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11화 (21/53)

11

“50분에 전화하려고 했는데 딱 왔네.”

“미안.”

동그랗게 모여 있는 백팀 선수들 사이에 동규가 끼어 섰다.

“지금까지 했던 대로만 하자. 솔직히 우리가 신장에서부터 이긴 것 같은데 뭐, 모든 게임은 해 봐야 아는 거니까. 그리고 황우민 진짜 빠른 거 알지. 걔 진짜 잘 막아야 돼. 패스도 존나 잘해서. 잔머리가 좋아서 잡기술도 많아. 그리고 김동규, 리바운드 무조건 잡아. 골은 못 쳐내도 괜찮아. 만회하면 돼. 근데 리바운드는 안 돼. 무조건 잡아라. 그러라고 골대에 붙여 놓는 거니까.”

골대에 붙여 놓는 대신 리바운드란 리바운드는 다 잡으라고 그러고 심지어는 교체 없이 풀 코트 뛰라는 게 말이 되나. 동규는 불만이었지만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코트에 나와 있으면 하림이 계속 자길 봐 주겠지 싶어서.

양 팀 농구선수들이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드리블을 점검하고 점프도 점검하고 슈터들이 3점 슛을 몇 번 날려 보거나 하며 2부의 시작을 끊어 주는 농구를 하기 위해 몸을 달궜다.

동규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딱히 준비라고 할 게 없어 스트레칭을 가볍게 하고 굴러다니는 농구공 하나를 주워 천천히 드리블했다. 누가 닦아 준 손이라 그런지 농구공이 손에 더 잘 감기는 느낌이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제자리에 대부분 착석했다. 각 팀은 몸 풀기에 쓴 농구공을 정리하고 심판 앞으로 모였다.

“선수 소개하고 인사한 다음 시작하는 거야.”

심판을 맡은 선생님이 비장하게 말했다. 스타팅멤버 다섯 명이 상대팀을 바라보고 섰다. 스피커에서는 주장부터 선수들을 한 명씩 소개하는 소리가 나왔다. 선수소개가 끝나자 팀 최장신 선수들이 선공을 정하기 위해 심판의 앞에 섰다. 나머지 선수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뛰어가 자리를 잡았다.

심판이 공을 던져 공이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떨어지는 순간, 두 선수가 뛰어 공을 제 팀에게 쳐내면 그 팀이 공격을 시작하게 된다. 백팀 주장인 시윤은 골대 아래에만 있고 싶어 하는 동규에게 그 중요한 일을 맡겼다.

‘그러다 내가 선공 뺏기면 골대 아래에 내가 없는데 그러다 첫 골 먹히면 어떡하게.’

‘흔히들 각 쿼터별 첫 골이 경기의 흐름을 가져오는 아주 중요한 한 골이라고들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왜냐. 한 골 정도는 전략상 줘도 된다, 이 말이야. 첫 골? 그거 그냥 걔네 먹으라고 해. 선공 뺏겨도 상관없어. 널 거기다 세우는 이유는 네 몸에서 나오는 아우라로 걔네 기 죽이려고 그런 거야.’

‘……아우라?’

‘포스 있잖아 포스.’

‘나도 알아.’

‘안 그래도 우리는 180넘는 사람이 꽤 되는데 청팀은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키만 큰 게 아니라 몸 자체가 큰 네가 선공한다고 나가면 선공을 뺏기더라도 걔는 쫄아 있고 관중석에서는 ‘아니 저런 엄청난 선수가?’ 하고 기대를 하게 되는 효과가 있어.’

‘나는 별로…… 기대를 받고 싶지가 않은데.’

‘그 기대는 경기 진행되면 바로 우리들한테 옮겨지게 되어 있어. 그냥 너는 처음에 우리 팀 이 정도다, 하고 보여 주는 거고 골대 아래에서 리바운드만 잘 잡아서 넘겨.’

농구를 좋아한다는 시윤이 연습을 할 때마다 온갖 작전을 짜 와도 딱히 이해가 잘 되진 않았으나 이번 얘기는 뭔지 단번에 이해했다. 처음만 치고 빠진 뒤 서포트나 잘 해 달라는 건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그러니까, 공 뺏기더라도 무조건 높이 뛰어. 딱 3초만 기대 받고 그 다음부턴 골대 밑에서 나오지 마.’

심판 선생님이 동규와 백팀 선수 사이에 섰다. 백팀 선수는 딱 180cm이거나 1, 2cm정도는 모자란 것 같았다. 마르기도 엄청 말라서 동규는 이런 애를 골대 아래에서 만난다면 리바운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겠다 싶어 김이 샜다.

삐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농구공이 하늘 위로 던져졌다. 동규는 한 발을 뒤로 살짝 빼 무릎을 구부렸다. 공이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가다 속도가 느려지며 공중에서 잠깐 멈췄다. 허벅지에 순간적으로 힘을 주고 동규는 있는 힘껏 뛰어올랐다. 청팀의 학생도 동규와 같이 뛰어 올랐으나 동규보다 높이가 많이 낮았다.

선공 뺏겨도 상관없다 했으니 굳이 공을 때릴 필요는 없겠지. 동규가 팔을 느리게 움직이는 순간에 청팀의 선수가 손끝으로 공을 쳐 청팀으로 보냈다. 체공시간이 짧았던 만큼 땅에 빨리 떨어진 청팀 선수는 땅에 내려오자마자 공을 따라 뛰어갔다. 동규도 적당히 뛰어 백팀 골대로 향했다.

백팀이고 청팀이고 백팀 골대에서 바글바글했다. 동규가 골대로 도착하자 백팀 선수들이 골대 밑을 열어 주었다. 골대 바로 아래에 피지컬이 좋은 선수가 등장하자 청팀 선수들이 압박감을 느끼고 계속 서로에게 공만 돌렸다.

“야 일단 던져!”

“안 들어가면 어떡하라고!”

“그래도 시발 그냥 던지라고! 시간 가잖아!”

청팀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시윤이 공을 들고 있던 청팀 주장 우민의 쪽으로 끼어들어 공을 커트했다.

“뭐야!”

단숨에 농구공이 청팀의 골대 쪽으로 넘어갔고 선수들도 사람들의 관심도 그쪽으로 옮겨졌다. 동규는 홀로 백팀 골대 아래에 남아 발목 스트레칭이나 했다. 시윤이 만약에라도 경기 흐름을 뺏기게 되면 덩크슛을 할 수 있는 동규에게 덩크슛으로 흐름을 끊어 달라는 부탁을 했었는데 이대로만 간다면 동규가 쓸데없이 힘을 뺄 필요는 없어보였다. 물론 경기는 이제 시작됐고 승부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만.

첫 골을 시윤이 넣으면서 흐름이 단숨에 백팀의 것이 되었다. 리바운드로 공을 잡은 청팀이 공을 길게 던져 다시 백팀으로 공이 넘어왔다. 청팀은 키는 크지 않은 대신 주장인 우민을 필두로 속도가 빠른 팀이었다.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몸이 느린 동규는 자신에게 붙은 두 명의 마크를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게 다였다.

“장준! 던져!”

우민이 청팀 슈터인 준에게 공을 던지며 소리쳤다. 발이 빠른 우민은 혹시라도 준이 3점 슛을 실패할까봐 골대로 빠르게 달려갔다. 패스된 공을 잡은 준이 순식간에 자세를 잡아 공을 날렸다. 동규는 작지만 근성이 대단한 우민이 옆에 딱 붙어 굉장히 불쾌했다. 조금만 힘주면 밀려서 넘어질 걸 악바리로 버틴다.

-슈우우우웃! 슛입니다! 깔끔한 3점슛!

“리바운드! 김동규! 리바운드!”

소리 안 쳐도 알아. 시윤이 외치기 전에 이미 점프해 공을 잡은 동규가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힘이 세 농구공이 코트를 가로질러 멀리멀리 날아갔다.

“씨발놈아! 이렇게 멀리 던질 땐 말 좀 하고 던져!”

스피드 게임에 어떻게 던지고 어디로 던질 거라고 언제 말하고 있냐. 동규는 속으로만 꿍시렁거리며 청팀 응원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림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청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평소에 비해서는 굉장히 타올라 열심히 하는 중인데 재밌긴 한가 보다.

공이 빠르게 백팀의 골대에도 들어갔다가 청팀의 골대에도 들어갔다. 1점 차이로 1쿼터가 종료됐다. 백팀은 3쿼터 빼고 다 뛰기로 한 시윤과 홀로 숨도 안 차는 동규를 빼고 선수가 교체 될 예정이다.

“잘 하면 김동규 카드 안 꺼내도 되겠다!”

“야 닥쳐. 그런 말 하면 말이 씨가 돼서 다음 쿼터 말아먹는다고.”

놀랍게도 시윤이 한 말은 현실이 되었다. 2쿼터에서 갑자기 흐름을 뺏긴 백팀은 청팀에게 연속으로 골을 네 개나 뺏기면서 점수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한 동규도 이쯤 되자 멍청하게 공을 뺏기는 같은 팀 친구들에게 화가 치밀었다.

2쿼터가 끝나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2쿼터를 뛴 다섯 선수들은 죄다 짜증이 가득했다. 동규도 마찬가지였다.

“나보고 3쿼터에 골대 밑에서 나오라는 말만 하지 마.”

“나올 수도 있어.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도록 대기해.”

“아, 진짜.”

굉장히 많은 말이 함축된 짧은 한마디였다. 동규의 목소리는 굉장히 날이 서 2쿼터를 말아먹은 다른 선수들이 듣기에는 비꼬는 것처럼 듣기 충분했다.

“아 진짜 뭐. 말끝까지 해.”

“……됐어.”

“똥 씹은 얼굴 하지 말고 똑바로 해.”

“씨발 뛰어다녀서 힘들어 죽겠는데 쉬는 시간에도 말싸움하느라 기 빨려야 돼?”

“그럼 넌 귀나 막고 있어.”

“귀나? 귀나 막아?”

“야, 다 닥쳐.”

“조용히 해! 내가 김동규한테 물어봤지 너네한테 물어봤냐? 김동규 얘기해 봐. 아 진짜 뭐.”

험악한 분위기 속에 동규에게 시선이 모였다. 동규는 저를 바라보는 친구들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모두 짜증이 난 상태였고 동규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굳은 동규와 시선을 마주한 몇몇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작게 욕을 뱉기도 했다.

“내가 골대 아래에 있는 조건이 너네가 잘해 줘야만 그럴 수 있는 건데 지금 점수 차 10점 넘게 낸 게 나머지 네 명 때문이지 나 때문은 아니잖아. 나는 리바운드 다 잡고 파울 하나 먹을 정도로 공 엄청 쳐냈어.”

농구에는 상대가 던진 공이 링에 닿기 전에 터치하면 안 되는 골텐딩이라는 규칙이 있다. 슛한 공이 올라가는 중엔 수비 선수가 공을 건드리거나 쳐낼 수 있어도 최고점을 찍고 내려오는 공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의 궤도가 만일 링의 안으로 들어가는 궤도라면 해당 슛은 점수인정으로 처리된다. 파울이 되는 건 아니지만 자꾸 골텐딩이 일어나면 심판의 재량으로 파울이 될 수 있다. 동규는 그걸 알고 있었으나 청팀의 공을 열심히 막았다. 그 탓에 파울도 받았다.

동규의 말에 너 잘났다는 말이 튀어나오고 동규도 얼굴을 찌푸리면서 “나 안 해.” 하고 벤치에 앉았다. 그 소리가 시발점이 되어 3쿼터에 나갈 준비를 하던 벤치 선수들까지 죄다 일어나 한마디씩 하며 싸웠다. 사실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게 아니라 2쿼터를 통으로 청팀에게 질질 끌려 다닌 자신들의 한심함을 부정하며 빼액거리는 거였다.

“아 됐어 시발! 지금 여기서 누가 잘했네 못했네 하면 기분 좆같아서 3쿼터도 망한다고. 남은 두 쿼터 다 좆창 내고 싶냐? 3쿼터에선 힘내서 점수 차 줄여보자. 김동규 너는 우리가 3쿼터에서 동점 못 만들면 4쿼터 첫 골로 덩크 좀 넣어.”

“…….”

체육 대회에서 하는 농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프로 선수도 아닌 놈들이 목소리 높여 땍땍거리는 건지. 동규는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거면 골대 아래 있는다고 하지 말고 그냥 1쿼터만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점수나 쫙 내고 빠진다 할 걸 그랬다.

2쿼터 쉬는 시간은 다른 때보다 5분이 더 길다. 다음 쿼터 시작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은 동규는 청팀 쪽으로 고개를 돌려 하림을 찾았다. 하림 역시 동규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동규가 하림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야 잠깐만! 김동규! 여기 봐!”

동규가 제 쪽을 보는 걸 발견한 하림이 뭐라 뭐라 소리쳤다. 멀리 있어 소리가 작게 들렸다. 입모양도 잘 보이지 않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동규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동안 하림은 등 뒤에 숨겨뒀던 플래카드를 꺼내들었다. 문구는 ‘농규왕 김동규’. 옆에 앉아 있던 응원단 친구가 하림의 플래카드 멘트를 확인하고 이게 뭐냐며 타박을 하는 게 보였다.

하림은 그래도 꿋꿋하게 동규에게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포인트는 규와 이응. 특히 농의 농과 동규의 동에 들어있는 이응 받침은 유달리 컸고, 모든 이응엔 농구공이 그려져 있었다. 동규는 하림이 직접 그린 것인지 궁금해졌다. 계속 하림의 집에서 붙어 지냈으나 저런 걸 만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만약 하림이 저걸 직접 만들었다면 동규가 돌아간 시간, 그러니까 잠이 많은 하림이 졸린 눈을 비비며 몰래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얼마나 많은 하품과 피곤함이 묻어 있을지 싶어 동규는 코끝이 간지러웠다.

“야! 김동규! 잘해!”

청팀 응원단이면서 패기 좋게 백팀 선수 응원하는 플래카드를 흔드는 하림의 꿋꿋함에 동규는 웃음이 났다. 3쿼터에서 백팀 친구들이 경기를 또 말아먹었음 싶었다. 그래야 4쿼터의 첫 골을 멋지게 덩크로 넣을 테니까. 저런 멋진 플래카드도 받았는데 그 값은 해야지.

그래서 동규는 이번엔 규칙을 정확히 따라 정점을 찍기 전 공만 쳐냈다. 덕분에 점수 차가 쉽사리 줄어들지 못했다. 대신 욕을 엄청 먹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파울 먹어서 몸 사리게 된다고 말했다.

드디어 4쿼터. 시윤이 퍽 비장한 얼굴로 동규에게 덩크슛을 부탁했고 동규는 속으로는 꽤 기뻤지만 겉으로는 ‘어쩔 수 없지.’라며 마지못해 해 준다는 티를 팍팍 냈다.

4쿼터 공격의 시작은 청팀. 동규의 위치는 골대 밑이 아닌 코트 정중앙. 끝날 때가 돼서야 본격적으로 나온 동규에게 하림도 놀랐다. 플래카드의 힘이 이렇게 클 줄 알았으면 일찌감치 꺼냈을 걸 조금 후회도 됐다. 그러면서도 칭찬해 주니까 바로 튀어나오는 동규가 귀여워 보이니 하림은 스스로가 심각한 중증이라는 걸 새삼 또 느꼈다.

심판의 휘슬이 불리는 순간 동규는 공을 들고 있던 우민에게 돌진했다. 그런 동규를 세 명이 뒤늦게 막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민이 같은 팀 다른 선수에게 공을 패스했으나 동규가 가로채 청팀 골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오래 뛰는 건 자신 없어도 아주 짧은 시간 빠르게 달리는 건 할 수 있었다.

“야 김동규 막아!”

“다 모여!”

“김동규 엄호해!”

백팀과 청팀이 동규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동규는 자기 팀이고 상대 팀이고 제 앞에 있으면 힘으로 밀거나 뒤로 빠지면서 덩크슛을 할 수 있는 거리를 가늠했다. 시윤이 골대에 붙어 있는 우민을 몸으로 막아 동규가 어서 뛰어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

시윤과 눈이 마주친 동규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허벅지에 힘을 줘 뛰어올랐다. 청팀 두 명이 동규를 뒤따라 뛰었으나 동규가 훨씬 높은 데다 온 힘을 실어 농구공을 꽂아 넣으려는 동규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덩크! 덩크슛! 덩크슛이이!

공을 링 안에 때려 넣으며 링에 매달려 볼까 하던 동규는 순간 링에 매달렸다간 부러질 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덩크슛을 성공시키고 아주 찰나의 순간만 링을 잡고 있다가 땅에 내려왔다.

“와아!”

덩크슛이 골대망을 통과하자 시윤이 떨어지는 공을 잡아 백팀 슈터에게 던졌다. 그 공을 우민이 겨우 잡아 백팀 골대로 달려갔다. 동규는 백팀 골대를 사수하기 위해 달렸다. 멋지게 한 골 넣었으니 오늘 밥값도, 플래카드 값도 다 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골대 아래에서 실점을 내지 않는 것뿐이었다.

“김동규! 잘 했어! 이제 거기에 딱 박혀 있어라!”

백팀 선수 하나가 김동규에게 엄지를 지켜 올렸다. 동규는 고개를 끄덕이고 본격적으로 몸싸움에 돌입했다. 그러다보니 덩크슛 넣은 뒤로는 실점만 안 내게 적당히 할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코트 여기저기를 뛰고 말았다. 숨도 찼고 땀도 났고 심장도 빠르게 팔딱거렸다.

승리를 결정짓는 마지막 쿼터에서 백팀이 흐름을 완전히 가져왔다. 점수 차가 꽤 나던 것을 빠르게 줄였고 청팀은 스피드를 앞세워 마냥 당하지도 않았다. 두 팀 다 열심히 뛰어다니며 골이 자주 들어가서 그런지 코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도 보고 있는 학생들도 완전 불타올랐다. 골대 아래에만 있겠다던 동규는 몸싸움이 치열해질 때마다 3점 슛 라인을 박차고 나갔다.

“자기가 골 못 넣겠으면 무조건 장준한테 패스해! 야 장준! 일단 되든 안 되든 던져! 김동규 골대! 리바운드!”

백팀이 2점 뒤처진 상태에서 백팀은 3점 슛으로 역전승을 노렸다. 청팀도 굳히기를 하기 위해 슈터에게 자꾸 공을 보냈다. 몇 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슈터들이 3점 슛을 자꾸 쏘아댔다. 마지막 쿼터라 그런지 슈터들도 체력이 많이 떨어져 골 성공률이 현저히 떨어졌고 그 말은 동규가 양 골대를 수시로 왔다 갔다거리면서 리바운드를 잡아야만 했단 뜻이기도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동규는 양쪽 골대 아래에서 리바운드를 필사적으로 사수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덜 뛰어다닌 것도 있지만 타고난 체력이나 폐활량이 엄청났기 때문에 네 쿼터 내내 코트를 전속력으로 뛰어다녔어도 동규는 그렇게 지치지 않았을 것이다.

“김동규!”

30초 남짓 남겨 두고 동규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하지만 동규는 빠르게 일어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대로 뛰어갔다.

“야 괜찮아?”

“응.”

“얼마 안 남았어!”

“피 나는 거 아니야?”

“시발! 김동규 좀만 참아!”

백팀 선수들이 동규에게 한마디씩 건네며 달렸다. 그걸 모조리 본 하림은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친 동규가 골대 아래에서 몸싸움을 하는 걸 보고 백팀 벤치로 달려갔다.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빨리 타임아웃 외치고 선수부터 교체해!”

백팀 벤치에 청팀인 하림이 와서 백팀 선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걸 말리는 동안 백팀의 마지막 공격이 이어졌다.

“아무나 잡은 사람이 넣어!”

하림을 말리러 청팀 응원단 친구들이 몰려왔다. 하림은 멱살은 놓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려 코트를 바라보았다.

-삐이이익! 102대 103으로 백티이임 승!

하림에게 멱살을 잡혀 있던 백팀 선수가 하림의 손을 밀치고 코트로 달려갔다.

“와씨 진짜 존나 재밌었다.”

청팀 응원단 중 한 명이 감상평을 읊으며 박수를 쳤다. 다른 친구는 하림의 등을 두드리며 자리로 가자고 보챘다.

“너는 왜 여기까지 튀어 와서 행패야.”

“사람이 넘어졌는데 그냥 보고만 있으니까 그렇지.”

“네가 부랄친구랑 존나 세기의 참우정, 김동규 팔불출인 건 알겠는데 뭐 어디 까진 곳도 없고 지금도 잘만 서 있구만 뭘.”

“그건 모르는 거지. 발 삐었는데 일부러 참고 있는 거면 어떡하라고.”

“돌았나. 김동규가? 저 덩치에 삐끗했으면 발목 아작 났거나 존나 삐어서 쩔뚝였겠지.”

“저기요, 서하림 씨. 지금 입고 있는 옷 색이 하얀색인지 파란색인지 좀 봐 보세요. 우리 지금 졌다고요.”

“나도 알아.”

동규가 넘어져서 다친 건 다친 대로 속상하고 우리 팀이 진 건 진 대로 속상해서 하림은 옆에 따라 걷는 친구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김동규를 지가 낳았지. 딸이야, 딸.”

“악! 아파 시발놈아!”

“아프라고 때렸어, 시발놈아. 쟤네 농구 왜 이렇게 잘해? 밥 먹고 농구만 했대?”

“그럼 이제 밥 먹고 축구만 한 서하림 실력 기대해 봐도 되냐.”

“승리곡 부를 준비나 해.”

“오올.”

“아 미친 서하림 힘 존나 세. 어깨 부러졌다 지금.”

“뭐래냐.”

청팀 응원단 자리로 돌아온 하림은 응원단 친구들과 얘기는 하면서도 눈은 동규에게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동규는 백팀 응원석에 90도로 인사를 하고 박수를 받고, 주장인 시윤을 따라 어색하게 세리머니를 했다. 싫다는 애 억지로 참여시킨 하늘에게 향했던 미움이 싹 가셨다. 뒷머리 긁고 있는 동규를 보고 있자니 귀찮다 싫다 늘어놔도 막상 하니 저렇게 잘 하고 즐거워하는 걸 왜 작년에는 좀 더 못 밀어붙였나 조금 아쉽기도 했다.

“야 서함 너 이제 슬슬 준비하래. 축구팀 모인다고.”

하림의 친구인 건우가 뒤에서 내려왔다. 들고 있던 막대 풍선이 터져 응원단에게 다시 받으러 온 거였다.

“어, 알아.”

“농구 진 게 그렇게 억울해?”

“응.”

“아주 백팀 애들을 뚫어져라 보네.”

“어. 지금 전투력 상승 중.”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림은 동규가 언제쯤 자길 바라볼지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뒤통수가 따가울 법도 한데 동규는 어색한 자세로 친구들에게 질문 폭탄 세례를 받는 듯 보였다.

“완전 영웅이네 영웅. 김동규 저렇게 농구 잘하는지 다들 처음 알았나봄.”

“어.”

“근데 뭐, 처음은 아니지. 연습 때도 잘한다고 얘기 돌았잖아.”

“응.”

드디어 동규가 친구들에게서 벗어났다. 종일 지정석이나 다름없던 계단 맨 위로 올라간 동규가 자리에 앉으려다 하림을 발견했다.

“나도 듣기만 했는데 눈으로 보니까 역시 농구는 키가 다인 스포츠인 거 또 느낌.”

“응응.”

“뭐 봐?”

동규가 하림에게 잘 하란 의미로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하림은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취고는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 세리머니 연습해?”

“넌 알 거 없어.”

“뭐야, 뭔데.”

“그냥, 세리머니 연습.”

“야 근데 서함 너 오늘 끝나고 바쁘지.”

“아마?”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중요한 거 아니면 전화나 메시지로 해.”

“아니 그러기엔 좀…… 내, 내일은?”

“바빠. 나 간다.”

“어어. 잘 하고 와.”

하림은 청팀 천막에 모여 축구팀과 함께 여학생들의 피구를 관람했다. 밥만 먹고 피구 연습했다는 하늘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피구는 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백팀은 연달아 이긴 승리에 도취되어, 청팀은 곧 시작될 축구가 이어 달리기를 제외하고 남은 마지막 경기라 양 팀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댔다.

하림은 축구화 끈을 다시 한 번 단단히 묶은 뒤 천막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백팀 쪽을 보았다. 천막을 보고 있던 건지 바로 동규와 눈이 마주쳐 손을 흔들었다. 동규는 혹시 몰라 주변을 한 번 살펴본 뒤 살짝만 손을 들어 조금만 흔들었다.

“귀여워.”

하림은 동규에게 들리지도 않을 말을 조용히 뱉어 놓고 천막 안쪽으로 돌아왔다.

농구에 피구까지 다 진 것도 승부욕이 자극됐지만 하림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된 것처럼 은밀하게 저를 응원해 준 동규 때문에 운동장을 날아다녔다. 이 날 하림이 넣은 골만 네 골이었다. 개인 등장 곡부터 ‘Lazenca, Save Us’를 들고 와 백팀을 기죽이더니 골은 골대로 넣고 공 따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백팀 선수들은 빠른 속도로 뛰어다니는 하림을 보면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재미없게 끝나 버린 축구는 청팀의 승리였다. 하림은 이겨 놓고도 근성 없는 백팀 선수들 때문에 찝찝했다.

“어디 가?”

“백팀에.”

“왜?”

건우와 친구들이 하림을 붙잡았다.

“나 이제 할 거 다 해서. 놀러.”

“너 이어 달리기 나간다지 않음?”

“한다고 했다가 뺐어.”

“헐. 왜?”

“그냥. 쉬려고.”

“백팀 가서?”

“어.”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낸 하림이 계단을 내려갔다.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된 아이스박스를 열어 찬 음료수 두 캔을 꺼내 들었다. 손으로 잡았다가 너무 차가워 티셔츠를 바구니처럼 잡고 거기에 음료수 캔을 담았다. 친구들은 살짝 드러난 하림의 탄탄한 복근에 부럽단 소리를 늘어놓았고 하림은 웃기만 하면서 빠르게 걸었다.

동규는 청팀 쪽에서 벗어나 제 쪽으로 걸어오는 하림을 발견했다. 처음엔 그냥 자리를 옮기나 보다 하고 별생각 없이 보고 있었는데, 점점 자신이 앉아 있는 곳과 가까워지고 있어 벌떡 일어나 하림에게 다가갔다.

“여기 와도 돼?”

“일단 차가우니까 이거 좀 받아 줘.”

동규는 하림이 가져온 음료수를 두 개 다 잡았다. 시원한 게 갑자기 목이 말라왔다.

“여기 오면 뭐. 어차피 다 같은 학교 학생인데 알 반가.”

“그래도.”

“헐, 너 무릎 아까 이거 넘어져서 이런 거지!”

피가 나는 건 아니지만 조금 까지고 발갛게 달아오른 무릎에 하림이 동규의 손에서 캔 하나를 낚아챘다. 하림은 쭈그리고 앉아 차가운 캔을 동규의 무릎에 대었다.

“차, 차가워.”

“쓸려서 부었나 봐.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고 약을 바르지 왜 그냥 있었어?”

“피도 안 났고 별로 안 아파.”

“거짓말. 누가 봐도 아파 보이잖아…….”

멀거니 서 있던 동규는 하림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제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싫었다. 바닥 더러운데.

“됐어. 이제 다 나았어.”

동규는 하림의 겨드랑이를 손에 넣어 쑥 들어 올렸다.

“약 가져올게.”

“괜찮…….”

좀 전까지도 운동장을 그렇게 뛰었으면서 지치지도 않는지 하림이 빛의 속도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 버렸다.

양손 가득 밴드에 폼밴드에 약에 붕대에 온갖 것들을 들고 온 하림이 동규보고 자리가 어디냐고 물었다. 동규는 제일 위쪽 계단 아무 데나 남는 곳에 앉았다.

“솔직하게 말해.”

“응.”

“아파, 안 아파.”

“안…….”

하림이 무서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픈 줄 알았는데 사실 아팠어.”

여전히 하림은 화가 단단히 난 얼굴이다.

“……따끔따끔하고.”

“거봐. 다리 세워봐.”

하림은 쭉 뻗었던 다리 하나를 세운 동규 때문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동규가 하복 체육복 바지를 입은 탓에 허벅지 안쪽이 보였다. 하림은 동규의 속살에 눈을 떼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서하림?”

아무것도 못 본 척 동규의 설명을 따라 솜에 소독약을 묻혀 동규의 붉은 무릎을 닦았다. 그리고 거의 새것인 연고를 반이나 짜 덕지덕지 바르고 거즈를 올렸다. 붕대까지 감으려고 하기에 동규가 하림의 서툰 손을 잡았다. 이대로 가다간 깁스까지 두를 기세였다.

“……뭐야. 왜.”

“이 정도로 가벼운 건 약도 안 발라도 돼. 폼밴드 붙여 줘.”

“그, 그래도 많이 아플 텐데.”

“서하림 손 약손이라 아까 다 나았어. 음료수 캔 대줬을 때.”

하림이 들고 있던 붕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하림은 심장이 거세게 뛰어 왔다. 하림이 충격 먹은 걸 모르는 동규는 떨어진 붕대가 굴러가는 걸 잡아 다시 돌돌 말았다.

“흙 묻었는데 다시 못 쓰겠지?”

“…….”

“진짜로 괜찮아. 의사 선생님 아들이라 그런가, 약손 같아.”

“뭐라는…… 거야. 엄마가 갑, 자기 왜 나와.”

하림이 폼밴드를 붙일 수 있도록 동규는 제 무릎을 가득 덮은 연고를 닦아 냈다. 얼마나 많이 발랐는지, 닦는 데에만 휴지를 세 번이나 뜯어야 했다. 폼밴드를 상처 난 곳 크기에 맞춰 잘라 붙여야 되지만 당황한 하림은 손만 한 폼밴드를 그냥 통으로 뜯어 동규의 무릎에 붙였다.

“…….”

동규는 무릎을 가득 덮은 폼밴드를 보면서 무릎을 굽히기도, 펴기도 불편해졌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떼고 싶지는 않았다. 집에 가자마자 뗄지언정 지금은 하림이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올, 김동규 완전 잘 보이는 VIP석인데. 운동장뷰석.”

가져온 약과 밴드, 붕대들을 죄다 한쪽으로 밀어 놓은 하림은 이제야 제대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그게 뭐야.”

“호텔 가면 오션뷰 있잖아. 여긴 운동장뷰지.”

제일 윗칸 계단에 하림이 앉아 있었지만 백팀 제일 아래 계단까지 학생들이 하림의 얘기를 하느라 웅성거렸다. 동규는 그런 백팀 친구들도 신경 쓰이고 태평하게 음료수 캔이나 따고 있는 하림도 신경 쓰였다.

“아.”

“…….”

“김동규 너 왜 이겼어.”

“어?”

“이기는 건 우리 팀이라고 그랬잖아.”

“아…… 미안.”

스타트건이 발사되고 이어 달리기가 시작됐다.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그게 왜 미안한데.”

분명 주변이 시끄러운데, 소리를 지르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하림의 목소리가 귀에 박혀 오는 건 무슨 자연의 조화인지 동규는 알 수 없었다.

“우리 팀이 이겨……서?”

하림 역시 응원 소리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동규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소리가 살짝 묻히다 보니 동규가 하는 말을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 동규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바보냐. 그냥 장난으로 왜 이길 정도로 잘했냐고 한 건데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뭐가 돼.”

“아…… 미안.”

“또 또.”

“아 미, 아…….”

동규는 하림의 시선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제 눈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살짝 아래쪽에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게 어디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동규 역시 하림이 하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림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점점 학생들의 응원 소리가 커져만 갔다.

“나 참. 그러니까 작년에 같은 반이었을 때 내 말 듣고 참여했어야지. 올해는 이게 뭐야.”

“미, 아니. 어…….”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할 뻔하는 동규 때문에 하림은 웃음이 나왔다.

“바보야. 잘했다고. 잘해도 너어어무 잘했다고.”

모양 좋은 입술이 벌어지며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동규는 괜히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거기 보지 말고 나 봐 봐.”

동규는 뭘 훔쳐 본 것도 아닌데 하림의 말에 깜작 놀라 시선을 더 아래로 내렸다.

“잘했다는데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

“아니 나는.”

“덩크슛 딱 넣는데 진짜 반하는 줄.”

“……어?”

동규는 잘못 들었나 싶어 하림과 눈을 마주쳤다. 하림은 살짝 웃고 있었지만 진중한 얼굴이었다.

“반했다고.”

“…….”

“멋있어서.”

마침 또 누군가 달리다가 역전을 한 것인지 앉아 있던 학생들이 크게 함성을 질렀다. 몇몇은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동규는 마음이 너무 울렁거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조용한 곳에 있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지금은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워서 뭔가를 생각하기에 힘들었고 정신 사나웠다.

하림은 흔들리는 눈동자의 동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동규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하림은 지금 세상에 저와 동규만 핀 조명을 받으며 특별해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토록 시끄러운 운동장 한복판에서 심장이 녹아내릴 것처럼 두근거리는 건 오로지 둘뿐일 테니까.

“……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농구 하면, 해 볼, 할게…….”

겨우겨우 단어를 짜 맞춰 입을 뗀 동규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흐렸다. 하림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만약에 김동규 다음에 또 뭐든 농구 한다 그러면 응원 가야지. 아 맞다. 플래카드 가져가.”

“가져가라고?”

“농규왕 그거 네 거야. 나는 누구랑은 다르게 직접 만든 거니까 기념으로. 너 진짜 죽을 것처럼 뛰어다니더라.”

“나도 그렇게 열심히 할 생각은…… 없었어. 네가 열심히 하라고…… 근데 하다 보니까 좀 재밌고 한번 시동 걸리니까 몸에서도, 아 그냥 네가 이렇게 얘기해 줄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해서 멋있는 모습 더 보여줄걸…….”

“뭐라고? 헐. 야, 역전하겠다!”

혼잣말하듯 작게 얘기하는 동규의 말을 하림은 듣지 못했다. 대신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어 달리기를 보기 위해 일어나려다가 동규의 팔을 잡아끌어 같이 일어났다.

사방이 하얀 티셔츠인 곳에서 하림 홀로 청팀 이기라며 소리쳤다. 주변에 있는 몇몇 친구들이 그런 하림을 둘아보며 당황스런 눈빛을 보냈지만 하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동규는 이 재밌는 상황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괜히 크게 웃었다간 하림이 왜 웃냐고 뭐가 웃기냐고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묻는대도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이 즐거운 순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아직, 반했다는 하림의 말이 귀에서 간지럽게 굴며 떨어지지도 않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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