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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1화 (1/280)

러스트 [RUST]-1

“하아- 진짜 개명신청이라도 해야 하나?”

흑역사가 이름에 달라붙어 영원히 따라올 것만 같았다.

솔직히 이름만 따지자면 나쁜 이름은 아니었다.

마루.

마루라는 이름은 괜찮은 이름이지만 성이 문제였다. 하씨.

그러니까.

하마루.

질풍노도의 시절, 성질대로 살았던 중2 때는 나름 지역구 별칭이 있었다.

‘마도중 작은 하마룰 건드리면 잣되는 거야.’

아버지 하현석, 어머니 오미예, 여동생 이름은 하나루. 마루나루라고 하면 부르기 쉽다고 하지만 문제는 모친 오미예 여사였다.

‘요즘은 양성평등 일환으로 엄마쪽 성을 병기하더라.’

‘엄마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엄마의 오씨가 부끄러운 거냐?’

‘엄마 성을 뒤에 쓰면, 내 이름이 하오마루가 되는데?’

‘하오마루가 어때서 입에 착착 감기네. 정 하오마루가 싫으면 오씨를 앞에 쓰면 되지.’

‘그러면 오하마루가 된다고.’

마루는 철모르던 시절 쌓은 흑역사를 생각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나름 중학교 시절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했던지라 미래 따윈 걱정 없었다.

그런 마루의 자신감도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박살 났다.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기울어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가 친척 보증을 섰던 게 터졌다.

일이 벌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잘 산다던 집안이 반지하에 나앉게 된 것이다. 그 뒤 마루의 고등학교 생활은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마루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며 수도를 틀어 장갑과 칼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고상하게 메스면 좋았는데 말이지.”

의사도 수술하면 칼잡이 아닌가? 아니지 요즘 의사들은 대부분 로봇으로 수술한다고 했었지. 아버지 암 수술도 로봇수술인지로 했었다.

처방도 프로그램인가 인공지능인가? 뭐 그런 거로 처방한다고 했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마루는 한숨을 푹 내쉬고 앞치마를 벗었다.

마루의 직업은 정형사였다. 소나 돼지를 부위별로 해체하는 것인데 처음엔 아르바이트로 시작했지만 어쩌다 정형사 자격증을 따고 난 뒤, 이젠 직업이 된 일이었다.

정형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일단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기를 다룬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매일 피를 보고, 피를 뺐다고는 하지만 핏기 도는 고기를 찢고 썰고 토막 내는 일이다. 쉬울 리 없었다. 힘들지만 마루에게 있어서 이 일은 어쩌면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고기를 자르려면 고기의 결을 봐야 한다. 잘 잘리는 부분, 그렇지 않은 부분. 마루는 본능적으로 그 결을 알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경력 5년이니 10년인 사람들이 칼질하는 것을 한 번 봤을 뿐인데 마루는 바로 어설프게나마 흉내 낼 수 있었다.

눈썰미가 좋다고 해야 할까? 즉시 2~3년 경력자처럼 칼질하는 마루를 보곤 주변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마루는 시큰둥했었다.

‘옛날 생각나네.’

살아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다니. 작게 쓴웃음을 삼킨 마루가 해체용 식칼을 깨끗이 닦았다.

그러고 보니 이 일을 한 것도 2년이 됐다.

시작이 어렵지, 어찌해보니 이쪽 업계도 잘하면 충분히 돈이 될 것 같았다. 기술도 기술이거니와 꾸준히 물량만 나오면 일 한 만큼 현금이 떨어지니 나름 짭짤했다.

“그래도 대학 졸업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거나 9급 공무원 시험 보겠다고 몇 년 날려 먹는 것보다는 낫지. 암. 그렇고말고.”

인서울 대학. 그나마 서울 안에 있는 대학에 장학금 받고 들어간 건 절반은 운이었다. 졸지에 집이 망했는데 자기만 공부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고, 동생도 챙겨야 했다.

이것저것 따질 여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말 그대로 장학금 나올 점수에 맞춰서 어거지로 들어간 대학이었느니, 졸업한다고 뭔가 달라질 거라는 보장 따윈 없었다.

그러니까 마루는 후회하지 않았다.

“인생 뭐 있냐. 개처럼 벌어도 정승처럼 쓸 수 있게 벌면 되지.”

칼질은 이제 좀 하니까 고기 좀 제대로 보고 유통망 좀 알게 되면 정육점이나, 정육점을 끼고 하는 식당도 나쁘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워서 그쪽으로 가도 괜찮고. 아니면 이쪽으로 계속 밀고 나가는 것도 괜찮지 싶었다.

한쪽 구석에 아쉬움으로 남은 공부가 하고 싶어진다면, 몇 년 더 열심히 돈 모아서 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열심히 돈을 벌어야 했다.

“현실에 충실해야지 현실에.”

순간, 모친 오미예 여사의 청순함이 떠오르자 속이 쓰렸지만, 꾹 참은 마루는 가지런하게 꽂힌 칼 가운데 하나를 꺼내 익숙하게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서늘한 소리가 나며 갈리는 칼날을 보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마루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칼을 갈고 또 갈았다. 칼을 쓰고 칼을 갈고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루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이야. 폼-보소, 폼만 보면 한 10년은 칼밥 먹어 보인다니까.”

조폭 싸대기 때리게 생긴 과장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서른 중후반 현직 은퇴 조폭의 스멜이 물씬 풍기는 과장. 순간 첫 회식자리에서 과장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마루야. 너 혹시 검도 했냐?’

‘예? 검도요?’

‘그래. 검도.’

‘어릴 때 조금요.’

고등학교 2학년까진 집도, 마루도 잘나갔다. 당시에 해보지 않은 운동이 없었고, 손대지 않았던 악기가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렇지? 했었지? 딱 칼 잡는데 필이 팍 오더라니까. 너는 진짜 딱 칼질이 천성이다. 이름도 그렇고. 마루-하면 산속에서 칼 쓰게 생긴 이름 아니냐, 딱이다. 너 이거 천직이다. 천직. 자- 건배, 백정 마루를 위해!’

잊었던 기억을 헤집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백정 마루라는 그 표현이 싫었는지 시간이 지났지만, 마루는 과장이 불편했다.

마루가 대답 없이 칼만 갈고 있음에도 과장은 개의치 않고 히죽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번 명절에도 집에 안 가더니, 이번에도 안 가냐?”

“가면 뭐합니까?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게 낫죠.”

과장은 마루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돈독 올라서는. 그래도 그러면 쓰나. 부모님께 전화는 가끔 하냐?”

“전화는 되도록 적게 하는 게 좋다. 그런 가풍입니다.”

그래, 서로 어지간하면 연락 끊고 살았으면 이 지경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다. 사업이 망한 뒤 아버지는 재기한다고 여기저기 빚을 끌어 쓰다가 또 망했고, 모친은 보증 때문에 고생했음에도 또 외삼촌 사업하는데 도와주겠다고 하다 덤터기 썼다.

각자도생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서로 연락하지 않고 살았든지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뭐 인마? 큭. 무슨 가풍이 서로 연락하지 않고 사는 거라고?”

“........”

“어찌 됐든 부모님께 안부 전화는 자주 해라. 다 나중에 후회한다 너.”

“안부 전화보다 현금 이체가 최곱니다.”

“야. 돈이 전부가 아니야. 아 자식이 진짜- 대놓고 현금이 최고라니 참-”

마루의 말에 과장이 진짜 꼴통이라는 듯 마루를 봤다. 마루는 당당했다.

말로만 안부 전화하면 뭐 하나?

‘복학은 영 안 할 생각이니?’

‘근데 이번에 나루가 콩쿠르에······.’

어차피 없는 집구석, 안부 전화 내용의 70~80%는 돈과 관련됐다. 아들 복학 걱정하면서 실상은 딸의 콩쿠르 관련해 돈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하는 모친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예. 알겠습니다.”

입에 발린 안부 전화보다 통장으로 쏘아 보낸 현금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루는 굳이 그걸 말하지 않았다.

큼. 큼.

마루의 늘어지는 표정과 대답에 웃음을 참으려 작게 헛기침을 한, 과장이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루야 너. 음. 그러니까 일본어 좀 한다고 했지?”

“일본어요? 예.”

뭐 중고등학교 시절 배우고 싶은 건 전부 한 번 정도 찔러 볼 수 있었으니, 그건 외국어도 그랬다. 영어, 일어, 중국어 정도는 그냥 대충 메뉴판 읽지 못해 밥 굶고, 화장실 찾지 못해 길바닥에 똥오줌 싸지 않을 정도는 했었다.

따지고 보면 전부 수박 겉핥기지만, 어쨌든 조금 하는 편이었다. 대충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나 일본 애니를 볼 정도는 됐다.

절반은 분위기로 눈치껏 알아먹는 다지만 그게 어딘가? 암. 마루는 당당했다.

“이번에 일본에 수출하는데 말이야. 예전에는 그냥 생물로 보내주면 그쪽에서 알아서 작업하는데, 뭔 일이 생겼는지 작업할 인원까지 보내달라고 연락이 와서 말이지. 어때 생각 있어?”

기회인가? 군대도 갔다 왔겠다. 출국에 걸림돌은 없었다.

“기간은요?”

“뭐. 걔들이 한국 사람 오래 쓰겠어? 단기로 쓰겠지.”

“단기요? 그럼 한 3~4개월?”

“그렇겠지. 길어야 6개월 아주 길어도 1년 아니겠냐? 취업비자니, 숙소니 그런 건 그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너만 좋다고 하면 연결해주마.”

단기라고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저야 좋죠.”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그쪽에 알리마.”

외국어를 제법 한다는 걸 술자리에서 술김에 말했었는데 그걸 기억해 주다니. 그놈의 백정 마루 드립만 아니라면 괜찮은 사람 같았다.

꼭 은퇴 조폭 같이 생겨서는. 역시 별자리도 사람도 겉보기 등급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건가? 마루는 폴더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뭘. 이것도 기회라면 기회인데 잘 잡아 봐.”

“예.”

그렇게 마루의 일본행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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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막 작업준비를 시작하려는 마루의 어깨를 툭-치며 과장이 말했다.

“야- 일정 잡혔다. 내일 바로 가면 된다.”

“네? 내일이요?”

일본 업체에 연락한다고 했으니, 적어도 보름에서 최소한 일주일은 시간적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제 운을 띄우고는 졸지에 내일 출국하라니. 너무 급한 거 아닌가?

“왜 그렇게 죽상이야? 일본 간다고 좋다고 하더니만 왜? 생각해보니까 아니야?”

“아뇨. 그건 아닌데. 이렇게 갑자기 가도 되나요?”

“갑자기는 무슨 갑자기. 그쪽에서 바쁘다고 하니까 이쪽도 빨리 움직여야지. 취업비자는 일단 1년짜리 끊겠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예? 엊그제 연락하셨다면서 벌써 취업비자가 나왔대요?”

“얌마. 그게 아니라. 그냥 일단 관광으로 들어가기만 해라. 거기서 취업비자 받아준다고 하니까 걱정 말고.”

“그게 되나요?”

“안 될 건 뭐 있냐? 걔들이 그렇게 이제껏 사람 썼다는데. 주로 베트남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 애들을 주로 썼는데, 한국인이라고 다르겠냐?”

뭔가 기분이 좀 그랬다.

“동남아요? 그게 아니라. 취업을 1년짜리 끊어주기는 하는데 그보다 짧게 쓴다는 거죠?”

“그렇지. 취업비자 하면 대부분 1년짜리 끊어주지, 재계약 못 하면 그냥 나와야 하는 거고.”

마루는 과장의 대답을 듣곤 그 의미가 아니라는 듯 다시 말했다.

“아- 그러면 어차피 단기로 갔다 올 건데, 원룸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해서요. 당장 내일이라 방을 뺄 수도 없고, 기간도 확실하지 않고.”

과장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 새끼. 안 그래 보이더니만 뭐가 그렇게 새가슴이야. 일단 너 원룸은 회사에서 관리해줄 테니까 그냥 다녀와. 넌 거기서 칼 솜씨만 발휘할 생각만 하면 돼.”

“옙!”

탁탁- 마루의 어깨를 치며 과장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일 일본에 가니까 오늘 사람들끼리 한잔할까 싶었는데 직원들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가는 날짜가 확실히 결정되면 술자리에서 일본엘 간다고 운을 띄우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과장은 일본에 도착해서 전화하라며 키득거렸다.

‘짧게 간다지만 송별회 같은 거 안 하고 가도 되나?’

누구는 실력을 인정받아 회사에서 일본 보내주는데 그 일본 가는 누구는 나이도 어린 것이 입도 뻥긋하지 않고 갔다고 하면 돌아와서 피곤했다.

마루의 표정을 본 과장이 킥킥-웃으며 ‘거참. 새끼. 이름값 못하고 새가슴이네.’ 하며 마루의 등을 떠밀었다.

“오늘 일찍 들어가서 짐 챙겨, 내일 아침 6시까지 인천공항이다. 여기.”

과장이 손에 들고 있던 비행기 표와 명함, 엔화가 조금 들어있는 봉투를 줬다. 얼떨결에 받아든 마루를 쫓아내듯 밖으로 내보내면서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하며 뻐끔거리는 과장이었다.

‘일본에 도착하면. 전화하고’

킬킬 웃는 과장의 미소를 뒤로하고 마루는 원룸으로 향했다.

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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