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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서하림 학생은 우수상뿐만 아니라 국제올림피아드 한국 대표 최종 후보 15인에 선발되었습니다. 15인 중에 비특목고 학생 중 유일하고 또 우리 세문 역사상 최초로 IMO에 참여하게 되어 교장 선생님으로서 무척 기특하고 뿌듯합니다. 국가 대표까진 마지막 단계인 최종 시험이 남아 있긴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서하림 학생이 우리 학교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려 줄 거라 당연히 믿고 있고, 서하림 학생의 FKMO 우수상 수상은 서울시를 대표하는 수과학 중점 학교로서 꾸준히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히는 이공계 전문가들의 모교가 되는 세문고등학교의 위상을…….
“아, 교장 선생님 말 더럽게 많네.”
하늘이 과자 부스러기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아침 조례 시간이었고 중간고사를 12일 앞둔 날이라 그런지 빔 프로젝터를 보고 있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하림은 교실이 아닌 시청각실에서 상을 받았음에도 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작년에 동규가 3학년들 제치고 장원에 차상을 받아 오면 학창 시절부터 문학 소년이던 자신의 과거로 아침 조례 시간을 다 잡아 먹던 교장이 올해는 하림 덕분에 체면이 서는 모양이었다.
“아직 국대 된 것도 아닌데 저러다 서하림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설마.”
“그러니까 진짜 만에 하나 해가 서쪽에서 뜨면. 이공계 전문가들의 모교라니 교장 선생님 지금 서하림뽕 치사량 같다. 이러다 IMO 가서 메달이라도 타 오면 현수막이라도 걸 기세네.”
“그거 불법…….”
“말이 그렇다고. 근데 진짜 미친 거지. 솔직히 나는 교장 선생님이 저렇게 뽕 존나 차도 좀 이해 간다. 서하림이 공부를 못하는데 올림피아드만 받아 오는 것도 아니고 내신은 내신대로 잘 받아, 모고는 모고대로 잘 봐. 그 와중에 과학고 애들 물리치고 상 턱턱 받아 오는데 예뻐 죽겠지. 학원 쌤 중에 유명한 사립고 고3 담임 출신 선생님 수업 들은 적 있는데 그 선생님이 얘기 해 준 거 있거든. 공립은 교장들이 정년퇴직 마무리를 사건 사고 없이 잘 하려고 말년에 가는 편이라서 적당히 동네 학부모들에게 평판만 나빠지지 않게끔 대학 보내면 되지만 사립은 아니래. 우리 학교 봐라. 재수생 포함이긴 한데 작년에도 의치한 토탈 130명 넘게 붙었잖아.”
“근데 서하림은 의대 안 간대. 물리학과 간다 그랬어.”
“그니까. 물리학과로 S대 쓰고 나머지는 다 의대 쓸 걸? 의대반 방과 후 안 듣잖아. 그리고 우리학교 S대 보내는 숫자도 자사고 전국 탑 쓰리임.”
동규는 지난달 말아먹은 네 개의 백일장을 떠올렸다. 결과는 장려 하나, 입상 하나. 장려나 입상 같은 건 초등학생 때만 몇 번 받아 봤지 초등학교 졸업한 이래로 그런 참가상 같은 상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 백일장 시즌 첫 달부터 장려와 입선이 고작이었고 당장 내일모레에 있는 백일장도 촉이 별로였다.
작정하고 쓰면 못 쓸 것도 없지만 이제는 뭘 쓴다는 데 재미도 못 느끼겠고 그러니 열심히 쓰고 생각도 안 들고 작년까지 어떻게 그렇게 잘 썼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차라리 이미 등단한 기성작가라면 이 마음 앓이를 실컷 써 보겠는데 고등학교 백일장에서 그런 걸 썼다간 심사위원들이 웃으며 원고지를 갈기갈기 찢고도 남았다.
어디다 풀지도 못하고 쌓이기만 하는 응어리가 슬슬 버겁다. 오늘이 제일 힘든 것 같아서 더 이상은 힘들 것도 없다고 생각해도 자고 일어나면 어제가 그나마 나았다. 매일 인터넷에 검색하는 건 ‘짝사랑 잘하는 법’, ‘짝사랑이 힘들어요’, ‘짝사랑 후유증’ 같은 것들이었다. 전국 짝사랑 인구가 천오백만이 아니라 삼천만쯤 되는 듯한 글들에 동규는 매일 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짝사랑 동료들의 고민 글을 읽었다.
짝사랑하거나 이별하면 거의 모든 노래가 다 자기 얘기 같다더니 동규는 그 말에 아주 깊이 통감했다. 노래를 잘 듣진 않지만 편집되어 올라오는 ‘라디오 짝사랑 사연 레전드 탑10’이라거나 SNS에 돌아다니는 ‘짝사랑 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공감한다는 노래들’, ‘짝사랑 히트곡 300’ 같은 걸 클릭했을 때 듣게 되는 신청곡과 하이라이트 메들리는 밤마다 동규의 베개를 적시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이런 가사를 썼지, 어떻게 이런 멜로디를 만들었지 하며 동규는 소리 없이 참 많이도 울었다.
“또 또 멍때린다.”
“생각을 좀.”
“무슨 생각.”
그걸 네가 왜 궁금해하냐는 뜻으로 쳐다봤다. 다른 학생들이라면 동규의 무표정에 도망가기 바빴겠지만 전혀 쫄지 않은 하늘이 뭔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냐고 책상을 발로 툭 쳤다. 그래도 동규는 그냥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기만 했다. 보통은 이러면 알아서 쫄아 그만두던데 서하늘은 그런 것도 없다.
“흠. 그래 벙어리야. 입에서 단내 나시길.”
누가 들어도 빈정 상해 비꼬는 어투지만 말만 이렇다. 하늘은 쉬는 시간이나 이동 수업 시간, 점심시간에 동규를 잘 챙기는 편이었다. 동규를 좋아해서 그런다기보다 하필 이 반에 개처럼 싸웠던 애랑 친한 애들이 많이 포진해 있어 올해는 친구 문제로 골머리 썩기 싫어 조용한 동규를 고른 거였다.
동규랑은 안 맞는 부분도 많고 답답한 구석이 많지만 초중고 다 같은 곳 다녀서 아예 모르는 애도 아니고 하림과 친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동규는 말로 친구 사이 이간질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질색은 해도 지랄 맞은 제 성정을 잘 맞춰 주기도 하고. 또 하림에게 이모저모 들은 게 있었는데 그거 말고도 개인적으로 하늘은 동규에게 궁금한 것도 있었다.
마지막 이유로는 몸 좋고 산적 같은 애 하나, 잘생기고 잘난 애 하나 달고 다니면 싸운 걔랑 걔 친구들에게 잘 지낸다고 보여 준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스스로 생각해도 매우 유치했지만 걔도 하늘에게 친구들 열 명씩 끌고 다니면서 ‘너 없어도 친구 많고 잘 지냄’이란 티를 내니 똑같이 친구빨로 받아 치는 방법밖엔 없다. 급식실 갈 때도 꾸역꾸역 열 명 다 데리고 다니는 게 한심했다. 하늘은 두 번 중 한 번은 하림과 동규랑 먹고 한 번은 작년에 친했던 친구들과 점심을 먹는다.
“야 똥똥규 일어나. 우리 영어 수준별 가야 돼.”
수업 준비종이 치자 하늘이 엎어져 있던 동규의 등을 백 번쯤 연타했다. 동규는 꾸물거리며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없어.”
“사물함에 있나 봄. 난 먼저 간다.”
어차피 하늘은 영어 A반이고 동규는 영어 C반이라 따로 가도 상관없다. 사물함 가기 정말 귀찮았지만 동규는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 이동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동규는 사물함에 교과서 말곤 다른 걸 넣어 놓지 않아 자물쇠를 걸어 두지 않았다. 가끔 친구들이 말도 없이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걸 넣어 두기도 하고.
오늘도 누군가 쿠키를 구워 예쁘게 포장해 넣어 놨다. 열여덟이나 먹고 마니또 게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매번 이렇게 몰래 주는 거지.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게. 동규는 교과서를 옆구리에 끼고 쿠키를 먹으며 영어 교실로 향했다.
요즘 학교 오는 재미도 별로였다. 4월이 되면서부터 하림은 밥 먹기 무섭게 축구 하러 나갔고 동규 역시 농구 연습 때문에 밥 먹고 나면 바로 체육관 직행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하림이 체육 대회 축구팀 친구들과 모여 전술을 짜느라 동규네 반으로 잘 놀러오지도 않았고 동규가 가도 교실에 없거나 축구 얘기로 바빠 보였다. 거기다 축제 준비로 동아리 친구들이랑은 따로 모이고.
동규는 농구팀 첫 연습 날부터 백팀 농구팀 주장인 시윤에게 슬쩍 귓속말을 했다.
“나는 농구 할 생각 하나도 없었는데 서하늘이 억지로 시킨 거 알지.”
“응.”
“근데 나 사실 농구 제대로 해 보는 건 처음이거든.”
“헐. 진짜?”
“어.”
가끔 하림과 아파트 산책길 걷다가 농구 골대 보이면 일대일로 몇 번 해 본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하림이 하자고 해서 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그런데…… 혹시 내가 연습하긴 할 건데 좀 괜찮게 하면 골대 아래에서 그냥 슛 쳐내고 리바운드만 잡고 그 정도만 하면…… 안 돼?”
“좀 억지긴 한데 연습 좀 해 보다가 잘하면 그렇게 해 줄게.”
골대를 사수하기 위해 동규는 평생 뛸 달리기를 농구 연습경기에서 했다. 팝스에서 셔틀런도 이렇게는 안 했다. 하림의 아파트 주민들만 이용 가능한 단지 내 피트니스에서도, 아빠 친구가 하는 피트니스 센터에서도 러닝머신은 쳐다도 안 봤는데 이렇게 뛰어다닐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나.
3일 정도는 감을 잡느라 허둥지둥했던 동규는 곧 바로 농구공을 따라 뛰며 덩크슛을 곧잘 넣었다. 리바운드 싸움에서도 밀리질 않았다.
주장인 시윤이 그러라고 하진 않았으나 농구팀 학생들은 동규가 골대 아래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경기해도 다 이긴 경기라며 동규가 멍을 때리고 있든 짝다리를 짚고 서 있든 신경을 안 썼다. 공이 아무리 높이 날아와도 점프해서 다 쳐내고 리바운드 싸움에서도 손쉽게 이겨 주니 다른 것까지 기대하지 않았다. 동규가 어디서 뭘 하든 골대만 사수하면 좋았다. 축구도 아닌데 졸지에 골키퍼가 되어 버린 동규가 농구를 엄청나게 잘 한다는 소식은 빠르게 하림의 귀까지 들어갔다.
“김도도동 김동규! 농구할 때 날아다닌다며.”
“……누가 그래?”
“박시윤이랑 농구팀 애들이.”
이번 주 내내 농구 골대 아래에서 하품이나 하면서 날아오는 공 쳐내고 리바운드 오면 공 잡아 던지고밖에 한 게 없는데 도대체 왜 그런 얘기가 도는 건지 동규는 잘 이해가 안 갔다. 백팀 농구부엔 동규 말고도 180cm 언저리인 남학생이 둘인가 셋이 있었고 걔네는 농구도 꽤 잘했다.
“잘…… 모르겠는데. 나는 그냥 골대에서 공만 막아. 귀찮아서 그거만 한다 그랬어.”
“그게 더 대단하다. 우리 가끔 1대1 할 때도 너랑 몸싸움은 진짜 못 하겠던데. 그래서 내가 다 3점 슛만 날렸었잖아. 그때도 너 농구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안 했으면 어쩔 뻔했냐. 작년에 나도 서하늘처럼 강경한 태도로 나가 볼걸.”
“아 그러지 마.”
“너랑 나랑 다른 팀이라고 대충대충 할 생각 하지 말고 열심히 해. 근데 이기는 건 우리 팀.”
제일 하기 싫었던 이유를 하림이 정확하게 짚어 내며 웃었지만 동규는 모른 척 말을 아꼈다. 진짜 서하림은 독심술을 하는 게 분명했다.
IMO 최종 시험이 치러지는 S대 상산수리과학관 앞에 빨간색 차 한 대가 섰다.
“여기가 129동 맞지.”
“나보단 엄마가 더 잘 알지. 엄마는 여기 학교 다녔잖아.”
“졸업한 지가 너무 오래돼서.”
“엄마 다닐 땐 이 건물 없었어?”
“의대는 여기 아니고 대학로에 있으니 엄마는 잘. 근데 있긴 있었을 거야. 익숙하네.”
“아하.”
“중간고사 끝난 주말인데 우리 하림이 쉬지도 못 하고 고생이네. 내리실까요, 아드님.”
“네네.”
하림은 엄마와 진한 포옹을 한 뒤 건물로 들어갔다.
시험을 치르는 강의실은 404호. 동규의 출석번호인 20404와 같아서 하림은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서라면 진짜로 1등 할지도 모르겠다. 강의실에 앉아 지정된 자리에 앉은 하림은 여기서도 동규랑 어떻게든 연관 짓는 스스로가 어이도 없고 갈 데까지 간 것 같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자꾸만 참아야했다.
“서하림 안녕!”
“안녕, 오랜만.”
“올, 서하림! 일반고 학생 중 유일하게 비행기 타냐!”
“아직 문제를 안 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요?”
사뭇 비장하고 진지한 분위기에서도 하림과 친한 학생들이 교실 곳곳에서 인사를 건넸다.
근데, 진짜 401, 402, 403호도 있는데 굳이 404호에서 시험을 보다니 꼭 동규가 응원을 해 주는 것 같고, 허무맹랑한 거 믿진 않지만 동규의 기운이 강의실 곳곳에 있는 것 같고 그렇다. 김동규가 시험 잘 보라고 기도를 해 주든 응원을 쏴 주든 했을 거니까 하다못해 그런 게 이 강의실을, 아 더는 못 하겠다. 하림은 비과학적 사랑 타령을 1절만 하고 머리를 털었다.
세상 바보 같은 생각들이었지만 원래 사랑한다면 바보가 된다고 혼자서 속으로 생각하는 건데 이 정도는 뭐 어떤가 싶어졌다. 과학자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404호가 된 건 운명이란 소리는 못 하겠다. 404호가 우연히 이 날 써도 된다거나 시험 보기에 적당한 강의실이라거나 이런 뭐 다양한 이유가 있어서 결정된 거지 사랑의 힘이나 운명 같은 그런 간지러운 이유를 붙이기엔 하림은 뼛속까지 천생 과학자였다.
사실 이미 404호에서 세문고 20404번 학생을 떠올리며 그 학생의 기운이 어쩌고 하는 것부터가 하림의 인생에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다.
“진짜 미쳤네.”
“뭐라고?”
동규 때문에 중증도 이런 중증이 없다고 생각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뿐인데 앞줄에 앉아 있던 예준이 홱 뒤로 돌았다.
“야, 서하림. 지금 뭐라고 그랬냐. 나보고 미쳤다고?”
“너한테 한 거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누가 봐도 나한테 한 말인데.”
“아니라고.”
“시발, 야. 서하림.”
하림은 의자 등받이에 깊게 기대앉으며 두 팔을 머리 뒤로 가져가 깍지를 꼈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예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예준아.”
일부러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며 대답했다. 환하게 웃어 주는 건 덤이었다. 예준의 심기가 뒤틀리는 게 얼굴로 다 드러났다.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
“그럼 내가 먼저 한다.”
하림은 일부러 거만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뒤통수로 가져갔던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예준에게 바짝 붙었다. 몸을 뒤로 빼 도망간 건 예준이었다.
“우리 그래도 여덟 살 그 어린 나이에 학원 친구로 만나서 매해 주니어도 꼬박꼬박 나가고 상도 같이 받고 지금까지 본 세월이 10년인데 대놓고 열폭은 하지 말자.”
“열폭?”
“나 봐. 너 RMM 붙었을 때 축하한다고 해 줬어 안 해 줬어.”
“…….”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화도 해 줬잖아, 내가. 너도 신나서 나보고 자랑 늘어놨는데 기억나지. 전화도 네가 자랑질 끝내고 그냥 끊어 버리고. 겨우 세 달 전 일인데 기억 안 나면 치매다 그거. 혹시 까먹었으면 우리 엄마 병원에 가 볼래? 아, 미안. 너네 엄마도 개인 병원 하셨지. 까먹었다. 근데 거긴 개인 안과고 우리 엄마는 대학 병원이니까 우리 엄마 병원 신경정신과.”
“야.”
“응? 왜?”
아예 비아냥거릴 생각으로 하림은 꽃받침까지 했다. 예준은 고개를 돌려 혼자 씩씩거리다 못해 욕을 내뱉더니 입술을 깨물고 하림을 쳐다보았다.
“씨발 새끼, 나중에 죽일 거야.”
“오, 살해 협박. 그래라. 오늘부터 경호원 셋 고용할게. 죽긴 싫으니까? 잠시만, 죽더라도 증거로 남기게 우리 대화 녹음 좀 하자.”
“미친 새끼. 야!”
“저기요, 거기 조용히 좀 해 주세요.”
주먹을 쥔 예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림은 그 주먹을 가볍게 토닥여 줬다.
“나는 정말 예준이 네 얘기가 너어무 궁금한데, 우리 이제 곧 있으면 시작이고 다른 애들이 본다. 중학생 애기들도 있는데.”
“서하림.”
“시험 잘 봐. 잘 봐야 같이 비행기 타지. 호옥시라도 나만 선발되면 축하 전화 해 줘. 쌤쌤, 믿는다.”
“……씨발놈. 그 전화는 네가 해야 될 걸.”
하림은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뒤에서 봐도 예준의 귀까지 달아올라 있다.
좀 과했다 싶긴 한데 예준이 뒤에서 얼마나 저를 욕하고 다녔는지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가볍게 털어 준 거였다.
지보다 키 큰 것도 싫고 잘생긴 것도 싫다 하는 건 뭐, 하림도 이해했다. 그런데 왠지는 몰라도 정작 과학고 다니고 있는 새끼가 과학고에 대해 한이 맺혀서 하림이 자기네 학교 다녔으면 자기랑 비슷했을 거라는 둥 자기가 세문고 갔으면 하림과 같거나 더 나았을 거라는 둥 했던 거 다 알고 있다. RMM도 예준이 나간 올해 한국이 1위를 달성했는데 그때 온갖 SNS에다 주어만 없지 누가 봐도 하림인 것을 알게끔 저격하기도 했다.
예준의 SNS 때문에 친구들에게 메시지가 엄청 쏟아지던 그날을 떠올리며 하림이 고개를 저었다. 불쌍한 놈.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머리 좋고 잘생기고 키도 크게 태어나지 그랬냐. 짠하다 짠해.
“출석 먼저 불러 볼게요. 이름 부르면 손도 들고 큰 소리로 대답도 해 주세요. 강영호.”
주말 이틀로 나뉘어 진행된 IMO 최종 시험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미련 없이 문제를 푼 하림은 후련했고 재밌기도 했다. 모의고사 형식인 만큼 실제로 IMO에 가면 이런 재밌고 어려운 문제들만 풀 거고 자신처럼 수학에 미친 전 세계 친구들을 만날 거란 생각에 조금 설렌 것도 같다.
지난 주 금요일에 끝난 중간고사의 꼬리표가 월요일 되자마자 나왔다. 꼬리표를 받아 든 하늘은 동규를 끌고 하림의 반으로 뛰어갔다.
“와 서하림 미쳤네. 돌았나 봐. 하나 빼고 다 백 점이네.”
“겸손 좀 떨었지.”
“미친놈. 심지어 중간고사 끝난 다음 날이 올림피아드 최종 아니었음?”
“맞아.”
“와 미친놈. 존나 미친놈.”
“난 이제 내신은 뭐, 발로 풀어도 되겠더라고.”
하늘이 하림의 말에 질색을 하고 말을 돌렸다.
“김똥규 거 봤어? 이번에 등수 올랐더라. 저번에 꼴등이었는데.”
하림의 꼬리표에 점수 옆에 전교 등수를 알려주는 숫자 1을 보며 감탄하던 동규는 갑자기 하늘에게 느닷없이 공격을 당했다.
“너…… 내 거 언제 봤어.”
“좀 전에 받으면서 봤지. 내가 시력이 좋아서 대충 어깨 너머로 봐도 잘 보이던데? 책상에 대충 올려놨잖아.”
엄마가 대학이나 성적은 중요하게 생각을 안 하고 건강하기면 하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동규도 그런 걸로 부끄러워하거나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림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제 성적을 얘기할 때면 쪽팔리고 부끄러웠다. 기말고사 때부턴 서하늘이 보지 못하게 꼬리표 받자마자 찢어 버리든지 해야겠다.
“오 봐 봐. 등수 올랐어? 얼마나?”
“……몰라. 두고 왔어.”
“야 똥똥규, 아까 바지에 넣은 거 내가 다 봄.”
“줘 봐, 줘 봐.”
이를 꽉 깨문 동규는 하는 수 없이 하림의 손에 가느다란 꼬리표를 올려놨다. 하늘이 하림의 옆에 붙어 두 사람의 눈동자가 똑같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존나 와 진짜, 한 번 살고 가는 인생 이렇게 망나니처럼 살아 보기도 해야 하는데.”
“근데 문학은 찍었다고 하기엔 거의 50점 나왔네. 작년에는 잘 봐야 10점 대였는데.”
“찍신 내린 거 아니야?”
“아니지. 아무리 신내림 받았어도 주관식도 있는데 50점 넘어간 거면 공부를 한 것 같은데. 혹시 얘 수행 잘 하고 있어?”
“아니. 1교시부터 7교시까지 잠자거나 멍만 때리고 프린트도 맨날 잊어버리고 교과서 필기는 하는 걸 본 적이 없어. 필통도 아예 없는 것 같던데. 발표나 뭐 내는 것도 안 해. 특별 입학 대단해.”
“그건 작년에도 그랬어. 그러니까 더 공부를 한 거지. 맞아?”
동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림에게서 꼬리표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하림은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고 손을 위로 올렸다. 동규의 손이 허공을 붙잡았다.
“거 봐. 하면 되잖아! 근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공부를 다 했어? 공부할 거면 나한테 말하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그냥 심심해서. 그리고 너 올림피아드 준비하느라 바쁘니까.”
다시 손을 뻗어 하림의 주먹을 잡았다. 이번엔 하림이 피하지 않고 순순히 잡혀 줬다. 동규는 하림의 손가락을 잡고 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둘이 뭐 하냐. 느려 터졌네. 야, 서하림 손 펴.”
하늘이 하림의 손을 가져가 검지를 잡았지만 하림이 힘을 줘 열리지 않았다.
“이거 김동규 거거든.”
“아 네, 야 똥똥규 내 거 아닌 네 거 빨리 가져가. 우리 이제 수업 시작이라 돌아가야 됨.”
하늘이 하림의 손목을 잡아 하림의 손을 동규 앞으로 가져왔다. 하늘이 손가락 잡았을 때 손 펴면 됐을 걸 주먹을 꼭 쥔 채 풀지 않는 하림 때문에 동규는 퍽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하늘까지 하림의 주먹이 언제 열리나 집중했다. 하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씨익 웃고만 있었고 하늘은 짝다리를 짚고 서 부산스럽게 다리를 떨어 댔다.
“나 먼저 교실 간다?”
재촉하는 하늘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던 동규에게 하림이 입을 열었다.
“김동규.”
“……응?”
“빨리.”
예쁜 얼굴로 속삭이듯 얘기한 탓에 동규는 홀린 것처럼 하림의 손을 제 왼손에 올려두고 다른 손으로는 굳게 다물린 손가락을 잡았다. 잠깐 눈동자를 굴려서 하림을 봤더니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다. 지금 동규는 심장 떨려서 죽을 것 같은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
하늘이 열려고 했던 때와는 다르게 하림의 손가락은 간단히 열렸다. 손가락이 하나씩 열리면 열릴수록 동규의 얼굴도 빨개졌다.
수업 종이 울렸다. 새끼손가락까지 다 열리는 순간 하늘이 못 견디고 교실을 나갔다. 4반의 이번 시간은 성질 더러운 수학 선생님 수업이었고 그 선생님은 종 치는 순간에 교실에 없으면 태도점수를 무자비하게 깎기도 했다. 하늘은 다행히 선생님과 동시에 교실에 들어가 수행 점수가 깎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규는 그런 걸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학생이기 때문에 종이 치고 나서도 하림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하림이 이제 놓으라는 의미로 주먹을 빠르게 쥐었다 펴자 그제야 동규는 하림이 갖고 있던 꼬리표를 챙겨 교실을 빠져나왔다. 4반 교실 뒷문을 열자마자 수1 선생님이 동규를 째려봤다. 동규는 고개만 꾸벅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추천 입학생이라는 신분이 새삼스럽게 감사했다.
꼬리표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동규는 책상 위에 엎어졌다. 점수만 보고도 공부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채는 하림이 신기하다. 공부했냐는 하림에게 맞다고 하긴 했지만 이걸 했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백일장은 망한 것 같으니 그냥 시험 전날에 교과서만 한 번 읽고 몇 장 잃어버린 프린트도 빈칸투성이지만 그냥 슥 읽고 시험 본 게 다라 공부를 했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원래 시험 볼 땐 문제는 넘기고 다섯 개의 보기만 열심히 읽어 마음에 드는 거로 찍는 게 동규의 시험이었다. 제일 재미있는 건 영어다. 알아서 재밌는 게 아니라 정말 단순 재미의 의미로.
아예 뭔질 모르니 보기 중에 제일 긴 거 아니면 제일 짧은 거를 주로 고르고 제일 긴 단어가 들어가 있는 문장을 고르거나 그 날 끌리는 알파벳이 제일 많이 들어간 보기를 고르느라 시간도 제일 오래 걸리는 과목이었다. 제2외국어인 중국어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하림을 따라 선택하긴 했는데 영어보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봐도 뭔지 모르겠고 뭔지를 모르겠으니 재미도 없고 그랬다.
오전 수업이 끝난 후 점심을 먹기 위해 급식실에 갔을 때 하림은 체육복 차림이었다. 하림의 반 친구들은 교복인 걸 보아 4교시가 체육은 아니었던 듯한데.
“아 너 오늘 축구 연습이구나.”
“정답. 밥 먹고 소화 좀 시키다 갑니다요.”
“내일도 해? 내일은 개교기념일이라 쉬잖아.”
“내일은 놉.”
“그럼 목요일까지 점심시간마다 계속?”
“응. 점심시간도 점심시간인데 학교 끝나고도 남아야 할걸.”
“하드한데.”
“내가 금요일에 골 두 개 넣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우리 팀에 백유빈 있거든.”
“주유빈이겠지.”
“아 몰라. 걔 못생겨서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하늘, 하림, 동규 순으로 급식실 입구에 학생증을 찍었다.
“아 맞다. 서하림 너 축구랑 이어달리기라고?”
“어, 근데 이어달리기는 안 할 수도 있어. 나는 축구가 메인이라. 너는 팔씨름이랑 또 뭐 한다 그랬지.”
“팔씨름이랑 박 터트리기.”
“너도 팔씨름 나가지?”
오늘 급식엔 잡채가 나와 동규는 배식 직원에게 많이 달라고 하려다 갑자기 하림이 물어와 깜짝 놀랐다.
“으응. 저…… 이거 많이 주세요.”
“야 똥규. 그거 말고 줄다리기도 나가잖아. 농구랑.”
“아, 어.”
동규가 체육 대회에서 팔씨름도 나가고 줄다리기도 나가고 농구까지 무려 세 종목에 나가는 건 동규의 의사라곤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오로지 하늘의 뜻이었다. 잊고 있었는데 친절하게 떠올려 준 덕분에 동규는 ‘어’에 엄청난 가시를 붙여 대답했다.
“잡채 내 거도 먹을래?”
“응.”
하림은 밥 먹으면서 지나치게 쌓여 있는 동규의 잡채가 어서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지금은 제 것을 놔 주기엔 자리가 없었다.
“네 젓가락 줘.”
“너 거로 써도 돼.”
“안 돼, 더러워.”
“안…… 더러워.”
“사람 입 안에 얼마나 많은 세균이 살고 있는 줄 알면 그런 소리 못 할걸.”
동규는 하림의 입 안에 불치병 바이러스가 있대도 괜찮았지만 강경한 하림의 태도에 순순히 젓가락을 건넸다. 하림이 제 식판에서 잡채를 집어 동규의 잡채 칸에 옮겼다. 하림과 마주 앉은 하늘이 동규의 밥을 가리켰다.
“밥 많이 남았는데 김똥규 잡채 더 받아 와야 하는 거 아님?”
“귀찮아. 아껴 먹으면 돼.”
“밥 먹는데 똥 얘기는 좀.”
“똥 얘기 아니고 김동규 부른 건데.”
“그러니까 왜 그렇게 부르냐고. 엄연히 부모님이 지어 준 예쁜 이름이 있는데.”
“너도 김동규보고 김동구라고 부르잖아.”
“네가 부르는 것보단 낫지. 동구는 황구 백구 같고 귀엽잖아.”
“그럼 나도 귀엽게 똥똥규라 부른다.”
“아, 서하늘.”
“왜, 뭐! 똥똥규 귀엽기만 하구만.”
“하나도 안 귀여워. 김동규 친구들도 그렇게 안 부르고 김규라고 불러.”
“김규나 김동구나 똥똥규나.”
“아닌데. 완전 다른데.”
“아닌데. 그게 그건데.”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동규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밥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세 사람의 주변에 있는 학생들도 하림과 하늘에게 하나둘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기…….”
“똥이란 단어가 긍정적인 느낌이야? 아니잖아. 뭐 조지고 망쳤을 때 똥 됐다 그러지 금 됐다 그래?”
“그럼 귀여운 강아지들보고 똥강아지라고 하는 건 뭔데? 똥강아지 하면 너는 무슨 느낌 드는데? 다 죽어 가는 강아지 떠올라? 귀여운 강아지가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친구 이름을 똥이라 부르는 사람이 어딨냐?”
“여깄다 왜. 그리고 유치원 가면 친구 이름 앞에 똥 붙이는 애들 전국에 만 명 있거든?”
“하, 진짜 유치해서 말이 안 나오네.”
“유치? 유우치? 시발 너 지금 유치라 했냐?”
“저기, 일단 둘 다 진정을 좀…….”
“그럼 유치원 얘기 나오는데 이게 안 유치한 거야?”
“진정한 유치함을 보여 줘? 유치원 아니고 초등학교 가도 똥 얘기 천지인데? 똥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단언데? 별똥별은 심지어 예쁜데?”
“서, 서하림…….”
하림은 뭐라 더 하늘에게 따지려다 제 팔을 붙잡은 동규의 흔들리는 눈동자 때문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밥부터 먹고 얘기해.”
“넌 밥 다 먹고 뒤졌어. 시발, 그놈의 똥이 뭐라고 이게 뭐야 지금?”
이러다 둘이 진짜로 싸우게 될까 봐 동규는 겁을 먹고 아예 젓가락을 내려놨다. 3초 전까지 소리 지르며 싸우던 하늘과 하림이 평온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동규는 차마 다시 젓가락을 집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림이 쩔쩔매고 있는 동규의 귀를 잡아 속삭였다.
“얼른 마저 먹어. 우리 원래 자주 이래.”
동규는 귀가 너무 간지러웠다.
“얘랑 나랑 거의 남매처럼 커가지고 진짜 사소한 거로도 엄청 싸우고 금방 풀어.”
“나 귀…….”
“밥 다 먹고 나면 괜찮을걸. 아마도?”
“아, 잠깐…….”
“쫄지 말고. 덩치 아깝게.”
“아, 알았으니까 잠깐만…….”
“그리고 싸워도 너한테는 불똥 안 튀게 할 테니까 걱정 마. 아니 쟤는 왜 네 이름을 그런 식으로 불러. 개학날부터 그랬어?”
“서하림, 아 간지, 간지러워.”
“아 미안.”
“야. 둘이 남자라고 편먹고 나 욕하지 마라.”
“안 그랬어! 그냥…… 아무 말 안 했어. 아니! 했는데 나보고 밥 먹으라고만 했어. 급식 많이 있다고.”
당황한 동규가 손사래를 치면서 답지 않게 큰소리로 말했다. 하늘은 두 사람을 째려보고 마저 밥을 먹었다. 하림은 당황한 나머지 먼저 나서 이상한 해명을 한 동규 때문에 밥 먹는 동안 웃음 참느라 광대가 아팠다.
밥을 다 먹고 식판 정리도 끝내고 급식실 계단 내려갈 때까지, 하림은 괜찮다고 했지만 동규는 그야말로 폭풍전야 말고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단어를 찾질 못했다. 불안함에 심장도 쿵쿵거렸다. 몇 번이나 하림에게 어떡하냐고 물었지만 하림은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야 김동규.”
조용하던 하늘이 입을 뗀 건 급식실 건물을 나선 그 순간이었다.
“네가 말해 봐. 똥똥규 싫어 좋아.”
“야. 그걸 얘한테 왜 물어. 싫어도 싫다고 하겠어? 위에서 신나게 싸운 거 뻔히 다 봤는데?”
“그럼 어떡하라고. 이미 똥규가 입에 붙어서 김동규가 어색한 정돈데.”
“아니, 그러니까 애초부터 왜 그렇게 불렀냐고.”
“김동규 이름에 동이 들어가 있어서 그렇게 편하게 부른 건데 나보고 왜 그렇게 부르냐고 하면 김동규 부모님이 김동규를 김동규라고 이름 지어 준 거부터 따져!”
“와, 억지 부리는 거 봐.”
“네가 선후 관계를 따지니까 김동규 이름의 시초를 짚어 준 거잖아.”
동규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둘이 자주 싸운다고? 평소에 그렇게 친하게 지내면서 이 정도로 수시로 싸웠다고? 살면서 친구랑 한 번도 이렇게까지 싸워 본 적이 없는 동규는 혼란스럽고 이해를 할 수가 없어 그만하란 뜻으로 하림의 교복 끄트머리를 잡아끌었다.
“친구 이름을 부를 땐 김동규랑 싸운 것도 아니고 친한 친군데 좀 애정을 담아서 부르면 되잖아. 동에서 똥이 연상 되면 동 빼고 다른 친구들처럼 김규라고 부르든가.”
“아니 이미 똥규가 입에 붙었다고.”
“아니,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입에 붙은 옛날 사람들도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제외되고 나서 수금지화목토천해라고 잘만 부르는데 여덟 글자의 반의반밖에 안 되는 이름 두 글자를 바꿔 부르는 게 그렇게 힘들어?”
이름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일이 커진 거지. 동규는 자기 이름이 동글동글한 느낌이 나는 것 같아 음성학적으로도 글자로서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름을 개명해야 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엄마랑 아빠가 동규 말고 윤규나 민규, 선규 같은 이름으로 지어 줬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거란 데까지 생각이 뻗어 갔다. 갑자기 자기 이름에 대한 애정도가 뚝뚝 떨어졌다.
“아. 시발 야, 나는 비하의 의미로 김동규를 김똥규라 부르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럼 그게 나쁜 뜻이 아니고 뭔데? 나는 김동규한테 사랑과 애정을 가득 담은 애칭도 지어 줬다. 야! 김동규 맞아, 아니야.”
동규 쪽으로 불똥 안 튀기게 한다 해놓고 하림이 불쑥 물었다. 동규는 하림이 물은 게 설마 곰이랑 규를 합친 그 단어를 말하는 건가 싶어서 눈만 크게 떴다. 정황상 그게 맞는 거는 같은데 그게 그냥 덩치 큰 게 곰 닮아서 지어 준 게 아니라 사랑과 애정까지 담은 엄청난 애칭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기가 겁이 났다.
“아. 김동규 미안. 됐고, 아무튼 너도 친구한테 좀 예쁘게 부르라고.”
“뭔데. 무슨 애칭이길래 사랑에 애정까지 담아. 나도 그거로 불러 보자.”
“네가 왜? 야 너 설마.”
“아 씨발…… 설마라니. 그 설마 아니거든. 왜 오해를 하고 지랄이야? 서하림 미친 거 아니야? 쟤는 네가, 아 됐고 알려 주기 싫으면 그냥 똥규라고 부를 거야. 김동규 친구가 너밖에 없어? 나도 김동규랑 친해. 하 진짜 시발 내가 이런 애기까지는 안 하려고 그랬는데 네 마음 다 눈치 깠고 김동규도 누구랑 똑같은지 삽질하면서 똥강아지처럼 낑낑거리길래 걍 그렇게 부른 거라고. 씨발 내가 이렇게까지 다 얘길 해야 돼? 도대체 왜 이걸 이렇게 질질 끌 건 또 뭐야? 그만 좀 하자.”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하늘의 말에 하림의 입이 닫혔다. 하늘이 말하지 않은 얘기까지 한 번에 알아들었다.
“어…… 알겠어. 그만해. 네 말 이해했고, 화내서…… 미안해.”
“난 아직 화 안 풀렸어. 좆같으니까 먼저 간다.”
“어, 그래.”
“병신아 내가 진짜 아, 걍 나중에 얘기해. 쟤 있으니까.”
동규는 하림과 다르게 하늘의 말을 반의반밖에 이해하지 못했고 왜 저 말을 듣고 하림이 차분해져서 먼저 사과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하늘이 사라져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우뚝 서서 이마를 짚은 채 말도 없는 하림이 걱정되어 하림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는 동그란 머리통도 회오리 모양 가마도 다 귀엽다.
“서하림.”
“응.”
이럴 때 하림이 늘 동규에게 하던 말이 있다.
“……나 봐 봐.”
소심하고 숫기 없는 동규가 기운 없어 할 때마다 하림은 이렇게 말했다. 하림을 본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동규는 하림이 자길 보라고 할 때마다 고개를 들어 하림을 봤었다. 까만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 그 안에 제 얼굴이 담기는 걸 보기만 해도, 그냥 하림과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고 위안이 됐다. 항상 하림이 하던 말을 반대로 하림에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를 보라는 말은 막상 입 밖으로 뱉어 보니 굉장히 간질거리는 말이었다. 말은 소리의 영역이다. 때문에 귀만 들린다면 굳이 상대방을 보지 않아도 되는 걸 시선을 맞추고 눈동자를 맞추기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김동규를 보라는 말은 간질거리는 걸 넘어서 벅차오르기까지 하는 이상한 말이기도 했다. 하림도 자길 보라고 할 때마다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응.”
하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동규와 눈을 마주했다. 동규는 순간 하림의 눈이 살짝 젖어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림은 하늘과 싸웠다고 울 정도로 약하지도 않고 싸움도 잘 마무리되어 아무래도 잘못 본 게 아닌가 싶다. 밖이고 햇빛도 강해서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탓에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그…… 나는 서하늘이 뭐라고 한지 이해는 안 되는데 혹시 걔 말 중에…… 뭐 이상한 거 있었어?”
교실로 향하는 아이들 몇몇이 동규와 하림이 멈춰 서 있는 걸 힐끔힐끔 바라봤다. 두 사람을 아는 친구들은 하림과 동규가 워낙 친하니까 둘이 무슨 말을 하나 보다, 하고 말았다. 하림은 바삐 걸음을 움직이는 학생들 사이에 자신과 동규 둘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렇게 느꼈다.
“아니. 없어. 그냥, 걔 눈치 진짜 빠르구나 싶어서. 앞으로 뭔 말을 못 하겠다 뭐 그런 생각.”
하림은 하늘에게 동규 이야기를 많이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몇 번 되지 않는 얘기도 그냥 김동규랑 같은 반 언제 될까, 같은 반 됐는데 친해져서 매일 걔가 우리 집에 놀러 온다, 밥 엄청 많이 먹더라, 글 쓰는 거 말고는 취미가 수영이라더라 뭐 그런 게 전부지 일부러 하늘에게 티 날까 봐 그 이상으로는 얘기한 적도 없었는데 어떻게 하늘은 다 알아채고 있는 건지 싶다. 심지어 동규가 저를 좋아하느라 제 앞에서는 끙끙대고 있단 것까지 다 꿰뚫어 보고 있다니. 하늘과 동규가 같은 반이 되지만 않았어도 안 들켰을 건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맞아.”
됐다. 이미 일어난 거 어떡하냐고 발 동동 굴리는 것보다 하늘과 제대로 얘기해 보는 게 정답이지. 어떻게 생각하고 무슨 생각인지 등등.
“가자. 고마워. 기분 풀렸어.”
하지만 사실 하림은 하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었다. 지가 싫다고 더럽다고 하면 뭐 어쩔 건가.
“……같이 가.”
일부러 빠르게 걷는 저와 함께 걷겠다고 졸졸 따라오는 동규만 있으면 충분했다. 하림은 자신보다 늦게 걸음을 뗀 동규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걸음 속도를 더 높였고, 뛸까 말까 고민하던 때 동규에게 붙잡혔다.
“알았어, 알았어. 천천히 걸을게.”
하림은 도대체 언제쯤 동규가 삽질을 그만두고 고백할 생각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접어 두고 동규와 발을 맞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