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18화 (2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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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시간에 휴대폰 쓰는 거 걸렸다간 벌점도 받고 혼도 엄청 나는 걸 알지만, 동규는 등교하자마자 엎어져 기사 검색창에 ‘대한민국 인재상’을 쳐 놓고 1초에 세 번씩 새로 고침을 했다. 오늘 첫 기사는 7시 30분쯤 올라온 기사로 각 지방 신문사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몇 명이 받았고 지방 국립대에서 누가 받았고 하는 기사였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상이 진행되기 전까지는 계속 그런 작은 지역 신문사들의 기사들이 전부였고 하림에 대한 기사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1교시 시작되고도 계속 비슷한 기사만 올라와 시상식 시간인 10시에 알람을 맞춰 두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 놨다.

지금 시간은 10시 20분, 2교시 쉬는 시간 종이 막 울리고 있었다.

“야, 똥똥규.”

동규는 손가락만 빠르게 움직이며 새로 고침을 했다.

“추천 입학생도 벌점은 벌점대로 똑같이 받아. 알아?”

“어.”

“10시 됐다고 바로 상 주는 게 아니라 개회식 하고 무슨 관계자 소개하고 이것저것 한 뒤에 50명을 한 명 한 명 불러서 상을 줄 텐데 기사 뜨려면 점심시간은 돼야 하지 않겠냐?”

“……응.”

“좀 전에 문학쌤이 너 휴대폰 하는 거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준 건데 모르지.”

“응.”

“어디 가?”

“보건실. 그냥 아프다고 종일 거기에 있을래.”

“아예 편하게 누워서 서하림 기사가 언제 뜨는지 붙들고 있으시겠다?”

“진짜 아파.”

“어디가.”

“……배.”

“그러시겠지. 이따 밥 먹을 때 늦지 말고 급식실로 와.”

“응.”

하늘과 마찬가지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보건 선생님을 모르는 척, 출석 번호와 이름을 적고 침대에 들어가 누운 동규는 여전히 재미없는 내용만 올라오는 대한민국 인재상 기사를 새로 고침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30분쯤 뒤, 하림의 기사가 뜨긴 했지만 기대한 실시간 사진이 아니라 학생증 사진이었다. 하림의 양옆으로 고등학교 학생 둘, 중학교 학생 둘의 사진이 붙어 있었지만 동규의 눈에는 하림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왜 기자들 일 안 해.”

한 시간 반이 다 되도록 똑같은 화면만 보면서 손가락 움직이는 것도 지쳐 갈 즈음, 하림의 기사가 떴다. 심지어 상 받고 있는 순간과 상 받고 대통령과 악수를 하는, 그야말로 동규가 원하던 실시간 사진과 함께. 누워 있던 동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 서울세종문회관에서 열린 ‘올해의 대한민국인재상’ 시상식에서 중고교 부문에 서하림 세문고등학교 학생과 (……) 중고교부 대표자로 선정된 세문고등학교 2학년 서하림 학생은 과학 분야의 학문적 소질 및 탐구 능력이 탁월한 점을 인정받았다.

서하림 학생은 초등학생 때부터 다수의 저명한 수·과학대회에서의 수상과 다양한 연구 활동 실적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수·과학 문제집 및 교과서 학생 검정단과 초등학생 수학 교실 등에 재능 기부를 하며 (……) 서하림 학생은 “물리학이 세계인의 기본 소양이 되는 것이 꿈”이라며 “지구를 넘어 우주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절대적인 진리를 많이 찾아내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남한형 교육감은……]

“말도 멋지게 잘하네.”

점심시간에는 하림이 중고등학생부 대표 수상자로 소감을 발표하는 사진과 모든 수상자들이 한데 모여 찍은 단체 사진도 올라왔다. 하림은 키가 커서인지 제일 뒷줄이었지만 한가운데였다. 활짝 웃고 있는 데다가 얼굴도 하얘서 백 명이 넘는 사람들 속에서도 빛이 났다.

슬슬 정리하고 급식실로 가려는데 하림에게 전화가 왔다. 일부러 점심시간 시작되는 시간에 딱 맞춰 건 것 같았다.

-김동규! 뭐 해!

한껏 들떴는지 신난 하림의 목소리에 동규도 덩달아 신이 났다.

“점심 먹으러.”

-급식실 가는 중?

“응.”

-나도 이제 점심 먹어. 스테이크 나온대. 엄마랑 아빠랑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맛없겠지?

“엄마할아버지?”

-응. 아니, 시상식에 나만 엄마에 아빠에 할머니, 할아버지 다 왔어. 쪽팔리다 진짜. 다른 애들은 부모님이랑만 왔는데.

“어, 그럼 지금 어른들이랑 있는 거 아니야?”

-맞아. 근데 화장실 간다고 지금 잠깐 나온 거. 다시 홀로 들어가 봐야 돼.

“기사 사진 봤어.”

-그래? 잘 나왔어?

“응. 사진 메시지로 보내 줄까.”

-아니, 나도 찾아보면 돼.

“인터뷰…… 잘했더라.”

-그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수상 소감도 멋지게 딱 했지. 이따 9시 뉴스에도 나간다.

“또 데뷔하네.”

-데뷔가 아니라 컴백이지.

하림을 보고 과학계 아이돌이라고 얘기하던 하늘의 말이 떠올라 동규는 작게 웃었다.

“그러게. 컴백.”

-학교 끝나면 우리 집에 올 거지?

“오늘? 바쁜 거…… 아니야?”

-아니? 시상식 다 끝나면 한가한데?

“그럼 갈게.”

-응. 내가 먼저 집에 갈 것 같으니까 딴 데로 새지 말고 빨리 와. 기다리고 있을게.

“……응.”

-이따 봐. 끊는다!

동규는 잠시 빠르게 뭔가를 생각하고 하림을 불렀다.

-왜.

“학교 끝나고 딴 데 한 군데만 들렀다 갈게.”

-아, 왜.

“케이크…… 사 가려고.”

-아하. 그래 그럼.

엠바고가 풀린 하늘이 친구들에게 얘기를 해 놓은 덕분에 급식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학교 친구들이 하림이 상을 받았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동규는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하림의 이름에 제가 다 괜히 뿌듯했다.

“서하늘.”

“오냐.”

“학교 끝나고 케이크 사러 가려고 하는데 학교 근처나 너네 집 근처에 케이크 맛있게 하는 곳 알아?”

“역삼역 앞에 호텔 하나 있잖아. 거기 베이커리 가면 바닐라 밀푀유 팔거든. 서하림이 그거 좋아해서 잘 먹어. 가격이, 홀케이크로 하면.”

“아. 잠깐만. 좀 적고.”

동규가 휴대폰을 꺼내 메모장을 켰다. 하늘이 다시 처음부터 얘기를 해 줬다.

“조각으로 잘라 놓은 거 말고 홀케이크가 6만 원인가? 그럴 거야. 근데 그거 존나 작아서 네가 세 입 먹으면 끝일 걸.”

“괜찮아.”

“잠만. 1분만 기다려.”

하늘은 그 호텔 베이커리에서 이번 시즌에만 판매하는 한정 케이크가 뭔지 빠르게 검색했다.

“오,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벌써 파네. 야, 거기 가을 시즌 리미티드로 호박케이크 시폰케이크 파는데 맛있대. 그거랑 밀푀유 같이 사 들고 가면 될 듯? 후기 보니까 많이 안 달고 엄청 부드럽고 인위적인 호박맛이 아니래. 같이 한정으로 나온 호박몽블랑도 맛있나 봄? 헐…… 사진 보는데 호박무스에 바닐라빈 섞여 있대. 존나 맛있겠다. 서하림도 존나 좋아할 거 같아. 이거는 1만 2천 원. 호박케이크는 4만 5천 원.”

순식간에 10만 원이 넘게 나가게 생겼지만 동규는 부디 학교 끝나고 달려갔을 때 바닐라 밀푀유와 호박케이크가 있길 바랐다. 큰 돈 쓰는 것보다 케이크가 없는 게 더 절망이다. 조퇴할까. 어차피 수업도 안 듣는데 학교에 오래 있어 봤자 케이크 살 시간만 덧없이 흘러가는 걸.

오후 수업도 전부 듣지 않고 보건실에서 보낸 동규는 오전과는 다르게 이번엔 호텔 베이커리 케이크를 열심히 검색했다. 특히 6교시만 하는 오늘은 3시 20분에 끝나기 때문에 금요일 오후 3시와 4시 사이에 방문해 케이크를 샀다는 후기를 쥐 잡듯 찾았다. 다행히 그 시간대는 금요일이어도 케이크가 남아 있는 듯했다.

또 다른 글에서는 금토일 주말은 3시가 되기도 전에 인기 케이크가 품절되기 시작한다고 쓰여 있어 동규는 우선 종례를 빼기로 마음먹었다. 눈을 퀭하게 뜨고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하자 담임 선생님은 별 말 없이 이른 하교를 허락해 주었다.

그래 봤자 반 친구들보다 10분 일찍 학교를 나오는 거였지만 동규는 택시를 잡아 타 케이크를 샀다. 도착해서 밀푀유와 호박케이크만 살 생각이었지만 이것저것 추천하는 직원의 권유에 비상금과 이번 달 용돈을 5천 8백 원 남기고 다 쓰고 말았다. 카드 결제를 하는 순간 동규에게 카드 이용 내역 문자가 도착했다.

이건 엄마에게도 똑같이 전송되므로 동규는 이따 밤에 엄마한테 변명할 말도 혹시 몰라 미리 생각을 해 뒀다. 서하림이 이런 이런 큰 상을 받아서 친구들이 돈을 모아 축하 케이크를 샀고 우선 내 카드로 긁었다. n분의 1했고 다음 주 중에 친구들이 돈을 주기로 했다. 대충 이런 스토리다. 엄마는 하림을 예뻐하니까 잘 샀다고 하지 혼을 낼 것 같진 않았다.

양손 가득 달콤한 디저트를 사들고 간 동규는 하림과 축하 파티를 하고 집으로 일찍 돌아왔다. 하림은 자고 가라고 했지만 아침부터 시상식에 참가한 하림이 피곤할 것 같다며 동규가 거절했다.

“내가 안 피곤하다니까.”

“단 거 먹어서 그래. 11시 넘으면 졸릴 걸.”

“그건 굳이 오늘 아니어도 항상 그렇고.”

축하 파티 하면서 사 온 디저트들이 맛있어서 다 먹긴 했지만 동규는 하림이 받은 상장을 본 순간부터 기분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올해 동규의 백일장 기록은 그야말로 암전. 엄마가 창작 과외 선생님이 잘못 가르치는 게 아니냐는 불평을 슬슬 꺼내기 시작해 얼마 전엔 창작 과외도 끊었다. 선생님 탓이 아니라는 걸 동규 스스로가 제일 잘 아니까.

과외 마지막 날엔 퇴근한 엄마와 속 싶은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혹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선생님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는 게 있냐고 물었고 동규는 그런 거 절대 아니고 그냥 요즘 슬럼프가 심한 것 같다고 했다.

그 얘길 듣고 엄마가 울었다. 일하느라 잘 챙겨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엄마는 동규가 어릴 때부터 책 좋아하고 글 써서 상도 받아 오니까 동규도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엄마 욕심인 게 아닌가 걱정된다고.

동규는 하는 수 없이 엄마에게 왜 슬럼프가 시작됐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물론, 그 대상이 하림이라는 건 쏙 뺀 채로. 혹시라도 엄마가 하림으로 특정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나 하림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다 제외하고 말했다. 하루 종일 하림과 붙어 있다 보니 하림을 빼고서는 얘길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엄마가 눈물을 매단 채로 동규의 손을 잡고 있어 그 어려운 일을, 하림 없는 짝사랑 이야기를 꾸역꾸역 했다.

‘세상에, 우리 아들이 짝사랑에 밤마다 잠 못 이루는 줄은 몰랐네.’

그리고 동규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안방에서 콘돔을 가져와 성교육을 시작했다. 동규는 갑자기 시작된 성교육에 엄청 당황했지만 엄마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길 해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자위하던 거 처음 들킨 날에도, 몽정하고 새벽에 속옷 빨다 걸린 날에도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서 부끄럽거나 더러운 거 아니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해 준 어른이었다.

‘너무 사랑하면 더 사랑하고 싶고 그래서 조금 더 조금 더 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스무 살 되기 전까지는 엄마는 동규가 그 친구를 위해서 참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야. 지금도 다 큰 것 같고 동규 생각에는 어른이랑 다른 게 없을 것 같겠지만 그래도 학생이고, 근데 그래도 정말 너희가 둘 다 분위기 타고 그 전에 하게 되더라도 준비는 꼭꼭 해야 해. 그건 그 친구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중요한 거야.’

‘……나도 콘돔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는데, 엄마 나 걔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 혼자만 좋아하는 건데 엄마 너무 앞서서…….’

‘고백은 안 하려고?’

‘몰라. 자신 없어.’

‘왜? 걔 남자친구 있어?’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 우리 아들이 좋아한다고 하면 안 넘어갈 여자애가 있어?’

‘그냥 걔는 좋은 친구고 인기도 많고 예쁘고…… 그냥 옛날부터 나 친구로만 생각하고 그래서. 근데 되게 다정하고 세심하고 배려심도 깊고 센스도 좋아서 나 되게 잘 챙겨 주는데 그냥 그게 다야.’

‘원래 좀 다정한 애야?’

‘응. 다른 애들한테도 다 그래. 착하고 그래서 애들이 다 걔 좋아해. 고백도 자주 받아.’

‘인기녀네.’

‘내가 막, 좋다고 티 내거나 그러는 성격이 아니라 걔랑 오래 친구일 수 있는 거 같아. 걔한테 고백했다가 어색해진 애들 몇 명 있거든. 그래서 나도 고백했다가 사이 틀어질까 봐 그것도 걱정 돼. 그냥 이대로…… 혼자만 좋아할래. 현상 유지만.’

‘그래도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차라리 고백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몰라. 그냥 그런 거 생각하면 무섭고 마음 아파. 심란해져. 차라리 내 마음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우리 아들 다 컸다, 정말. 이렇게 첫사랑도 해 보고.’

엄마가 동규를 꼭 안아 주며 나중에 고백을 하게 되든, 아니면 마음을 접게 되든, 그것도 아니고 마음이 점점 사그라지든지 간에 엄마에게 꼭 얘기를 해 달라고 했다. 동규는 알겠다고 하고 같이 엄마를 안아 줬다.

하림과 맛있는 케이크 잘 먹어 놓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동규는 드라마에 열중해 있는 엄마 옆에 붙었다.

“엄마, 안아 줘.”

“하림이네 갔다 온 거 아니야?”

“맞아.”

“근데 왜 이렇게 풀이 죽었어. 하림이가 동규랑 친구들이 축하 케이크 사 줬다고 인증 샷 보내 줬는데.”

서하림 눈치 귀신같이 빠른 건 알아줘야 한다. 비싼 케이크를 왜 이렇게 많이 사 왔냐고 묻길래 축하해 주고 싶어 용돈에 비상금까지 다 써 버렸다는 말을 한 게 전부였는데 말이다.

“……맞아.”

“엄마는 아까 몇만 원이 갑자기 빠져나가서 깜짝 놀랐잖아. 근데 그럼 우리 아들이 왜 이러실까.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좀.”

등을 토닥여 주는 엄마의 손길에 동규는 더 우울해졌다.

“엄마. 나 뭐 해 먹고 살지.”

“아직 하고 싶은 거 딱히 없다며. 글 쓰는 것도 전업 작가는 싫다고 했고.”

“그러니까. 글만 써서는 돈도 못 버는데. 재수 학원부터 알아봐야 하나.”

“공부하게?”

“몰라. 그냥 내 성적으로는 재수 삼수해야 할 거 같아서. 대학 가려면.”

“재수 삼수해서 간다고 해도 가서 뭐 하게. 대학 가도 문제야. 지금이랑 똑같은 고민할 텐데 굳이 하기 싫은 공부 하면서 대학 가는 건 엄마는 반대. 등록금이 한두 푼도 아니고.”

“그럼 뭐 하고 살아?”

“엄마 아빠가 아직 돈 벌고 있으니까 지금부터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지.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데.”

“…….”

“왜 한숨이야. 엄마는 우리 아들한테 부담 하나도 주기 싫어. 정말이야.”

“그냥…… 서하림 옆에서 보고 있으면 걔는 다 잘하고 진짜 대단한데 나는 아니라서 좀…… 오늘 받은 상은 대통령상이래. 막 기사도 엄청 나고 아까 9시 뉴스에도…… 엄마도 봤을 거 아니야.”

드라마 끝나고 나서도 한참이나 엄마가 동규를 달랬지만 동규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엄마가 달래 주는 게 좋아 엄마 품에 안겨 어리광을 실컷 부렸다. 하지만 그것도 엄마가 하품을 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나 이제 씻을래.”

“엄마는 언제나 동규 편! 알지? 사랑해, 우리 아들.”

“응. 나도 사랑해.”

동규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방으로 돌아왔다. 가방 대충 내려놓고 침대에 엎어졌다. 엄마가 피곤할 텐데 빨리 씻고 자라며 문을 두드렸다.

“알았어. 5분만 있다가.”

한 시간이 넘게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을 맞고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하기 좋았다. 온천이라도, 하다못해 사우나라도 가서 밤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으나 미성년자라 그럴 수가 없는 게 정말 아쉬웠다.

방으로 돌아왔을 땐 벌써 12시 반이 훌쩍 넘어있어 동규는 드라이기 대신 수건으로 머리를 열심히 말렸다. 11시 반 쯤에 하림에게 잘 자라는 메시지가 왔었는데 읽고 답장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시간이면 하림은 꿈나라에 가고도 남았다.

책상 의자에 앉아 ‘짝사랑 노래’를 검색했다. 짝사랑 곡으로 유명하다는 90년대의 어느 노래를 재생시키자 이 노래와 같이 듣는 노래들이라며 노래 추천이 떴다. 이제 어지간한 국내 유명한 짝사랑 노래는 다 들어 본 것 같다.

동규는 추천으로 뜨는 노래들 중 익숙한 건 제끼고 처음 보는 곡이 나올 때마다 다 한 번씩 눌러 10초씩 들었다. 초반 도입부가 마음에 안 들면 넘기고 마음에 들면 2차로 가사를 확인했다. 멜로디가 마음에 들어도 가사가 별로면 그 곡도 패스. 멜로디와 가사, 가수의 음색까지 완벽한 곡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꽤 많았다.

동규는 까다롭게 고른 짝사랑 노래들을 골라 새로운 재생 목록을 만들고 이어폰을 찾았다. 저번에 서랍에 넣어 둔 것 같은데 보이지가 않았다. 노래를 아주 작게 틀어놓고 책상 서랍을 전부 뒤졌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이어폰이 보이지가 않는 거다.

어디 갔지. 분명히 여기다 넣었는데. 서랍을 모두 열어도 보이지 않자 동규는 아예 바닥에 앉아 본격적으로 이어폰 찾기에 돌입했다. 하지만 서랍 구석구석, 심지어는 뒤로 넘어갔을까 봐 아예 서랍을 모두 빼 확인해도 이어폰 한 짝조차 나오지 않았다. 동규는 고작 이어폰 하나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아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바닥 가득 꺼내 놓은 물건들을 서랍에 정리도 않고 욱여넣었다. 다시 의자에 앉아 씩씩거리며 진정하려는데 이어폰도 하나 어디다 놨는지 기억을 못 하는 자기 자신이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아, 씨발.”

생각 없이 쳐다본 책장 제일 위 칸에 그렇게 찾았던 이어폰이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삐죽 나와 늘어져 있다. 동규는 그걸 보는 순간 지난주 수요일 새벽에 노래 듣다가 청승맞은 자신이 부끄러워 저기다 던져 놨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진짜 씨발, 아…….”

짜증 나고 한심하고 화도 나고 모든 게 다 맘에 안 들고. 세상에 모든 불행이란 불행은 다 끌어안은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동규는 삐져나와 있는 이어폰을 가져왔다.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을 잡아 뜯었다. 손쉽게 이어폰 하나가 운명을 달리했다. 얇은 줄 하나 끊어졌다고 분노가 줄지도 않고 기분도 풀리지 않아 동규는 의자에 털썩 앉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 의자에서 뚝 소리가 났다.

“헐.”

뭔가 명백하게 부러진 소리였다. 스프링처럼 빠르게 일어나 의자를 살펴보니 부러진 곳은 없고 전과 똑같아 보였다. 뚝 소리와 함께 뜨거워진 얼굴이 원래의 온도를 찾아 빠르게 내려갔다.

“……완전 놀랐네.”

기운이 조금 빠지는 것 같아 동규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의자가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아닌가.

“하, 씨발…… 씨, 아, 아!”

하다 하다 의자까지…….

“아 몰라. 잘 거야.”

머리가 다 마르지도 않았지만 동규는 그냥 침대에 누웠다. 다 좆같고 좆같아서 깨어 있는 게 싫었다. 다행히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동규는 푹 잤다.

아침에 일어난 동규는 이대로는 안 되겠어서 몇 달 만에 백일장 정보가 올라오는 사이트에 들어갔다. 듣보 백일장이든 듣보 공모전이든 뭐라도 나가서 작은 상이라도 받아야 좀 숨통이 트일 것 같다. 공부를 시작하기엔 몇 달 뒤면 고3이었고 기술을 배우기에도 너무 늦었다.

“…….”

백일장 시즌이 지나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자질구레한 백일장과 공모전 정보밖에 없다. 이상한 대회도 많았다. 실존했는지도 의심스러운 역사 위인을 위한 공모전은 그렇다 쳐도 공교육의 발전을 위한 학생백일장은 개최 의도부터 이해가 잘 가지 않는데 대상에겐 상금이 100만 원이나 되는 건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싶어 두 눈을 의심했다. 이런 건 학생들에게 물어볼 게 아니라 전문가들이 할 일 아닌가.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 작은 대회는 넘기고, 이제 막 생긴 신생 대회도 넘기고 하다 보니 남은 건 하나였다.

“바다…… 사랑.”

생긴 지 올해로 7년 된 바다사랑나라사랑 글짓기 대회. 대상은 장관상이고 깜찍한 이름에 걸맞게 상금은 굉장히 적었다. 백일장 시즌도 아닌데다 참가 부분이 중고등부, 대학생부, 일반부로 나뉘는 걸 보니 대학생과 성인들 위주로 참여하는 대회인 것 같다. 다시 보니 대학생부와 일반부는 국비장학생 선발이나 해외 인턴십 제공 등 부상이 빵빵했다. 누가 봐도 취업 스펙 쌓는 용이었다.

일단 정 할 거 없으면 바다사랑글짓기에 참여하기로 하고 동규는 더 열심히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결국 바다사랑글짓기 대회 안내 글로 돌아와 대회 의의와 공모 주제를 휴대폰 메모에 저장했다. 마감은 2주 뒤 11월 마지막 날. 11월 31일자 날인이 찍힌 것까지 접수를 받는다고 하니 여유롭게 하루 전 우편으로 붙이면 되겠다.

무척 오랜만에 워드를 켰으나 글은 술술 써졌다. 공모 주제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동규가 고른 건 ‘바다 여행을 하며 느낀 점’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다 여행을 간 지도 벌써 5년은 된 것 같은데 저 정도는 태어나 바다에 한 번도 안 가 봤어도 상상으로 지어내기에 충분했다. 누가 저 주제로 장편 소설을 쓰라고 해도 쓸 수 있었다.

“식은 죽 먹기지.”

어릴 때부터 수많은 백일장과 글짓기 대회를 나가 봤지만 상을, 그것도 1등상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위해 참여하는 건 처음이었다. 목표가 생겨서 그런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규의 손이 날아다녔다.

3학년 되면 다시 백일장 나가서 나도 예고 애들처럼 상 받을 욕심 가지고 써야지. 마감까지 시간이 많아도 너무 많다. 다섯 개를 써서 골라낸다 해도 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늘은 점심시간마다 하림의 눈치 때문에 밥맛이 떨어졌다. 그렇게 눈칫밥 먹게 할 거면 밥 따로 먹자고 얘기해 봤지만 하림이 하늘의 손을 붙잡고 ‘김동규한테 작업 쳐 주기로 했잖아’라며 눈을 반짝이며 얘기하는 통에 발을 뺄 수도 없다.

하림은 아예 저와 동규 사이에 하늘을 앉게 했다. 그리고 하늘의 팔을 툭툭 치며 뭐라도 해 보라고 눈빛을 쐈다.

“……야 김동규.”

“응.”

“너 서하림한테 소원 하나 쓰는 거 있잖아.”

“아.”

동규는 그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수학여행 때 카트 내기 이겨서 받은 소원. 나중에 혹시라도 고백할 일이 생기면 고백 못 들은 걸로 해 달라는 소원으로 쓸 생각이었다. 어떻게 그걸 잊고 있을 수 있지. 당황한 나머지 집었던 김치를 놓쳤지만 동규는 침착하게 떨어진 김치를 집었다.

“……어.”

“그거 나한테 팔아라.”

“왜.”

“나 뭐 서하림한테 부탁할 거 있는데 죽어도 안 해 준데.”

부탁할 건 있지도 않고 있어 봤자 하늘은 소원 1회권 같은 게 없어도 하림에게 부탁을 잘만 하기 때문에 소원은 한 개도 필요 없지만 일단 던져 봤다.

“싫어.”

“아, 왜. 비싸게 살게. 아니면 너 소원 쓸 거 있어?”

“아마도.”

“내가 나중에 서하림이랑 내기해서 소원 따 가지고 너한테 주면 되잖아.”

동규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려다가 말고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냐 그 눈빛은. 나를 무시하는 의도가 명백하게 읽히는데.”

아니라고 작게 대답하며 동규는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야. 뭐야. 똑바로 보고 대답해라. 내가 서하림한테 못 이길 거 같아서 지금 무시한 거 맞잖아.”

“아니야.”

“야이 씨, 따다 준다니까? 서하림이 나한테 스키랑 보드 발려. 교환하자.”

“싫어.”

“소원 확실하게 없다며.”

“있어.”

“아, 그거 그냥 나 주고 너 이제 담달이면 생일이니까 서하림보고 생일 선물로 소원 하나 들어달라고 하면 되잖아!”

생각해 보지 못한 거였다. 동규는 속으로 하늘에게 천재라며 박수를 쳤다.

“……그래도 싫어.”

소원이 두 개가 되면 하나로 합쳐서 더 큰 소원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하림에게 고백하지 못하더라도 딱 한 번만 안아 본다고 하거나 손을 잡아 본다거나 그런 소원을 첫 번째로 쓴 다음에, 하림이 뭐 한 거냐고 물으면 방금 한 행동은 잊어 달라는 걸 두 번째 소원으로 쓰면 완벽할 것 같다.

“아오. 그래라 그래. 너 다 써라 소원. 얼마나 대애단한 소원 쓰나 내가 지켜본다.”

하늘 덕분에 소원을 하나 더 챙길 일도 생겼고 바다사랑대회도 상 받을 느낌이 강하게 들어 동규는 기말고사 준비하는 동안 공부가 이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사실 기말고사 공부가 아니라 영어 사전을 읽으라고 해도 행복할 수준이긴 했다.

기말고사 마지막 날은 동규가 포기한 수학 과목이었고 그래서 동규는 시험지 받은 지 3분 만에 죄다 찍어 놓고 잠을 잤다. 9시쯤 바다사랑대회 결과가 홈페이지에 올라온다고 했으니 시험 끝나고 확인하면 딱이었다.

“…….”

다른 친구들이 반장이 불러 주는 답을 들으며 가채점을 시작했을 때 동규는 휴대폰을 꺼내 바다사랑나라사랑 글짓기 대회 수상 결과가 올라오는 해양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동규는 당연히 중고등부 제일 위에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자신의 이름 위에 다른 이름이 무려 두 개나 더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 인터넷 창을 죄다 닫고 휴대폰 전원까지 껐다 켰다.

아무리 봐도 동규는 은상이었다. 잘해야 장려나 입선을 받았던 올해 참여한 대회 중 제일 높은 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규는 낭떠러지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죽을까…….”

동규도 하림에게 서프라이즈로 장관상 받은 걸 알려 주고 싶어 글짓기 대회 참여하는 걸 비밀로 했다. 하림은 은상을 받았든 장려를 받았든 아니면 아예 상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잘했다고 해 줄 애였지만, 동규는 그냥 다 싫고 짜증나서 하림에게 몸이 아프다고 하고 제 집으로 돌아왔다.

하림으로부터 간만에 혼자 집에 가는 길이 쓸쓸하다는 내용의 메시지들이 와 있었지만 동규는 하림에게 답장을 할 의지조차 없었다. 안 그래도 은상밖에 되지 않아 우울해 죽겠는데 시험은 어떻게 정답을 하나도 빠짐없이 피해 간 건지. 심지어 하림은 오늘도 백 점이라 동규는 의지가 상실하는 걸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위에 엎어져 눈을 꾹 감았다. 두 손으로 침대를 두드리고 발을 동동거려도 바뀌는 건 없었다. 잘 썼다고 생각했고 분명히 1등 받을 것 같았는데. 겨우 그런 듣보 대회에서 은상 받은 것도 자존심 상해 죽겠고 겨우 은상 받을 미래에 대작 썼다고 뿌듯했던 과거를 지우고 싶다. 문제는 또 왜 열심히 찍었지. 그냥 한 번호로 다 찍을 걸. 그러면 0점은 아니었을 텐데.

한참 침대를 때려 대던 동규는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베개에 오래 눌려 있어 약간 불그스름했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잘 보면 왼쪽으로 기울어진 의자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가라앉았던 기분인데 화 비슷한 감정이 울컥 치밀더니 코끝이 찡해졌다. 동규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의자를 방 밖으로 빼 던져 버리고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엎어져 엉엉 울었다.

세상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신이 있다면 나를 버린 게 분명해. 그것도 아니라면 불행의 신이 나를 지독하게 사랑하거나.

“……사랑?”

사무치는 단어에 동규는 눈물이 더 왈칵 쏟아졌다. 심장을 인공 심장으로 바꿔 끼면 이런 일도 없을 텐데 왜 아직도 의사들은 그런 기술을 발명하지 못한 건지 서러웠다.

머리털 난 이래로 이렇게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한참을 운 동규는 울음이 잦아들자 슬금슬금 일어났다. 너무 울어 머리가 띵했다. 하늘색 베개가 눈물 때문에 남색이 돼 버렸다.

“배고프다…….”

이런 와중에 배는 고파와 다 흘린 줄 알았던 눈물이 또 비죽 나왔다. 위도 인공 위였으면 배고픔도 못 느꼈을 텐데 왜 아직도 과학자들은 이런 거 하나도 못 만들고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로봇으로 태어날걸. 왜 나는…… 사람이어서…….”

배도 고프고 피곤도 느끼고 머리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 사람으로 태어나 동규는 너무 서러웠다. 모든 게 다 서러웠지만 지금 이 시간에 제일 서러운 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었다. 속상해 죽겠어도 배가 고픈 자기 자신이 너무 싫어서 동규는 햄을 구우면서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밥 먹을 때도 세 입 먹다 한 번 울고, 세 입 먹다 한 번 울고 그랬다. 그래도 밥을 다 먹었을 땐 배부름에 기분이 나아져 눈물이 사그라졌다.

시간 확인하려고 주머니에서 휴대폰 꺼내려다가 아예 전원을 껐다. 하림에게서 분명 연락이 왔을 테지만 봤다가는 이제 더 나올 것도 없는 눈물이 또 나올 것 같아서. TV 아래 놓인 탁상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월요일부터 그냥 학교 쉴까.”

소파에 누워 시침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무료하게 시간을 죽였다.

어차피 이제 기말고사도 끝났으니 조금만 지나면 겨울 방학이다. 학교 나가 봤자 방학식 아침부터 하림은 2학년 학업 우수상을 받을 거고 동규는 비교되게 바다사랑나라사랑 어쩌고 대회 은상을 받을 거다.

“아.”

동규는 집 안 어딘가에 던져 둔 휴대폰을 찾아왔다. 학교로 보내지 말고 상장 집으로 보내 달라고 해야겠다. 학교 통해서 신청한 대회가 아니라 상장만 집으로 오면 바다 어쩌고에 참여한 사실이 은폐될 수 있었다. 동규는 해양부 홈페이지 하단에 적혀 있는 정부종합콜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네…… 이미…… 발송됐다고요. 알겠……습니다…….”

또다시 눈물바다였다.

토요일에도 동규는 아프다며 하림의 연락을 죄다 무시하고 밤새 ‘글 잘 쓰는 법’, ‘한심한 나를 극복하는 법’ 같은 것들을 검색했다. 그러다 연관 질문들을 타고 타고 흘러가다 보니 ‘명곡은 이별이 필수인 이유.jpg’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대부분의 명곡은 작곡가나 가수가 이별을 했을 때 만들어졌고 노래는 물론, 모든 예술가들은 원래 사랑에 빠져 행복할 때보다 슬프고 힘들 때 명작을 탄생시킨다는 거였다. 글 쓴 사람이 글 안에 예시를 든 노래나 영화, 소설, 책 같은 것들은 동규도 한 번쯤 들어 본 것들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글쓴이의 주장에 매료됐다.

그럼 나는 왜 이래. 이 글에 따르면 나도 이번에 대상 받았어야 하는 거잖아. 글 쓴 새끼는 안 봐도 연애 못 해 본 남자새끼다. 이렇게 죠죠거리면서 허세로 가득 찬 글을 써 재끼는 걸 보니 알 만했다.

다음 날, 엄마가 정신 차릴 겸 바람이나 쐬라며 심부름을 시켜 등 떠밀려 나간 동규는 툴툴거리며 나갔다가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 마음이 홀려 그네에 잠시 앉았다. 그런데 앉아서 어제 새벽에 읽은 ‘명곡은 이별이 필수’ 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동규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별.

글 쓴 사람이 제목에 썼던 건 다름 아닌 이별이었고 글에서도 열심히 강조했던 건 이별과 헤어짐이었다. 동규는 하림과 사귄 것도 아니고 고백을 한 것도 아니라 이별은 안 했고 차인 것도 아니었으니 글 쓴 사람이 써 둔 연구 결과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하…….”

낮에 나간 동규가 집에 돌아온 건 해가 떨어진 뒤였다. 그리고 감기를 얻었다. 금방 돌아올 줄 알고 가볍게 입고 나가 한참을 밖에서 있었으니 이 추운 겨울에 당연한 결과였다.

이왕 걸린 감기, 동규는 좋다고 병원도 안 가고 약도 먹지 않았다. 이대로 방학 날까지 계속 아프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주인의 바람과 달리 동규의 몸은 너무 튼튼했고 딱 이틀 열이 올랐다가 깨끗하게 나았다.

방학까진 아직 한참 남아 벌써 이렇게 감기가 나으면 안 됐다. 동규는 아예 지독한 감기에 걸릴 심산으로 이번에는 반팔 반바지를 입고 놀이터에 앉아 있기로 했다. 비장한 각오로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열었다.

“김동규.”

“…….”

“어디 가. 여름옷 입고.”

“어, 이 앞에 마트에 집 앞에 두부 사러.”

“엄마가 어제 사왔는데.”

“그……건 찌개용 두부고 나는 부침용이나 순두부…….”

“방으로 들어가.”

하필 엄마가 나와 있을 줄이야. 그 뒤로 두 번 정도 더 감기 바이러스를 얻기 위한 대장정을 나섰지만 번번이 엄마에게 잡혀 돌아왔다.

“방에만 계속 그렇게 있으면 생각만 많아지고 더 속이 곪아. 학교 가서 하림이랑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다 오면 괜찮아질 거야.”

속 곪는 이유가 바로 그 서하림이라고 엄마.

“이제 시험도 끝나서 월요일부터는 놀기만 한다며. 이번 주는 내일부터 3일만 나가면 또 주말인데 왜 안 가려고 그래.”

“몰라.”

“좋아한다는 걔 때문에 그래?”

“아니야. 걔 말고 나 때문에.”

“무슨 일인지 엄마한테 얘기 안 해 줄 거야?”

“……좀 쪽팔린 일이라.”

“큰일은 아니고?”

“응.”

“그러면 학교는 가.”

“아, 엄마.”

“큰일 아니라며.”

“생각해 보니까 큰일 같아.”

“김동규.”

“……알았어. 대신에 방학식은 안 갈래.”

“그 날은 일찍 끝나잖아. 대체 무슨 일이길래 혼자만 알고 엄마는 알면 안 돼?”

“말하기 부끄러워. 나중에, 내년에 말해 줄게. 1월에.”

“알았어. 그럼 방학 날은 선생님한테 연락할게. 엄마가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전날 저녁에 다시 말해 줘.”

“고마워, 엄마.”

이렇게 등교를 하기 싫은 적이 있던가. 몇 번 있던 것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학교 가기 싫은 날이다.

동규는 아침을 먹으며 하림에게 오늘은 등교한다고 답장을 했다. 바로 하림에게 전화가 와서 짧게 통화를 했다. 하림은 5일 동안 걱정돼 죽는 줄 알았다며 연락도 못 할 정도면 얼마나 아팠던 거냐고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동규는 금요일부터 5일간의 긴 시간을 거짓말로 둘러댈 자신이 없어서 이제는 정말 괜찮으니 학교에서 보자고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다.

“헤엑, 김동규 얼굴 수척해졌어.”

동규보다 먼저 등교한 하늘이 오랜만에 본 동규를 보고 기겁을 했다. 아픈 동안에도 밥은 잘 먹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된 건 아니었지만 퀭한 얼굴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좀 아팠어. 지금은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나야 뭐, 그렇게 생각하는데…….”

서하림이 이 몰골 봤다간 난리 나겠군. 하늘은 벌써부터 잠시 후 시작될 하림의 걱정 퍼레이드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 야, 김동규. 서하림 일 생겨서 늦는대.”

“왜?”

동규가 가방을 내려놓는 동안 하늘이 세 사람 단체방에 올라온 하림의 메시지를 읽었다.

“걔네 할아버지가 방금 전에 길에서 넘어지셔서 병원 실려 갔대. 그래서 거기 들렀다 온대.”

“많이 다치셨대?”

“심한 건 아니고 살짝 삐었다는 거 같은데?”

“오래오래 사셔야 되는데.”

“왜?”

“서하림 노벨상 받는 거 보셔야 하니까.”

“아하.”

하늘은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뜯었다. 동규에게 입구 쪽을 보여 주자 동규도 과자를 하나 꺼내 먹었다.

“존나 오래 사실걸. 내가 그분 욕을 엄청 해서.”

“못…… 죽으시는 거 아니야?”

“그 정도까진 안 했어. 한, 음. 반만년 정도는 사시라고 딱 그 정도만 했어, 가볍게.”

태연하게 재밌는 말을 하는 하늘 때문에 동규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늘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과자 봉투를 다시 동규 쪽으로 내밀었다.

담임 선생님이 오늘도 재밌게 놀라며 빠르게 아침 조례를 마치고 사라졌다. 오늘 2학년 4반에선 미국에서 인기 있었다던 웹 드라마의 시즌 1을 정주행하기로 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교실 불이 꺼졌다. 볼 사람은 보고 말 사람은 다른 걸 자유롭게 해도 됐다. 그래서 하늘은 책상을 옆자리 동규에게 붙이고 과자 봉투를 넓게 뜯었다.

“야, 김동규.”

“응.”

“우리 떡볶이 언제 시켜 먹어?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음.”

“……나는 그거 아직 먹는다고 안 했어.”

“아, 왜. 먹자 먹자.”

“혼나.”

“서하림한테?”

“속 버린다고.”

“너 매운 거 잘 먹잖아.”

“먹는 건 문제가 없는데 먹고 나서가 문제라서…….”

“그럼 서하림 또 뭐 대회 나가서 학교 안 오는 날 먹자. 안 들키면 되는 거 아님?”

하림이 없다 해도 학교에서 급식 대신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다는 건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동규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일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이번 학기 들어 틈만 나면 떡볶이 시켜 먹자고 동규를 꼬시고 있어 그걸 거부하는 것도 이젠 어려웠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근데 너 서하림한테 무슨 소원 얘기할 거야.”

“응?”

“궁금해서.”

“……안 판다니까.”

“알았다니까. 그냥 궁금해서. 왜냐면 서하림은 내기 아니었어도 네가 부탁하는 건 다 들어주잖아. 굳이 소원이네 어쩌네 할 필요 없이.”

맞는 말이라 동규는 과자만 먹었다.

“꼭 소원을 써야 하는 소원이야?”

“아……마도. 지금은 구체적으로 생각한 게 없어.”

“서하림이 뭐 안 들어줄 것 같은 거 부탁하게?”

“그러지 않을까…….”

답답해. 하늘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림이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서하림 좋아하지?’라거나 ‘서하림도 너 좋아한대’ 같은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해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런 게 있나? 뭐지? 재단 주식 지분이나 유산 떼 달라고 하게?”

“아니!”

“깜짝아. 그럼 뭔데?”

“모른다니까.”

“흠. 뭐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뭘 부탁하든지 서하림은 다 들어줄 거 같은데. 별도 달도 따 달라고 하면 우주여행 시켜 줄걸.”

“설마.”

“요즘은 돈만 있으면 우주여행 할 수 있어.”

“진짜?”

“진짜. 나중에 한 번 생일 선물로 우주여행 보내 달라고 해 봐. 걔 돈 많아.”

“…….”

“과자 더 드실? 내 가방에 오늘 과자밖에 없어.”

“그러면 고맙지.”

하늘은 몸을 돌려 책상에 걸어 둔 가방을 뺐다. 서하림 유산은 내가 떼서 받아 가야겠어.

“재밌는 거 본대서 팝콘 대신으로 가져옴.”

“천재.”

동규가 엄지를 들어 올려 줬지만 하늘은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튼.”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하늘은 목소리를 좀 더 작게 냈다.

“서하림은 네 말이라면 다 들어줄 텐데 왜 소원 쿠폰이 왜 필요한지가 나는 궁금해.”

“너 되게…… 집요하다.”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야, 우리가 올해 3월부터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걸 이제 알았냐?”

“아니. 옛날에 알았어.”

동규는 동규대로 고백에 소원을 써먹겠다는 말을 둘러 둘러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하늘은 하늘대로 핵심만 빼놓고 얘기하느라 속이 터졌다. 하늘은 30분 정도 동규에게 다양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새로운 과자 봉투를 시원하게 뜯으며 하늘은 강수를 뒀다.

“내가 봤을 땐 서하림은 네가 장난으로 사귀어 달래도 ‘그래’ 할걸.”

“다른 애들이 장난쳐도 ‘그래’ 할걸.”

“나 잠깐만 화장실 좀.”

장난이라는 전제를 괜히 달았다. 아니, 안 달았어도 대답은 크게 바뀌진 않았으리라. 하늘은 복도로 나와 하림에게 전화를 걸어 욕을 하려던 걸 아직 병원에 있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심호흡으로 평정심을 되찾은 하늘이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하늘이 불타는 속을 다스리고 온 줄도 모르는 동규가 반짝이는 눈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재밌다. 갑분 언데드인데 아까 초반은 좀 더럽고 징그러워서 별로였는데 지금은 주인공이 완전 멋있고 개그도 나랑 잘 맞아.”

“드라마가 지금 눈에 들어와?”

“응?”

“아까 하던 말 계속해. 서하림이 1년 중에 고백 제일 많이 받을 때가 만우절인데 걔 한 번도 장난 같은 고백에 그러자고 한 적 없어.”

“그래?”

“어.”

“그럼…… 그런 장난 안 좋아하나 본데. 사람 마음 가지고 그러는 거.”

하늘은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과자 더 안 먹게?”

“아니…… 먹을 거야.”

하늘은 지금 씹고 있는 게 과자인지 김동규가 잃어버린 눈치인지 헷갈렸다.

“그냥 빨리 1월 1일이 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뭐가?”

“그런 게 있어.”

“너도 저거 봤어?”

“응. 나 저거 최근 시즌까지 다 봤어.”

“계속 징그러운 거 나와?”

“어. 저거 19금임. 징그러워서.”

“헐.”

“근데 조온나 재밌어.”

“징그러운 거 나오기 전에 알려 줘.”

하늘은 느리게 과자를 집어 먹다가도 징그러운 장면이 나오면 꼬박꼬박 눈을 가리는 동규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뭐 김동규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거 아니고 서하림은 김동규의 저런 모습까지 다 좋다고 하니까 천생연분이네.

“진짜 덩치만 큰 소심하고 착한 동생 둔 기분이네.”

“응?”

“야, 김동규.”

“응.”

하늘은 하림의 연애를 응원하는 만큼 동규의 짝사랑도 응원 중이다. 올해 동규 아니었으면 반 애들 눈치 보느라 외롭게 겉돌았을 거다. 싸운 애들이 하도 입을 털어 댔으니 동규도 분명 싸웠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한 번도 그거 가지고 먼저 물어보지 않아 고마웠다. 그래서 수련회 가기 전에 동규에게 솔직하게 얘기할 마음이 들었다. 어쩌다 싸웠고 누구랑 싸웠고 왜 개판이 됐고 등등등.

변덕이 심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하늘을 무던히 잘 받아 주는 데다가, 둘이 해야 하는 수행 평가가 있으면 무조건 선생님을 찾아가 동규로 바꿔 달라고 하는 바람에 잠시 둘이 사귄다느니 하는 오해도 받았지만 동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지호나 다른 친구들이 음흉한 얼굴을 하고 ‘서하늘이랑 사귄 지 얼마나 됐어?’라든지 ‘고백은 누가 했어?’ 같은 걸 물어도 그저 허허 웃으며 아니라고 정정해 주었다.

그런 소문을 입에 올리는 친구에게는 하늘이 앞장서 응징을 한 것도 있지만 반 전체에 싸하게 도는 분위기, 그러니까 하늘과 싸운 친구들이 주도해 하늘을 은근히 배척하는 분위기를 동규만의 방식대로 대처한 거였다. 하늘도 잘 알고 있었다. 동규는 제가 하자고 하는 건 모두 별말 없이 순순히 따라 주었으니까.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그 날은 하림이 무슨 대회 시상식 가느라 학교에 나오지 않은 날이었다. 하늘이 동규와 점심 먹고 교실로 돌아왔는데 싸운 무리들이 4반에 전부 모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반에 있는 친구까지 모두.

동규는 하림에게 연락 온 게 없나 휴대폰 보며 걷느라 교실 안을 보질 못했지만 자기들끼리 모여 앉겠다고 책상을 죄다 붙여 놓은 걸 본 하늘이 갑자기 동규의 팔을 잡아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 탓에 휴대폰을 떨어트려 액정이 깨진 동규는 교실을 코앞에 두고 다짜고짜 어딘가로 향하는 하늘에게 액정 바꿔 달란 얘기만 하고 자길 끌고 가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 외에 2인 1조 발표 숙제 때 발표는 곧 죽어도 하기 싫단 동규를 발표자로 세운 일도 있다. 1학기에도 같은 숙제가 있었는데, 그때는 하늘이 발표자로 나갔다가 곤욕을 치렀다. 싸운 애들이 하늘을 괴롭히려는 의도로 발표하는 내내 쓸데없는 질문을 수시로 하고 마지막 질문 시간에서는 고등학생인 하늘이 답변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어려운 질문만 꺼낸 것이다. 하늘은 자기는 이번에 발표 못 하겠다고 동규 앞에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던 동규는 ‘그대로 읽기만 하면 되는 대본 써 줘’라며 결국 앞에 나가 발표를 했었다.

물론 바보처럼 반박도 못하고 따르는 건 아니고 쭝얼쭝얼 대기도 하지만, 동규는 하늘에게 화를 내거나 진심으로 밀쳐 낸 적이 없다. 하림이나 지호를 포함한 동규의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자기는 많이 거칠다는 걸 하늘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말한 적 없어도 동규를 정말 좋은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고마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가끔 집에서 뭐 만들었다면서 하림 거 말고도 제 것까지 꼬박꼬박 챙겨 주는 것도 고맙고 등이며 팔을 자주 때려도 왜 때리냐며 짜증은 낼지언정 손을 올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도 고마웠다. 답답하고 소심한 부분만 안 맞아서 그렇지.

“진짜 진심으로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응.”

“서하림은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부탁을 하든 다 들어줄 거야.”

“……그럴까?”

“내가 장담해. 나 걔랑 배 속부터 친구였어.”

자신이 하려는 말은 고백이고 하늘이 그걸 알 리 없겠지만, 동규는 하늘의 말이 엄청난 위안이 됐다. 하늘은 이런 거 가지고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었다.

“정말……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어떤 소원을 얘기해도 그럴까?”

“응.”

“어쩌면 걔가…… 아니, 어쩌면이 아니고 걔가 조금도, 상상으로도, 꿈에서도 예상해 본 적 없는 그런…… 그런 얘기일 텐데 그런 얘기를 하면…….”

하늘은 잠시 내가 서하림이다, 하고 동규의 말을 들었다. 얘가 날 좋아하는 걸 뻔히 알고 나도 얘를 좋아하고 있는데 이렇게 신중하게 삽질하고 있는 걸 눈앞에서 보고 있다면. 뭐, 서하림이 그렇게 귀엽다 귀엽다 하는 게 조금 이해도 가고.

하지만 하늘은 하림이 아니었다. 하늘은 하림의 의견에 많이 쳐줘서 1%는 동의해 주기로 했다. 내 동생이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나한테 고민 상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좀 귀여운 것 같아서.

“괜찮아. 서하림은 네가 무슨 말을 하고 뭘 하든지 어떻게든 널 이해하고 받아들일 그릇이 되는 애야. 그리고 서하림이 너 되게 아껴. 소중하게 생각해. 물론! 걔는 나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응. 알아.”

“나 이런 거로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지.”

“응.”

“나 믿지, 내가 한 말.”

“응.”

“그럼 됐어. 드라마나 보자. 1화가 제일 재미없어.”

“1화도 엄청 재밌던데.”

“내가 과자 챙겨 온 수를 봐. 뒤로 갈수록 존잼임.”

서하림, 나는 할 만큼 다 했다.

하늘은 무서운 장면이 나오기 직전마다 동규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면서 동규의 생일날 하림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 같은 촉이 왔다.

김동규 생일이 30일이었나, 아니면 31일이었나.

아무튼 새해가 되기 전에, 늦어도 1월 초가 되면 하늘은 이 커플의 삽질에서 탈출이란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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