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12화 (22/53)

12

점심 먹고 동규네 반에서 한창 잘 놀던 하림은 시후가 제 이름을 외치며 교실로 들어오는 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쟤 아직도 포기 안 함?”

“서하리이이임!”

“보면 모르겠냐.”

학생회 부회장으로 하림과는 친한 친구인 백시후는 하림이 IMO를 포기하면서 유명 인사가 되자 하림을 붙들고 장학퀴즈를 나가자며 하림을 귀찮게 굴고 있는 중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시후가 하림에게 장학퀴즈 얘기를 한 지 한 달이 다 된다.

“귀 아파. 너 안 바빠? 3일 뒤면 학생회장 선거라 이럴 시간이 없을 텐데.”

“선거보다 더 중요한 일 때문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회장님.”

“뭐라는 거야.”

하림이 동규와 함께 읽던 책을 덮었다. 둘이 청소년 필독서 100권 중에 읽고 싶은 거 골라서 똑같이 읽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두 사람이 전부터 같이하던 다양한 취미 중 하나였고 지금도 이번에 고른 책에서 제일 재밌게 읽은 곳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마침 하늘도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며 끼어들어 세 사람은 한창 마음의 양식을 채워 가고 있었으나 회장님 소리 하는 시후의 등장에 흥이 식어 버렸다. 하림이 동규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동규가 고개를 끄덕이고 책을 가방에 넣었다.

“우선 콜라부터 바치고 얘기하겠습니다.”

“나가서 얘기해.”

“안 돼. 김동규 있는 데서 얘기할 거야.”

“나가자니까.”

“시로시로. 김동규가 옆에 있어야 서하림이 욕을 안 하지.”

하림은 동규에게 붙은 시후를 데리고 나가려다 말았다. 피하는 것도 한두 번이고 숨기는 것도 정도가 있어 차라리 지금 동규가 알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면서 하림은 손을 뻗었다. 그제야 시후가 동규에게서 떨어져 하림에게 아이스 콜라를 건넸다.

“너도 진짜 징하다. 싫다는 애 말고 다른 애 찾지 왜 서하림 물고 늘어져?”

“요즘 서하림 말고 핫한 우리 학교 학생 있어?”

“싫다잖아, 거머리야.”

동규는 저만 빼고 다 아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하늘의 팔을 살짝 찔렀다.

“무슨 얘긴데. 나도 알려 줘.”

“백시후가 서하림보고 TV 출연하자고 떼쓰, 엥? 왜 처음 듣는 얼굴이야. 서하림 너 얘한테 말 안 했어?”

“안 했어. 지금 하려고.”

올해 들어 요즘 따로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 보니 그거 때문에 과외 시간을 더 늘렸다. 그 탓에 동규 혼자 놀게 하는 시간도 많았고 무엇보다 기사에 사진 하나만 올라가도 학생증 사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걸 왜 굳이 기자가 사진을 찍어 가게 했냐고 속상해하길래 장학퀴즈 얘기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동규와 같이 있을 때 시후가 등장하면 시후 데리고 빛의 속도로 자리를 피하고 동규 귀로도 장학퀴즈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게 조심 많이 했다.

학생회장 선거 때문에 바쁜지 요 며칠 시후의 등장이 뜸하길래 포기한 줄로 알았다. 뭐, 잠시 뒤에 시후가 교실로 돌아가면 동규에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줄 거니 상관은 없지만.

“서하림 너 어차피 IMO도 안 나가서 지금 시간 비잖아. 다른 대회들은 올림피아드에 비하면 네가 눈 감고도 준비하는 수준 아냐? 어? 빨리 신청해서 방학에 네가 싫어하는 그 새끼 묻히게 우리도 장학퀴즈 나가자니까?”

“그래, 좋다. 권예준한테 엿 좀 먹여, 서하림! 나가서 잘생긴 얼굴 자랑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우승도 하면 딱이네!”

하늘이 맞장구를 쳐 주자 시후는 입에 모터라도 단 것처럼 장학퀴즈 영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시후의 이야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동규의 얼굴은 심각해졌고 하림은 동규를 슬쩍 쳐다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나갈 생각도 없는데 미리 얘기할 걸 그랬다.

“오, 김동규 백슈 칠 기센데.”

“아 써하리이임! 이제 올림피아드 안 나간다며!”

“안 나간다고는 한 적 없어.”

“나갔어? 1차?”

“아니. 신청은 했는데 나가진 않았고 근데 나 지금 그거 말고도 하는 게 좀 많은, 아 근데 이 얘기는 이따 하자.”

“왜?”

왜긴 왜야. 김동규 진정부터 시켜야 하니까 그렇지.

“이제 이쯤 되면 갓난애기 때부터 봐 온 정을 봐서라도 같이 나가 줄 때가 되지 않았나요, 회장님?”

“아니. 그러니까 이따가.”

“콜라 마신 거 다 토해, 그럼.”

하림이 얘기 안 해 줬다고 시무룩해진 동규나 그런 동규의 눈치를 보며 쩔쩔매는 하림이나 막무가내로 억지 부리는 시후까지, 하늘은 지랄 염병도 가지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 하림과 눈이 마주쳤다. 명백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었다.

“야, 백시후. 나 그거 장학퀴즈 갑자기 관심 생기는데 쟤 말고 나 알려 줘.”

“너는 필요 없어. 나는 서하림이랑, 악!”

“존나, 궁금하다고.”

하늘이 시후의 머리채를 잡아 올려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전혀 궁금해하는 얼굴이 아니었지만 하늘은 계속 입으로만 “나도 공중파 데뷔하고 싶네, 장학퀴즈 나가고 싶다.”라며 시후를 교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복도에서도 하늘이 손을 놓지 않았는지 시후의 비명이 들렸다.

거의 다 먹어 가는 콜라를 쓰게 마시며 하림은 어떻게 얘길 해 줘야 하나 머릿속을 돌렸다. 요즘 안 그래도 순한 줄로만 알았던 동규가 질투를 꽤 한다는 걸 알게 돼서 좋긴 좋은데, 나쁜 놈 된 것 같아 심란했다. 별개로 하늘과 동규 얘기를 아직 하지 않은 상태인 것도 걸렸다.

하늘은 당사자가 얘길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 평소처럼 똑같이 지내고 있어도 하림은 어찌 됐든 모든 걸 눈치챈 하늘과 얘기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권예준 일도 일이고 체육 대회에, 체육 대회 끝나고는 토론 대회 결승이 있었고 영어 말하기 대회나 과학경시대회 같은 교내 대회도 참여해야했고 IMO 불참 이후 온갖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해 와 바빠도 너무 바빴다.

“우선.”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제일 중요한 건 동규가 마음이 상했단 거였다. 하림은 복잡한 머릿속을 깔끔하게 밀었다.

“첫 번째로, 지금 이게 무슨 일이냐면. 아니다. 제일 먼저 사과부터 할게. 너한테 비밀로 하려고 했던 거, 모르게 했던 거 다 미안. 그러니까 백시후가 말한 거는 장학퀴즈 같이 나가자는 건데 그게 일요일 아침에 교육 방송에서 하는 퀴즈 프로그램이거든. 알아?”

“아니.”

“학교 이름 걸고 두 명이 나가서 퀴즈 맞추는, 골든벨이랑 비슷한 뭐 그런 건데 저번 달에 내가 올림피아드 안 나간다고 하고서 좀 이리저리 유명해지니까 백시후가 같이 장학퀴즈 나가자고 그러는 중이야.”

“……왜.”

“자소서에 이것저것 많이 적고 싶은가 봐.”

“이미 적을 거 많은 거 아니야? 학생회 부회장도 했고 이번에도 무난하게 회장 될 거 같던데. 공부도 잘하잖아. 상도 많이 받고.”

“내 말이. 아무튼 근데 나는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걔보고 안 나간다고 그랬어. 그랬는데도 계속 이런다. 귀찮은 놈이야.”

하림의 설명을 들어도 동규는 기분이 별로였다. 찡그리던 미간을 풀긴 했으나 샐쭉 튀어나온 입은 그대로인 걸 동규는 몰랐다.

“원래 백시후한테 투표하려던 거 너무 귀찮게 굴어서 금요일에 다른 애 뽑을까 생각 중이야, 지금.”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미안하다고 해 준 하림 덕분에 놀란 가슴은 진정됐어도 하림의 말을 생각하면 할수록 동규는 다른 부분이 꼬여 갔다.

“미안해. 많이 속상했어?”

“많이는 아니고.”

“근데 왜 아직도 얼굴이 심각해. 나 거기 안 나가! 기사 인터뷰도 들어오는 대로 다 하는 게 아니라 메이저 신문사만 골라서 했었고 또, 또…… 아무튼 안 나감.”

동규는 하림이 했던 말 중에 ‘나는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안 나간다고 그랬어’가 제일 걸렸다. 동규는 다른 사람들이 하림의 능력보다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게 싫은 거지 하림이 유명해지는 것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어디 가둬 두고 저만 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동규는 하림이 가진 모든 능력들이 빛을 보는 게 더 좋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반짝거리는 모습도 좋고. 하림에 비하면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자기 자신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다른 사람 통해서 얘기 듣게 해서 미안해. 아니 근데 나 진짜 안 나갈 거고 백시후가 뭐라고 해도 꿈쩍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친하다고는 해도 고작 친구 사이일 뿐인데, 네가 싫어할까 봐 나가지 않겠다는 하림에게 동규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 ‘왜 내가 싫어할까 봐 안 나겠다고 하는 건데?’라는 한마디를 내뱉고 싶어도 하림이 뭐라고 대답할지 감이 오지 않아 겁이 났다. 어차피 나가고 말고는 하림의 일이지 자기가 뭐라고 나가라 마라 하는 것도 웃겼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동규는 그중에서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이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되는 대로 입을 움직였다.

“……진짜 나가기 싫은 거 맞아?”

“응?”

“나가고 싶은데 내 핑계 대는 건가 하고.”

“그게 무슨 소리야.”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는 하림을 보고 동규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할 수가 없어 생각 없이 다른 말을 꺼낸 게 엄청난 실수였다. 다른 건 다 몰라도 핑계라는 단어는 쓰지 말았어야 했다.

“무슨 소리냐고.”

“아니 나는…….”

“어. 너는.”

“…….”

“너는 뭐.”

나는 싫은 거 아니니까 네가 뭘 하든 괜찮다고 얘길 하고 싶은데, 이렇게 얘길 해도 기사나 인터뷰로 짜증을 냈던 과거가 있어 하림이 왜 갑자기 말이 바뀌었냐고 할 게 뻔했다. 그러면 또 왜 말이 바뀌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길 해야 하는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

“뭐냐고.”

“나도 네가 그…… 퀴즈 참여하면 서하늘이 말한 대로 권예준한테 한 방 먹이는 거 같아서, 같은데 아니 같은 게 아니고 맞는데 왜 네가 안 나간다고 했는지 이해가 잘…….”

“내가 거기 나가는 게 나한테 좋은 일인데 네가 싫어하는 것 같다는 핑계를 대고 지금 이러고 있는 거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맞잖아. 진짜 나가기 싫은 거 맞냐며. 네 핑계 대고 있는 거 같다며.”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아니라고.”

“아…… 아니 그러니까, 나는 너 거기 나가는 거 좋은데.”

“그래. 너는 내가 거길 나가도 좋은 사람인데 내가 혼자 지레짐작으로 너는 싫어할 것 같다고 넘겨짚어서 혼자 바보처럼 굴었다 그거 아니야 지금.”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는 좋다며. 내가 거길 나가는 게 나한테 좋은 일인 거 같으니까 좋은데 내가 안 나가겠다 한 게 이해가 안 간다며. 맞아 아니야.”

“마, 맞는데.”

“거봐. 그럼 내가 혼자 네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서 삽질한 게 맞네.”

“아니, 서하림 그게.”

“그래 내가 바보였네.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내가 그냥 네 핑계 대고 있었고. 그럼 너는 나 나가도 상관없다는 거지. 백시후한테 같이 나가자고 얘기하러 간다.”

화가 단단히 난 하림이 인사도 않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동규는 하림을 잡지도 못했다. 대체 지금 무슨 실수를 한 거지? 바로 쫓아가 사과를 하고 싶지만 지금은 뭐라고 하면서 사과를 해도 하림에게 통하지가 않을 것 같다. 하림이 남겨두고 간 얼음컵은 이제 얼음이 작아져 콜라 위쪽은 투명한 맹물과 섞여 색이 옅었다.

곧 점심시간 끝나는데 서하늘은 왜 안 들어와. 얘는 진짜 필요할 때 없고 쓸데없을 때는 옆에 있고. 하림과 싸운 얘기를 하늘에게 하기에는 빼도 박도 못하는 제 실수라 무척 창피했지만 동규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하림도 동규도 잘 알고 있는 하늘뿐이었다.

교실 문만 보며 하늘이 들어오길 애타게 기다리는 동규의 바람과 달리 하늘은 수업 시간 종이 친 뒤에야 교실로 뛰어 들어왔다.

“너 서하림이랑 싸웠어?”

“아니, 어.”

“헐. 너네가 싸우는 날도 다 있네. 걔 지금 울어.”

“운다고?”

“아니?”

“아 뭐야, 진짜 운다는 거야 아니란 거야?”

“거의 울 기세임. 눈 엄청 빨갛던데. 울기 싫어서 참는 거야 그거. 너 걔한테 욕했어? 아니면 때렸어?”

“안 그랬어!”

“아 시발 깜짝아. 그럼? 도대체 뭐라고 그랬길래 서하림이 울려고 그래? 걔 진짜 어지간한 일로는 안 우는데.”

“그, 나는 그냥.”

“야. 쉬는 시간에 얘기하자.”

동규야말로 수업 시간에 몇 번이나 울 고비를 넘겼다. 처음엔 솔직하게 그냥 ‘왜 내가 싫어할까 봐 안 나가겠다고 한 거야?’라고 물어보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하림이 무슨 대답을 한들 나는 네가 뭘 하든 좋다고 얘길 했으면 이렇게까지 싸우지 않아도 될 거였다.

처음엔 그래서 울 뻔했고 그 다음은 하림이 미워서 울 뻔했다. 알고 지낸 날이 얼마나 많고 같이 붙어 지낸 시간이 얼마나 되는데 그런 식으로 사람 말을 비꽈 들을 건 뭐야. 그게 아니라고 계속 제대로 얘기하려 하는데 잘 듣지도 않았던 하림이 너무 미워서 울 뻔했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애초부터 말을 잘못한 자기 자신이 제일 한심하고 등신 같아서 김동규 왜 사냐며 울고 싶었다. 수업 시간이라 겨우 참았다. 울면 꼴사나울 테니까.

쉬는 시간 종 치자마자 동규의 옆자리인 하늘이 책상을 밀어 동규의 것과 붙였다. 고작 한 교시 지났을 뿐인데 죽어 가는 행색을 하고 있는 걸 보니 하림이 울 것 같다는 얘기는 하지 말 걸 그랬다. 하늘은 속으로 동규에게 사과한 뒤 머리를 긁었다.

“옆에서 아주 수업 내내 정신 사나워서 죽는 줄.”

“미안…….”

“왜 싸웠는데.”

“내가 말을 이상하게 했어. 아…… 왜 그랬지.”

“뭐라고 했는데.”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됐는데 내가 실수로.”

“아니 그러니까 뭐라고 했냐고.”

“하아……. 많이 화났어? 아니 화났겠지 울 거 같았다 그랬으니까…….”

“야.”

“너 서하림 반에 친한 애 있지. 걔보고 서하림 만약에 울면 알려 달라고 해주면 안 돼?”

“아 진짜, 야. 우는지 안 우는지는 네가 1반 가서 직접 확인 하시고 무슨 말을 했는지 얘기 안 할 거면 나는 책상 뗀다.”

“알았어.”

“얘기 안 한다고?”

“아니 할 거라고.”

“구체적으로 얘기해. 실수를 했으면 어떻게 실수를 했는지 얘길 해야 내가 판단을 할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그게, 내가.”

“야, 세 문장으로 정리해서 말해.”

“……접속사 사용해도 돼? 그러면 한 문장도 길.”

“아, 답답해! 접속사 쓰면 엄청 길어지는 거 아니야? 빼고 해.”

“그럼 잠깐 생각 좀.”

진짜 나가기 싫은 게 맞냐고, 나가고 싶은데 내 핑계 댄 건 아니냐고, 핑계라는 단어가 최초의 실수 같고, 원래 하고 싶은 말은 다른 말들이었는데, 왜 내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나는 싫은 거 아니고, 전에는 왜 싫었는지, 지금은 왜 괜찮은지, 하림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권예준한테 복수하는 거 같단 거 나도 동의하고, 너한테 좋은 일은 나한테도 좋은 일이고…….

“시간 더 줘야 돼?”

“아니. 세 문장…… 어…….”

동규가 손가락을 접으며 세 문장을 고르는 걸 보다 못한 하늘이 두 문장을 더 주겠다며 빨리 얘기하라 보챘다. 동규는 다급하게 손가락을 접으며 다섯 문장을 완성했다.

“뭔데 그래서.”

“첫 번째는 내가 서하림보고 진짜 나가기 싫은 거 맞냐 그랬어. 그다음은 나가고 싶은데 내 핑계 대는 거 아니냐고 그랬어. 세 번째는 퀴즈 그거 나가면 나도 네가 했던 말처럼 권예준한테 엿도 먹이고 괜찮은 모습 보여 줄 수 있어서 좋다고 했어. 네 번째는 나는 서하림이 뭘 하든 서하림 좋은 일이면 나도 다 좋아. 마지막은 근데 내가 핑계라고 그래서 서하림이 많이 화가 난 거 같아. 어떡하지?”

눈물 참느라 빨개진 눈을 한 하림이 했던 얘기와 조합해 보니 하늘은 아까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훤히 그려졌다. 하림은 동규가 질투가 좀 있어서 기사 뜨던 걸 싫어했으니 장학퀴즈도 싫어할 줄 알고 배려해서 숨긴 거였는데, 정작 동규가 다 듣고서는 괜찮다고 한 것도 억울하고 배려한 자기가 바보같이 느껴지고 동규가 자긴 거기 나가는 게 한 방 먹이고 좋은 일이니 하는 속 좋을 소리만 하는 게 제일 속상하다고 했다.

‘나 아직 너랑 걔랑 무슨 사인지 네 입으로 못 들었는데 이런 일에 끼게 돼서 좀 당황스럽다.’

‘미안. 근데, 아 진짜 지금 기분 진짜…….’

하림이 두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교실 가면 김, 걔가 나 붙잡을 텐데 그러면 너랑 걔 사이에서 사랑의 큐피드 역할 해야 하는 내 인권은 누가 보상해 줘. 원래 친구 연애 상담 들어 주는 게 제일 기 빨리는 일이거든.’

하늘의 말에 울적하던 하림은 웃음이 터졌다. 복도라 다른 친구들이 들을 걸 염두하고 동규의 이름을 얘기하지 않아 준 것도 고마웠다.

‘내가 보상해 줄게.’

‘보상금액 억은 나올 것 같은데요.’

‘적게 나왔네요.’

‘올.’

하림이 손을 떼고 앞머리를 정리했다.

‘걔 얘기는 조만간 빨리 나눠 보자. 나 걔랑 내년 2월까지 한 교실에서 지내야 하는데 양쪽 상황을 알아야 중간에서 난처할 일이 없지.’

‘오키. 일단 걔 내가 화내서 많이 놀랐을 텐데 가서 좀 잘 달래 줘.’

‘그걸 내가 왜 해? 네가 해.’

‘야아. 서하느을, 보상해 준다니까.’

‘아, 진짜 팔자에도 없는 남동생 둘 생긴 기분이야. 악!’

‘나 운 건 얘기하지 마라.’

‘안 해. 울지도 않았구만, 뭘.’

‘고마워. 나 먼저 간다.’

‘네 가세요.’

살다 살다 서하림이 연애 문제로 삽질하는 걸 다 본다면서, 하늘은 하림이 사라질 때까지 복도 끝을 지켜보다 교실로 올라왔다.

“……화.”

“응.”

“났지 당연히. 너도 잘 알고 있네. 핑계라고 한 게 문제야.”

“아 어떡하지. 화 한창 났을 때 사과하면 오히려 역효과잖아. 근데 울었, 아니 운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게 속상, 내가 말실수를 그렇게 심하게 한 거라 사과 안 하는 것도 너무 그런데.”

“나 참.”

“왜? 서하림 화 풀리기 힘들어 보여?”

“그건 아닌데.”

하늘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 하림의 부탁을 들어줄 의지를 상실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동규를 째려봤다. 도대체 서하림은 이런 답답한 애를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아니, 객관적으로 보면 키도 크고 생긴 것도 괜찮고 몸이야 뭐 좋다 못해 훌륭한 애인 거 아는데 얘기해 보면 소심도 이런 답답한 소심쟁이가 없다.

하늘은 하림만큼 동규랑 자주 붙어 다니는 건 아니라 동규의 단편적인 모습만 알고 있는 거긴 했다. 서하림 빼고는 제대로 된 인물 하나 없는 남학생들 천지인 이곳에서 눈에 띄는 애는 맞으니 친해지기 전에는 다른 여자애들이 김동규 좋다고 뒤에서 쑥덕거릴 때 피지컬은 끝내준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는 됐다. 멀쩡한 탈의실 두고도 귀찮다고 교실에서 체육복 갈아입을 때도 다른 남학생이 그랬으면 바로 내쫓았을 테지만 김동규라 그냥 둔 것도 있었다.

심지어 하늘은 동규가 혼자 다니고 조용하고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지나가던 같은 학교 학생 1 내지는 서하림의 친구 25749581563로 생각한 게 다였다.

대부분의 남자애들 다 어린 것 같지만 동규도 얘기하다 보면 속도 좁고 잘 삐지는 탓에 어려도 한참 어린 느낌이 있다. 남학생들과 별로 친하지 않은 데다 혼자 글 쓰고 책 많이 읽으니 순하고 생각이 깊은 것과는 별개로 그냥 아직 애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늘의 성격상 이런 애랑은 생긴 게 아무리 다시없을 경국지색의 미남이라고 해도 연애는 하기 싫었다. 연예인이 이런 성격이면 열심히 좋아했을지 몰라도 현실적인 연애 상대로는 꽝이었다.

“몸을…… 많이 보나?”

“어? 뭐라고?”

“아니야. 혼잣말.”

“하, 어떡하지. 화 많이 났는데 미안하다고 하면 더 기름 붓는 거 아닐까? 오늘 집에는 따로 가야겠지? 아, 뭐라고 하지……. 사과하지 말까, 화 풀릴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계속 땅 파고 들어가는 소리만 하는 동규를 보던 하늘은 친한 친구이자 가족인 하림의 취향이 의심됐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엄청 밝히네.

“……가 언제 풀릴지도 모르겠고. 아 그냥 오늘 아니 이따.”

“내 생각에는.”

하늘은 가만히 놔두면 혼잣말로 세 시간은 가뿐히 중얼거릴 동규의 얘기를 더 듣기 싫어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응.”

“오늘은 서하림한테 미안하다 하지 말고 내버려 뒀다가 내일 사과하면 좋을 것 같다.”

“내일? 오늘 밤에 사과 메시지 보내는 건 안 돼?”

“그럼 새벽에 보내서 아침에 읽게 해.”

“어. 알았어. 뭐라고 쓰면 돼?”

하늘은 하림에게 청구할 보상 금액에 천만 원을 더 얹었다.

“잘은 모르는데 전에 네가 서하림 기사 뜨고 뉴스 나간 것도 싫어했다며. 그러면 서하림 입장에서는 네가 이것도 당연히 싫어할 거라 생각하지. 걔는 네가 싫을 줄 알고 배려한 건데 그 앞에서 ‘나는 배려 필요 없음’ 한 거잖아.”

“아…… 그러면 뭐라고 써?”

“야. 그런 것도 내가 다 알려 줘? 받아쓰기 해? 네가 걔랑 싸웠지 내가 걔랑 싸웠어?”

“아니. 근데…….”

“근데 뭐.”

“또 실수할까 봐 걱정 돼서…….”

“하, 참. 답답하네. 중요한 건 하림이가 널 위해 배려한 걸 네가 눈치도 없이 무시한 거잖아. 물론 하림이 좋을 일이 너한테 좋은 일도 맞는데 거기서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고. 그러니까 그걸 중점으로 쓰면 돼. 알겠니, 김똥규야?”

“응.”

“또 실수할까 봐 걱정이 되면 기사 때문에 싫어한 전적이 있어서 하림이 네가 이번 일도 배려를 해 준 건데 내가 몰라줘서 미안하다 이걸 중심으로 놓고 네가 하고 싶은 말 다 써. 걔는 네가 그렇게 열심히 미안하다고 쓰면 알아서 이해하고 넘어갈 테니까 그냥 하고 싶은 말 백 줄 쓰라고.”

“내가 처음부터 그 배려를 바로 알고 말실수 안 했으면 서하림이 괜히 나 때문에 백 줄 다 읽어 가면서 그렇게 이해 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것도 미안한데 써도 되나?”

“써 써. 쓰라고. 쓰고 싶은 거 다 써.”

“오늘 밤에?”

“어! 오늘 밤에! 걔 신데렐라라 일찍 자니까 12시 넘어서 보내면 내일 읽는다고.”

대답해 주면서도 하늘은 기가 찼다. 선생님에게 똥 싸러 가도 되냐 쉬 싸러 가도 되냐를 비롯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본다는 초등학생과 얘기해도 이것보단 낫겠다. 적어도 걔네는 고차원적인 생각을 못 하니까.

도대체 서하림은 얘 어디가 좋다는 거야? 내가 모르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나? 역시 몸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하늘은 하림에게 받을 보상 금액을 두 배로 올리면서 이번 일도 하림을 어떻게든 놀려 먹는 떡밥으로 만들 궁리를 했다. 그게 싫었으면 다른 친구에게 큐피드 역할을 청했어야 된다. 다른 친구라는 그런 선택지는 없으니 결국 이렇게 될 일이란 거다.

“저기.”

“어.”

“너 보통 언제 자?”

“나? 한 12시나 1시. 왜? 나보고 메시지 보내기 전에 한 번 읽어 봐 달라고 하는 말만 아니면 좋겠는데.”

“……그냥 서하림은 일찍 자는데 너도 가족이니까 원래 걔네 집 사람들은 다 일찍 자는 건가 궁금해져서 물어봤어.”

“야. 종 치겠다. 교과서 가지러 가야 돼. 너는 사물함 안 가?”

“가.”

“야, 빨리 갔다 오자. 종 치기 직전임.”

서하림 가족들은 모두 독심술을 하는 게 분명하다. 전에 서하림도 얘한테 말조심해야겠다고 했었고 서하림은 말할 것도 없이 내 마음을 쭉쭉 읽으니까.

동규도 앞으로 하늘에게는 말실수 안 하도록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은 12시를 지나도 한참 지난 새벽 4시.

동규는 하림에게 보낼 메시지를 몇 번째 썼다 지우는 중인지 모른다. 휴대폰 메모장에는 벌써 여섯 번째 새로 쓰는 장문의 글이 있었지만 동규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운 메모를 열었다. 창밖에 보이는 까만 밤하늘에 살짝 푸른색이 도는 걸 보니 조금 있으면 일출인 듯싶었다.

“아, 진짜 왜 사냐.”

5시가 되자 확연하게 밝아지며 방 내부가 보였다. 동규는 또 새롭게 메모를 열었다. 열심히 뭐라고 써도 다 좆같고 이상했다. 처음부터 말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거란 데서 오는 자괴감과 한심함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다. 시간이 지나면 좀 괜찮아져야 하는데 속에 난 불이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하늘이 얘기해 준 대로 제일 중요한 포인트를 처음에 쓰고 난 뒤 하고 싶은 말을 열심히 적어 봐도 하림이 이걸 보고 마음이 풀릴 거란 보장도 없고 오히려 더 화가 돋아서 아침부터 싸우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다면 동규는 혀를 깨물고 죽을지도 몰랐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이런 상황을 만든 자기 자신이 멍청해도 너무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두 시간만이라도 잘까. 근데 잠을 자고 싶어도 하림에게 아무런 사과의 말도 없이 학교에 가기 싫어서 자꾸 머릿속에서는 긴긴 편지가 써졌다. 그럴 바에는 그냥 휴대폰 붙들고 있는 게 나았다.

“하아…….”

또 새 메모를 열고 동규는 액정을 느리게 두드렸다. 잠시 뒤 엄마가 일어났는지 전자레인지 돌리는 소리가 났다. 동규는 스물한 번째 쓰던 메모를 저장하고 방문을 열었다.

“엄마.”

“아, 깜짝이야. 일어났어? 일찍 일어났네.”

“나 오늘 학교 안 가고 싶어.”

“어디 몸 안 좋아?”

“응.”

“어디?”

엄마가 동규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동규는 마음이 아프다고 할 수는 없어 그냥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팬티만 입고 자지 말라고 그랬지. 티셔츠라도 입고 자. 아니면 에어컨을 끄든가.”

“……어. 그럴게.”

“엄마가 선생님한테 전화 할 테니까 용돈 카드로 병원 다녀와. 죽도 사 먹고.”

“응.”

“더 잘 거지? 에어컨 끈다.”

출근 준비를 끝마친 엄마가 마지막으로 물을 끓여 동규에게 가져왔다. 그동안 동규는 티셔츠와 바지를 주워 입었다.

“따뜻한 물 좀 마셔. 귀찮다고 잠만 자지 말고 병원 꼭 다녀오고.”

“응. 엄마 고마워.”

“병원 안 다녀오면 혼난다.”

“알겠어. 엄마 나 졸린데.”

“아니다. 엄마 이따가 반차 써서 일찍 퇴근할게. 병원 같이 가.”

“아니! 엄마 나 혼자 다녀올게. 한숨 더 푹 자고 점심 먹고서.”

“환절기도 아니고 감기가 뭐야 감기가 엄마 속상하게.”

“아…… 나 옷 다 입었어.”

“오늘부터 팬티만 입고 자면 엄마한테 혼날 줄 알아.”

“응. 엄마 출근해야지.”

“아픈 아들 두고 출근하려니까 엄마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네.”

“심한 거 아니니까 빨리 가. 뜨거운 물도 먹었고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수도 있어.”

“그럼 자고 일어나서 전화해.”

“응. 나 잘 거야.”

“엄마 간다?”

“네. 다녀오세요.”

겁쟁이처럼 피하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다. 한심하고 비겁하고 치졸하고 쪼잔하고.

동규는 엎드리고 누워 자꾸 나오려는 눈물을 삼켰다. 나도 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답답해서 화가 났을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런데 하림은 오죽할까.

긴긴 말 쓰기도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세 글자라도 보내고 싶은데, 보내기 싫다. 그냥 다 싫었다. 오늘은 이렇게 아프다고 빠지지만 내일은 어떡하고 모레는 어떡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이대로 하림과 영영 멀어지는 건 아닐까.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엄마 빼고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걸. 서하림도 이제 나 같은 건 싫어졌겠지. 싫어졌을 거야…….

그게 제일 두려워 동규는 눈물이 나왔다. 자기 자신이 너무 못나고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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