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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졸업생 대표는 학생회장이 해야 하는 게 맞지만 학생회장인 시후가 유럽으로 여행을 가 버린 바람에 부회장인 학생이 졸업생 대표를 맡았다. 역대 졸업식에 학생회장 말고도 다른 3학년 학생이 졸업생 대표를 맡은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재학 기간 타 학생들에게 모범이 되고 학교의 이름을 알린 경우였다.
2월 개학일에 시후가 졸업식은 참여하지 못한다고 학교로 연락했을 때, 그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는 하림 역시 선생님으로부터 졸업생 대표를 제안받았다. 하지만 하림은 졸업식하는 동안 동규 옆에 앉아 있을 예정이라 거절했다.
“이제 학교도 안녕이구나.”
“그런 말 하지 마.”
“왜.”
“……몰라.”
“모르긴 뭘 몰라. 친구들이랑 헤어지고 선생님이랑 헤어져서 슬픈 거면서.”
“아, 말하지 말라고.”
하림은 동규를 놀리려고 입을 열었다가 말았다. 이제 겨우 자리에 앉아 졸업식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눈가가 촉촉해진 동규가 정말로 눈물 한 방울을 흘릴 것 같아서.
하림도 학교를 졸업해 다시는 고등학교 건물을 하루 종일 누빌 수도 없고 동규와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동규처럼 슬픈 것보다는 즐겁고 기대되는 마음이 더 컸다. 동규나 다른 친구들도 계속 볼 거고 선생님이 보고 싶으면 학교로 찾아가면 되는 일이니까.
그런데 동규가 졸업생이라고 이렇게 울적해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림은 동규의 옆에 앉아 졸업식 내내 동규의 옆구리를 찔러 주고 귓가에 속닥거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줬다. 하지만 동규는 하림이 무슨 얘길 해도 고개만 끄덕이는 게 다였다. 어느 정도 슬퍼할 줄은 알았지만 이건 예상 범위 밖이었다.
“다음으로는 공로상 시상을 진행하겠습니다. 우리 세문고등학교에서는 매년 졸업생 중 한두 명을 선정하여 공로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하림과 동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체육관 오른쪽으로 빠져 앞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이미 동규, 하림과 함께 공로상을 받는 다빈이 도착해 교복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도 거울.”
다빈은 마이 주머니에 꽂아 놨던 손거울을 하림에게 건넸다. 하림은 제 얼굴을 빠르게 한 번 훑고 동규의 머리와 교복 옷매무새를 정리해 줬다.
“떨린다.”
“김동규 너도 떨려? 대통령상도 받았었는데?”
다빈이 앞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다빈은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는 엄마와 사회복지사인 아빠를 따라 어릴 때부터 봉사를 많이 해 온 학생으로 방학마다 국내외 봉사 활동을 다녔다. 국제청소년NGO단체에도 소속되어 있다. 하림은 다빈의 요청으로 가끔이지만 몇 년째 꾸준히 다빈이네 보육원에 공부 선생님으로 자원봉사를 다니기도 했고.
“그때도 떨렸어.”
“걍 학교상인데도 떨린다는 게 신기하다. 글 써서 받은 상 100개라며.”
“……이건 좀, 특별하니까.”
미술이나 음악, 체육처럼 메이저하지 않은 글 쓰는 일로 학교의 이름을 드높였다는 게 쑥스럽다. 대통령상이 대단하긴 하구나.
“기특해, 기특해.”
“라고 또 다른 대통령상 수상자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조용히 하자. 이제 올라갈 거야.”
가나다순으로 올라가느라 동규의 이름이 제일 먼저 불렸다. 그다음은 방씨인 다빈이, 마지막으로는 하림의 이름이 불려 하림은 작게 목을 풀고 강단으로 올라갔다. 올해는 특별히 세 명이나 공로상을 받는다는 설명과 함께 3학년 학생부장 선생님이 세 사람의 대외 활동을 간단하게 줄여 말했다.
동규에게 공로상을 안겨 주는 교장 선생님은 거의 친손주를 대하는 듯 동규에게 악수를 하며 손등을 토닥이다 참지 못하고 동규를 끌어안았다. 교장 선생님은 남자였지만 무척 작아 동규의 품 안으로 쏙 들어올 정도였다. 아마 앉아 있는 학생들은 동규의 몸에 가려 교장 선생님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다빈은 남들 모르게 고개를 저었고 하림은 소리 없이 활짝 웃었다. 저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동규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는 하림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장을 받은 뒤 교장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내려온 동규는 자리에 앉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해 보면 동규가 이 학교에 특기생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교장 선생님 덕분이었고, 특기생 신분이었기에 0점을 맞든 1점을 맞든 성적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뿐이던가. 백일장 간다고 아무리 많이 결석해도 모두 공결로 출석 처리가 되었고 상 받아올 때마다 엄마보다 더 좋아해 준 게 바로 교장 선생님이었다.
교장 선생님 아니었으면 하림과 이렇게 같은 학교에도 오지 못했을 거고 그러면 친해질 수도 없었을 거고. 또 서로 좋아할 일도 없을 거고 만약 다른 학교에 다녔다면 고등학교 3년을 평범하고 조금은 지루하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동규는 제 인생에 가장 고마운 사람이 교장 선생님인 것 같아 아까 교장 선생님이 자길 안아 왔을 때 똑같이 안아 줄걸 하는 후회가 쏟아졌다.
“울지 마.”
“안…… 울어.”
있을 때 잘하라는 어른들의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 교장 선생님에게 제대로 감사하다는 말도 못한 것 같아 동규는 죄송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림은 동규의 허벅지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고 손수건을 꺼내 동규에게 쥐여 주었다. 동규가 눈가를 톡톡 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교실로 돌아와서는 졸업 앨범을 받고 선생님의 마지막 종례를 들었다. 거기서 하림도 조금 눈가가 시큰했지만 울 정도는 아니었다.
“1년 동안 너희들 덕분에 즐겁고 행복했다, 똥강아지들아.”
선생님이 끝인사를 마치자 학생들은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사진을 찍고 선생님과도 모여 사진을 찍었다. 하림도 동규의 손을 이끌고 선생님과 사진을 찍고 친한 친구들과 모여 사진을 열심히 찍어 댔다. 그리고 다른 반에 있는 친구들과도 사진을 찍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림이 꽃다발을 들고 있는 동규와 지호의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둘 다 복도에서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우느라 사진을 찍을 때에도 눈물을 닦는 모습의 사진이 여러 개였다.
“3월에 꼭 한 번 보자.”
“응.”
“우리 애기들 보러…… 놀러 와.”
“응, 갈게.”
“왜 이렇게 슬프지, 우리 계속 볼 건데.”
“몰라…….”
나중에 강아지나 고양이 키우면 꼭 자기가 봐주겠다며 지호가 동규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김동규!”
지호가 사라지자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동규는 또 코끝이 찡해졌다. 서하늘은 왜 등장도 요란해서…….
“김동규 이 울보 새끼가, 왜 울어서 나까지 눈물 나게 만들어.”
“너는 왜 울어, 안 울 것처럼 그러더니…….”
“너 때문이잖아.”
이미 다른 친구들이랑 한 번 울고 왔으면서 동규의 핑계를 대는 하늘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동규는 눈물만 뚝뚝 흘려댔다. 하림이 쪼개면서 하늘을 놀렸다가 한 대 맞았다.
사진 찍자는 소리에 하늘이 얼굴을 정리하고 싱긋 웃어 보였다. 두 사람에 비해 키가 작은 하늘이 가운데에 서고 하림과 동규가 양쪽에 섰다. 하늘은 제 친구들에게 팔짱을 끼고 양손으로 브이를 했다. 동규는 사진 찍는 순간까지는 잘 참고 있다가 세 명의 엄마들이 사진 잘 찍었다고 하는 순간 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늘과 처음 같은 반이 됐던 2학년 3월 개학식이 기억난다. 그때만 해도 하림과 떨어져 학교 다니기 싫은 맘뿐이었고 소문만 무성하던 하늘과 같은 반이 된 게 어찌나 싫던지. 그냥 같은 반만 된 수준이 아니라 하늘이 제 옆에 붙어 다니질 않나, 툭하면 혼자 있으려는 저를 끌고 다니질 않나, 목소리도 큰 게 자긴 되도 남은 안 되는 게 많은 데다 불같은 성격도 처음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도 친구 관계에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다. 꺼내기 힘든 친구 얘기를 해 준 거나, 동규가 멍 때리고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 주기도 했고 음악 가창 수행 평가 때 혹시라도 음 이탈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동규를 위해 같이 연습을 해 준 일도 있었다. 또 하늘은 동규 인생 최고의 일탈 행위였던 ‘학교에서 배달 떡볶이 시켜 먹기’를 같이한 친구였다.
“아, 진짜 김동규 왜 이래. 다 들어갔는데.”
하늘이 동규를 안아 주고 등을 퍽퍽 때렸다. 하지만 하늘도 동규 때문에 다시 눈물이 나와 곤혹스러웠다.
“자주 연락해. 그리고 대학교 갔는데 동기 선배 후배가 너한테 이상한 말 하고 쎄한 기분 들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말없이 쳐다보기만 해. 그럼 알아서 깨갱할 거야.”
“알았어.”
“그리고…….”
울음을 참으며 얘기하느라 하늘은 목구멍이 막혀 왔다. 침을 몇 번 삼켜도 똑같았다. 울면서 얘기하면 우스워 보이니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멋지게 얘기해 주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선배들이, 특히 남자 선배들이 너 불러서 이거 해라 저거해라 하면 절대 하지 말고, 아니 아예 가지도…… 아 존나 슬퍼, 씨…….”
“응. 그것도 알겠어.”
“야, 서하림 원래 졸업식 이렇게 슬퍼?”
“아닐걸?”
하림은 아까부터 휴대폰으로 두 사람을 찍고 있는 중이었다. 동규는 싫어할 것 같으니 동규에게 보여 줄 건 아니고 오로지 하늘을 놀리는 용도였다. 둘이 저러고 있는 게 귀엽기도 하고.
하늘은 동규에게 안겨 있느라 하림이 자기들을 찍고 있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하림은 처음 보는 하늘의 모습에 최대한 웃음소리를 누르느라 죽을 맛이었다. 어디 멀리 가는 아들에게 조심하라고 온갖 얘길 해 주는 엄마의 모습 같았다.
“선배들이 밥 사 준다고 해도 넙죽넙죽 따라가지 말고, 이상한 친구 있으면…… 나나 서하림한테 무조건 털어놔.”
“응. 고마워.”
“우리 둘이 같은 학교니까 혼자인 네가 우리 학교로 놀러 와라. 오면…… 맛있는 거 사 줄게. 하 씨, 눈물이 안 멈춰.”
“응. 지하철 타고 버스 타면 한 시간 걸려.”
“서하림 차 타고 오면 되잖아, 이 바보가…….”
“야 서하늘, 그만 때려.”
조용히 동영상을 저장한 하림이 하늘을 토닥이며 떼어 냈다. 그러자 이번엔 하늘이 하림을 껴안아 와 하림도 하늘을 안아 주었다.
“우리는 같은 학교 가는데 왜 이렇게 울어. 집도 옆 동이면서.”
“김동규한테 울보 바이러스 옮았어.”
하림이 하늘을 안고 달래는 동안 동규는 다른 친구와 사진을 찍느라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하늘이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고 하림에게서 떨어졌다.
“나 이제 채원이네 반 가야 돼.”
“나도 바빠. 아, 시후랑도 찍고 싶은데 걔 어제 이탈리아 도착했대.”
“백슈 걔도 답이 없어. 단단히 미친놈이야. 그럼 주말에 봐.”
이번 주말에는 점심에 가족 모임이 있고 저녁에는 동규까지 셋이 모여 술을 마시기로 했는데, 하림이 생각한 건 전자였고 하늘이 얘기한 건 후자였다.
동규는 친구들과 사진을 다 찍었지만 하림은 아직도 사진 찍을 친구들이 많이 남아 바빴다. 엄마가 집에 가자고 했지만 동규는 하림을 기다리겠다며 복도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빠도 왔으면 좋았을 걸.”
“어쩔 수 없지.”
공교롭게도 아빠의 학교와 세문고의 졸업식은 같은 날이었기 때문에 아빠는 동규의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왔었어도 올해 졸업하는 유도부 학생들이 감사의 의미로 점심을 사 드리겠다고 한 탓에 얼굴 도장만 찍고 돌아갔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아빠가 미안하다고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전화를 줬다. 동규는 정말로 괜찮았지만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졸업식보다 제자들이 더 중요하냐고 화를 낼 정도였다.
“어쩔 수 없지는 무슨 어쩔 수 없지야. 엄마가 너 임신했을 때 순두부를 너무 많이 먹었어.”
“진짜 괜찮은데…….”
조금도 속상하지 않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지만 엄마를 통해 가끔 듣는 얘기로는 아빠가 제자들과 사이가 아주 끈끈하다 못해 찰떡같다고 했다. 아빠가 후배 양성을 위해 공을 들이는 만큼 실제로 고등학교 졸업하고 국제 대회에서 메달까지 딴 선수 중에서는 아빠에게 감사하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럼 됐지.
이따 저녁에 아빠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비밀번호 바꿔 놓는다는 엄마의 말에도 동규는 그냥 웃고 말았다.
“김동규 눈 부은 거 봐.”
“많이 가라앉았는데.”
“전혀 아닌데요.”
차가 주차된 운동장으로 걸어가는 길이 너무 짧다. 오늘은 둘 다 바빠 밤늦게도 보지 못할 거라 지금 헤어지면 내일 만나야 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고등학교의 생활이 아쉬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선물 가져올게.”
서로의 졸업을 축하하는 의미로 선물을 준비했다. 하림의 차가 더 멀리 있어 하림은 엄마 차로 뛰어가 쇼핑백을 들고 다시 동규네 차로 뛰어왔다.
“추우니까 안에 들어가서 확인만 하자.”
하림은 눈 깜빡할 새 동규네 차에 올라탔다.
“뭐 해. 너도 빨리 타, 추운데.”
동규가 어색하게 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하림이 빨리 열어보라고 재촉하는 통에 동규가 먼저 선물을 개봉했다. 도장과 시계였다.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졸업할 땐 도장 받는 거라 그래서 내 거랑 똑같은 곳에서 주문 제작했어. 그리고 시계는.”
하림이 앞좌석의 동규 엄마를 확인하고 동규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커플시계♡]
“흠흠.”
얼굴이 빨개진 동규에게 어서 네 선물 열어 보라고 하림이 헛기침을 했다. 동규가 손부채질을 하며 고이고이 가져온 선물을 꺼내 들었다. 하림이 동규의 손에 들린 걸 보자마자 목에 감고 있던 제 목도리를 풀고 동규 쪽으로 목을 내밀었다.
“우리가 그런지 1년이 넘었는데.”
동규는 하림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하림의 목에 목도리를 둘렀다. 하얀 목에 잘 어울리는 흰 목도리였다.
“이제야 목도리를 주다니 너무 늦은 것 같지 않아?”
“네 생일은 여름이라서.”
“1년 되던 날은 뭐 하고.”
“그날은 다른 거로 기념했잖아. 3일 내내.”
하림은 보드라운 목도리에 얼굴을 비비며 발을 동동 굴렀다. 드디어 동규가 열심히 뜬 목도리를 하게 됐다. 지금까지는 동규가 하고 온 동규 거를 뺏어 두르고 다녔는데 이젠 진짜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서하림, 자기 거였다.
“아, 진짜 좋아. 너무너무 좋아.”
“그리고 셔츠도 샀는데.”
“목도리 귀여워. 어떡해.”
“그냥…… 평범한 목도린데.”
“하얀색이라 때 타기 쉽다고 아줌마가 그렇게 말렸는데 동규가 고집 부려서 하얀색으로 만든 거야.”
“아 진짜요? 근데 저는 하얀색 좋아해서요.”
“그래서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거구나.”
하림은 동규에게 뭐라고 고집을 부렸는지 물어보려다가 엄마에게 전화가 와 아쉬움을 뒤로하고 차에서 내렸다. 동규는 창문을 내려 하림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림이 아예 뒤로 돌아 걸으며 엄마 차에 탈 때까지 동규에게 손을 붕붕 흔들어주었다.
창문을 올리자 차가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동규는 엄마의 바로 뒤로 바짝 붙어 앉아 하림이 두고 간 목도리를 동그랗게 뭉쳐 코에 가져갔다. 하림의 목에 닿아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좋으면서도 고작 부드러운 실 덩어리인 목도리에게 질투가 났다. 잠깐 코에서 떨어트렸다가 하림의 냄새를 맡기 위해 손을 올렸다. 아주 약하지만 하림의 냄새가 나 기분이 좋아졌다.
주말엔 하림, 하늘을 만나 술을 마셨다. 동규는 술 잘 먹기로 태릉에서 유명했다는 아빠를 믿고 나댔다가 제일 먼저 나가떨어졌다. 술에 취하자 세상 모든 게 서럽다며 우는 동규 때문에 술자리는 순식간에 파투가 났다. 하늘은 얼마 마시지도 못했는데 동규 때문에 술자리가 쫑이 난 게 짜증 나 동규의 모습을 빠짐없이 찍어 두었다.
-난 젓가락질도 잘 못하는데 왜 포크가 없어.
-포크 달라고 그럴까?
-아니…… 일회용 나무젓가락이면…… 잘 잡히는데…… 아, 근데 그러면 나무가, 자연에 좋지 않잖아. 어떡해…….
-뭐라는 거야.
-나…… 하림아, 내가…… 젓가락질 못 하는 게…… 싫어?
-포크 달라고 해야겠다.
-걍 나무젓가락 달라 해. 일회용으로. 고기를 못 집는 게 슬프시다잖아.
-연습…… 많이 할게.
-야야, 김동규 또 운다.
-젓가락질 못 한다고…… 미워하면 안 돼…….
-시발 무슨 수도꼭지냐고. 아 진짜 김동규랑 다시 내가 술을 먹나 봐라.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 기억이 없어 휴대폰부터 찾았다가 안 그래도 울렁거리는 속이 하늘이 보내온 동영상을 보자 쓰려왔다.
[이 동영상만 보고서는〉
[알 수 없는〉
[놀라운 잔실은〉
[소주 단 세 잔으로〉
[김동규가 꽐라가 됐다는것입니다아아아다가ㅏ악ㄱㄱㄱㄱ!!!〉
[뭐야〉
[김동규 맥주도 마셨어〉
[넴 마셧ㅅ죠〉
[한 잔하고 무ㅜㅜ려 반! 잔! 이! 나! 더요〉
[처음 먹으면 그럴 수도 있지〉
[ㅇ ㅑ근데 세잔은 좀 넘하다〉
[김돋규 몸만보면 페트로 ㄷ개를 마셔도 부족한뎈ㅋㅋㅋㅋㅋㅋ〉
[3개〉
[얌 김동뀨~~~~~~%%%~~#~~ 아빠가 그렇게 잘 마긴다며~~~~~〉
[똥동규 해명해~~~〉
[하지만 넌 나랑 다신 술 마실 생각 하지 마라〉
[절〉
[대〉
[로〉
그 뒤로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들을 보아 짐작하기로는 하림이 대리기사를 불렀고 하늘도 하림의 차에 타 동규를 같이 집에 데려다줬고 그 뒤로 두 사람은 따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는 것 같다.
동영상은 둘이 헤어지고 난 뒤 하늘이 집에 도착해서 누웠다며 보낸 거였다. 동규는 하늘이 보내온 동영상을 아예 삭제하고 짧게 답장했다.
〈알았어.. 안 마실게...ㅠㅠ]
해장국으로 뭘 해먹을지 고민하며 동규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분간 두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지……. 몇 시간 뒤 깨어난 하림이 자길 달래주러 올 것을 모른 채 동규는 이불을 발로 차며 쓰린 배를 끌어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