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4 43화 (53/53)

43

동규는 대학 생활의 마무리를 두 번째 등단으로 끝을 맺었다. 졸업도 코앞이니 좀 쉴 만도 한데, 바로 다음 작품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림도 대학원 합격 발표가 나자마자 친한 사람들과 죄다 약속을 잡느라 바빴다. 그래도 아무리 바쁜 와중이라도 일주일에 하루는 서로에게 온전히 쏟아 붓는 날로 비워두었다.

졸업여행도 가기로 했다. 이름은 졸업여행이지만 동규의 소설가로서의 데뷔도 축하하고 하림의 대학원 합격도 축하하고 하림의 출국 전 둘만의 추억을 하나라도 더 남기기 위한 여행이었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동규가 여행 일정을 짰다. 한국은 추운 겨울이라 손발이 차가운 하림을 위해 따뜻한 남쪽나라로 정했다. 하림과 가봤던 나라 중에 제일 자연이 예뻤던 뉴질랜드였다.

“동규야, 나 왔어.”

“일찍 왔네. 전화하지.”

“보고 싶어서 일찍 왔지. 우리는 요즘 일분일초가 아쉽잖아.”

“……그렇게 말하지 마.”

“왜. 또 눈물 나서?”

하림이 잘 되는 것도 좋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것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곳으로 날아가는 하림을 누구보다 응원하는 동규지만 하림과 오래 떨어져 있을 생각만 하면 아무리 재밌는 얘기 중이어도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며칠 전엔 하늘과 셋이서 술 먹다가 기분이 굉장히 좋아진 하늘이 장난으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다가 난리가 났다. ‘하지만 너네는 그럴 사이 아니잖아’라는 문장까지가 하늘이 하려던 말이었는데 동규가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뒤의 문장을 듣고서도 테이블에 엎어져 울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두 달도 아니고 짧게는 반년, 길게는 몇 년을 해외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하림도 동규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고 동규도 하림이 떠난다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걸 싫어했다.

대학도 해외로 나가려던 걸 할아버지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학부는 무조건 국내에서 나와야 한단 고집에 선택한 것으로 안다. 하림이 말도 없이 갑작스레 정한 것도 아니고 동규도 몇 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코앞에 닥치자 몇 년간 준비한 게 부질없었다. 하늘은 두 사람이 얼마나 그 문제를 회피하고 있었는지까지는 몰랐다.

문제는 동규만 울고 끝난 게 아니라 하늘이 동규에게 미안하다고 달래다가 ‘나도 서하림 못 봐서 슬퍼’ 하고 눈물을 흘린 데에 있었다. 제정신이었어도 펑펑 울까 봐 하림이 떠나는 날 공항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던 하늘은 술도 마셨겠다 동규도 울고 있겠다 분위기를 타고 동규와 껴안은 채 꺼이꺼이 울었다. 그날 하림이 흘린 땀만 해도 1년 치였다.

“몰라.”

“울지 마. 네가 울면 나도 슬퍼.”

“아, 그런 말 하지 마.”

“난 세상에서 네가 우는 게 제일 싫.”

“하지 말라고, 진짜…….”

눈을 가린 동규의 코끝이 붉다. 하림은 한마디 더 얹으려다 말았다. 하림도 코끝이 찡해졌다. 눈물 참느라 씰룩이는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춘 하림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 추워. 빨리 씻어야겠다. 따뜻한 물에 몸 녹여야지.”

동규가 하림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눈은 가린 상태였다.

“춥다 추워! 우리나라 너무 추워!”

“……씻고 와.”

샤워는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동규는 하림을 기다리며 눈물을 미리 쏟아냈고 하림도 생각을 정리하며 눈물을 말렸다.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가 요즘은 섹스를 할 때 두 사람의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대신 키스하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원래도 몸을 섞으며 키스하는 걸 좋아했지만 애틋함이 섞이니 말보단 서로의 몸에 더 닿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섹스 하고 나면 둘 다 입술이 땡땡 부어 있을 정도였지만 싫기는커녕 자는 순간까지 쪽쪽거리다 누가 떨어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꼭 껴안고 잠에 들었다.

다른 건 다 참겠는데 동규가 섹스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건 하림도 참기가 힘들었다. 동규는 우는 것도 꼭 자기처럼 울어서 소리를 내면서 울지 않고 소리를 누르고 삼키면서 눈물만 흘리면서 운다. 차라리 엉엉 소리 내어 울면 좀 후련하기라도 할 텐데 미련하게 소리를 참았다.

눈물은 또 엄청 많아 강을 이루는 수준이라 동규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걸 보는 하림의 마음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울지 말라고 속삭이면서 동규와 입을 맞추는 하림도 눈가가 젖기 일쑤였다.

아침에 일어난 동규는 입술도 붓고 눈도 부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분명 어제 하림이 씻는 동안 눈물 주머니를 다 비웠다 생각했지만 섹스 하면서도 너무 많이 울었다. 다 하고 씻으면서도 울고 침대에 하림을 끌어안고 누워서도 눈물만 흘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림이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나간 게 천만다행이다. 이런 못난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되어서. 찬물로 아무리 세수를 해도 퉁퉁 부은 얼굴은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부어 있는 눈에 얼음이라도 올려야 할 것 같다.

기분이 꿀꿀할 땐 느끼한 거 먹는 게 최고라 동규는 피자를 시켜 먹었다. 그리고 느끼한 걸 먹었으니 입가심을 위해 샷을 내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한 입 마시니 이제야 정신이 좀 깨는 듯했다.

〈누나 뭐해요]

아메리카노를 들고 거실 소파에 왔을 때 보낸 메시지를 규연이 확인한 건 동규가 커피를 다 마시고 얼음까지 씹어 먹기 시작할 때였다.

[동규는 뭐하니〉

〈저 그냥..]

〈조금 전에 일어나서 밥먹었어요]

[누난〉

[학교ㅎ〉

[과사다ㅎ〉

〈저 놀러가도 되나요]

[치킨〉

〈바로 갑니다]

〈주문부터 하고 출발할게요]

[빨리와 밥 잘 사주는 예쁜 동동♥〉

분명 졸업여행을 처음으로 얘기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슬프지 않았는데 여행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동규는 한없이 우울해졌다. 이럴 땐 어른스러운 사람의 조언이 필요했다.

치킨을 주문하고 눈 깜짝할 새 옷을 갈아입은 동규는 차를 끌고 학교로 날아갔다. 학과 사무실 문을 열자 보이는 규연의 얼굴에 동규는 눈앞이 흐려졌다.

“왔냐. 치킨 언제 온대.”

규연은 테이블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느라 동규가 눈물을 흘린 걸 보지 못했다.

“40분쯤…… 걸린다고 했으니까…… 곧…….”

“뭐야. 왜, 예고 좀 하고 울어!”

눈 부은 걸 보니 지난밤에도 이미 한 차례 울고 온 듯한데. 규연은 동규를 바라본 채로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게임을 이어갔다.

“누나 저 어떡하죠…… 하림이 보고 저 데리고 가 달라고…… 하고 싶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예상은 했지만 하림이 때문이구나. 잠깐만, 이 판만 끝나면 휴지 가져올게. 앉아.”

“제가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아요.”

“왜.”

“사실 하림이한테 조르면, 그러면…… 하림이는 데리고 갈 거고 또…… 돈이야 뭐, 괜찮다고 하겠지만 제가 하림이한테…… 짐이 되는 거잖아요. 밥만 축내는 거지 그게 뭐예요 진짜……. 방학 때 저 데리고 갔던 앤데…… 이번에는 왜 저한테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는 건지…… 그것도 걔 마음을 잘 모르겠고…… 물론, 저도 염치없이 걔 따라갈 생각 없어요. 어느 정도 나이 있는 중견 작가면 몰라도 지금은 완전 신인이라 돈을…… 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학점이 좋아서…… 어디 취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는 동규를 앞에 두고도 포기하지 않은 게임은 규연의 승리였다. 규연은 벌써 눈물로 젖어 버린 동규의 양쪽 옷소매를 못 본 척하고 휴지를 가져왔다.

참 속도 좋은 고민이네. 규연은 그걸 그럼 모르고 사귀고 있었냐고 하림이처럼 뭐 대비해 놓은 것도 없이 칠렐레 팔렐레 연애만 한 결과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들었지만 하림이 미리 해 둔 얘기들이 있어 말을 아꼈다. 만약 동규가 울며 찾아오면 잘 달래서 집에 보내 달라는 하림이 동규에게는 맞춤형으로 느껴졌다.

하림 정도 되는 사람이니까 동규가 마음껏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게 하면서 모자란 거 하나 없이 서포트를 해 줄 수 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동규 벗겨 먹고 노예 계약서에 사인 받아내 온갖 곳에 굴려 먹으며 이용해 먹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물은 괜찮으니까.

“취직이 걱정이면 알아봐 줄게.”

“진짜……요?”

“그럼 진짜지. 정직원까진 아니어도 1년이나 단기? 네가 잘 하면 정직원 될 수도 있고 그런.”

“어떤 건데요.”

“알바?”

“근데 저…… 일 잘 못해서 잘리면요. 자신 없는데…….”

“하림이가 널 너무 곱게 키웠다. 밥만 축내는 식충이 하기 싫으면 자신이 없어도 해야지. 북카페 알바나 서점 쪽은 손님들 성향도 우악스럽지 않고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도서관 사서랑 카페 알바 반반 섞은 거야. 너 커피머신도 쓸 줄 알잖아.”

“……좋아요.”

“그럼 알아보고 연락 줄게. 좀 괜찮아졌어?”

“네.”

타이밍 좋게 치킨이 도착했다. 규연은 한 마리라기엔 너무 무거운 봉투를 받아 들고 웃었다.

“후배님, 그렇게 울면서 치킨 먹을 맘이 들어?”

“울면 배 많이 고파요.”

“야 이거 몇 마리야 도대체.”

“세 마리밖에 안 돼요.”

“많이도 시켰다. 먹으면서 마저 얘기하자.”

맛있는 걸 먹으며 규연의 얘길 듣고 있으니 동규는 누나 찾아오길 정말 잘했다며 기분이 좋아졌다. 특히 규연이 여행 가면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기분도 환기 되고 잘 놀고 올 거라고 해 주었는데, 그게 마치 마법 주문처럼 느껴져 무척 힘이 됐다.

이게 다 커 가는 과정이라는 말도. 100세 인생에 어른 되려면 한참 멀었으니 30대까지는 애새끼라 울고불고 해 봐야 어른이 되는 거라나. 규연도 고작 동규보다 두 살 많았지만 규연이 해 준 모든 말들이 동규에게는 엄청난 위로였다.

규연의 응급처치는 꽤나 성공적이어서 효과가 좋았다. 단순히 우울했던 게 환기되는 것뿐만 아니라 하림과 둘이 가는 여행에서 우중충하게 있어 봤자 떠나는 하림의 발걸음이 무거울 테니 떨어져 있는 동안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는 시간으로 여행을 즐기자는 단계까지 올라갔다.

뉴질랜드 웰링턴에 도착해 일주일간 북섬을 돌고 남섬으로 내려왔다. 북섬에서 지내는 동안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하림이 떠나는 얘길 하지 않았다. 하는 얘기의 반 이상이 과거 얘기이거나 지금 보고 먹고 있는 것들로 이루어졌다.

서로 이번 여행을 좋은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단 1초도 허투루 쓰기 싫어 약간의 슬픔이나 부정적인 감정들은 허용되지 않았다.

남은 일주일은 북섬과 남섬을 페리로 이어주는 작은 항구도시인 픽턴에서 출발해 여왕에게 바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라는 퀸스타운까지 천천히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남섬으로 내려온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동규 대신 하늘이 눈물을 흘려주는지 이례적으로 비가 많이 쏟아졌다. 3일 째 되는 아침까지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자 뉴스에서도 무슨 일이냐고 연신 보도하기 바빴다.

“아침부터 비 오는 소리 들리니까 부침개 먹고 싶다.”

“해줄까? 김동규 만족할 만큼 만들려면 몇 판을 만들어야 하지.”

“아니야. 귀찮게. 한국 가서 해 먹을래.”

“그럼 밥 먹고 나가서 조금 걷자.”

빗소리 듣는 게 좋다는 하림을 따라 나와 한참을 걸었다. 하림은 정말 빗소리를 듣기 위해 나온 건지 이따금 걷다가 한 번씩 걸음을 멈추고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가만히 비를 맞았다. 물웅덩이를 만나면 두 번 중 한 번은 피했고 한 번은 괜히 발로 건드렸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비 오는 길거리를 이리저리 다녀서 그런지 여름인데도 긴바지에 긴팔을 입은 하림의 옷이 거의 다 젖을 정도였다. 오랜 시간 말없이 걷던 하림이 입을 뗀 건 호텔로 돌아와 문을 열기 위해 선 순간이었다.

“키스해 줘.”

풋풋한 비 냄새가 코끝을 감돌았다. 여전히 비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센 기세로 쏟아졌고 열어 두고 나간 창에선 빗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서로를 껴안고 입을 맞췄다. 동규는 눈물을 참는다고 참았지만 감은 눈을 따라 흐르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하림은 동규의 눈물을 대신 닦아 주었다. 괜찮아. 울지 마. 네가 울면 나도 슬퍼. 동규와 살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면서 하림은 끝없이 말했다. 눈물만 흘리는 동규가 가지 말아 달라고, 나를 데려가 달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동규야.”

뜨거운 나신이 하림의 위로 엎어졌다. 그리고 품에 가득 안았다. 하림은 동규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제 안에 사정하느라 잘게 떨리는 동규의 몸을 느꼈다.

여행 와서 동규와 했던 섹스는 하나 같이 달콤했지만 처음으로 심장이 가시로 찔리는 듯한 섹스였다. 따끈한 몸과 얽히면서 괜찮아지려고 하면 동규가 눈물을 한 방울씩 흘렸고, 그런 동규를 달래며 하림도 마음이 차차 진정되려고 하면 또 동규가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륵 흘렸다. 우리가 정말로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을 뿐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이별은 이별인가 보다.

“김동규.”

“응.”

“듣고 싶은 말 있어.”

“…….”

“내 마음 약해질 것 같은 한마디만 해. 아무거나 상관없어.”

너랑 오래 떨어져 있기 싫다거나 보고 싶을 거라는 단순한 말이라도 마음이 약해지다 못해 허물어질 거다. 그거면 된다. 아주 옛날부터 동규를 데리고 갈 생각을 하고 있던 건 맞지만 한두 달도 아니고 몇 년을 오로지 저 하나만 믿고 한국 생활을 정리해 달라는 말을 하림은 할 수 없으니 동규가 먼저 해 줬으면 하고 바랐다.

동규는 흔치 않게 등단한 첫 해부터 평론가와 출판사 그리고 독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인지도를 무섭도록 쌓는 중이었고 동규 스스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동규의 실력도 뛰어나지만 여러모로 운도 좋았다.

그만큼 기회도 많이 찾아왔다. 해외에서도 글은 쓸 수 있고 출판사와 미팅 잡힐 때마다 한국으로 보내 주면 되지만 해외에 나와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불편하고 포기할 게 하나 늘어갈지도 모른다.

동규의 아빠도 올해부터는 서울에 있는 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때문에 부모님 두 분이서 같이 살게 되었고 동규가 부모님을 보고 싶으면 언제든 차 타고 15분만 가면 된다. 오랜 시간 아빠와 떨어져 산 동규가 아빠가 서울로 온다고 했을 때 굉장히 좋아했던 걸 아는데 그런 동규에게서 또다시 가족과 헤어지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하림이 명분으로 삼을 수 있는 한마디가 필요했다.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 증거가.

“하림아.”

“하라니까.”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던 동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안해…….”

결국 동규는 하림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지 못했고 하림도 그런 동규의 마음을 이해는 했지만 가슴 한구석이 조금 답답했다.

다행히 늦은 오후에는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저녁엔 먹구름이 완전히 사라져 별이 쏟아질 것처럼 하늘을 수놓았다. 내일부턴 다시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을 거란 뉴스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비 때문에 발이 묶여 있던 두 사람은 일어나자마자 캐리어를 챙겨 들고 이른 체크아웃을 했다. 핸들을 잡은 동규는 장장 3일 동안 비가 와 예상보다 일정이 많이 늦어져 속이 탔다. 쭉 뻗은 도로를 시속 100km 넘게 밟았다.

“날씨도 좋은데 푸카키 들렀다 가자.”

“응.”

하림은 푸카키 호수도 보고 테카포 호수도 보고 싶었지만 동규가 시속 120km까지 밟는 걸 보고 하나는 포기했다.

“또 봐도 예쁘지.”

“……응.”

전에도 한 번 봤던 거 갈 길이 바쁜데 뭘 또 보나 싶었던 동규는 반짝이는 태양과 뽀얀 에메랄드빛의 호수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에 하림과 왔을 때는 구름이 많은 날이었지만 그 때도 충분히 예쁘다 생각했는데 오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틀간 내린 비로 구름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고 저 멀리 설산까지 깨끗하게 전부 보였다.

“내려가자.”

차를 세워두고 문 앞에 서서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만 하고 있었다. 동규는 하림이 건네준 모자를 썼다. 호숫가로 내려와서도 걷질 못하고 말도 못하게 예쁜 호수만 넋을 읽고 바라보았다. 뒤늦게 사진을 찍을 정신이 들었다.

“아, 카메라. 까먹었다.”

“내가 가져올게. 계속 보고 있어.”

조금이라도 더 눈에 호수를 담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뜬 동규에게 하림이 입을 맞추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올라갔다. 잠시 뒤 하림이 돌아올 때까지 동규는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풍경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좀 걸을까.”

“응.”

하림과 손을 잡고 호숫가를 따라 걸으며 동규는 종종 발걸음을 멈췄다. 눈으로 경치를 바라보다가 카메라로 찍었다가 감탄사를 뱉었다가 하는 동규의 발걸음을 하림이 옆에서 천천히 맞춰 걸었다.

“서하림, 브이.”

“쁘이.”

동규가 찍고 싶은 만큼 찍을 수 있도록 하림이 동규가 하라는 대로 포즈를 취했다.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하림 때문에 웃음이 터진 동규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하림에게 입을 맞췄다. 귀 아래 턱으로 하림의 차가운 손가락이 느껴졌다.

진득하게 얽혔던 혀가 떨어지면서 하림의 속눈썹이 작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하림은 시선을 계속 아래로 내린 채 침만 삼켜 댔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걸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데. 동규는 제 귀 밑 턱을 만지작거리는 하림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할 말 있어, 동규야.”

“응. 해.”

가볍게 하림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눌렀다 뗐다. 천천히 해도 돼.

“나는 가끔, 아무것도 생각 않고 그냥 세상 편하게 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부모님 돈으로 할아버지 돈으로 흥청망청 너랑 놀기만 해도 좋을 것 같고 지금 하는 건 모두 그냥 취미로 이따금 한 번씩 까먹지 않을 정도로만 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게 살면 너나 나나 재미가 없겠지.”

하림이 하는 말들은 어딘가 익숙했다.

“왜냐면 너는 겁도 많고 세상 모든 게 걱정투성이고…… 나는 그런 너를 좋아하니까 그 모든 걱정으로부터 지켜 주고 싶어. 아주 사소하고, 작고, 귀여운 걱정들만 해. 나머지는 다 내가 할게.”

같이 가자고, 먼 곳으로 같이 가자는 말일 거라 생각했다. 하림이 그 말을 해 줄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하림이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짜고짜 비행기 타러 가자고 해도 동규는 고민도 하지 않고 함께 갈 생각이었다. 염치도 없고 대책 없다고 욕한대도 괜찮다. 하림이 가자는 곳이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더라도 같이 가자는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랬는데.

“결혼하자.”

눈앞이 흐려진다. 햇빛이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거리고 따스했고 아름다웠다.

“몇 년 뒤에 박사까지 다 끝내면 그 때. 그러려고 미국까지 가는 거고.”

하림은 동규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빼고 새로운 반지를 껴 주었다. 하림의 뒤로도 에메랄드빛의 호수가 끝없이 펼쳐져있다. 하림은 덤덤한 얼굴에 강인한 눈빛을 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동규는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만일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다면, 나와 영원을 약속해 준다면 행복한 하루를 끝내기 싫어 지금처럼 일분일초가 아깝고 아쉽지도 않겠지. 내일도 모레도 우리들의 행복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는 너와 함께하는 아주아주 먼 훗날까지 상상해. 그 때도 우리는 서로의 품속에서 아침마다 같은 햇살을 맞으며 눈을 뜨고 사랑을 속삭여. 매일매일이 기적의 순간들로 이루어질 거야.”

한 발짝 하림은 뒤로 물러났다. 동규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커다란 눈물이 떨어졌다.

“동규야 나, 너 좋아해. 사랑하고 있어. 나랑 결혼해 줘.”

“…….”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그 때까지 기다려 준다면, 지치지 않고 나를…… 날 지금처럼만 사랑하고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나는 너 없이는 안 되겠어. 사실 내 욕심이야. 이기적인 거 아는데, 내 욕심이지만…… 한다고 해. 기다려 준다고, 그렇게 말해.”

동규는 제 눈물에 짙은 색으로 변해가는 모래들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떨어져 있는 시간만 견뎌내면 찬란하고 행복한 미래만 있을 거라고 약속해.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단언하는 게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자주 올게. 네가 너무 보고 싶은 날이면, 너도 내가 많이 보고 싶다고 그러면 참지 않고 올게. 응?”

“……그러면 왜 같이 가자는 말을 안 하는데.”

“몇 달 해외에서 지내 봤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 생각보다 더 많은 걸 포기해야 할 거고 몇 년을 어쩌면 평생을 부모님이나 친구 하나 없는 곳에서 외롭게 살아야 할 수도 있어.”

“왜 외로워? 너 있잖아. 같이 가. 우리 둘이면 외롭지 않을 거야.”

“김동규.”

“내 꿈이 하나 있는데, 아주 커다란 숲을 만드는 거. 그러려면 아주 유명한 작가가 돼야겠지만 해가 들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숲을 만들고 싶어. 그리고 내 꿈이 하나 또 있는데 뭐냐고 물어봐.”

“……뭔데.”

떨어져 있던 한 걸음 하림에게 다가간 동규가 하림을 안아 입을 맞췄다. 하림이 눈을 감는 걸 보고 동규도 눈을 감았다. 꿈은 아닐까,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청혼을 받게 되는 꿈.

심장이 거세게 뛰는 감각만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깨닫게 했다. 동규는 하림이 손에 쥔 반지 케이스를 열어 반지를 꺼낸 뒤 그의 손가락에 꼈다. 반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같이 빛났다.

“이게 내 마지막 남은 꿈이자…… 대답인데……. 충분해?”

익숙한 대답에 하림은 웃음이 나왔다. 동규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중이다.

“……충분하냐고.”

“완벽해.”

언제나 푸른 나무 같은 청춘의 나날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황홀할 정도로 완벽하고 아름답고 영원이 되어 이어질 태초의 날이기도 했다.

릴리 IF 외전, 상록수

fin.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