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4 36화 (46/53)

36

하림은 커피를 결제하며 동규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타이밍을 살폈다. 두 사람의 커피가 나왔음에도 동규가 마실 생각 않고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시럽 넣어야 한다고 밍기적거리며 일어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시럽 펌핑을 네 번이나 한 동규의 눈에는 다크써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동규는 이번 달 들어 매일매일을 카페인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중간고사 나쁘지 않게 봤다고 기말고사는 더 잘 볼 거라며 공부는 공부대로 하고, 하림의 소개로 고등학생 창작 과외도 하게 되어 거기에도 나름대로 시간을 투자해야 했고 가장 결정적으로는 6월 마감인 신인문학상 공모전에 준비하느라 집에도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3월부터 천천히 쓰겠다고 했던 다짐은 사라지고 주말이면 하림과 놀러 가기 바빠 한 글자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학교 끝나면 가까운 하림의 집에 와서 낮잠부터 잤고, 같이 저녁 먹고 나면 하림이 마련해 준 작업실에 들어가 공모전 원고에 돌입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하다 보니 잘 쓸 것도 제대로 되지 않아 동규는 커피를 물처럼 마시며 새벽을 지새웠다.

하림은 동규와 같이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좋았으나 동규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잘 알고 있어 티를 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 품 속에 동규가 있고 잠에 들 때도 헤어지지 않고 같은 침대에서 누워 잘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네가 힘든 건 알지만 어찌 됐든 같이 사는 것 같아서 좋다는 말을 꾹꾹 누르면서 하림은 동규를 위해 커피 머신과 캡슐 커피들을 잔뜩 주문했다. 아예 샷을 추출할 수 있는 커피 머신을 사 주려고 했는데 둘 중 아무도 사용 방법을 몰랐다. 커피를 물처럼 마시는 동규를 위해 집에 상주하는 바리스타를 고용하겠다는 하림을 동규가 말렸다.

대신 하림은 새벽에 잠들어 아침 일찍 학교에 가야 하는 동규를 위해 먼저 일어나 캡슐 커피를 내렸다. 잠이 많은 하림에게는 굉장히 큰일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좀비처럼 학교 갈 준비를 할 동규에게 커피를 쥐여 주고 키스를 하고 나면 다시 하림은 침대로 돌아와 마저 잠을 잤다.

종강하면 그나마 좀 나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크게 다르진 않았다. 글 쓰는 시간이 그만큼 더 늘었을 뿐이었다.

하림이 모닝콜에 맞춰 10시 30분에 일어났을 땐 동규가 식탁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바닥에 캡슐 커피 하나가 떨어져 있는 걸 보니 일어나 잠을 깨려고 커피를 내리기 위해 잠깐 앉았다가 그대로 잠에 든 것 같았다. 하림은 동규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 깨우고 비몽사몽한 동규에게 토스트 한 조각을 물린 뒤 모자와 마스크를 씌워 집을 나섰다. 바람이라도 좀 쐬면 잠이 깰까 싶어서였다. 둘이 좋아하는 집 근처 작은 카페로 가는 동안에도 동규는 하림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쓰러졌을 만큼 휘청거렸다.

기껏 먹겠다고 시럽도 네 번이나 펌핑해 넣었으면서도 동규는 멍하니 하림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하림은 동규의 눈앞에 손을 휘휘 흔들었다.

“어제는 몇 시에 잤어? 네 시 넘어서 화장실 갈 때도 보니까 작업실 불 켜져 있던데.”

“다섯 시 반인가…… 해 뜨고도 한참 있다가 잤으니까…….”

하품하는 동규를 따라 하림도 하품이 나왔다. 동규는 머그컵을 들 기운도 없는지 상체를 숙여 맥없이 빨대를 물었다.

“동규야.”

“응.”

“공모전 끝나도 많이 바쁘지.”

“아니. 과외랑…… 나 뭐, 음……. 바쁜가? 졸려서 생각이 안 나. 근데 너랑 놀 시간은 있어.”

“나랑 노는 거면 뭘 해도 괜찮아?”

“응.”

“혹시, 서하늘까지 같이 노는 건 어때.”

쪼르륵 커피를 마시던 동규가 하늘의 이름에 반응하며 빨대에서 입을 뗐다.

“서하늘이랑? 뭐 할 건데.”

“정확히는 서하늘과 친구들까지.”

“서하늘 친구들 누구. 고등학교 친구들?”

“아니. 지금 학교 친구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서하늘 대학 친구들이랑 왜.”

동규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하품을 했다.

“서하늘이랑 셋이 가는 건 괜찮아.”

“나도 너랑 하늘이까지 셋이 놀러가는 거 좋지. 전에도 셋이 놀러가자고 얘기 나왔었고. 그런데, 저번에 하늘이가 그 일 때문에 좀 고생했잖아.”

약 한 달 전 하늘은 한평생 통틀어 제일 어이없는 소문의 희생양이 되었다. 지금은 사그라진 그 소문은 동규의 약혼자가 하늘이라는 내용이었다. 하늘은 그 소문을 듣자마자 거품을 물었다. 하림은 내용이 너무 같잖아 웃고 넘겼지만 하늘이 그런 소문을 퍼트린 씨발 새끼를 지구 끝까지 찾아내 죽이겠다고 불을 뿜는 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만 봤다.

동규랑 얽힌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하림도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만 하필이면 가족인 하늘인 덕분에 가벼운 해프닝 정도로 느껴졌고 하늘이라면 정말 누군지 밝혀낼 것 같아 흥미진진했다. 동규는 불을 뿜는 하늘과 미적지근한 하림의 사이에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하림은 하늘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달랬고 하늘도 동규에게 네 잘못 아니니 쫄지 말라고 해 주었다.

“……그거랑 걔 친구들이랑 놀러 가는 게 무슨 상관인데.”

“서하늘이 친구들이랑 다음 달에 워터파크 가는데 우리 둘 보고 따라와서 가드 좀 해 달래. 나랑 너 때문에 고생 많이 했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자기한테 이상한 남자들이 들러붙으면 막아 달라고.”

하늘은 금세 입을 잘못 놀린 사람을 찾아냈고 며칠간 두 학교를 떠들썩하게 했던 소문도 빠르게 진정됐다. 동규는 그게 그대로 끝인 줄로만 알았다. 하늘이 왜 그 때 한 번도 화를 내지도, 짜증조차 내지 않았는지 뒤늦게 이해됐다.

‘뭘 이 정도로. 내가 서의리 아니냐, 서의리. 너도 맘고생 많았을 텐데 이제 두 발 쭉 뻗고 자라.’

그 때 그 미소가 얼마나 유쾌하고 멋져 보였는데. 다 이걸 노리고 지은 미소였나. 서하늘에게는 100원도 빌리면 안 되겠다. 베풀기만 하면서 살아야지.

“우리 둘보고 가드 해 달라는 건…… 서하늘 친구들 다 여자친구들이라는 거겠네.”

“그렇지.”

“많이 오나. 막 열 명씩 가면서 우리보고 다 지켜 달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 서하늘이 양심이 그렇게 없지는 않아.”

동규는 다시 몸을 숙여 빨대를 물었다. 몇 입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다 마셨다. 동규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기 위해 빨대를 열심히 빨아 대다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한 잔 더 시켜 줄까?”

“아니…….”

“일주일만 참아. 하와이 갈 생각하면서 버티자.”

“응…….”

팔을 베고 누운 동규의 머리를 하림이 찬찬히 쓰다듬었다. 동규는 무거운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가는 걸 억지로 들어 올리며 하림의 손길을 느꼈다.

“아침 뭐 먹고 싶어.”

“고기.”

“스테이크 구워 주면 먹을래?”

“스테이크 말고 수육. 아…… 아니다. 그건 시간 걸리니까 아침은 일단 간단하게 반찬 모아다가 가볍게 비빔밥 해 먹고 아주머니보고 점심으로 수육 해 달라고 그러자.”

“OK. 바로 메시지 넣는다. 점심 수육. 저녁도 고기?”

“저녁은 구워 먹자. 삼겹살이나 갈비.”

“그래.”

워낙 동규가 자주 자고 가는데다가 밤새도록 발가벗고 아침까지 뒹굴거리는 날도 많아서 아침부터 가정부를 오라고 하기가 뭐했다. 아침은 동규나 하림이 번갈아 가면서 시간 되는 사람이 만들었고 가정부는 주로 점심이나 저녁만 책임졌다. 청소를 비롯한 집안일도 모두 오후에 이루어졌다.

하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 가만히 받고 있으려니 동규는 이대로 잠에 들 것 같아 벌떡 일어났다. 아직 반쯤 남은 하림의 라떼가 출렁였다.

“가자.”

“좀 더 쉬지.”

“배고파.”

“헐 그럼 빨리 가자. 샌드위치라도 좀 먹을래?”

“응.”

샌드위치에 베이글까지 죄다 사서 동규에게 안겨 준 하림은 걸음이 느려진 동규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동규는 연신 하품을 하며 냉장고에 있는 나물 반찬들을 죄다 꺼내 양푼에 털어 넣었다. 밥 먹으면 잠이 좀 깨기 때문에 밥도 한가득 넣었다. 고추장도 잔뜩 퍼 담고 마지막으로 참기름 뚜껑을 열어 휘휘 돌렸다.

“김동규! 정신 차려!”

“아…….”

피곤함에 사고가 잠시 정지됐나. 조금만 넣어야 하는 참기름을 한 바가지 쏟아 버렸다. 하림은 아침부터 매운 걸 먹기는 부담되어서 강된장 비빔밥을 먹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동규의 참기름 비빔밥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버리자. 이거 느끼해서 못 먹어.”

“괜찮아. 참기름 많이 넣은 만큼 밥 더 넣으면 돼. 소고기도 구울까. 아니야. 어차피 이따 고기 먹을 거니까…… 소고기랑 돼지고기는 맛이 다른 거라…… 부위별로도 다르고…… 점심은 수육…… 아무래도 비빔밥으로 먹는 게…… 좋지.”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왔어도 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동규가 귀엽고 안쓰러워 하림은 찬물을 한 잔 떠 왔다. 동규가 하림이 건네준 찬물을 마시고 허리를 돌려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공모전에 작품 보내면 한숨 푹 자고 수영복 사러 가자.”

“수영복 있잖아. 수영장 다닐 때 입는 거.”

“색이 마음에 안 들어. 김동규 하와이 가서 다른 거 입히려고.”

“또 사? 그거 입으면…….”

구립 수영장 다닌다고 할 때 하림이 사 준 래쉬가드를 꼬박꼬박 잘 입고는 다니지만 바다 수영은 다른 문제였다. 바다 수영은 자고로 아래만 간단하게 딱 입고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면서 하는 것인데.

동규가 말을 흐렸지만 하림은 동규가 생략한 말들을 전부 알아들었다.

“무슨 소리야. 가슴 다 내놓고 다니겠다고?”

“하와이 가는 준비물엔 래쉬가드 없었잖아.”

“하와이 가서도 래쉬가드 입어.”

“뭐야. 그런 게 어딨어.”

“너는 사람들 눈에 너무 잘 띈단 말이야.”

“사람들 엄청 많을 텐데 누가 나 보지도 않을 걸.”

“구청 수영장 아줌마들한테 인기 많잖아.”

“내가 아들 같으니까 그렇지. 아. 너도 그럼 입어. 다 너만 쳐다볼 거 아니야. 하얀 게 젖꼭지도 분홍색이라.”

“나는 네가 입으라면 입을 건데 래쉬가드 별로야?”

“그건 아닌데 그냥…… 바다에서 수영하면 물이랑 햇볕, 바람 느끼는 게 좋아서.”

“타잖아.”

“그래도. 기분 좋아. 바다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둥둥 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내가 바닷물이 된 거 같고 그래.”

바닷물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동규가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굳이 온몸을 꽁꽁 숨기라고 하는 게 더 이상했다. 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수영복 새로 사자.”

“……그래도?”

“하와이 여행 기념으로 기분 내게.”

“응, 알겠어.”

“그리고.”

“그리고?”

“나 없는 데서 훌렁훌렁 벗고 다니지 마.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갑갑하다고 옷 벗는 순간 네 지문 등록 삭제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응.”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그런 적 없어.”

“잘했어.”

참기름 때문에 추가한 밥과 나물이 두 배가 된 동규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하림의 손길에 기분 좋게 아침을 먹었다.

하림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수영장이나 워터파크를 정말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하늘과 친구들을 열심히 따라다니면서도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수영 좋아하는 동규만 신나게 수영을 하고 다녔다. 어린이들만 들어가는 유스 풀 빼고는 전부 들어가겠다는 각오였다.

하늘과 함께 부지런히 탈 것도 다 타고 놀 것도 다 노는 동규의 옆에는 그를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수시로 간식을 먹여 주는 하림이 있었다. 하림은 동규의 사진까지 열심히 찍어 대며 시간을 보냈다. 하늘은 그게 고까웠다. 둘이 눈에서 하트가 떨어지든 꿀이 떨어지든 그게 고까운 게 아니라 워터파크 왔는데 하림 혼자만 쏙 빠진다는 게.

“김동규! 여기 봐, 브이! 하트!”

“…….”

“아 방금 아저씨 지나갔어, 다시!”

“그렇게 물 더럽다고 들어가기 싫으면 예뻐 죽는 김동규는 왜 저 더러운 곳에 들어가게 냅두냐?”

오늘 하루 동규를 위한 찍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하림은 사진 찍기 바빠 하늘이 깔끔 떤다고 빈정대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껏 놀러 와서 왜 이렇게 빼.”

“가드만 해달라고 했지 같이 놀아 달라고는 안 했잖아.”

“아주 김동규 전용 홈마 납셨어요.”

수영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 할 줄은 몰랐다. 구립 수영장 다닐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섭다고 하면서 하늘을 따라 두 눈 꼭 감고 워터슬라이드를 타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알았으면 전국 워터파크란 워터파크는 다 데리고 다녔을 거다.

“잠깐 혼자 놀 수 있지?”

“왜?”

“사진 정리할 겸 너 노는 거 보고 있음 재밌긴 한데 사람들한테 치여서 좀 쉬려고.”

“알았어. 그럼 조금만 놀다가 서하늘한테 얘기하고 나도 쉴게.”

하림은 동규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잘 놀다 와’ 하고 웃었다. 동규가 하늘과 친구들을 따라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 하림을 바라보았다. 빨리 가라고 하림이 소리쳤지만 동규는 뭔가를 결심한 듯 아예 하림에게 뛰어왔다.

“왜?”

“귀.”

“할 말 있어?”

동규가 쉽게 얘기할 수 있도록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동규는 두 손을 모아 하림의 귓가에 가져갔다. 잠시 머뭇거린 동규는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은 물론이고 코까지 두 손에 바짝 가져가 작게 속삭였다.

“굿바이 키스 하고 싶다. 잠깐이지만…… 헤어지는 건데.”

아침에 각자 학교 가느라 인사할 때, 동규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하다못해 같이 잠에 들더라도 늘 떨어지는 게 슬프다고 굿바이 키스 하다 보니 이제는 완전히 버릇이 든 입술이 달싹거렸다.

“재밌게 놀고 와.”

“보고 싶을 거야.”

“나도.”

“이따 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말끝에는 제 손으로 가린 귓가에 쪽 하고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하림은 웃음을 누르려고 입술을 말아 물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고 광대가 씰룩거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진짜 갈게.”

“빨리 와.”

“응.”

달아오른 얼굴은 생각도 못하고 동규가 뽀뽀해 준 귀만 만지작거리면서 하림은 카바나로 돌아왔다.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거울을 봤다가 깜짝 놀란 하림은 얼굴을 식히다가 도저히 열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자몽에이드를 주문했다. 얼음이 가득 들어간 에이드를 받아 들자마자 반이나 마셨더니 코도 찡하고 얼굴도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림은 한가롭게 카바나 안에서 뒹굴거렸다. 백장 대를 넘어 천장 대에 돌입한 동규의 사진을 넘겨 보기만 해도 천국이었다. 시원한 자몽에이드는 혀가 녹아 내릴 정도로 달았지만 아주 못 먹을 맛은 아니었다. 하림은 흔들리거나 이상하게 나온 사진들을 삭제하며 갤러리를 정리했다.

사진을 정리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자몽에이드를 다 마셔 버려 이번엔 생과일주스를 사 먹을까 하던 차였다. 지갑을 챙긴 하림이 일어나 나서려던 때, 하늘과 잘 놀고 온다던 동규가 코가 빨개져 카바나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동규가 와락 껴안길래 보고 싶어서 울었냐고 장난스럽게 묻자 대답 대신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울었어?”

“…….”

“뭐야, 서하늘이 뭐 했는데. 이게 진짜 겁도 없이 누굴 울려.”

“갑자기 서하늘이 물 뿌려서 물 먹었어.”

“그걸 그냥 맞고만 있었어?”

“나도 공격하고 싶었지. 그런데 내가 하면 좀…….”

“그래 잘 생각했어.”

하늘은 분명 동규가 자기에게 물을 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했을 게 분명했다. 하림 없이도 혼자 잘 놀고 있는 동규를 보고 하늘은 장난기가 돋았을 거고, 큰 덩치로 반격도 하지 못하고 맞아만 주었을 동규에게 하늘이 얼마나 깐족댔을지 안 봐도 훤했다.

이건 분명한 도발이었다. 아까 하늘이 ‘김동규 혼자 놀다 큰일 나도 모른다’고 얘기한 걸 가볍게 넘긴 결과였다. 어디선가 하늘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하림은 아직도 코가 빨간 동규에게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다가 결심했다.

“난 진짜 워터파크 물 찝찝해서 싫은데.”

“들어가려고?”

“응. 내 소중한 귀염둥이를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데 응해 줘야지. 완전 양아치 아니야 이거. 가자. 서하늘 어딨어.”

동규가 알려 준 곳으로 달려간 하림은 비열한 웃음을 한 채 팔짱을 끼고 있는 하늘을 만났다.

“야 이 양아치야!”

“얭애치얘!”

하늘은 하림의 말을 따라 하며 놀렸다. 그렇다면 작전 변경이다.

“누가 내 새끼 울리래!”

“우웩. 소름 돋아 시발!”

“내가 규염둥이랑 놀아 주랬지 울렸다는 건 자폭이냐?”

“규염 뭐? 아오, 썅. 귀 썩어 시발! 으! 오글! 죽어라 서하림!”

하늘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공격을 날렸다. 하림은 갑작스런 공격에 물을 한 번 먹고 반격을 시도했다. 동규는 멀리서 두 사람의 전쟁을 지켜볼 뿐이었다. 둘 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싸우는 게 그 누구도 기권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림은 오랜 시간 하늘과 함께 미친 듯이 어울려 주고 카바나로 돌아왔다. 무승부였지만 더 이상 동규가 울면서 하림을 찾는 일은 없었다.

2학기 시간표는 하림의 도움으로 하림과 똑같이 월요일 공강도 만들고 하림보다 30분씩 늦게 끝나게 해 두어 둘이 만나는 시간도 딱 맞췄다. 1학기에 비하면 굉장히 여유로운 아침과 학교생활이 펼쳐져 동규는 이게 대학생이구나, 하며 지내고 있었다. 하림과 주말에 양양으로 서핑을 다녀와도, 2박 3일로 해외를 다녀와도 널널했다.

“그냥 아무거나 입고 나가도 돼.”

“안 돼.”

간만에 엄마와 데이트 약속을 잡은 동규는 엄마가 예쁘게 차려입고 오라고 했지만 평소처럼 학교 갈 때 입는 옷을 주워 입고 나왔다. 저녁까지는 시간이 남아돌아 하림의 집에서 놀고 가려고 했더니 하림이 그렇게 입고 갈 거냐고 핀잔을 주었다.

하림은 침대에 누워 흐느적거리는 동규를 데리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하림의 집이고 하림의 옷이 대부분인 곳이지만 동규에게 입히려고 또는 선물하려고 사 둔 동규의 옷도 많았다.

“골라 봐. 너는 뭘 입어도 다 예쁘지만 두 개로 추려 봤어.”

“네가 보기에 예쁜 걸로 입을래.”

“으으, 블랙이냐 브라운이냐.”

하림은 옷이며 시계며 신발까지 다 골라 주느라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이었지만, 신난 게 훤히 보일 정도로 행복한 고민이란 건 동규도 알 수 있었다. 동규는 반지만 만지작거리며 애써 드는 불안함을 외면해야 할지 하림에게 말해야 할지 생각이 많아졌다. 괜히 헛다리 짚고 있는 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갔다가 누가 번호라도 달라고 그러면 결혼했다고 해.”

“…….”

“아, 엄마랑 같이 있으니까 그건 좀 그렇겠다. 혹시 너네 엄마 너 연애 중인 거 아셔?”

“말한 적은 없는데 반지 때문에 엄마가 알아챘어. 옛날에 좋아하는 애 있다고 한 적 있어서 걔랑 사귀는 거냐고 그래서 그렇다고 한 게 다야.”

“그렇군. 나인 거는 얘기하지 말고. 나중에, 나중에 졸업하고 취직하면 그 때 말하자.”

“응. 근데 우리 엄마는 너랑 사귄다고 하면 나보다 더 좋아할 거 같은데.”

“그건…… 모를 일이야.”

하림은 자기 엄마도 동규를 그렇게 예뻐했는데 지금은 전보다 동규에게 거리를 두는 걸 보면서 느꼈다. 동규는 눈치가 없어서 하림의 엄마가 이전처럼 자신에게 살갑게 굴지 않는 걸 모르는 듯했지만 하림에겐 다 보였다.

가끔 보는 동규에게 볼 때마다 학교생활은 괜찮냐, 공부는 할 만하냐, 졸업하고 뭐 할 거냐, 시험 준비는 따로 하고 있는 게 있는지, 등단은 언제쯤 할 생각인지, 요즘 같은 때에 작가가 괜찮은 직업이라 생각하는지 같은 것들을 물었다.

동규를 재는 건지 아니면 공부 못하는 게 새삼스럽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물어보지 않아 속을 알 순 없어도 엄마가 동규를 그저 아들 친구로만 보고 있지 않다는 게 느껴져 하림은 엄마가 불편했다. 살다 살다 엄마에게 낯을 가리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왜? 우리 엄마는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하는데. 내가 우리 엄마면 너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아도 된다고 할 거야.”

“그건 너니까 그렇고.”

“우리 엄마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저기, 하림아.”

동규의 손목에 채워 줄 시계를 고르며 하림이 응, 하고 답했다. 동규는 하림을 불러 놓고 그의 넓은 등만 보며 끙끙댔다.

“왜 불러 놓고 말이 없어.”

“그냥 내 감인데.”

“응.”

“오늘 왜인지 엄마가 사귀는 애 누구냐고 진지하게 물어볼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엄마가 전에 엄마 직장 동료 중에 우리 학교 선배 있다고 그랬거든. 휴학생이긴 해. 근데 엄마가 그냥…… 요즘 갑자기 반지 가지고 말이 많았어. 둘 다 학생일 텐데 왜 그렇게 비싼 반지를 했냐, 반반 한 건지 아니면 내가 해 준 건지 둘이 같이 가서 고른 건지 결혼반지도 아니고 그냥 학생들 커플링인데 어디서 돈이 났는지 뭐 그런 거.”

“아.”

“나는 가격이나 브랜드 잘 모르고 그냥 다 사귀는 애가 해 줬다고 그랬어. 엄마는 그냥 나랑 데이트하고 싶은 건데 내가 지레짐작하는 걸까?”

“으음. 꽤 합리적인 의심이야. 그래도 나인 거는 얘기하면 안 돼. 알겠지?”

“알았어. 그럼 이거 만약에 그 휴학생 선배한테 들은 거면 약혼반지라고 들었을 텐데 그건 뭐라고 해?”

“약혼반지는 네 여자친구가 누가 너 채갈까 봐 그렇게 얘기 하고 다니라고, 아 그러면 너무 좀 질투 많아 보여서 어른들이 보기엔 별론가. 거기다가 어른들은 결혼이 일생의 제일 큰일이니까 그걸 가볍게 장난으로…… 으, 너무 어렵다.”

옷을 골라 줄 때보다 더 심각한 얼굴을 하고 하림은 동규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었다. 시계를 찬 손에 깍지를 끼고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었다가 그냥 다시 시계를 풀러 시계 보관 서랍에 넣었다.

“왜? 예뻤는데.”

“그냥. 시계는 다음에 하고 가.”

반지보다 몇 배는 비싼 시계까지 채워 보내기엔 감이 좋지 않았다.

“나인 건 절대 얘기하지 말고, 나인 걸 유추할 수 있는 정보도 최대한 말하지 말고 반지는 우리가 사귄 첫날부터 내가 어른 되면 커플링 하려고 돈 모아서 백화점 할인을…… 어떻게 딱 받아서 50%나 70% 인하된 가격으로 했다고…… 아 근데 그건 그거대로 싫어. 없어 보이잖아.”

가만히 앉아있던 동규는 혼잣말을 하며 왔다 갔다 하는 하림을 잡아 품에 안았다. 하림에게서 작게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렵다.”

“적당히 잘 둘러대. 믿는다.”

“응. 잘 해볼게.”

엄마에게 네 얘기를 했었다는 걸 너무 말하고 싶은 하림은 입술만 꾹 물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동규는 엄마에게 과연 잘 얘기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누구처럼 능글맞고 자연스럽게 받아칠 재주도 못 되었고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게 하질 못해서 하림의 믿음을 와르르 무너트리는 건 아닐까.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 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엄마랑 데이트도 취소될 거고 아픈 거 핑계로 하림의 간호도 받을 수도 있을 텐데.

“……가기 싫다.”

하림이 새로 꺼내준 신발까지 잘 신어 놓고 동규가 다시 하림에게 쪼르르 다가와 안겼다. 하림이 동규의 등을 두드리다가 입을 맞추며 동규를 달랬다.

“어차피 엄마 나랑 저녁 먹고 인천 내려갈 건데 저녁도 그냥 가서 아빠랑 먹지.”

“아들이랑 데이트 하고 싶으니까 그런 거지.”

“맛있는 거 먹으면서 유도심문할 걸. 아마도지만.”

“잘 할 수 있다며.”

“아니야. 잘 못 할 것 같아.”

“왜 약한 소리 하고 그래.”

“몰라…….”

하림은 동규의 양 볼을 붙잡아 꾹 눌렀다. 얼굴이 눌려 동규가 붕어 입술이 됐다.

“너도 모르게 내 이름 얘기하거나 그러면.”

“…….”

“괜찮아. 뭐, 같이 잘 수습해 보자.”

“진짜?”

“진짜. 그래도 방어해 볼 수 있을 때까진 하는 게 제일 좋지. 혹시라도 말해 버렸을 때 얘기야.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응.”

“가자. 1층까지 데려다 줄게.”

걱정 어린 동규와 진하게 키스를 나누고 현관문을 열었다. 1층에 도착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동규가 출발할 수 있도록 하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올라왔다. 동규에게선 바로 메시지가 와 있어 하림도 열심히 휴대폰 액정을 두드리며 동규에게 답장을 했다. 곧이어 동규가 엄마와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고 했고, 하림도 그동안 연구 자료 살펴볼 테니까 저녁 맛있게 먹으라는 메시지를 끝으로 대화는 종료됐다.

저녁은 간단하게 알리오올리오, 과일과 시리얼을 넣은 그릭요거트를 먹었다. 동규의 SNS에 저녁 사진이 올라온 걸 확인한 하림은 댓글로 자기가 먹은 것들을 적어 놓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패드로는 논문 검색 사이트를 켜 놓고 휴대폰으로는 사전을 열어 뭐부터 검색을 할지 잠시 고민하다 하림은 저자 이름부터 검색했다.

대전에서 학교 다니는 친구 유현의 도움으로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유현의 학교 고학년들 위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1학년은 유현과 타 대학 학생인 하림뿐이라 두 사람은 선배들이 시키는 온갖 자질구레한 심부름이나 자료 검색, 실험 결과 정리를 도맡았다. 거리도 멀어 직접 선배들과 만날 수 없는 하림은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파트를 전담했고 더불어 선배들 야식까지 매일 주문해 같은 학교 후배인 유현보다 더 예쁨 받는 중이었다.

마침 유현에게 메시지가 왔다.

[써함ㅁㅁㅁㅁㅁㅁㅁ〉

[이번 주말애 대전온다고?〉

〈응]

〈선배들이 술사준대]

〈그때 선배들 다 모인다며]

〈인사도 할 겸 나도 가기로 했어]

[누가 보면 울학교 학생임〉

〈받아주신 것만 해도 절 백번 해야지]

〈오늘은 뭐 먹고 싶으시대ㅋㅋㅋ?]

[족발ㅋㅋㅋㅋ〉

[구론대 하리밍어빠〉

[뉴효니는 떡보끼 머꼬시퍼><〉

〈??]

[나보다 키 크고 잘생기면 오빠임〉

[형이라 불러줄까〉

〈족발만 시킨다]

[아됫어 메정한놈〉

〈됫x 됐o 메x 매o]

[ㅅㅂ 같튼 이과생끼리 이러지 말자〉

〈난 맞춤법에 민감해]

[씨바〉

[물리학과 조럽해서 국립국어원 갈거냐?〉

[아됫어 그렁거 몰라도 안주금〉

〈됐 이라고]

[씨바 떡보끼 안 먹어〉

〈유현아... 떡볶이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떡볶이 세 글자도 모르면 어떡해...]

[안머근다고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

족발은 주문자 이름을 수정하지 않고 시켰지만 떡볶이는 ‘★떡★볶★이★좋아하는김유현’이란 이름으로 주문했다.

〈시켰어]

[ㄳ〉

동규가 정말로 엄마와 자기 얘길 하는 걸까 봐 오늘따라 논문 검색하기가 너무 싫어 유현과 좀 더 놀 생각이었는데 유현이 논문 모아서 보내라며 하림을 재촉했다. 한 시간만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하림이 불어사전을 열었다.

인천 내려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엄마를 역까지 배웅해 준 동규는 덤덤하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가 교통 카드를 찍고 사라지자마자 기운이 다 빠지고 한숨이 푹 나왔지만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엄마랑 헤어졌는데]

〈할 말이 좀 많아]

〈얼굴 보고 얘기할게]

동규의 메시지를 읽은 하림에게서는 바로 전화가 왔다.

“가서 얘기 한다니까.”

-내 목소리 듣고 싶을 것 같아서.

“……너한테는 거짓말도 못 해.”

-혹시라도 할 생각 있으면 평생 접어.

“아니야. 혹시도 없어.”

-울진 않는 거 보니까 나쁘진 않았나 보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어. 좋은 거 6에 아닌 거 4? 그냥, 가서 얘기해 줄게. 생각 정리도 좀 필요해.”

-그럼 전화 끊을까?

“음, 계단 올라갈 때까지 5분만.”

-그래.

출구로 올라가는 계단을 동규는 15분에 걸쳐 느릿느릿 올라갔다. 지하철을 타고 가도 괜찮았지만 사람이 많고 정신없어 생각 정리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 택시를 잡았다. 다행히 동규가 잡은 택시는 노래나 라디오를 틀어 놓은 택시도 아니었고 택시기사도 동규에게 행선지를 물어본 뒤론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림이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엄마도 안 돼.’

어찌 됐든 싫단 얘기는 아니지 않나. 생각을 정리하면 정리할수록 동규는 엄마의 말이 좋게만 해석됐다. 아빠에게도 따로 말해야 하지만 아빠는 대체로 동규가 뭘 물어보면 아빠는 잘 모르니 엄마 의견과 같다고 하거나 동규 편한 대로 하란 편이었다.

그래서 하림의 집에 오자마자 신이 난 채로 신발도 벗지 않고 엄마와 한 대화를 모두 말했다. 하림은 현관 앞을 벗어나지 못하고 흥분한 동규를 진정시키고 식탁에 앉힌 뒤 동규 먹일 핫 초코를 탔다.

네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너인 걸 알더라, 내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니까 엄마가 한동안 말이 없더니 한 말이 저거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어른들은 다 아는 수가 있다더라, 엄마는 널 싫어하지 않으니 희망적이다 등등.

이렇게 빠르게 말을 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인 동규에 비해 하림은 굉장히 차분했다. 동규의 얘길 듣던 하림이 희망적이라는 동규의 얘기에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게 어떻게 희망적인 말이야.”

머그컵을 문지르느라 눈을 살짝 내린 하림의 목소리가 낯설다. 동규는 말문을 잃어버리고 뭐라고 해야 할지 입만 달싹거렸다.

“그, 그건, 엄마 말은, 어쨌든 허락은 하지만 너네 부모님 의견이 우선.”

“우리 엄마 알아.”

“뭐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하림의 차는 반이나 줄어들어 있었지만 동규는 얘기하느라 핫 초코를 아직 한입도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어……떻게?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언제?”

“좀 됐어. 작년 내 생일쯤. 사귀는 건 몰라. 그냥 나 혼자 너 좋아한다고, 그렇게 말했어.”

“뭐라셔.”

“요즘 우리 엄마가 너한테 어떻게 대하는지 생각해 봐.”

“잘…….”

대해 주신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가 않았다.

하림의 한마디에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 중에 동규는 가장 최근 하림의 본가로 저녁 먹으러 갔다가 굉장히 조용한 식사를 했던 것을 떠올렸다. 보통 때는 하림이 먼저 조절조잘 떠들고 하림의 엄마가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 동규가 거들고 하림의 아빠도 한마디씩 끼어들었다. 그 날은 하림도 조용했고 하림의 엄마 역시, 그랬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딱히 그 날만 조용한 게 아니었다.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동규를 보던 하림이 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고개를 위로 올렸다. 하얗고 높은 천장엔 밝은 불빛들이 달려 눈이 부셨다.

“네가 생각해도 잘, 안 대해 주고 이상해졌지.”

“이상……까진 아니고.”

“엄마 반응은, 내가 가끔 한 번씩 떠보긴 하는데 인정을 해 줄 것 같지는 않아. 아직까진 그냥 감이 그래.”

“너 그런 거 안 믿잖아. 감이나 떠보는 거 말고 제대로 얘기를 해 보는 건?”

“그랬다가 엄마가 우리 둘 찢어 놓으려고 하면 어떡해.”

“설마.”

“너는 우리 엄마가 드라마처럼 10억 수표 내밀면서 헤어지라고 하면 어떡할래.”

“찢을, 아니 그러면 너무 건방져 보일 수 있으니까 망설임 없이 바로 곱게 돌려드릴래.”

“그럼 100억은.”

“그것도. 100억이 아니라 그 열배, 백배를 줘도 똑같아.”

“100억 정도면 받아.”

“싫어. 왜 그런 말을 해? 너…… 조금 이상해.”

하림이 엄마에게 자길 좋아한다는 얘기를 무려 작년에 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100억이면 받고 떨어지란 말에 동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닦을 새도 없이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불안하게 왜 그런 얘기를 해. 혹시 너네 엄마가…… 그럴 분은 아니지만…… 설마 나 좋아하지 말래? 돈…… 유산 가지고 협박하면서?”

“김동규.”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동규는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 커다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차라리 엉엉 소리 내서 울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동규는 울음소리를 애써 삼키면서 조금이라도 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애썼다.

“응, 근데, 그런데, 너네 엄마가 너한테 혹시…… 상처 받는 말을 했다거나…… 그, 할아버지도 아시는 거면 그 분은 널 때릴, 때릴지도 모르고, 그럴 것 같은 분인데…… 아니 그 전에 아줌마가 뭐라고…….”

하림은 자리를 옮겨 동규의 옆에 앉았다. 동규가 바로 품에 안겨 왔다. 훌쩍이는 소리조차 동규는 참으려 했다. 하림은 동규의 등을 토닥이고 또 토닥였다.

“엄마가 너 싫다고는 안 했어. 그냥 나 혼자만 너 좋아한다고 그랬다니까. 그래서 그런가 엄마가, 내 생각인데 내가 좋다고 하니까 너를 그냥 단순히 내 친구로만 보는 게 아니라 좀…… 여러 가지 기준을 세우고 판단하는 중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무슨 말이야.”

“나랑 사귀는 애로 적합한지 아닌지 엄마가 재고 있는 중인 것 같다고. 확실한 건 아니고 그냥 내 생각이야.”

괜찮은 말이었는지 동규의 울음소리가 잦아졌다. 동규는 하림의 품에서 벗어났다. 하림이 동규에게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했다.

“뚝.”

동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하림아. 나는 네가 보기에 몇 점이야.”

“응?”

“네가 보기에 객관적으로 나는 100점 만점에 몇 점이냐고.”

“나는 100점 만점에 100점 주지. 너보다 완벽한 애가 어딨다고.”

“아니, 객관적으로.”

“객관적으로 네가 왜 100점인지 설명하려면 지금부터 일주일은 밤새야 돼. 내가 워낙 잘난 남자친구를 둬서.”

“……일주일 뭐야.”

눈물로 젖은 뺨을 닦아 준 하림은 동규가 부끄러워 눈동자를 굴리는 걸 보고 이제는 눈물이 고이지 않는 눈가에 뽀뽀를 했다.

“그만 울어. 난 네가 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알았어.”

마음이 좀 진정된 동규는 하림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지 않고 느린 키스가 오랜 시간 이어졌다.

“부모님 일들은 음. 너희 엄마께는 엄마 의견 잘 알겠다, 그런데 하림이네 엄마한테는 얘기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시간을 계속 벌어 보고. 우리 엄마는……. 나도 슬슬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내가 잘 할게.”

“응?”

“너한테는 100점이라도 아줌마한테는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아줌마 기준에 100점 되면 되는 거 아니냐구.”

“몰라. 나도 그냥 내 생각인 거라. 엄마 마음은 나도 알 수 없으니까.”

“너도 시간 벌어 줘. 내일부터 아빠 친구가 하는 유도 도장 성인반부터 등록하고 또…… 철인 3종 경기도 나갈래.”

“갑자기?”

“아니다. 이제 곧 중간이니까 내일부터 집에서 공부할래. 시험 끝날 때까지 만나지 말자. 시험 끝나고부터 유도도 하고 철인 3종 경기도.”

“김동규, 잠깐만. 진정 좀.”

“토익. 토익도 따야겠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까? 공무원 시험 어려운데 내일부터 시작해도 졸업 전에 합격하는 건 어렵겠지? 그것보단 신춘문예 쪽이 더 가능성이 있으니까 문학상 버리고 무조건 3대 메이저 신춘문예부터 하는 게 좋겠다. 규연이 누나한테 부탁해야겠어. 밥부터 사 주고…… 누나가 뭐 좋아하지. 전에 내가 네 향수 뿌리고 갔는데 향기 좋다고 몇 번이나 얘기한 적 있거든. 향수 선물부터 할까? 나랑 내일 같이 백화점 좀 가 줘.”

비장한 얼굴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점수를 따겠다는 동규가 귀여워 하림은 그냥 계속 동규가 얘기하게 두었다. 하림이야말로 동규네 부모님에게 이제부터 책잡힐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동규 아빠가 가입되어 있는 한국청소년유도연맹이 개인 후원을 받던가.

“그러니까 내가 준비가 다 되면, 그때 제대로 얘기하자. 아직 나는…… 10점이야.”

“응. 그래. 근데 10점은 너무 낮아. 자신감을 가져.”

“일단 난 집에 갈래.”

“왜?”

“공부하러. 중간고사.”

밤새 같이 있자고 붙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하림은 동규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지금까지는 하림 혼자만 두 사람의 미래를 계획했다면 이제 동규 나름대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걸 막고 싶지 않았다.

동규가 뭐를 하든 하림은 응원하고 도와줄 거다. 시험 끝나지 때까지 만나지 말자는 말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만 보고 싶다고 살살 꼬드기면 동규가 금세 허물어질 걸 알아서 그건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규를 쿨하게 보내주었다.

“뒤도 안 보고 가네.”

하지만 당분간 집이 조금 쓸쓸하겠다. 동규가 떠난 지 1분도 되지 않았는데 하림은 집이 텅텅 빈 것만 같아 외로웠다. 그런 하림을 알았는지 동규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규가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굉장히 오랜 시간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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