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4 39화 (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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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새끼길래 하림을 좋다고 따라다니는 건지 괘씸해 동규는 밤낮으로 화가 치밀어 속이 답답했다. 하림과 같이 있을 땐 아닌 척했지만 자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시간이 흘러 그 새끼를 만나게 될 테지만 그 새끼 얘기가 저에게까지 흘러왔다는 자체가 동규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본래 하림이라면 알아서 혼자 처리하고 저에게는 그런 새끼가 존재했었는지조차 모르게 했을 텐데, 그런 하림의 선에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짜증 났지만 게다가 같은 학교 안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도움을 요청한 건지 싶어 잠도 오지 않았다.

“김동규! 뭐 해?”

누웠다 앉았다 일어났다 다시 누웠다 하길 여러 번. 물이라도 마시자 하고 나온 동규는 생각이 많아져 식탁에 앉아 있다가 화장실 가려고 일어난 엄마와 마주쳤다. 화장실 불 켜는 순간 나타난 동규 때문에 엄마도 놀랐고 놀란 엄마를 본 동규도 깜짝 놀랐다.

“그냥 물 마시러…….”

“불도 안 켜고?”

“안방에 불 들어갈까 봐…….”

“엄마 너무 놀라서 잠이 다 깼다.”

의도치 않게 엄마를 놀래킨 동규는 사과의 뜻으로 포옹을 한 뒤 방으로 돌아왔다. 물도 마셨으니 이제 진짜 자자.

“…….”

하지만 놀란 가슴 때문일까, 동규는 잠이 오지 않아 눈이 초롱초롱했다.

“아이씨.”

답답한 속을 대신해 이불을 빵빵 찼다. 제 풀에 지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밤은 너무 밝아 천장은 까만색이 아니라 짙은 회색빛이었다. 이제는 제 집보다 더 익숙한 하림의 집은 늘 암막 커튼을 쓰기 때문에 오히려 천장이 보이고 방 안 실루엣이 보이는 게 어색했다.

동규는 발길질에 침대 아래로 흘러 내려갔던 이불을 끌어왔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올려 덮었다. 배만 덮고 자는 여름 이불이라 길이가 짧아 얼굴을 가리니 가슴 아래로 속옷만 한 장만 입은 몸이 죄다 드러났다.

이불의 도움으로 시야가 깜깜해진 동규는 눈을 가만히 깜빡이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 코가 시큰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같은 학교에 갔어야 했어……. 하림이도 서하늘도 물리치지 못할 정도라니…….

소리를 죽여 울던 동규는 벌떡 일어나 하늘에게 SOS를 쳤다. 아침에 하늘의 전화를 받으며 학교 준비를 하던 동규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섭섭한 마음은 덤이었고.

-미안미안! 서하림이 너 걱정한다고 얘기하지 말라 그랬어.

“너 내 친구라며. 나랑 평생을 짱친으로 지내자고 약속까지 했으면서…… 배신이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잖아.

“……너무해.”

누나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고 동규가 툴툴거리는 걸 들은 하늘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미안하니까 내가 사과의 뜻으로 예쁘게 꾸며 줄게. 세수나 하고 기다려.

“세수? 옷은?”

-진짜 세수만 하라는 뜻이 아니라 걍 아무것도 하지 말고 대충 있으라고.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다음 주에 시간 정해서 알려 줄게.

하늘이 뭘 해 준다는 건지 정확히는 몰라도 저 한 마디에 든든한 빽을 얻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동규는 복잡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해소되어 뜬눈으로 지새우던 밤이 깔끔히 사라졌다.

결전의 날. 하늘은 오전 강의만 있었고 동규도 1시 30분에 강의가 다 끝났기 때문에 하늘이 동규를 데리러 왔다. 동규 친구들이 하늘을 보고 고개를 꾸벅했다. 하늘도 똑같이 인사를 해 주었다. 작년 그 소문이 났을 때 보고 처음 만난 거였다.

“김동규가 여자였으면 하림이한테 시집가면 딱인데.”

동규를 태우고 떠난 차의 엠블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주안이 한마디 했다. 유주와 시은은 주안을 잠시 째려보았다.

“왜, 뭐. 내가 틀린 말 했냐? 서하림은 걔네 집만 잘 사는 게 아니라 친척도, 온 집안이 다 잘 살잖아. 서하림도 재벌 3세급인데 김동순이 그 집으로 시집가면 인생 역전 아님?”

“김동규 약혼자한테 일러야지.”

“너네 김동규 약혼자 누군지 알아? 서하림 사촌은 아니라며.”

“우리도 몰라. 그냥 뻥쳐 본 거.”

“뭐야, 뭔데, 누군데. 야! 말해 줘, 누군데! 같이 가! 너네 아는 거지! 너네 나 따돌리냐? 야! 나도 알려 줘!”

주안이 친구들에게서 동규의 약혼자를 정말 모른다는 얘기를 삼십 번째 듣고 동규가 자기한테만 말해 주지 않았다는 의심을 거두는 동안 하늘은 동규와 하림의 집에 들렀다.

하림의 드레스 룸에서 동규가 입을 옷과 시계, 신발을 골라 주고, 그다음은 압구정으로 넘어가 예약해 둔 샵에 들렀다. 하늘은 동규의 머리를 담당한 실장님 옆에서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무슨 연예인 머리가 잘 어울리겠네 아니네 어떤 아이돌 머리가 잘 어울리겠네 저쩌네 하며 엄청 닦달했다. 실장님이 남자친구도 아니라면서 왜 이렇게 자길 괴롭히느냐고 곡소리를 낼 정도였다.

머리에 얼굴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동규를 보고 하늘이 흡족한 미소로 박수를 쳤다.

“야, 서하림한테 사진 찍어 보낼 거니까 잘 좀 서 봐.”

“연예인 된 것 같다.”

“비주얼은 맞지.”

“……사진 잘 찍어 줘.”

“캬, 오늘은 서하림도 네 옆에 서면 좀 딸리겠다.”

“그 정도…… 아니야.”

“쫌! 자신감! 좀! 가져! 오늘은 라이벌 물리치러 가는 건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 제일 잘났다 세뇌라도 해.”

하늘이 동규의 사진을 몇 장 찍어 하림에게 보냈다. 동규가 하늘의 옆자리에 앉아 하늘이 미리 받아 놓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좋은 곳이라 원두도 좋은 걸 쓰는지 맛이 괜찮았다.

“근데 시발, 너 보면 진짜 비웃음 나올걸. 솔직히 너 자고 일어나서 씻지도 않고 가도 그 새끼한테 이길 수 있어. 라이벌이라 하기엔 내 자존심도 상해. 걘 진짜 뭔 자신감으로 서하림한테 들이대지? 내가 한 번 다른 사람들 있는 앞에서 개쪽도 줬는데 포기를 못 하더라. 남자 새끼들 왜 그래? 못생긴 새끼들이 꼭 더 그러더라.”

“나도 몰라.”

“하긴 너는 그런 새끼들 마음을 평생 이해 못 하겠네. 서하림한테 답장 왔는데 볼래.”

“응.”

[우리 학교 정문 앞에서 김동규가 내 남자친구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라고 전해줘〉

〈ㅇ]

“그렇대.”

“응.”

하림의 메시지에 하늘이 딸랑 이응 하나만 보낸 게 신경 쓰인 동규는 용기 내어 물었다.

“나도 답장 보내도 돼?”

“하트 보낼 거면 네 거로 해.”

“응…….”

정확히 찔린 동규는 하늘의 휴대폰을 반납하고 아메리카노만 쭉쭉 빨아 마셨다.

“이따가 허강현 만나면 너는 그냥 딴 거 하지 말고 정색하고 걔를 위아래로 한 번만 훑어. 절대 웃어주면 안 돼.”

“안 웃어.”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면 걔 또 지한테 관심 있어서 웃어 준 줄 알아.”

“설마.”

“걔는 무슨 남자 애들이 메시지 답장만 해 줘도 그린라이트라는 새끼임. 그러니까 하림이가 인사 몇 번 해 줬다고 그 지랄이지. 으, 시발.”

하늘은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별생각 없이 강현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걔는 하필 수학과라 하림과 같은 수업을 듣는다는 둥, 둘이 작년에 조별 과제하면서 허강현의 스토킹이 시작됐다는 둥, 하늘도 그 새끼 때문에 골치를 꽤나 썩었다는 둥. 정말로 별 생각 없이 꺼낸 데다 하늘의 신경은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규가 유리컵을 한 손으로 깨트릴 기세인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야, 그러다 사람 하나 쳐 죽이겠다.”

아무리 놀리고 깐족대도 화낸 적이 한 번 없던 동규의 낯선 모습에 하늘이 반쯤 장난으로 한 마딜 건넸지만 동규는 조용히 있다가 남아 있던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셨다.

“안 해.”

시간을 두고 나온 동규의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였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한다 이거지. 하늘은 강현이 피떡 된 상상을 해 봤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얼굴 딱 좋아. 가서, 걔 보고 이렇게 험악한 얼굴 해. 효과 존나 좋을 거라 장담함. 걘 너 보고 무서워서 오금이 저릴걸.”

얼굴을 풀지 않는 동규 앞에 선 하늘은 이제 그만 학교로 가자며 동규를 일으켜 세웠다. 학교 가는 동안에는 동규가 좋아하는 하림의 얘기로 기분을 풀어 줬다. 내용은 주로 하림을 까는 뒷담화였지만 동규는 그것도 좋다고 헤실헤실 웃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 하림이 끝나길 기다리며 하늘과 수다를 떨었다. 이러고 둘이 놀고 있으니 하늘과 같은 반이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동규는 신기했다. 하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야 지금 우리 약간 고2 때 느낌.” 하고 추억 팔이에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저 멀리서 사람들 소리가 났다. 어딜 가든 사람들을 끌고 다니는 하림이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와, 서하림도 오늘 작정하고 예쁘게 하고 왔네. 야, 쟤야. 일행 아닌 것처럼 하고 들어온 쟤.”

하늘이 말한 대로 하림을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학생은 볼품없었다. 나름 열심히 꾸민 것 같은데 패션이나 미용 쪽으로는 잘 모르는 동규가 봐도 좀, 그랬다. 하늘이 옆에서 원래 안경 쓰던 새낀데 하림에게 고백했다 차인 이후로는 렌즈를 끼고 열심히 꾸미기 시작했다고 알려 줬다.

“……그런 건 얘기 안 해 줘도 돼.”

“궁금해할 것 같아서.”

“안 궁금한데.”

“김동규!”

마침 그때 하림이 동규의 이름을 불렀다. 동규가 하림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제 쪽으로 시선을 돌려 굉장히 부끄러웠지만 아닌 척하기 위해 애썼다.

“어떠냐. 내 작품이.”

“퍼펙트입니다. 역시 배우신 분은 달라요.”

하늘이 머리를 귀 뒤로 새침하게 넘겼다.

“뭐 마셔야지. 내가 사 줄까.”

동규가 하림에게 받은 카드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에 동규의 양옆에 앉은 하림과 하늘이 동규를 붙잡았다.

“기다리면 와.”

카운터 가서 직접 주문해야 하는 카페인데 뭐가 온다는 건지 동규는 하림과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뭐가 오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저, 하림아.”

하늘은 입 모양으로 욕을 하며 앞만 바라보았다. 창가 자리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카페 쪽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게 보였다. 하늘은 아는 사람을 발견하면 손을 흔들었다.

“이거. 너 좋아하는 라떼.”

“내가 사 먹을게. 나도 돈 있어.”

“아는데…… 사 주고 싶어서.”

“너 먹어.”

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빠르게 걸어갔다.

“야, 허강현.”

강현이 하림을 따라가려다가 제 이름을 부르는 하늘의 목소리에 우뚝 섰다.

“……아, 씨. 왜.”

동규는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하늘이 조언했던 대로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정말로 이렇게 하기만 해도 효과가 있나 의심스러웠지만 하늘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별로 없었으니 일단 해 보는 거였다. 그리고 하늘의 조언이 없었어도 동규는 본능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숨길 생각도 없었다.

몇 번 해야 하는 거지. 동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강현은 노골적으로 저를 훑는 시선에 눈동자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서하림에게 커피 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말도 못하게 핫한 남자였다. 팔뚝이며 어깨며 피부까지, 강현은 짧은 순간 본 남자의 몸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서하늘 쟤는 무슨 복이 있길래 서하림 말고도 어디서 또 이런 잘생긴 오빠를 데려와 자랑을 해? 강현은 아주 잠깐 하늘을 째려봤다가 아닌 척 눈동자를 돌리고 입술만 짓이겼다. 저런 핫가이가 자길 위아래로 훑어본 걸 어떻게 오해하고 싶어도 조금의 오해도 할 수 없게 무서운 얼굴인 게 아쉬웠다.

“인사해. 내 친구이자 서하림 친구인 김동규. 셋이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야.”

“아, 어.”

“악수라도 해 볼래?”

“어? 어어. 좋아요.”

“그건 내가 싫은데.”

라떼를 사 온 하림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강현도 하림과 엮여 나름 유명 인사라면 유명 인사여서, 창밖으로 지나가던 학생들이 하림과 강현이 맞붙은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둘 모였다. 그 와중에 하늘의 친구가 있어 하늘은 친구들로부터 메시지를 엄청나게 받았고 신이 난 하늘이 내부 현장 중계를 열심히 해 주었다.

“김동규야. 여기 라떼 진짜 맛있는데 한 번 먹어 봐.”

“응.”

사람 세워두고 둘만의 세상으로 빠진 하림이 한 입도 먹지 않은 라떼를 동규에게 건넸다. 동규가 자연스럽게 받아 라떼를 먹어 보고 자긴 역시 아메리카노가 좋다며 하림에게 라떼를 돌려주었다.

“거품 묻었어.”

“어디?”

“윗입술 이 쪽에.”

하림이 제 입술 근처를 짚으며 위치를 알려 줬지만 동규는 자기 입술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하림의 입술만 빤히 보며 가만히 있었다.

“알았어, 닦아 줄게. 근데, 누구 보라고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

“글쎄.”

하늘은 하림이 동규의 입가를 닦아 주는 걸 보면서 속으로 김동규 잘한다를 외쳤다.

액정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굉장히 빨랐다. 저 눈치 없는 놈이 무슨 일이래. 친구들은 하늘에게 허강현이 또 서하림에게 추근덕거리냐고 물어 왔고 하늘은 그렇다며 여론을 주도했다. 안 그래도 하림에게 계속 들이대는 강현의 앞에서 대놓고 더럽다고 욕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하림이 타격 하나 받지 않고 강현을 가볍게 무시하고 있어 망정이지, 만약 하림이 질색을 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일은 더 커졌을지도 몰랐다.

강현은 하림이 손수 동규의 입을 닦아 주고 남이 먹은 커피를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휴지로 입 닦아 주는 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이미 다른 사람이 입을 댄 걸…….

“케이크 맛있어?”

“응. 근데 네가 먹기엔 많이 달 걸.”

“한 입만 줘 봐. 네가 먹는 거 보니까 엄청 맛있어 보여. 서하늘. 뭐가 제일 맛있어 이 중에?”

“나는 초코 덕후라 브라우니 케이크.”

“포크 가져올까?”

“아니. 괜찮아.”

결정타는 동규가 입에 넣고 빨았던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하림에게 먹여 주는 장면이었다. 케이크만 쏙 빼먹어도 놀랄 판에 하림이 남의 침이 묻어 있는 포크를 입에 물고 배시시 웃기까지 했다. 강현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황급히 사라졌다. 그제야 하림이 창밖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해주었다.

“뭐야, 뭔데? 쟤 뭐에 저렇게 얼굴 빨개져서 튄 거야?”

“내가 김동규 포크 써서 그런 것 같은데.”

“아하.”

“이제 퇴치도 했으니 커피를 즐겨 볼까. 아, 유치한 방법이지만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림은 라떼를 반 정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과 동규도 하림을 따라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하림이 사 주는 음식들을 부지런히 받아먹었다. 정작 돈을 쓴 하림은 별로 먹질 않아 하늘이 깔끔 참 더럽게 떤다고 핀잔을 줬다. 하림이 그걸 이제 알았냐고 받아쳤고 하늘은 그래 너 잘났다며 웃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하늘과 헤어졌다. 맥주 캔을 몇 개 사 와 공연장 제일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규는 음료수만 마셨을 뿐인데 분위기에 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디 가수의 몽환적인 노래도 좋았고 유쾌한 제 친구의 이야기도, 하림과 슬쩍 닿은 손가락과 살랑이며 불어오는 봄바람까지 모두 딱 좋았다.

“일어나자.”

“벌써 집에 가?”

“아니. 같이 갈 데 있어.”

하림의 손을 잡고 일어난 동규는 하림과 나란히 서서 걸었다. 걸을 때마다 스치는 하림의 손을 잡고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하림의 새끼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하림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지만 살며시 느껴지는 동규의 손가락 때문에 입이 귀에 걸린 상태였다.

“……전에 여기 왔을 때 성악 하는 소리랑 연주 소리 들렸는데 밤이고 축제라 그런지…… 조용하다.”

“지금도 귀 기울이면 들려. 누가 오늘도 열심히 연습 중인가 봐.”

“그러게. 들린다.”

음대 건물을 지나쳐 호수까지 걸어가는 길은 낮에 왔던 전과는 달리 조명이 켜져 있었다. 동규는 환하게 반짝이는 조명에서 익숙한 기억이 떠올랐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클래식 연주가 로맨틱하게 들려왔다.

“우리 학교에 재밌는 소문이 있는데.”

“……응.”

하림은 길가를 따라 난 조명을 발견하고 우뚝 선 동규의 손을 풀고 몸을 살짝 앞으로 숙여 동규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음대에서 이렇게, 호수 가는 길을 따라 저녁에는 조명이 켜지고.”

“…….”

“그 길을 같이 걷는 두 사람은 사귀게 된다. 뭐 그런 소문.”

학생들 사이에서 도는 썰이고 모두가 개구라라며 웃고 말지만 이 길을 같이 걷고 사귀었다는 커플들의 이야기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도시 전설처럼 나타났다.

하림은 개강하고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동규에게 고백하기 위해 조명과 센서들을 직접 제작했던 밤들이 생각났다. 하늘과 열심히 곰돌이 케이크 만들던 것도.

여전히 조명에 시선을 뺏긴 동규는 발걸음을 떼지도 못하고 우뚝 멈췄다. 하림은 동규의 앞에 서 손을 뻗었다. 하림의 손 위로 동규가 제 손을 조심스레 올렸다. 그대로 하림은 발걸음을 뗐다. 동규와 마주 보고 걷느라 뒤로 걷게 되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와 부딪힌다거나 넘어지게 되면 동규가 잡아 줄 걸 믿었다.

“……그 때 생각난다.”

“나도.”

동규는 잠시 첫 키스의 기억에 잠긴 듯 묵묵히 걷다가 하림과 눈을 마주했다.

“하림아.”

“응.”

“소문 말인데.”

조금 부끄럽지만 궁금한 게 생긴 동규는 뜨거워진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만약에…… 이미 사귀는 사람이랑 같이 걸으면…… 어떻게 돼?”

이런 류의 모든 소문이 그러하듯 이 소문 역시 사귀게 된다는 것에서 끝이다. 하림은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면서 새로운 소문을 덧붙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사귀는 사람이랑 같이 걸으면…….”

동규는 침을 꼴깍 삼켰다. 반짝이는 조명을 오롯이 받고 있는 하림의 얼굴에 눈이 멀 것 같았다.

“결혼한대.”

“……정말?”

“응. 여보.”

동규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광대가 움찔거렸다.

“남편 하는 그 결혼.”

“그……게 뭐야…….”

“그냥. 그렇다고.”

음대에서 호수까지는 길이 짧았다. 하림은 동규의 손을 놓고 그의 옆에 섰다. 걸음 속도를 맞춰 똑같이 걷는 동안 동규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여보 소리에 얼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손부채질을 아무리 열심히 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덧 해가 모두 지고 달이 환하게 떠올랐다. 커다란 구름이 달 주변에 깔려 밤하늘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쉬는 시간 다 지났다. 샤프 들어.”

규연은 케이크를 자르려다 휴대폰 속으로 아예 들어가려고 하는 동규를 발로 툭툭 쳤다.

“잠깐만요.”

“뭔데 그렇게 재밌게 봐. 같이 봐.”

“……비밀이에요.”

규연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약혼한 게 유세냐고 동규의 발을 좀 세게 쳤다. 동규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정강이를 쓰다듬으면서도 10분만 시간을 더 달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속보]S대 대숲에 누가봐도 허강현의 것으로 보이는 글 올라와〉

[[후속]댓글로 비난폭주〉

쉬는 시간 2분을 남겨 놓고 하늘이 S대 SNS에 올라온 글 하나를 캡처해 동규에게 보내 줬다. 동규는 그걸 읽느라 바빴다.

길어도 너무 긴 익명의 글은 하늘의 말마따나 누가 봐도 하림에 대한 고백이었고 초반엔 하림을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를 구구절절 써 놨다가 중반으로 가서는 체념과 그래도 널 포기할 수 없다는 얘기를, 마지막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하림을 욕하다가 또 제일 마지막에는 그래도 사랑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어 동규로서는 그의 감정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정신 사납게 지 혼자 좋아했다가 상처를 받았다가 화를 냈다가 난리인지.

사진 아래 하늘이 보내 준 링크로 들어가자 같은 학교 학생들이 단 댓글이 보였다. 조금 전에 올라온 건데 벌써 댓글이 50개가 넘어갔다. 익명으로 제보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강현의 이름을 대놓고 거론하며 욕하는 댓글뿐이었고 하늘이 달아놓은 것도 보였다. 속 시원한 댓글들이 많아 동규는 그걸 모두 읽어 보고 싶었지만 규연이 짜증을 내려고 해 두 눈을 꼭 감고 휴대폰을 뒤집었다.

“약혼자랑 사이좋은 거 보기 좋다만 공과 사는 구별합시다, 후배님.”

“네.”

요즘 동규와 일주일에 두세 번씩 과외 중인 규연은 동규가 필사하는 걸 물끄러미 보았다. 작년 가을부터 동규에게 부탁을 받아 이러고 있긴 한데, 매번 동규가 맛있는 걸 사 준다고 하지 않았어도 규연은 동규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동규는 말도 잘 듣고 순한데다 착하고 예쁜 후배라 데리고 다니는 맛이 났다. 동규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같이 앉아 있다 보면 꽂히는 사람들 시선도 꽤 즐거웠다.

졸업하기 전에 꼭 등단하고 싶다고 찾아온 동규는 규연과 달리 학원을 다닌 게 아니라 그런지 글 쓰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좀 특이하고 자유분방했다. 덕분에 작년에는 동규의 스타일이 어떤지 파악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올해 들어서야 이런저런 스킬을 알려 주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다소 힘들어하더니 이제는 규연의 방식을 곧잘 따라왔다.

“다 썼어요.”

“오늘은 이 작품까지만 해석하고 끝. 나 저녁에 약속 있다고 한 거 기억하지.”

“네.”

필사를 한 등단작을 열심히 분석해 동규에게 들려주고 동규 나름의 생각과 피드백을 받았다. 그러면 규연이 동규의 생각을 더듬어주고 동규는 또 그걸 듣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계속 반복하다 서로의 생각이 같아지면 다음 시로 넘어갔다. 규연은 대학원에 진학해 현대문학비평을 전공할 생각이라 이 방법이 꽤 잘 맞았다.

동규와 열띤 문학 토론을 끝낸 규연은 짐을 정리하다 문득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동동. 나 뭐 물어볼 거 있어.”

“네.”

“너 쓰는 향수 뭐야?”

“네?”

“향수. 너 가끔 쓰는 거. 여러 개 쓰던데 하나라도 알려 줘.”

“아…….”

동규는 향수를 쓰지 않았다. 하림이 여행 갈 때마다 기념으로 하나둘 사곤 했고 최근엔 엄마와 친척 어른들에게 향수를 선물 받으면서 그걸 레이어링 해 쓰곤 했다. 한 번씩 동규에게도 향 좋다고 한 번씩 뿌려 준 게 다라 무슨 브랜드에 어떤 제품인지도 몰랐다. 규연에게 등단 과외를 부탁할 때 선물한 향수도 하림과 함께 백화점 가서 하림이 골라준 걸 산 거였다.

“저도 잘 모르는……데요.”

“약혼자가 선물해 줬나 보다.”

“네. 저는 그냥 걔가 뿌려 준 게 다라.”

“선물하고 싶은데 한 번 물어봐 줄 수 있어?”

“물어볼 수는 있는데 그게 걔가 두세 개 그, 섞은 거라서요.”

“그럼 그 두세 개가 뭔지 물어봐 줘. 특히 너 농구 경기하고 난 다음 날 뿌렸던 거. 그게 최근에 맡은 것 중에 최고였으니까 그거로.”

공대와의 농구 경기는 공대의 패배이자 동규가 속해 있던 비공대 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당연 하림이 동규를 응원한다고 왔었고 뒤풀이에는 동규만 혼자 빠져 하림의 집으로 달려갔다. 딱히 하고 싶지 않았던 농구였지만 코트를 뛰어다니고 승리를 쟁취해서 그런지 그날따라 동규는 지나치게 흥분해 하림이 거의 기절할 정도로 몰아붙였다.

어차피 경기는 금요일이라 다음 날 아침이 되었어도 쉬는 날이었다. 동규가 하림의 안에서 빠져 나왔을 땐 하도 하림의 안에 정액을 싸질러 놔 물 흐르듯 정액이 줄줄 나왔다. 전날 저녁부터 쉴 새 없이 이어지던 섹스는 씻고 온 하림이 곯아떨어지고 나서도 끝나지 않았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불을 끄고 누워 있어도 자꾸 피가 들끓었다.

동규가 성욕이 해소되고 비로소 배고픔을 느낀 뒤에야 길었던 밤이 끝이 났다. 자고 있는 애를 데리고 혼자 발정 난 게 미안해 뒷정리를 해 주려고 했더니 하림이 귀찮으니까 이따 일어나서 씻자고 잠에 들었다. 하림이 잠에 들 때까지 옆에 앉아 토닥여 준 동규는 배가 너무 고파 물을 올렸다. 라면 일곱 개를 끓여 먹으면서 미안한 것도 미안한 거지만 하는 동안 중간중간 깬 하림이 잠꼬대를 하던 게 떠올라 웃음이 자꾸 나왔다.

그러고 몇 시간 뒤에 일어나 규연을 만났다. 하루 정도는 과외를 쉬고 계속 하림과 있고 싶었지만 규연이 그런 정신머리로 어떻게 프로가 되겠냐며 당장 나오라고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동규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라면 먹고 자서 얼굴이 부어 못생겨졌다며, 향수라도 뿌리고 가라고 하림이 뭘 뿌려 줬는데 생각해 보니 그날 규연이 동규를 만나자마자 코를 킁킁거리며 좋은 냄새 난다고 했고 집에 가는 순간까지 동규에게 좋은 냄새 난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다.

“선물 그 선배한테 하는 거죠.”

규연은 얼마 전 어찌저찌 문현과 사귀게 되었다. 놀라운 건 친구와 술 먹고 꽐라가 된 상태로 새벽에 전화했다가 사귀게 되었다는 거다. 규연이 전화해서 이번에도 거절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라며 강수를 두었더니 사귀자는 대답이 돌아왔더란다.

그동안 숱하게 규연의 고백을 받아 주지 않았던 이유는 친한 친구를 잃을 것도 무섭고 연애를 해 보지 않아 규연에게 실례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그랬다는데, 하림은 그걸 듣고 뒷목을 잡았고 동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깊은 공감을 했다.

“응. 6월에 걔 생일이라 생일 선물로 향수나 주게.”

“서…….”

“서?”

하림도 6월이 생일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랬다간 어떻게 됐을까 싶어 소름이 돋았다. 동규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향수 알아봐 달란 말에는 고개만 크게 끄덕였다.

과외가 일찍 끝나 수영을 다녀와도 하림이 없는 거실에서 빈둥대고 있던 동규는 하림이 집 앞이라는 소리에 현관문 앞으로 달려가 섰다. 들어온 하림은 동규를 와락 안고 동규의 얼굴에 사정없이 뽀뽀를 했다.

“규연이 누나랑 잘 했어? 잘 했지? 보고 싶었어.”

가볍게 시작한 뽀뽀가 농밀한 키스로 변해 갈 즈음 두 사람은 떨어졌다. 하림이 숨을 고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동규는 하림에게서 은은하게 나던 냄새를 곰곰이 곱씹었다. 또 처음 맡는 향이다. 하림은 향수를 뿌려도 진하게 뿌리는 게 아니라 아주 살짝 뿌리는 편이라 동규는 방금 전 맡았던 향이 금세 기억나지 않아 갸우뚱했다. 그래서 씻고 나온 하림의 손을 잡고 향수를 모아 둔 곳으로 데려갔다.

“규연이 누나가 그 선배한테 향수를 선물하고 싶은데 네 향수로 하고 싶대.”

“나? 내 거?”

“정확히는 네가 나한테 해 준 거.”

“어떤 걸 말하는 거지.”

“농구 하고 나서 다음 날 네가 뿌려 줬던 게 좋은가봐.”

“아 그거. 병 찍어서 보내 줄게. 근데 하나는 지금 못 살 텐데.”

하림이 병 세 개를 쪼르르 세워 두고 동규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에 비율을 적어 놓은 뒤 경기 다음 날 동규에게 뿌려 줬던 것 말고도 올 초에 규연이 소개시켜 준 공문현이란 선배를 떠올리며 그 선배와 어울릴 것 같은 향수도 몇 개 추천해 적어 주었다.

“그거 그대로 복사에서 누나한테 보내.”

“응. 조금 이따가.”

하림의 손에 있던 제 휴대폰을 뺏은 동규가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어 두고 하림에게 바짝 붙었다. 하림이 동규의 목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살짝 틀어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왔다. 동규는 눈을 감았다.

“곧 저녁 하러 아주머님 오실 거야.”

“응.”

“조금만 참아.”

대답하는 시간도 아까워 동규가 하림의 입술을 물었다. 하림의 잠옷 안으로 손을 넣었지만 하림이 동규의 손을 빼 허리를 감게 했다. 동규가 한 번 더 젖꼭지를 더듬고자 손을 넣었지만 바로 저지당했다. 맞닿은 입술에서 하림의 웃음소리가 먹혀들었다.

종강하고 하림이 본격적으로 바빠지면서 동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요리 클래스야 동규가 원래 요리하는 걸 좋아해 혼자 해도 괜찮았지만 그림 그리기와 목공예는 혼자 하려니 흥미가 뚝 끊어졌다. 작년에 하림과 동규가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로 했던 건 합의하에 연말로 약속을 미뤘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그리기엔 실력이 모자라단 의견에 동의했는데 아무래도 또 1년을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규연과 하는 과외는 하림의 부모님에게 잘 보이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다 보니 매 수업이 힘들긴 해도 재밌었지만, 고등학생 과외는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올 여름 방학까지만 하고 그만두게 됐다. 하림이 소개시켜 준 거라 1년 했지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였다. 과외비가 세서 그거 하나 좋았을 뿐 과외 선생님이라는 게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었다. 책임감이 조금 없었던 것 같지만 동규는 깊게 생각하길 포기했다.

모든 건 다 체력에서부터 나온다며 하림이 동규와 빠지지 않고 하는 게 바로 운동이었다. 일주일에 최소 3일 이상, 되도록 매일 하기. 집에서 러닝머신만 10분 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주 3일은 꼭 채웠다.

그러나 하림은 학과 공부 말고도 이곳저곳에 인터뷰를 하고 광고나 방송 촬영을 하거나 프로젝트에 참여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다. 재학생 추천으로 동규도 학교 홍보 모델이 되었지만 그건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구독자 수도, 조회 수도 바닥을 기던 S대 공식 채널은 하림을 아나운서로 영입하면서부터 하루가 다르게 고공 행진을 달리는 중이었고 과학을 다룬 채널은 물론 개인 채널을 개설한 S대 학생들이나 다른 명문대에 재학 중인 영재원 친구들이 하림에게 러브콜을 보내왔다. 동규는 이러다 하림이 연예인 하겠다고 하면 어쩌나 매일 전전긍긍이었다.

동규의 불안함을 빠르게 눈치챈 하림이 동규에게 수시로 전화하고 연락하고 공식적인 일정 아닌 술자리나 저녁 같은 건 전부 거절하고 있는데도, 한 번씩 동규는 마음 약해지는 소리를 했다. 동규랑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서글픈 건 하림도 마찬가지라 이번 여름 방학에는 연구소 인턴을 제외한 모든 스케줄을 접었다.

종강하자마자 동규가 가 보고 싶은 나라를 골라 주말마다 퍼스트 클래스를 끊어 놀다 왔고,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인턴으로 치여 지내다가도 동규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바로 퇴근했다. 가끔 동기들이 뭐라도 먹고 들어가자고 하림을 붙잡았지만 밥값이나 술값만 미리 계산하고 빠져나왔다. 그렇게 두 달을 동규에게 쏟아 부었더니 개강을 앞둔 동규가 술을 먹고 울었다.

“나 진짜…… 애도 아니고 너무 한심해.”

동규가 솔직하게 할 말이 있다며 먼저 술을 먹자 한 것부터 이상하더니, 술 먹고 울면서 한다는 소리가 저렇다.

“어떤 게.”

또 이번엔 뭐가 그러게 서러우실까. 하림은 김동규 설움가를 듣기 위해 아예 의자 등받이에 등을 편안하게 기댔다.

“그냥…… 다 미안해. 네 시간 뺏는 것 같고, 중요한 일 하는 건데 나 때문에 일부러 다 거절하는 것 같고…….”

“응, 그게 그랬구나. 또.”

“또…… 너 술 먹는 거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너보고 술 먹자고 하는 것도 다…… 나랑만 마시구, 나는 술 잘 먹지도 못해서 재미도 없, 는…….”

“그랬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은 뚝뚝 흘리는 동규가 고개만 끄덕거렸다. 하림은 티스푼으로 블루베리를 떠먹었다.

“난 또. 괜히 쫄았네.”

“미안해, 미안…….”

“김동규, 나 봐 봐.”

동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 보라고. 고개 들어.”

“…….”

“나도 운다.”

“그러지 마…….”

고개를 든 동규는 하림이 운다는 말에 그가 건네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하림은 턱을 괴고 동규의 눈물로 색이 진해지는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방학 동안 자기가 옆에 붙어 있어 좋다고 했던 동규의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이 도사리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혹시 내가 자길 위해 시간을 쏟는 게 미안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있던 건 아닐까.

하림은 동규가 속이 풀릴 때까지 울도록 가만히 두면서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동규와 자기 생활을 적당히 맞춰 유지할 수 있을지 열심히 가늠했다.

“하아……. 이제 좀…… 괜찮아졌어. 근데, 너무 울었는지 머리 아파. 어지, 럽…….”

“괜찮아졌다면서 왜 또 우는데.”

“몰라, 머리가 아프, 아프니까 그렇지.”

동규의 이마에 손을 올렸더니 열은 없지만 울어서 그런지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요거트 먹을래? 열 좀 식히자.”

“응. 좋아.”

골라 먹을 수 있도록 짜먹는 요거트를 맛별로 하나씩 꺼내 온 하림은 하나를 잘라 동규의 입에 물렸다.

“손수건 다 젖겠다.”

“그러라고…… 준 거잖아.”

“코 풀어.”

“으응.”

중얼중얼 요거트 맛있다면서도 한숨을 푹푹 쉬는 동규를 가만히 보고 있던 하림은 조용히 와인 한 병을 비웠다. 언제쯤 동규가 조금 술에 깰지 기다려도 영 그러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하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하나 꺼내고 정수기에서 얼음을 담아 왔다. 동규는 텅 빈 요거트 팩을 한데 모으다 하림을 눈으로 좇았다.

“아, 해.”

아직도 훌쩍이는 동규가 하림을 올려다보며 입을 작게 벌렸다. 하림은 컵에서 얼음 하나를 꺼내 제 입에 넣고 동규와 입을 맞췄다. 동규의 입으로 얼음이 쏙 넘어왔다. 차가운 감각에 동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얼음 탓에 혀가 굳은 것처럼 뻣뻣하게만 느껴졌다. 얼음이 반쯤 녹았을 때 하림이 입술을 뗐다.

“이제 그쳤네.”

“……서하림.”

동규가 하림의 허리를 안았다. 입 안에서 점차 작아지는 얼음이 아까웠다. 동규는 얼음을 씹어 삼키고 아예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내밀었다. 하림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차가운 얼음과 말랑한 하림의 입술이 느껴졌다. 말로 하지 않아도 하림의 마음이 느껴져 동규는 그대로 이성을 날려 버렸다. 술기운을 빌어 속마음을 얘기하기 위해 잡고 있던 한 가닥의 이성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덜컥 주량을 훨씬 초과한 한 병을 마셔 버린 동규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계속 눈앞이 뿌예지도록 눈물이 차오른 것도 있지만 이 정도로 취한 것도 처음이었다. 자꾸 넘어지고 어딘가에 부딪혀도 별로 아픈 줄도 몰랐다.

거기다 하림이 장난으로 “이렇게 울어서 자꾸 형아 속상하게 하면 어떡해”라고 한마디를 했더니 갑자기 형아란 단어에 꽂히질 않나, 위로는 울면서도 아래로는 하림에게 삽입한 채로 난폭하게 움직이느라 위아래로 바빴다. 그러다가도 하림이 잠시 멈추라고 하거나 빼 달라고 하면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콘돔 낄 정신도 없었기 때문에 하림의 안에 잔뜩 싸 놓은 건 물론이고, 하림이 이제 씻으러 가자고 했을 땐 제 것을 쑥 빼 버리고는 콘돔 없이 안에 싸서 미안하다고 또 한바탕 울었다. 하림은 우는 동규를 달래다가 눈물 뚝뚝 흘리면서 안에 싼 걸 빼 주겠다는 동규에게 홀랑 넘어갔다.

당연히 손가락으로 뺄 거라 생각한 건 큰 오산이었다. 동규는 하림이 뒤를 돌자마자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혀부터 들이댔다. 하림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혀가 안으로 들어온 뒤였다. 다이나믹하게 꿈틀거리는 게 성기로 잔뜩 쑤셔졌던 곳을 건드리는 감각만으로도 버거운데, 동규가 안에 차 있는 정액을 빼주겠다고 강하게 흡입하는 바람에 하림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술 취해서 우는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이 엄청나고 이상한 감각을 더 견딜 자신도 없고. 동규가 한 번씩 이를 세워 입구를 잘근잘근 씹을 때마다 하림은 저도 모르게 뒤에 힘을 줬다. 널따란 식탁은 매끈하기까지 해서 하림이 붙잡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동규가 입술을 떼고 물러났을 때 하림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숨을 고르고 일어났더니 이번엔 동규가 발기한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 그 다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뒤를 핥는 동안에도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부운 게 귀여웠다.

하림은 식탁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뒤가 엄청나게 얼얼했다.

“뒤에…… 빼 주고 괜찮아진 거 아니었어?”

“몰라.”

동규는 손을 뻗어 하림의 유두를 쓰다듬었다. 동규가 하도 물고 빨아 부었는지 찌릿하고 아파왔다. 하림이 인상을 찌푸리자 동규가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눈물을 한 방울 똑 떨구었다.

“나 물 좀 마시고.”

“……나도.”

하림은 동규의 눈물을 닦아 준 다음 컵에 물을 담았다. 동규가 먹을 컵에는 얼음도 넣어 주었다. 동규는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찬물을 단숨에 마셔 버리고 얼음 하나를 꺼내 하림의 유두로 가져갔다.

“차가워.”

“아프니까…… 이렇게 해 줘야 돼.”

“아, 으, 근데 너무, 차가, 아, 차가운데.”

하림이 아픈 게 싫은 동규는 얼음을 떼고 제 입으로 가져갔지만 하림의 가슴을 붙잡고 유두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알았어, 해.”

“……진짜?”

“진짜.”

동규는 고개를 숙여 힘을 잃지 않은 자신의 성기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해.”

“그러면…….”

뭐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둘 다 하고 싶은데 하나만 골라야 하는 줄 안 동규는 또 눈물을 흘렸고, 하림은 눈물을 닦아 주면서도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안쓰럽긴 해도 정말 큰 일이 있어 우는 게 아니라 술 먹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서러워 우는 거라 귀여웠다.

“형아가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어요.”

“그러면 아픈 것부터…….”

아픈 거 치료해준다고 얼음으로 유두는 물론이고 뒤까지 얼음으로 문지른 미친 짓에, 얼음 물고 하림의 성기까지 빨아 댔지만 다음 날 동규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림이 말로 들려주는 지난밤 섹스가 너무도 아까워 동규는 베개만 쥐어뜯었다.

“다시는 술 먹고 안 해.”

“왜, 귀여웠는데. 술 먹어서 그런지 울면서 열심히 움직이는 거 진짜 귀여웠어.”

“아씨! 기억 하나도 안 나.”

“안 돼. 또 마시고 형아 해 줘.”

“그런 소리도 했어? 으으, 억울해. 너만 기억하고.”

“억울하면 기억을 하든가. 나는 차마 말로는 부끄러워서 더 이상은 얘기 못 하겠다.”

“뭐야, 해 줘. 내가 동생한테 깔려서 박히니까 좋냐고 그랬어?”

“몰라.”

“아, 서하림. 너만 혼자 좋은 게 어딨어.”

“그럼 씻겨 주면 얘기해 줄게.”

“당장 씻으러 가자.”

거품목욕 하고 싶다는 하림의 의견을 수용한 동규가 욕조에 거품을 한가득 만들었다. 하림은 씻겨 줬을 뿐만 아니라 제 몸을 주무르는 동규의 손길을 느끼며 얼굴이 빨개진 채로 동규가 어제 해 줬던 말들을 속삭였다. 그러다 둘 다 아침부터 거품을 뒤집어쓰고 힘을 빼고 말았다.

2학기가 시작됐지만 경영학과 1학년이 국어국문학과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 앉아 있는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동규와 세 친구는 율하의 의도를 훤히 읽었으나 반응은 셋으로 갈라졌다.

첫 번째. 주안은 무척 좋아했다.

“나 이 수업 이제 아침 여섯 시부터 학교 와서 기다린다.”

두 번째로는 나머지 두 친구들. 그리 좋은 반응은 아니었지만 노력은 가상하다는 반응.

“쟤 수강 신청 다 끝나고 나서 교수님한테 구구절절 메일 보내서 들어온 거래.”

“딱 봐도 누구 때문에 그런 건지 알겠다.”

마지막. 동규는 율하가 국어형태론을 듣든 현대소설론을 듣든 별 관심도 없었다. 점심 먹고 친구들과 학교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카페의 아메리카노가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마셔 버리고 홀더에 그려진 로고를 찍어 놨던 걸 SNS에 올리는 게 더 중요했다. 맛있는 건 무조건 하림에게 알려 줘야 하니까.

0622xoxo1231 첨 보는 곳이넴 후기 자세하게 말해줘ㄱㄱ

6ear123123 @0622xoxo1231 한 문장으로 가능해 하루 종일 여기 아메리카노만 마시라고 해도 할 수 있음

0622xoxo1231 @6ear123123 허얼 그 정도? 그런 대단한 곳이 있었다고?

6ear123123 @0622xoxo1231 근데 사람 많더라ㅠㅠ

0622xoxo1231 @6ear123123 프렌차이즈는 아닌 것 같은데

6ear123123 @0622xoxo1231 맞아 바리스타 무슨 대회에서 1등한 사람이 하는 곳이래

0622xoxo1231 @6ear123123 와 벌써 맛있다

6ear123123 @0622xoxo1231 응♡♡ 진짜 맛있어♡

0622xoxo1231 @6ear123123 우리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자

6ear123123 @0622xoxo1231 응응 다 조아

0622xoxo1231 @6ear123123 엄마가 카페인중독자라 원두 선물 많이 받는 거 알지 너도 나도 커피 좋아하니까 좀 달라그래서 우리도 손수 갈아서 내려먹자

6ear123123 @0622xoxo1231 헐 좋지 생각만 해도 행복해 드립커피 완전 좋아

0622xoxo1231 @6ear123123 커피머신도 사서 샷도 뽑아먹고! 캡슐 커피 안녕~

6ear123123 @0622xoxo1231 집에서 아아메 먹을 수 있다니ㅠㅠ 무릉도원인가? 너무 좋음♥

0622xoxo1231 @6ear123123 나도♥

6ear123123 @0622xoxo1231 ♥♥♥♥

0622xoxo1231 @6ear123123 ♥♥♥♥♥

6ear123123 @0622xoxo1231 ♥♥♥♥♥♥

0622xoxo1231 @6ear123123 ♥♥♥♥♥♥♥

성적과는 별개로 동규는 한국어라는 언어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고전 문학과 중세 국어는 거의 교수님을 떠받드는 수준으로 좋아했고 모든 전공 수업이 재밌었다.

하림이 F만 맞지 말라고 한 덕분에 성적 스트레스를 받을 것도 없어 더 그런 걸 수도 있다. 하림과 댓글로 하트 탑을 쌓던 동규는 “쟤도 한국어의 심오한 세계에 빠졌나 봐” 하고 스치듯 말했다. 유주와 시은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앞에 앉아 있던 율하가 쉬는 시간이 되자 동규와 친구들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동규는 교수님이 잠시 쉬자고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림과 메시지를 나누느라 율하가 온 줄도 모르고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

“하이.”

“율하 안녕!”

“김동규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

“바쁘세요?”

“응.”

“네…….”

주안은 가방을 내려놓고 옆에 앉은 율하에게 신나서 말을 걸었고 유주와 시은도 괜히 눈치가 보여 풀이 죽은 율하를 위해 주안의 되지도 않는 개드립에 맞춰 어색한 리액션을 했다.

사귀는 사람이 있는 동규에게 들이대는 건 별로였지만 동규가 너무 조금의 틈도 없이 차단하다보니까 조금 안쓰러웠다. 그러게 왜 다른 사람 좋아하지 사서 고생을 하나 싶다가도 학교에 김동규만 한 사람이 없으니 율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다.

꼬장꼬장하게 나이만 먹은 교수가 첫날인데도 기어코 두 시간 강의를 꽉 채워 끝을 냈다. 율하는 네 명의 선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빠르게 사라졌다. 동규도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이 어딘지 확인했다. 친구들과 강의실로 향하던 중에 하림에게 전화가 와 동규가 따로 빠져나갔다. 얼마나 소중하길래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않냐고 주안이 툴툴댔으나 유주와 시은은 그런 주안을 버려두고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어느덧 2학기도 그럭저럭 흘러 가을 축제가 다가왔지만 동규는 푸드 트럭에만 관심을 갖고 나머지는 그냥 있나 보다, 하나 보다 하며 강의만 열심히 들었다. 친구들이 밤에 공연을 보자고 동규를 꼬셨지만 데이트해야 한다고 빠졌다.

무엇보다 오전 강의 들을 때 하림에게서 복숭아 산 거 오후에 올 테니까 학교 끝나고 먼저 가서 먹고 있으라고 했기 때문에 종일 집에 가서 복숭아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소중한 데이트 빼고 시간 내줘서 고맙다 김동규. 이 누나 생각해 주는 건 동규밖에 없네.”

하지만 친구들은 어떻게든 넘길 수 있었어도 규연은 넘을 수 없는 큰 산이었다. 대학원에 진학을 준비하는 규연이 마지막 축제라며 복숭아 먹으려고 신나게 뛰어가던 동규를 붙잡고 늘어졌다.

“다른 학교 대학원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 학교 대학원생 되는 거면서 마지막은 무슨 마지막이에요. 게다가 아직 3학년이면서.”

“내년 이맘때는 피곤함에 찌들어 살아 있지 못할 수도 있어.”

“설마요.”

“그래도 울 예쁜 후배 등단은 책임진다, 내가.”

“올해는…… 힘들겠죠?”

“글쎄. 졸업 때까진 아직 세 번 기회 있으니까.”

규연을 따라 푸드 트럭 구역도 한 바퀴 다 돈 동규는 푸드 트럭 뒤편 계단으로 된 관중석에 앉아 사 온 음식들을 펼쳐놓고 규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규연은 닭강정과 감자튀김, 봉지칵테일을 먹고 나선 배가 부르다며 퍼질러졌지만 동규는 쉬지 않고 음식들을 비워 나갔다.

“누나 남자친구는 안 온대요?”

“걔 시끄러운 거 싫다고 죽어도 안 온대. 이따 밤 되면 포토 존에서 사진도 찍어 주는 거 잊지 마.”

“저 사진 잘 못 찍어요.”

“하림이 찍어 주는 거 보니까 잘만 찍던데.”

“아니에요.”

“이따가 제 인생 샷도 부탁드립니다.”

“그런 거 못 해요.”

“이거 사 준 거 다 사진 잘 찍어 달라는 불순한 의도의 로비 푸드였어.”

“…….”

“공무녀니 없이도 잘 놀고 있다고 사진 존나 많이 올릴 거야. 이따 공연할 때 공문현한테 전화도 해야징, 귀 터지라고옹.”

동규 말대로 어차피 아직은 3학년이고 같은 학교 대학원 가는 건데 술을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하늘이 예쁘고 노을이 운치 있어서 그런가, 규연은 동규에게 참 많은 얘길 했다. 학창 시절 이야기, 글 쓰는 이야기, 친구 이야기만 해도 이야기가 한가득했다.

동규도 살짝 취한 듯한 규연과 얘기하다 보니 속 이야기를 저도 모르게 술술 말했다. 규연의 반응이 화려하기도 하고 동규의 말에 뭐만 해도 추임새를 넣어 주다 보니 규연은 알지도 못할 고등학교 친구 이야기나 서울로 전학 오기 전 이야기, 아빠랑 어릴 때 있었던 일까지 이야기하고 말았다.

동규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동규의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나온 건 바로 하림이었다. 규연은 동규와 이야기를 하며 봉지칵테일을 다섯 개째 마시는 중이었다. 술도 마시지 않았으나 진실 게임이라도 하듯 하림의 얘기를 늘어놓는 동규 때문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열심히 참았다. 동규가 낯을 많이 가려서 다행이다. 성격이 친구인 주안의 반의반만 닮았어도 입학하고 한 달 만에 애인이 누군지, 약혼자는 누군지 온 사방에 까발려졌을 게 뻔했다.

서하림은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이래서 멋지고 저래서 멋지고, 서하림이랑 몇 살에는 이런 일이 있었고 몇 학년 때는 저런 일이 있었다며 주절주절 얘기하는 동규가 귀여워 규연은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걸 참고 있는 것도 일이라 그냥 규연은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칵테일 때문에 기분도 좋아서 될 대로 되라 식이었다.

“그래그래. 나도 문현이가 숨만 쉬어도 예뻐 죽겠더라. 근데 가끔은 진짜 주먹을 불러.”

“서하림은 좋은 애라 한 번도 그런…… 주먹……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없었는데 가끔 저게 사람인가 로봇인가 싶을 때는 있어요.”

“진짜 바쁘게 살긴 하더라. 아 맞다. 너는 진작 봤겠지만 하림이 찍은 그 뭐냐. 걔네 학교 무슨 영상 조회 수 벌써 100만 넘었더라. 거기에 내가 조회 수 한, 1500 정도는 기여했어. 솔직히 내용은 기억 하나도 안 난다. 얼굴 보기 바빠서.”

“걔 나온 것만 조회 수 다 높아요. 학교 거 말고도 걔 친구들이 하는 과학 채널이나 다른 것들 특별출연 한 것도 그렇고. SNS 라이브만 해도 누가 서하림이랑 술 먹고 있다고 켜잖아요? 그러면 천 명은 금방이에요. 그래서 걔 친구들 서하림이랑 뭐 약속 있을 때마다 조회 수 올린다고 꼭 방송하고 녹화하고 사진 찍고…….”

“걔 방송 나오면 실검도 뜨잖아. 근데 정작 하림이는 자기가 직접 그런 거 하진 않던데.”

“귀찮대요. 남이 찍어 주는 건 괜찮고.”

“그렇게 유명하고 바쁜 애랑 제일 친한 친구면 무슨 기분이야?”

“그냥 뭐…….”

“불안하진 않아?”

“조금요. 근데 제가 불안해하면 걔가 저 신경 써 주는데 그게 미안해서…… 서하림 진짜 착하거든요.”

“알지 알지. 너 조금이라도 기분 안 좋으면 귀신같이 알아채잖아.”

“맞아요. 좋은 애예요.”

“너도 좋은 애니까 걔랑 친구인 거야.”

“……네.”

“쑥스러워하기는.”

규연이 동규의 옆구리를 찔렀다. 동규는 몸을 옆으로 쭉 빼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규연을 다급하게 불렀다.

“누나, 누나.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뭔데.”

“혹시 누나 그…… 남자친구분 뭐라고 불러요?”

“공문현?”

“네. 그냥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지…….”

“공문현 무녀나 야 너 무뇨니 현이 꽁꽁이 정도로 불러. 꽁꽁이 귀엽지.”

“네.”

다행이다. 누나도 크게 다를 게 없어서.

“기분 좋을 땐 자기 소리 좀 해 주고.”

“……네?”

“걔는 나한테 공주님 여왕님 여보야 자기야 그런 거. 아 부끄러운데 존나 웃기다.”

동규는 갑자기 튀어나온 단어들로 혼돈에 빠졌다. 돌만 닦게 생긴 재미없는 선배가 저런 엄청난 단어들로 누나를 부르고 있었다니…….

“너는 그냥 이름 불러?”

“네…….”

“사귀는 애도?”

“아니요. 걔는…….”

“뭐라고 하는데? 궁금해. 설마 걔도 동동이라 부르는 건 아니겠지. 그건 내가 만든 거라 쓸 거면 저작권비 내야 돼.”

“아니에요.”

“그럼 뭔데?”

“몰라요…….”

“이럴 땐 말 안 하는 대신 원샷 때리면 되는데 아 왜 김동규 하필이면 알코올 알레르기여서 누나 혼자만 술을 먹여, 먹이긴! 지금 딱 누나랑 술 먹는 분위기인데.”

하림이 붙여 준 애칭들을 말할 순 없지만 동규가 하림과의 약속을 깨고 규연에게 사실 칵테일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다고 얘기를 막 꺼내려던 찰나, 율하가 나타나 동규의 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안녕!”

이대로 분위기 타다가 동규에게 솔직하게 하림과 비밀 연애 하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망쳤다. 규연은 입맛을 다시곤 조만간 동규와 저녁이나 먹어야겠다며 아쉬움을 달랬다.

“안녕하세요, 김동규 선배님!”

“야, 무안하겠다. 인사 좀 받아 줘.”

“……했는데요.”

“고개만 꾸벅 하는 게 무슨 인사야.”

“……안녕.”

“저도 칵테일 사 와도 돼요?”

“그래. 나랑 같이 마셔 줘. 동규는 다 좋은데 술을 못 마시는 게 흠이야.”

“저 술 좋아해요. 빨리 다녀올게요.”

“그럼 내 것도 하나 아무거나 너 좋아하는 거로 부탁해. 돈은 네 거까지 내가 쏠게.”

“와, 감사합니다!”

규연은 얼마 남지 않은 칵테일을 마저 쪽 빨아 마시고 동규가 마련해 둔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김동동, 쟤가 너한테 무슨 실수라도 했어? 왜 이렇게 싫어해.”

“그런 거 없어요.”

“뻥치지 말고. 무식하게 들이대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기분 나쁘지 않게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던데. 눈치도 있고 센스도 있고.”

“조심……. 전에 쟤가 약혼이 뭐가 어떠냐고 결혼한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않냐 그래서요.”

“술 먹고 한 거잖아. 바로 사과도 했다던데. 그래도 어린 게 패기 있고 귀엽지 않아? 저 예쁜 애가 너 좋다고 누구 사귀지도 않는대.”

“제가 알 반가요.”

“그건 그렇지. 근데 그래도 노력은 가상하다는 거야. 옆에서 보고 있으면.”

“누나도 1학년 애가 그 선배한테 붙으면 좋아요?”

“올, 꽁꽁쓰 다 늙어 빠져 놓고 인기 많은데 하고 기분 좋을 것 같아.”

“저는 안 그래요.”

“쨌든 사람 관계라는 게 너도 너무 어린 애 상처 받지 않게, 흠흠.”

율하가 돌아와 규연이 말을 아꼈다. 앉은 자리가 규연, 동규, 율하의 순서라 가운데 낀 동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앉아 아무 말 없이 멍만 때렸다.

규연이 재밌어 죽으려고 할 때마다 동규를 가볍게 때리거나 흔들기도 했는데 동규는 종종 규연이 물어보는 거에 대답하고 율하가 물어보는 건 단답으로 일관하면서 속으로 규연을 욕했다. 싫은 이유 말해 줬는데 계속 데리고 있는 이유가 뭐야.

규연이 율하의 기분도 잘 맞춰 주며 얘기를 한 덕분에 율하는 칵테일을 규연보다 훨씬 많이 마시게 됐다. 점점 동규에게 말을 붙이는 횟수가 늘어났고 나중엔 규연처럼 동규의 팔을 붙잡고 흔들기도 했다.

“저! 그래서 동규 선배에게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요. 궁금한 것도! 딱 하나! 있고요.”

“어, 나 자리 피해 줘야 해 율하야?”

“누나 가지 마세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아.”

“시간 많이 걸려?”

“음, 아니요. 쪼오금요.”

“아 진짜, 안 돼요. 규연이 누나 저 데리고 가요.”

규연은 가방에서 보조 배터리를 꺼내 휴대폰에 연결시켰다. 그리고 동규에게 가방을 맡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규가 규연의 다리를 붙잡았다.

“누나, 제발요.”

아무리 다리를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동규의 귀를 잡고 규연이 속삭였다.

“기회야. 아예 딱 거절해. 확실하게 고백 받은 적은 없다며. 쟤가 말실수 한 것도 있으니까 그것도 얘기 하면서 좋은 선후배로 남자고 하든 앞으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하든 얘기해.”

“옆에 같이 있어 주세요. 네?”

“나는 서하림이 아니고 김규연이거든요. 같이 있으면 쟤한테도 미안한 일이지.”

“아, 저 진짜 안 돼요. 못 해요.”

“선배니임. 뭘 그렇게 얘기 중이에요. 자리 피해 주신다면서요.”

“동규야. 그러면 나한테 전화 걸어 놓고 메시지 창 켜 놔. 뒤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테니까. 전화 듣고 있다가 네가 돌아보면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메시지 보낼게.”

“누나 이 은혜는 평생 갚을게요.”

“그럼 좀 놔.”

동규는 눈물을 머금고 규연을 놓았다. 그리고 율하에게 보이지 않게 휴대폰을 가리고 빛의 속도로 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규현이 전화를 받으면서 놀다 온다고 사라졌다.

“선배님.”

“응.”

율하가 동규에게 좀 더 바짝 다가왔다. 동규는 엉덩이를 반대쪽으로 조금 옮겼지만 율하가 또 따라붙었다.

“제가 저엉말 열심히 생각하고 의심하고 그랬는데요.”

겨우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동규는 곧장 고개를 뒤로 돌렸다. 걸어가고 있는 규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바로 하고 눈동자만 힐끔 돌려 규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동규가 자길 보는 걸 보지 못했을 테니 당연한 거지만 규연에게서는 아무런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결론이 하나밖에 안 나서 물어보는 거거든요. 네, 아니요로 대답해 주세요.”

“그걸 내가 왜…… 대답해야 하는데.”

“선배 서하림이랑 사귀죠.”

동규는 입을 딱 다물었다. 율하가 비밀을 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자기보다 한 살 많은 하림을 선배나 오빠라는 호칭 다 빼고 이름으로만 부른 게 굉장히 거슬렸다.

화를 내기 전에 동규는 규연이 들었을까 봐 통화를 급히 종료했다. 공연 시작했다고 주변에 앉아 있던 학생들의 대부분이 사라진 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동규는 주변을 쭉 둘러보고 하림의 이름을 작게 말했다.

“나한테는 선배라고 했으면서 서하림은 왜 선배 안 붙여.”

“와, 대박. 그게 중요해요?”

“이름 막 부르지 마.”

“사귀는 거 맞네. 그럼 약혼은 뭐예요. 진짜 한 거 맞아요?”

“아니.”

“하긴. 할 수가 없지. 대한민국인데.”

단순히 고백할 줄 알았지 이렇게 다 알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동규는 규연에게라도 미리 털어놨어야 하는 건 아닌지 후회가 들었다. 그러면서도 규연이 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어 차라리 얘기를 하지 않은 게 더 나은 건가 싶기도 하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럼 저 계속 선배한테 이래도 되는 거죠. 학교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고백도 할 거예요.”

“싫어.”

“왜요?”

“말해야 알아?”

“그럼 뭐 해. 사귀는 사람 누구라고 말도 못 하면서. 그럼 제가 얘기해요? 김동규 누구랑 사귀고 있는지?”

“그건…….”

“이거 봐. 선배, 이게 현실이에요. 떳떳하지도 못할 거면서.”

“떳떳.”

갑자기 머리가 차게 식는 기분이다. 화가 너무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갑자기 차분해져서 그런 건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동규는 율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얘기해.”

“네?”

“얘기하라고. 확성기 대고 소리쳐. 나는 남자친구 있고 그게 서하림이라고. 우리 둘이 사귄다고.”

“하라고 하면 진짜 해요, 저.”

“해. 나는 학교 사람들 다 알아도 상관없어. 근데 후폭풍은 네 몫이야.”

“후폭풍은 선배가 감당해야지 왜 제가 해요?”

“궁금하면 말해 보든가.”

“……뭐야, 뭔데요. 그 사람 무슨 깡패예요? 아닐 텐데.”

“깡패면 다행이게.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근데 확실한 건 일단 고소는 확실하고 지금은 성인이니까…….”

“네?”

“걔가 어디까지 뭘 할지 몰라서 나도 좀 무서운데.”

“그게 무슨…….”

“대학교도 강제 전학이 있어?”

“……네? 아니요. 없어요.”

고등학교도 아니고 강제 전학 운운하는 동규 때문에 율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동규는 팔짱까지 끼고 꽤나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율하는 고소에 강제 전학에 알 수 없는 얘기만 나와 조금 겁을 먹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의료 재단 상속남이라는 게 거짓말이었나? 사실은 어디어디 파 후계자는 아니겠지?

“율하야, 아무래도 널 위해서 그냥……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그 사람이랑 헤어지고 저랑.”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저 선배 진짜 정말 많이 좋아해요.”

“응. 고마워. 좋아해 주는 건 괜찮아. 계속해도 돼. 고마워. 근데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건…… 조금만 더 생각해 봐.”

“서하림이랑 직접 얘기해 보고 결정할게요. 번호 알려 주세요.”

“……싫은데. 그리고 이름 그렇게 막 부르지 말라고 그랬잖아.”

지금까지 다 괜찮았던 율하는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졌다. 눈물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전화번호가 뭐라고 그거 하나 주기 싫다는 게, 남들 다 있는 이름 하나 그냥 부른 걸 두 번씩이나 지적당하는 게 너무도 확실한 거절이라 그랬다. 고백에는 분명 고맙다는, 계속 좋아해도 된다는 얘길 들었지만 방금 전의 그 말이 너무 세게 다가왔다. 율하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서하림 내일 우리 학교 와요, 안 와요.”

“이름만 부르지 말.”

“알겠어요. 그 사람 그래서 우리 학교 또 언제 오냐구요. 자주 놀러 오잖아요.”

“글쎄. 오고 싶으면 오겠지. 요즘 바빠서.”

“그러면 오면 바로 알려 주세요. 제 번호 아시죠.”

“뭐 하려고.”

“몰라도 돼요. 저 갈게요.”

율하가 사라지고 나니 동규는 입이 말랐다. 기운도 쭉 빠졌다. 하림에게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갑갑했다. 살다 살다 이런 날도 다 있네. 서하림은 수시로 이런 고백을 받을 텐데 어떻게 한 번도 힘든 내색을 안 했지.

규연이 등장한 건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투덜대는 동규의 볼을 가볍게 꼬집은 규연이 “울 동동, 누나가 보고 시포또요?” 하고 대놓고 놀렸다. 동규는 눈동자를 굴리다 개미만 한 목소리로 “네…….” 했다. 규연이 웃으며 동규의 볼을 놓아주었다.

“무슨 얘기 했어? 네가 전화 끊어서 하나도 못 들었다.”

“그냥…… 거절했어요.”

“그런 것 같더라.”

이런 날 사람들은 술이 고프다고 하는 거겠지. 동규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줄 게 필요했다. 이럴 때 제일 좋은 건 하림의 품에 안겨 뽀뽀나 실컷 하는 거지만 하림은 현재 할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있는 중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누나. 저 칵테일 하나만 사 주세요.”

“뭐?”

“술 마시고 싶어요.”

“먹으면 죽는다며. 100세 인생에 벌써 죽음 쓰나.”

“거짓말이에요.”

“야, 아무리 힘들어도 알레르기 그거 진짜 잘못하면 기도 막혀서 큰일 나.”

“거짓말이라니까요. 대신에 주량 세 잔밖에 안 돼서 칵테일도 하나 다 못 마실 수도 있어요.”

“진짜? 진짜야?”

“네. 아, 혼나겠다…….”

“야 일단 알겠어. 사 온다. 칵테일 뭐 좋아해.”

“아무거나 잘 먹어요. 조금밖에 못 먹어서 그렇지.”

“세상에…….”

규연이 기다리고 있으라며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 공연하는 가수 중에는 규연이 굉장히 좋아해 콘서트까지 매년 가는 발라드 가수도 있었지만 그런 건 잊은 지 오래였다. 규연은 동규의 것과 제 것을 들고 뛰어왔다. 그리고 동규가 정말로 칵테일을 마시는 놀라운 광경을 관람했다.

“저기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끝났어요.”

손바닥만 한 봉지 칵테일을 딱 두 개만 마셔서 그런지 취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땅이 일렁거릴 정도라 집에 데려다준다는 규연의 손길도 뿌리치고 나섰다. 하림에게 데리러 오란 전화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규연의 말에는 절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하림의 허락도 없이 그것도 하림이 없는 곳에서 술을 마셨으니 하림이 알았다간 정말 큰일이었다.

“끝……이요?”

“네, 죄송합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오시면, 손님?”

비틀비틀 학교 정문을 나와 술이라도 깨고 들어가려고 하림의 집으로 무작정 터덜터덜 걸었다. 어떻게 얘기를 해야 좋을지 몽롱한 머리를 억지로 돌려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배드 엔딩밖에 나오지 않는 시나리오에 동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김율하만 아니었어도 안 마셨을 텐데.

이대로 차도에 뛰어들까 하던 때 동규의 눈에 보인 건 꽃집 간판이었다. 동규는 코를 훌쩍이며 꽃집 간판을 향해 홀린 듯이 걸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끝이라니. 끝이 났다니.

“휴, 휴지 드릴까요?”

“아니요……. 저…… 꽃 주세요…….”

문에는 클로즈를 걸어 놓고 내일 있을 세 건의 결혼식에 쓸 화환들을 만들고 있던 꽃집 주인은 밤늦게 찾아와 갑자기 엉엉 우는 손님 때문에 당황했다. 수도꼭지라도 틀어 놓은 것처럼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는데 휴지는 싫다고 한사코 거절하면서 휴지 말고 꽃 달라는 손님은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제정신인 사람이 왔어도 내일 오시라고 해야 할 판에 술에 취한 사람이 들어왔다는 건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학생, 일단 눈물 좀 닦아요. 너무 우네.”

“제, 발요……. 저 진짜 꽃다발 필요해요……. 하림이한테 미안, 해서 이대로는 집에…… 못…….”

입구를 꽉 채우는 커다란 덩치의 손님이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 우는 광경은 살면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꽃집 주인은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꽃다발 만들어 주겠다며 우는 사람부터 달랬다.

“무슨 꽃으로 할 거예요?”

조금 진정된 듯한 동규는 드디어 휴지를 받아 들고 눈물을 닦았다.

“몰라요……. 사과할 건데…… 꽃보다 네가 더 예쁘다구, 그렇게 말, 하면서…….”

왜 또 우는데! 꽃집 주인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면 제가 알아서 예쁘게 만들어 드려요? 사이즈는요?”

“네……. 사이즈는, 큰, 엄청 큰…… 여기 있는 꽃 다 주시, 면…… 어떡해, 너무 슬퍼요. 미안, 해, 서…… 제가 칵테일을, 먹을 생각이 없었거든요…….”

꽃집 주인은 의자를 끌어와 울보 손님을 앉혀두고 엄청 큰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돈은 있냐고 물었더니 하림이 카드 있다고, 이거로 차도 살 수 있다고 알 수 없는 말을 하다 휴지에 얼굴을 묻어 그냥 재능 기부한다 생각하고 꽃을 골랐다.

뭐가 큰 잘못을 했다고 하는 것 같고 사과를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사과의 선물로 향기 나는 꽃다발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크기는 이 정도면 돼요?”

“아니요…….”

“더 크게?”

“네……. 세상에서 제일 크게 해 주세요……. 저 돈 많아요. 아니, 하림이가요. 이거 하림이 카든데…….”

그러면서 꺼낸 까만색 카드는 얼핏 봐도 범상치 않아 꽃집 주인은 마음을 놓았다. 만약 한도가 초과됐다거나 잔액이 부족하다고 뜨면 연락처와 신분증을 받아 둘 생각이었다.

그 뒤로도 사이즈를 몇 번이나 확인하기 위해 물어보았는데 자꾸만 더 크게 해 달라고 울보 손님이 요청하는 바람에 꽃집 주인은 살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어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어 갔다.

동규가 사죄의 꽃다발을 자꾸자꾸 불리던 그 시각, 하림은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동규는 하림이 소파에서 자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여기는 현관문이 열리면 방보다 더 빨리 알 수 있는 곳이라 가끔 동규가 친구들과 늦게까지 노는 날이면 소파에서 동규를 기다리다 잠에 들곤 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과제하느라 저녁도 먹지 않고 잠에 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하림은 동규가 꽃집에서 무려 50만 원이 넘는 초대형 자이언트 꽃다발을 결제한 문자도 확인하지 못했다.

제 커다란 몸을 다 가리고도 남는 꽃다발 덕분에 의기양양해진 동규는 문을 열고 들어와 자고 있는 하림에게 입부터 맞췄다. 칵테일도 마셨고 하도 울어 머리가 하얗게 비었기 때문에 입술만 꾹 누른 게 다였다. 하림은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바닥에 굴러다니는 엄청난 크기의 꽃다발 때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저거…….”

하림의 시선을 따라 간 동규가 꽃다발을 들고 섰다가 문득 드라마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가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 죽을죄를 지었는데…….”

꽃다발에 가려져 동규는 보이지도 않는다.

“봐주면…… 안 돼? 잘못했어…….”

목소리는 또 얼마나 조그만지, 하림은 두 귀를 쫑긋 세워 겨우 동규의 목소리를 들었다.

“무슨 죄를 지었는데.”

“나…….”

“응.”

“나, 하림아……. 규연이 누나랑…… 마셨어…….”

“술?”

“으응……. 미안해……. 근데…… 진짜 쪼금…… 마셨어. 손바닥만큼, 칵테일…….”

꽃다발 너머로 하림이 하는 말들은 오로지 단답이라 동규는 꽃다발 작전은 실패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림이 화를 내는 건 아닌지, 이 집에서 나가라는 건 아닌지, 지문을 삭제당하면 어쩌나 싶어 코끝이 찡해졌다.

“미안해…….”

하림은 소리 죽여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동규의 정수리가 보였다. 술 마셨다고 했으니 안 봐도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게 훤했다.

“꽃은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무척이나 다정한 말투에 동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올렸다.

“……이 꽃들 다 합쳐도 너보다 안 예쁘다고 말하려고 샀……어.”

“그래?”

“응……. 거기 주인이 말해 줬는데 꽃향기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화도 풀릴 거라구……. 그리고 이거…… 빨간색 장미꽃 꽃말은 사랑…… 불타는 사랑이래. 그리구 이거…… 이름 까먹었는데 얘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이고 얘는…… 영원한 사랑, 그리고 얘는 히아신스인데, 보라색 히아신스 뜻이 미안합니다래…….”

“그럼 얘는 뭐야?”

하림이 주황색에 까만 점박이 무늬의 특이한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그건?”

“호랑이꽃인데…….”

“이름 귀엽다. 꽃말은?”

술에 취해 울면서도 꽃말은 기억해 온 동규가 기특해서 물었더니 동규가 대답을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건 기억이 안 나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저으며 그건 아니란다.

“그럼 뭔데.”

“……나를.”

“나를?”

“사랑해 주세요…….”

하림은 동규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동규의 얼굴을 붙잡았다.

“미…….”

거의 들리지도 않게 속삭이는 말이 완성되지 않도록 하림은 동규의 입에 입을 맞췄다. 여전히 풀이 죽은 눈동자에 하림은 입술을 살짝 떼고 “네, 김동규 사랑해 줄게요.” 하고는 다시 키스를 하려는데 그만 웃음이 터져 동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 진짜, 귀여운 짓 잘해.”

“하지만.”

“잘 했어. 누나랑 잘 마셨어. 미안해하지 마. 뚝 해.”

방금 전까지 엄마에게 하림이와 헤어졌다고 얘기하는 상상까지 했던 동규는 하림의 잘했다는 한마디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하림의 넓은 품으로 파고들었다. 하림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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