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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규 보고 싶다고 미국에서 빨리 돌아온 하림이 본 동규의 자기 소개서는 조금 의외였다. 당연히 문예창작과를 노리고 썼을 거라 생각했으나 동규는 문창과 버전의 자기 소개서도 써놓고 국문과 버전의 자기 소개서도 써놓았다. 하림은 학교마다 두 장씩 만들어진 자기 소개서를 다 읽지도 않은 채 물었다.
“국문과 가게? 왜?”
“그냥.”
“이미 실력이 너무 출중해서 대학 가서 배울 것도 없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뭐야. 아니 국문도 문특으로 갈 수 있긴 해. 대학교 가도 어찌 됐든 공부를…… 해야 할 텐데 글 쓰는 수업 듣는 게 부담이 덜 되지 않아?”
“좀 많이 힘들까.”
“학점은 상관없이 졸업만 하는 게 목표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국문과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
“그냥.”
동규가 눈동자를 피하는 걸 보니 뭔가 이유가 있지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하림도 동규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자기 소개서로 눈을 돌렸다.
“근데…… 대학교 공부는 많이 어려워?”
“흠. 어렵다면 어렵고 안 어렵다면 안 어렵지.”
“넌 대학생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영재원으로 자기 수업 들으러 오라고 교수님들 연락 종종 와.”
“재밌어?”
“그 수업을 한 학기 통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몇 개만 듣는 거니까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끝이 나. 그리고 연락 와도 필수 참여 아니고 가고 싶은 사람만 가는 건데 그닥 인기 없어. 거의 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애들이 신기하니까 가는 그런 거? 다른 강의 더 듣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는데다가 어쨌든 학교 수업을 빼먹고 가는 거라.”
“수업 어떻게 되는데. 뭐 배워?”
하림이 주로 들었던 수업들은 자연과학대학의 수업들이었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어떻게 다른지만 알려 주면 되었기 때문에 동규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럼 세 개만 국문 쓸래. 아니, 두 개. 아니다. 그냥 한 개.”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딜 가든 내가 매일 보러 갈게.”
“간다고?”
“내 차 타고 김동규 학교에.”
“너 차 있어?”
“아니 아직. 근데 있어. 대학 합격 선물로 할아버지가 사 준댔는데 떨어질 일은 없으니까.”
“멋지다.”
동규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림은 어깨를 씰룩하며 뿌듯한 얼굴을 했다.
마지막 백일장인 문학 캠프에 참여하는 길은 하림이 같이 가 줬다. 2박 3일의 일정이라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도 너무 길다며 아예 전날은 동규네 집에서 잠까지 잤다. 9시까지 광화문빌딩에 도착해야 했지만 하림과 동규는 방에서 껴안고 입을 맞추느라 동규의 엄마가 방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릴 때가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가서 아프면 안 돼. 밥 많이 먹고.”
“응.”
“대상 꼭 받아 와.”
“응. 해 볼게.”
“전화해.”
“응.”
“하림이가 아줌마가 해야 할 말을 다 해 줘서 엄마도 하림이랑 이하동문. 아들, 엄마 안아 주고 가.”
동규는 엄마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엄마 뒤로 몇 걸음 떨어져 있는 하림만 바라보았다. 엄마가 부담 갖지 말고 훌륭한 작가님들과 재밌게 놀다 오라는 말과 함께 뭐라 뭐라 얘기했지만 동규는 엄마의 등만 부드럽게 토닥일 뿐 하림과 입 모양으로 얘기하기 바빴다.
약속했던 대로 동규는 방 배정을 받고 잠을 내려놓기 무섭게 하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이제 도착해서 방 왔어.”
-어때? 좋아? 사진 찍어서 보내 줘.
“그냥 깨끗해.”
-버스에서는 뭐 했길래 연락이 없었어?
“몰라. 무슨 이상한 게임이랑 자기 소개, 아니 그거보다 같이 앉은 애 때문이야. 걔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너한테 연락도 못 하고.”
-룸메랑 같이 앉는 거라며. 친해지고 좋지.
“아니야. 도착한 다음 세미나실 모여서 OT 듣고 온 건데…… 망했어.”
-왜?
“내 룸메 너무 시끄러워. 말 진짜 많아. 자는 척을 해도 자는 사람한테 말 걸어. 오는 내내 걔 때문에 너랑 연락도 못 한 거야.”
-룸메 지금 없나 본데.
“응. 짐 던져 놓고 학교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나갔어. 예고 애야.”
-시끄럽기만 해? 괴롭히진 않아? 눈치 주고 질투하고 그러는 애 있으면 이름 다 적어 놔.
“그런 애들 없어. 근데 얘 처음 보는 앤데 내 팬이라고 계속 친해지재. 어떡해…….”
-팬?
“응. 상 많이 받는 거, 글 잘 쓰는 거 멋있대. 백일장 중에 수상작 공개하는 곳들 있거든. 중학교는 일반중 나왔는데 내 글 보고 나 같은 애들은 예고 간다는 얘기 들어서 예고 간 거라고…… 나중에 지니의 램프 발견하면 첫 번째 소원이 나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거래.”
동규는 무척 심각했지만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건 하림의 빵 터진 웃음소리였다.
“……웃지 마.”
-사인이라도 해 줘.
“나 사인 없어. 아, 진짜 어떡해. 걔랑 심지어 같은 조야. 걔 말고도 우리 조 애들 다 시끄럽고 낯가리는 것도 없어서 아까 OT하면서 간단하게 자기소개하는데 진짜 죽고 싶었어.”
-다 친해지면 되지.
“친해지더라도 어느 정도 나랑 맞아야 친해지지 다들 무슨 파티라도 온 것처럼 그래. 다른 조 애들은 조용조용하던데. 아, 서하늘 같은 애도 하나 있어.”
-근데 넌 서하늘이랑 친하잖아.
“그건 그런데……. 아까 OT하면서 우리 조 채팅 만들었는데 메시지도 엄청 와. 만들어지자마자 메시지 300개 넘었어. 방에만 있다가 이따 룸메 오면 라운지 나가야지. 아까 봤는데 재작년엔 없던 스무디 기계 생겼더라고. 원래는 차랑 음료수밖에 없었는데.”
-대박. 스무디 먹어 봤어?
“응. 맛이 세 개나 돼. 포도, 블루베리, 애플망고. 다 맛있어.”
-좋겠네, 김동규. 많이 먹고 와.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사인은 꼭 해 주고.
“아 진짜, 나 사인 없다고…….”
-이번 기회에 만들어. 3호 팬이랑 같은 방 쓰는 것도 운명이다.
“3호?”
“김동규! 10분 뒤에 나오래! 아, 전화 중이네. 미안 쏘리 고멘 데졸레 뚜이부치!”
룸메인 성원이 문을 쾅 소리 나게 열었다가 조심스럽게 닫았다. 카펫 바닥에 실내 슬리퍼까지 신어 발소리는 들리지 않을 텐데도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걸어 침대에 도착했다.
“누구야. 여자친구?”
-룸메 왔어?
“응.”
-요란한 친구네.
“헐 미친. 너 여자친구 있어? 시발 빅뉴스다.”
“아니. 홍성원 잠시만. 이따 전화할게. 미안해.”
다급하게 통화를 종료한 동규가 벌떡 일어났다. 이미 늦어 있었다. 성원은 같은 조 채팅방은 물론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 벌써 동규가 여자친구 있다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여자친구 아니고 친구야.”
“남자랑 여자는 친구 하는 거 아니랬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무튼 아니야 그런 거.”
“진짜?”
“진짜. 그리고 여자애 아니고 남자애야.”
“헐. 나 이미 친구들한테 다 얘기했는데.”
동규가 입을 다물고 눈썹을 씰룩하자 주원이 미안하다며 거듭 사과했다.
“지금 바로 정정할게. 10초면 돼. 진짜 존나 미안! 아니 왜냐면 너 여자친구 없는 줄 알고 각재고 있는 애들이 많아서 여자친구 있으면 미리 희망을 차단해 줘야 한단 말이야. 아무튼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친구들한테 얘기해서 미안하다.”
“그게 무슨 말인데. 무슨 각.”
“각 중의 각 고백각이지. 이야, 하도 흔히 있는 일이라 감흥도 없나 봐.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 이것도 멋져 부러! 진짜 나는 복권 1등보다 김동규로 태어나는 게 내 인생 최대의 소원이다. 빨리 나가자! 일단 우리 조 담당 작가님 만나러 가야 돼.”
작가님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도 동규네 6조가 제일 목소리가 컸다. 각 조에게 배당된 강의실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조원들이 조잘조잘 떠들기 바빴다.
작가님조차도 어린 학생들을 만나니 젊어지는 기분이라며 딸과 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얘기를 꺼내기도 하고 6조 학생들에게 요즘 많이 쓰이는 줄임말이나 최신 유행어가 뭐냐고 묻기도 했다. 제 자식들에게는 부끄러워 물어보지 못하지만 이런 기회에 물어볼 수 있어 좋다며.
아이돌 얘기할 때만 해도 동규는 당장 광화문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하림이 있을 역삼동이 그립고 차라리 학교에 가는 게 낫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유행어 얘기에는 학생들이 먼저 단어를 제시하고 작가님이 뜻을 가늠하며 맞춰 보는데 온통 오답 천지라 동규도 작게 웃으며 6조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몇몇 개는 동규도 모르는 게 나왔지만 들키기 싫어 다 알고 있는 척을 했다.
참가자와 담당 작가들이 친해지는 시간을 보낸 뒤엔 바로 점심시간이었다. 국내 대기업이 만든 문화재단에서 진행되는 백일장이라 그런지 식단이 무척 괜찮았다. 동규는 첫 번째 먹을 땐 한식을 먹고 두 번째 먹을 땐 양식을 먹었다. 밥 먹을 때에도 성원과 6조 친구들이 함께였다. 밥 먹는 내내 시끄러웠다는 얘기다.
첫날은 다음 날 있을 백일장을 준비하라는 취지로 일정이 빡빡하지 않아 동규가 하림에게 연락을 하기 딱 좋았다. 문학수업과 영화 감상, 오후 조별 모임이 다였다. 둘째 날은 아침 8시부터 백일장이 시작되었다. 동규는 네 시간을 거의 꽉 채워 썼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레크리에이션이 포함된 체육 대회였는데 동규는 하나도 참여하고 싶지 않았으나 6조 친구들이 작가님의 친필 사인 책을 꼭 받고 싶다고 온갖 종목에 동규를 꽂아 넣었다.
동규는 성원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눈으로 욕하다가도 서너 살 어린 중학교 동생들이 눈을 반짝이는 걸 외면할 수 없어 섹시댄스, 퀴즈 맞추기 같은 미니게임을 제외하곤 다 나갔다. 결국 체육 대회에서 1등을 거머쥔 건 6조였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원로 작가를 초대한 토크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었다. 동규는 뒤쪽에 앉고 싶었지만 하림과 전화를 하고 왔더니 먼저 온 학생들이 뒤쪽부터 자리를 채우고 있어 맘에 드는 자리가 없었다. 키가 커서 제일 뒤쪽이 아니면 동규 뒤에 앉은 사람들도 불편하고 동규도 뒷사람들이 신경 쓰여 불편했다. 어디 앉아야 하지.
“동규 오빠! 여기요!”
같은 조의 중학교 동생들이 팔을 붕붕 흔들며 동규를 불렀다. 한 명은 3학년, 다른 한 명은 2학년이었는데 첫날 OT 때부터 동규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동생들이 앉은 곳은 한가운데 자리였기 때문에 동규는 손만 흔들고 동생들과 같은 줄 제일 끝인 벽 쪽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두 학생이 작게 속닥거리다가 동규에게 다가왔다.
“오빠, 우리 여기 빈자리면 앉아도 되는지.”
“그래.”
동생들은 동규를 따라다니긴 해도 성원이나 다른 친구들처럼 귀찮게 굴지는 않았다. 얘기를 해도 주로 둘이 얘기를 하다가 동규와 한 번씩 눈을 마주치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둘이 까르르 웃으며 난리가 났다. 라운지에서도 동생들은 꼭 동규랑 하나 건너 테이블에 앉았고 소파도 꼭 하나 떨어져 앉았을 뿐이었다. 지금도 옆에 앉아서 둘이서만 얘기하지 동규에게 괜히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토크 콘서트에 초대 된 작가는 동규도 좋아하는 시인이라 질문 시간에는 큰맘 먹고 손을 들어 보기도 했다. 질문을 마치고 답변까지 들은 동규가 자리에 앉았을 땐 옆에 앉은 동생들이 양손 엄지를 들어 올리며 소리 없이 요란을 피워 대 동규도 마지못해 엄지를 살짝 들었다 내려 주었다.
이튿날 마지막 일정은 문우공감이라는 이름의, 조장을 중심으로 한 조별 모임이었다. 아무래도 예선을 통과한 학생의 대부분이 고등학생이었고 그중에서도 3학년이 제일 많다보니 대입 얘기가 주를 이뤘다. 물론 좋아하는 작가님이나 소설, 영화, 드라마, 연예인, 취미, 가족, 친구 이야기도 활발하게 나왔다. 문제는 대입 얘기에서 상을 많이 받은 동규에게 질문이 많이 돌아갔다는 데에 있었다.
“글 잘 쓰는 방법이 뭐예요?”
“작년에는 집에 무슨 큰일 있었어?”
“상금 받은 거 저축해요 아니면 다 써요?”
“예고는 왜 안 왔어?”
“글 써서 냈을 때 상 받을 거 같은 거는 제출하면서 느낌이 와요?”
“부모님이 문창과 나와서 뭐 할 거냐고 안 해?”
중학교 3년 내내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일 때도 문학 캠프에 참여했었지만 매번 혼자 있거나 조원들이 다 조용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적은 없었다. 질문들이 집중 포화 수준으로 쏟아져 동규는 땀만 뻘뻘 흘렸다. 하나를 고심해서 대답하려고 하면 바로 새로운 질문이 들어오고, 또 나름 열심히 생각을 정리해서 말을 하다 보면 새로운 질문이 들어왔다.
“아 진짜 오빠들 좀 천천히 물어봐요.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왜 자꾸 말을 자르고 그러는데요.”
“그래 맞아. 시끄러워. 애기들도 아는데 다 큰 새끼들이 정도를 몰라요 정도를. 조장 권한으로 너네 다 5분 동안 입 다물고 있어.”
“넵.”
“하나씩 대답해 봐. 나도 궁금하긴 해.”
조장인 예린이 종이에 남학생들이 사정없이 물었던 질문들을 정리해 하나하나 천천히 물었다. 동규는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정성스럽고 꼼꼼하게 대답했다. 중학생들이 동규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단하다며 박수를 치거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고 있어 그쪽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보라와 남학생들만 쳐다봤다.
마지막 날 일정은 전 날 백일장에서 썼던 글들을 간단하게 합평하는 시간을 갖고 시상식이 진행됐다. 원고지 제출할 때만 하더라도 상 받아 가는 거 아닌가 했던 기대는 합평 시간에 탈탈 털려 깔끔하게 날아갔다. 어젯밤 꿈이 좋아 멋지게 대상 받아 돌아갈 줄 알았는데 개꿈이었다.
동규의 근처에 앉은 6조 친구들이 고등부 금상까지 발표가 끝났을 때 동규가 대상 받는 거 아니냐고 웅성거렸다. 동규는 망했다고, 너네도 아까 나 열심히 까인 거 듣지 않았냐고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친구들이 띄워 주는 걸 열심히 차단하기 바빴다.
-이제 마지막으로 대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올해의 대상은.
“김동규다 김동규.”
“아니라니까.”
고등부 시 동상을 받은 성원이 동규의 옆구리를 찌르며 겸손은 상 받고 나서 떨어도 된다며 능글맞게 웃었다.
-세문고등학교 3학년, 김동규 학생입니다.
“우와!”
“거봐! 내가 뭐랬어!”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선정된 김동규 학생의 ‘흐림과 맑음’은 계절의 변화라는 흔한…….
“축하해!”
“아니긴 뭐가 아니야!”
조원들이 동규의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헝클어트리기도 하며 격한 축하를 해 줬다. 옷도 머리도 엉망이 된 동규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축하합니다.”
“네…….”
재단 이사장과 악수를 나눴을 때에도 동규는 머리나 옷을 정리하지 못 하고 얼떨떨했다.
-대상. 세문고등학교 3학년 김동규. 위 학생은 본 재단이 실시한 D전자와 함께하는 전국청소년문학상에서 문예 자질이 뛰어나다고 평가되어 이 상을 드립니다. D문화예술대단 이사장 대독. 부상에는 상금 300만 원과 대학 등록금 1년 치를 장학금으로 수여하고, 수상자가 취업 또는 개인사정으로 인해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을 시 재단에서 자체적으로 두 학기의 대학 등록금을 산정하여 추가 상금으로 대체됩니다.
동규는 받은 상장을 펴 상장 문구를 몇 번이나 읽었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가루가 되도록 열심히 까셨어요, 라는 말이 너무 하고 싶었다.
사회자가 뭐라 더 대상에 대한 설명을 해 줬지만 동규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마지막 시험을 보고 기분이 이상하다던 하림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싶다.
그 때 분명 지금 이 순간을 상상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이상한 기분도 별로 들지 않고 단순히 ‘끝이구나’ 하는 생각만 들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저 앞엔 친구들이 축하한다며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고 언젠가는 동규가 선 이 자리에 설 어린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요상한 기분이 발끝부터 차오르는 듯했다.
지금까지 글을 써 온 게 그렇게 특출 나게 어렵지도 않았고, 오늘도 지금까지 썼던 것처럼 재밌게 쓴 게 다였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글도 계속 쓸 거였지만 이 감정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때 하림이 저에게 꼭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너무나 이해됐다. 동규도 지금 제일 생각나는 게 하림이었고 가장 필요한 사람도 하림이었으며 하림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2학기가 시작되고 동규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D문화예술재단의 문학 캠프에 참가한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문학회 ‘81084’의 회원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4회 문학 캠프 때 만들어진 ‘81084’는 처음엔 전국에서 모인 참가자 중 친해진 참가자 몇 명이 헤어지기 아쉬워 만든 작은 문학회였다. 1년에 두 번 방학마다 모여 서로의 작품을 합평하고 좋아하는 문인의 작품을 얘기하는 게 전부였지만 해가 갈수록 함께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몇 년이 지나자 ‘81084’ 회원들이 대학생이 되었고 그중에서는 실제로 등단을 해 문인이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은 워낙 회원 수가 많아 합평이 이루어지진 않지만 대학생 회원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 행사들은 회원은 물론 일반인도 저렴한 참가비만 낸다면 누구든 참가할 수 있었다. 주로 작가와의 만남 또는 영화평론가, 소설가, 시인, 기자 등 다양한 전문가들을 초청한 인문학 토크 콘서트가 열렸고 초청된 전문가는 대부분 81084의 회원이거나 그들의 동료이거나 했다.
성인 회원들은 이렇단 얘기고, 중고등학생 회원들은 행사마다 스태프 일을 하거나(봉사 활동 시간으로 인정된다) 친한 친구들끼리 81084 핑계를 대고 놀았다. 소속 회원의 부모님들은 자녀가 ‘문학회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요’라고 하면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동규는 6년간의 학창 시절 중 이 캠프에 참여한 게 올해로 네 번째지만 81084에 가입한 건 처음이었다. 같은 조 친구들 모두가 가입하면서 동규도 얼떨결에 가입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유달리 올해 참여한 참가자들은 사이도 좋아서 캠프가 끝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따로 모였다는 얘기가 들렸다. 동규도 마찬가지였다. 일곱 명의 6조 조원들은 캠프 끝난 바로 그 주 주말에 첫 모임을 가졌다. 일곱 명 중 네 명이 수도권을 벗어난 지방에 살고 있었음에도 모두 빠짐없이 참석했다. 9월 모의고사를 보고나서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을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자는 여론을 꺾지 못한 동규가 대구로 내려갔다.
6조 친구들을 만나는 것 말고도 하림의 권유가 있어, 동규는 81084에서 열리는 인문학 토크 콘서트 스태프 신청을 해 일주일에 두 번은 방과 후에 대학로에 갔다.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봉사 활동하는 학생들 중에 유일한 고3은 동규뿐이었지만 아무도 동규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선배들이 놀 수 있을 때 놀아라, 고3때는 길가의 벽돌만 봐도 즐겁고 재밌다며 대학로에서 열리는 각종 공연이나 전시회 초대권들을 동규의 손에 덥석덥석 쥐여 주곤 했다.
티켓은 늘 두 장. 그리고 선배들이 하는 얘기는 하나같이 똑같았다.
“여자친구랑 같이 가.”
그런 거 없다고 백 번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연극은 소극장에서 열리는 이름 모를 것들이라 가지 않는다 쳐도 전시회는 하림이 좋아하니까 같이 갈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가도 혹시 이상한 말이라도 돌까 봐 전부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다.
친구들은 면접 준비에 수능 준비에 날이 갈수록 말라갔지만 동규는 학교 가는 길도 즐겁고 학교 끝나고 대학로 가는 것도 즐거웠다. 하림과 노는 틈틈이 토크 콘서트 준비하고 매일 밤 새벽까지 6조 단체방 수다에 참여하느라 비록 중간고사는 폭삭 망했지만. 대신 실기 시험을 잘 봤으니 된 거라고 하림이 꼬리표를 받고 풀이 죽은 동규의 어깨를 다독였다. 실제로, 동규는 10월 말 발표였던 예대에 합격하며 10반의 첫 번째 합격생이 되었다.
“애들 귀엽다.”
수능을 보름도 남기지 않은 학교 축제날, 처음으로 학교 축제를 참가한 1학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학교를 열심히 돌아다니는 3학년은 동규와 하림이 전부였다. 3학년도 틈틈이 축제 교실들을 돌아다니긴 해도 대부분 자기 교실에서 인터넷 강의를 틀어놓고 있거나 학습실에 틀어박혀 있지 아예 작정하고 축제를 즐기진 않았다.
심지어 하림은 시후와 역사 골든벨을 신청해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까지 진출해 이번 주말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장학퀴즈 나가 줬음 됐지 골든벨은 안 되다고 하더니 시후가 하림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결국 그렇게 됐다.
하림과 여유롭게 축제를 즐기고 있다 보니 올해 체육대회가 절로 떠올랐다.
3학년이라 참가하는 종목도 거의 없고 자율 참여인 체육 대회에 동규와 하림은 반 티만 입고 오늘처럼 학교 안팎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교실에서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는 동규는 존재조차 모르는 장소들로 하림이 데려갔다. 도착해서 아무도 없으면 CCTV 사각지대에서 뽀뽀도 했다. 학교가 커서 처음으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 수업 할 때나 등교할 땐 욕하기 바빴던 학교였는데.
2부 농구 시합과 축구 시합을 보러 나와서는 작년 생각난다며 하림과 추억을 곱씹었다. 그땐 그랬지. 청팀인 하림이 백팀 한가운데에 눌러 앉질 않나, 넘어져 까진 무릎을 치료해 주질 않나.
하림은 웃으며 작년을 추억했지만 동규는 남모르게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하림이 자길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가슴앓이를 했던 게 떠올라서. 만약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작년 오늘로 되돌아 가 열여덟 김동규의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김동규, 빨리 고백부터 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바보인 걸 인증하는 것 같았었지. 그 때의 동규는 바보라고 자책하며 다 마신 음료수 캔을 종잇장처럼 구겼다.
“귀신의 집 해 보고 싶은데 누구 때문에 할 수가 없어서 즈엉말 아쉽네.”
“올해는 작년보다 별로래.”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대. 직접 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안민주랑 손채원이 다녀왔는데 나도 할 수 있을 정도래.”
“헐. 그 정도래? 요즘 어린 애들 너무 오냐오냐 커서 그런 거 하나도 잘 못하나 봐.”
“너도…… 요즘 어린 앤데…….”
동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하림이 동규를 이끌고 귀신의 집으로 향했다. 동규는 아무리 이곳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지 않은 귀신의 집이라 하더라도 이번 생엔 갈 수 없다며 뒷걸음질 쳤다. 그럼 하림이 혼자 다녀오겠다며 앞장섰다.
“다녀온다. 10초 컷으로.”
하림이 나올 때까지 동규가 다리를 뜯고 손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하림의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다른 학생들의 비명 소리가 들릴 때마다 두 눈을 꼭 감았다.
귀신의 집 체험을 마치고 나온 하림은 무척 평온하고도 안정적인 태도로 동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진짜 하나도 안 무서워. 같이 가 줄게.”
“싫어.”
“물론 아주 안 무섭진 않아. 그런데 적당히 즐기는 수준?”
“안 해.”
“정말 김동규 집 밖엔 어떻게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몰라.”
말로는 동규를 타박하면서도 하림은 축제 안내 책자를 펼쳐 동규가 재밌어 할 활동을 훑었다.
“이번엔 뭐 하고 싶어. 어차피 다 할 거지만 순서 정해 줘.”
“음.”
“오올, 대학생!”
복도 창가에 기대어 책자를 펼쳐 보던 동규에게 친구들이 인사를 했다. 공부 중에 잠시 군것질 하러 나왔다는 친구들은 모든 문장에 부럽다를 넣어 말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고 수능 앞뒤로 대부분의 학교가 1차 발표를 하기 때문에 이미 합격을 한 동규는 대답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동규가 괜히 친구들의 기분이 상하게 할까 봐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걸 알아챈 친구들이 노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먼저 자리를 피해 줬다.
“너도 공부하러 교실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주말은 골든벨인데.”
“나?”
“응.”
“날 너무 과소평가하네.”
“그건 아닌데…….”
“몇 시간 논다고 골든벨도 그렇고 수능도 망할 거 아니니까 걱정 놓고 빨리 이다음에 뭐 갈지 골라 줘. 도장 다 채워서 선물 받자.”
“그럼 천문학 동아리 가서 타로 카드로 미래 보.”
“안 돼.”
“왜.”
“그런 거 다 거짓말이야.”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맞으니까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타로 보러 가는 거 아닐까.”
“하나도 안 맞아. 어느 정도 그럴 듯한 얘기 하다가 한두 개 얻어걸리는 거지.”
“나도 별자리나 혈액형은 재미라고 생각하지만…….”
하림이 입술을 깨물고 무서운 얼굴을 해서 동규는 말을 흐렸다. 과학자를 꿈꾸는 사람 앞에서 너무 비과학적인 얘기만 늘어놓았다.
“……근데 나 진짜 꼭 알아보고 싶은 거 있어.”
“뭔데. 뭔지 알려주면 꼭 알아보고 싶은 것의 30년 최고 전문가를 소개시켜 줄게.”
“그런 게 있어.”
“나한테 말도 못 할 비밀이야?”
“큰 건 아니고 좀…… 부끄러운 비밀. 이상한 거 아니야. 그냥 생각 중인 게 있는데 잘 될까 해서. 마음에는 안 담아 두고 그냥 참, 아니 참고도 아니고 재미로 볼게 재미로. 진짜야. 나도 그런 거 안 믿어.”
“믿는 거 같은데. 내 눈 똑바로 보고 대답해.”
“……살짝. 조금만 믿어. 재밌잖아.”
“작년에 서하늘이랑 놀더니 이상한 걸 배웠어.”
원래도 각종 점과 심리 테스트를 재밌어하는 동규였지만 모든 것을 하늘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긍정의 뜻인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늘은 하림이 질색하는 사주, 점, 미신, 오컬트, 유사 과학 같은 걸 무척 좋아하는 친구였다.
“그럼 천동교실 근처 쉼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딱 하나만 물어보고 와. 알겠지.”
“응. 나도 하나만 물어볼 생각이었어.”
하림을 쉼터 교실에 앉혀 놓고 동규는 천문학 동아리 교실에 줄을 섰다. 교실 안에 부스를 여러 개 설치해 놨다더니 한두 개가 아닌지 생각보다 줄이 금방금방 빠져 동규의 금세 동규의 순서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미친.”
2학년 타로 리더 학생이 동규의 등장에 입을 막고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앉으세요.”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가 동규를 따라 앉은 리더가 급하게 앞머리를 정리했다. 테이블에 엎어 놓았던 손거울로 얼굴도 한 번 빠르게 훑었다. 다른 학생을 받을 땐 무게를 잡고 차분하게 있었지만 이 선배에게는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동규는 전에 하늘이 몇 번 봐 준 게 다지 이렇게 제대로 된 분위기로 타로 점을 보는 게 처음이라 ‘신수빈’이라 써 있는 타로리더의 이름표만 열심히 읽었다.
“감사합니다.”
“……네?”
“와 주셔서요.”
학교에서 제일 유명한 선배님 중 하나가 제 부스에 찾아올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던 수빈이다. 왜냐면 김동규 선배님은 서하림 선배님이랑 제일 친하고 서하림 선배님은 뼛속까지 이과생에 천생 과학자라 이런 건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동아리 언니가 알려 줬기 때문이었다. 서하림은 우리 동아리 부스에 오지도 않을 거고 서하림 딸랑구인 김동규도 서하림 따라서 안 올 거니까 기대하지 말라고.
그 얘기에 다들 낙담했었는데, 어쩐지 밖이 시끄럽더라니!
“……네.”
“안 오실 줄 알았거든요. 저, 선배님. 오빠라고 불러도 되나요. 편한 분위기에서 타로 점 봐 드릴게요.”
“네.”
“말 놓으셔도 괜찮아요.”
“아니요, 그냥…… 이렇게 할게요.”
리더는 자꾸만 웃음이 났지만 입술을 말아 물며 웃음을 참았다. 갑자기 더워져 손으로 부채질도 열심히 했지만 영 나아지지가 않았다.
“저기, 서하림 선배님은요? 혼자 오셨어요? 같이 안 왔어요?”
혹시나 싶어 수빈은 사심을 담아 물었다.
“걔는 이런 거 싫어해서요……. 죄송해요. 전 좋아해요.”
하지만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오빠가 죄송할 건 없죠. 서하림 선배는 기대도 안 했어요. 무슨 점 보시러 온 거에요?”
“취업운이요.”
“네?”
제발 연애운이었으면 하고 있는데 고등학생에게서 나오긴 힘든 단어에 리더가 너무 크게 소리쳤다. 목을 가다듬고, 다시 조용히 물었다.
“연애운 말고 취업운 맞으세요?”
“네.”
“오빠, 저…… 대학 안 가고 바로 취직하시게요?”
“아니요. 가긴 갈 것 같은데, 음. 생각해 보니까 학업운이나 시험운이 더 맞는 것 같아요. 그거로 바꿀게요.”
“네?”
또 한 번 소리가 크게 나갔지만 리더는 정말 궁금해서 이번에는 목을 가다듬지도 않았다.
“설마 졸업하고 바로 공무원 시험 보시게요? 왜요! 노량진 같은 곳에 박혀 있지 말고 캠퍼스를 누벼 주시면 안 돼요?”
“그건 아닌데…….”
“그럼 무슨 시험이요? 오빠, 공부는 하나도 안 하시는 분이잖아요.”
“그게요.”
“네.”
“저…….”
우물쭈물하는 동규에게 수빈이 가까이 다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잘 들릴 수 있도록 귀를 쫑긋 세웠다.
“확실한 건 아닌데 제가…… 국문과에 갈 것 같거든요. 떨어지면 상관없긴 한데 수상 실적도 괜찮고, 면접도 잘 봐서……. 그런데 국문과 가면 교직 이수 받을 수 있고 또 그러면 임용고시 볼 수 있잖아요. 그……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공부를 한 적이 없는데 과연 대학교 가서 공부 시작하면 저도 임용고시에 합격할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대생들도 몇 년을 준비하는 시험인데 그걸 제가…… 하면 몇 년을 공부해야 할지도 알아보고…… 싶은데요.”
“오빠 선생님이 꿈이에요?”
“꿈까지는 아닌데…….”
“그런데 왜 다 붙어 놓은 예대 버리고 국문과를 가요? 전 선생님이 꿈이라 사대 갈 거라 잘 아는데요, 교직 이수 받으려면 국문과에서도 공부 진짜 손꼽히게 잘해야 돼요.”
“그냥……요.”
“그리고 임용 고시도 말해 뭐해. 진짜 힘들고요. 일단 오빠가 봐 달라고 하니까 봐 드리긴 하겠지만 미래에 훌륭한 참스승이 될 예비 선생님인 제가 보기엔 타로 점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오빠는 임용을…….”
카드를 셔플하다 본 동규의 표정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해 수빈은 말을 급히 돌렸다.
“잘 볼 수도 있는 거니까, 미래는 바꿔 나가는 거잖아요. 타로로 한 번 봐 볼까요. 혹시 타로 보신 적 있으세요?”
“있긴 한데 그냥 친구한테요.”
그래선 안 되는 거지만 리더는 뒤집은 카드를 다 좋게만 해석해 얘기했다. 조금이라도 안 좋은 말을 하려고 하면 동규가 충격 받은 얼굴을 하고 눈꼬리를 떨어트리니 몇 번이나 말을 돌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타로 리더로서의 양심과 선생님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동규에게 진심을 담은 조언을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오빠. 아무리 생각해도 국문과는, 선생님은 아니에요.”
“네. 감사합니다.”
수빈의 진심 어린 조언은 동규에게 닿지 못했다. 동규는 걱정을 가득 안고 본 타로 점이 너무 좋게 나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수빈이 같이 셀카를 찍자고 해도 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쉼터 교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조금만 더 기분이 좋았다면 콧노래까지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동규는 타로 점을 본 자신을 열심히 칭찬했다.
“뭐 보고 왔어. 연애운? 연애운이면 너무 순항에 고난과 역경 하나 없다고 나왔을 텐데 맞나요.”
“연애 말고 다른 거 봤어. 근데 카드 잘 뽑았는지 좋은 얘기만 들었어. 다 잘될 거래.”
“아, 진짜 궁금해. 말 안 해 줄 거지.”
“응. 나중에.”
“내년 내 생일 선물로 타로 점 뭐 봤는지 알려 달라고 해야지.”
하림은 다시 축제 안내 책자를 펼쳤다. 동규는 막대 사탕을 입에 문 채 몇 번은 봤을 책자를 또 처음부터 읽고 있는 하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정말 별거 아닌 이유라 그냥 합격하면 스쳐 지나가듯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동규가 국문과에 교직 이수에 임용 고시까지 생각한 건 하림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게 확고한 하림은 좋은 대학 가서 열심히 공부해 나중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훌륭한 과학자가 될 거라지만 그에 비해 동규는 자기가 너무 바람 따라 물 따라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가나 시인이 되면 제일 좋지만 뭔가 불안정한 직업 같고 돈도 잘 못 벌 것 같고 하림과 평생을 같이 살 거라면 퇴직금도 나오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러 직업 중에서는 학교 선생님이 제일 좋아 보였다.
이것도 너무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는 거다. 아까 전 후배가 했던 말처럼 공부를 아주 잘해야 하지만 잘할 자신은 없고 단지 하림의 옆에서 폐 끼치고 싶지 않은 거라.
“도자기 타일 만들기 갈래? 나중에 구워서 교실로 배달해 준다는 그거.”
하림의 뒤로 보이는 학생들은 죄다 1학년과 2학년 후배들뿐이다. 동규는 갑자기 자기 자신이 굉장히 철없게 느껴졌다. 오늘 하루 놀아도 수능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하림을 두고 되지도 않을 시험에 합격할 수 있냐는 타로 점이나 보고 왔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아무거나 골라.”
그냥 하림의 말을 따를 걸 그랬다. 타로는 무슨 타로인가. 다 거짓말이고 신빙성 하나 없는데. 그러고 보니 타로 점을 봐 준 후배의 말도 다시 곱씹게 된다. 자신과는 달리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이 되겠다는 그 애가 자길 얼마나 멍청이처럼 봤을까.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꽤 진지한 조언도 해 줬는데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동규는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피곤해서.”
“그럼 그냥 교실로 돌아갈까? 아니면 보건실 가서 자고 오는 게 더 낫겠어?”
“아니야. 그냥 잠깐…… 이러고 있을게.”
국문과 떨어졌으면 좋겠다. 무슨 패기로 국문과를 지원하고 임용고시 볼 생각을 했지. 쪽팔려…….
“아무래도 보건실 가야 할 것 같아.”
“헐, 아픈 거 맞지. 근데 갑자기 왜 아프지? 열은 없는데.”
하림의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동규는 여전히 속상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상한 속을 달랬다. 그런데 아무리 달래도 속상한 게 나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