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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O는 FKMO와는 다르게 홈페이지 발표일 하루나 이틀 전에 최종 선발된 여섯 명에게 연락이 간다. 늦으면 하루라는데 천재지변이 있지 않는 한 이틀 전에 통보됐다. 그리고 하림은 조금 전 대한수학회에서 전화를 받았다.
-메일로 안내 자료 보내드리긴 할 테지만 전화상으로도 설명을 해 줘야 하는 거라 알려드릴게요.
“네.”
-다음 주 주말부터 7주간 매주 주말마다 주말 교육 이루어지고요. 그거 끝나면 매일매일 모여서 IMO 집중 교육 들어갑니다. 주말 교육이랑 집중 교육은 반드시 참여하셔야 하고 불가피하게 IMO에 참여하지 못 할 경우는 파이널에서 TST 본 최종 후보 학생들 있죠. 서하림 학생 포함한 열다섯 명. 그 학생들 중에서 성적순으로 제일 높은 학생이 대신 참여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메일 주소만 다시 한 번 확인해 볼게요. 메일 주소 어떻게 되시죠.
하림과 대한수학회 직원이 서로 하림의 메일 주소를 말해 주고 나서야 전화가 끊겼다. 하림은 음소거 함성을 발사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와. 진짜 대박. 심지어 오늘 개교기념일.”
신이 나서 내려오는 하림을 계단 앞에 선 아주머니가 반겼다.
“방금 막 점심 알려 주려고 올라가려 했는데 잘됐네요.”
식탁에 앉으려던 하림은 몸을 돌려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엎드리고 누워 동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하림아…….
뭐야. 자던 중인가? 하림아?
-왜…… 전화 했어.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잠에서 막 일어났는지 엄청 낮아졌다. 하림은 떨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하고 입을 뗐다. 하려던 말이 새하얗게 날아갔다가 겨우 돌아왔다.
“아, 어. 내가 깨웠……나 보다.”
-아니야. 일어나려고 그랬어.
난데없는 청각적인 충격에 하림이 허우적거리느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걸 모르는 동규는 하림에게서 말이 없자 진짜로 지금 일어나려고 했던 거 맞고 10분 전에 첫 번째 알람이 울렸다는 거짓말까지 쳤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잠이 깨 잠겨 있던 목소리가 풀어졌다.
-무슨 일인데? 나 잠 다 깼어.
“아, 그게…….”
무슨 일로 전화한 건지 기억이 돌아왔지만 하림은 심장이 너무 뛰어 혀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귓가에도 심장이 있는지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왜 그래.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고 하림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아, 진짜 얘는 왜 눈치도 없이 이렇게 훅훅 들어와.
“저……녁에 밥 같이 먹자고.”
-저녁?
“그, 나 그거 됐어. IMO 한국 대표.”
-와, 진짜? 축하해. 진짜 됐구나! 될 줄 알았어.
아주머니가 점심 준비 다 됐다며 하림을 데리러 왔지만 하림이 입모양으로 ‘10분만요’ 하고 아주머니를 물렸다.
“……자. 그럼 이제 100개의 아부 멘트를 들려줬으면 좋겠는데.”
-아.
“아아? 아아? 이 어이없는 반응은 설마 100개를 다 채우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때 얘기한 게 뻥이었다, 그 말?”
-아, 그게…….
“와…… 정말 실망입니다. 김해 김씨 가문이 낳은 곰돌이 김동규 씨.”
-그게 뭐야.
“뭐긴 뭐야. 나도 준비해 본 멘트.”
-그거 내가 했던 거잖아. 표절이야.
“저작권 등록 안 했으니까 상관없지.”
-어떻게…… 맞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가…….
“아무튼 저녁이나 같이 먹자. 축하 파티 해야지. 음. 샤브샤브 어때?”
-좋은데 샤브샤브 너무 비싸.
“내가 살게.”
-돈 많이 들어.
“나 돈 많아!”
-아는데 그게 중요한 게……. 나 말고 부모님이랑 저녁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
“엄마랑 아빠 오늘 병원 회식이래.”
-그러면 나도 돈 낼래.
“얼마 나올 줄 알고?”
-어디로 갈 건데?
“샤브샤브 맛있게 하는 데.”
-그러니까 그게 어디.
“말해도 모를걸.”
-그럼 그냥 너네 집에서 저녁 먹자.
“아 왜. 나는 둘이 먹, 아 김동규. 작년에 나 생일 파티 했던 곳 가자.”
-거기 예약밖에 안 받는다며.
“그럼 할아버지한테 부탁해 보고 다시 전화 줄게. 세수하고 조금만 기다려.”
하림은 식탁에 앉아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에게 왜 거기에서 저녁 먹고 싶은지를 설명하다가 엄마보다 할아버지에게 먼저 알렸다는 걸 깨닫고 아차 싶었다. 이런 소식은 할아버지한테 제일 나중에 알려 줘야 하는 건데. 김동규랑 근사한 저녁 먹겠다고 스스로 정한 약속을 깨트리고 말았다. 아무튼 식당은 확보했다. 하림은 냉큼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야, 김동규.”
-응.
“오늘 저녁 테이블 남는대서 내 이름 대고 들어가면 된대.”
-진짜?
“진짜. 그럼 저녁 많이 먹게 점심 조금만 먹어.”
-응.
“이따 보자.”
-응, 점심 맛있게 먹어.
“너는 아침 맛있게 먹고.”
-아침이랑 점심 같이 먹을 거야.
“그래. 그럼 진짜 이따 봐.”
-응.
바로 전화 끊을 줄 알았는데 동규가 끊질 않아 하림도 종료를 누르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저기.
“응.”
-진짜…… 엄청 많이 매우 대박 진짜 축하해. 아인슈타인도 너보단 못할 거야.
“뭐야.”
-많이 축하하는 건 진심인데 말로 표현이 쉽지가 않네.
“아, 뭐야 그게.”
-나도 몰라.
“네, 김동규표 진실된 빅 축하 충분히 잘 전달됐고요. 저는 지금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중입니다.”
귓가에 동규가 작게 웃어 나는 숨소리가 들렸다.
“나 지금 식탁에 앉았어. 진짜로 밥 먹어야 돼. 예쁘게 하고 7시에 봐.”
-응. 밥 맛있게 먹어.
종료 버튼을 누르고 밥을 먹는 동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새로 산 운동화 저녁에 개시해야지.
“무슨 좋은 일 있나 봐요.”
“아 맞다! 아주머니 저 IMO 됐어요! 엄마한테 바로 전화한다는 걸 깜빡했네.”
하림은 엄마와 아빠, 이모님, 과외 선생님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다. 전화가 끝났을 땐 국도 밥도 다 식어 있어 아주머니가 새로 떠 주었다.
아, 여섯 시간 언제 지나가.
침대에 가로로 누운 하림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낮잠이라도 자야 하나 싶었다. 뭐 하지. 영화 볼까. 근데 지금은 무슨 영화를 봐도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다큐멘터리나 예능도. 게임이나 할까. 근데 원래 게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뭘 할지 감도 안 온다. 진짜 잠이라도 자야 되나.
“아.”
이따 신을 운동화랑 맞는 옷을 머릿속으로 코디해 보면 시간이 빨리 가지 않을까. 그런데 사 놓고 아직 신지도 않은 새 운동화가 한두 개여야지. 하림은 벌떡 일어나 드레스 룸 신발장을 열었다. 사 놓은 뒤로 건들지도 않은 운동화 상자들을 죄다 꺼냈다.
“뭐 신고 가지.”
전화 끊었을 때만 해도 제일 최근인 지난주에 산 운동화를 신고 가야지 했는데 이렇게 펼쳐 놓고 보니 다 예뻐서 뭘 신을지 고민이 됐다.
“돼쓰. 이거다.”
신발 하나만 고르는 데에만 한 시간 반이 소요됐다. 오늘의 선택에서 탈락한 신발들을 상자 안에 넣는 것도 일이었다.
다음 순서는 입을 옷이었다. 옷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하림은 상의 하나 하의 하나 고르는 것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직 학생인 데다가 동규가 워낙 집돌이라 밖에서 보는 일이 거의 없어서 간만에 사복 입고 밖에서 만나려니까 이 옷도 마음에 안 들고 저것도 마음에 안 들고 그랬다. 우유부단, 결정 장애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 제 모습이 낯설었다.
옷 겨우 고르고 씻고 나왔을 땐 거의 6시였다. 하림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옷도 입고 머리도 만졌다. 향수 뿌리려다가 밥만 먹는 건데 이거까진 좀 너무 그런가 싶어서 내려놨다.
“어, 뭐야.”
동규에게 메시지 온 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자 굉장히 낯선 이름으로 부재중이 와 있었다. ‘권예준’.
하림은 전화를 걸까 말까 하다가 그냥 걸었다. 진짜 떨어져서 축하 전화를 준 거든 얘도 합격해서 확인차 건 거든 어쨌든 하림은 한국 대표로 선발됐기 때문에 누구처럼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원래 1등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은 여유와 관용이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냐. 진짜로 축하해 주려고 했던 건 아닐 것 같은데.”
-자존심 존나 상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 IMO 포기하면 안 되냐?
“뭐라고?”
-부탁할게. 나 7등이고 네가 포기하면 내가 IMO 나가.
“선발 떨어진 사람은 아직 TST 점수도 등수도 비공개인데 네가 7등인 건 어떻게 알아.”
-아는 수가 있어.
“그게 뭐냐고. 나도 지금 내 점수랑 등수밖에 모르는 걸 떨어진 네가 어떻게 아는데.”
-아빠한테…… 부탁해서 알아냈어. 6시까지 전화가 안 와서.
IMO 한국대표 선발 전화는 보통 학생들 점심시간 맞춰 오고 휴대폰이 꺼져 있으면 평균적으로 학교 수업이 다 끝나는 4시 이후에 온다. 아무리 늦어도 6시 안에는 온다는 얘기다.
지금 시간은 6시 27분이었고 개인 사업을 하는 예준의 아빠가 어떻게 대한수학회를 회유해 예준의 등수를 알았는지는 몰라도 하림은 예준이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것부터가 자존심에 심하게 금이 갔다.
“내가 왜. 그렇게 대단한 아빠시면 1등부터 6등까지 다 알아다 주셨을 텐데, 아. 1등부터 차례로 전화 돌리는 중인 거지 지금.”
-…….
“거짓말이라도 맞다고 해. 지금 존나 욕 하고 싶은 거 참고 있는 거니까.”
-너는…….
“설마 나한테만 전화를 걸었다는 건 아니겠지. 왜. 나 빼고 다 특목고 애들이라? 나만 일반고라서? 아, 그래서 존나 만만하니까 이런 좆같은 전화를 걸었다 이 말?”
-솔직히 아니라고는 말 못 해.
“시발 새끼가, 전화 끊어.”
-잠깐만!
하림이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예준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하림은 거절했지만 전화가 또다시 왔다.
“차단한다.”
-차단하더라도 내 말 좀 다 듣고 해. 씨발 나는 지금 누구 좋으라고 이딴 전화하는 줄 알아?
“와 존나 부탁하는 입장이 욕하고 난리 났네.”
-하……. 욕 안 하면 되잖아.
“나 7시에 약속 있으니까 빨리 말해.”
-알겠어. 개소리 같아도 일단 끝까지 들어.
이게 끝까지 이래라 저래라 명령조네. 하림은 그냥 끊고 차단하려다가 10년 봐 온 미운 정으로 마지막 개소리를 들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다 들어 놓고 ‘응 알겠는데 싫어’ 하면 될 일이니까.
-후…… 첫 번째로. 너 과학고 아닌 거랑 비슷한 이유인데 너 물리학과 갈 거잖아. 나는 수학과 가서 응용 수학 할 거니까 미래의 수학자에게 수학올림피아드는 양보해.
“미래의 수학자란 사람이 물리학이랑 수학을 마치 경영과 무용처럼 아주 다르게 말하는 이 상황이 나는 존나 웃긴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아니 십, 물리올림피아드 있잖아. 거기나 나가지 왜 수학에서 이러고 있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의대 가기 좋게 과학고 가라 그래서 영재원 지원했는데 거기서 날 과학 영재가 아니라 수학 영재로 뽑은 걸 어떡하라고. 따질 거면 서울시 교육청 가서 따져.”
-아 알았어. 지금 잘잘못 따지자고 전화한 거 아니니까.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네.”
-아 진짜…… 안 가면 안 돼?
예준이 하는 모든 말들이 하나같이 비논리적인 얘기들뿐이다. 수학과 물리학이 칼로 자르듯 나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걸 모를 애도 아니다. 하림은 예준의 말에서 오류들을 잡아 내다 부질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출전을 포기해 달라는 이 상황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예준 자체가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부탁 좀 하자. 내가 진짜 거기 가고 싶어서 그래. 성공한 물리학자에게 IMO 참가 이력? 별거 아니야. 내년에 물리올림피아드 나가는 게 더 도움 되지.
“야. 말은 바로 하자. 수학 문제 하루 이틀 푼 거 아니잖아. 물리가 수식으로 써져 있지 뭐로 되어 있는데? 갈릴레이가 수학은 물리의 언어라고 했고 가우스가 수학과 과학의 관계를, 됐다. 우리 둘 다 아는 거 말해 봤자 입만 아파. 개소리 더 듣기 싫으니까 곱게 말할 때 여기서 끊고 없던 일로 해.”
-그냥,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냥 포기해 주면 죽냐? 속이 뒤틀려?
“이유가 그냥인데 어떻게 포기를 해. 너 같아도 그러겠어? 누가 너 때려서 맞았는데 왜 때렸냐고 물으니까 그냥이라 그러면 너는 ‘아 그냥 때린 거구나’ 하고 받아들여? 나 약속 있어서 나가야 된다고.”
-그 약속 취소하든 좀 미뤄 봐.
“야. 권예준.”
-시간 조금만 더 내줘.
“이게 부탁하는 사람 태도야? 끊어라, 그냥. 나는 들어줄 만큼 들어줬어.”
-씨발…… 알았어. 솔직하게 얘기할게. 하, 씨발…….
아무래도 제대로 얘기 꺼낼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하림은 동규에게 조금 늦는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 좀 늦어]
〈갑자기 일이 생겨서ㅠㅠ]
〈7시 안에는 출발할게]
[괜찮아〉
[천천히 와〉
기분 더러운 와중 예쁘게 답장이 와서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예준은 계속 씨발거리며 제대로 운을 떼지도 못하고 있었다. 토끼 같은 김동규가 예쁘게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하림은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열 셀 때까지 얘기 안 하면 진짜 끝이야. 하나.”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사고를 쳤어.
조금 떨리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하림은 예준의 이런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입학하자마자는 아니고 작년에……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때. 일단 중간고사부터 존나 말아먹었어. 성적이고 등수고…… 간신히 중간 언저리 나왔는데 중학교에서 잘하던 애들만 모였으니 각오하고 간 건데도 좀 힘들더라. 그래서 기말고사 때 커닝을 했어. 다는 아니고 딱 하나, 제일 하기 싫었던 화학2만.
“짧게 얘기해.”
물증이 없어 커닝을 걸리진 않았지만 학교에서 내신 8등급임에도 몇 등급이나 올려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것과 의대 가서 병원을 이어받으라는 엄마의 압박, 학벌콤플렉스가 있는 아빠의 잔소리 얘기까지 듣자 시간이 2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너도 할아버지 때문에 어릴 때부터 뭣도 모르고 의대 준비해서 잘 알 거 아니야. 근데 시발 나는 엄마고 아빠고 다 좆같아서 기말고사까지 망하니까 나를 인간 취급을 안 하잖아. 근데 올림피아드에서 상 받아 오는 건 옛날부터 그 사람들 자랑이라 이거라도 잘 되면 좋아하고 그랬어. 그래서 내가 만약에 IMO 나가게 되면 유학 보내 달라니까 알겠대. 그러겠대.
“그럼 올해는 아깝게 못 했으니까 내년에 가면 되겠네.”
-내가 그 때까지 1년을 더 부모님 얘길 들을 자신이 없어. 차라리 내신 성적이라도 좋아서 조기 졸업이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내신 쓰레기라 그것도 안 돼. 근데 엄마랑 아빠가 국내 대학은 무조건 S대 아니면 안 된다, 재수를 하든 삼수를 하든 무조건 S대다 이 지랄 해 대잖아. 웃긴 건 엄마도 S대 아니다. 나는 유학 가서 응용 수학 전공한 다음 금융회사 다니면서.
“핵심만 말해.”
-알았어, 시발……. 아무튼 그렇게 한 학기는 조졌지, 엄마랑 아빠는 좆같지, 작년에 자살 시도도 하려다가 죽기엔 겁이 나서 그건 또 못 했어.
“핵심만 말하라고.”
-너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닥 드러내고 얘길 하는데도 핵심 소리밖에 할 말이 없냐.
“짧게 핵심만 얘기하라고 세 번 말했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다 얘기한 게 누군데. 자살 이야기니 아빠 학벌 콤플렉스니 그런 것까지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아도 에둘러서 잘 얘기할 수 있잖아. 동정심이라도 기대한 것 같은데 내가 그런 거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하…… 씨발, 그럼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돼? 무릎이라고 꿇어 줘?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엎드려 절 받기도 싫어. 무슨 얘긴지는 알겠어. 왜 네가 나한테 이런 전화했는지도 알겠고.”
-그럼 포기한다고?
“아니. 생각을 좀 해 볼게. 근데 좋은 얘기는 기대 안 하는 게 좋을걸.”
-……알겠.
이 정도는 지금까지 권예준의 알고 싶지 않은 얘기를 길게 들은 값으로 쳐도 되겠지. 전화를 중간에 끊어 버린 하림은 아예 예준의 번호를 차단했다.
〈나 이제 나가!!!!!!!]
〈그리고 갑자기 고민 생겼어]
〈밥 맛있게 먹고 좀 들어줘]
[응 조심히 와〉
방을 나가기 전 거울을 한 번 보고 내려와서 신발 신을 때도 거울을 확인한 하림이 택시를 잡아탔다. 말 길어질 때마다 잘라먹은 덕분인지 동규에게 약속했던 30분보다는 빨리 출발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신나게 상상했었던 길은 동규를 만나러 가서인지 주황색의 택시도 명품 차였고 까만 아스팔트도 꽃길이었는데 이게 다 뭔지. 근심과 걱정으로 얼룩진 평범한 도로였다.
어떻게 정리를 해서 말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다 보니 약속 장소에는 금세 도착했다. 하림은 저 멀리서 보이는 인영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보통 사람들보다 키가 한참 커서 우뚝 솟아 있는 동규는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몰라도 땅을 보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좀 남았는데도 큰 덩치 덕에 동규가 잘 보였다.
“저 바보가 더운데 안에서 기다리지 더위도 잘 타는 게 왜 밖에서 기다려.”
신호등을 보니 아직도 빨간불이다. 하림은 다리를 빠르게 떨어 대다가 카드를 꺼냈다.
“그냥 여기서 내릴게요.”
기사가 카드를 돌려주는 걸 거의 뺏다시피 가져온 하림이 차에 내려 횡단보도에 섰다. 큰 길가도 아니고 살짝 외진 곳에 있는 레스토랑 건물 앞에 동규가 보인다. 여기서 보니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오른발 뒤꿈치로 땅을 콩콩 찍고 있었다. 그렇게 먼 거리도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지만 하림은 동규가 예쁘게 꾸미고 왔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아 꼭 그만큼 숨을 들이쉬어 동규의 이름을 불렀다.
“김동규!”
하림이 팔을 크게 흔드는 걸 발견한 동규가 손을 들어 작게 흔들었다.
“야! 왜 밖에 있어!”
초록불이 켜졌다. 하림은 좌우에 차가 멈추는 것을 빠르게 확인하고 건너편으로 뛰어갔다. 동규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하림은 심장이 쿵쿵거려 머리까지 울렸다. 아무리 큰 고민이 있어도, 그 어떤 고민이 있어도 동규에게 달려가는 순간만큼은 다른 무엇도 생각나지 않았다.
“시간도 많은데 걸어오지.”
“나는 좀 힘주고 나왔는데 너는 얼마나 예쁘게 하고 왔는지 검사하려고.”
하림의 말에 동규가 고개를 살짝 떨어뜨리며 뒷목을 잡았다. 동규의 귀가 살짝 붉어진 것을 본 하림이 기대에 찬 얼굴로 동규의 얼굴 구석구석을 훑었다.
손을 들어 동규의 머리도 만져 보았다. 뭘 바른 것 같진 않고 드라이를 새롭게 한 건지 머리가 좀 복슬복슬한 느낌이 났다. 하림이 그런 동규의 머리를 잠시 헤집으며 실실 웃었다.
“오올 머리 예쁜데.”
“머, 머리 망가져.”
“그러며느은.”
동규의 머리를 헝클인 하림이 놀고 있던 다른 한 손까지 사용해 동규의 머리를 다시 예쁘게 정리했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아까랑 똑같아졌어.”
하림의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규가 카메라를 켜 머리를 확인했다. 살면서 이렇게 외모에 신경 쓴 적이 없는데. 아니, 사실은 작년에 하림과 같은 반 되고 나서는 교실에서 하루 종일 하림을 만나니까 아침에 거울 보는 시간이 엄청나게 늘긴 했다.
늘긴 했는데 오늘은 하림이 예쁘게 하고 오라 그랬고,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둘이서만 축하로 저녁을 먹자고 하니까 옷장에 있는 옷을 다 꺼내서 방바닥이 전부 옷으로 엉망진창 됐고 왁스로 머리 좀 살짝 건드렸다가 영 이상하게 돼 버려서 다시 머리 감고 그리고 또…….
아무튼 그렇게 공들여서 한 머리였는데 하림이 죄다 헝클어트린 게 조금 속상했다. 열심히 꾸며 봤자 하림이 대충 추리닝 입은 것에 겨우 견줄 만할 정돈데 하필 또 하림은 머리도 연예인처럼 예쁘게 하고 옷도 자기랑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걸 입고 와서 눈도 못 떼게 만든다.
“나 배고파. 얼른 들어가자.”
자리에 앉은 하림이 동규의 몫까지 주문하고 난 뒤 팔짱을 끼고 퍽 진지한 얼굴을 했다. 동규는 자기가 뭔가 실수한 게 있나 싶어 괜히 눈동자만 굴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늘은 100점 만점에 99점 드립니다.”
줄 거면 100점 주지 왜 1점은 빼는 거지.
“……뭐야 갑자기.”
“예쁘다고. 학교고 집이고 교복 입은 것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까 좋네.”
“방학에 만날 땐 교복 안 입잖아.”
“음, 그러네. 그럼 이렇게 예쁘게 입고 만난 게 오랜만이라?”
“우리 학교는 교복 예쁜 편이잖아.”
“아, 뭐, 음, 그렇지.”
“생활복은 편하긴 해도 생긴 게 안 예뻐서 여름에도 네가 계속 하복 셔츠만 고집하는 게 우리 교복 예뻐서라고 그랬어.”
“내가…… 그랬나?”
“응. 조끼도 열심히 입잖아. 불편해서 그거 입는 애들 거의 없는데.”
“빵이나 더 먹어라 그냥.”
하림은 그냥 동규 앞에 빵을 밀어주었다. 교복이 예쁘다고 했었다는 말을 한 줄 까먹어서 물어본 게 아니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물어봤다. 생활복은 편하긴 하지만 좀 후줄근해 보이고 핏도 안 서서 하림은 여름에도 무조건 하복을 풀 세트로 입었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 데다가 학교가 덥지 않아 큰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체육 있는 날은 가끔씩 갈아입기 귀찮을 때만 종일 체육복 입다가 그대로 하교하고. 그런데 이것도 작년까지만 그러다가 올해는 또 꼬박꼬박 잘 갈아입는다.
“옷이 아무리 예뻐도 옷걸이가 좋고 비주얼이 좋아야지.”
사귀는 것도 아닌데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은 놈한테 대놓고 칭찬 늘어놔 봤자 아니라고 질색할 게 뻔해서 대충 둘러 둘러 말했다. 알아들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애피타이저인 트러플 머쉬룸 수프가 나왔다. 회색 머그컵에 담긴 수프 향에 하림이 식욕이 돋아 숟가락을 들었다. 맛이 너무 괜찮아서 눈이 크게 뜨일 정도였다. 하림이 수프를 손가락으로 연신 가리키며 동규보고도 얼른 먹으라고 재촉했다. 하림만 빤히 보던 동규가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떠먹으려다 다시 하림을 바라보았다.
“왜, 뭐 다른 거 시켜 줄까?”
“아니.”
“빨리 먹어 봐. 버섯 두 가지 들어갔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 향이 나면서 따로 안 놀지.”
“아까 네가 했던 말 있잖아.”
“아까?”
“옷이 예뻐도 옷걸이랑 비주얼이 좋아야 한다고.”
“아, 응.”
“…….”
“그게 뭐.”
동규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하림은 얘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싶어 심장이 거세게 펌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도 옷걸이랑 비주얼이 너무 좋으니까 예쁜 옷을 입고 와도 눈에 안 보여.”
이렇게 말하면 되나. 아까 하림이 했던 말을 아무리 되새김질해 봐도 칭찬을 해 준 것 같아 동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칭찬을 끌어 봤다.
“아, 옷이, 그, 네가 이상한 걸 입고 왔다는 게 아니라 옷 너무 예쁘고 잘 어울리는데 그냥…… 나도 밖에서 이렇게 만나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냥, 나도 좀 새롭고 좋고…… 좋아. 좋다고.”
동규는 온 힘을 다 쥐어짜 내 어떻게든 저도 하림보고 오늘 되게 예쁘다고, 멋지게 차려입고 왔다고 말해 보려 했지만 하림처럼 간단하고 쉽게 ‘예쁘다고.’ 같은 한마디를 하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하림이 했던 말을 빌려 겨우겨우 얘길 꺼낸 건데 자기가 말해 놓고도 너무 이상했다. 그냥 눈 딱 감고 ‘너도 예쁘다’고 할걸.
짧은 몇 초 동안 온갖 생각을 마친 동규는 수프를 떠 마시고 하림이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수프 감상평을 늘어놨다.
“이거 진짜 맛있다. 나 버섯 진짜 좋아하는데 이거 씹히는 버섯이랑 수프에서 느껴지는 버섯이랑 다른 거 같은데 아, 버섯 두 개 들어갔다 그랬지.”
자기가 아는 모든 요리 지식을 총동원해서 손바닥만 한 머그컵에 담긴 수프에 대해 어색한 감상을 늘어놓는 동규를 보며 하림은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혼이 났다.
잘생겼다거나 예쁘게 생겼다는 말은 아주 어린 태초의 기억부터 너무 많이 들어 이젠 감흥도 없었지만 동규가 해 주면, 동규가 해 줄 때마다 너무 좋아서 힘들고 괴로웠다. 그렇게 서툴 수가 없는데 이토록 강렬하게 심장을 쥐고 흔든다.
갑자기 땀이 날 정도로 더워진 하림이 얼음물을 한 컵 전부 비우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잠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에는 막 나온 메인을 보고 감탄한 동규가 또 뭐라고 뭐라고 열심히 얘기하는 게 들렸으나 솔직히 말해서 내용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둘이 처음 본 아홉 살부터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동규만 얘기하고 하림이 말이 없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림은 초등학교 시청각실에서 처음 만난 그날을 회상했다.
처음엔 6학년 형인 줄로만 알았는데 똑같은 2학년이래서 깜짝 놀랐었지.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서 서로 이름을 말해 주는데 첫날부터 얘기가 잘 통한다는 느낌이 딱 들었던 신기한 친구.
학원 하나 다니지 않고 그래서 남는 시간이 많고, 조용하고, 취미는 독서에 늘 뚱한 무표정을 유지하는 데다 생각이 많아 맹한 것 같지만 막상 얘기해 보면 투덜거리며 할 말은 다 하고. 순해서 은근히 싫단 소리도 잘 못 하고 다른 사람에게 워낙 무심해 눈치는 없지만 소심해서 겁은 많은 김동규.
같이 얘기할 때면 동규가 작게라도 반응하는 게 좋아 참 열심히 떠들었다. 잘 모르는 얘기라도 하림이 두 손 두 발 써 가며 얘기하면 동규가 눈을 반짝이거나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그러면 하림은 신나서 더 이야기를 하고. 다른 친구들에게는 한마디면 끝날 얘기를 동규에게는 서너 마디로 늘려 하게 되는 건 다반사고 동규가 하는 말들을 똑같이 따라 하며 되묻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 됐다.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이렇게 요리를 잘하니까 자기 레스토랑을 하고 있는 거겠지만…….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먹보들이 많았대. 그래서 이 좁은 나라에 맛집도 그렇게 많은 거라고, 치킨집만 해도 교회보다 많다고 하잖아.”
이렇게 김동규가 많이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있었나. 늘 말이 많은 건 내 역할이었는데. 김동규가 말을 잘 안 하는 만큼 내가 하면 평균이 맞춰진다는 느낌이었다.
“……아닌가. 아무튼 인류사는 식문화의 역사와도 관련이 굉장히 깊어서 전에 무슨 제목인지 생각은 안 나는데…… 완전 고대 인류가 수렵 생활하면서 날것 먹는 거부터 현대까지 음식 문화 이야기에 대한 책 봤는데 엄청 재밌었어.”
동규는 동규대로 하림이 고민 있다고 한 게 걸려 그거 때문에 그런가 싶어 식사하는 동안이라도 걱정을 덜어준다고 열심히 떠들었다. 하림은 그런 동규의 얘기에 적당히 반응하며 속으로 동규 욕을 엄청 했다. 동규가 입 다물고 있을 때 옆에서 온갖 얘기들을 떠들어 대던 수많은 날들도 떠오르고,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저렇게 열심히 얘기하는 심리가 뭔지 하림이 제일 잘 알고 있어서 그랬다.
미친놈. 알고 말했다 해도 미친놈이지만 모르고 얘기한 거니까 더 미친놈이다. 그렇게 꿀 떨어지는 눈으로 엄청난 말을 해 놓고도 내 눈치나 살피고 있는 건 귀여운데 이럴 거면 그냥 용기 있게 고백을 하라고, 미친놈아.
예술하는 남자는 보통 괴팍하고 온갖 곳에서 예민 떠느라 삐쩍 말라서는 성적으로 문란한 데다가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고 꼬여 있고 그러지 않나. 얘는 순한 게 덩치는 커서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짓만 하고 말도 예쁜 말만 골라 하고 거기다가…….
“서하림, 디저트 고르래.”
“아. 네, 뭐 있다고요?”
노린 건 아니겠지만 동규가 한 번씩 훅 치고 들어올 때마다 하림은 동규의 손을 잡고 ‘너 나 좋아하지. 다 알아. 근데 나도 너 좋아해.’라는 고백을 하고 싶은 걸 꾹꾹 참는다.
하림이 고백해도 두 사람의 앞날은 핑크빛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여는 건 제가 아닌 동규였으면 했다. 그래서 열심히 참는 거다. 말도 없고 맹하고 생각 많고 소심한 주제에 툴툴거리긴 엄청 툴툴거리고 그러면서 삽질은 또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그런 동규가 많은 생각과 고뇌와 삽질의 끝에 제 입으로 고백을 하는 게 보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그 고백을 꺼내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단어들 중 어떤 걸 말해야 할지 신중하게 선택하고, 그렇게 고른 단어가 모인 동규의 언어는 또 얼마나 자신을 홀릴지 궁금했다. 다만 하림은 그 때까지 자신의 인내심이 한 톨이라도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갑자기 생긴 고민이라는 건 뭔데.”
디저트를 기다리며 동규가 물었다. 동규 기준 쉬지도 않고 떠드느라 조금 지친 목소리였다. 하림은 완전 까맣게 잊고 있던 예준의 일이 떠올라 갑자기 현실로 끌려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거 때문에 늦은 거지.”
“김동규 다 컸다. 이젠 독심술도 쓸 줄 아네.”
“……네가 다 했던 말인데.”
집에서 나오기 전 까지만 해도 그게 엄청 큰일처럼 느껴졌었다. 택시에서도 어떻게 동규에게 잘 설명할지만 생각했고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도 자존심 상해서 그냥 말하지 말까 싶기도 했다. 택시에서 동규 발견하자마자 다 잊어버렸지만. 그런데 다시 예준의 일을 떠올려도 아까만큼 가슴이 답답하거나 심각하게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나 진짜 아까 집에서 내 인생에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고 이러다 누구 죽일 수도 있겠다 싶은 큰 일이 있었거든.”
“무슨 일인데 도대체.”
“근데 너랑 이렇게 맛있는 거 먹고 있으니까 별거 아닌 일 같아졌어.”
“큰일이면 큰일이지 아닌 것 같아졌어는 또 뭐야. 왜, 집에 무슨 일 터졌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나 올림피아드 나가지 말까 봐.”
“……왜? 엄청 나가고 싶어 했잖아.”
하림이 시킨 디저트는 크림브륄레와 뜨거운 녹차. 이 녹차는 보성에서 올라온 녹차 잎으로 끓인 거였다. 말이 길어질 것 같진 않은데 좆같은 얘기는 맞으니까 정화하는 느낌으로 녹차를 한 입 마셨다.
“아 역시 녹차는 차로 먹어야 돼.”
하림과는 다르게 디저트도 네 개나 시킨 동규는 하림이 얘길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음음…….”
동규의 두 번째 디저트가 나왔을 때 하림이 머그컵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전에 너한테 얘기했던 권예준이라고 기억 나?”
“어릴 때 학원 같이 다녔다던 걔?”
“응. 얘기하면서 내가 욕도 좀 했었던 건?”
“기억 나.”
“IMO가 여섯 명이 출전이라고 했잖아. 만약 그 여섯 명 중에 누가 출전을 못 하게 되면 성적순으로 7등부터 차례로 대표자가 돼. 근데 예외적인 경우로 상위 여섯 명이랑 7등의 점수 차가 많이 나면 그냥 결원 안 채우기도 하는데 아무튼 지금은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7등이 권예준인데 걔가 나보고 자기가 나가고 싶으니까 포기해 달래.”
“……미친 거 아니야?”
“미쳤지. 미쳐도 한참 미쳤지.”
“포기할 거야? 아니지? 아니라고 해.”
“안 해.”
“씨발 새끼가, 죽고 싶나 봐. 걔 학교 어디야.”
“알면. 뭐 하게.”
“몰라.”
“아 잠깐만. 진정하고 마저 들어 봐.”
하림은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게 권예준이라고 했다간 다짜고짜 말도 없이 죽일 기세인 동규를 진정시켰다. 마저 들어 보란다고 동규는 험악했던 얼굴을 풀고 걱정 어린 눈빛으로 하림을 바라보았다. 의자도 끝에 걸터앉아 하림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걔 프라이버시라 자세히 말은 못 하겠는데 자존심도 엄청 세고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애가 자기 속 얘길 다 하더라고. 그리고 들어보니까 걔 상황이 올해가 아니면 기회가 없……대.”
“왜?”
“그건 말 못해. 그냥 내가 생각해도 그 정도 이유면 해 줄 만한 것 같아. 근데 아직 마음이 확실하게 기운 건 아니야.”
“나는 왜 네가 걔 때문에 그걸 포기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걔 너한테 열폭 심하게 한다면서. 그냥 무시하면 안 되는 거야?”
“음…….”
“할아버지한테는 뭐라고 말할 건데? 할아버지한테 국가 대표로 출전한다고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횐데…… 아직도 할아버지가 의대 포기 못 하셨다면서.”
“그래서 나도 좀 아까워.”
“나는…….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응.”
온갖 숫자와 처음 보는 기호들로 쓰인 수학 문제를 길고 긴 풀이 과정 끝에 답을 구하는 하림이 멋있다. 다른 거 하나도 안 하고 문제 풀고 있는 하림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세상에는 자신이 푼 문제와 아직 풀지 않은 문제만 있다는 패기도 좋고, 과학고 학생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는 자신감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실력까지 하림은 좋아하는 것을 할 때 반짝이다 못해 눈이 부셨다. 그래서 하림이 가만히 앉아 문제만 풀고 있는 걸 보기만 해도 굉장한 파워가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걸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 열린다는 축제에 하림이 얼마나 참여하고 싶어 하는지는 동규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얼마나 대단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당장 죽을병에 걸려 마지막 소원을 하림에게 부탁했다고 한들 동규에겐 그딴 새끼가 아파 죽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네가 얼마나…… 얼마나 오래 그걸 준비했는지 알고 엄마나 할아버지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네가 좋아서 네가 하고 싶어서 준비했다는 걸 아니까 차라리 걔가 오늘내일 길 가다 갑자기 벼락 맞고 죽어서 네가 그런 고민할 필요 자체가 없어졌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인데. 근데, 이건 내 마음이고. 네가…… 서하림 네가 생각했을 때 충분히 네가 그걸 포기해도 될 이유면, 그래서 네가 포기하면 그게 맞는 거겠지. 내가 아깝고 속상하고 화나는 것보다 네 선택을 더 믿어. 단순히 동정심이나 감정에 휩쓸려 바보 같은 선택할 거 아닌 사람인 거 아니까. 내 솔직한 생각은 이래.”
하림은 동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골똘히 동규의 말을 곱씹었다. 예상보다 더 격하게 화를 내 준 게 놀랍고 고맙다. 종종 당황하면 횡설수설하며 말이 길어지긴 해도 이런 식으로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동규가 화를 내 줘서, 하림은 놀랍게도 예준을 향해 있던 온갖 짜증과 분노와 상처받은 자존심이 전부 괜찮아졌다.
“지금 너무 속상한데 디저트 더 먹는다.”
“응. 디저트 도장 깨기 해 봐.”
동규가 디저트를 새로운 디저트를 두 개만 주문하려는데 하림이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라며 디저트를 모두 시켜 버렸다. 그리고 다시 머그컵을 매만지며 입을 닫았다.
그냥 이대로 포기하기엔 좀 아쉽고 아까우니까 발표는 일단 그대로 나가게 하자. 온갖 곳에 열등감만 그득그득한 불쌍한 새끼 하나 구제해 주는 셈 치지 뭐. 국제 무대 설 기회가 이번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아쉽긴 한데 걔가 못하는 다른 거 실컷 하면 되는 일이다.
“결정했어.”
“뭔데?”
“발표 다음 날 포기하는 거.”
“……그래.”
무엇보다 예준의 옆에는 김동규 같은 친구도 사람도 없는 게 제일 불쌍했다. 그러니까 1년을 버틸 자신이 없다는 거겠지. 만약 하림이 예준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1년 그까짓 거 동규랑 놀면서 충분히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학생 때 동규 덕분에 용길 얻어 전 과목 0점을 만들지 않았던가.
“공식적으로 내가 자격도 실력도 된다는 걸 남게 하고 포기하는 거랑 그냥 지금 포기하는 거랑은 천지 차이야. 그리고 내 목표는 고작 올림피아드가 아니라 더 높은 곳이라.”
“잘 생각했어. 근데 진짜 나는 네 선택 지지하거든. 근데, 진짜 지지하는데…….”
“내가 아무렇지 않은데 왜 네가 울어.”
“몰라.”
“진짜 김동규 울보야 울보.”
“원래 잘 안 우는데…… 너 때문이잖아.”
“모든 울보들은 우는 이유를 찾아.”
“……눈물 들어갔어.”
“잘 됐네.”
하림이 유쾌하게 웃으며 동규에게 티슈를 건넸다. 동규가 눈가를 가볍게 두드리며 고여 있던 눈물을 닦았다. 정말로, 진짜 원래는 잘 안 우는데. 태어나서 운 적 손에 꼽을 정도인데.
“하아. 마음 결정하니까 엄청 후련하다. 근데 걔가 한 얘기 중에 나는 물리학자 될 거고 자기는 수학자 될 거니까 수학올림피아드는 양보해라 뭐 그런 얘기가 있었거든.”
“응.”
“물리학과 수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학문이지만 심오한 세계니까 얘긴 안 하겠는데 물리올림피아드도 있단 말이야. 걔 얘기 듣는데 걔한테 화난 것도 있고 또 갑자기 할아버지 생각이 나면서 혈압이 딱 오르는 거야. 내가 그놈의 할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수학 말고 알아서 물리올림피아드 나가서 그것도 국제올림피아드 있는데 거기 가는 비행기 티켓을 진작 끊고도 남았을 걸 이 꼴이 지금 뭐야. 진짜 할아버지 죽기 전에 노벨상을 탄다, 내가. 너도 우리 할아버지 욕 많이 해. 욕 존나 드시고 오래오래 사시게.”
다음 날 대한수학회 홈페이지에 IMO 한국대표 최종 6인이 발표되었다. 하림은 딱 하루 모두의 축하를 받고 그다음 날 출전 포기 전화를 했다. 전화하기 전에는 엄마와 아빠에게는 예준의 상황을 반쯤만 솔직하게 털어놨다. 예준의 부모님과 하림의 부모님은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비밀 엄수를 조건으로 말한 거였다. 부모님은 예준의 개인적인 얘기를 듣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림의 결정이라면 따르겠단 의견이었다.
예준은 규정에 따라 IMO 한국대표에 합류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5월이 다 가도록 하림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림은 물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이게 뭐냐며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새끼라고 욕을 하다 예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세상 다시없을 만큼 상큼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하림이 뿌듯한 얼굴로 통화를 마친 것과 반대로 동규의 표정은 사뭇 험악했다.
“엿 먹이는 전화를 그렇게…… 그렇게 상냥하게 할 건 또 뭐야.”
“상냥하게? 비꼬는 말밖에 없었는데.”
그건 옆에서 통화를 같이 들은 동규도 잘 알고 있지만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목소리와 말투가 문제였다. 내용이 살벌했을 뿐 하림은 거의 예준과 사랑을 속삭이는 수준으로 통화를 나눴다. 예준을 이름으로만 불러 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걔가 한 번씩 하림의 말에 화를 낼 때면 ‘웅웅’ 하고 아기 대하듯 한 것도 싫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기는 싫어 입을 다물었다.
“왜. 질투 나?”
하림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능글맞게 물었다.
“……아니.”
“맞는 거 같은데. 야, 피하지 말고 나 똑바로 봐라.”
“…….”
“김동규, 나 보라고.”
“……나 바빠.”
“뻥치네. 어제도 신문사에서 전화 오니까 끊어 버린 게 누군데.”
하림이 IMO를 포기하고 난 뒤로 재밌는 일들이 일어났다. 한국은 매년 IMO에 참여하는 게 당연한 나라였다. 그래서인지 학생 대표 발표 자체는 지난 1년간 그랬듯 평범했다. 과학고 사이에 비특목고 출신 학생이 근 10년 만에 IMO에 나가게 된 것만 조금 집중되고 끝이었는데, 하림의 포기는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하림의 포기로 합류하게 된 학생이 다른 누구도 아닌 과학고 학생이라 더 그랬다.
단순히 개인적인 이유로 IMO를 포기했단 것이 밝혀지면서 하림을 일반고 학생이 아닌 ‘비(非)특목고’ 학생이라고 지칭했던 강남 최상위권 교육계의 병폐라느니 사교육 시장의 단면이라느니 특목고 위주의 엘리트주의 등등 온갖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당연히 하림 쪽으로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고 9시 뉴스에까지 이번 일이 나가 버려 안 그래도 많던 하림의 SNS 팔로워 숫자가 시시각각 올라갔다.
하림은 공중파 데뷔했다고 좋아했지만 동규는 이렇게까지 난리가 난 모든 원인을 하림이 잘생겨서라고 일축했다.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리 듣던 천재 학생이 과학고도 아닌 일반고에 다니고 있고, 충분히 실력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포기를 했다, 그런데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다음 달에 해외로 가는 한국 대표단보다 하림에게 몰리는 게 당연하다며 은근한 짜증을 며칠씩 부렸다.
토라진 게 이렇게 오래간 적은 처음이었지만 하림은 그 짜증을 아주 즐겁게 받아 주는 중이었다. 동규는 죽어도 질투라고 인정을 안 하고 있는 중이고. 자기는 그냥 하림을 겉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싫은 것뿐이란다.
“모르는 번호는 전화 안 받는다고 그래 놓고 왜 받아. 스팸이나 보이스피싱이나 해커들이 바이러스 뿌려 놓은 전화일 수도 있잖아.”
“헐 그러네. 그러면 세상에서 딱 한 명 김동규랑 연락하는 용으로 휴대폰 하나 더 사야겠다.”
동규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열을 식혀 보겠다고 입으로 숨을 쉬는데 하림이 쉬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그건 너랑만 쓰는 거니까 번호도 너 거만 저장해야지.”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혹시 모르잖아. 해커들이 바이러스 뿌려 놓은 전화를 받아서 휴대폰이 순식간에 랜섬웨어 걸리면? 노트북도 아니고 인터넷 선이랑 연결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치?”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아닌데.”
“맞는 거 같은데.”
“맞아.”
계절이 바뀔 즈음엔 어떤 곳에서 일반고 학생이 IMO 대표가 되는 것을 싫어하는 누군가가 하림에게 압박을 넣은 게 아니냐는 기사도 떴다. 대한수학회에서는 반박 기사를 냈다. 하림의 친구들은 더 유명인이 된 하림에게 이번을 기회로 장학퀴즈라도 나가 보라는 둥, 오디션 프로그램에 지원해 보라는 둥 반쯤 놀리면서 하림을 꼬드겼다.
하지만 그런 것에 별 관심 없는 하림은 IMO 한국 대표 최초 발표 이틀 후 있을 체육 대회가 더 중요했다. 하림이 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던 일도, 기사가 마구 쏟아지던 일도, 동규가 짜증을 내는 것도 모두 체육 대회로부터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