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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학생회 부회장 됐을 땐 이런 것도 안 하더니 시후는 학생회장이 된 기념으로 축하 파티를 열었다. 요란스럽진 않고 그냥 건물 하나 빌려서 출장 셰프 부르고 위아래로 VR게임기나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당선 기념으로 노는 거였다. 2주 뒤면 기말고사라 다들 시후의 당선을 축하한다는 핑계로 모였다. 작년과 다르게 하림이 올해는 생일 파티를 하지 않는다고 한 탓도 컸다.
하림은 생일 당일에는 집에서 부모님이랑 밥 먹고 동규랑은 밤에 잠시 만나기로 했고, 다음 날인 토요일은 동규랑 아침에 만나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붙어 있을 계획을 다 짜 놨다.
‘점심 피크 시간 때 만나면 사람들 너무 많으니까 음, 2시에 만나서 익선동에서 조금 늦은 점심 먹고 한옥마을 구경하자. 퓨전 한복 대여한다니까 그거 빌려서 사진도 찍고 돌아다니다가 간식 먹고 거기 오락실에서 내기 걸고 게임도 했다가 운현궁이랑 창덕궁, 아 여기는 진짜 한복 빌려서. 그리고 저녁 먹고.’
‘근데 생일 일주일 뒤가 기말고사잖아. 그렇게 종일 놀아도 돼?’
‘또 또 전교 꼴등이 1등 걱정하는 소리 한다.’
‘아니 나는 그냥…… 예의상 한 말이었어.’
동규는 하림의 성적을 케어해 주는 이모님보다 더 하림의 성적에 민감하게 굴었다. 공부를 잘했으면 하림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하나의 노는 방법이 될 텐데 그게 아니니까. 하림은 동규에게 너는 방해 요소가 될 수가 없다고 단언했고 동규 역시 하림의 공부에 자기 자신이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 옆에서 팽팽 놀고 있다 보면 죄책감이 들기 마련이었다.
어쨌든 하림은 이런 귀찮은 파티의 총대를 저 대신 매 준 시후에게 한 턱 크게 선물을 줄 생각이다.
“시후야 나 왔다.”
동규랑 놀다 오느라 뒤늦게 도착한 하림의 두 손에는 친구들이 준 선물이 한 가득이다. 하림은 넓은 식탁 한편에 쇼핑백을 모두 올려두고, 홀로 앉아 뭔가 먹고 있는 시후의 옆에 앉았다. 분명 인기척도 느끼고 인사도 들었을 텐데 시후는 일부러 모른 척이었다. 하림은 테이블을 두드렸다.
“나 왔다고.”
“왔냐.”
“지금 바빠?”
“아니? 네가 더 바빠 보여.”
“나는 생일이잖아.”
“뭔데. 나는 진짜 리얼로 하나도 안 바쁨. 말이 내 축하 파티지 지금 다들 나 따돌리고 지들끼리만 노는 걸 봐.”
하림은 커다란 파티 룸 내부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1층도 이런데 2층은 더 놀자판일 거다. 친구들이 하림에게 인사를 건네 와 하림이 두 손을 바쁘게 흔들었다.
“거봐, 거봐. 나는 다들 안중에도 없어. 말이 내 축하 파티지 네 생일 축하도 겸하는 파티야.”
“아무리 봐도 백시후 당선 축하 파틴데.”
시후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온갖 쇼핑백들을 불에 탈 것처럼 째려보다 하림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서하림. 유치원 다닐 때부터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해 오던 걸 왜 올해는 안 하겠다는 건데.”
메뉴판을 살피며 하림은 말이 없었다.
“시험 기간에 놀기는 눈치 보이고 그런데 네 생일 있으니까 네 이름 대고 놀기도 편하고 좋잖아. 이 동네 엄마들이 너를 좀 예뻐해? 너도 그거 알아서 우리들 숨통 트이게 해 준다고 꼬박꼬박 잘만 앞장서 주던 거 왜 갑자기 나한테 토스했냐고.”
“귀찮아. 투표해줬으니 표 값 한다고 생각해.”
“구라 치네. 여자친구랑 놀고 싶어서 그런 거면서.”
“나 여자친구 없어. 카나페 먹고 싶은데 너 뭐 뭐 먹어 봤어. 추천 좀.”
“없는 놈이 왜 이유도 없이 내빼는데? 참치 카나페 맛있음. 그거 먹어. 참치에 양파랑 마요네즈랑 꿀이랑 같이 갈아서 해 주는데 존맛임. 그 위에 계란은 그냥 삶은 계란이랑 훈제란 중에 선택 가능인데 뭐로 할래. 둘 다 맛은 괜찮아.”
“훈제란.”
“아래 오이 깔리고 위에 올리브 토핑인데 괜춘? 난 올리브 싫어해서.”
“괜찮아.”
시후가 셰프에게 참치 카나페와 몇 가지를 더 시켰다.
“저는 올리브 토핑 반이랑 방울토마토 토핑 반으로 주세요.”
“마실 거는? 내가 마시고 있던 거는 무알콜 샴페인 스파클링.”
“음 사과 주스. 시럽 빼고.”
생과일주스가 빠르게 나와 하림은 주스부터 한 입 마셨다.
“야 그래서 누군데. 서하늘이 아니라고 열심히 쉴드 쳐 주고는 있는데 걔가 그런 거 해 줄 애냐? 걔가 아니라고 나서서 그러고 다니니까 더 의심되잖아.”
“만약에 진짜 내가 여자친구 있었으면 서하늘이 쉴드를 안 쳤겠지. 내 여자친구를 서하늘만 알게 됐다고 생각해 봐. 과연 서하늘이 지금과 같았을까.”
“우리 궁금해 죽으라고 들쑤셨을 듯.”
“거봐.”
“하긴. 네가 그런 거 숨길 사람도 아니지.”
“아, 배고프다. 언제 나와.”
“금방.”
하림은 카나페를 몇 개 집어 먹다가 깜빡 잊고 있던 선물이 생각났다.
“아 맞다. 백슈 당선 축하 선물 있어.”
“뭔데? 사인 유니폼? 아니면 리미티트 에디션 축구화?”
“아니 이 축덕아. 그거 말고 장학퀴즈 같이 나가 준다고.”
“헐 진짜?”
“응. 생각해 봤는데 나가서 5승하면 괜찮은 미들엿인 것 같아서. 기사도 뜨겠지?”
“미들엿? 왜 빅엿이 아닌데?”
“그런 게 있어.”
“뭐 따로 꿍꿍이가 있나 본데.”
“좀? 근데 장학퀴즈 챙겨 보는 사람 별로 없지 않나. 화제성은 있을까?”
“야, 말해 뭐 해. 거울 봐라 거울.”
“아니 그거 말고.”
동규가 이제 그런 일로 어린애처럼 투정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림은 약속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며 동규랑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이제 올림피아드는 안 나가니까 놀 생각만 했는데 누구 때문에 또 방학에 공부만 하게 생겼다.”
“고마워. 사랑해!”
“두 번 사랑했다가는 골든벨 나가자고 하겠네.”
“헐.”
“야 너 설마.”
“하림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안 어려워.”
“됐어. 그리고 골든벨은 학교 단위라서 지금 신청해도 언제 올지 모르는 거 아니야?”
시후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림은 접시를 들고 한 자리 더 옆으로 옮겼다.
“3년 전부터 매해 11월마다 순국선열의 날을 알리기 위해 특집으로 통일 골든벨이라고 역사 특집.”
“몰라몰라몰라몰라몰라.”
“을 하는데 9월인가 10월에 예선 보고 방송이 본선.”
“몰라몰라몰라. 안 들려요 안 들립니다.”
시후는 어릴 때부터 축구를 무척 좋아했다. 축구를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구단의 역사를, 구단의 역사를 알아보다 유럽의 역사를, 유럽의 역사를 알아보니 세계사를, 세계사를 공부하니 한국사까지 관심사가 이어져 중학생 때 이미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과 세계사능력검정시험에서 1급을 땄다.
그런 시후에게 역사 특집인 통일 골든벨이란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으나 혼자 참여하기는 조금 그랬다. 고등학교 3년간 통일 골든벨은 못 나가나 싶었는데 하림이 올림피아드를 포기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때,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시후는 하림과 배 속부터 친구였으므로 지금의 반응은 조금만 더 물고 늘어지면 하림이 마지못해 같이 나가 줄 반응이라는 걸 잘 알았다. 장학퀴즈 같이 나가 준다는 건 골든벨 출연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쳇. 그래, 하나라도 나가 주는 게 어디냐. 나는 골든벨도 나가련다.”
우선은 아닌 척 한 발을 뺐다. 어차피 착한 애라 같이 나가 줄 걸 아니까.
“응원은 가 줄게.”
“고오맙다. 최후의 1인 돼서 너한테 찬스 쓸 수도 있으니까 공부는 같이 해 줘.”
“그래.”
이거 봐. 시후는 리조또를 마저 입에 넣으며 사악하게 웃었다. 별 특별할 거 없는 자기가 방송 타 봤자 나왔는지도 모르게 편집당해 쉽게 묻히고 말 테지만 하림과 함께라면야 전국구로 유명해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뭐야. 왜 변태처럼 웃는데.”
“내 역덕력을 모두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좋기도 하겠다. 나도 수학 골든벨 있으면 나갔을 텐데. 물리나.”
“근데 그런 거 있었어도 워낙 마이너해서 1화만에 폐지됐을 듯.”
“그건 그래.”
이 날 하림은 시후랑 얘기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학생회 소속 축제 위원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시후가 학생회장이 되면 이루겠다고 한 공략 중에 ‘더 재미있는 축제’가 있다. 하림의 학년은 작년 수학여행 취소로 인해 저주받은 학년이라는 오명을 썼고 시후는 그 오명을 씻기 위해 5월에 있던 체육 대회에 혼을 팔더니 가을에 있을 축제는 아예 축제 위원회까지 꾸려 놨다.
그러니까 하림은 얼렁뚱땅 중간에 합류하게 된 축제 위원회 회원이었다. 작년 축제에서 하림이 축구부 프리 허그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잘 알고 있는 시후가 학생회에서는 프리 허그 따위는 취급도 안 할 것이며 이번에는 쿠폰을 만들어서 나눠 줄 건데 어쩌고저쩌고, 미션 수행하듯 도장을 모으는데 어쩌고저쩌고, 축제의 테마를 정해서 이러쿵저러쿵하며 하림을 홀렸다. 축제에 테마를 정한다는 건 개학 때부터 안내된 상황이긴 했어도 하림은 기악부에 축구부에 임시 학생회까지 얼떨결에 바쁜 몸이 되어 버렸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1학년도 아니고 너무 과하게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작년에 동규가 참여하지 못한 학교 축제를 재밌게 만들어서, 동규와 함께 즐겁게 보내면 좋은 일이었으니까. 작년 겨울쯤 축제를 대대적으로 손보기 시작했다는 건 하림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동규는 정규 동아리로 독서부에 속해 있지만 신문부 친구들의 요청으로 매달 교내 신문에 실을 글들을 짧게 이것저것 써서 보내 주는 객원 기자도 겸하고 있다. 세문고 신문부 ‘세움’은 정규 동아리와 자율 동아리를 모두 합쳐 약 70개가량의 세문고의 동아리 중에서 80년이라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매달 말일 A3 사이즈의 〈월간 세움〉이 학생들 사이에서 핫한 이슈들을 모아 앞뒤를 꽉꽉 채워 발간되고 있는데 SNS의 세문고등학교 재학생 계정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음에도 종이 신문은 인기가 나쁘지 않았다. 방학이 있는 달은 네 페이지짜리로 꽤 그럴싸하고 알찬 신문이 나온다.
신문부가 꾸준한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신문부가 학생들에게 대자보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말일에 가정 통신문 나눠 주듯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있지만 〈월간 세움〉은 우선 각 반 칠판 옆에도 다 붙기 때문에 학생들이 학교나 선생님에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을 때 제일 잘 활용하는 매체였고 신문부 부원들은 익명으로 투고된 이슈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교내에서 열리는 각종 대회 수상자 인터뷰나 연예인 관련 이슈, 인기 드라마 이야기도 들어가며 신문부 SNS에 이미지 파일로도 올라간다.
의외로 하림은 신문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교외상 수상자의 경우 인터뷰 대상이 아니었다. 자소서에 대외 활동을 쓰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교내 대회의 경우도 다양한 학생들을 실어야 한다는 규칙 때문에 1등이 아닌 학생들의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하림은 연말에 1학년 학업 우수상 수상자로 첫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작년 세성전 우승을 이끈 주역이었으니 인터뷰를 했을 만도 한데 축구부 인터뷰는 2학년 주장과 축구 덕후 시후가 가로채 가 버렸다. 올해는 IMO 포기 후에 특목고와 자사고 그리고 사교육 시장의 이슈 문제에 관한 기사를 작성할 때 인터뷰를 했다.
동규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신문부 학생들이 리뷰를 해 줬으면 하는 책이나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짧게 적어 내거나 자유롭게 수필을 썼다. 하림은 동규가 매달 적은 글들을 전부 스크랩해 모아 놨지만 동규에겐 비밀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 보여도 독서부와 신문부 활동을 하는 동규가 작년 축제를 참여하지 못해 하림은 무척 안타까웠다. 독서부는 뭘 했는지 몰라도 작년 신문부에서는 즉석 신문 만들기를 했었다. 태블릿 PC로 얼굴 사진을 찍으면 자동으로 미리 저장된 사진에 합성되어 그 사진과 맞춰 저장된 웃긴 기사가 프린트되는 식이었다. 신문부에서는 기발한 합성 사진과 참신한 기사 템플릿을 스무 개나 준비해 작년에 제일 인기 있던 부스 TOP 5에 이름을 올렸다.
하림은 축구부 부스에서 손만 빨며 그걸 보고만 있었다. 동규랑 같이 가서 즉석 신문을 얼마나 만들고 싶던지. 하늘의 동아리인 패션 디자인부의 부스는 또 어땠던가. 하늘이 자기네 동아리 부스에서 걱정 인형을 만든다고 꼭 놀러 오라 했었지만 동규 없이 혼자 만들고 싶지 않아 가지 않았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작년 축제를 떠올리니 하림은 차라리 축제 위원회가 된 게 다행이라 느껴졌다. 이제 막 당선되었어도 작년에 이어 연속으로 학생회 임원인 시후가 작정하고 축제를 뜯어고쳐 놨다. 학교에서 전교회장인 시후에게 힘도 실어 준다.
무엇보다 하림은 부스 지키고 있는 건 죄다 시후 시켜 버리고 동규랑 재밌는 부스들이나 돌아다니며 도장이나 모을 생각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까짓 거 바쁘게 살아 보지 뭐. 언제는 안 바쁘게 산 적 있었나. 안 그래도 올해는 연초부터 계속 준비하던 것도 있는데 일 한두 개 더 생긴다고 죽는 것도 아니었다. 좀 힘들긴 하겠지만.
동규는 좀 있으면 도착할 하림을 기다리며 세상이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한테 금요일은 하림의 생일이고 그날 밤에 하림을 잠깐 만났다가 헤어진 다음, 토요일에 다시 만나 하루 종일 논다는 얘기를 해 두었다. 그런데 말하지 말걸, 괜히 말했다고 동규는 후회 중이었다. 그 얘길 들은 엄마가 귀찮게 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냐,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되지 않냐고 했다가 하림이 그걸 덥석 물어 버린 탓이다.
하림이 쓸 침대가 없어 엄마와 같이 접이식 매트 침대를 사러 갔다가 동규는 고집을 부려 새 이불과 베개까지 샀다. 집에 멀쩡한 이불이랑 베개가 몇 갠데 새로 사냐는 구박에 동규는 제대로 반박도 하지 못하고 요즘 자기 이불이 너무 흐물거린다는 둥 베개도 좀 이상해진 것 같다는 둥 자기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하림에게 새 이불과 새 베개를 주고 싶다는 말은 부끄러워하질 못했다.
“하아…….”
진짜 지구 안 망하나. 엄마는 서하림 제대로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대뜸 집으로 초대를 해 초대를.
이틀 연속으로 방청소를 마쳐 깔끔하다 못해 청결한 방 상태도 마음에 안 들고 하림이 자기 방에서 자고 가는 것도 별로였다. 오늘 밤은 잠 다 잤다. 잘 수나 있을까. 벌써 밤새고 일출을 본 것만 같다.
“안녕하세요!”
“하림아, 생일 축하해! 이건 아줌마가 주는 작은 선물.”
“저 지금 까 봐도 돼요?”
“그럼.”
“엄마 일단 좀 들어오라고 하자. 신발도 안 벗었어.”
하림은 그 말에 운동화를 벗어 던진 채 정리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동규가 하림의 운동화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헐. 진짜 감사해요. 저 안 그래도 비타민 먹던 거 다 떨어져서 사야 됐는데.”
“정말?”
“네! 우와 진짜 어떻게 딱 아셨지? 저랑 아줌마랑 텔레파시가 통했나 봐요!”
“그랬나봐.”
“진짜, 지인짜 감사합니다. 덕분에 더 행복한 생일이 됐어요.”
서하림이 비타민을 챙겨 먹는 게 있던가. 비타민 먹는 것보다 과일 먹는 게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림의 말에 동규가 의아하게 쳐다봤으나 하림은 그런 동규를 가볍게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씻는다. 아줌마, 오늘 언제 주무실 거예요?”
“글쎄. 12시 전에는 자지 않을까? 왜?”
“아 그냥 우리 둘이 떠들다가 웃고 그러면 주무실 때 방해 되진 않을까 해서요.”
“괜찮아. 오히려 그런 소리가 나면 아줌마야 좋지. 동규가 소리 내면서 웃은 거 들은 지 10년은 된 것 같다 아줌마는. 어릴 땐 까르르 잘도 웃었는데.”
“그러니까요. 아홉 살 때 처음 봤을 때는 무슨 말을 해도 반응도 확실하고 귀여웠는데 지금은 뚱해 가지고 툴툴대고 속도 좁아서 삐지기는 또 얼마나 잘 삐지는지 제가 요즘 친구랑 다니는지 유치원생이랑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내가 먼저 씻고 온다.”
화장실로 도망친 동규는 앞으로 다시는 하림을 집에서 재우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둘이 저렇게 쿵짝이 잘 맞을 건 뭐람. 입술 댓 발 내밀고 샤워하던 동규는 혹시 몰라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한 번 사정했다. 숨소리까지 죽여 자위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정액을 물에 흘려보내며 잠시 진득한 공허에 휩싸여 있던 동규는 자위를 한 것을 후회했다. 이 뒤로 하림이 씻으러 들어온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동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욕실 청소를 시작했다. 간단하고 빠르게 청소를 끝마쳤지만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 리모델링 하는 줄. 왜 이렇게 늦게 나와.”
“그냥.”
머리를 말리고 소파에 앉아 TV를 켰지만 내용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주 작게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좋은 집에서 씻고 오지 왜 안 씻고 와서 우리 집에서 씻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서하림이었으면 집에서 아예 반신욕까지 하고 왔다.
“아들. 엄마는 오늘 좀 일찍 잘게. 급하게 내일 출근하게 됐어.”
“왜? 토요일인데.”
“엄마도 잘은 몰라. 내일 출근하면 확실히 알게 된다는데 뭐가 잘못돼서 지금 난린가 봐. 사실 지금 와 달라고 연락 오긴 하는데 피곤해서 못 간다고 했어.”
“몇 시에 나가?”
“평소에 가는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빠르게.”
“그럼 주말 출근이니까 월요일에 쉬어?”
“잘 하면? 근데 월요일에 늦더라도 출근할 것 같아. 어쨌든 하림이랑 재밌게 놀아. 엄마는 피곤해서 먼저 자러 간다.”
동규가 엄마와 잘 자라고 포옹을 했다. 동규의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려다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하림의 ‘누구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하림아, 아줌만데! 아줌마가 내일 새벽에 갑자기 출근을 하게 돼서!”
-헐! 진짜요!
“응! 그래서 이렇게 잘 자라는 인사하려고! 얼굴 보고 해야 하는데 미안!”
-괜찮아요! 안녕히 주무세요!
“하림이 잘 챙겨 줘.”
“내가 엄마 아들인데.”
“하림이는 생일이잖아.”
“알아서 내가 잘 챙겨.”
“그럼 엄마 진짜 자러 간다. 너 늦게 잔다고 하림이도 늦게 재우지 말고.”
“……엄마. 그냥 서하림 데리고 살아.”
“그럴까?”
“아, 엄마.”
“알았다 알았어. 그럼 내일 낮에 전화할게.”
“응. 안녕히 주무세요.”
거실에 홀로 앉은 동규는 채널만 열심히 돌렸다. 샤워 오래 한다는 건 아는데 오늘은 하림이 씻는 시간이 평소보다 세 배는 되는 것만 같다. 아니 그냥 하림이 밤새 씻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것보다는 그냥 하림에게 침대를 주고 자기는 거실에서 자는 게 낫지 않을까. 근데 그러면 자기 이불과 베개에서 하림의 냄새가 날 것 같아서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다. 아, 아니구나. 새 이불이랑 침대 샀으니까 그걸 쓰게 하면…….
“나 드라이기 좀.”
“여기.”
어느새 거실로 나온 하림이 동규가 틀어 놓은 TV를 보며 머리를 말렸다. 동규는 하림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뭐 재밌는 거 해?”
“아니.”
“그럼 방에 들어가자.”
제발 그 말만은 하지 않길 바랐으나 하림이 앞장서 동규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규는 한숨을 푹 쉰 뒤에 소파에서 일어났다.
“……왜 네가 거기 누워 있어.”
하림은 동규의 침대 위에 누운 채 동규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안 잘 거야. 그냥 눕기만 한 거임.”
“그러니까 왜 그러고…….”
“너도 맨날 내 방에서 내 침대 차지하고 있는데 나라고 이러면 안 되냐?”
“아. 돼. 미안.”
“또 미안한 거 아닌데 미안하다고 해라.”
“……영화 볼래?”
“아줌마 자는데 소리 나는 거는 좀.”
“괜찮아. 우리 엄마 잠귀 어두워.”
“내 가방에서 이어폰이랑 패드 좀 줘 봐. 이어폰은 두 개랑 Y자로 되어 있는 이어폰 두 개 꼽을 수 있는 잭 있거든. 그것도 같이.”
동규가 하림에게 이어폰과 패드를 건넸다.
“이거로 보자. 뭐 재밌는 거 없나.”
동규는 제 방인데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림이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찾느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동규를 보질 못했다. 동규는 책상 의자라도 끌어와 앉아 있어야 할지 아니면 침대 옆에 깔아 놓은 접이식 침대에 앉아야 할지 몰라 진땀을 흘렸다.
“김동규 이리 와.”
엎드리고 누워 있던 하림이 벽 쪽으로 붙어 자리를 내줬다. 동규가 어리둥절한 채로 가만히 하림만 바라보았다.
“여기.”
하림은 제 옆에 난 자리를 팡팡 쳤다.
“좁을…… 것 같은데.”
“그럼 앉아서 보지 뭐. 빨리 와서 앉아.”
동규는 하림의 옆에 앉기 전 에어컨 온도를 제일 낮게 내렸다. 더워도 너무 더웠다.
“많이 더워?”
“……좀.”
“아 나는 좀 추운데.”
내려놓은 리모컨으로 동규가 다시 온도를 올렸다.
“아니, 너 더우면 그냥 내려.”
“춥다면서.”
“괜찮아.”
하림은 동규의 침대 한쪽에 곱게 접혀 있던 이불을 펴 몸에 돌돌 감았다.
“이러면 됨.”
하림이 동규에게 이 영화는 이래서 재밌고 이 영화는 저래서 재밌다며 동규에게 설명을 하는 동안 동규는 하나는 듣지도 못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속으로는 온갖 욕을 하며 짜증을 겨우겨우 누르기 바빴다. 시발 이래서는 엄마한테 고집 부려서 새 이불을 산 의미가 없잖아 시발…….
“그냥 대충 아무거나.”
“아니면 예능 볼까? 내가 좋아하는 그거.”
“응.”
“그래 그럼 그거 보고 자자. 우리 내일 스케줄 엄청 빡빡한 거 알지. 잠 많이 자 둬야 돼.”
“응.”
콩국수와 해천탕 편이라는 예능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에 봤으면 재밌을 테지만 동규는 지금 속에서 불도 나고 전쟁 중이라 내용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간혹 하림이 웃으며 동규를 붙잡고 흔들기도 했는데 그 때만 잠깐 장단 맞춰 주려고 피식피식 웃었지, 그 외에는 하림과 너무 가까이 붙어 앉아 있어서 눈을 깜빡이고 숨을 쉬고 침을 삼키는 것까지 신경 쓰였다.
한 시간 반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동규는 제 왼쪽에 붙어 있는 하림 때문에 심장에 무리가 온 지 오래였다. 왼쪽 몸이 다 굳은 느낌이다.
“우리도 시험 끝나고 콩국수 먹자.”
“……그래.”
“아주머니보고 해 달라고, 아.”
패드 화면을 보고 있던 하림이 고개를 돌려 동규를 바라보았다. 동규는 제 쪽으로 훅 들어온 하림 때문에 고개를 뒤로 뺐다.
“너 콩국수 먹을 때 설탕 넣어서 먹지.”
“어, 어떻게 알았어?”
“독심술 쓰니까 알지.”
그 소리에 마주친 눈도 피했다. 하림이 지금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는다면 동규는 혀를 깨물고 죽을 수도 있었다.
하림은 일부러 더 동규 쪽으로 고개를 쭉 뺐다. 그만큼 뒤로 물러나는 동규가 귀여워 웃음이 삐져나왔다.
“거짓말이야. 너 단 거 좋아하니까 찍은 거. 나는 소금만 살짝 넣어서 먹는 게 좋더라고.”
“……자자. 자고 싶어.”
하림이 동규의 침대에서 내려와 접이식 침대에 있던 새 이불을 동규의 침대로 올렸다.
“이거…… 내 이불 아닌데.”
“알아.”
“오늘 너 쓰라고 가져온 이불이야.”
“나는 그냥 이거 쓰고 싶은데.”
하림이 동규의 이불에 얼굴을 비볐다. 그걸 본 동규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흔들렸다. 하림은 동규의 당황을 모르는 척 안대와 수면 모자를 챙겨 누웠다.
“잡시다, 잡시다. 내일 스케줄이 엄청나게 밀려 있어요. 이러고 낭비할 시간이 없다, 이 말입니다.”
여전히 흔들리는 눈동자를 굴리며 새 이불을 덮어야 할지 아니면 하림에게서 이불을 가져와야 할지 고민하느라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동규 대신 하림이 일어나 불을 껐다.
“……진짜 자?”
“그럼 가짜로 어떻게 자?”
“아니…… 그거 내 이불인데.”
“안다니까. 나 지금 좀 졸린데.”
하며 하품을 한 하림이 말을 마저 이었다.
“자기는 조금 아까우니까 얘기만 조금 하다가 자자. 벌써 11시 넘었어.”
어둠 속에서 하림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서울의 불빛 때문에 하림의 인영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잘 보이지는 않았다.
“빨리 누워라.”
“응.”
보송보송한 새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동규는 어색하게 누웠다. 분명 익숙한 자기 방, 자기 침대인데 여행 와서 자는 것처럼 불편했다.
하림은 엄마, 아빠와 어떤 저녁을 먹었는지 얘기했다. 하늘이 생일 선물로 뭐를 줬고 외가 쪽 조부모님, 친가 쪽 조부모님들과는 영상 통화를 한 얘기도 했다. 동규는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으며 점점 낮아지고 느려지는 하림의 목소리를 감상했다.
어둠에 희미하게 보이는 하얀색 천장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림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야광별 스티커라도 붙여 놓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심장은 아까부터 계속 기분 좋게 두근거리며 존재를 드러냈다. 온몸이 간질간질한 게 동규는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나 이제 잘 건데 너도 잘 거야?”
“아마.”
“아쉽다, 잠자기. 이런 기분 처음이야. 밤이면 아침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서 빨리 잠들었는데.”
동규를 보려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아침 해가 밝아야 했으니 하림은 늘 밤이 순식간에 지나가길 바랐다.
누군가 좋아하는 계절이 뭐냐고 물으면 하림은 언젠가부터 겨울이라고 대답했다. 이유는 동규의 생일이 있으니까. 원래는 여름이 좋다고 했었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제 생일이 있기 때문에.
“……나도.”
하림은 문득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동규의 손을 건들고 싶어졌다. 어둠 속 어렴풋 보이는 동규의 커다란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아쉬움 하나 없이 꿈나라로 갈 수 있을 텐데. 오늘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제일 행복하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할 수도 있겠지.
“김동규.”
“응.”
“나 민증 만들라고 통지서 왔어.”
“진짜 형아 같네.”
“근데 좀 나중에 만들려고.”
“왜?”
“민증 사진 찍어야 하는데 혼자 찍기 싫어서.”
또 당연하게 ‘왜?’라고 물어야 할 동규가 말이 없어 하림은 잠시 기다리다 말을 이었다.
“겨울방학에…….”
하림은 목구멍도 간질거리고 가슴께도 간지러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같이 찍으러 가자. 네 생일까지 기다려 줄게.”
사진이야 미리 찍어도 문제없는 거지만 하림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동규와 함께하고 싶었다. 동규가 같이 찍으러 가자고 할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의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진다. 설마 싫다고 하진 않겠지.
“……알았어. 나 근데 뭐 하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
“작년에는 친구들이랑…… 했는데 올해는 왜 친구들이랑 안 해?”
“뭐. 생일 파티?”
“응.”
어둠의 힘을 빌려 동규는 용기를 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해 볼 수 있는 말이었다. 심장이 갑자기 엄청나게 뛰었다. 하림이 바로 대답을 해 줄 줄 알았는데 대답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굴었다.
“이불에서 김동규 냄새 나.”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손이 주먹을 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어렴풋하게만 보이던 동규의 손이 더 선명하게 보일 수 있게 했다. 하림은 윗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무…… 무슨…….”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지만 하림도 심장이 너무 뛰어 아팠다.
손잡고 싶다. 내 말에 속에서 폭탄이 터졌을 김동규의 주먹을 풀어서 손가락과 손가락이 맞물리도록 깍지를 낀 다음 사실 나 너 좋아해하며 달콤한 목소리로 고백을 하고, 손잡고 자도 되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러면 김동규는 새빨개진 얼굴로 된다는 대답을 세 번도 넘게 말하겠지.
울지는 않을까. 케이크 받고도 그렇게 울었는데 내가 좋다고 고백하면 엉엉 울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동규가 우는 건 보기 싫으니 하림은 동규에게 제일 하고 싶은 말을 또 삼켜 냈다. 전에는 동규가 얼마나 예쁜 말로 고백을 해 오는 게 궁금해서 참았다면 이제는 동규가 우는 게 보기 싫어 참았다.
“좋은데.”
“…….”
“김동규 냄새.”
하림은 일부러 이불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소리를 냈다. 침대 밖으로 나와 있던 손까지 거둔 동규가 침대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하림은 더 크게 킁킁 소리를 내며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오래 지나지 않아 하품에 먹혔다.
“아 진짜 졸려……. 하품 나온다. 자자 진짜로. 잘 자. 내일 봐.”
동규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얼마나 좋으면 잘 자란 말에 대답도 못 하냐. 하림은 소리를 죽인 채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 잠자긴 그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