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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은 2학기 중간고사로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물리 과학에 대한 해외 다큐멘터리나 기사, 칼럼, 연구들을 체크했다. 동규는 옆에서 그걸 보고 있다 보면 하림이 하루를 24시간이 아니라 50시간쯤으로 늘려 쓰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중간고사가 일주일도 남지 않아 한창 공부하던 중 갑자기 뭐 생각나는 게 있다며 패드를 켜 들더니 침대에 엎드리고 누웠다.
“다 했어?”
“아아니.”
“바빠?”
“좀?”
뭘 그렇게 심각하게 읽는지 궁금해 동규도 침대 한쪽에 앉아 슬쩍 봤다. 영어가 잔뜩 보여 머리를 살짝 털었다.
“궁금해서 와 놓고는 영어 써 있으니까 흥미 떨어진 얼굴인데.”
“……아니야.”
“정말?”
“짧고 쉽게 설명해 주면 들을게.”
“쉽게 말하면 블랙홀도 은하가 합쳐지듯 병합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건데 국내외로 이 이슈가 좀 핫해. 연구 방법으로는 중력파나 블랙홀 공전 운전을 관측하……는 건데 이 얘기는 생략하자.”
“좋은 생각이야.”
이제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인데도 관심사도 확실하고 꿈도 뚜렷한 하림이 부러웠다. 6월에는 특목고 학생도 아닌데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상도 받았다. 잘은 몰라도 비특목고 학생은 참여도 거의 못한다는데 거기서 상까지 받았다는 하림이 무척 대단해 보였다. 하림의 친구들도 하림을 엄청 추켜세웠다. 여름방학에도 무슨 과학 여름 학교인가 그것도 다녀오고.
물론 동규도 문학 캠프에 다녀왔다. 거기서 만난 친구들, 선배들은 다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긴 했는데 동규처럼 순수문학을 하려는 학생들은 극소수고 방송 작가나 드라마 작가를 하겠다는 게 대부분이었다. 다른 조에 시인이 꿈이라는 3학년 누나가 있다고 듣긴 했지만 어차피 다른 조라 말을 걸 용기가 없어 누군지 알아보지도 않았다.
사실 동규는 재밌어서 글 쓰고 있긴 한데 누군가가 소설가나 시인이 될 거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네’ 하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직업 자체의 문제였다. 해마다 책 읽는 인구가 줄어든다는 내용이나 대한민국 1인 평균 독서량이 바닥을 친다는 기사가 수시로 나오니까 만약 정말로 작가가 되더라도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대학에 갈 머리는 안 되는 거 같고 사무실에 하루 종일 앉아 일하는 사무직은 하기 싫고. 글은 계속 쓰고 싶으니까 공무원 시험 봐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엔 글 쓰며 투잡하는 삶이나 살아 볼까 뭐 그런 단순한 계획이 전부였다. 그런데 공무원 시험도 사람들이 몇 년씩 매달리던데 과연 그 엄청난 경쟁률을 뚫을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다.
뭐 하고 살지. 그냥 어릴 때 아빠 따라서 유도나 뭐 다른 운동이라도 할걸.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면 운동선수 연금 200만 원 바로 채워지던데.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은 운동이 뭐가 있지. 아기 스포츠단 때부터 수영으로 쌓아 온 기본 체력과 근력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나쁘지 않지만 달리기는 느리니까 할 수 있는 운동의 범위가 좁을 것이다. 한번 제대로 알아봐야겠다.
“너는 뭐 해. 이번 달은 시험 끝나는 주 주말부터 매주 백일장 나간다며.”
“응. 그래서 이번 주까지는 놀려고.”
“시험이 담 주 화수목금인데 주말까지 논다는 걸 보니 이번 시험도 안 봐도 123321이군.”
“111111은 어때.”
“아 대박. 그것도 능력이다 능력. 수행도 다 안 하는 거네.”
“원래도 잘 안 하긴 했어.”
“하긴. 수행 하나라도 했으면 123321이 아니라 11, 12, 13, 13, 12, 11점 받았겠다.”
“고득점이네.”
“미친.”
어이도 없고 공부에 하나도 얽매여 있지 않은 게 신기하기도 해서 하림은 웃음이 터졌다. 제일 웃긴 건 고득점이라고 잘 받아친 동규였다. 하도 놀렸더니 이제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칠 줄도 안다.
하림은 중간고사에서 전 과목 만점은 하지 못하고 세 문제를 틀렸다. 모두 1, 2점짜리 문제였다. 동규가 낮은 배점 문제만 틀린 건 대단한 게 아니냐고 했다가 한 소리 들었다. 차라리 배점 큰 문제에서 틀리면 어려워서 틀렸구나 하겠지만 1점짜리 그 쉬운 걸 틀리면 더 자존심이 상하는 거라고.
“임계온도문제 이건 그냥 전교생보고 1점 가져가라고 나온 문젠데 어떻게 이걸 틀렸지. 아, 진짜 바보 아니냐고.”
동규는 이해할 수 없는 전교 1등의 고뇌였다. 동규는 1점짜리라도 찍어서 맞추면 그날 시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니까.
“다들 소문 들어서 알겠지만 수학여행이 급하게 취소가 됐어요. 가정 통신문 보면 자세하게 나와 있지만 뉴스에 나온 것처럼 지금 제주도에 눈병이 심하게 도는데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눈병이 잡히질 않고 해서 제주도청에서 관광객 방문 자제 공문을 때리고 제주도로 수학여행 오는 학교들도 다 취소를 해 버렸다, 이 말이니까 월요일까지 집에 가서 너희들 의견이랑 부모님 의견 체크해서 가져와. 학부모 의견 체크 안 하면 일일이 다 전화 돌려야 하니까 되도록이면 한 번에 가정 통신문으로 끝내자.”
시험 끝난 날이지만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았다. 다음 주 수목금으로 예정되어 있던 수학여행이 갑작스럽게 취소된 탓이었다. 가정 통신문엔 수학여행 대체 방안으로 ‘3일 자율 수업, 같은 날짜의 국내 타 지역, 추후(다음 달 초 예정) 국내 타 지역 또는 해외’라고 적혀 있었다.
동규는 고민도 하지 않고 세 번째 칸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학부모 의견 칸도 역시 세 번째 칸에 동그라미를 미리 체크하고 엄마한테는 사인만 하라며 가정 통신문을 내밀었다. 동규는 학생들 의견이 2 아니면 3에 몰릴 것이라 확신했다. 하림에게 물어보니 하림은 1번을 체크했다고 했지만 동규의 예상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 월요일 종례 시간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두 명 차이로 자율 수업 쪽에 제일 많은 의견이 모아져서 올해 수학여행은 자율 수업으로 대체됐고 대신에 가정 통신문에 안내됐던 대로 이 3일은 현장 학습 허가서 다 받아 주니까 혹시 결석하거나 여행 갈 사람 있으면 지금 나눠 주는 현장 학습 허가서랑 부모님 동의서 받아 가지고 내일까지 꼭 제출하도록. 하루만 등교하거나 이틀만 등교할 사람도 어쨌든 쉬는 날은 공결 처리하려면 내일까지 꼭 내야 돼. 출석부 개떡으로 만들어도 상관없으면 내지 말고.”
가장 마지막 줄에 앉은 동규의 자리까지 현장 학습 허가서와 부모님 동의서가 도착했다. 동규는 참담한 얼굴로 두 장의 종이를 바라보았다. 하림은 그런 동규의 종이를 대신 반으로 접어 주었다.
“빨리 가방 싸서 집에 가자. 뭘 그렇게 세상 무너진 표정이야.”
“아니…….”
“그렇게 제주도가 가고 싶었어?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 같네.”
“아니, 그게…….”
“헐. 설마 진짜야?”
“아니…… 가 보긴 했는데.”
“그럼 왜? 친구들이랑 2박 3일 못 놀아서?”
“다들 같은 이유로 자율 수업 안 고를 줄 알았어.”
“학교에서 가는 것도 좋은데 친한 애들이랑만 놀러가도 상관없어서 다들 그거 골랐을걸. 서하늘도 친구들이랑 싱가포르 놀러간대. 주말 끼면 5일 쉴 수 있잖아. 싱가포르에 걔네 삼촌 살거든? 홍콩 하루 들렀다가 싱가포르 간다나 봄? 홍콩 딤섬 맛있지.”
“너도…… 어디 놀러 가?”
“글쎄. 너는?”
“몰라.”
“음.”
하림은 주말 내내 친구들에게 왔던 메시지들을 떠올렸다. 상해 가자, 발리 가자, 홍콩 가자, 부산 가자, 여수 가자 기타 등등.
“나는…… 다음 달 올림피아드 2차 준비 때문에 그냥 집에서 쉴까 싶은데. 간단하게 전시회도 가고. 뮤지컬 보러 가도 좋겠지. 근데 인기 있는 작품은 좋은 자리가 남아 있나? 영화 보러 갈까 싶어도 아이맥스도 웬만하면 다 매진일 텐데.”
“어디 안 놀러 가고?”
“응. 귀찮아. 아, 너도 혹시 약속 없으면 나 축구나 도와줘.”
“축구?”
“학우님, 세성전이 2주 뒤라구요.”
“아.”
“이번엔 원정인 거 알지? 풍선 기대하고 있는다.”
“아, 왜. 그냥 플래카드만 들게.”
“핸드메이드?”
“아니, 나 그런 꾸미는 거 잘 못해.”
“그게 뭐 별건가. 그냥 ‘세문고 메시 서하림’ 크게 써서 빨주노초파남보 색으로 색칠하면 끝이지.”
“……축구 연습은 학교에서 하게?”
“말 돌리는 거 봐.”
“야! 서함! 잘 가라!”
“어, 내일 봐!”
“나 내일부터 바로 쉬는 거 들음? 할머니 보러 간다?”
“대박 거의 일주일 쉬네. 올 때 빵집 들러서 맛있는 거 많이 사 와.”
“빵도 잘 안 먹으면서. 암튼 알겠어. 담 주에 봐.”
“서함 너 왜 여수 안 가!”
“바빠!”
어느덧 운동장을 지나 정문이었다. 엄마 차로 하교하는 친구들에게 하림은 인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규도 서준과 지호가 엄마 차에 타는 걸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따가 서준과 지호에게 연락해 보고 쟤네 학교 나온다고 하면 동규도 나와 볼까 싶다. 하림이 3일을 바쁘게 살 생각 같으니 학교 끝나고 놀러 가면 될 거 같고.
〈수목금 학교 나오는 사람]
[일단 난 아님ㅃ〉
[자작곡 만들 얘정〉
[나도〉
[유기견 보호센터〉
[봉사 감 ㅇㅂㅇ〉
[설마〉
[김동구...〉
[학교 간단느건〉
[아니겟지〉
[에바라 봅니다〉
[ㅁㅈ〉
[학교 가는 사람 거의 없을걸〉
〈몰라 아직]
[헐 ㄹㅇ로 학교ㄱ?〉
[ㅎㄹ....;;〉
[와 김동구 말고〉
[김규형님 ㅇㅈ....〉
[털썩....〉
[아니근뎈ㅋㅋㅋㅋㅋㅋㅋ 공ㅂ는 죽어도 안 하는게〉
[출석은 열심히 하는거 존나웃김〉
[월래〉
[김규형님은〉
[학교에 식사하러 오심〉
[급식 두그륵ㅇㅇㅋㅋㅋㅋㅋ〉
[마자ㅋㅋㅋㅋ〉
[나중에 김규형님 데리고〉
[대왕돈가스나 대왕칼국수같은거〉
[데려가면 잼쓸듯 ㅇㅅㅇㅋ〉
[울형님은 않봐도 성공〉
동규는 더 이상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서준과 지호 둘만 신나게 떠들어 휴대폰을 내려놨다. 혹시 몰라 중학생 때 친했던 친구들 중에 세문고 다니는 친구들에게도 학교 가냐고 물어봤는데 한 명도 등교를 하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놀러 간다는 답뿐이었다.
덕분에 갑자기 생긴 3일의 휴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학교에 가자니 전교생 중에 혼자만 등교할 것 같고 집에만 있자니 심심할 것 같고 하림은 바쁠 것 같다.
동규가 갑자기 붕 뜬 3일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는 것과 다르게 하림은 침대에 엎드리고 누워 딸기에이드를 마시면서 휴대폰 게임 중이었다. 원래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하림이지만 팀플레이가 가능한 게임이라 남학생들 사이에서 반 대항으로 판이 열렸다는 거 같다.
예정대로라면 수학여행 첫날 예선을 하고 둘째 날은 결승전이 진행됐을 테지만 취소가 된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게임을 잘 하지 않는 하림이 계속 연습하며 레벨을 올리는 걸 보아 다행히 그 모바일 게임 대항전은 취소가 되진 않았나보다.
“……근데.”
“어.”
“아까 얘기한 거 말인데.”
“응.”
“나 축구 잘 못해.”
“어. 괜찮아.”
“그게 연습이 돼?”
“어.”
“너 내 말 안 듣지.”
“아니, 듣는데.”
“게임 끝나면 얘기할게.”
“끝!”
뚝 끊긴 소리를 듣자하니 한창 진행 중이었던 것 같아 동규는 의심의 눈초리로 하림을 바라보았다. 하림은 일부러 굉장히 억울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죽었어.”
“아닌 거 같은데.”
“죽었다니까.”
“……내가 그 게임을 안 해서 진짠지 거짓말인지.”
“에이, 죽었어요 죽었어. 의심 많이 하면 오래 못 산대. 암튼 너 축구 못하는 건 잘 알고 있고.”
“어떻게?”
“너 달리기 싫어하잖아. 싫어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생 때는 그래도 잘 뛰어다녔던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그때도 몸집이 커서 날쌘 느낌은 아니었다. 뜀박질 자체를 좋아하지도 않고. 아빠 친구의 친구가 한다는 집 근처 피트니스 센터에 다닌 뒤로는 근육을 많이 키워 더 그랬다. 허벅지 근육 덕분에 달리기도 제대로 하면 속도가 나쁘진 않을 듯하지만 몸이 워낙 무거워 그것도 잘 될지 모르겠다. 살면서 열심히 뛰어 본 역사가 없다. 팝스(PAPS, 학생건강체력평가)도 늘 설렁설렁 했다.
“못…… 하는 거 같아.”
“흠. 그냥 골대에 서서 공만 막아.”
“진짜 학교 가?”
“공 하나 차러 학교 가긴 좀 그렇긴 해.”
“…….”
“솔직하게 말해 봐. 귀찮아, 안 귀찮아. 안 귀찮으면 공 차는 거고 귀찮으면 늦잠 자고 일어나서 나랑 놀아 줘. 전시회도 가고 집에서 영화도 보고 음 또…….”
“귀찮아. 학교 안 갈래.”
“그래. 그러면 또, 음, 자전거도 타자. 너 자전거는 탈 줄 알아?”
“응.”
“있어 없어 자전거.”
“없어.”
“나 로드바이크 두 개야. 하나 빌려줄게. 해 지면 바람 살짝 추우니까 낮에 타는 게 좋을 듯.”
“응. 좋아.”
“자전거 타고 음…… 아침 먹고 만나서 자전거 타고 점심 먹고 돌아올까?”
“좋지.”
“와서 씻고 쉬든지 낮잠 자고 일어나서 저녁 먹고 놀다 집에 가면 되겠다.”
“응.”
“그럼 전시회는 언제 가지. 아, 잠시만. 자전거를 수요일에 타? 아니면 목요일? 금요일?”
“너 마음대로 해.”
“흐음…… 그러면.”
거실 소파에 누워 있던 하림이 2층에 올라가 전자 기기들을 가져왔다.
“나 에이드 한 잔 더 마실 건데 너도 더 마실래?”
“응.”
“뭐로?”
“너 마시는 거.”
“나 자몽 마실 건데.”
“괜찮아.”
자몽에이드 두 잔을 가져온 하림이 테이블에 내려두고 태블릿 PC의 전원을 켰다.
“심심해도 잠깐만 혼자 놀고 있어. 형아는 계획 좀 짜 보자.”
하림은 거의 눕듯이 앉아 이것저것 검색 후 죄다 스크린샷을 찍어 두었다. 어느 정도 정보가 쌓이자 제대로 앉아 블루투스 키보드와 마우스를 연결했다.
“야, 수요일 2시쯤에 전시회 갔다가 이른 저녁 먹고 영화 보고 목요일도 2시쯤에 아 너 혹시 방 탈출 해 봤어? 이거 재밌는데 이번에 홍대에 가던 곳이 방 다 새로 리뉴얼했대.”
“좀 무서운데…….”
“그럼 패스. 볼링은? 볼링 좋아해?”
“해 본 적 없어.”
“이번 기회에 해 보자. 그럼 목요일은 볼링. 소원 하나 걸고 내기해.”
“나는 초심자인데 너무 대놓고 소원 가져가겠다는 거 아니야?”
“들켰네. 아무튼 볼링 한다.”
“응.”
“금요일에 자전거를 타자. 한강 라이딩으로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아.”
“근데.”
“응. 추가하고 싶은 거나 수정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주세요. 다 수용해 드립니다.”
“추가로, 나 너네 집에서 자도 돼?”
“그럼, 그럼. 이번엔 네 잠옷 가져와. 갈아입을 옷이랑 다.”
“어 근데 나…… 아직 잠옷 안 입어.”
“응?”
“겨울 아니면 그냥 팬티만 입고 자. 아니면 그냥 반팔에 반바지.”
“음. 뭐 어때. 우리 엄빠랑 마주치지만 않음 되는 거 아님? 방 나갈 땐 옷 입고 나가고.”
“말하고 나니까 조금 부끄러워. 남의 집인데 그냥 잠옷 입고 잘게.”
“괜찮아. 왜냐면 사실 나도 잘 때 부끄러운 거 하나 있어.”
동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잘 때 사실 수면 모자랑 안대 쓰고 자.”
“저번엔 안 썼잖아.”
“그래서 깊게 못 잤어.”
하림의 말에 동규는 얼굴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날 꿈에 하림이 나와서 말도 못 할 짓을 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속옷을 빤 것도 모자라 자위까지 또 했는데. 잘 못 잤다면 화장실에 한참을 가 있던 거나 속옷 빨아서 가방에 급히 쑤셔 넣은 것까지 듣지 않았을까? 하림은 아는 걸 모르는 척하기도 잘하니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그……래? 괜찮으니까 이번엔 그냥 써.”
“그럴라고. 내 모자가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지. 보고 귀엽다고 해 줘.”
“으응. 아. 나 오늘은 집에 6시에 갈게.”
“왜?”
“엄마가 같이 저녁 먹자 그래서……. 좀 전에 연락 왔어.”
“간만에 효도하네.”
효도는 무슨. 새빨간 거짓말이다. 엄마는 오늘도 야근이었다.
동규는 집에 돌아와 친구 집에서 몽정에 자위까지 했던 배덕감과 꿈에 여러 번 찾아왔던 하림을 다시 떠올리며 열심히 휴지를 썼다. 다음 날도 엄마가 야근이라 이러다 고환이 쪼그라드는 건 아닌지 싶을 정도로 자위를 하고 정액을 쏟아 냈다. 하림과 3일을 내내 붙어 있으려면 미리 빼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친구를 상대로 이러면 안 될 것 같지만 자주 붙어 다녀서 그런지 하림이 꿈에 찾아오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 예쁜 얼굴은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꿈속에서는 파급력이 열 배는 늘어나 동규는 하림의 손을 따라 그냥 녹아내렸다.
하림은 동규의 머리를 쓰다듬고 목을 감쌌다가 동규의 옷 안으로 손을 넣기도 하고 가슴을 쓸거나 복근을 만지기도 했다. 하림의 손은 수족냉증 때문에 늘 차가운 편인데 꿈속에선 왜 그렇게 뜨거운 것인지.
하얗고 뜨거운 손은 가끔 바지 안에, 속옷 안까지 파고들었다. 그런 날은 학교에서 하림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미안함에 배덕감에 죄책감에 온갖 것들이 뒤섞였지만 결국은 꼴려 했던 거밖엔 되지 않아 인간으로서 가진 최소한의 양심이 고개를 무겁게 만들었다.
동규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꿈속의 하림은 자비 없이 굴었다. 동규는 하림의 집에서 지낸 3일 내내 기어코 밤마다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동규는 세성전에 응원단에 참여해 레드팀인 세문고의 색을 따 빨간 풍선을 흔들었다. 제일 끝에 서 있었지만 멀리서도 보이는 커다란 동규의 모습에 하림은 잘했다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응원단으로 뛰어와 동규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어찌나 많이 토닥이던지, 동규가 도망을 갈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 날인 축제엔 동규가 참여하지 못했다. 지방 대학교 백일장 본선 때문이었다.
“야 좀 제대로 성의 있게 해.”
“이것도 한두 번이지 너네는 안 하고 나만 프리 허그 하는데 존나 성의가 있었어도 한참 전에 바닥났어.”
어제 세성전에서 우승을 했으면 뭘 하나. 동규도 없고 성의도 없는 축구부 부스에 하림은 삐딱하게 서서 툴툴거렸다.
하림의 동아리인 축구부는 부스 행사랍시고 한다는 게 ‘축구부 에이스와 프리 허그를 나누세요!’였다. 하림은 친구들이 찾아오면 방긋방긋 웃어 주며 포옹을 해 주다가도 축구부 부원들을 보면 피가 차게 식었다.
이딴 걸 왜 하겠다고, 아니 왜 김동규는 오늘 하는 백일장을 통과할 건 또 뭐야. 아니지. 상 받으면 걔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이긴 한데 왜 하필 그게 오늘일 게 뭐냐고. 김동규가 놀러오면 프리 허그 해 준다면서 안아 줄 생각이었는데.
“아니 그리고 성의? 야 이 부스의 존재 자체가 성의 리스야. 다른 데는 진짜 성의 있게 이것저것 하던데 우린 뭐냐. 아 괜히 한다 그랬어. 안녕하세요, 축구부 World Ball입니다!”
축구부와 함께 기악부에서 활동하는 하림은 축제가 끝나고 나서는 세문의 밤에 참석해 기악부 공연을 마쳤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외가 조부모님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 작년에 그렇게 싸웠던 할아버지와는 아직도 많이 불편한 관계였지만, 할아버지가 얼굴도 볼 겸 수고했단 의미로 마련한 자리라 하림은 어떻게 빼고 싶어도 뺄 수가 없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몇 시간은 입가에 경련 오도록 방긋방긋 웃으며 사람들 안아 주느라 기가 빨렸고 오후에는 동규 없는 관객들 앞에서 공연하느라 연주할 맛도 안 났는데 할아버지랑 밥까지 먹어야 한다니. 하림은 문득 인생이 너무 슬퍼졌다.
그래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할아버지 얘기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차피 할아버지는 공부 얘기, 대학 얘기, 재단 얘기 같은 말밖에 하지 않았다. 하림은 할아버지 비위를 대충 맞춰 주며 시간이 어서 지나가길 바랐다. 빨리 김동규 보러 가고 싶다.
아직도 의대 타령을 하는 할아버지의 말을 엄마가 대신 끊어 줬다. 이러다 애 하품하겠단 소리에 할아버지는 또 보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차를 타고 출발하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하림은 택시를 잡아 고속 터미널 역으로 날아갔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동규가 9시 반이면 서울 도착이라고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서프라이즈 해 주고 싶어 일부러 마중 간단 얘길 해 놓지 않아 동규가 이미 벌써 도착해 집에 가 버렸을까 봐 걱정이 들어 자꾸 입이 말랐다.
택시에서 내린 하림은 금요일이라 사람도 많고 정신없는 고속 터미널에서 동규를 어떻게 찾을지 갑갑했다. 차 타고 지나다니면서 보기만 했지 직접 와 본 건 처음이라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다. 난감했지만, 우선 안내 데스크를 찾기로 했다.
“저기, 여기 안내소 같은 곳이.”
“어디 가는데요.”
“제가 타는 건 아니고 부산에서 서울 오는 버스를 친구가 타서 마중.”
“경부선.”
“아, 네.”
편의점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굉장히 불친절하고 말도 잘라먹어 하림은 감사하단 말 없이 고개만 까딱하고 안내 표지판을 따라 뛰어갔다.
“미친 대머리 새끼, 자를 머리도 없으면서 사람 말을 왜 자르고 지랄이야.”
다행히 아직 부산 플랫폼엔 아무런 버스가 없었다. 하림은 초록색의 대기 의자에 앉아 동규에게 전화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겨우 참아 냈다. 눈치가 없는 놈이라 어디까지 왔냐고 물어봐도 하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를 테지만 인내가 쓸수록 열매는 달다는 선조들의 말을 곱씹었다. 전화 미리 안 하면 동규가 놀라는 모습을 봤을 때 두 배는, 열 배는 더 즐거울 것 같았다.
“내가 살다 살다 고터로 마중을 다 나와 본다.”
동규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게도 느껴지고 짧게도 느껴졌다. 빨리 왔으면 싶어서 일분일초가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동규가 반드시 온다는 걸 아니까 내일 아침에 버스가 도착한다 해도 기꺼이 기다릴 수도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 넣고 신발을 까딱거리다 차가 좀 밀리는 듯싶어 휴대폰을 꺼냈다. 그런데 문제는 분명 되게 재밌는 글을 읽고 있는 중이라도 버스 바퀴 소리가 들렸다 하면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 들게 된단 거였다. 방금 또 들린 소리는 1번 부산이 아니라 3번 마산 버스였다. 그 전에는 4번 창원 버스였고.
“아 진짜…….”
바보 같네.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잖아.
9시 반을 넘어 10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림 말고도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길래 하림이 슬쩍 끼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중간에 무슨 사고가 있었나 본데요. 도로 통제가 잠깐 있었다고 두 시간 전에 기사 떴어요.”
“시간 밀리는 거 아니야? 발권할 때 아무 말 없던데?”
“직접 가서 물어봐요.”
누군가가 다른 버스 기사에게 따지듯 묻자 버스 기사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도 정확히는 모르는 듯했으나 오랜 경험으로 흥분한 남자를 진정시키고 양해를 구했다.
“어, 저기 오네. 부산 버스.”
사람들이 줄을 재정비하고 섰다. 하림도 제일 뒤에 붙었다.
“표 보여 주세요.”
“저는 타는 건 아니고 친구 마중이에요. 부산 버스요.”
“그럼 방해되니까 뒤로 가든가 옆으로 나와 있어요.”
“네.”
버스가 제자리에 맞춰 서자마자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꽤 많이 내렸지만 그중에 동규는 보이지 않았다. 예상이지만 동규는 사람들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리다 마지막으로 내릴 것 같아 하림은 승객들이 지나가는 곳에서 옆으로 좀 더 빠져 문 앞에 바짝 붙어 섰다. 과연 예상대로 동규는 거의 끝에서 내리고 있었다.
“마, 김덩규! 잘 쓰고 왔나!”
“……서하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바로 보이는 예쁜 얼굴에 동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켰다. 얘가 여기 왜 있지? 온몸이 굳어 얼어붙은 동규를 뒤에 있는 승객이 툭툭 쳤다. 겨우 정신 차린 동규는 차에서 내려 옆으로 비켜섰다.
“마! 오늘은 상 각이가, 아니가!”
“아 뭐야.”
하림이 얼음이 된 동규의 팔을 가볍게 쳤다. 그게 마치 얼음 땡 신호라도 되는 양 동규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알 수 없는 사투리에 웃음도 자꾸 나왔다. 동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팔을 뻗어 당기고 목을 움직였지만 부자연스러워 보일까 봐 괜히 동작을 크게 했다.
대놓고 웃으면 놀린다고 생각할까 봐 꾹 참아 보려는데 하림이 옆에서 따라 걸으며 계속 ‘덩덩규 상 우예 받는데!’라거나 ‘김덩규 또 대상 받는 거 아니겠나. 나는 다 알제.’ 같은 엉망진창 사투리를 자꾸 쓰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하림은 동규가 결국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어도 사투리를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동규가 웃는 게 보기 좋아 말하는 속도를 올렸다.
“뭐여 김덩규 왜 이렇게 우서대. 내가 참말로 서프라이즈를 하길 잘했구먼. 이 정도면 성공 아니겠나.”
“어디 사투리인데 그건.”
“아마도 부싼 아니겠노, 마!”
“지역이 다 섞였는데.”
“사실 잘 몰라. 들어본 거 다 써 봤어. 그래서 상 각이가, 아니가?”
“아, 그만해.”
“응.”
“……가자.”
웃음이 빵 터진 것도 좋았지만 버스에서 내려 마주쳤을 때 동규 반응은 더 만족스럽다. 버스에서 내려 저를 발견했을 때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 거나, 숨도 제대로 못 쉰 거나, 평소엔 웃더라도 마치 ‘ㅎㅎㅎ’ 정도로 웃는 게 전부이던 애가 어색한 사투리에 웃음소리 내며 크게 웃은 것도 좋고 그래 놓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며 걸음이 빨라지는 것까지 하림은 다 좋았다.
“왜, 왜 왔어.”
“형아가 힘든 몸 이끌고 와 주면 90도로 허리 굽히면서 감사합니다 하는 거야.”
그 말에 도망치듯 걷던 동규가 걸음을 멈추고 하림을 바라보았다.
“힘들어? 많이? 오늘 축제라 집에서 그냥 쉬지 왜…… 여기까지 왔어.”
금요일 밤 아직도 사람이 북적거리는 고속 터미널 역에서 하림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는지 잠시 고민했다. 조금 간질거리는 말을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오픈된 곳에서 해도 괜찮을까. 의외로 사람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기도 하니까 고작 그 한마디 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은데.
어디가 힘드냐고, 바이올린 대신 들어 주겠다는 동규의 팔을 거둬 낸 하림이 입을 열었다.
“왜냐니.”
“…….”
“보고 싶어서 왔지.”
바이올린 가지고 온 줄도 몰랐다. 그 사실이 살짝 웃겼다. 하림은 동규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보고 싶더라고, 네가.”
시선을 먼저 피한 건 동규였다. 하림은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라 아쉬운 한숨을 작게 내쉬며 동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힘껏 흔들었다. 힘들단 제 말에 바로 걱정하는 눈빛으로 돌아본 것만 해도 충분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매일!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게 없으니까 보고 싶지 그럼 안 보고 싶겠냐?”
“…….”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는 법이야. 너 배는 안 고파?”
“……뭐 많이 휴게소에서 사먹긴 했는데 밥은 안 먹었어.”
“김동규 인생사에 밥 안 먹었으면 식사는 안 한 거지. 뭐 먹을래? 너 먹고 싶은 거로 먹어. 나는 저녁 먹어서 괜찮아.”
고터 내부 식당은 하림과 이용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이 시간에 식사를 할 곳이 마땅치 않아 동규는 역 근처 24시간 분식집으로 들어왔다. 분식집인데도 엄청 깔끔하고 세련되어 분식집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근데 나는 뭐 안 시킬 건데 괜찮은가.”
“내가 많이 시킬 거라 괜찮아.”
“맞다. 김동규 하루 네 끼 먹지. 뭐 먹을 거야?”
“일단 돌솥비빔밥.”
“네 김규, 돌솥비빔밥이랑 또 뭐. 김밥?”
“……김규?”
“정서준이랑 윤지호가 너 뭐 많이 먹거나 상 받아 오면 그렇게 부르던데. 형님까지 붙여서.”
“아 형님 하지 마.”
친구들이 저를 추켜세울 때마다 부르는 별명을 하림이 부르자 너무 부끄러웠다.
“알았어. 그럼 형님은 안 하고, 푸드 파이터 김규의 나머지 선택은 뭐죠.”
동규는 김규란 호칭이 부끄러웠지만 하림이 즐거워하는 것 같아 그냥 말을 아꼈다.
“……돈가스김밥이랑 고구마치즈돈가스.”
“돈가스를 먹는데 굳이 또 돈가스김밥을 먹어?”
“그럼 참치김밥이랑 땡초김밥이랑 라면볶이. 아, 뭔가 따뜻한 거 먹고 싶은데. 국물 있는 거.”
“장국 나와요.”
“장국 나온대.”
“아는데 아예 국물 있는 면 요리 먹고 싶어. 저기요.”
결국 동규는 우동까지 총 다섯 가지를 시켰다. 직원이 동규가 주문한 메뉴들을 서빙하기 위해 세 번이나 오가더니 숟가락과 젓가락이 동규 앞에만 놓인 걸 보고 “혼자 먹어요?” 하고 물어왔다. 음식을 보고 눈을 반짝이던 동규가 그 한 마디에 풀이 죽은 걸 보고 하림이 대신 답했다.
“네, 혼자 다 먹는대요. 대단하죠.”
“운동하는 학생인가? 보통 혼자 이렇게 많이 먹으면 운동선수거든.”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이에요.”
“근처에 야구부가 유명한 학교 있는데 거기 학생들만치 먹네. 천천히 먹어요.”
직원이 카운터로 돌아갔지만 동규는 젓가락을 들 마음이 없어 보였다. 하림이 식기 전에 먹으라고 재촉하고 나서야 동규가 늦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림은 저녁을 제대로 먹진 않았지만 동규 얼굴 보니 배가 고픈 줄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밖에서 사먹는 걸 좋아하지 않아 물만 홀짝였다.
“나 참치김밥 한 개만.”
그런데 동규가 너무 복스럽게 먹으니까 침이 고이고 위가 요동쳤다. 한 개만 먹는다고 한 하림이 김밥을 반이나 먹어 버려 동규는 치즈김밥과 불고기김밥을 더 시켰다.
“내가 이거 다 살게.”
“이거 뭐 얼마나 한다고 사 줘. 여기 있는 거 다 먹어도 돼.”
“아냐, 배불러. 너는 다른 거는 더 안 시켜?”
“집에 가자마자 잘 거라 조금만 먹게.”
“그래…….”
하림은 동규의 조금이란 기준이 다른 사람보다 한참 크다는 걸 새삼스레 상기하며 빈 그릇들을 하나로 쌓았다.
“너랑 같이 살면 식비가 엄청나겠다.”
“안 그래도 엄마가 그 소리해. 월급의 절반은 다 내 배로 들어가는 거 같다고.”
“우리 엄마랑 아주머니는 너 잘 먹는 거 엄청 좋아해. 엄마가 저번에 너 쓰라고 엄청 큰 사이즈 밥그릇 사 왔잖아. 김동규 전용.”
“나도 그 그릇 예뻐서 좋아. 우리 엄마도 내가 너네 집에서 세 끼 다 해결하고 오니까 돈 굳어서 좋대.”
“뭐야, 그게.”
“몰라.”
어깨만 으쓱한 동규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하림이 셀프로 빈 컵에 물을 뜨다가 문득 든 생각을 별거 아닌 말처럼 슬쩍 흘려 보았다.
“그러면…… 돈 많은 사람이랑 사귀어야겠다.”
“나도 용돈 많이 받아. 밥값으로 쓰라고.”
그래, 그러겠지. 연애 안 한다고 딱 잡아떼는 최악의 대답보단 낫다.
“밥값은 따로고 사람 만나면 밥만 먹는 건 아니잖아.”
“엄마가 간식비도 줘.”
“간식이나 밥이……. 그래, 만나서 밥도 많이 먹고 간식도 많이 사 먹는 거 중요하지. 다 먹고 영화를 본다거나 놀러 간다거나 하다 보면 너는 돈 두 배로 들겠다.”
“그러게. 그럼…… 돈 많은…… 사람이랑 만나면 좋겠네.”
“그치!”
“근데 돈은…… 사귀는 데 그렇게 안 중요한 거 같은데.”
“그럼 너는 뭐가 중요한데.”
동규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그릇에 내려놓고 하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림은 동규를 떠본 게 조금 찔렸지만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알아챌 놈이면 이미 커플링을 끼고도 남았다.
“이상형 물어보는 거라면 생각을 안 해 봐서 잘 모르겠어. 네가 왜 이런…… 밥 먹는데 이런 얘기 하는지도 모르겠고.”
“아 미안. 불편했어?”
빠른 사과에 고개를 젓고 내려놨던 젓가락을 다시 들긴 했으나 동규는 갑자기 하림이 누구랑 연애하나 싶은 촉이 섰다.
“……불편한 건 아닌데 그게 궁금하면 오늘 하루 생각해 보고 내일 대답해 줄게.”
“아니,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밥 잘 먹는 거 보기 좋아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가 그렇게 흘러간 거야. 신경 쓰지 마. 잊어버려. 진짜 아무것도 아님.”
과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랬다. 동규는 갑자기 입맛이 떨어졌다. 하림은 연애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최소 누군가 좋아하는 중이고. 그러지 않고서야 올해 내내 붙어 다니면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연애 얘기니 이상형 얘기니 이런 걸 할 리가 없다.
“더 안 먹어?”
“배불러.”
“벌써? 아직 김밥 반 남았어.”
“……피곤해. 쉬고 싶어.”
“그러면 택시 타자. 빨리 가서 쉬게.”
“아니 괜찮아. 나 그냥 지하철 타고 가도 상관없어.”
“내가 상관있어. 아, 내년에 생일 지나면 바로 운전면허부터 따야지 이거 답답해서야.”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고 전부터 생각하던 거야. 면허 따면 스무 살 전에도 바로 차 끌고 다녀도 된대.”
“너 차 있어?”
“면허 따면 어른들이 사 준댔어. 아니면 엄마 차 타도 돼. 엄마 차 세 대인데 하나는 슈퍼 카고 평소엔 혜화동 집에서 출근할 때 쓰, 아무튼 차는 많아.”
택시를 잡아 두 사람의 목적지가 다른 것을 기사에게 얘기했다. 기사가 괜찮다길래 냉큼 올라탔다. 하림은 택시에 타자마자 동규에게 이것저것 얘기했지만 동규가 정말 피곤한지 반응이 신통치 않아 이내 곧 입을 다물었다.
실은 하림도 무척 피곤했다. 축제 부스에서 내내 웃고 있던 것만 해도 에너지를 굉장히 많이 소비하는 일이었는데 아직도 할아버지는 의대 타령 하면서 하림의 기를 꺾으려고 난리였으니 저녁 약속 끝나고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까지 내려가 고생한 동규에게 잘했다는 한마디 해 주겠다고 힘들지만 달려온 거였다. 뭐, 얼굴 봤고 밥도 먹였으니 할 일은 다 했다.
하림은 씻고 누워 굉장히 행복한 기분을 만끽하며 잠에 들었지만 동규는 뒤척이느라 한참 잠을 설치다 겨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