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7화 (17/53)

7

하림이 동규의 생일 밤에 있던 일을 없던 일처럼 대해 준 덕분에 두 사람의 사이는 전과 같아졌다. 다시 동규가 하림의 집으로 놀러오기 시작해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하림은 겨울 방학 동안 동규의 눈물이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했다가 명쾌한 해답을 얻었다. 누가 봐도 짝사랑하는 사람의 서러운 눈물이었다.

동규가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에는 엄마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병아리나 새끼 오리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확실히 동규가 저를 ‘좋아하는 사람’ 영역에 두고 엄청나게 신경 쓰는 게 보였다. 동규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지금껏 하림이 보아 왔던 많은 친구들과 비슷했고 백이면 백 그 친구들은 하림에게 고백했다.

눈 마주칠 때 먼저 눈동자 피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만 흠칫 놀라면서 몸을 빼거나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잔뜩 굳는 걸 쉽게 알 수 있고 얼굴도 굉장히 쉽게 빨개졌다. 분명 하림은 숱하게 봐 온 반응이라 지루할 법도 한데 동규가 그러니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하림은 틈만 나면 동규에게 얼굴을 들이밀거나 의미심장한 말들을 내뱉고 종종 동규에게 은근한 스킨십을 하면서 동규가 자길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반응들을 감상했다.

스스로도 참 못됐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하림은 동규를 자극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귀여운 걸 어떡해. 어릴 때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여자애들을 괴롭히는 심리를 열여덟이나 먹고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리 놀러 와도 동규가 잠은 집에서 자겠다고 선언한 탓에 하림은 일어나면 세수도 하기 전에 동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규는 보통 새벽에 잠드니 전화를 해도 한 번에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림은 목소리가 잠겨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한참 가라앉은 걸 듣는 것도 좋고 가끔씩 동규가 반쯤 자는지 옹알이하듯 아무 말 대잔치하는 것도 좋았다. 종일 붙어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동규 저녁 먹이고 집에 보내 줄 때면 조심히 가라고 쿨하게 동규를 보내 줬다. 눈으로는 가지 말라는 미련을 뚝뚝 흘렸지만 눈치 없는 동규는 그런 하림의 애처로운 눈동자를 안타깝게도 읽지 못했다.

현관문 밖으로 동규가 사라지면 바로 휴대폰을 들어 수다를 떨었다. 그런 식으로 자기 직전까지 동규랑 떠들다가 둘 중 먼저 잠드는 하림이 잘 자라는 인사를 보내면 하루가 끝났다.

불 다 끄고 안대에 수면 모자를 착용 후 눈 감고 몇 초 누워 있다 보면 하림은 안 그런 척하면서 엄청 예민하게 반응하던 동규가 생각나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웃다가 누가 본 것도 아닌데 민망해하며 목을 가다듬고 잠에 들었다. 눈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동규로 점철된 겨울 방학이었다.

하림은 이렇게 핑크빛 세상에 물들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동안 동규는 새해를 맞아 더 짓궂게 구는 하림 때문에 가슴앓이하는 날이 늘었다. 하림이 장난을 치면 나름 평소처럼 반응하면서도 집에 와선 하림의 목소리, 어투, 눈빛, 손짓까지 하나하나 분석했다. 그리고 더 멋지게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말주변이 없어 겨우 그렇게밖에 못한 자신이 한심했고 다정했던 하림의 한마디 말을 붙잡고 밤을 지새웠다.

꿈에 하림이 거의 매일 찾아오는 건 생각도 하기 싫다. 깨어났을 때 속옷 축축한 건 좆같고 하림과 꿈속에서 말도 못 할 짓을 다 해 놓고 하림의 집에 놀러가는 건 좋으면서 싫고, 하림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다가 한 번씩 베개를 킁킁거리는 자신에겐 혐오감이 들고 마지막으로 그 베개에서 나는 하림의 냄새를 못 잊고 집에 와서는 밤마다 자위하는 건 길 가다 벼락을 맞아도 모자라다 생각했다.

온갖 상상을 숨기느라 힘겨워하던 동규와는 다르게 하림은 청소년 과학잡지에 실릴 인터뷰도 하고 올림피아드 겨울 학교도 다녀오고 APMO 준비도 하고 그 와중에 해외 유명 물리학자가 내한하면서 한 강연도 전 회차 듣고 왔다.

강연은 총 2회차로 진행됐는데 그냥 들으러 간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 질문할 거 있다고 영어로 뭘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무슨 논문이며 책을 찾아보느라 겨울방학에 하림의 스터디 룸은 온갖 A4종이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만든 영어 질문지는 하림이 나온 서울시 과학영재원 출신의 물리학과 대학생 선배에게 이론적으로 틀린 게 없는지 검수까지 받았다.

3월부터 다시 창작 과외를 시작하기로 한 동규는 백수처럼 하림의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았다. 그런 동규가 했던 그나마 생산적이고 보람찬 일은 공부하느라 바쁜 하림에게 달달한 디저트를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처음엔 뇌에 당이 좋단 얘길 듣고 무조건 달게만 만들었다가 디저트도 별로 안 달게 먹는다는 하림의 입맛에 맞춰 수정했다. 열심히 만든 디저트를 만들어 줄 때마다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하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동규는 뿌듯했다.

하지만 딸기 오믈렛 만들었던 날 하림이 생크림 좋다고 왕창 넣어 줬다가 그날 밤은 잠도 못 잤다. 공부하면서 먹느라 왼손으로 오믈렛을 들고 먹은 탓에 생크림이 죄다 삐져나와 하림의 입가에 묻었는데 동규는 하필 하림을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하림은 계속 문제를 푸느라 시선도 오른손도 문제집 위에 고정한 상태였다. 한창 풀다 방해가 됐는지 들고 있던 오믈렛을 내려놓은 뒤 입 근처에 묻은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대충 닦고 그러다가 문제가 갑자기 잘 풀리면 다 닦지도 않은 채로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문제를 다 풀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며 무심하게 멈춰 있던 왼손을 다시 움직여 생크림을 마저 닦았는데, 온통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생크림이 잘 닦일 리가 없었다. 동규는 자꾸만 고이는 침을 삼키고 거세지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게 노력하다 물티슈를 꺼내 하림의 손과 입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갔고 한참을 괴로워하다 결국 저녁 먹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은 하림과 주방에서 케이크였는지 빵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생크림 들어간 뭔가를 만들었다. 착한 학생처럼 동규가 뭐만 해도 네, 하던 하림이 갑자기 알몸이 됐고 알몸이 된 하림이 하얀 조리대 위에 누웠다. 꿈속의 동규는 하림의 온몸에 생크림을 발라서 게걸스럽게 핥아 댔고 하림의 입 안 가득 생크림을 짜 넣은 다음 그 안에 자기 걸 물리고 결국엔 뭐…… 그랬다.

하림과는 2학년이 되어 반이 갈렸다. 천만다행으로 정말 조상신이 도운 수준이었다. 하림은 다른 반이 된 걸 많이 아쉬워했지만 동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올해도 같은 반 됐다간 수업 시간에 화장실 여러 번 다녀왔을 거였다.

“야 똥똥규.”

다만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하늘과 같은 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야.”

적당히 무시하고 싶어도 하림이 하늘을 보러 자주 놀러 오는 데다가, 하늘이 친한 친구들과는 죄다 찢어졌단 이유로 동규를 끼고 다녔다. 동규는 하림의 친구고 자기는 하림과 친구니까 동규도 자기 친구가 된다는 이상한 논리였다.

같은 반 다른 친구들 두고 왜 자길 선택한 건지 동규는 의아하기만 했다. 개학하고 며칠은 하늘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하림이 귀띔해 준 바로는 이 반에 하늘이 싸운 친구와 친한 무리가 몇 명 있다는 것 같다. 하늘은 그런 거 눈치 하나도 안 보는 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의외였다.

“왜.”

하도 어깨를 치며 불러 대길래 고개를 돌렸더니 하늘의 손가락에 동규의 볼이 찔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하늘과 같은 반이 된 건 작은 문제가 아니라 큰 문제다.

“……이런 거 할 시간에 수업이나 들어.”

키도 한참 작은 게 꼭 자리는 제일 뒷자리인 제 옆에 붙어 앉아 수업 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이런다.

“너보단 잘 듣고 있어.”

하림과 함께 전교 등수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하늘의 말이라 동규는 반박도 하질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2학년 1학기가 시작된 지는 3주쯤. 동규는 하늘이 왜 자신을 툭툭 건드는지 이해도 안 갔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괜히 싫다고 반응했다간 더 싫어하라고 할 애인 걸 알아서 조금 짜증은 나도 놔두고 있는 중이다. 가끔 좀 심하다 싶으면 미간을 찌푸리는데 그러면 알아서 그만두면서 선을 넘진 않는다.

귀찮게 왜 이러냐는 말이 바로 입 앞까지 튀어나왔지만, 삼켰다. 다 귀찮다. 반응하지 않으면 알아서 그만두겠지. 동규는 책상에 엎어져 팔을 베고 누웠다. 하늘에게는 등을 돌린 채로.

“나 음료수 마실 건데 너도 뭐 마실래? 딜리버리 해 줌.”

“아니.”

“팔 안 저려?”

“응.”

“흐음.”

이렇게 하림이 쉬는 시간에 놀러오지 않으면 다른 친구랑 같이 있을 게 질투 났다. 1반인 하림이 4반인 여기까지 놀러 오는 횟수도 많지만 하늘이 동규를 데리고 1반에 놀러 가는 적도 많아 거의 모든 쉬는 시간엔 서로의 반엘 갔다. 하림이 4반으로 놀러올 때도 그렇고 하림의 반으로 가면 하림과 하늘의 근처로 친구들이 모였다. 1반엔 두 사람이 공통으로 아는 친구가 못해도 다섯은 됐다.

1반 가면 정신도 없고 사람 몰려 싫으니 하림이 4반으로 와 줬으면 좋겠다. 일단 오면, 그나마 4반엔 하늘과 싸운 친구들이 있어 쉬는 시간은 온전히 하림과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하림이 쉬는 시간에 안 보이면 다른 누구랑 무슨 얘길 할지, 얼마나 재밌는 얘길 듣고 있길래 놀러 오지 않는지 신경 쓰였다. 이동 수업도 아닌데 교실 앞에 얼쩡거리고 있으면 하림이 알아챌 것 같아 가고 싶진 않고 그런데 왜 이번 쉬는 시간에는 안 오는 건지도 궁금하고. 그냥 다 귀찮고 복잡하고 그랬다. 서준이나 지호라도 같은 반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오다 사 왔다. 마셔.”

하늘이 복숭아 아이스티 캔을 동규의 눈앞에 내려놨다. 지금은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고맙다고 하고 책상 서랍에 넣었다. 다시 팔을 베고 눕자 하늘이 허리를 숙여 동규와 눈을 마주쳤다.

“너 어디 아픔? 안색이 안 좋은데.”

그래서 팔을 바꾸고 반대로 누웠다.

“아 뭐야. 사람이 걱정을 해 주는데 대놓고 무시하기 있어?”

“무시하는 건 아닌데 아프니까 오늘은 조금만 놔둬…….”

“아픈 것치고는 엄청 짜증이 묻어난 목소린데.”

“……진짜 아파.”

“흠. 그래. 쉬어.”

하늘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동규가 보고 있던 쪽이라 동규는 팔을 반대로 바꾸는 수고를 또 해야 했다.

이번 겨울 방학에 매일 같이 붙어 지내면서 동규는 하림이 누구랑 사귀거나 아니면 최소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란 가정을 반쯤 지웠다. 나름의 큰 성과였다.

하림은 누굴 만나고 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자신과 시간을 보냈고 그렇다고 다른 방 가서 길게 통화를 하지도 않았으며 누군가랑 메시지 주고받을 때도 동규가 옆에 앉아 슬쩍 봐도 전혀 피하지 않았다. 가끔은 친구들이 웃긴 얘기 해 줬다고 메시지 화면을 보여 주거나 읽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림은 고1 겨울 방학을 수학 공부에 올인했고, 만약 하림의 애인이 누구냐 물어보면 숫자라고 대답해도 부족할 게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 뭐 해. 다 부질없다. 같이 지내면 지낼수록 하림에 비해 못난 모습들만 보이고 자꾸 비교하게 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거울 봐도 맘에 드는 거 하나도 없고 결정적으로 고백 할 건 꿈도 못 꾸겠는데.

노래 가사로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인다고 쓴 새끼들은 다 뒤져야 된다. 하림을 좋아해서 분명 좋고 행복하긴 한데 그것보다 슬프고 답답한 게 좀 더 크니까.

동규가 생각하기로 공감하는 짝사랑 인구수가 전국에 못해도 천오백만은 되는 것 같다. 이미 애인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중이라든가 짝사랑 중이던 사람이 죽게 되거나 연예인을 진짜 애인 좋아하듯 사랑한다거나 뭐 그런 다양한 이유들로. 그러지 않고서야 검색창에 짝사랑을 치면 엄청난 양의 글들이 나오는 걸 설명할 수가 없다.

엄마랑 아빠 때문에 타의로 태어난 이 세상에 낙이라곤 맛있는 음식들과 하림뿐이었는데 요즘은 입맛도 없고 하림 때문에 감정 소모도 너무 심해 인생 사는 맛이 안 났다. 동규는 하루에 네 끼 먹던 게 세 끼로 줄고 식사량도 다소 줄었다.

수영장 가던 발길도 끊고 헬스장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근육이 빠지는지 몸무게가 줄기 시작했다. 급식실 직원들은 다이어트 하냐고 물었다. 뺄 지방이 없어 그런 건 아니라고 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입맛이란 게 하루아침에 뚝 떨어지진 않아서 하림이나 하림의 집 아주머니, 하림의 엄마는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보통 사람보단 많이 먹는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동규를 품고 낳은 엄마만 아들이 말라 간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개학 앞두고는 새 학기 됐으니 보약이라도 지어 주겠다 하는 걸 겨우 말렸다.

여전한 팔뚝도 보여 주고 몸무게도 90kg대이지 않냐고 체중계 위에 올라가 보여 주면서 지금이 딱 건강한 몸 상태라는 걸 몇 번이나 확인시켜 주었다. 동규의 엄마는 우리 아들 몸무게가 줄었는데 어떻게 건강한 거냐고 우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동규는 다시 수영이라도 나가겠다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 둔 상태다.

“너 점심 먹을 거지?”

“응.”

“아프면 담임한테 외출증 끊어서 죽 먹고 와.”

“나갔다 올까.”

반이 다른 하림과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급식실 앞에서 만난다. 하늘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동규의 등 너머에서 말했다.

“끊으려면 빨리 가야 할 걸. 선생님도 교직원 식당 가서 자리에 없을 수 있어. 죽집이 우리 학교 근처에 있나?”

“죽 안 좋아해.”

“왜?”

“소화도 빨리 되고 흐물흐물거리고 밥 먹은 느낌이 안 들어. 양도…… 적고.”

“뭘 사 먹어도 네가 먹으면 다 양이 적겠지. 밥 먹을 거면 빨리 일어나. 애들 벌써 다 나갔잖아.”

귀찮아 죽겠다. 서하림이나 다른 친구들이랑 먹을 거면 그냥 혼자 가서 걔네랑 먹지 왜 꼭 나를 못 데려가서 안달이지. 동규는 느릿느릿 일어났다. 하늘이 동규의 등을 밀며 급식실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급식실 입구에서 하림이 배가 등에 붙겠다며 하늘을 타박했다.

“김동규 아프대.”

“어디?”

“몰라. 그래서 음료수도 사 줬는데 안 먹었어.”

“김동규 나 봐 봐.”

“배고프니까 나는 먼저 올라가서 기다린다.”

하늘이 계단을 두 개씩 올라가며 1, 2학년 급식실로 사라졌다. 하림은 동규보다 계단 한 칸 위에 올라섰다.

“보라니까. 많이 아파?”

“많이는……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얌전히 서 있는 동규의 이마에 하림이 손을 얹었다. 하림은 늘 손가락이 찬 탓에 동규는 이마에 놓인 하림의 서늘한 손가락을 너무나 잘 느낄 수 있었다. 동규는 살짝 목을 움츠렸다.

“열은 없는데.”

“그냥…… 몸이 조금 욱신거리고 속도 좀 울렁거리는 거 같고…… 열은 없어.”

“속 별로면 조퇴하고 병원 가.”

“그 정도까진 아니고.”

“밥 산처럼 받지 말고 조금만 받아서 국이랑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가자.”

동규는 하림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하림의 손이 닿았던 이마에 자신의 손을 똑같이 얹었다. 좋은데, 진짜 좋은데 눈물 날 것 같다. 차라리 성격이 지랄 맞아서 하림이 이럴 때마다 손을 바로 내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그거대로 후회도 하고 아쉽기도 하겠지만 일단 당장 이렇게 울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을 거다.

하림과 하늘이 신나게 떠드는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동규는 울적한 점심을 먹었다. 오후 수업도 다 엎어져 있었고 학교가 끝난 뒤엔 늘 그랬듯 하림의 집으로 향했다.

“아주머니, 오늘 간식 뭐예요? 바로 스터디 룸으로 가져다주세요. 씻고 거기서 먹을 거예요.”

“감자 핫도그랑 망고 푸딩에 결명자차예요. 핫도그는 튀겨야 하니까 스터디 룸 들어가면 가져가려고 했는데 지금 튀길까요?”

“아니요! 튀긴 거 바로 먹을래요. 맞춰서 주세요. 저 먼저 올라가요, 씻는 시간 생각해서 조금만 이따가 튀겨 주세요!”

하림은 현관문을 열자 맞아 주는 아주머니를 발견하고 말을 빠르게 쏟아 냈다. 1층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큰 보폭으로 걸으며 말을 끝마쳤을 땐 계단 가장 마지막 칸을 딱 디뎠을 때였다. 방에 도착한 하림은 숨도 고르지 않고 가방만 내려놓은 채 빠르게 욕실로 사라졌다가 금세 나왔다.

“이따 볼 수 있으면 보는데 아닐 수도 있으니까 미리 인사할게. 안녕! 조심히 가.”

“저녁은?”

“저녁도 엄마 아빠랑 같이 안 먹을 것 같아.”

“난…….”

“나 신경 쓰지 말고 너 편하게 먹고 놀다가 집에 가고 싶을 때 알아서 가. 집에 갈 때 메시지 하나만 주고! 형아 간다!”

좀 늦게 먹더라도 나는 너랑 같이 먹어도 괜찮다는 말은 하림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혀 아래에 흩어졌다.

동규는 무기력하게 하림의 침대에 가로로 누웠다. 이 방은 이모님 의견으로 하림이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고 시계조차 무소음 시계를 쓰기 때문에 초침 소리도 하나 없다. 정작 하림은 집중하면 바로 앞에 시계를 가져다 놓든 옆에서 누가 떠들든 상관없다고 했는데.

1초가 이 정도쯤 되지 않을까 가늠하며 시간을 숫자로 세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아주머니가 핫도그 얼른 튀겨서 이 방에도 갖다주셨으면 좋겠다.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린 건 10분 뒤였다. 동규는 쟁반에 산처럼 쌓여 있는 감자 핫도그를 보고 조금 겁을 먹었다. 작년만 같았어도 이거 다 먹고 저녁에 야식도 먹었을 테지만 요즘은 이거 다 먹었다간 저녁 거르고 밤에 라면 끓여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핫도그는 그게 다고 푸딩은 더 있으니까 필요하면 내려와요.”

“네…….”

다음 주 주말이면 하림이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있는 FKMO였다. 파이널에서 상 받으면 제일 낮은 상인 장려라도 전국 고등학생 중 수학으로는 견줄 자가 없다고는 하지만 하림은 FKMO에서 상 받는 건 당연하고 그다음 단계인 IMO가 더 목적이었다.

FKMO에선 IMO에 출전하는 선수를 선별하는 시험인 TST까지 치르기 때문에 하림은 케이크 일로 동규가 자길 좋아하는 걸 확실하게 알아차렸어도 동규의 속이 타들어 가는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실 그 바쁜 와중에도 동규가 울적해지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신경을 쓰긴 했는데 그럴수록 동규가 하림의 시간을 뺏는 것 같다면서 안 좋은 상태를 더 꽁꽁 숨기다 보니 동규의 상태가 어떤지를 정확히 몰랐다.

1월에 겨울 학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하림은 적당히 동규 놀려 먹고 같이 놀고 했었지만 겨울 학교 가서 RMM 모의고사를 망쳐 한국 대표 4인에서 떨어진 뒤로는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공부만 했다. RMM 4인에 하필 하림과 초등학생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권예준이라는 학생이 합격한 게 타격이 컸다.

하림은 동규가 먹여 주는 복숭아 젤리를 아기 새처럼 받아먹으며 ‘걔는 주니어 때부터 나한테 이긴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한 번 이겼다고 기세등등이야. 시발놈, 과학고면 다냐? 가서도 고작 중간권 유지한다고 아등바등이라는데 운 좋게 루마니아 가는 거면서 자랑질을 그렇게 해댄다?’ 하고 화를 냈었다.

동규는 루마니아까지 언급되는 수학 천재들의 심오한 세계에 잠시 감탄했다가 하림의 화를 받아주면서 네 말이 다 맞고 권예준 시발놈은 파이널에서 0점 맞아서 네가 이길 거라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 못 먹을 것 같던 핫도그를 다 먹었다. 핫도그에 감자 하나 추가됐는데 이렇게 맛있을 게 뭐람. 근데 생각해 보면 감자도 감자지만 소시지부터가 마트에서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과 육즙이 나온 걸 보아 수제 소시지가 들어간 것 같다. 거기에 빵 반죽 둘러서 튀겼으면 안에 감자가 아니라 청국장이 들어갔어도 맛있을 조합이었다. 나중에 집에서 해 먹어야지.

입가심으로 망고 푸딩을 해치운 동규는 양치를 했다. 양치를 끝내고 칫솔 소독기에 칫솔을 넣으려다 문득 하림의 것이 눈에 밟혔다.

“약간 지금…… 미친 것 같은데.”

저 하얀 칫솔이 하림의 입 안을 헤집었을 걸 생각하니 제 입 안에도 쑤셔 넣고 싶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저 칫솔을 쪽쪽 빨아 보고 싶단 그런 미친 생각이 한번 떠오르자 당최 떨어지지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림에게 고백은 고사하고 좋아하는 티를 열심히 누르고 있는 것의 반증인지 동규는 꿈에 하림이 나올 때마다 늘어나는 자신의 변태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의식은 도대체 하림을 얼마나 망가트리고 난잡하게 굴리고 싶어 하는 건지 꿈 꿀 때마다 무섭기까지 한데, 이제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제정신일 때도 자꾸 올라오니 동규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냄새만 맡아 볼까. 코에 닿는 것도 아니고 입에 넣는 것도 아니고 코에서 1cm 정도 떨어트린 곳에서 냄새만 맡는 건 남에게 걸리지만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니까. 그냥 소독기에서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는 거랑 다른 게 없지 않나? 그러고 보니 칫솔 위치가 너무 오른쪽에 걸려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꽤 큰 용기와 다짐과 명분을 겨우 찾아 하림의 칫솔을 잡았다. 입에 넣지만 않으면, 코에 닿지만 않으면 미친 짓이 아니라는 변명을 수없이 되뇌며 콧구멍 바로 앞에 칫솔을 가져갔다.

“…….”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심장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데 그와 반대로 하림의 칫솔에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냄새를 맡아보고자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심 침 냄새가 났으면 기대했던 것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가당찮다. 양치는 침으로 하는 게 아니라 치약 묻혀서 하는 거고 양치 거품 뱉고 나면 칫솔을 흐르는 물에 씻지 않던가. 거기다 칫솔 소독기에서 파란 빛 받으며 마르는데 도저히 침 냄새가 날 수가 없는 과정이었다.

존나 멍청이 같다. 김도 샜다. 괜히 비장했네.

동규는 제 칫솔을 하림의 칫솔과 나란히 걸어 두고 하림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림의 침대에 가로로 누워 손을 뻗었다. 손에 바로 하림이 베개가 위치해 있었다. 그걸 산소 호흡기라도 되는 양 얼굴 위에 올렸다. 매일매일 소독하고 세탁하느라 하림의 냄새는 잘 나지 않지만 동규의 후각은 섬유 유연제 사이에서도 희미하게 나는 하림의 체취를 열심히 찾아냈다.

이렇게 약하게 나는 게 딱 좋다. 여기서 조금만 더 하림의 향이 진하게 났다가는 화장실 가서 몇 번은 빼고 와야 하니까.

얼굴 위에 베개 올려 두고 누워 있다가 저녁 시간 맞춰 문 두드려 준 소리에 일어났다. 하림의 부모님과 저녁을 먹은 동규는 하림을 기다리려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공부 끝나고 지쳐 있을 하림이 편하게 쉬었으면 하는 배려였다.

학교 끝나면 이제 여기 오지 말고 집에 갈까……. 버스 타는 동안 이렇게라도 하림과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은지 아니면 괜히 울적해지니까 하림의 집에 놀러가지 말아야 하는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

1박 2일의 FKMO를 마친 하림의 소감은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시원섭섭’이었다. 완전 끝은 아니고 IMO 모의시험이 남아 있긴 했으나 예준 때문에 과하게 불타오른 게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작년 파이널 생각하면 그때 받았던 장려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들었다.

빨리 결과 나왔으면 좋겠다. 14일 안에 발표니까 내일 아침에 눈 떴을 때 2주가 지나 있었으면.

“우리 왕자님 하루 만에 다크서클이 생겼어!”

집에 도착하자 하림의 엄마가 고생했다며 하림을 제일 먼저 안아 주었다.

“잠도 안 설치고 늦게 잠든 것도 아니고 완전 숙면 취했는데 다크서클이 엄마 눈에만 보이다니 신기한데.”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거라.”

“어, 나도 보이는 거 같아.”

“거봐, 보이지?”

엄마의 장난을 받아 준 하림이 휴대폰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돌려 거울처럼 썼다. 아빠가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저었지만 하림과 엄마는 엄마가 더 착하네 아들이 더 착하네 하며 작은 실랑이를 벌였다.

하림은 식탁에 앉았다. 엄마도 아빠도 잘 봤는지를 묻질 않아 좋았다. 잘 봐도 못 봐도 상관없는 분들이었다. 하림이 답을 밀려 쓰거나 문제를 잘못 읽었거나 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해 속상해하는 일만 아니라면 잘 봐서 좋은 것도 하림의 몫, 망친 것도 하림의 몫이라고 여겼다.

올리브유를 잔뜩 두르고 달궈진 팬에 두툼한 고기를 올려놓자 치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하림은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제야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준이랑 싸웠어?”

“내가 걔랑 싸울 레벨은 아니지.”

“우리 아들이 엄마한테 예준이 욕을 했던 것만 모아도 예준이는 150살은 살 걸?”

“엥, 150살?”

“조금 과했지?”

“200살은 살아야지. 내가 엄마한테만 걔 욕을 했겠어? 기…….”

“응?”

“가 막히게 서하늘한테도 욕을 뿌려놨지.”

하림은 찰나의 시간 동안 실수로 얘기할 뻔한 동규의 이름 대신 가장 자연스러운 단어를 생각해 냈다.

“하늘이한테 얘기 했으면 300살은 살겠는데 예준이.”

“그, 그렇지.”

동규도 엄마랑 같이 주말에 시간 보내는 중이라 연락 안 하고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하림은 시간 확인하는 척 휴대폰을 들었다.

[아 나 너 내일 도착했을 때〉

[엄마랑 영화보고 있는 중일걸〉

[ㅠㅠ〉

[나도 너 마중 나가고 싶은데....ㅜㅜ〉

〈괜춘괜춘]

〈아줌마가 엄청 보고 싶어 하던 거라며]

[그렇긴 해〉

[우리 엄마 이거 영호ㅏ관 등급 SVIP야〉

[아 전에 말했나?〉

〈응]

〈너 영화보는 거 안 좋아하는데]

〈엄마가 추천하는 건 일단]

〈퀄은 보장된다고도 했어]

[맞아〉

[이번에 보는 건 한국에 못 들어올 뻔 했는데〉

[어떻게 겨우겨우 수입이 된 거래〉

〈예술영환가본데]

[맞아 근데 엄마가 엄청 재밌을 거 같대〉

[암튼 영화 보고 나면 연락할게〉

[시험 파이팅하고〉

[다 쓸어버리고 와〉

〈너도]

〈엄마랑 데이트 잘하구]

〈시험은 뭐]

〈형아가 상 받아 올 테니까 박수만 준비해]

[ㅋㅋㅋㅋ〉

[네 형아〉

〈나 먼저 자러간ㄴ당]

[난 3시에는 잘 듯〉

〈영호 ㅏ재밌게 봐ㅏㅏㅏㅏ]

[응응〉

금요일 밤에 자기 전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다시 읽는데 아직 연락 없는 거 보니 영화 보는 중인 것 같았다. 밥은 미리 먹었나? 아니면 영화 보고 먹는 건가. 근데 보통 상업성 적은 예술 영화는 조조나 심야에 열리던데 이런 황금 시간대에 그런 영화를 걸어 주는 곳이 있나?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영화 이름이랑 어디서 보는지라도 물어볼걸 그랬다. 그럼 영화 언제 끝나는지 아니까 이렇게 기다릴 필요도 없는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봐?”

“어? 아, 아니 그냥 기사.”

“무슨 기산데?”

말 잘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사별 헤드라인부터 훑는 게 일인 사람이 자신의 엄마였다.

“어…… 3월 모의고사 결과 발표 분석 기산데 그, 보통 3월 모의고사는 매해 첫 모의고사라 전반적으로 성적이 잘 나오는 편인데 이번에는 수포자 학생들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었고 수포자 학생들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니까 공교육에선 수학 난이도를 내리려고 하고 근데 그게 전문가들은 임시방편이라 생각하고 결국은 학생들의 기초사고력을 떨어트리는 거라고 경고하는, 교육은 백년지계니까.”

전에 봤던 몇몇 기사를 짜깁기해 자연스럽게 하나로 엮어 봤다. 내용은 괜찮았지만 말투가 너무 당황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아무래도 현장에 있는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학생들을 끌고 가야하는 학습자니까 난이도를 낮추는 방법이라도 써 보고 싶은 거겠지. 하림이 너는 수학 선생님은 관심 없어? 근데 선생님 되면 우리 아들은 정년 퇴임할 때까지 여고만 도는 거 아니야? 학생들 복지 차원으로 교육부에서.”

다행히 엄마는 어떤 접시 쓸지 고르느라 하림의 당황을 하나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하림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엄마의 얘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줬다. 동규와의 대화창 알림을 진동으로 바꿔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빠가 만들어 준 수프에 스테이크에 파스타에 샐러드까지 다 먹고 아주머니가 만든 수제 아이스크림을 막 떠먹으려던 때 동규에게 연락이 왔다.

[영화 끝났어〉

[엄마 진짜 사기꾼이야〉

〈왜???]

〈재미없었어?]

[그건 아닌데 영화 세시간 짜리야〉

[아니 세시간이 넘음〉

〈헐 세시간....]

[진짜 치사한 게 뭐냐면〉

[난 영화 티켓도 구경 못 했어〉

[티켓에 영화 끝나는 시간 써있잖아〉

[하..〉

[지금 엄마 감동 엄청 먹었어〉

[나도 재밌긴 한데〉

[길어도 너무....길었어............〉

[시험은 어댔어?〉

[당연히 잘 봤겠지만 관례상 물어보는 거야〉

〈잘 하면 비행기 탈 수 있을 듯]

[헐〉

[역시〉

[이천 서씨 가문이 낳은 이 시대의 참천재〉

〈뭐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말고도〉

[너 국제올피가면 쓰려고〉

[멘트 몇 개 더 준ㅂ했는데〉

[들어볼래〉

〈ㅋㅋㅋㅋㅋㅋㅋ아니 일단 킵해]

〈비행기 티켓 확정되면 그때 아부멘트 100개 듣겠어]

[최종이 6명이랬나〉

〈응]

[발표 언제야?〉

〈2주 안에 최종인원 2~3배수로 뽑고]

〈그 안에서 최종 시험을 봐]

〈그러면 이제 그 시험으로 비행기 타는 6명 결정인데]

〈최종 시험 성적이랑 파이널 선별시험, 겨울학교 성적, APMO, RMM 모고 등등 1년 치 성적 다 참고해서 결정되는거]

〈근데 사실 최종성적이랑 파이널이 제일 비중 큼]

[최종 시험은 또 언제봐?〉

〈이번달 말에]

〈한국대표 6인 발표는 5월 초]

[남은 95새는 한달 ㄷㅇ안 잘 생각해볼게〉

[95개〉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마나 신박하고 창의적인 백개인지]

〈기대할겤ㅋㅋㅋ]

[근데〉

[백일ㅈ아은 기껏해야〉

[다 걍 당일백일장이고〉

[예선이랑 본선밖에 ㅇ벗는데〉

[없는데〉

[이건 뭐 마니작까지 단계가 한 다섯 개?〉

〈오타 왜이렇게 심해]

[아 지금 엄마랑 카페 가믄중이라〉

[엄마가 빙수ㅜ먹고 싶대〉

〈아줌마가 영화 얘기 안 듣고 휴대폰 한다고 뭐라 하시는 거 아닌지]

[역시〉

[독심술사....〉

〈그럼 엄마랑 빙수 먹으면서 얘기 잘 들어주고]

〈자기 전에 전화해]

[그래〉

하림은 동규가 ‘괜찮아’라고 할 줄 알고 쿨한 척 해 본 거였지만 동규를 과대평가했음을 인정했다. 원래도 타고난 눈치 없음 같지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 더 눈치 없는 놈이었다. 아니 그런데 그 사실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평온하던 마음에 물결이 일었다. 지금 이틀 만에 연락한 건데.

“……아니 그걸 넙죽 ‘그래’ 하면 어떡하냐고.”

엄마랑 얘기하면서 메시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 그으래?”

바로바로 읽고 답장하는 건 좀 힘들어도 말 많은 편 아니니까 들어주고 있단 신호로 고개만 신나게 끄덕이면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빙수를 먹든 갈비를 뜯든, 아 잠시만. 지금 나랑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는 건가? 설마…….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랬다. 나였으면, 내가 엄마랑 데이트 중인데 김동규한테 연락 오면 엄마한테 욕을 먹어도 계속 김동규랑 계속 얘기했을 텐데. 김동규는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실내에 앉아 빙수나 먹으면서 자기는 별로 말도 하지 않는 상황인데도 대화를 끊었다 이거지.

아니, 김동규 얘는 딸랑거리며 귀여운 애교도 떨어 놓고 이런 식으로 내빼면 단가?

“이따 전화 백 번 해 봐라. 누가 받아 주나.”

하림은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신경질적으로 휘저었다. 다른 디저트 많은데 왜 아주머니는 아이스크림으로 디저트를 만들어서 다 녹아 먹지도 못하게 만드는지. 물론 이게 다가 아니라 다시 퍼 오면 될 일이지만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냥 이게 녹은 것 자체가 짜증났다.

따뜻한 물 맞으면 기분이 좀 풀릴 것 같아 하림은 욕실로 빠르게 들어갔다. 혹시 몰라 휴대폰을 챙겼지만 혹시라도 동규에게 전화가 온다면 받지 않으려고 들고 간 거지 받으려고 들고 간 건 절대 아니었다.

아까 집에 올 때만 해도 시원섭섭하고 적당히 기분 좋았고, 동규에게 연락이 왔을 때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누가 건드렸다가는 한 대 칠 기세였다. 자칫 잘못하면 거울도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씻고 나와 방에 온 하림은 테이블에 앉았다가 한숨 푹 쉬고, 일어나서 침대에 앉았다가 또 한숨 쉬고, 방을 뱅뱅 돌았다가 갑자기 화가 나서 1층에 내려가 아이스크림을 퍼 왔다. 그래 놓고 먹진 않았다. 전화 와도 받기 싫어서 그냥 자 버릴까 싶어 침대에 누웠는데 잠은 안 오고 생각만 많아져 찬물을 마시려고 다시 1층에 내려갔다 올라왔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전화가 오면 받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던 게 거짓말처럼 하림은 동규의 전화가 오자마자 쏜살같이 일어나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는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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