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10화 (20/53)

10

-이인삼각 달리기와 팔씨름 경기가 있겠습니다. 이인삼각에 출전하는 청팀 선수, 백팀 선수 앞으로 나와 주세요. 팔씨름 남학생부 청팀선수, 백팀선수, 팔씨름 여학생부 청팀 선수, 백팀 선수는 앞으로 나와 주세요.

스피커에서 제발 들리지 않길 바랐던 팔씨름부 선수 출전 내용이 흘러나왔다. 동규는 못 들은 척 계속 앉아만 있었지만 슬프게도 동규는 백팀 팔씨름 선수 중 하나였다. 앉아 있는 백팀 학생들 중 팔씨름과 이인삼각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하나둘 일어나 앞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동규는 엉덩이 쪽에 뭐가 묻어 있는 양 아예 현실을 부정했다.

“야 김동규 뭐 해! 빨리 나가!”

“휴대폰 잃어버렸어.”

“주머니에 보이는 그 직사각형 실루엣은 뭔데.”

“그러니까 휴대폰에 끼고 있던 이어폰이…….”

“사 줄 테니까 일단 좀 나가!”

-2학년 4반 백팀 김동규 학생, 2학년 4반 백팀 김동규 학생 빨리 나오세요.

“거봐.”

동규는 나가기 싫어 열심히 버텼지만 세 명의 남학생이 양팔을 잡아끌고 등을 억지로 밀어 대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구나 싶고 서하늘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3월 말에 체육 대회 선수 선발 얘기 나눌 때 하늘이 큰 키랑 덩치 뒀다 뭐 하냐고 동규를 억지로 팔씨름과 줄다리기에 밀어 넣었다. 동규는 바로 손을 들고 안 하겠다고 열 번도 넘게 말했지만 하늘이 절대 안 된다고 왁왁대는 탓에 어영부영 이름이 적혔다.

다음 날 반장에게 이름을 빼 달라고 몰래 얘기했다가 한 시간 지난 뒤 하늘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동규는 하림에게 달려가 이를까 하다가 겨우 참았던 걸 떠올렸다. 진짜 하기 싫어 죽겠다.

줄다리기는 많은 인원이 하는 거고 농구야 엄청난 스피드로 진행되는 팀 경기라 골 넣는 에이스 선수들이 주목 받을 테니 눈 딱 감고 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동규는 골대 아래에서만 있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하는 김에 골대 아래에서 리바운드 싸움 멋지게 몇 번 해서 하림에게 멋진 모습 보여 주면 그게 참여의 의의였다.

그렇게 농구는 겨우 마음을 다잡고 참여할 이유를 만들었지만 팔씨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히 가져다 붙일 이유가 없었다. 화려한 것도 아니고 작년 체육 대회 생각해 보면 손쉽게 이길 것 같은 데다가 하림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도 뭐 어떻게 자세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동규는 반티 오른쪽 소매를 돌돌 말아 올려 팔 근육이 다 드러날 수 있도록 했다. 눈이 좋은 애니까 보이긴 하겠지.

“대진표 보고 줄 서라.”

도망도 못 갈 거, 답은 하나였다. 1초 컷으로 승부 보고 빠르게 경기를 끝내 버리는 것만이 답이다.

동규는 누가 붙든 시작 소리가 선생님의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상대 남학생의 팔을 다 눌러 버렸다. 엄청난 속도였다. 다른 남학생들이 비슷비슷한 힘으로 시간을 끄는 게 짜증 날 정도였다. 여학생부에서 고군분투 중인 하늘을 몇 번이나 째려보며 동규는 속을 겨우 삭였다.

“팔씨름 남학생부 경기, 백팀 김동규 승!”

결승전이 1초 만에 싱겁게 끝난 남학생부 경기보다 여학생부의 경기를 모두가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았다. 동규는 대기 중인 하늘의 뒤통수만 열심히 째려보고 자리로 돌아왔다.

백팀 학생들이 동규를 환영해 주긴 했는데 때마침 여학생부 경기 4강전에서 역전승이 터지면서 동규는 학생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오히려 친구들의 안중에도 보이지 않는 게 더 좋아 동규는 제일 뒤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오올, 김동규 팔씨름 1등!”

“와, 김규 형님 팔뚝 보소. 지금까지도 안 깝쳤지만 앞으로도 더 깝치지 말아야겠다.”

서준과 지호는 10반이라 동규와 반은 달랐지만 짝수반이라 같은 백팀이었다. 2년 연속으로 같은 반이 되어서인지 두 친구는 작년보다 훨씬 친한 사이가 되었다.

다른 모두가 여학생부 경기에 집중한 와중에 두 친구만 동규의 우승을 축하해 줬다. 지호와 서준이 우승자의 팔이라며 동규의 팔을 주물럭거렸다.

“……재미없었어.”

동규는 돌돌 말아 놨던 소매를 빠르게 내렸다.

“그야말로 추풍낙엽이더라. 배현우는 그으렇게 맨날 운동을 한다느니 뭘 한다느니 뭐를 몇 키로를 들었다느니 자랑자랑을 해 대더니 김규 형님한테 1초 컷인 거 존나 꼬시다.”

“홍태영도. 근데 걔는 우리학교 비공식 허벅지씨름 우승자인데 음…… 김규형님 보니까 허벅지도 쉽게 발릴 것 같군요.”

작년에 셋이 다닐 땐 지호도 서준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올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동규는 제 친구들이 갑자기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팔씨름 결승전이나 봐.”

“네네, 그래야죠 형님.”

“서하림이 김규 부끄럼쟁이랬어.”

“엑, 초딩도 아니고 그게 뭐냐?”

“내 말이 그 말이다. 와! 서하늘 드디어 결승.”

“4강에서 힘 너무 빼서 나는 질 것 같다. 너무 치열한 준결승이었어.”

“그건 모르는 일임. 소년만화처럼 ‘친구들아 도와줘!’ 하면서 안에 숨겨져 있던 힘이 나올 수도 있어.”

“아, 나는 비관적이라 봅니다. 김동규 캐스터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오른팔 스트레칭을 하던 중에 난데없이 들어온 질문에 동규는 어깨만 씰룩 했다.

“네, 제 말이랑 같다고 하네요.”

“저게 어떻게 너랑 같은 거란 뜻이야. 누가 봐도 모르겠단 건데.”

“아 몰라. 됐고, 음료수 내기 할래?”

“콜. 나는 이긴다.”

“난 진다. 김규 너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

“빨리 골라! 이제 시작한다!”

지는 것에 걸었다가 하늘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까 생각도 하기 싫어 동규는 하늘이 이기는 쪽에 걸었다. 그리고 음료수는 하늘이 지는 것에 걸었던 서준이 샀다.

줄다리기 여학생부 경기가 끝날 무렵 스피커에서 남학생부 선수들 준비하란 공지가 나왔다.

“김규 행님 이렇게 쉴 시간이 어디 있어요! 어서 가세요. 이제 줄다리기 시간입니다요.”

“야 그 이상한 말투는 뭐임.”

“조폭 말투.”

“시간입니‘다요’가? 내시 아니고?”

“죽고 싶냐.”

얼마 쉬지도 못한 것 같은데 벌써 줄다리기였다. 이건 많은 사람이 참여해 다수의 힘으로 승패가 결정 나는 게임이라 누구 하나가 튀지도 않고 개인의 존재가 지워질 수 있어 팔씨름과 농구에 비하면 굉장히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다. 동규는 잠시 밍기적대다가 일어났다. 응원해 주는 지호와 서준과는 하이파이브도 했다.

선생님이 나눠 주는 목장갑을 끼며 동규는 벌써부터 하루치 에너지를 다 쓴 느낌을 받았다. 하루가 길어도 너무 길다. 체감 시간은 벌써 오후 7시 20분쯤인데.

“여학생부는 키 순으로 서지만 남학생부는 아니거든. 몸무게 순으로 앞이 가벼운 사람 뒤가 무서운 사람이 서는 거예요. 빨리 설 수 있지?”

동규는 끝에서 네 번째에 섰다. 동규의 뒤로는 살만 많이 쪄 100kg이 훌쩍 넘는 남학생들뿐이었다. 앞에 서 있는 남학생들도 비슷했다. 뒤쪽에 선 학생들 중 유일하게 비만이 아닌 동규는 상대적으로 슬림해 보였다.

제일 자주 붙어 다니는 하림은 큰 키에 보기 좋게 예쁜 몸이고 하늘이나 지호는 한참 작고, 그나마 키도 크고 살집도 있는 서준이 있긴 해도 동규 옆에 서면 둘이 비슷해 보일 뿐이지 동규가 보기에도 스스로가 왜소하단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끼어 있으니 자기가 슬림해 보이는, 봐도 봐도 신기한 광경에 동규는 고개를 빼 몇 번이나 앞뒤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청팀 응원단이라 계단 제일 앞에 앉아 있는 하림과 눈이 마주쳤다. 꽤 멀리 있는 것인데도 하림이 그 시선을 놓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동규에게 양손을 붕붕 흔들었다. 동규가 손을 들어 막 흔들려던 찰나, 옆에 앉아 있던 청팀 응원단원 하나가 그런 하림의 팔을 붙잡아 앉혔다. 하림은 잡히지 않은 팔을 더 열심히 흔들다가 결국 등짝을 맞았다.

지금 약간 서하림이랑 나랑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

“……헐.”

진짜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아닐까. 겨우 체육 대회 팀 갈린 거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린 자신이 어이도 없고 한심해졌다.

그런데 한 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하림과 제가 정말로 세기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동규는 갑자기 땀이 났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하림이 알면 얼마나 비웃을지 걱정도 됐다. 하림이 손 흔들어 줄 때만 해도 혼자서도 청팀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모든 의욕이 떨어졌다.

-줄다리기 남학생부! 첫 번째 판! 자, 준비!

운동장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준비 신호가 떨어졌다. 남학생들이 쭈그리고 앉아 줄을 잡았다.

탕!

동규는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냥 지구나 망했으면 좋겠단 생각이라 줄을 잡고 대충 뒤로 누웠다. 백팀의 전략은 첫 판은 뒤로 누워 버티기, 두 번째 판은 반은 눕고 반은 당기기였다. 세 번째 판까지 간다면 둘 중에 잘 먹힌 방법으로 하는 것이었다.

뒤로 누운 동규는 힘을 쓰는 게 아니라 그냥 줄에 매달려 있는 느낌으로 줄만 잡았다. 아예 힘을 쓰지 않으면 티가 너무 나니까 적당히 힘은 줬다.

첫 판은 청팀의 승리였다. 줄을 내려놓은 동규는 고개를 돌려 청팀 응원단을 바라보았다. 하림이 치어리더가 들 법한 파란색의 풍성한 반짝이 응원 수술을 흔들며 청팀 구호를 외치는 중이었다.

저렇게 즐거워하는데 이번에는 백팀이 이겨서 1대1로 마지막 판까지 가면 좋으려나. 이번에는 좀 힘을 써 봐야겠다. 한 명 더 힘쓴다고 뭐가 크게 바뀌나 싶었지만 안 해 보는 것보단 나았고 지든 이기든 하림과 오늘의 줄다리기 얘기를 할 때 거짓말을 할 구석은 남기고 싶지 않다.

두 번째 판에서 펼쳐지는 반반 전략은 앞쪽 남학생은 눕고 뒤쪽 남학생들은 당기는 전략이었다. 동규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무거운 사람들이 뒤에서 누워 있어야 하지 않냐고 속으로만 격하게 항의했다.

-줄다리기 남학생부, 두 번째 판! 준비!

동규는 줄을 잡고 청팀 응원단을 빠르게 보고 고개를 돌렸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힘써야지.

탕!

청팀은 이번 판에서 다 같이 드러눕는 전략을 펼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팀이 하나둘에 맞춰 당길수록 청팀이 질질 끌려왔다. 동규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입술을 질끈 깨물고 줄을 당겼다. 허리 코어 운동을 해 온 게 이 날을 위해서인가 싶을 정도로 허리에 힘을 꽉 주었다.

-백팀, 승!

청팀이 첫 번째 판에서 당기는 전략으로 이겼고 백팀도 두 번째 판에서 당기는 전략으로 이겼기 때문에 두 팀이 긴급 비상 회의에 들어갔다. 분명 세 번째 판 역시 당기는 전략을 쓸 텐데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청팀 백팀, 경기 속행합니다!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회의 결과로 두 팀은 힘겨루기를 하게 됐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백팀과 청팀의 대결에서 벗어나 남학생들의 자존심 싸움이 됐다. 백팀이고 청팀이고 여기서 지면 다들 대가리 박자느니 머리를 깎자느니 하는 격한 말이 튀어나왔지만 동규는 하등 쓸데없는 사내새끼들의 자존심 싸움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 진다고 세상 끝나는 것도 아닌데 힘겨루기 하나 이기겠다고 비장해지는 꼴이 우스웠다.

자존심보다는 사랑을 위해 힘을 쓰는 제 자신이 훨씬 낭만적이고 멋져보였다. Power of love라고 영어에서도 쓰는 걸 보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역사가 증명하고 인류가 보증하는 힘이 바로 사랑인 것인…….

-줄다리기 남학생부! 마지막 판! 준비!

바로 사랑인…… 됐다. 5초만 시간이 더 있어도 생각을 마무리했을 텐데 김이 새 버렸다. 동규는 줄을 다시 꽉 잡고 고개를 양쪽으로 꺾어 마지막 판이 시작되는 순간을 기다렸다.

탕!

양 팀에서 엄청난 함성 소리가 들리며 남학생들의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고작 줄다리기가 힘겨루기가 되어서 그런지 학생들 사이에서 욕도 튀어나왔다. 심판이 비속어 사용으로 경고를 줘도 소용이 없었다.

비등비등하던 힘겨루기의 균형이 깨진 건 시작하고 몇 초 뒤였다. 줄 가운데에 묶여 있는 하얀 끈이 점점 왼쪽으로 이동했다. 백팀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청팀 학생들은 구호에 맞춰 응원을 이어 갔다.

동규는 농구 생각도 못 하고 힘을 쏟아부었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져야 하림이 기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이미 백팀 쪽으로 승기가 잡힌 가운데 자기 혼자 힘을 뺀다고 결과는 바뀌진 않을 것 같았지만.

-줄다리기! 마지막! 대망의! 세 번째 판! 5초 셉니다! 5! 4! 3! 2! 1! 백팀 승!

백팀과 청팀 둘 다 심판의 말이 끝나자마자 줄을 놓고 운동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끌려온 청팀 몇은 줄을 잡고 있는 탓에 넘어지기도 했다. 동규는 운동장에 드러누웠다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하림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림은 친구들과 함께 ‘괜찮아! 괜찮아!’를 외치며 응원 도구를 열심히 흔들었다. 멀어서 표정은 잘 안 보이지만 서서 열심히 파란 반짝이를 흔드는 걸 보니 상심한 것 같진 않다.

1분의 쉬는 시간을 주겠다고 공지가 나왔지만 1분은 너무 짧았다. 줄다리기에 참여한 남학생들이 비틀거리며 각 팀 계단으로 흩어졌다. 동규는 아예 제일 위쪽 계단에 올라가 누웠다. 서준과 지호가 누워 있는 동규에게 아이스 팩과 타월, 찬 음료를 대접했다.

“살면서 김동규 그렇게 열정적인 거 처음 본 듯.”

“대충대충 하는 척만 할 줄 알았더니.”

“왜 그렇게 열심히 했어?”

“이거 핑계로 농구 안 하려고?”

“……몰라. 힘드니까 얘기는 조금 이따가…….”

서준과 지호는 근육도 많아 봤자 힘 좀 쥐어짜 내고 끝이냐며 둘이서만 쑥덕거렸다.

“아 근데 우리 이제 곧 개인전 하고 밥 먹으러 가야 돼.”

“……벌써?”

“지금은 아니고 박 터트리기랑 기타 등등 몇 개 더 하고. 그리고 어차피 밥 여자애들 먼저 먹잖아.”

“개인전 그냥 패스하고 싶은데.”

“안 될걸.”

믿고 싶지 않아 동규는 아이스타월로 얼굴을 덮었다. 누워서 반쯤 자던 동규는 개인전 시간이 되자 밍기적거리며 일어나 모든 개인전 종목들을 슬렁슬렁 끝내고 참가용 확인 도장만 받았다. 50m달리기는 기록이 14초대였고 제기차기 기록은 1개, 투호 던지기는 0개였다.

투호 던지기를 끝내며 도장 세 개를 모은 동규는 급식실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손등을 잠시 쳐다봤다. 특별한 것 없이 그저 학교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는 의미 없는 도장 세 개.

저와 다르게 하림은 분명 귀여운 도장 하나와 학교 도장 두 개를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50m달리기는 5명이 한 조를 이루어 같이 달리는데 거기서 1, 2, 3등을 한 학생에게는 귀여운 도장을 찍어 주기 때문이었다.

아마 1등은 토끼, 2등은 사자, 3등은 말. 나머지는 확실하진 않은데 1등은 확실했다. 작년에 하림은 50m에서 1등을 받아 토끼를 받았다. 올해도 1등 하고 토끼 도장을 받지 않았을까. 하림은 50m에 6초 80대를 유지중이다.

“야. 찾았잖아.”

손등 위로 도장이 두 개 찍힌 하얀 손이 불쑥 나타났다. 동규는 너무 놀라 머리카락이 다 서는 줄 알았다.

“도장 다 모아 놓고 왜 여기서 서 있어?”

“그냥.”

“난 50m달리기 하러 가야돼.”

“아직 안 했어?”

“너 찾느라고.”

“……나?”

하림은 동규의 손등을 살펴보며 귀여운 동물 도장이 없는 걸 확인했다.

“이거 봐라. 너 이번에도 50m 걸어갔지?”

작년엔 동규가 50m달리기에서 거의 걷다시피 했던 걸 놀리는 말이었다. 빠르든 느리든 도장만 받으면 될 일이라 대충 했던 거였는데.

“안 걸었어. 뛰었어.”

“몇 초 나왔는데?”

“몰라.”

“모르긴 뭘 몰라. 도착하면 도장 찍어 주면서 선생님이 알려 주는데.”

“……까먹었어.”

“일단 빨리 와 봐. 나도 얼른 뛰고 밥 먹으러 가게.”

하림은 동규를 도착 지점에 세워두고 50m달리기 줄로 가 섰다. 도착지점에서 도장을 찍어 주는 선생님이 왜 여기 서 있냐고 동규에게 물었지만 동규는 자기도 이유를 몰라 선생님에게 설명을 해 드릴 수가 없었다.

곧이어 하림의 조 차례가 됐다. 하림이 팔다리를 풀고 자세를 잡았다. 아, 풍선 살걸. 동규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아 텅 빈 주머니를 괜히 뒤적거렸다.

선생님이 들고 있던 팔을 내리자 다섯 명의 학생들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하림이 빛과 같이 달려 1등으로 도착했다.

“야 김동, 규! 이리 와.”

하림이 숨을 할딱거리면서 동규를 불렀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헉헉거리고 있는 걸 보니 동규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속속들이 도착한 학생들에게 다가가 빠르게 도장을 찍어 줬다.

“서하림! 도장 받아 가라!”

“야! 빨, 리 오라고!”

동규는 도대체 하림이 왜 자길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라니까 쭈뼛거리며 하림에게 붙었다. 하림이 도장 담당 선생님 앞에 섰다.

“6초 81. 잘 뛰었네.”

“완전 진하게, 나오, 게, 꾹! 오래 눌러 주세요.”

원래대로라면 짧게 찰칵 소리가 나면서 찍혀야 할 도장이 차아아아알칵 소리를 내며 찍혔다. 하림은 도장이 손등에서 떨어지는 순간 동규의 손을 잡아 손등끼리 맞댔다.

“……뭐해?”

“손등 뽀뽀?”

하림의 단어 선택에 동규가 말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한술 더 떠 하림이 손등을 좌우로 움직여 아직 마르지 않은 도장 잉크가 동규의 손등에 마저 묻을 수 있게 했다.

“이, 이걸 왜…… 왜 하는데?”

“선생님 얘 몇 초 나왔어요?”

“14초 거의 끝. 말이 14초지 15초다 15초. 김동규보다 느리게 뛴 사람이 없어.”

“허얼!”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뜬 하림이 동규를 바라보았다.

“뛰었다며!”

“……느리게.”

동규는 하림의 양손에 갇혀 있는 오른손을 빼고 싶어 죽을 맛이었다. 아니, 빼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대로 평생 하림의 두 손 사이에 껴 있었으면 좋겠다. 맨날 딸만 치던 손이 이렇게 호강을 하는구나. 아, 오늘 이제 손 씻지 말고 이대로 집에 가서 밤새…….

“자, 끝!”

하림이 손을 떼자 동규의 손등에는 희미하게나마 하림의 토끼 도장과 똑같은 모양이 찍혀 있었다.

“아 이거 역시 이렇게밖엔 안 나오네. 어쩔 수 없지. 가자, 밥 먹으러.”

졸지에 도장이 4개가 된 동규가 어리둥절해하며 하림을 따라 걸었다. 하림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달고 저를 따라오는 동규 때문에 웃음이 났지만 입술을 말아 물며 참았다.

“1등 도장 한 번 받아 보라고 내 거 나눠 준 거야. 됐지.”

“응?”

“왜 이랬냐고 다시 물어보지 왜 물어보지도 못하고 끙끙거려.”

“그게, 아까 물어봤는데 대답 안 해 줘서 그냥 큰 뜻이 있는 건가 하고…….”

“야 체육 대회 도장에 뜻이 있어 봤자 무슨 큰 뜻이 있어.”

하림이 웃으며 동규를 놀려댔다. 동규는 하림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그 거리를 유지하려 했지만 하림이 계속 따라와 “무슨 뜻? 결재 서류라도 돼?”라든지 “직인 도장인가? 토끼 도장이니까 토끼 왕국의 옥새?”라며 급식실 건물에 도착하고 나서도 계속 동규를 괴롭혔다.

점심을 먹고 동규와 하림은 화장실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의 사물함으로 찢어졌다. 칫솔에 치약을 묻힌 동규는 양치를 하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하림의 손등과 닿아 희미하게 찍힌 토끼 도장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걸었더니 발걸음이 느려져 이미 도착했을 땐 하림은 양치를 끝낸 상태였고 동규도 양치 거품이 입 안 가득 차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

“그냥.”

“컵 필요해?”

“아니. 그냥 손으로.”

양치 거품을 뱉은 동규는 무의식중에 손을 씻으려 물을 묻혔다가 손을 거뒀다.

“컵 필요해.”

“손으로 한다며.”

“손 씻기 싫어서.”

“뭐?”

“아니, 손에 물 묻히기 싫어서.”

“아 뭐야. 더러워.”

“아니…… 씻을 거야.”

“씻기 싫다며 세균 덩어리야. 내 컵 만지지도 마.”

동규에게서 멀리 떨어진 하림은 겉으로는 더럽다고 질색 팔색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손 씻기 싫다는 동규의 마음이 뭔지 그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한 참이었다. 도장 지워질까 봐 저러는 거다. 더럽다는 말에 손을 씻으면서도 최대한 손등엔 물도 닿지 않게 하려고 물을 살짝 틀어 씻는 걸 보고는 100% 확신했다.

“바보야. 그렇게 씻으면 세균이 하나도 안 씻겨지지.”

하림은 동규의 옆에 서서 컵과 칫솔을 내려놓고 반쯤만 열려 있던 수도꼭지 손잡이를 끝까지 위로 올렸다.

“대한소아청소년의사회에서 공식 지정한 손 닦는 방법 알려 줄 테니까 잘 기억하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씻어. 알겠지.”

“응.”

그런데 물비누를 저렇게 많이 짜는 게 의사회의 공식 정량인가? 저러면 지구 환경에도 안 좋을 것 같은데.

“일단 이건 내가 너 알려 준다고 비누 2인분으로 많이 했지만 그냥 거품 충분히 낼 수 있을 만큼만 짜서.”

하림은 물비누를 가득 담은 손에 물을 조금 받은 뒤 손등으로 물을 껐다. 그리고 양손을 비벼 거품을 한가득 만들었다.

“손 줘 봐.”

하림이 거품을 나눠 주는 줄 알고 동규가 손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자 하림이 거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손으로 동규의 두 손을 모아 잡더니 동규의 손을 문지르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 첫 번째로는 손바닥. 이렇게, 우리가 보통 아는 것처럼 닦고 그 다음은 손가락 사이.”

예민한 손가락 사이로 하림의 매끈한 손가락이 들어왔다. 동규는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고 했지만 하림의 손가락이 동규를 놓아주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 하림의 손가락이 왔다 갔다 하며 여린 살을 자극했다. 동규는 손을 씻는 행위가 이토록 선정적이고 미칠 것 같은 행위였는지, 숨도 가빠 와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게 불가능했다. 손가락 사이의 살도 성감대가 될 수 있는 건가? 여기서 발기하면 서하림이랑 절교하는 건가? 이대로 손 씻다 속옷에 사정하면 노팬티로 농구 해야 돼?

“그리고 약간 주먹 쥐듯 한 다음에 손바닥을 긁어 줘. 그러면 손톱 사이에 있는 세균들도 없앨 수 있어.”

“아, 잠깐…….”

하림은 동규가 죽어 가는 소리를 내며 참는 걸 알고도 모르는 척했다. 다리를 꼬아 대는 걸 보니 자극이 엄청나긴 엄청난가 보다. 귀엽게.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이렇게 하면.”

하림이 동규의 엄지손가락을 쥐고 뚜껑을 따듯 가볍게 돌렸다. 거기서 동규는 참지 못하고 손을 뺐다.

“뭐야. 이제 마지막으로 손목 닦는 거 알려 주려고 했는데.”

“이거 진짜 손 닦는, 소아청소년과에서 아, 알려 주는 방법 맞아?”

“맞아. 검색해 봐.”

“너, 너무 좀 청소년들이 하기에는 야한 거 같은데.”

단순히 자극이 아니라 도대체 어디서 야함을 느낀 건지 하림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 뒷걸음질 친 동규에게 바짝 다가갔다.

점심을 거의 끝에 먹어 화장실에 아무도 없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동규는 여기에 몇 명만 더 있었다간 방금 전의 제 말에 괜한 주목을 받았겠구나 싶었다.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뭐가 야한 건데. 그냥 손가락을 안에, 헐.”

아, 망할. 좆 됐다. 하림의 놀란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동규는 죽고 싶어졌다.

“와……. 김동규, 일상생활 가능해?”

“아니…….”

다리 사이로 피가 몰리던 게 차갑게 식어 갔다. 동규는 다급하게 변명 할 말을 찾았지만 횡설수설이라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당황스럽고 당혹감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하림의 앞에서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그, 그게, 나는 그게 아니라…….”

“일단 손부터 씻어. 우리 이제 나가야 돼.”

“아니, 서하림 그게…….”

“짜아식. 멍만 때리고 밥 먹는 것만 좋아해 가지고 어? 순진한 줄로만 알았더니 이게 속으로 어?”

변태 새끼라고 욕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시뮬레이션 다 돌렸는데 하림이 옆구리를 찌르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놀리기만 할 뿐이라 동규는 하나님 예수님 알라님 제우스 무슨 님 무슨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조금 충격적이야. 이게 엄마가 아들이 자위하는 거 알게 된 기분일까? 갑자기 우리 동규가 다 큰 거 같고 어른이 된 거 같고 그렇다.”

“뭐야. 엄마도 아니고.”

“하아…… 내 귀여운 친구가 사실은 멍 때리면서 온갖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런 생각 안 했어.”

“했잖아.”

“아니 그거는…….”

“나 그런 얘기 별로 안 좋아하니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생각으로만 해. 알겠지.”

“응. 알겠어.”

그런 생각 엄청 잘 한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하림을 데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사자가 알았다간 최소 사형이다.

“이제 농구 할 거잖아.”

“응.”

“대충대충 하면 죽는다.”

“응.”

“근데 이기는 건 우리야.”

“응.”

“야, 응이라고 하면 어떡해. 대충 하겠다는 얘기냐, 지금?”

“아니. 열심히 할게.”

“그래 좋아 그런 마인드.”

동규는 하림과 헤어져 칫솔을 정리한 뒤 운동장으로 내려왔다. 아직 2부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백팀과 청팀의 농구팀이 다 모여 있어 동규는 급하게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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