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19화 (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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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겨운 하늘의 노력 덕분에 동규는 침착하고도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생일을 기다렸다. 휴대폰에 디데이도 설정해 뒀다. 18년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을 꼽으라면 당연 올해의 생일일 것이다. 동규의 인생을 둘로 나눈다면 그 기점도 올해의 생일일 것이고.

동규는 매일 밤 하림에게 어떻게 고백하면 좋을지 휴대폰을 붙잡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잘 써지지 않으면 아예 일어나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손으로 썼다. 쓰다가 눈물 몇 방울 흘린 적도 있고 너무 오글거려 몸부림치다 새로 산 의자를 망가트리기도 했다.

생일날은 점심에 하림을 만나 저녁까지 먹고 헤어지는 스케줄이었다. 스케줄에 따른 동규의 고백 계획은 이렇다.

저녁 먹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하림의 집에서 놀다가 버스 타는 곳까지만 데려다달라는 말로 하림을 집 밖으로 끌어낸다. 버스정류장에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엘리베이터에서 할 말이 있다고 한 다음 놀이터로 데리고 가는 거다. 어차피 하림의 아파트는 세 살 아기들부터 학원을 다니느라 놀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다.

그렇게 하림을 데리고 놀이터에 간 다음 열심히 쓰고 외운 고백을 하고, 소원으로 지금 들은 말은 잊어 달라며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을 한 다음 집으로. 그리고 다음 날부터는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림이라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들어줄 거라는 하늘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하림이 고백을 잊어 달라는 약속을 지키며 정말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잘 대해 줘도 자기가 그렇게 못 지내면 어떡할지 그게 걱정이 됐다. 이런 건 고백하고도 평소처럼 지내야 잊어 주는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은 건데. 서로 리셋하기로 해 놓고 만약 자기가 계속 좋아 죽는다는 눈빛을 보내거나 하면 말짱 도루묵인 일이었다.

그냥 고백하지 말까. 고백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다. 좀 힘들긴 하지만 지금의 관계도 나쁘지 않은데. 아니, 사실은 좀이 아니라 많이 힘들다. 그런데 나 편하자고 고백하는 것도 매너 없는 짓 같고, 그런데 이대로 계속 혼자 앓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내년에 하림과 같은 반이라도 됐다간 수업 중에 한 번은 울 것 같고, 내년에도 글은 한 글자도 못 쓸 것 같고 그리고 또…….

동규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하림이 전에 보내 준 긴 메시지들을 읽었다. 사소한 얘기가 있기도 하고 속 깊은 얘기인 것도 있고. 시간 순으로 따라 쭉 거슬러 올라오니 울렁거리던 마음이 조금 괜찮아졌다.

크리스마스엔 하림이 가족들과 보내기로 했다기에 이브만 같이 보냈다. 동규는 하림을 위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구워 왔고 하림도 동규를 위해 동물 쿠키를 만들어 가져왔다. 곰돌이 쿠키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유난히 컸다.

즐겁고 행복하게 이브도 잘 보냈지만 방학 날엔 학교를 빠졌다. 하림이 학업 우수상을 받는 건 축하할 일이 맞지만 그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또 삐걱거릴 것 같았고 무엇보다 바다 어쩌고에서 은상 받은 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에게만 몰래 얘기했다. 올해 상 받은 게 너무 없어서 뭐라도 받아서 1년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1등 못해서 부끄럽다고.

담임 선생님이 은상도 대단한 거라고 동규를 추켜세웠지만 동규는 만약 자기가 그 대회에서 은상을 받은 걸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학교를 자퇴하겠다고 했다. 조용한 동규가 심각한 얼굴로 자퇴 얘기를 꺼내자 선생님은 아차 싶어 학교로 온 바다사랑나라사랑 글짓기 대회 상장을 가져와 동규에게 주었다. 올해는 실적이 저조하긴 했어도 교장이 동규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수틀린 동규가 자퇴라도 했다간 큰일이다.

방학 다음 날인 토요일과 일요일은 하림이 집안 어른들 만나느라 바빴다. 드디어 대망의 12월 31일 아침이 밝았을 때 동규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세수를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선 얼굴은 누가 봐도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후우…….”

누군가 잘 자고 있는 중에 깨워 고백문을 읊어 보라 하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과연 하림의 앞에서는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용기도 안 나고 자신도 없고. 카트 내기에서 얻은 소원만 아니었으면 꿈에도 못 꿨을 고백이었다.

“엄마.”

동규의 생일 미역국을 하기 위해 소고기를 자르던 엄마에게 동규가 바짝 다가가 뒤에서 안았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몰라. 그냥 눈이 떠졌어. 엄마.”

“응.”

“나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마워.”

“김동규, 엄마 아들로 태어나서 고마워.”

“엄마.”

“응. 또 무슨 예쁜 말을 하려고.”

“몰라. 그냥 엄마 안고 싶어서. 더 세게 안아도 돼?”

“기다려 봐.”

엄마가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손을 씻었다. 뒤에 붙어 있는 동규의 팔을 풀고 엄마는 동규를 꼭 안아 주었다.

“아 엄마, 숨 막혀.”

“김동규! 팔에 힘 풀어!”

동규와 엄마는 서로를 세게 껴안고 떨어졌다. 헉헉거리던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TV 보고 있어. 다 되면 불러 줄게.”

“응.”

아침으로 배를 두둑이 채우고 동규는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데 집에 뭔가 두고 온 게 있는 기분이었다. 집에 한 번만 다시 들어갔다 올까. 목도리 이거 말고 다른 게 하고 싶어지는데…….

1층 엘리베이터 문 옆에 붙은 거울을 살펴보던 동규가 다시 집으로 올라갈 생각을 하던 중 하림에게 전화가 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동규는 목도리를 바꾸지 못한 채로 하림을 만났다.

“목도리 귀엽게 잘 묶었다, 리본 모양으로.”

“……이게 편하대서.”

점심 먹기 전에는 하림이 전부터 강력 추천을 하던 방 탈출 게임을 하러 갔다. 동규는 추리력이 필요한 게임은 완전 젬병이라 하림만 믿고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옆에서 하림이 탐정처럼 척척 증거 모으고 하는 것만 봐도 즐거울 것 같다.

“헐. 미친.”

“왜?”

“내가 저번에 여기 신기록 세워 둔 거 깨졌어.”

“진짜?”

“이 방이 제일 난이도 높은 방인데 헐 대박, 공대생들이 깨고 갔네.”

방문 옆에 붙은 폴라로이드 사진 중 하림이 작은 칠판을 들고 서 있는 사진이 두 번째로 달려 있다. 첫 번째 사진에는 똑같은 과잠에 똑같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는 공대 남학생 셋이 요란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럼 오늘 이거 할래?”

“아니. 다 푼 방을 또 하면 그게 무슨 재미야.”

“그래도…….”

“나는 친구랑 둘이서 풀었는데 저 사람들은 셋이서 풀었으니까 내가 이긴 거야. 가자 가자. 레벨 1의 방으로.”

동규는 하림의 손에 이끌려 로비 테이블에 앉았다. 직원이 서약서와 펜을 주며 유의사항과 여러 가지 팁들을 설명했다.

“설명은 여기까지인데요, 질문 있으실까요? 근데 이쪽 분이 워낙 잘하시는 분이라.”

“저요.”

“네.”

“여기 내부 시설을 부수면 안 된다고…… 물어 줘야 한다고 써져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힘 조금만 썼다고 생각했는데 부러지거나 하면요?”

“그래도 돈을 지불하고 가셔야 합니다.”

“야, 괜찮아. 내가 내줄게.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오늘 네 생일이잖아.”

수갑을 차고 시작한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도 동규는 머리 굴리기 싫어 힘으로 끓어 버릴 게 걱정이었다. 똑똑한 하림이 옆에 있으니 금세 수갑을 풀 테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두 사람은 웅장한 글씨체로 ‘BEGINNER’라 쓰여 있는 방 앞에 섰다. 하림은 이 정도 수준은 눈을 감고도 탈출할 수 있지만 오늘은 동규가 주인공인 날이었다. 하림은 서울 지역에서 유명한 방 탈출 카페는 거의 다 정복한 실력자였고 동규는 하림의 방 탈출 카페 도장 깨기를 듣다가 조금 흥미가 생겼다. 하림과 함께라면 재밌을 것 같아 생일 기념으로 온 거였다. 대신 하림이 다 푸는 게 아니라 동규도 열심히 해 본다는 약속을 하긴 했는데, 사실 동규는 자기가 하나라도 풀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제가 문 닫고 나가면 시작하시면 돼요.”

수갑 푸는 건 하림이 해 주겠다며 시작한 지 30초도 되지 않아 동규의 손은 자유를 찾았다.

“……해?”

“해. 옆에 따라다니면서 도와줄게.”

뭐부터 건드려야 할지 몰라 헤매는 동규를 위해 하림이 “어, 저 책 왜 혼자만 빠져 있지?”, “서랍 속에 중요한 힌트가 들어 있을 것 같은데.”, “창문 밖이 좀 수상하지 않아?”라며 동규가 감을 잡을 수 있도록 해 줬다. 감을 잡기 전까지 동규는 정말 쓰잘데기없는 소품들을 죄다 하림에게 들고 와 “이것도 중요한 거야?”라며 일일이 검사를 받았다.

그래도 막판이 되었을 땐 동규도 하림의 도움 없이 혼자 이것저것 잘 맞히고 기계 장치도 잘 작동시켰다. 방을 탈출했을 땐 제한 시간인 한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은 시간이었다.

“헐. 시간 순삭.”

“그치? 진짜 재밌다니까. 고난이도 전용 방 탈출 카페 서울에 백 개만 생겼으면 좋겠다. 계절마다 리뉴얼도 자주자주 되고. 재밌었다니까 다행이야. 또 하러 오자.”

“응.”

그러면서도 동규는 열심히 준비한 고백문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언제든 고백의 타이밍이 찾아오면 바로 튀어나올 수 있도록.

그런데 하림과 계속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동규는 어쩐지 고백문의 첫 문장인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은 정말 이기적이고 배려 없고 미안한, 그런 말이야’를 꺼낼 수가 없었다. 하림이 생일이라고 엄청 잘해 주는데 내 맘 편하자고 고백해 놓고 소원 핑계 대면서 잊어 달라니. 세상에서 제일 파렴치한 놈이 아닐 수가 없다.

“이건 엄마가 준비한 거. 열심히 고민한 거라고 잘 갖다주래.”

저녁을 먹기 위해 도착한 레스토랑에서 하림이 집에서부터 들고 온 쇼핑백을 동규에게 건넸다.

“뭔데?”

“나도 몰라.”

엄마가 아침에 쇼핑백 꺼내 주는 순간 로고 확인하고 만년필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하림은 시치미를 뗐다.

“뜯어도 돼?”

“네 건데 왜 나한테 물어.”

“그럼 집에 가서.”

“풀어 봐, 풀어 봐. 궁금해.”

“그래.”

“뭐지, 뭐지.”

“……편지도 있네.”

편지에는 선물이 뭔지 써져 있을 것 같아 동규는 금색 리본을 잡아 풀었다. 까만 포장지를 뜯자 로고가 박힌 하얀 박스가 나왔다.

“……뭐지.”

“빨리 열어 봐.”

까만색 직사각형 케이스는 무겁진 않았다. 슬쩍 흔들어 봐도 소리도 안 나고.

“펜?”

“만년필이네. 너 글 쓰니까 엄마가 골랐나 봐. 편지도 읽어 봐. 빨리.”

정말 감사하고 좋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하필 글이 써지지 않는 슬럼프에 빠진 동규에게는 만년필 선물이 상당한 치명타로 다가왔다. 그래서 맛있는 코스 요리가 나와도 우울했고 고백할 마음도 아예 접었다. 그래, 이 상황에 고백이 뭐냐. 어차피 죄책감이 들어 내키지 않는 고백이었다. 그냥 소원은 나중에 서하늘에게 10만 원 주고 팔아야지.

“오늘 언제 잘 거야. 새벽에?”

“아마도.”

“일찍 잘 계획은 전혀 없고?”

“응.”

“12시 넘어서 잔다는 거지?”

“응. 빨리 자야 1시 넘어서 잘걸.”

“그렇군.”

“제야의 종 치는 거 볼 거야.”

“맞다. 너 그거 좋아하지.”

“좋아하는 건 아니고.”

“어쨌든 알았어. 오늘 일찍 자면 안 돼.”

“응.”

하림은 굉장히 신나 보였다. 내일이면 열아홉에 고3이 되는 건데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걸까. 보통의 예비 고3들은 새해가 오는 걸 엄청 싫어하던데.

“내일 봐.”

“그래 빨리 가, 엄마가 기다리시겠다.”

평소 같으면 더 놀고 가자고 할 하림이 웬일로 집에 들어가라며 동규를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동규가 아쉬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 가?”

“응? 그럼 뭐 하게.”

“아니야.”

오늘 하루 종일 재밌게 놀았다는 건가. 하긴, 방 탈출 카페도 하고 서점에 들러 서로 책도 선물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화가 전시회도 다녀왔고 저녁은 셰프님이 메뉴에도 없는 요리들을 몇 개나 만들어 주고 그랬으니 하림은 오늘 하루 즐거웠을 거다. 동규도 즐겁고 행복하긴 했는데, 그만큼 슬프고 우울했다.

엄마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무료한 연말 시상식들을 봤다. 엄마는 드라마광이라 채널을 돌려가며 누가 무슨 상을 받는지 열심히 살폈다. 연기를 못한 배우가 상을 받거나 화제성도 적고 스토리도 이상했던 드라마의 배우가 상을 받으면 엄마가 불같이 화를 냈다. 동규는 엄마가 화를 내든 누가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울든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림이랑 메시지라도 주고받으면 그나마 나을 텐데 부모님과 같이 있는지 메시지 하나가 없다.

“졸리면 들어가서 자. 엄마도 조금 있으면 잘 거야.”

“싫어. 종 치는 거 보고.”

“우리 아들 벌써 열아홉 살이네. 내년이면 어른이야.”

“어른 되기 싫어. 평생 청소년으로 있고 싶다.”

“왜, 어른 되면 술도 먹고 야한 영화도 보고 할 수 있는 거 많잖아.”

“몰라. 그냥 다 싫어. 지루해. 짜증 나. 다 망했으면.”

“설마 좋아한다는 걔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동규는 오지 않는 하림의 연락만 기다렸다. 알람 온 게 하나도 없는데 계속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고, 잠금을 풀고, 하림과의 채팅창에 들어가고. 또 시간을 확인하고 잠금을 풀고 하림에게 메시지가 온 건 없나 확인하고.

11시가 넘어가자 친구들에게 메시지가 하나둘 도착했다. 1년간 수고했고 고생했고 어쩌고저쩌고 내년에도 잘 지내자 어쩌고저쩌고. 다 지루하고 재미없어. 동규는 친구들에게서 온 메시지를 몇 개 읽고 말았다. 배우들이 울면서 얘기하는 수상 소감도 다 지루하고 따분했다.

“어디 가.”

“오줌 싸러.”

“올 때 엄마 물 좀.”

볼 일 보고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았다. 나오는 게 한숨뿐이었다. 작년 생일에 서하림 케이크 받고 엄청 좋았는데. 울기도 많이 울고. 지난 365일을 되돌아보니 한심하고 찌질하기 그지없는 1년이었다. 내년 생일에도 이럴까. 다음 1년은 올해보다 더 말할 수도 없이 처참하고 우울하면 어떡하지. 평생 생일은 이렇게 우울하고 불행하고 그러면…….

“김동규! 하림이한테 전화 왔어!”

동규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거품 묻은 손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화장실을 나가 전화를 받았다.

-뭐 하고 있었어. 이제 곧 제야의 종 치는데.

“화장실!”

대답이 너무 우렁차게 나와 동규도 엄마도 하림도 놀랐다.

-화장실?

“손…… 씻으러.”

-안 바쁘면 좀 나와.

“지금?”

-제야의 종보다 더 좋은 거 보여 줄게. 예쁘고 반짝반짝한 거.

“그게 뭔데.”

-궁금하면 나와. 지금 여기 어디냐면, 우리 가끔 산책하는 너네 아파트 산책길인데 111동 뒤에 계단.

“집에 간 거 아니었어?”

-뭐, 가긴 갔었는데 예쁘고 반짝반짝한 거 가지러. 아무튼 여기서 기다린다. 너 나올 때까지 밤새도록 기다.

“지금 나가.”

-천천히 와.

전화를 끊자 엄마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물었다.

“하림이가 나오래?”

“응. 뭐지.”

“밤늦었으니까 얘기 조금만 하고 하림이 집에 보내.”

“응.”

밖에 추운데 왜 우리 집 앞도 아니고 굳이 111동 계단에서 기다린다는 거지. 동규는 빠르게 나갈 준비를 하면서도 궁금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갔다 올게.”

“안에 옷 따듯하게 입었지?”

“오늘 별로 안 추워.”

“그래도 겨울이야. 반팔 입고 나갔다간 또 감기 걸릴라. 빨리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우리 아들 키 커서 롱 패딩이 그냥 패딩이잖아.”

“……귀찮은데.”

방으로 다시 돌아온 동규는 바지만 갈아입었다. 기모 있는지 확인해 본 엄마가 목도리를 둘러 주고는 동규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잘 했어. 엄마 12시 넘으면 잘 건데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마.”

“응. 금방 올걸.”

뛰긴 싫어 걷고는 있지만 반쯤은 뛰는 속도였다. 동규는 부지런히 걸으며 111동 계단으로 향했다. 111동 계단은 동규네 아파트 가장자리를 빙 둘러서 조성된 산책길에 난 유일한 계단이지만 아파트 안쪽 구석에 위치해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춥긴 해도 바람이 불진 않아 체감 온도는 그렇게 낮지 않았다. 동규는 목도리를 코까지 올렸다.

“김동규!”

동규는 계단 제일 위에 서 있는 하림을 보고 빠르게 계단에 발을 디뎠다.

“…….”

그러자 평범한 계단에서 환하게 불이 켜지더니 주변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동규는 두 번째 계단에서 더 올라가지도 못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발치를 열심히 살펴보았다. 세 번째 계단에 조심스럽게 발 하나를 얹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세 번째 계단에도 불이 들어왔다.

“이거…… 왜 이래?”

커다래진 눈으로 동규가 위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하림은 어깨를 씰룩했지만 웃고 있는 얼굴 주변으로는 입김이 흩날렸다.

동규는 세 번째 계단으로 올라와 섰다. 그리고 또 한 계단을 올라왔다. 잘 보니까 계단 양 끝에 무슨 장치 같은 게 달려 있는 것 같다. 서하림이 설치했나? 동규는 탁구공만 한 까만색의 무언가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까 카메라 렌즈 비슷한 것도 보였다. 발을 인식해서 켜지는 건가. 그러면 쟤는 어떻게 올라간 거지? 한 번 인식되면 켜지고 그다음은 꺼지고 그다음은 또 켜지고 그다음은 꺼지고 그런 건가. 동규가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불은 여전히 커져 있었다.

“……아니네.”

“야! 뭐 해!”

다시 첫 번째 계단을 디딘 동규는 저를 부르는 하림을 보고 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심장 고동이 거세게 울려 퍼졌다. 숨이 가빠지고, 입술이 말랐다. 이렇게 로맨틱한 이벤트로 열여덟의 생일을 마무리하게 될 줄은…….

“김동규! 빨리 올라와!”

지금이야 말로 고백문을, 아니 그 고백문은 이런 분위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온통 미안함투성이인 그런 고리타분하고 이기적인 고백문보다는 그냥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얘기하고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들을 얘기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 하림의 반응을 봐서 잊어 달라고 하든지 아니면 그냥 서먹한 사이가 되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소원도 있으니까……. 동규는 고개를 돌려 발아래 반짝이는 불빛들을 눈에 담았다. 이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면, 이 빛들이 제 뒤에서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것 같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동규는 잔인하고 가시 돋친 말로 거절을 당한대도 벅차오르는 한마디를 하고 싶어 계단을 올라갔다. 참을 수도 없었고 참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냥, 아무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널 너무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만이 동규가 할 수 있는 모든 언어였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하림에게 가까워질수록 빨라졌다.

“어때. 예쁘지. 반짝반짝.”

말없이 동규는 고개만 끄덕였다.

“제야의 종보다 별로야?”

마지막 계단을 하나 남겼을 때, 두 사람의 시야는 똑같아졌다.

“아니.”

“지금 시간 12시 3분, 우리 이제 열아홉.”

“나 할 말 있어.”

고백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서 죽을 것 같다.

“할 말 있어, 서하림.”

동규는 살기 위해 참을 수 없는 고백을 시작했다. 떨리는 목소리가 부끄러웠다.

“해.”

“소원이야. 소원 쓸게. 듣고 잊어 줘.”

“응, 알았어.”

“……난, 나는.”

심장이 너무 뛰다 못해 귓가에서 쿵쿵 울리는 기분이다.

“종종 내가…… 어디론가 사라졌으면 하고 생각해.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고 사람들도 다 없어졌으면 좋겠고. 그런데 그러기 싫어. 왜냐면, 왜 그러냐면…… 아침에 일어나서 널…… 너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 보고 싶으니까. 만나면, 어제도 하루 종일 그렇게 붙어 있어서 몇 시간 만에 만나는 거라 새로운 일도 없는데…… 너랑 얘기하는 모든 게 재밌고…… 너랑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너랑 헤어지고 집에 오면, 널 만나서 행복했던 하루를 끝내기 싫어서 잠을 자기가 싫어. 근데 내일 또 너 만나려면 자야 하니까 꿈에서도 너를 만나길, 네가 나오기를 기도해. 이제 나는…… 하루의 모든 순간들이…… 너밖에 없어.”

어느 영화에서 나올 법한 멋진 고백을 하고 싶지만 동규는 제 마음을 가장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고르는 것만 해도 버거웠다. 어떻게 말을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순 없었으나 이 정도면 되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뭐냐면…… 나…… 서하림, 나…… 너…….”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났다.

“좋아해.”

“…….”

“좋아……하고 있어. 미안. 대답은…… 하지 않아도.”

하림은 동규의 목도리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동규의 뒷말이 하림의 입술에 막혀 사라졌다.

아주 가까이에 눈을 감은 하림이 보였다. 동규는 무슨 상황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도 쉬지 못했다. 하림의 차가운 입술이 따뜻해질 때까지, 따뜻해진 입술의 감촉이 사라지고 나서도 동규는 고장 난 로봇처럼 서 있었다. 심장만이 세차게 뛰어 꿈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이게, 내 대답이야. 충분해?”

목도리를 놓고 조금 떨어진 하림이 흔들리는 동규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했다. 온갖 감정이 얽혀드는 눈동자에 하림은 동규의 목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살짝 틀었다. 다시 입술이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깝게 동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물었다.

“……충분하냐고.”

동규는 키스의 충격으로 말을 잃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눈 감아.”

하림이 동규의 두 손을 제 허리에 둘러 주었다. 동규는 눈을 감고 입을 맞추는 하림을 따라 사르르 눈을 감았다. 겨울 공기에 차갑게 식은 입술이 금세 따뜻해졌다.

혀를 쓸 줄 몰라 두 사람은 입술을 물었다가, 잠시 떨어져 고개를 틀고 다시 입을 맞춰 숨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 다급한 숨이 오가고 이따금 열에 들뜬 눈동자가 시선을 짧게 마주했다.

동규의 아랫입술을 오래 물다 떨어진 하림은 숨을 들이쉬며 침을 꼴깍 삼켰다. 하림이 다시 입을 맞춰 오지 않아 동규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리할 말을 꺼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

동규가 뭐라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하림은 갑자기 동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동규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동규의 풍성하고 부드러운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 이게…… 안 믿, 안 믿어지는데.”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봐.”

“너…… 울어?”

놀란 동규가 품에 안긴 하림을 떼어 놓았다. 하림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았지만 일렁이던 눈물이 결국 또르르 흘러넘치고 말았다.

하림은 눈물을 닦고 동규에게 짧게 입맞춤을 했다. 귀여운 쪽 소리가 나는 키스였다.

“내가…… 좋아한다는 그 흔한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어도 동규는 하림이 울어 자기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너 좋다고 그렇게 티를 내고 너만 예뻐해도 하나도 눈치 못 채고……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장난으로…….”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온 하림은 아예 동규의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 울었다. 동규가 하림의 등을 토닥이며 같이 울었다. 하림이 울지 말라고 어깨를 퍽퍽 쳐 동규는 눈물만 찔끔 흘리는 게 다였다.

“원래는 내가 먼저 고백하려고 그랬어.”

조금 진정이 된 하림이 다시 동규의 품에서 떨어져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옛날부터 알아서, 네 멱살 잡고 ‘너 나 좋아하지, 다 알아. 나도 너 좋아해’ 하면서 고백하려고 그랬는데…… 네가 항상 생각만 많고 그러니까…….”

“응.”

“나보다는 네가 고백을 하면 뭔가 그냥, 뭔가 더 좋은 그런…….”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가던 하림이 또 동규에게 안겼다. 동규는 자기가 다 잘못했다며 하림을 달랬지만 하림이 동규의 어깨를 팡팡 치며 미안하단 말 하지 말라고 울면서 화를 냈다.

“……아무튼 그래서 계속 기다리고 기다렸어. 우리는 오래 알았으니까, 친구라는 관계를 네가 깼으면…… 해서…….”

“그만 울어. 나도 눈물 나.”

“이게 다 네가…… 바보처럼 눈치도 못 채고, 내가 너 그렇게 예쁘다 멋지다 반했다 귀엽다 얼마나 말했어. 집에 매일 오라 그러고 밥도 꼬박꼬박 먹이고 선물도 맨날 사 줘, 맛있는 것도 갖다 바치고…… 너 때문에 내가 케이크도 만들어 보고…… 싸워도 먼저 사과하러 가고 다…… 내가 진짜 얼마나 너한테…….”

목도리 때문에 정확히 들리지는 않아도 동규는 하림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자신이 매일 밤 베개를 적시며 가슴앓이 하는 동안 하림도 똑같은 밤을 보냈다는 얘기를, 제 답답한 성격에 삽질이 반복되어도 그저 기다리고 기다리며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던 하림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알아채지 못한 게 더 신기할 정도였다.

“잘못했어.”

“잘못한 거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춥, 추운데 어디 들어가자. 우리 집 갈래?”

“몰라. 나 지금…… 너무 눈물이…….”

동규는 휴대폰을 열어 엄마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피곤해서 먼저 잔다고 들어오면 현관문 걸쇠 걸어 놓으란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는 하림의 등을 토닥이며 우는 하림을 달랬다.

“우리 집 가자.”

“울었는데. 아줌마 만나면 뭐라고 그래.”

“엄마 잔대.”

“진짜?”

하림은 동규의 품에서 벗어나 물었다. 울어서인지 추워서인지 빨개진 코끝이 귀엽다. 놀라 동그랗게 뜬 눈도 귀엽고.

“엄마 요즘 새벽에 일찍 나가서. 좀 됐어. 어제는 회식도 있었는데 새벽에 출근했어. 그래서 엄청 피곤하다고 아까 오늘 일찍 잔다 그랬어.”

“그럼 가자.”

동규의 손을 잡은 하림이 앞장섰다. 눈물이 완전 그치지 않아 얼굴이 반질반질했다. 꺼져 있던 불빛이 하림과 동규의 발걸음에 맞춰 다시 하나씩 하나씩 두 사람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동규는 이 마법 같은 계단이 꼭 천국으로 가는 계단처럼 느껴졌다.

몇 걸음 걷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림은 별거 아니라는 듯 눈물을 슥슥 닦고 힘차게 계단을 내려갔다. 동규는 계단에 달린 조명이나 센서들을 두고 가도 괜찮은지 걱정됐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하림을 따라 걸었다. 누가 손잡은 걸 볼까 봐 주변도 계속 살폈고 뽀뽀한 게 CCTV에 다 찍혔을 텐데 그것도 걱정이 됐다.

그래도 아직 하림의 말랑말랑했던 입술의 감촉을 잊을 수 없어 동규는 남아 있는 한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웃음도 자꾸 나왔다.

집에 도착한 동규와 하림은 아주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동규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살금살금 걸어 화장실에서 가볍게 씻었다.

“아줌마 깨면 어떡해.”

“우리 엄마 잠귀 어두워.”

동규는 하림과 먹을 핫 초코와 녹차를 타왔다. 하림이 따끈한 머그컵을 두 손으로 잡았다. 하림이 아무런 말이 없자 동규도 콩닥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눈동자만 굴렸다. 정적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럽다. 뭐라도 하림과 얘길 나누고 싶은 동규는 의자에 걸어 둔 하림의 베이지색 코트에 대해 말해 보기로 했다.

“……아까 코트만 입고 안 추웠어?”

“추워 죽는 줄.”

“왜 그랬어. 감기 걸리면 어떡해.”

“김동규한테 예쁜 옷 입고 고백하려고.”

“그…… 고, 마워.”

이런 엄청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동규는 태연한 하림의 대답에 광대가 씰룩거렸다.

“장난이고, 별로 안 추웠어. 그치.”

“응. 근데 언제 가게? 벌써 12시 반이야.”

“자고 갈 건데.”

“어?”

“집에 가기 싫어.”

“왜?”

또 시작이네. 하림은 머그컵을 내려놓고 동규를 바라보았다. 침대 옆에 나란히 앉아 눈높이가 엇비슷했다.

“키스한다.”

“지금?”

짧게 입을 맞췄다가 떨어진 하림이 동규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당황한 동규가 뒤로 몸을 빼 조금 떨어졌지만 하림이 바로 따라와 이번에는 깊게 들어왔다. 하림이 눈을 서서히 뜨면서 동규에게서 입술을 뗐다. 동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핫 초코 맛 나.”

“그, 야 내가 핫 초코 마셨으니까…….”

“나 집에 가기 싫어. 이번에도 귀엽게 ‘왜?’ 하고 물어봐.”

입술이 거의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한 하림 때문에 동규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렀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무슨 사고라도 치겠다는 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왜?”

“귀여워서.”

하림은 쪽 하고 입을 한 번 맞추더니 동규를 꽉 껴안았다. 두 사람 다 동규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동규에게로 하림의 무게가 훅 하고 들어왔지만 동규가 한 팔로 두 사람의 무게를 가볍게 지탱했다. 나머지 한 손은 공중에서 방황하다가 하림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그러자 하림이 동규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게 느껴졌다.

“자, 잠은 어디서 자게.”

“네 침대에서. 문 잠그고 자자.”

“…….”

“아무 짓도 안 할게. 뽀뽀만 할게.”

“그게 뭐야.”

동규를 안고 있던 하림이 고개를 들어 동규와 눈을 마주했다.

“설마 뭐 기대한.”

“아니.”

두 사람은 빛의 속도로 튀어나온 동규의 대답에 마주한 고개를 돌렸다. 하림은 동규 쪽으로 잔뜩 기울이고 있던 몸도 바로 했다.

한 번 찔러 본 하림은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고자 애썼다. 잘 되진 않았다. 차라리 동규가 맞다고 했거나 아예 대답을 하지 않았다면 나았을 텐데 괜히 아니라고 해서 더 이상했다. 동규 역시 너무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대답한 게 쪽팔렸다. 뭔가를 기대한 게 맞는데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한 꼴이었다.

두 사람은 녹차와 핫 초코를 다 마실 때까지 한마디도 없었다. 엄청나게 어색했고 어색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뜨거운 차를 마시고 나니 몸도, 분위기도 살짝 풀린 것 같아 옷을 갈아입고 양치를 했다. 하림은 동규의 옷을 입은 게 좋다고 양치하는 동안 실실 웃었고 동규도 로맨틱했던 첫 키스를 떠오르며 웃었다.

하림은 말했던 대로 정말 동규의 침대의 누웠다. 그리고 눕지 못하고 서 있는 동규의 손에 깍지를 꼈다. 이렇게 어색한 상황을 동규가 타파할 용기도 비책도 없을 테니 결국 하림의 몫이었다.

“빨리 누워. 엄청 졸려 지금.”

“싫어.”

“왜. 바닥에서 자게?”

“몰라.”

“그럼 내가 바닥에서 잘래.”

“그건 안 돼.”

“그럼 같이 자.”

“그것도…… 안 돼.”

“아무 짓도 안 한다니까.”

“…….”

“너도…… 아무 짓도 하지 마. 나 진짜 피곤하고 졸려.”

좀 전처럼 말도 못 할 정도의 어색한 기류가 흐르진 않았다. 하림이 자연스럽게 얘기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졸린 건 진짜라 잠이 쏟아져 이번에는 동규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동규는 하림의 옆에 누웠다. 동규 키에 맞춰 사느라 보통 침대보다 좀 더 큰 사이즈의 침대가 장정 둘이 누우니 꽤 좁았다. 벌써부터 한 침대를 써도 되나 싶었지만 동규는 아무 짓도 안 하면 된다는 합리화를 해 보았다.

“옷은. 안 불편해? 역시 집에 가서.”

“김동규 냄새도 나고 좋은데 뭐.”

“안대도 없고 수면 모자도 없는데…….”

“문 잠갔어, 안 잠갔어.”

“잠갔어.”

하림이 하품을 길게 하더니 말이 조금씩 느려졌다.

“잘했어. 아, 너무 울었어. 내일 눈 붓겠다. 붕어 될 듯.”

“너는 그래도 예뻐.”

“……뭐래냐.”

사귀는 사이도 됐으니 이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아 꺼낸 말인데 하림이 웃음을 참는 걸 보고 동규는 민망해졌다. 어디 숨고 싶은 마음에 엎드리고 누웠다.

“진짜 이제 자자.”

“……아까 네가 그랬잖아. 행복한 오늘을 끝내기 싫어서 자기 싫다고.”

동규는 엎어져 있던 자세를 꾸물거리며 하림을 바라보고 누웠다. 그러자 하림이 동규의 얼굴에 잔뜩 입을 맞추며 간지럽혔다.

“응.”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동규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하림이 동규의 입술에 또 입을 맞췄다.

“……너 키스 너무 잘하는 것 같아.”

“나는 원래 뭐든 다 잘해서.”

반박하지도 못하고 토라진 동규 때문에 웃음이 터진 하림이 또 동규의 입술 위로 쪽쪽거렸다. 혀라도 들어갔다간 난리 나겠네.

“삐지지 마세요. 나도 첫 키스니까.”

“진짜?”

“뭐야. 이 반응은.”

“엄청 많이 해 본 줄…… 아니, 그 전에, 엄청 옛날에 했을 줄 알았는데…….”

눈이 반이나 감긴 하림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하품을 했다.

“엄청 많이라니.”

“미안.”

“사귄 애들은 많았지. 아니. 아니다. 엄청 많이는 아니야.”

“…….”

“왜냐고?”

동규는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하림의 여자친구들이 미워졌다. 하림도 미웠다.

“제대로 사귄 것도 다섯 명? 솔직히 그건 사귄 것도 아니야. 어렸을 때 사귀어 봤자 뭘 한다고.”

“언제 사귄 건데? 초등학교 아니면 중학교?”

“몰라. 지금 졸려서 생각 잘 안 나. 근데, 갑자기 든 생각이 있는데…….”

“응.”

“내가 작년 생일 즈음에 널 좋아한 줄 알았거든 왜, 네가 편지 써 준 거. 그때부터 시작인 줄 알았는데 그거보다 더…… 내가 너를 되게 오래…… 좋아한 거 같아. 그냥, 고백 받으면 사귀고 그랬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옛날부터 너한테 관심 쏟느라 그랬던 거 같아서. 그때부터 따지면 언제부터지 너 좋아한 게. 한…… 중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인가…… 나 너무 졸려.”

“불 끄, 끌까?”

“자기 싫다. 근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너 볼 생각에 설레.”

동규는 부끄러워 대답도 하지 못하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다시 하림의 옆에 누웠다. 하림이 동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손도 잡고 자자. 나 너랑…… 손 꼭 잡고 자고 싶었어. 넌 그것도 모르지. 내가…… 저번에…… 진짜 그랬는데.”

동규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하림의 손을 잡았다. 요령 없이 정말 잡기만. 하림이 어둠 속에서 살짝 웃고는 손을 펴 깍지를 꼈다. 생일날 김동규 집에서 자면서 얼마나 이렇게 손깍지를 끼고 싶었는지.

“잘 자, 김동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동규는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 꿈에 놀러 와. 나도 그럴게.”

이런 엄청난 말에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머리를 팽팽 돌리는 동안 하림의 숨소리가 느리고 규칙적으로 변했다. 동규가 겨우 “잘 자”라는 아주 간단한 말을 완성했을 땐 이미 하림이 잠에 든 지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그러고도 동규는 한동안 눈을 감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오늘이 자고 일어나면 물거품처럼 사라질까 봐 잠에 들기 무서우면서도 숨을 쉬면 느껴지는 하림의 냄새와, 살결과 숨이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빨리 자야겠다. 서하림과 같은 햇살을 맞이하며 눈을 뜨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보는 게 하림의 얼굴인, 그런 놀랍고도 마법 같은 하루가 어서 찾아왔으면. 귓가를 두드리는 초침소리가 너무 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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