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3 26화 (36/53)

26

서준은 동규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끌고 다녔다. 백화점을 갔다가 서점을 갔다가 팝업 스토어를 갔다가. 도착하는 곳마다 하림의 취향은 뭐고 뭘 좋아할 것 같은지도 물었다. 동규는 처음엔 성실히 대답해주 다가 점점 말이 짧아졌다. 서준은 동규가 추천해 준 것들에는 시큰둥하게 반응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들이밀며 이건 걔가 좋아할까? 하고 물었다.

자고로 선물은 받는 사람이 좋아할 것 같은 걸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규는 자기가 사고 싶은 걸 고르는 듯한 서준에게 더 이상 조언을 하지 않았다. 서준이 하림을 준다고 고른 건 자기 눈에 ‘존나’ 스웩이 넘친다는 셔츠였다. 등짝에 이상한 해골과 입술, 혀, 비키니 입은 여자 같은 것들이 괴랄하게 그려진. 원래 힙합에 빠지면 사람이 좀 어딘가 이상해지는 건가. 저런 좆같은 걸 17만 원씩 주고 사는 서준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림이 저걸 받고 어떻게 반응할지 감도 안 왔고.

“도와줘서 고맙. 존나 덥네. 뭐 좀 마시자. 음료수는 내가 산다. 뭐 먹을래.”

“바닐라 라떼. 휘핑크림 많이 올려서.”

“나는 딸기 스무디.”

에코백에서 지갑을 꺼낸 서준이 결제하는 동안 동규는 쇼케이스를 살펴봤다. 서준이 동규에게 뭐 먹고 싶으면 사 주겠다 그래서 맘 편히 이것저것 다 골랐다. 진동 벨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자 서준이 뭐라 뭐라 얘길 했지만 동규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하림에게서 온 메시지들을 확인하느라 바빴다.

[김동귱귱규유구구궁〉

[뭐해〉

[많이 바빠?〉

[나도 바빠〉

[야〉

[♥우리뀨♥ 뭐해〉

[ㅠㅠ 답장 할 시간도 없냐ㅠㅠ?〉

[뭐하는데ㅠㅠㅠ〉

〈미안]

〈뭐 좀 고르느라]

[뭐〉

〈카페 디저트]

〈사진 보내줄게]

동규가 조각 케이크 사진을 찍어 하림에게 보냈지만 하림은 바쁜지 확인하지 못했다. 동규는 하림이 언제쯤 사진을 보려나 1이 사라지길 기다렸지만 10분이 넘도록 그대로라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하림은 정부 지원을 받아 여름 방학에 국제 청소년 과학 포럼에 참가하게 되어 이번 달부터 토요일엔 S대로 특별 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수업 들으러 가면 수업이라고 얘길 꼭 해 주는데 아닌 걸 보니 갑자기 누구 아는 사람을 만났다거나 한 것 같다.

“그래서 형들이 재수하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말래. 존나 웃기지 않아? 벌써부터 삼수각이래.”

“설마 재수 하겠어.”

“김동규 지금 존나 얄미운 거 아냐.”

“왜.”

“너야 프리 패스권인 대통령상에 1등에 장원에, 참여하는 백일장마다 상 쓸어 와서 어딜 쓰든 합격일 거 아냐. 실음과는 수시 경쟁률이 야 씨발, 무슨 몇백 대 1이야.”

“보통은 몇인데?”

“몰라. 어쨌든 실음과가 존나 제일 세. 그래도 나는 보컬 전공 아니고 작곡이라 그나마 살만 하지만. 수시로 갈 수 있겠지? 정시 가면 나는 진짜 재수 확정이야.”

“왜?”

“왜긴 왜야. 정시는 실기가 100이니까 운 좋게 시험장에서 신 내린 애들이나 공부 더럽게 못해도 실력은 좋은 애들이 붙어 버리니까 그렇지.”

“아.”

“너야 뭐, 합격 프패까. 존나 조옿겠다. 씨발 나도 글이나 쓸 걸 그랬다.”

칭찬은 맞는 것 같은데 하림이나 다른 친구들이 얘기하는 것과는 느낌이 달라 동규는 찜찜했다. 동규가 상을 받은 걸 부럽다고 하면서도 너에 비하면 나는 상 받은 것도 없고 어쩌고저쩌고, 너 보니까 글 쓰는 거 쉬워 보이는데 어쩌고저쩌고. 동규는 대답 없이 케이크만 잘라 먹으며 다른 얘기로 돌릴 게 없나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서하림한테는 선물 어떻게 줄 건데.”

“아 맞다! 야, 휴대폰 줘 봐.”

“왜.”

“서프라이즈 해야지.”

“내 휴대폰이 왜 필요한데.”

“서프라이즈엔 거짓말이 필수니까.”

“그러니까 왜 내 거 쓰냐고.”

“나는 서하림이랑 싸운 당사자니까 네 도움이 필요함.”

“그러니까 왜.”

“문자 하나만 보내게.”

“뭐라고.”

“아 씨발, 그냥 닥치고 좀 줘 봐.”

동규는 포크를 내려놓고 서준을 빤히 쳐다봤다. 서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돌렸다.

“아니. 난 그냥, 그…… 네가 도와준다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서하림은 너랑 친하니까 네가 거짓말 좀 쳐도 괜찮을 것 같고 아니, 나쁘게 말해서 거짓말이지 좋게 말하면 깜짝…… 서프라이즈…… 아, 씨발 그냥 좀 달라고. 내가 휴대폰을 부순댔냐? 그냥 문자 하나만 보내자고. 너는 친구가 부탁하는데 그런 것도 못 해 줘? 아, 서하림은 존나 잘나고 친한 친구라 나 같은 새끼가 걔랑 화해한다는 게 싫다 이거냐 지금?”

“아니. 왜 그렇게 말해.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럼 내놓으라고 씨발놈아.”

서준이 테이블을 발로 밀치며 위협적으로 굴었다. 동규는 그릇들이 떨어지지 않게 테이블을 붙잡았다. 그러자 서준이 발로 몇 번 더 때려도 테이블은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씨이바…….”

“좀 진정해. 휴대폰 빌려줄 건데 무슨 내용으로 보낼 건지 나도 알려 줘.”

힘에서 밀려 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서준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여유로운 척 말했다.

“뭐, 별건 아니고. 그냥, 하림아 나 다쳐서 병원 왔어. 이 정도.”

“뜬금없는데.”

“보통 서프라이즈 몰래 카메라들이 다 비슷비슷해. 누가 다치고 아프고 쓰러지고 싸우고. 그래서 당하는 사람이 걱정돼서 달려오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면서 놀란 가슴 진정시켜 주고.”

“그래도 다쳤다는 거는 좀.”

“내가 걔랑 안 싸웠으면 너랑 내가 싸웠다는 게 제일 좋은데 그게 안 되니까.”

“아…….”

“빨리 내놔.”

“조금만 다쳤다고 써 줘. 발목 삐었다고, 괜찮다고.”

“씨발 그럼 그게 무슨 서프라이즈야. 적당히 잘 써서 보낼게.”

동규는 선뜻 서준에게 휴대폰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얼른 내놓으라니까 문자 창을 열긴 했는데 다쳤다는 거짓말을 하는 게 마음이 걸렸다.

“야, 진짜 다친 거 아니라 괜찮아. 뭘 그렇게 남자 새끼가 쫄아 있냐, 쫄아 있긴. 알고 보니 김동규는 안 다쳤고 정서준은 서하림과 사과를 하게 되고. 시나리오 존나 좋잖아.”

“알았어.”

다른 건 보지 않겠다는 서준이 신나서 동규의 휴대폰을 뺏어 갔다. 그리고 열심히 액정을 두드리며 문자를 썼다. 동규는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 포크로 케이크를 헤집기만 했다. 서준은 하림과 화해할 생각에 신이 난 것처럼 보였지만 동규는 서준과 정반대로 하림에게 미안한 일만 잔뜩 만든 것 같아 기분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전에 서준이 하림과 싸운 거 하림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을 때 바로바로 물어볼걸 그랬다. 서준과 혹시 무슨 일 있었냐고. 그때 그렇게 살짝 물어보기만 했어도 이런 상황까진 오진 않았을 텐데.

“보냈다. 근데 어느 정도 잠수 타야 효과가 좋으니까 전원 꺼 놓는다. 한 30분만 기다리자.”

“30분이나?”

“시간 금방 가. 새끼가, 쫄았냐?”

“그런 건 아닌데.”

“디저트나 더 먹어. 케이크 더 먹을 거?”

“아니.”

“나는 베이글이나 먹을까. 야, 케이크 중에 뭐가 제일 맛있어?”

“레드벨벳이랑 초콜릿무스.”

서준이 동규의 휴대폰을 가져가 버려서 동규는 멍하니 엉망진창이 된 당근케이크만 바라봤다. 어차피 하림은 수업 시간일 테고 30분만 지나고 서준이 휴대폰 돌려주면 문자 내용도 볼 수 있어 급한 것도 아니었다. 서준의 베이글이 나왔을 때 냄새가 너무 좋아 동규도 어니언 베이글을 시켰다.

서준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서준이 휴대폰을 돌려줬을 땐 시간이 한 시간이 넘어가 있었다. 동규는 서준이 도대체 뭐라고 보냈을지 궁금해 서둘러 전원을 켰다. 익숙한 잠금 화면이 액정에 떴다. 잠금 화면을 막 해제하려는데, 부재중 전화와 문자 알림이 쏟아졌다. 동규는 의아함에 잠금을 풀어 하림이 보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하림에게 온 메시지들이 하나같이 걱정하는 것뿐이라 동규는 위로 쭉 올려 서준이 보낸 내용을 확인했다.

[역삼 경찰서 강력계 형사입니다. 김동규 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수술 들어갔는데]

한 문장도 다 읽지 않고 동규는 고개를 들었다. 서준은 “서하림이 뭐래?” 하며 실실 쪼갰다. 곧바로 하림에게 전화가 왔다. 동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고 전화부터 받았다.

-김동규.

“하림아 그거 문자 다 거짓말이고 나 아무 일도 없어.”

-전화는 왜 꺼져 있었어.

“카페야 지금. 정서준. 정서준이랑 같이 있어. 걔가 꺼 놨어.”

-정서준?

“야! 김동규!”

“문자도 걔가 보낸 거고,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하림아 너 어디야? 만나서 얘기해 줄게. 수업 끝났어?”

“야이 씨발 새끼야! 나랑 있는 걸 말하면 어떡해!”

당황한 서준이 동규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동규가 바로 서준에게 팔을 뻗었지만 서준이 동규를 피하다가 휴대폰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아 씨발 진짜, 도와줄 거면 끝까지 도와주든가.”

액정이 깨진 것도 좆같은데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서준의 태도와 제일 좆같은 문자 내용에 동규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야, 무슨 일이야! 정서준이랑? 야! 김동규!

“10분만. 이따가 전화할게.”

누가 봐도 허접한 거짓말로 쓰인 문자라 똑똑한 하림은 믿지도 않았겠지만, 동규는 그런 쓰레기 같은 내용을 하림이 보게 한 게 제일 좆같고 서준이 자길 속인 것도 좆같았다. 전화 받았을 때 하림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는 것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적당히 쓴다고 그랬잖아.”

“좀 센 게 기억에 잘 남을 것 같아서.”

“…….”

“너는 눈치도 없게 나랑 있는 걸 왜 말해? 서하림을 여기로 불러서 거짓말이었다고 할 생각이었는데!”

서준이 이상해졌다던 지호가 왜 할 말이 많다 하면서도 하지 못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서준이 입이 닳도록 찬양하던 형들이 병신 모임이라는 건 어렴풋 짐작하고 있었어도 서준까지 그렇게 됐을 거라고 믿지 않은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아 씨발 네가 다 망쳤어. 서하림이랑 사이 돌이킬 수 없게 되면 네 탓이야.”

“정서준.”

“왜. 야, 걍 됐다. 나도 집에 간다. 서하림이랑은 끝난 것 같으니 선물은 그냥 내가 가져가서 입을 테니까 너도 그렇게 알아.”

사람들 시선이 모여 동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서준이 계속 동규에게 욕을 했지만 동규는 일부러 반응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아, 씨발. 이게 뭐냐 씨발, 씨발!”

“정서준.”

“왜!”

“나, 친구 때리기 싫어.”

“뭐……라고?”

카페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부터 왁왁거리며 성질내던 서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친구는 때리기 싫다고.”

“…….”

“왜 그렇게 보냈는지 설명해. 적당히 보낸다고 했잖아.”

힘쓰기는 싫지만 말 하다 보니 뭘 부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워밍업처럼 손을 털었다.

“때, 때리게?”

“설명하라고.”

“때려 봐! 때려! 때려라!”

뒷걸음질 치며 도망갈 타이밍을 엿보는 서준에게 동규가 조금의 틈도 내주지 않았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아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서준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려 달려가 버렸다.

허탈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걸 뒤로하고 동규는 서준이 하림에게 보낸 문자의 전문을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너무 현실성이 없고 허술한 내용이었지만 하림이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하니 손이 다 떨려왔다.

이런 건 믿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랬겠지만……. 반대로 누군가 하림의 번호와 이름을 빌어 자신에게 이런 질 낮은 장난을 친다면 동규는 맨발로 병원을 뛰쳐나갔을 게 뻔했고 하림도 그랬을 것 같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림아, 너 어디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

-너네 집 아파트 놀이터.

“알았어. 지금 바로 택시 잡아서 빨리 갈게.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나도 지금 정리가 잘 안 되는데.”

-천천히 얘기해. 진짜 사고당한 게 아닌 거 알고 있었으니까.

“아, 이게. 어디서부터 얘기하지.”

동규는 택시에 올라타 시간 순서가 엉망인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서준이 전에 하림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던 부분에선 하림에게 미안해 눈물도 나왔다. 하림이 울지 말라고 다독였지만 동규는 지호가 얘기해 준 걸 왜 제대로 듣질 못했는지 스스로가 바보 같고 멍청이 같아 하림에게 얘길 하면 할수록 목소리도 작아지고 눈물만 흘렸다.

집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뒤죽박죽이긴 했어도 하림에게 설명을 마쳤고 하림은 다 듣고서도 그랬냐는 말이 다였다. 수화기 너머로는 숨소리만 들려왔지만 동규는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아 택시비를 내고 하림이 기다릴 놀이터까지 가는 동안에도 휴대폰을 귀에 바짝 붙이며 걸었다. 하림도 동규도 생각이 많아져 아무 말이 없었지만 둘 다 끊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나서야 통화가 종료됐다.

“…….”

“…….”

하림은 동규가 사고를 당했다는 문자를 보자마자 수업을 박차고 나와 제일 먼저 역삼 경찰서에 전화해 문자가 거짓말이라는 걸 확인받았다. 노인들도 요즘은 보이스피싱 잘만 알아채는데 젊은 학생이 왜 이러냐며 한심하단 목소리로 보이스피싱 조심하라는 형사와의 전화를 끊고 문자를 다시 읽었다.

보이스피싱이라고 하기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문자는 처음 봤을 때부터 누군가의 장난이란 티가 났지만, 그래도 진짜로 사고를 당한 걸까 봐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 지역 대형 병원 응급실이나 수술실에 교통사고를 당한 고등학생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며 부탁했다. 할아버지에게 올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동규에게도 전화를 수차례 시도하고, 번번이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멘트를 들을 때마다 울고 싶어졌다.

할아버지가 네 친구 이름으로는 어디에도 응급실 환자가 들어온 게 없다고 확인을 해 줬어도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분명 거짓말이라고, 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동규가 그럴 애는 아니라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꾸몄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하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멘트가 더 이상 들리지 않도록, 동규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전화를 하는 게 전부였다.

아무리 걸어도 동규의 휴대폰은 전원이 켜지질 않았고 하림은 슬슬 위험한 생각에 사로잡혀 갔다. 뉴스에서나 볼 법한 무서운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가고 수없이 읽은 범죄 기사들이 떠올랐다.

겨우 연결된 동규의 입에서 정서준 이름 세 글자가 나오는 순간 불안하고 걱정되고 초조하던 모든 감정들이 분노로 바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서준 씨발 새끼가 뭘 어떻게 했길래 이딴 문자를 보낸 건지도 짜증 났고 이딴 걸 보게 한 일에 다른 누구도 아닌 동규가 끼어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어 화가 났다.

다시 동규의 전화가 걸려오기까지 8분. 하림은 그 8분 동안 화를 못 이기고 폭발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평온했다. 만나서 화를 내도 늦지 않는다는 생각 덕분이었다. 동규가 울면서 얘길 하지만 않았다면, 동규의 얼굴을 보는 순간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고.

“앉아.”

“내가 미쳤나 봐. 잘못했어. 죽을죄를 지었어.”

“일단 앉아.”

“미안해. 내가…… 아, 진짜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하지.”

“김동규.”

“나는 왜 맨날 이러지? 전에도 내가 실수하고 이번에도…….”

“동규야.”

하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책하는 동규의 손목을 잡았다. 동규의 자학은 끝날 줄을 몰랐다. 하림은 동규가 이러다가 미안하니까 헤어지자는 말이라도 하게 될까 봐 동규의 말을 끊어냈다.

“문자 그거, 초등학생이 봐도 안 속을 그런 문자야. 보자마자 네가 보낸 거 아닌 것도 알았어.”

“하지만, 아, 내가 괜히…… 그 때 너한테 얘기 안 해서…….”

“다친 거 아니면 됐어. 사고 난 거 아니고, 어디 아픈 거 아니니까 괜찮아. 솔직히 놀라지 않은 건 아닌데.”

“놀랐……다고.”

하림의 말에 동규가 겨우 진정된 눈물을 뚝뚝 흘렀다. 하림이 동규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다시 골랐다.

“나한테 다른 건 몰라도 병원에 실려 가서 수술 들어갔다는 거짓말을 하면 몇 분 만에 밝혀질 걸 정서준 그 미친놈은 간도 커, 그치? 우리 할아버지가 누군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동규는 여전히 눈물을 한 바가지 쏟는 중이었다.

“할아버지가 1분 만에 거짓말인 거 확인해 줬어.”

“나 때문에 네가 할아버지한테 직접 그런 부탁까지 하게 하고…….”

미안함에 동규가 몸을 동글게 말고 앉아 엉엉 울었다. 하림은 무릎에 고갤 묻은 동규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수없이 등을 토닥여 주며 별거 아니었단 얘기를 자꾸자꾸 했다. 할아버지가 갖고 있는 병원이 몇 개고 진짜로 네가 어디로 실려 갔다면 나는 네가 어느 병원을 갔든 바로 알 수 있을 거고, 네 잘못 아니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으며 다친 곳 없으니 다행이라고. 그래도 동규는 얼굴을 거리고 울 뿐,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김동규, 그만 울어. 응? 울지 마. 네 잘못 아니야. 걔 힙찔이 새끼들 때문에 이상한 것만 배워서.”

이렇게 된 거 서준과 싸웠을 때 나온 얘기를 동규에게 해 줘야 하나 싶었다. 하림은 어디까지 얘기해 주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그날의 기억을 빠르게 정리했다. 이대로 가다간 동규가 종일 울 것만 같다.

“정서준이랑 왜 싸웠는지 안 궁금해?”

“…….”

“나도 솔직하게 다 얘기해 줄게. 지호 얘기도 있어. 빨리 일어나서 앉아 봐. 그만 울고.”

이번 일의 시작점인 하림과 서준이 싸운 얘기에 동규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래서 코를 훌쩍이며 일어날지 아니면 좀 더 울지 고민했다. 하림이 귓가에 속삭인 빨리 얘기하고 너네 집 가자는 말에 동규는 벌떡 일어났다. 하도 쭈그리고 앉아 있었더니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지만 하림이 잡아 줘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벤치에 앉을 수 있었다.

하림의 손수건에 눈물콧물 닦아 가며 들은 얘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서준이 자길 그렇게 무시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고 다른 친구들에게 하림의 욕을 하고 다니는 줄도 몰랐다. 자신에게 했던 하림의 욕은 욕도 아니었다. 지호가 서준과 절교까지 했다는 얘기는 잘못 들은 줄 알고 하림에게 두 번이나 되물었을 정도였다.

“내가 뭐라고 하니까 꼴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뒤에서 우리 싸우게 하려고 수 쓴 것 같아. 걔가 나보고 그 때 그랬어. 김동규는 되는데 왜 자기는 안 되냐고. 근데 이해가 안 되는 게, 나랑 친해지고 싶은데 왜 나를 그렇게 욕하고 다니지?”

“몰라…….”

동규는 하림의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나올 눈물이 더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또 울컥했다. 하림 혼자 서준이 병신 같은 걸 감당하려고 했단 것도 미안하고 서준이 자길 무시하는 것도 하나 눈치채지 못해서 사건을 키운 것만 같아 부끄럽고 한심했다. 하림은 동규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어 오히려 자신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동규, 나 봐 봐. 이번 일로 알겠지. 우리 이제 우리 사이에 비밀 있으면 안 돼. 아니, 정확히는 나한테 얘기해 줘야 하는 걸 얘기해 줘야 하고, 나도 너한테 얘기해야 할 거 있으면 다 얘기할 거야. 나는 너한테 할 얘기 다 했어. 그런데 네가 왜 우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속상해.”

“마음 읽으면 되잖아.”

울면서도 깜찍한 말을 하는 동규 때문에 하림은 심각한 상황 속에서 웃음이 나왔다. 표정 관리를 하고 하림은 말을 이었다.

“우느라 장마라서 아무것도 안 보여. 먹구름이 가득, 아 저 멀리 바다에는 해일이 보이고요, 파도가 어휴, 비가 너무 내리는데요. 정말 기록적인 폭우입니다.”

“……뭐야.”

“지금 김동규 마음속. 네, 지금 돼지 한 마리가 둥둥 떠내려 오고 있습니다! 오리들은 신나게 수영을 하고 있네요. 아, 속보입니다! 우리학교 1층이 물에 잠겼다는 소식입니다! 과연 휴교를 할 수 있을까요?”

기상 캐스터를 따라 하는 하림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간 동규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내렸다.

“아, 또 속보가 들어왔네요. 김동규 마음속에 해가 떴습니다. 잠시 뒤면 햇살을 닮은 김동규의 미소로 젖었던 땅이 마르고 화창한 날씨가 예상되는 만큼 휴교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네요. 슬픈 소식입니다.”

동규는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랬다가도 이렇게 하림은 저를 위해 노력해 주는 게 고마워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또 울었다가는 하림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거라 꾹 참았다.

숨을 몇 번 크게 들이쉰 동규가 모든 게 다 미안하고 미안한 걸 얘기했다. 하림의 말대로 해야 할 얘기를 하지 않아 생긴 일이니 지금 속상하고 미안하고 고맙고 복잡한 감정과 심경까지 전부 말했다. 말하고 나니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하림과 비교가 되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그것도 모두 얘기했다.

“좋아. 잘했어. 그럼 이제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자.”

“지금?”

“울어서 지금 기운 다 빠졌잖아. 가자, 내가 치킨 열 마리 시켜 줄게. 나머지는 먹으면서 얘기해. 아줌마 집에 계셔?”

“아니. 아빠 만나러 갔어.”

“가자, 그럼. 재밌는 얘기도 해 줄게. 내 친구 이건우 알지.”

치킨에 피자에 떡볶이까지 시켜 준 하림은 동규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친구 얘기를 해 줬다.

공부 잘하는 건우도 부모님이 의대 가라고 난리인데 건우는 곧 죽어도 피 보기 싫어 의대는 못 가겠다며 최근 친구들에게 조언을 얻고 있고, 하림도 얼마 전 바쁜 시간 쪼개 건우의 고민을 들어줬단 내용이었다. 건우의 친구들이 건우보고 바리스타 자격증 따서 부모님 카페 물려받으라고 한 거나 치킨대학 가라고 했다는 얘기는 좀 웃겼다.

이제야 웃는 동규에게 오늘 일로 미안할 거 하나도 없고 그런 기분 드는 건 당연하다며 동규가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열심히 동규를 달랬다.

내가 너무 소심해서 너만 고생인 것 같다는 동규의 얘기에 하림은 나는 너의 소심한 모습들도 다 좋아하고 고생이래도 속상한 너를 달래 줄 수 있는 거라면 평생 할 수 있는 거라고 답했다. 너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단 말에는 그런 내가 널 좋아하고 있으니 네가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 주자 드디어 동규의 기분이 좋아지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너랑 같이 있으면…… 뭐든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아.”

“같은 게 아니라 맞지.”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쿡쿡 찌르던 동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양치하고 올래.”

“벌써 다 먹었어?”

“아니. 뽀뽀하려고.”

꼼꼼히 양치를 하고 돌아온 동규가 하림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강하게 혀를 빨아 대다가 숨이 차면 속도를 낮춰 입술만 가볍게 물어 대길 반복했다. 분위기가 좀 더 끈적해지기 전에 입술을 뗐다. 오래 입을 맞춰 말랑거리는 두 입술은 떨어지고 나서도 같은 숨을 공유했다.

하림은 태어나 처음으로 뜬눈으로 밤을 샜다. 생일이라고 친구들에게 선물도 받고 저녁엔 동규와 근사한 식사도 하고 한참 부둥켜 안고 행복하게 생일을 마무리한 건 맞으나 월요일에 학교 가면 서준을 볼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서준에게서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대 쓰고 누워서 어떻게 서준을 어떻게 조져 놓을지 계획을 짜다가 한 번씩 속에서 천불이 터져 벌떡벌떡 일어났다.

2시쯤, 동규에게 자고 있냐고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겨우 참았다. 목소리라도 한 번 듣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아도 이 시간에 자지 않고 깨어 있다고 하면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역시 아직 화가 풀린 게 아니지 않냐 하며 땅굴을 파고 들어갈 애라는 걸 잘 알았다. 하림은 동규가 보여 줬던 3월부터 나눈 서준과의 메시지를 밤새 되새김질했다. 그 순진하고 착한 애를 뒤에서 그딴 식으로 꼬셔 댔다 이거지.

아침이면 아주머니가 깨워 줘야 일어나던 하림이 깨우지도 않았는데 방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자 집안 식구들 모두가 난리였다. 엄마와 아빠가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하림은 그걸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심각한 얼굴로 아침을 먹는 하림에게 엄마도 말을 제대로 붙이질 못했다.

평소보다 20분은 이른 등교에 하림은 학교 가는 길이 낯설었다. 당연한 거지만 매일 하림과 비슷한 시간에 등교하던 학생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서하리이이이임!”

아파트 정문을 막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가방에 퍽 하고 무언가의 무게가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벌써 나와? 안경은 왜 썼어? 김동규랑 또 싸웠어? 이번에도 걔 잘못이야? 어제 네 생일이었는데? 걔랑 데이트도 잘 했다며?”

하림이 하나씩 물으라며 하품을 했다.

“걔 때문 아니야.”

“그럼 너 때문이야?”

“나도 아니야.”

“그럼 뭔데?”

“정서준 때문에.”

“정서준? 김동규 친구? 뚱뚱한 애?”

“이따 얘기해 줄게. 말하자면 길어.”

피곤으로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하림은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어차피 볼 거라면 빨리 보고 얘기하는 게 좋다. 계단도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 하늘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하림은 이미 머릿속이 전쟁 통이었기 때문에 하늘의 말이 들릴 리 만무했다.

교실에 도착했을 땐 다행히 동규는 없었고 서준은 있었다. 하림은 제 책상 위로 가방을 집어 던진 뒤 의자를 끌어 서준의 책상에 붙였다.

“야. 정서준.”

“왜.”

서준은 휴대폰 액정을 열심히 두드릴 뿐 하림을 바라보지 않았다.

“기타나 띵가띵가 치던 새끼가 언제 경찰 시험 봐서 강력계 형사님이 됐냐?”

“씨발…….”

“전에 내가 분명히 경고했었지. 김동규한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너도 네가 스스로 병신인 거 알아서 미안하다며. 피해 다니겠다고 그랬잖아. 했어, 안 했어.”

입술만 깨무는 서준의 책상을 하림이 똑똑 두드렸다.

“다 봤어. 나 모르게 김동규 데리고 별별 말을 다 했던데. 뭐라더라. 내가 살만 빼면 김동규 너보다 더 낫다? 김동규 넌 머리가 나쁘니까 몸이라도 좋아야 한다? 서하림이 널 데리고 다니는 걸 너는 감사하게 여겨라?”

“그건.”

“응. 그건.”

“하, 씨…….”

“머리 굴리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 열심히 머리 굴려 봐야 찌질한 대답 나올 것 같은데.”

“찌질?”

“응. 찌질. 순화한 건데 필터 없이 말해 줘?”

“야! 이 씨발 새끼가!”

서준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하림의 멱살을 잡았다. 교실에 있던 학생들과 막 교실로 들어오는 학생들, 복도에 있던 다른 반 학생들까지 하림과 서준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친구들의 휴대폰이 하림과 서준을 찍어 댔다.

“미안한데 어쩌지. 하나도 안 무서워.”

“씹……”

하림의 말에 서준이 하림을 때릴 것처럼 주먹을 들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서준의 주먹에 순식간에 커졌다.

“도대체 걔를 후려쳐서 네가 얻는 게 뭐야. 걔보단 네가 낫다고 어필하고 싶은가 본데, 백날 그 래봐. 내가 김, 걔 대신 너랑 노나.”

“씨발아!”

날리지 못하고 들고만 있던 주먹에 서준이 힘을 실어 하림의 얼굴을 가격했다. 보고만 있던 친구들이 끼어들어 서준에게 들러붙었다. 서준은 때려 놓고도 주먹이 아프다며 엄살을 떨어 댔다.

하림은 이빨 나간 게 없는지, 입 안은 터지지 않았는지 확인하자마자 반쯤 벗겨진 안경을 아예 벗어 던지고 서준에게 달려들었다. 친구들이 말릴 새도 없이 하림이 서준의 얼굴로 주먹을 꽂아 넣었고 서준이 그 반동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친구들이 이번에는 하림에게 붙었지만 하림이 친구들을 다 떼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서준에게 다가갔다. 친구들은 처음 보는 하림의 화난 모습에 다시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서준은 다가오는 하림을 피해 누운 채 뒤로 기어 가면서도 욕을 하며 발길질을 했다.

정강이를 걷어차이는 게 꽤 아파, 하림은 인상을 쓰고 아예 서준의 위에 올라앉았다. 서준이 기겁을 하고 두 손을 어설프게 날렸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주먹질만 하느라 피할 것도 없었다. 하림은 날아오는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서준의 뺨을 때렸다. 힘을 잔뜩 실어 때린 거라 서준이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주먹도 아닌데 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준은 하림의 눈을 한 번 마주쳤다가 두 눈을 꾹 감았다. 아주 찰나에 마주친 하림의 시선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늘 서글서글 웃기만 하던 얼굴이 웃음기 하나 지웠다고 무섭게 느껴질 일인가. 하림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서준이었다. 때리는 척만 하면 적당히 몸을 사릴 줄 알았지 이렇게 다짜고짜 달려들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에게 예쁨받는 모범생이, 그것도 학교에서.

“정서.”

“아악!”

서준은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주먹을 날렸다. 친구들이 다 보고 있는 상황에 하림이 또 때릴 것 같은데 겁쟁이처럼 머리를 감싸기는 죽기보다 싫어 마지막으로 뭐라도 해 본 거였다. 하림은 예상치도 못하게 들어온 서준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뻑, 하는 소리가 강하게 나면서 학생들이 소리를 질렀다.

“씨발, 아프잖아.”

그 비명을 시작으로 하림이 서준의 앞머리를 휘어잡고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 서준은 아픈 주먹을 다른 손으로 감싼 채 하림이 때리는 걸 피하지도 못하고 맞았다.

“야 씨발, 서하림! 너 미쳤어?”

뒤늦게 소식 듣고 온 하늘이 하림을 잡아끌었지만 하림이 다리를 뻗어 어떻게든 때리겠다고 서준을 발로 찼다. 서준은 하림의 다리가 닿지 못하게 몸을 웅크렸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선생님이 학생들의 인파를 뚫고 들어왔다. 코피가 터진 하림과, 누가 봐도 하림에게 얻어 터진 서준이 교실 바닥에서 울고 있었다.

“다들 교실로 돌아가!”

선생님의 말을 따르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하림은 흐트러진 교복을 정리하고 휴지로 코피를 닦았다. 친구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안경을 주워 하림에게 건넸다. 서준도 비틀비틀 일어났다. 교무실로 따라오라는 선생님의 말에 하림이 선생님 뒤에 붙었다. 선생님이 지나가는 길이 바다가 갈라지는 듯했다.

학교에서 난리가 난 걸 모르는 동규는 아침부터 삼겹살을 먹느라 집에서 늦게 나왔다. 기름이 바닥에 묻지 않도록 주변에 신문지 잔뜩 깔아 놨더니 그거 정리하는 데에 시간을 은근 잡아먹히고 조금만 구워야지 했는데 너무 많이 구워 밥 먹는 시간 자체가 길어졌다.

심지어 버스도 코앞에서 놓쳤다. 배차 시간을 확인하자 너무 빼도 박도 못하는 지각이라 동규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지각인데 안달 내 봤자 손해였다.

동규가 하늘의 전화를 받은 건 학교까지 세 정거장을 남겨 놓았을 때였다. 지호와 다른 친구들에게서도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야!

하늘이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지, 동규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하늘의 목소리를 듣고 동규를 쳐다봤다. 동규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꾸벅꾸벅 하며 소리를 제일 작게 줄였다.

-너 오늘 학교 와, 안 와!

“다다다음역이 학교야.”

-야! 서하림 정서준이랑 싸워서 지금 교무실 갔어! 존나 코피 터지고 주먹질하고! 서하림 존나 깡팬 줄?

“뭐라고?”

-존나 놀랬잖아. 너 어제 서하림이랑 싸웠어? 쟤가 왜 정서준이랑 싸워? 너 뭐 아는 거 있어?

“아 그게…….”

동규는 토요일에 있던 일을 하늘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고해 바쳤다. 입에 모터를 단 듯했다.

-미쳤네. 좆같은 새끼가. 야, 일단 알았고 빨리 오기나 해. 와서 말하자. 난 지금 선생님 왔어. 끊는다.

세문고 전 역에서 열렸던 문이 닫히는 순간 동규는 하차 벨을 연타했다. 어제 하림과 헤어질 땐 평소랑 똑같았고 서준의 얘기를 더 하지도 않길래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줄로만 알았다. 해 봤자 서준에게 뭐라고 하면서 말로 싸울 줄 알았지 코피가 터질 정도의 주먹 다툼은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동규는 길이 막히고 빨간 불에 버스가 멈출 때마다 속이 탔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에서는 땀이 났다. 불안함에 다리도 떨고 입술도 자꾸 깨물었다.

아침에 삼겹살 괜히 먹었다. 그냥 대충 차려 먹고 올 걸 아침부터 무슨 호사를 누리겠다고 고기를 구웠지. 김동규 이 돼지 새끼, 아까 그 버스를 뛰어서 탔으면 지각 안 하고 벌써 학교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창문 밖으로 학교가 보이자 동규는 자리를 옮겨 문 앞에 섰다. 문 앞으로 오기까지 ‘내려요, 죄송합니다’라는 두 문장을 얼마나 말했는지 모른다.

“김동규, 지각. 아침 일찍 오던…….”

교문 앞에 서 있던 선생님을 쌩하니 지나친 동규는 학교 건물까지 쉬지도 않고 뛰었다. 부른 배를 안고 뛴 거라 윗배가 상당히 아파 왔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교실 문을 열었을 땐 조례 시간인데도 담임 선생님 없이 반 친구들뿐이었다. 동규의 등장에 반 친구들이 동규에게 몰려들었다. 두 사람이 싸우기 전에 동규의 이름이 나왔다는 게 서준의 주변에 앉아 있던 친구들에 의해서 퍼진 상태였다.

“야, 서하림이랑 정서준이랑 왜 싸운 거야?”

“정서준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학폭위 열릴지도 모른대.”

“서하림 이러다 좆 되는 거 아니야?”

“너도 정서준이랑 싸웠어?”

교실 문 앞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친구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반장조차 친구들을 말리지 못하고 그 무리에 합류했다. 동규는 친구들이 물어보지 않아도 머리가 지끈지끈한데 시끄럽기까지 하니 두통이 오는 것만 같았다.

“몰라 나도. 들어가게 좀 비켜 줘.”

인상을 찌푸린 동규에게 친구들이 서둘러 길을 터줬다. 뒤늦게 반장이 자리에 앉자며 친구들을 설득했다. 자리에 앉아서도 모든 반 친구들의 시선은 동규에게 향해 있었다.

“나도 모른다고.”

그때였다. 담임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동규를 불렀다. 동규는 벌떡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선생님은 동규에게 서준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고, 동규는 선생님에게 여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서준과 나눴던 메시지들을 보여 드렸다. 친구들이 복도로 난 창에 붙었다.

“아까 하림이랑 서준이가 싸웠는데.”

“네, 알아요. 서하늘이 전화해 줘서요.”

“그래. 하림이랑 서준이 얘기 중에 네 얘기가 나와서 선도부 가기 전에 선생님이 상황 파악 좀 하려고 먼저 따로 부른 거야. 가서도 똑같이 잘 얘기할 수 있지?”

“네.”

“엄마 학교로 오실 수도 있어.”

“네. 괜찮아요.”

엄마뿐이겠나. 하림의 결백을 주장할 수만 있다면 인천에 있는 아빠에 수원과 대전에 계신 친가외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소환할 수 있었다.

동규는 떨려 오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일이 왜 이렇게 꼬여 버렸지. 친구들 말대로 정말 학폭위가 열린다면 하림의 평판은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게 분명했고 생기부에 적혀 하림이 대학 갈 때 아주 치명타가 될 거였다. 처음부터 서준이 자길 무시하는 걸 단번에 알아차려서 괜히 새벽마다 메시지를 주고받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될 일이 아니었는데…….

하림의 인생에 생길지도 모르는 오점을 자신이 만든 것만 같아 동규는 눈가가 시큰해졌다. 교무실로 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하림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고 서준이 잘못한 거지만 만약 하림이 서준을 많이 때렸다면, 그래서 서준과 서준의 부모님이 용서도 안 해 주고 합의도 안 해 준다면…… 하림의 할아버지에게 이 소식이 들어가서 하림이 호적에서 파이게 되고 부모님도 하림을 비난하게 되고, 그러면 하림이 헤어지자고 할 게 분명했다. 너는 왜 눈치 없게 굴어서 매번 내가 고생해야 하나고, 너 때문에 내 인생 망했다고.

“뭐 해. 안 들어가고.”

선도부실은 구관 교무실 안쪽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 교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동규가 따라오지 않고 문 앞에 서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게 아닌가.

“선생님…….”

“동규 네 잘못 아니야. 따지자면 서준이랑 하림이한테 있지.”

“안 되는데요…….”

“친한 하림이가 일에 휘말려서 놀란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폭력이고 때린 건 때린 거야. 빨리 들어가자.”

이대로 하림의 얼굴을 보면 울 것 같다. 선생님이 동규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동규는 한숨을 푹 쉬면서 교무실로 들어왔다. 선생님이 선도부실 문을 열었을 땐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동규는 이쪽에 앉자.”

교감 선생님의 목소리가 저승사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동규는 바닥만 보며 걸었다. 동규의 자리는 하림의 옆이었다.

“놀랬지, 미안.”

동규는 하림의 멍든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하림은 예상하고 있던 거라 당황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있는 휴지를 뽑아 동규에게 건넸지만 선생님들은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은 동규의 휴대폰을 가져갔고 선생님들이 동규와 서준이 나눴던 메시지들을 읽기 시작했다. 하림과 서준의 싸움은 서준이 동규에게 보냈던 메시지들을 통해 서준이 동규를 괴롭혔다는 문제로까지 확대됐다. 하림은 선생님들 사이에 흐르는 혼돈의 기류를 알아채고 동규가 더 울 수 있도록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림이 선생님들에게 일관적으로 주장했던 건 세 가지였다. 서준이 작년부터 이상한 형들과 어울리면서 행실이 불량해졌고 자기 친구 중 착하고 만만한 동규를 괴롭혔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와 동규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안경을 쓰고 있던 자신에게 서준이 먼저 주먹을 날렸고 잘못했다간 안경알이 깨질 수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림의 주장에서 선생님들이 주목했던 점은 서준이 하림을 때렸고 하림도 서준을 때렸다는 점이었다. 학교에 귀하고 좋은 집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중에서도 하림은 선생님들도 여러모로 신경 쓰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하림이 서준과 싸우게 된 원인보다는 결과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규가 서준과 나눴던 메시지를 아예 공개해 버린 데다가 선도부실 들어오자마자 동규가 눈물을 흘려대 판도가 완전히 뒤집혔다.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서준이 얼마나 동규를 괴롭혔으면 조용한 동규가 울고 모범생인 하림이 싸움까지 하게 됐는지가 새로운 의견으로 대두됐다.

서준은 계속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긴 동규랑 친해서 말이 조금 과했던 거고 오히려 하림이 자길 무시했다며 고집을 부렸다. 서준이 사과를 하고 하림도 사과를 하면 선도부장 선생님 선에서 끝날 수 있었을 걸 서준이 계속 뻗대느라 점점 일이 커져 갔다.

결국 구청장과 약속이 있던 교장 선생님이 학교로 돌아왔고 부모님들에게 연락이 갔다. 선생님이 동규의 엄마와 전화를 끝내고 난 뒤, 동규가 엄마에게 아빠는 못 오냐고 울먹거렸다. 아빠도 지금은 유도부 학생들과 운동하는 중일 테지만 아빠가 같이 있어 주면 세상 든든할 것 같았다.

엄마처럼 회사원도 아니고 고등학교 선생님과 다를 바 없는 운동부 감독님인 아빠가 서울도 아니고 인천에서 지금 바로 오기는 힘들겠지. 동규도 그 사실을 잘 알았지만 엄마가 아빠는 오시기 좀 힘들다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걸 듣고도 모른 척 고집을 부렸다.

“지금 당장 오라고 해, 얼른…….”

-말하면 올 수는 있는데 아빠도 학교에 얘기해야 하고 인천이라 빨라도 두 시간은 걸릴 거야. 못 올 수도 있고. 그래도 아빠 오라고 해?

“응…… 빨리 오라고 그래. 차 타고 오라고.”

-알겠어. 엄마도 조금 시간 걸려.

“빨리 와…….”

하림은 선생님으로부터 휴대폰을 돌려받고 엄마에게 딱 한마디만 했다.

“엄마, 나는 엄마한테 부끄러운 짓 한 거 없어.”

서준의 엄마와 전화하는 선도부 선생님의 말이 길어진다. 하림은 서준 쪽을 살펴보다 휴지를 더 뽑았다. 휴지는 전화를 끊고도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훌쩍거리고 있는 동규에게 전달됐다.

“엄마가 와, 아니면 이모님이 와? 응. 이모님 오셔도 상관없긴 한데, 그래도 엄마가 왔으면 좋겠어서.”

선생님과의 통화에서는 갈지 말지 정하지 못하던 엄마가 하림의 말에 직접 학교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선생님, 저 엄마가 오신대요. 다행히 오늘 수술 잡힌 거 없어서.”

“그럼 다시 선생님 좀.”

하림은 선생님에게 휴대폰을 넘겼다. 선빵도 안 쳤고, 운 좋게 안경도 쓰고 있었고, 정서준이 멍청하게 동규에게 욕한 거나 막말한 것들을 메시지로 보내 놔 증거도 명확했다.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보여 주라며 찍어 둔 동영상도 보내 줬다.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일이 잘못되면 할아버지한테 빌 생각도 있다. 하림에게 서준과 싸운 일 자체는 별게 아니었으나, 동규가 얼마나 또 이번 일로 제 일처럼 속상해 할 것인지와 엄마가 동규 일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고 캐물을 게 조금 신경 쓰였다.

“네가 맞은 것도 때린 것도 아닌데 그만 울어. 선생님들이 네가 울어서 더 안절부절못하시잖아.”

“으응. 하지만, 하지만…….”

하림의 얼굴에 멍이 들고 코피가 난 게 속상해 동규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선생님은 동규가 진정이 됐을 때 동규에게 따로 서준이 어떻게 괴롭혔는지 물어볼 생각이었으나 동규가 울음을 그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였다. 선생님이 동규의 앞에서 서성이는 걸 본 하림이 이제는 슬슬 그만 울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본격적으로 동규를 달랬다.

“눈 다 부어서 교실 돌아가면 친구들이 엄청 놀리겠다. 서하늘이 이제 너보고 학교 공식 울보라고 그럴걸.”

“갑자기 걔 얘기가 왜 나와…….”

“빨리 뚝 하고 선생님이랑 얘기 하고 오자. 그게 나 도와주는 거야. 정서준 저 씹, 이랑 얘기하면서 얼마나 상처받았고 속상했고 무서웠는지 다 얘기해.”

“알겠어.”

“선생님, 김동규 다 울었대요.”

동규가 교무실로 나가 담임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엄마들이 학교에 도착했다. 동규는 직접적으로 싸움에 연관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서준이 괴롭힌 일로 엄마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선도부실에서는 꽤 큰 소리가 오갔다. 안 그래도 서준의 엄마는 서준이 실용 음악 학원 다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하림이 서준의 엄마가 도착한 뒤 서준이 형들이랑 술 담배 하고 다닌다고 입을 열어 난리가 났다. 아니라고 발뺌하기엔 서준의 SNS는 가관이었고 결정적으로 가방에서 담배가 나왔다.

멍청한 새끼. 하림은 서준에게 때려서 미안하다고 진심을 담은 척 사과했다. 그리고 때린 건 때린 거라 교내 봉사 열 시간을 받았다. 말이 열 시간이지 2주간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들 심부름을 하거나 틈틈이 복도와 계단 청소하는 게 다였다. 벌점은 1점도 받지 않았고 생기부에 남지도 않는 가벼운 처분이었다.

하림은 이왕이면 서준이 동규를 괴롭혔던 게 더 크게 조명됐으면 하고 바랐으나 그것도 하림이 기대한 것보다는 약한 처분을 받았다. 동규를 무시하는 말을 했던 기간이 짧고 신체적인 위협을 가한 적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술 담배 역시, 학교에서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고 있는 현장을 잡은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는 하림이 말한 서준의 SNS 사진만으로는 강한 징계를 주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서준의 처벌은 벌점이 전부였다.

몇 시간 동안 선생님들과 어른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결론이 저딴 거라 하림은 상황이 돌아가는 꼴에 빈정이란 빈정이 다 상해 기분이 더러웠다. 하림의 바람과는 달리 이제 슬슬 이번 사건들이 마무리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어른들은 서로 죄송하다며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서준 고소할래요.”

그 순간 난데없는 하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하림에게 모였다.

“민사는 법정 대리인 필요하지만 형사는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서하림!”

“안경 쓰고 있는 사람 얼굴을 때렸고 친구에게 언어 폭력 사용했고 정신적 괴롭힘도 줬고 담배랑 술도 사진이라는 증거 다 나왔는데 교장 선생님도 어떻게 못 하신다면서요. 징계도 못 받고 벌점 30점 주고 끝이라는데 이게 무슨 학교예요. 가해자 양성소지.”

하림의 엄마가 하림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물었다. 담임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은 하림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엄마가 변호사 선임 안 해 줄 거면 됐어. 내 돈으로 선임하거나 국선 변호사 쓸 거야.”

“엄마한테,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설명 다 했잖아. 학교에서 겨우 벌점 30점으로 끝이라니까 나 혼자 제대로 해결하겠다고.”

선생님들이 하림의 앞에 앞다투어 섰지만 하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럼 학교에서는 이번 일 다 끝난 거죠? 감사합니다. 수업 들으러 갈게요. 정서준 아줌마, 김동규 아줌마 안녕히 가세요.”

서준의 엄마가 하림을 붙잡으려 들었지만 하림은 죄송하단 말을 끝으로 선도부실을 빠져나갔다. 서준의 엄마가 그런 하림을 따라 나섰다. 동규는 하림의 입에서 나온 고소라는 단어에 심장이 너덜거렸다. 진짜로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뒤늦게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 학년부장 선생님까지 뒤따라 나갔다.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선도부실에는 이제 동규와 엄마, 서준뿐이었다. 서준은 인상을 찌푸린 채 테이블을 발로 쳤다가 아픔에 주저앉아 끙끙거렸다.

그러고 있으려니 담임 선생님이 돌아와 동규를 불렀다. 복도로 나가자 교장 선생님이 제 선에서 해결하겠다며 일단 서준과 하림의 엄마, 동규의 엄마를 되돌려 보냈다. 하림의 엄마는 하림을 향해 이따 학교 끝나면 병원으로 오라고 으름장을 놓고 사라졌다.

동규는 다시 붙잡혀 온 하림의 옆에 서서 하림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다. 곧 점심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점심 먹고 얘기하자며 두 사람을 올려 보냈다.

하림과 교실로 돌아가는 길은 적막했고 무서웠고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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