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동규는 오랜만에 부모님과 저녁을 먹는다고 일찍 돌아갔다. 하림은 동규가 현관문에서 나가는 순간부터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동규와 열심히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엄마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살폈다. 놓친 예능 재방송을 보며 깔깔거리는 엄마를 보고 있으려니 괜히 중간에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다. 아, 도대체 저 프로그램은 언제 끝나.
〈바로 아빠 보러 간다 그랬지]
[응〉
[엄마 어제부터〉
[소 한 마리 잡아먹는 거 아니냐고 그래〉
〈너랑 아빠랑 인당 한 마리가 아니고?]
〈1인 1소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그리고 소고기 금방 질려〉
〈그래도 10키로 거뜬히 먹을 듯]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밥도 먹잖아〉
[음료수랑 쌈채소랑 된찌도...〉
[근데〉
[밖에 너무 춥다ㅠ〉
〈그러면 주머니에 손넣고 기다려 잠만]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가 다시 앉으려는 순간, 하림이 엄마를 불렀다.
“깜짝이야. 왜?”
“엄마, 나 김동규랑 놀러 가는 거 말인데. 강원도 별장.”
“동규 못 간대?”
“아니, 가는데. 어차피 1박 2일 짧게 가는 거니까 그, 안에 계시는 관리인분들 일찍…… 집에 가시라고 해도 돼?”
“얼마나 일찍?”
“음, 우리 도착한 날 점심까지만.”
“오후에는 눈꽃 열차 타러 간다며.”
“저녁에 김동규가 맛있는 거 해 준대.”
동규와는 전혀 협의된 게 아니지만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림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그럼 더 안 되지. 동규도 놀다 와서 힘들 텐데 어떻게 저녁을 해 줘.”
“나도 같이할 거야. 같이 그냥 가볍게 둘이 먹을 만큼만 만들어서 대충 먹기로 했어.”
“맛있는 거 해 먹는다며.”
“그러니까, 김동규 요리 잘하잖아. 걔한테는 쉽고 가볍고 대충인데 엄청 화려하고 맛있는 거. 놀다가 늦게 들어갈 수도 있는데 기다리시게 하면 죄송하잖아. 엄마가 데리러 올 거기도 하고. 내가 설거지도 다 해 놓을게.”
뭐 하러 귀찮게 그런 짓을 하냐고 엄마가 탐탁지 않아 하는 눈빛으로 물어왔다. 하림은 엄마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이런 기회에 설거지도 해 보고 밥도 해 먹어 보는 거라고, 김동규한테 잘 배워서 엄마한테도 맛있는 저녁 해 주겠다고 열심히 의견을 피력했다.
“엄마 몰래 청소년이 하면 안 되는 거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그게 뭔데.”
“술이랑 담배? 엄마가 누누이 말하지만 인간 수명을 빠르게 단축시키는 가장 큰 세 가지가.”
“술, 담배, 고칼로리 음식. 알아, 알아. 김동규 걔 나랑 같이 길거리 돌아다니다가 아저씨들이 담배 피우면 같이 코 막고 욕해.”
아직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못한 엄마에게 하림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맞대응했다.
“우리 세상 건전하게 노는 거 엄마도 많이 봤잖아. 책 보고 공부 하고 보드 게임하거나 뭐 만들고. 아, 말이 나와서 그런데 저번에 김동규랑 만든 브라키오사우르스 로봇 볼래?”
움직이는 네 다리로 낮은 장애물들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공룡 로봇을 찍어 둔 동영상을 함께 감상한 엄마는 잘 만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네. 그럼 동규 너무 힘들지 않게 간단한 거 해 먹어.”
“응. 진짜 간단한 거 해 먹을 거야. 장도 우리가 본다.”
“장도?”
“거기 근처에 마트 있으면 말고.”
“있긴 있는데 겨울이라 장 보고 가지고 오기가 좀 힘들 걸. 미리 봐. 엄마 차에 실어서 가지고 가면 되지. 그리고 점심에 보내 드리는 건 안 돼. 저녁 밖에서 먹지 말고 별장에서 먹어. 둘이 들어오면 그거 확인하고 나가시라고 할 거야. 밤늦게 어디 나가는지 안 나가는지도 CCTV로 다 확인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고. 그게 조건이야.”
“알겠어. 그럼 뭐 해 먹을지 물어봐야겠다.”
하림은 다시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삼각뿔 모양의 쿠션이라 이렇게 누워 휴대폰 하기 딱이었다.
〈김동규김동규]
[응〉
〈별장 관리해주시는 분들 그날 휴가래]
[휴가?〉
〈우리 점심까지만 해주고 휴가 가시라고 내가 방금 엄마한테 말함]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저녁에 들어오는 거 확인하고 가신대]
〈저녁이랑 다음날 아침은 우리가 해먹자]
바로바로 오던 답장이 잠잠했다. 하림은 동규의 대답을 천천히 기다렸다.
[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너가 먹고 싶은 거]
[나?〉
〈뭐 먹고 싶은데?]
〈나는 너가 해주는 거면 다 좋아]
[맵고시고짜고단거는 빼고?〉
〈들켰네ㅋㅋㅋㅋ]
[오늘만 생각 좀 해볼게〉
[갑자기 저녁 해먹는다니까 조금 당황스럽네....〉
〈너랑 둘이만 있고 싶어서]
〈일찍 들어가시라 한 건데]
〈그냥 다시 계속 있으라고 할까?]
[아니〉
[잘 했어〉
〈ㅋㅋㅋㅋ뽀뽀보내줘]
〈김동규뽀뽀]
잠시 말이 없던 동규에게서 입술 이모지가 하나 날아왔다. 하림은 웃음을 꾹 참고 일어났다. 곧 저녁을 먹어야 하지만 지금 당장 동규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손 잡자거나 안아 달라거나, 뽀뽀해 달라는 말이나 키스하자는 건 부끄러워하면서도 막상 끌어안고 입 맞추면 좋아하는 게 귀여워 일부러 뽀뽀 소리를 엄청 하고 있다. 뜬금없이 뽀뽀해 달라고 하면 순식간에 얼굴이 타오르는 것도 귀엽고 어색하게 다가와 아까도 했는데 왜 또 하냐고 툴툴거리는 것도 귀엽고, 그래서 또 하는 게 싫은지 물어보면 고개를 젓는 것도 귀엽고.
메시지 주고받을 땐 어떻게 뽀뽀하냐고 묻길래 이모지 보내라고 한 뒤로는 동규가 곧잘 이렇게 이모지를 보내왔다.
“지금 어디쯤이야?”
-선릉. 2호선 갈아타러 가는 중.
“강변 간댔나.”
-응. 아빠 아는 분이 알려 준 정육 식당. 그래서 지금 신선한 육회 기대 중이야.
“나는 육회 무슨 맛으로 먹는지 잘 모르겠어.”
-배랑 참기름이랑 생고기 맛……. 치즈랑 김 싸서 먹어도 맛있지.
“구워 먹는 게 더 좋아.”
-나도.
“우리 저녁으로 고기 구워 먹을까? 너 좋아하는 돼지갈비 10킬로 사서. 마포에 단골집 있다며.”
-그럴까. 그러면 된장찌개랑 볶음밥 재료만 사면 될 거 같아. 아침 할 거랑. 아, 파채랑 쌈채소도.
“그래그래. 너 먹고 싶은 거로 다 사.”
-침 고여.
“조금 이따 소고기 먹을 거잖아.”
-나는 돼지고기파야.
“잘 알죠. 김동규 돼지고기 없어서 못 먹는 거.”
출발하는 날 아침은 일찍 출발하니까 전 날 저녁 먹고 장을 보자는 약속을 잡았다. 어차피 장보기 약속을 잡지 않더라도 매일매일 동규가 하림의 집에 가 있느라 약속은 하나마나였다. 약속을 정한 뒤로도 하림은 동규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이제 다음 역 강변이야.
“벌써? 부모님 만나면 끊어.”
-응. 너는 저녁 안 먹어? 지금…… 너네 집 저녁 시간인데.
안 그래도 방금 저녁 먹으라고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렸지만 하림이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려보냈다. 벌써 두 번이나 이따 내려간다고 한 상태였다.
“먹어야지. 이제 슬슬 아주머니가 먹으라고 할 것 같아.”
-오늘은 조금 늦게 먹네.
“아, 어. 아빠가 오늘 늦은 오후엔가 학교에 일이 있어서 아빠 집에 오면 같이 먹으려고 해가지고 다 같이 기다렸어. 근데 아빠가 일이 끝나는 게 좀 늦어지나 봐. 집 근처래.”
휴대폰 너머로 삑 소리가 났다.
-바쁜 분이니까. 된장찌개 말인데.
“응.”
-고기 많이 먹을 거니까 좀 시원하게 우렁이 넣어서 우렁된장찌개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헐 완전 천재. 나 우렁이 들어간 된장찌개 저번 주부터 먹고 싶었어.”
동규가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하림은 이제 곧 끊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이렇게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으니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은데.
“부모님 만나면, 고깃집 도착하면 알려 줘.”
-응.
삑 소리가 들렸으니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하림은 동규가 말해 주는 냉면이나 볶음밥 얘기 같은 걸 무한 긍정하며 부디 정육 식당이 출구에서 멀어도 한참 멀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오늘은 밖이 별로 춥지 않아서 동규가 걸어가는 길에 쌓여 있는 눈이 다 녹을 정도로 따뜻하길 기도했다. 그런데.
“…….”
-아침은 가볍게 아보카도랑 계란 사용하고…….
아무리 동규가 부모님을 늦게 만났으면 바라고 있다지만 지하철 출구 밖으로 나온 지 한참은 지난 것 같은 동규가 전화를 끊지 않는 게 이상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삑 소리가 들린 지 벌써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니다. 토스트 말고 그냥 과카몰리를 만들고 타코에 파스타를 하는 게 더 낫나. 브런치로.
“김동규.”
-응. 네 생각은 어때?
“지금 어디야.”
-으……응?
“고깃집 아니고 어디냐고.”
쫑알쫑알 브런치 메뉴까지 정하던 동규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하림은 안 봐도 동규가 뭐 하고 있을지 훤히 그려졌다.
“혹시 출구 앞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중은 아니겠지.”
-아닌데.
“아니면 고기집 주변을 걸어 다니는 중이거나.”
말이 없는 걸 보니 정답이다. 고개 휙휙 돌려 가며 주변을 살피는 중일 거고.
-너…… 여기 근처야?
“아니. 내 방.”
-근데 어떻게 알았어.
“독심술 쓰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침대에 누워 있던 하림이 일부러 ‘읏차’ 소리를 크게 내며 일어났다.
“밖에 추우니까 들어가. 나도 밥 먹으러 오래. 손 다 얼었겠다.”
-알았어…….
“내가 먼저 끊는다. 진짜 바로 딱 들어가서 인증 샷 보내.”
끊기 정말 싫었지만 하림은 이 추운 날 밖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닐 동규를 생각하며 두 눈을 꾹 감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바로 동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동규에게 답장이 빠르게 왔고, 하림이 1층에 내려갔을 땐 이미 부모님과 아주머님이 식사를 반쯤 끝내고 있었다. 하림은 식탁에 앉아서도 계속 메시지를 보내다가 동규에게서 고기가 구워지고 있는 사진을 받은 뒤에야 식사를 시작했다.
1박 2일을 최대한 재밌고 알차게 지내겠다는 일념 하에 하림과 동규는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차에 탔다. 어제 저녁 즐겁게 열심히 본 장과 짐들을 가득 챙겨 하림의 엄마 차에 실었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강원도 주요 지역을 도는 눈꽃 열차를 타고 뭐를 할 거라는 둥, 태백산 눈 축제에서 제일 기대되는 게 눈 조각상들이라는 둥 하는 얘기로 신이 났다. 신나게 떠든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둘 다 꿈나라로 가 버렸지만.
동규는 늘 그랬듯 새벽 늦게 잠들어 잠을 조금밖에 자지 못했고, 잠이 많은 하림에게 5시란 시간은 너무 가혹했다.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난 하림과 동규는 몽롱한 정신을 다잡으며 짐을 옮겼다. 그리고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관리인들이 준비한 아침을 먹었다. 하림의 엄마는 강원도로 아이들을 데려다준 김에 아는 의사를 만나는 약속을 잡아 밥만 먹고 바로 별장을 나섰다. 약속 전에 급하게 누구를 또 만나야 하는 모양이었다.
“낮잠이라도 잘까. 너 너무 졸려 보이는데.”
“아니…… 괜찮아. 늦게 자서 그래.”
아침을 먹자 살아난 하림과 달리 동규는 죽을 맛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은 한창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보통 자는 시간이 빨라야 1시인 동규지만 어젯밤은 특히나 설렘에 잠 못 이루고 늦게 잤다.
“얼마나 늦게 잤으면 영 힘을 못 써.”
“3시 다 돼선가…….”
“3시? 와 진짜 대단하다. 왜 그렇게 늦게 잤어, 이 바보야.”
“설레서 잠이 안…….”
동규가 하품을 하느라 말끝을 흐렸다. 하림은 길게 이어지는 하품을 바라보다 저도 하품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또 콩닥거렸다. 하림은 어젯밤에 아침이 빨리 오길 바라며 일찍 잠들었다. 자기가 꿈도 안 꾸고 푹 자는 동안 동규는 설레서 잠을 못 잤다는 게, 그걸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게 왜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지난밤, 내 몫까지 김동규가 대신 설레 줘서 그런가.
“……왔어.”
“낮잠 자는 거 어때. 어차피 우리 기차 시간 1시라 좀 자도 돼.”
“아, 그럴까.”
또 하품을 하는 동규에게 다가간 하림이 동규의 팔을 잡아끌었다. 반쯤 눈을 감은 동규가 하림에게 팔을 둘렀다.
“아우, 야 업혀.”
“……아니야.”
“빨리 업혀.”
“무거워.”
“알아. 너 정도는 업을 수 있으니까 업히라고.”
동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저보고 빨리 업히라는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년까지 마음고생하느라 쭉쭉 빠지던 몸무게가 한 달 만에 아주 빠른 속도로 복귀하고 있다는 것도 떠올렸다. 먹는 양도 돌아왔고 운동도 다시 잘 나갔다. 특히 운동은 동규가 좋아하는 걸 잘 아는 하림이 같이 따라와 함께 운동한 적도 많았기 때문에 동규는 선뜻 하림의 넓은 등에 몸을 맡기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튼튼한 하림이라도 100kg을 넘어가는 거구를 업기엔 힘들지 않을까.
“얼른.”
“나 진짜 무거워.”
“안다고. 너 업고 달리기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위로 올라가는 건데 뭘 그렇게 빼냐.”
“……그냥 걸어갈래.”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난 하림이 앞장섰다. 뒤로는 동규가 피곤함에 흐물거리며 따라붙었다. 하림이 방문을 하나 열며 네 방이라고 소개를 해 줬지만 동규는 방을 살펴볼 생각도 못 하고 침대 위로 엎어졌다. 동규가 엎어지기 직전 한 발 빠른 하림이 이불을 거둬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잠 잘 올 것 같아.”
“자, 얼른. 적당히 이따 깨워 줄게.”
“응. 아, 일찍 잘 걸 시간 아깝다…….”
동규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눕자 하림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동규가 잘 수 있도록 토닥여 주는데, 동규가 눈을 반밖에 뜨지 못하면서도 꾸역꾸역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자지 않으려 했다.
“오늘 좀 늦게 자면 되지. 내가 너 자는 시간 맞춰서 늦게 잘게.”
“그럼 내일 아침에 늦게 일어나게 되잖아.”
“내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지 뭐. 몇 시에 일어났으면 좋겠어. 8시? 9시?”
“음…….”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아깝다는 동규에게 하림은 살짝 입을 맞췄다. 진짜 졸린지, 이렇게 말도 없이 뽀뽀를 할 때마다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지던 눈이 오늘은 조금 커진 게 전부였다.
“내일 몇 시에 일어날지 정하는 건 자고 일어나서 해. 너 진짜 피곤해 보인다.”
“그냥 안 잘.”
“자! 좀! 자라고.”
“미안해서…… 원래 우리 도착해서 아침 먹고 여기 근처 산책하기로 했는데.”
졸려서 목소리도 작아진 동규가 시무룩해져 중얼중얼하기 시작했다. 하림은 동규의 말이 어디까지 이어지나 가만히 들었다. 자길 탓하는 얘기가 반이 넘어서 한 글자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이따 놀면서 그 말들 고대로 되돌려 주기 위해서였다. 네가 걱정하고 미안해했던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하림은 동규가 편히 잘 수 있도록 커튼을 치기 전 스탠드 램프부터 켰다.
“미안할 게 뭐 있어.”
창밖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어 반사된 햇빛이 방 안 가득 들어와 불을 켜지 않았을 때에도 밝았다. 하림은 커튼을 치고 빛이 새어 들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두 시간 뒤로 휴대폰 알람을 맞추고 테이블 위에 엎어 놓았다.
“늦게 자서…….”
“옆으로 가 봐.”
“왜?”
“나도 졸려서.”
“너도?”
“응. 아, 너무 일찍 일어났어.”
하림은 하품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졸리지도 않은데 억지로 한 하품이라 동규가 평소 같았으면 알아챘을지도 몰랐으나 지금의 동규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 할 정도로 잠에 취한 상태였다.
“나도.”
“내가 괜히 여기까지 오자고 했나 봐. 서울에서 놀 걸.”
“아니야. 내가 괜히 눈꽃 열차 타고 싶다고 그래서…….”
“아 졸려. 알람 두 시간 해 놨으니까 그 때까지만 자자.”
“으응.”
여전히 기운 없는 얼굴이라 하림은 한 번 더 하품을 했다.
“고개 들어봐. 팔베개 해 주게.”
동규가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내 팔로 팔베개 하고 자는 거라 완전 꿀잠 잘 걸.”
“응. 진짜 좋다. 네 꿈 꿨으면……. 아니, 네 꿈 꿀 거 같아.”
“꿈꾸면 깊게 자는 거 아닌데. 렘수면 상태라 얕은 잠이야.”
“그래도 네 꿈꾸는 게 더 좋아. 행복하잖아.”
잠으로 흐려진 눈동자가 하림과 눈을 마주한다. 하림은 간지러움에 시선을 살짝 피하고는 손을 올려 동규의 귀밑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진짜로 자, 동규야.”
“응. 잘 자.”
“불 끈다.”
“응.”
하림은 스탠드 불을 끄고 나서도 눈을 감지 않고 어둠 속에 있을 동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재밌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근데 아무리 낮잠이라지만 어떻게 굿 나잇 키스도 안 해 주고 잘 수가 있냐.”
“아.”
“서운하다.”
동규가 입술을 빼고 앞으로 쭉 다가올 거라 생각한 하림은 고개를 일부러 뒤로 물렀다. 하지만 동규의 큰 손이 하림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물론, 동규도 하림에게 바짝 다가갔다.
“깜빡해서…… 미안. 잘 자.”
짧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진 게 다였으나 하림은 진한 키스라도 나눈 것처럼 얼굴이 뜨거웠다. 동규는 이제 진짜로 자기 위해 몇 번 꾸물거렸다. 금세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림은 한참 입술만 만지작거리다 잠에 들었다.
두 시간 뒤에 일어난 동규는 훨씬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하림은 동규가 베고 누웠던 팔을 폈다 접었다 했다.
“나 주방 쓰고 싶은데.”
“말해 놨으니까 써.”
1시에 탈 눈꽃 열차 내부에도 스낵바와 카페가 운영되고 있지만 동규는 그런 곳에서 사는 건 다 맛이 없어 하림에게 먹을 수 없다고 간식 만들기에 돌입했다. 샌드위치, 주먹밥, 꼬치 같은 간단한 것들이었다. 하림도 동규의 옆에서 동규를 도왔다. 간식을 다 만들고 나니 금세 점심시간이었다.
서울에서 탑승한 게 아니라 강원도 내에서 탑승했기 때문에 열차의 종착지인 태백산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창문 밖으로는 커다란 폭포가 꽝꽝 언 장관도 나왔고 눈으로 겹겹이 쌓인 설산들도 나왔다. 경치를 구경하며 싸 가지고 온 간식을 깨끗이 비운 덕에 하림과 동규는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태백산 눈 축제에 참여했다.
돌아가는 열차는 30분 간격으로 있었지만 두 사람이 고른 건 5시 반 열차. 강원도까지 온 이유는 눈꽃 축제 관람이 가장 큰 이유였기 때문에 세 시간이면 축제를 둘러보기엔 충분했다. 더 오래 있어 봤자 어른들 내보낸 뒤 별장에서 둘이 보낼 시간만 줄어들 뿐이었다.
열차에서 내려 사진부터 찍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서서 까만색과 하얀색의 운동화가 잘 보이게 찍고, 서로 찍어 주기도 하고. 열차에 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즈음 두 사람은 사람들 무리 끄트머리에 따라 붙었다. 걸어가는 동안 사진이 잘 나왔다고 둘이서 소곤거리느라 바빴다.
눈꽃 축제 입구부터 웅장하게 조각된 문이 사람들을 반겼다. 여기서도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하림이 동규를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 댔다. 반대로 동규도 하림의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입구부터 으리으리한 조각상이 반겨 준 탓에 기대하던 눈조각상 대회가 더 기대됐다.
“이게 뭐지.”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했던가. 눈축제가 끝나가는 무렵이라 그런지 눈조각상의 디테일들이 많이 죽어 있고 하림과 동규가 기대한 거대하고 웅장한 작품들이 몇 개 되지 않았다. 게다가 분명 위에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뻔히 있는데도 사람들이 축제 기간 동안 열심히 올라가 새하얀 색이어야 할 눈조각상들이 얼룩덜룩하기도 했다.
“……썰매라도 탈까. 재밌는지 사람들 되게 많은데.”
“타고 싶어?”
“응.”
“그럼 가자.”
하림은 별로 썰매를 타고 싶지 않았지만 동규를 위해 같이 줄을 섰다. 동규는 이 축제에 이것저것 하고 싶어 하는 게 많은 모양이지만 하림은 오로지 눈조각상을 보기 위해 온 거라 이미 흥미가 다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티는 내지 않고 사람들이 남녀노소 썰매를 타며 즐거워하는 걸 지켜봤다.
두 사람의 차례가 거의 다 되었을 때 하림은 다리가 아프다며 도착 지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카메라를 켜 동규가 눈썰매를 타는 걸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또 탈 거야?”
“응.”
제대로 된 썰매도 아니고 고작 눈꽃 축제 로고가 박힌 비닐 포대로 썰매를 타는 거면서, 전차급 썰매라도 가진 듯한 얼굴의 동규에게 차마 돌아가자고는 할 수 없어 하림은 다시 줄을 섰다. 눈치 없는 동규지만 혹시라도 재미없어 하는 걸 눈치챌까 봐 적당히 반응하면서 썰매를 한창 타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만족할 만큼 타고 내려온 후엔 근처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샀다. 하림이 볼 때는 장사꾼들이 잘 모르는 외지인에게 사기를 치는 거였지만 동규가 기념품 사고 싶다고 하는 통에 말없이 동규가 원하는 걸 전부 질렀다. 혹시 몰라 현금을 가져와 다행이었다.
야외에 커다랗게 설치된 먹거리 부스에서 동규에게 한가득 먹을 걸 물려 놓고 하림은 군밤을 하나 샀다.
“뭐 봐?”
“우리 저거 타자.”
“셔틀 버스?”
“석탄 박물관 간대.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석……탄?”
“국내 최대의 석탄 박물관이래. 전에 우리 수학여행 갔을 때 박물관 재밌었잖아. 저기도 그럴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응. 좋아.”
강원도 별장은 하림도 몇 번 온 적이 없어 석탄 박물관 역시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동규는 재밌는 실험이 가득했던 번개과학관과 하림도 잘 모르는 분야였던 온갖 비행기, 전투기, 우주선들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던 항공우주박물관처럼 석탄 박물관은 또 어떨지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석탄은 겨우 돌덩이라 과학 실험을 할 것도 없을 것 같고 석유에 밀려 사람들의 관심도 많이 못 받는 자원인데 재미없고 지루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었다. 두 사람은 하림이 산 군밤을 까 서로의 입에 넣어 주면서 석탄 박물관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광물들은 우주에서 떨어진 게 아닐까 싶은 기괴한 모양이었다. 동규와 하림은 좀 더 지켜볼까 하다가 갑자기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와 서둘러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1층에 들어간 순간, 동규는 석탄 박물관으로 온 건 정말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제1관인 지질관은 다름 아닌 화석을 다루는 곳이었다. 공룡의 화석들이 땅에 묻혀 있으니 당연한 거지만 동규는 어떻게 둘이 먼 곳까지 와서 축제를 즐기고 생각 없이 온 박물관에서 하림이 좋아하는 공룡화 석을 볼 수 있는지 놀라웠다. 운명의 신이란 있구나. 행운의 신도.
“안내 책자 사?”
“기념으로 사고 싶으면 사고.”
“어차피 옆에서 네가 다 설명해 줄 거라 필요 없을 것 같아.”
박물관 내부는 따뜻했다. 화석이긴 해도 진짜 공룡알도 있었다. 하림은 그걸 보고 감동의 눈빛을 하더니 말없이 동규를 바라보았다. 이미 동규는 카메라를 켜 둔 상태였다.
“역시 넌 척하면 척이야. 예뻐.”
“사진 찍어 줘 아니면 동영상?”
“둘 다.”
동규는 하림의 옆에서 지구의 탄생과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화석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공룡 박물관이 아니기 때문에 공룡 화석에 대한 설명은 적었지만 하림은 놀랍게도 암석, 광물, 화산폭발까지도 꽤나 자세하게 알고 있고 석탄의 생성, 발견, 인류사에 석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까지도 줄줄 꿰고 있었다.
“여기는 물리가 아니라 완전 지구과학 영역인데 어떻게…… 이런 것까지 다 알아?”
“공룡 좋아하다 보면 화석도 관심 갖게 되는데 보통은 화석에서 끝나지만 나는 화석이 생성 환경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해서 광물이나 지질까지 다 찾아봤었어. 전문적인 지식 수준은 아니고 상식 수준밖에 안 돼.”
동규는 또 반했다며 박수를 쳤다.
제3관부터는 본격적으로 석탄 채굴이나 광산에 대해 나왔다. 하림도 모르는 분야라 두 사람은 전시된 물품이나 사진 옆에 붙은 설명을 꼼꼼히 읽었다. 마지막으로 지하 갱도 체험관까지 마쳤을 땐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헐. 시간 뭔데 순삭이지?”
“여기가 지하까지 총 네 층이라.”
“너 배고프겠다. 카페에서 뭐라도 먹을래?”
“배고프긴 한데…….”
“열차 출발까지 아직 시간 40분쯤 남아 있어.”
“그럼 먹을래.”
허니 브레드 하나는 부족할 것 같아 두 개 시켜 준다는 걸 동규가 갈비 먹을 배를 남겨 놓는다며 사양했다. 출발 시간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림은 라떼를 한 잔 시켰다. 이런 곳에서 먹는 커피 맛은 거기서 거기라 맛은 없었지만 동규가 잘 먹는 걸 보고 있는 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