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13화 (23/53)

13

하늘은 교실로 들어와 가방부터 벗어 놓고 1반으로 뛰어가 하림이 등교했는지를 확인했다. 잠이 많아서 일찍 등교하지 않고 시간 거의 끝날 때 오는 건 아는데 하림이 하늘의 메시지를 아침부터 씹은 것도 있고, 어제 일이 있었으니 아침에 김동규 메시지를 봤다면 빨리 등교했을 것 같아서. 하지만 하림은 평소처럼 등교 시간 딱 맞춰 교실로 들어왔다. 하늘은 안경을 쓰고 온 하림의 얼굴이 심상치 않은 걸 확인하자마자 앉아 있던 하림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굿모닝.”

“굿모닝.”

안경 쓴 걸 보면 백 퍼 밤샜거나 새벽까지 잠을 안 잤거나 둘 중 하나다. 하림은 피곤하면 초점이 흐려지고 일시적으로 시력이 내려간다며 안경을 썼으니까.

“그런 똥 씹은 표정으로 굿모닝이라고 하니까 좀…… 아이러니한데.”

“아침부터 욕하기 싫어서 굿모닝 한 거야.”

“이따 놀러 올게.”

김동규가 메시지를 좆같이 보냈나? 그럴 애는 아닌데. 서하림도 김동규가 뭐라고 보냈으면 잘 받아 줄 애고. 설마 김동규 이 새끼 삽질하다 아무것도 못 보냈나? 하늘은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교실로 뛰어갔다. 동규의 자리는 아직 비어 있는 상태였다.

“야, 김동규 안 왔어?”

“응.”

“지각 잘 안 하면서 웬일로 지각이래.”

“늦게 오나?”

때마침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와 출석을 불렀다. 동규는 감기로 인한 결석이었다. 하늘은 본능적으로 동규가 잠수 탔단 것을 직감했다. 미친놈이 죽이 됐든 밥이 됐든 학교를 나왔어야지 싸웠다고 학교를 빼먹어? 하늘은 오늘 하루 하림에게 시달릴 걸 생각하며 머리를 싸맸다.

“서하림 너 바빠?”

건우가 심각한 얼굴로 휴대폰만 보고 있는 하림에게 겨우 말을 붙였다.

“어.”

“지금 말고 점심시간에도?”

“어.”

“왜?”

“할 일 있어서.”

“아…… 그럼 너 언제 시간 나?”

“안 나.”

“학교 끝나고도?”

“어.”

“아…… 그러면 나 너한테 할 얘기 있는데 좀 길거든. 나중에 너 시간 날 때 아무 때나 알려 줘.”

“어.”

“꼭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거 아니어도 상관없어. 메시지나 전화도 괜찮아.”

“바쁜데.”

“그러니까 시간 나면.”

“어.”

대학 문제로 하림과 얘기하고 싶은데 까칠하게만 대답하는 하림에게 건우는 더 말을 걸지 못하고 주춤거리다 제 교실로 돌아갔다. 옆에 앉아 있던 하늘이 혀를 찼다.

“까칠한 거 봐라. 이건우 쫄아서 갔네. 걔 하나 학교 안 나왔다고 아주 고슴도치가 다 됐어?”

“조용히 해.”

“그렇게 백날 휴대폰 보고 있어 봐라. 안 올 게 오나. 내가 봤을 땐 걘 글렀어. 내일도 아프다고 안 나올걸.”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직 오늘인데.”

“내가 어떻게 메시지 보내라고 내용이며 시간이며 다 알려 줬는데도 미안해서 못 보낸 거 봐. 남은 평일은 글렀고 주말쯤에 미안하다고 연락 올 듯.”

“오늘 안에 올 거야.”

“안 온, 그래. 오늘 안에 왔으면 좋겠다 나도. 쨌든 난 어제 상황 보고 다 했으니까 이만 간다. 이제 겨우 1교시 쉬는 시간인데 흐음 언제든 걔한테 연락 오면 나한테도 알려 줘. 부디 종례 전에는 오길 빈다.”

하림은 하늘에게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수업 시간에 휴대폰 꺼야 하는데도 하림은 전원을 켜 놓은 상태로 아예 필통 안에 넣어 틈틈이 동규에게 연락이 오나 확인했다. 오전 중엔 아무런 전화도 연락도 없었다.

자연스레 입맛이 없어 점심을 걸렀다. 이온 음료 하나만 뽑아 마시고 아예 조용하게 있을 수 있는 보건실에 몸이 아프다고 드러누웠다. 오후 수업도 다 제꼈다. 종례 시간 맞춰 교실로 올라왔을 땐 친구들이 어디 아프냐고 물어 왔지만 하림은 대답해 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대충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오늘은 아직 안 끝났으니까 뭐. 12시까지 약 여덟 시간 남았죠? 한 번 희망을 가져 봅시다. 우리 인류는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남았다, 이 말입니다.”

같은 아파트 사는 하늘이 간만에 하림과 하굣길을 걸었다. 평소엔 하림이 동규하고만 집에 가기 때문이었다.

“속 그만 긁어.”

“긁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해 준 거지.”

“그러니까 왜 굳이 그걸 집어 주는데.”

“나도 걔한테서 연락 오길 바라니까? 아 진짜 힘들다 힘들어. 너네 지금 사, 음. 그러지도 않는데 이 지랄이면 제대로 되고 나서는 어떡하려고. 그 때마다 걔는 잠수타고 너는 속 뒤집어져서 헤어지자고 하게?”

“안 헤어져.”

“아니 그러니까 이번에는 어떻게 할 건데. 이번을 잘 넘겨야 다음에도 비슷한 상황 생기면 잘 풀 거 아니야.”

“나도 알아. 생각 중이야 지금.”

“헐 설마 걔네 집에 찾아가게?”

“아니. 내가 왜 가. 걔 잘못인데.”

“멱살 잡으러 가는 줄.”

“안 그래.”

“아. 너 오늘 과외 없으면 오늘 걔 얘기하자. 내가 갈까, 네가 우리 집 올래.”

“음……. 너네 집. 빨리 얘기하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

“그래라.”

“별건 없어.”

“원래 다들 친구한테 자기 연애 얘기할 때 그렇게 말 해. 듣는 사람은 몇 시간 내내 죽어나는 거지.”

“10분 컷으로 끝낸다.”

“스톱워치 돌립니다. 1초 지날 때마다 만 원.”

하늘이 놀린 것과는 달리 하림은 정말로 깔끔하게 얘길 마쳤다. 10분은커녕 마시겠다고 나온 아이스 녹차를 딱 세 모금 마실 시간이었다.

“이 동네 출신이 아니라 다른 애들에 비해서 처음 본 것도 늦고, 첫 만남도 좀 특이해서 관심이 갔어. 항상 상 받을 때만 만났으니까. 거기다 잠깐만 얘기해도 말이 잘 통하는데 걔가 학원을 안 다니니까 친해지기가 쉽지가 않더라고. 그러다 6학년 때 걔 얘기를 듣고 내가 하고 싶은 거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 걔 글 쓰잖아. 내가 별생각 없이 왜 글 쓰냐고 물어봤는데 재밌어서 쓰는 거고 나중에 소설가 되겠대. 그거 듣고 머리 띵해서 내가 의사 하고 싶은 게 내가 진짜로 좋아서 하는 건지 할아버지 염불에 세뇌된 건지 고민하고. 그러다 할아버지랑 싸우고 마지막 시험 점수로 반항하고.”

“올 빵 점 사건의 배후에 김동규가 있는 줄은 몰랐네.”

“그러다가 작년에 같은 반 돼서 맨날 붙어 다니니까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나도 모르게 좋아졌는데 작년 생일에 걔가 감동의 손 편지 써 줘서 폴인럽했음. 끝. 그리고 걔도 나랑 비슷하게 작년에 같이 다니면서 나 좋아하게 된 거 같은데 연말에 뭔 일 있어서 그때부터 자기 맘 자각한 듯해. 그 뒤로는 눈치도 없고 소심한 애라 혼자 짝사랑하는 중이고 나는 그걸 알고 있지만 귀여워서 내버려두고 있어.”

“변태 같다.”

하림의 축약된 러브 스토리를 들은 하늘의 감상은 이랬다.

“뭐?”

“김동규는 얼마나 짝사랑에 밤마다 가슴앓이를 하겠어. 걔 성격에 삽질도 어후, 장난 없잖아. 조만간 지구 뚫을 듯.”

“그게 귀엽다는 건데.”

“변태도 이런 상변태가…….”

“아, 장난하지 말고.”

“장난 아닌데. 아 근데 하림아 나 방금 든 생각인데.”

“뭔데.”

“내가…… 걔 3월부터 보면서 느낀 게 있는데 아무래도 걔 약간……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진짜로 아픈 거 아닌가 싶어지는데.”

“뭔 소리야. 진짜로 아프다니.”

“그…… 어제 걔가 미안한 거 중에 자기가 말실수한 것도 미안하고 미안하다고 해서 네가 받아 주게 되는, 그러니까 자기 실수를 네가 이해해 주는 것 자체도 미안해하던데 걔 성격에 너무 미안해서 앓아누운 게 아닌가 싶다고. 걔가 너를 아씨, 존나 오글거리지만 걔가 너를…… 아 진짜 오글거려서 말하기도 싫다. 옆에서 내가 봤을 때 걔가 널 좋아해도 존나 존나 좋아하는데 물론 걔는 그 정도인지 자긴 모르는 것 같다만 아무튼 존나 존나 좋아하는데 그런 와중에 자기가 입을 잘못 털어서 싸우게 됐으니 셀프로 가스라이팅 하는 중일 거 같고 그러다가 뭐 마음이 너무 상하면 없던 병도 오고 그러잖아.”

“설마.”

“맞아. 아닐 수도 있지. 근데 그냥 내 감이 그래.”

하림은 아직도 조용한 휴대폰의 잠금을 애써 해제했다가 다시 잠갔다.

“……걔네 엄마한테 한 번 연락해 볼까?”

“진짜 아픈지 아닌지?”

“응.”

“걔네 엄마가 김동규한테 하림이가 너 걱정 많이 한다고 연락 줬다고 얘기하면 어떡하게.”

“비밀로 해 달라고 하면?”

“글쎄다. 그럼 일단 하루만 더 기다려 봐. 내일도 아프다고 하면 음. 병문안이라도 가든가. 갔는데 가짜로 아픈 거면 뭐…… 걱정돼서 왔다, 안 아프다니까 다행이다 근데 나 너한테 진짜 실망했다 빨리 사과해라 하고 진짜로 아프면 간호 잘 해 준 담에 다 나으면 얘기하자고? 근데 그렇게 다 낫고 얘기하자 그러면 걔는 얘기할 것도 미안해서 무서워할 거 같다.”

“아. 어떡하냐.”

“몰라 나도. 아니 시발 내 연애도 아니고 내 친구 둘이 지지고 볶는 걸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돼? 아니 이거는 연애가 아니라 걍 친구 사이에서도 괜히 말 잘못한 거잖아. 근데 그냥 친구 사이여도 큰일 날 거를 하나는 소심해서 좋아하는 애한테 실수한 거라 미안해 죽으려고 하고, 하나는 좋아하는 애가 걱정은 되지만 잘못한 건 봐줄 마음 없다고 하고. 흐음. 그냥 이번에도 네가 한 수 접고 들어가. 그게 제일 깔끔하겠네.”

“아씨. 잘못한 건 잘못한 거라. 이번만 봐줄……까?”

“대신 김동규한테 사과는 확실히 받아야지. 너 또 얼굴 보고 맘 약해져서 너한테 내가 말을 심하게 한 것 같다느니, 다 내 잘못이라느니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김동규랑 싸웠을 때 걔가 빼도 박도 못하게 잘못이어도 네가 늘 먼저 사과해야 돼.”

“그건 싫은데. 잘못한 사람이 사과해야지.”

“거봐. 지금 이것도 김동규 잘못이잖아. 근데 문제는 걔가 성격이 땅굴을 지구 반대편까지 파는 성격이라는 거고. 야, 근데 우리나라에서 땅 파고 들어가면 무슨 나라 나와?”

하림은 하늘이 해 준 말들을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동규가 지나치게 미안해하느라 속앓이를 하고 있을 거라는 데는 하림도 적극 공감하는 바였다.

“……아마도 파라과이나 우루과이 같은 남미.”

“저기요. 제가 열심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보상 금액 두 배로 쳐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왜 갑자기 두 배가 됐죠.”

“그쪽이 제 입장이라고 생각을 해 보세요. 그쪽의 상대방은 추가 요금이 발생되는 성격이라고요.”

“귀여운데 왜요.”

“아 씨발! 아악! 미친 거 아니야? 제발 듣는 내 입장 좀 생각해 주라!”

“나중에 너도 연애하면 내가 잘 들어줄게.”

“난 꼭 연하 만나서 우리 애기 우쭈쭈쭈 울 애기가 어제는 이랬고 울 애기가 오늘은 저랬고 이런다.”

“그래, 해.”

“그래서 뭐 어떡하게. 내일까지 기다리게?”

“아니. 이따 김동규네 가게.”

“헐. 멱살?”

“아니. 뭔 소리야. 네가 맘 상해서 아플 것 같다고 하니까 진짜 그럴 거 같아서 내일까지 못 기다려. 여기서 저녁 먹고 간다.”

“헐 그래라.”

“……아니다. 지금 갈래. 너 이거 마카롱 더 있어?”

“그럴 걸. 가는 길에 먹으려고?”

“아니 김동규 주려고.”

“허얼.”

“친구네 집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 나 이거 좀 예쁘게 담아 줘.”

“미친. 아 동생 연애하는 거 보는 게 이렇게 괴로운지 처음 알았어.”

“부탁합니다, 선생님.”

“하 진짜. 보상 금액 두 배로 주세요 선생님. 이런 식으로 제 물품을 뜯어 가시는 건 못 참겠네요. 잠깐만 기다려.”

전에 마카롱 만든다고 잔뜩 사둔 7구짜리 케이스에 하늘이 마카롱을 담아 가져왔다.

“더 가져갈래?”

“응.”

“엄마가 이걸 얼마나 만들어 놨나 모르겠네. 잠만.”

“큰엄마가 만드신 거야? 나는 산 건 줄 알았어.”

1층으로 내려갔던 하늘이 다시 올라왔다. 7구 케이스 네 개였다.

“다섯 줄이면 김동규가 먹다 질릴 정도는 되겠어? 35갠데.”

“완전 딱이지. 걔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5개 먹고 싶어 할 걸.”

“뭐래. 쇼핑백도 가져왔으니까 넣어서 가.”

“고마워.”

“보상이나 철저히 해 주시죠. 큼큼.”

“당연하죠. 그럼 나 간다!”

하림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큰엄마! 저 가요! 마카롱 너무 맛있던데요? 저 어디 백화점에서 사 온 줄 알았어요!”

“왜 저녁 먹고 가지.”

“급한 일 생겨서요.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택시 타고 내린 동규의 집은 무척 오랜만에 오는 곳이라 낯설었다. 작년 동규 생일 때 마지막으로 왔으니 딱 반년 만이다. 게다가 아파트 앞까지야 몇 번 와 본 적 있어도 동규네 집에 아예 들어간 적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서, 하림은 택시에서 내리고 나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진짜 아픈 거면 마카롱이 아니라 죽을 사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휴대폰으로 근처 죽집을 찾았다.

다시 택시를 잡아 죽집에 도착한 하림은 제일 비싼 죽을 포장주문했다. 미리 만들어 놓는 게 아니라 주문이 들어가야 만든다는 건 마음에 들었으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마음에 안 들었다. 인류가 달에 도착한 게 언제인데 아직도 죽 하나 3초 만에 만드는 기술을 발명 못 했단 말인가.

한 시간은 기다린 것 같은 죽을 받아 든 하림은 택시를 타고 동규의 집 앞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잡고 올라가는 동안 무슨 말을 할지 정리했다. 화는 다 풀린 지 오래였고 그냥 동규가 제 진심을 눈치 없이 몰라 준 것만 사과하면 다 괜찮았다. 그리고 만약에 너무 미안해하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도 해 주고 싶고.

“…….”

“안녕.”

“아, 어.”

“아프다며 죽 사 옴.”

“아…….”

동규는 말도 없이 찾아온 하림 때문에 머리가 다 울렸다. 엄마가 한두 시간 일찍 퇴근한 줄 알고 벨소리에 문을 열었는데 생각해 보니 엄마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지 벨은 누르지 않았다.

“얼마나 아프길래 학교를 다 빠져?”

“아 그게.”

“눈 밑이 다 퀭하네.”

“잠깐만 기다려. 5분 아니 1분만.”

동규는 하림의 대답도 듣지 않고 현관문을 닫았다. 닫자마자 신발장에 붙은 거울로 얼굴 상태부터 확인했다. 계속 누워 있느라 머리가 한쪽으로 눌려서 보기 흉했다. 세수도 귀찮아서 안 한 상태였다.

아, 왜 하필 이럴 때 찾아오고 난리야.

빠르게 화장실로 뛰어가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야구 모자를 쓴 동규는 옷도 갈아입었다.

“엄마 아니었으면 쪽팔려 뒤졌을 뻔했네.”

아침에 엄마가 옷 입으란 소리를 안 했다면 팬티 바람으로 하림을 조우할 뻔했다. 신발장 거울로 마지막 얼굴 체크를 마친 동규가 문을 열었다.

“1분 넘었어.”

“……미안.”

“그놈의 미, 아 됐고 일단 너 죽부터 먹어. 먹고 얘기하자.”

1시쯤 병원 갔다가 집에 와 피자 두 판과 떡볶이를 시켜 먹은 동규였다. 아직은 출출하진 않았지만 하림이 사온 죽 정도는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간식 먹을 생각이었다. 동규는 하림을 봐서 좋았지만 어제 싸웠던 일 때문에 죽 먹는 내내 하림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하림이 아무 말 없어서 더 무서웠다. 밥 먹이고 이제 아는 척하지 말자고 하면 어쩌나 싶어서 먹는 속도도 느려졌다.

“싸우자고 온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먹어. 너 주려고 마카롱도 가져왔어. 냉장고에 넣어 놓는다.”

“응…….”

싸우자고 온 건 아니어도 사과는 받으러 온 거겠지. 동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미안해 죽겠는데 그걸 하림이 다 받아 줄까 걱정이 들었다. 모든 게 걱정투성이인 스스로가 한심하고 미웠다. 나도 내가 싫고 미운데 하림은 더 할 거다. 

“다 먹었어.”

“남았는데?”

“입맛이 좀 없어서.”

“그럼 마카롱이라도 먹을래? 단 거 먹으면 좀 입맛 돌지도 모르잖아.”

“……그래.”

하림이 사 온 마카롱은 엄청 맛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어디서 사 왔냐고 물어보고도 남을 정도였다. 동규가 한 줄을 다 먹고 새로 한 줄을 까자 하림은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걸 본 동규가 시무룩하게 손을 거뒀다.

“아 먹어, 빨리. 너 잘 먹는 거 보기 좋아서 웃은 거야.”

동규는 아무래도 하림과 어제 일을 마무리 짓지 않는 이상 제 앞에 아무리 맛있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어도 목이 막혀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진짜로 입맛이 떨어졌다.

“왜 왔어.”

“아프다고 학교 빠져서.”

“나 사실…… 안 아파.”

“응.”

“아니 몸은 안 아프고…….”

“그럼 어디가 아픈데.”

동규는 뒤로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앞으로 돌렸다. 하림과 마주 보고서는 도저히 얘기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음이.”

“우리 어제 싸워서?”

“말하다가 울지도 몰라.”

“모른 척해 줄게.”

“……나는.”

하림은 식탁 위에 올려놓은 오른손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동규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진짜…… 네가 부러워. 나는 지금 엄청난 자기혐오 들거든. 쪽팔리고 한심해서 죽고 싶어. 내가 너였으면 아프다고 죽 사들고 이렇게…… 너네 집에 못 찾아가. 나는…… 지금도…… 어제 너한테 실수한 거 때문에, 말실수해서 진짜 죽고 싶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네가…… 나 아프다고 죽…… 사 들고 와 준 게 고맙고 또 미안해서, 네가 이렇게 찾아왔는데 내가 여기서도 겁먹고 입 닥치고 있으면 진짜 너랑은 끝일 거 같아서…… 진짜 그게 제일 무서워서 뭐라도 하려고…….”

말이 진행될수록 목소리는 한없이 작아지고 낮아졌다. 하림은 동규의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어제…… 아, 그러니까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그게 뭐였냐면.”

“응. 하고 싶은 말이 뭐였는데?”

“왜…… 왜 내가 싫어할까 봐 안 나겠다고 하는 건지…… 내가 싫다고 해도 안 나갈 사람도 아니고…… 내가 싫다고 할 그런 게 되나 싶고…….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는데 내가 말이 너무……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나도 모르겠어. 미안해. 내가 요즘에 내 맘이 내 것 같지가 않고 좀…… 이상해.”

이 정도로 솔직하게 얘기해 줄 거라곤 예상 못 했던 하림은 동규의 진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 것 같다고 한 건 자기면서 왜 울지 않고 기특하게 할 말을 다 하는 건지. 기껏 해 봐야 어제 그렇게 얘기해서 미안하다, 앞으로 안 그러겠다, 너무 미안해서 학교도 빼먹었다 정도만 할 줄 알았다.

“네가 생각해도 요즘에 네가 좀 이상하지.”

“응.”

“기자한테 온 전화도 네가 끊을 정도로 싫어했으면서 장학퀴즈 나가는 건 또 괜찮다고 그러고 네가 생각해도 좀 앞뒤가 안 맞지.”

“……응.”

“그럼 내가 당연히 백시후가 같이 나가자고 했을 때 네가 싫어할 거 떠올랐을 거 같아 안 떠올랐을 거 같아.”

“떠올랐을 거 같아. 아, 그러니까 그게…… 네가 나 신경 써 준 건데 내가 그것도 모르고…… 진짜 미안해.”

“알면 됐어. 뭐가 미안한지 모르고 사과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나 봐 봐, 김동규.”

“안 보면 안 돼? 못 보겠어.”

“지금 안 보면 지금 당장이야 마음이 조금 불편하고 말 일이지만 이따 되면 더 크게 올 걸.”

“…….”

“나 봐 봐.”

푹 숙인 고개는 움직일 기미가 없다. 하림은 찡한 코끝을 한 번 눌렀다. 울보는 김동규고 이 타이밍에 울어도 김동규가 우는 게 정상인데, 김동규는 울지도 않고 왜 자기가 울 것 같은지 정말 모를 일이다.

“얼른.”

울음 참느라 살짝 갈라진 목소리에 동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진짜 별걸 다…….”

“미안해. 울지 마.”

“안 울어. 그리고 뭐가 미안한데. 사과할 일은 조금 전에 사과해서 끝났잖아. 사과부터 대뜸 하는 거 하지 말라 그랬지.”

“그래도 지금 눈 빨간데.”

“필사적으로 참고 있으니까 모른 척해. 다른 사람한테 우는 거 보여 주는 거 싫어하니까.”

“알았어.”

동규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모르는 척을 해 달랬지 누가 안 보이는 척을 해 달랬나. 하림은 고여 있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하여튼 이런 하나하나가 다 귀엽다니까.

“아니, 나 안 운다고.”

“응.”

“눈물 다 들어갔어.”

“응.”

“이제 고개 들어도 돼.”

“진짜?”

“응. 진짜.”

동규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하림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왜 또.”

“몰라.”

“맨날 모른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는데 그럼 모른다고 그러지 거짓말해?”

하림은 동규의 손을 붙잡고 ‘내가 알아. 너 나 좋아하잖아. 나도 그래.’라고 고백하고 싶은 걸 꾹 눌렀다. 오늘처럼 동규가 용기를 내서 기특하게 고백하는 걸 보고 말겠다는 의지로 겨우 참았다.

오늘 일이 동규에게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는지 하림은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동규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하림과 화해하기 위해 도망치는 게 아닌 뭐라도 해 볼 거란 것도.

굉장히 큰 변화의 첫 걸음이지만 동규는 모르는 듯 보였다. 하림은 말해 줄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시간 지나서 이런 일 몇 번 더 있으면 스스로 깨닫겠지 싶어서. 지금은 말해 줘도 뭔지 잘 모를 것 같다.

“그래 알았어. 나도 가끔 그래. 나도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 엄청 유치해지고 편협해지고 치졸해질 때 많아.”

“너도?”

“응. 특히 작년부터?”

“공부하느라 힘들어서?”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헐. 몰랐어.”

“딱히 말해 주고 싶은 맘도 없었어. 말해 봐야 나만 이상한 사람 되니까.”

“아하.”

“그럼 마카롱 더 먹을 거지?”

“같이 먹자.”

“그래. 나 사실 오늘 점심 안 먹었어.”

“왜?”

“내 맘이 내 맘 같지 않아서?”

“어제…… 일 때문에?”

오, 날카로운데. 하림은 솔직하게 말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아니. 내가 너랑 좀 싸웠다고 밥 안 먹고 그럴 사람은 아니지.”

“하긴.”

속도 모르고, 아니라고 하니까 곧이곧대로 바로 수긍하는 동규가 귀여워 하림은 웃음이 터졌다. 진짜 나는 김동규한테는 못 이기겠다.

“아 정말, 거짓말을 못 하겠네.”

“응?”

“맞다고. 너랑 어제 싸워서 내 맘이 내 맘 같지 않았다고. 그렇게 싸웠는데 누가 아프다고 학교도 안 나오니까 마음 심란하고 그랬지.”

“아…….”

“그러니까 학교 끝나고 죽 사 들고 왔고.”

식은 죽을 동규는 한술에 떠 비웠다. 하림은 동규와 떠들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서른다섯 개의 마카롱도 동규랑 다 먹어 버렸다.

이제 집에 가야 하나 아쉬운 마음에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동규의 엄마가 퇴근을 했다. 아픈 아들 소고기 구워 주겠다며 고기를 한가득 사 온 동규의 엄마는 집에 가려는 채비를 하는 하림을 다시 앉혔다.

“저녁 먹고 가.”

“네?”

“하림이 너는 먹을 복 있나 보다. 어떻게 소고기 사 온 날에 딱 놀러 왔지?”

“아, 네.”

인사는 몇 번 했어도 이렇게 제대로 마주 보고 있는 건 처음이라 하림은 어색했다. 하지만 나중에 있을 큰일을 위해 어색함은 접어 두고 동규 엄마 옆에 붙어 이거 도와드릴까요 저거 도와드릴까요 하며 애교 있게 굴었다.

“하림이는 하는 짓도 어쩜 이렇게 예쁘니? 아니 그렇다고 우리 아들이 못났다는 건 아니고 동규도 엄마한테 잘 하는데. 삐지면 안 돼?”

“하나도 안 삐졌는데.”

“엄마가 하림이 더 예뻐한다고 꽁해 있는 건 아니지?”

“아닌데.”

동규는 하림이 엄마 옆에 붙어 있는 게 보기 좋아 흐뭇하게 보고 있던 것뿐이었으나 괜한 오해를 받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엄마도 나를 삐쟁이라 보고 있는 건가 싶어서.

1차로 구운 고기가 식탁에 올라오자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하림은 쌈 채소가 열 가지나 있어 조금 놀랐다. 그리고 식탁에 늘어놓은 반찬들도 하나같이 간이 세지 않아 제 입맛에 딱이라 그것도 놀라웠다.

“하림이는 고기보다 다른 반찬들이 더 맛있나 봐.”

“네, 제가 사실 입맛이 좀 밋밋한 편이라 슴슴하고 간이 약하고 그런 거 좋아해요. 맵고 시고 짜고 단 거 싫어하고요.”

“아줌마랑 입맛이 똑같네.”

“그런 거 같아요.”

하림은 동규 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반짝이며 반응했다.

“그러면 가끔 우리 집 와서 저녁 먹고 그래. 맨날 동규만 하림이네 집 가서 밥 축내는 거 항상 미안했는데.”

“그럴까요? 근데 얘가 우리 집 와서 밥 많이 먹는 건 괜찮아요. 엄마가 복스럽게 밥 먹는다고 엄청 좋아하거든요. 제가 입이 짧은 편이라서요. 그리고 아주머니도 요리할 때마다 김동규가 뭘 해 줘도 잘 먹으니까 요리 할 맛 난다고 하시고.”

“그래? 그래도. 전에 동규 잘 챙겨 줘서 고맙다고 학교에서 하림이 엄마 만났을 때 얘긴 했는데. 하림이 입맛이 아줌마랑 똑같은 걸 모르고 있으면 모르겠지만 알게 됐는데 계속 동규만 가서 먹이게 할 수는 없지. 자주 놀러와. 아줌마가 야근을 자주 해서 동규 저녁 잘 못 챙겨 주거든. 근데 작년부터 하림이네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와서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

“미안해하실 필요 하나도 없어요! 집에 식구가 많아서 김동규 하나 더 밥 먹는다고 큰일 날 것도 없고 저도 얘랑 같이 있으면 재밌고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동규가 밥을 좀 많이 먹어서.”

“걱정 하나도 안 하셔도 돼요. 들으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엄마가 동규 전용 밥그릇까지 사주셨어요. 진! 짜! 부담 하나도 안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엄마가 얘 엄청 귀엽다고 좋아해서요.”

“전용 밥그릇?”

하림은 두 손을 모아 크기를 가늠하며 이 정도 된다고 자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귀엽게 잘 하나? 나한테는 귀엽게 애교도 떠는데 나야 엄마니까. 남자애 치고는 워낙 어릴 때부터 글을 써서 그런가 말도 없고 숫기도 없고 다른 남자애들처럼 뛰어 놀고 그러는 것도 안 좋아해서.”

“네, 좀 조용하긴 한데 하는 짓이 귀여워서요. 친구들도 다 얘 좋아해요. 우리 엄마랑 아빠도요.”

“엄마. 얘기할 거면 서하림 밥 다 먹이고 해.”

“안 되겠다. 하림이 자주 놀러와야겠는데. 동규가 도통 학교 얘기나 친구 얘기를 해 줘야 말이지. 하림이 얘기밖에 안 해.”

“아, 진짜요?”

“엄마!”

“왜!”

“……고기 다 먹어 간다고. 엄마 별로 못 먹었는데.”

“그러네. 더 구워야겠다.”

“내가 구울게.”

“아줌마 그런데요. 제 친구인데 가족인 사촌누나 서하늘이라고 있는데요, 김동규 지금 걔랑 같은 반인데 김동규가 걔 얘기는 안 해요?”

“응. 처음 듣는 이름인데?”

“와 대박. 김동규 너 너네 엄마한테 서하늘 얘기 한 번도 안 했어? 나 이거 서하늘한테 다 말해야지.”

“안 돼, 말하지 마.”

“아줌마, 걔가요. 저랑 누나 동생 하면서 친남매처럼 컸는데요. 아 근데 동갑이라 친구인 것도 맞아요. 근데 걔가 김동규랑 저를 묶어서 남동생처럼 대하고, 아니 그 전에 지금 반에서 김동규랑 제일 친한 거 서하늘인데 서하늘이 성격이 좀 김동규랑 완전 상극이거든요. 아마 이 얘기도 알면 입에서 불 뿜을 걸요.”

“그래? 상극인데 어떻게 친해?”

“김동규가 물이라면 걔는 불인데 그래도 걔는 워낙 호탕하고 뒤탈도 없고 시원시원해요. 아 그리고 김동규 친구 중에 정서준이랑 윤지호도 있거든요, 걔네는 작년에 김동규랑 저랑 같은 반이었구, 김동규랑 비슷하게 다들 조용하고 얌전한 애들이거든요. 안민주라고 김동규랑 같은 동아리 친구도 있는데요.”

하림은 자길 제외하고 세상에서 동규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동규에 대한 얘기를 마음껏 풀어놓았다. 이런 게 좋고 저런 게 좋다고 얘길 해도 맞다고 공감을 해주는 반응만 나오니 신이 나서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동규의 엄마는 엄마대로 매번 동규에게 말로만 듣던 친구를 직접 만나고 또 동규가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듣는 게 좋았다. 하림이 동규 어릴 때가 궁금하다기에 초음파 사진으로만 동규를 볼 수 있었던 태아 시절 얘기부터 사람들이 세쌍둥이 임신한 줄 알았다는 얘기나 초특급 우량아로 신생아실 간호사들이 놀란 얘기, 신생아였어도 모유를 그렇게 많이 먹었고 분유는 박스로 쌓아 뒀다는 것과 동규가 평균보다 무겁다 보니 애기 때는 늘 아빠가 동규를 안고 업고 살았다는 거, 아빠가 자길 뒤이어 동규 유도 시킨다고 네 살 때부터 새벽 운동을 시켰고 그래서 동규가 아직도 그 일로 아빠에게 한이 맺혀 있다는 것까지 들려주었다.

동규는 두 사람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기 얘기 하는 게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방해하고 싶진 않아 엄마와 하림이 밥그릇을 비웠을 때 조용히 거둬 설거지를 하고 과일도 깎아 왔다.

거실로 자리를 옮기고 동규가 깎아 온 과일까지 깨끗하게 비워진 뒤에도 한참이나 하림의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엄마도 신이 나서 하림에게 별별 얘기를 다 했다. 가끔 엄마가 동규의 어깨나 허벅지를 퍽퍽 치며 동규에게 대답을 종용했지만 그럴 때마다 동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충 대답했다.

동규는 소파에서 발만 까딱거리다가 입이 심심해졌다.

“서하림. 나 요거트 먹을 건데 너도 먹을래.”

“하림아, 먹어 먹어. 냉동실에 맛별로 다 있어. 동규가 좋아해서.”

“무슨 맛 있는데?”

“동규랑 가서 골라, 가서.”

하림은 냉장고 냉동실에 상자째로 넣어져 있는 요거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왼쪽부터 포도, 딸기, 복숭아, 플레인.”

“헐. 너 이렇게 맨날 얼려 먹어? 우리 집에서는 그냥 떠먹거나 마셨잖아.”

동규는 대답 대신 냉동실 안쪽에서 떠먹는 요거트를 꺼냈다.

“떠먹는 것도 있어. 여름이라 얼린 거야.”

“대박. 그럼 집에 오면 매일 이거 짜먹는 요거트 열린 거 먹고 자겠네.”

“응. 맛별로 하나씩.”

“애기 같다.”

“……무슨 맛 먹을지 골라.”

하림은 플레인 박스에서 요거트를 하나 꺼냈다.

“이거 애기들 먹기 쉬우라고 이렇게 나온 거잖아. 짜 먹으라고. 대박, 김동규 세 살 애기처럼 짜 먹는 거 먹는다.”

“그런 거 아니고 이거 얼리면 막대 아이스크림 같아서 먹기 좋아.”

“그래그래. 떼 댤 김동규.”

“떼 댤이 뭔데.”

“세 살.”

하림이 동규를 놀리며 웃었다. 동규는 요거트 먹자고 얘기 꺼낸 것을 후회했다. 안 그래도 형아 소리 하며 저를 어린애 취급하길 좋아하는 애인데 또 떡밥이나 하나 물려 준 셈이었다.

동규는 하림의 플레인 요거트를 잘라 입에 물렸다. 하림은 요거트를 입에 물고도 계속 실실 웃기만 했다. 동규도 하림을 따라 슬쩍 웃고 말았다.

결국 하림이 동규네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했지만 동규가 집으로 돌려보냈다. 엄마 차에 같이 타 하림을 데려다주는데 하림과 엄마만 아쉬워 죽으려 하고 동규는 차라리 주말에 자러 오라며 하림을 달랬다.

“매정한데.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내일 학교 가잖아.”

“아침에 집에 들렀다 가도 되는데.”

“너 아침잠 많은 거 전교생이 다 알아.”

“아줌마! 김동규가 저 아침잠 많다고 놀려요!”

“원래 미인이 잠이 많대. 하림이도 그래서 아침잠이 많은가 봐.”

“아니 그게 아니라요.”

“얼른 들어가 하림아. 또 놀러오면 되지. 진짜 이번 주말에는 자면 되고.”

“2박 3일로 자도 돼요?”

“그럼.”

“……들어갈게요.”

“내일 봐.”

“응. 나 간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집으로 돌아온 동규는 한참이나 엄마가 하는 하림의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하림을 마음에 들어 해서 입꼬리가 씰룩거렸지만 계속 ‘그래?’라거나 ‘그런가?’라며 뚱하게 반응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뭐가 그러냐고 동규를 타박하며 하림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게 좋아서 동규는 엄마가 하림의 얘기로만 한 시간을 떠들었어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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