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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하루하루가 꿈을 꾸는 것만 같은 하림은 컨디션이 최고였다.
5월에 있던 올림피아드(KMO) 1차 시험 오일러부에서 1등으로 금상을 받았던 건 충분히 예상 범위였다. 오일러부는 비특목고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이었고 하림에겐 아주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다. 주변에서 대단하다고 백 번 얘기해 줘도 하림은 어깨만 으쓱했다. 그랬던 1차 시험에 비해 훨씬 어려운 11월 2차 시험에서조차 하림은 파죽지세였다. 시험 치르면서도 이거 잘 하면 2차에서도 금상 받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고 그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원래도 대수, 기하, 정수, 조합 네 영역 다 잘하긴 했다. 그중에서 상대적으로 더 재밌어하는 정수와 조합을 잘하는 편이었는데 하림이 맞춘 정수 문제가 하필이면 점수 배점도 오답율도 제일 높아 2차에서도 금상을 받았고 동시에 하림은 2차 시험 금상 수상자 중에서 유일한 비특목고 학생으로 주목을 받았다.
3일 전 2차 시험 결과 발표를 확인하고 나서야 이번에는 하림도 기쁘게 축배를 들었다. 빨리 겨울 학교도 가고 싶고 루마니아 수학대회나(RMM) 아시아태평양올림피아드(APMO)도 나가고 싶고 파이널올림피아드(FKMO), 최종적으로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까지도 되기만 한다면 전부 다 나갈 거였다.
친구들이 가끔 하림의 계획을 들으면 과학고 학생도 아니면서 내신이나 관리하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곤 했는데, 하림은 학교 내신도 수학도 과연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초등학생들의 리그인 JKMO에서는 늘 전국 10등 안에 들었고 KMO 중등부에서도 금상만 받았으며, 중학생과 고등학생 통합으로 시상하는 FKMO에서 우수상을 받는 중학생은 하림 혼자거나 한두 명만 더 있거나 했다.
그렇다면 이제 고등부에서도 할 수 있는 모든 건 다 해 보고 싶었다. 하림이 알기로 과학고나 영재고가 아닌 자사고나 일반고 학생이 최종 6인에 들어 IMO까지 나가거나 후보 선수에 드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몇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다.
특히 이번 2차 시험은 올해 3월에 열렸던 FKMO에서 장려를 받은 충격을 잊고자 더 불에 타올라서 공부했다. 하림은 과학고를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였고 FKMO 전에 열린 겨울 학교에서 성적도 좋았다. 그보다 더 전에 열린 KMO 중등부 2차에서는 금상을 받았으니 FKMO에서도 당연히 중등부에서처럼 우수상 정도는 받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고작 장려라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장려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하림은 문제집에 파묻혀 한 해를 달렸다. 그러자 아주 만족스럽고 흡족한 결과가 따라왔다. 어차피 내신은 너무 쉬워 재미없는 수준이라 시험 기간만 아니면 거의 모든 공부 시간을 다 수학에 쏟았다.
2차 수상을 확인한 뒤로 하림은 틈만 나면 내년 여름 한국 대표로 IMO에 출전하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에서 온갖 언론사와 인터뷰도 이미 다 했고 9시 뉴스에도 출연을 마쳤다. 왜냐면 하림은 다른 한국 대표들과는 다른 메리트를 가진 학생이었으니까.
할아버지한테 반항한다고 선택한 세문고였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지 하는 마음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특목고 유일’ 또는 ‘일반고 유일’이란 수식어를 붙이며 마치 저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듯해 아주아주 좋았다. 애교심이 이렇게도 생길 수가 있나 조금 웃겼다. 노인네 따라 과학고 갔다간 흔한 과학고의 수학 잘하는 학생 중 한 명이 될 뻔했다. 나중에 노벨상 받으면 학교에 서하림 장학금 만들어야지.
하림은 이렇게 커리어를 착실히 쌓아 가고 있는 와중 동규의 수상 실적은 망해도 이렇게 망해도 되나 싶은 정도였다. 대형 백일장은 10월을 끝으로 더 이상 있지도 않아 이제 더 참여할 것도 없긴 한데 10월 마지막 주에 참여했던, 하림이 마중까지 나와 줬던 그 백일장 이후로 참여한 자잘한 백일장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와. 김동규 11월 첫째 주 이후로 한 달째 상장 제로.”
아침 조례 시간 시청각실에서 KMO 2차 시험 금상을 받아 온 하림이 상장을 동규의 눈앞에 펼쳤다 접었다 하며 동규를 놀리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형아는 이렇게 잘나가는데 너는 뭐 하냐, 요즘? 벌써 12월이에요, 12월.”
안 그래도 고터로 마중 나온 그날 이후로 하림이 뭔가 숨기는 것 같고(아마도 여자친구겠지만) 툭하면 저를 보면서 실실 웃어 대 밤이면 하림의 웃는 얼굴이 생각나 잠도 잘 안 왔다. 글이고 뭐고 그냥 다 좆 까고 싶다. 하림이 그런 자기 맘도 모르고 놀리느라 신이 난 게 동규는 마음이 상했다.
“야야 김동규 설마 부러워서 그래? 요즘 스코어 나쁜데 나는 잘 받아서?”
올해 같은 반 되고 제일 친한 사이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든 누구랑 사귀고 있든 그거 하나 얘기 안 해 주는 것도 서운하고 일주일 중에 일주일을 붙어 있던 하림이 이제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낼 거라 생각하니 그것도 섭섭하고 아쉽고.
“야, 왜 사람 말을 무시해.”
게다가 하림이 상 받은 건 축하할 일이지만 하림의 말대로 11월에 참여한 네 개의 백일장은 심지어 유명하지도 않은 소형 백일장이었는데도 입선조차 못했다. 그걸 콕 집어 얘기하는 건 짜증 나고 하림은 큰 상을 턱턱 받아 오니 부러우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불안함도 느껴졌다.
여름방학에 참여했던 D예술재단 청소년문학상 수상집이 발간되고 시 부문 고등부 은상을 받은 동규의 시 역시 책에 실렸지만, 며칠 전 학교로 수상집이 도착했을 때 동규는 표지만 보고 가방에 쑤셔 넣었다. 오히려 하림과 친구들이 책을 펼쳐 놓고 읽느라 바빴다.
‘준경여고 이 누나는 또 대상이네.’
매번 동규와 수상자 목록을 살펴보는 하림은 동규가 참여한 대회마다 1등을 가져가는 3학년의 이름을 발견했고 동규는 그 누나가 캠프 때 들은 시인이 되고 싶다던 누나인가 싶어 말이라도 걸어볼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제대로 된 상은 D재단의 청소년문학상 이후로 없다 보니 시간차로 받아 본 수상집은 슬럼프에 빠진 동규에게 치명적인 상처였다. 그 상처를 받은 지 겨우 3일째라 상처에 딱지도 생기지 않았는데 하림은 전국 대회에서 상을 받아 왔다.
“야, 김동규. 너 오늘도 우리 집 안 와?”
상은 못 받아도 창작 과외는 계속해도 되는 거였지만 동규는 2주 전쯤 과외 선생님에게 따로 연락을 넣었다. 슬럼프가 온 것 같아 쉬고 싶다고, 엄마나 하림을 포함한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그렇게 얘기하지 말고 자잘한 백일장밖에 없으니 2월까지 쉬는 거로 하자고 말도 맞췄다.
그러면서 하림의 집에 매일같이 가던 발길도 끊었다. 이건 엄마 핑계를 댔다. 날씨 추워지니까 엄마가 퇴근할 때 집에서 아들이 ‘다녀오셨어요’ 하는 걸 듣고 싶어 한다고. 당분간 집에 바로 간단 얘기에 하림이 그런 게 어딨냐고 동규의 양팔을 세게 잡았다가 엄마 얘기에 그러라며 보내 줬다.
“진짜로 안 와? 하루 정도는 놀러 와도 될 거 같은데. 아줌마 퇴근하기 전까지만 있어도 되잖아.”
여친이랑 시간 보내지 왜 자꾸 놀러오라고 하는 건지. 동규는 졸리단 핑계로 책상 위에 엎어졌다.
“야 김동규 나 봐 봐. 집 밥이 그렇게 맛있어? 우리 집 아주머니가 해 준 밥보다 더?”
엎어지고 보니 하림이 내려놨던 상장이 딱 품 안에 들어와 있다. 가져가라고 한쪽 팔을 조금 들어 품 밖으로 슬쩍 밀었다.
“뭐야.”
기능장의 손맛으로 동규를 꼬셔 보던 하림은 빼꼼 나온 상장 케이스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동규는 말없이 상장을 더 밀었고 엎어진 자세만 고쳐 잡을 뿐이었다.
“……먹을 거로 꼬셔도 안 넘어오네. 얘 오늘 왜 이래.”
“상 못 받아서 우울한가 봐.”
“설마. 얘 그런 거에 연연 안 해. 상 욕심 없어.”
“아니야. 요즘 학교에서 책도 안 읽고 뭐 끄적거리는 것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
“수업 시간에는 김동구 모드 ON이야.”
“그것도 그래.”
“김동규, 우울하면 아기 강아지 사진 볼래? 우리 크림이 얼마나 귀여운지 세상 모두가 알아야 돼.”
“김동규야, 일어나 봐. 강아지 진짜 귀여워.”
하림은 동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어트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좋았다. 여전히 동규는 묵묵부답에 움직이지 않았지만 하림은 손을 계속 찬찬히 움직였다. 정수리 즈음에 위치한 회오리 모양의 가마가 하림의 손길에 흐트러졌다.
“강아지 싫으면 고양이도 있어. 우리 집 막내 귀염냥이 보리 보자.”
“아기 고양이도 있대. 응? 일어나.”
“야, 선생님 왔어.”
서준과 지호가 빠르게 자리 자리로 돌아갔지만 하림은 동규의 머리를 정리해 주고 나서야 일어났다. 하림이 앉아 있던 곳의 주인인 친구에게 하림이 작게 미안, 하고 사과했다.
동규는 수업이 시작되자 밍기적 몸을 일으켰다. 그런 동규를 발견한 하림이 양손을 흔들며 요란을 떨었지만 동규는 고개만 까딱했다. 하림은 동규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아 찝찝했다. 동규는 오전 수업 시간 내내 어딘가를 멍하니 보고 있거나 엎어져 있었다. 그런 동규가 하림은 너무, 너무너무 신경 쓰였다.
“어! 서하림 먼저 간다.”
“아까 밥 다른 친구들이랑 먹는다고 했었잖아.”
“아 맞다. 요즘 거의 매일 같이 먹어서.”
동규는 점심을 먹을 때도 오후 수업 때도 옆에서 서준과 지호가 뭐라고 떠들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하림이 말을 걸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단답만 하며 친구들의 속을 썩였다.
그중에 제일 애가 타는 건 당연 하림이었다. 하림은 아침에 괜히 상장 들고 설쳤다며 자기반성 중이기도 했다. 놀려서 화났냐고 물어도 동규가 고개만 젓고 글 안 써 져서 속상하냐고 물어도 아니라고 그러고. 갑자기 왜 그러냐고 해도 그놈의 ‘몰라’만 얘기하니 하림은 속이 썩는 걸 넘어서 화가 났다. 동규에게 나는 화가 아니라 아무리 봐도 정황상 아침에 놀려 댄 게 동규의 안에 뭔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애매하게 틀어진 사이는 이상하게 돌아올 줄을 몰랐다. 하림은 열흘간 고민한 끝에 기말고사 끝나는 날이 되어서야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동규가 마음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거 말고도 동규 때문에 복잡한 머리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겠다.
다음 날, 주말 아침부터 할아버지에게 하루 종일 붙잡혀 있다 탈출한 하림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동규에게 긴긴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김동규 안녕 저녁은 엄마랑 맛있게 먹었어? 바로 어제 기말고사가 끝났지만 너한테는 시험 잘 봤냐는 얘기는 해봤자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 밥으로 안부를 물어본다. 아무튼...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은 진짜진짜 솔직하게 하는 거거든. 좀 두서없고 길고 정신없고 그럴 수도 있는데 그거 감안하고 읽어줘.
너는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가 약간 슬럼프 같아.... 그래서 아니 음.. 그런 와중 내가 상 받고 나서 너 놀려가지구 너가 맘 상했다고 느꼈어. 내 입장에선 그랬단 뜻이야. 미안해. 나는 그날 사실 책상위에 그러고 누워있던 너한테 강아지나 고양이 보라는 말보단 놀려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물론 너는 아니라고 했고 나도 그걸 믿지만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한 평범한 말에도 속이 좀 상할 때가 있잖아. 그런 거 아니어도 너도 너 나름대로 내가 모르게, 내가 모르는 이런 일 저런 일도 있을 거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그때 내가 그렇게 말해서 화나거나 속상했던 거 하나도 없던 건 아닐 거잖아. 너도 사람인데..
그리고 너 요즘 걱정도 많아 보이고 생각도 많아 보이고... 한숨 쉬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요즘은 혼자 있다가도 한숨 자꾸 쉬더라구. 만약에.... 진짜로 만약에 뭐 집에 큰 일이 있으면....... 도와줄게 나 돈 많아..(이건 장난이야.. 미안) 그게 아니어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아니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라도 그냥 마음이라도 털어놓고 싶은 거면 언제든지 얘기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거랑 별개로.. 나는 당분간 너가 음... 무슨 일이 있는데 그걸 나한테 말을 해주든 아니든 마음 상한 거든 아니든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주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렇게 흘려보낼 수 있을 정도로 너 혼자 지낼 수 있게 잠시 우리 떨어져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야. 그래서 이렇게 길게길게 써봤어. 나한테 속에 있는 얘기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얘길할지 생각 정리도 필요할 테니까. 우리 올해 붙어 다녀도 너무너무너무너무 붙어 있었고....
근데 사실 이거 다 내가 일주일 내내 혼자 생각한 거라서 만약에 내가 잘못 짚고 있거나 이렇게 얘기하는 게 이기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도 솔직하게 얘기해줘. 나 요즘에....... 너 언제쯤 괜찮아질까 신경 너무 쓰여서 기말 볼 때도 문제 읽는데 자꾸 너 생각만 나더라. 그러니까 너도 이거 읽고 든 생각이나 감정 그대로 얘기해 줬으면 좋겠고 아 근데 뜬금포로 생각 난 건데 정답 잘못 체크한 거 있으면 어쩌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이번 시험 망친대도 너 때문이라고 탓하는 게 아니고 그냥 내가 정신없고 그랬다고. 내가 생각보다 되게 너를 아끼나 봐.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썼어. 조금 후련하다. 다른 애들이랑은 이렇게 길게 쓰면 좀 오글거리는데 너랑은 원래 자주 이러니까 그런 거도 없네. 예상보다 너무 길게 쓴데다가 다시 읽으면 부끄러울 거 같아서 걍 보냄 오타 있어도 무시해 읽고 바로 답장 안 줘도 괜찮아. 그냥.. 아 모르겠다ㅏ... 난 정말 솔직하게 다 썼어 그게 다야. 주말 잘 보내!]
답장은 의외로 바로 왔다. 마찬가지로 동규 역시 길고 긴 메시지였다.
동규는 하림이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있던 것 같아 미안했지만 답장에 사과를 썼다간 하림의 진심을 튕겨 내는 것 같아 적지 않았다. 대신 하림의 말에 공감을 해 주면서 ‘너 말이 맞아. 슬럼프 태어나서 처음이야’라거나 ‘집에 아무 일은 없어. 그냥 마음이 좀 심란해.’라고 적고 그 심란함이 하림 때문은 맞았으니 ‘그럼 당분간만 너무 길게는 말고 조금 떨어져서 지내보자. 나 사춘기도 왔나 봐.’ 하고 썼다. 마무리는 이렇게 마음 써 줘서 고맙다고 적었다.
하림의 긴 메시지에는 동규의 마음을 여럿 때린 구절이 있어 동규는 처음 메시지 읽고 소파 쿠션을 찢을 뻔했다. 원래도 하림은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말이나 행동을 곧잘 하고 엄청 다정한 편이지만 이렇게 간지러운 말을 쓸 건 뭔지 싶고, 이렇게 따뜻한 편지를 받아 놓고 바로 답장하지 않으면 천벌 받을 것 같았다.
막상 보내고 나니 하림과는 다르게 너무 딱딱하게 보낸 건 아닌지 걱정됐다. 네 얘기도 잘 들었고 고맙고 월요일에 보자는 짧은 답장이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좀 나았으려나. 근데 답장 안 왔으면 안 오는 대로 왜 봐 놓고 아무 말 없는지 삽질할 게 뻔했다.
아 몰라. 고맙다고 했으니까 됐지 뭐.
동규는 자꾸만 드는 아쉬움을 애써 무시하고 하림이 보내 준 긴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나는 그 날 사실 책상 위에 그러고 누워있던 너한테 강아지나 고양이 보라는 말보단 놀려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이게 예술이 아니면 뭐지. 사과를 이렇게 낭만적으로 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 수가 있나.
‘나 요즘에....... 너 언제쯤 괜찮아질까 신경 너무 쓰여서 기말 볼 때도 문제 읽는데 자꾸 너 생각만 나더라.’
끌리는 숫자로 대충 다 찍고 엎어져 자고 있을 때 서하림은 내 생각만 했다 이거지. 그 서하림이, OMR 카드에 정답을 잘못 체크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을 정도로 그랬단 말이지. 문제 읽는데도 내 생각만 나고 그랬단 거지.
‘내가 생각보다 되게 너를 아끼나봐.’
주말 드라마에 몰입한 엄마한테 자랑하고 싶다. 아니면 베란다 창문 열고 소리치고 싶다. 엄마, 세상 사람들, 서하림이 나 엄청 아낀대. 난 걔 때문에 혼자 속으로 별별 생각 들어서 심란해 죽겠고 삶의 낙도 사라진 것 같은데 얘도 나처럼 똑같이 내 생각 하고 나 제일 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그런대.
“아 미치겠네.”
“그치. 지금 저 망할 놈이 바람피우는 꼴 보니 엄마 뒷골이 다 당긴다, 지금.”
“…….”
“저런 놈들은 고추를 뜯어 버려야 돼.”
“……어.”
은근슬쩍 자랑이나 좀 흘려 볼 생각이었지만 하필 드라마에서 찌질한 남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환장할 장면이 나와 동규는 방으로 피신했다.
조용한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눕고, 누워서 너무 좋았던 하림의 메시지를 또 읽었다. 그런데 아깐 분명 그렇게 좋았던 게 지금은 왜 이리도 울적해지고 슬퍼지는지 모르겠다. 천장에 붙어 방을 환히 비춰 주는 전등 빛에 괜히 눈가가 시리다. 왜 이렇게 하림과 서먹해졌는지, 제 속은 왜 상했던 건지 그 시발점이 된 기억을 떠올린 탓이었다.
분명 하림이 깜짝 마중을 나왔던 순간은 너무 좋았는데.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기분이 구려졌지만. 마치 지금처럼.
월요일이 되자마자 하림은 자리도 동규의 옆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밥도 원래 친하던 친구들이랑 먹었다. 종종 서준과 지호와 놀기도 했지만 그 사이에 동규가 껴 있어도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그 말은, 동규는 워낙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동규와 하림이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어졌단 뜻이기도 했다. 하림이 일요일에 서준과 지호에게 동규랑 이런 이런 얘기 나눴다고 미리 언질을 해 줬어도 두 사람은 살짝 하림과 동규의 눈치를 봤다.
서준과 지호는 처음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며칠 지나자 하림과 동규가 싸운 것도 아니고 인사나 적당한 말은 오가긴 하는 데다가 요즘 동규의 상태는 하림의 말마따나 슬럼프가 온 것 같았다. 한숨도 자주 쉬고 정신 놓고 멍 때리느라 옆에서 누가 넘어져도 잘 모르고 그 좋아하는 밥 먹는 시간에도 젓가락 쥔 손이 느려지며 허공을 보기가 일쑤였다. 거기다 어차피 다음 주면 방학이었다. 방학 동안 둘이 알아서 잘 풀겠지, 하며 서준과 지호는 시간에 모든 걸 맡겼다.
하림은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친구들과 노는 동안 잊고 있던 12월 1일을 기억해 냈다.
12월 1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하림이 제일 먼저 떠올렸던 생각은 ‘김동규랑 크리스마스에 놀아야지’였다. 이브 날부터 어디 놀러 가고 뭐를 먹고 아주머니께는 어떤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할지까지, 세수하고 씻고 아침 먹는 동안 완벽한 계획을 전부 다 세워뒀고 그렇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규가 슬럼프에 빠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그때 세웠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다 못해 아주 박살이 난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한숨을 푹푹 쉬어 봐도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김동규 이놈은 뭐 하느라 크리스마스에 연락도 한 번 없냐며 먼저 전화를 하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혼자 마음 정리, 생각 정리할 시간이 무슨 보름씩이나 필요해.
이러다 잘못하면 해를 넘기게 생겼다. 게다가 6일 뒤면 동규의 생일이었다. 이렇게 애매한 상황에서 동규의 생일을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생일은 챙겨 주고 싶은데.
“서하림 걍 그렇게 계속 휴대폰만 볼 거면 집에 가지?”
누군가와 전화를 마친 하늘이 하림의 등 뒤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하림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으나 아닌 척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하늘은 하림의 친가 쪽 친척으로, 하림과 동갑이지만 몇 달 더 빨리 태어나 집안 어른들이 있는 곳에선 하림이 누나라고 불렀다.
“계속 안 보고 있었어.”
“너 몰래 사귀는 여자친구 있는 거 아니냐는 소문 도는 거 알지.”
“어. 근데 그거 루머니까 정정 좀 해 줘.”
차라리 진짜로 사귀고 있으면 억울하지는 않겠다. 조금 삐딱하게 말이 튀어 나가 하림은 살짝 놀랐다. 물론,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흠. 그래?”
“하늘아 너 혹시.”
“나는 네가 이름으로 부르면 좀 쫄려. 왜.”
“너 이런 거 저런 거 만들 줄 안다고 그랬잖아.”
최대한 아무렇지 않고 특별한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게 얘길 해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이 좋은 하늘을 상대로.
“이런 거 저런 거가 뭔데.”
“쿠키나 빵 같은 거 굽는다며. 초콜릿도 전에 맛있게 잘 만들고.”
“아아, 어. 근데 요즘은 안 해서 다 까먹었을 걸.”
“아…….”
“왜? 누구 주게? 여자친구?”
하림은 쉿 하고 주위를 살짝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들은 것 같진 않다.
“아니, 없다니까.”
“그럼 갑자기 왜 쿠키 얘길 꺼내는데?”
“나 좀 도와줘.”
“그럼 나는 네 여자친구 누군지 알려 줘. 내가 감도 못 잡겠는 거 보니까 너 중딩 때 다니던 학원 애 아니면 영재원 애다. 영재원 애면 지방에서 학교 다닐 수도 있겠는데.”
“야. 없다고.”
“오, 정색하니까 쫌 무섭다?”
“지금 좀 진심으로 화나려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하늘이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빠르게 사과했다.
“근데 뭐 만들고 싶으면, 아니 그 전에 네가 직접 손으로 뭘 만든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긴 한데 아무튼 집에 아주머니보고 알려 달라고 하면 되는데 왜 굳이 나한테?”
“아주머니랑 같이 케이크 만들었다가는.”
“케이크?”
깜짝 놀란 하늘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하림이 다급하게 하늘의 입을 막았다. 하늘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진짜야?” 하는 소릴 냈다. 입이 막혀 있어 코로만 소릴 냈는데 아마 정확할 것이다.
“……어. 아주머니랑 같이 만들면 이모님이랑 엄마랑 아빠랑 다 알게 되잖아. 근데 혼자서는 할 자신이 없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 찾기엔 시간도 너무 없고 나 이런 쪽 잘 몰라서 어디서 사람 찾아야 하는지 감도 안 와.”
“미친 거 아니야?”라고 하늘이 콧소리로 얘기했다.
“좀 도와줘. 너밖엔 이런 부탁 할 사람 없어. 큰아빠랑 큰엄마 제주도 놀러 가셨다며. 하준이 형도 중국.”
“야!”
손을 막고 있던 하림의 손을 쳐낸 하늘이 목소리를 낮게 가다듬었다.
“진짜 너 무슨 고백하게? 너는 내가 10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로 프러포즈하는 것보다 빈손에 얼굴만 있어도 성공 확률 100프로라고 얘기 안 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게 아니긴! 존나 중요하지! 와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어떤 애야. 이 얼굴을 거부한 게? 갑자기 빡치네. 야 네가 뭐가 못나서 케이크를 갖다 바쳐? 누가 내 동생.”
“아 진짜 조용히 좀.”
하늘은 다시 입이 막혔다.
“1절만 해 제발.”
그리고 바로 하림의 손을 뗐다.
“알았어. 아니 근데 좀 화나잖아. 원래 내 새끼 못나서 까더라도 내가 까는 건데 네가 못났냐? 진짜 누구야. 누군데 이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귀한 손으로 손수 서하림이 케이크를 만들게 해?”
하림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하늘은 신난 상태라 괜히 또 입을 막거나 그만두라고 했다가는 입에 스피커라도 단 것처럼 쩌렁쩌렁 10절까지 할 거였다. 진짜로 화내면서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테지만 이건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무시하고 빨리 뜨는 게 답이다.
“아, 알았어알았어. 쏘리쏘리쏘리. 케이크 어려운 건 좀 그렇고 그냥 기본으로 시트 구워서 생크림 케이크 만드는 거면 할 수 있어.”
“……진짜지.”
“그럼. 누나 믿지?”
하림은 대답 대신 눈동자를 아래로 떨궜다.
“야, 믿어라. 맛있고 예쁜 케이크 안 만들고 싶죠, 아우님?”
“죄송합니다. 만들고 싶어요.”
“근데 나도 좀 까먹어서. 언제 줄 건데?”
“31일 아침이나 30일 저녁.”
“용도는? 그러니까 문구나 뭐 그런 거 쓸 때 도움 되게.”
생일이라고 했다간 김동규라는 게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겠지.
“그냥 어…….”
머리 굴리는 동안 하늘이 능글맞게 웃으며 ‘뭘 그렇게 고민해, 고백용이잖아.’라고 놀릴 줄 알았으나, 하늘은 생각보다 가만히 앉아 진득하게 기다려 줬다.
“새해맞이 응……원?”
“응원?”
“아니면 음, 위로? 격려?”
“아하. 이해해쓰. 아 그러면 초코 빵으로 구울까 시트? 우울할 땐 초콜릿이지.”
“완전 좋아. 걔 단.”
“계단?”
실수로 ‘걔 단거 좋아해’라고 넙죽 고해바칠 뻔했다. 순간 하림은 온몸의 땀구멍이 다 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하늘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하림은 모르는 베이킹 이야기를 늘어놨다.
“계단 좋지. 차근차근 계단 올라가듯 하면 네가 원하는 목표를 이룰 거다 뭐 그런 느낌으로 만들고 싶은가 본데. 의도 괜찮고 만들기도 어렵진 않고 계단 뭐 시트 직사각형으로 구워서 자르면 될 것 같긴 하다. 근데 꼭 계단 모양 해야 돼? 완성된 게 그렇게 예쁘진 않을 거 같아서 비추다, 난.”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 하늘아.”
“응.”
“혹시 곰돌이 모양은? 그건 괜찮지? 안 어렵고 귀여울 거 같아.”
“가능하고 나도 귀여울 거 같긴 한데 갑자기 좀 귀찮아졌어. 귀엽게 하려면 반구 모양으로 하는 게 제일 좋거든? 근데 그러려면 눈 코 입 그리기 어렵고 귀찮아.”
“반구? 나는 그냥 평범한 케이크빵이랑 아주 작은 케이크빵 한 개 더 구워서 그거 반으로 잘라 가지고 귀처럼 이렇게 위에 평면으로 붙이는 그런 거 생각했는데.”
하림은 두 손을 움직여 하늘의 이해를 도왔다.
“아.”
“어려……워? 이상할까? 반구가 더 나아?”
“아니, 그렇게 해도 돼. 그럼 그렇게 하자. 근데 케이크를 그렇게 크게 만들게?”
조금 전 하림이 케이크 설명을 위해 움직였던 손동작이 평범한 케이크 크기를 훨씬 웃돌아 물었다.
“이왕 만드는 거 크게 만드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케이크는 쉽게 물려서 그렇게 크게 만들면 다 못 먹고 버릴걸.”
“음……. 알겠어.”
“곰은 흰 곰이 좋아 아니면 갈색? 핑크? 노랑도 있어. 생크림도 색 온갖 거 다 할 수 있거든.”
“갈색 곰!”
“그럼 초코 생크림 써야겠다.”
“헐. 완전 좋아. 천재야, 서하늘.”
“그럼 내일 한 번 만들어 볼게. 간만에 오븐 쓰네.”
하늘이 작게 중얼거리다가 뭔가 생각난 듯 하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야야, 30일 아침부터 시간 비워 놔.”
“아침부터? 왜?”
“시트도 다 네가 반죽하고 굽고 할 거 아니야?”
“어, 응.”
“그래도 너는 초심자인데 망칠 수도 있으니까 넉넉하게 아침부터 만나자.”
“안 어렵다며.”
“나는 안 어렵지.”
“나도 안 어려워.”
“그건 모르는 거지. 혹시 알아? 서하림이 요리에는 똥손일지.”
“일리 있는 말이야. 안 해 봐서 반박도 못 하겠다.”
“오키. 그럼 내일 한번 만들어 보고 사진 찍어서 보내 줄게.”
그다음 날 하늘이 보내 준 사진은 하림의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하림이 얘기한 형태보다 하늘이 말했던 반구 형태의 케이크가 너무 귀여워 하림은 하늘에게 아부의 말을 20문장쯤 보냈다. 하늘이 더 해 보라고 생색을 내도 다 받아 줬다.
30일엔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져 하늘의 집에 쳐들어갔다. 하림은 하늘이 예상한 아침인 9시보다 두 시간이나 빨리 일어났다. 욕을 많이 먹긴 했지만 하림은 벅찬 마음뿐이었다.
케이크 만드는 일은 예상보다 어려웠고 생각보다 즐거웠다. 하는 김에 엄마 아빠 줄 바나나머핀도 만들었는데 정확하게 계량하는 건 꼭 어릴 때 배웠던 소금물 농도 구하는 문제를 3D로 하는 기분이었고, 반죽이 부풀거나 오븐에 구워지는 건 화학 실험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도 뭐 하나 이렇게 먹을 걸 만들어 줘 본 적이 없었는데 인생 첫 케이크를 다른 사람도 아닌 동규에게 그것도 생일 선물로 주기 위해 만들어서일까. 시트가 누렇게 타고 생크림이 지나치게 달아도, 녹은 초콜릿을 테이블에 죄다 엎거나 글자가 이상하게 써져도 다 즐겁기만 했다. 하늘의 당부도 잊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줄 거면 냉장실에 보관하다가 냉동실에 살짝 조금만 넣어 놓고 얼지는 않게! 케이크는 차갑게 먹는 게 좋으니까 나가기 전에 30분 정도만 냉동실에 넣었다가 줄 때 꺼내 가고 내일 줄 거면 냉장실에 하루 종일 넣어 놨다가 줘.’
지호에게 확인한 동규의 오늘과 내일 스케줄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기였으니 갑자기 찾아가도 집에 있을 거였다. 하림은 동규의 생일을 10분 남겨 두고 찾아갈 생각이었다. 11시 지나면 졸려 오긴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고 내일 좀 늦게 일어나면 된다.
11시 35분, 하림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부모님도 일찍 주무시는지 벽에 달려 있는 몇 개의 등만 아주 약하게 불을 켜 두고 집은 어두웠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디뎠다. 이 시간에 어디 나가는 게 걸리더라도 상관은 없는데 그냥 집안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평소엔 몇 개 되지도 않게만 생각했던 계단이 80개쯤은 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또 주방에 들렀다가 현관문까지 가는 것도 너무 길었다. 이 집을 털러 오는 도둑도 이보다는 조심스럽지 못할 것이다.
하림은 케이크 상자를 꺼냈을 때부터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막상 이걸 주려니까 너무 부끄럽고 무슨 반응 보일지 궁금한데 또 안 궁금하기도 하고. 갑자기 눈치 없는 놈이 이걸 네기 왜 만들었냐고 캐물으면 솔직하게 얘기를 할지 말지, 얘길했는데 만에 하나라도 나는 네가 날 그런 식으로 보는 줄 몰랐다고 이상하게 쳐다보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동규와 사이는 이대로 멀어지는 건지 친구로라도 지내자고 매달려야 하는 건 아닌지 온갖 생각이 폭풍처럼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하늘의 말처럼 얼굴 들이밀고 고백하면 실패할 할 것도 없겠다 싶은데 그건 여자애들 얘기고 동규는 같은 남자니까. 아니 근데 잘 생각해 보면 남자애들한테도 고백 비스무리한 걸 받은 적 있는 하림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학년 때 일인데 그 일로 하늘이 얼굴로 세계 평화 이루겠다고 며칠을 내내 놀리기도 했었고 그 전에도, 그보다 더 어린 유치원 다닐 때도 여자친구들과 남자친구들에게 하트 편지를 그렇게…….
됐다. 하림은 쓸데없는 생각을 애써 지우며 택시에 올라탔다. 집에서 나오는 데 최대 3분을 예상했지만 훨씬 초과한 10분을 소요했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동규의 집으로 가는 10분이 하림의 인생에서 제일 긴 10분이었다. 많이 가 봐서 익숙한 길도 건물도 도로도 전부 낯설게만 느껴지고 택시 기사에게 다시 아까 그 아파트로 돌아가 달라는 말이 너무 하고 싶어 입술이 자꾸만 들썩거렸다.
“아 진짜 미쳤다…….”
동규의 생일까진 겨우 5분 전. 하림은 동규의 번호를 액정에 띄워 두고도 통화 버튼을 누르질 못했다. 추워 죽겠는데 그것보다 얼굴도 몸도 다 뜨거워 자꾸 목이 탔다.
“아, 씨…… 하……. 하자 해, 서하림 해. 얘 지금 안 자고 있어. 해, 하자. 새벽에 자잖아 얘.”
두 눈 꾹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버튼 누르면 꿈에서 깨는 상황이었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통화 연결음이 몇 번 들리다가 동규가 전화를 받아 버렸다.
-서하림?
전화 받지 말았으면 하고 그렇게 바랐는데 결국 동규가 받아 버린 상황에 하림은 딱 죽고만 싶었다.
-서하림, 너 맞아?
“어, 나야. 혹시, 음. 자고 있었어?”
-응…… 그렇긴 한데…….
잠에서 막 깨어 한참 낮아진 목소리에 하림은 뜨거워진 얼굴을 가리고 입술만 깨물었다.
-왜 그래……. 밖이야? 왜 안자고 있어? 어디 아파? 병원이야?
“아니! 근데.”
-응.
“너 혹시 괜찮으면 지금 나올 수 있어?”
-지금?
“어 나 지금…… 너네 집 앞이야.”
-우리……집? 지금? 집 앞이라고?
“어어.”
-갑자기 이 시간에 왜, 아니 잠시만.
“자고 있는 거 깨운 거면 미안해. 그냥 계속 자고 싶으면 자. 미안. 내일 다시 올게. 저녁 약속 있어서 집 가는 길에 지나가다가 그냥 여기 아파트 지나가는데 네가, 그, 아무튼 피곤하면 내일 와도 되니까 전화 끊어.”
하림은 너무 쪽팔려서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당분간 거리 두자고 한 건 저였으면서 생일이라고 케이크까지 만들어 온 것도 부끄럽고, 늦게 자는 동규가 오늘은 일찍 자고 있어서 그걸 깨운 것도 부끄럽고 동규가 자길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게 제일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에 몸부림치고 있는데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액정 위로 뜬 동규의 이름을 보고 하림은 세상이 정지한 듯했다.
-전화 왜 끊어.
“더 자. 미안해 깨워서. 갑자기 여기, 집 앞에 나오라고 하니까 이상, 뜬금없지. 나도 알아.”
하림은 통화 소리를 최대한으로 키우고 귓가로 더 바짝 휴대폰을 붙였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어차피 12시 좀 넘어서 일어날 생각이었어. 잠시만…… 나 세수만 하고.
“어어. 그래.”
-아니 세수 말고 머리도…… 양치도 아니, 어…….
자다 일어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지 느린 말투에 하림은 웃음이 나왔다. 저를 보겠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씻고 오겠다고 할 것 같다.
“아예 샤워까지 하고 오겠다고 하겠네.”
-너…… 진짜로 독심술 쓰지.
“노코멘트.”
이래야 김동규지. 하림은 거세게 뛰던 심장이 조금 차분해진 것을 느꼈다. 딱 지금 기분 좋은 정도로, 적당히 피가 뜨거워질 만큼.
-그럼 샤워 진짜로 해도 돼?
“아니? 나 추워.”
-아…… 그럼 집에 들어올래?
집에 들어갔다간 뭔지는 잘 몰라도 사고 하나는 칠 것 같아 하림은 칼같이 선을 그었다.
“대충 하고 나와. 어차피 밤이라 누구 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그래도…….
“빨리 와. 추워 죽겠다.”
-그럼…… 세수는 해도 돼?
하림은 귀에 파고들 정도로 붙이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트려 놓고 소리를 죽여 크게 웃었다. 아, 진짜 너무 귀엽고 좋은데 김동규도 나 좋아해 줬으면 소원이 없겠다.
“세수까진 허락해 줄게. 나 진짜 추워. 빨리 나와. 너네 집 앞에 놀이터야.”
-응. 1분만 기다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는 지나 있었다. 이번엔 하림의 인생에서 가장 긴 1분이 시작됐다. 107동 앞 벤치에 케이크 상자 올려 두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오일 손난로 두 개를 한 시간 전에 미리 불을 붙여놔 주머니 속은 아주 따뜻했다.
“집에서 10분만 더 일찍 나올걸.”
잠시 뒤 아파트 1층 자동 센서 불이 켜지고 동규가 나왔다. 하림이 손을 흔들기도 전에 동규가 하림을 발견하고 놀이터로 뛰어왔다. 하림은 케이크 앞에 바로 서 동규가 상자를 볼 수 없도록 가렸다.
“안녕!”
겨우 사흘 전에 방학식 했고 시간상으로는 마지막으로 본 지 약 60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건데 이렇게 반가운 일인가.
“응. 춥지?”
“아니 별로. 이거 가져와서. 그리고 오늘 종일 별로 안 추웠어.”
하림은 주머니에 하나씩 넣어 둔 손난로를 꺼내 흔들었다. 동규가 뭔지 궁금해하길래 하나를 동규의 손에 쥐여 주었다.
“따뜻하지. 비싼 거다, 기름으로 불 태워서 쓰는 거라.”
“손은 따뜻해도 얼굴이…….”
“너야말로 얼굴이 그게 뭐야. 머리 다 뜨고 눈도 엄청 부었네. 자기 전에 뭐 먹고 잤어? 진짜로 세수만 하고 왔나 봐.”
“아, 응.”
하림은 푹 자고 일어나도 그렇게 잘생기고 예쁘던 걸 떠올리며 동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급히 쓸었다. 자기 전에 뭐 먹고 자긴 했지만 울고 잤더니 눈이 부은 거였다.
역시 그냥 하림을 집에 들어와서 기다리라 그러고 제대로 씻을 걸 그랬다. 아니면 선글라스나 마스크라도 쓸걸. 최소한 모자라도. 추운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 생각하니 세수도 오래 할 수가 없어서 대충 하고 그냥 그대로 뛰쳐나왔다. 신고 나온 운동화 안은 맨발이었다.
“뭐…… 할 말 있어? 그럼 빨리 하고 집에 가. 너무 춥다.”
여전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동규가 물었다. 하림은 보고 싶어서 검지와 중지 사이는 떼 눈은 잘만 보였다.
“아 그게 음. 일단.”
“…….”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갑자기 와서 미안하고 당분간 좀 서먹한 상태 유지하자고 했는데 이렇게 말도 없이 약속 깬 것도 미안하고. 근데…… 근데 동규야.”
하림에게서 성 떼고 이름만 불린 게 얼마만이더라. 열 살 넘어서부터는 없던 것 같다. 당당하고 거침없는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하림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가 입술을 깨물기를 반복했다. 동규는 하림이 다정하게 이름으로만 불러 준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핑 돌겠는데 하림이 예쁜 입술을 자꾸 가만두지 않아 좀 괜찮아지던 얼굴이 다시 뜨거워졌다.
“이거. 생일 선물. 생일 축하해.”
깜짝 선물이라며 하림이 등 뒤에서 꺼내 준 작은 상자를 얼떨떨하게 받아 들었다. 동규는 그걸 열어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하림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설마 아무리 네가 김동구스러울 때가 있다고 해도 생일인 걸 까먹은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리고 그 김동, 그거 그만 써.”
“아, 왜. 귀여운데. 빨리 열어 봐.”
빨리 보라고는 했지만 하림은 부끄러워 눈을 살짝 감았다. 케이크도 케이크지만 케이크 판에 쓰여 있는 생일 축하 글씨가 걱정됐다.
하늘의 집에서는 한글 공부하듯 글자 공부 열심히 하고 집에 와서는 문장을 연습했다. 쓸 때는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동규가 본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케이크판에 잘 써 놓은 글자들이 삐뚤빼뚤한 건 아닌가 하림은 심각해졌다. 이상하게 쓴 이건 뭐냐고 동규가 태클을 걸 것만 같다. 갑자기 소매치기가 나타나서 케이크 상자 채 갔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봤다.
“짜잔! 서하림 인생에 다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핸드메이드 1호 곰규 케이크!”
무척 귀여웠지만 손수 만든 티는 나는 갈색 곰돌이 케이크에 동규는 얼떨떨했다. 베이컨 몇 장 굽는 걸 요리했다고 뿌듯해하던 하림이 이걸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진짜 네가 만든 거야?”
“서하늘이 도와주긴 했는데 내가 초콜릿도 직접 중탕해서 브라우니 시트 반죽도 하고 오븐에도 직접 넣고 생크림도 직접 거품기로 손수 했다가 아 근데 그건 기계의 도움을 받았어. 그리고 여기 귀도 내가 붙였고 생크림 바르는 건 서하늘이 좀 도와줬고 눈이랑 코랑 입은 서하늘이 그린…… 아, 붙이는 건 내가 다 했어. 이게 어, 그리는 거보다 붙이는 게 더 힘든 거더라고. 이게 그냥 일반적인 평범한 케이크가 아니라 반구 형태고 그래서 그걸 붙인 건데…… 근데 이거 글자는 내가 연습 많이 해서 썼어! 아 말하고 나니까 서하늘이 많이 도와준 것처럼 들리는데 전혀 아니고 내가 거의 다 만들었고 서하늘은 옆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만 했어.”
곰돌이의 구석구석을 가리키며 조곤조곤 설명하는 하림의 목소리도 예쁘고 손가락도 예쁘고 고개를 살짝 숙이느라 보이는 정수리나 잘 빠진 콧대도 다 예쁘다. 어떻게 서하림은 한 곳도 안 예쁜 구석이 없지.
“진짜, 진짜로 내가 만들었어. 진짜야.”
심지어는 직접 썼다는 글자가, ‘깅동규 생일 축하해!!’라는 조금 엉성한 문장도.
“이거 곰돌이 머리에 있는 고깔모자랑.”
생일이라고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 한 번도 없는데 당사자가 챙기지 않는 생일을 이렇게까지 챙겨 준 마음씨까지 다 예뻤다.
그냥 아침에 엄마가 미역국 끓여 준 거 먹으면서 축하받고 엄마 안아 주면서 ‘엄마 17년 전에 나 낳으면서 고생 많았어’ 하는 간지러운 말을 하고, 저녁은 유명한 맛집에서 저녁을 먹는 게 동규의 생일이었다. 전에는 엄마도 동규에게 선물을 이것저것 주긴 했는데 워낙 반응이 시큰둥하기도 하고 맛있는 저녁 선물을 제일 좋아해 늘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간간이 몇 명의 친구가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오고 때론 기프티콘으로 케이크도 보내 주곤 했지만, 오늘 하루만 해도 생일인 사람이 얼마나 많을 텐데 생일이라고 요란 법석 떠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이런 생일이라면, 이런 근사하고 멋진 데다 세상에 다시없을 생일 선물을 받는다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생일이고만 싶다.
“하트는…… 내가 열과 성을 다해서 그린 거다.”
“응, 잘 그렸어. 고마워.”
하림이 제 입으로 자기 집이 어떤 집이고 어떻게 자랐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질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의사에다 집에는 유모님 따로, 가정부 따로 있고 입맛이 까다로워 급식도 가려 먹는 거나 돈 쓰는 씀씀이가 큰 것, 이 근방에서 제일 비싸다는 복층 아파트에 살고 누가 챙겨 주는 걸 당연하게 받는 도련님 같은 분위기나 라면도 끓여 본 적 없을 거라는 하림의 친구들 이야기를 미루어 봤을 때 하림이 직접 이걸 만들었다는 건 꽤나 큰 사건이지 않을까.
물론 전에 같이 간식 만들어 보긴 했지만, 근데 그건 그냥 베이컨 굽는 게 하림이 했던 전부였고 그건 요리라고 지칭한다거나 베이컨을 만들었다기엔 조금…….
“정말…… 진짜 잘 그렸다.”
동규는 하림을 처음 본 그날의 기억부터 시청각실에서 자주 마주칠 때마다 짤막하게 나눴던 대화들, 언제쯤 같은 반이 될까 기대도 했다가 조금 실망도 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같은 반이 되어 이렇게까진 친해질 줄 몰랐던 3월까지.
누가 보면 고작 케이크 하나에 무슨 의미를 그렇게 부여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하림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분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하림의 손길 하나 행동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그 모든 시간들이 케이크 하나로 정리가 됐다.
벅차고 설레는데 그만큼 슬픔이 커다란 파도가 되어 끝없이 밀려왔다.
“……정말로.”
“야, 너 울어?”
“나 이거…….”
하림이 직접 그렸다는 하트에도 괜한 의미 부여하고 싶고. 아니 그 전에 이런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걸 생일 맞춰서 직접 만들었단 것부터 오해를 하고 싶은데 해도 되는 건지, 그보다 더 전에 다른 친구들은 이름으로만 부르는 하림이 자신에게만 귀여운 애칭을 지어서 불러 주는 것부터 다 그냥이 아닌 특별한 이유를 붙여도 되는 걸까.
“이거 아까워서…….”
“야 잠깐만. 감동 먹은 건 좋은데, 울 건 진짜 예상 못 해서 휴지가 없는데. 아 어쩌지.”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먹어.”
미간만 살짝 찌푸린 채 눈물만 뚝뚝 흘려대는 동규 때문에 하림은 엄청 당황했다. 집에 얼른 보내야 될 것 같아 하림은 우선 급한 대로 손으로 동규의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엄지로 눈물을 닦아 주니 동규가 아예 두 눈을 감고 눈물을 더 흘려 대는 게 아닌가.
“김동규, 나 봐 봐. 진정 좀 해.”
동규가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벤치로 내려놓자 하림은 말없이 우는 동규의 눈물을 닦았다. 손난로를 계속 쥐고 있으니 눈물 닦아 주기가 불편해 주머니에 대충 손난로를 쑤셔 넣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계속 닦자 눈물이 겨울바람에 점점 식는 것 같고 손가락도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너 빨리 집에 들어가.”
열어 놓은 케이크 상자를 정리하고 하림은 동규를 끌어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잡아 줘도 타지 않고 계속 울고 있길래 하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도 올라탔다.
하림은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동규가 이렇게까지 울어대니 덜컥 겁이 나서 왜 우는지 물을 용기가 안 났다. 내가 잘못을 했든 김동규가 잘못을 했든 뭔가 또 안에서 쌓여서 터졌겠거니 싶고 진정되면 알아서 얘기해 줄 거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게다가 이번엔 서로 떨어져 있기로 했던 때였으니 이렇게 울고 나면 그 동안 뭐 하고 지냈고 무슨 생각하고 지냈는지도 얘기해 줄 거라 믿는다. 하림은 겁도 났지만 동규를 믿어서 그냥 케이크 상자만 힘 있게 쥐었다.
“……쪽팔려.”
“눈물 뚝 하고 얘기해. 도어록은 네가 열어. 나 비밀번호 몰라.”
하림의 말에 하림의 뒤에 서 있던 동규가 손을 뻗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하림이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동규의 등을 밀었다. 그리고 동규의 손에 상자를 건넸다.
“나 간다. 화장실 가서 세수부터 해. 자고 일어나면 연락할게.”
아줌마가 깰까 봐 하림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았다. 하림이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동규는 조금 더 현관에 선 채로 있다가 신발을 벗었다. 운 거 보인 것도 쪽팔리고, 고백도 못 하고 차인 것 같아 속상해 죽겠는데 집은 또 엄청 따뜻해서 하림이 준 케이크 녹을까 봐 화장실이 아닌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
“하…… 진짜 엄마…… 아.”
저녁에 자고 있는 동안 엄마가 장을 봐 왔는지 냉장고가 한가득 차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장을 왜 보고 정리는 왜 안 하고 잔뜩 우겨만 놓은 건지. 케이크 상자를 넣을 공간이 하나도 없다. 동규는 그것도 서러워 겨우 그친 눈물이 또 터졌다.
“아 이거 씨발 언제 정리해, 아…….”
참아보려 해도 욕이란 욕이 다 튀어나왔다. 냉장고를 가득 채운 식품들 중 3분의 1만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씩씩거리고 있는데 화장실 가려고 나온 엄마와 마주쳤다.
“김동규…… 뭐 해?”
“엄마!”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아 왜 엄마는 오늘 장을 봐서…….”
“아침에 미역국 할 거 사면서 우리 아들 좋아하는 거 다 해 주려고 이것저것, 너 울어? 동규야 왜,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왜…….”
“아니, 엄마는 그냥 우리 아들 생일이니까 점심에도, 아니 아가 어디 아파? 왜 이렇게 울어, 응?”
냉장고의 빈 곳에 케이크 상자를 넣어 두고 동규는 벌떡 일어났다. 아직 바닥엔 꺼내 놓은 식품들이 굴러다녔다.
“몰라. 그냥 엄마도 싫고 냉장고도 싫고 다 싫어. 왜 냉장고 이렇게 작은 거로 샀냐고…….”
“뭐가 작아. 네 키보단 작아도 이거 평균 크기인데, 동규야 왜 이렇게 울어? 진짜 아픈 거 아니야?”
엄마 품에 안긴 동규는 냉장고 타령을 하며 울었다. 워낙 순해 젖 먹던 시절에도 잘 울지 않고 속 썩인 적 한 번 없는 아들이 왜 갑자기 새벽에 냉장고 정리를 하질 않나, 요즘은 가정집도 냉장고를 두 개씩 두던데 왜 엄마는 하나만 샀냐, 사도 이왕이면 큰 걸 사지 왜 작은 걸 샀냐 하는 이상한 꼬투리를 잡으며 우는지 동규의 엄마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