소설리스트

러스트-77화 (77/280)

러스트 [RUST]-77

약쟁이들 그리고 최 전무와 그 직속 부대들과 싸웠을 때 입은 상처.

사이토 카인 폭풍으로 위험해 처했을 때, 호텔 샬롯의 도움으로 치료받았다. 사이토 카인을 치료받으면서 상처 입은 곳도 같이 치료받았다. 그때 썼던 약. 노벨상이라도 받을 법한 약이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완벽하게 치료했던 약이 떠올랐다.

마루는 GPS 지도를 확인했다.

‘그러니까 다카이치 제약하고 야마츠키 신약이라고 했었지.’

샬롯 사장을 배달해주기로 했던 곳이.

결정했으면 즉시 움직이는 게 마루 스타일이었다. 일단 간호사부터 정리하자.

간호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에에?”

감탄사인지 아니면 단어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루가 툭 내민 것은 1만 엔짜리 뭉치, 그러니까 100만 엔. 간호사는 자기가 받는 월급을 잠깐 생각해 봤다. 거의 3달 월급. 세금 떼고 뭐하고 뭐 떼고 그러면 진짜 4달 월급이었다. 근데 아무것도 떼지 않고 선지급으로 100만 엔? 에? 갑자기?

“여기서 환자들 좀 봐주시죠. 어차피 병원 망했던데, 월급 제대로 나오겠습니까? 일도 고되고 월급은 기약 없고 그럴 텐데. 그냥 편하게 여기서 환자 2명 봐주시고 월급 100만 엔. 어떻습니까? 청소랑 뭐 그런 일도 하셔야 하니까 보너스도 추가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너스는 뭐 일하는 거 봐서 드리는 거지만 최대 50만 엔 정도? 마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너스 포함 150만 엔? 월급이? 메이드 겸업이라도 합니다.

돈으로 간호사를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 쉬웠다.

좋아. 일단 걱정거리를 하나 덜었으니 됐다. 바로 카타마란을 조종해 도쿄만으로 향했다. 기순이었다면 낯에는 돛을 이용해 항행해서 기름을 아꼈겠지만, 지금은 기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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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부유물이 많았다. 특히 해안가 근처를 지날 때는 정말 바다가 아닌 잡탕 같았다. 부서진 파편을 비롯한 비닐류, 플라스틱병, 캔은 기본이고 가방 신발과 같은 잡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바닷물에 잠긴 집이 떠다녔다.

뭐가 떠다녔다고?

집?

반파된 집이 바다를 둥둥 떠돌았다. 아무리 목조 주택이라지만, 반파됐다지만 집이? 쓰나미에 쓸렸다고 해도 집인데? 정말 집이 바다를 둥둥 떠다녔다. 간호사가 멍하게 반파된 집을 보고 있었다.

“에에엣! 저기··· 저기요!”

집이고 나발이고 조심조심 부유물을 피하느라 신경이 곤두선 마루는 무시했다. 막 저 앞에서 손가락으로 떠다니는 집을 향해 붕붕 흔드는 간호사. 하는 짓이 좀···.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저런 스타일이라서 좋게 좋게 따라온 게 아닌가 싶었으니까.

“잠깐만요. 잠시만 멈춰주세요!”

?

“이거 자동차 아닙니다. 멈추란다고 바로 멈춰지는 거 아니고요.”

잘 가고 있는 배를 왜 멈추란 말인가? 자동차도 아니고, 그대로 운항을 계속했다.

간호사는 멍하니 부유하는 집을 바라봤다. 저 멀리 작아지는 집, 옥상에 고양이 한 마리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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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항법장치가 가끔 오작동하는 바람에 다시 설정하고 그러느라 번잡했다. 간호사는 월급과 보너스 때문인지, 애초에 그런 성격인지 제법 열심히 기순과 김 양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니까 관동지역에서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거죠?”

“네.”

짬을 내서 갑판을 청소하던 마루가 간호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까 고양이 무시 사건도 있었고 그런 게 쌓이면 이상하게 터질 가능성도 있으니, 이야기를 통해 풀 수 있으면 푸는 게 좋았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도쿄와 인근 지역의 상황이었다. 고압 분무기로 물을 뿌리자 붉은 찌꺼기가 갑판에서 벗겨졌다.

“도쿄 쪽으로 구조대원이나 자위대가 파견되지는 않았고요?”

“···파견 이야기는 방송과 신문에서 많이 했었는데, 그 뒤에는 조용했어요.”

도쿄를 구조하겠다고 가더니 연락이 끊겼다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있을 때 뉴스에서도 그랬다. 외신기자들도 연락이 두절됐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도쿄 인근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없었고요?”

“처음에는 신문이나 인터넷 방송에서 소문이 돌았는데 너무 이상한 이야기라서···.”

“무슨 이야기였나요?”

“동물들이 사람을 공격한다고···.”

이제는 하던 말이 중간에 줄어들었다. 마루는 깊게 심호흡했다. 급하게 하지 말자, 원래 이런 사람이다. ‘에’, ‘또’를 줄인 것도 어디냐. 다 고쳐서 어쩌려고.

“구조대나 자위대가 동물들 때문에 구조활동을 포기한 건 아니지 않을 거 아닙니까?”

간호사는 ‘그걸 저한테 말씀하셔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인터넷 방송에서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요?”

“병이 심각하다고 했어요.”

“무슨 병이요.”

“코로나요. 코로나가 이상하게 변이됐다고.”

음- 백신이 듣지 않니, 돌파 감염이니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코로나가 방사능 변이라도 일으킨 건가? 면역력이 널뛰었던지라 병은 조금 쫄렸다. 계속 이야길 해보라고 지긋하게 바라보자 간호사가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계속 이야기하라고 쳐다봤는데 왜 안절부절못하는 건데?

“어떻게 변이됐다고 말입니까?”

“에. 그게. 변이된 코로나 걸리면 막 쉽게 흥분하고 가만히 있지 않고 돌아다니고 그래서 병을 막 전파 시키고 그런다고···. 그리고 폐 섬유화로 호흡 곤란도 막 질식해서 죽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눈치를 슬슬 보는 간호사였다. 뭔가 발랄하다가 주눅이 든 것 같은 모습을 보니 짐작되는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걸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후지산이 폭발했다는 소리는 없었죠?”

“네. 막 이상한 구름이 후지산에 생기고, 미세 지진인가? 그게 후지산 지하에서 관측됐다는 소리는 있었지만 폭발했다는 소리는 없었어요.”

도쿄 인근에 가면 배는 좀 떨어진 곳에 정박해 놓고 방독마스크를 쓰고 들어가는 게 좋아 보였다. 쿼드 스키를 전부 잃었다는 게 뼈아팠다. 수륙양용 모두 80km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였다. 그걸 그냥 들이박는 데 썼다니. 당시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이렇게 지나고 보니 속이 쓰렸다.

수륙양용차량은 땅에서 40km가량, 물에서는 5km 내외였다. 적재량이 넉넉하다고 하나, 지금 상황에서는 적재량보다는 속도가 중요했다. 모터를 바꿔 속도를 더 뽑을 수 있을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마력 좋은 모터로 바꿔 물에서 20km가량을 낼 수 있으면 괜찮았다. 8X 8이라 험지에서도 달릴 수 있으니까.

야앙

끼야

고양이 소린가? 바다에서? 간호사가 두리번거리다 앗-하는 소리를 냈다. 뭐가 간호사 머리를 팍하고 치고 날아갔다. 간호사가 자기 머리를 치고 간 것을 찾아 고개를 하늘로 들었다.

구름인가 싶었던 것들이 빽빽하게 하늘을 헤집고 있었다.

‘에?’ 하는 표정. 넋 나간 표정의 간호사.

뭐지? 마루도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그건 마치 구름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멀리 뭔가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분명 날갯짓 소리였다. 높고 날카로운 조류 특유의 울음소리가 날갯짓 소리와 섞여, 소나기 소리처럼 들린 것이었다.

“들어가!”

“멍하니 있지 말고 들어가라고!”

멍하니 있는 간호사를 기순과 김 양이 있는 선실로 내려보내고, 조종실 문을 닫아걸었다. 잠시 뒤 검은 구름이 하얀 카타마란을 덮쳤다.

조종실이 어둠에 싸였다.

새의 날갯짓 소리가 진동으로 변해 조종실 창문을 두들겨 댔다. 폭풍에도 끄떡없던 유리에 갈매기의 흔적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이게 갈매기? 이게 부산에서 새우깡 얻어먹겠다고 하던 애들이랑 같은 종이라고?

조종석 유리창을 부리로 쪼는 놈, 들이받는 놈, 발톱으로 할퀴는 놈, 날개로 때리는 놈. 웅웅 벌떼가 몰려드는 것처럼 갈매기들이 카타마란을 휩쓸었다.

흔들, 흔들.

힘겹게 전진하던 배가 앞뒤 좌우로 요동쳤다.

이걸 어쩌지?

동물들이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그냥 소문으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이런 갈매기 떼를 작은 낚싯배를 타고 가다 마주쳤다면 그냥 뒈지는 거 아닌가?

배에 타고 있으면 다행이었다. 바닷가를 걷고 있다가 마주쳤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갈매기가 미쳤나? 어쩌다 미친 거지? 동물들이라고 하면 갈매기 말고 다른 것들도 이 지랄이라는 거잖아?

흔들. 흔들

흔들림이 조금 더 커졌다. 마루가 갈매기들로 빼곡한 조종석 창밖을 봤다.

씨발

이 미친 새들이.

카타마란에 빼곡하게 내려앉은 갈매기들이 퍼덕 날아올랐다 다시 내려앉았다. 이쪽저쪽에서 그렇게 날아 오르락내리락하자 점점 흔들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카타마란 특유의 복원력과 안정성 때문에 별 탈이 없었지만, 환자들이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저것들을 어떻게 하지?

칼 들고 나가서 썰 수도 없고. 수백도 아니고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더 심각한 건. 갈매기들이 주변을 배회하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갔다가 공격당하면?

답이 없었다.

[저 환자들이 정신을 차렸어요.]

“둘 다요?”

[네. 남자 환자분이 왜 배가 이렇게 흔들리냐고 물으시는데요?]

“갈매기 때문이라고 해주세요. 여자 환자는 괜찮고요?”

[예. 아직 반응이 좀 그렇지만, 의식은 확실히 돌아왔어요. 열도 많이 내렸고요.]

‘잠깐. 인터폰 소리 좀 키워줘요.’ 기순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야. 갈매기 때문에 배가 흔들린다니 무슨 소리야?]

“갈매기들이 미쳐서 날뛰고 있어. 공격성도 공격성인데 이것들이 배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새우깡 없냐? 다른 과자라도?]

“과자 문제가 아니야. 박스 단위로 던져도 티도 안 나게 생겼어.”

[그렇게 많냐?]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환자분 이게 그만 말씀하세요.’ 간호사가 기순을 말렸다. 기순이 괜찮다고 버둥거리다 진정제인지 수면제를 맞았는지 잠잠해졌다. 팔에 박힌 파편만 문제가 아니었다. 방탄복을 겹쳐 입었어도 충격을 다 막지는 못했는지 갈비뼈도 상했고, 내장도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나마 김 양은 탈진과 깁스한 오른팔이 문제였지 다른 부분은 괜찮다고 했다.

‘김 양?’

번뜩였다.

김 양. 김 양의 트라우마. 안개. 연기. 갈매기.

갈매기들도 시각으로 먹이를 쫓지 않나?

갈매기도 후각이 있지? 새도 콧구멍이 있잖아.

콧구멍이 아니더라도 눈을 뜨고 있고. 귓구멍도 있었다.

새끼들.

펑- 펑- 텅-

푸쉬쉭- 푸화아아악-

작심하고 까 던졌다.

최루탄에서 뿜어진 연기가 카타마란을 자욱하게 덮었다.

끼에에에에!

꺄아아아아!

갈매기들이 고양이 목청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갈매기 때문에 먹통이 됐던 레이더가 사방을 표시했다. 갈매기 무리가 날아간 방향이 레이더 영상에 구름처럼 보였다.

새들이 날아가자, 바로 레이더에 잡힌 배들이 표시됐다. 자동항행으로 가고 있던 항로를 떡 가로막고 있는 배들이 있었다. 거리는 대략 4~5km 정도? 다른 배들도 자동항법장치를 사용했다면 비슷한 항로로 몰리는 건 당연했다. 갈매기를 빨리 처리하지 않았으면, 충돌했을 수 있었다.

마루는 가스마스크를 차고 조종실 밖으로 나갔다. 최루가스의 독한 흔적이 갑판을 덮고 있었다. 핏물 지운다고 열심히 청소했는데, 이제는 갈매기들 똥으로 사방이 난리였다. 콕핏으로 가 쌍안경으로 전방을 살펴보니, 레이더에 표시된 배들이 보였다.

커다란 크루즈 선과 럭셔리 메가 요트 그리고 중대형 요트들이 한데 뒤엉켜 부유하고 있었다. 밧줄과 줄사다리로 서로 엮인 모습. 크루즈 선에서 메가 요트로 옮겨 타려고 했는지 아니면 반대인지, 서로 얽힌 중대형 요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물 사다리에 걸려 흔들리는 시체들은 무엇의 공격을 받았는지 흔적만 남아있었다. 시체도 시체지만 배들이 전부 불이라도 났던 것처럼 검게 그을려 있었다. 사방에 불탄 흔적들이 가득했다.

저쪽에서도 이쪽을 발견했는지, 누군가 밖으로 나와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쏴 올렸다.

하늘에서 터지는 신호탄.

저거 구조 신호인가?

배에 대해 모르는데 해상신호 따위, 알 리 없었다.

마루는 상큼하게 씹고 배들이 얽혀있는 곳을 살짝 피해 운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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