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25화 (35/53)

25

가족사진처럼 크게 뽑아 집 안에 걸어 둘 것도 아니고 취업에 쓰기 위해 증명사진을 찍는 것도 아닌데 왜 다들 요란스럽게 얼굴을 정리하고 있는 건지, 동규는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규는 입을 꾹 다물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하림이 제 얼굴 곳곳을 두드리며 정성스럽게 꽃단장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규는 아까 하림이 준 장미꽃 한 송이도 소중하게 쥐고 있는 중이다. 생화는 아니었지만 하림이 준 거라 책상에 대충 올려놓거나 바닥에 떨어트리기 싫었다.

그리고 이마, 눈썹, 볼, 코, 턱까지 하림의 눈동자가 제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는 게 보기 좋았다. 동규는 하림의 열중한 얼굴에 문득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장미꽃으로 하림의 팔을 툭툭 쳤다.

“아…… 왜…….”

“서하림.”

“말하지 마.”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그래도 동규는 다시 한 번 하림의 팔을 꽃으로 두드렸다. 하림은 팔에 느껴지는 동규의 신호를 무시하고 동규의 얼굴을 이곳저곳 살피고 또 살폈다. 이쯤 되자 동규도 오기가 생겨 계속 손을 까딱거리며 하림이 반응할 때까지 장미꽃으로 하림을 불렀다.

“왜 이러는지는 알겠는데.”

드디어 하림이 동규와 눈을 마주쳤다. 자기도 모르게 동규는 혀로 입술을 쓸었고, 하림의 눈동자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동규의 입술로 내려갔던 하림의 눈이 다시 돌아왔다.

“참아 봐.”

하림은 동규의 턱을 잡고 동규의 얼굴을 좌우로 움직였다. 동규는 대놓고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림이 동규의 볼을 잡아 쭈욱 늘렸다.

“못난이.”

동규는 억울한 마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놔.”

“싫은데용.”

“서하리.”

“나 서하리 아니고 서하림인데.”

잡힌 볼 때문에 발음이 새는 동규를 하림이 고대로 따라 하며 놀렸다.

“치.”

“치.”

“아 지짜 그마애.”

“아 지짜 그만할게.”

하림이 손을 놓자 볼에 손자국이 남아 살짝 붉었다. 동규는 거울을 확인하며 하림을 째려보았다.

“다시 잘생겨졌네.”

뭐라고 더 하려다가 그 말에 말문이 막혀 동규는 다시 거울로 도망쳤다. 화도 못 내게 해.

뾰로통한 표정의 동규를 보며 함박웃음을 띤 하림도 제 거울을 확인하며 앞머리를 다시 정리했다.

“꽃 빨리 할 거면 해요.”

사진사가 꽃을 꼽지 못하고 있는 동규에게 짜증을 냈다.

“할게요.”

사진사 뒤로 서 있는 줄에 하림이 빨리 하라며 귀를 가리켰다. 꽃을 줄 때만 해도 들고 있으라고 준 줄 알았는데 귀에 꽂는 거라고 했을 때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규는 눈물을 머금고 귀로 장미꽃을 가져갔다. 귀에 잘 꽂더라도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꽃을 귀에 가까이 대고 말았다.

“그게 다예요?”

꽃을 꽂은 것도 그렇다고 제대로 들고 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포즈에 사진사가 물었다. 동규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셋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

“안 웃었어요. 다시. 하하, 자연스러운 웃음.”

“하하…….”

“하나, 둘, 세에엣. 됐습니다.”

제대로 안 했다고 혼나면 어쩌지. 동규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계단을 내려왔다. 하림을 피해 서둘러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팔이 붙잡혔다.

“미안.”

“뭐가.”

“귀에…… 안 해서.”

“잘 했는데? 나 꽃 주고 가야지.”

예상치 못한 칭찬에 우뚝 선 동규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하림이 꽃을 가져갔다. 그리고 동규의 손목을 잡아 건물 문을 열었다.

“너 사진은.”

“이제 6번이고 나는 19번이라 아직 시간 좀 있어. 얘들아! 나 화장실 갔다 온다!”

“빨리 다녀와!”

1층 남자 화장실로 동규를 끌고 간 하림은 화장실 칸 문을 모두 열어 사용하는 사람이 있나 확인한 뒤 동규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바로 떨어지려는데 동규가 허리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야, 누구 들어올 수도 있어.”

“한 번만 더.”

“그래.”

하림은 동규의 볼을 잡고 세 번 뽀뽀를 해 주었다. 그래도 동규가 팔을 풀지 않아 하림이 직접 풀어야 했다. 하림이 세면대로 돌아가 손을 씻었다. 동규도 손을 씻었지만 고개는 하림에게 돌아가 있었다.

“점심 먹고 별관 화장실 가자.”

음악실과 미술실을 비롯한 특수 교실들이 모여 있는 별관은 학교 제일 안쪽에 있는 건물이었다. 하림이 말한 별관 화장실은 1층 장애인 화장실을 말한 거였다. 3학년이 쓰는 신관이나 후배들이 쓰는 구관은 아무리 점심시간이래도 학생들이 돌아다니는 데 비해 별관은 해당 수업 시간이 아니면 개미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으응.”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동규의 대답에 하림이 손을 말리고 손바닥에 제 입술을 찍었다. 그리고 동규의 입에 손바닥을 누르며 ‘이제 진짜 뽀뽀 끝.’ 했다. 세면대에 올려놓은 장미꽃을 들고 사진 찍으러 간다며 사라진 하림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동규는 머리만 긁적이다 교실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하림이 사진 찍는 게 보고 싶어 다시 건물을 나가려는데 마침 사진을 찍고 교실을 가던 9번 친구와 마주쳤다.

“어디 가?”

“그냥.”

“선생님이 사진 찍고 바로 교실 올라오라고 그랬잖아.”

“그……랬지.”

갑자기 세상이 회색빛이 됐다. 서하림은 왜 김 씨가 아니라 서 씨여서 바로 교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건지. 그래도 다행이라면 점심 먹고 찍을 단체 사진에선 키 순서로 자리를 정하니까 하림의 옆에 설 수 있단 거였다. 잘생겼는데 키도 커, 거기도 크고 공부도 잘 해, 성격도 천사야. 도대체 서하림은 부족한 게 뭐지. 동규는 새삼스럽게 차오르는 하림에 대한 자부심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교실에 들어가기 직전, 동규는 휴대폰을 꺼내 하림에게 뽀뽀 이모지를 보냈다. 하림이 읽은 걸 확인하지도 못하고 동규는 교실 문을 열었다. 수업 중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자리에 앉았다. 하림이 어떤 답장을 보냈을지 궁금했지만 쉬는 시간이나 잠시 뒤 하림이 교실로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동규는 칠판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퍼뜩 든 생각에 정신을 차렸다. 동규의 옆자리가 하림의 자리였다. 하림이 교과서와 노트를 펼쳐 두고 갔기 때문에 동규는 선생님이 뒤를 도는 순간을 노려 하림의 노트를 가져왔다.

펼쳐져 있던 노트 하단에 조그마한 입술 그림을 그렸다. 그리면서도 살면서 이런 짓을 처음 해 봐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살다 살다 이런 간지러운 짓을 다 해 보다니……. 그래도 이따 하림이 들어와서 깜짝 놀라고, 이게 뭐냐며 웃을 걸 생각하니 가끔은 하림처럼 이런 깜찍한 짓도 해 볼 만했다.

“으.”

그래도 역시 간지러운 건 제 성미에 맞지 않아 동규는 노트를 덮어 빠르게 하림의 책상 위에 올렸다.

사진을 찍고 돌아온 하림이 펼쳐 놨던 노트가 왜 이런 상태인 건지 의아애하며 노트를 펼쳤고 못 보던 그림이 자그맣게 그려져 있는 걸 바로 발견했다. 동규가 모르는 척 칠판만 바라보고 있어 하림은 발을 동동 구르다 주먹을 꼭 쥐고 파괴 본능을 잠재웠다.

노트 제일 뒷장을 펼치고 필통에서 제일 두꺼운 유성 매직을 꺼낸 하림은 노트 가득 하트를 그렸다. 그리고 채점할 때 쓰는 빨간 색연필로 하트를 색칠했다. 동규가 보지 못하게 색칠할 때부터는 아예 책상에 팔을 베고 누웠다.

동규는 하림이 커다란 답장을 제조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하림을 힐끔 쳐다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리 봐도 발견을 못 한 것 같다. 역시, 입술을 너무 작게 그렸다. 조금 더 대범하게 두 배로 크게 그릴걸. 동규는 한숨을 쉬며 책상 서랍에서 공룡 쿠션을 꺼냈다. 팔 베고 자면 아프니까 편하게 자라고 하림이 사 준 쿠션이었다.

발톱아 나 진짜 왜 이렇게 멍청이 같지.

하림이 쿠션을 선물해 주면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트리케라톱스가 그려져 있으니까 사랑과 애정을 가득 담아 애칭을 붙여 달라고 그랬고 동규는 공룡 이름 듣자마자 발톱이라는, 차마 하림에게는 말하지 못한 애칭을 지어 주었다. 프린팅 되어 있는 게 실사 공룡 그림이 아니라 귀여운 캐릭터여서 대외적으로는 ‘트리’라는 공식 애칭을 사용했지만 동규는 공식 애칭이 입에 영 붙질 않았다.

사실 하림은 동규가 쿠션을 발톱이라 부르든 트리라 부르든 동규가 붙인 이름이라면 다 좋았지만 온갖 세상 걱정을 다 끌어안고 사는 동규는 혹시라도 실수로 발톱이라고 말했다가 하림이 화낼 게 무서워 늘 조심하는 중이다.

눈물을 삼키며 발톱이에게 속으로 하소연을 하던 동규의 등을 하림이 톡톡 두드렸다. 동규는 시무룩한 기색을 숨기고 엎어진 몸을 들어올렸다. 하림이 건네준 것은 쪽지였다. 이게 뭐냐고 동규가 입 모양으로 물었지만 하림은 ‘답장’이라는 모양만 만들고선 더 이상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샤프를 들고 칠판에 적힌 것들을 빠르게 적어 나갔다.

동규는 하림의 공부를 방해하기 싫어 쪽지만 열심히 노려봤다. 답장이라는 건 아무래도 아까 교실 들어오기 전에 보낸 이모지에 대한 답이겠지. 쉬는 시간 되면 휴대폰으로 답장할 수 있는데 왜 번거롭게 답장을 두 번이나…….

별 다를 게 써 있겠나 하고 동규가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쪽지를 열었다. 종이 가득 그려진 빨간 하트와 그 아래에 적힌 ‘뽀뽀 그릴 거면 크게 그려’라는 문장에 동규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하림은 시야 끝에 걸리는 동규를 보고 웃음을 꾹 참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지,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공부하느라 놀란 네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바쁘다, 바쁘다, 바쁘다.

얼굴이 빨개진 동규가 하림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종이를 접어 다시 쿠션에 엎어졌다. 그제야 하림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칠판에 적혀 있는 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동규는 문제집 해답을 봐도 이해가 안 가는 문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씨름 중이었다. 하림이 영어선생님 해 줄 테니 언제든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지만 하림은 다음 주에 있을 학교 과학경시대회와 6월 모의고사 준비로 바빠 보였다.

하림은 전혀 아니었지만 동규의 눈에는 그랬다. 하림이 샤프를 돌리며 프린트되어 있는 문제들을 보고 있는 건 문제가 심각하게 안 풀려서 그런 것이라 짐작했고 얼마나 지독한 문제들이길래 하림을 괴롭히는지 싶었다. 그래서 『초등학생도 이해하는 영문법』 책을 다시 펼쳤다.

“어디서 막혔어.”

“응?”

“지금 뭐 잘 안 풀리는 거 아니야?”

“……아니.”

하림이 거짓말하는 거 다 안다는 얼굴로 턱을 괴었다. 동규는 책 넘길 때 소리 안 나게 조심조심 넘길 걸 후회가 됐다. 우물쭈물하며 문법 책만 잡고 있는 동규를 보다 못한 하림이 동규가 풀던 문제집을 잡아 제 쪽으로 가져왔다.

“또 관계 대명사 문제네.”

“문법 너무 어려워. 우리나라 문법도 어려운데 영어로 된 건 백 배는 더 어려워.”

“내가 문법은 대충대충 하고 회화 위주로 하랬잖아.”

“그래도 어쨌든 학교 성적 잘 받는 게 좋아서…….”

“중간고사도 성적 엄청 잘 나왔지.”

“살면서 그렇게 높은 등수 처음 받아 봤어.”

올라 봤자 중하위권이었지만 성적표 나온 날 동규가 엄마에게 뛰어가 자랑을 했을 정도라는 걸 아는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규가 놓친 부분을 짚어 주었다. 동규가 고맙다고 다시 문제집을 제 쪽으로 가져가려 하기에 하림은 문제집 위에 손을 올려 동규가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또.”

“응?”

“또 물어보라고. 선생님 옆에 놔뒀다가 뭐 해.”

“바빠…… 보여서.”

“하나도 안 바빠.”

입 삐죽이는 걸 보니 안 믿는 게 분명하다.

“나 이거 발로 풀어.”

하림은 제 문제집을 빠르게 앞으로 넘기며 동규에게 보여 줬다. 전부 머리로 풀어서 깨끗하다는 점을 강하게 어필하며 동규에게 진짜 하나도 바쁘지 않다고 말했다.

“바나나 스펠링이 뭐냐고 물어도 친절하게 알려 줄 거니까 빨리 또 몰랐던 거 물어봐. 내가 너 봐 주지도 못 할 정도로 바쁜 거면 미리 얘기할게. 나도 네가 뭐가 모르는 건지 알아야 알려 줄 때 편해.”

“그럼…… 이거.”

“또.”

“이거랑, 이거도.”

“좋아 좋아.”

하림이 설명해 주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이해가 쏙쏙 됐다. 동규가 틀렸던 문제들을 풀어 정답을 체크하고 하림의 눈치를 살폈다. 그 때마다 하림이 동규에게 뽀뽀를 해 주며 똑똑해, 잘했어, 천재야 하면서 동규를 띄워 줬다. 중학교 수준의 알록달록한 문제집을 풀어 봤자 천재 발끝도 따라가지 못 할 테지만 진짜로 똑똑한 하림이 칭찬을 해 주니 기분은 좋았다.

동규가 틀렸던 문제를 다 해결하고부턴 본격적으로 키스를 했다. 앉아 있는 자세가 불편해 둘 다 일어났다. 동규가 책상에 걸터앉았고 다리 사이로 하림이 들어오니 입 맞추기에 높이가 적당해 두 사람은 입술을 떼지 않고 계속 쪽쪽거렸다.

“……과외 가기 싫어.”

“옆방인데.”

동규의 코끝에 제 코를 붙여 살랑이던 하림이 동규의 윗입술을 깨물었다.

“아파.”

“뜯어 먹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겨, 이 눈치 없는 놈아.”

하림의 골반을 가볍게 쥐고 있던 동규는 하림의 허리를 감아 강하게 안았다. 그리고 몸을 숙여 하림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가지 마. 나랑 놀아 줘.”

“…….”

“계속 이렇게 뽀뽀하고 껴안고 있자.”

대놓고 이런 노림수의 말을 할 애가 아니라 하림은 얼음처럼 굳어 동규의 머리통만 내려다봤다. 뭐라고 얘기하고 과외를 취소해야 하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선생님과 이모님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뭐가 있지. 선생님이 집으로 오고 있는 중일 텐데. 아무렴 어떤가. 하림은 선생님이 이미 도착해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린다고 하더라도 오늘 과외는 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동규가 이마를 비비고 있는 심장 부근이 뻐근했다.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하림 때문에 동규는 하림의 품에서 벗어났다.

“……진짜로 하기 싫은 거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몰라.”

“평생 안 해 본 애교도 떨어 봤는데 내가 그러자고 안 해서?”

“…….”

이번에는 하림이 동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안 갈게. 과외 안 해. 너무 귀여워서 할 말을 잃었어.”

“……그래?”

“응응. 그리고 오늘 과외 미룰 합리적인 이유를 삼십 개 생각하느라.”

“그래도 공부는 하러…… 가야지.”

“싫어. 안 해. 못 해. 너 두고 못 가. 안 나가.”

동규를 안고 있는 하림이 더 세게 동규를 끌어안았다. 하림이 당연하게 거절하며 공부하러 가겠다고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동규는 지금의 상황이 퍽 당황스러웠다. 만약 하림이 ‘귀엽지만 과외는 과외야’라고 예상했던 말을 하면 동규도 어른스럽게 ‘역시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어.’라며 멋지고 쿨하게 하림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하림은 동규의 예상을 가볍게 박살 냈고, 동규를 안고 있는 팔은 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네가 과외 하러 간다고 할 줄 알고 그런 건데.”

“그런 섭섭한 소릴. 나 오늘 과외 쨀 거야.”

타이밍 나쁘게 마침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과외 선생님이 도착했다고 알렸다.

“저 오늘 안!”

“서하림 10분 뒤에 나간대요!”

동규가 하림의 입을 막고 대신 소리쳤다. 하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규의 손을 내렸다.

“야. 나 오늘 안 한다니까?”

“안 돼.”

“오늘은 안 한다고.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에 하루 더 하면 돼.”

“그래도…… 안 돼.”

“하, 진짜.”

하림은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어 동규의 양 볼을 꼬집었다. 그리고 위아래로 빙글빙글 돌렸다.

“내가 꼬셨어? 품에 폭 안겨서는 가지 말라고, 놀아 달라고 끼 부린 게 누군데. 내가 거기에 홀랑 넘어갔잖아. 꼬셨으면 책임을 져야지.”

“진심은 아니었어.”

“거짓말이라고.”

“너랑 놀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껴안고 싶은 건 진심이야. 가지 말라는 게…… 거짓말.”

하림은 제 손을 따라 맥없이 흔들리던 동규를 놓았다. 발갛게 손자국이 난 볼을 문질러 주었다.

“나 참. 너는 가끔 거의 내 학부모 같아.”

“남자……친군데.”

엉뚱한 대답에 하림은 웃음이 났다. 언제 그렇게 섭섭했냐는 듯이.

“그래. 그럼 김동규 남자친구는 김동규 먹여 살려야 하니까 열공하고 온다. 뽀뽀.”

동규가 몸을 바로 하고 하림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지만 하림이 동규의 얼굴을 붙잡고 혀를 들이밀었다. 잠시 당황했으나 곧바로 하림의 허리를 잡아 동규도 하림의 입 안을 훑고 침을 삼켰다. 아주머니가 다시 하림을 부르러 올 때까지 하림의 방 안에는 두 사람이 키스하는 소리뿐이었다.

겨우 하림과 헤어진 동규는 비척비척 걸어 침대에 누웠다. 하림의 베개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과외가 1분 뒤에 끝나길 바랐다.

동규는 벌써부터 하림이 보고 싶어 휴대폰 갤러리에 저장해 둔 하림의 사진들을 감상했다. 벌써 사진 순서를 다 외울 정도로 봐 온 것들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웠다. 사진들을 보고 있다 보니 동규는 울적해졌다.

그냥 오늘은 가지 말라고 그럴걸. 하림도 괜찮다고 그랬는데 왜 쿨한 척했지. 싫다는 애 억지로 공부시킨 건 아닌가 싶어 동규는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미안하다고 하기도 미안하다. 그냥 오늘은 쉬어도 좋았을 텐데. 동규는 하림의 베개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발버둥을 쳤다.

잠이나 잘까. 그러면 시간 빨리 가는데. 제 풀에 지친 동규는 휴대폰 알람을 맞췄다. 일단 한 시간. 아니, 30분. 아니, 한 시간. 하림의 쉬는 시간은 늘 유동적이라 알람 시간 맞추는 데에도 신중해졌다. 큰 맘 먹고 한 시간으로 정해 놓고 하림에게 잘 거니까 쉬는 시간 되면 깨우라고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는 순간, 서준에게 전화가 왔다.

-야, 동구! 나 오늘 좀 전에 선생님한테 존나 칭찬 받았다!

“진짜?”

-어! 감 되찾은 것 같다고! 와씨, 요즘 곡 너무 안 써져서 조온나 힘들었는데 형들이 응원도 많이 해 주고 조언도 많이 해 줘서 위로가 많이 됐나 봄.

“그러게. 잘 됐다.”

서준은 밤늦게까지 곡이 안 써지네, 가사가 안 떠오르네 하며 동규를 괴롭혔던 건 쏙 빼고 형들 얘기와 선생님 얘기만 실컷 했다. 동규는 친구가 슬럼프에 탈출한 게 기뻐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마냥 축하만 해 줬다.

-야, 근데 이번 달에 서하림 생일 있잖아.

“응.”

-나 걔 생일에 미안하다고 사과하게.

“좋아. 좋은 생각이야.”

아직도 동규는 서준이 하림과 왜 싸웠는지는 몰랐다. 하림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전혀 티를 내지 않았고 서준에게 물어보자니 제대로 된 이유를 듣지 못할 것 같아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서준이야 동규가 물어봐 줬으면 하고 종종 동규를 떠보기도 했으나 동규가 알아채질 못했다. 그래서 동규는 친구 둘이 사이가 다시 좋아질 거란 기대에 같이 선물 고르러 가자고 약속까지 잡아 버렸다.

-그러면 서프라이즈로 선물 주자.

“왜?”

-사과든 선물이든 미리 알고 받는 것보다 모르고 받는 게 더 기쁘니까.

“그래. 좋아.”

-22일 일요일이니까 토요일에 만나. 4시 넘어서. 주말이라 늦게 일어날 거라.

“응.”

-진짜 너밖에 없다, 동규야.

“뭘.”

동규는 씰룩거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괜히 기침을 했다. 서준이 쉬는 시간이라 다시 수업 들어가 봐야 한다고 전화를 끊었다. 생일날 하림은 점심시간에 하늘과 친구들과 놀기로 했고 저녁을 동규랑 먹기로 했기 때문에 서준과의 약속 날짜는 딱 적당했다. 여러모로 하림의 생일이 기대됐다.

〈윤지호 뭐해]

〈바빠?]

[아닝ㅇㅇㅇ〉

[김동그 왜〉

〈너 서하림 선물 샀어?]

[생일선물? 아직 안샀는뎁〉

〈그럼 21일에 같이 사자]

[너 안 샀어?〉

〈샀어]

[???〉

〈정서준이 그날 서하림 생일선물 사러 갈 건데 같이 가달래]

[아......〉

[너 요즘 정서준이랑 놀아?〉

〈노는 건 아니고]

[둘이 같이 있는 거 못 봤는데〉

〈그냥 걔랑 나랑 둘 다 예체능이라]

〈힘들고 그럴 때 얘기만]

[따로 만나서?〉

[서하림이 뭐라고 안 해?〉

〈아니 그냥 메시지로]

〈서하림은 왜?]

[아〉

메시지를 보던 지호는 하림이 일부러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 하림이 서준과 싸운 날 지호에게 결국 이렇게 돼 버렸다고 상황 전달을 해 줬다. 지호도 서준과 사이가 멀어졌다지만 어쨌든 전에는 다 같이 다니던 친구였기 때문에 불편해질 상황을 염두에 둔 거였다.

하림의 말에 따르면 서준이 너무 미안하니 자진해서 하림과 동규를 피해 다니겠다고 했다던데 그렇다면 괜히 나서서 얘길 하는 것보다는 하림이 적당한 때에 동규에게 말해 주는 게 좋겠다 싶었다. 지호는 우선 한 발 물러섰다.

[구냥ㅇㅅㅇ〉

동규는 동규대로 지호는 두 사람이 싸운 걸 모르는 듯해 말을 아꼈다.

[나는 걍 내가 알아서 사서〉

[서핢줄게ㅇㅇ〉

[생일 전에 갠적으로〉

〈그래]

하림이 아직 얘기를 안 한 이유가 분명 있으니 얘길 안 한 거겠지만, 그래도 지호는 손가락이 드릉드릉했다.

[근데 김동규〉

[정서준이랑 언제부터 속깊은 얘기했어????????????〉

〈음.. 그냥 올해 같은반 되고나서]

〈계속]

[계속? 매일??;;〉

〈그 정도는...]

〈근데 원래 새벽에 글도 잘 써지고 작곡도 잘 되고 그러니까]

〈주로 새벽에]

[내가 할 말은 많지만〉

[..........〉

[정서준이랑 너무 자주 놀지는 마〉

[걍 걔 요즘에 좀 이상해졌음〉

[존나 지랄맞아졋으니까〉

[너도 걔한테 휩쓸리지말고〉

[적당히 받아줘〉

〈헐]

〈나만 이상하다고 느낀 거 아니었어]

[걍 걔 요즘에 겉멋만 들어서 좀 이상하니까〉

[걔가 뭐라고 해도 걍 대충대충 들어〉

[새벽에 걔가 메시지 해도 걍 씹고〉

[걔 얘기 진지하게 들을 필요x〉

[ㅇㅋ?〉

[걔 하는 말 99%는 존나 헛소리임〉

〈그런 거 같더라]

지호는 더 이상 서준의 얘길 하기 싫어 찍어 둔 반려 동물들 사진을 왕창 보냈다. 동규는 간만에 보는 지호의 동물들이 얼마나 컸고 새끼를 어떻게 낳았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안 그래도 하림이 동물들 보고 싶다고 지호네 놀러 가자고 했던 게 떠올랐다. 이따 쉬는 시간에 언제 놀러 갈지 얘기해 봐야겠다.

동규는 지호와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하림이 쉬는 시간이 되어 달려와 문을 열 때까지 지호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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