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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일 하림의 집으로 하교하는 동규는 이제 하림의 집이 굉장히 편해졌다. 엄마가 정상 퇴근을 하는 날이면 세 시간 정도 빈둥대다 제 집으로 돌아갔고, 야근하시는 날은 하림이 잠드는 시간 직전까지 놀다 돌아갔다. 주말에도 동규가 심심하다고 놀러 가고 하림이 할 일 없음 놀러 오라고 한 탓에 일주일에 최소 7일은 붙어 있는 셈이 됐다.
동규의 집과 하림의 집은 파란 시내버스를 타면 약 20분 거리. 열일곱의 고등학생 둘이 친해지기엔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거리와 시간이었다.
동규는 오늘도 학교가 끝나고 하림의 집에 놀러와 있었다. 충분히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만큼 제 집처럼 편안하던 하림의 집은 느닷없이 어색하고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바뀐 건 하나도 없는데 그냥 동규가 느끼기에 그랬다. 바야흐로 오늘은 6월 22일. 다름 아닌 하림의 생일이었다.
동규는 하림의 생일 한 달 전부터 선물을 준비하고 메모장에 너무 길지 않게, 그렇다고 가벼워 보이지 않는 문장들을 다듬고 다듬고 또 다듬어 놨지만 6월 22일 정각,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열여덟 시간 전 하림에게 보내려다 말았다. 무척 잘 썼다고는 생각했지만 친구들에게 이런 식의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가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손 편지 쓰는 것도 굉장히 좋아하지만 손 편지도 줘 봤자 역시 오글거린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냥 생일 축하한다는 간단한 메시지와 이모지를 보냈다.
선물은 일단 쇼핑백에 챙기긴 했는데 그냥 이것만 달랑 줄지 아니면 역시 보내지 못한 메모장 속 편지를 손으로 써서 같이 줄지 고민됐다. 자기 전에 한참 뒤척이며 고민하다 편지지를 펼쳐 옮겨 적긴 했다.
하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사랑을 받았을 테지만 시험 기간이 12일 남았다는 이유로 정작 생일 당일엔 아무런 약속을 잡지도 않고 동규와 단둘이 집에 있는 중이었다(이모님과 가정부 아주머니는 논외다). 심지어 부모님도 오늘은 당직이고 친구들과의 생일 파티는 토요일인 내일, 부모님과 양가 조부모님들과의 식사는 일요일.
아무리 시험을 앞두고 있다고는 해도 생일날 다른 사람도 아닌 동규만 집에 오라고 한 게 동규는 굉장히 생소하고 어색하고 그랬다. 불러 놓고도 오늘은 내 생일이라느니 저녁에 생일 케이크를 준비했다느니 그런 말이 일절 없었다. 동규는 12시 정각에 짧긴 했어도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고 학교에서도 등교하자마자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는 하림의 친구들과 함께 박수도 쳐 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긴 했다. 그랬는데 하림이 생일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으니 가방 속에 있는 쇼핑백을 꺼내지도 못하고 계속 끙끙거릴 뿐이었다.
동규 혼자 어색함을 느끼며 하림의 눈치를 살피는 동안 하림도 평소랑 다르게 부산스러운 동규가 신경 쓰였다. 안 그래도 덩치가 산만 해 한 번 시야에 걸리면 계속 보이는 애가 이 책을 봤다가 저 책을 봤다가, 책장을 뒤졌다가 갑자기 책장에 꽂힌 책들을 정리하질 않나 여간 어수선한 게 아니었다.
“야, 똥 마려우면 가서 싸고 와.”
“어?”
“정신 사납게 뭐 해, 계속.”
“아, 미안. 그냥 좀 오늘 집중이…….”
하림은 교과서를 대충대충 넘기며 물었다.
“집에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럼 뭐, 고민이나 할 말 있어?”
“…….”
동규의 침묵은 대부분 의도적으로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라 침대에 누워 있던 하림은 벌떡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뭔데. 말해 봐. 나 조금 있으면 과외쌤 오니까 그 전까지 들어 줄게.”
“생각 조금만 더 해 보고 과외 끝나고 얘기해도 돼?”
“그래 그럼.”
다시 하림이 침대에 드러누워 교과서 옆에 있던 문제집을 펼쳤다.
“무슨 대단한 얘기길래 티저까지 날린 건지 쪼오금 기대하고 있겠어.”
“……말 안 할래. 부담스러워졌어.”
“헐, 미안 미안. 기대 하나도 안 할게. 안 궁금하다, 안 궁금하다, 김동규가 뭔 말 할지 진짜 완전 하나도 안 궁금하다. 됐지.”
장난처럼 한 말에 동규는 하림이 또 웃음기 머금고 무슨 얘기인지 당장 얘기해 달라는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정말 관심을 딱 끊고 부교재에만 집중해 조금 얼떨떨했다. 하림은 손쓰기 귀찮다고 수학 문제를 눈으로 풀어 나갔다. 수학 심화 문제들만 들어 있는 문제집을 어떻게 적어 보지도 않고 푸는 건지 동규는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살면서 수학 시험은 만점만 받아 봤다는 하림의 말이 생각났다.
수학만 만점이던가. 어지간한 과목은 거의 불패 신화였다. 게다가 작년 중학교 마지막 기말고사에서 하림은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3년 내내 전교 1등이던 하림의 모든 과목 점수가 0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객관식은 정답을 제외한 번호에 마킹하고 주관식과 서술형은 일부러 한 칸씩 밀려 써 제출했다. 마킹을 반대로 하고 주관식과 서술형도 제자리에 맞춰 적었으면 올백이었을 점수를 의도적으로 백지화한 이유는 하림이 쓴 단어를 빌리자면 레지스탕스였지만 선생님들은 사춘기의 반항이라 불렀다.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의 뜻 따라 의사가 되겠다던 하림이 의대도 싫다 과학고도 국제고도 싫다 하며 할아버지와 싸우다가 빼 든 마지막 카드기도 했다.
꽤 큰 사건이라 중학교 졸업 후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그 사건은 동규도 하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니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말이 너무 많이 나와서. 세문중 말고도 인근 학교들과 강남 학원가에 소문이 다 돌았다.
세문중 전교 1등인 서하림의 0점 사건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짜 진실은 동규만 알 거다.
작년에 그렇게 학교가 뒤집어지고 나서 동규가 너무 궁금해 졸업식 즈음 하림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봤었는데 하림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너 때문에’라는 다소 충격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하림의 0점과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동규가 겁을 먹고 하림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지도 못 하고 있는 동안 하림은 몇 분의 정적을 기다렸다. 동규는 손을 벌벌 떨면서 ‘나....?’라는 답장을 겨우 보냈고, 하림은 점 네 개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동규의 떨림에 ‘ㅋ’를 백 개쯤 보냈다. 그리고 동규와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왜 그런 일을 벌였고 왜 동규 때문인지 같은 것들을.
동규는 작년 겨울을 핫하게 만들었던 이 동네 해프닝을 떠올리다 휴대폰을 들었다. 뭐 볼 거 없나 하던 중에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림아, 선생님 오셨어. 시간 맞춰서 스터디 룸으로 와.”
“헐. 아, 시간 진짜 빨리 가. 형아 공부하고 올 테니까 혼자 잘 놀고 있어.”
문제집과 필통을 챙겨 든 하림이 동규의 팔뚝을 가볍게 치고 방을 나갔다.
“……뭐만 하면 형아래.”
물론 하림의 생일이 동규보다 반년이 빠르고 동규는 까딱 잘못했다간 해를 넘겨 태어나 정말 하림보다 한 살 어릴 뻔했지만 결국은 같은 해에 태어나지 않았던가. 거기다 하림은 동규보다 키도 작고 몸도 작고. 누군들 동규 옆에 서면 작지 않을 순 없고 하림도 객관적으로 보면 큰 키였으나 어쨌든 동규는 아직도 하림을 아홉 살 처음 만났을 때로 생각하곤 해서 하림이 한참 작게만 느껴지곤 했다. 그때 하림은 정말 하얗고 예쁘고 작았으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동규는 괜히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가방에 넣어 온 선물을 뭐라고 하면서 줄지 골똘히 궁리했다.
하나도 안 궁금한 척한 것과는 정반대로 하림은 과외 받는 내내 동규 생각으로 바빴다. 정확히는 동규 생각이라기보다는 동규가 줄 생일 선물 생각이었지만. 누가 봐도 선물을 준비해 왔는데 타이밍이 영 맞지 않아 눈치만 보고 있는 행색이었다.
평소에도 곧잘 메시지로 서로 몇 시간 동안 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영화나 책을 보고 나면 짧지 않은 감상을 보내기도 해서 하림은 오늘도 생일 축하 메시지가 길게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졸려 죽겠는데도 12시까지 버텨 겨우 받은 메시지는 겨우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전부라 김이 다 샜다.
어차피 학교에서 친구들이 신나게 축하해 주면서 동규도 그 옆에 슬쩍 껴 박수 쳐 줬고 내일은 생일 파티도 하니까 별생각 없이 가만히 있었던 건데 동규가 생일 축하를 더 해 주고 싶은지 깜찍하게 군다. 원체 생각이 많고 속으로 삽질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같은 반이 되고 붙어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신과는 성격이 완전 다르다는 걸 새삼 느꼈다.
딴생각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하림을 보다 못한 선생님이 과외를 15분 정도 일찍 끝냈다. 하림은 과외 선생님에게 일찍 끝내 주셔서 감사하단 의미로 90도로 허릴 숙여 인사하고 제 방으로 급히 돌아왔다.
“형아 끝!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동영상. 다큐멘터리. 극한 직업 재밌다.”
“아하. 무슨 직업인데?”
“말벌 잡는 거.”
“나 말벌 지인짜 싫어. 바퀴벌레보다 더 싫어.”
“꿀벌 천적이라?”
“응. 미친놈들이야.”
하림이 잠시 말벌이 왜 싫은지, 꿀벌이 지구 생태계에 얼마나 중요한지 짧게 설명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우리 이제 밥 먹으러 내려가야 돼.”
“그럼 밥 먹고.”
“그래라.”
풍선 때도 그렇고 글 안 써져서 속상해했을 때도 그렇고, 하림은 문득 동규를 다루는 게 쉽긴 쉬운데 손은 많이 간다고 느꼈다. 맘만 같으면 그냥 생일 선물 내놓지 않으면 방 밖으로 못 나간다고 하겠지만 그러면 동규 성격상 죽어도 생일 선물 없다고 내뺄 것 같다.
저녁 먹고 다시 방으로 올라왔을 때 하림은 다시 모르쇠 작전을 펼쳤다.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예능 클립을 재생시키고 혹시 동규가 뭐라고 작게 자길 부르지 않을까 귀를 그쪽으로 쫑긋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규는 상상으로는 가방 지퍼를 팔천 번쯤 열어 선물들을 꺼내고도 남았지만 하림이 예능을 보며 웃고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괜히 잘 쉬고 있는데 방해하는 건 아닐까 싶어 실행할 용기가 안 났다. 눈동자만 굴리다 밥 먹기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 말벌 사냥꾼 편을 마저 틀었으나 이미 한참 전에 끝났다. 좀 전부터는 대게 잡기 편이 시작됐지만 뭔 내용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생일 축하를 많이 받아서 오늘은 더 받기 싫은 건가? 어차피 내일이면 친구들이랑 생일 파티 하면서 놀 거니까 나한테는 받아 봤자 별거 아니라 그건가? 아니면 12시에 보낸 게 다른 친구들은 생일 축하한다고 길게 길게 보냈는데 나는 너무 짧게 보내서 마음이 상했다거나. 그런데 학교에서 서하림 친구들이 생일 축하 노래 부를 때 옆에서 정서준 윤지호랑 같이 불러 줬는데…… 그리고 그런 거 가지고 삐질 애도 아니고. 그렇다면 왜 어째서 아무 말도 없는 거지…….
“너 내일 뭐 해.”
“어?”
“왜 이렇게 놀라. 또 멍 때렸지.”
“아, 어, 응.”
“내일 뭐 하냐고.”
“내일? 별일…… 없는 거 같은데. 왜?”
“심심하면 생일 파티 놀러 오라고.”
“어?”
“시험 기간이라 오래는 못 놀고 그냥 프렌치 레스토랑 하나 빌려서 점심만 먹을 거야. 파티랄 것도 없네. 거기 셰프님이 청와대 출신에 거의 예약 손님만 받거든. 원래 주말 피크 타임에 전체 대관 절대 안 해 주는데 할아버지 졸라서 성공했지. 이번 시즌 메인 디시로 나오는 수비드 치킨 너무 맛있어. 닭가슴살로 한 건데도 부드러움 장난 아니야.”
“대단하다.”
“영혼이 없는데.”
“있어, 영혼.”
하림이 그 레스토랑의 무슨 메뉴가 맛있고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는 어떻게 나오고 하는 것들을 얘기 하면 할수록 동규는 시무룩해졌다. 하림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계속 열심히 얘기했다.
“근데, 안 와도 괜찮아. 상관없어.”
“응?”
“와도 너랑 친한 애 하나도 없어서 불편할걸.”
“…….”
“먹고 싶으면 나중에 따로 가도 되고. 그리고 지인짜 리얼 생일은 오늘이니까?”
“아…… 응.”
이 정도까지 떠먹여 줬는데 삼킬 수 있겠지. 하림은 데굴데굴 굴러 침대 끄트머리에 옆으로 누웠다. 머리통을 팔로 받친 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규를 바라보았다.
“아, 저 혹시.”
“응.”
“별건 아닌데…….”
“응.”
“생일……선물 준비했거든.”
“오 진짜? 기특하네.”
나이스. 하림은 손 하나를 등 뒤로 숨겨 주먹을 꼭 쥐었다.
“좀…… 크고 무거워.”
요란하게 반응해서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보고 싶긴 한데 최대한 동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어 하림은 계속 가만히 있었다.
“친구들한테 좋은 선물들은 많이 받을 거 같고, 부모님이랑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비싼 거 받을 거 같아서…… 나는 진짜 별거 아니야.”
주춤거리던 동규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림을 보고 조금 용기가 났다. 만약 하림이 눈을 반짝이면서 무슨 선물일지 궁금해했다면 부담스러워서 편지만 주고 말았을 텐데 다행히도 하림은 별 기대를 하는 것 같진 않다.
“별건 아니지만 많이 무겁기는 한 건가 봐. 좀 무거운 게 아닌 거 같은데.”
가방에서 꺼낸 쇼핑백은 멀리서 봐도 중량감이 느껴졌다.
“가까이 가서 봐도 돼?”
“응. 어차피 네 건데.”
하림은 빛과 같은 속도로 일어나 테이블에 앉았다. 동규가 직접 쇼핑백 안에 든 것들을 차례차례 꺼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첫 번째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합본이었다. 투명 비닐로 포장되어 있었고 표지와 동일한 디자인의 스티커가 온전한 형태로 붙어 있었다.
“이건, 네 책장에도 있는 책이라 안 좋아하면 어쩌지 좀 걱정되는데…….”
“나 책 완전 좋아해. 좋아하는 책은 두세 권씩 또 사.”
“……그래?”
“응. 진짜로. 게다가 나 이 책 진심 완전 좋아해. 진짜, 지인짜 진짜 완전 고마워. 우와 대박. 두꺼운 거 봐.”
기대치가 낮아서 그랬는지 선물을 본 하림의 반응이 뜨거워 동규는 속으로 엄청 안심했다. 만약 실망하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읽혔다면 모니터 받침대나 인테리어 소품이나 용돈 숨겨 두는 책으로 쓰라고 할 참이었다.
“이게 다섯 권짜리를 하나로 합친 1200페이지도 넘는 합본이야. 2005년에는 소프트커버로 나왔었는데 그건 흐물흐물하고 책도 금방 망가져서 인기가 별로였대. 근데 마침 몇 년 전에 하드커버 합본이 한정판으로 새로 나왔어.”
“포장 스티커 그대로인 거 보면 미개봉인 거 같은데 맞아?”
“어떤 사람이 미개봉을 프리미엄가 붙여서 팔더라고.”
“프리미엄가? 얼마나?”
“그냥 조금.”
“무리한 거 아니야?”
“안 했어. 예전에 너 이거 엄청 재밌게 읽었고 좋아한다 그래서, 아무튼 이거랑.”
“이거‘랑’? 또 있어?”
“응.”
두 번째로 꺼낸 것은 꽤 큰 상자였다.
“공부도 안 하는 게 왜 그렇게 큰 가방을 메고 왔나 했더니 이러려고 그랬군.”
하림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축구공 크기의 유리구슬과 원통형의 나무 받침대가 들어 있었다. 구슬 안에는 과학책에서나 볼 법한 하얀색 원자 모형이 들어 있고 주변에는 반짝거리는 가루도 보였다.
“대박. 나 이거 알아. 서하늘이 인터넷 서점에서 책 사고 굿즈로 받았어, 고래 그림으로. 근데 그건 되게 작던데.”
“이거 회사가 이런 구형 유리로 램프 만든 거 원조래. 걔가 받은 거랑은 크기부터가 차원이 다른…… 아무튼 진짜 유리 램프인데 무드등처럼 쓸 수 있는 거. 깨지지 않게 조심해야 해. 네 방에도 무드등 있길래.”
“안에 이거 원자 맞지. 근데 약간 이거 별 모양 느낌 나는데, 주변에 뿌려져 있는 거는 은하수 같고. 의도한 건가.”
“글쎄…….”
대답을 제대로 해 주고 싶은데 원자가 뭔지 모르는 동규는 말을 흐렸다.
“서하늘이 이거 불 끄고 보면 엄청 예쁘댔어. 지금 해 보자.”
동규가 램프의 불을 켰다. 하림은 유리구슬을 깨끗하게 닦아 조심스럽게 올렸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방의 불을 껐다. 이 유리 램프는 뉴턴인지 아인슈타인인지 무슨 과학자의 뭔가를 기념해서 유명한 해외 조명 회사가 낸 이벤트 상품이고, 딱 다섯 개 남은 걸 사서 배송 받는 데 보름이 넘게 걸렸고 더 이상 재판도 안 한다는 그런 얘기는 이 분위기에 하지 않아도 되겠지.
“우와…….”
까만 어둠을 밝히는 빛을 하림이 벅차오른 얼굴로 담았다. 눈동자가 꼭 반짝이는 듯이 보였다. 하림은 우와, 우와 하며 감탄만 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손가락으로 구슬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구슬 안에 있는 반짝이들이 햇빛에 빛나는 바다처럼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반짝거렸다.
동규는 하림의 얼굴과 눈동자를 살피다 두 눈을 꽉 감고 편지를 꺼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었다.
“……이것도.”
램프만 보던 하림이 고개를 돌려 동규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빛이 반사된 것일 테지만 하림의 눈동자는 마치 눈물이 고인 것만 같다. 동규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바라보는 하림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목이 타고 심장이 뛰어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편지네. 직접 쓴 거야?”
“그냥, 생일 축하한다고.”
“나 손 편지 좋아해.”
“……응.”
램프 지금 켜지 말자고 할걸. 괜히 진실 게임 분위기 같은 게 돼서는. 이렇게까지 진지한 분위기로 전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선물이 무겁고 하림에게 이미 있는 거니까 적당히 설명해 주고 말 거였는데 괜히 램프를 켜서 이상한 분위기가 됐다.
“지금 읽으면 안 되지.”
“읽어도 돼. 그냥 생일 축하한다는 내용밖에 없어.”
“아…… 그래.”
하림은 굉장히 아쉽다는 목소리였지만 동규도 하림도 알아차리진 못했다. 동규는 편지 내용에 뭐가 이상한 건 없었는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편지를 복기했고 하림은 이 분위기에 고백 편지가 아니라 고작 생일 축하한다는 편지를 선뜻 뜯지 못했다.
“부담스러워 할 거 없어. 진짜 그냥 별 내용 없고 생일 축하한다는 편지야.”
“…….”
“근데 조금…… 부끄러워. 이번에는 봐도 되는데 다음부턴…… 너 혼자 있을 때 읽어.”
“다음?”
“내년 생일.”
“알겠어.”
그냥 생일 편지치고는 두툼한 편지 봉투를 열었다. 한 장보다 더 많은 편지지가 접혀 들어 있었다. 하림은 첫 두 문장을 씁쓸한 티를 내지 않고 소리 내 읽으며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점점 진지해졌다. 하림은 제가 바보처럼 입을 열고 읽는 줄도 몰랐다.
“너, 아…….”
[……지금까지 너랑 했던 모든 얘기들은 다 재밌고 신기하고 즐거워서 소중한 기억들로 남아 있지만 그중에 제일 특별한 걸 고르라면 나는 졸업식 때 너가 왜 작년에 시험을 그렇게 망쳤는지를 말해 준 걸 고를 거야. 혹시 읽으면서 다른 거 예상했다면 미안.
너랑 내가 안 지가 몇 년인데 의외로 굉장히 따끈따끈한 최신 기억이지? 사실 난 아직도 내가 몇 년 전에 그렇게 대단한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 정확히 언제 얘기했는지도 잘 생각 안 나. 5학년 때인지 6학년 때인지... 그냥 나는 너가 나보고 글 왜 쓰냐고 물어봐서 재밌으니까 쓰는 거고 그래서 소설가가 될 거라고 얘기한 게 다였으니까. 별생각 없는 초딩의 한마디에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그 어린 나이에 되돌아보고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뭔지 개척한 너가 정말 용감하고 대단한 것 같아.
근데 작년에 네가 그랬잖아. 내 덕분이라고, 나 아니었으면 너가 진짜 뭘 하고 싶은지 몰랐을 거라고 말해 주는데... 나는 그 말에 정말 많이 기뻤어. 나도 너한테 뭔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너는 늘 혼자서도 다 잘하니까 솔직히 좋은 의미로 충격이었고. 사실, 그 이후로... 글 쓸 때 책임감? 같은 게 생겼어. 부담스럽다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친구들에게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좋은... 긍정적인... 영향? 을 줄 수 있단 걸 처음 알았어, 그때. 왜냐면 다들 공부만 하잖아. 아무튼 그래서……]
하림은 편지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마치 꾹꾹 눌러쓰듯, 그렇게 읽었다. 친구와 가족과 학교가 전부인 미숙한 세계에서 이토록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건 천운이 아닐까.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며 받을 수 있는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인복이라고도 했다. 운이니 복이니 그런 건 하나도 믿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규와 만난 건 필연적인 인연이라고 하림은 확신했다.
“야 김동규…….”
“혹시 내가 뭐 잘못이나 그, 실수로 이상한 말을 적었.”
“그런 거 없어.”
두 장 하고도 반을 적은 빼곡한 편지를 다 읽자 하림은 진심으로 심장과 폐가 뻐근해 왔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몇 번이나 숨을 깊숙이 들이쉬고 내쉬어도 소용이 없었다. 하림이 심각한 표정으로 숨만 푹푹 쉬고 있자 동규가 또 시무룩해지는 게 보였다.
“김동규 나 봐 봐. 괜찮아. 진짜 잘 읽었어. 완전…… 진짜 감동이야. 책도 유리구슬도 편지도, 다.”
“…….”
“나도 네 선물들 다 재밌고 신기하고 소중한데 제일 감동 먹은 거 고르라면 나는 편지 고를래. 내년에 또 써 줘. 백 장쯤.”
“음, 백 장.”
“빨리 내년 생일 됐으면 좋겠다.”
한두 장도 아니고 백 장을 쓰려면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하지. 내용도 내용인데 시간은 또 얼마나 걸리려나.
“김동규 바보냐? 진짜로 백 장 써 달란 얘기가 아니라 그냥 그만큼 좋았다고.”
“아, 그래.”
“어휴 진짜 미련곰탱이가 따로 없어요.”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백 장 써 달라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진짠 줄 알지.”
“여기.”
“…….”
“와, 지금 눈으로 욕한 거 봐. 자기가 장난을 진지하게 받아 놓고?”
“안 그랬어.”
“다 봤는데요. 유치하다고 욕한 거.”
“……너 독심술도 해?”
“조금?”
“뭐야. 거짓말이지.”
음흉한 얼굴로 하림이 흐흐, 하고 웃었다. 동규는 진짜로 하림이 독심술을 쓰는 것 같아 몇 번이나 진짜냐고 되물었다. 하림은 너는 은근히 얼굴에 티가 다 난다는 말을 해 줄 생각이 없어 계속 뭔가 있는 것처럼 실실 웃기만 했다.
시험이 끝나면 다음 날 정도에 1차 가채점 점수와 등수가 적힌 꼬리표가 나온다. 그 뒤론 정오표가 나오고 주관식과 서술형 정답 검수를 거쳐 최종 성적이 결정되는데 하림은 제 꼬리표보다 동규의 꼬리표를 붙잡고 몇 번이나 점수를 확인했다. 처음 보고서는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서하림 너도 작년에 전교 꼴지 해 봤잖아. 0점 퍼레이드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충격 받은 얼굴이야.”
“맞아. 올 빵점 클리어했었다며.”
“아니 그건…… 내가 일부러 그런 거고. 아니 그런데…… 학생이 0점을 받으면 그 과목 선생님이 시말서를 써야 한단 말이야. 내가 해 봐서 알아.”
서준과 지호, 하림이 시끄러운 와중 동규가 다시 슬쩍 하림 쪽으로 고개를 빼 점수를 확인했다.
“나 0점은 아니야. 1, 2, 3, 3, 2, 1이 나온 건 좀…… 신기한데. 내 생일 같아.”
“신기?”
“그리고 나는 일반 입학 아니라서 0점 맞아도 괜찮다고 입학할 때 안내받았어.”
“그래도…….”
괜히 한마디 했다가 하림이 머리를 싸맸다. 동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먼 산만 바라보며 다른 사람 일인 양 굴었다.
“아, 됐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근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 진짜 너 공부 하나도 안 할 거야?”
“대학 안 가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어.”
“아니 그러니까 나도 그건 아는데.”
“딱히 안 가도 상관은 없지만 가더라도 특기자로 예대 갈 거라서 공부 안 해도 돼.”
하림은 이미 동규와 각자의 학교 과잠을 입고 이런 곳 저런 곳 놀러 다니는 계획까지 다 세워 뒀는데 성적이 123321이 나왔다고 신기하다는 둥 공부 안 해도 된다는 둥 속 편한 소리만 하는 동규 때문에 열이 올랐다.
물론 동규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거고 혹시라도 갑자기 실력이 일취월장된 다른 학생이 백일장에서 동규보다 상을 더 잘 받아 갈 수도 있는 일이지 않은가. 이번 학기만 해도 1학년이라 그런지 장원은 한 개밖에 못 받았다고 하고.
“김규형님 전국 대회 2등만 몇 개냐. 백일장에서 2등을 그 차, 차 뭐라고 하더라.”
“차상.”
“수상 이력 칸 벌써 꽉 찼을 듯. 장원 급제 하나랑 차상 다수.”
“1학년이 2등 쓸어가는 것만 해도 대단하지! 차상만 받아와도 교장이 난리 나잖아. 전국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친구들이 동규에게 프로 차상러, 전국2등남이란 수식어를 붙여 주는 동안 하림은 지금부터라도 동규와 함께 공부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공부 스케줄을 급하게 짜기 시작했다.
“김동규 너 방학에 뭐 해.”
“나? 음…… 8월에 접수해야 하는 백일장 예선작 쓰는 거랑 문학 캠프랑 또 영화 열 개 보기. 아, 엄마 아빠랑 계곡도 놀러가.”
“바쁘네.”
“그러게.”
“아, 너 예선작 우리 집에서 쓸 거지.”
“응.”
“그럼 영화도 우리 집에서 봐.”
“영화도?”
“열 개 보는 거 꼭 최신 영화로만 봐야 돼? 영화관 가서?”
“아니, 그냥 1월 1일에 세운 올해의 목표 중 하나야. 방학에 유명한 영화들 열 개 보기. 영화 잘 안 봐서.”
“우리 집에서 봐, 우리 집에서. 아빠가 영화 디비디랑 블루레이 다 모으는데 영화방 스크린 엄청 크고 홈시어터 있어서 1인 영화관 같아. 내가 좋아하는 영화 보여 줄게.”
“그래.”
나름 동규에게 친절한 선생님이 되어 주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여름 방학을 시작한 하림은 아주 큰 포부를 갖고 동규와 마주 앉았다. 지적인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 피곤할 때만 쓰는 안경도 썼다.
“……공부 알려 준다고?”
“알아봤는데 문학 특기자도 수상실적 100% 아니고 면접이랑 내신이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50%나 반영이더라.”
“과외쌤이 그랬는데 그거 써 있는 거만 그렇게 써 있지 실질적으로는 수상 실적 100%로 봐도 된대. 쌤도 국어만 3등급이고 나머지는 7이랑 8등급이었는데 붙었어.”
“야, 너는 국어도…….”
“…….”
“일단 알겠고, 그래도 일단은 해 보자. 혹시 모르는 거잖아. 면접날 어디 아플 수도 있는 거고 상도 어떤 애가 갑자기 문학의 신에 빙의해서 대작을 쓸지도 모르는 거고.”
“그래.”
패기 좋게 시작했지만 동규는 구구단도 제대로 몰랐다. 초등학생 때 뭐 했냐는 질문에는 “기사 봤는데…… 성인들 10명 중 7명이 구구단 잘 기억 못한대. 왜냐면 사칙연산 다 휴대폰으로 하니까.”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림은 화가 나진 않고 오히려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동규가 자기는 공부에 뜻 전혀 없고 대학도 마찬가지라며 눈 마주치고 얘기하는데 하기 싫다는 애 데리고 억지로 가르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하는 동안 동규는 맘껏 놀게 내버려 뒀다. 동규가 백수로 산다 해도 하림은 백수 동규 백 명쯤은 거뜬히 데리고 살 자신이 있었다.
동규는 아침에 눈뜨면 하림에게 전화를 걸어 하림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하고 바로 하림의 집으로 달려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하림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 둘이 집에서 뒹굴거리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운동을 하기도 보드게임을 하기도 하고 각자의 공부를 하기도 하면서 종일 붙어 있는 게 혼자 있는 것보다 익숙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