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15화 (25/53)

15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열린 한국사경시대회에 하림은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 동규가 이건 왜 참여하지 않은지 물어보았다. 하림은 약간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참여해 봤자 어차피 시후 때문에 1등은 못 할 거란다.

7차 정규 동아리 활동을 하림은 기악부가 아닌 학생회로 참여했다. 축제 위원회 일 때문이었다. 감투를 썼다간 축제날 동규랑 돌아다니질 못하니 하림은 그냥 평범한 회원 1만 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날로 먹을 순 없어 회의 참여도는 높았다.

“그렇게 열심히 할 거면 뭐라도 한 자리 해.”

“뭐라도 한 자리 주면 바로 축제 위원회 탈퇴할 거야. 나는 그냥 일개미가 꿈인 소박한 사람이라고.”

“일개미? 소박한 사람? 서하림이 입학하고 학교 안팎으로 받아 온 상장만 해도 산을 쌓겠다. 올림피아드도 안 나가면서 뭐가 그렇게 바빠?”

샘솟는 아이디어를 열심히 뱉고 있긴 한데, 사실 축제 위원회는 올해 3월부터 시작되어 하림이 할 일이 크게 없는 상태였다. 위원회 친구들과 후배들이 떠드느라 산으로 가는 이야기의 맥락을 잡아 주고 새로 나온 의견들을 현실 가능성 있게 정리하는 게 하림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축제까지 아직 멀었다는 학생회 친구들이 하림에게 엄지도 날리고 박수도 날렸다. 원래 학교 축제 자체가 크게 진행됐기 때문에 하림은 그걸 어떻게 잘 하나로 엮을지만 내놓은 거였는데 친구들이 칭찬해 주니 기분은 좋았다.

“오늘도 우리 집으로…… 가?”

“응.”

매일같이 동규가 하림의 집으로 하교 했던 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이제는 하림이 방과 후에 동규네 집으로 갔다. 하림의 자리는 동규의 침대 위. 장학퀴즈 기출문제 프린트를 동규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보다가, 휴대폰 보다가, 동규랑 간식 먹고 과외 시간 맞춰 집으로 돌아갔다. 과외 없는 날은 저녁까지 먹었다.

그럴수록 난감해지는 건 동규였다. 동규의 자위 장소도 침대 위로 고정이 되었다. 샤워할 때도 하림을 생각하며 신나게 해 대지만 제일 최고는 하림이 누워 있던 제 침대에서 하는 거였다. 침대가 두 사람은 누울 수 없는 크기인 게 천만다행인 수준이다. 조금만 더 컸어도 하림이 같이 누울 수 있는 크기라며 같이 드러누워 시간을 보낼 뻔했으니까. 그랬다가는…….

하림이 왔다 간 날의 이틀 중 하루는 꿈에 하림이 나왔다. 그것도 동규 침대 위에 누운 채로. 하림은 매번 침대 위에 누워 동규의 이름을 야살스럽게 불렀다. 옷은 벗고 있을 때도 있고 입고 있을 때도 있는데 대체로 입고 있을 때가 많았다.

옷을 입고 있는 하림이 나오면 동규는 하림의 교복을 손수 벗겼다. 손만 스쳐도 스르륵 스르륵 풀리는 단추들을 미루어 봤을 때 동규는 옷을 입고 하는 게 자기 취향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하림의 옷을 다 풀어 주고 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림과 흘레붙어 몇 번이고 섹스를 했다. 꿈속에선 체력이 무한으로 남아도는지 해가 몇 번이나 뜨고 져도 계속 하림과 하고 또 하길 여러 번이었다. 때때로 하림은 섹스 도중에 기절을 하기도 했는데 동규는 그런 하림을 붙잡고도 계속 허리 짓을 하고 힘이 빠져 달랑거리는 하림의 안에 사정을 실컷 하고 그랬다.

이 정도는 양반이고 말로는 못 할 짓도 꿈속에서 엄청 했다. 동규는 자기 자신이 엄청난 쓰레기라는 사실에 매일 아침마다 울적해졌다. 어쩔 때는 해가 지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잠드는 게 싫어 밤을 지샌 적도 있었다.

열락에 찬 밤이 많아질수록 동규는 한계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서하림.”

“응.”

“아주머니 밥 먹고 싶어.”

“아. 그러고 보니 너 우리 집 밥 못 먹은 지 오래 됐네.”

“응. 사실 나는 우리 엄마랑 입맛 너무 달라서 우리 집 밥 별로야.”

“헐 진짜?”

“응. 우리 엄마 완전 노인네 입…….”

순간 동규는 자기 엄마와 하림의 입맛이 똑같다는 것과 하림이 제 엄마가 하는 음식들을 얼마나 좋아하고 잘 먹는지를 떠올리며 황급히 말을 수정했다.

“맛은 아니지만 그, 풀맛 아니 맛없, 아니 그러니까 조미료 재료를 잘 안 쓰는…….”

“뭐야. 우리 아주머니도 조미료 안 써.”

“어, 알지. 그러니까 나는 좀 매운 것도 잘 먹고 느끼한 거나 달고 짜고 그런, 그런 강한 맛도 잘 좋아하는, 아니 아주머니가 막 밖에서 사먹는 것처럼 자극적인 것만 한다는 건 아닌데.”

하림은 당황이 잔뜩 느껴지는 동규의 말이 어디까지 이어지나 듣고 싶어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아주머니 밥이 너무 먹고 싶어.”

횡설수설한 와중 결론은 깔끔해 하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우리 아주머니 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내가 잘 알지. 그래, 가자 우리 집에.”

“그리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아 왜. 나도 김동규네 집 밥 먹고 싶어.”

계속 하림이 왔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하림에게 입술이라도 들이댈 것 같아 동규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단호한 말에 하림이 발걸음을 멈추고 동규를 바라보았다. 살짝 심각한 표정인데도 그답지 않게 눈을 피하지 않는 게 정말 싫긴 싫은가 보다.

하긴 일부러 김동규네 집에 놀러가서 온갖 수작이란 수작은 다 부렸는데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느끼는 게 있겠지. 게다가 동규는 안 그렇게 생겨서는 속으로 야한 생각도 많이 하는 것 같았으니까.

“알았어. 갑시다, 서하림의 스위트 홈으로.”

여름 방학 동안 동규는 매일같이 하림의 집으로 놀러 왔다. 잠도 일주일에 하루는 꼭 하림의 집에서 잤다.

올해 여름 방학의 시작은 하림의 장학퀴즈 연습이었다. 공부해야 하는 기출문제만 해도 백과사전 급이었는데 하림은 따로 또 과학 어쩌고를 하느라 엄청 바빴다. 중요한 건 아닌지 동규에게는 이제 올림피아드 안 나가니까 그 시간에 다른 걸 하겠다고 했을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동규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매년 여름마다 참가하던 여름 문학 캠프에 떨어져 발에 치이는 게 시간이었고 하림의 퀴즈를 도와주면서 의도치 않게 학문적 지식이 쌓여 갔다. 원래도 책 많이 읽어서 잡지식이 굉장했는데 심화 지식이 덧입혀지는 기분이었다.

“촬영일이 언제라고 그랬지.”

“아직 몰라. 왜냐면 이게 챔피언 학교 애들이 연승할 때마다 도별 학교들이 도전자로 가는 건데 지금 한창 챔피언인 학생들이 계속 이기는 거면 우리가 서울 지역 대기 5번이라. 두 번째 조거든. 촬영이 방송보다 한 주 정도 텀 두긴 하는데 아무튼 챔피언 학교들이 몇 승에서 떨어질 줄은 모르는 거니까.”

“아하.”

“헐!”

갑자기 소리를 지른 하림에 동규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닭강정을 놓쳤다.

“……왜?”

“내가 말했나? IMO 결과 엊그제 나왔었는데?”

“아니.”

“어 왜 말 안했지. 근데 내가 하도 만나는 사람들한테 다 얘기해서 너한테도 얘기한 줄 알았나봐. 아무튼 결과 나왔는데 올해 우리나라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10위권 밖으로 떨어져서 기사도 났어. 매해 1~5등 하는데 올해는 부진한 성적 거뒀다고. 그리고 권예준 가서 지 혼자만 금은동 메달 못 받고 장려 받음.”

“벌 받았네.”

“내 말이. 빨리 시간 지나갔으면 좋겠다.”

“장학퀴즈 때문에?”

“응. 내겐 우승뿐이야. 장려가 뭐냐 장려가. 발로 풀어도 장려 받겠네. 참가상인데.”

“…….”

올해 참여한 열 몇 개의 백일장에서 장려 세 개밖에 받지 못한 동규는 하림의 말에 대답 없이 닭강정만 먹었다. 왜인지 슬픈 것도 같고 목이 막혀 와 콜라도 두 컵을 마셨다.

“그리고 인터뷰지 받아 봤는데.”

“헐. 궁금해.”

“TV로 확인하세용.”

“아 뭐야. 나 그날…… 응원 갈 건데.”

“오 진짜? 왔다가 너도 방송 탈 수 있어. 잘생기고 예쁜 친구들 오면 무조건 카메라로 잡는대.”

“그게 왜?”

“너 찍어 달라고 그럴 거야.”

“……그럼 생각 좀 해 보고.”

“서하늘은 온대.”

“좋다고 간다 했을 듯.”

“정답.”

하림이 방송을 탔다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림을 알아볼지, 나만의 서하림이었으면 좋겠는데 만인의 서하림이 되는 건 아닌지 동규는 걱정이 됐지만 하림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고 있자니 싫은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전에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것도 있었고.

그 후 하림과 시후의 촬영 일자가 잡혔다. 개학한 주 토요일이었다. 파죽지세의 전남 전호고가 4승을 확정 지으며 5승 도전으로 서울 지역의 세 고등학교가 도전자로 결정됐고 그 세 고등학교에는 세문고도 포함이었다.

결국 동규는 고민을 많이 하다 얼굴이 팔릴 수도 있다는 걸 감수하고 장학퀴즈 녹화에 참여했다. 대신 마스크에 야구 모자를 쓰고 무조건 화면에 잡힐 것 같은 하늘과 멀리 떨어져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았다.

하림과 시후는 방송 촬영을 하는 건데도 하나도 떨지 않는 게 신기했다. 동규는 고작 방청석에 앉아 있는 건데도 손발이 덜덜 떨리고 세문고팀 버저가 갑자기 안 눌리면 어쩌나 걱정돼 죽겠는데.

게다가 이번 챔피언 학교는 5승에 도전하는 학교로, 올해 5승을 한 학교가 딱 두 학교밖에 없어 세 번째 5승 도전이라는 팀이었다.

챔피언 팀인 전라도 전호고의 5승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하림과 시후가 스튜디오에 나타나자 방청석이 술렁거리고 스텝들도 웅성거렸다. 세문고 친구들이 함성을 질렀다. 동규는 좋으면서도 싫은 양가감정을 느끼며 침만 삼켰다.

1라운드는 사지선다의 객관식 열여섯 문제로 맞추면 10점을 얻게 되고 틀리면 10점을 잃는다. 문제는 인물, 음악, 물리, 역사, 화학, 문학, 상식, 미술, 지리 법, 생명과학, 지구과학, 음악, 국어, 한문, 사회까지 총 열여섯 영역으로 나오는 순서는 랜덤.

1라운드 첫 문제를 풀고 난 뒤 사회자가 전호고팀에게 5승에 도전하는 소감을 물었고 네 번째 문제를 풀었을 땐 도전자 팀에게 사회자의 질문이 돌아갔다. 서울지역 세 학교 중 첫 번째 질문 대상은 세문고였다.

“장학퀴즈를 10년 넘게 진행 중인데요.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이렇게 잘생긴 남학생은 처음 봅니다, 서하림 군.”

“감사합니다.”

“잘생긴 거 스스로도 알고 있죠?”

“미와 추는 잘 구별하는 편입니다.”

“인기가 굉장히 많을 것 같은데요.”

“없진 않습니다.”

하림의 대답에 사회자가 웃었다. 하림도 활짝 웃었다.

“네, 그럼 서하림 군. 세문고는 어떤 학교인가요. 학교 자랑 좀 해 주세요.”

“우리 세문고등학교는 역사 교과서에 나올 만큼 역사가 깊은 학교로 일제강점기에도 국민 교육에 힘을 쓴 민족 학교입니다. 국어 교과서에서 만날 수 있는 기라성 같은 시인, 소설가, 역사교과서에서 나오는 독립운동가분들이 우리 학교 선배님이거나 선생님이셨습니다. 나라의 기초가 되는 국민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나라의 독립과 문화 발전을 위해 힘써 온 학교가 바로 우리 세문고등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멘트 열심히 준비해 왔나 봐요.”

“학교 자랑이라 실수 안 하려고…….”

“학교가 몇 년 됐나요?”

“백 년이 넘었습니다.”

“듣기로는 서하림 군은 그렇게 수학을 잘 한다고 들었어요.”

“잘하는 것보다는 좋아합니다. 좋아하니까 매일 수학만 풀게 되고 그래서 잘하게 되는 그런 거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온갖 수학 대회에는 다 참여했었는데요. 올해는 국제올림피아드 한국 대표에도 뽑혔습니다.”

“하지만 포기했죠? 뉴스까지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이슈였습니다.”

“개인적인 이유라 밝힐 순 없지만 수학은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고요, 대신에 이렇게 시후랑 장학퀴즈 출연하게 되어서 행복합니다!”

“백시후 학생은 엄청난 축구 매니아라면서요?”

“제가 돌잡이 때 축구공을 잡았어요.”

시후는 태몽도 엄마가 굴러오는 황금 축구공을 잡았다느니, 어릴 때 친구들이 공룡 이름 외우고 다닐 때 자기는 유럽 5대 리그 선수 이름을 꿰고 다녔다는 얘기를 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들었어요.”

“제가 학생회장이거든요. 작년에는 부회장이었고 아무튼 나름 작년에 이어서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생각만큼 잘 못 하는 거 같고 그런데, 올해는 체육 대회 진짜 열심히 준비했고 11월에 있을 축제도 열심히 준비 중이니까 TV를 보고 있을 친구들아. 지금 다 보고 있지? 다들 축제 기대해라.”

“축제에 그렇게 열을 올리는 이유가 있어요?”

“작년에 저희 학교가 수학여행을 못 갔어요. 제주도 눈병 때문에 취소가 되가지고…… 그래서 저주 받은 학년이라는 오명이 붙었는데 그걸 씻어 보려고 열심히 준비 중입니다.”

첫 방송이라 그런지 세문고팀은 1단계에서 조금 부진했다. 1등과의 점수 차는 크지 않았으나 3등으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나 좀 이상하거나 그러지 않았어?”

“전혀. 존나 잘생기게 나올 듯.”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해하고 그러진 않았냐고.”

“응응. 잘했어요.”

하늘이 하림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대충 대답했다. 하림이 만에 하나 떨어질까 걱정인 동규는 하늘의 뒤에 서서 그저 하림에게 “잘하고 있어” 한마디 한 게 고작이었다.

쉬는 시간 후 주관식 20문제로 이루어진 2라운드는 맞추면 20점이고 틀리면 10점 감점이었다. 중간중간 추가점수나 선물이 걸린 한국사 문제가 있고 시후가 한국사 문제를 전부 맞히며 2라운드에서 2위로 우뚝 올라왔다.

동규는 파이널 라운드가 시작될 때 심장이 바스러지는 줄만 알았다. 1등과의 점수 차는 단 10점. 마지막인 만큼 맞추면 30점, 틀리면 10점인 종합형의 다섯 문제와 최대 50점까지 점수를 걸어 획득하는 최종 문제로 진행된다. 영역은 역사, 창의력, 문학, 음악, 과학.

첫 문제는 챔피언인 전호고가 골랐고 창의력 문제가 나왔다. 문제를 맞힌 건 세문고의 하림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역사였고 시후가 맞췄다. 시후와 하림은 버저를 누르는 손이 떨려 왔다. 최종까지 가지 말고 다섯 문제를 다 맞히자며 작게 파이팅을 했다.

그리고 뒤이은 3번과 4번 문제에서 전호고가 오답을 말한 상태에서 세문고는 다섯 문제를 전부 맞혀 버렸다. 1등와 2등의 점수 차가 150점 이상 벌어져 최종 문제까지 가지 않은 채 세문고의 우승이었다. 팡파르가 울리며 시후는 방방 뛰며 환호했지만 하림은 얼떨떨해 옆에서 저를 잡고 흔드는 시후를 따라 팔랑팔랑 흔들렸다.

-파이널에서 다섯 문제를 다 맞힐 줄은 몰랐는데 똑똑한 제 친구 서하림이 승리의 가장 큰 이유 같고요. 학교 선생님, 친구들, 엄마 아빠 다 감사합니다! 부모님 사랑해요! 백시, 백시연 너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재 갓하림 고마워!

-전호고 친구들이 못 이룬 5승 우리가 달성할 수 있도록 계속 열심히 할 거예요, 네, 어, 아직도 잘 안 믿기고 네, 감사합니다. 응원해준 2학년 1반 친구들 고맙고 시후야 제일 고마워! 다음 주도 잘 부탁해.

일요일 아침부터 놀러 온 동규와 온 가족들이 본방을 사수했다.

“시후, 시연이랑 그렇게 매일 싸우면서 그래도 오빠라고 이름 얘기해 줬네. 우리 아들 화면빨을 너무 못 받는 거 아니야?”

엄마와 아빠가 오두방정을 떨면서 부끄러워하는 하림을 보고 웃었다.

“으, 나 1승 때 엄청 굳어 있었다.”

“어제는 엄청 자연스러웠어. 연예인인 줄.”

어제 녹화에서 하림은 2승을 했다.

“하림아. 할아버지한테 전화 드려.”

1승을 거머쥔 첫 방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이 온갖 연락에 알람으로 불이 났다. 하림은 대신 엄마 휴대폰으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려 했으나 엄마의 아는 사람들도 하림의 방송을 봤는지 연락이 자꾸 쏟아졌다.

“장학퀴즈 시청률 낮다고 했는데 이게 대체 뭐야. 나 휴대폰 좀 빌려줘.”

하림은 아빠 쪽 조부모님들께 제일 전화를 먼저 드리고 엄마 쪽 조부모님들에게는 나중에 걸었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뭐가 그렇게 탐탁지 않은 건지 우승했다고 방심하는 순간 지는 거라고 잔소리만 했다. 하림이 어제 2승했다니까 그래도 겸손해야 하는 거란 말만 나와 하림이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트렸다. 전화를 바꾼 할머니와는 10분을 넘게 통화했다.

그 뒤로도 하림과 시후는 1차 목표였던 5승을 이루고 몇 년 전 2인 1팀 체제가 된 이래로 세 번째, 올해만 따지면 장학퀴즈 첫 7승을 달성하며 전국 모든 지역 대표 학생들을 물리쳤다. 3천만 원의 장학금을 어떻게 쓸 거냐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하림은 전액 기부 의사를 밝혔고 시후는 유학 자금으로 쓴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엄청난 유명인사가 됐으나 바로 코앞이었던 2학기 중간고사와 축제 준비로 정작 하림은 인기를 누릴 정신이 없었다. 시후는 적당히 놀고 적당히 인기도 즐기곤 했는데 하림은 바이올린 연습도 해야 하고 세성전 축구 연습에 온갖 교내 대회도 참가하고 축제 위원회 준비에, 마지막으로 백일장에서 맥을 못 쓰며 슬럼프에 빠져 있는 동규를 챙기기까지 하느라 몸도 시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 참여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어.”

1반으로 놀러 온 시후는 하림과 자신의 꼬리표를 비교하며 잠시 좌절했다가 금세 살아났다.

“그게 중간고사 꼬리표랑 무슨 상관인데.”

“몇십 년 된 장수 프로그램이기는 해도 시청률이 낮은데 화제성이 아직도 안 꺼진 걸 봐.”

“그게 성적이랑 뭔 상관이냐고.”

“당연히 상관이 있지. 심지어 우리 7승할 때 장학퀴즈 역대 최고 시청률 찍음. 너 방송국에서 연락 엄청 온다며. 난 성적이 인생의 다가 아니라는 걸 몸소 느꼈다, 하림아.”

“그건 나도 그래.”

“담 주가 수학여행인데 성적이 뭔 상관이냐. 지금을 즐겨 서하림!”

“축제 위원회에 사기 쳐서 꽂아 넣은 새끼가 입만 살아서…….”

시후는 하림이 이번에도 전 과목 1등을 차지한 것에 좀 놀랐다. 과목별 등수가 2, 3등을 하더라도 토털 등수는 1등이 될 수 있는데 서하림은 도대체 얼마나 괴물인 건지 그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 와중에도 단 한 과목도 빠짐없이 1등을 놓지 않았다.

7주나 장학퀴즈에 출장하는 건 시후도 꽤나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었고, 하림도 집에 가면 장학퀴즈 준비만 한다고 그랬기 때문에 이번에는 하림이 10등 밖으로 미끄러지진 않을까 말은 안 했어도 걱정 많이 했었다.

왜냐면 시후는 역사골든벨 예선에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장학퀴즈로 시간을 따로 빼기 어려워 골든벨 공부는 딱히 하지 않았더니 본선에 나갈 수 있는 50등 안에 들지 못했다. 지금까지 덕질한 세월이 몇 년인데 50등 정도는 당연히 될 줄 알았던 시후는 쪽팔려서 밤마다 베개를 뜯었다. 그랬던 시후는 자기가 얼마나 부질없는 걱정을 했던 건지 하림의 꼬리표를 보고 깨달았다. 앞으로는 서하림을 걱정하는 과오는 저지르지 말아야지.

“사기라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나는 말만 했고 결정한 건 너야.”

분명 축제 위원회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고, 작년 축구부와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과는 다르게 하림은 이상하게 시후가 저를 학생회 홍보 대사쯤으로 쓰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림은 시후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다 강수를 뒀다.

“골든벨은 너 혼자 나가. 아, 못 나가지.”

“뼈 부러졌어요.”

“진짜 정중하게 얘기하는 건데, 꺼져 주라.”

4반 놀러 가려던 걸 시후한테 붙잡힌 상태라 하림은 말에 가시가 섰다.

“꺼져 달라니. 어떻게 친구한테 그런 험악한!”

그리워하면 영화처럼 만나게 된다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교실 앞문에 고개를 빼꼼 내민 동규가 보였다. 하림은 벌떡 일어나 앞문으로 뛰어갔다. 갑자기 일어나 시후와 부딪혔지만 하림은 얼얼한 팔꿈치를 쓰다듬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내가 안 놀러가서 온 거야?”

“응.”

“근데 왜 들어오지 않고 문에 서 있었어?”

“바빠 보여서.”

“하나도 안 바쁜데.”

“백시후랑 뭐 하는 거 많잖아.”

“그거 다 하나도 안 바쁜 거야.”

“……그래?”

“응응.”

“줘 봐.”

여름 방학부터 동규가 하림의 퀴즈를 도와주면서 쌓인 지식들은 학교 공부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래서 하림은 동규의 시험 점수가 꽤 오르지 않았나 기대 중이었고 꼬리표 나오면 확인할 거라 그랬다.

동규는 그 말을 착실히 따라 하림에게 꼬리표를 보여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하림이 종이 쳐도 오지 않자 1반으로 꼬리표를 들고 왔다. 시후가 하림의 옆에서 뭐라고 뭐라고 얘기 중이라 방해하기 싫어 교실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 대박. 역시.”

국어는 공부해서 올랐던 1학기 점수와 비슷했고 괄목할 만한 성적을 이룬 건 사회 과목들이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너도 하면 잘 할 수 있다고 했어 안 했어.”

“했어. 아 근데 이거는 너랑 같이 문제 맞히듯이 하니까 재밌어서 반짝 오른 거고 기말고사 때는 또 0점 맞을 걸.”

“그러니까 내가 선생님 해 줄게.”

“……공부하기 싫은데.”

“그럼 다른 건 말고 영어만 하는 건 어때.”

“영어만? 왜? 나는 국어나 사회 과목들이 그나마 재밌는데.”

“그럼 그거는 네가 알아서 공부하고 영어는 내가 알려 줄게. 영어 공부해.”

“아니 그러니까 왜…….”

“세계화 시대에 영어를 해야 살아남지. 유치원생 알려 준다 생각하고 엄청 쉽고 재밌게 알려 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얼떨결에 영어 과외를 하게 된 동규는 하림이 가져갔던 꼬리표를 주머니에 넣었다. 하림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동규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어서 가.’ 했다.

“2교시 땐 내가 놀러갈게.”

동규는 인상을 찌푸린 채 교실로 돌아왔다. 하늘이 왜 그렇게 사람 죽일 표정을 짓고 있냐고 놀렸지만 동규는 왜 하림이 영어 공부를 시키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심각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수학도 아니고 내가 재밌다고 한 국어나 사회도 아닌 영어?

평생 한국에서 살 건데 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여행은 자고로 호캉스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동규는 해외여행을 개고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었고 국내 여행도 서울 밖은 위험하다며 아직 살면서 부산도 한 번 안 가 봤다.

그러나 늙어 죽어도 영어 공부는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타의에 의해 시작된 영어 공부는 예상보다 재밌었다. 하림이 워낙 쉽고 재밌게 설명해 주다 보니 그랬다. 동규는 다 늦은 나이에 초등학생용 알록달록한 영어 단어책을 들고 다니며 틈틈이 영어 단어를 외웠다. 하림은 잘해도 못해도 칭찬을 해 줬지만 이왕이면 잘해서 받는 칭찬이 기분 좋았다.

그렇게 동규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동규를 아는 친구들이 하나같이 그 모습을 보며 놀라워했지만 동규는 가볍게 무시하고 영어 단어책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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