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방학 동안 둘만의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지만 고3 때는 시간이 없을 거라는 지호의 연락을 받고 개학을 며칠 앞둔 날 셋이 만났다. 오랜만에 강아지, 고양이, 토끼, 카멜레온, 앵무새 등등 지호네 동물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침부터 동물 농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엔 지호의 제안으로 돈가스를 먹기로 했다. 대왕 돈가스로 유명한 곳이었다.
“김규형님 도전 먹방! 재작년부터 내가 꼭 김동규랑 오려고 했었음.”
자리에 앉자마자 옆 테이블 손님에게 대왕 돈가스가 도착했다. 하림과 지호가 열광을 하며 옆 테이블을 지켜보았지만 동규는 한번 힐끔 보고 메뉴판을 탐색하기 바빴다.
“서하림 캐스터, 성공할 것 같나요?”
“양은 괜찮은 것 같은데 시간이 좀 빠듯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양은 괜찮다?”
“네. 많이 잘 먹는 거지 빨리 잘 먹는 게 아니라서요.”
동규도 하림과 같은 생각이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문제가 있는데 동규는 한 가지 음식만 많이 먹으면 조금 질려 여러 가지를 함께 먹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꼭 시간 맞춰서 먹을 필요 없고 그냥 나는 김규 형님이 이걸 다 먹을 수 있나 그게 궁금한 거라 괜찮음.”
“그럼 나 다른 것도 시켜도 돼?”
“더 먹는다고?”
“이것만 먹으면 조금 느끼할 거 같아서…….”
비록 제한된 시간 안에는 먹지 못했지만 동규는 대왕 돈가스와 밥, 생선가스, 냉면, 콜라까지 남김없이 해치웠다. 이날 동규가 대왕 돈가스를 다 먹은 이야기는 전교로 퍼져 나갔지만 동규는 1년 내내 다른 곳도 도전해 보라는 친구들의 성화를 거절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이런 식의 관심은 너무 부담이었다.
새 학기 반 배정을 확인하기 위해 로그인을 시도했지만 비밀번호를 또 까먹었다. 이미 하림이 먼저 3학년 10반이 된 것을 확인한 상태였기 때문에 동규는 침착하게 아이디와 임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하림은 기도하듯 깍지를 기며 눈까지 감았다. 제발 김동규랑 같은 반 되게 해 주세요.
“……됐어? 됐냐고.”
동규에게서 아무 말이 없어 하림은 한쪽 눈을 슬쩍 떴다.
“응.”
“헐.”
동규의 휴대폰을 낚아채 동규도 3학년 10반인 것을 확인한 하림이 동규를 껴안고 쪽쪽거렸다. 간지럽다고 몸을 빼도 하림이 계속 따라와 입술 주변에 입을 맞췄다. 너무 좋다며 안겨 오는 하림을 밀어내지 못하고 동규도 하림을 끌어안았다.
“내일 백일장만 잘 다녀오면 퍼펙트다.”
“응.”
“서하늘은 12반이래. 서준이도 이번에 같은 반이고.”
“걔 싸운 친구들은?”
“이번에는 다 다른 반.”
“잘 됐다.”
12년이나 되는 긴긴 학창 생활의 마지막 1년을 동규와 같은 교실에서 지낼 수 있단 사실만으로도 하림은 행복했다. 쉬는 시간에 잠깐 만났다가 수업 들으러 가야 해서 헤어질 필요도 없고, 수업 시간 중에 보고 싶으면 언제든 동규를 볼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았다.
다른 학생들은 고3이 되었다고 죄다 울상이었지만 하림과 동규는 고3 생활이 얼마나 즐거울지 기대됐다.
“서하림 되게 오랜만에 보는 느낌.”
“그러게. 너도 지호도 교실에만 있으니까 그렇지.”
동규도, 하림도, 서준도 키가 커 교실 제일 뒤로 자리를 잡았다. 동규가 제일 왼쪽이었고 그 옆이 하림, 하림의 옆은 서준이었다. 서준은 1년 만에 다시 하림과 같은 반이 되어 좋았다. 그래서 계속 하림에게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꺼내며 말을 붙였다. 하림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 동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학 때 뭐 했어?”
“공부.”
“김동규도 같이?”
“응.”
“너네는 작년에 다른 반이었는데 더 친해진 것 같아.”
“그러게. 신기하네.”
대답을 꼬박꼬박 해 주고 있긴 한데 말도 없는 동규만 신경 쓰는 하림 때문에 서준은 약간 조바심이 났다. 두 사람이 친한 건 같은 학교 학생이라면 다 아는 거였고, 저렇게 둘이 친한데 저 혼자만 빼고 둘이 놀까 걱정도 됐다.
“너는 방학에 노래 좀 작곡 했어? 자작곡 좋은 거 뽑히면 나도 들려줘.”
“아, 어! 당연하지!”
“연주하는 동영상 몇 개 봤는데 기타 연주 실력이 더 늘었던데.”
“그걸 봤어?”
“채널 개설하고 알려 줬었잖아.”
“진짜 봤을 줄은 몰랐어.”
하림이 서준과 서준의 연주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선생님이 들어왔다. 서준은 작년 겨울에 만든 동영상 개인 채널에 올린 걸 하림이 전부 다 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창작곡 연주에 히트곡 편곡 연주에, 랩 한 것까지 동영상은 다양했다. 얼마 되지 않는 조회 수 사이에 하림이 있다니. 구독자 수는 세 자리도 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의기양양해지는 기분이었다.
“동구. 올해도 공부는 영 아니올시다임?”
모의고사 보는 동안 누워만 있던 동규였다. 급식실로 향하며 동규는 시큰둥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서하림 너는 당연히 잘 봤겠지. 오후에 볼 과목들도 그렇고.”
“그냥 평소 실력대로 봤어.”
“그럼 또 다 1등급이겠네. 나는 좀 망한 느낌. 엄마가 성적 많이 떨어지면 실음학원 끊어 버린다고 해서 걱정 중.”
“수시로 갈 거 아니야? 그럼 오늘은 상관없잖아. 중간고사 잘 보면 되지.”
“맞아. 그래야지.”
입구에서 학생증을 찍고 급식실로 들어갔다. 모의고사라고 특식이 나와서 그런지 많이 달라고 하는 소리가 여럿 들렸다.
“김동규 너 이거 다 먹고 또 먹지?”
“응.”
“이런 날 아니면 한 번만 먹는다니 김규 형님 이제 소식가 다 됐네, 다 됐어.”
올해 들어서 동규는 급식을 한 번만 받아 먹고 대신 하림의 집에 가서 엄청난 양의 간식을 먹었다. 오늘은 특식이라 두 번 먹는 날이었고.
“넌 뺄 살도 없는데 다이어트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조금 먹냐? 난 올해 다이어트 꼭 성공한다.”
“열심히 해.”
“서준아 너도 김동규처럼 먹을 거 다 먹고 운동해.”
많이 먹고 쑥쑥 크라며 하림이 동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운동 OUT! 난 오로지 식이만 조진다!”
“이따 간식으로 국수 해 달라고 할까.”
“좋지.”
“비빔국수랑 간장국수랑 냉국수랑 뜨거운 국수 중에 뭐가 좋아. 골라 봐.”
“나는 아무.”
“서하림, 너 피아노 잘 친다고 그랬지?”
동규와 하림의 대화를 불쑥 치고 들어온 서준에게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 어. 치긴 치는데 너만큼 잘하지는 못할걸.”
“그러면 나랑 같이 뭐 하나 연주할래?”
“갑자기? 지금?”
당황한 하림의 얼굴에 서준은 아차 싶었다. 하림의 SNS 팔로워 수만 보고 덜컥 얘기를 꺼낸 건데 너무 뜬금없었다.
“아…… 아니, 아니야. 나중에 다시 얘기할게. 이건 못 들은 거로 해.”
“뭐야.”
하림은 다시 고개를 돌려 동규와 이따 먹을 간식 얘기를 했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서준은 부끄러워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밥을 다 먹고 서준이 먼저 일어났다. 하림은 동규가 한 번 더 급식을 받아 오는 걸 기다리느라 밥이 아직도 반이나 남아 있었다.
“먼저 가게?”
“아, 어. 뭐 악상이 생각나서 그것 좀 노트에 적어 놓으려고.”
“아하. 나는 김동규 기다렸다가 같이 갈게.”
“맛있게 먹어.”
도망가듯 부리나케 자리를 뜬 서준의 뒷모습을 하림이 팔짱을 끼고 바라보았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을 때 어렴풋 느꼈던 게 못 본 사이 심해졌다. 지호가 없는 게 이렇게 차이가 나나.
“와, 무슨 계란찜을 이렇게나 가져왔어.”
“치즈계란찜이라 맛있어서.”
“그건 그런데.”
아직은 시기상조겠거니 하고 하림은 서준에 대한 생각을 멀리 던졌다.
밸런타인데이는 사귀고 처음 맞는 기념일이라 준비를 하지 못했지만 화이트데이는 달랐다. 하림이 동규에게 파베 초콜릿 만드는 방법을 알려 달라며 그 날은 초콜릿을 만들어 먹자고 제안했다. 안 그래도 친구들 줄 초콜릿을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동규는 하림의 제안을 한 번에 수락했다.
초콜릿 재료들은 따로 샀고 모양 틀, 유산지를 비롯한 베이킹 도구들은 하늘에게 빌렸다. 하늘의 서랍에서 귀여운 동물 모양 틀을 발견한 하림은 밀크 초콜릿과 아몬드를 추가로 구매했다.
“기업들의 이런 상술들은 다 사라져야 돼.”
“핑계 대고 초콜릿이랑 사탕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난 좋은데.”
“여자애들한테 초콜릿 많이 받아서 좋으시다?”
“몇 개 받지도 않았어. 네가 많이 받았지.”
하림과 동규는 서로에게 줄 초콜릿 말고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을 줬던 친구들에게 답례로 줄 것부터 만들었다. 하림은 친구들 초콜릿은 대충 끝내 버리자고 계량을 설렁설렁 했지만 동규가 기겁을 하며 다시 제대로 계량했다. 하늘과 친구들이 동규에게 사거나 만든 초콜릿을 건네주면서 눈을 반짝이던 게 생각나서였다. 동규가 요리도 잘하고 베이킹도 잘한다는 사실은 하늘이 퍼트리고 다녀 모르는 친구가 없었다.
“친구들 줄 거 왜 이렇게 열심히 해. 예쁘게 만들어서 줘야 될 애 있나봐?”
“너 말고 없어. 서하늘이 나한테 초콜릿 하나 줘 놓고 맛있는 거 기대한다고 그래서 그래.”
“아, 네. 그러시겠죠. 이렇게 정성 가득 들어간 거 ‘서하늘’ 주려고.”
하늘의 이름 세 글자를 또박또박 얘기하며 손가락으로 강조 표시를 한 하림은 동규가 계량해 둔 다크 초콜릿과 밀크 초콜릿을 다시 원래의 봉투 속으로 부었다.
“나 정성 하나도 없어. 그냥 성의만 있어. 초콜릿에, 카카오와 생크림과 우유, 아니 젖소랑 아몬드, 사탕수수, 오레오에 대한 예의.”
질투 같은 건 절대 아니고 그저 동규가 쩔쩔매는 모습이 귀여워 일부러 토라진 척을 하는 거지만 동규가 귀여워도 너무 귀엽다. 하림은 올라가려는 입가를 숨기기 위해 입가를 슬쩍 가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광대가 씰룩거려 손을 좀 더 위로 올렸다.
“그리고 나 초콜릿도 얼마 안 받았어. 너도 봤잖아.”
“내 남자친구가 워낙 인기쟁이라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서.”
“왜? 아니라니까.”
“모르면 됐어.”
“그럼 나…… 서하늘 줄 거 만들어도 돼?”
“그래.”
초콜릿들을 동규에게 건넸다. 하림은 갑자기 초콜릿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꽃받침을 하고 동전 크기의 초콜릿을 1g까지 신중하게 계량하는 동규를 눈으로 좇았다.
말로는 여자친구 없다, 사귀는 사람 없다고 하면서도 하림은 동규가 없는 곳에서 사귀는 사람 있는 티를 일부러 폴폴 냈다. SNS에 사진 올릴 때도 날짜나 간단히 한두 문장 적고 말던 걸 프로필 이름 옆에 하트와 곰을 넣었고, 동규가 자길 찍어 준 사진을 올릴 때도 곰 아니면 하트를 붙여 올렸다.
거기다가 하늘이 뒤에서 뭘 하고 다닌지는 몰라도 하림에게 초콜릿을 준 여자친구들은 정말로 하림을 친구 사이로 봐 주는 친구들뿐이었다.
동규에게는 화이트데이에 맛있는 거 잔득 받을 걸 노리고 초콜릿을 준 거고 하림에게는 옜다 먹어라 하며 준 딱 그 정도의 의미. 어차피 친구들은 하림이 단 거 좋아하지 않는 걸 알았기 때문에 동규 주면서 하림 몫으로 작은 걸 하나 더 샀을 뿐이었다.
하림이 열심히 티를 낸 것과 하늘의 알 수 없는 노력으로 하림은 밸런타인데이 때 고백을 거의 받지 않았다. 오히려 동규가 받을까 봐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지.
특히나 동규의 사물함은 자물쇠도 없어 하림은 겨울 방학 끝나고 종업식 하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 쉬는 시간 마다 동규네 교실로 가기 전에 동규의 사물함을 꼬박꼬박 열어 편지나 선물 같은 게 있지는 않나 확인했다.
겨울 방학이 끝난 수요일이었나, 목요일이었나. 하림은 동규의 사물함에서 편지와 작은 선물상자를 발견하고 동규에게 알렸다. 동규의 사물함에서 고백 편지라도 발견하면 화가 나고 질투가 나지 않았을까 했었는데 의외로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동규의 매력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준다는 게 신기했고 제 눈에만 귀여운 게 아니라는 걸 인정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동규가 자신 말고는 다른 사람은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편지를 본 동규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백 개쯤 단 채 편지와 하림을 번갈아 봤고 하림은 그 얼굴에 키스를 하고 싶어 입술만 꾹 물었다.
‘나 이거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고백도 받고 좋겠네.’
‘찌, 찢어 버릴까?’
‘누군가의 순정을 갈기갈기?’
‘그럼 어떡해.’
동규가 하림에게 편지를 보여 줬다. 이걸 봐도 되나 싶었지만 편지 주인이 보여 주는 거라 괜찮다며 찔리는 양심을 외면했다. 편지 내용은 동규와 올해 같은 반이었던 학생이 보내 온 고백이었고 동규의 어떤 모습이 좋은지 적혀 있었다. 하림도 아는 애였다. 거의 대부분 하늘을 배척하는 4반에서 그나마 하늘에게 잘 대해 주는 친구였다. 4반 놀러갔다가 몇 번 얘기도 해 봤고.
귀여운 글씨로 써진 동규의 장점들은 하림도 빠짐없이 공감하는 것들이었다. 세상 무심해 보이지만 가만 보면 자기 친구들은 말없이 잘 챙겨 주고, 하기 싫은 일도 일단 시켜 놓으면 책임감 있게 하고, 조용히 책 읽는 모습도 잘생겼고 키 큰 것도, 운동 잘 하는 것도 멋있고 커다란 덩치로 손재주가 좋은 것도 좋고.
‘김동규 너, 대학 다 떨어지면 우리 집 와서 살아.’
‘응?’
‘엄마한테 말해 놓을게.’
‘그게 무슨 말이야. 편지엔 그런 내용 없는데.’
‘그냥 해 본 말.’
다른 사람들 눈에도 똑같이 동규가 잘나고 예쁘다는 걸 확인 사살 받은 기분이었다. 편지를 보기 전까지는 동규 잘난 거 인정받아 우쭐한 기분이었다면 편지를 읽고 난 지금은 조금 슬펐다. 이래서야 불안해서 어디 내놓을 수가 있겠나. 커도 덩치도 너무 커서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도 없고.
아무튼 동규는 하림의 조언을 따라 편지를 준 친구에게 답장을 썼다. 이런 고백을 받아 본 것도 처음이고 거절 편지를 쓰는 것도 처음이라 밤까지 샜다. 아침에 일어나 전화 준 하림에게 편지 내용을 읽어 주려고 했는데 하림은 네가 알아서 잘 썼을 거니까 읽지 말라고 했다. 그 친구에게도 실례라는 말에 동규는 머쓱해졌다. 역시 유경험자는 다르구나.
하림은 어서 동규와 서로를 위한 초콜릿을 만들고 싶어 좀이 쑤셨다.
“대충 만들자 대충. 어차피 대충 만들어서 줘도 걔네는 몰라.”
“알 거 같은데…….”
“모른다니까.”
“안 돼, 잘 만들어야 돼.”
“도대체 서하늘한테 초콜릿 받으면서 무슨 말을 들었길래 겁을 먹어.”
“아무 말도…….”
말이 아니라면 눈빛으로 뭐라고 했을 게 뻔해 하림은 동규의 양 볼에 손을 대고 쭉 눌렀다. 동규의 얼굴이 눌려 입술이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누구누구 줄 거야.”
“서하늘이랑 이보람이랑, 안민주랑, 박다솜이랑…… 손채원이랑 표지유랑 황재이랑…….”
“더 있어? 다 불러 봐.”
“강초롱, 하다은, 정윤아도. 유나연, 유하연도.”
“이거 봐, 이거 봐. 많이 받았네.”
“네가 더…….”
하림이 손에 힘을 줘 동규는 입을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동규는 하림을 가볍게 안아 등을 토닥였다. 얼굴을 놔달라는 뜻이었다. 하림이 동규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동규가 눌려 있던 볼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하림이 그런 동규의 입술 위로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뒤 저울의 전원을 켰다.
“서하늘 외 백 명의 친구들에게 줄 초콜릿 빨리 만들고 우리 거 만들자.”
“백 명까진 아닌데…….”
하림이 웃으며 동규의 입술에 또 뽀뽀를 했다.
“내가 백 명이라면 백 명인 거로 해. 인기 많다고 칭찬해 주는 거니까.”
“응. 서하늘 외 백 명.”
초콜릿 완성까지 동규가 예상한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었지만 뭐만 하면 쪽쪽거리기 바빠 두 시간을 넘어도 한참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초콜릿 만들기를 끝낼 수 있었다. 하림이 방에서 만들자고 한 걸 따른 게 천만다행이었지, 만약 동규가 의견을 꺾지 않고 주방에서 만들었다간 큰일 날 뻔했다.
3학년은 체력 관리의 일환이라며 일주일에 한 번은 체육 시간에 운동장을 뛰는 게 필수였다. 개학한 첫 주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걸어도 상관은 없지만 학교든 학원이든 매일 앉아만 있다 보니 나름 진지하게 달리기를 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동규는 첫 주부터 계속 누구보다 더 열심히 느리게 걷는 학생들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 키가 커 그중에서도 제일 돋보였다. 하림은 친구와 운동장 한 바퀴를 누가 더 빨리 뛰는지 대결을 하다가 숨이 차면 동규와 발을 맞춰 걸었다가, 심심하면 뒤로도 걷고 친구를 업고 달리거나 반대로 친구의 등에 업히기도 하고, 속도를 높여 경보를 하기도 했다.
특히 남학생들은 수업 시간을 통으로 운동장을 돌아야 하는 지루한 시간을 타파하기 위해 어떻게든 재밌는 놀이를 찾아내기 바빴다. 오늘자 10반 남학생들의 목표는 동규였다. 하림이 동규의 등에 업혀 있다가 내려와서 동규를 업어 준다고 하는 걸 보고 몰려오더니, 김동규를 업고 운동장을 돌 수 있는 진정한 상남자가 누구냐며 이상한 데에서 불이 붙었다. 하림은 동규가 싫어하지 않을까 살짝 동규의 얼굴을 살펴봤는데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순서 정하기 가위바위보를 다 같이 한판승으로 할지, 아니면 나눠서 할지도 의견 통일이 안 되는 남자친구들 사이에 하림이 끼어들었다.
“야, 하더라도 김동규 의사는 좀 물어봐라.”
“너도 할 거야?”
“나는 그냥 마지막에.”
순서를 정하느라 말도 많고 시끄러운 친구들 사이에서 동규와 하림은 한 걸음 떨어졌다.
“김동규, 업히는 거 찬성?”
“넘어질 것 같은 사람은 알아서 먼저 빠져 주면.”
“콜.”
동규의 한마디에 남학생들이 너는 말라서 안 된다느니, 너는 작아서 안 된다느니 하며 난리가 났다. 하림은 다 되면 부르라며 동규의 팔을 잡고 친구들 무리에서 아예 도망을 쳤다.
“안 한다고 뺄 줄 알았더니.”
하림은 몸을 돌려 동규와 마주 보고 걸었다. 뒤로 걷는 게 익숙하지 않아 자주 뒤로 고개를 돌렸지만 동규의 얼굴을 보고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냥.”
“‘짐짝 취급 하는 거 같은데.’라면서 툴툴거릴 줄 알았음.”
하림이 동규의 말투를 흉내 냈다. 동규가 그게 뭐냐며 입을 내밀었다.
“김동규 따라 하는 건데.”
“아닌데.”
“맞는데.”
“……안 그래.”
“안 그래 아닌데.”
“아, 뭐야.”
“나 김동규어 1급이야. 아닌데, 싫은데, 그냥, 몰라 이거면 김동규 하는 말 다 할 수 있어.”
“……아닌, 아니야.”
“지금 아닌데 하려고 그랬지.”
“아니.”
“맞는 거 같은데.”
하림이 또 동규의 말투를 그대로 복사해 따라 했다.
“어, 지금 거 완전 똑같았다.”
“전혀.”
“야! 김동규!”
친구들이 순서를 정했다며 반 바퀴 앞서 걷고 있던 동규와 하림에게 뛰어왔다.
“업혀.”
동규는 첫 번째 친구에게 업히기 전 고개를 좌우고 꺾고 상체를 좌우로 돌리면서 몸을 풀었다. 남학생들이 근육 부풀리는 거라고 쑥덕거렸다.
“헉.”
첫 번째 남학생은 동규를 업은 채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했다.
“야, 너 몇, 킬로야!”
“몰라. 최근에 안 재 봐서. 90은 많이 넘을 걸.”
엄마를 외치며 일어난 남학생은 열 걸음 정도를 걷고 동규를 내려놨다. 남학생과 여학생들에게서 우우하는 야유 소리가 튀어나왔다. 첫 번째 학생이 허리를 두드리며 김동규 업고 한 바퀴 돌면 형님으로 대해 줘야 한다는 일장연설을 늘어놨다.
바로 두 번째 학생이 동규를 업었다. 어차피 많이 못 버틸 거 속도라도 빠르게 내서 최대한 많이 가겠다는 학생은 동규를 업고 일어나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차라리 걸었으면 한 바퀴를 다 돌았을지도 몰랐지만 두 번째 학생은 반 바퀴를 겨우 넘기고 포기를 외쳤다.
“야, 꺼져.”
차례대로 동규를 업은 남학생들이 한 바퀴를 도전했으나 성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상하게 실패하는 학생이 늘면 늘수록 남학생들은 불타올랐다.
동규를 업고 도는 것만으로도 김동규급이라는 얘길 하는 걸 듣고 나서야 하림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친구들이 왜 이렇게 열심히 동규를 업나 했더니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키 크고 몸 좋기로 유명한 동규에게 어떻게든 비벼 보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다.
동규처럼 되고 싶으면 잠 많이 자고 운동을 열심히 할 것이지 고작 업고 운동장 도는 거로 무슨 김동규급이네 어쩌네 하며 자신감을 채우는 건지 하림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서준이 동규를 업고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다. 서준은 친구들 사이에서 영웅 취급을 받았다.
“김동규도 별거 없네.”
슬슬 동규를 업을 준비를 하기 위해 발목을 풀던 하림에게 서준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야, 너 힘 존나 미쳤어!”
“주니주니, 몇 걸음만 더 걷지!”
동규는 친구들 사이에서 서준에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오, 하고 감탄하는 얼굴을 하고서. 서준의 다음 친구도 그다음 친구도 동규를 업고 얼마 걷질 못했다. 그럴수록 친구들은 서준을 추켜세웠고 서준은 수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라스트, 서하림!”
“과연 서하림은 한 바퀴를 채울 수 있을까요?”
“서하림 키만 큰 편이라.”
“아니야. 쟤 마른 근육 잡힌 거 못 봄?”
“그래봤자 정서준보다 가볍잖아.”
저마다 된다 안 된다 토론을 시작한 친구들을 뒤로하고 하림이 앉았다. 동규가 하림의 등에 업히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너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지금.”
“아니, 나 사실 겨울 방학 동안 살 너무 쪄서…….”
“내가 그렇게 먹였으니까 당연하지. 일어난다.”
하림이 조금의 주저도 없이 일어났다. 깜짝 놀란 동규는 하림에게 오늘 아침에 잰 몸무게를 속삭였다.
“진짜 괜찮겠어?”
“꽉 잡아.”
“나 진짜 방학에 너무 무겁, 내릴까?”
“조용히 해.”
동규를 고쳐 잡고 하림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앞에서 많은 친구들이 실패의 데이터를 축적해 준 것을 토대로 뛰지도 걷지도 않으며 적당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하림을 따라 반 친구들도 함께 걸었다. 동규는 친구들이 저와 하림을 보고 있는 게 조금 부끄러웠지만 하림의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주변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고 하림의 목만 꼭 껴안았다.
하림의 등에 박동이 다 느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장이 너무 세게 뛰었다. 정말 이대로 하림이 운동장을 한 바퀴 다 돌 돌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하림을 업어 주기만 했지 이렇게 업힌 적은 처음이라 그것도 신기하고 설렜다.
서 있을 때와 높이는 크게 다를 게 없는 것 같아도 하림의 등 위에 업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공기도 더 맑은 것 같고 불어오는 바람도 더욱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예뻐 보이고 매일 보는 학교 건물은 더 멋져 보였다. 하림도 제 등에 업혔을 때 이런 풍경이었을까.
“하림아, 괜찮아?”
“…….”
학교는 쓸데없이 좋아서 운동장도 더럽게 컸다. 동규는 하림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불안해졌다. 이러다 하림의 무릎이나 발목이 상하거나 키가 줄어든다면 큰일이었다.
“도착! 서하리임!”
하림이 딱 한 바퀴를 돌았을 때 동규가 빛의 속도로 하림의 등에서 내려왔다. 하림은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고 섰다. 동규가 옆에서 하림의 키가 줄어들지 않았나를 확인했다. 그리고 하림이 혹시라도 토를 하진 않는지, 현기증이 나는 건 아닌지도 발을 동동 굴리며 체크했다. 다행히 동규가 걱정하던 일은 하나도 벌어지지 않았고 친구들이 하림에게 입을 모아 칭찬하기 바빴다.
“야. 김동, 규, 너…… 이리 와서 뒤돌아.”
하림이 동규를 불러 어깨를 잡고 눌렀다. 동규는 하림이 누르는 대로 앉았다가 제 등에 붙는 하림이 뭘 하려는지 알아채고 몸을 앞으로 더 숙였다.
“보, 보건실 갈까?”
“아니.”
땀도 잘 흘리지 않는 하림이 땀으로 푹 젖어 있다. 동규는 하림의 살 내음이 진하게 풍겨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냥 좀…… 계단까지만 좀 돌아. 힘드니까.”
“야, 서함 어디 가게!”
“저기 가서 쉬려고.”
동규는 하림이 명령한 대로 운동장 트랙을 따라 돌지 않고 가로질러 계단으로 직진했다. 계단에 도착해 업혀 있던 하림을 내려놓자 하림이 동규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응. 이 정도로 안 죽어. 10분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져. 김동규 진짜 묵직하네.”
“미안.”
동규의 말버릇에 하림이 동규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가볍게 때렸다.
“취소.”
“아무리 근육이 지방보다 부피가 작다고는 해도 살로 100kg인 사람들보다 네가 훨씬 날씬해 보였는데 아, 진짜 힘들었다.”
“내 인생에 날 이렇게 업고 이렇게…… 한 건 네가 처음이야.”
하림은 부끄러워 조그맣게 속삭이는 동규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왜?”
“뽀뽀하고 싶어서. 따라와.”
몇 초 전까지 힘들다며 앓는 소리 낼 때는 언제고 하림은 동규의 팔을 끌고 씩씩하게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동규는 학교에서 뽀뽀할 생각으로 좋은 마음이 반, 신성한 학교에서 그런 짓을 해도 되는지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그래도 좋은 마음이 양심을 이긴 탓에 자꾸만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 연신 입술을 축였다. 말없이 따라가고는 있지만 하림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하림이 동규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장애인 화장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모든 칸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하림이 문 제일 위에 있는 잠금 버튼을 돌려 문을 잠갔다.
“나 장애인 화장실 처음 와 보는데 진짜 깨끗.”
하림은 동규의 볼을 양손으로 잡고 입을 맞췄다. 동규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게 귀여워 하림은 입술을 뗐다가 웃으며 입술을 꾹 댔다.
“그래도 화장실은 화장실이야. 깨끗해 봤자지.”
화장실 제일 안쪽 벽에 선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본격적으로 키스를 시작했다. 변기에 앉아서 하림이 위에 올라타는 게 키스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하림이 싫어할 것 같다. 동규는 하림과 벽 사이에 끼어 있는 지금도 나쁘지 않아 하림의 허리를 조금 더 세게 안았다. 그 탓에 하림이 한쪽 팔로 벽을 짚어야 했다.
급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입맞춤은 느렸다. 느긋하게 입술을 빨았다가 가볍게 물었다. 혀가 상대방의 입 안을 헤집는 것도 느긋했다. 동규가 고개를 반대로 틀어 혀를 깊숙이 넣었다. 하림은 벽을 짚던 손을 동규의 체육복 안으로 넣었다.
“……뭐야.”
대답 대신 하림은 동규의 가슴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땀 때문인지 평소처럼 뽀송하진 않았다. 도톰한 유두를 톡톡 만지며 하림이 작게 웃었다. 동규의 혀가 움찔거렸다. 얽혀 있던 혀가 떨어지자 가는 실이 두 사람의 입술을 연결하다 끊어졌다. 동규는 하림의 턱선을 따라 입을 맞추고 목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하림이 몸을 살짝 뒤로 뺐지만 동규는 가는 목에 흐르는 땀을 혀로 핥으며 간질였다.
“아, 간지러워.”
“네가 땀 흘리는 거 보니까 존나 흥분돼.”
“뭐 더 안 할 건데. 학교잖아.”
“그럼 조금만 핥을게.”
“어딜.”
“목이랑 젖꼭지. 가슴도.”
“안 씻었어.”
“그래서 좋은 건데.”
동규가 하림의 체육복을 들어 올렸다. 하림이 바로 옷을 내렸다.
“안 돼, 더러워.”
“별로 안 더러워.”
하림의 목에 코를 박은 동규가 킁킁거리며 네 땀 냄새는 향긋하다는 둥, 네 냄새가 더 진하게 나오기만 한다는 둥 하며 하림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동규는 정말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하림의 목에 붉은 흔적이 남지 않도록 조심하며 혀를 길게 놀렸다. 그러면서 다시 하림의 체육복 상의를 들어 올렸다. 하림의 가슴골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땀으로 미끈해 손가락이 움직이기 쉬웠다.
“아…… 지금 딱 서로 좆 비비면 좋겠는데. 엄청나게 원초적인 느낌이야.”
“학교에선 안 하기로…… 약속한 거 잊지 마.”
“응.”
동규의 가슴을 주무르던 하림은 동규가 붙은 탓에 자세가 불편해 껴안듯이 동규의 뒤로 손을 넣었다. 널찍한 등 근육이 손아래에서 뚜렷하게 느껴졌다. 동규가 엄청나게 흥분했다는 증거였다.
동규가 가슴을 빨아 대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씻지도 못하고 이런 식으로 더럽게 몸을 맞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규가 유두 주변을 혀로 쓸다 가볍게 물었을 때, 하림은 동규의 말대로 원초적인 섹스에 한 발짝 다가간 기분이었다.
“후으…….”
“기분은 좋지. 빨아 주니까.”
“으음.”
“네 젖꼭지는 좋은가 본데.”
이제 거의 한계였다. 씻지도 않았고, 학교였고, 더 이상 가슴팍을 빨렸다간 여기서 나가지도 못 할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다. 하림은 동규의 등에 붙어 있던 손을 거두고 동규의 어깨를 밀었다. 뭐가 나오지도 않을 텐데 동규가 열심히 빨아 댄 탓에 동규의 입술이 떨어지며 민망한 소리가 났다.
“……키스만 할 생각이었어.”
“아. 너 힘들겠다.”
동규가 하림의 옷을 내리고는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순간적으로 허벅지에 힘을 주면 발기가 되지 않게 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됐다.
하림은 숨을 크게 쉬었다 들이쉬면서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에 입술을 물었다. 방금 전까지 정신없이 가슴을 빨아 대던 동규가 무슨 생각인지 벽에 붙어 짝다리를 짚고 시선을 아래로만 내리고 있어 발끝으로 동규를 툭툭 건드렸다. 동규가 똑같이 발끝으로 하림의 운동화를 쳤다.
“뭐 보고 있어.”
두 팔로 벽을 짚고 선 하림은 동규를 제 안에 가두고 턱을 추켜세웠다. 눈높이가 약간 높은 동규가 하림과 눈을 마주쳤다가 옆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아무것도.”
“곧 있으면 점심시간 종 치는데 그때까지 키스하다가 나가자.”
“좀…… 위험한데.”
“여기 쓰는 사람 한 번도 본 적 없어.”
하림은 동규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온 하림에게 동규가 고개를 돌리며 작게 대답했다.
“아니, 우리가 위험하다고.”
“그래서. 안 한다고?”
동규는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거리의 하림에게 고개만 움직여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제 다리 사이에 들어온 하림의 다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했다.
“……다리 빼. 신성한 학교라며.”
“눈이나 감아.”
괜히 자극했다간 정말로 일을 치를 것 같아 하림은 가볍게 동규의 입술을 빨았다. 동규도 일부러 혀를 깊숙이 넣지 않고 가볍고 천천히 움직였다. 느린 키스에 숨도 차지 않았다. 중간중간 눈을 떠서 눈이 마주치면 입술 사이로 푸스스 웃음이 흩어지기도 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나서 두 사람은 잠시 떨어졌다가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혀를 섞었다. 지금껏 노력했던 게 무색하게 격렬히 얽히는 키스였다. 하림은 벽에서 팔을 거두고 동규의 목을 껴안았고 동규도 하림의 체육복만 쥐고 있던 손으로 하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행히 입술은 크게 티가 안 나네.”
문 너머로 학생들의 인기척이 느껴질 때야 두 사람은 입술을 뗐다. 세면대에 자리를 잡고 서 찬물로 손을 열심히 닦았다. 이렇게 하니 올랐던 열이 조금 가시는 느낌이다. 세수까지 마친 하림은 입술을 이리저리 삐죽이며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체크하고 동규의 얼굴도 체크했다. 동규가 찬물을 끄지 않고 계속 손만 씻고 있길래 잠시 기다렸다.
“……가자.”
무거운 동규도 업었고 얼마 쉬지도 못한 채 오래 키스해서 그런가 하림은 녹초가 된 듯했다. 목이나 팔로 스트레칭을 하는데도 자꾸 몸이 축축 처졌다. 그래도 밥 먹고 나면 바로 괜찮아질 정도였다. 체력에는 자신 있었다.
“안 부러졌어.”
언제 얘기가 다 돈 건지, 급식실에서 만난 하늘은 하림의 팔을 확인하고 동규를 봤다가 하림의 다리를 확인하고 동규를 봤다.
“존나 대단하다. 저 거인 덩치 거구 근돼를 업고 한 바퀴 돌 생각을 하다니. 너 말고 성공한 애는 없다며.”
“그렇지. 그냥 남자애들 자존심 싸움이었어.”
“안 봐도 훤하다.”
“뭐, 김동규 솜털처럼 가볍던데.”
“미친.”
하늘이 리얼한 소리를 내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소리가 리얼해도 너무 리얼해 동규는 진짜로 하늘이 토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간만에 힘썼더니 배고파. 너 우리랑 먹게?”
“응.”
하늘이 동규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식판을 들고 섰다. 동규에게 목마를 태워 달라고 했다가 그럼 도대체 높이가 몇cm가 되는 건지 서로의 키를 물었다. 하림은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다 식판을 들었다. 밥과 반찬을 받아 들고 옆으로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국은 콩나물국. 콩나물은 됐고 국물만 먹을 생각에 ‘국물만 많이 주세요’라고 했다가 하림은 두 눈을 의심했다.
“야, 서하…….”
됐다. 서하늘에게 말했다간 또 토하는 소리만 들려줄 게 뻔하지. 하림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누르고 동규의 옆자리에 앉았다.
“김동규김동규김동규김동규김동규!”
“응.”
“이거.”
다급하게 동규를 부르는 목소리에 하늘도 고개를 빼 하림을 바라보았다. 하림이 동규의 식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하늘과 동규의 시선이 식판 한곳으로 모였다.
하림이 동규의 식판에 올려놓은 것은 파였다. 하트 모양 파.
“내 마음.”
“씨발놈이 미쳤나.”
하늘이 자기가 먹어 버리겠다며 젓가락을 들었지만 동규가 숟가락으로 하늘의 젓가락을 막았다.
“와, 진짜 지랄도 가지가지. 쌍으로 처돌았네 아주. 이럴 거면 나 빼고 둘이서만 밥 먹으라고.”
온갖 욕을 하늘이 던졌지만 하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시작했다. 동규는 숟가락으로 귀여운 하트 모양의 파를 살짝 건드리다가 하림을 따라 밥을 먹었다. 어떻게 파가 이렇게 하트 모양으로 딱 나올 수가 있지.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겠다. 동규는 밥을 뜨고 반찬을 집을 때마다 계속 보이는 하트 모양 파에 웃음이 자꾸만 났다.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하늘 몰래 광대도 몇 번 눌렀지만 웃음이 자꾸 나오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동규는 하림에게도 자기 마음을 보내 주고 싶어 제 식판을 뒤적거렸다. 콩나물들을 헤집어 봐도 영 잘 보이질 않아 아예 통으로 집어 밥 위에 올려 본격적으로 찾아보려 할 때, 하림이 동규의 옆구리를 찔러 왔다.
“그냥 먹어. 파다 파.”
“그래도…….”
마음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저 귀여운 걸 잔인하게 먹을 수가 있냐는 얼굴에 하림은 웃음이 빵 터졌다.
“먹어야 네 거가 되지.”
동규의 눈이 유레카라도 외칠 것처럼 동그랗게 뜨였다. 하림은 하트 파를 집어 동규의 입 앞에 가져갔다.
“아 해.”
하림의 젓가락까지 문 동규가 입술을 요란하게 움직이며 오물거렸다. 장난을 치는 것 같아 하림은 그대로 손을 놨다.
“좋아?”
“응.”
동규는 하림의 젓가락을 모아 건넸다. 하림이 동규가 준 젓가락을 받아 들고도 계속 웃었다. 옆에서 하늘이 계속 욕을 해 왔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하림은 먹을 생각이 없던 콩나물 하나를 집어 먹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