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2화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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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규와 친구들이 쉬는 시간에 하는 것이라곤 책을 읽거나 작곡 노트를 꺼내 가사를 짓거나 집에 설치해 둔 카메라로 동물들이 잘 지내나 보는 일이다. 귀찮으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기도 한데 서준과 지호는 꼭 주섬주섬 노트와 휴대폰을 챙겨 동규의 옆에 모였다. 어차피 모여 봤자 딱히 하는 말도 없이 서로 할 일만 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도 일쑤였다.

“아. 나 망했어.”

셋 중에 말이 제일 없는 동규가 한숨을 푹푹 쉬며 죽어 가는 소리를 하자 서준과 지호가 깜짝 놀라 당황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아침에 등교했을 때부터 동규는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몰라…… 말하기도 싫어.”

이제 겨우 1교시 쉬는 시간이었지만 동규는 책상 위에 엎드려 집에 가고 싶다며 중얼거렸다.

“얘 원래 이래?”

“글쎄다. 나도 얘랑 친해진 거 올해가 처음이야.”

“중학교 다닐 땐 안 친했어?”

“엉. 내 친구의 친구라 걍 이름만 알았어. 그리고 김동규 원래 마웨 쩔어서 혼자 다녔고. 수업 시간이랑 쉬는 시간에 잠만 잠. 얘 지금도 학교 나오는 거 급식 먹으려고 나오는 거임.”

“어쩐지, 두 번씩 받아먹더라.”

서준과 동규는 같은 중학교를 다녔지만 지호는 계속 충남 천안에서 살다가 작년 여름 서울 사당 근처로 전학 왔다.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서준은 중학교 내내 보고 들었던 동규가 어땠는지를 지호에게 설명했다. 백일장에서 상 자주 받아 오더라, 우리 학교에서 키 제일 크더라, 남자애들이 앞에서 쪽도 못 쓰더라 등등.

“김동규 어디 아파?”

쉬는 시간 종 치자마자 교실 밖으로 사라졌던 하림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동시에 2교시 수업 종이 울렸다.

“그건 아닌데 나도 몰라. 뭐 망했다는데 말하기 싫대. 아, 김동규한테 가사 좀 봐 달라고 부탁 좀 할랬더니.”

친구들이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동규는 엎어진 상태로 있었다. 선생님이 들어와서도 움직이질 않아 하림이 동규를 찔러 무슨 과목이라고 알려 주고 나서야 팔 하나만 움직여 교과서를 꺼냈다. 그마저도 다른 과목 교과서였다.

“김동규, 아프면 보건실 가고 아니면 일어나라.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엎어져 자는 것만 아니면 다른 건 다 해도 된다 했지.”

“네.”

일어난 동규의 얼굴은 꽤 험악했다. 하림은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며 팔을 뻗어 동규의 책상 서랍을 뒤져 제대로 된 교과서를 꺼내 주었다.

“……고마워.”

“무슨 일인데 이래? 진짜 아픈 건 아니야? 망한 건 또 뭔데?”

“아, 그게.”

“쉿. 잠시만.”

자리에 앉은 하림이 노트 제일 뒷장을 펴 뭔가를 적은 뒤 동규에게 건넸다.

[무슨일인지 물어봐도 돼?]

[ㅇㅇ 근데 별건 아니야]

[별거 아닌데 왜 그러고 있었어]

[아니 그냥.. 몰라 그냥 좀 속상한 일]

[뭐지 긴 얘기야?]

[아니]

[그럼 밥 같이 먹고 점심시간에 알려줘]

[응]

급식실로 가는 동안 하림은 지호가 키우는 강아지 영상을 봤다. 하림은 강아지 사료의 종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뭐든 새로운 지식을 알아 가는 걸 좋아해 지호가 신이 나서 이번에 크림이 피부병 때문에 바꾼 사료에 뭐뭐가 들어갔고 전에 먹던 사료랑은 어떤 게 다른지를 설명해 주는 걸 귀 기울여 들었다. 아파서 동물 병원에 한 달이나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카멜레온인 레오의 이야기가 막 시작이 됐을 때 급식실에 도착했다.

“근데 카멜레온 내가 알기로는 귀뚜라미 먹는 거 같던데 맞아?”

“잡식성이라 사실 곤충 다 잘 먹긴 하는데 애완용은 귀뚜라미가 제일 좋고 거의 대부분 주인들이 귀뚜라미 먹여. 가끔 특식으로 밀웜. 비타민이나 칼슘제 주사도 정기적으로 놔 주고.”

“카멜레온 파충류지. 잡식이면 육식동물인가?”

“어, 야생 카멜레온은 곤충 말고도 거미, 지네, 지렁이, 쥐, 크기 작은 새도 먹는다?”

“쥐 먹을 정도면 곤충들 중에서도 꽤 큰 곤충들도 먹겠는데. 딱정벌레목처럼. 아, 근데 이건 너무 딱딱한가? 귀뚜라미는 메뚜기목으로 분류되거든. 카멜레온 이빨 있어?”

“없어.”

“그럼 딱정벌레 곤충들은 못 먹겠다. 메뚜기목은 이빨 없는 카멜레온이 먹기 괜찮게 부드러울 거야. 식감 정도만 있고.”

동규는 나름 하림과 줄 서서 기다리는 때부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멜레온의 먹이 얘기로 귀뚜라미가 나온 순간, 동규는 속으로 탄식했다. 누가 말리지 않는 한 못해도 밥을 다 먹을 때까지 하림과 지호의 얘기는 계속될 거였다. 하림은 지금 자기가 아는 온갖 곤충 얘기를 풀어내느라 흥분해 말이 엄청 빨라져 있었다.

“서하림 벌레 엄청 좋아하나봐.”

“노노. 벌레 아니고 곤충.”

“벌레나 곤충이나. 아우 징그러.”

“엄청 달라. 곤충은 머리, 가슴, 배로 나뉘는 절지동물들을 말하는 거고 벌레는 소동물 종류도 다 포함하는 말이라 벌레 안에 곤충이 들어가는 거기 때문에 정확히는 좀 다르지. 거미랑 지렁이는 벌레는 맞는데 곤충 소속은 아닌 것처럼.”

“헉.”

서준은 그냥 별생각 없이 얘기한 것일 뿐인데 하림의 전문적인 설명에 입을 틀어막았다.

“서하림한테 공룡이랑 곤충 얘기하면 큰일 나.”

동규는 서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공룡도? 공룡 얘기는 뭐, 초식 공룡 대분류나 고고학의 역사부터 말해 주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준이 물었다. 하림이 듣지 못하게 마찬가지로 동규의 귀에 속삭였다.

“그 얘기 꺼내면 공룡 연구는 고고학이 아니라 고생물학에서 하기 때문에 두 개가 어떻게 다른지 알려 줄걸.”

입이 떡 벌어지며 서준이 경악을 했다.

“와, 진짜 천재도 아무나 못한다. 공부를 잘하면서 다른…… 것들도 엄청난 덕질을……. 혹시 또 주의해야 할 단어 있어?”

“글쎄, 저거 두 개만 아니면 뭐…….”

“밥이나 먹자.”

서준은 말을 잇다 말고 동규의 옆구리를 찔러 하림과 지호와는 조금 떨어진 자리를 향해 턱짓을 했다. 지호는 곤충 자체는 잘 모르지만 이야기의 시작이 카멜레온의 먹이로부터 시작되다 보니 하림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진짜?’ 하며 꽤 흥미 있게 들었다. 동규는 하림을 따라가려다가 서준이 같이 가자며 동규의 등을 간지럽혀 그냥 서준을 따라갔다.

“서하림 친구들은 저걸 그냥 다 받아 주나?”

“아닐걸.”

“그래?”

“애초에 저런 얘기를 잘 안 꺼내니까. 우리가 친구랑 곤충이나 공룡 얘기 할 나이는 아니지.”

“아, 그러네. 저거 저러다가 점심시간 다 벌레 얘기로 날리겠는데. 김규 너 그거 다 먹고 또 먹음?”

“아니.”

원래는 급식을 두 번씩 먹던 동규였지만 며칠 전부터는 급식실 직원들이 알아서 동규의 식판에 밥이나 반찬을 산처럼 쌓아 줘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번 달 초까지는 동규가 아무리 많이 달라 해도 적당히 더 주고 말았는데 매번 밥을 다 먹고 새 식판을 들고 와 조리사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질문 있어.”

서준이 음식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서하림이 공룡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한 번도 같은 반 된 적 없다면서.”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지만 6학년 때 갑작스럽게 열린 피구 대회로 하림과 운동장에서 오래 앉아 있던 적이 있다. 동규는 빨리 죽고 쉬고 싶었기 때문에 어슬렁거리며 선 안을 돌아다니다가 세 번째로 죽었다. 상대 팀인 하림은 첫 판 거의 마지막까지 남았었는데 공을 무리하게 잡으려다 넘어져 기권을 해야 했다.

사실 죽은 학생은 선 밖에서 살아 있는 상대팀을 공격해야 했는데 빠른 게임 진행을 위해 공격팀은 한 팀당 네 명만 두는 룰을 정해 동규는 마음껏 쉴 수 있었다.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안 그래도 키가 크니까 온갖 운동을 해 보라고 권유당하는 판이라 몸치인 척, 운동 못하는 척을 해 온 덕분이었다.

그렇게 그늘 아래서 만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공룡 얘기까지 흘러갔다.

‘너는 무슨 공룡 좋아해?’

동규는 공룡 이름 아는 건 티라노사우루스밖에 없었지만 모두가 다 아는 공룡을 얘기하기 싫어 마침 나비가 날아다니길래 이렇게 대답했다.

‘익룡.’

나름 괜찮은 대답이라 생각했으나 큰 오산이었다. 하림이 익룡은 사실 공룡이 아니라 비행 파충류이며 둘 다 뿌리는 같은데 공룡이 진화하기 전에 갈라져 쉽게 말하자면 유인원과 인간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는, 다소 어려운 이야기를 쏟아 냈다.

‘익룡이랑 공룡이랑 똑같은 룡을 써서 나는 같이 공룡인 줄 알았어.’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근데 자세하게 알아보면 익룡은 종류도 별로 없어서 재미없어.’

동규는 자기가 잘 아는 건 공룡이지 익룡은 아니라면서도 익룡이 어느 시대에 출연해 어느 시대에 멸종했는지, 두 가지의 종류로 나뉘며 각각을 대표하는 익룡이 뭔지도 얘기하던 열세 살의 하림을 떠올렸다.

“그냥, 내가 익룡 좋아한다고 했다가.”

“안 봐도 알겠다. 익룡 이름 천 개는 얘기함? 티라노사우루스랑 어쩌고저쩌고사우루스랑. 뭔가 좀 의외다. 살짝 깨는 느낌? 아니 깬다기보다는 갑자기 서하림이 엄청 친근해지네.”

동규는 전혀 모르는 분야라 고갤 열심히 끄덕였을 뿐 지금은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 하림이 얼마나 눈동자를 빛내며 얘기했는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익룡은 공룡이 아니래.”

“응?”

“그리고 익룡은 종류도 별로 없댔어. 상대방이 싫어하면 그런 얘기 잘 안 해. 나도 공룡 얘기, 곤충 얘기는 딱 한 번 들었어.”

곤충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동규는 백일장 상을 받기 위해, 하림은 대한민국어린이과학대회 상을 받기 위해 아침 조례 시간에 시청각실 갔다가 들은 얘기였고 동시에 하림과 동규가 처음 만난 날이기도 했다. 동규는 ‘필기구’란 주제로 시를 써서, 하림은 장수풍뎅이 실험으로 상을 받았다.

“아하. 난 또 답도 없는 오타쿠처럼 어떻게든 자기 좋아하는 얘기만 하는 줄 알았지.”

“걔는 안 그래.”

“글쿤.”

“그리고.”

“응?”

“얘기는 들을 만해. 말 되게…… 재밌게 잘해서.”

“그건 인정. 저 얼굴로 국어사전만 읽어도 재밌다고 할 여자애들 많을걸.”

“그거랑은 상관없어.”

“왜 상관이 없냐. 아니 여자애들 말고 남자 새끼들도 하나같이 대단하다고 박수 치고도 남지. 서하림 따라다니는 애가 한둘도 아니고.”

얘기하느라 잠시 내려놓은 숟가락을 다시 들고 동규는 급식이나 마저 먹었다. 그 이후로도 서준이 뭐라고 더 떠들었지만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말뿐이라 고개만 끄덕이는 게 다였다. 그랬더니 서준도 알아서 조용해졌다.

점심 먹는 동안 곤충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인지 급식실을 나올 때쯤엔 하림과 지호는 강아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잘 들어 보니 고양이 얘기도 들렸다.

“나 김동규랑 할 말 있는데 너네 둘은 교실 먼저 갈래?”

“아침에 그거?”

“아니. 김동규 얘기 아니라 내 얘기.”

“그래라. 올 때 뚱바 두 개.”

“오키.”

하림의 말에 동규는 머리 위로 물음표 하나를 띄워 두고 하림을 졸졸 따라갔다. 하림이 뭐 마시겠냐고 물어보길래 아무거나라 대답했더니 자판기에서 스포츠 이온음료를 뽑아 동규에게 먼저 주고 하림은 콜라를 뽑았다. 왜 거짓말을 했는지 하림이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장 등나무 벤치에 도착할 때까지 동규는 눈동자만 굴렸다.

“오, 대박. 아무도 없네.”

콜라 캔을 따는 하림의 옆에 앉은 동규는 드디어 입을 뗐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응?”

“조금 전에…… 네 얘기한다고.”

“거짓말이야. 너 속상한 거 얘기해야지.”

“왜 거짓말했어? 걔네한테 말해도 상관없는데……. 대단한 거 아니야.”

“혹시 모르니까. 너랑 나만 아침 일로 얘기한다 그러면 걔네가 너한테 섭섭해할 수도 있잖아.”

“아…….”

갑자기 목이 타는 것 같아 동규는 음료수를 원샷했다.

“그래서 속상한 일이 뭔데. 나 네가 그렇게 음, 풀 죽어 있는 거 처음 봤어.”

“별건 아니고.”

“응. 별건 아닌데.”

아침엔 그렇게 속상했던 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일이라 동규는 조금 머쓱해졌다.

“김동규, 나 봐 봐.”

“…….”

하림의 말에 동규는 발만 보고 있던 고개를 돌려 하림을 바라보았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도 너나 다른 친구들한테 얘기 안 한 비밀 엄청 많아.”

긴장한 동규를 풀어 주고 싶은지 하림이 양쪽 눈썹을 들썩거렸다.

“……금요일에 어디 대학교 백일장 마감이거든.”

“응. 마감인데.”

“거기 상 받으면 특기자로 입학할 수 있는데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교수고, 백일장 심사 위원도 해서 좀…… 잘 쓰고 싶은데 잘 안 써져서. 근데 시간은 화수목금 4일밖에 안 남아서 사실 오늘도 등교 안 하려고 그랬단 말이야.”

“글 쓰려고?”

“응. 예선이 금요일 마감.”

“시간 진짜 조금 남았네.”

“망했어. 아…… 진짜 망했어. 뭘 써도 다 마음에 안 들어. 다 써 놓고 버린 게 세 개나 돼.”

하림은 머리까지 쥐어뜯어 가며 괴로워하는 동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작의 고통은 알 수 없지만 잘 하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리는 건 이해가 됐다.

“김동규야.”

“응.”

“너 학원 따로 안 다닌다고 그랬나? 글 쓰는 학원.”

“응.”

“그럼 뭐, 과외라도 알아볼까?”

“과외?”

“학원까진 모르겠는데 특기자로 입학한 대학생 소개시켜 주는 건 해 줄 수 있을 거 같아.”

“어떻게?”

“우리 집에 나 봐 주시는 이모님 있다고 했잖아. 이모님한테 알아봐 달라고 하면 돼.”

중3 겨울 방학에 동규는 엄마가 알아봤다는 글 쓰는 학원 두 곳을 한 달씩 다녀 봤지만 아무래도 대학 입시 학원의 일종인지라 백일장에서 수상하기 위한 글과 스킬을 주로 알려 줬다. 그냥 자기가 쓰고 싶은 걸 썼더니 상을 받던 동규와는 맞지 않았다.

“근데 나 학원 잠깐 다녀 봤는데 좀…… 별로였어.”

“왜?”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쓰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입시용 글쓰기를 배운다고 해야 하나. 정형화되어 있는 그런…….”

“나도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리 들으며 학원 꽤 많이 다녀 봤거든. 근데 작년 겨울부터 과외만 해. 과외의 장점이 뭐냐. 바로바로, 선생님이 나한테 딱 맞는 방법으로 공부를 알려 준다는 거. 글도 비슷하지 않을까? 기악부 선배 언니가 음대 갔는데 고2땐가 고1때 음대생한테 레슨 받을 때 그런 식이었대. 1대1 맞춤형.”

솔깃한 얘기에 동규는 사뭇 진지해졌다. 하림의 이모님을 통해 소개받으면 괜찮은 실력에 괜찮은 수상 실적을 가진 사람일 거고, 하림의 말처럼 학원이랑은 다르게 자신에게 맞춰 줄 것 같았다.

“이모님한테 지금 전화해, 말아?”

“…….”

“야아, 하자. 해 보자. 응?”

“……그럼 나도 이따 엄마 퇴근하면 그런 거 있다고, 너네 이모님이 소개해 준다고 말해 볼게.”

이모님에게 전화를 하자 일사천리로 과외가 진행됐다. 동규의 엄마는 동규의 재능을 키워 주고자 하는 쪽이라 동규에게 맞춤인 과외는 지금 당장 시작해도 좋다며 과외비 상관 하지 말고 좋은 선생님만 소개시켜 달라고 전해 왔다. 다만 금요일 마감인 백일장 이후에 과외가 잡혔다.

그 때문에 동규는 하교하면 방에 틀어박혀 홀로 예선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과외 시작 전이지만 과외 선생님은 예선작 다 쓰면 메일로 보내 달라고, 한 번 봐 줄 테니 부담 갖지 말라고 얘기했으나 동규는 메일을 보내긴커녕 예선을 통과할 수나 있을지 마음이 갑갑했다.

〈딱 일주일만 너한테 빨리 얘기할걸]

〈지금 후회중]

[왱〉

[아직도 다 안 썼어?〉

[낼모레면 마감이라며〉

〈몰라]

〈죽겠어]

[우편으로 보내려면 빨리 완성해야 하지 않아?〉

〈오늘 다 못쓸 거 같아서]

〈금요일에 방문 접수 하게ㅠㅠ]

[헐....〉

〈지금 머리가 완전 굳었어]

〈암것도 생각 안나]

[헐〉

[그정도야.....?〉

[야 그러면〉

[우리집 잠깐 놀러올래?〉

〈ㅈㅣ금?〉

[ㅇㅇ 아빠가 엄마 준다고 백화점에서 조각케이크 엄ㅁㅁㅁ청많이 사왔어〉

[심지어 이번달 한정으로만 파는 것도 있음〉

하림이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매실케이크란 설명도 했다.

〈매실로 케이크?]

〈맛이 상상이 안 가는데]

[나도 그랬는데 괜찮더라 맛있어〉

[올 거야 말 거야 아직 10시도 안 됐네〉

[오면 티타임 즐기고〉

[엄마나 아빠보고 너네집까지 데려다 달라 그럴게〉

〈흠.........]

[올 거면 데리러 갈게〉

[집에 갈 때도 데려다 주고〉

[엄마차 타면 금방임〉

[매실케이크 말고 다른 것도 많아 ㄱㄷ 사진 보여줄게〉

사진 속엔 정말로 ‘엄청 많은’ 조각 케이크들이 있었다. 지금 시간은 8시 반. 9시에 갔다가 11시에 돌아오면 딱 좋을 것 같다. 하림이 차로 데리러 왔다가 집에 데려다준다니까 귀찮은 것도 없고. 하지만 조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라 선뜻 가겠단 말을 하지 못하고 엄지가 액정 위를 방황했다.

[단 거 먹으면 글 잘 써질걸〉

[잘 써진다〉

[잘써짐〉

[완전 대박 명작 써짐〉

[아~~ 맛있다~~~~ 케이크 완전 달구 맛있네~~〉

[골 라 먹 는 재 미 !〉

[야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보이지 않음~~~~~????〉

〈ㅋㅋㅋ]

[웃어???〉

[휴〉

[뭐든 많ㅎㅎㅎ이 잘 먹는 친구가 와서 같이 먹어주면〉

[참 좋을텐데.........〉

[아〉

[좋을텐데~~~♪ 케이크 꼭 먹고 그냥~~♬♬〉

[이 케익 먹었으면 내겐~~~~ 당뿐인걸 니가 알았으면~~~♬♬〉

[좋을테엔~데~~♬♩♪♩♪♪♪♩♪〉

음표에서 어디까지 버티나 해 보려는 의지가 느껴져 동규는 소리 없이 웃었다. 광대가 씰룩거려 꾹꾹 누른 뒤 답장을 보냈다.

〈ㅋㅋ알았어 갈게]

〈늦었으니까 조금만 있다가 집에 갈래]

[그래그래〉

〈근데 무슨 노래야? 누구꺼?]

[나도 잘 몰라 옛날 노래임〉

[무슨 드라마에서〉

[남주가 술취해서 여자주인공한테 전화해서는〉

[울면서 불렀는데 핫했나봐〉

[클립으로 떠서 봤어〉

[그럼 나 지금 간다?〉

〈응]

[넉넉하게 15분만 기다려〉

열심히 쥐어뜯느라 엉망진창이 된 머리를 다시 곱게 빗고 노트와 필통, 노트북을 챙겨 든 동규가 집을 나서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동 현관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으려는데 시간이 너무 느리게만 흘러가는 것 같아 뭐라도 시간을 죽여 보기 위해 옆 동에 불 켜진 창문이 몇 개인지를 셌다. 금방 다 셀 줄 알았으나 10층쯤 세고 있다 보면 층수를 틀려 다시 1층부터 세야 해 퍽 괜찮은 놀이가 됐다.

“동규 뭐 보고 있는 거래?”

동규네 집인 107동으로 들어가기 위해 하림의 엄마가 속도를 줄였다.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듯한 동규가 하늘도 아닌 어딘가를 보고 있어 하림이 동규의 시선을 따라가 봤지만 아파트 건물 말고는 뭐 특별히 보이는 게 없었다.

“쟤 원래 멍 잘 때려. 말은 없는데 생각은 많아서 맹해 가지고.”

“그래?”

“응. 뭐 생각 중인가 봐.”

“글 쓸 거 생각하나?”

“아마? 곰 같은 게 저러고 있는 거 귀엽지.”

“그러게. 근데 엄마는 우리 아들이 더 귀여워.”

“아. 뭐래.”

“어, 동규 정신 차렸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정면에서 비치자 동규는 불 켜진 창문을 세던 것을 멈췄다. 하림이 창문을 열고 상체를 반쯤 빼 팔을 크게 흔들었다.

“다친다!”

“야! 김동규! 뭐 해!”

“차라리 문을 열어 줘.”

“빨리 타!”

하림은 동규가 차에 도착하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동규가 문을 닫고 앉으며 작게 인사했다.

“반가워, 동규야. 아줌마가 하림이한테 얘기만 그렇게 그렇게 많이 들었던 동규를 드디어 만나네.”

“그렇게 많이는 얘기 안 했어.”

“안 해? 아주 처음 봤을 때부터 우리 학교에 이런 애가 전학을 왔는데 키가 엄청 컸고 어땠고 글을 잘 쓰고 같은 반이.”

“엄마, 얘 빨리 맛있는 거 먹고 글 써야 된대.”

“아 참. 그랬지. 미안해. 하림이 친구들은 네 발로 기어 다닐 때부터 봤는데 동규만 다 커서 만나서 신기해서. 아무튼 빨리 가서 맛있는 케이크 먹자.”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하림의 엄마는 동규에게 이것저것을 물었고 동규는 성의 있게 대답하느라 진땀을 뺐다. 하림이 어머니 직업이 의사시다 보니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걸 무시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공부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최근에 재밌게 읽은 책은 뭔지, 좋아하는 작가는 누군지, 왜 예고에 가지 않았는지 같은 말뿐이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계속 어른들과 함께 있을 줄 알았으나 하림의 엄마는 두 사람을 하림의 방으로 올려 보냈다. 동규는 하림과 똑같이 잘생긴 하림의 아빠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2층으로 올라왔다.

서하림 얼굴은 아빠한테서 온 거구나. 부모님 얼굴이 저 정도는 되어야 이런 유전자가 탄생하는 거군. 동규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하림의 방을 둘러보았다.

“방 구경은 다음에 놀러 와서 해. 시간 늦기도 했고 얼른 다시 가야 하니까.”

“좀…… 갑자기 오긴 했지.”

“맞아. 내가 오라고 초대했고. 여기 앉아. 케이크 왔다.”

문을 열어 쟁반을 받아 든 하림이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올라오기 전 마실 것으로 우유를 얘기해 놔 우유 두 잔도 있었다. 찬 우유는 동규 거고 따뜻한 우유는 하림의 거였다.

“엄마가 내일 쉬는 날이라 좀 늦어도 데려다줄 수 있대. 근데 너무 늦게는 말고 한 12시? 나는 좀 일찍 자서.”

“응. 알아. 바람 쐬러 왔다 생각하고 있어서 한 시간 정도만 있다 갈 거야. 너네 부모님…… 쉬셔야지.”

“응응. 나도 마저 문제 풀 거 있으니까 편하게 있다 가. 뭐 더 먹고 싶으면 1층 가서 아주머니한테 말하면 되는데 좀 그러면 나한테 말해도 돼.”

“응. 고마워.”

하림은 곧바로 책상에서 종이 몇 장을 가져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케이크는 먹을 만큼 먹었는지 접시들은 동규 쪽으로 밀어 놓고 머그잔만 손이 닿는 곳에 놓았다. 동규는 어색함에 눈동자만 굴리며 케이크만 깔짝거렸다. 정말 맛있긴 한데 정말 이렇게 케이크만 먹으면 되는 건가. 하림은 이 방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수학 문제 푸는 데 열중하고 있다.

“배부른 거 아니면 다 먹어 버려.”

문제를 푸는 자세 그대로 얘길 꺼낸 하림 때문에 동규는 깜짝 놀랐다.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닌지 하림 쪽으로 고개를 빼 보았지만 하림의 손은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엄마 거 따로 있어. 그건 다 네 거야.”

“아, 응. 맛있다 엄청.”

“많이 먹고 내일은 케이크 덕분에 잘 써졌으면 좋겠다.”

“응. 나도.”

“으응.”

쉬지 않는 손을 보고 있으니 동규도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아 노트를 펼쳤다. 공부하는 하림을 방해하기도 싫었고.

귀에는 두 사람의 샤프 소리가 사각사각, 코에는 케이크의 단내가 맡아졌다. 동규는 브라우니 케이크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단 거 먹으면 글이 잘 써질 거라는 하림의 말을 그냥 웃어넘겼는데, 신기하게도 동규의 손 역시 하림의 손처럼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내일 학교 빼먹고 종일 쓸 생각이었지만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11시가 넘어가자 꼼짝 없이 문제만 풀던 하림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이따금 하품도 했다. 동규는 11시 30분이 됐을 때 노트와 필기구를 빠르게 정리했다.

“가려고? 12시까지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응. 근데 내일 학교 가니까.”

“그건 그렇지.”

“그리고…….”

“그리고?”

“……너 되게 피곤해 보여서.”

“헐, 티 났어? 12시까지 버텨 보려고 했는데 사실 지금 좀 졸려. 너도 알겠지만 빠르면 11시에 자잖아, 나.”

“응.”

“그래 그럼 내려가자.”

집에 오는 동안 동규는 오늘 밤을 샐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집에 오는 10분이 참 짧게만 느껴진다는 생각도. 빨리 가서 마저 뭐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반, 차에서 내리기 싫은 마음이 반이었다. 동규가 하림의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느리게 차 문을 열고 나와 문을 닫으려는 찰나, 하림이 차에서 내렸다.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밤도 어두운데.”

“여기…… 우리 집 107동 앞인데.”

“나도 알아.”

“엘리베이터도 탈 거야?”

“탔으면 좋겠어?”

하림은 가볍게 던지듯 물었지만 동규는 손에 땀이 차 허벅지에 닦았다. 엄마가 기다리고 계시니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얘기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같이 올라가 달라고 하는 게 좋을지. 근데 애도 아니고 정말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상황이 좀 웃기고 이상한 건 아닐까.

“……몰라.”

“맨날 몰라요. 넌 아는 게 도대체 뭐야.”

내일 보자며 인사를 막 하고 하림이 계단 하나를 막 내려갔을 때였다. 동규는 다급하게 입을 뗐다.

“서하림.”

“응?”

“내일…… 바빠?”

“내일? 학교 끝나고?”

“응. 과외 있어?”

“아니.”

사실은 있었지만 하림은 왜인지 없다고 얘기해야 할 것만 같았다. 동규의 표정이 그랬다.

“그럼 나…… 내일도 놀러가도 돼?”

“내일?”

“케이크는 꼭 없어도 돼. 맛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진짜 맛있었는데 케이크가 없어도 괜찮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음 그냥 아까 보니까 좀 뭔가 잘 써지는 거 같고, 아니 그게 왜 그런지 생각을 해 봤는데…… 우리 집이랑 내 방은 익숙한 공간이라 그런가 마음이 조급할 땐 낯선 공간에 가니까 머리가 환기가 된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아까 좀 잘 써져서, 잘 써졌는데 내일 딱 쓰고 금요일에 학교 끝나고 제출하러 가면 될 거 같아서.”

동규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말을 횡설수설하고 있단 건 알겠어서 하림이 자길 바보처럼 생각하면 어쩌나 조금 걱정이 됐다.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닌지는 많이 걱정됐고 백일장 예선도 마찬가지고.

“그래.”

“…….”

“내일도 와.”

해가 지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5월의 밤. 하림이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고 동규도 그랬다. 보름달이 아닌 초승달이 떠 그렇게 깜깜할 수가 없었는데도 눈이 부신 듯한 착각이 들었다. 둘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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