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3 27화 (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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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종이 치기도 전에 반 친구들이 하림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반 친구들뿐인가. 다른 반 친구들도 10반으로 모였다. 하림은 친구들이 물어보는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진 않고 학교에서 내린 처분만 앵무새처럼 얘기했다. 배가 고프다며 밥 먹으러 간단 말에 친구들도 하림을 더 붙잡지 못하고 흩어졌다. 동규는 얼굴이 회색빛이 되어 말라 가는 중이었다. 일어나잔 의미로 하림이 동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굴이 아주, 멍이 예술적으로 들었네.”

친구들이 사라지자 무리 속에 있던 하늘이 나타났다.

“야, 겨우 벌점 30점으로 끝낼 거야?”

“아니. 김동규, 밥 먹으러 가자.”

동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하림은 동규가 일어나는 걸 확인하고 하늘과 앞장서서 걸었다.

“나 김동규한테 정서준이랑 무슨 일 있었는지 대충 얘기 들음.”

“언제.”

“아침에. 너 교무실 가고 김동규한테 전화해서.”

하림이 고개를 돌려 동규를 힐끔 바라보았다. 근심과 걱정에 동규의 낯빛이 어두웠다.

“야, 그냥 이대로 끝낼 거냐고. 어떻게 할 건데.”

“고소하려고.”

“정서준? 와…… 걔 좆 됐다. 진짜 재판 열리면 할머니한테 말해 놓을게. 아, 너 혹시 이따 경찰서로 감?”

“응.”

“학생이라 경찰서 가면 무시만 당해. 다이렉트로 검찰청 가서 써. 학교에서 안 멀어.”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동규의 머릿속이 훤히 읽혔지만 하림은 동규를 그냥 그대로 놔뒀다. 겁 많은 애가 고소 소리에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 개는 생성 중일 텐데 지금은 괜찮다고 해 줘도 눈물 그렁그렁 단 채 자기 탓만 할 게 뻔했다. 하늘에게도 동규에게 말 걸지 말라고 작게 속삭였다.

점심 먹자마자 하림은 보건실에 가서 누웠다. 보건실 간다는 하림의 말에도 동규는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었다.

졸려서 오후 내내 잠이나 푹 잘 생각이었다. 하림을 찾으러 교실에 갔던 선생님들이 허탕을 치고 보건실로 왔을 때 하림은 몸도 아프고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커 수업을 들을 수 없다고 이불만 돌돌 말았다.

“그럼 쉬었다가 종례 끝나면 선도부실로 와라.”

갈 생각이 전혀 없어 하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례가 끝난 뒤에는 동규의 팔을 잡고 선도부실이 아닌 정문으로 향해 뛰었다. 휴대폰 전원을 꺼 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규는 ‘왜?’ 하고 묻지도 못하고 하림의 손에 맥없이 끌려갔다.

하림은 동규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동규와 함께 올라타 집으로 가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흔들리다 주공 아파트 정문에서 내릴 때까지 두 사람은 침묵했다. 하림은 겁먹은 동규에게 어떻게 말을 해 주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고 동규는 하림이 속으로 자길 욕하는 게 아닐까 하며 태어난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정말 쫑알쫑알 시끄럽네.”

“……뭐가.”

“김동규 머릿속.”

동규는 대답 없이 걸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고소 그거 별거 아니라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신경 끄고 살고 있으면 좋은 소식 들려줄게.”

“고……소를 한다는 것부터가…….”

“하늘이네 엄마 쪽 할머니가 변호사시거든. 부모님도 법원 공무원이야.”

“걔네 할머니가 판사래도 나는…… 하림아, 그냥 우리 고3이고 너도 포럼 준비랑 뭐 다른 것도 한다고 했고 이제 조금 있으면 기말고사고…….”

“알았어. 할지 말지는 생각 좀 더 해 볼게.”

하림은 동규를 집에 데려다준 뒤 바로 고소장을 접수 할 예정이었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헤어질 예정이었으나 하림은 엘리베이터도 같이 탔다. 동규네 집까지 올라가는 동안은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어 조용했다.

“비밀번호 누르기 전에.”

동규가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도어록을 위로 열자 하림이 빠르게 닫았다. 그리고 동규의 어깨를 잡아 문으로 밀었다.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규를 두 팔 안에 가둔 하림이 동규의 입술 위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진짜 미안해. 아침부터 많이 놀랐지.”

“응.”

“나는 그냥 말로만 하려고 했는데 걔가 선빵 친 거야.”

“응, 알아.”

“난 안경도 쓰고 있었어. 안경 쓴 사람 얼굴 때리면 살인 미수야.”

“살…….”

동규와 같은 층 사는 사람들이 죄다 노인네들이라 정말 다행이다. 학생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이러고 있지도 못 했을 테니까.

“그래. 살인 미수.”

안경 쓴 사람에 대한 폭행이 살인 미수라는 얘기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루머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하게 얘기를 해 줘야 동규가 서준에게 남은 일말의 우정 같은 걸 확실하게 뗄 수 있을 듯해 하림은 거짓을 강경하게 말했다. 김동규는 미련하게 착해서 문제다.

“안경 깨지면 눈이 바로 다치니까 살인 미수인 거지.”

“너 눈 다쳤어?”

동규는 하림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눈가를 살폈다. 하림의 눈 주변에 실낱같이 아주 작은 상처라도 발견한다면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걱정 어린 눈동자에는 하림이 비쳤다. 하림은 동규의 눈동자 속의 제 얼굴을 보며 심장이 찌르르 아파 왔다. 미련스럽게 착하면 뭐 어떤가.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다쳤냐고.”

“아니.”

뺨을 달구어 주는 뜨거운 손바닥에 하림은 두 눈을 감았다. 동규도 눈을 감고 하림에게 입을 맞췄다. 하림의 혀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동규의 혀를 간질였다. 입 맞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동규가 고개를 숙여 까치발을 들었던 하림이 편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림은 얼굴에 있던 동규의 손을 잡아 제 허리에 둘렀다.

가볍게 시작했던 입맞춤이 조금씩 격렬해졌다. 틈새 없이 붙어 있던 입술이 숨을 쉬기 위해 잠시라도 떨어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맞붙었다. 혀가 섞이는 소리가 복도라 그런지 더 크게 울리는 것만 같다. 동규가 팔에 힘을 주고 하림을 세게 끌어안았다. 동규와 하림의 성기가 더 가까이 붙었다.

“그만…….”

동규가 먼저 팔을 풀자 하림도 입술을 뗐다. 너무 열심히 서로의 입술을 빨아 대서 그런지 입술이 얼얼했다. 하림은 아랫입술을 꾹꾹 눌러 보았다. 입술에 열이 올라 뜨거웠다.

“나 엄마한테 가야 돼. 학교 끝나면 바로 병원 오라 그래서.”

엄마 소리에 동규가 하림을 다시 끌어안았다. 그 대단한 분이 하림을 얼마나 혼낼지 감도 안 왔다. 하림은 제 품에 파고든 동규의 등을 토닥거렸다.

“혼내실 것 같아. 미안해.”

“안 혼나.”

“미안해, 내가…… 내가 바보 같아서…….”

“울지 마. 미안한 일 아니야 진짜로.”

“으응…….”

동규가 하림의 어깨에 묻은 얼굴을 좌우로 저었다. 동규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고. 말로는 동규를 달래기 위해 다정한 말들만 쏟아 냈지만 하림은 폭행죄로 형사 소송부터 하고 합의 없이 손해 배상 청구 소송까지 걸 생각으로 칼을 갈았다.

휴대폰 켜 봤자 학교와 친구들에게 연락이 한가득 와 있을 것 같아 동규 휴대폰으로 엄마에게 좀 늦는다는 문자를 보냈다.

동규를 집 안까지 잘 들여보낸 하림은 곧장 근처 병원으로 가 진단서를 떼고 검찰청으로 향했다. 교복 입은 학생이 친구를 폭력죄로 고소하겠다고 하자 처음엔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기계적으로 안내하던 어른들이었으나 하늘의 외할머니 이름을 대자 순식간에 접수가 완료되었다.

국선 변호사 신청서는 작성만 하고 가방에 넣었다. 변호사 알아보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도 아까워 국선 변호사를 쓸까 했던 건데 초범에 미성년자인 서준을 어떻게든 압박하려면 비싼 변호사가 좋을 것 같아서였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7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하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센터장실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싸울 거면 그냥 욕을 하면서 말로 싸우지 왜 엄마 마음 아프게 얻어맞아, 맞기를.”

아까 학교에서 얼굴을 살펴봤고 보건 선생님이 응급 치료도 다 해 줬지만 하림의 엄마는 하림을 앉혀 놓고 소독부터 새로 시작했다.

“얻어맞기만 한 거 아니라 나도 많이 때렸어.”

“에휴. 그걸 잘했다고 해야 좋은 엄마인 건지 엄마는 감이 안 온다, 아들.”

“학교에서 온 전화 잘 커버해 줬으니 좋은 엄마지.”

하림이 잠수 타고 튄 바람에 학교에서는 엄마에게 연락했다. 그는 제 아들이 학교에서 고소를 말리기 위해 남으랬다고 남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네, 선생님! 전화 드린다는 걸 깜빡했는데, 하림이가 도망간 게 아니고 제가 하림이보고 학교 끝나면 바로 병원 오라고 해서 지금 저랑 같이 있어요. 네, 네네. 제가 잘 말해 놓을게요. 저도 정신없고 놀래서 선생님께 전화 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아, 하림이가 선생님이랑은 지금 전화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네요. 네. 걱정하지 마시고, 네. 내일요? 당연히 등교하죠. 네, 내일 또 연락 주세요.’

이런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을 하고 잠수를 탔을 애지만 그러지도 못 할 정도로 제 아들에게 급한 일이 있겠거니 하고 적당히 둘러댔다. 학교에 남지는 않아도 엄마인 자신에게는 약속을 지키러 올 테니까. 실제로 담임 선생님과 전화 끊고 얼마 뒤 동규 번호로 연락이 오기도 했고.

“커버? 엄마가 야구 선수야? 실책 낸 거 만회해 주게?”

“아, 아파.”

“잘생긴 얼굴에 멍 든 거 봐. 속상해 죽겠네, 정말.”

“나 음료수 먹어도 돼?”

“꺼내 먹어.”

냉장고에서 녹차 캔을 꺼낸 하림이 소파에 벌렁 누워 멍이 있을 광대 쪽에 캔을 댔다. 차가워서 소름이 돋았다.

하림의 엄마는 솜과 쓰레기들을 버리고 약을 정리했다. 잠시 제 아들의 까만 정수리를 바라보던 그는 병원장에게 올릴 서류를 마저 확인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그래서. 이렇게 과하게 오버한 이유가 뭐예요 아드님. 엄마도 학교에서 제대로 처분 안 내준 거 마음에 안 들고 네 성격에 바로 따질 수 있겠다 했지만 고소는 좀, 과하지?”

소파 밖으로 나온 다리를 하림이 까딱거렸다.

“엄마가 생각해 봤는데, 엄마랑 서준이네 엄마랑 해서 셋이 따로 시간 내서 만나는 거 어때.”

“싫어. 걔네 엄마는 아들 하나 잘못 둬서 뭔 고생이야. 차라리 정서준까지 넷이 만나. 아니, 아예 아빠들까지 다 만나.”

“하림이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할아버지에 할머니에 모든 가족이 다 만난대도 싫어.”

“흠……. 이건 어때. 엄마가 교장 선생님에게 다시 얘기를.”

“그리고 이미 고소장 접수하고 왔어.”

“뭐라고?”

센터장실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대어 서류를 보던 엄마가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하림! 너 진짜야?”

“진짜야. 접수증 보여 줄까.”

이런 일로 거짓말을 치진 않았겠지만 엄마는 하림이 주머니에서 꺼낸 접수증을 굳이 두 눈으로 확인했다. 말문이 막힌 엄마는 이마를 짚고 하림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동규랑 친해서? 네 욕을 하고 다닌 애가 널 때린 게 자존심 상해서?”

“내가 김동규를 좋아해.”

지독한 적막이 찾아왔다. 초침 소리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뭐, 지금…… 그게 무슨 뜻이야.”

까딱거리던 두 발은 어느새 움직임을 멈춘 채였다. 하림은 아직 차가운 음료수 캔을 이마로 옮겼다.

“무슨 뜻인지 알면서 왜 물어봐.”

엄마를 바라보진 못하겠지만, 그렇게 식은땀이 난다거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진 않았다. 갑작스러운 말로 충격 받았을 엄마에게 조금 미안하긴 해도 잘못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나 혼자만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애 그런 식으로 괴롭히고 무시하고 나랑 김동규 사이 찢어 놓으려고 한 새끼라 이대로는 못 넘어가.”

“…….”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이런 거니까 엄마만 알고 있어 줘. 부탁……이야, 엄마.”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났다. 하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엄마 쪽으로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최대한 평범하고 평소 같은 어조로 말을 한 것 같은데 조금 떨리진 않았겠지. 엄마가 김동규 찾아가서 뺨을 때릴 사람은 아니라도 너무 최악의 타이밍에 말한 것 같기도 하고. 아 몰라. 알 바야. 내가 좋다는데 엄마가 뭐 어쩔 건데.

“……네 아빠랑.”

하림은 음료수 캔에 써져 있는 녹차의 효능을 읽는 척 했지만 하나도 읽히지 않았다. 그저 두 귀만 엄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아버지한테는…… 변명을…… 뭐라고…… 얘기를…….”

힐끔 본 엄마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꾹 누르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엄마.”

“10분 새에 10년은 늙은 기분이다.”

“엄마아.”

“일단, 알겠고. 엄마도 생각 정리 좀 하자.”

“나 그럼…… 먼저 집에 가?”

“엄마는 한 시간 뒤에 나갈 거야. 누구 때문에 오늘 자리를 오래 비웠거든.”

“알았어…….”

하림은 센터장실을 나오면서 휴대폰 전원을 켰다. 학교와 선생님으로부터 부재중 통화가 엄청나게 와 있었다. 싹 다 차단할까 조금 고민한 하림은 담임 선생님 번호를 차단하는 대신 병원 근처 디저트 가게를 검색했다.

이 시간이면 인기 있는 곳들은 마카롱이며 케이크들이 죄다 품절일 듯했지만 동규가 집에 누워 하지 않아도 될 걱정까지 끌어안고 있을까 봐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동규가 좋아하는 달달한 디저트들을 기어코 한가득 사 동규네 집에 잠시 들렀다. 동규는 눈가가 부었는데도 울지 않았다고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 하림은 동규의 입에 달콤한 것들을 잔뜩 물려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서준에게 고소장이 날아간 사실은 하림이 고소장을 접수하고 며칠 되지 않아 전교생이 다 알게 되었다. 서준의 엄마가 학교로 찾아왔고 하림의 이모님도 마찬가지였다. 학부모 요청으로 서준은 선도부실로 등교해 오전 수업만 받고 조퇴했다. 등교와 하교 모두 엄마가 따라 붙었다.

하림이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니 학생들 사이에서는 3일 뒤 시작될 기말고사보다 학교가 이번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더 핫했다. 덕분에 하림은 수시로 교무실로 불려갔고 선생님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래도 하림은 주눅 들지 않고 앵무새처럼 “정서준 퇴학시켜 주세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면 고소를 취하하겠다고.

문제는 서준의 집도 만만찮은 집이라는 거였다. 서준의 집에서는 학교를 고소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양쪽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어 학교는 골머리를 앓았다.

어제는 서준의 아빠가 학교로 찾아와 하림에게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날려 난리가 났다. 그래도, 하림은 떨리는 손을 뒤로 숨긴 채 선생님들에게 몇 번이고 얘기했던 말을 서준의 아빠에게도 했다.

“전학도 싫은데요. 정서준이 자퇴서 쓰는 거 아니면 다 싫어요.”

착하고 말 잘 듣고 자타공인 학교의 자랑인 줄 알았던 하림이 알고 보니 골칫거리였다며 10반 담임 선생님을 쥐어짜는 교장 선생님도, 어른으로서의 자존심까지 다 버려 가며 하림에게 이제 그만하자고 얘기한 담임 선생님도 동규에 비하면 살 만한 정도였다.

동규는 하림이 정말로 무시무시한 일을 벌인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기말고사 마무리 공부를 하지 못한 건 당연하고 밤마다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하림에게 미안해서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고 있어 하림은 그런 동규를 볼 때마다 마음이 자꾸 약해졌다.

하림은 일부러 동규에게는 고소의 ‘ㄱ’도, 정서준의 ‘ㅈ’도 얘기하지 않았건만 동규가 더 열심히 고소 얘기를 하고 서준의 이름을 거론했다. 미성년자의 폭력죄는 어떻게 진행되고 고소 과정과 재판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정서준은 정말로 교도소나 소년원에 가게 되는 건지.

그럴수록 하림은 너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말로 일축하며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지냈다. 실제로도 하림은 자기 할 일로 바빠 고소에 쓸 시간이 부족했고 엄마가 도와준 덕분에 아빠나 할아버지가 하림을 혼내는 일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반응은 꽤 의외였다. 금쪽같이 귀한 장손이 얻어맞았다는 얘기에 직접 변호사를 선임해 주겠다며 노발대발했다. 하림은 할아버지의 전화에 평소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고 어리광을 부렸다. 천군만마를 얻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을 정도였다.

“…….”

하림의 부탁으로 오늘 저녁은 동규가 좋아하는 반찬들만 잔뜩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동규의 젓가락질이 영 시원찮았다. 입맛이 없다. 동규는 아까 하림의 집에 놀러오기 전 무료 법률 상담소에 다녀왔는데, 서준은 초범에 미성년자라 제대로 구형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0에 가깝고 그렇다면 서준 쪽에서 하림을 맞고소할 수도 있다는 대답을 들어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겨우 밥 한 그릇을 비운 동규를 이끌고 하림이 방에 들어왔을 때, 동규가 하림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동규의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도 알아봤는데, 고소라는 게 몇 달…… 몇 년 걸릴 수도 있는 거고 잘못하면 걔가 너한테도……. 그러다가 너 잘못되면 어떡해…… 내가 처음부터…… 다 내 잘못이야. 선생님들도 그랬어. 선생님들이 뒤에서, 네 얘기하는 거 다 들었, 들었는데 나보고 선생님들이 너 말리면 좋겠다고…….”

동규를 안아 달래던 하림이 동규를 떼어 냈다.

“선생님이 너한테도 뭐라고 했다고?”

“아니, 그건 아닌데…….”

“어쨌든 뒤에서 내 얘기 했단 거잖아. 너보고 나 말리라고. 진짜 단체로 미쳤나.”

“서하늘이랑 같이…… 불려 갔는데 선생님이 너.”

“서하늘도?”

불안함을 꾸역꾸역 참다 터진 동규에게서 두 친구가 불려 갔다는 얘길 들은 것도 놀라운데 선생님들이 제 일로 동규와 하늘을 불렀다는 것에 하림은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하늘도 동규도 지금까지 한 번도 선생님이 불렀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하림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어차피 원하는 만큼 서준이 벌을 받지도 않을 테니 끝까지 합의 없이 겁이나 주려던 건데, 그조차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버거운 일임을 하림은 처음으로 체감했다.

“어떡해……. 하림아, 어떡해…….”

하림은 동규의 눈물을 닦아 주며 입술을 꾹 물었다. 서준이 실형을 받아 소년원으로 들어간대도 동규가 힘들어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거였다.

“정말, 진짜로 끝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무죄가 나오든 집행유예가 나오든 뭐든지 간에 사람 잘못 건드린 거 똑똑히 알려 주려고.”

고개만 끄덕이는 동규의 코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근데 이렇게 너 우는 거 보니까 더 이상 못 하겠다. 여기서 멈추고 그만할게. 정서준도 싫지만 네가 우는 게 더 싫어. 마음 아파서 못 보겠어. 그러니까…… 울지 마.”

동규도 그만 울고 싶은데 하림의 멈춘다는 말에 눈물이 차올라 후드득 떨어졌다. 그동안 얼마나 자신을 탓하고 욕하면서도 하림이 왜 서준에게 강수를 뒀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만두라고 하지 못했다.

무섭고 불안하고, 한편으로는 하림의 강단이 대단하게 다가오다가도 하림과 비교되는 자신의 나약함에 매일매일 혼란의 연속이었다. 하늘이 이럴 때일수록 하림이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좋다고 몇 번을 얘기했지만 선생님 앞에 앉아 이런저런 얘길 들었을 때 동규는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하림이 서준과 싸운 이유도, 이런 상황까지 끌고 온 이유도 전부 자신 때문이었고 그만두는 이유 역시 김동규 본인이라는 사실에 동규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셀 수 없이 흘러 넘쳤다. 안도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속상한 마음도 컸다. 서럽다기엔 불안함이 해소되는 중이었고.

그냥 지금은 하림의 넓은 품과 저를 달래주는 손만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서준이 전학을 가고 생기부에도 이번 일이 자세하게 적히는 것을 조건으로 하림은 고소 취하에 동의했다. 세문고 마지막 등교 날에 취하를 진행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서준의 전학 수속이 예외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기말고사까지만 세문고에서 보고 다음 날부터 바로 타 학교로 등교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서준이 전학 가는 학교는 꽤 먼 곳이었다. 이미 이 동네에선 소문이 다 돌아 쪽팔려서 다닐 수 없다며 서준이 부모님을 조른 탓이었다.

동시에 서준과 하림은 각서도 작성했다. 정서준은 각서를 작성한 시간 이후로 다시는 김동규에게 직간접적으로 연락을 취하지 말 것, 서하림과 평생 모르는 사람처럼 대할 것, 해당 일을 왜곡하여 서하림과 김동규의 험담을 하고 다니지 말 것. 위반 시 최소 천만 원의 위약금이 발생하게 되고 최종 금액은 서하림의 의사를 반영한다. 그 외 기타 등등.

하림이 작성한 초안은 양쪽 변호사의 손을 거쳐 각서로 완성됐다. 하림은 변호사를 대동하고 찾아가 서준이 자필로 각서를 작성하는 것을 확인 후, 두 변호사에게 공증까지 받았다. 하림이 제 몫의 각서를 한 부를 챙겨 서준의 집에서 나왔을 때는 한창 기말고사가 진행 중이었다.

서준이 세문고등학교 소속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자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하림과 동규는 하늘의 집에 모였다. 당사자인 하림의 집을 두고 하늘의 집에서 축하 파티가 열린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하늘의 집은 부모님과 오빠가 전부 여행 가 있느라 텅 빈 상태였다. 가정부 아주머니도 휴가라 셋이 어른들 눈치 없이 놀기엔 더할 나위 없이 딱이었다. 하늘은 점심부터 놀 생각이었으나 하림이 조금 쉬고 싶다며 6시로 약속을 잡았다.

하늘과 동규가 치킨이나 피자 같은 걸 시킨대서 하림은 자기가 먹을 음식들을 따로 가져왔다. 하늘이 참도 까탈스럽다며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같이 먹으려고 많이 가져왔는데 자꾸 이럴 거야?”

“네네, 노인네 입맛.”

“내 거 먹지 마, 너.”

“줬다 뺏는 게 어딨어!”

동규는 말없이 피자 두 조각을 겹쳤다. 싸울 것처럼 굴어도 조금 기다리면 둘 다 알아서 다른 얘기로 넘어간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하림이 가져온 로제 파스타 접시를 하늘과 하림이 서로 자기 쪽으로 당기며 한참을 투닥거리다 갑자기 동규에게 이야기가 튀었다.

“김동규, 그래서 대학 안 간다고?”

노른자에 충분히 적신 빵을 구워 그 위에 잼을 바른 해시브라운을 올리고 아주머니의 비법 소스를 뿌린 뒤 수란을 올린 에그 베네딕트는 수제 치즈가 제일 위를 장식하고 있어 하림이 아주 잘 먹는 것 중 하나였다. 하림이 수란을 반으로 갈랐다. 하늘의 시선은 하림의 에그 베네딕트에 고정된 채였다.

“……갑자기?”

“백일장 1등상 이번 학기에만 5개라며. 얘가 네 자랑 자랑을 너무 많이 해서 상 이름도 다 알 정도임. 너 무슨 신문에 프러포즈한 것도 얘가 보여줘서 다 봤어. 으, 오글.”

“프러포즈는…… 아니야. 그냥 조금 고맙다고…….”

언제 자랑을 한 거지. 동규가 하림을 쳐다봤지만 하림은 어깨만 씰룩 하고 빵과 해시브라운을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조금? 아주 사랑한다고 난리를 다 쳤던데. 암튼 오늘은 정서준 꺼지는 거 축하하는 동시에 너 얼마 전에 1등 한 것도 축하하는 파티라고 서하림이 하아도 뭐라 뭐라 했음.”

“몰랐어.”

“근데 그러면 너 공부 못해도 특기자로 대학 갈 수 있는 거 아님? 아직도 갈 생각은 없어?”

“갈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가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어.”

“상 받은 거 아깝다. 아 맞다. 내 친구도 예고 다니는데 걔는 첼로 하거든. 근데 걔도 너 알더라.”

“어떻게?”

“걔네 학교에 글 쓰는 과 있어서 걔네한테 들었대. 여자애들이 너 보러 백일장 간다고 그러던데.”

하늘은 피자를 자르던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렸다. 동규는 눈동자를 가만두지 못하고 피자만 입에 가득 물었고 하림은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였다. 하늘은 재밌는 생각이 들어 나이프로 동규를 가리켰다.

“김동규 백일장 가서 여자애들에게 인사도 잘 해 주고, 어? 눈도 마주치고 어? 그런다던데?”

재밌어 죽으려는 표정이다. 동규는 입 안에 든 피자를 삼키지도 못하고 저거 다 거짓말이라는 뜻의 몸짓으로 해명을 시작했다. 하림은 옆에서 동규가 난리가 났어도 고고하게 소시지를 썰어 샐러드와 함께 먹을 뿐이었다.

“김동규 팬까지 생길 기세래.”

하늘의 말에 동규가 손사래를 쳤다. 목이 타 생수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켠 동규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이상한 소문을 듣고 왔냐고 난리가 났다. 하늘은 쉬지 않고 웃으며 동규를 놀려대면서 하림의 반응을 기다렸다.

“진짜 김동규 어디 불안해서 밖에 내놓겠나.”

생각보단 좀 약한데.

“서하림 긴장 타라. 걔네 글 쓰는 과 여자애들이 다들 김동규 본다고 백일장 떼로 간대.”

“가라고 해.”

그게 뭐 별거냐는 어투로 어깨만 으쓱하는 하림이 얄미웠다. 아무리 김동규랑 자기가 천년의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재수가 없을 건 뭔가.

“넌 질투도 안 하냐, 재미없게.”

“내가 왜? 애도 아니고.”

“그래, 네 똥 굵다. 잘나셨어요 아주.”

하림은 또 어깨를 으쓱했다. 일부러 하늘이 싫어하는 잘난 척하는 표정도 한껏 지어 주었다.

“남자애들이 자기네 학교 여자애들 뺏긴다고 김동규 욕을 그렇게 한다던데 야, 너 알았어? 예고 남자애들이 너 욕하는 거?”

“……예고 다니거나 학원 다니는 애들은 다 나 욕해.”

그런 일로 욕하는 줄은 몰랐고 장원 가져가니까 욕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럼 여자애들이 너 좋다고 하는 건? 누가 고백했다가 까였다는 건 뭐야?”

동규로서도 금시초문인 얘기였다. 백일장 가면 혼자 다녔고 자리도 주로 구석에 앉았고 백일장 시작 직전까지 하림과 전화하거나 노래를 듣거나 했기 때문에, 동규에게 관심 있는 친구들이 동규에게 말을 걸 기회가 거의 없었다. 여학생 리가 동규 앞에서 웅성거려도 동규는 누가 제 앞에 있는지도 잘 몰랐고 그 웅성거림이 자신에게 향하는 줄도 몰랐다.

“그런 적 없는데.”

분명 있었으나 동규는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용기 있는 친구들이 동규에게 번호를 물어본 적도 있지만 동규가 칼같이 거절했고 옆에 앉아 말을 걸어도 ‘아니, 싫어, 몰라’로 일관하며 대화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말을 건 친구가 싫은 건 아니었는데 예중예고 학생들에게 견제받는 건 초등학생 때부터 자주 있던 일이라 동규는 말을 걸어오는 것도 그 일환인 줄 알고 나름대로 방어를 했던 거였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친하게 지내자고 동규의 옆에 앉았던 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 학생이 동규에게 무슨 내용으로 쓸 거냐고 물어보더니 홀랑 베껴 써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 동규는 백일장에서 혼자 다니기로 결심했다.

“이상하다. 누가 1등 받는지보다 백일장에 너 있고 없고가 존나 여자애들 사이에서 제일 중요한 거랬는데.”

“아닐걸.”

“아니야. 그래서 작년에 여자애들 엄청 너 찾았다고 그랬어.”

“음악과인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잘못이 아니라 분명히…….”

하늘은 이쯤에서 하림이 동규랑 사귀면서도 왜 이토록 여유롭게 구는지 납득했다. 이 정도면 서하림이 질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게 아닐까.

“그래 됐다 됐어. 네 김동규 너 아는 사람 하나도 없고 너 좋다는 사람도 하나 없어. 됐냐.”

“진짜 없어. 네 친구한테도 그거 아니라고 얘기해.”

“……피자나 먹어라 걍.”

피클 접시에 피클이 몇 개 남지 않아 하림은 유리병을 열어 피클을 꺼냈다. 피자 한 조각에 동규가 피클을 0.5kg은 먹는 것 같다.

“됐어?”

“조금만 더.”

그런데 아무리 동규가 자기 말고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이라면 조금은 불안한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김동규가 별 볼일 없이 평범하고 못난 애면 몰라도.

실제로 동규는 하림과 사귀기 전에 다른 애가 하림을 채 가면 어쩌나 걱정했고 사귀고 나서도 걱정인 사람이었다. 하늘이 삽질하는 동규에게 ‘서하림은 죽어도 너밖에 없대’라는 닭살 돋는 얘길 해 준 게 올해만 해도 세 번은 될 거다.

“너 진짜 상관없어?”

“뭐가.”

하늘은 턱짓으로 피자 먹기 바쁜 동규를 가리켰다.

“응.”

“진짜?”

“그럼 진짜지.”

“에이, 아닐 텐데?”

“진. 짜. 상관없어.”

“정말 요만큼도?”

하늘이 검지와 엄지를 모아 이만큼도 아니냐고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뭐, 그 정도라면.”

“서하림, 난 진실만을 말했을 뿐이야. 괜히 들쑤신 거 아니고.”

“…….”

미친놈. 김동규 일에는 거짓말 하나를 봐주질 않는다. 하늘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하림의 시선을 똑같이 응시하다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쏘리. 괜히 들쑤신 거 맞아. 너 재수 없어서 장난 좀 쳐 봤다. 하지만 말한 내용은 다 팩트.”

“듣기 좋았어. 더 해 봐.”

“씨발 됐어. 안 해.”

하림은 질색하는 하늘을 보고 빵 터졌다. 하늘은 욕을 궁시렁거렸다.

“근데 그런 일로 신경 쓸 거 좀 많지 않아? 뭔 고생이냐.”

“고생까진 아니고 약간? 귀엽잖아. 잘 모르고 있는 게.”

“나였음 줄담배 피웠다. 몰라도 어지간히 몰라야지.”

“그게 귀여운 거라니까.”

혼자만 못 알아듣는 말이라 동규가 하림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화를 이해하려고 할 때 다시 동규의 대학 얘기로 주제가 돌아왔다.

“야, 그래서 김동규 너 대학교 안 가냐고.”

“엄마가 가고 싶으면 가고 싫으면 가지 말래. 나는 꼭 대학을 가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

“네가 공부를 잘했거나 서하림이 공부를 못 했으면 CC하러 같은 대학 가라고 할 텐데 그건 불가능하네.”

“지금부터 12년을 공부해도 불가능할걸…….”

“뭐,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짠 합시다.”

하늘이 샴페인 잔을 들어 동규와 하림도 잔을 들었다. 하늘이 진짜 샴페인 먹자고 한 걸 동규가 싫다고 해 세 사람의 잔에는 무알코올 샴페인이 찰랑거렸다.

“김동규 전국 재패 축하하고, 정서준 헐레벌떡 도망가는 거 존나 꼬시다. 서하림 나이스!”

하늘을 따라 하림이 “나이스!” 하며 건배를 했고 동규는 말없이 잔만 부딪혔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속이 타서 담배 피우다가 엄마한테 걸릴 뻔했잖아. 정서준 아빠 학교 왔을 때가 절정이었음.”

“선생님이 너랑 김동규 불러서 뭐라고 그랬어.”

웃고 있던 하늘이 얼굴을 굳히고 동규에게 고개를 휙 돌렸다. 선생님에게 불려 갔던 건 비밀로 하기로 했었다.

“김동규가 말한 거 아니고 우연히 알게 됐어. 선생님들 얘기하는 거 듣고 유추한 거야.”

“유추한 거로 김동규 찔렀다가 죄다 불어 버렸나 본데.”

“그렇지.”

“이렇게 물어보는 거 보면 정확히 무슨 내용인 건 얘기 안 했나 봐.”

“그냥 선생님이 너랑 김동규 불러서 내 이야기 했다는 것만 알아.”

샴페인을 원 샷한 하늘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사뭇 진지한 얼굴을 했다. 동규는 비밀을 지키지 못했다며 하늘에게 욕을 들을 줄 알고 긴장했다가 오랜 침묵 중인 하늘을 따라 저도 모르게 같이 진지해졌다.

“모르는 거로 해.”

“응?”

“그냥 모르는 거로 하라고. 특별한 얘기도 없었어. 우리가 선생님한테 뭔 얘길 들었든 다 끝났는데 알아서 뭐 하게. 선생님도 고소하려고? 이번에는 친구들 협박죄로?”

“그게 아니라.”

“알 필요 없어. 김동규 너도 더 이상 얘기하지 마.”

“응.”

“아, 뭐야. 얘기해.”

“다 까먹었어.”

“뻥치지 말고.”

“진짜로 다 까먹었어.”

하림은 동규에게 당장 얘기하라는 눈빛을 쏘았다. 눈동자를 굴려 하늘을 바라보았더니 하늘이 말하지 말라며 주먹을 들어 보였다. 동규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김동규, 나 봐 봐. 선생님 어떻게 하겠다는 거 아니고 그냥 이번 일에 내가 모르는 게 있으니까 알고 싶어서 그래.”

입을 막은 채로 동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서하늘은 진짜 대단해. 내가 서하늘이었으면 서하림이 말해 달란 얘기에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줄줄 다 얘기했을 텐데.

“알겠어. 너네가 얘기하기 싫다니까.”

하림은 하늘의 잔에 샴페인을 따랐다. 포크로 새우 하나를 찍어 동규의 앞에 가져갔더니 동규가 손을 떼고 하림이 준 새우를 받아 먹었다.

금세 또 다른 얘기가 시작됐다. 피자도 치킨도 하림이 가져온 음식들도 모두 깨끗하게 비워지고서도 한참이나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하늘은 친구들과 함께 뒷정리를 하면서 냉장고에 가득 들어 있는 아이스크림이나 각종 디저트를 떠올렸다. 같이 먹으려고 하교하면서 사 온 것들이었으나 먹고 가라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누가 집 앞까지 데려다줄 건지 정하자며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두 친구는 눈에서 아주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주 지들 세상 납셨네 납셨어.

“씨발놈들. 또 나만 따 시키지.”

저러다 아예 결혼까지 한다고 하겠네.

“미친.”

갑자기 든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아무리 좋아도 그러겠어.

닭살이 돋은 팔뚝을 벅벅 긁으며 하늘은 보냉백 두 개를 열었다. 그 안에 아이스팩과 미리 사 둔 디저트들을 전부 꺼내 나눠 담았다. 하늘은 소파에 딱 붙어 앉아 내가 이겼으니 내가 너를 집에 데려다주겠네, 졌으니까 내가 데려다주는 게 맞네 하는 하림과 동규에게 거의 던지듯 보냉백을 건넸다.

“연애질 할 거면 빨리 꺼져 주라.”

“학교 끝나고 뭐 많이 사 왔다며.”

“그게 이거야. 너네 집 가서 먹어. 아니면 김동규네 가서 먹든가.”

“왜, 같이 먹어.”

“됐거든요. 내가 친구를 초대한 거지 염병천병 커플을 초대한 거 아니거든요.”

“미안. 잘 먹을게.”

민망함에 하림이 빠른 사과를 했다. 손을 잡거나 껴안은 것도 아니고 그냥 옆에 앉아서 가위바위보 한 게 다인데 하늘이 외로움을 느낄 정도였나. 하림은 제 행동을 되짚어 봤다.

“미안.”

동규도 하림을 따라 진심 어린 사과를 했지만 하늘이 동규에게 뭐가 미안한지 알고나 사과하는 거냐고 왁왁거렸다.

“우리만 연애해서…….”

진심 어린 동규의 말에 하늘이 결국 주먹을 들었다. 하림이 웃음을 꾹 참고 동규의 보냉백을 챙겨 일어났다.

“금등그 으즈 즉으르 즉으. 세상 연애는 지 혼자 다하지, 다.”

당돌한 정답이긴 했지만 하늘이 동규에게 이 악물고 주먹을 연타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제 그만해. 내가 이따 김동규 눈물 쏙 빠질 정도로 혼내 놓을게.”

“구라 치네.”

하늘이 동규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동규는 그 손길을 따라 목을 달랑거렸다.

“미친놈아아아! 귀 씻을 거야!”

하늘이 멱살을 잡은 손을 풀자 동규가 허겁지겁 일어나 하림의 뒤로 도망쳤다. 여전히 하늘이 눈에서 불을 뿜고 있어 동규는 애꿎은 바닥만 바라보았다.

“야이씨, 김동규 너 진짜 자꾸 까먹나 본데 너 그럴 때마다 존나 섭섭해. 진짜 지금 봐 온 정을 봐서 욕 참고 있는 거야. 누가 너네 사귀는 거 모른대? 연애질은 둘이 있을 때 하라고. 존나 나만 따돌림당하는 기분 든다고.”

“헐, 미안. 몰랐어.”

“됐어. 빨리 꺼져. 사라져. 꺼져 꺼져.”

하늘은 하림과 동규의 등을 밀었다. 그리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동규의 등을 찰싹 때렸다. 소리가 굉장히 컸고, 엄청난 아픔에 동규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허리만 뒤틀었다.

“오늘 눈치 없던 건 이거로 퉁쳐. 아 시발 손 아파.”

하림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가 버려 동규는 눈물이 찔끔 나왔다. 좀 말려 주지.

아직도 따끔거리는 듯한 등을 문지르며 동규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픔과 비례하게 입술을 잔뜩 내밀고 있었고 한 10분 정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괜찮아? 많이 아팠지.”

동규가 문을 열고 나오자 하림이 현관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그 소리에 동규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림은 하늘의 손이 닿았던 곳에 제 손을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서하늘 손 모양으로 자국 남겠다. 소리 진짜 컸는데.”

“…….”

“내가 너 구해 주려고 했는데 하늘이가 좀, 우리랑 지내면서 많이 서운했나 봐. 아무래도 사귀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 끼어 있으면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고 그러잖아.”

“……몰라.”

“그랬대. 이번에는 우리가 잘못했어.”

“그래도 아픈데.”

“집에 가면 호 해 줄게. 내가 가위바위보 이겼으니까 데려다준다.”

“왜 이긴 사람이 데려다줘? 진 사람이 데려다줘야지.”

“이긴 사람 마음이야.”

하림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가, 아픔이 많이 사그라든다. 이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동규는 제 말이 얼마나 별로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이따가 집에 가면 제대로 된 사과메시지 보내야지.

“……가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하늘과 하림은 집이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동규가 이겼다면 얼마 걷지도 못하고 헤어졌을 거다. 동규가 이겼다고 해도 하림은 진 사람이 데려다주는 거라고 했을 거라 하림이 이기든 지든 결과는 똑같았다. 동규는 하림을 집에 데려다주지 못해 토라진 표정이었다. 뭐라도 하림에게 더 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럼 버스 타게?”

“걸어가는 데 시간 얼마나 걸려?”

“버스로 20분 정도니까 많이 걸려. 30분은 걸어야 할걸.”

“딱 좋아.”

“아니, 30분 말고 40분.”

“더 좋네.”

“좋다……고?”

“그냥 너랑 같이 걷고 싶어서. 할 말도 있고.”

차로는 한 10분쯤 걸렸던 것 같은 길이 버스로는 두 배가 되고 걸어서는 몇 배가 되는 곳에 동규가 산다. 동규는 아이스팩이 몇 분을 갈까, 하는 혼잣말을 심각한 어투로 말하면서 커다란 제 손에 비해 앙증맞은 아이스팩을 조몰락거렸다.

서준의 일도 잘 풀렸고 그 기념으로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재밌게 시간을 보냈지만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났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시험을 망쳤냐 하면 오히려 늘 그랬던 것처럼 잘 봤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이번 시험이 정신없이 달렸던 12년 수험 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시험이었기 때문일 거다.

아직 원서 접수도 남아 있고 면접도 봐야 하지만 오늘까지가, 하림이 느끼기는 레이스의 끝이었다. 그래서 바로 놀러오라는 하늘의 말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가 한참이나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멍하기도 했고 별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동규와 걷는 길이 30분이 됐든 40분이 됐든 그때 느낀 것들을 같이 나눌 동규만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밤인데도 여전히 밝기만 한 서울의 한복판에서, 어제와 거의 같은 더운 밤공기와 살짝 눅눅한 바람이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제 옆에서 달콤한 디저트가 녹을 걱정에 바쁜 동규 때문이었다. 동규가 평생 이런 고민과 걱정만 했으면 좋겠다. 큰일 없이 작고 소소한 걱정들로 심각했다가 금세 행복해지도록.

“김동규.”

“응.”

“나 이번 기말고사도 전교 1등 할 거 같고 6월 모의고사도 그렇고, 수능도 잘 보고 대학도 다 붙을 것 같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름 방학에 포럼도 잘 다녀오고 소논문 대회도, 사이언스 페어도 다…… 다, 자신 있어.”

“응.”

“정서준 일보다 그냥, 너한테 얘기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하림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뱉었다.

“이번 시험이 끝이라, 기분이…… 이상하다. 학교 시험 그거, 나는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단 말이야. 어차피 지금까지 봤던 것처럼 잘 봤는데, 그랬는데.”

최대한 하림의 얘기에 공감을 해 보기 위해 동규는 여름 방학에 참가할 마지막 백일장 현장에 있다는 상상을 해 보았다. 하림이 아주 어릴 때부터 수학 문제를 풀어 왔다면 동규는 글을 써 왔으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얼추 비슷한 듯했다. 만약 마지막 백일장이고 더 이상 백일장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면 원고지를 제출했을 때…….

“대학교 합격한다고 인생 끝 아니고 그건 그냥 내 인생에 당연한 순서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다른 친구들은 끝나서 좋다고 그러는데 나도 좋긴 좋지만 이런, 이상한 기분 얘기는 사실 다른 친구들이랑 별로 하고 싶지 않아.”

“왜?”

“걔네는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면 믿지도 않고 그렇다고 발로 푼다고 하면 잘난 척한다고 그러니까.”

“누가 그래? 누가 열심히 하는 거 안 믿어?”

“있어. 아무튼 기분 이상했어, 하루 종일. 서하늘은 시험 끝나서 좋은데 시원섭섭하대. 나도 시원섭섭은 시원섭섭인데 그것보다는 좀 더 복잡한, 음. 뭐라고 정확하게 정의를 못 내리겠는 그런 감정이 들어. 그래서 너한테만 얘기하고 싶었어.”

한때는 동규도 좋은 상을 받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글 쓰는 일은 상을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주제 맞춰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거였다. 상이야 받으면 좋고 안 받으면 그만인. 이왕이면 받는 것도 좋지만 백일장도 참여하고 싶은 것만 참여하고 귀찮으면 신청해 놓고도 안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림의 수험 생활은 0.1점차로 성적이 갈리고 시험을 본 모두에게 등수가 매겨지는 데다 자의로 시험을 보고 안 보고를 선택할 수도 없는 전쟁 같은 세계였다. 동규는 그 전쟁에서 제일 먼저 죽은 졸병이나 다름없었고 하림은 온갖 신식 무기에 전차에 군함까지 끌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전쟁이 끝났으니 무기들이 모두 필요가 없어졌다고 하면, 무거운 무기들을 벗어 던지는 기분이 어떨지 사실 동규는 온전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규는 마음속에 시인의 눈을 품고 있는 문학도였고, 그 눈은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기도 했다.

“수고했어.”

하림이 인재상을 받았다고 했을 땐 고생했다는 말을 해 줬지만 지금은 이 말이 가장 적절했다.

“12년은 정말 너무 긴 시간이야. 수고했어.”

“응.”

“나라면 너처럼 절대 못 해. 알잖아. 나는 공부…… 그런 거. 학교 내신만 열심히 챙겨도 대단한 일인데 3년, 아니 6년 내내 전교 1등만 한 건 진짜 사기야. 너는 그거 말고도 다른 것들도 엄청 많이 하면서 매번 1등밖에 안 하고, 근데 그게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전부 네가 하고 싶어서 한 거잖아. 좋아서.”

하림과 어릴 때부터 같이 공부한 친구들은 많을 것이다. 천재를 넘어 괴물 수준의 똑똑한 친구들도 많을 거고. 하림도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라면 오히려 공부와는 거리가 먼 자신보단 비슷한 수준의 영재원 친구들과 얘기를 해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 친구들이 훨씬 하림의 마음을 이해할 테니까.

그런데도 하림이 친구들에게는 얘기하지 않고 저에게만 얘길 하고 싶었다면 분명 그 친구들과는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을 테다. 얼마큼 하림의 마음에 공감하고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동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쁘고 귀한 말들을 하림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네 말대로 긴긴 인생에 대학이야 뭐, 나중엔 더 큰물에서 놀 거니까 별거 아닐 수도 있는 거지만 12년은 길어도 너무 길어. 우리 태어나고 산 시간의 절반이 넘잖아. 5분의 3이나 돼. 이상한 기분 드는 거 당연한 거야.”

“…….”

“어려운 퍼즐을 맞추거나 매번 어딘가 2% 부족한 맛이었던 어려운 요리를 드디어 완벽하게 성공하거나 하다못해 목도리를 떠서 완성해도 뿌듯하고 싱숭생숭한…… 내가 뭔가를 끝내서 후련하고 성장한 것 같아서 기특하고 별별 생각 다 드는데. 하루를 50시간으로 쓰는 너는 더 하겠지.”

“50시간 뭔데.”

“……너무 많이 말했나?”

조금 머쓱해하는 동규를 보며 하림은 가슴이 벅찼다.

역시 다른 친구들에게 얘기하지 않고 동규에게만 얘기하길 잘했다. 목도리를 떠 본 적은 없어도 동규의 적절한 예시가 마음에 쏙 들었다. 전국 수석을 한 엄마조차도 이렇게 제 마음을 알아주진 못할 거다. 종일 울렁거리던 마음에 평온함을 선사하지도 못할 거고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 종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도 들지 않을 거고.

“아무튼 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고 대단하고 또.”

“김동규.”

당장이라도 동규와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손바닥이 간지럽고 입술이 말랐다.

“너…… 뜨개질도 할 줄 알아?”

“응.”

“대박. 언제 배웠어?”

“엄마가 뜨개질 엄청 잘해. 그래서 나도 옛날에 배웠어.”

“뭐뭐 할 줄 알아?”

“목도리랑 모자, 이어폰 케이스 같은 거나 니트도. 엄마만큼 잘 하진 않고 기본적인 것만.”

“헐. 그럼 겨울에 하고 다녔던 거 다 직접 뜬 거야?”

“몇 개 빼고.”

“뭐야. 왜 나는 목도리 안 만들어 줘.”

“올해 겨울에…… 주려고 그랬어.”

“통상적으로 겨울은 12월부터 2월을 얘기해. 올해 1월이랑 2월에는 왜 안 줬는데.”

“그건…… 그때는……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

“팽팽 논 거 내가 다 아는데.”

연애하느라 바빴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뗐다가 너무 부끄러워 다시 입을 닫았다.

“……바빴어.”

“그랬지. 누구랑 연애하느라 바빠도 너어무 바쁘셨지.”

고스란히 읽힌 마음에 동규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말도 그랬고 걸음걸이도 그랬다.

“하고 싶어.”

“뭐……를?”

“뭐든.”

하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몇 있지도 않았지만 혹시라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까 봐 하림은 동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붙이고, 오른발과 왼발이 움직이는 속도를 동규와 똑같이 맞췄다.

“너랑 같이하는 거면 뭐든 다 하고 싶은데,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건.”

“…….”

“뽀뽀. 뽀뽀가 제일 하고 싶다.”

고개를 푹 숙인 동규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림은 그런 동규를 따라 제 걸음 속도를 높였다. 귀가 빨개진 동규를 따라 걷는 동안 하림은 계속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와 한 번씩 입을 가리고 소리 내 웃었다. 빠른 걸음으로 걷기만 하던 동규의 붉은 귀가 진정된 건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였다.

“서하림.”

“응.”

“나는…… 네가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동규의 속도는 여전했고, 하림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도 없이 오로지 둘만 걷는 까만 밤의 횡단보도는 마치 영화와도 같았다. 초록불은 1초마다 숫자가 줄어들었고 동규는 그만큼 멀어졌다. 하림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벌써 저만치 멀어진 동규에게 뛰어갔다.

“그럼, 사랑한다고 해.”

하림은 동규의 팔을 붙잡아 뒤돌게 했다. 긴 횡단보도의 중간 지점에 섰다. 쉬어 가란 듯이 횡단보도를 한 번 끊어 주는 곳에서 하림과 동규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절반이 남아 있던 초록불의 시간이 끝나 두 사람의 앞뒤로는 차가 쌩쌩 내달렸다.

“너무 좋으면, 너무 좋은 거니까 좋아하는 거 말고 그것보다는 더 큰…… 더 위의…….”

말을 하면 할수록 갑자기 너무 커다랗고 고차원적인 감정을 얘기해 동규는 당황한 듯 보였다. 하림은 잡았던 동규의 팔을 놓아주고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나, 나도 너 좋아해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말이 좋아한다는 말보다 더 크고 위에 있어?”

“글쎄. 아마도…… 사전적인 의미로는…… 그렇지 않을까. like랑 love의 차이 같은…….”

“나는 지금 너랑 꼭 껴안고 싶어. 사람들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나도.”

동규는 하림이 눈동자를 굴린 곳으로 성큼 자리를 옮겼다. 하림은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동규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좋아한다와 사랑하다의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하림이 느끼기에 두 단어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하는 거라면, 동규는 얼마든지 하림에게 속삭여 줄 수 있었다.

“사랑해.”

무척이나 간지러울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동규는 살랑이는 세 글자를 퍽 멋진 목소리로 말했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보다 조금 작은 그 소리는 떨리지도 가라앉지도 않았다. 머쓱해진 동규가 머리를 매만졌다. 심장은 기분 좋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도.”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하림은 동규의 팔목을 잡았다.

“나도 사랑해.”

어서 빨리, 서둘러 동규의 집에 도착해야 했다. 실컷 깍지를 끼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쉴 새 없이 얘기할 둘만의 세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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