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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학교 모델은 연임이 되지 않는다는데 그걸 동규가 처음 깬 3학년 때는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다는 분위기였다.
동규네 학교는 학교 홍보 모델이 하는 일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고 홍보물에 부착되는 사진 및 학교 공식 영상에 등장하는 정도라 큰 구설수는 없이 넘어갔다. 어차피 고학년은 잘 하지 않다 보니 동규가 4학년이 되는 해에는 새로운 남자 홍보 모델이 나올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올해도 또 4학년인 동규가 학교 모델로 선정되면서 동규는 뭇 남학생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으로 이루어진 홍보 모델은 여학생만 매해 바뀌는 실정이었다.
동규만 모르지 그를 지지하는 학생층은 무척 컸다. 올해도 재학생 투표와 학생회 투표에서 연달아 동규가 뽑히면서 남학생들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특히 배우나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남학생들은 둘 이상 모여 있다 하면 동규 욕을 하느라 바빴다.
올해 여자 홍보 모델이 된 학생은 연영과 1학년이었는데 같은 과 남학생들 중 몇몇이 동규와 사적으로 말을 섞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그 엄포가 지켜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홍보 모델로 선정된 학생은 저에게 동규 일로 뭐라고 한 선배들 앞에서는 번호 저장도 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촬영 있는 날마다 동규에게 연락을 꼭 했다. 남학생 중에서도 신입생 몇몇은 캠퍼스를 돌아다니다가 동규를 발견하면 근처에 남자 선배님이 있는지 없는지 스캔한 뒤 부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동규를 좋아하거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비단 한 과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고학년 남학생들은 동규 앞에서 웅성거리기도 하고 뒤에서는 다 들리게 욕도 했지만 동규는 거의 대부분 자신의 욕을 하는 줄도 몰랐다. 제 이름이 들려와도 나이 먹고 할 짓 없다고 못 들은 척을 했다. 동규가 뭐라도 반응을 하면 좀 나았을 텐데 그것도 아니라 남학생들은 더 약이 올랐다. 하림이 동규의 친구인 것도 그 약 오름에 한 축을 담당했다.
후배들은 그나마 나았다. 동규와 같은 학번이거나 그 위이거나, 학번이 같거나 낮아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면 동규가 학교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것만 봐도 재수 없고 눈꼴이 시리다고 할 정도였다. 동규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르고 학생 식당에서 그와 스치기라도 한 날이면 저 멀리서부터 달려와 인사하는 후배를 괜히 더 쥐 잡듯 잡았다.
“쟤네 뭐 하냐.”
“내 말이.”
“똥군기야 똥군기. 저럴 거면 군대나 가지.”
“김동규 있어서 그래.”
“어린 애들만 불쌍하지 뭐.”
“내가 왜.”
“모르면 됐다.”
“옛말에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했다. 어른들 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요.”
“혼낼 거면 다른 곳 가서 혼내지 왜 여기서…….”
“빼액질이지 뭐.”
“열폭 종자들이야.”
동규는 친구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가방에서 빵 봉지를 꺼내 들었다. 아침부터 학교 앞 빵집에 들러서 사 놓은 거였다. 겨우 한 번 먹은 거 가지고는 동규의 양에 한참 모자랐다. 그렇다고 또 밥 받아오기엔 귀찮기도 하고 친구들은 아직 밥이 남아 있기도 했다.
친구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이 학생 식당에서 애먼 후배만 잡고 있는 고학번 선배를 보고 있는 와중 동규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떻게 학교 앞에 이런 전국구로 유명한 빵집이 있는 건지 정말 다시 생각해도 고3때 학교를 이곳으로 선택하길 잘했다며 속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하림과 같이 사는 집이 학교와 가까운 것도 운명처럼 느껴졌다.
바질 스콘에 딸기잼을 발라 먹던 동규는 문득 봉지 안에 남은 빵들을 살폈다. 맛있는 식빵도 샀는데 겨우 시판용 딸기잼을 발라 먹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볼 거 있어.”
“뭔데.”
“오늘 무화과잼이랑 복숭아잼 만들 생각인데 너네도 그런 거 좋아해?”
“어어. 없어서 못 먹지.”
“김동규가 만드는 잼이면 된장으로 만들어도 맛있을 듯.”
“저러다 한 대 치겠다.”
“우는 거 아니야?”
된장으로 잼을 어떻게 만든다는 거지. 그런 게 있냐고 물어보려는데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웠다. 싸울 거면 멀리서 싸우든가 왜 이쪽에서 싸우는 건지 모르겠다.
“나 먼저 일어난다. 카페 가서 자리 잡고 있을게.”
“김동규 승!”
“뭐가.”
“아니야.”
친구들이 김동규 전적이 어떻게 되더라 몇 승째지 하며 웅성거리는 걸 뒤로하고 동규는 학생 식당을 나오면서 하림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줬어? 선물??〉
〈아니 아직]
〈점심 이제 먹었어]
[아하〉
[빨리 줘ㅋㅋㅋㅋㅋ〉
[좋아할 듯〉
〈맞아... 그래서 떨려ㅠㅠ]
[왱〉
〈부끄러....]
[알지알지 선물 주기 직전이〉
[제일 떨리고 긴장됨ㅋㅋㅋ〉
[그래도 좋아하는 거 보면 선물 주는 사람 입장에서 기분 좋아〉
〈갑자기 든 생각인데]
〈받고서..]
〈안 좋아하면 어떡해]
[아나〉
[같이 골라줬잖아〉
[걱정X〉
[좋아할거야〉
〈알았어....]
동규는 가방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가방 안에는 유주에게 줄 선물이 담겨 있었다. 5월부터는 유주가 교생 실습을 가기 때문에 잘 하고 오란 의미로 산 선물이라 더 그랬다. 뭘 줘야 할지 고민하다가 하림과 함께 선물을 샀다.
동규는 유주가 홍차를 좋아하니까 백화점에서 홍차를 사 갈 생각이었지만 하림은 거기다가 커피를 얹고, 마침 명동에서 4월 한 달간 열린 팝업스토어의 초콜릿까지 동규의 선물 목록에 추가했다. 하림은 블라우스와 아는 한의사에게 개인적으로 주문한 사향도라지청을 선물로 마련하긴 했는데 이번 주는 너무 바빠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어 동규에게 선물 전달을 맡겼다.
[선물 주면서 동영상 찍어놔〉
[그리고 전화해〉
[만나서 줘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하게〉
〈알았어]
〈근데]
〈홍차 좋아하는데]
〈이미 집에 홍차가 올해 내내 마실 만큼 많이 있으면?]
[아ㅋㅋㅋ 괜찮아〉
[유주가 먹는 브랜드랑 달라서〉
[집에 있는 것도 마시고 선물 받은 것도 마시고 그럴걸〉
〈아그래?]
[유주는 영국꺼 먹는데 그거는 프랑스꺼야〉
[프랑스 대통령이 먹는거〉
〈아하....]
[선물 주고 전화하는거 잊지마〉
[이따봐♡♥〉
〈응♡]
〈사랑해♥]
[나도♡♥♡♥ 뽀뽀〉
이따 보자고 해놓고 동규는 친구들이 올 때까지 하림과 뽀뽀를 날려 댔다. 시은과 주안은 동규가 무슨 선물을 줘야 할지 머리를 싸매던 때 이미 선물을 다 줬기 때문에 남은 건 동규뿐이었다. 내일모레면 5월이었다. 어서 고심해서 고른 선물들을 주고 싶어 동규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누가 보면 우리 밥 안 먹은 줄 알 거야.”
“밥 배랑 빵 배, 디저트 배는 따로야.”
가방에 아직 먹지 못 한 빵들도 있는데 카페 쇼케이스에 있던 베이커리를 몽땅 시킨 동규 덕에 정사각형 테이블 두 개가 접시로 빈틈이 없었다. 게다가 좀 전의 학생식당은 너무 시끄러워 빵을 제대로 먹지도 못 했으니 아직 배가 부른 건 아니었기 때문에 동규는 배부터 채우기 위해 열심히 포크를 움직였다.
어느 정도 배가 차오르자 빈 접시들을 치워 버린 후 동규는 가방에 넣어 둔 상자들을 꺼냈다. 까만색은 동규 거, 회색은 하림이 준비한 거였다.
“교생 실습 선물이구나!”
주안와 시은이 눈을 반짝이며 선물 상자를 톡톡 건드렸다.
“응.”
“왜 두 개야?”
“이건 서하림 거. 바빠서 요즘 집에도 늦게 들어오거든. 실습 시작하기 전에 직접 만나서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내가 대신.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
“유주야 지금 열어 봐.”
“야 서하림이 골드바라도 준 거 아니야?”
“아, 저기 그 전에.”
동규가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서하림한테 영상 통화 좀…….”
“걔 수업 중 아님?”
“전화 주면 잠깐 나온대.”
동규가 전화를 걸자 하림이 바로 받았다. 화면에 하림이 1초 정도 보였다가 빙글빙글 돌았다. 잠시 뒤 천장이 보였고 곧이어 이어폰을 낀 모습이 나왔다.
“써하림!”
“얼굴 까먹겠어!”
“하림 어빠 팬이에요! 방송 잘 봤어요!”
“실물이 더 잘생겼어요!”
“우리 잊으면 안 돼!”
-얘들아 진정해.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우리도 4학년인데!”
“우리가 S대로 놀러간다!”
-귀 아파. 얘들아, 진정 좀 해.
하지만 친구들은 진정은커녕 목소리를 높여 하림을 부르짖었다. 하림의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동규가 휴대폰을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트렸다.
“귀 아프대.”
“알았어. 빨리 다시 가져와.”
-유주 쌤! 교생 실습 축하합니다!
“아직 선생님은 아니야.”
-왜, 교생 실습 하면 선생님 다 된 거지 뭐.
“임고가 있잖아 임고가.”
-잘 볼 건데 무슨 걱정이야. 암튼, 내가 선물 직접 주고 싶은데 요즘에 너무 바빠서. 알지? 김동규 통해서 보내서 미안해. 실습하다가 오늘은 고생한 나에게 사치를 부려도 될 것 같은 날 연락해. 맛있는 저녁 쏜다.
“역시 서 회장님밖에 없다. 실습 끝나고서는 다 같이 모이자.”
-좋지 좋지. 그러면 얼른 열어 봐. 선물 여는 거 보고 들어갈게.
유주가 회색 상자를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주안이 옆에서 요란을 떨며 카운트다운을 했다.
“우와!”
“블라우스 존예야.”
“이건 뭐지? 한자로 써 있는데.”
“야 너는 국문과면서 이런 쉬운 한자를 모름 어떡해.”
“내 전공은 국어국문학이지 한문학 아니거든. 그리고 국문과라고 한자 다 알 거라는 오해는 말아 줄래, 국문과 오시은 씨?”
“저기요. 난 한자 급수 3급이야.”
“앗. 죄송합니다.”
시은이 한자급수 3급 정도는 다 초딩 때 따 놓는 거 아니냐고 주안을 놀렸지만 한자 무급인 유주, 동규까지 저격을 한 셈이라 잠시 숙연해졌다.
“초정한의원이라고 적혀 있어.”
-선생님들 선물로 목에 좋은 도라지청 많이 한다길래.
“나는 도라지청 먹어야 할 정도로 수업을 많이 하는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감동이야. 옷도 너무 예뻐! 잘 입고 다닐게.”
-주문 제작이라 비싼 거니까 목 말고도 매일매일 먹으면 좋을 거야.
“암요, 알죠. 서 회장님이 사 주신 건데 안 봐도 귀해.”
“열어봐. 금가루 섞여 있다 이거.”
“다음은 김동규 거 열자.”
다른 상자를 연 유주는 홍차와 초콜릿 브랜드를 확인하자마자 말없이 박수를 세 번 치고 동규에게 팔을 펼쳤다. 동규가 멀뚱멀뚱 보고만 있자 “아 거 참. 회장님, 허락 좀 해주세요.”라며 유주가 하림의 허락을 구했다. 주안은 아직도 동규와 하림의 사이를 몰랐기 때문에 하림은 무슨 말이냐고 한 발 뺐다. 시은이 자리를 비켜 주어 유주가 동규를 껴안았다.
“고맙다, 김동규. 너도 알지. 내 혈관에 홍차 흐르는 거. 실습 시작하면 내 자리에 갖다 놓고 매일매일 식후땡 할게. 싸랑해.”
“응, 나도…… 좋아해 줘서 고마워.”
“어후, 근데 김동규 팔근육, 오우. 좋은데.”
“어, 나도!”
“나도!”
유주에 시은에 주안까지 동규의 몸을 주물렀다. 그 덕분에 휴대폰을 들고 있던 동규의 손이 흔들렸다. 하림이 닳으니까 적당히 만지라고 웃었다.
“끄, 끊을게. 이따 전화해!”
구석구석을 더듬는 친구들의 손길에 동규는 하림에게 구해 달란 전화를 하고 싶은 걸 눈물과 함께 삼켜 냈다. 동규의 귀가 빨개지고 손으로 가린 얼굴이 터지기 직전까지 친구들의 장난은 끝나지 않았다.
바쁘고 피곤할수록 먹고 자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게 동규의 지론이다. 동규는지난 겨울 방학과 마찬가지로 이번 여름 방학 역시 버클리연구소 국제 학생 인턴에 합격한 하림을 따라왔다. 캘리포니아의 청명한 햇살을 맞으며 장을 보는 게 하루 중 제일 중요한 일과였다.
줄곧 국내연구소에서만 있다가 처음으로 해외로 나왔던 저번 겨울 방학만 해도 하림이 잔뜩 긴장한 채로 하루하루를 지내느라 동규까지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적응이 좀 되나 싶었더니 40일이 금세 끝나 동규도 적잖이 아쉬웠고.
이번 여름 방학 국제인턴학생에 하림이 지원했던 곳은 열 곳이었고 그중에 합격한 곳은 버클리연구소 말고도 영국왕립연구소와 스위스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덴마크의 닐스보어연구소며 마지막으로 가까운 일본의 이화학연구소도 있었다. 그렇지만 하림은 고민도 하지 않고 이번에도 버클리연구소를 선택했다. 동규는 하림에게 다른 곳도 가 보지 왜 똑같은 곳을 가냐고 물었는데 하림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UC버클리 마스코트가 곰이라.’
너무도 태평한 어투였다. 당연하다는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진짜 그 이유야?’
‘뻥이고, 네가 거기서 되게 잘 지낸 것 같아서. 글도 술술 써졌다며. 사진도 아무렇게 찍어도 잘 나오고 뭘 먹어도 맛있다고 그러고.’
‘……그랬었나.’
‘그랬거든요. 그리고 대학원 어차피 미국에 있는 학교로 갈 거니까 거기가 제일 무난해. 학교 안에 있잖아.’
동규가 보기에 하림이 합격한 곳 중에선 영국왕립연구소가 제일 근사하고 있어 보였지만 그래도 동규는 하림의 결정이 정말 좋았다. 적응하느라 힘든 건 둘째 치고 하림의 말처럼 캘리포니아에서는 글도 술술 써지고 사진도 잘 찍히고 음식도 다 맛있었다.
거기다 마침 동규가 지난겨울에 이어 이번 여름에도 캘리포니아로 두 달 넘게 간다는 걸 알고 한 잡지사에서 여행 에세이를 보내 줄 수 있냐는 의뢰도 들어왔다. 이런 의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하림은 주말마다 동규와 캘리포니아주 이곳저곳을 여행 다닐 계획을 세웠다. 첫 주말은 동규가 그렇게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LA의 테마파크를 다녀왔다(겁이 많은 동규는 놀이기구를 거의 타지 않았다).
그 외에도 동규는 어차피 타국에서 고생하는 하림이 밥이라도 잘 챙겨 먹었으면 하는 걱정에 매일매일 장을 보고 맛집을 탐방하러 다니고 괜찮은 카페를 발견하면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다. 하림이 잡지사에 사진도 같이 보내면 좋을 것 같다고 DSLR 카메라도 사 준 덕분에 사진 공부도 해야 했으므로 동규는 아침부터 하림이 집에 오는 시간까지 나름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림과 함께 두 사람이 좋아하는 빵집에 들러 베이커리들을 사 와서 커피와 함께 간단한 아침을 먹는다. 연구소로 출근하는 하림을 배웅하고 난 다음엔 오전 간식 타임으로 버거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하림이 렌트한 집은 연구소에서 차로 20분 정도 거리인 곳인데 집에서 30분만 차를 타고 나가면 인앤아웃버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림은 느끼하다고 싫어했지만 동규는 세상 천지에 못 먹는 게 없는 사람인지라 이틀에 한 번 꼴로 꼭 인앤아웃버거를 방문했다. 차 타고 거기까지 나가기 귀찮은 날은 샌드위치를 사먹고.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은 뒤 점심을 먹고 나면 제일 중요한 일과인 저녁 장을 봤고, 집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 보면 하림이 동규를 데리러 왔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고 테이크아웃 해 집에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하림이 동규가 글 쓰면서 먹기 좋을 간식을 사 오거나 만들어 주었다.
여기서 지내는 두 달간 집안일을 해 주는 사람을 고용하려다가 동규가 만류하는 탓에 둘이 지내고는 있지만, 어쨌든 하림은 동규가 낯선 나라에서 여유를 만끽하면서도 부지런하고 바쁜 일상을 보내는 게 좋았다. 그래서 또 캘리포니아행을 택한 거였다.
동규가 해 준 또는 둘이 같이 만든 저녁을 먹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밖에서 외식을 하고 돌아와 씻고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커피를 마실 때면 동규가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뢰받은 여행 에세이 말고 소설로도 등단을 준비하는 동규가 글을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으면 하림은 여기가 캘리포니아 피드몬트가 아닌 서울 옥수동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김동규.”
“응.”
“나 졸려서 먼저 자러 간다.”
“응. 잠깐만.”
하림은 침실로 가려다가 소파에 기대어 섰다. 곧장 동규가 다가와 하림에게 입을 맞추었다.
문득 작년 11월 동규보고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같이 미국 가자고 했을 때 동규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게 떠올랐다. 고민도 하지 않고 따라간다고 한 것치고, 동규는 첫 한 달은 하림 없인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그랬던 겁쟁이가 한 번 와 봤다고 제법 능숙하게 지내는 게 기특했다.
“자러 간다면서 왜 여기 있어.”
“그냥. 김동규 뽀뽀 조금 더 오래 받으려고?”
입을 맞추면서도 간지러운 말 한마디에 귀가 달아오른 모습이 사랑스럽다. 오늘 같은 하루들이 계속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하림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준 동규는 바로 돌아 나가기가 아쉬워 하림의 옆에 누웠다. 하림이 잠에 들 때까지 토닥여 줄 생각이었다.
바로 잘 것처럼 꽤 졸려 보이던 하림이 자꾸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졸리다며.”
“졸려.”
“자, 얼른. 내일까지만 나가면 주말이다.”
“내일은…… 뭐 할 거야.”
“음.”
“또 인앤아웃?”
“맞아. 어떻게 알았어?”
“뻔하지. 펜톤도 갈 거지. 아이스크림 미친 듯이 커다란 거 먹으러.”
“응. 역시…….”
맛은 있지만 지나치게 많이 담아 지저분하게 흘러내리는 비주얼인 탓에 하림이 별 다섯 개를 줄 수 없다던 아이스크림들을 떠올리며 동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너 요즘 살쪘어.”
“그럼 안 가.”
“장난이야. 햄버거랑 아이스크림 많이 먹고, 사진도 많이 찍어.”
“내일은 집 근처에 작은 고서점 있다던데 거기 한 번 가 보려고.”
“뭐 사게?”
“아니. 보러.”
“어떤 거?”
“전에 교수님이 미국 고서점 가서 북한 시집인가 소설책을 산 적이 있대. 나도 그거 있나 보려고.”
“재밌겠다.”
“그럼 내일 내가 먼저 가서 보고 올게. 발견하면 주말에 또 같이 가자.”
“그래.”
“자. 많이 피곤해 보여.”
“응. 나 먼저 잔다.”
“뽀뽀 또 해 줘?”
“응…….”
“잘 자.”
하림과 입술을 맞댄 채로 동규는 토닥이는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그 속도에 맞춰 저를 보고 있던 하림의 눈도 느리게 감겼다. 동규는 잠에 든 하림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하림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 불을 끄고 방문을 닫았다.
아까까지 쭉쭉 잘 써지던 게 하림을 재우고 왔더니 영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이럴 땐 오늘은 망쳤다 생각하고 덮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동규는 워드 파일을 저장하고 냉장고에서 간식거리들을 왕창 꺼내 왔다. 외장하드를 노트북에 연결하자 한국에서 다운받아 온 수많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예능들이 보였다. 동규는 드라마 폴더에 들어가 재밌어 보이는 제목의 드라마 1화를 재생시켰다.
10초쯤 보고 일시정지를 한 동규는 지금의 잉여로운 순간이 뭔가 어른의 삶처럼 느껴져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주방에서 나무젓가락도 가져왔다. 이것만 있으면 아무리 과자를 많이 집어먹어도 손에 기름기 하나 묻지 않고 과자를 먹을 수 있었다.
하림만이 볼 수 있는 SNS에 사진을 올리면서 오늘을 어떻게 남겨 놔야 내일 아침에 일어난 하림이 또 한 번 제게 반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결혼한 것 같다고 쓸까. 아니다. 너무 주책맞은 것 같아 패스. 내조의 달인이 되어 가는 것 같다고 하면…… 이것도 주접 떠는 듯해 별로다.
감자칩 한 봉지를 다 비우고 치즈볼 뚜껑을 열고나서야 동규는 액정을 두드릴 수 있었다.
6ear123123 몇 년이 지나면 오늘과 비슷한 날들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 있을 것 같아 문득 이렇게 지내고 있는 게 미래를 먼저 체험해 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떼 한 잔을 들고 연구하러 가는 하림이와 늦은 하루를 시작하는 나는 굉장히 다른 아침 풍경을 맞이할 테고 하림이가 세상의 이치를 밝혀 내는 동안 나는 언어의 바다를 마음껏 누비고 있을 거다. 서로 할 일 다 끝내고 만나면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얘길 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사랑을 속삭이고 행복한 꿈을 꾸다 또 서로 다른 아침을 맞이하고. 이렇게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라도 빨리 시간이 흘러 오늘 같은 날들이 끝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p.s 솔직히 말하자면.... 언어의 바다를 누비던 중에 암초를 만나 이렇게ㅋㅋ 쉬는 중이지만 뭐 어떤가.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맥주 대신 콜라, 맥 앤 치즈 대신 과자뿐이라도 괜찮다. 내일도 오늘만 같아라. 서하림 사랑해 내 꿈 꿔♥
하트 하나만 해 놓고 잠시 고민하던 동규는 하트를 세 개 더 추가한 뒤 드라마를 다시 재생시켰다.
귀국하고 하림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동규의 엄마에게 따로 만나자는 연락을 한 거였다. 처음 같이 사는 걸 허락받았을 때만 해도 동규의 아빠를 바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동규의 아빠가 시간이 되면 하림이 바빴고 하림이 시간이 되면 동규의 아빠가 바빴다. 영 타이밍이 맞지 않은 상태로 어영부영 시간을 흘려 버렸지만 이제는 더 미루기엔 하림의 시간이 없었다. 반 년 뒤면 하림은 한국에 없을 거니까.
“그래서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너네 부모님을 만나기로 했어.”
“…….”
“왜?”
“난 사실 네가 우리 아빠는 안 만났으면…… 해서.”
“흠. 왜?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우리 아빠 운동했잖아.”
“응. 멋있는 분이지. 한국 유도 역사의 살아 있는 전설, 아직도 온리 원인 세계 유도 올 포디움 보유자, 자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한국청소년유도연맹의 빛이 되는 참스승!”
“……그럼 뭐해. 운동하는 남자들 약간…… 그런 거 싫어하잖아. 같은 남자 그런 거.”
“아.”
“우리 아빠 멋지고 좋은데, 엄청난 마초야.”
연어스테이크를 잘라 먹은 하림이 팔짱을 꼈다.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뵌 분도 아니고 동규나 동규 엄마에게 건너 듣기만 했지 제대로 본 적은 한두 번 잠깐 인사한 게 다였다. 아드님의 남자친구라며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리는 애초에 성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동규는 진작에 연어스테이크는 다 먹고 방금 전에 막 나온 티본스테이크를 시무룩한 얼굴로 썰었다.
“아줌마가 미리 얘기 잘 해 놓으시기로 했어.”
“그래도.”
“셋이 만나면 내가 너 많이 좋아하고 나는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는 뭐 할 거고 우리 집은 어떻고 이런 거 얘기 하면서…… 허락도 받고 뭐 그러다가 주먹 날아오면 맞지 뭐.”
“안 돼. 그럼 차라리 이번 주말에 아빠 올라오면 그 때 내가 먼저 말해서 맞는 게 나아.”
“남의 집 귀한 자식인데 패기야 하시겠어. 몇 대 맞고 허락해 주는 거면 맞고 말지.”
“난 싫어. 아빠 만나지 마, 하림아.”
“흐음.”
“아빠 안 만나는 거다.”
동규가 재차 물었지만 하림은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계획 수정하자. 너랑 엄마랑 너네 아빠 먼저 만나.”
동규가 걱정하고 있는 부분은 하림도 충분히 생각해 둔 부분이었다. 그 부분은 동규의 엄마와 만났을 때 동규의 엄마가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란 말을 들었다. 아무래도 떨어져 가끔 만나는 아들보단 부부지간인 동규의 엄마가 동규의 아빠를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동규의 엄마를 믿기로 한 거였다.
그런데 동규가 말하는 것도 간과를 할 수 없는 부분이 맞고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만약 하림이 동규의 아빠라면 아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도 아니고, 얘길 듣기도 전에 아들의 남자친구를 먼저 만나는 것에 화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내가 맞고 허락받을게.”
“아니, 동규야. 그게 아니고.”
비장하게 몇 대 맞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동규 때문에 하림은 피식 웃음이 났다.
“아줌마가 옆에서 잘 얘기하고 아저씨도 잘 말려 주신다고 그랬어. 그리고 나는 자신 있거든. 만나기만 하면 허락 받을 자신. 근데 그렇다고 해도 네가 직접 아빠한테 얘기도 없이 나부터 덜컥 만나면 그거 때문에 더 맞을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응. 그러니까 일단 너랑 엄마랑 아빠한테 먼저 얘기해 보고, 거기서는 허락 못 한다고 맞든 욕을 먹든 상관없어. 아줌마가 커버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믿어 보자. 네가 직접 아빠한테 말씀 드린다는 게 중요해.”
“나중에…….”
동규는 하림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하림의 아빠는 마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니까 언젠가 동규가 하림의 부모님을 만나게 된다면 이것보단 좀 낫겠지. 큰 산을 넘고 나면 작은 산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처럼 이번만 어떻게 잘 해보면 하림의 부모님을 만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나도 너네 부모님을 이런, 그, 소개하는 자리로 만나면…….”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왜?”
“우리 집은 엄마가 대장이라 엄마 허락만 받으면 아빠는 그냥 딸려오는 플러스알파라고 보면 돼.”
“그래도…… 되는 거야?”
“우리 아빤 한량이야. 내가 아마 너랑 사귄다고 해도 조금 놀라고 말 걸. 슬렁슬렁 와서 너보고 당구 치자고, ‘동규야 너 당구는 치니?’ 할 수도 있어. 아빠 올해 들어서 갑자기 당구에 빠졌거든. 그래서 나한테 계속 당구 치러 가자고 꼬셔. 애인이랑 노느라 바쁘다고 하니까 삼각함수에 피타고라스의 정의까지 끌어와서는 막 꼬신다? 약간 너랑 비슷한 면도 있어. 잔잔한 물 같아. 이리 흐르고 저리 흐르고.”
“그렇다면 희소식이고. 내일부터 당구 연습할게.”
“도와줄게.”
“당구도 할 줄 알아?”
“아빠랑 조금 하는 정도야.”
“엄청…… 잘 하겠는데.”
“아니야. 진짜 잘 못 해.”
“거짓말.”
동규의 엄마도 하림의 의견에 동의했다. 우선 동규가 직접 아빠에게 얘기를 하는 게 좋겠다며.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밖보다는 집에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삼겹살 5kg을 준비했다. 잠시 뒤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아빠가 고기질이 좋다느니 동규가 만든 비빔냉면 소스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느니 하며 속 편한 소리만 늘어놨다.
엄마는 잘될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눈빛으로 말했지만 동규는 아빠에게 맞고 울지만 말자는 다짐만 천 번째 하는 중이었다. 울면 지는 것 같으니까.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아빠한테 맞으면 많이 아프겠지…….
8시부터 11시까지 방송되는 공중파 3사 주말드라마를 전부 챙겨 본 아빠와 얘기할 타이밍을 살피던 엄마가 드라마가 끝났다고 TV를 끈 아빠를 불렀다. 방에 있던 동규도 거실로 나왔다.
“아빠.”
아빠를 부르는 목소리가 무척 작았다. 어렸을 땐 아빠가 사내 새끼 목소리가 그게 뭐냐고 귀 터지게 불러 보라고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최근까지도 덩치가 아깝다며 아빠가 뭐라 한 적이 있었지만 웬일인지 아빠는 사과만 씹어 먹으며 조용했다.
“나……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데.”
심장이 입으로 튀어 나올 정도로 거세게 뛰었다. 엄마가 아빠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이기에 이렇게도 분위기를 잡는가 싶어 동규의 아빠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늠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 동규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아빠가 상상하는 시나리오는 순박한 아들이 몇 억의 사기를 당했다거나 사람을 때려 죽인 데까지 뻗어나갔다. 아빠가 남은 선수 연금을 일괄로 받아 내면 뺑소니 합의금은 되지 않나 하던 차에 동규에게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이야기는 아빠로선 다소 김이 빠지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충격적이지 않은 건 아니라 묵묵히 동규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동안 올해 1월 1일, 빨간 날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동네 한 바퀴를 뛰고 펼쳐 든 신문에서 읽은 아들의 당선 소감을 떠올렸다. 맹하고 겁도 많고 소심한 제 아들이 그래도 연애하면서 사내 구실은 하고 있는 것 같아 좋아했던 것도.
주변에서 동규가 얼마나 예쁜 사랑을 하고 있길래 신문에 이런 글을 썼냐고 물어봐도 일부러 좋은 티를 숨긴 채 관심 없는 척으로 일관했었다. 유난 떠는 것 같아 아들이 사귀는 친구가 어떤지 제 처에게도 일부러 한 번을 물어보질 않았다. 아주 가끔 아내가 흘리듯 하는 얘기로는 내로라하는 집의 예쁘고 귀한 딸인 것 같아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지.
대신 운동선수는 아니어도 어쨌든 예체능 계열로, 예술가로서 평생을 살아갈 아들의 짝이니 안정적인 직업인 사람이었으면 하고 상상했고 소심하고 물러터진 아들의 성정을 잘 알고 있으니 똑 부러지고 싹싹한 친구이길 바랐다.
제 아들이 어디 내놔도 빠질 인물은 아니었다. 드라마를 볼 때도 남자주인공이 키가 크고 몸이 좋다면 무조건 제 아들로 치환해서 봤고 머릿속에선 혼주석에 아내와 같이 앉아 있거나 아들을 꼭 닮은 손주들을 돌봐주는 것까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첫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질 거란 촌스러운 생각은 하지 않더라도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안정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어릴 때부터 운동하면서 동규 엄마가 큰 힘이었고 그래서 또래 선수들 중에 가장 먼저 결혼을 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이, 그 안정감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너무도 잘 알고는 있지만 그는 아들에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동규의 말이 끝난 뒤엔 곧바로 아내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착하고 좋은 애고 동규에게 잘해 주고 동규도 많이 좋아한다고. 그런 얘기는 그다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어차피 동규가 말한 것과 다른 것도 없었다.
그는 아들이 연애하는 몇 년간 상대가 누군지 자기에게 어떻게 말도 하지 않고 있었냐는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았고, 동규의 엄마는 잠시 눈을 피했다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는 아들 때문에 용기를 내 남편과 눈을 마주했다. 남편의 미간이 아무리 화가 났음을 보여 줬어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 양쪽 스케줄을 알고 있으니까 시간 정해서 보내.”
딱 한마디만 꺼낸 동규의 아빠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는데 쾅 소리가 엄청났다. 오늘은 따로 자자는 뜻이었다. 동규는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잤다. 잠에 들기 전까지는 엄마와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된 이야기는 하림일 수밖에 없었다. 볼이 성한 걸 감사하게 여기자는 엄마가 잠에 들고 나서도 동규는 한참이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야. 너희들 연애사에 지금 어른들 끼어서 좆같은 건 아는데 지금은 우리 셋이 여행 가는 거 짜려고 모인 거거든. 제대로 집중 안 할 거면 씨발 다 그냥 파토 내, 그냥.”
원래 삽질왕인 동규야 그렇다 쳐도 하림까지 기운이 없어 보여 하늘은 열심히 밑줄 치고 있던 펜을 던졌다. 바닥으로 펜이 굴러떨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하림이 펜을 주워 하늘의 손에 다시 쥐여 줬지만 하늘의 기분은 계속 구렸다.
“아, 미안. 근데 우리 아빠가 내 얘기 들으면서 포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쥐었다 풀었다 했던 게 잊히지가 않아. 나 그거로 허벅지에 구멍 나는 줄.”
“그래서 어쩌라고. 이러다 아주 서른 넘어서 여행 가겠다? 아니, 그것도 너무 빠르네. 마흔 넘어서 환갑 때나 셋이 패키지여행 가야겠어.”
“미안해…….”
“진짜 미안. 잘 집중할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셋이서 여행 가자고 말만 하던 걸 두 사람이 귀국하고 나서 하늘이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림이 앞으로도 계속 해외에서 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하림을 보러 동규와 같이 미국으로 놀러갈 순 있어도 졸업을 하게 되면 서로 시간을 맞추는 게 힘들 거다. 다행히 이번 추석이 목요일에, 월요일은 대체 휴일로 지정한다고 발표되면서 연휴가 무려 6일이나 되었다.
“담배 피우고 올 테니까 다시 돌아왔을 땐 제대로 해라. 알았냐.”
하늘은 두 친구가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털 수 있도록 30분 뒤에 자리로 돌아왔다. 하늘이 돌아왔을 땐 동규도 하림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소와 똑같았다. 하늘이 이제야 좀 할 맛이 난다며 커피와 티라미수를 추가로 주문했다.
동규가 비행기 타는 시간이 아깝다며 국내 여행을 하잔 의견을 냈고 하림과 하늘도 동의했다. 그럼 국내 어디로 갈지 온갖 지역이 나오던 중에 하늘이 전국 빵집 순례를 가자며 눈을 반짝였다.
“난 좋아. 하림이 너는?”
“나는…….”
아무리 맛있는 빵도 많이 먹으면 질리는 법인데 5일 내내 빵 먹을 생각을 하니 속이 니글니글 한 것 같다. 하지만 빵순이인 하늘과 빵돌이인 동규가 저렇게나 하림의 대답을, 그것도 긍정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데 다른 의견을 내기가 싫었다.
“나도 좋아.”
“그럼 결정!”
“빵지 순례 내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어. 일단 서울부터 도는 게 좋겠지?”
“낙성대, 아니 거긴 우리 학교 근처라 너무 자주 갔어. 빼. 너네 집 근처에 약수 가면 밤식빵 존나 밤이 무슨 밤식빵 수준이 아니라 식빵밤 수준인 데 있거든.”
“얘들아 잠깐만.”
“연남동이랑 용산이랑 이태원 무조건 들러야 하고 성수! 성수 잊으면 섭하다.”
“망원동, 연희동, 서초동, 성북동도. 압구정도.”
“알지 알지. 아니다. 야 서울은 평소에도 갈 수 있으니까 지방을 위주로 돌자.”
“좋아. 그러면 경상도 갔다가 전라도 들러서…… 아, 전국 팔도를 어떻게 해야 6일 만에 다 갈 수 있지.”
“얘들아 다 좋은데 내 얘기 좀 들어줘.”
“기사님을 한 분 모실까? 택시기사면 지름길이나 빨리 가는 법 이런 거 잘 알 것 같은데.”
“그건 좀…… 불편해.”
“그래 그럼 패애쓰! 그냥 원래대로 우리 셋이서 운전하는 게 제일 좋아. 벌써 재밌다.”
둘만의 빵 세상으로 떠나버린 친구들을 바라보며 하림은 작게 웃다가 말없이 라떼를 마셨다. 그래, 너네 좋을 대로 다 해라. 굳이 빵을 먹지 않아도 저 둘을 따라다니면 즐겁고 재밌을 걸 알았다. 중간중간 하림은 알지도 못하는 빵집 이름을 얘기하며 뭔가 통했는지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엄지를 추켜세우는 게 귀여워 하림은 아예 다리까지 꼬고 편히 앉아 친구들을 감상했다.
언젠가 동규가 하림에게 하트 모양 빵을 구워 주면서 갓 나온 빵 냄새는 노벨평화상감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이제야 그 말이 십분 이해갔다. 빵 하나로도 이렇게나 행복할 수 있는데 노벨평화상이 따로 있나. 이 정도면 차고 넘치는 평화상감이었다.
하림과 하늘은 캠핑카를 렌털했다. 동규까지 셋 중에서 이렇게 커다란 차를 운전해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무슨 패기인 줄은 하림도 하늘도 몰랐다.
심지어 밥은 무조건 식당에서 사 먹고 잠은 무조건 호텔에서 자자고 해 놓고, 오로지 편하게 누워 가고 싶단 이유와 내부 스피커가 빵빵하단 이유로 이번 우정 여행의 차가 캠핑카로 선정된 거였다.
캠핑카라면 자고로 청춘과 낭만적 여행의 상징이라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라면을 끓여 먹고 해가 지면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던가. 동규는 여행이 다 끝나고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캠핑카는 렌털이 아니라 아예 하림이 산 거였다. 엄마에게 주든 아빠에게 주든 아니면 동규네 부모님께 드리든지 간에 어쨌든 렌털은 뭔가 찝찝해 새로 구매를 해 버린 거였으나 동규에게는 굳이 알리지 않았다.
여행 당일. 설레는 마음으로 DSLR, 폴라로이드 카메라, 목베개를 챙겨온 동규는 하림과 하늘이 가져온 마이크와 기타, 미러볼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아닌 척을 했다. 이러려고 일반 자동차가 아니라 넓고 커다란 캠핑카를 골랐나 싶을 정도였다. 탬버린이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동규는 캠핑카에 마지막으로 탑승했다.
“서하림. 여행하는 동안 좆같은 이과 개그 금지야.”
“아 왜. 너도 이과생이잖아.”
“그래서 더 좆같다고.”
“동규야, 세상에서 제일 우스운 학문이 뭐게.”
“우스운?”
“서하림 너 내려. 야 너도 저거 걍 무시해. 내가 싫어하니까 일부러 어디서 이상한 거 주워듣고 와.”
“빨리. 맞춰 봐.”
눈동자를 굴리던 동규가 내놓은 대답은 “치킨학과”였다.
“땡. 정답은 물리학이야.”
“왜?”
“피식이라서.”
“내려, 시발!”
동규만 혼자 이해하지 못하고 혼돈에 빠져 있는데 하늘이 정답풀이를 해 줬다.
“물리학이 영어로 physics야. 악! 야 김동규도 표정 구린거 봐. 야, 서하림보고 하지 말라 해.”
“더 해도 돼?”
하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지만 동규는 끝내 외면했다. 집안 사정으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느라 13년 만에 졸업한다는 선배에게 얻어 낸 이과 개그가 많았다. 전부 하늘을 괴롭힐 심산으로 알아 온 거였는데 동규도 질색을 할 줄은 몰랐다.
동규에게는 빵 사 먹을 돈만 가져오라던 호화로운 우정 여행은 하늘이 요즘 제일 자주 듣는 노래를 부르면서 막이 올랐다.
첫 운전자는 동규였고 하림의 코러스를 따라 동규도 조금씩 어깨춤을 췄다. 하늘이 운전대를 잡았을 때 동규가 수줍게 튼 노래는 동규가 아직 하림을 짝사랑하던 시절 베개를 적시며 귀가 닳도록 들었던 발라드곡이었다.
노래가 재생되자마자 하늘이 탄식을 하며 분위기 깬다고 뭐라고 해 놓고 후렴이 시작됐을 때 마이크를 하나 더 꺼내 자기가 애드리브까지 다 불러 버렸다. 동규는 노래를 끝까진 부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열창하는 하늘에게 박수만 쳤다. 하림은 하늘이 고음에서 삑사리를 낸 걸 언제 녹음했는지 운전하는 하늘의 옆에서 반복 재생을 하며 쪼갰다.
하림과 하늘이 독식하던 마이크가 다시 동규에게 돌아왔다.
“이번에도 발라드 부르면 떨구고 간다.”
뭘 불러야 낙오되지 않을 수 있을지 동규는 두뇌를 풀가동했다.
“10분만 이따가.”
마이크를 다시 잡은 하늘이 80년대 가요를 부르며 흥을 올렸다. 그럴수록 동규는 진땀이 났다. 도대체 저 텐션을 이어 가려면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건지 감도 안 왔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하늘이 브레이크를 밟지 않을 만한 게…….
그러다 문득 지독한 짝사랑 시절 들었던 짝사랑 노래 모음 300곡 중에 그나마 이 타이밍에 살아남을 수 있는 노래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원곡은 동규가 부르기에 너무 높고 상큼해 남자 가수가 리메이크한 버전으로 불러야 하나 싶었는데, 88올림픽 즈음부터 히트한 곡들은 거의 꿰뚫고 있는 하늘이 있다면 원곡으로 시도해 볼 만했다. 옛날 노래라 잘은 몰라도 짝사랑 노래 모음 300곡은 다 유명한 노래들만 담았다고 했으니 하늘도 알 가능성이 컸다.
하늘이 뒤로 넘긴 마이크를 잡은 동규는 비장한 얼굴로 노래를 재생했다.
“미친.”
“알아?”
“김동규 선곡 오졌다. 니가 참 좋아 미친.”
운전 중이던 하늘은 하림이 갖고 있던 마이크를 달라고 몸을 들썩였다. 하림이 갖고 있던 다른 마이크를 받자마자 하늘은 전주부터 박장대소하며 난리가 났다. 동규가 예상했던 대로 하늘이 신나서 노래를 같이 불렀다.
마이크를 동규와 하늘이 갖고 있는 데다가 무슨 노랜지 모르는 하림은 박수만 칠 뿐이었지만 노래를 듣고 있다 보니 가사가 너무 깜찍해 입을 틀어막았다. 동규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하림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하늘이 노래를 부르다 행사장에 온 MC처럼 중간중간 “자, 김동규!”라거나 “김동규 고백 갑니다!”, “초코빛깔 김동규!” 같은 추임새를 넣어 동규가 민망해 죽으려 했다.
노래를 끝냈을 때 하늘은 웃겨 죽는 줄 알았고 동규는 얼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자, 그럼 서하림 답가 가나요! 불러 줘! 불러 줘! 이거만큼 오그라드는 거! 악! 싫은데 존나 재밌어!”
“기타 간다. 난 개사도 할 거야.”
“시발 아 진짜 존나 웃어서 배 아파.”
“차라리 떨궈 주라…….”
몸이 힘들지도 않고 돈은 남아도는 여행이다 보니 전국을 돌아다니는 6일 내내 웃음이 마를 날이 없었다. 왜 진작 셋이서 여행을 오지 않았는지, 마지막 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서 셋이 다 아쉬워 한숨만 푹푹 쉬었다.
“가능하면, 서하림 시간 되면 김동규 생일 전후로 또 놀러가자.”
“알았어. 시간 잘 빼 볼게.”
“스케줄 다 비워라.”
“알았다니까. 바쁘지만 널 위해 시간을 내볼게.”
“즈언하 황송하옵니다.”
동규는 하림과 하늘이 말하는 내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먹고 있는 게 튀어 나갈까 봐 그런 것도 있지만 웃는 걸 숨기려고 그런 게 더 컸다.
저녁 먹고 하늘의 집까지 데려다주는데 괜히 아쉬워 차에서 내려 하늘과 한 번씩 포옹을 하고 나서야 동규와 하림은 한남동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던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동규는 툭하면 여행 갔을 때 찍었던 사진들을 보는 게 하루 일과였다. 성적이야 하림이 과락만 아니면 된다 했고 엄마랑 아빠도 졸업장만 받으라고 그랬다.
모든 강의를 마치고 친구들과 약속한 카페에서 만났다. 친구들은 공부에 열을 올렸으나 동규는 케이크만 집어 먹으며 여행사진에 푹 빠져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데 주안이 10월 연휴에 뭐 하냐고 물었다. 개천절이 화요일이라 월요일도 대체 휴일이 되면서 한 달 만에 또 긴 연휴가 생겼다.
“너네 이번에 계획 세운 거 뭐 있어?”
“아직 확정된 건 없어. 얘기 중.”
“난 집에서 쉬려고. 추석에 돈 너무 써서 돈이 없다.”
“나도. 야, 그러면 다들 할 거 없으면 만나서 보드카페라도 갈래? 영화 보거나.”
동규를 뺀 셋이서 후다닥 약속을 잡았다. 동규는 친구들이 저만 쏙 빼놓고 셋이만 얘기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왜 나는 빼.”
“넌 금수저 애인이랑 놀 거잖아.”
“아직 몰라. 걔 바빠서 그때도 바쁠걸.”
“그럼 너도 껴.”
“그러면…… 잠깐 만나서 노는 거 말고 어디 놀러 가자.”
연휴까지는 코앞이고 굉장히 즉흥적으로 꺼낸 말이었다. 하림, 하늘과 셋이 간 여행이 너무 좋았다. 그뿐이었다. 친구들이 안 된다고 해도 그냥 한 번 꺼내 본 말이었는데 의외로 친구들의 얼굴이 밝아지며 화색이 돌았다.
“근데 나 돈 없어.”
“나도. 어디 놀러 가기엔 좀.”
“연휴 풀로 놀진 말고 1박 2일 정도만 어때?”
“돈이 부담이면 내 카드 쓰는 건…… 어때.”
“블랙카드?”
“응.”
저녁 먹는 동안 여행 경비와 지역을 선택하느라 친구들은 밥도 제대로 먹질 못했다. 동규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어느 곳이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고, 카드 쓰면 되니까 너희가 좋을 대로 하겠다며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서 남매와 했던 여행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첫 번째로 이 여행에서 경비를 내는 건 블랙카드를 갖고 있는 동규라는 점. 동규가 한도가 없는 카드라고 블랙카드의 비밀을 말해 주었지만 친구들은 그런 카드가 어딨냐며 과소비하지 않는 선에서 여행 경비를 정했다.
차도 하림에게 캠핑카 빌리면 되겠다, 잠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동규 카드로 미리 예약하면 되겠다, 식사도 동규 카드로 먹으면 되는 거라 지역을 정하는 데에 시간이 제일 많이 걸렸다.
카페로 자리를 옮겨 한 시간이 넘도록 전주가 좋네 부산이 좋네 경주가 좋네 강원도가 좋네 하며 어디로 여행을 가야 할지 토론을 하느라 시간을 소비하던 중에 시은이 하림에게 슬쩍 메시지를 보냈다. 카드에 정말로 한도가 없는 거냐고.
동규가 처음 저 카드를 들고 왔을 때 했던 말이 애인이 준 카드라고 했었기 때문에 하림에게 반신반의하며 물어본 건데 하림이 [그걸로 요트도 살 수 있어ㅋㅋㅋ]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 메시지를 읽은 시은이 여행지를 제주도로 확정했다. 1박 2일이었던 여행 일정도 긴 연휴를 전부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
코스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시은의 주도 하에 빠르게 정리됐다.
“카드 믿고 질러 봤어. 괜찮지?”
“괜찮아.”
비행기 타고 나서야 동규는 시은에게 이코노미가 아니라 비즈니스로 예매해 달라고 했었어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돈만 모았다 하면 해외로 여행 가는 시은은 하림에게 항공권을 선물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건 선물로 받은 거고 이번에는 직접 카드를 사용하는 거라 남의 돈을 쓰는 느낌이다 보니 당연히 이코노미로 티켓을 결제한 거였다.
하림과 비행기 탈 때는 하림이 알아서 퍼스트만 끊어 놨기 때문에 동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블랙카드 사용자는 요청만 한다면 바로 좌석을 업그레이드해 준다는 사실을 모르는 동규는 커다란 몸을 구긴 채 탑승했다.
대학 친구들과의 여행은 하림, 하늘과 했던 여행에 비하면 조금 어색한 부분도 있고 크게 한 번 싸울 뻔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들도 많았다. 동규가 물주라고 운전에서는 동규를 빼 준 것도 그렇고 야식을 시켜 먹거나 만들어 먹기도 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새벽까지 광란의 화투를 친 것, 생선회나 조개는 물론이고 해삼 멍게 같은 온갖 맛있는 해산물들과 돼지고기를 질릴 정도로 많이 먹은 것까지 온통 재밌었다.
하지만 제일 놀라웠던 일은 따로 있었다. 제주도 와서 친해진 사람들 몇몇과 바닷가에서 조개구이에 술 먹자고 나왔다가 화장실 간다고 슬쩍 빠진 동규는 10분 정도 하림과 전화를 했다. 특이한 것도 없었고 단지 전화 끊을 때 많이 보고 싶다고 한 게 다였다.
친구들이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정신없는 틈을 타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월요일이고 금요일 강의 끝나자마자 바로 제주도로 날아왔으니 금요일 아침에 하림을 본 이후로 벌써 3일째 하림을 보지 못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확실하진 않지만 대충 40시간쯤.
내일 밤에 서울로 올라가지만 남은 시간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해도 거의 다 져 가 어둑어둑해지는 바다를 따라 걸으며 하림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동규의 이름을 불렀다.
하얀 얼굴이 양팔을 붕붕 흔들더니 옆에 있는 계단을 두고 단숨에 뛰어 내려와 동규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동규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믿을 수가 없어 하림이 제 앞에 도착할 때까지 양 볼을 몇 번이나 꼬집었다.
“안녕, 김동규.”
“…….”
“볼 빨개졌으니까 그만 꼬집어.”
어떻게 왔냐는 말도 나오지 않아 얼음처럼 서 있었다.
“보고 싶었어.”
“지, 금 이게…….”
커다랗게 뜬 눈이 아직도 돌아오질 못하자 하림은 동규를 꼬옥 안았다가 한 걸음 떨어졌다.
“진짜야. 하루만 기다리면 김동규가 돌아올 텐데 너무 보고 싶어서 날아왔지 뭐야.”
동규는 순식간에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거렸다.
“내가 김동규 보고 싶었던 만큼 김동규도 나 보고 싶었다고 하고.”
“……사랑해.”
“응? 안 들려.”
“사랑해. 좋아해, 하림아.”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동규는 하림을 껴안고 얼굴을 묻었다. 하림은 목덜미로 동규의 뜨거운 이마를 느꼈다. 나도 사랑해, 하며 속삭여 주자 동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온전히 해가 저물어 깜깜한 어둠이 찾아왔지만 여전히 찬란하고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하림은 말도 안 되는 거란 걸 알면서도 자꾸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생각들이 흘러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뭐 해, 지금.”
“술 마시고 있지.”
근처 술집에서 맥주를 몇 캔 사 와 모래사장에 앉았다. 해가 지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너랑 있으면.”
“응.”
“……신기해.”
“뭐가?”
“그냥. 사랑은 그저 호르몬의 장난이고 심장이 아니라 뇌가 하는 건데도, 신기해.”
“나도 그래. 예술가들이 사랑을 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하잖아.”
“재밌는 거 알려 줄까.”
“뭔데?”
“영어에서 scientist라는 단어가 생긴 게 19세기인데 한 지질학자가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뭐라고 부를까 하다가 artist에서 따와서 scientist라는 단어를 만들었어.”
국문학도로서 영어 단어의 어원을 알게 된 동규는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scientist라는 단어는 소크라테스나 미켈란젤로 때부터 썼을 것 같은데 고작 19세기에 만들어진 것도 신기하고, scientist가 artist에서 따왔다는 게 제일 흥미로웠다.
“과학자를 직업군으로 묶어서 불러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 예술이랑 비슷하다고 본 거야. 과학의 시작도 누군가의 상상에서 시작되잖아.”
“아…….”
“우리 둘이 언어학적으로도 운명이란 얘기지.”
동규가 scientist와 artist를 번갈아 발음해 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동안 하림은 무릎을 끌어안고 동규를 바라보았다.
“저기, 있잖아.”
“응.”
“내가…… 전부터 꽤 오래 곰곰이 생각한 게 있는데.”
뭔지는 몰라도 잘 생각했단 의미로 동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사귈 때 막 자기야 여보야 그런 거…….”
“듣고 싶어?”
“아니, 나는 아니 이거는 듣기 싫다는 게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건데.”
“응. 뭔데 자기야.”
“아니…….”
“우리 자기는 너무 부끄러움이 많아.”
얼굴이 빨개진 동규 때문에 웃음이 터진 하림은 맥주 캔을 가볍게 흔들다 목을 축였다.
“알았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내가 왜 너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걸 제일 좋아하는지, 다른 애칭은 생각나는 게 왜 없는지 그런 걸 생각했었거든.”
“응.”
“나는 너한테 좋은 수식어나 단어를 붙여 주고 싶은데. 예를 들면 엄마가 나한테 복덩이 행복이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근데 그건 너무 안 어울려.”
“그럼 뭐가 어울려?”
동규는 손가락으로 괜히 모래를 팠다. 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햇살.”
“…….”
“태양, 달, 중력, 반짝이는 별, 예쁜 오로라, 생명이 태동하는 넓은 숲, 푸르른 바다, 포근한 품, 청아한 산소, 강인한 나무, 좋은 향기, 맑은 하늘, 영원, 행복……. 아무래도 세상에 존재하는 간질간질하고 달콤한 모든 것들이…… 네 이름에 숨어 있나 봐. 그래서 나는 하림아 하고 이름 부를 때마다 늘 새롭고 좋아.”
동규가 제 이름을 불러 주면 유난히 부드럽게 들리던 이유가 동규는 ‘하림아’ 세 글자에 저 많은 것들을 담아 부르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하림의 귀가 뜨거워질 차례였다.
동규는 부끄러워하는 하림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하림아, 서울에 언제 갈 거야?”
“……언제 갔으면 좋겠는데.”
급하게 온 것 같으니 아무래도 바로 돌아가 봐야 하겠지.
“30분…… 아니, 한 시간 뒤에. 될 수 있다면 두 시간이나 세 시간 정도.”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면…….”
“말해 주는 만큼 있다가 가고. 솔직하게 얘기 안 하면 진짜 한 시간 뒤에 간다.”
그래도 동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점심에 중요한 미팅이 있다던 하림이다. 그래서 오늘은 미팅 준비 때문에 바쁠 거라고 그랬고.
“……언제까지 있을 수 있는데?”
“글쎄. 확실한 건, 너랑 같이 해가 뜨는 걸 볼 수 있단 거야.”
“진짜?”
“진짜.”
“그래도 돼?”
“돼.”
하림은 조금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빈 캔을 동규에게 건네고 새 캔을 땄다.
“고등학생 때 생각난다.”
“언제?”
“너 방학에 미국 갔을 때.”
국제청소년국제포럼 일정이 모두 끝나면 이틀 정도의 파티가 진행되는데 공식 행사가 아니다보니 첫날만 출석 체크하고 인솔 교사와 함께 다들 놀러 다녔다.
하림은 동규와 폰섹스 했던 다음 날 바로 선생님에게 먼저 가 보겠다고 의사를 밝히고 포럼의 공식 행사가 모두 끝난 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원래 오기로 했던 날보다 훨씬 빨리 출발한단 얘기에 동규가 깜짝 놀라 인천 공항으로 달려갔었다.
“아, 그때. 그러네. 오늘이랑 비슷하다. 내가 도착 시간 알려 줬는데도 인천 공항에서 열세 시간을 기다린 누구가 있었지.”
“……갑자기 온다니까 무슨 큰 일 있는 줄 알았지, 난.”
그때 말고도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어디로 사라졌냐는 유주의 전화를 받고 동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림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호텔 잡아 놨고 알아서 저녁 먹겠다고 엉덩이를 털었다.
“두 시간만 기다려.”
“천천히 와.”
낮부터 술을 마신 일행들을 모두 정리한 동규는 엉망진창이 된 친구들을 사진으로 남겨 두고 호텔로 뛰어갔다. 그리웠던 만큼 마음껏 껴안고 키스하고 몸을 섞다가 하림의 비행기 시간을 겨우 맞춰 공항에 도착했다.
오늘 밤이면 다시 만날 건데도 애틋함에 하림의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동규는 조금 훌쩍거렸다. 하림은 이러고 있다간 동규가 정말로 울 것 같아 두 눈을 꼭 감고 몸을 돌렸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택시를 타면서 동규는 하림의 머리를 말려주지 못한 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다. 아침엔 바람이 선선해 몸이 찬 하림은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는 건데…….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여니 엄청난 술 냄새에 질식할 정도였지만 동규는 터덜터덜 제 침대에 누워 소리 없이 울다 잠에 들었다.
오후 늦게 친구들이 일어났고 동규는 땡땡 부은 눈을 비비며 친구들이 해장국으로 어떤 것을 먹을지 예상을 해 봤다. 뭘 먹어도 다 좋아서 기분 좋게 샤워실을 나왔더니, 친구들이 동규의 눈을 보고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단지 하림이 그리워 우느라 눈이 부었던 것일 뿐인데 친구들은 동규가 밤새 자기들 때문에 고생한 줄로만 알았다. 덕분에 친구들은 종일 동규의 심부름꾼을 자처했고 동규는 무척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좌석은 하림이 알려 준 팁으로 비즈니스로 바꿔 탔다. 김포 공항에 도착한 친구들은 내일 수업이 있다며 빠르게 흩어졌고 동규는 저를 기다리고 있을 하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림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전화로 다 하지 못했던 제주도 여행 얘길 했다. 특히 화투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해 주니 하늘이 좋아하겠다고 해 둘 다 웃음이 터졌다. 세 사람의 여행에서 동규가 화투를 너무 못해 하늘에게 구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재미로 시작한 화투는 하림과 하늘 두 사람이 펼치는 고도의 두뇌 게임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하림은 S대 지니어스 우승자의 자존심을 걸었고 하늘은 S대 비공식 타짜의 자존심을 걸어 아주 살벌했다.
여행하는 동안 유주와 시은에게 빌려준 폴라로이드 사진들도 하림에게 보여 줬다. 집에 와서는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보여 줬고 친구들이 휴대폰으로 찍어 놓은 동영상들도 같이 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마찬가지로, 제주도 여행에서 찍은 수백 장의 사진들 역시 동규가 자주 꺼내 보는 사진들이 되었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은 꼭 지나치게 빨리 왔다. 인천에서 아빠가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하림이 동규의 부모님과 만나는 날은 주말이었다. 그 말은 동규가 주말이라 엄마 집에서 지낸다는 뜻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림의 집에 달려가서 종일 하림과 부둥켜안고 불안함을 달래다가 약속 시간이 되면 하림을 보내 주겠다는 동규를 하림이 반대했다. 이런 날일수록 동규가 부모님과 같이 있는 게 좋다는 입장이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지만 동규는 하림이 말을 따르기로 했다.
하림은 집에 오지 말라는 말에 풀이 죽은 동규에게 토요일에 일어나면 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아빠 앞에 한 번씩 알짱거리라는 숙제를 줬다. 동규는 그것도 마뜩잖았지만 하림의 말을 들어 손해 볼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가끔 방문을 열고 나와 물을 마시거나 짜 먹는 요거트를 가지러 나오거나 귤을 까 먹거나 괜히 TV 채널을 돌리거나 하는 의미 없는 행동들을 했다. 아빠는 여전히 말이 없이 굳은 얼굴이었고 엄마만 정신 사납다며 동규에게 뭐라 했다.
약속시간을 앞두고 부모님이 나갈 채비를 하자 동규가 신발장 앞을 서성였다. 엄마는 동규를 꼭 안아 주었고 동규는 “잘 다녀오세요”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하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빠 나갔어. 출발했어?”
-이미 도착했어.
“아…….”
-빨리 잘했다고 해 줘.
“잘했어.”
-불안해하지 마. 나 믿지.
“응.”
-난 별로 긴장 안 돼.
물론 반쯤은 동규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나머지 반은 정말로 괜찮았고.
“역시…… 대단해.”
-뭐 별건가. 잘할 자신 있다니까. 10분만 전화하고 끊자.
“으응…….”
-한숨은 쉬지 말고.
“알았어…….”
전화를 끊고 15분 뒤에 하림에게서 부모님 도착하셨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리고 동규는 1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옥에 다녀왔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에서 소리가 나는 순간 누군지 확인도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빠다.
“……네.”
-집 근처 사거리 곱창집 알지.
“네.”
-좀 나와라. 거기서 보자. 엄마는 없이 아빠랑 둘이 얘기할 거야.
“네…….”
엄마는 보고 나가야 가는 길에 기절하지 않을 것 같아 엄마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동안 하림과 전화를 했다. 분위기 좋았고 괜찮았고 맞지도 않았고 잘 될 것 같다며 하림이 좋은 얘기만 잔뜩 해 줬다.
엄마 얘기도 들어 봐야 안심이 될 듯한 동규는 하림에게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놓았다. 못 믿어서 미안해.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라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지만 하림은 동규의 목소리를 캐치하고 괜찮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빠랑 잘 얘기하고 이따 전화하자는 하림의 전화가 끝나고 얼마 뒤 엄마가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아빠도 별말이 없었고 무엇보다 하림이 맞지 않았다고 말해 주어서 동규는 다리가 다 풀리는 듯했다. 아빠에게 이제 나간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집을 나섰다.
일부러 빙빙 돌아 온 곱창집에 도착했지만 동규는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아빠가 커다란 동규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줄은 모르고, 동규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밤이라 동규의 한숨이 하얀 입김으로 부서졌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 보내면 더 못나 보이겠지. 들어가야 하는데……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 만약 하림이 옆에 있었다면 무슨 말을 해 줬을까. 등을 가볍게 밀어주면서 잘 얘기하고 오라고, 실수하면 같이 해결하자고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동규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왔어, 요.”
아빠에게 반말을 쓰지만 왜인지 지금은 존댓말을 써야만 할 것 같다.
“늦었다.”
“죄송합니다.”
“맥주 한 잔만 받아라.”
“응. 아니, 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것 가지고도 아빠가 잔소리를 한 이후로는 아빠와 이렇게 술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스무 살 때 일이니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아빠가 동규의 맥주잔에 술을 따랐다. 동규도 아빠에게 두 손으로 소주를 따라 드렸다.
만약 아빠가 또 덩칫값 못하고 술도 제대로 못 마신다며 뭐라고 하면 무리해서라도 주량을 넘겨야겠지. 술 많이 마시면 눈물부터 나오는데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우는 건 아빠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었다. 남자애가 눈물 많다고 혼난 적은 많았어도 술 못 마신다고 호통을 친 적은 없어, 아빠가 소주 한 잔을 모두 들이켜는 것과 반대로 동규는 고개를 돌려 맥주를 조금만 홀짝거렸다. 아빠의 한숨 소리가 들려 동규는 화들짝 놀라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아빠를 바라볼 자신이 없다. 분위기 나쁘지 않았다면서. 하림이도 엄마도 다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지.
초벌로 구워 나와 바로 먹어도 되는 양념곱창에 동규는 손도 대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 정도는 순식간에 먹어 버리고 2인분을 더 시키고도 남았을 텐데 입맛이 없다. 아빠는 잔뜩 수그리고 있는 동규를 보다 혼자 술을 따라 두 잔을 더 마셨다.
아빠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서워서 고개도 들지 못하겠는데 하림은 아빠와 장장 두 시간을 넘게 얘기했다는 게 생각나 동규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는 손도 주먹을 꾹 쥐었다.
하림이 두 시간을 힘내 줬다면 저도 그 반의반이라도 뭔가를 해야 했다. 아빠는 늘 카리스마 있고 목소리도 크고 고집도 센 데다가 가끔 화를 내면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얘기를 잘 해 본다면 아빠도 제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고 동규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아빠.”
“좋은 애더라.”
“…….”
“남자답고.”
분명 놀랍고 감동적인 순간이 맞긴 한데, 아빠의 첫 마디가 하림의 칭찬이라 동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입을 가렸다.
“능력도 좋고 당당하고 배포도 있고 야망도 크고.”
광대가 눈치도 없이 씰룩거렸다. 한 손으로는 모자라 두 손으로 눈 아래를 전부 가린 동규는 아빠의 말에 맞장구를 쳐야 할지 아니면 겸손을 떨어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가렸던 손을 내리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아직 겁먹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의 한 글자가 다였다.
“네…….”
“귀한 집 자식인 건 아빠도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엄마한테 많이 들어서. 전에 두 번인가 본 적도 있잖아.”
“맞아.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몇 번 봤었어.”
“아빠는 솔직히 말하자면, 일단 먹으면서 얘기하자. 타겠다.”
“응.”
수십 번은 먹었을 이 집 양념곱창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질기고 퍽퍽한 건지. 아빠는 잘 먹는 걸 보면 기분 탓인 게 분명하지만 목이 막혀 곱창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질 않았다. 껌이라도 되는 양 하나를 계속 우물거렸다. 자다가도 엄마가 이 집 곱창 포장해 왔단 소리면 눈도 뜨지 않고 일어나던 지난날들이 다 꿈만 같다.
“운동과는.”
담담한 말투로 시작되는 얘기는 아빠의 얘기였다. 동규는 아빠가 당연히 하림이나 제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얼떨떨한 채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연 없는 집에서 우량아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친구들 때리면 안 된다고 유도 도장 다닌 걸 시작으로 아빠는 평생을 운동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게 딱 적성에 맞아서 신동 소리도 듣고 코치님 감독님이 다 찾아와서 요즘 우리 애들이 말하는 체육 엘리트 코스도 밟았고. 다른 거 생각 않고 우직하게 운동만 했더니 세계선수권도 1위 해 보고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걸어 보고. 아빠도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응. 나도.”
“아빠가 보기엔 너도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었는데 아깝고…… 아니다. 이건 끝난 얘기니 말자.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동규야 술 좀 따라 봐라. 마시진 않아도 아빠가 자작을 하게 두면 안 되지.”
“응. 미안.”
아빠는 또 원샷을 했다. 동규는 아빠 눈치를 보다가 저도 한 입 마셔야 하나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데 아빠가 마시기 싫으면 마시지 말라며 동규의 잔을 가져가 버렸다.
“잘 못 마시는 거지 싫어하는 건 아니야.”
“얼씨구. 그래?”
“……다시 줘. 한 잔은 괜찮아.”
“아빠가 태릉에 있을 때 거 있는 선수들 중에서 술 제일 많이 마신 걸로 금메달 딴 걸 네가 알아야 할 텐데.”
“알아. 아빠 그 얘기 살면서 천 번은 했어.”
“그랬나?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뭐래. 어이가 없어 혼잣말로 수군거린 걸 아빠가 듣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귀여운 아들 쌈 싸 준다며 상추 두 장에 곱창을 한 주먹을 담아 동규에게 먹였다.
“아빠 생각에는 동규도 공부를 좀 안 해서 그렇지 그거 빼고는 모자란 구석이 하나도 없고 어디 내놔도 꿀릴 거 하나 없는데, 그 친구가 그냥…… 아빠 개인적인 생각이야. 지금이야 젊고 어리니까 좋다고 만난다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사람 일 하나도 모르는 건데, 그냥 아빠 생각은 그렇다. 마음이나 시간이라는 게.”
동규의 아빠가 하림에게 들은 얘기는 많았고 그중에는 미래를 확실하게 약속하는 말도 있었지만, 그의 입장에선 어린애가 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말이야 뭔들 못할까.
“지금이야 좋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고 우리 둘이 천년의 사랑이고. 그냥…… 우리 아들이, 아빠 눈에는 제일 잘나 보이는데 그 친구도 지금은 널 그렇게 보겠지만 연애라는 게 하다 보면 마음이 식기도 하고 싸우면 헤어지기도 하는 거고. 아빠도 알아. 그 친구 착하고 괜찮은 애인 거. 너희 둘이 나빠서 헤어진다는 게 아니라, 만난, 사귄 지 햇수로 몇 년이랬나.”
“5년.”
“5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심지어 교제를 한 게 5년이지 알고 지낸 시간은 그거보다 훨씬 길었다. 서울로 이사 왔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했으니 제 아들 23년 인생의 절반이 훨씬 넘도록 그 친구가 있는 셈이었다. 동규의 아빠가 동규의 엄마를 처음 만난 시기도 비슷했다. 열 살 언저리.
“미안하다. 아빠가 너처럼 글을 잘 쓰질 못해서 말이 정리가 안 된다, 동규야.”
“괜찮아.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이해 잘 되고 있어.”
동규의 대답을 듣고도 아빠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한참 동안 말없이 술만 마셨다. 혹시라도 단어 하나 실수해서 아들에게 상처를 줄 것도 걱정이었고, 동규도 상대방도 성인이기 때문에 단순히 반대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말을 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대형 의료재단이 몇 년 전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한국청소년유도연맹과 의료 협정을 맺어 연맹에 소속되어 있는 학생들의 몸 관리를 케어하고 있는데, 하림이 바로 그 재단 장손이라는 것도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하림의 할아버지가 병원장이라고만 알고 있던 동규의 엄마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성장하는 청소년 선수들에게 태릉급의 의료, 재활 시스템을 거의 무료로 받는 파격적인 협정이라 이쪽에서는 꽤나 화제가 됐었다. 오죽하면 뉴스까지 나왔을까. 보통 귀한 집 자식이 아니었다.
하림은 자신이 좋아하는 동규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동규의 부모님께도 감사하고 힘이 되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성격상 돌려 말하는 건 못하니 불쾌해도 질문 하나만 하자. 설마, 네 할아버지가 다른 협회도 많은데 우리 연맹을 선택한 건 네 입김이냐?’
돌직구로 물어보는 말에 하림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마찬가지로 거짓 없이 답했다.
‘네. 제가 유도연맹 적극적으로 밀었어요. 저는 정말로 아저씨를 존경한다니까요. 한국 유도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초장부터 이렇게 까고 나니 그 뒤는 오히려 얘기하기 편했다. 시원하게 인정한 모습부터 그는 하림이 마음에 들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나이만 어리지 만만찮은 내공이 느껴지는 하림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끝까지 날을 세웠다. 웃긴 건 하림이 그마저도 읽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단 거였다.
예의 바르고 싹싹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제 앞에서 기죽지 않는 태도가 다시 생각해도 아주 괜찮았다. 물러 터진 제 아들 끼고 살 거면 이 정도는 돼야지.
“그 친구 부모님은 허락했다는데……. 동규 너도 그 친구네 집이 어떤지 알아?”
“잘은 몰라. 내가 안 물어봐서 걔가 얘기해 준 적 없어. 근데 부모님 다 의사고 외할아버지가 엄청난 분이라는 것만.”
“내가 그 친구 아빠였으면 허락을 못 했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보면 아빠가 무슨 생각이 드냐면. 아니, 우리 동규가 뭐가 어때서. 허락을 못 해 줄 건 또 뭐냐? 이런 생각이 든다. 아빠 마음이라는 게 그래. 아빠는 그 친구가 대통령 아들이래도 성에 안 차. 안 차는데, 애는 또 마음에 들어. 싹싹하니 말도 예쁘게 잘 하고 몸도 멘탈도 건강해 보이고.”
“맞아.”
“맞긴 뭐가 맞아? 그냥 듣고만 있어.”
그 뒤로도 계속 아빠는 앞뒤가 맞지 않는 복잡한 마음들을 얘기했다. 어른들은 그런 것까지 다 걱정하고 생각하는 건가 싶어 동규도 머리가 아파 왔다. 혼자 소주 두 병을 다 비운 아빠가 새로 한 병을 더 주문했다. 동규는 문득 아빠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빠, 걔 술 진짜 잘 마셔.”
“……그래? 아까 그런 말은 없던데.”
“장난 아니야. 걔 네 병까진 마신 걸로 치지도 않아.”
아닌 척 하면서도 눈썹 한쪽이 씰룩이는 게 아빠가 굉장한 흥미를 느끼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동규는 신이 나서 말이 빨라졌다.
“맥주는 10,000cc를 먹어도 멀쩡해. 살면서 맥주를 마시고 취한 역사가 없어. 와인도 무슨 집에 거의 와인 냉장고가 김치냉장고 급으로 커. 양주도 나라별로 다 있어. 그거 말고도 전국에 유명한 술 있지. 무슨 종갓집 그런 데에서 만드는 전통술. 그런 거는 도수가 좀 높잖아. 선물 많이 받는데 없어서 못 마셔. 잘 마시는 것도 잘 마시는 건데 술 자체를 좋아해.”
“누구랑은 천지 차이구만.”
“그러니까. 그리고 또, 걔네 학교에서 걔보다 잘 마시는 학생이 없대. 체교과 애들도 다 진대.”
“나 참. 요즘 운동하는 애들도 다 글러 먹었어. 체육인이란 이름이 아깝다.”
“그치. 아무튼, 아까는 편한 자리는 아니라서 말을 안 했나봐. 나중에 한 번 셋이서 술 마시자. 아. 걔 내년에 대학원 때문에 미국 가는데 그 전에.”
“아까 들었다.”
“어…… 그럼 다음 달에 내 생일 있으니까. 근데 그때는 너무 연말이고 아빠 바쁠 것 같아서 담주나 다담주 정도가 좋을 것 같은데 아빠 괜찮아?”
“뭐,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에는 쐐기를 박을 게 필요하다. 어떻게 얘기해야 아빠를 확실히 도발할 수 있을지 머리를 빠르게 굴린 동규는 곱창만 집어 먹고 있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능글맞게 얘길 해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까. 일단 목부터 풀기 위해 기침을 작게 두 번 했다.
“……아빠.”
“응.”
“걔가…… 아빠보다 더 잘 마실지도 몰라.”
“뭐라고.”
“그래도 나이가 있잖아.”
“언제가 좋다고?”
“다음 주나 다다음 주! 12월 첫째 주 주말이나 둘째 주 주말.”
“마셔. 어린 게 깡으로 오기로 버티나 본데 어디 얼마나 잘 마시는지 보자.”
아빠가 생각이 많고 세심한 성격이었다면 절대로 먹히지 않을 작전이었지만 운동하는 마초남이라 다행이다.
어쩌다 보니 아빠에게서 엄마와의 연애 시절까지 듣느라 12시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직원이 빈 술병을 치울 때마다 아빠가 손사래를 치며 한 줄로 세워 놨는데 동규는 그걸 보고 약간 위기감을 느꼈다. 괜히 도발했나. 이거 완전 자긴 이만큼 마시고도 괜찮다고 보란 듯이 보여 준 거나 다름없었다. 젊은 간이 연륜에 지는 건 아닐까. 집으로 가는 길을 멀쩡하게 걸어가는 아빠의 옆에서 동규는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빠와 집으로 돌아온 동규는 빛의 속도로 씻고 나와 밤새 하림과 전화를 했다. 하림은 하림대로 불이 붙어 실력 발휘를 해 보겠다며 허세를 부렸다.
둘 다 전화하다 아침 해가 뜨고 나서 잠에 들었고, 2주 뒤 성사된 술자리에선 사뭇 비장함이 감돌았다.
“동규 넌 오늘 아빠가 봐줄 테니까 깍두기 해. 콜라나 시켜.”
그 말에 동규도 자존심에 금이 가 맥주를 한 병 시켰다.
“……아예 못 먹는 건 아니야.”
“오늘은 제가 쏘는 거니까 아저씨가 소 한 마리, 김동규가 소 한 마리 해서 오늘 두 마리의 소가 사라지는 걸까요?”
“그렇지.”
안주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술 배는 따로 있으니, 새파랗게 어린애 정도는 가뿐하게 이길 수 있다는 숨겨진 말을 하림은 알아들었지만 동규는 조금도 읽지 못했다.
“소 두 마리까진 안 될걸. 그치, 아빠.”
동규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동규의 아빠는 하림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술잔이 채워진 그가 하림에게도 술을 따라 줬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자부심 중 하나가 술에 대한 자부심이라 생각하는 하림은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면 먼저 나서서 잘 마신다고 자랑을 하거나 잘난 척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적당히 부려야 저 마초답기 그지없는 어른이 자길 귀엽게 봐주실 거란 예감이 딱 들었다. 초반이야 가볍게 생각하고 귀엽게 봐주시더라도 뒤로 갈수록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였다.
그럼 그 때부터 진짜 시작이다. 적당히 즐기면서 마시는 게 제일 좋지 이렇게 무식하게 들이붓는 건 하림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하림 역시 점수를 따는 게 중요했다.
날고 기는 사람 위에 즐기는 사람이 있고 즐기는 사람을 이기는 건 간절한 사람이라 했던가. 셋 중에 제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술을 즐기는 데다 김동규란 사람이 간절하기까지 한 하림이었다.
하림은 동규의 아빠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술잔도 자꾸 쓰러트리기 시작하자 여유롭게 인증샷을 남겼다. 토끼, 곰, 사자 등 귀여운 필터를 씌워 찍은 사진 다섯 장엔 하림의 얼굴은 구석에 자리했고 커다란 덩치 둘이 엎어진 게 빼도 박도 못하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