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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22화 (22/280)

러스트 [RUST]-22

김 양은 순간 확 탈주해 버릴까 고심했다. 그럼 지가 어쩔 건데? 걍 씹고 튈까?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며 자신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특삼계전복죽을 보니 조절했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오늘 하루 세상 고생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혀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니가 와.”

[······.]

고오오오-하는 느낌이 휴대폰 너머에서 느껴졌다. 김 양의 분노는 다시 조절됐다.

“칼 맞은 거 치료했는데 많이 부어서 지금 움직이기 그래. 거처도 옮겨야 해서 짐 싸고 있고 그러니까 급하면 이쪽으로 와.”

속으로 욕하면서도 이유를 찾는 김 양이었다. 돈. 그래 돈 때문이야. 1~2억이라고 해놓고는 열어보니 1억 5천 5백만 원이었다. 그냥 1억 5천이라고 하지. 쪼잔한 새끼.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신분 둘에서 셋 새로 파고, 북미든 남미든 넘어갈 거 생각하고, 넘어간 곳에서 거처 잡고 토끼굴도 파고 무장도 다시 장만하고 그럴 거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그런데 업장에서 슈킹한 돈은 백정 새끼가 가지고 있었다.

성질대로라면 이 새끼랑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데, 그놈의 돈이 뭔지. 확 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 괴물 같은 움직임을 떠올리면 닭살부터 돋았다.

뭣보다 정상인 몸으로도 목숨 구걸해서 간신히 살았는데, 다치고 감각 떨어진 이 상태로 붙었다간······.

장거리 저격이면 가능할까? 휙 피하고 두다다 추격하면? 순살 엔딩이 눈에 선했다.

[······.]

“아니. 뭔 일 때문에 오라 가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니까. 오늘 밤이든 새벽이든 회사에서 오면 어쩔 건데? 나도 살자 좀. 급한 일이면 그쪽이 여기로 와야지.”

김 양은 마루의 침묵이 살 떨렸다.

[주소.]

“여기가···”

김 양은 주소를 부르는 끝에 한마디 더 보탰다.

“돈이 모자라서. 신분 바꿀 방법은 대충 찾았으니까. 돈 좀···.”

뚝-

“이 애미나이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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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쩌라고?

김 양은 앞에 앉은 마루가 불편했다. 오른팔 반병신 만든 건 그렇다고 쳐도, 홍 과장 그렇게 보내버리는 거 겪고 나서는 진짜, 아주, 매우, 많이 불편했다.

“그러니까 동생? 그 산삼 학생? 걔가 독립하겠다고 했다고?”

“······.”

“와 동생 대단하네, 험한 일은 당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공포 분위기 쩔었을 텐데, 그걸 겪고도 한국에 있겠대? 강심장이네.”

“······.”

“왜? 부모님 때문에 한국에 있겠데?”

끄덕.

“효녀네, 효녀야. 내레 기런 효녀는, -큼-큼- 아니 요즘 그런 효녀 보기 힘들지 힘들어.”

“······.”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독립했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들어보니까 알아서 잘하기로 했다면서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거야?”

“······.”

‘아니, 사람이 말을 했으면 대답을 하라고 이 간나 셋키야!’ 라고 김 양은 속으로만 말했다.

“독립하겠다고 하면 장한 거 아닌가? 응원해줘야겠네. 무엇보다 독립 응원에 최고인 건 현찰이지. 두 손 무겁게 현찰이면 동생도 든든할 거야.”

마루의 눈이 찌릿 김 양을 쏘아봤다. 아니 왜? 그럼? 또 뭘 어쩌라고?

김 양은 작게 헛기침을 한 뒤, 꺼내 놓은 아이스 롱블랙을 홀짝 마셨다. 가시에 걸린 것처럼 껄끄러운 느낌이 내려갔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동생을 혼내준다고 하더라도 제일 확실하게 혼내는 건 돈쭐내는 거지. 암- 돈다발로 싸대기를 올려붙이는 거야. ‘니 멋대로 독립한다고? 가져가 이년아!’ 이러면서 또 두 손 무겁게 보내주면, 비록 싸다구를 날렸지만, 오빠가 날 걱정하는구나 이렇게···."

"아니 잠깐, 잠깐 손. 그거 스톱. 그거 손잡이 놓고. 아니 왜 그래 자본주의 남한에서 자본으로 해결하는 게 맞지 않아? 나라면 두 손 높이 들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네다. 그럴 텐데. 왜? 뭐? 어쩌라고? 그게 아니라, 아니 뭐가 문제인데?”

마루는 김 양이 자기를 놀리나 싶어서 발끈했는데 하는 짓을 보니 그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믿는 거 같았다.

일본에 가기 전 홍 과장과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번 명절에도 집에 안 가더니, 이번에도 안 가냐?’

‘가면 뭐합니까?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게 낫죠.’

‘돈독 올라서는. 그래도 그러면 쓰나. 부모님께 전화는 가끔 하냐?’

‘전화는 되도록 적게 하는 게 좋다. 그런 가풍입니다.’

‘어찌 됐든 부모님께 안부 전화는 자주 해라. 다 나중에 후회한다 너.’

‘안부 전화보다 현금 이체가 최곱니다.’

‘야. 돈이 전부가 아니야. 아 자식이 진짜- 대놓고 현금이 최고라니 참-’

그래. 그랬었다.

마루는 내가 뭘? 왜? 하는 표정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순둥한 김 양의 얼굴을 봤다. 아마 그때 저랬었지.

어딘가 불편했다.

“증명사진이랑 지문만 있으면 가능하긴 한데, 그건 일본인 신분까지만 가능할 거 같고. 회사에서 확실히 벗어나려면 북미나 남미 쪽으로 빠지는 게 제일 안전하지만, 그건 거기 상황이 어떻게 변하냐에 따라 또 달라져. 제일 확실한 건 본인이 직접 가서, 현지 업장에서 돈다발 흔들면서 작업하는 거야.”

“그쪽 신분은 꼭 본인이 가야 하나? 준비물 미리 챙겨서 가져가면 되지 않고?”

마루가 혹시 하는 마음에 이야기를 꺼냈다. 김 양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엔 좀 달라. 물론 돈이 엄청나게 있다면 다르겠지만, 다 갖춰진 상황에서 정보 살짝 바꾸는 거랑, 처음부터 생으로 찔러 넣는 거랑 난이도 차이가 크다고 들었어."

“대리인이 오면 그걸 핑계로 더 뜯는 놈들도 있고. 다시 말하지만, 본인이 직접 업장 찾아가서 그 자리에서 작업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퇴짜 놓고 그래야 일이 제대로 돼.”

계획은 그랬다.

일단 일본인 신분을 만든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상류층에서는 미국 영주권 시민권 딴 애들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와 있던 사람들 가운데 실종된 사람들이 많을 테니, 그 사람들 신분을 덮어쓰자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 어렵다 싶으면, 일본 행정체계가 무너진 상황이니 적당한 신분을 만들어 껴 놓고, 북미나 남미로 넘어가 새로 신분을 만들어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일단 일본인 신분으로 바꿨으니, 회사에서 그걸 추격하기가 어려웠고 거기에 북미나 남미로 가서 새로 신분을 만들면, 그걸 무슨 수로 찾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당신 지금 쓰는 이메일도 없애버려.”

이메일뿐만 아니라 동생과 연락을 끊으라고 했다. 연락을 굳이 한다면, 한국으로 들어와 새로 계정 파서 연락하고 한국 출국 때 삭제하고 그런 방법이 제일 안전하다고 했다.

아니면 해커의 도움을 받아 해커 끼고 연락하든지. 근데 해커가 배신하면? 그냥 죽은 목숨이라고 김 양은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사내 새끼가 기게 뭐네, 흠- 그게 뭐임? 동생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면서 걱정이야 되겠지만, 그쯤 하면 된 거 아니겠어? 목숨 걸고 빼줬으면 할 만큼은 한 거야. 나머지는 동생이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져야지.”

흥- 김 양은 산삼이 부러웠다. 자기도 오빠가 있었다면, 자기도 목숨 걸고 달려올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복에 겨워 똥을 싸다 못해 사방으로 퍼지르게 싸고 있는 년을 동생이라고 걱정하는 걸 보고 있자니, 이것도 마냥 괴물은 아니구나 싶었다.

‘하는 짓은 그래 보여도, 속마음은 좀 여린 걸까?’

무슨 미친 생각을··· 마음이 여린 놈이 순식간에 수십을 썰어버리냐? 김 양은 작게 도리질했다. 지금도 김 양과 마루의 거리는 미묘했다.

왼손으로 언제든 뽑을 수 있는 위치에 놓인 발터 P22. 마루의 손에 닿을락 말락 한 곳에 있는 사시미 손잡이.

서로가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든 서로의 머리에 구멍을 낼 수 있는 그런 관계. 김 양은 흥- 콧김을 한 번 냈다.

“일없으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일본으로 갈 방법 말인데···.”

김 양은 일본에 배를 타고 가자고 했다. 어차피 도쿄 근처 공항은 완전 파괴가 됐기 때문에 공항으로 가면 도쿄에서 먼 곳으로 가야 했다. 거기서 육로로 도쿄로 가야 하는데 도로와 철도가 완전히 박살이 나서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그럴 바에야 장거리 항행이 가능한 요트나 보트를 빌려 도쿄만 안쪽에 접안 해놓고, 산악오토바이나 사륜 오토바이를 이용해 도쿄로 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내용이었다.

“사륜구동 오토바이면 제법 무거운 짐도 운반할 수 있고, 지진으로 도로 사정이 엉망이라고 하더라도 주파할 수 있으니까 괜찮지, 싶은데. 야쿠자 애들도 돈이나 금붙이 같은 거 그대로 두고 대피했다가 정리됐을 거 같고. 아니면 뭐. 우리가 정리하면 되고.”

순둥한 얼굴의 김 양이 총기를 스윽 쓰다듬으며 말했다. 순둥한 얼굴과 가끔 보여주는 백치미로 순간순간 경계심이 풀렸지만, 김 양 역시 어둠이 짙은 여자였다.

‘내가 할 소린 아닌가?’

마루가 피식- 씁쓸하게 웃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김 양의 표정이 뾰로통하게 변했다.

“어쨌든 지금 난리 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서 우리 흔적 지워야 해. 천만다행이지. 일본에 지진 터진 게.”

마루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오는 말은 달랐다.

“일단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가는 건 힘들어. 최소한 3일은 한국에 있어야 해.”

“아니 왜?”

“최 실장, 백 실장을 보냈는데. 그 장소가 집이라서.”

“집? 당신 집? 당신 가족이 사는?”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 양의 표정이 '아니 무슨 그런 병신 같은 짓을.' 그런 표정으로 변했다.

“그럼 짭새가 벌써 냄새 맡았고?”

“아니, 내가 신고할 거야.”

“왜? 어째서?”

“일단 수사 범위에서 빠져나가야 앞으로 운신이 편할 테니까.”

김 양은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운신은 무슨 운신, 후딱 신분 바꿔서 들락날락하면 되지 않나?

“당장 내가 사라지면 빼도 박도 못하고 내가 최 실장이랑 백 실장 사망과 관련 있다는 심증이 확증으로 변하겠지만, 내가 자발적으로 신고한 뒤, 알리바이 확실해서 혐의가 없어지면, 조직에서도 긴가민가 하겠지. 그럼 내 동생이나 부모님도 좀 안전해지겠고.”

김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만 ㅈ된다는 말이로군. 하하하.

심지어 병원까지 갔으니까 잘해야 싸우다 상처 입고는 책임이 두려워 회사에 보고도 안 하고 토신 년이 되는 거고, 대충 최악은 배신하고 잠수탄 년이 되겠군. 둘 다 망했는데? 하하하.

“홍 과장이 나를 스카웃 하려고 했으니까, 그 이야기는 위에 올라가긴 했겠지 그래도 나한테 확실한 혐의만 없으면 최악으로 가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하- 그럼 나는? 여기 있는 나는? 나는요?”

김 양이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반복했다.

“그러니까 김 양이, 아까 말한 배편 좀 구해봐. 사륜 구동 오토바이도. 요즘에는 밧줄도 자동으로 감아줘서 편하게 운전할 수 있는 요트도 있다던데. 좀 커다란 카타마란(쌍동선) 같은 거면 일본까지 항행하는 건 문제 없을 거 같고. 적재량도 제법 된다고 하니까. 한 3개월 빌리는 거로 해서 준비해봐. 떠나는 건 3~4일 정도 뒤에 떠나는 거로 하고.”

“회사에서 언제 추격할지 모르는데 3~4일? 아니 당장 내일 가도 조마조마한데 3~4일 뒤에 가자고?”

“경찰 조사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일본 간다고 말한 뒤에 떠나야지, 최소한 2~3번은 경찰서에 가지 싶은데 일단 내일 어떻게든 해 볼 게.”

마루는 내심 자신있었다. 마약이야 자신이 일본에 있을 때 사건 터진 것이고, 모친이 중요 참고인이었다. 자신은 신고자일 뿐. 집에 생긴 시체 역시 마찬가지, 알리바이는 완벽했다.

“뭘 어떻게 해? 어떡하긴. 아니 가족도 좋은데 나도 좀 생각해 주라야. 나 없으면 도쿄 거기 빌딩을 어케 찾아갈 거니? 찾아도 어케 신분 바꿀 건데?”

무언가가 김 양의 뇌관을 건드렸는지 김 양이 매우 흥분했다. 마루는 일단 김 양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진정해. 진정하고. 일단 너 가지고 있는 신분이 여럿 있다고 했잖아. 홍 과장이라면 몇 개는 회사도 모르게 만들었을거라며?”

김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가 무슨 너만 타켓으로 움직일 것도 아니고, 신분도 여럿인데 뭘 그렇게 걱정해? 아까 네가 말한 대로 일단 이 집은 바로 비우고, 다른 곳으로 옮겨. 그리고 최대한 빨리 배 수배하고 인천항이든 부산항이든 배가 있는 곳으로 바로 출발해. 난 경찰에 신고하고 조사받은 뒤 정리하자마자 뒤따를 테니까.”

아니 똑같은 소리 반복하지 말고, 어쩌라고? 김 양의 눈빛을 해석했는지 마루가 덧붙였다.

“인천이나 부산에 가서 대포폰 들고 잠수하고 있는 건데 뭐가 걱정이야. 호텔이랑 그런 건 내 친구 명의로 예약할 테니까 추적은 걱정하지 말고, 이따 밤이나 새벽이나 바로 주소 확인하고, 고속버스든 기차든 빨리 출발하는 거로 내려가.”

아- 망한 느낌이··· 김 양의 표정이 우울해지려는 찰나

마루가 배낭에서 작은 검은 봉투를 꺼냈다.

“자- 이걸로 배 빌리는 데 보태고. 계약금만 일단 내, 나머지는 내가 가서 준다고 하고.”

봉투 안 노란색 뭉치가 묵직했다. 어두웠던 김 양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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