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4화 (14/53)

4

“근데.”

하림은 마지막 물리 문제를 끝내고 샤프를 빙빙 돌리며 입을 열었다. 공부할 때 심심하면 말 걸어도 상관없지만 동규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한 번도 공부하는 자신에게 말을 건 적이 없다.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응.”

“너 과외하고서부터 저녁도 거의 매일 우리 집에서 먹고 잠만…… 너네 집에서 자는 수준인데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셔?”

“응.”

“왜?”

“몰라.”

“……그래.”

물은 내가 잘못이지. 하림은 오답 노트를 펼쳤다.

“…….”

우리 집에서 놀고먹는 거 가지고 뭐라 하는 게 아니라면 방학인데……. 샤프를 천천히 딸깍이다 결국 심 하나가 전부 나와 노트 위에 떨어지고 나서야 하림은 다시 입을 뗐다.

“김동규.”

“응.”

“오늘 자고 갈래?”

“……여기서?”

“물론 너네 엄마가 된다고 허락해야 하는 거지만.”

“여기? 여기서?”

동규가 내내 누워 있던 하림의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아니 거기 말고 옆방에서. 2층 게스트 룸 침대 두 개잖아.”

“…….”

“그냥 가끔 저녁 먹고 배 두드리면서 한창 얘기 재밌는데 너 집에 가면 아쉽고 그랬는데 방학이고 하니까. 담 주면 나도 어차피 여름 학교 가야 돼. 너도 무슨 글 쓰는 캠프 가야 한다며.”

“아…….”

“밤새 수다 떨고 그러면 좋을 거 같아서. 재밌지 않을까.”

“응.”

“그럼 빨리 엄마한테 전화해 봐. 우리 엄마는 된다 그랬어. 전에 내가 물어봤어.”

동규의 엄마 역시 괜찮으니 재밌게 놀고 오라고 유쾌하게 말했다. 동규는 좋긴 좋은데 갑자기 하림과 같이 잘 생각을 하니 머쓱해졌다.

그래서 하림이 숙제 다 끝내고 함께 점심을 먹을 때는 잘 되던 젓가락질이 조금 서툴러져 자꾸만 반찬을 놓쳤고 하림의 네 시간 되는 올림피아드 과외를 기다릴 땐 글을 한 글자도 적질 못했다. 분명 동규도 창작 과외 숙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숙제를 끝내려면 뭐라도 썼어야 했음에도.

노트북 켜 놓고 괜한 생각 하느라 시간이 금방금방 흘러갔다. 화면 보호기 시간을 30분으로 해놨는데 뭐 별다른 생각 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노트북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생각의 시작은 하림과 같은 방을 쓴다는 것. 학기 중에도 학교 끝나면 하림의 집에서 최소 여섯 시간은 있다 집에 가기 때문에 보통 하림과 하림의 방에서 노는 게 다지만 오늘은 갑작스럽긴 해도 자고 가니까. 그것도 같은 방에서. 손님방 침대가 두 개긴 해도 뭔가 하림과 둘이서 잔다고 생각하니 자꾸 온몸이 간지러웠다.

거기다 매일 밤늦게까지 하림의 집에 있다 보면 꼭 보게 되는 게 씻고 나와 잠옷으로 갈아입은 하림인데, 처음에 잠옷 입은 하림을 봤을 땐 집에 가서도 얼마나 그 모습이 아른거리던지. 사복이나 평상복 입은 걸 안 본 것도 아닌데. 특별할 것도 없고 그냥 진한 남색이거나 짙은 회색 계열에 무늬가 있는 것도 아닌 그냥 좀 좋아 보이는 그런 잠옷일 뿐인데도 티셔츠에 반바지만 입거나 혹은 속옷만 입고 자는 자신과는 너무 달라 그랬다.

자긴 자더라도 잠옷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걱정됐다. 요즘처럼 더운 때면 속옷만 덜렁 입고 에어컨 바람 쐬면서 자는 게 좋지만 하림의 집에서 그러고 자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티 쪼가리 가지러 집에 다녀오긴 귀찮다.

이불을 잘 덮으면 편하게 속옷만 입고 자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이모님이나 아주머니나 하림의 부모님이 2층으로 올라올 일은 없을 것 같다. 하림에게도 속옷만 입은 거 보여 주긴 부끄러우니까 이불 안에서 옷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고 아침에 다시 주워서 이불 안에서 입으면 되겠고.

서하림은 올림피아드 때문에 방학인데도 하루 종일 공부 열심히 하던데 괜히 내가 옆에서 방해하는 건 아닌지, 그냥 집에 가는 게 하림이 공부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닌가, 근데 막상 같이 잔다 생각하니 잘 자라는 인사도 들어 보고 싶고 집에 갈 때 아쉽다고 현관문 앞에서 30분씩 서 있는 것도 안 해도 돼서 좋긴 하고…….

역시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 캠프 다녀와서, 하림의 여름 학교 끝나고 나서 자자고 할 걸 그랬다. 근데 또 하림에게 집에 간다고 무를 용기는 안 났다. 그냥 자기 전까지는 손님방에 있어야겠다.

생각을 마친 동규는 하림의 과외가 끝나는 5시가 되기 5분 전 짐을 손님방으로 옮겼다. 손님이 없어도 매일매일 관리한다는 방답게 깨끗했다. 이제야 좀 글 쓸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라면 하림에게 방해도 하지 않고 동규도 맘 편히 숙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 너 왜 여깄어!”

열일곱 문장쯤, 동규가 신나게 써 내려갈 때 손님방 문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어, 그냥.”

“그냥? 멀쩡한 방을 두고 여기로 이사 온 이유 그냥 말고 똑바로 말해.”

“그냥, 아니 너 여름 학교 준비로 바쁘니까 공부하는 데 방해될까 봐…… 그게, 노트북 타자 치는 소리가 좀 큰 것 같아서. 과외 끝나고도 조금 쉬고 또 바로 숙제해야 하잖아.”

“나도 여기서 공부할래.”

“어?”

“타자 치는 소리 듣기 좋아. 백색 소음 같아서.”

“아…….”

“만약에 방해될 정도면 그 때 얘기해 줄게.”

“응.”

“그리고 그 정도로는 나 방해 못 해. 원래 공부 못 하는 애들이 장비 탓 환경 탓 하는 거야.”

“좀 재수 없는 발언…….”

동규의 말에도 하림이 어쩌라는 얼굴로 눈썹을 들썩거렸다.

“이지만 세상 사람 누구도 네 말에 반박 못 할 걸.”

“그럼 나 여기로 기출 가져온다. 그리고 쉬는 시간인데 같이 뭐 먹자. 뭐 먹을래?”

“시원한 거.”

“망고 빙수 어때.”

“응, 좋아.”

“먼저 내려가 있어.”

동규는 하림과 같이 내려가고 싶어 기출문제를 한 아름 안아 들고 손님방으로 옮기는 하림을 따라다녔다. 동규가 도와줄까, 하고 물었지만 하림이 됐다며 자길 따라다니는 동규를 보고 작게 웃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만들어 준 망고 빙수는 제일 아래엔 시리얼을 깔고 그 위에는 전날 생망고를 착즙해 통으로 얼려 놓은 걸 갈아 만든 빙수였다. 그것 말고도 얼린 우유도 갈아 올리고 사이사이엔 수제 망고청이, 제일 위엔 애플망고와 연유, 휘핑크림으로 마무리를 해 동규는 이걸 밖에서 사 먹으려면 도대체 얼마를 주고 사 먹어야 할지를 가늠해 봤다. 만구천 원이 넘어가자 그냥 고개를 털어 숫자를 지웠다.

“아주머니가 지난번에 딸이랑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후식으로 이 빙수를 드시고 반하셨대. 그래서 오늘 해 주신다고 했던 거.”

“그냥 망고 빙수가 아니라 진짜 리얼 트루 망고 빙수다.”

“진짜로. 일단 사진부터……. 먹자. 잘 먹겠습니다.”

30분만 쉬겠다던 하림은 동규와 빙수 먹으며 수다 떨다가 한 시간을 넘게 놀았다. 시간을 확인하고 놀란 건 오히려 동규였다. 동규가 이렇게 많이 쉬어도 되냐고, 숙제 다 못 풀고 자는 거 아니냐고 물었지만 하림은 동규의 손을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세 가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뭔지 알아.”

“아니.”

“내가 시험 망칠까 봐 걱정하는 거. 내 입으로 말하려니 민망하지만 다 시간 보고 적당히 조절하는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니, 너는 네 성적은 신경 하나도 안 쓰면서 나 공부하는 건 우리 이모님보다 더 신경 쓰더라.”

“나는 공부 안 해도 돼.”

“그럼 네 글 쓰는 거 신경 써. 전교 1등이 시험 망칠까 봐 걱정하는 전교 꼴등을 너 말고는 본 적이 없어.”

“……꼴등은 아니야.”

“설마. 네 아래로 누가 또 있어? 일이삼삼이일 아래가?”

“그, 그런가 봐.”

“미친. 누구래? 누군데? 시험 안 본 거 아니야 아파서? 아 존나 웃겨.”

“……웃지 마.”

이미 쉰 시간이 꽤 됐는데도 하림은 동규를 놀리느라 30분을 또 썼다. 그동안 아주머니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밥을 안치고, 익숙한 소리들이 들리자 동규는 엄마가 혼자 저녁을 먹을 게 미안하고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다.

나름 효자 노릇한다고 안부 전화 건 거였는데 엄마는 맛있는 거 먹으러 맛집에 줄 서 있다며 오히려 동규에게 자랑을 하느라 동규의 귀를 아프게 했다. 동규는 엄마의 말을 더 듣고 있을 자신이 없어 맛있는 저녁 먹으라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저녁 뭐예요?”

동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는 아주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맑은 복어탕을 메인으로 반찬 이것저것? 동규는 뭘 해 줘도 잘 먹으니까 아줌마가 매일 저녁마다 신이 나네요.”

“복어요? 복어도 할 줄 아세요?”

“그럼요. 복어조리기능사 옛날에 땄거든요. 그리고 제가 조리기능장이라서요.”

“기능사가 아니고 기능장이요? 와…… 저도 요리 좀 하는 편인데, 복어……. 근데 왜 회로 안 먹고 탕으로 하신 건지…….”

“회도 있어요. 근데 하림이가 겨울 아니면 회를 잘 안 먹더라고요. 교수님들은 회 드신대서 회도 따로 나갈 거예요. 동규도 먹을 거죠?”

“네, 주신다면…….”

도와드릴 게 있을까 싶어 주방을 좀 더 서성였지만 동규가 뭐 도와드릴 것도 없이 아주머니의 빠른 손이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었다. 동규는 어깨 너머로 아주머니를 지켜보던 중 자꾸 아주머니와 부딪히자 방해되는 것 같아 죄송하다며 다급하게 주방을 나왔다.

“맛있는 냄새 나.”

“저녁 복어래. 완전 대박이다.”

“그게 왜?”

“복어는 독 있잖아.”

“아주머니 완전 요리왕이야.”

“복어조리기능사도 땄대.”

“그래?”

하림은 요리 얘기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친구와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동규는 스무 살 되면 하고 싶은 일 중에 요리를 좀 제대로 배워 볼까 하는 게 있어, 복어조리기능사를 땄다는 조리기능장 아주머니의 위대함을 하림에게 설파하고 싶었다.

“조리기능장이래, 기능장.”

“응.”

“진짜 대단한 거야.”

“그래?”

“기능장이면 이런…… 곳에 계실 분이 아닐 텐데.”

“젊었을 때 큰 식당 운영하셨대. 엄청 유명한 곳이라 막 대통령도 오고 그랬나 봄? 근데 이혼하면서 나도 잘은 모르는데 뭐가 잘못됐나 봐. 아무튼 혼자 힘들게 딸 키우고 그러시다가 결혼까지 다 시키고 쉬고 계시다가 우리 집 오신 거야. 할아버지 소개로. 근데 기능장이 그렇게 대단해?”

“응. 진짜, 진짜로. 국가가 공인하는 실력자란 거야. 음…… 한식 고수, 장인, 마스터라고 하면 좀 더 대단한 게 느껴질까.”

“대단한 분인 건 알았지만 그 정도였군.”

“응. 나도 나중에 조리자격증 딸 거라 그런가 갑자기 오늘 저녁부터는 존경심을 담아 식사하게 될 거 같아.”

“오, 존경까지?”

어느덧 하림은 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동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식사를 할 때도 동규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밥조차도 한 숟갈이나, 반찬 하나하나마다 꼭꼭 씹어 먹으며 어떻게 이런 맛이 있을 수 있냐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먹었다. 하림의 부모님과 이모님, 아주머니까지 식사하는 자리에서 동규만이 침묵을 지키고 조용했지만 하림이 보기엔 동규가 제일 시끄럽게 식사 중이었다.

동규의 말을 듣고 나서 그런지, 하림도 어제나 점심보다 지금이 더 맛이 좋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매 식사 때마다 동규 덕에 아주머니가 얼마나 대단한 음식들을 내놓고 훌륭한 요리를 하는지 상기할 것 같았다. 하루에 세 번씩 반복되는 평범한 식사가 특별함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 번쯤은 쉬거나 휴대폰을 해 봄 직한데도 쉼 없이 들려오는 타자 소리가 자꾸 귀에 걸린다.

김동규는 뭘 쓰길래 저렇게 손가락이 날아다니냐. 아주 모니터에 들어가겠네, 들어가겠어.

문제 푸는 속도가 종종 머리가 손보다 더 빠를 때가 있어 어지간히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면 하림은 눈으로 풀곤 했다. 지금 하림의 앞에 펼쳐져 있는 문제집은 기출문제 중에서도 전에 실수가 많았던 유형만 따로 모은 문제집이라 이 정도면 필기구가 필요 없었다. 눈으로 풀더라도 진작에 다 풀었을 걸 이미 오늘은 친구와 노는 날이라고 정해 놔서 그런지 영 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같이 노는 그 친구도 그랬으면 참 좋겠지만 친구는 하림의 마음도 모르고 예술의 세계에 심취해 있어 심심해 죽으려는 하림이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지루함을 참다못한 하림은 펜을 들어 문제에 적힌 숫자나 기호의 색칠할 수 있는 부분들을 죄다 칠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하루 정도는 공부 하나도 안 하고 버려도 상관없는데. 아니, 이틀이나 삼일.

하림이 알기로 동규가 열심히 하고 있는 저 숙제도 일요일까지만 하면 되는 거고 오늘은 금요일이라 내일 집에 가서 해도 될 것 같은데 저걸 굳이 붙잡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납득할 이유를 찾아보자면 삘이 오는 순간에 써야 하나 보지 하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래도 프로 작가도 아니고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이 삘이 와 봤자 얼마나 오겠으며 잘 써 봐야 얼마나 잘 쓰겠냐는 못된 심보가 계속 치밀었다. 하림은 그게 굉장히 유치하고 어이없는 생각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멈춰지지가 않아 조금 당황하는 중이기도 했다.

“어디 가.”

“화장실.”

“뭘 그렇게 열심히 쓰길래 80분을 꼼짝 없이 글만 써.”

“……몰라.”

“참나. 네 글인데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몰라. 화장실 다녀온다.”

“그래 가라 가. 한 10L 싸고 와.”

동규가 뭘 썼는지 궁금해서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하림은 꾹 참았다. 허락도 안 했는데 남의 창작물을 보는 건 실례니까.

“김동규.”

“응?”

“혹시 그, 다 쓰려면 많이 걸릴 것 같아?”

“이거?”

“응.”

갑자기 떠오른 스토리를 기승전결로 정리만 하던 중이라 딱히 다 쓰고 말고가 없긴 했다. 머릿속에 다 있는 거고 보기 편하게 정리하는 중이었으니까.

“……다?”

“나는 풀 거 대충 거의 다 풀어서 너 계속 써야 하는 거면 나 먼저 씻을까 해서.”

“다 썼어.”

“쓰던 중에 화장실 간 거 아니었어?”

“아니, 다 썼어. 끝까지 쓰고 간 거야.”

“그래? 그럼 정리하자. 어떻게 딱 맞춰서 둘 다 끝났지? 같이 씻을 수 있겠다.”

동규는 하림의 말에 깜짝 놀라 하림을 쳐다봤으나 하림은 테이블에 있던 문제집과 필기구를 정리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너 잠옷 없지. 갈아입을 옷도.”

같이 씻는단 말에 고개도 끄덕이지 못하고 동규는 하림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림은 그런 동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레스 룸에 다녀온다며 사라졌다. 동규는 노트북 전원을 끄지도 않고 그냥 닫아 버렸다. 엄마가 노트북 사 준 뒤로 얼마나 이걸 소중히 썼는데, 전원을 끄지 않은 건 처음이고 고장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퍽 소리 나게 닫은 것도 처음이었다.

“잠옷은 제일 큰 남자 어른 사이즈 가져왔는데 딱 맞을 거 같아. 혹시 작으면 말해. 그리고 내일 입을 옷은 내 거 가져와 봤는데 어…… 너한테 작겠다.”

“옷 내일 다시 입어도 돼.”

“그래? 그럼 잠옷만 입어 보고 작으면 말해 줘.”

하림이 잠옷 비닐 포장을 뜯어 상의를 동규의 몸에 대 보았다.

“이건 잘 맞을 듯? 나도 오늘은 이 색깔 입어야지.”

참다못한 동규가 하림의 어깨를 잡아 멀리 떨어트렸다. 하림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동규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평소처럼 “그냥” 하며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갑자기 뭐야. 놀랐잖아.”

“미안.”

“어디 욕실 쓸래. 네가 손님이니까 쓰고 싶은 곳 골라.”

하림의 말에 동규는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긴 이 큰 집에 화장실과 욕실이 몇 갠데 어떻게 같이 씻겠다는 걸 정말 한 욕실에서 같이 씻는 걸로 오해를 할 수 있었을까. 할 수만 있다면 혀를 깨물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1층.”

최대한 하림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어 골랐다.

“어 근데 1층은 부모님 씻고 있을지도 몰라. 그냥 네가 2층 써.”

“그럼 왜 고르라고 한 건데.”

“미안. 그럼 좀 이따 보자.”

동규는 무슨 정신으로 씻었는지 몰랐다. 쪽팔려 죽겠고 근데 하림이 자기랑 똑같은 색 잠옷을 입겠다고 한 건 좋아 죽겠고, 빨리 씻고 나가면 빨리 씻는 대로 하림이 이상하게 볼 것 같고 오래 씻으면 오래 씻는 대로 이상하게 볼 것 같았다. 초등학교에서 양치하는 법만 알려 줄 게 아니라 정석으로 샤워하는 법을 알려 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욕실을 나섰다. 잠옷은 작진 않고 딱 맞긴 했는데 너무 딱 맞아서 불편했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슴 쪽 단추가 좀 간당간당했지만 얌전히 누워 잘 거라 괜찮을 듯했다.

하림은 평소라면 샤워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릴 테지만 오늘은 보통의 샤워 시간의 반의반도 쓰지 않았다. 씻고 나온 시간은 둘이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하림이 머리를 말리지 않고 2층으로 뛰어 올라와 동규가 있을 욕실 문을 두드렸다.

“왜?”

“엄마 아빠 자는데 소리 때문에 깰까 봐.”

부모님은 아직 주무실 시간도 아니고 1층 구조상 욕실과 안방은 끝과 끝에 위치해 있어 드라이기를 밤새 틀어 놔도 괜찮았지만 동규는 알 리가 없어 드라이기를 들고 서 있는 하림을 위해 욕실 문을 활짝 열었다.

“여기도 드라이기 있던데.”

“까먹었어.”

“응.”

“야, 너 잠옷 너무 딱 맞는 거 아니야?”

“괜찮아.”

“불편해 보이는데.”

“편해.”

“단추 터지겠다.”

동규는 가슴을 두 팔로 가렸다. 단추 터지기 전에 심장이 먼저 터지겠다.

하림이 정말로 같은 색의 잠옷을 입을 거라곤 생각도, 아니 하림이 그러겠다고 했으니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눈으로 보는 것과 상상만 하는 건 천지차이였다. 심지어 디자인도 비슷했다. 세세한 건 다르긴 했지만 동규는 지금 입고 있는 게 잠옷이 아닌 포대 자루여도 벗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잠옷 차림의 하림을 보는 게 한두 번이 아님에도 동규는 자꾸 입술이 마르고 입이 탔다. 홀딱 젖은 머리에 방금 막 씻고 나와 물기 가득한 얼굴 때문인 것 같은데 왜 자꾸 침을 삼키게 되는지를 당최 모르겠다. 다시 드라이기 전원을 켜 머리를 마저 말려야 하는데도 바보처럼 하림만 보게 되고.

하림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동규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동규는 하림의 시선에 붙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이상한 생각도.

동규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을 넘어서 코마 상태가 되어 갔다. 뭘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순간, 하림이 쐐기를 박았다.

“머리 말려 줄까.”

“……뭐?”

“또 멍 때렸지. 많이 졸려 보이는데 머리 말려 준다고.”

“어, 그래…….”

욕실에 비치된 의자를 끌어와 앉은 동규는 하림이 머리를 말리는 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평소에 아기 새처럼 떠들던 하림이 조용해진 탓이 컸다. 하림의 손가락이 머리를 헤집을 때마다 동규는 자꾸 이상한 상상이 떠올라 진땀을 흘렸다. 좀 전에 샤워했는데 또 샤워가 고팠다.

“너 머리 가마 되게 귀엽다.”

“……가마?”

“정수리에 있는 거.”

“아.”

“완전 회오리 모양이야.”

“몰랐네.”

“나도 몰랐어. 네가 나보다 키가 커서 정수리를 볼 일이 있어야지.”

“너도…… 회오리 모양이야.”

“알아.”

“안다고?”

“응. 다 됐다. 나도 말려 줘.”

동규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매단 채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림이 의자에 앉으며 웃었다.

“우리 엄마가 어릴 때부터 보는 사람마다 자랑하던 것 중 하나야. ‘여기 보실래요, 우리 아들은 진짜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예뻐요’ 하면서.”

“아…….”

“정수리 찍은 사진도 있고 암튼. 예쁘게 머리 해 주세요, 선생님.”

“……말리면 그냥 말리는 거지 어떻게 예쁘게 말려.”

“아 진짜, 그냥 네 하고 맞춰 주면 될 걸 엄청 투덜대.”

“안 투덜댔어.”

“네 다음 투덜이.”

“……나 안 해.”

“알았어, 알았어. 안 놀릴게, 삐쟁아.”

“아, 나 안 해. 진짜 안 해. 네가 말려.”

“와. 먹고 튀는 거 봐. 알겠어, 진짜 안 놀려. 미안해.”

하림이 동규의 등을 토닥이며 사과했다. 사과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동규는 일단 드라이기 전원을 켰다.

“그…….”

“응? 안 들려!”

“아니야.”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이따가.”

“그랭.”

따뜻한 바람과 따뜻한 손이 머리를 말려 주는 덕분에 하림은 기분이 좋아 고개를 좌우로 살살 흔들었다. 동규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동규에겐 하림이 헤드뱅잉을 하고 있어도 별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림이 자기보다 키가 작으니까 늘 봤던 정수리의 가마도 오늘은 왜 이렇게…… 그렇게 보이고 젖은 머리카락도 그냥 머리카락일 뿐인데 왜 이렇게 손가락에 들러붙는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고 점점 말라 갈수록 손가락 사이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간질이는 것만 같고 그리고, 그리고…….

“아, 진짜 미치겠네.”

드라이기 소리에 동규의 작은 한마디가 묻혔지만 동규는 지금 굉장히 힘들었다. 하림의 하얀 목과 살짝 보이는 쇄골이라든가, 예쁜 가마에 코를 박고 싶다는 그런 변태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 손이 땀으로 젖어 갔다. 몇 번이나 손을 허벅지에 닦았는지 모른다. 조금만 거짓말을 보태면 하림의 머리카락이 동규의 손바닥에서 나온 땀으로 다시 젖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다한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온몸의 땀구멍이 활짝 열린 것만 같다.

“끝?”

동규는 그답지 않은 빠른 행동으로 드라이기를 뽑아 눈에 보이는 아무 서랍장에 넣어 두고 욕실을 빠져나와 손님방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썼다가 하림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가올까 봐 목까지 내렸다. 조금만, 조금만 참고 화장실 가야지.

“야, 화났어? 미안해. 안 놀릴게.”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빨리 눕고 싶었어. 푹신한 이불이랑 침대랑.”

“아, 그래? 난 또.”

하림은 하나 남은 침대에 눕자마자 동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김동규, 너…… 많이 피곤한 거면 불 끌까?”

“아니. 잠은 안 와.”

“그럼…… 언제 자게?”

“글쎄. 너 졸리면? 원래 12시 전에는 잘 안 자.”

“그렇구나.”

하얀 천장만 바라보던 동규는 하림의 시선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하림이 그런 동규를 따라 상체를 일으켰다.

“왜?”

“화장실.”

“빨리 갔다 와. 나 심심해.”

“……큰 건데.”

“알았어. 빨리 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어 나온 동규는 혹시 몰라 화장실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욕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 화장실로 들어왔다. 방음이 잘 되는 것과 상관없이 그냥 욕실에 누가 있으면 싫을 것 같아서.

화장실로 들어오고 나서 자위하기에 욕실이 더 괜찮지 않나 잠시 생각했지만 여긴 화장실도 엄청 크고 좋아 욕실이든 화장실이든 상관없을 것 같아 일단 터질 것 같은 바지부터 내렸다.

미쳤지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친구를, 서하림으로…….

하지만 일단 한 발 빼야 했기 때문에 동규는 머리를 굴려 하림으로 자위를 해도 될 이유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하림의 얼굴을 보면 한 번쯤은 이렇게 자극받을 거고 남녀를 떠나 거부감이 하나도 들 수 없는 얼굴이라 어쩔 수 없었고, 하림의 탓이라는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흥분한 내가, 친구를 상대로 이렇게 된 내가 쓰레기인데 잘생긴 애가 잔뜩 젖어서, 반질반질한 얼굴로, 씻어서 그런지 볼도 붉고 촉촉한 입술이나 손가락이…….

“……좆 됐다.”

한 번만 뺄 생각이었으나 하얗게 빈 머리로 휴지를 뽑다가 이번엔 하림이 머리를 말려 주던 기억이 폭주해 다리 사이로 피가 몰렸다. 심심하니까 빨리 오라고 그랬는데. 하림은 동규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침대를 뒹굴거리며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규는 정액에 젖은 질척한 손으로 다시 제 것을 잡고 빠르게 움직였다. 방금 전에 사정을 했음에도 하림의 손가락을 떠올리면서 좀 만져 주자 배에 바짝 서 한 손으로 잡기도 힘들었다. 자위는 많이 해 봤지만 이토록 흥분하며 성기가 커진 건 처음이었다. 진짜 미친 게 아닐까. 아침까지 여기서 자위만 하라고 해도 하림을 떠올리면 가능할 것 같다.

“아, 미친 새끼…….”

두 번째 사정인데도 휴지가 흠뻑 젖을 만큼 사정한 뒤엔 지독한 공허가 찾아왔다. 웃긴 건, 여기가 하림의 집이 아닌 제 집이었다면 한 발 아니 두 발은 더 사정하고도 남았을 거란 거다.

“진짜…… 어떡하냐…….”

하림이 화장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일어나야 했다. 좋은 향기가 가득 찬 화장실이라 다행이다. 화장실에 비치된 물티슈로 다리 사이를 박박 닦고 손도 닦았다. 사용한 티슈와 정액으로 절여진 휴지들은 변기에 버렸다. 핸드 워시로 손과 팔뚝을 세 번이나 씻고 화장실을 나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있어 동규는 헐레벌떡 손님방으로 돌아왔다.

살짝 잠에 들어 있던 하림은 문 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동규는 미안함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똥 싸다 죽은 줄 알았네.”

“……미안. 배가 좀…….”

“저녁 뭐 이상한 거 있었나.”

“아니. 그냥 좀 어제 집에서 밤에 내가 밤늦게 새벽에 야식 먹었는데 배고파서 그게 아직까지 여파가…… 있어.”

“어제…… 야식 먹은 게?”

“어어. 핵 매운 라면 여섯 개.”

“미쳤어. 새벽에 그 매운 걸 많이도 먹었다.”

“그……러게.”

“위에 안 좋아. 앞으로는 밤에 그렇게 먹지 마.”

“으응.”

자다 일어난 하림은 많이 졸린지 눈을 느리게 꿈뻑였다. 목소리에서 잠도 묻어났다. 동규는 미안해 하림 쪽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밤새 얘기 나누기로 한 거 뻔히 알면서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림으로 뺄 생각을 했지.

“아까 하려던 말이 뭐야. 궁금해.”

“아까?”

“머리 말려 줄 때. 왜 말을 하다 마냐고 하니까 이따가 한다고 했었잖아.”

“아…… 그거.”

동규는 그게 뭔지 기억나지 않았다. 뭐였지. 생각 안 나는 거 보면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하림이 궁금하다는 말에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아까 전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찾아 기억해 내 보려 했다.

“생각 안 나지.”

“……1분만 기다려.”

“도와줄게. 그때 내가 ‘선생님, 머리 예쁘게 말려 주세요.’ 하니까 네가 어떻게 머리를 예쁘게 말리냐고 그래서 내가 투덜이라고 놀리고 삐쟁이라고 놀렸어.”

“아.”

“생각났지.”

“응.”

“뭔데 그래서. 뭔 말 하려던 건데.”

“아, 되게 유치한 건데.”

“유치한 거 뭐.”

“그냥…… 애도 아니고 투덜이, 삐쟁이가 뭐냐.”

“뭐야.”

“유치한 거라고 했잖아.”

하림이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너 하루만 늦게 태어났어도 나보다 어렸거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지. 너 나한테 되게 할 말 다하고 투덜대고 툭하면 삐지고 그러더라.”

“……내가?”

“이게 몇 시간만 늦게 태어났으면 나한테 형아 형아 하면서 졸졸 따라다녔을 거면서.”

그래서 형아 소릴 그렇게 했던 거였군. 동규는 앞으로 하림이 형아 소리 할 때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엄청 귀여운 이유였다. 혹시 서하림은 동생을 갖고 싶은 걸까. 아가들 좋아하긴 엄청 좋아하던데. 아기 안는 폼도 프로답고.

“……졸졸 안 따라다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개도 아니고.”

“개? 너는 개 느낌은 아닌데.”

“개 느낌은 또 뭐야.”

하림은 누운 채로 팔짱까지 꼈다. 꽤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좀…… 곰?”

“곰?”

“곰 같지.”

“아 서하림. 듣자듣자 하니까 지금 나를…… 고옴?”

인상을 쓰며 질색하는 동규를 보며 하림은 웃음이 터졌다. 서랍에 올려 둔 휴대폰을 가져와 잠금을 풀었다.

“완전 딱이야. 대박, 너 이름 바꿔 놔야지. 곰규로.”

“아 하지 마.”

“싫은데용.”

“하지 말라니까.”

“내 휴대폰인데 뭘 하든 내 맘이지. 억울하면 너도 내 이름 바꾸든가.”

“……바꿀 거야.”

동규도 휴대폰 잠금을 풀고 하림의 이름을 지웠다. 그런데 뭐로 바꾸지.

“내일은 뭐 하고 놀까. 너 내일 언제 집에 가게?”

“몰라.”

원래 저장되어 있던 건 하림의 이름 세 글자. 아무리 머릴 굴려 봐도 하림과 딱 맞는 동물은 찾을 수가 없고 그렇다고 다른 별명을 지어 주자니 마땅한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림의 다른 친구들이 하림의 이름을 줄여 ‘서핢’이라 한다는 건 알지만 그건 걔네가 지은 거라 쓰고 싶진 않았다.

“점심은 먹고 가?”

“아마도.”

“점심은 뭐 먹지.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괜찮아. 지금 생각 안 나도 아침 먹으면서 아주머니한테 말하면 되니까.”

“혹시.”

“응.”

“간식 같은 거 해 먹어도 돼?”

“간식? 직접?”

“응. 점심 먹고 좀 쉬다 갈까 싶은데 주말이라 간식까지 해 달라고 하기가 좀. 간식 정도는 내가 만들.”

“그럼 나도! 나도 만들래! 뭐 만들 건데?”

“몰라 아직. 근데 너도…… 만든다고?”

“아 왜.”

동규가 알기로 하림은 계란 하나 삶아 본 적 없었다. 동규가 불신의 눈으로 하림을 바라보자 하림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네가 알려 주면 되잖아. 요리 잘한다며.”

“…….”

“쉬운 거로 만들면 나도 할 수 있어. 요리가 별거냐?”

“별거지.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고 손맛이 중요한 건데.”

“나도 해 보고 싶은데.”

“일단 내일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 샌드위치 같은 건 너랑 할 수 있을 거 같고.”

“샌드위치 완전 좋아. 내일 샌드위치 만든 거 벌써 맛있다.”

“……문법이 틀린 것 같은데.”

“아 진짜 투, 흠흠. 아무래도 너 나 되게 싫어하는 거 같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주 내가 뭐만 하면 어? 나한테만 뭐라고 그러고 어? 다른 애들은 안 그러는데 아주 내가 귀엽다 귀엽다 봐주니까 진짜 귀여운 줄 알아.”

“네가 언제 나를 귀여워했는데. 너야 말로 다른 애들한테는 안 그러면서 나만 놀리잖아. 고, 그것도 난 싫어.”

“곰? 네가 곰처럼 큰 걸 나보고 어쩌라고. 아기 곰돌이라고 하려던 거 곰이라고 한 걸 감사하게 생각해.”

“…….”

“또또 삐 그거 했대요.”

“잘래.”

“자지 마.”

“잘 자.”

말로만 잔다고 한 동규는 장난 어린 얼굴로 웃는 하림을 보다 작게 웃음이 터졌다. 하림이 웃으면서 ‘잔다며’ 하고 물었지만 동규는 눈만 깜빡거렸다. 그렇게 잠시 두 사람은 웃기만 하다가 금세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하림이 무거운 눈꺼풀과 싸우다 2시가 넘어서야 게스트 룸의 불이 꺼졌다. 동규는 불이 꺼진 방에서 잠에 들지 못하고 휴대폰에 ‘서하림’이라 저장되어 있던 걸 ‘하림이’로 바꾼 다음 하림의 숨소리를 한참 듣다 잠들었다.

다음 날, 간식으로는 에그마요베이컨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동규가 하림에게 베이컨을 태우지 말아야 한다는 미션을 준 덕분에 하림은 베이컨을 한 장도 태우지 않고 노릇하게 구워 동규에게 칭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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