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4 38화 (48/53)

38

작년에는 시간표도 별로였고 평일 5일 중 적게는 4일을 차가 있는 하림이 동규네 학교로 놀러왔기 때문에 동규가 하림의 학교로 간 적은 1년을 통틀어도 두 손에 꼽았다. 하늘이 놀러 오래도 학교 근처에서 만났지 학교 안까지, 그것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혈혈단신으로 온 건 오늘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동규가 하림의 학교 안까지 올 때는 하림이 아픈데도 학교에 출석하겠다고 나와서 아픈 하림을 데리러 오는 경우뿐이었다. 그 때마다 하림이 자기 다른 차를 끌고 오라고 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차 없이 큰 캠퍼스를 걷고 있는 게 어색했다. 학교 캠퍼스를 도는 셔틀 버스도 있고 하림이 알려준 자연대 쪽으로 도는 버스인 5513번도 있지만 동규는 그냥 S대입구역에서 내려 쭉 걷고 있었다.

세문고도 국내 고등학교 중 특목고를 제외하고는 학교 부지로는 수도권에서 제일 큰 곳이고 D대도 동규가 느끼기로는 작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하림의 학교는 커도 정말이지 너무너무 컸다. 차를 타고 올 때도 괜히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지하철에서 내려 하림에게 가는 길이 대륙 횡단 길인 양 끝이 없었다. 셔틀버스 탈 걸 그랬나. 아니다.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어 돌아갈지도 모르니 이렇게 걸어가는 게 더 낫다.

오늘은 하림에게 말도 없이 덜컥 S대에 온 것이었으므로 동규는 하림이 바쁜데 귀찮게 구는 건 아닐지, 정문을 통과했을 때라도 연락을 했어야 하는 건 아닌지 후회가 들었다. 지금이라도 뒤를 돌아 집으로 갈까 하는 생각이 수천 번씩 들었다.

이건 다 친구들이 바람을 넣어서 그렇다. 몇 번 하림의 차를 타고 학교를 왔다 갔다 했더니 친구들은 아예 그걸 동규의 약혼자가 선물해 준 차라고 여겼다. 하림이 사다 준 옷도 친구들이 어디서 난 옷이냐고 물으면 사귀는 애한테 선물 받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1년간 동규를 지켜보던 친구들이 새학기를 맞아 동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담스럽진 않아?’

‘조금.’

‘그럼 너는 걔한테 뭐 해 줘?’

요리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혀 위로 올라왔지만 선뜻 내뱉지는 못했다. 동규가 하림에게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 주긴 하지만 하림도 동규에게 종종 맛있는 걸 만들어 줬고, 운전도 동규가 많이 하긴 하는데 하림도 때때로 차를 몰았다.

편지 쓰기나 사진 찍어 주는 것도 있긴 한데 하림에게 선물 받은 이야기를 하다가 고작 사진 예쁘게 찍어 주기를 해준다고 말하기엔 뭔가 너무 엉뚱하고 보잘것없는 대답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림이 아무리 익숙해지라고 한들 지나치게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동규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세 친구들을 눈빛만 교환하다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풀어놓았다.

‘좀, 차이 나는 연애 하고 있으니까 걱정이 돼서.’

‘그냥 우리가 네 연애 잘 되고 결혼까지 잘 했으면 하는 바람에 오지랖 부리는 거야.’

하림과 싸우지도 않고 평소랑 똑같은 상태지만 친구들이 왜 이러나 싶다가도 아는 사람들 얘기까지 끌어다 말해 주는 친구들의 얘기에 푹 빠져 진지하게 듣게 되었다. 엄마 친구 딸이 판사 집안에 시집갔다가 이혼했다더라, 아빠 친구의 친척의 누구 아들은 사고 쳐서 의사 집안에 장가갔는데 무시를 엄청 받고 있다더라,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는 이렇고 저렇고 등등.

‘근데 이건 다 극단적인 얘기들이고 너도 아빠가 그 시절 국민 영웅이잖아.’

‘그래도…….’

‘아직도 가끔 광고 찍으시던데?’

‘그거 다 제자들한테 써…….’

하림과 서로 좋으면 된 거라 생각했다. 부모님 일은 나중 일이니 밀어 두더라도 하림의 성격상 불편하고 싫은 게 있다면 확실하게 얘기할 거란 걸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친구들이 걱정할 일은 없었다. 반대로 동규도 서로 맞춰 가기 위해 하림에게 서운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얘기를 하는 편이었고.

그래도 봄이 찾아왔으니 작은 꽃다발 하나 들고 바람처럼 가 보라며 시은이 작게 말했다. 동규가 그 말에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려고 하는 걸 세 친구가 뜯어말렸다. 그런 건 말 없이 가야 좋아할 거라고.

그래서 정말 바람처럼 훌쩍 왔다. 꽃다발을 사고 싶었지만 단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꽃다발을 주기가 뭐해 화분을 하나 골랐다.

꽃이 있는 걸 고를까 하다 꽃이 폈다는 소리는 이제 꽃잎이 떨어질 일만 남았다는 거고, 꽃이 아직 피지 않은 건 꾸준한 관리가 필요해 매일매일이 바쁜 하림이 신경 쓰기에 조금 힘들어보였다.

여러 이유로 동규가 고른 것은 동글동글한 모양의 작은 선인장. 3~4주에 한 번만 물을 주면 된다는 직원의 말에 선인장 화분이 쭉 늘어져 있는 곳에서 한참이나 서서 제일 예쁘게 생긴 걸 골랐다. 지나가면서 언뜻 볼 땐 다 비슷비슷해보이던 것들이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조금씩 생김새가 달랐다.

아무튼 동규는 귀여운 선물 포장이 된 미니 화분을 든 채 하림이 수업을 듣고 있을 25동 앞에 섰다. 제 시간표보다 하림의 시간표를 더 꿰고 있는 동규인지라 하림이 어느 강의실에 있을지 훤히 보였다.

오늘 이 시간에는 25동 307호에서 수업을 듣는다. 아직 끝나려면 40분쯤 남았는데 307호 문 앞에 서있을지 아니면 건물 앞에 앉아 있을지 잠시 고민하다, 카페에서 와플과 커피를 한 잔 사 건물 앞 벤치에 앉았다. 커다란 나무 그늘 덕분에 해를 쬐고 있지 않아도 되었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꼰 다리를 까딱까딱했다. 아직 봄바람이 쌀쌀했지만 체온이 높은 동규는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사람들의 목소리, 저 멀리서 전해져 오는 도시의 소음이 들렸다.

책이라도 읽을까. 햇살이 좋아 가만히 광합성하고 있는 게 좋다. 책 꺼내기는 귀찮아 멍하니 앞만 바라보며 동규는 머릿속을 조금씩 비우면서 시간을 죽였다.

“똥규! 왔으면 연락을 해야지!”

조각처럼 앉아있던 동규의 뒤에서 튀어나온 하늘 때문에 동규는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잔을 바닥으로 떨구고 말았다. 하늘이 동규의 목에 팔을 둘러 짤짤 흔들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다 깜짝 놀랐네.”

하늘은 도서관에 있다가 같은 과 동기에게 ‘이거 네 친구 맞지’라며 동규의 사진을 받았다. 자연대 건물 앞에 앉아 있단 소식을 접수하고 그대로 짐을 정리해 살금살금 동규의 뒤로 온 거였다.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거는 게…… 어딨어.”

“알았어, 알았어. 커피 사오면 되잖아.”

아직 커피가 반이나 남았는데 다 쏟아 버렸다. 동규가 뚜껑과 분리된 테이크아웃 컵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왔더니 하늘이 동규가 사 온 선인장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뭔데 화분에 리본까지?”

“몰라.”

“딱 보니 서하림 주려고 선물 포장 해 달라고 한 각인데 이거.”

“……맞아.”

하늘에게는 거짓말을 했다간 열 배로 철퇴를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동규는 빠르게 진실을 말했다.

“음.”

“왜, 설마 상태가 안 좋은 선인장이야?”

“아니.”

“그럼?”

“그냥. 좀, 음…… 소박하고 아기자기하게 연애하네.”

“귀엽지. 이게 직원분이 알려 주신 건데 동그랗고 예뻐서 인기가 제일 많은 선인.”

“놀러 온 김에 밥이나 사라.”

“응?”

“어! 서하림!”

하늘이 손을 흔들어 동규는 뒤를 돌았다. 하지만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동규가 하늘을 째려봤고 하늘은 딴청하며 휘파람만 불었다. 동규는 입술만 삐죽이고는 벤치 오른쪽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 사 온다며.”

“아, 맞다.”

커피를 사 온 하늘은 휴대폰을 꺼내 게임을 시작했다. 하늘이 소리를 줄여 뿅뿅거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하늘이 사다 준 커피도 다 마셨다. 동규는 저 앞 쓰레기통을 바라보며 생각을 비웠다. 이러고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갔다.

동규는 여전히 눈도 깜빡이지 않고 조각처럼 앉아 있었는데, 게임을 끝낸 하늘이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친구가 웃긴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내 줄 때면 동규에게 보여 주거나 동규를 퍽퍽 때리며 웃었다. 동규는 제 쪽으로 다가온 하늘 때문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에는 왼쪽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귀찮아서 꺼내지 않고 있던 책을 빠른 속도로 꺼내 들었다.

“차단?”

“……바빠. 책 읽을 거야.”

“치사한 놈.”

“너도 게임해.”

“할 거야.”

벤치 양 끝에 앉은 동규와 하늘은 그 이후로 말 한마디도 없이 책을 읽고 게임을 했다. 동규는 책을 읽다 벌떡 일어났다.

“뭐야.”

“서하림 발소리 나.”

“뭐?”

정말 건물에서 하림이 친구들과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하늘은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본 듯한 기시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언제였지, 서하림도 이랬던 것 같은데. 잘 떠오르지 않아 하늘은 아무렴 어떤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 이런 것도 닮고 천생연분인가 보지.

“야 서하림!”

기껏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까지 알아채 놓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하림에게 다가가진 못하는 동규 대신 하늘이 하림을 불렀다.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들 얘길 듣던 하림이 뒤늦게 동규와 하늘을 발견하고 벤치로 달려왔다.

“김동규?”

동규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다 두 팔 벌려 다가온 하림에게 꼬옥 안겼다. 하림의 친구들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 동규는 눈동자만 굴렸다. 좀 위험한 거 아닌가.

“갑자기 왜 왔어? 연락도 없이? 나 보고 싶어서?”

“응.”

“보고 싶었던 거 어떻게 알고.”

“나도 보고 싶었어.”

“아, 너무 좋아.”

하림은 이대로 계속 안고 싶은 걸 참고 동규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하늘도 안아 주었다.

“나는 김동규 안아 주면서 겸사겸사 떨이로 안아 주는 것 같은 건 내 착각?”

“아니야.”

“뻥치지 마라.”

“다 알면서 굳이 묻지 마라.”

“나 따라하지 마라.”

하늘을 놓아준 하림이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고 인사를 했다. 세 사람은 학교 근처에 하늘이 먹고 싶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놀러온 동규가 사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동규가 밥에 후식까지 쏘게 됐다. 오늘의 메뉴는 수제 돈가스였다.

“대박. 진짜 귀엽다. 어떻게 선인장이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어?”

하림은 동규가 수줍게 내민 선인장을 보고 신나게 사진을 찍더니 농대 다니는 친구에게 보냈다. 원예 동아리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라고 했다.

“귀여워서 골랐어.”

“진짜 감동이야! 귀엽지.”

“어. 너는 김동규가 해골 모양 선인장을 가져왔어도 귀엽다고 할 거잖아.”

“맞아.”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큰 선인장을 살 걸 그랬나. 아니면 공기 정화에 좋은 식물들이라거나 그런 것도 괜찮은데. 너무 작은 걸 사다 준 듯해 동규는 조금 머쓱해졌다. 하림과 하늘이 투닥거리는 동안 동규는 하림에게 다음번에는 뭘 해 주면 좋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생각의 끝은 조금 원대한 것이었다. 동규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돈을 아주 많이 벌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지금보다 백배는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았다. 먼 미래의 계획을 하나 세워 두고 나니 저 스스로가 뿌듯해 기분이 좋아졌다.

밥 먹는 동안 친구에게서 답장이 왔다.

“대박. 동규야 이거 봐.”

[모양 예쁘게 잘 잡혔네〉

[얘 이름〉

[식물러들 사이에서〉

[곰돌이 선인장임〉

[학술명은 따로고〉

[선인장 키우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름〉

“곰돌이처럼은 안 보이는데.”

“어쨌든 곰돌이 선인장이라는 게 대박이야.”

“왜, 운명이라고 하시지.”

하늘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하림이 자기가 할 말을 대신 해 줬다며 박수를 쳤다. 이제 두 친구의 사랑 놀음에 포기를 한 지 오래된 하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단무지를 쿵 소리 나게 찍었다.

“걔도 규염둥인지 귀염둥인지로 부르게?”

“안 돼.”

“왜?”

“규염둥이는 김동규 거라 얘는 다른 이름 지어 줄 거야.”

“네 그러시겠죠.”

“뭐 하지. 지금부터 생각해야겠다.”

“그런데 김동규는 별명 부잔데 너는 김동규가 뭐라고 부름?”

돈가스 먹던 동규가 벼락을 맞은 듯이 충격적인 얼굴을 했다. 하림은 별 대수롭지 않게 “이름 부르잖아.” 하고 화분을 내려놨다.

“이름 말고.”

“그럼 뭐.”

“그 막, 간지러운 거.”

“간지러운 거 뭐. 자기야?”

하늘은 어깨만 으쓱 했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라 동규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하림은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돈가스를 썰었지만 하늘은 흥미로운 얼굴로 동규를 쳐다봤다.

“그게…….”

“김똥규 고장 났다. 고장 났어. 이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없음 말고.”

바로 다른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됐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배가 어느 정도 찼을 때 하늘이 포크로 동규를 가리키며 말했다.

“똥규, 이번에는 우리 학교 축제 놀러 와.”

“하지만 너네 학교 축제 재미없다고 서하림이 그랬어.”

“오라면 친구가 무슨 이유가 있으니 오라고 했겠거니 하고 걍 와. 서하림도 공부하다가 이것저것 먹으러 온대.”

“진짜?”

하림이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푸드 트럭 여러 개 오고 맛있는 거 먹고 그런 게 다긴 해. 주점 금지인 건 아쉽지만 다들 알아서 맥주 사서 들고 다님. 트램펄린도 있어. 존나 잼씀. 너랑 같이하면 무게 때문에 3m는 날 수 있겠다. 그리고 공연도 다른 곳처럼 사람들 미친 듯이 오는 것도 아니고 반 정도밖에 안 차서 널널해서 좋음. 또 음, 서하림이랑 음대 연못길 걸어도 좋을 듯.”

“한강 밤도깨비 야시장이랑 다를 게 뭐지…….”

정확한 동규의 지적에 하늘은 하림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해.

“음대는 무슨 말이야?”

“서하림 너 그 얘기 안 했어? 입학하자마자 했을 거 같더니.”

“아직.”

학생회관 가는 길에 있는 연못은 동규도 하림을 따라 몇 번 거닐어 본 적이 있는 곳이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음대 얘기에 하림만 바라보았다. 하림은 나중에 알려 준다며 동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맛있는 거 많이 사 줄 테니까 하루 정도는 우리 학교에서 놀자. 너 좋아하는 느티나무 와플도 사줄게. 나 강의 다 끝날 때까지 서하늘이랑 놀고 있어.”

“김동규 수목금 중에 무슨 날이 제일 괜찮냐?”

“너 편한 날로 해.”

“네 시간표 좀 알려 줘.”

“잠깐만.”

때마침 하림의 휴대폰에 전화가 와 진동이 울렸지만 하림은 누가 전화한 건지 확인한 뒤 휴대폰을 엎어 놓았다. 잠시 뒤 전화가 또 걸려왔지만 하림이 취한 행동은 조금 전과 같았다.

“설마 또 걔?”

“응.”

하림은 친구들에게 뜬금없이 걸려오는 영상 통화를 자주 받아 주는 편이었지만 받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무시하는 게 아니라 받아서 지금은 전화가 어렵다고 말하거나 아예 휴대폰을 꺼 버렸다. 평소랑 다른 반응에 동규만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하늘은 누가 전화한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하늘도 하림도 그게 누군지는 동규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걍 무음 하거나 꺼 버리지 왜.”

“연락 올 거 있어.”

“쯧쯧. 야 김동규 축제 꼭 와야겠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어봐도 하늘이 오면 얘기해 준다며 말을 아꼈다. 하림도 입을 다문 걸 보니 동규는 도대체 뭔지 싶어 궁금해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축제는 이번 달 말이었고 급한 거라면 바로 말해 줬을 텐데 그때 얘기해도 괜찮은 걸 보면 큰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동규는 궁금함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고, 추가 주문을 하기 위해 메뉴판을 펼쳤다. 두 개를 더 시킬지 아니면 세 개를 더 시킬지 하림에게 물어보는데 하늘이 자기도 한입 더 먹겠다고 하기에 세 개를 주문했다.

선인장 봐야 한다고 동규에게 차 키까지 건네준 하림은 집에 오는 내내 화분을 손에 쥐고 이름을 뭐로 지어 줄지 고민했다. 동규는 고작 손바닥만 한 화분에 이렇게 행복해하는 하림을 보자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진짜 별거 아닌데.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으면서 하림이 뿌듯한 얼굴로 동규를 불렀다.

“이름 정했어.”

“뭔데?”

“후보가 한 3천 개는 있었는데 김동규 주니어 줄여서 동주. 문학적인 여운도 함유되어 있어.”

“…….”

전에 동규가 하림이 준 공룡 쿠션에 지어 준 이름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그리 센스 있는 이름은 아닌 것 같아 동규는 고개만 끄덕였다.

“마음에 안 든다는 반응이군.”

“아닌데.”

“작명 센스 별로라고 생각한 거 다 읽었거든.”

“별로라고는 생각 안 했어. 그냥 조금…… 좋지는 않구나…….”

“그럼 나머지 2999개 중에서 골라야겠다.”

김동규 주니어든 뭐든 하림을 뒤에서 끌어안은 동규가 하림의 목에 입을 맞췄다. 하림의 이름을 작게 속삭이며 키스를 졸랐는데도 하림은 동규의 손을 끌어와 뽀뽀를 할 뿐 동규에게 입술을 내주진 않았다.

“선인장은 관심 끄고 살아도 잘 크니까, 너무 예뻐하진 마.”

“이런 작은 식물한테도 질투해?”

“응.”

“욕심이 많네.”

“아, 서하림.”

하림에게 붙잡힌 손을 빼낸 동규가 하림의 턱을 잡아 돌렸다. 하림이 동규에게 입을 맞추고 진득하게 동규의 윗입술을 빨았다.

“근데, 나도 욕심 많아.”

“응. 알아.”

“알아? 뭘 알아. 눈치도 없는 게.”

“스무 살 새내기를 약혼남 만들어 버린 게 누군데.”

“잘 아네. 다 컸어.”

작게 웃으며 입을 맞춰 온 하림의 옷을 벗기는 동규의 손은 무척 빨랐다. 바지까지 순식간에 벗겨낸 동규는 하림의 것을 바로 입에 물었다.

“애기가 보는데.”

“……누구?”

“식물들도 다 느낄 수 있어.”

“그래? 그럼 잘 보라고 해.”

하림의 앞과 뒤를 게걸스럽게 빨아 댄 동규는 하림을 벽에 가두고 끝까지 했다. 동규도 그렇고 벽과 동규의 사이에 낀 하림도 세 번을 싸고 나서야 두 사람은 떨어졌다. 한참을 허공에 매달려 있다가 두 발을 땅에 내렸을 때 하림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동규가 업어 준다고 하는 걸 밀어내고 두 발로 선 하림이 동규의 손을 잡은 채 가장 가까운 욕실로 들어갔고 동규도 그런 하림을 따라갔다.

중간고사 끝난 기념이라며 동규 친구들이 하림과 저녁 약속을 잡았다. 장소는 당연히 D대 근처 술집이었다. 술 먹자는 얘기에 하림은 기다렸다는 듯 콜을 불렀고 다 같이 죽어 보자며 신난 와중 술 먹기 싫어하는 동규만 할 말은 많지만 하지 못한 채 친구들의 메시지를 읽기만 했다.

동규는 한마디도 없었지만 하림과 친구들은 어디서 언제 몇 시에 만나자며 얘기를 끝내 버렸다. 약속 당일 동규는 신이 난 친구들에게 끌려갔다. 그래도 도살장 끌려가는 느낌은 아닌 게, 이 친구들과 있을 땐 술 대신 음료수만 마시면 되어 그건 좋았다. 어차피 하림도 올 거고.

“어!”

하림이 조금 늦는다며 먼저 가 있으라고 한 탓에 동규와 친구들이 먼저 술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동규를 알아본 같은 학교 학생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중에는 주안의 친구도 있어 주안이 안주 나오면 오겠다며 타 과생 무리에 잠시 앉았다.

“쟤네 경영과 애들인 것 같은데.”

“김동규 따라다니는 1학년 있는 거 보니 맞네.”

“최주안은 걍 포기하지 왜 쟤한테 맨날 되도 않는 작업질이야. 쟤는 김동규 좋다고 하고 있는데.”

“보니까 경영, 회계, 경정 다 있어. 걍 경영대 모였나봐.”

유주와 시은이 구석에 자리를 잡으며 경영대는 사람도 많은데 왜 여기서 이렇고 있냐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동규도 자길 발견하고 벌떡 일어난 1학년을 봤을 텐데 그 후배에 대한 언급이 일언반구 없어 유주와 시은도 관심을 끄고 메뉴판을 펼쳤다.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는 김동규는 오늘도 콜라만 드시겠고. 너는 뭐 먹을래. 생과일 소주? 아니면 걍 바로 소주 고?”

“여기 왔으면 1차로 셰프님표 생과일소주부터 먹어야지. 셰프님 섭섭해하실라. 그 다음에 리얼 소주 가자.”

“오키. 최주안은 진짜 안주 나올 때까지 저기 있으려나 본데.”

동규가 경영대 학생들로부터 등을 돌린 자리에 앉아 뻥튀기만 집어먹는 동안 유주와 시은은 목을 빼 경영대 쪽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주안과 1학년 후배가 유주, 시안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뭐야, 쟤네.”

“이상한데. 안주 김동규랑 같이 골라서 주문해 줘. 나는 최주안 데리러 간다. 분위기 좀 이상해.”

유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얼큰해물짬뽕.’ 하고 경영대 쪽으로 사라졌다. 메뉴판을 세상 진지하게 보던 시은이 동규에게 뭐 먹고 싶냐고 물었다.

보통 동규, 유주, 시은, 주안 이렇게 넷이 술집에 올 땐 동규가 안줏값을 다 내고 나머지 셋은 탕과 같은 국물요리 종류와 술값만 내지만 하림과 먹을 땐 하림이 전부 다 계산하기 때문에 둘이 상의해 우선 네 개만 가볍게 골랐다. 하림을 믿고 신나게 먹어 볼 작정이었다.

벨을 눌러 주문을 끝마치자 유주가 주안과 돌아왔다. 그 옆에는 경영과 1학년 후배도 함께였다. 시은이 유주에게 눈빛으로 뭐냐고 물었지만 유주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고개만 좌우로 젓고는 시은의 옆에 앉았다.

“자리 다 찼어.”

시은이 후배의 인사를 듣기도 전에 말했다. 주안은 동규의 옆에 앉으며 친구들과 후배의 눈치만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빈자리 하나 있는데요?”

“거기 주인 있어. 이제 곧 올 거야.”

“지금은 없는 거네요. 선배님에게 할 말 있어서 그것만 얘기하고 돌아갈게요.”

“김동규보고 농구 해 달라고 하는 거잖아.”

“맞아요!”

“야, 너 거절 안 했어?”

“했어.”

“거절했다는데요.”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후배가 말하는 농구란 공대에서 주최하는 농구대회를 말했다. 실제 선수들로 이루어진 학교 농구부 말고 일반 학생들로 이루어진 공대 농구 동아리는 가입도 아무나 할 수 없다. 오로지 공대 남학생 중 어느 정도 기준을 넘겨야만 가입할 수 있는 이 동아리는 역사도 오래되고 아마추어 농구팀임에도 실력도 꽤 되어 공대 내부에서도 자기들끼리 팀 대회를 열기도 하고 타 과생들의 도전을 받기도 했다.

작년에는 사회과학대 학생들과 예대 학생들이 팀을 꾸려 덤볐다가 처참하게 패배했고 올해는 경영대가 도전해 보려던 참이었다. 하필 경영과에는 3년 전 동규의 활약상을 실시간으로 관람했던 세문고 졸업생이 있었고, 그리하여 경영대에서는 동규에게 계속 러브콜을 끊임없이 보냈다. 그 중심에는 패기 좋은 1학년인 율하가 있었다.

“우리 과 이번에 진짜 이길 자신 있고요, 참여하는 선배 오빠들 전부 키 180 이상에 열의도 넘치고 공대 이겨 보자고 으쌰으쌰 하는 중이에요.”

“응.”

“한다고요?”

“아니.”

“아, 왜요. 선배님 같은 분이 같이 해 주면 정말, 저엉말 큰 힘이 될 것 같은데! 공대 이기고 학교의 영웅이 되고 싶지 않으세요?”

“응.”

“그, 그렇다면…….”

“엣헴. 예쁜 후배가 얘기하는데 그렇게 너무 싫다고만 하면 쓰나.”

주안은 예쁘장하게 생긴 율하에게 나름 멋진 선배의 모습을 어필하고 싶었는지 목을 가다듬고 팔짱까지 낀 채였다. 그러나 율하는 제 옆에 앉은 주안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주안의 옆에 앉은 동규에게만 눈을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에 주안이 목소리를 깔고 얘기하는 것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축제 시작 직전으로 농구 경기 날짜 잡았거든요. 시간 많이 남았구,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는 건데 벌써부터 안 된다고만 하는 게 어딨어요. 제가 열심히 응원 해드릴게요. 자신 있어요!”

“글쎄, 딱히. 귀찮아…….”

서하림 언제 와. 술은 첫 안주가 나올 때 같이 달라고 했기 때문에 아직 테이블에는 물과 뻥튀기가 전부였다. 안주는 또 왜 이리도 늦게 나오는지. 뻥튀기라도 더 덜라고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알바생이 안주를 가져왔다.

“날치알치즈계란말이랑 술 드릴게요.”

“다른 것도 금방 나오죠?”

“네. 이제 순서대로 나올 거예요.”

테이블 위에 하나둘 채워지는 안주들을 보던 율하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드시는 거 제가 다 사 드리는 건 어때요. 제가 쏘겠습니다.”

동규는 그 비장한 얼굴에 시큰둥한 얼굴로 맞대응했다.

“계산할 사람 따로 있어.”

“누구요?”

“율하 너도 알 걸. 김동규보다 더한 유명인이라.”

“우리학교 사람이에요?”

“아니. S대생.”

“설마, 오늘 그분이랑 술 먹는 자리예요?”

“그분?”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여기서 오늘 계속 있어도 될까요?”

친구들이 거절하기 전에 주안이 냉큼 선수를 쳐서 대답했다.

“당연하지! 근데 너네 선배들은?”

“인사하고 올게요.”

“난 싫어.”

“나도.”

유주와 시은이 계란말이를 먹으면서 딱 잘라 말했다. 좋다고 한 주안만 머쓱해졌다.

“그럼…… 김동규 선배님은요? 저 오늘 여기서 선배님 친구인 그분도 소개시켜 주시고 경기 참여 얘기랑 이것저것 제 얘기도 많이 해 드리고 싶고 또 선배님 이야기도 궁금하고…….”

“얘. 율하야.”

술 식기 전에 정리하자며 유주와 시은이 눈빛을 교환했다. 입을 연 건 유주였다. 시은은 술병을 까 자신의 술잔과 유주의 술잔 그리고 주안의 술잔까지만 술을 따랐다.

“네?”

“김동규 결혼할 사람 있어.”

“……알아요. 그런데 그게 왜요? 결혼을 한 상태도 아니고 서류상 아무것도 없는 약혼이잖아요. 결혼해도 이혼 많이 하는데 약혼이 뭐 대단한 거라고.”

말이 좀 심하다고 하려던 유주와 시은은 조용히 해 달라는 손짓과 함께 등장한 하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림이 뒤에서 율하를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누구냐고 물었다. 유주도 시은도 시선은 율하에게 고정한 채 어깨만 으쓱했다. 동규는 험악한 얼굴로 계란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힘없는 계란이 그 누구 대신 묵사발로 변해 갔다.

“아니에요. 약혼도 결혼 전에 하는 약속이니까…… 그걸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선배님 엄청난 사랑꾼인 거 알구요, 그래서 고백해 봤자 받아 주시지 않을 거 아니까 좋다고 하진 않더라도…… 후배로는 잘 지낼 수 있는 거잖아요. 농구도…… 사심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해도 저는 정말 선배가 멋지게 코트 누비고 하는 거 보고 싶고 그랬으면 좋겠고…… 죄송해요. 제가 선배들 오기 전부터 술을 마시고 있어 가지구 말이 좀 횡설수설해요. 제가 혹시 선 넘는 발언 했다면 잊어 주세요. 죄송합니다. 저도 술 한 잔만 마실게요.”

주안의 잔에 담긴 술을 남김없이 마셔 버린 율하가 선배 술 뺏어 먹어 죄송하다며 물도 마셨다.

동규는 불편해도 너무 불편하고 불쾌해도 너무 불쾌했다. 선배들과 술 먹는 자리를 열심히 빠지는 이유를 고르자면 아주 많지만 내가 아는 애가 너 소개시켜 달래, 네가 약혼한 거 아니었으면 고백하는 건데 하는 소리를 자주 들어 매번 규연의 이름을 팔아먹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친구들과는 술집에 와도 그런 주제로 얘길 나누지 않기에 좋은 거였다. 그런데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이런 식으로 끼어든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약혼한 게 뭐가 그리 대수냐는 말에 동규는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김율하.”

“저 김율하 아니고 민율하인데요.”

“그거나 그거나.”

“……네?”

“네 이름이 뭐든.”

“그, 그게 무슨 말인지…….”

더는 말 꺼냈다간 곱게 나가지 않을 것 같아 동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깨 위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왔고 그 손은 일어난 동규를 힘으로 다시 앉혔다. 동규가 고개를 돌려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후배로 보이는 뉴 페이스 이름이 민율하야? 우리 국문과?”

“서하림! 뭐 한다고 이렇게 늦었어!”

“아직 해도 안 졌다.”

“야 너 이과생이면서 무슨 우리 국문과야!”

유주와 시은이 하림을 격하게 반기며 얼굴을 폈다. 하림은 “나 명예 국문과 아니었어?” 하고 가볍게 웃었다. 율하는 눈을 반짝이면서 하림에게 인사할 타이밍만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야 덥겠다. 옷부터 벗어.”

“싫어. 안 더워.”

“넌 진짜 신기할 정도로 더위 하나도 안 타더라.”

하림은 유주의 옆에 앉았다. 율하의 맞은편이었다. 율하는 하림의 등장에 TV와 SNS에서만 뵙던 분을 직접 보게 되어 영광이라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림이 입고 있는 학교 과잠도 멋지다고 박수까지 쳤다.

“저 여기 학교 매일 출퇴근하는데 직접 본 건 처음이라구요.”

“네! 저는 학교 다닌 지 이제 겨우 두 달 된 걸요. 와 진짜 신기해. 연예인 본 느낌이에요 완전!”

“신기할 거까지 있나요.”

“말 놓으세요. 진짜 잘생기셨어요!”

유주가 하림의 발을 툭툭 쳤다. 하림이 율하를 본 채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근데 오늘 약속은 우리 다섯뿐인데 여긴 왜 온 거야?”

“율하 내가 데려왔어! 저기 경영대 자리에서.”

“아. 그게요, 이번에 공대랑 농구하는 거 우리 경영대에서 도전장 냈는데 김동규 선배 영입하는 담당 제가 하기로 했거든요.”

“그렇구나. 동규 농구 잘하지.”

나도 술 달라며 하림이 술잔을 유주 쪽으로 기울였다. 하림이 알아서 하겠거니 싶어 유주는 하림에게 술을 따라 주고 시은과 둘이서만 짠을 했다. 동규는 혼자 술 마시는 하림을 보다가 유주와 시은을 봤다가 홀로 바빴다. 시은이 동규를 불러 휴대폰을 가리켰다.

[아오ㅗ〉

[최주안 개눈새〉

〈왜]

[그냥 보내면 좀 그러니까〉

[하림이가 잘 다독여서 보내려나봄〉

〈뭘 다독여]

〈그냥 가라고 해]

[내가 서하림 생각을 어떻게 알아〉

[아까 너가 화내려던ㄷ거〉

[서하림이 말렸잖아〉

[좀만 기다려보자〉

[쟤네 투명인간이라 생각하고〉

〈짜증나]

〈난 분명히 안 한다고]

〈세 번은 넘게 거절했어]

[기다려방〉

[하림이 믿어보자〉

[하림이 혼자 쫄리면〉

[나랑 유주가 머라고 할겡ㅇㅇ〉

〈알았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은 동규가 젓가락을 들고 열심히 안주를 먹기 시작했다. 주안은 하림과 율하의 얘기에 푹 빠져들어 제 친구들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이건 우리학교 여학생 복지 차원에서도 저는 꼭 선배가 농구를 해 줬으면 좋겠어요.”

“복지?”

“유니폼 입고 코트를 누비다가 땀 흘리는 모습 있잖아요. 운동하는 남자만큼 섹시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 너 취향 되게 구체적이다. 나랑 비슷하네.”

“선배님도 여자 볼 때 그런 거 많이 봐요?”

“아니.”

“뭐야. 비슷하다면서요.”

“내 모습을 말하는 거야. 운동하는 내 모습.”

“그건 그거대로 선배님 섹시한 거 인정. 운동은 뭐 하세요?”

“음.”

이제 슬슬 이야길 끝내고 싶은 하림이 술잔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아, 술잔이 비었네요. 따라 드릴게요.”

“아니 됐어.”

“내가 따라줄까?”

“주안아, 너도 됐어.”

하림은 싱긋 웃어 보이고는 술잔을 옆으로 밀고 율하 쪽으로 몸을 가까이했다. 한 손으로 턱을 짚고 성큼 다가갔더니 율하가 하림의 눈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웬만한 운동 다 잘 하는데 격한 운동 하고 싶으면 스쿼시나 테니스하고 자전거 좋아해서 로드바이크 타는 거 좋아하고 겨울 되면 보드 꼭 타러 가야 하고 스케이트도 재밌고. 승마도 재밌지. 펜싱은 멍 너무 많이 들어서 별로야. 아, 볼링. 요즘 볼링에 빠져서 김동규 데리고 볼링장 자주 가.”

“우와 역시……. 볼링 둘이 하면 누가 이겨요?”

“쟤는 나한테 상대도 안 돼.”

“완전 멋있어요! 나중에 저도 볼링 해 보고 싶어요.”

율하가 다시 하림과 눈을 마주쳤다. 같이 데리고 가 달라는 의도를 알아챈 하림이 활짝 웃었다.

“친구들이랑 한번 가 봐. 재밌어.”

“하하…… 저 친구들 중에 볼링할 줄 아는 애 한 명도 없어요. 혹시 선배님이…….”

“근데, 율하야. 이제 우리끼리 술 마시고 싶은데.”

“아, 네. 저 그러면…….”

“뭐 부탁할 거 있어?”

“저기,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도 되나요?”

“그래.”

“제 친구들도 선배님 다 좋아해요.”

“넌 김동규 좋아한다며.”

“어떻게 아셨어요?”

“유명하던데.”

“그거랑…… 선배님 좋아하는 건 달라요. 아무튼, 제가 가끔 선배님 SNS에 댓글 달면 아는 척해 주시기예요.”

“생각 좀 해 보고.”

“하긴 댓글 너무 많이 달리시죠. 괜찮아요! 제 거에 이렇게 사진 찍은 거 올리면 되죠 뭐.”

하림과 기본 카메라로 몇 장, 필터 써서 몇 장을 찍은 율하는 제 갤러리에 하림의 사진이 있단 것에 쾌재를 불렀다.

“다음에 선배님이랑 제대로 밥이나 술 마셨으면 좋겠어요.”

“시간 되면.”

“네, 제가 선배님 시간에 맞출게요. 사진 정말 감사합니다. 가 볼게요.”

“잠깐만, 그 전에.”

하림의 말에 율하는 발걸음을 멈췄다.

“김동규.”

젓가락을 양손으로 잡고 김치전을 신중하게 삼등분 하던 동규가 화들짝 놀랐다. 모두의 시선이 동규에게로 모아졌다.

“농구 정말로 할 생각 없어?”

“응? 응.”

“하면 응원이나 가려고 했더니.”

하림이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하고 눈을 두 번 깜빡였다. 하라는…… 뜻인가. 하림이 원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저 눈빛이 하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동규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닥 하고 싶지는…… 않아서.”

“진짜로 안 할 거야? 간만에 농구 하면 좋지 않을까? 완전 멋있을 것 같은데. 덩크슛도 넣고.”

“좋을 것 같아.”

“와, 율하야 축하해. 김동규가 농구 해 준대.”

“네?”

이렇게 간단하게? 율하가 믿을 수 없어 재차 물었다.

“진짜 선배 할 거예요?”

“……응.”

“진짜? 요? 지금까지는 계속 안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왜 서하림 선배님이 한마디 했다고…….”

“술 모자라다.”

테이블 벨을 눌러 하림이 술을 더 시켰다. 율하는 뭔가 이상했지만 술을 마신 상태라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지 못해 이상한 무언가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할 수가 없었다.

“가암사합니다…….”

“안녕!”

산뜻하게 웃는 하림과 국문과 선배들을 뒤로하고 어리둥절한 율하가 경영과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리고 동시에 동규를 제외한 유주, 시은, 하림이 테이블 아래서 주안을 발로 찼다.

“아악!”

옆에 잘 앉아 있던 주안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데굴데굴 구르는 걸 본 동규가 무슨 일인가 싶어 주안에게 다가갔다. 주안이 동규에게 매달려 우는 소리를 냈다.

“너 오늘부터 이름 최눈새로 해.”

“낄낄빠빠 모르냐? 부끄러움은 왜 우리 몫인 건데.”

“동규야, 어흐윽, 김동규 빼고 다 가 버려! 이 매정한 놈들! 어떻게 친구를 이렇게, 이렇게…… 아오씨, 존나 아파악!”

“눈치 없이 쟤를 왜 데려와. 그렇게 민율하가 좋으면 사귀든가.”

“고백해 봤자 안 사귀어 줄 게 뻔한데 왜 고백하냐?”

“그럼 둘이 따로 테이블 잡고 술 마시든가.”

“싫어! 나 돈 없어! 서하림 온대서 신분증만 들고 왔어!”

“자랑이다 자랑이야.”

“쪽팔려…….”

오늘의 대역죄인인 주안은 무슨 말만 해도 원샷 집중 공격을 받았다. 주안이 한 번씩 옆에 앉은 동규의 팔을 붙잡고 불만을 토로했으나 동규도 슬슬 참지 못하고 어물쩍 주안이 잡은 팔을 빼 버리자 주안은 친구 같은 건 다 필요 없다고 뒤로 돌아 우는 척을 했다.

“안 우는 거 다 아니까 원샷해라.”

“씨, 1분 기다리면 눈물 나오거든.”

“진짜 1분 재서 안 나오면 소주 한 병 병째로 마시기. 어때.”

“죄송합니다.”

동규는 토할 것 같다는 주안을 데리고 화장실에도 다녀왔다. 주안에게 안주라곤 물만 허용되어 토해 내는 게 죄다 액체뿐이었다. 동규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안의 등을 열심히 두드렸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안에게서는 술 냄새가 많이 났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유주가 주안의 술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주안은 유주의 얼굴이 악마 같다고 생각했다.

“위장 비웠으니 다시 채워야지.”

“미친…… 새끼들……. 난 이미…… 취했어, 이 쉬발 양심 없는 친구드라아!”

“집 가는 택시 태워 줄 테니까 마셔, 마셔. 이제부터는 안주도 같이 먹게 해 줄게.”

물만 먹게 해 주던 친구들이 안주를 허락한단 얘기에 주안의 분노가 사르르 녹았다. 안주와 함께 술을 먹던 주안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결국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은이 동규에게 물었다.

“김동규 근데 너 진짜로 농구하게?”

“응.”

“움직이는 거 귀찮아서 싫다면서.”

“운동은 좋아해. 그런…… 많은 사람들 관심이 집중되는 게 싫은 거지.”

“진짜 이해 못 하겠다. 내가 김동규였으면 관종이었다 관종. 왕리본 달고 농구했어.”

저 멀리 앉아 있던 경영대 학생들이 우르르 일어나더니 동규에게 몰려와 고맙고 잘 해 보자며 시끄럽게 한바탕 얘기한 뒤 사라졌다. 유주와 시은도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쟤네보단 오래 앉아있겠다는 쓸데없는 오기였는데 이겼다.

시은이 주안의 휴대폰으로 주안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 그 새끼 술 처먹고 누나들 고생시킨다는 목소리가 스피커폰도 아닌데 크게 들렸다.

-그 새끼 그냥 버려요 걍! 뒤지면 걔 명줄이 짧은갑다 하면 되죠.

“알바생은 뭔 죄야.”

-그럼 누나들은 뭔 죄인데요. 길가에 버리고 가 주세요.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옛날이 있지. 택시 태워서 보낸다.”

-아빠보고 내려가라고 해야지. 이제 그 새끼 아빠한테 맞아 뒤짐요.

주안을 제일 먼저 보내 버리고 동규가 하림의 차를 가져오기 위해 사라졌다.

“내 차 타고 가. 운전은 김동규가 하지만.”

“아직 차 안 끊겼어.”

“그래도 갈아타고 뭐하고 하려면 힘들잖아.”

“우리 먹고 마신 거 계산해준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회장님.”

“잘 먹었어.”

“진짜 괜찮아?”

“어어, 우리 간다!”

살짝 술기운에 들뜬 채로 멀쩡하게 걸어가는 두 친구는 지하철역 쪽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아 동규를 기다리게 된 하림이 고개를 올려 하늘만 바라보았다. 서울 시내라 별이 보이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 기분이 복합적으로 드는데 술에 취하지도 않아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운전해 하림의 앞에 선 동규가 창문을 내려 하림을 불렀지만 하림은 고개를 내려 동규를 한 번 봤다가 다시 하늘로 고개를 올렸다.

차 가지고 온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싶어 동규는 차에서 내리기 위해 벨트를 풀었다. 그러자 하림이 나오지 말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전유주랑 오시은이랑 무슨…….”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화가 좀.”

“화?”

동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하림이 다급하게 단어를 수정했다.

“아니 화가 아니라 음, 걱정?”

“걱정?”

화나 걱정이나 동규에겐 큰일 날 단어였다. 하림이 다시 정정하겠다며 팔짱을 꼈다. 이 복잡한 마음을 뭐라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할지 몰라 하림은 끙 소리를 냈다.

“나 너 너무 어마무시하게 좋아하는 것 같아.”

“……응?”

예상치 못한 말에 동규의 귀가 달아올랐다. 하림은 한숨을 푹 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할 말이 많은데 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럼 지금 말고 생각 정리되면 말해 줘.”

“그 전에.”

“응.”

“줄 게 있어. 손.”

하림이 지갑에서 까만 카드를 꺼내 동규의 손 위에 올렸다. 하림이 자주 사용하는 카드는 두 개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였고 동규도 종종 보던 거였다. 카드를 집어 앞뒤로 살펴봤다. 은은한 무광으로 앞면은 그림 같은 것도 하나 없이 밋밋했지만 무게가 상당했다.

“너 가져.”

“이게 무슨 카든데?”

“한도 없는 카드.”

“내 카드도 아닌데 내가 왜 가져?”

“난 필요 없어. 원래 신용카드보다 체크카드 쓰는 걸 더 좋아해서 이거 잘 안 쓰는 카드야.”

“아니 그러니까 이걸 왜 내가 쓰냐고. 나는 한도 없는 카드가 필요 할 만큼 큰돈을 쓰진 않는데.”

“앞으로는 좀 써. 카드 줘 봐. 여기 뒷면 보면 이름이나 고유번호 선택해서 새겨 주는데 나는 번호로 골랐어. 내 번호 엄청 작게 쓰여 있는 거 보이지.”

“이거 줘 봤자 나는 장 보러 마트 다니고 너나 엄마랑 저녁 먹고 친구들이랑 카페 가고 그게 다일 것 같은데.”

“상관없어. 그런 거에도 이거 쓰고 이 카드로 후배 선배 친구들에게 밥도 자주 사 줘. 막 사 줘. 그리고 누가 무슨 카드냐고 물으면 약혼자가 펑펑 쓰라고 카드 줬다고 해.”

“하림아.”

“그리고 음, 조만간 차도 하나 사 줄게. 그것도 약혼자가 선물 준 거라고 잘 얘기 하고. 너 까만색 좋아하니까 까만색으로 사 주면 잘 어울리겠다.”

“서하림.”

“응.”

“집에…… 가서 얘기하자. 머리 좀 식혀.”

동규는 카드를 하림에게 건네고 핸들을 잡았다. 하림이 왜 다시 주냐고 뭐라고 했지만 동규는 ‘그냥…….’ 하고 말만 흐렸다. 하림은 뭐라 동규에게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규는 한마디도 않는 하림에게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 같아 집까지는 조금 멀리 돌아갔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잘 거야?”

“응. 엄마한테 친구들이랑 술 먹는다고 그랬어.”

“잘했어. 씻고 와서 와인 마시자.”

씻는 내내 쪽쪽거리다 겨우 욕실을 나온 두 사람은 샤워 가운만 걸친 채로 다이닝 테이블에 앉았다. 동규가 치즈를 꺼냈다가 문득 감바스가 먹고 싶어 주방으로 들어갔다.

“대충 해.”

“응. 빨리 할게.”

동규가 먹고 싶어 시작한 거라 마늘빵도 꺼내 오고 큐브스테이크도 구워 버려 대충이라기엔 너무 본격적인 안주들이 되었다. 동규가 테이블로 접시를 들고 왔을 땐 이미 하림이 와인 셀러에서 와인 한 병을 가져와 딴 상태였다.

와인 병을 들어 보니 반 넘게 마셨다. 동규는 제 전용 커다란 컵과 얼음, 스프라이트를 가져왔다. 하림이 동규의 컵에 와인을 3cm쯤 따라 주자 동규가 얼음을 넣고 스프라이트를 왕창 부었다.

“김동규 아기야 아기. 누가 와인을 저렇게 먹어. 포도주스지 그게.”

“그래도 와인이 들어가긴 들어갔어.”

짠 하고 와인을 모두 마신 하림이 동규가 잘라온 치즈를 하나 집어 먹었다. 그다음으로는 조각내 온 멜론을 먹다가 문득 샹그리아 해 주면 동규가 잘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말에 샹그리아 해 줄게. 도수 낮은데 맛있는 와인에다가 과일 왕창 넣어서 진짜 달기만 한 거로.”

“응.”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도수 낮은 거로 많이 마시다 보면 주량도 늘 거야.”

“응.”

잠시 중요한 얘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다가 와인 한 병을 다 끝내 버렸다. 하림이 한 병을 더 가져올 테니 기다리라며 동규에게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 아직 얘길 꺼내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생각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는 거겠지. 동규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이제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해 볼까.”

“……응.”

“학교 갈 때 지하철 타고 다니면 안 불편해?”

본론으로 들어온 줄 알았더니 바로 딴 길로 새는 것 같아 동규는 조금 의아했지만 착실하게 대답했다.

“별로.”

“고등학교 다닐 때도 매일 버스 타는 거 힘들다고 그랬잖아. 사람들한테 끼어 다니고 너무 낮다고.”

“조금…… 불편해.”

“반지 1년이면 유효 기간 길었다.”

“그런가…….”

“응. 차 사 줄 테니까 이젠 좀 사이즈 키워서 차로도 티 내고 그래.”

동규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서 차 사 준다고 한 거였구나.

“카드도. 부담스러울 거 아는데 블랙카드 수시로 긁어 대고 비싼 외제차 끌고 다니는 거 자주 보여 줘야 네가 어떤 사람이랑 만나고 있는지 다들 알겠지. 그냥 내가 나서면 제일 좋은데 그럴 수도 없고 진짜 답답하다.”

입술을 깨문 하림이 와인 잔만 살살 흔들다가 남김없이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키스해 줘.”

동규는 하림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숨이 찬 하림이 떨어질 때까지 동규는 하림에게 꼭 붙어 입을 맞추었다. 조금이라도 술은 술이라고, 몸이 달아오른 동규가 하림에게 바짝 다가갔다. 하림은 동규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며 넓은 등을 토닥였다.

“얘기 조금만 더 하고.”

“응. 빨리 해.”

입술 위로는 입을 맞추지 않고 그 근처를 쪽쪽거린 동규가 하림을 보챘다.

“간지러워. 잠깐만 떨어져 봐.”

“나 급한데. 아래 빨아 주면서 얘기 듣는 건 안 돼?”

동규의 손은 이미 하림의 가운 안쪽으로 들어가 하림의 속옷 밖으로 성기를 꺼내려 했다. 하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천천히, 느리게 해. 알겠지.”

“응.”

하림은 빈 잔에 와인을 가득 따랐다. 잠시 뒤 동규의 따끈한 입 속으로 성기가 사라졌다. 발가락을 오므렸다 편 하림이 동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동규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두 눈을 뜬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게 귀엽다. 펠라는 펠라고 무슨 말을 하든 들어주겠다고 하는 눈동자에 하림은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너한테 비밀이 하나 있어. 미안해. 하늘이는…… 아는 거야.”

하림의 것을 혀 위에 올려 약하게 빨아 대던 동규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하고 눈동자로만 물어보려다가 동규는 아예 입에서 하림의 것을 뺐다.

“어떻게 서하늘한테는 얘기하고 나한테는 말을 안 한 비밀이 있을 수.”

하지만 동규의 말은 하림의 성기로 입이 막히면서 끝을 맺기 어려웠다. 동규가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 그래서 이를 세워 하림의 것을 아프게 긁었다.

“이러지 마.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잖아. 학교에, 오늘 본 귀여운 후배처럼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가 있어. 걔는 율하처럼 귀엽진 않아. 남자애거든.”

충격받은 얼굴로 동규가 돌처럼 굳었다. 하림이 동규에게 마저 움직이라고 말했지만 동규는 하림의 속옷과 가운을 정리하고 아예 다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이름이 뭐야. 어떤 씹, 인데.”

“여자들은 내가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10년 짝사랑하다 고백하고 이제 사귄다고 하니까 나한테 들이대거나 하는 거 없거든. 오히려 그런 쪽으로 조심하고 배려해 주는 게 보여. 나이 상관없이.”

“응.”

“문제는 걔인데. 걔는 진짜 눈치도 없고 좀 끈질겨. 그리고 못생겼어.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됐다. 자세한 건 얘기해 봤자 내 자존심만 상해.”

“걔가 괴롭혔어? 막 만져 대고 이상한 말 하고?”

“뭐, 그 정도는 아니고 짜증 나게 굴었어. 근데 내가 누구야. 잘 대처하고 있어. 근데 걔가 진짜 포기를 몰라. 여자애보다 자기가 더 좋, 아 아니야. 잊어버려. 비위 상해, 비위 상해. 우리 동규한테는 예쁘고 좋은 얘기만 들려줘야지.”

“죽여 버릴 거야.”

“죽이진 말고 그냥 축제 때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차려 입고 와.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걔 앞에서 키스라도 해?”

웃음이 터진 하림이 고개를 저었다.

“안 해도 돼. 나한테 생각이 있어.”

“뭔데?”

“다 끝나고 알려 줄게. 넌 거짓말도 못 해서 티나. 그냥 이런 상황이란 것만 알고 그날 와서 나랑 재밌게 놀면 돼.”

“……궁금한데.”

“입 튀어나왔다.”

입술을 원위치한 동규에게 하림은 스테이크를 하나 집어 가져갔다. 동규가 심통 맞은 얼굴로도 고기를 받아 먹었다.

“착해요. 나 와인 더 마시고 싶으니까 이거 다 먹고 하자.”

“맛도 없는 술. 서하림 이거 왜 좋아해.”

“포도 주스나 마셔 아가야.”

하림은 동규의 컵을 끌어오며 웃었다. 동규는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스프라이트 섞은 와인을 홀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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