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17화 (27/53)

17

세성전 축구 연습으로 모였는데 오늘따라 하림은 축구가 안 돼도 더럽게 안 됐다. 친구들이 어디 아픈 거 아니냐며 쉬라고 할 정도였다. 아프지도 않은데 그런 소리 듣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하림은 더 열심히 운동장을 달렸다.

그러나 슛은 순간 집중력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마음이 심란하니 될 슛도 자꾸 다른 곳으로 튕겨져 나갔다.

“서함 오늘은 집에 일찍 가는 게 어떠냐?”

“싫어.”

“오늘은 딱 봐도 망한 날인데 뭘 그렇게 고집을 부려.”

“아직 몸이 안 풀려서 그래.”

“한 시간도 넘게 뛰고 있는 중인데?”

에이스인 하림의 상태가 영 메롱이라 같은 축구팀 친구들이 슬슬 하림의 눈치를 본다는 걸 하림도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몰랐어도 시후가 계속 눈치를 엄청 줬다. 다른 친구들이 시후의 옆구리를 찌르며 하림을 집으로 보내라는 걸 시후가 빙빙 둘러 말을 해 주는 게 거의 한계에 도달했단 것도 안다.

“그럼 지금 이거 골인하면 계속하고, 못 넣으면…… 갈게.”

“야! 이거 무조건 막아! 꼭 막아!”

골키퍼가 시후의 외침에 자세를 다잡았다.

“제에발 넣지 말아 주세요.”

하림도 자세를 취하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강한 힘에 뻥 하고 날아가는 공은 누가 봐도 고의적인 게 뻔한, 골키퍼에게 정직하게 날아가는 슛이었다.

“못 넣었으니까 간다.”

“오올, 감사요.”

시후가 양손 엄지를 들었다. 하림은 똑같이 쌍따봉을 날려주고 운동장을 걸어 나왔다. 가방에서 스포츠타월을 꺼내 얼굴을 가리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지 일주일. 올해까지만 참자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귀여우니 된 거 아니냐고 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한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하림은 학교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있는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오늘 자고 일어나면 1월 1일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눈 뜨자마자 김동규네로 달려가서 다짜고짜 자고 있는 김동규 멱살부터 잡은 다음 짤짤 흔들면서 나랑 사귀어 달라고, 너 좋아한다고 해 보겠는데. 아직도 10월인 게 믿어지지가 않고 1월까지는 60일 넘게 남은 건 더더욱 믿어지지가 않는다.

집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하림은 한숨을 푹푹 쉬며 아파트 정문을 통과했다. 그 때였다.

“여보세요.”

-나다, 서하늘. 이름 안 보고 받음?

“어.”

-서하림 뭐 하냐.

“그냥 있는데. 집 가는 중.”

-그렇게 좋아하는 축구 하고 오는 길인데 왜 한숨을 푹푹 쉬어, 쉬기는.

하늘의 말에 하림이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돌려 하늘을 찾았다.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야! 여기!”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림이 고개를 들었다. 정문 바로 앞에 있는 동 중간층쯤에서 하늘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야! 너 거기서 뭐해!”

“친구네! 놀러왔어!”

“누구!”

“이보람!”

“아 맞아! 걔 거기 살지!”

“어! 근데 너 무슨 일인데! 왜 한숨 쉬어! 오늘 세성전도 아닌데! 연습경기 졌어?!”

“아니!”

“그럼! 뭔데!”

하림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 잠시 뜸을 들였다.

“야! 나 내려가?!”

“이보람이랑! 놀고 있는 거 아니야?!”

“맞는데!”

“그럼 됐어!”

“다 놀았어!”

“진짜?!”

“어! 잠깐 온 거야!”

하림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하늘은 ‘간다!’ 하고는 창을 세게 닫았다.

“헐. 진짜로 가게?”

“어.”

“아 뭐야. 네가 모이라며.”

“그렇게 얘기 안 했어. 모일 사람은 모여라, 했지.”

“그런 게 어딨어!”

“오늘만 봐줘. 어차피 내일 또 모일 거잖아.”

“그건 그런데.”

“서하림 때문에 빠지는 거니까 내일 걔 데리고 올게. 이럼 됨?”

“잘 가!”

“가세요!”

“빨리 가!”

축제 준비 때문에 모여 있던 동아리 친구들이 어서 가라며 하늘이 가시는 길을 열어드렸다. 하림이 내일 놀러 와 봤자 거의 다 끝난 축제 준비를 뭘 더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은 일단 하림을 앞장세워 빠져나왔다.

하림이 한숨을 쉬는 이유는 안 들어봐도 알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을 해 줬다.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말해 봤자 네가 하는 거 아니고 아주머니가 해 주는 거면서 생색은.”

“서하늘.”

“맛있는 거 안 먹여도 도와줄 테니까 빨리 집에 가자.”

집에 도착한 하림은 빛의 속도로 씻고 왔다. 간식을 방으로 올려 달라고 얘기해 둬서 방으로 돌아왔을 때 하늘은 이미 열심히 간식을 먹는 중이었다.

“김동규 때문인 거 아니까 빨리 얘기해.”

“나도 와플 줘.”

“말 돌리지 말고. 김동규 닮아 가냐?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아니 나 뛰고 와서 배고프다고.”

“아하. 미안. 다 먹을 뻔.”

하림은 와플을 잘라 먹으며 하늘에게 수학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고해 바쳤다. 하늘이 과장되게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하림의 얘기가 진전될수록 장난을 거두고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특히 둘째 날 밤, 일정 다 끝나고 동규를 따로 불러 리조트 외곽을 따라 조성된 올레길을 걸으며 온갖 분위기란 분위기를 잡아 봤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는 대목에서 하늘이 탄식하고 말았다.

“난 진짜 네 성격에 걔를 그러고 보고만 있는 게 놀랍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걔는 너 좋아하는 거 확실해?”

“확실해. 좋아한다 말만 안 하지 거의 뭐 사랑의 편지 급으로 보내온 메시지들 보여 줄까.”

“아니.”

“잘 썼는데. 명문이야.”

“너나 실컷 봐. 근데 뭐, 나도 걔가 너 좋아하는 건 빼박으로 맞다고 생각하고. 근데 혼자 그러고 있는 기간이 좀 기네. 아닌가, 걔 성격 생각하면 3년 내내 짝사랑만 한다 해도 납득 가.”

“내 말이.”

“흐음.”

하늘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은 제법 신중했다.

“너 올해까지 기다려 본다 그랬지.”

“응.”

“좋아. 걔가 올해 가기 전에 고백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은 못 하겠지만 장작은 넣어 줄게.”

“대박, 역시 너밖에 없어.”

“대신에 내일 우리 동아리 애들 만나서 막바지로 축제 준비하는 것 좀 도와줘.”

“그래. 근데 내가 가서 도와줄 게 있어?”

“내 말이. 근데 네가 와서 그냥 앉아만 있어도 우리 애들이 좋아할걸.”

“뭐 먹을 거라도 들고 가야겠다.”

“헐, 대환영.”

“아 근데 나 내일 오전에는 뭐 면접 있어.”

“괜찮아. 어차피 주말임. 그래서 우리 주말 동안 마무리 작업만 해야 돼.”

매번 동아리마다 중구난방으로 진행되던 축제였지만 올해는 학생회에서 정해 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컨셉을 정했다. 시후가 정한 주제는 ‘시간 여행’. 말이 시간여행이지 온갖 역사 속 시대를 컨셉으로 삼으라는 역사 덕후의 불순한 의도였다.

외부에서 진행되던 것도 실내로 들어왔다. 1, 2, 3층 교실에 있는 책상과 의자를 4, 5, 6층으로 옮기고 각 동아리마다 교실을 하나씩 배정받아 인테리어도 했다. 오전에는 교실을 꾸미고 점심을 먹은 뒤에 축제 1부가 시작된다.

1부는 교실을 돌아다니며 동아리에서 하는 게임이나 미션을 수행하거나 음식을 사 먹을 때마다 도장을 받았고 학생회에서 나눠 주는 책자 제일 뒤에 도장을 모았다. 학생회에서는 도장 세 개를 쿠폰 한 장으로 교환해 줬고 그 쿠폰을 모으면 졸업생이 기부한 각종 선물들과 교환할 수 있었다.

1부 첫 시간에 잠시 축구부 손님 끌기용으로 축구부 교실에 있던 하림은 딱 30분만 있다가 동규가 있을 독서부로 뛰어 갔다. 독서부는 20세기 만화영화를 컨셉으로 잡았다. 동규가 곧 죽어도 뭘 하는지 얘기하질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궁금해도 독서부의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서프라이즈처럼 직접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허얼.”

얼마나 대단한 걸 했길래 숨겼던 건지 확인하기 위해 하림은 뒷문에 붙어 살짝 안쪽을 살폈다. 남학생들은 공주 드레스를 차려입고 여학생들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갖가지 캐릭터 의상을 입고 있었다.

“미친놈.”

뒤돌아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커다란 덩치에 누가 봐도 동규인 사람이 아마도 잠옷으로 짐작되는 노란 곰돌이 옷을 입고 팝콘을 튀기는 중이었다. 빨간 티셔츠가 같이 입혀져 있는 보니 하림이 생각하는 그 곰이 맞는 것 같고.

“어서 오세요!”

친구들보고 이름 부르지 말라는 의미로 검지로 쉿 하고 교실로 들어왔는데 사방팔방에서 하림을 불러대느라 김동규 놀래키기 작전이 실패했다. 하림의 이름이 들리자 동규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아 왜 벗어. 귀여운 곰돌이 얼굴 그려져 있는데.”

“……그냥. 더워서.”

“서하림! 주문할 거면 줄부터 서.”

팝콘 줄에 선 하림이 고개를 빼 팝콘을 열심히 튀기는 동규를 지켜봤다. 빈 팝콘 기계에는 옥수수 알을 부어 넣고, 다 튀겨진 팝콘을 꺼내서는 캐러멜을 뿌리거나 시즈닝을 뿌린 뒤 컵에 담는 간단한 일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동규는 하림이 등장한 뒤부터 실수를 하기 시작한 건지 독서부 친구들로부터 갑자기 왜 이러냐고 타박을 받았다.

“나는 어니언맛. 아니, 갈릭맛.”

“반반도 있어.”

“그럼 나 반반.”

“야 어반 갈반! 서하림 거야!”

고개를 끄덕인 동규가 막 튀겨진 팝콘을 통에 담아 시즈닝을 뿌리고 흔들었다. 그리고 반반 컵을 꺼내 하림이 주문한 어니언맛과 갈릭맛 팝콘을 담았다.

“잘한다, 잘해.”

“흘리지 좀 마.”

“김동규! 교대 전에 바닥 다 치워!”

팝콘은 담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았다. 하도 바쁘다 보니 독서부 친구들의 말이 까칠했다.

“야, 김동규 왜 자꾸 흘려? 벌써부터 네가 이렇게 팝콘 버리면 이따 1학년들이 튀기는 거 부족하다고.”

“미안. 조심할게.”

“야, 왜 그래. 주문 많으니까 마음 급하면 흘리고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그건 그런데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이렇게 다 흘리면 진짜 이따가 부족해.”

“김동규, 천천히 해 천천히. 뒤에 애들이 다 기다려 준대.”

동규가 손부채질을 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림이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격려해 준 덕인지 새로 담는 것부터는 별로 흘리지 않았다.

“나 잠깐 김동규한테 할 말 있는데 해도 돼?”

“3초 준다. 야, 김동규! 서하림이 할 말 있대. 바쁘니까 짧게 얘기해.”

쭈뼛거리며 책상에서 빠져나온 동규가 하림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뭔데” 하고 물었다.

“팝콘 냄새 좋은데 먹으면서 해?”

“아니. 그럴 시간도 없어 지금.”

“아 해 봐.”

하림이 해 보래서 생각 없이 입을 벌린 동규의 입 안으로 팝콘 몇 개가 들어왔다. 동규가 깜짝 놀라 하림을 바라보자 하림이 웃기만 했다.

“맛은 어때.”

“……맛있다. 근데 전에 먹어 봤어.”

“너네도 2학년이 첫 타임하고 교대지? 그 때까지 열심히 팝콘 튀기고 있어. 나는 학생회 쪽 하러 가야 돼.”

“응.”

“먼저 끝나는 사람이 데리러 오기 하자.”

“……응.”

하림은 미리 가져온 한복으로 갈아입고 학생회가 운영하는 교실로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학생회장이라고 곤룡포를 입은 시후가 왜 이렇게 늦었냐며 하림에게 잔소리를 했지만 하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시후의 입에도 팝콘을 넣어 주었다.

시후가 정해 준 하림의 역할은 선물 교환해 주기, 기념사진 찍어 주기다. 기념사진은 분명 선물을 수령한 사람을 찍어 주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어느덧 예쁜 한복을 입고 갓까지 쓰고 있는 하림과 같이 사진을 찍겠다는 학생들이 늘어 하림은 선물을 주는 것보다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래서야 작년이랑 다를 게 없어 하림은 시후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으로 레이저를 발사했다. 시후는 하림의 시선을 피하고 휘파람만 불었다.

먼저 끝난 건 동규였다. 동규가 물도 마시지 않고 팝콘만 튀기고 있는 걸 보다 못한 1학년 후배가 좀 쉬라며 첫 타임 끝나기 10분 전에 교대해 줬다. 갑자기 교실에서 쫓겨난 동규는 축제 안내 책자를 펼쳐 학생회 교실을 찾았다.

도착했는데 사람이 많이 몰려 있어 동규는 복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10분 뒤면 하림도 끝날 거였다. 곰돌이 잠옷을 입은 채로 우두커니 서서 있는 동규에게 친구들이 이따금 인사를 하거나 후배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를 했다. 이런 옷을 입고 있어 튀는 건지, 왜 이렇게 다들 아는 척을 못 해서 안달인지 싶다.

곰돌이 후드라도 다시 쓸까 고민하며 만지작거리는데 하림이 복도로 나왔다.

“왜 안에 안 들어오고 여기 있어?”

하림이 한복 입는다는 건 예전에 들었었고, 학생회 교실 다녀온 친구들에게서 한복 입은 서하림이 꽃선비네 어쩌네 하는 얘긴 들었지만 한복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줄 알았다. 동규는 하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로 겨우 입을 뗐다.

“안에…… 사람 많아서.”

“빨리 가자. 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너 어디 가고 싶어. 먹는 거 하는 데도 많던데.”

하림이 동규를 잡아끌며 책자를 펼쳤다.

“공포의 집은 죽어도 싫다고 하겠고.”

“응.”

“과학 실험 하러 갈래? 너 저번에 번개과학관 갔을 때 재밌어했잖아. 화학부 애들이 뭐 신기한 거 한대.”

“좋아.”

“마술부부터 가자. 거기 이번에 장난 아니래. 번호표 배부할 정도라던데.”

책자를 펼쳐 마술부 교실이 어딘지 확인한 하림이 같은 층이라며 동규의 팔을 잡았다. 동규는 기뻐 들떠 있는 하림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렸다.

“거기 가지 말자.”

“왜?”

“그냥…… 안 가면 안 돼?”

동규가 마술부를 가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하늘 때문이었다.

‘김동규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뭔데? 들어 보고.’

‘안 들어도 들어준다고 해. 서하림만 네 친구냐?’

‘……알았어.’

‘이번에 축제 하면 서하림이랑 둘이 다닐 거지.’

‘응.’

‘그러면 내가 말하는 동아리 부스들은 가지 마.’

‘들?’

‘두 개밖에 안 돼.’

하늘은 동규의 손에 과자와 사탕, 젤리 같은 것들은 한 아름 안겨 주었다. 로비의 일환이었다.

‘이런 거 안 줘도 부탁 들어주려고 그랬어.’

‘올.’

‘두 개가 어딘데.’

‘마술부랑 로봇제작부.’

하늘이 말한 동아리는 축제에서도 늘 인기가 많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들어가는 것조차 경쟁이 치열한 동아리들이었다. 동규는 과자 봉지를 만지작거리며 왜인지 물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늘이 다짜고짜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긴 해도 이번에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궁금하면 그냥 물어봐라. 대답해 주기 싫으면 어련히 싫다고 하겠지.’

‘그래도…….’

‘나랑 싸운 애들 있지. 걔네가 마술이랑 로봇 제작 동아리 하거든. 어차피 흥할 부스니까 너랑 서하림이라도 가지 말아 달라고. 서하림한테는 그냥, 지금 안 그래도 바쁜 앤데 신경 쓸 일 더 만들기 싫어.’

‘아…….’

‘하림이한테는 말하지 마라.’

‘응.’

‘걔 데리고 마술부랑 로봇제작부는 가지 마. 걔 들어가면 다른 애들도 줄줄이 소시지처럼 다 간단 말이야.’

‘알았어.’

‘우리 동아리 와서는 한 시간 넘게 있어도 돼.’

잠시 들르는 건 몰라도 그건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하늘이 동규의 멱살을 잡고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대답하라고 짜증스럽게 얘기했지만 말투만 그렇지 진짜로 짜증 내지 않는다는 걸 동규는 알았다. 그래서 하늘에게 흔들리면서도 태평하게 과자를 하나 깠다.

“그래. 그럼 마술부 빼고 화학부 가자.”

“로봇동아리도.”

“알았어. 로봇동아리도 가지 말자.”

하림은 마술부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확실하게 있어 보이는 동규가 입을 꾹 다물어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유 없이 고집부릴 애는 아니니까.

“그.”

“응?”

“화학부 가기 전에 패션디자인부부터 가자.”

“패, 아. 서하늘 동아리? 그래 좋아. 괜히 다른 데 돌아다니다가 까먹고 욕먹는 것보단 제일 처음에 출석 도장 찍어 놓는 게 좋겠다.”

축제를 한 바퀴 다 돌고 온 1학년 후배들이 마술부가 제일 재밌고 좋았다고, 꼭 가 보라고 했었기에 조금 아쉬웠지만 하림은 마술부와 로봇제작부를 쿨하게 패스했다.

동규가 싫다고 하는 곳들은 다 빼고 착실히 돌아다니며 도장을 모았다. 먹을 걸 사기도 했고 이것저것 산 것도 많아 확인도 할 겸 쉼터 교실로 들어왔다. 각 층마다 쉬는 공간으로 하나씩 빼 둔 교실들이었다.

하림은 갓을 벗어 내려놓고 교실 돌면서 산 것들을 펼쳤다. 그러면서 넌지시 물었다.

“너는 왜 드레스 안 입었어.”

“드레스?”

“독서부 남자애들은 공주 옷 입었던데.”

“아.”

동규가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을 주저했다.

“맞는…… 옷이 없었어.”

동규가 입고 있는 곰돌이 잠옷도 길이가 짧아 동규의 종아리가 훤히 보였다.

“그리고 내가 이거 하겠다고…….”

“진짜?”

고개만 작게 끄덕이는 동규는 부끄러워 하림을 쳐다보지 못했다. 하림은 자기가 나서서 곰돌이 옷을 입겠다고 한 동규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다시 갓을 급하게 썼다.

“음, 어, 잘했네.”

“괜히 공주 드레스 입었다가 찢어질까 봐……. 이거 다 대여한 거라 반납해야 돼.”

“잘 생각했어.”

59일만 참자, 59일만. 새해까지 겨우 60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거는 나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올해가 자그마치 59일이나 남았다. 하림은 1월 1일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동규 앞에서 한숨을 쉴 수는 없어 제 입엔 하나도 맞지 않은 크림 떡볶이만 먹었다.

동규는 독서부에서 20세기 만화영화로 컨셉을 정하자마자 나름 하림이 사랑과 애정을 담아 지어 줬다는 별명에 맞는 곰돌이 캐릭터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래서 다른 남자애들처럼 드레스 입으라는 독서부 부장 민주의 의견을 끝까지 거부했다. 민주와 다른 독서부 학생들이 혼자만 제일 편한 거 입으려는 동규에게 처음에는 반발을 했다가 평소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 모습에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양보를 해 줬다.

생각보다 별론가. 동규는 맛있는 크림떡볶이를 모래 씹는 것처럼 먹었다. 이왕 하는 거 확실히 제대로 된 곰인형 탈을 쓰는 게 더 나았을까. 이건 너무 잠옷이라 성의도 없어 보이겠지…….

말도 못 하고 둘 다 우울한 상태로 5시 시작해 8시에 끝나는 2부까지 마쳤다. 기악부인 하림만 공연 때문에 2부에 바빴고 동규는 연극부나 기악부, 영화부, 밴드부 등 다양한 공연을 관람한 게 다였지만 곰돌이 잠옷을 고른 자신의 선택이 너무 후회됐다. 옆 학교 댄스 동아리가 인기 아이돌의 히트곡을 추느라 동규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소리를 질러도 동규만 혼자 딴 세상이었다. 하림도 마찬가지였다.

심란한 마음을 환기한다는 느낌으로 하림은 커다란 스케치북에 동규의 이름을 크게 적어 열심히 꾸몄다. 금요일에 있을 독서경시대회 때문이었다. 월요일은 예선이었고 금요일은 본선인 이 대회에는 동규가 참여한다. 하림은 작년에 참여해서 최후의 2인까지 살아남았고 마지막 문제에서 헷갈려 아쉽게 탈락한 역사가 있다.

매해 3월이면 나오는 청소년 필독서 고등학생편 50권에서 문제를 뽑아 예선을 치르고, 그 성적순으로 최대 50명까지 본선에 올라가는 이 대회에 동규를 참여시키기 위해 하림은 작년 겨울방학부터 열심히 동규와 책을 읽었다. 해마다 몇 권씩 바뀌긴 해도 대부분은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하림은 동규에게 책을 읽히면서도 꼭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중요한 포인트는 잊지 않게 질문도 했다.

어떻게라도 동규의 학생부를 채워 주기 위해 노력하는 하림의 노력 덕분에 동규는 손쉽게 예선을 통과했다. 무려 3등이었다. 동규는 예선 보러 가는 순간까지 떨어질 것 같다며 낙담했지만 하림은 동규가 당연히 예선을 통과할 거라고 믿었다. 하림이 동규에게 밀리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바로 독서량이었으니까.

“기분 좋아 보이네.”

“좀.”

아침 조례 시간에 결승 진출을 전해 들은 동규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급식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신이 났다.

“최후의 1인 되면 한턱 쏴.”

“근데 그럴 일은 없을 걸.”

“말이 씨가 된다. 김동규 1등, 김동규 1등, 김동규 1등, 김동규 1등, 김동.”

1등 소리에 민망해진 동규가 하림의 입을 막았다가 말랑한 입술에 화들짝 놀래며 손을 뗐다. 하림도 덩달아 놀라 조용해졌다.

하림이 하래서 등 떠밀려 신청한 거고 우승은 꿈에도 꾸지 않지만 그래도 뭔가 하림과 열심히 책 읽은 게 헛되지 않은 걸 보여 주는 것 같아 동규는 빨리 내일이 왔으면 싶었다. 좋은 말은 절대 안 해 주는 하늘이 웬일로 동규가 대단하다고 칭찬해 줘서 더 그런 것도 있다.

“나는 나갔으면 예선 겨우 통과하거나 본선 가서 1번 문제에서 광탈임.”

“왜.”

“나는 독서 편식이 좀 심해. 소설책도 안 읽고 자기계발서 안 읽고 힐링 어쩌고 감성적인 책이랑 문학 관련 책도 잘 안 읽어. 그나마 읽는 거 인문학? 심리학? 약간 다큐멘터리스러운 책을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아하.”

“실제로 다큐멘터리는 많이 보긴 해. 대신에 2배속으로. 비슷한 주제로 책이랑 다큐 있으면 나는 다큐 봄.”

“2배속…….”

“그 뭐냐. 난 어릴 때 속독도 배워서 책도 빨리 읽어.”

“2배속?”

“아니지. 보통 사람보다 20배는 빨리 읽을걸. 근데 빨리 읽으면 머리에 잘 안 들어와. 너는 어릴 때부터 책을 엄청 많이 읽었으니까 뭐…… 작년에 나갔어도 본선은 바로 갔을 거 같은데.”

“그런가.”

“그럼 그럼.”

동규가 처음 들어보는 하늘의 칭찬에 좋은 티를 숨기려고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가 밥을 크게 떴다. 하늘이 의자 뒤로 고개를 빼고 마찬가지로 의자 뒤로 고개를 뺀 하림과 눈을 마주쳤다. 하늘이 입술을 삐죽이며 짜증 나는 얼굴로 물었다.

‘됐냐?’

하림은 아주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하늘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칭찬은 뽑아 낸 것 같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잘했다고.’

반응이 시원하지가 않다. 하늘은 ‘시발!’ 하고 입모양으로 소리친 뒤 자세를 바로 했다.

“야 김동규.”

하늘이 동규의 어깨를 두드리며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네가 정말 최후의 1등이 되어 독서 골든벨을 울리길 바랄게. 나는 동규 네가 마지막 문제를 풀 거라는 것에 한 치 의심을 하지 않아. 꼭 네가 우승을 했으면 좋겠다, 친구야.”

동규가 하림에게 고개를 돌려 얘 왜 이러냐고 눈으로 물었지만 하림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 잘하래.”

“저게?”

“친구야 1등 하면 내 이름 꼭 얘기해 주는 거 잊지 마. 네가 나중에 성공한 사람이 되어서도 나를 잊으면 안 돼. 네가 만약 골든벨을 울린다면 세문고등학교 독서경시대회는 너의 인생에 큰 터닝 포인트가 될 거야. 오늘 밤 자기 전에 정수를 떠 놓고 달님에게 너의 우승을 빌게.”

“서하림. 얘 좀 말려 봐…….”

하늘이 도를 넘어 10절까지 할 때는 그렇게 싫었지만 동규가 당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쩔쩔매는 게 귀여워 하림은 어깨만 씰룩하고 밥을 먹었다. 하늘이 쉬지도 않고 동규의 우승을 염원하는 말들을 지어내는 동안 동규도 차츰 적응해 나갔다. 중간중간 하림과 동규가 들어도 웃긴 표현이 있어 그럴 때면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

식판을 정리하며 하늘이 이제 됐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림이 웃으면서 두 손으로 따봉을 날려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하늘이 동규의 등을 소리 나게 때렸다.

“아 왜.”

“잘 보라고. 기 불어넣어 준 거야.”

“……진짜지.”

“아무나 안 주는 기다. 내가 서하림만큼은 안 돼도 우리 학교 두 손 안에서 노는 인재다 이 말입니다.”

“그건 아는데, 손도 작으면서 엄청 아프네.”

“아프라고 때렸으니 당연히 아파야지.”

“기 불어넣어 준다는 거 거짓말이지.”

“아닌데?”

하림은 밥 먹는 동안 와 있던 메일을 확인하느라 발걸음이 느려졌다. 하늘과 동규는 투닥이며 걷느라 하림이 뒤처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림은 받은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될 거라고, 서류 정도는 당연히 통과할 거였고 면접도 잘 봤으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막상 이렇게 수상자 선정 메일을 받으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야! 서하림 뭐 해! 뭐 재밌는 거 봐? 같이 봐!”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하림이 동규와 하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서하늘 너 먼저 교실 가.”

말은 하늘에게 하고 있지만 동규를 보고 있는 하림 때문에 하늘은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갑자기 뜬금없이 고백을 할 것 같진 않고 뭔가 신나 보이는 게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싶다.

“김동규 다음 순서는 나야.”

“응.”

“진짜로 그 다음은 내 차례야. 나 속상하게 만들지 마.”

“응, 알겠어.”

제일 친하고 의지도 많이 하는 친구를 뺏긴 듯한 느낌이 살짝 들었지만 하늘은 도리질을 치며 스스로를 나무랐다. 하림이 태어날 때부터 동생처럼 지낸 가족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제일 친구인 건 맞지만 동규도 제 친구였다. 그런 둘이 좋다는데 네 살짜리 꼬마애도 아니고 그런 마음이 들면 어떡하나.

“아씨. 근데 봐 온 세월이 있는데.”

지금껏 하림과는 서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가장 먼저 얘기하는 사이었다. 하늘은 저 멀리서 운동장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하림과 그런 하림을 뒤따라 걸어가는 동규를 보며 복잡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들 다 키워서 장가보내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다.

“빨리 앉아 봐.”

하림이 자기를 따라 졸졸 걸어온 동규를 벤치에 앉히고 자기는 동규와 마주 보고 앉았다.

“뭔데 갑자기.”

“수학여행 갔을 때, 내가 한 달만 기다리라고 했던 거 생각나?”

“응. 첫날 저녁 먹으면서 그 씨발 새끼 얘기할 때.”

“맞아.”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며 하림이 말을 이었다.

“내가 올해 초에 RMM 떨어졌을 때 엄청 빡이 쳤다가도 준비를 시작한 게 있는데.”

“응.”

“선생님 딱 두 명 빼고 아무도 몰라. 담임 선생님 한 명은 나 추천서 써 주느라고, 교장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생이라 학교장 직인 찍어 줘야 해서 알고 그 외에는 진짜 아무도 몰라. 우리 엄마도 아빠도 모르고 서하늘한테도 얘기 안 했어.”

“…….”

“너한테 제일 먼저 얘기해 주는 거야.”

도대체 뭐길래 학교장 직인까지 필요한 일인가 싶어 동규도 괜히 가슴이 떨렸다.

“대한민국 인재상이라고, 매해 50명 뽑아서 주는 상이 있는데.”

“받아?”

“응.”

하림은 휴대폰 잠금을 해제해 한국창의재단 사무국에서 받은 대한민국 인재상 결과 안내 메일을 열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거, 잘하는 거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랑 어른들 주는 건데 중1부터 서른 살까지만 받는 그런 상이고.”

“젊은 인재 뭐 그런 건가.”

“응. 예전에, 중2 때도 한 번 신청했었는데 서류는 통과했지만 어렸을 때라 면접에서 너무 떨어서 떨어졌었어. 그래서 나중에 대학생 되고 시간 나면 해 볼 생각이었지만 RMM 떨어지고 제대로 준비를 시작했어. 어차피 서류는 중2때 만든 거에서 3년 치만 더하면 되는 거니까.”

“그랬구나.”

“올해 내가 학교 밖에서 과학 들어간 온갖 청소년 대회 상은 다 받아 왔잖아. 방학에는 코엑스에서 과학 축전 봉사 활동도 하고.”

“아, 너 금토일 어디 갔었던 거.”

“맞아. 상 받은 거 말고도 그냥 내가 영재원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한 게 엄청 많은데 그거까지 얘기하려면 너무 기니까 짧게 결론만 얘기하자면, 중고등학생 25명 뽑는 거에 나도 선정됐어. 대통령상이라 아주, 아주아주 권위 있는 상인데 특히 중고등학생부 대표 수상자로.”

동규는 길지 않은 메일을 빠르게 읽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대박, 진짜 대단하다! 축하해. 진짜, 너무너무 축하해. 어떻게 이런…… 이런 대단한 걸 숨기고 있었어? 박수 쳐 줄까?”

하림은 박수 칠 준비를 하는 동규를 보며 눈가가 시큰해 왔다.

“진짜…… 이거 받으려고 엄청 바빴거든. 아니, 사실 올해 안 되면 내년에 또 신청하면 되는 거라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생각은 없었는데 올림피아드 포기하고 그러니까 이걸 꼭 받아야겠는 거야. 접수가 8월 말까지였는데…… 그 때는 또 장학퀴즈도 했었잖아.”

“응.”

“자소서는 자소서대로 어릴 때부터 내가 수학이나 과학 뭐 그런 거 어떻게 얼마나 해 왔는지 써야 하고 퀴즈는 퀴즈대로 외워야 하지, 진짜 너무 힘들고 좀 지치고 그래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하림은 미간에 힘을 줬다.

“왜 얘기 안 했어? 방학에 내가 매일매일 너네 집에 갔었는데.”

“떨어지면 쪽팔리잖아. 그리고 나는.”

윗입술을 한 번 물었다 놓은 하림이 동규와 눈을 마주했다.

“내가 걔한테 양보해 준다고 하니까 나 대신 울어 준 너한테 멋지게 짠, 하고…….”

하림은 목이 메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울컥하지. 전혀 울 일이 아닌데.

“울지 마.”

“안 울어. 그냥, 바빠도 할 만하긴 했는데, 그랬는데…… 그러니까 진짜 학교 안팎으로 별거 별거 다 하면서도 재밌고 그랬는데…… 아 모르겠다. 왜 울 것 같지. 원래는 엄청 자랑하면서 얘기하려고 했단 말이야.”

“응.”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설명하고…… 엄청 자랑하려고 그랬는데…….”

“응. 대단해.”

“그때 네가 울어서 그래. 그러니까 엄청 열심히 하게 되고…… 바쁜 와중에 지칠 때면 너한테 너무 말하고 싶었는데 서프라이즈로 알려 주고 싶어서 말도 못 하고……. 대학 합격해도 이렇게는 안 울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버릇처럼 하던 미안하다는 말보다 동규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하림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면 하림이 진짜로 울 것 같아서 해도 되는지 하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그날 울지 말라며 놀릴 때는 언제고 뒤에서는 열심히 달린 하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마워.”

“…….”

“그리고 너무, 너무 고생했어. 고생 많았어.”

고개 숙인 하림에게서 결국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마워, 정말로.”

동규는 하림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운동장 쪽으로 트여 있는 하림의 오른쪽에 앉아 몸을 살짝 틀자 하림이 적당히 가려졌다. 작정하고 보려면 볼 수도 있겠지만 다들 밥 먹고 교실로 돌아가기 바빠 이 정도만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동규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둘 다 울었다가는 지나가는 누군가 한 명쯤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챌까 봐 눈물이 들어가게끔 행복한 상상을 했다.

“……메일 봐서 알겠지만 다음 주 금요일이 시상이고 기사도 뜨거든.”

“응.”

“그 전까진 엠바고 걸려 있고.”

“응.”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안 돼.”

“응. 절대 말 안 할게. 죽을 때까지.”

“그래.”

다음 주 금요일까지만 참으면 되는데 무슨 죽을 때까지 얘기를 하지 않겠다는 동규 때문에 하림은 웃음이 났다. 아직도 동규의 고맙다는 한마디가 자꾸 뇌 어딘가를 누르는 건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웃음도 계속 나왔다. 동규가 울지 말라고 옆에서 횡설수설하며 이상한 얘기를 쏟아 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이제 정말 한가해질 시간들이 기대되어 그랬을 수도 있고.

중요한 건 지금 하림의 옆에 동규가 있다는 것과, 앞으로의 시간에도 동규가 함께할 거란 사실이었다. 그게 제일 좋아서 웃음이 났다. 눈물도 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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