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3 35화 (4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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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 전에도 후에도 하림은 꾸준히 온갖 동아리에 가입하라고 권유를 받고 있었지만 딱 하나 빼고는 전부 다 거절하고 틈만 나면 동규네 학교로 놀러갔다. 하도 자주 놀러가 D대 SNS나 커뮤니티에는 그 S대생 봤다는 이야기가 수시로 올라왔다. 하림을 아는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댓글로 하림을 열심히 태그해도 하림은 가볍게 무시했다.

하림은 동규와 함께 이것저것 배우느라 매일매일 바빴다. 제일 먼저 시작한 건 요리 클래스. 동규는 전부터 고등학교 졸업하면 요리를 제대로 배우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하림은 동규에게 맛있는 걸 만들어 주고 싶어 배우겠다고 했다. 동규는 그 말에 조금 놀랐지만 유명 요리 연구가를 집에 초대해 일주일에 한 번씩 한식, 중식, 양식, 일식 가리지 않고 하나씩 배웠다.

그다음으로는 그림.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한 번 선생님이 하림의 집으로 왔다. 그림은 전부터 하림이 배우고 싶어 하던 거다. 동규는 그림에는 문외한이었지만 나름 열심히 하림과 수업을 들었다. 서로의 인물화를 그려 주는 게 올해 목표였다.

마지막으로는 하림이 동규랑 잘 어울린다고 강력 추천한 목공예. 가죽 공예도 나쁘지 않아 후보군에 올라와 있었으나 동규가 바느질은 못할 것 같다고 거절했다. 뜨개질은 잘하면서 왜 바느질은 못하냐고 물었더니 동규가 그 둘은 아주아주 큰 차이점이 있다고 설명을 늘어놓아 기각됐다. 목공예는 부피나 도구, 청소 같은 자질구레한 문제들 탓에 하림의 집에서 하기엔 여러모로 무리가 있어 집 근처 압구정 나무 공방을 다녔다.

같이 운동하던 건 고등학생 때부터 해 온 거라 이사하고 나서도 빌라 단지 내 피트니스를 이용 중이다.

수영만 동규 혼자 다녔다. 하림의 집 근처에 구립 수영장이 있어서 수영 좋아하는 동규는 하림의 허락을 받고 회원 등록을 했다. 집에서 홀로 하림을 기다리다 심심할 때 수영만 한 게 없었다. 물살을 가르며 수영을 하고 있다 보면 하림이 동규를 데리러 왔다.

하림도 같이 하면 좋겠지만 바쁜 것도 있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수영장은 하림이 영 내켜 하지 않는 듯했다. 한 번 하림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 안까지 같이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하림은 수영하는 동규를 지켜보는 게 다였다.

그 날 하림이 본 것은 동규가 거의 수영장 아이돌급이라는 것. 특히 아주머니 회원들에게는 폭발적인 인기였다. 삼각 수영복을 입은 수영 선생님은 동규가 등장하자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동규는 회원들이 아는 척을 하거나 말이라도 걸면 쪼그라든 채 물속으로 사라지거나 하림을 찾기 바빴다.

아주머니들이 동규에게 국가 대표보다 수영을 더 잘한다고 칭찬을 해 줘도 동규는 그저 ‘네…….’ 하고 말끝을 흐릴 뿐이고, 그런 모습에 아주머니들이 웃으며 그렇게 숫기가 없어서 어떡하느냐고 해도 ‘네…….’ 하고 수줍어했다. 그런 동규가 환하게 웃을 땐 수영하다 하림을 보고 손을 흔들 때뿐이었다. 선 베드에 누워 있던 하림은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모른다.

종종 하림이 이렇게 수영장 안까지 들어왔으면 하고 바랐지만 동규는 괜찮았다. 하림이 사 준 수영복만 있으면 어디든, 혼자여도 상관없었다. 하림이 전신 수영복 입고 다니라고 장난으로 말한 적이 있었는데 동규는 진짜로 하림이 전신 수영복을 사 준다고 해도 입을 생각이었다. 그저 수영할 때마다 저를 데리러 와 주는 하림이 고맙기만 했다.

요리도 그림도 목공예도 모두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하림은 동규와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좋아 바쁜 시간을 쪼개 뭐를 더 할 수 있을지를 찾곤 했다. 종일 떨어져서 지내서 그런지 강의가 끝나고 나면 어떻게든 붙어 있고만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림 씨는 반지 없는 거 보니까 솔로?”

“아니요. 되게 오래 사귄 친구 있어요.”

동규는 어딜 가든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반지 얘길 꺼냈다. 스무 살에 약혼반지 끼고 있단 소리에 사람들이 놀라면 그 다음은 동규와 붙어 다니는 하림의 손으로 시선이 집중됐다. 하림은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었고 하림에게는 늘 연애나 사귀는 사람이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공방에 새 회원들이 올 때마다 하림은 동규와 다르게 빈 손가락에 대하 설명하느라 바빴다.

처음엔 동규도 하림이 잘 대처하고 넘어가 별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둘이 워낙 같이 붙어 다니는데 저 혼자만 반지를 끼고 다니니 하림이 더 튀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최근 들어 슬슬 들기 시작했다.

“너도 반지 끼고 다녔으면 좋겠어.”

하림이 좋아하는 화가 김완의 전시회를 감상하고 드라이브를 하던 중에 동규가 문득 말했다. 고작 반지 하나가 무슨 효과가 있겠나 싶었지만 임자가 있다는 표식이 된다는 걸 동규가 제일 크게 실감하고 있었다. 하림이 알아서 잘 처신하고 있을 거란 걸 알지만, 열심히 끼고 다니는 자신과 비교되는지 하림이 유난히 애인에 관한 질문을 받아도 너무 많이 받는 게 싫었다.

“똑같은 거라 하고 다니면 걸릴 텐데.”

“그럼 내가 빼고 다닐래.”

“그건 안 돼. 너는 그거 없으면 큰일 나.”

“아, 왜. 내가 몇 달 끼고 다녔으니까 이젠 네 차례야.”

“나는 그런 거 없어도 되지만 너는 죽어도 안 돼. 무조건 끼고 다녀.”

“우리 학교 축제 놀러올 때 반지 끼고 왔으면 좋겠는데.”

동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학교인 하림의 학교 축제가 어떨지 굉장히 궁금했지만 S대 축제는 재미없기로 전국 세 손가락 안에 든다며 오히려 하림이 동규네 학교 축제를 가겠다고 약속을 잡아 둔 상태였다. 동규 친구들과 선배들이 하림이 축제 내내 온단 소식에 명예 D대생이니 뭐니 하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럼 다른 브랜드로 하나 더 사서 나눠 갖자.”

“하나 더?”

“이번에 사는 건 나만 끼고 너는 갖고만 있어. 안 그래도 학교에도 슬슬 좋아하는 애한테 고백해서 사귀게 됐다고 말하려고 했어.”

“사귄다고 한 거 아니었어?”

“어른들한테는 사귀는 사람 있다고 하면 되는데 학교에서는 그냥 사귄다고 하는 것보다 10년째 짝사랑 중이라고 하는 게 이상하게 더 잘 먹히더라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동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얼굴에, 키에, 집안에, 머리에 세상 혼자 사는 하림이 10년이나 지고지순하게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누가 들어도 안 될 게임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지. 1, 2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10년이란 긴 시간은 동규의 반지보다 파급력이 더 컸을 게 분명했다.

“역시……. 서하림 똑똑해.”

“뭐가.”

“그냥. 다.”

“당연한 소리를 새삼스럽게 하네. 귀엽게.”

학교에서 세 친구를 제외하곤 과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지도 않고 학과 행사나 모임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는 동규는 시간이 갈수록 신비주의 유명인이 되어 갔다. 그 유명세에는 동규의 외형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고 그다음 몫이 약혼을 했다는 개인사가 차지했다. 여기에 얼마 전 있었던 교내 문학상에서 동규가 장원을 받으면서 이제 겨우 신입생인 동규를 모르는 사람은 잘 없을 지경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반쪽짜리 아웃사이더로 대학 생활 중이었지만. 하림이 언덕이 닳도록 D대에 오는 이유는 다 그런 동규 때문이었다.

불교 학교라 학교 축제와 함께 연등제가 진행되어 친구들이 동규 옆에서 어떤 소원을 적을 거냐고 물었다. 주안은 소원을 적는 종이가 모자를 만큼 빼곡하게 소원을 적었다. 유주는 임용고시 합격이었고 시은은 내년 유럽 배낭여행을 써 붙였다. 친구들은 아직 고민 중인 동규가 과연 어떤 소원을 쓸지 저마다 이런저런 의견을 냈다.

혼자 연꽃 종이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동규는 멍하니 있을 뿐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교양으로 들은 불교 수업에서 연등을 열심히 만들었던 게 잠시 생각났다.

“역시 결혼이지.”

“백세 인생에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결혼이 인생의 목표면 너무 불쌍타.”

“아니면 등단.”

“복권 당첨.”

“A+의 성적.”

소원. 동규에게는 그만큼 부질없는 게 또 있을까. 무엇을 얘기하든 다 이루어 주는 능력 있고 사랑스러운 애인이 있는데 연등 나부랭이에 소원을 적어 붙이는 건 유치원생이 산타 할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소원을 비는 것보다 시시해 보였다.

“적을 게 없어.”

“다 가졌다 이거지. 어차피 재벌집 데릴사위 될 건데 성적이랑 복권이 무슨 소용이겠냐. 부러운 놈.”

어느 정도는 맞는 말 같아 긍정의 의미로 침묵을 지켰다. 등단이나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 뭐 이런 것들은 하림이 해 줄 수 없는 영역이니 그걸 적어 볼까 하다가, 그래도 나름 하림이 보러 올 건데 뭔가 하림과 관련된 걸 적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친구들이 눈치채지 않고 하림의 이야기를 쓰면 좋을지 동규는 꽤 심각하게 고민했다.

[커다란 숲을 지킬 수 있는 용기 있고 강한 사람이 되기를.]

“뭐야? 무슨 뜻인데 이거?”

“……몰라.”

“김동규 저거 또 맨날 자기 혼자만 알고 우리는 따시키고.”

주안이 일부러 동규에게 다 들리라고 꿍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동규는 미안하다고 작게 속삭이면서 머리만 긁었다.

종이를 축제위원회에 제출하기 전에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새삼 느낀 거지만 동규는 스스로 생각해도 멋지게 잘 쓴 것 같아 뿌듯했다. 빨리 축제 시작해서 하림에게 보여 줬으면 좋겠다.

소원종이를 SNS에 올린 건 축제 당일이었다. 동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진만 슬그머니 올리고 하림의 반응을 기다렸다. 바쁜지 하림이 댓글을 단 건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0622xoxo1231 이게 뭐야

6ear123123 @0622xoxo1231 이따 알려줄게

0622xoxo1231 @6ear123123 맞춰볼래 쉬워보여ㅋㅋㅋ

6ear123123 @0622xoxo1231 응

0622xoxo1231 @6ear123123 종이에 연꽃 그림이 있는 걸 보아 부처님 관련 행사에 쓰이는 거겠고

6ear123123 @0622xoxo1231 오...

0622xoxo1231 @6ear123123 너네 학교에서 부처님 오신 날 축제를 한다고 들었는데 부처님한테 소원 비는 그런 종이겠군

6ear123123 @0622xoxo1231 소오름

0622xoxo1231 @6ear123123 그리고 누가봐도 커다란 숲은 나겠고

6ear123123 @0622xoxo1231 맞아 역시...

0622xoxo1231 @6ear123123 숲에서 평생 놀고 먹는 곰이 되게 해주세요 쓰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ear123123 @0622xoxo1231 내가 그렇게..... 염치가 없어...ㅜㅜ?

0622xoxo1231 @6ear123123 몰랐나봐

6ear123123 @0622xoxo1231 헐

0622xoxo1231 @6ear123123 염치도 없고 눈치도 없네

6ear123123 @0622xoxo1231 진짜야..?

6ear123123 @0622xoxo1231 ㅠㅠㅠㅠㅠㅠㅠ서하림ㅠㅠㅠㅠ

0622xoxo1231 @6ear123123 장난이야ㅋㅋㅋㅋ♥♥ 김동규 귀여워!!!!!!!! 사랑해~♥

6ear123123 @0622xoxo1231 그런 장난 치지마...ㅠㅠ 수명 단축되는 기분.....

0622xoxo1231 @6ear123123 알았어ㅋㅋㅋ 빨리 나도사랑해 해줘

6ear123123 @0622xoxo1231 나도사랑해♥♥ 보고싶어 언제와?

0622xoxo1231 @6ear123123 과대누나랑 교수님 만났다가ㅠㅠ 방학에 뭐 도와주게 될지도 몰라.... 아 우리 물고기보러 하와이 가야하는데 교수님 눈치x

6ear123123 @0622xoxo1231 바쁜거면 이따 끝나고 전화해

0622xoxo1231 @6ear123123 okok 어차피 좀 시간 많이 걸릴 거 같으니까 심심하면 집에 가있어

6ear123123 @0622xoxo1231 응♥♥♥ 낮잠 자야지

0622xoxo1231 @6ear123123 내꿈꿔♥♥♥ :D

6ear123123 @0622xoxo1231 당연하지♥♥♥♥♥♥

하트를 남겼는데도 하림에게서 더 이상 말이 없는 거 보니 과대 누나인지 교수님인지를 만나러 간 듯했다. 동규는 하림이 이따 봐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트로 도배를 했다. 동규 표정이 굉장히 심각했기 때문에 동규의 친구들은 동규가 온갖 색깔의 하트를 보내는 중일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그저 학과 주점 얘길 하다가 심각해 보이는 동규를 어떻게 하면 데려올 수 있을지 타이밍만 볼 뿐이었다.

무슨 큰일 있나 봐. 서빙과 요리를 담당한 주안과 유주, 시은이 동규에게 너도 같이하자고 말도 못 하고 포기를 하려던 찰나, 주안에게 전화가 한 통 왔다.

“과대 누나가 너 바꾸라는데.”

“왜.”

“글쎄다.”

-동규야 너 잘생긴 친구랑 언제 와.

“걔 학교에 일 있어서 좀 늦는대요.”

-얼마나?

“저도 잘…….”

학과 행사에 참여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 축제 역시 동규는 쏙 빠졌다. 다른 학생들은 불참하는 대신 불참회비를 냈지만 동규는 하림을 데리고 오라는 추가 조건이 붙었다. S대생인 하림이 D대 국문과 주점에 꼭 와야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 그냥 자기가 참여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와중 하림이 그 정도는 괜찮다고 시원하게 수락했다.

-그럼 너라도 먼저 오면 안 돼? 물론 네가 불참회비 많이 낸 건 아는데. 어차피 그 친구 올 거니까 미리 와서, 아 잠깐만. 김규연이 바꿔 달래.

학과 행사에는 참여하지도 않아 아는 선배도 없는 동규가 유일하게 따르는 선배가 바로 김규연이라는 2학년 선배였다. 그는 동규처럼 고등학교 시절 상이라 상은 모두 받아 특기자로 입학한 학생으로 입학한 해에 시인으로 등단해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신인이었다. 작년에 휴학하고 올해 복학했다. 동규보다는 두 살이 많다.

예고 출신이 아닌데 그 바닥에서 상 많이 받아 유명하고 공부를 못했던 것까지 자신과 닮았다며 무뚝뚝한 동규를 입학부터 많이 예뻐했다. 왜냐면 규연은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상을 받는 동규와 친해지기 위해 말을 열심히 걸었지만 죄다 실패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동규는 백일장에 늘 혼자 다녔고 시상식이 끝나면 누구보다 빠르게 사라져 어떻게 친해질 기회가 하나도 없었다. 동규가 직속 후배로 들어온 절호의 찬스를 규연은 놓치지 않았다.

동규가 학과 행사에 하나도 참여하지 않아도 별 구설수 없이 지낼 수 있는 건 이 선배의 후광이 매우 컸다.

-동동, 나야.

“네.”

-급한 일 있어?

“아니요.”

-약속은.

“……없어요.”

-그럼 와서 조금만 도와줘. 나도 너 부르기 싫었는데 이 멍청이가 연영과랑 무슨 내기를 하게 됐대. 술 마시라는 거 아니고 서빙도 안 봐도 돼. 그냥 와서 계산만 해.

“저 수포자라 그런 거 잘 못하는데요.”

-계산은 계산기가 해 줄 거니까 괜찮아. 사람들이 뭐 시킬 때마다 적당히 웃으면서 돈 거슬러 주기만 하면 되는데 두 시간만. 그때쯤이면 하림이도 오지 않을까?

며칠 전에도 술 마시자고 선배들이 몰아가던 걸 규연이 구해 준 게 생각나 동규는 작게 “갈게요”라고 답했다.

친구들은 동규가 온다는 말에 신이 나 동규를 과방으로 데려갔다. 친구들의 손에 이끌리면서도 동규는 하림에게 주점 도와주게 됐으니 집이 아니라 학교로 바로 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하림은 뒤늦게 동규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 동규의 친구들과 선배들 SNS를 확인했다. 동규 사진마다 하트를 누르고 싶은 걸 꾹 참고 규연이 ‘핫바디 존잘남에게 주문하러 오세요!!’란 문장과 함께 온갖 해시태그를 달아 놓은 거에만 ‘누나 저 가요’란 댓글을 달았다.

집으로 날아가 옷을 갈아입고 예쁘게 꽃단장을 한 채 동규네 학교로 차를 몰았다. 정문부터 알록달록한 연등이 달려 있어 하림은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국문과 주점에 도착하자 바로 보이는 건 현금 계산에 쩔쩔매고 있는 동규였다. 하림은 이젠 같은 학교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동규의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동규의 옆에 섰다.

“인간 계산기가 왔습니다.”

국문과 주점은 무조건 선불이었고 계산이나 주문은 앉은 자리가 아닌 카운터에서만 이루어졌다. 동규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으면 주문을 하러 가야 했고 오래 보려면 많은 걸 주문해야 했다. 손님이 여러 가지를 시킬수록 동규의 머리는 자꾸만 꼬여 갔다. 그런 와중 하림이 나타나 밀려드는 주문을 빠르게 정리해 계산을 탁탁 해 주니 동규는 순식간에 줄어드는 계산 줄에 감탄밖엔 나오지 않았다.

“왜 붙잡혔어.”

동규 때문에 지체됐던 주문 줄이 정리가 되어 이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불참회비 냈잖아.”

“나도 몰라. 그냥 규연이 누나가 도와달래서 잠깐만 도와줄 거라.”

“잠깐이 맞아? 아니면 오늘 종일이야.”

“잠깐……일걸.”

“물어보고 와.”

“올 필요 없어.”

등 뒤에서 들려온 규연의 목소리에 동규와 하림이 깜짝 놀랐다.

“하림이 너 오늘만 우리 과 학생 해라.”

“네?”

“첫날이 사람 제일 없어서 제일 매출 높은 곳에 첫날 매출 몰아준대. 근데 지금 연영이랑 내기 붙었어.”

“내기고 뭐고 얘는 불참회비도 냈는데 이렇게 매출에 써먹을 거면 불참회비를 받지 말았어야죠. 이런 거 하기 싫어서 불참회비를 낸 건데.”

“이렇게 매정하게 굴기야? 불참회비 돌려줄게. 아니, 매출 톱 찍으면 두 배 아니 다섯 배로 돌려준다.”

“어때.”

“……1등 하면 진짜 다섯 배죠.”

“그럼 그럼. 1등 못 해도 불참회비는 바로 돌려줄게.”

“장소는 한정되어 있고 테이블 수도 그렇고. 받을 수 있는 사람 수나 재료도 한정되어 있을 건데 얘나 제가 호객 행위를 한다고 해도 매출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요.”

“동규가 약혼남만 아니었어도!”

주문 줄이 생겨 다시 계산을 마친 하림이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누나. 혹시 안주들 테이크아웃 가능해요?”

“접시 째로 가져가면 그게 테이크아웃이지.”

“맥주잔으로 나가는 플라스틱 컵 있잖아요.”

“거기는 안주 반 정도 들어갈걸?”

“친구 불러도 되죠.”

“땡큐지.”

“누나 잠깐만 둘이 얘기 좀 해요. 김동규 여기서 혼자 하고 있어 봐.”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술 먹는 사람은 왜 이리도 많은 건지, 동규는 또다시 주문 줄을 길게 만들면서 홀로 진땀을 흘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말라고 했던 당부에 어색한 웃음을 유지하며.

“김동규, 나와.”

“응?”

“배고프지. 우리도 이제 손님 하자고.”

“지금?”

“안주 도장 깨기 하자.”

선배 둘이 카운터로 들어와 동규가 어리둥절한 채 물러났다. 규연이 마련해 준 테이블에 앉은 동규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단 채 하림이 할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하림이 한 말은 태연하게도 “뭐부터 먹을래?”였다.

“먹기는…… 다 먹을 건데, 뭐 했어?”

“뭘?”

“아까 누나랑 둘이 얘기했잖아.”

“아, 그거. 돈지랄.”

“…….”

“지랄도 못 되네. 그냥 소소한 돈 씀씀이.”

“뭔데.”

“너네 과 주점 1등 하길 바라면 안주만 열심히 먹어 주면 돼. 너도 매출에 한몫할 수 있게.”

“알았어.”

하림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기 때문에 동규는 하림을 믿고 카운터로 가 먹고 싶은 안주를 전부 시켰다. 계산하라고 하림이 지갑을 준 덕에 동규는 돈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동규가 안주들을 모두 시켜 먹는 동안 주점 입구는 사람이 밀려들어오며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건지 너무 긍금해진 동규가 하림에게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이러는 거냐고 물어봤지만 하림은 어깨만 씰룩하는 게 다였다.

“아까 연등 걸려 있는 거 예쁘던데 이따가 이거 다 먹고 다른 곳들도 돌아다니자.”

“응.”

“아 맞다. 그리고 규연이 누나도 잠깐 끼기로 했어.”

“어디.”

“여기.”

“여기?”

하림이 동규에게 빈 술잔을 내밀면서 끄덕였다. 동규는 어리둥절한 채로 소주를 따랐다.

“왜?”

“누나가 잘생긴 애들이랑 술 먹고 싶다 그래서 그러자고 했지. 너는 마시지 마.”

“응.”

제일 구석에 앉아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계속 다른 사람들이 동규나 저를 알아봐 귀찮아질 뻔했다. 하림은 자극적인 안주들 중에서 유일하게 먹을 수 있었던 계란찜을 거의 다 먹어 가 배가 불렀다. 물론 액체인 소주를 두 병 넘게 홀로 마셨으니 배가 부른 건 당연한 건데 그래도 저보다 훨씬 많은 음식들을 복스럽게 먹고 있는 동규를 보고 있자니 괜히 뿌듯했다.

“진짜 잘 먹는다.”

“배고팠어.”

“배 별로 안 고파도 많이 먹잖아.”

“그건 그런데. 혹시…… 나 살 쪘어?”

“아니. 잘 먹으니까 좋다고.”

동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양을 혼자 마신 하림이 또 빈 잔을 동규에게 내밀었다. 저렇게 먹어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게 신기하다. 하림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다 보면 한 번씩 하림이 마시고 있는 건 그냥 초록병 안에 든 생수가 아닐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 아닌 거 알지만 하림에게 한 잔 따라주고 소주잔 입구에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당연하게도 술 냄새가 났다.

“너도 한 잔 하게? 안 된다니까.”

“안 마셔.”

“와인 마시고 싶다.”

“소주가…… 세 병짼데.”

“지금 기분 딱 좋아.”

하림이 나른하게 말하는데 때마침 규연이 소주병 하나를 들고 와 테이블에 앉았다.

“와씨 김동동 너, 진짜로 시킨 거 다 먹었어?”

“대박이죠. 엄청 잘 먹는다니까요.”

“하림이 너도 같이 먹은 거 아냐?”

“전 계란찜만요.”

“동규 먹방해라 먹방. 돈 떼로 벌고도 남겠네.”

“싫어요.”

“하림아, 김동규 얘도 술 먹었어?”

“아니요.”

“그럼 이거 다 하림이 너 혼자 먹은 거?”

“네.”

“너도, 어우. 대단한데.”

“제가 빈말은 안 하는 사람이에요.”

“동규야 얘 진짜 주량이 다섯 병이야?”

“더 될 걸요.”

규연이 너는 간이 두 개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하림이 너랑 술 너무너무 마시고 싶었는데 이제야 마시네. 시끄럽고 엉성한 곳이라 좀 미안한걸. 그래도 선배인데 딱 맛있는 안주 나오는 술집에서 제대로 사 줘야 하는 건데.”

“괜찮아요. 저도 누나랑 이렇게 마시니까 좋아요.”

“아 맞다. 너 저번에 다른 애들이랑 술 마신 거! 그거 알고 내가 얼마나 배신감 느꼈는지 알아?”

“그래서 오늘 이렇게 누나랑 단둘이서만 마시잖아요. 사실 주점에도 놀러 올 생각 없었는데 누나 생각해서 온다고 한 거예요.”

“캬, 내가 진짜 공부를 못한 게 한이다 한. 하림이 너랑 같은 학교 선후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게요. 우리 학교 선배를 다 합쳐도 누나 한 명보단 못 할 걸요.”

“이거 이거, 예쁜 하림이 립 서비스도 예쁘게 잘하네. 너네 과에 여자 선배 있어? 있겠지. 배 아플 것 같으니까 공대라 없다고 해. 아, 근데 물리학과 공대 아니랬나.”

“누나가 공대하라고 하면 우리 과 공대로 칠게요.”

하림이 웃으며 규연이 듣고 싶은 대답을 들려줬다. 보아하니 규연은 서빙하다 술을 몇 잔 마신 모양이었다.

“그럼 김규연과 서하림의 첫 합동 음주를 기념하는 짠 합시다! 동규 너도 잔 채우기만 해.”

있는 줄도 몰랐던 잔에 동규가 물을 채워 두 사람과 건배했다. 동규는 문득 하림과 규연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3월 셋째 주였나, 어느 정도 대학 생활이 익숙해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하림이 동규네 학교 안에 있는 카페에서 동규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거기에 규연도 있었다. 동규가 카페에 들어와 하림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걸 입구 쪽에 앉아 있던 규연이 발견했다.

‘친구 누구. 주안이? 유주? 시은이?’

‘아니요.’

‘걔네 말고 누구?’

‘……선배는 모르는 친구예요. 다른 학교 애라.’

‘나도 소개시켜 줘. 얼마나 친하면 여기서 널 기다려. 서얼마 약혼녀?’

‘남자앤데요.’

동규는 하림을 소개시켜 주고 싶지 않았지만 선배가 인사만 하고 돌아간다기에 어쩔 수 없이 하림을 소개시켰다. 규연은 원래부터 하림의 SNS를 팔로하고 있었고 하림은 동규에게서 규연의 이름을 듣는 순간 동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백일장에서 늘 대상만 받아 가던 그 3학년 김규연이 이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눈치챘다.

‘저도 선배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백일장에서 항상 김동규 위에 1등 받아 가던 준경여고 3학년 김규연 아닌가요?’

‘맞아!’

‘이렇게 희대의 천재를 뵙네요. 영광입니다.’

‘저 역시 국가가 인정한 이과 천재를 뵈어서 영광입니다.’

원래부터 알던 사람인 것처럼, 두 사람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친해졌다. 하림은 이때 규연이 동규에게 지어준 김동동이라는 별명도 처음 들었다. 이날부터 동규도 규연에게 선배가 아니라 누나라고 불렀다. 물론 자의는 아니고 하림과 규연의 뜻이었다.

“누나.”

“오냐.”

“저 궁금한 거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주실 수 있어요?”

“뭔데.”

“누나 김동규 좋아하죠.”

동규는 말없이 골뱅이를 집어 먹다 놓치고 말았다. 허벅지로 떨어진 골뱅이는 바닥까지 굴렀지만 동규는 옷에 붉은 양념이 묻은 것도 모르고 규연과 하림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너도 나중에 내가 뭐 하나 물어보면 솔직하게 대답한다고 약속하면.”

“약속할게요.”

“좋아해. 나 말고도 우리 학교에만 한 트럭이지. 남산도 채울 수 있어.”

하림은 동규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전혀 몰랐군. 아주 바람직해.

“내가 동규 처음 본 게 고3때인데 그 때는 키 크고 멀끔해서 눈길이 간 정도고, 그런데 저런 애가 글까지 잘 써서 매번 내 밑으로 상을 받잖아. 중학교 이제 졸업해서 올라온 애가 헉 소리 나게 잘생겼는데 그럼 안 좋아하고 배기냐. 동규 때문에 글 쓰는 여고생들 난리도 아니었지. 졸업하고 나서도 창작 학원 동생한테 들은 건데 동규한테 고백했다가 차인 애도 있대.”

고백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왜 누나가 거짓말까지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동규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 칭찬인데.”

“……몰라. 나 밖에 나갔다가 와도 돼?”

“안 돼. 동동, 앉아. 하림이가 된다고 해도 내가 안 돼.”

엉거주춤 일어난 동규가 하림을 쳐다봤지만 하림은 어깨만 으쓱 했다. 동규는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규연이 하림의 술잔이 빌 때마다 빠르게 술을 채워 주었고 하림도 규연도 빠르게 잔을 비워 나갔다.

“그러다 뭐, 나도 원서 쓰고 수능 본다고 공부도 하고 대학 들어와서 등단이다 휴학이다 바쁘게 지내다 잊고 있었는데 미친, 2년 만에 첫사랑 김동규가 내 후배로 들어왔어.”

“오, 완전 로맨스 영화 같네요.”

“내 말이.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김동규는 약혼을 해 버린 몸이었고!”

“저런…….”

“고작 스무 살짜리가 약혼반지라고 몇 백만 원짜리 반지를 끼고 돌아다니는데 이거 뭐, 결혼 할 사람이 있다니까 어떻게 작업을 쳐 보지도 못해. 아까워 죽을 맛이야.”

동규가 그 말에 제 손에 있던 반지를 뺐다. 규연이 동규의 팔뚝을 때리며 지금 빼 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웃었다.

“근데 올해 최고의 반전. 난 사실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

“네?”

“동규 좋아하는 건 맞아. 근데 지금은 그냥 예쁜 후배로 좋아하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의 반전. 난 처음에 동규 내 후배로 들어와서 존나 싫어했다.”

규연의 얘기를 듣는 동안 단 한 번도 놀래지 않던 하림이 이번에는 정말 놀라 ‘진짜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리얼입니다. 왜냐면. 그 전에 짠 하고.”

너무 궁금해 하림은 원샷을 했다.

“아, 뭔데요. 진짜 대박이에요. 누나가 왜 김동규 싫어한 건지 감도 안 와요. 동동이라 부르고 완전 예뻐하는데.”

“바야흐로 내가 고등학교 3학년 김동규 씨가 풋풋한 1학년이던 옛날 옛적.”

“호칭 동규에서 김동규 씨로 바뀌었다.”

하림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동규는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이든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하림이 허벅지를 붙잡고 있지만 않았어도…….

“나는 내 친구 중에 글 쓰는 애가 있는데 친한 애는 아니고. 근데 걔가 어느 날 자기는 백일장 다니면서 문상 많이 받는다길래 나도 처음엔 그거 때문에 걔가 다니는 학원 다닌 거거든. 처음 간 게 중3 겨울방학인가……. 근데 가보니까 학원 애들 절반이 예고 떨어진 애들이라 김 씨를 알고 있었고 걔네로부터 김 씨의 소문은 익히 듣긴 했어. 어디 대회에서는 중학생인 김 씨가 고등학생 제치고 학생부 1등을 했었다. 중학생부는 김 씨를 이길 수 없다 뭐다. 근데 뭐 그건 내가 중학생 때 글을 안 써서 그랬나 봐? 동규 나랑 3년 전에 한창 현역으로 붙었을 때 한 학기 내내 전국 백일장에서 다 만났는데 나 이긴 적 한 번도 없어.”

“알죠. 준경여고 3학년 김규연.”

“……그래도 장원 두 갠가 받았는데.”

“내가 안 나간 백일장인가 본데.”

“그리고 누나, 누나는 고3이지만 저는 1학년이었잖아요. 솔직히…… 동일선상은 아니죠.”

“네, 김 씨 아저씨. 정확하게 동일한 기간으로 가려 봅시다. 3학년 1학기에다가 여름방학까지 열린 대회만 따져서 장원 몇 개 받으셨죠? 제가 알기론 저의 반도 되지 않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그 때 장원만 열세 개요.”

“열세 개요? 김동규 너 몇 개였지?”

“……몰라.”

“근데 나는 상금 때문에 듣보 대회도 다 참여하긴 했어. 실적 인정 안 되는 거라도 용돈 벌이 한다는 생각으로. 아무튼, 내가 장원 받으면 동규가 차상 받고 내가 1등 받으면 동규가 2등 받아서 그때 그 바닥에서 돌았던 고유명사가 ‘차김장김’이었어. 시상은 낮은 상부터 부르니까 ‘차상 김동규 장원 김규연’이 하도 당연한 순서로 불린다고.”

“몰랐어요.”

“불알친구라는 니도 김동규한테 나으 이름 한 번 못 들었을 것이다. 왜냐믄 저 김 씨 아저씨는 날 몰랐기 때문이지.”

“누나 서울 사람 아니에요?”

“맞아. 엄마가 여수 사람이야. 그래서 술 마시면 엄마 말투 튀어나와.”

잔을 비운 하림은 규연 쪽으로 몸을 좀 더 가까이 했다.

“암턴, 김 씨는 나한테 밀려서 한 학기 내내 2등만 해서 예고 애들이 나랑 얘를 남매라고! 오해를 한 적도 있었다, 이 말이야. 둘 다 이름에 규 들어가잖아. 그러다가 뭐였지. 야, 우리 문학 캠프 참여하는 그거 뭐지. 810 가입하는 거. 나는 그거 귀찮아서 안 들었어.”

“그게…….”

“아. 됐어, 됐어.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무튼 그게 3학년들 수시 원서 쓸 수 있는 가장 마지막 대회거든. 양심 없는 새끼들은 2학기에도 나가긴 해. 3학년이라고 참여 못 하게 하는 건 아니라. 아무튼 그 때 금상이 김 씨였고 대상이 나였는데 나는 이제 마지막이기도 하고 그래도 3, 4, 5, 6, 7, 8 여섯 달 동안 1등 경쟁했던 사이니까 나름 속으로 친하다고 생각하고…… 말을 걸었어.”

‘야, 너 나 알지.’

‘…….’

‘왜 이렇게 멍 때려.’

‘누구세요.’

“이제 나는 이게 마지막 백일장이니까 앞으로 네가 다 장원 받겠다, 짜식 그 동안 선의의 경쟁자가 되어 줘서 고맙다, 넌 1학년이니 앞길이 창창하다 같은 준비한 모든 말들이 쏙 들어가더라. 어떻게 나를 모르냐고 물어보지도 못했어, 자존심 존나 상해서. 나 혼자만의 내적 친목이었던 거지.”

“기억 나?”

“눈도 못 마주치고 물 마시는 거 보니까 기억 안 난다.”

하림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답하기도 전에 규연이 놀려 대자 동규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요.”

“3월에도 내가 똑같이 물어봤는데 기억 안 난다며! 이게 어디서 선배한테 구라를 쳐 구라를!”

“서하림…….”

“누나, 얘 울겠어요.”

진정하라며 하림이 규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메뉴판도 펼쳐 누나가 먹고 싶은 거 시켜 준다 하자 규연이 침착해지며 과일 빙수를 시켰다.

얼마 얘기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규연이 마시는 속도가 빨라 두당 두 병을 거의 다 비우는 중이었다. 하림도 규연의 속도에 따라 마시느라 점점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어 남은 얘기는 안주 먹이면서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기억이 구려서 첫사랑이고 뭐고 다 파사삭 엔딩! 짝짝짝! 근데 뭐, 다시 봤을 땐 2년 만에 본 거라 자존심 상하고 화나고 그런 것도 다 희미해진 상태에서 만났고 걍 와, 짜식 완전히 남자가 됐네 하는 감탄만? 준수한 외모와 착한 몸매에 따르는 인간적인 호감이나 끌림은 있지만 그게 다야. 만약 동규 진짜로 좋아했어도 결혼 할 사람 있단 얘기 듣고 바로 마음 접었을걸.”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같은 학교 사람이에요?”

“응응. 불문과고 올해 프랑스로 교환 학생 가서 너네는 몰라. 내년에 돌아오면 보여 줄게. 모솔인 주제에 내가 걔한테 지금 고백 다섯 번째 까였다, 하림아?”

“사진 있어요?”

사진을 보고 누나가 아깝네, 뭐가 잘났다고 누나를 까네 하며 두 사람이 열을 올리는 동안 동규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동규는 속이 타 남은 물을 전부 다 마셔 버리고 손을 흔들어 새 물통을 받았다.

그 뒤로도 하림과 규연은 부어라 마셔라 하며 주점 매상을 착실히 올렸다.

“와 씨, 서아림 술 조온나 세.”

“누나 숙취 해소제라도 사다 줘요?”

“어어어. 그거 사주고, 너네는 가. 씨이, 나 공문현한테 전화 할 거야.”

“누나 그 사람한테 흑역사 적립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서빙하던 주안이 규연의 상태를 보고 숙취 해소제를 가져 왔다. 유주와 시은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규연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우리가 선배 뒤처리할 테니까 너네는 가. 서하림도 술 엄청 마셨네. 아우, 최주안! 너도 좀 선배 잡아 봐!”

“난 괜찮아.”

하림은 그렇게 마셔 놓고도 멀쩡하게 일어나 똑바로 걸었다. 동규와 동규의 친구들이 술냄새가 풀풀 나는 하림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정말이야.”

“야…… 우린 서하림 앞에서 술가지고 깝치지 말자.”

“사랑하는 친구들, 우리 간다.”

“어어! 내일 또 온다고?”

“여기는 잠깐만 들를게. 누나 저 갈게요.”

시끄러운 주점을 나서자마자 하림은 발걸음을 멈췄다. 아까 여기 올 때만 해도 해가 떠 있어 연등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몰랐는데 해가 지자 연등의 불빛들이 어딜 쳐다봐도 한 가득이었다.

“네 거 어딨어? 소원 쓴 거 있잖아. 커다란 숲에서 놀고먹는 곰 쓴 거.”

“……그렇게 안 썼어. 그리고 나도 내 거 어디 있는지는 몰라. 이거 거는 건 축제 위원회에서 하는 거라.”

“그렇구나. 아쉽다. 보고 싶었는데.”

연등을 따라 학교를 조금 돌아다니다가 코끼리 동상 앞에 앉았다. 하림이 아이스크림 먹고 싶단 소리에 동규가 얼른 뛰어가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하림은 쭈쭈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로 동규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코끼리 위에 앉아도 돼?”

“올라가면 퇴학이래.”

“나는 여기 학생 아닌데.”

“내가 당하지 않을까.”

“손 따뜻해.”

“응.”

“키스하고 싶어.”

“나도.”

“내 손목 잡아 봐.”

동규에게 기대 앉아 깍지를 꼈다가, 손가락 사이를 만졌다가, 반지를 뺐다가 껴 주면서 하림은 한숨을 자꾸 푹푹 쉬었다. 평일에다 첫날이고 죄다 공연 보러 가서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지만 한 번씩 동규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하림은 재미없다며 툴툴거렸다.

“술 마셨으니까 뜨끈뜨끈한 김동규 품 안에 안기면 딱인데.”

“집에 갈까?”

“음, 아니. 공연은 언제 시작한다고 그랬지.”

“8시부터.”

“30분이나 지났네. 보러 갈까. 규연이 누나가 재학생 팔찌도 줬어.”

재학생에게만 판매하는 걸 규연이 하림에게 줬는지 하림은 꼬물거리며 주머니에서 팔찌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정작 재학생인 동규는 아직 사지 않은 거였다.

“나 그거…… 귀찮아서 안 샀어.”

“그럴 줄 알고 누나가 너 것도 나한테 줬지.”

동규는 하림에게 양손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 손을 잡아 하림은 동규의 손에 팔찌를 둘렀다. 제 손도 동규에게 뻗어 팔찌를 해 달라고 조르는데 동규가 하림의 손을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 하림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 주지 않았다. 하림이 손을 가볍게 털어 뭐 하냐고 물었다.

“집에 가자.”

“공연 보고.”

“……가자, 집으로.”

동규는 하림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원래도 뜨거운 동규의 손이 너무도 뜨거워 하림은 제 손이 녹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웃긴 생각이 들었다.

“축하 공연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오는.”

“서하림.”

저를 올려다보는 동규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다. 하림은 조금 더 튕겨 보려다가 제 손을 터트릴 것처럼 꽉 쥐는 동규에게 홀랑 넘어가 버렸다.

“장난이 안 통하네.”

하림에게 차 키를 받아 든 동규는 평소답지 않게 차를 거칠게 몰았다. 늘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항상 주차를 완벽하게 한다고 자랑하던 동규였는데, 동규는 처음으로 주차를 삐딱하게 하고 차에서 내렸다.

“우와 너 이렇게 이상하게 주차한 거 처음 봐.”

신기한 거라도 발견한 듯 하림이 주차선 밖으로 튀어나온 바퀴를 허리까지 숙여 봤지만 동규가 하림을 들쳐 업을 기세로 끌고 갔다. 하림은 여전히 뒤를 돈 채로 후면주차도 아니고 전면주차를 하면 어떡하냐, 선 밖으로 차가 삐져나왔는데 나중에 전화 오겠다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하림이 동규에게 바짝 붙어 왔다.

“너한테 술 냄새 엄청 나.”

“입이나 벌려.”

“누가 보면 어떡해.”

“우리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하면 돼.”

“그게 무슨 말도 안.”

급한 건 하림도 마찬가지였으므로 하림은 동규에게 입을 맞추면서 동규의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탄탄한 복근이 손가락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가슴까지 올라갔을 때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했다.

한 층에 호수가 하나밖에 없으니 12층 전부가 하림의 집인 셈이라 하림은 동규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지문 인식 패널에 손가락을 올려놓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한 다급한 손길에 자꾸 지문을 제대로 인식하라는 경고음이 들려왔다.

“아, 씨발 손가락 제대로 올려 놨는데 왜 자꾸.”

1초도 너무 길다. 하림은 술도 많이 먹었고 몸이 달아올라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다섯 번째 경고음이 들리자 30초 후에 시도하라는 문구가 떴다. 하림은 욕을 삼키며 주먹으로 문을 쾅 때렸다. 꽤 큰 소리가 나 동규는 깜짝 놀랐다.

“손 괜찮아?”

“어. 아 진짜 욕 나오게 하네.”

“내가 할게.”

“빨리 해.”

술 먹으면 사람의 폭력성이 나온다고 하지만 처음 보는 하림의 모습에 동규는 조금 겁을 먹었다. 하림의 손에 호호 바람을 불어 주다가 30초가 지나자 제 손가락을 올려 문을 열었다.

지문이 확인되었다는 맑은 효과음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하림이 문을 열어 동규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동규를 벽으로 밀어붙여 옷을 벗겨냈다. 단 한 번에 동규의 상의를 벗어 던진 하림은 다시 동규에게 입술을 붙이고 동규의 가슴을 세게 붙잡았다. 손바닥을 가득 채우는 동규의 가슴에 하림은 당장이라도 동규와 몸을 섞고 싶었다.

“씨, 씻어야지.”

“알아.”

“잠깐…….”

“씻으려면 옷 벗어야 하잖아.”

동규의 바지를 벗기기 전 하림은 동규에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 동규의 속옷까지 한꺼번에 내렸다. 하림이 나지막하게 신발 벗으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동규는 단숨에 알아듣고 신발도 벗었다. 오로지 동규만 알몸이 된 상태로 다시 입술이 맞붙었다. 동규의 것은 이미 발기가 되어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림이 동규의 것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아, 씻고…….”

“집에 오자고 한 게 누군데.”

자꾸 씻자며 고개를 돌리는 동규 때문에 하림이 짜증을 냈다. 동규는 실수한 건가 싶어 입을 가렸다. 동규의 성기도 겁을 먹고 크게 한 번 움찔거렸다.

“손잡아. 그놈의 씻는다는 소리 그만 좀 하고.”

동규의 손을 잡은 하림이 욕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가는 길엔 상의만 남기고 하림의 바지와 속옷이 허물처럼 흔적을 남겼다. 욕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하림은 참지 못하고 동규를 끌어안았다. 동규도 제 것에 닿는 하림의 성기를 느끼고 하림의 엉덩이를 세게 쥐었다.

“하림아. 술 많이…… 취하면 원래 좀…… 이래?”

“어떤데.”

“그냥.”

“나 술 안 취했어. 기분 좋은 정도지. 내가 술에 취했으면 우리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문 앞에서 서로 바지만 벗고 하고 있을 거라는 말이야.”

“진짜 안 취한 거 맞아?”

“응. 동규야, 나……”

이렇게 달콤하게 이름을 부르고 입술에 뽀뽀하는 건 반칙이다. 분명 취한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는 것도 반칙이고 동규의 손가락을 제 뒤에 비비면서 말 대신 행동으로 보채는 것까지 전부. 씻더라도 일단 한 번 해야 술도 좀 깨고 진정이 될 것 같은데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멋대로 굴어도 될지 동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으음…….”

하림의 안으로 동규의 손가락 하나가 들어갔다. 동규가 넣은 게 아니라 하림이 넣은 거였다. 성기는 어서 손가락이 아니라 자길 넣어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동규는 하림을 돌려 세워 하림의 두 손이 욕실 문을 짚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하림의 뒤를 벌려 귀두를 삽입했다. 하림이 발가락을 모으며 신음을 터트렸다.

한 손으로는 하림의 손을 겹쳐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림의 허리를 안아 천천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니, 쑤셔 넣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굉장히 좁고 뻑뻑한 곳에 커질 대로 커진 것을 억지로 넣으려고 하니 잘 들어가지가 않았다.

“힘, 좀 빼.”

“아, 으, 천천히…… 흐으…….”

반 정도 들어갔을 때 허리를 뒤로 물려 뺀 동규가 다시 절반까지 강하게 쳐올렸다. 하림이 문을 짚고 있던 손을 말아 쥐며 아파 했다.

“안 되겠어. 콘돔이라도 껴야 돼.”

동규가 하림에게서 제 성기를 빼내면서 아쉬워하지 말라고 입을 맞췄다. 준비 없는 삽입에 하림도 힘이 들었는지 입술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어디 있더라.”

동규가 욕실을 둘러보며 살피는 동안 하림은 샤워 부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동규에게 취하지 않았다고 한 건 반쯤 거짓말이고, 차에 올라탔을 때 갑자기 술기운이 훅 올라와 조금 어질어질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게 규연을 기다리는 동안 세 병쯤 마셨고 규연과도 둘이 다섯 병을 마셨으니 하림 혼자 마신 양만 따져 봐도 꽤 됐다.

떨어지는 물 때문에 셔츠가 몸에 들러붙어 벗기가 어려웠다. 동규가 다 벗고 들어오자는 걸 춥다고 입고 온 건데 술김에 괜한 고집을 부렸다. 취할 정도로 마신 건 아니지만 확실히 정신은 잡고 있기가 조금 힘들었다. 하림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다 답답함에 그냥 죄다 뜯어 버렸다. 따뜻한 물을 맞고 있으니 술기운이 더 도는지 온몸이 쿵쿵거렸다.

“욕실에는 몇 개 없던데.”

바로 삽입하기 수월하도록 동규는 콘돔을 끼고 젤까지 아예 치덕치덕 발라 왔다. 물론 하림의 뒤도 풀어 줘야 했으므로 동규의 손에는 하늘색의 플라스틱 통도 함께였다.

“근데 역시 씻는 게 먼저겠지.”

“아, 진짜…… 각방 쓰기 싫으면 씻는다는 말 그만하고 빨리 넣어.”

“그럼 끊어 먹을 듯이 조이지 마.”

아무것도 없이 넣을 때보다 훨씬 부드럽게 귀두와 성기가 삽입됐다. 그래도 역시 반 이상이 들어가자 좁은 내벽이 성기를 압박하는 힘이 엄청났다. 동규는 손을 뻗어 하림의 것을 잡아 흔들었다. 성기를 자극해서 그런지 하림의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밀어 넣을 수 있었다.

“한 번 싸고…… 나갈 거야.”

“응, 응.”

“근데.”

끝까지 밀어 넣었던 성기를 뒤로 물렀다가 한 번에 쳐올렸다. 하림은 단숨에 꿰뚫고 들어오는 동규의 성기를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입도 절로 벌려졌지만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동규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다.

“너, 취한 거…… 맞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

말도 못하고 바르르 떨기만 하는 하림의 허리를 다잡고 동규는 또 귀두가 빠지기 직전까지 나갔다가 깊게 찔러 박았다. 참고 있던 숨이 터진 건지 하림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씩 피스톤질하는 속도를 높였다. 찔러 넣을 때마다 하림이 몸을 바르작대며 허리를 비틀었다.

“대답, 해. 맞지. 취했, 잖아 지금.”

“흐읏, 하아, 으으, 앗!”

빨라지는 허리 짓만큼 하림의 성기를 위아래로 쓸어대는 손도 점점 빨라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해 보려는데, 하림이 사정을 하며 상체를 무너트렸다. 동규는 얼마 하림의 안에서 움직이지도 않았음에도 정액으로 젖어 버린 제 손바닥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림이 동규를 밀어 동규의 성기가 빠져나가게 했다.

“하아, 흐으…… 김, 동규.”

“술 취했지.”

“술 취했는지 왜 자꾸 물어봐.”

“그냥. 나는 술을 안 마시니까.”

동규의 것은 아직 사정을 하지도 못했고 하림의 안을 제대로 괴롭히지도 못한 상태라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아있었다. 하림은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런 와중에도 동규의 손 하나를 가져와 얼굴을 묻었다.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냥 씻지 말고 밖에서 할 걸 그랬다. 동규의 옷을 벗겨 던지지 말고 동규의 입을 틀어막는 데 썼어야 했다. 동규를 눕혀 놓고 그 위에 올라타는 한이 있더라도 그랬어야…….

“안아 줄게.”

“응.”

고작 두 걸음 걷는 것도 휘청거린 하림은 동규의 품 안에 안겼다. 동규가 하림을 번쩍 들어 안아 욕실을 나왔다. 하림의 방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키스를 하며 혀를 섞었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질척거리는 소리로 변해 갈 즈음 동규가 하림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입을 맞춘 채로 동규는 하림의 다리를 벌려 넣었다. 하림이 숨을 삼키며 입술을 떨어트렸다가 다시 입을 맞춰 왔다.

긴장으로 팽팽해진 하림의 허벅지를 찬찬히 쓸어내리며 동규는 끝까지 삽입했다. 훅 좁아지는 하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남김없이 성기를 밀어 넣기 위해 허리에 힘을 강하게 줬다. 결국 하림이 입술을 떼고 신음을 흘려 댔다.

“아파…….”

“조금 있으면 기분 좋아지잖아.”

“맞아. 그건 그래.”

눈물이 고인 하림이 웃어 보였다가 묵직한 동규의 성기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동규는 하림의 얼굴 곳곳에 뽀뽀를 하며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넣을 때도, 뺄 때도 하림이 고개를 젖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동규의 팔을 잡아 흔들리는 제 몸을 고정하고 그만 조이라는 동규의 말을 따라 힘도 빼봤는데 배 속을 찔러대는 성기 때문에 하나마나였다.

이렇게 잘 풀지 않고 섹스하는 날이면 동규가 힘으로 비좁은 곳을 뚫어 대는 탓에 동규의 힘을 따라 하림의 몸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하림의 머리가 침대 헤드에 닿으려는 순간 동규가 하림의 안에서 제 것을 빼내고 하림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엎드려.”

술도 많이 마셨고 엄청난 힘으로 밀어붙이는 동규 때문에 하림은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은 팔과 다리를 겨우 움직여 몸을 뒤집었다.

바로 삽입할 줄 알았지만 동규는 제 것을 슥슥 매만지다가 첫 사정을 마치고 콘돔을 바꿔 썼다. 그러고는 숨을 고르고 있는 하림의 엉덩이를 벌려 빠끔거리고 있는 곳에 혀를 가져갔다. 예민한 곳에 동규의 혀가 닿고 들어가고 빨리는 건 기분이 오묘할 정도로 좋긴 하지만 가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치밀어 오르곤 해서 하림은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그거 말고…….”

돌아온 대답은 찰지게 엉덩이를 때린 소리였다. 하림은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신음만 끙끙 흘려댔다. 한 번 싫다고 의사를 표현해서 그런지 동규가 일부러 소리를 내며 뒤를 빨아댔다. 몸의 일부일 뿐인데도 동규가 혀를 대고 있으면 온몸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곳이라 하림은 어서 동규가 그만하고 차라리 넣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동규는 한 번씩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계속 뒤를 핥아대고 빨아대면서 뒤를 풀어 나갔다.

혀를 안으로 밀어 넣는 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거였다. 성기보다는 짧지만 더 집요하고 세심하게 움직일 수 있는 혀는 하림의 안을 이곳저곳 핥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좁은 곳을 꾹꾹 눌러대는 통에 하림이 그만하라고 혀를 조여 대면 동규가 신나서 웃어 대는 게 뒤로 느껴졌다.

하림의 뒷구멍에 잔뜩 침을 묻혀 놓은 동규는 엉덩이 사이에서 얼굴을 떼고 손가락 두 개를 찔러 넣었다. 그리고 크게 벌려 억지로 벌어진 곳에 젤을 짜 넣었다. 붉은 속살이 차가운 젤 때문에 꿀렁거리는 게 보였다.

“야, 지, 지금 뭐를, 왜!”

“젤 많이 쓰면 뒤에서 물 나오는 것 같아서 아예 미리 넣어 두려고.”

“그러니까 그걸, 그게, 아, 으…….”

“꼴리잖아. 나 때문에 발정 나서 잔뜩 젖는 거 같고.”

차가운 게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이상한 감각에 하림이 동규가 기껏 넣은 젤을 죄다 밀어냈다. 동규는 애써 넣은 게 뭉텅이로 빠져나와 이불을 적시는 걸 보고 엉덩이를 한 대 때렸다. 하림이 젖은 눈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힘주지 마.”

“근데, 진짜…… 진짜 이상한데…….”

“어차피 안에 엄청 뜨거워서 금방 녹아.”

“아니, 동규야 그게, 이게 안에 들어오는 게 진짜 이상한 느낌 들어.”

“싫지는 않다는 거네. 다시 넣는다. 넣고서 못 나오게 바로 막아 줄게. 엉덩이 더 들어.”

통을 흔들어 젤이 모이도록 한 동규는 젤로 축축해진 곳에 이번에는 손가락 세 개를 넣어 벌렸다. 젤을 하림의 안에 잔뜩 짰더니 이번에는 안에 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넘쳤다. 하림이 뒤에 힘을 주어 나머지도 빼 버리기 전에 동규는 제 것을 넣어 막았다. 얇은 콘돔 너머로 차갑고 말랑거리는 게 느껴졌다. 정말 이상하긴 한 건지 하림의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미안한 생각이지만 뜨거운 하림의 안에 차가운 게 들어있으니 어쩐지 흥분이 되어 조금 있으면 체온에 금세 녹아 버릴 젤 말고 얼음 같은 걸 넣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찬 게 한가득 들어있는 게 이상하다며 뒤를 잔뜩 조여 대는 것도 좋고 자꾸 이상하다며 울먹거리는 하림의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하림의 안에 그걸 줄줄 쌌을 때에도 하림이 당황하던 게 떠올랐다. 몸 안에 이상한 액체가 차오르는 하림보다 정작 싼 본인이 더 놀라 하림이 생각을 정리하고 저를 달래 주었는데. 하림의 다리 사이로 투명한 게 흐르던 건 굉장히 선정적이었다. 우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게 한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꼭 물이 흐르는 걸 젖은 구멍에서부터 감상해야지. 누운 채로 다리만 벌려서 뒤를 핥아 줄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 보는 것도 좋고 하림을 일으켜 세워 엉덩이를 벌린 채 구멍에서부터 허벅지를 따라 줄줄 흐르는 걸 봐도 괜찮다. 뭐든 굉장히 꼴리는 광경일 거였다.

아무래도 불편한 젖은 셔츠를 아예 벗겨 내고 허리를 눌렀다. 동규는 거세게 피스톤질을 하며 하림의 안이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제가 좆으로 쑤셔 주면 쑤셔 줄수록, 비벼 대면 비벼 댈수록 하림의 안은 예민해지고 뜨거워질 테니 안에 짜 넣은 젤들이 그만큼 빠르게 녹아 갔다.

차가운 감각이 점점 사라질 때쯤 동규의 성기를 따라 다 녹은 젤들이 조금씩 조금씩 새어 나왔다. 아주 소량이었지만 동규는 정말 하림의 몸에서 나온 것처럼 느껴져 하림의 엉덩이 아래쪽이 젖어 갈 때마다 점점 허리 짓이 난폭해졌다.

하림은 자꾸만 커지고 빨라지는 동규를 따라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숨을 쉬는 것도 버거웠다. 조금 진정하라고, 천천히 하라고 해 봐도 동규가 말을 듣지 않았다. 오늘은 뒤가 젖는다는 데에서 퓨즈가 나간 건지 아래쪽에서 평소보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크게 날 때마다 옅게 웃었다. 동규 때문에 잔뜩 흔들리는 시야에서도 동규가 웃는 게 보여 하림도 한 번씩 웃음이 나왔다.

“한 번만 더 넣자.”

동규의 것이 완전히 빠져나가자 많은 양의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동규는 하림의 엉덩이를 높게 세워 젤을 더 짜 넣었다. 녹은 젤이 하림의 입구는 물론이거니와 그 주변으로까지 묻어 있어 온통 미끌거렸다. 동규는 남은 젤을 하림의 안에 다 쏟아 넣을 기세였다. 하림은 엉덩이가 들리면서 배 속의 액체가 더 깊은 안쪽으로 흐르는 게 느껴져 숨을 훅 들이켰다. 이런 감각이 배 속에 존재해도 되는 걸까. 정말…… 동규랑 하면 할수록 남들에게는 말도 못 할 비밀이 늘어간다.

거친 숨도 나오고 손도 미끄럽고. 하림의 안은 너무 좁아서 동규가 원하는 만큼 젤이 충분히 들어가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되었다. 동규는 거의 다 짜 비어 버린 통을 던졌다. 빈 통이 바닥에 닿아 텅텅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규는 하림의 안에 끝까지 박아 넣고 하림의 허리를 내렸다.

안이 온통 녹은 젤로 찰박거려서인지, 동규는 제 것을 전부 밀어 넣자마자 사정을 하고 말았다. 사정을 했다고 크기가 줄어들진 않아 여전히 하림의 뒤를 틀어막은 꼴이었지만 동규는 혹시라도 젤이 밖으로 샐까 숨을 고르며 하림과 제 것이 연결된 곳을 빤히 살펴보았다.

“배가…… 배 안이,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네 거로도 꽉 차 있고 젤도……. 내 배 만지면 빵빵하지 않을까.”

하림의 말에 바로 손을 아래로 넣어 하림의 배를 만져 봤지만 배가 빵빵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액체인 상태로 흘려보낸 거면 모르겠는데 젤이라 반은 들어가고 반은 들어가지 못해 그런 듯했다.

“안 그래. 조금밖에 안 들어가서.”

“조금……이라고? 엄청 많이 들어간 줄 알았는데.”

“움직인다. 안에, 젖어서 촉촉해.”

“아…….”

사정한 성기가 하림의 안에서 다시 힘을 받아 단단해지고 또 사정을 하고 나서도, 동규는 한참이나 하림의 안을 들쑤셨다. 동규는 이대로 계속 하림의 안에 있느냐 아니면 물이 줄줄 흐르는 하림의 뒷구멍을 볼 것이냐 하는 고민을 하며 허리를 움직였다.

흥분으로 잔뜩 선 하림의 등근육과 곧은 척추 뼈가 보였다. 제 허리 짓을 따라 들썩거리는 어깨뼈와 쾌락으로 꿀렁이는 예쁜 근육들이 보기 좋았다. 동규는 하림의 뒷목과 날개뼈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췄다.

사정을 했어도 동규는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하림을 품에 꼭 안은 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성기로 달라붙는 내벽의 감촉은 놓치고 싶지 않아 되도록 많이, 오래 하림의 안쪽을 쑤셔 대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럴수록 아래에서 죽어나는 건 하림이었지만 하림도 동규에게 빼라거나 비키라는 말 대신 신음만 흘려 댔다. 안에서 제 성기를 뺄 생각을 하지 않는 동규가 입을 맞춰 오면 맞춰 오는 대로 키스를 하고 이름을 불러 달라 하면 할딱거리는 와중에 불러 주고, 반대로 동규가 하림의 이름을 애타게 부를 때마다 꼬박꼬박 대답도 해 주었다.

뒤쪽의 감각은 점점 희미해지고 성기로 두드려 맞는 듯한 배 속에서 느껴지는 빠듯함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즈음 하림은 자세를 바꾸기 위해 침대를 짚었다. 그런 마음을 읽은 것인지 하림의 안에서 빼지도 않고 세 번이나 사정을 한 동규가 드디어 하림에게서 제 것을 빼냈다. 성기를 따라 엉겨 붙은 물들이 줄줄 떨어졌다. 동규는 정액을 한가득 쏟아 낸 콘돔을 벗겼다.

“뒤에 힘 줄 수 있어?”

쉬어 버린 목을 가다듬으며 하림이 뒤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동규랑 하면 늘 그랬듯이 뒤로는 감각이 없었고 나름대로 힘을 주어 다물었다고 생각하는데도 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잘 안 돼? 왜 이렇게 움찔거려.”

“네 크기를 좀 생각해…… 그걸로 강제로 벌어져서 몇 시간을, 아, 힘 주는 것 자체가…….”

“완전히 꽉 안 다물어지네.”

동규는 하림의 구멍을 검지로 쓸었다. 물이 조금씩 흘러나와 아까웠다.

“일어나서 서는 건 할 수 있지.”

“조금만 쉬고.”

“나 보고 싶은 거 있어.”

숨을 고르던 하림이 동규의 부탁에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안에 잔뜩 고여 있던 것들이 아래로 쏠리는 느낌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하림은 본능적으로 뒤에 힘을 줬다. 두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이불만 세게 쥐었다.

“빨리 일어나서 서 봐, 하림아.”

“도대체 뭘 보고 싶으신 건데요 변태 아저씨.”

“변태 아저씨가 보고 싶은 게 뭐겠어.”

“코앞에서 자위하는 거라도 보고 싶어?”

“그것도 좋지. 근데 그건 다음에. 아니, 이따가 보여 줘.”

하림은 허리를 두드리며 동규의 앞에 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힘이 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동규의 앞에 정액으로 엉망인 제 성기를 보여 주는 게 쑥스러웠다.

“뒤로 돌아.”

엉덩이를 붙잡은 동규의 손길에 하림은 동규가 뭘 보고 싶은 건지 감이 왔다.

“동규야.”

“응. 뒤에 힘 주고 있다가 천천히 힘 빼.”

“자꾸 흘러.”

이런 말이 듣고 싶은 거겠지. 하림은 돌아 선 제 엉덩이를 잡아 벌리는 동규 때문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엉덩이를 벌리면서 구멍도 같이 벌어졌기 때문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녹은 젤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허벅지와 종아리를 타고 내려가는 물줄기를 다라 동규의 시선도 내려가는 것만 같아 하림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으윽! 김, 아!”

갑작스럽게 동규의 것이 들어왔다. 하림은 아무것도 잡을 게 없어 동규의 팔을 붙잡았다. 동규는 하림을 껴안고 몇 번 허리를 움직이다 침대에 앉았다. 몸무게 때문에 끝까지 들어찬 성기에 하림은 골이 올렸다.

“우, 움직이지, 으…….”

동규는 하림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는 하림의 손을 끌어와 그의 성기를 잡게 했다.

“자위하는 거 보여 줘.”

“그럼, 좀, 빼고, 아…… 김동규, 흐읏!”

“안 움직일게.”

동규에게 뒤가 뚫린 상태로 하림은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분명 동규는 가만히 있는데도 한 번씩 못 견딜 정도로 허리가 찌릿찌릿하게 울려 손을 몇 번씩 멈추고 숨만 쉬었다. 그 때마다 동규가 어깨나 목덜미, 귓가에 입을 맞추며 잘한다고 속삭여 주었다.

백 허그라도 하고 있는 듯한 자세에 하림의 심장이 쿵쿵 울렸다. 저도 모르게 하림은 뒤를 조이며 허리를 뒤틀었다. 나지막하게 신음을 터트린 동규가 하림을 뒤에서 껴안은 채로 얕게 몸을 치대기 시작했다. 동규는 여전히 하림이 위아래로 손을 움직이며 자위하는 걸 보고 있었고. 허리 짓은 점차 격해지더니 결국엔 하림을 끌어안고 위아래로 움직이고 말았다. 오로지 동규의 힘이었다.

“…….”

앞을 얼마 만지지도 않았는데 하림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 바들바들 떨려 왔다. 동규가 저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찍을 때마다 동규의 성기가 가장 깊은 곳을 뚫어 버릴 것처럼 찔러 왔고, 달아오른 동규의 거친 숨이 귓가로 쏟아졌다. 동규의 목소리가, 애타게 부르는 제 이름 사이에 섞여 있는 숨결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아……. 동규의 목소리로 잠식당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순간 뇌 속 어딘가가 터지는 듯한, 아니 시간이 아주 잠깐 멈춘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몇 초 동규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꼭 사정할 때와 똑같은 감각이었다.

정신을 차린 하림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성기는 정액으로 더러웠지만 이건 아까 침대에 누워 동규와 섹스할 때 사정한 거였고 새로 흘린 건 단 한 방울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상황을 빠르게 판단해 보건데 하림의 머릿속에 나온 결론이 있었지만 하림은 애써 그걸 무시하고 입술을 물었다. 말도 안 돼. 제대로 움직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목소리만으로.

하지만 제 성기를 아래에서 위로 쓸러 올려 봐도 꼭 조금 전 사정이라도 한 것처럼 아릿했다.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왜, 너무 많이 싸서 이제 안 나와? 같이 해 줘?”

“아니.”

“아, 나는 조금 전에 네가 되게…… 조여서…… 싸 버렸어.”

이렇게 딱 붙어 있는데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민망한 사실을 동규에게 들킬까 봐 하림은 몸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동규의 것이 삽입되어 있었고 동규는 하림을 놔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동규야, 잠깐만.”

“아직이야.”

하림의 몸을 내려누른 동규가 하림의 허리를 안아 가볍게 흔들었다. 하림은 동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신음했다.

“한 번만 하고 끝낼게. 지금 하림이 네 안이, 진짜 너무 젖어서 쑤실 때마다 야한 소리도 나고 안에가, 존나 말랑말랑해.”

“그 한 번은 긴 한 번을 말하는 거겠지.”

“잘 아네.”

“하아…….”

“귀여운 것 같아.”

“뭐가.”

“네 여기.”

동규가 잔뜩 벌어진 하림의 구멍을 더듬었다.

“왜냐고 왜 안 물어봐.”

부끄러워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하는 하림의 귓가에 동규가 웃음을 흘려 댔다. 하림이 목을 움츠리며 하지 말라고 작게 말했다. 동규는 하림의 귀에 더 바짝 입술을 가져갔다.

“나랑 하고 나면 잘 다물어지지도 못하는 구멍이 귀엽지 않아?”

“…….”

“내가 그렇게 몇 시간을 커다란 좆으로 늘려 놔서 뒤가 줄줄 새는데도 힘도 못 줄 정도로 벌어지는 거 귀여워. 너는 모르겠지만 끝나고 나면 살짝 벌어진 것도 벌어진 건데 부어 있거든. 평소에는 새침한 모양새로 주름이 예쁘게 잘 잡혀 있는데 잔뜩 쑤셔진 거 티 내면서 부은 게 진짜 귀여워. 색도 진해져 있고.”

“그만해. 나는 별로 안…… 궁금해.”

“더 귀여운 건 몇 시간 지나면 부은 것도 없어지고 다시 또 새침한 모양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언제나 좁고 작은 모습으로. 그거 보고 있으면 저 작은 곳에 내가 들어가는 게 맞나, 들어가도 되나, 찢어지는 건 아닌가 늘 걱정해.”

하림이 동규의 머리카락을 한 번 세게 쥐었다가 놓았다.

“아파.”

“그렇게 걱정을 하시는 분이…….”

“변태 아저씨라 그래. 이제 좀 괜찮아졌지? 움직인다.”

하림의 허리를 안고 들썩거리던 동규는 마음껏 박아 넣기 위해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하림이 안이 뒤틀리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마지막 한 번 오래 참아 보라며 동규에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동규는 그 말을 착실하게 잘 지켰다. 잘 지킨 동규에게 하림은 상을 주었고, 그 상은 욕조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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