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16화 (26/53)

16

수학여행 가는 비행기에 올라탄 동규는 주섬주섬 영어 단어책을 꺼냈다. 동규보다 조금 늦게 온 하늘이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지만 동규는 시끄러운 와중에 홀로 다른 세상 사람처럼 평온했다.

“제주도 너무 가서 질리는데. 설마 가서도 계속 그거 보고 있으려고?”

“……아니.”

뒤늦게 분 공부 바람에 동규는 수학여행 가서도 심심하면 공부나 하려고 단어책 가져온 게 맞았지만 솔직하게 말했다간 하늘이 그거 가지고 물고 늘어질 게 뻔해 우선은 부정했다. 그러다 책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화장실 가게?”

“아니.”

동규는 하늘의 기내용 캐리어를 들어 위쪽에 넣어 주었다. 무게도 무게지만 하늘의 키가 많이 작아 위로 올리기 어려워 보였다. 아직 학생들이 들어오는 중이라 동규는 빠르게 몸을 구겨 앉았다. 하늘이 동규의 팔뚝을 가볍게 때리며 “감사.” 했다.

“이따 내릴 때도 부탁드림.”

“……뭔데 이렇게 무거워. 고작 2박 3일 놀러가는 건데.”

심지어 하늘은 위탁 수화물로 넘긴 캐리어도 엄청 큰 거였다.

“아. 그게 제주도에 친구 살아서 걔 주려고 이것저것 들고 와서.”

“제주도도 택배 다 받을 수 있는데.”

“선물이라고 선물. 책이랑 옷이랑 앨범이랑 굿즈랑 이것저것 택배보다 얼굴 보고 주는 게 좋으니까 들고 온 거라고.”

하늘이 동규의 팔뚝을 때리며 말했다. 아프진 않아 대답 없이 단어책만 펼쳤다. 하늘은 목베개를 앞으로 돌리고 안대를 썼다.

“나 잘 테니까 시끄럽게 하면 죽는다.”

여기서 제일 조용한 건 동규였고 다른 친구들이 시끄러웠기 때문에 동규는 입을 열어 작게 대답했다.

“나는 처음부터 조용히 있었는데 왜 나만…….”

“야!”

하늘이 벨트를 풀고 일어나 앞자리 옆자리 뒷자리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자리에 앉았으면 조용히 좀 해! 존나 초딩이냐? 시끄러워서 귀 터지겠네!”

“서하늘 네가 제일 시끄러워!”

“뭔 개소리야 나 3초 전까지 자고 있었어!”

그냥 가만히 있을걸. 당황한 동규는 하늘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하늘이 동규의 팔을 내치고 계속 친구들과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결국 선생님이 친구들과 하늘을 중재하고 나서야 하늘은 자리에 앉았다. 동규는 1반이라 제일 안쪽에 앉아 있을 하림이 너무 보고 싶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 나 잔다. 어제 장기 자랑 연습한다고 밤샘.”

방금 전까지 그렇게 욕을 하며 싸워 대더니 하늘은 안대 쓴 지 10초 만에 잠에 들었다. 동규는 하늘 때문에 놀란 가슴을 진정도 하지 못하고 영어책을 펼쳤다 접었다 했다.

“김동규, 뭐 해.”

비행기를 탄 친구들은 조용하긴커녕 시끄럽기만 했다. 갑자기 하늘이 깨어나 또 싸울 것 같은 불안함에 동규는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도 영어 단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동규에게 하림이 찾아왔다.

“공부 중?”

“아니.”

“초콜릿 가져왔는데 먹을래?”

동규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벨트를 풀고 일어났다.

“저기.”

“응.”

“저쪽으로…….”

“왜?”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인 동규 때문에 하림도 조용하게 물었다. 동규가 턱짓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하림이 입을 틀어막으며 동규의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하림이 동규를 자기 자리로 데리고 왔다. 동규는 그냥 몇 걸음 떨어지고 말 생각이었지 이렇게 아예 1반 자리까지 올 줄은 몰랐다.

“아까 서하늘 싸우는 소리 여기까지 다 들리더라고. 12반 애들도 다 들었을 걸.”

하림이 더플백을 내려 동규에게 줄 초콜릿을 꺼냈다. 그거 말고도 쿠키나 젤리 같은 것들도 한가득 싸왔다. 전부 동규 주려고 가져온 거였다.

“너 이런 거 안 먹는데 왜 산 거야?”

“엄마한테 선물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너 주려고 했던 거.”

“근데 나 엄마가 제주도 가서 많이 사 먹으라고 용돈 많이 줬어.”

“……그래. 그럼 맛있는 거 사 먹기도 하고 내가 주기도 하고 두 배로 먹어서 더 좋겠네.”

“그러게. 역시 천재.”

“김동규 잠깐만. 이쪽으로.”

초콜릿을 까먹으며 동규는 하림을 따라갔다. 이코노미석이 끝나 커튼이 쳐져 있는 곳에 하림이 들어갔다. 동규는 선생님이 이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게 생각나 커튼을 앞두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하림이 커튼을 걷고 다시 나타났다.

“뭐 해, 이쪽으로 오라니까.”

“여기 선생님이 우리 자리 아니라고 그랬는데.”

“학교 자리는 아니지만 내 자리는 맞아.”

“어?”

“아 빨리. 조용히 하고.”

작게 난 통로에서 승무원들이 하림과 동규에게 인사를 했다. 동규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를 지나쳐 다시 커튼을 걷자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있던 이코노미 클래스와 다른 널찍한 비즈니스 클래스가 나왔다. 반 정도 차 있는 비즈니스석엔 아기가 동석한 가족들이 많이 보였다.

“너 자리?”

“응. 내 자리랑 너 자리.”

“내 자리?”

아직도 이해하질 못하고 서 있는 동규를 하림이 잡아끌었다.

“리원아, 잘생긴 오빠들 안녕 해 줘.”

하림과 동규가 걸어가던 중 한 아기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기 엄마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아기도 함께 손을 흔들며 웃었다. 하림이 아기에게 다가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애기 이름이 리원이에요?”

“네. 갑자기 사람 지나가니까 궁금했나 봐요.”

“리원이 안녕, 나는 서하림이고 얘는 김동규야.”

동규와 하림이 아기의 앞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 다 아기와 더 놀고 싶었지만 피곤해졌는지 아기가 갑자기 칭얼거려 자리로 가야 했다.

“창가 자리 좋아해? 그럼 네가 안으로 들어가.”

“내가?”

“네, 김동규가요.”

왜 이곳에 자신의 자리와 하림의 자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길 막고 서 있을 수 없어 동규는 일단 앉았다.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우선 지금은 뭘 물어보고 싶어 하는지 알겠으니 대답해 준다. 이코노미는 네가 앉기에 좁을 것 같아서 내가 끊었어.”

안 그래도 무릎이 앞자리에 거의 닿을락 말락하고 좌석도 동규가 앉기엔 작고 좁긴 했다.

“선생님한테도 허락 받은 거야. 처음에는 그래도 출석 체크해야 하니까 학교 자리에 앉아 있고 이륙하고 나서는 자리 옮겨도 된대. 여기 우리 말고도 몇 명 더 자리 잡아 놓은 애들 있을걸.”

하림이 말을 마치자마자 세문고 2학년 학생 세 명이 비즈니스 클래스로 들어왔다. 학생들이 하림에게 손을 흔들었고 하림도 손을 흔들어 줬다.

“맞지?”

“비행기라는 게 한 사람이 여러 개를 예약할 수 있어?”

“돈 있으면 뭔들.”

영화관 좌석도 아니고 비행기 좌석을, 그것도 일반석보다 더 비싸 보이는데 하림에게 돈을 줘야 하는 건 아닌가. 자리 좁을 거 생각해 준 건 고마운데 왜 말도 없이 결제해서 조금 부담이…….

“혹시 몰라 얘기하는 건데 이거 두 자리 사는 데 돈 10원도 안 썼어.”

하림이 또 속마음을 읽어 동규가 화들짝 놀랐다.

“시, 십 원도?”

“항공사 마일리지가 엄청 많아. 그거로 결제한 거.”

마일리지는 쓰지도 않았지만 동규가 너무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아 하림은 그렇게 얘기했다. 하림의 말을 듣고 나서야 동규가 눈에 띄게 안심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나는 또 괜히 너 돈 많이 쓴 건 아닌가 하고.”

고작 제주도 가는 비즈니스 왕복이 비싸 봤자 얼마나 비싸다고. 퍼스트 끊었다간 마일리지 썼다고 해도 동규가 도망갈 것 같아 많이 양보한 거였다.

“마일리지 쓴 거라 내 돈은 하나도 안 썼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고개를 작게 끄덕인 동규는 하림이 괜한 돈을 쓴 게 아니래서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아기 엄청 귀여웠어.”

좌석에 앉아서 다리를 꼬아도 좁지 않다니. 역시 돈은 많고 볼 일이다.

“맞아. 리원이 그 어린 애가 잘생긴 건 알아가지고 너랑 나랑 보면서 아주 방긋방긋 잘 웃던데.”

“전에 무슨 책에서 봤는데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애기들도 평범하게 생겼거나 못생긴 사람보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더 좋아한대.”

“헐. 진짜? 대박. 어쩐지.”

하림이 좌석을 뒤로 젖혔다. 동규도 하림을 따라 좌석을 뒤로 하고 편하게 기댔다.

“너 아기들 되게 좋아하는 거 같아.”

“맞아. 나 귀여운 거 엄청 좋아함.”

“나돈데. 나는 특히 작은 거. 아기나 식물이나 물고기, 인형 같은……. 식물은 큰 거 말고 화분에 키우거나 텃밭에서 키우는 그런 거 있잖아.”

동규는 문득 자신에게 동생이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살 어린 동생 말고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으로. 그러면 옛날 옛날 동생을 미끼 삼아 하림과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엄마보고 동생 낳아 달라고 그럴까.”

“헐 왜, 안 돼.”

“응?”

“너 귀여운 거 좋다한다며.”

“그러니까 귀여운 동생 있으면 좋지 않나…….”

“안 된다고. 하나도 안 좋아. 그럼 너 맨날 너네 집에만 있고 우리 집에 안 올 거잖아. 학교 끝나면 동생 보러 간다고 쪼르르 달려가고 동생 얘기만 하고 그럴 건데 절대 안 돼.”

“너도 우리 집에 동생 보러 올 거잖아.”

“그건 그런데, 아무튼 싫어. 차라리 내가 동생 생기는 게 낫지.”

“음…….”

하림을 닮은 동생이라면 얼마나 예쁘고 귀여울지 상상이 간다. 하림의 어린 시절 사진을 봐도 예뻐 죽겠는데 하림의 동생이 태어나면 아예 하림의 집에서 살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네 동생이면 엄청 예쁘긴 하겠다.”

동규는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자기 눈에 예쁘면 하림의 눈에도 예쁠 것이란 결론에 뒤늦게 도달했고, 하림은 동규가 있지도 않은 제 동생보고 예쁘다 하는 것에 조금 짜증이 났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예쁠지 못난이일지 어떻게 알아.”

“다시…… 생각해 보니까 너도 동생 생기면 낮이고 밤이고 동생만 끼고 사느라 나랑은 놀아 주지도 않을 것 같아.”

“내가?”

“기저귀도 자기가 갈아 준다 그러고 분유도 자기가 타 준다 그러고 아예 동생 안고 문제 풀 거 같아.”

“아닌데. 그건 육아잖아. 내가 엄마도 아빠도 아닌데 그렇게까지는 좀.”

“맞을 거 같은데.”

“그냥 둘 다 동생 없는 거로 해.”

“그래.”

예상 외로 툴툴거리지 않고 바로 수긍한 동규 때문에 하림은 조금 당황했다. 계속 네 동생은 예쁠 거라며 눈치 없이 굴 줄 알았다.

“아하.”

“응?”

“아니야.”

짜아식. 질투도 이렇게 귀엽게 할 일인가. 태어날 일도 없는 애 때문에 자기랑 놀아 주지 않을 것 같다니. 하림은 입술을 말아 물고 웃음을 참았다. 그러다 넉넉한 자리에 편안한지 동규가 다리를 몇 번이나 바꿔 꼬는 걸 보다가 동규의 허벅지를 살짝 때렸다.

“정신 사나워.”

“그…….”

여전히 손은 동규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다. 동규는 손을 떼 달라고 해야 할지, 치워 달라고 해야 할지,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닌지 머리를 굴렸다.

“그 뭐.”

“아니.”

하림은 손을 떼지 않고 그대로 허벅지를 토닥였다. 어서 말해 보라는 제스처였다. 동규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걸 알고 일부러 한 거였다. 동규는 다리를 풀어 반대로 꼬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하림의 손이 떨어졌다.

“이, 이게 마지막. 이제 다리 안 움직일게.”

이번 수학여행에서 하림은 동규에게 꼭 고백을 듣고 말겠노라는 계획을 세웠다. 말이 좋아 수학여행이지 사실상 오전부터 네다섯 시간만 단체로 움직이고 그 이후로는 자유 시간이니 어떻게든 동규가 먼저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준비 많이 했다.

비즈니스석도 그 일환이었다. 일단 자길 생각해 준 배려에 감동부터 먹고 시작하면 좋은 거니까.

제주도까지의 비행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라 두 사람은 별로 얘기를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도착했단 승무원의 안내를 받았다. 뒤로 젖혀 놓은 좌석도 바로 돌리고 벨트도 맸다.

“이따가 짐 풀고.”

“응.”

“이따가 첫날 활동 다 하고 나면 방에만 있을 거야?”

숙소는 제주의 대형 리조트였고 두 명이 호텔 객실 하나를 같이 썼다. 리조트 내 부대시설이 다양한 곳이라 이번 수학여행 경비 중 가장 크게 차지하는 게 바로 숙소였다. 열두 반을 둘로 나누어 두 리조트에서 지내는데 절반인 6반에서 잘려 1반과 4반인 하림과 동규는 같은 리조트에 배정됐다. 반이 다르니 층과 방은 달랐다.

“응. 나는 사실 활동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냥 방에서 누워 지내고 싶은데.”

“나랑 카트 타 준다며.”

“그건 네가 타고 싶다니까 나도 고른 거지.”

오전과 오후 합해 다섯 시간 정도 되는 활동은 사전에 각 날마다 선택할 수 있는 활동명을 제시한 뒤 인원 제한을 두고 학생들이 고르게 했다. 첫날 오전, 오후, 둘째 날 오전, 오후, 마지막 날 오전, 오후 이렇게 여섯 가지 활동 외엔 저녁에 여섯 반이 전부 잠깐 모이는 게 다였다. 첫날밤은 각 반별로 모여 선생님, 반 친구들과 허심탄회한 시간을 갖고 둘째 날은 반 대항 게임과 장기 자랑이 진행된다.

두 사람은 첫날 활동으로 오전에는 번개과학관을, 오후에는 카트 레이싱을 선택했다. 둘째 날은 공룡파크와 항공우주박물관을, 마지막 날엔 소인국테마파크와 거울미로체험관을 신청했다. 동규는 다 하림이 하란 대로만 신청했으므로 두 사람은 3일 내내 같이 붙어 다닐 수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자마자 같은 활동을 선택한 학생들끼리 모였다. 동규와 하림은 번개과학관 줄에 섰다. 동규는 이름만 들어도 따분할 것 같은 번개과학관에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는 게 놀라웠지만 아무래도 하림을 따라온 친구들이 많아 보여 심기가 불편해졌다.

“나 여기 벌써 세 번째 와 보는 거야.”

“그럼 재미없을 텐데 왜 오자고 그랬어?”

“세 번이나 오고 싶을 정도로 재밌단 얘기지.”

과학관에 들어가자 하림은 헤드셋을 대여해 주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규는 하림을 따라 느리게 걸어갔다.

“과학관 설명 말고 네가 해 주는 설명 들어도 되지 않나.”

“상관은 없지. 내가 설명 더 잘해 줄 수 있음.”

동규와 하림은 헤드셋을 다시 반납했다. 직원이 가이드 필요 없냐고 묻기에 동규가 자기는 세 번째 온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처음엔 별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마지못해 하림을 따라 다니던 동규였지만 10분쯤 지나자 눈에 생기가 돌았다. 모든 체험마다 붙은 설명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여 있었고 옆에는 걸어 다니는 과학백과사전이 함께였다. 동규는 들어온 지 30분도 되지 않아 구름이 어떻게 생겨나고 번개는 왜 생성되는지를 난생처음 알게 되었다.

펌프질로 구름을 만드는 구름 생성기에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펌프질을 해 구름을 만들고, 에너지관의 자전거로 전기를 만드는 곳에서는 하림이 도와줄 것도 없이 혼자 굴러 전기를 끝까지 채웠다.

동규가 제일 신기해한 건 액체 자석이었다.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그냥 까만 액체인 자석이 버튼을 누르면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이건 왜 이러는 거야?”

버튼을 연타하며 신기해하는 동규에게 하림이 웃으며 대답해 줬다.

“입자 크기가 먼지보다 작은 자석 분말에 계면 활성제 넣은 건데 자석이 원래 자기장을 띠거든. 근데 버튼 누르면 가운데에 저 쇠를 따라서 자기장이 나오고 그래서 이 액체 자석이 뾰족하게 변하는 거야. 자기력 따라서.”

어차피 정확히 설명하면 동규가 어려워하기 때문에 적당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춰 얘기했다. 이 정도 설명은 동규도 잘 알아들으며 오히려 하림에게 이것저것 더 되묻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까만 물인데 이렇게 누르면 오, 완전 신기해, 어 징그러워. 오, 이거 봐.”

“나도 처음 봤을 때 너랑 똑같았는데. 개웃기다.”

“너 여기 언제 처음 왔다고 했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오, 또 오오…… 으 징그러워.”

덤덤한 동규에게 제일 뜨거운 반응이 나온 건 정전기를 체험할 수 있는 반 데 그라프였다. 아주 커다란 지구본 느낌의 대형 볼에 손을 올려놓으면 정전기가 생기면서 머리카락이 서는 체험이었다. 하림은 이 실험을 위해 동규에게 아침에 씻을 때 린스 하고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린스를 사용하면 정전기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동영상 찍어 줄게. 아, 잠깐만 아직이야!”

“응. 다 되면 알려 줘.”

“자, 아직, 시이작!”

건들면 안 되는 거라도 되는 양 동규가 두 손을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볼 위에 올렸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은 모습이 볼에 반사되어 보였다.

“머리가…….”

하림은 휴대폰을 동규의 머리 가까이 들이밀었다가 뒤로 물러났다 했다. 동규도 손을 뗐다 붙였다 하며 머리카락을 수시로 매만졌다.

“나도 나도. 이거 지금 계속 찍고 있으니까 멈추지 말고 바로 나도.”

하림이 동규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주고 반 데 그라프에 손을 얹었다. 하림의 머리카락도 하늘을 향해 솟아 동규가 하림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얼굴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찍어야지.”

“아. 미안.”

동규는 손을 대면 머리카락이 솟았다가 떨어지면 머리카락이 힘을 잃는 게 신기해 몇 번이나 손을 댔다 뗐다 했다. 하림이 뒤에서 동규가 끝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반 데 그라프와 비슷한 플라즈마볼도 동규가 엄청 신기해하며 한 번에 몇 개씩 건드리거나 온몸을 이용해 건드렸다.

“이제 번개 터널하고 끝이야.”

“벌써?”

“벌써라니. 한 시간 넘었어.”

“헐.”

“가자, 번개 터널.”

번개 터널은 문이 닫힌 바깥에서도 우루릉쾅쾅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동규가 번개 터널을 그냥 슥 지나치려고 하길래 하림이 슬쩍 웃으며 동규에게 노란 헤드셋을 건넸다.

“어딜 가. 벌써 끝나냐고 아쉬워했으면서 천둥 번개는 왜 그냥 지나치는데.”

“아, 그…… 나 원래 천둥이랑 번개 싫어하는데…….”

“알아. 그러니까 안 무섭게 손잡고 들어가자.”

“어?”

“싫으면 팔짱 끼고.”

“아니, 싫다는 게, 그, 아니 팔짱 어, 그냥 들어가도 돼. 근데 무서운 거 아니고 싫어하는 건데…… 어차피 가짜잖아.”

손잡아도 괜찮고 팔짱 껴도 괜찮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다른 애들이 보니까 그럴 수는 없고, 하지만 그 자체가 싫다는 건 아니라는 말도 하고 싶고 무서워하는 걸 들키기도 싫어 동규는 머릿속이 죄다 꼬여 버렸다.

터널 문 앞에 서니 소리가 엄청나게 들려와 동규는 헤드셋을 벗을까 고민됐다. 옆에 서 있던 하림이 문을 열고 들어간 탓에 동규는 하림의 뒤꽁무니를 따라 덜컥 터널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헤드셋을 썼는데도 엄청나게 울리고 번쩍거리는 터널에 동규는 하림의 티셔츠 끝자락을 겨우 붙잡았다.

“아 씨발 그냥 밖에 있을 걸…….”

“뭐라고? 무섭다고?”

좋아하는 애 앞에서 무섭다고 내빼긴 싫어 동규는 입술만 꾹 깨물고 하림의 팔을 잡았다.

“야! 무서우면 나갈까!”

“아니! 하나도 안 무서워! 그냥 빨리 가자!”

“알았어! 무서우면 눈 감아!”

“안 무섭다고!”

하지만 동규는 눈을 감고 하림의 빠른 걸음을 따라 걸었다. 하림의 팔을 붙잡은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한 시간 반을 돌아다니면서 체험한 것보다 고작 터널 하나 끝에서 끝으로 걸은 게 더 진이 빠졌다. 동규는 2층 포토 존에 올라가 의자부터 찾았다.

“벌써 뻗어?”

“아니, 너무 열심히 돌아다녔어.”

“그럼 나 사진만 좀 찍어 주고 쉬어.”

트릭아트 포토 존에 가서 선 하림이 사진을 위해 열심히 포즈를 취했다. 사진 찍을 생각이 없어 하림만 열심히 찍어 주며 웃던 동규는 하림이 찍어 준단 말에 그림 앞에 어정쩡하게 섰다.

두 사람은 점심 먹고 간 카트 레이싱 체험에서 소원을 걸고 내기를 했다. 하림은 여기서 무조건 이겨서 소원을 딸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소원으로 오늘 밤이나 내일 밤에 어떻게든 고백을 이끌어 낼 요량이었고. 이길 자신도 있었다. 하림은 카트 주행을 여러 번 해 본 경험자였고 동규는 처음 해 보는 초심자였으니까.

동규가 연습 주행을 하는 동안 하림은 카페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노닥거렸다. 1년 만에 타는 카트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을 거란 자신감이 충만했다.

“나 연습 다 했어.”

“좋아. 소원내기 한판승이야.”

하지만 하림은 잊고 있었다. 자신은 운전을 개떡같이 한다는 걸. 그리고 몰랐다. 동규 역시 소원을 꼭 따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는 걸.

“……내가 이길 줄은 몰랐는데.”

“나야……말로.”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이다. 하림은 눈물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소원 뭔데? 뭐로 할 거야?”

“……아직 몰라. 생각 좀 해 보고.”

“집이나 차 사 달라고 하는 건 안 돼. 아니 되긴 하는데 너무 엄청나게 비싼 건 말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몰라.”

“또 그 놈의 몰라.”

“진짜 몰라. 이제부터 생각할 거야.”

저 눈치 밥 말아 먹은 놈이 소원을 얘기해 봤자 얼마나 대단한 걸 얘기할지 싶어 하림은 속이 탔다. 내가 소원을 가져갔어야 했는데.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리조트로 돌아온 학생들은 각자의 객실에서 쉬거나 다른 반 친구와 만나 리조트 내부에서 자유 시간을 보냈다. 저녁도 자유롭게 내부에서 먹고 8시 30분까지 지하 컨벤션홀에서 모이는 일정이었다.

하림은 도착해 씻자마자 동규의 객실로 뛰어갔다. 동규와 룸메이트인 친구는 어딜 나갔는지 동규 혼자였다.

“김동규 뭐 해, 나와.”

“왜?”

“왜긴 왜야. 뭐 보여 줄 거 있으니까 그렇지.”

“지……금?”

“맛있는 거 사 줄게.”

“안 사 줘도 돼. 씻기 귀찮아서 그랬던 거야. 30분쯤 더 쉬다가 씻으려고 그래서.”

“그럼 기다릴 테니까 씻어.”

욕실로 사라진 동규의 침대에 벌렁 누운 하림은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 밤에 고백을 받아 낸 뒤 모레 집에 서울 가는 비행기에서 얼마나 행복할지를 상상했다. 아, 돌아가는 비행기는 칸막이 칠 수 있게 퍼스트 끊을 걸 그랬나. 국내선 퍼스트에도 칸막이가 있던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하림이 시간을 빠르게 죽이는 동안 동규는 빛과 같은 속도로 씻고 나왔다.

“옷 들고 갔었어?”

분명 동규가 욕실 갈 때 빈손이었던 것 같은데.

“응.”

“샤워 가운 왜 안 입고?”

“……너 있어서.”

“뭐야. 같은 남자끼리.”

아무리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도 서로 알몸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려던 동규는 그냥 입을 닫았다.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도 부끄럽고 꿈속에서는 셀 수도 없이 많이 본 하림의 몸이 떠오르기도 했고.

“……가자, 빨리.”

“그래.”

샤워 가운 입은 동규를 보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나중에 실컷 보기로 하고 하림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동규를 데리고 간 곳은 VIP 라운지였다. 숙소 정해지자마자 하림이 할아버지에게 전화해 이용할 수 있게 부탁해 뒀다. 처음엔 단체로 간 수학여행에서 혼자만 이용하는 건 좋게 보이지 않는다고 할아버지가 탐탁지 않아 했지만 하늘의 이름을 들먹이며 간만에 둘이 오붓하게 식사를 하겠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마지못해 하림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할아버지의 VIP 카드와 서하림 외 1인 이용을 확인받고 하림은 동규와 VIP 라운지에 들어갔다.

“여기서 놀다가 저녁도 여기서 먹고 지하로 가자.”

“여기서?”

안 그래도 소수의 사람이 이용하는 VIP 라운지는 비수기인 10월 평일이라 하림과 동규를 빼면 몇 사람 있지도 않았다.

“응. 여기서.”

“여기…… 있어도 돼?”

“입구에서 확인 받았잖아. 서하림과 동반 1인.”

“그래도…….”

“여기도 리조트 내부라 상관없어. 선생님한테 허락받음.”

“……진짜?”

“그럼 진짜지.”

물론 어차피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되는 거라 허락은 받지 않았다. 동규가 너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어봐 그냥 적당히 대답했다.

“안마 의자 할래? 아니면 여기 무슨 게임할 수 있는 곳도 있어. 탁구는 어때.”

“나 탁구 잘 못하는데.”

“나도 잘 못해. 둘 다 못하면 더 재밌겠다. 원래 실력이 비등비등해야 재밌어.”

“……그런가.”

“가자, 가자.”

라운지 곳곳 돌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고 볼 수 있는 건 다 들여다본 두 사람은 가볍게 케이크를 곁들여 차를 한 잔씩 마셨다.

“저녁 먹기에는 이른 시간인데 그냥 저녁 먹을래?”

“이제 5시 좀 넘긴 했어.”

“저녁에 왜 굳이 모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거만 아니면 수영하고 8시쯤에 저녁 먹으면 딱인데.”

“그러게.”

“이래서 작년에 수학여행 파투 났어도 아무도 아쉬워 안 한 거라고.”

“아…….”

“도대체 누가 저주받은 학년이라고 부르는 건지. 정작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

저주까진 아니어도 운이 없는 학년이라고 생각했던 동규는 케이크만 떠먹었다.

“내일 오후 활동 끝나면 수영이나 할까.”

“내일?”

“응. 너 수영 좋아하잖아. 수영복 안 가져왔어도 여기서 사면 돼.”

“별로…… 안 하고 싶은데.”

“아 왜. 수영 엄청 잘하면서.”

“그냥…….”

이유는 간단했다. 하림의 벗은 몸을 보기 싫어서. 반대로 하림은 동규의 벗은 몸을 보고 싶어서 동규에게 대답을 보챘다. 몸 좋다고 실컷 놀리고 마음껏 만져 볼 생각이었다.

“추워서.”

“실내 수영장도 있어.”

“답답해.”

“나 참. 그럼 게임방이나 사우나는 어때. 근데 내일도 애들 게임방이랑 노래방에 다 몰려 있을 것 같다. 스파랑 사우나도. 흠. 뭐하지. 아, 밥 지금 먹자. 먹고 보드게임 한 판 어때.”

“좋아. 근데 나 보드게임 잘 못해.”

“내가 알려 줄게. 가볍게 오셀로부터 해 볼까. 젠가도 스릴 넘치긴 한데 정리하기가 귀찮아. 음, 루미큐브 존잼인데 이건 둘이 하기에는 조금. 아, 너 오목은 할 줄 알아?”

“그거 할 줄 모르면 한국인 아니야.”

“김동규 너 바둑 둘 줄 모르지.”

“응.”

“내가 나중에 바둑 알려줄게.”

“……보드게임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끝판왕을?”

“그렇게 안 어려워. 와 우리 남은 올해 동안 할 거 엄청 많아졌다.”

바둑은 보드게임이 아니었지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림은 그냥 넘겼다.

라운지 한쪽에 자리를 잡고 하림이 디너 주문을 했다. 코스 2인을 주문하면서 동규가 먹기 좋을 메인 두 개를 더 시켰다.

“많이 먹어라, 김동규.”

“…….”

“이거는 우리 할아버지가 쏘는 거니까 많이 먹어도 돼.”

“할아버지가?”

“여기 라운지 친구랑 쓴다고 한 거라서.”

“아.”

이제 하림이 독심술 쓰는 건 놀랍지도 않다. 동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피타이저로 나온 감자수프와 크랜베리 빵을 먹었다. 수프는 셰프의 추천으로 매일매일 바뀐다더니 정말 맛이 좋았다.

“근데.”

“응.”

“아래에…… 뷔페랑 한식당도 엄청 맛있다는데 왜 여기로 온 건지…….”

메인으로 스테이크에 파스타에 바닷가재까지 먹고 있던 동규가 물었다. 하림은 스테이크를 자르려다 말고 잠시 손을 뗐다.

“우선, 여기 코스 요리가 괜찮고 또 창밖으로 보이는 뷰도 좋아.”

하림의 시선을 따라 동규도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림과 같이 있느라 창밖 풍경은 신경도 못 쓰고 있었는데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근사했다.

“라운지 담당 지배인도 친절하고 플레이팅도 예쁘게 잘 나오고.”

“응.”

“나는 맛있는 거 먹거나 예쁜 거, 좋은 거 볼 때마다 너 생각이 제일 먼저 나.”

하림은 최대한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평범한 얘기를 하는 듯이 말했다. 생각보다 더, 심장이 터질 것처럼 굴었다.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한 것뿐이라 특별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눈을 깜빡이고 숨을 쉬는 모든 순간순간에 너를 생각하고 있단 말 대신 뱉은 말이라 그랬다. 과연 얼마나 잘 전해졌을진 알 수 없어도 하림은 이 정도까지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더 했다간 진짜로 좋아한다고 말해 버릴 것만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는 못 한 채로 동규가 고개를 돌려 하림을 바라보았다. 하림은 창 너머를 보고 있다가 스테이크를 마저 썰었다. 굳어 있는 얼굴도 아니고 심각한 얼굴도 아니다. 그렇다고 신이 나거나 웃고 있지도 않았다.

동규는 하림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머리를 굴렸다. 하림을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맛있는 걸 먹기도 하고 이곳저곳 참 많이 놀러 다니기도 했다. 하림이 한 말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엔 충분했지만 아무래도 아까 보드게임 얘기 할 때처럼 자길 데리고 갈 곳이 아직도 그렇게 많다는 뜻이겠지. 땅덩어리 좁은 나라라고 해도 TV를 틀면 나오는 게 전국팔도에 있는 맛집들이고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명소들도 매해 바뀌니까…….

그런데, 하림의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제멋대로 해석을 덧붙여 이해하고 싶다. 이미 하림의 평범한 한마디 한마디에도 이런 뜻이었으면, 저런 뜻이었으면 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따뜻한 말에는 커다랗고 소중한 의미를 붙여서 고이고이 간직하고만 싶었다.

“……고마워.”

하림은 눈동자만 살짝 굴려 동규를 바라보았다. 동규는 엄청나게 심각한 얼굴이었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항상…… 나 생각 많이 해 주고 그래서. 배려도…… 해 주고 되게 신경도…… 많이 써 주고…….”

왜? 하고 눈 동그랗게 뜨고 물어볼 줄 알았더니 의외로 기특한 말이 튀어나와 하림은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내가 성격이…… 너처럼 속에 있는 걸 바로바로 얘기하거나 솔직하게…… 그런 게 좀 아니다보니까 혹시라도 내가 너한테 고맙고 감사한 걸 표현하는데 부족했다면…… 미안해.”

잘 나가다가 이렇게 삐끗할 줄이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나도…… 나도 좋은 거 볼 때마다 네 생각해. 많이 해. 좋은 거만 보여 주고 싶고 또…… 그냥 아무튼 미안해. 나도 앞으로 잘 표현해 보도록.”

“아니. 김동규야, 잠깐만.”

“으응…….”

시무룩한 얼굴의 동규가 귀엽기도 하고 어이도 없어서 하림은 지금 웃어야 할지 짜증을 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확실한 건, 이번엔 실패다.

“네가 얼마나 나한테 고마워하는지는 잘 알아. 너도 알잖아. 나 독심술 쓰는 거.”

“……그거 진짜야?”

“그러니까 말로 하기 부끄럽고 힘들면 안 해도 돼. 다 알 수 있어. 마음도 읽고 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서.”

고맙고 좋아한다는 티를 그렇게 내는데 모르면 바보지.

“그거 가지고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사과한 거 취소해 빨리.”

“응, 미안해. 아니 이거 취소. 아까 사과한 것도 취소.”

“잘 했어. 마저 밥이나 먹자. 밥 먹고 오셀로 할 거야.”

하림이 스테이크를 잘라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동규가 아직도 시무룩한 채로 눈동자만 굴리고 있다. 뭐가 또 그렇게 걱정이고 생각이 많으신지. 하림은 작게 웃은 뒤 얼굴을 갈무리했다.

“김동규, 나 봐 봐.”

“…….”

“얼른.”

“……응.”

겨우 동규와 시선을 마주한 하림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엄마, 엄마 아들 큰일 났다.

“불러 놓고…… 왜 웃어.”

“김동규가 맛있는 음식들 앞에 두고 세상 잃은 표정을 짓는데 진짜 웃기지 그럼.”

나 이제 김동규가 뭘 해도 다 좋아서 어떡하지. 미운 구석을 찾아보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는데. 입을 세모 모양으로 삐죽이면서 왜 웃냐고 하는 것도, 축 처진 귀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도, 걱정에 열심히 흔들리는 눈동자도 다, 모두 다 좋아서 김동규가 나보고 1과 1을 더했을 때 2가 아니라고 하면 그게 내게는 진리가 될 것 같은데 엄마 아들 어떡하지.

“세상 안 잃었어.”

“그래 마않이 먹고 쑥쑥 커라.”

조금 식은 스테이크 고기를 하림은 작게 썰어 입에 넣었다. 식은 분위기를 함께 먹는 것이기 때문에 같이 먹는 사람도 중요한 거라던 어떤 유명인의 말이 떠올랐다.

“김동규.”

“응.”

좋아한다고, 이 눈치 없고 곰 같은 놈아.

“뭔데.”

하림은 고백을 해, 말아 하며 입술만 짓이겼다. 복스럽게 식사하는 동규를 보고 있자니 좋은데,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애가 탔다. 하림은 고개를 뒤로 꺾어 소리를 한 번 질렀다. 손님 없는 시즌이라 다행이었다.

“내가 진짜 딱 올해까지만 참는다.”

“뭐를? 왜? 내가 뭐…… 아 혹시 너무 많이 먹었……어?”

“아니 이건 할아버지가 사는 거라 메뉴판에 있는 요리 다 먹어도 상관은 없고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고 충분히 오해할 장면이긴 한데 갑자기 걔 어, 권예준 생각나서 그래.”

“걔가 또 뭐 했어?”

“걔야 뭐 항상 똑같지. 아 그리고.”

“응.”

“아니다. 확실해지면 알려 줄게.”

“뭔데. 궁금하게 왜 말 꺼내서…….”

“미안 미안. 다음 달 말? 아니면 중순쯤에 확실해지는 게 있거든. 한 달만 기다려.”

“응.”

하림은 올해 RMM 떨어졌을 때부터 세웠던, 극소수의 학교 선생님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계획도 빨리 말해 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게 결과가 나온 게 아니라 말하기가 좀 그랬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어.”

“응.”

“너 올해 백일장 더 안 나가?”

식사를 맛있게 하던 동규가 갑자기 또 풀이 죽었다. 동규는 열심히 참여는 하고 있었지만 상을 받질 못하니 하림에게는 백일장 나간다는 말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하림의 입장에서는 동규가 백일장을 나가지 않은 줄 알았던 거고. 주말마다 동규가 엄마랑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림도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있고.

“……아마도.”

“혹시 내가 뭐 아픈 곳을 찔렀다거나 그런 건가 지금?”

“살짝.”

“미안.”

“…….”

“아, 김동규 내가 미안해. 빨리 포크 들고 먹어. 내가 진짜 진짜 죽을죄를 지었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진행된 반별 모임에서 동규는 혹시라도 하늘과 싸운 친구들이 하늘에게 해코지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하늘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수련회 가기 며칠 전 하늘이 친구들과 왜 싸웠는지 처음으로 속 터놓고 얘기하면서 반별 모임 있을 때마다 같이 있자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고, 하늘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보내오는 무시무시한 내용의 메시지를 읽으며 동규는 베개를 적셨다.

아무튼, 동규가 하늘의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본 담임 선생님이 장난으로 둘이 사귀냐고 했지만 4반 학생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둘째 날 밤은 하늘이 다른 반에 있는 제 친구들과 준비한 장기 자랑으로 전교생을 뒤집어 놓았고 하림은 아무도 모르게 참여했던 복면가왕에서 첫 번째로 떨어졌다. 인터뷰는 목소리가 변조되어 몰랐다지만 ‘사랑에 빠진 호랑이’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친구들은 ‘사랑에 빠진 호랑이’가 하림인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실력으로만 문자 투표를 행사하는 냉철한 판정단이었다.

전교생 중에 동규만 하림이 가면을 벗을 때까지도 몰랐다. 동규는 가면을 벗는 하림을 보고 ‘사랑에 빠진 호랑이’를 투표하지 않았단 충격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림도 노래를 못 부르는 건 아닌데 나머지 다섯 명의 참가자가 엄청난 실력자였다. 복면가왕 기획자인 시후는 하림이 노래 괴물들에게 밀려 첫 번째로 떨어질 걸 예상하고도 오로지 재미와 이슈를 위해 하림을 참여시킨 거라, 가면을 벗은 하림이 다른 친구들이 이렇게 잘 부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을 흐리자 배가 찢어져라 웃었다.

동규는 마지막 날 아침 리조트 내에 있는 기념품관을 갔다가 직원의 말에 홀려 부모님 줄 선물로 나무젓가락을 사 하늘에게 혼이 났다.

“기념품관에서 일회용 돌하르방 나무젓가락을 사는 호갱이 누군가 했더니 그게 내 친구였을 줄이야.”

“장인이 이틀 내내 손수 사포질을 해서 비싼 값을 한대…….”

“그걸 믿어? 어떤 장인이 일회용 젓가락을 손수 사포질한대? 다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개구라 친 거지! 집에 일회용 젓가락 없어?”

“있어…….”

“그만 좀 잡아. 내가 이따가 제대로 된 거 사 주면 되잖아.”

“야. 간 김에 환불해 와라, 꼭?”

체크아웃하기 전 동규를 데리고 기념품관에 들렀지만 동규는 나무젓가락 위에 달린 돌하르방이 마음에 든다고 환불하고 싶지 않단 티를 풀풀 냈다. 그래서 환불한 셈 치기로 했다.

하림은 동규 것으로 제주도에서만 살 수 있는 캐릭터 인형을, 동규 엄마 것으로 감귤 디퓨저, 마지막으로 동규 아빠 드릴 홍삼 젤리를 샀다. 더 좋은 걸 사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엄마가 돈이 어디서 났냐고 의심을 할 거라며 동규가 카드를 긁으려는 하림을 겨우겨우 말렸다. 동규는 하늘에게 두 번째 선물들을 검사받았고 다행히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하림이 열심히 상상했던 것과 달리 동규와 하림 두 사람 사이에는 큰 변화 없이 수학여행이 종료됐다. 올해까진 겨우 두 달 반이 남았다고, 하림은 스스로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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