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동규의 시간표는 장렬하게 망했다. 하림이 도와준다는 걸 혼자 해 보겠다고 한 게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설마 망하겠어,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대충 수강 신청 시간 맞춰 일어나 배 긁으며 도전했다가 피를 봤다. 도저히 밥을 차려 먹을 기운이 나지 않아 씻고 하림의 집으로 날아갔다.
하림의 집에서 밥을 먹고 2층으로 올라오자 하늘에게 전화가 왔다. 동규의 얘기를 들은 하늘은 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가 없다며 웃다가 눈물까지 흘려 댔다. 동규는 하늘이 놀려 대는 것보다 나름대로 자기 학교에서 하림의 학교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생각해서 어떻게 어떻게 할 거라고 짜 두었던 계획이 하나도 맞지 않아 좌절한 거였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먼저 수강 신청을 한 하림과 요일이라도 맞추고 싶었는데 그것도 실패였다.
-이게 고등학교 4학년이지 뭐야!
깔깔거리는 하늘의 웃음소리가 온 방에 쩌렁쩌렁 울렸다. 하림도 말을 잃고 동규의 어깨만 두드렸다.
-5일 내내 1교시 미쳤나 봐. 아, 존나 배 아파. 너무 웃어서 지금 눈물까.
더 이상 하늘의 말을 들려주기 싫어 하림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바로 하늘에게 다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음, 그래도 금요일은 수업이 하나밖에 없고 좋네.”
“그러게. 금요일은 내가 너네 학교로 가면 되겠다.”
“흐음.”
“우리 똑같이 끝나는 날은 어쩌지. 내가 가기도 뭐하고 네가 오기도 좀.”
동규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하림과의 거리로 인한 시간 소비였지 1교시가 일주일 내내 잡혀 있는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하림의 시간표를 보고 무조건 하림이 학교 가는 날과 똑같은 요일에, 하림이 차 타고 올 시간까지 생각해서 나름 시간표를 A안부터 D안까지 짜 놨는데 다 망해 버렸다.
“어차피 내 집 옥수역 근처니까 상관없을 것 같아.”
하림은 학교 근처로 집을 사 주겠다는 할아버지에게 기껏 사 준 차 열심히 타고 다니고 싶다는 이유로 자취집을 한남동으로 구해 달라 했다. 강을 건너지 않아도 좋은 곳 많은데 뭐 하러 한남까지 가냐는 얘기에는 놀러 다닐 곳이 강북에 더 많다는 핑계를 대긴 했는데 그건 할아버지도 믿지 않았다.
그는 굳이 한남동을 콕 찝어 외치는 의심스런 장손에게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며칠 뒤 하림에게 후보군 몇 개를 뽑아 고르게 했다. 하림이 정한 곳은 옥수역 근처 고급 빌라. 동규네 학교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곳인데 집 앞에 있는 옥수역에서 동규네 학교까지는 고작 지하철로 세 정거장이었다.
“우리 집은 강남구 개포동인데.”
“와 멀다. 그러면. 내 집엔 안 오려고?”
“……아니. 매일 갈 거야.”
“좋아. 그럼 됐네. 오후 수업만 있는 날은 아침에 김동규 모셔다 줘야지.”
동규도 좋다고 대답하려다가 하림의 차를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그 으리으리한 차를 타고 학교에 내리면 바로 시선 집중이 될 게 뻔했다.
“그냥 지하철 타고 갈래.”
“왜?”
“뭐 하러 아침에 일찍 일어나. 늦게까지 푹 자.”
“그럼 나 수업 없는 날은 내 차 타고 가.”
“……나 장롱면헌데.”
“딴 지 이제 겨우 일주일 됐는데 장롱면허는 무슨 장롱면허야.”
다른 건 몰라도 하림이 혼자 살 집이 학교와 가까워 그건 좋았다. 10년을 같은 학교 다니다가 처음 떨어지게 된 건데 언제든 하림이 보고 싶으면 바로 달려갈 수 있을 정도인 곳이라.
하림은 동규랑 뭐 하고 놀지 알아보다 동규를 자취집에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큰 짐이나 가구들은 예전에 보냈고 자잘한 짐들만 정리하면 되는 데다가 3월 1일에 동규 불러서 집들이를 할 예정이었지만, 자기가 장롱면허라고 빼고 있는 걸 보니 틈나는 대로 차를 태워 버릇 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가자.”
“이제 밥 방금 먹었는데.”
“집 보여 줄게.”
분명 3월 1일이 이삿날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동규는 갑자기 닷새나 일찍 집을 보여 준다는 말에 일어나지 않고 고개만 갸우뚱했다.
“일어나 일어나. 너 거기 가서 할 거 있어.”
“뭐 무거운 거 옮겨야 돼?”
“아니.”
생각지도 못한 귀여운 말에 하림은 웃음이 나왔지만 그저 동규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중요한 거.”
하림을 따라 나오긴 했는데 하림이 동규에게 ‘네가 운전할래?’라며 키를 흔들어 보이는 게 아닌가. 동규는 손사래를 치며 조수석 손잡이를 잡고 섰다.
“도대체 언제 운전하려고?”
“나중에 아빠가 졸업 선물로 차 사 준대.”
“그럼 그 전까지는 내가 많이 태워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지금도 어디 밖으로 놀러 나가는 일이 있다 하면 무조건 동규를 제 옆에 태우기 바쁜 미숙한 초보 운전자 하림에게 동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응, 알았어.”
하림을 따라간 빌라 입구에 도착한 동규는 하림이 하란 대로 제 지문을 착착 등록했다. 1층 공동 현관, 주차장 그리고 이제는 하림의 자취집이 된 12호까지.
“나는 여기 살지도 않는데 내 거는 왜 등록해.”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동규는 하림이 언제든 제 집에 와도 된다는 것 같아 무척 신난 목소리로 물었다.
“내 거는 다 네 거니까?”
동규가 예상했던 것보다 하림이 더 엄청난 말을 내뱉어 동규는 눈동자만 아래로 굴렸다.
“그리고 당연히 네 거도 내 거고.”
“……응, 다 너 가져가.”
부끄러워 아무 말이나 내뱉는 동규 때문에 하림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문을 열었다.
“한 번 둘러보고 갈래? 테라스 되게 넓고 한강도 다 보여.”
“응.”
“아니다. 제대로 보는 건 이삿날에. 오늘은 그냥 지문만 등록해. 가자, 드라이브하러.”
“응. 아, 잠깐만.”
엘리베이터를 잡으려는데 동규가 아직도 12호 앞에 서 몇 번이고 잠금을 해제했다. 손가락 올려서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리면 문을 열었다가 닫아서 잠그게 하고, 그러면 또 손가락을 올려 잠금을 해제시켰다. 하림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고 동규가 하고 싶을 때까지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제 된 것인지 동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몸을 돌렸다.
“고장 나는 건 아니겠지.”
“고장 나면 새로 바꾸지 뭐.”
동규는 지문을 등록한 검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하림에게 바짝 다가가 입을 맞췄다. 고작 지문 하나 등록한 것 가지고도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아예 같이 살자고 그럴 걸 그랬나. 그런데 전에 한 번 동규보고 같이 지내는 건 어떤지 떠봤는데 얼굴이 빨개지며 절대 안 된다고 뺐던 게 떠올랐다.
“너 없을 때도…… 와도 돼?”
“물론.”
“집주인은 너인데.”
“상관없어.”
따로 나가 살 생각을 처음 했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정한 사항이었다. 동규가 편하게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하려고 했던 건 맞지만 동규가 학교 사람들과 혹시 술이라도 마시면 괜히 길거리에서 방황하지 말고 제 집에 올 수 있도록 동규 학교 근처로 정한 것도 컸다.
“그래도 어떻게 너 없는 곳에 들어와.”
“나는 집에 왔는데 네가 나 기다리고 있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은데?”
얼굴이 빨개진 동규가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하림은 동규, 하늘과 셋이서 술을 먹은 다음 날 동규에게 대외적으로는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다고 하는 게 좋겠다며 동규가 술 마실 일 자체를 아예 없애 버렸다. 하늘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참견하느냐고 하림을 나무랐지만 동규는 하늘이 찍었던 동영상이 꽤나 충격이었기 때문에 하림의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OT 때도 뒤풀이는 참석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뒤풀이는 가기 싫다고 얘길 하긴 했는데 OT 참석한 신입생은 한 명도 빠지지 말란 말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가 술집으로 향하는 걸 보고 알코올 알레르기를 방패 삼아 빠져나왔다.
술을 못 마시면 앉아만 있으라는 사람이 반이나 됐지만 동규는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셨다간 기도가 막혀서 죽을 수도 있다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동규의 말 한마디에 붙잡는 사람만 천하의 나쁜 놈이 되어 버려 선배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동규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새터도 당연히 불참이었다. 술 마시는 것도 싫지만 장기 자랑은 더 하기 싫어서. 하림이 생각해 낸 알코올 알레르기가 이렇게나 유용하다.
OT 다녀온 날부터 동규의 메시지 대화창 목록이 늘어났다. 인문대 신입생방, 국문과 신입생방, 국문과방, 세문고 출신 D대생방 외 동규에게 일대일로 대화를 거는 학생들이 많기도 해서 하림은 겉으로 티는 안 냈어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사귀고 난 뒤 동규 프로필 문구를 하림의 림자인 수풀 림林을 의미하는 나무 이모지와 함께 ‘지구야 아프지 마’로 해 둔 것도 ‘메시지 확인 잘 안 해요’로 수정한 때가 대학 합격한 직후였다. 그래도 동규에게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끊이질 않았다.
하림이 슬쩍 드라이브는 동규가 운전해 보라고 차 키를 건넸다. 동규는 잠시 하림의 손에서 달랑거리는 차 키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번에는 무슨 결심인지 고개를 끄덕이곤 운전자석에 올라탔다.
“……나 운전 잘 못해도 몰라.”
“사고만 안 내면 되지.”
동규가 액셀을 밟은 순간부터 드라이브를 하고 레스토랑에 도착해 주차를 마칠 때까지 하림은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동규를 엄청 띄워 줬다. 그 덕에 동규는 걱정과 달리 매끄럽게 운전을 할 수 있었다.
“밥 먹었으니까 디저트 어때.”
“좋지.”
“타르트?”
“좋아.”
식사를 마치고서는 하림을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동규가 하림의 차 키를 챙겨 들었다. 동규가 운전해 한남동으로 가는 동안에도 잘한다 잘한다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내리기 전 하늘에게 전화가 왔다. 아침에 전화할 때 할 말이 있었다면서. 동규에게 맛있는 떡볶이 사 준다는 내용이었는데 동규가 신나서 바로 약속을 잡았다가 어마어마한 양으로 유명하다는 분식집이라는 걸 알고 살짝 당황했다. 하늘이 자꾸 카메라를 들이밀면서 어디까지 먹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웃어서 더 그랬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오지 말걸 그랬다며 동규가 후회 아닌 후회를 했지만 막상 먹기 시작하자 동규 입맛에 너무 딱 맞는 곳이라 또 오자고 하늘과 새 약속을 잡았다. 하림과 같이 와도 되냐고 물어보려다가 달고 맵고 짠 음식들이라 말없이 숟가락만 움직였다.
이삿날엔 동규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림의 집에서 잠을 잤다. 다음 날이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동규는 주말 내내 하림의 집에서 뒹굴거리다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제 집으로 돌아갔다. 다른 학교 학생으로 지내야 하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며 하림이 동규를 끌어안고 집에 보내려 하지 않은 탓이었다. 동규도 하림 없이 학교를 다닐 생각만 하면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입술이 퉁퉁 부을 정도로 오랜 시간 키스를 하다 잠에 들었다.
오랜 시간 같은 학교를 다녔던 만큼 아직은 두 사람 다 받아들이기 힘든 낯설음과 함께 스무 살의 3월을 맞이했다.
1교시만 없을 뿐이지 미리미리 학점을 채워 놓기 위해 하림도 1학년 1학기치고는 빡빡한 시간표라 동규와 일어나는 시간은 엇비슷했다. 아침마다 깨워 주는 사람이 없는 게 제일 이상했고 부모님과 이모님이 집 안에 없는 것도 이상했다.
저녁은 선약이 없다면 동규와 먹었다. 두 번 중 한 번은 집에서 먹었고 한 번은 밖에서 외식을 했다. 술 약속도 거의 대부분 거절했다. 하림은 술 마시는 걸 무척 좋아했지만 매번 술자리를 빼는 이유는 다름 아닌 동규 때문이었다.
“사귀는 사람 있다고 해.”
워낙 주변에 무신경한 것도 있고 눈치가 없는 것도 그렇고 하림은 이해할 수 없지만 동규는 자기가 잘났다는 걸 모르고 있다 보니 한 학기 정도는 동규가 알아서 철벽을 잘 치고 다닐 거라 생각했다. 예상과 달리 그 튼튼한 철벽은 한 달도 되지 않아 무너졌지만.
정확히는 무너졌다기보다는 동규도 사람인데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버거워하기 시작했다는 게 더 정확했다.
동규는 혼자 하림을 기다리는 한이 있어도 학교가 끝나면 무조건 하림의 집으로 갔다. 친한 친구도, 선배도 하다못해 교수님도 동규의 뚝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동규를 두고 술 약속을 잡는 대신, 하림은 술을 마시고 싶으면 동규와 함께 집에서 마셨다. 만약 뺄 수 없는 자리라면 꼭꼭 동규의 허락을 받았다. 동규는 무조건 괜찮다고 허락을 해 주는 편이지만.
“말했지. OT 때부터 계속 얘기했어. 오래 사귀었고 지금은 한국에 없다고.”
“한국에 없다고 한 게 문젠가.”
“글쎄…….”
젓가락으로 회를 집으려던 하림은 테이블 위에 젓가락을 내려두고 머리를 싸맸다. 동규는 요 며칠 하림에게 학교 자퇴하고 싶단 얘기만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 마시라고 강요하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사귀는 사람 있다고 못을 박아 뒀더니 여자친구 보여 달라는 얘기가 나오고 입학하고 나서는 여자친구 없는데 여자친구 있다고 하는 거란 얘기가 돌아서 동규는 아침마다 학교 가는 게 짜증이 나곤 했다.
아무리 제 얘기여도 신경 끄고 입 다물고 있으면 어련히 관심이 사라지겠지 하고 가만히 있었지만 사람이 많은 곳이라 그런가 연애 얘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친해진 동기는 셋인데 하나는 남학생 두 명은 여학생으로, 친구들이 남학우들과 여학우들 사이에서 동규를 어떻게 얘기하는지 둘러둘러 얘기해 주곤 했다. 착한 친구들이라 나서서 얘기를 하는 편은 아니고 동규가 물어보거나 심각해 보일 때 살짝 얘기해 주는 게 전부였다.
오늘 학교에서 친구들과 점심 먹다가 들은 얘기는 꽤나 충격적이어서 하림과 저녁 먹으려고 만난 순간부터 동규는 친구들이 해 준 얘기를 하림에게 미주알고주알 전부 다 일러바쳤다.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꺼내 준 얘기는 남학우들 사이에서 동규가 재수 없음을 넘어서 공공의 적이 되었다는 거였다. 동규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게 거짓말이라는 건 거의 기정사실화되었고 뒤에서 욕을 엄청 하고 다닌다고도 했다.
“네 친구들이랑 한 번 만나 봐야겠다.”
“설마…… 너라고 다 얘기하게?”
“아니. 김동규 잘 부탁한다고 작업 좀 하려고.”
“무슨 작업?”
“그런 게 있어. 다음 주에 네 친구들이랑 약속 잡아서 나한테도 알려 줘.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자. 서하늘 데려가야지.”
“아, 안 돼.”
“왜.”
“그냥…… 너 혼자 와.”
“그러면 너무 어색한데.”
“그냥 나한테 뭐 책이나…… 그런 거 줄 거 있어서 전화했는데 내가 마침 너 있는 근처에서 밥 먹는다고 해서 그럼 지금 주러 잠깐 갈게 해서 만나면 되잖아.”
“올, 역시 미래의 셰익스피어. 스토리 술술 나오는데.”
하림은 회만 몇 점 더 집어 먹고 후식을 주문했다. 아직 신나게 식사 중이던 동규는 벌써 후식을 먹으려는 하림 때문에 놀랐지만 하림은 배가 부르다며 동규를 진정시켰다. 소갈비에 해신탕에 동규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죄다 시켜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던 한상이 거의 비워졌을 즈음 동규도 후식을 주문했다.
원래는 다른 곳 가려다가 동규의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여 비싼 거 먹이기 위해 한정식집에 데려온 건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곳은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자주 찾는 곳으로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하림의 입맛에 최적인 곳이었다. 물론 동규가 좋아하는 음식들도 많았다.
“배불러?”
“응. 딱 적당해.”
“아까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네가 했던 말 기억해?”
“오늘 왜 이렇게 예쁘고 멋지게 하고 나왔냐고. 내 생일도 아닌데.”
하림은 세 시에 수업 끝나자마자 미리 주문해 둔 것을 픽업하고 샵에 들러 머리도 했다. 동규네 학교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있다가 동규가 차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저를 보고 몇 초 동안 얼음이 되었던 걸 떠올렸다. 얼어 있던 동규가 ‘오늘 내 생일도 아닌데.’라며 조수석에 앉자마자 하림에게 입술부터 들이대 차 안에서 한참 키스하고 나서야 정명원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좀 더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이걸 주고 싶었지만.”
하림이 동규 쪽으로 내민 것은 작은 네모 모양의 케이스였다. 동규는 이게 뭔지 바로 알아보았다.
“열어 봐.”
“심장 터질 것 같아서 못 열겠어…….”
“손.”
떨리는 손을 작은 상자 옆에 가져간 동규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세게 뛰었다. 하림은 그런 동규를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한 얼굴로 리본 포장을 풀고 케이스를 열어 동규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반짝이는 반지가 하림의 손에 의해 케이스에서 빠져나와 제 손가락에 안착하는 그 짧은 순간이, 동규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도 끼워 줘야지.”
“하, 할게.”
동규는 반지를 놓치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과 함께 달달 떨면서 하림의 손에도 반지를 끼웠다. 하림은 왼손을 주먹으로 쥐었다 폈다 하며 웃었다.
“예쁘지.”
“이런 건 언제…… 아니, 그 전에 내 손가락 크기는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예뻐, 안 예뻐.”
“예뻐. 너무너무. 진짜로.”
동규는 손을 펴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동규도 하림에게 언젠가는 커플링을 맞추자고 해 볼 생각이긴 했었다. 둘 다 남자다 보니까 선뜻 말하지는 못하고 생각만 하고 있던 걸 하림은 바로 실행한 걸 보니 그 결단력이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나도 커플링 사려고 했었는데. 이거 얼마야. 비싸 보이는데.”
“비싸지.”
“그러니까 얼만데.”
“김동규가 근사하고 맛있는 저녁 만들어 주는 값.”
“아, 장난하지 말고.”
“장난 아니야.”
갑자기 손가락이 무거워지는 느낌에 동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김동규. 나 봐 봐.”
“응.”
“손.”
동규가 머뭇거리며 하림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하림은 커다란 손에 깍지를 꼈다.
“고등학생일 때는 학생이었으니 적당히 돈 많이 안 쓰고 연애했다지만 이제는 어른도 됐으니 나도 이제 내 돈 어른들 눈치 안 보고 쓸 생각인데.”
“…….”
“솔직히 네 입장에서 부담스럽지 않을 거라고는 말 못 해. 나는 내가 노숙자였다고 해도 빚을 내서라도 너한테는 좋은 것만 주고 싶은 사람이라.”
“그래도.”
“반지 얼마냐면 너네 학교 두 학기 등록금. 너랑 나랑 두 개니까 네 학기.”
작긴 해도 다이아가 박혀 있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예상을 훨씬 웃도는 금액에 동규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잠깐만.”
“네가 익숙해져.”
“하림아.”
“나도 적당히 쓸게.”
“잠시…… 생각을 좀.”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니까 잠시 말고 오래, 깊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우리 하루 이틀 연애하다 끝날 사이 아니잖아.”
드라이브하면서 생각해 보라며 하림이 일어났다. 동규는 반지를 빼지 못한 채 하림의 차에 올라탔다.
고등학생일 때도 늘 하림이 계산하고 사다 주고 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하림은 주로 먹는 것에만 돈을 크게 썼다.
언젠가 하림과 저녁을 먹고 동규가 계산하기 위해 용돈 카드를 내밀었다가 하림이 섭섭하다고 한 적이 있다. 하림은 동규가 계산한 영수증을 보면서 ‘나는 너한테 맛있는 거 사 먹이는 게 큰 행복인데 그걸 이렇게 뺏어 가네’라며 헤어질 때까지 평소답지 않게 시무룩한 모습을 보였다.
집에 와서는 하림이 했던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동규는 밤을 샜다. 하림의 집이 굉장히 부유하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돈을 얼마나 쓰느냐 안 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림의 행복이 초점인 거라면 동규는 하림의 행복을 뺏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하림이 엄청난 가격의 저녁을 사 주더라도 고맙다는 말만 할 뿐 가만히 있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하림과 수많은 식당을 다녀 봤지만 정명원은 메뉴판에 가격이 쓰여 있지 않은 곳이고 계절마다 메뉴들이 바뀌는 데다가 아예 손님 취향이나 식성에 맞춰 조리장이 알아서 만들어 주는 코스도 있다. 인터넷에 쳐 봐야지만 사람들 후기에서 가격을 알 수 있는 곳을 하림과는 벌써 두 손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왔었다. 그래도, 잘 먹는 거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다는 하림에게 싫다거나 부담스럽다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수학여행 갔을 때 비행기 좌석을 바꾼 거나 호텔 VIP 라운지를 이용했던 게 걸린다. 돈을 쓰지 않았다는 하림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저에게 늘 좋은 것만 해 주고 싶다는 말 역시 진심임을 안다. 졸업 선물을 비롯해 하림이 제 방식대로 하지만 당사자는 부담스러워하지 않게끔 여태 배려해줬다고 생각하니 미안함과 고마움, 부끄러움과 부담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하림의 말대로 하루 이틀 연애하다 끝날 사이가 되긴 싫고 계속 하림과 만나기 위해서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라면.
“……예전에.”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동규는 목을 가다듬었다. 하림은 동규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틀어 놨던 노래를 껐다.
“네가 그랬잖아. 나를…… 비싸고 좋은 곳들 데려가서 맛있는 거 사 먹이는 게 네 행복이라고. 반지도 그 행복의 일환이지.”
“맞아.”
“내가 만약에, 계속 부담스러워하고 미안해하고 그러면…… 어쩌지.”
“그럼 나는 상처받고 속상하겠지.”
“나는 그런, 부담스러운 마음이 아예 안 들 수는 없을 거야. 나는 지금 반지도 집에 가는 길에 잃어버리면 어쩌지 걱정돼. 오늘밤에 우리 집에 도둑 들어서 반지 훔쳐갈 것 같고 지하철 탔다가 소매치기한테 걸릴 것 같아.”
“이해해.”
“하지만…… 알겠어. 익숙해질게. 자신은 없는데…… 너랑 오래오래 연애하고 싶어.”
동규는 운전하느라 계속 앞만 보고 있어야 하는 하림을 바라보았다. 제 마음이 잘 전해졌을까. 하림은 답이 없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차오르는 말을 마저 꺼냈다.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지도 모르고, 매번 놀라고 미안하고 그래서 그 때마다 네가 속상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로 헤어지기 싫어. 나에게도 중요한 문제야. 내가, 내가 익숙해지려고 노력할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미안하고 부담스럽고 한 마음이 사라지고 고마운 마음만 남아서 너도 상처 받을 일 없을 거고…….”
조심스럽게 제 마음을 늘어놓는 동규를 위해 하림은 도로에서 벗어나 잠시 차를 세웠다. 그리고 핸들에 팔 하나를 올려 턱을 괸 채로 동규가 하는 나머지 말들을 끝까지 들었다. 동규는 말을 모두 끝내 놓고 하림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네가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알겠어.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를 너도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그 전에 미안하다는 말 먼저 할게. 반지 사기 전에 너랑 이 주제로 얘길 해 봤어야 했는데 내가, 많이 급했어. 우리가 평범한 남녀 커플이었으면 학교가 달라도 괜찮았을 건데 그게 아니라 너한테 뭐라도 내 흔적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덜컥 반지부터 질렀어.”
“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끼고 다닐게.”
“나는…… 많이 답답해. 너 좋아한다고, 우리 사귄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다 얘기하고 싶은데 그걸 못 하니까.”
동규는 하림의 미간을 꾹꾹 누르다 입을 맞췄다. 짧게 여러 번 뽀뽀를 해도 혀를 넣어 오래 입을 맞춰도 하림의 좁아진 미간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동규는 남들에게 비밀로 하는 연애라고 해도 하림과 있으면 충분해서 밖에서 손잡지 못하는 거나 키스하지 못하는 게 불편할 뿐 답답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림은 아니었나 보다.
“사람들이 무슨 반지냐고 물어보면.”
“응.”
“약혼반지라고 그래.”
“응?”
“아예 차단을 해 버리라고.”
“알았어.”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런가 누가 고백을 해 온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도 겨우 스무 살에 약혼이라는 강수를 두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커플링 맞췄다고 해도 충분할 텐데. 하지만 하림의 답답함과 불안이 풀린다면 약혼반지가 아니라 결혼반지라고 할 수도 있었다.
동규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하림이 동규 쪽으로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입술을 떼고 싶지 않아 하림은 아예 벨트까지 풀어 버리고는 본격적인 키스를 시작했다. 주차장도 아니고 길 한복판이라 너무 열이 오를 때면 입술을 떼는 대신 서로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혀를 섞고, 또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다가 다시 키스하길 반복했다.
교직 이수라는 큰 꿈을 안고 공부하러 중앙도서관에 도착한 동규는 건물로 들어가려다가 깜빡 잊은 게 있어 뒤로 돌아 나왔다. 건물 앞에서 도서관 사진을 찍고 나서야 만족했단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건물 안으로 향하는 걸음은 희망찼다.
6ear123123 열공하려고 중앙도서관 옴! 과탑을 노린다...
자리에 앉아 교수에게 받은 프린트나 교재를 꺼내기도 전에 동규는 제일 먼저 SNS에 방금 찍은 사진을 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SNS는 귀찮아 제대로 해 본 적도 만든 적도 없었지만 지난달 하림이 새로 만들어 준 거였다.
처음에는 하림에게 직접 사진 보내면 되는 걸 굳이 SNS에 올려야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동규도 사진과 이런저런 말을 붙여 제법 열심히 잘 쓰고 있다.
비공개 계정이라 하림만 알고 있는 곳에 사진을 올린 지 5분쯤 되었을까. 마찬가지로 동규만 알고 있는 하림의 비공개 계정으로 댓글이 달렸다.
0622xoxo1231 거기 말고 우리집 놀러와
0622xoxo1231 같이 공부하자 방 남아돕니다용
6ear123123 @0622xoxo1231 너네집 가면 공부 못해
0622xoxo1231 @6ear123123 보고싶은데ㅠ
6ear123123 @0622xoxo1231 그러면.... 두시가만 공부하고 갈게 너도 공부해야 되잖아
0622xoxo1231 @6ear123123 그러니까 왜 안 하던 공부를 하냐고ㅠ 공부 할거면 고등학교 다닐때 열심히 해서 나랑 같은 학교 오지ㅠㅠ
6ear123123 @0622xoxo1231 정신차렸어 이제 나도 열심히 살거야
0622xoxo1231 @6ear123123 뭐하러 열심히 살아 대충살아대충 내가 네 몫까지 열심히 살고 있는중임
6ear123123 @0622xoxo1231 너 보면 나도 열심히 살고 싶어져 두시간만 하고 갈게♡♡♡
그 뒤로도 서로 뽀뽀나 하트를 날려 대다가 이대로는 두 시간은커녕 20분도 공부를 못 할 것 같아 동규는 휴대폰을 아예 덮어 놨다.
과에는 교직 이수를 생각하는 학생이 반이 넘고, 공부 잘하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단 사실도 알고 있지만 하림을 보고 있다 보면 동규도 자극이 많이 됐다. 합격자 등록하는 마지막의 마지막 날까지 창작을 전공할 것이냐 국문을 전공할 것이냐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역사와 전통이 깊은 곳에 가면 조금이라도 나을 것 같아 국문과를 선택한 동규였다. 교직 이수란 큰 꿈도 선택에 한몫했다.
OT때 학과 안내 들으며 그냥 예대나 갈 걸 하고 적잖이 쫄긴 했으나 막상 강의들 듣고 있으면 까짓것 이과 과목들이 없으니 해 볼만 한 수준인 것 같고 어차피 1학년 1학기라 전공도 없으니 열심히 하면 대단한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패기 좋게 샤프를 든 동규는 음료수 사 오는 걸 깜빡해 카페부터 다녀왔다. 시럽을 왕창 넣은 아메리카노를 들고 앉자 뭔가 공부가 잘될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림이 오랜 시간 집중하며 공부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하림에게 부끄럽지 않을 남자친구가 되기 위해 동규도 프린트들을 진지하게 읽어 나갔다.
두 시간 동안 한 거라고는 시험 범위에 해당되는 것들을 몇 번씩 읽은 게 전부였지만 동규는 A+를 받은 것 같은 뿌듯함으로 색색의 펜들을 필통에 넣었다. 공부한 흔적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자랑해야지. 칭찬해 달라고 그래야지. 동규는 공부한 것들을 빠르게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야 김동규!”
도서관에서 나와 빠르게 학교를 빠져나가는 중인 동규를 발견한 주안이 달려왔다.
“방향을 보아하니 도서관에서 나온 거?”
“응.”
“간식 먹으러 가는 거면 같이 먹는 거 어떠냐. 나는 이제 강의 끝났다.”
“나도 공부 끝내고 집에 가는 건데.”
“이제 네 시밖에 안 됐어.”
“어, 알아.”
“벌써 끝?”
“나름 열심히 했어.”
“혼자?”
“응.”
“왜 혼자 했어! 공부할 거면 우리랑 같이 하지! 지금 전유주랑 오시은은 학교 근처 카페야. 나는 뒤늦게 합류하러 가는 거고.”
“그냥 너네랑 시간 안 맞아서.”
“그건 그래. 그럼 이제 너의 예쁜이 만나러 가겠네.”
“……응.”
여자친구의 장점을 말해보라고 했을 때 동규는 아주 많은 이유를 얘기했지만 그중에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건 외모였다. 남학생들이 얼마나 예쁘냐고 수도 없이 캐물었고 동규는 연예기획사에서 10년 넘게 따라다니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주안은 동규가 사귀는 누군가를 예쁜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혹자는 사진 한 번 보여 주지 않으니 별로 예쁘지 않아 그런 거라고 몰아갔지만 주안이 생각하기엔 다들 잘못 짚고 있는 거다. 저 김동규가 남들에게 보여 주기 싫어 꽁꽁 숨겨 둔 거면 얼마나 예쁠지 알 만했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지 않던가.
주안은 OT 때 우연히 동규의 옆자리에 앉은 것을 계기로 동규가 처음 사귄 대학 친구였다. 두 사람의 앞자리였던 유주와 시은까지 다 같이 친해져 넷이 잘 뭉쳐 다녔다. 최근 한 선배가 네 사람 이름에 모두 동그라미가 들어간다고 ‘국문과 아우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그 별명이 순식간에 유명세를 탈 정도로.
아무튼 하루도 빠짐없이 1교시를 듣는 동규는 동떨어져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점심은 되도록 넷이 함께 모여 먹었다.
“별일 없으면 우리랑 같이 공부해. 아우디 동그라미 하나가 빠지면 쓰나. 나야 추합으로 겨우겨우 들어온 거지만 전유주가 수석 입학이잖아.”
“진짜?”
“몰랐어?”
“응.”
“저번에 얘기했을 때 너 없었나? 아, 술 마실 때라 너 없었나 보다. 고등학생 때 얼마나 공부 잘했냐 뭐 이런 얘기 하다가 알게 된 거야.”
어딘가 똑똑해 보인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수석인 줄은 몰랐다. 주안이 정문 언덕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시은도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었다는 얘기를 해 줬다. 내신 포기하고 수능에 몰빵을 한 거라는 주안 본인의 이야기도 해 주었는데 동규는 한 달 넘게 같이 다닌 친구들에게 너무 무신경했던 것 같아 작게 반성했다.
“지하철 타러 갈 거지? 잘 가, 내일 보자.”
“아니. 걔네 보고.”
동규는 카페에 도착해 유주와 시은에게 먹고 싶은 것들을 물었다. 말하는 대로 쇼케이스에 보이는 모든 조각케이크를 주문한 동규가 친구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일부터 나도 같이 공부하고 싶은데.”
“케이크는 뇌물이었군.”
“……뇌물까지는.”
“근데 우리는 조용한 곳 말고 시끄러운 카페에서 공부하는 건데 괜찮겠어?”
“괜찮아. 나 원래 공부 안 해서 조용한 곳이 나랑 맞는지 시끄러운 곳이 나랑 맞는지도 몰라.”
평소엔 무슨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허공 어딘가를 멍하게 보고 있어 무기력하게 느껴질 정도인 동규가 눈을 반짝거리는 게 신기해 유주와 시은은 얼떨떨했다. 쟤 왜 저러냐, 나도 몰라 같은 대화를 눈동자로 주고받은 두 사람은 진동 벨이 울리자 주안에게 쥐여 주고 내쫓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유주가 팔짱을 끼며 어딘가 들떠 보이는 동규에게 물었다.
“잘은 몰라도 네가 전교 꼴등을 했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던데, 공부도 습관이거든. 같이 공부해도 상관은 없지만 하나도 모르는 걸 우리라고 선생님처럼 너한테 알려 주거나 하는 건 못 해. 과제는 다 네 몫이야.”
“물론이지. 과제는 내가 하는 건데. 그리고 공부는…… 그건 괜찮아. 강의 열심히 들었어.”
“중간고사 코앞이라 너는 지금부터 우리랑 벼락치기 한다고 해도 큰 기대는 하지 마라.”
“이제 겨우 1학년 1학기인데 왜 겁을 주고 그래.”
“솔직히 그렇잖아. 그리고 문창 있는데 굳이 국문을?”
두 사람 앞에서는 도저히 교직 이수의 ㄱ도 꺼낼 수가 없어 동규는 필사적으로 둘러댈 말을 찾아냈다. 케이크가 도착하자 유주와 시은의 관심이 동규에게서 벗어났다.
“간단한 거 아니야? 넘 잘 쓰니까 문창은 우습다 뭐 그런 거.”
주안은 나름 그럴싸한 이유를 꺼낸 것 같아 뿌듯한 맘이 들었다. 그 얘기를 들은 동규는 풀이 죽고 말았지만.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솔직히 내 말 맞는 거 아님? 고등학생 때 이미 다 정복했는데 비슷한 실력자들과 있어봤자 존심도 상하겠지.”
“아니라니까.”
“그래? 맨날 너는 학교 끝나면 여자친구한테 달려가느라 우리랑 뭐 이런 얘길 해 봤어야 알지.”
“나는…….”
때마침 하림에게 전화가 왔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를 받으려고 휴대폰을 꺼냈더니 주안이 ‘연애하느라 바빠서 공부는 할 수나 있나?’ 하고 물었다. 그대로 굳어 버린 동규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주안은 큰 의미를 둔 게 아니고 동규가 부러워서 한 말이었지만 이러나저러나 동규는 친구들과 손에 들린 휴대폰을 번갈아 보느라 전화를 받지도 못했다. 곧바로 또 전화가 걸려 왔지만 동규는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도로 넣었다.
“야 너는 말을 왜 그렇게 해서 김동규가 또 겁을 먹게 해.”
“내가 뭘?”
책상 아래에서 유주가 주안의 다리를 쳤다. 주안이 앓는 소리를 내며 씩씩거렸다.
“미안.”
하나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사과를 한 유주가 케이크 접시들을 주안의 앞에 옮겨 주었다.
“그래서 김동규 국문 왜 온 건데?”
정신없는 와중에도 시은이 모두가 잊고 있던 주제를 끌어와 되물었다. 동규가 ‘아 맞다.’ 하고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글 쓰니까 글을 이루는…… 근간인 한국어라는 언어를 좀 더 심도 있게 배우고 싶다고 해야 하나. 언어 자체를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언어의 역사나……. 한글은 또 과학적인 문자고 만든 사람이 확실한 데다가, 아무튼 언어에 대한 공부를 하고 그러면 글을 쓸 때에도 좀 더 잘……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왔어.”
“뚜아니는 도저히 예술가의 마인드를 모르겠당. 케이크나 먹어야쥐.”
주안이 고개를 저으며 케이크를 떠먹었다. 유주와 시은은 동규에게 들리지 않게 속닥거리며 열흘 정도 남은 중간고사를 어떻게 도와줄지 의논했다.
“그래 좋아. 뭐, 너는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어도 우리야 환영이지.”
“아무것도 안 하고?”
“말이 그렇다고. 전화 또 온다. 약혼남은 이제 가 주세요. 우리가 너무 오래 붙잡았네.”
“내일도 여기서 만나?”
“아니. 카페 다른 곳 갈 듯. 정해서 알려 줄게.”
“공부는…… 어떻게 해?”
“것도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 너 있으니까 규연 선배한테 뭐 물어보기도 쉽겠다.”
“빨리 가.”
“내일 봐!”
정말 이대로 가도 되는 건가 싶어 동규가 선뜻 일어나질 못했다. 버벅거리는 동규에게 몇 번이나 괜찮으니 어서 애인한테 가 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카페를 나선 동규가 전화를 받으면서도 친구들이 있는 창가 쪽에 섰다.
“동규야 제발 괜찮으니까 가!”
“이게 다 네가 아까 김동규한테 쪽 줘서 저런 거잖아.”
“내가 뭐!”
“얘들아 웃자. 이러다 김동규 다시 들어오겠어.”
세 친구는 활짝 웃으며 동규에게 두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동규도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고는 사라졌다.
입학도 하기 전부터 인문대를 조져 버린(D대 학생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다) 동규가 약혼반지를 끼고 왔을 때 다른 의미로 학교를 조져 버린 건 동규만 몰랐다. 알았으면 같은 과 학생들은 물론이고 타과생까지 몇십 명이 모여 있는 교양 강의 쉬는 시간에 주안이 무슨 반지냐고 물었을 때 수줍게 웃으면서 약혼반지라고 하지 못했을 거였다. 순식간에 동규의 얼굴이 달아오르던 것도, 약혼반지라는 단어에 웅성거리던 학생들까지 세 친구들은 기억났다.
동규가 사라진 뒤에 세 친구는 잠시 공부 대신 동규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가, 예쁘고 머리도 좋고 집안도 좋다는 사람과 사귀는 동규가 부러워 각자의 노트북만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