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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규가 1학년 6반 교실에 들어왔을 땐 반 친구들이 한 명도 없었다. 오로지 담임 선생님뿐이었다. 동규는 선생님을 전혀 몰랐지만 선생님은 동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세문중 출신의 김동규는 세문고에 학교장 추천으로 입학한 학생이었다. 다른 말로는 스카우트라고 부르는 학교장 추천을 ‘문학 특기자’라는 이유로 받았고, 그런 만큼 동규에게는 지난 3년간 전국 백일장 중학생부를 휩쓴 수상 이력이 차고도 넘쳤다.
운이 좋게 세문고 교장은 대학 시절부터 시인을 꿈꾸던, 아직도 매해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동규는 강남에서도 수준 높은 자사고로 유명한 세문고의 문턱조차 밟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세문고엔 동규 말고도 예체능 지원 학생들이 몇 명 더 있다. 마찬가지로 학교장 추천의 스카우트로 입학한 학생들이었으며 학교는 예체능 학생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비록 예고나 체고처럼 전문적인 수업들을 진행하진 못하더라도 대회 참여를 위해 학교를 결석해야 하는 일이나 대회 준비를 위해 오전 수업만 들어야 할 경우도 전부 허용됐다. 연말이나 연초면 의대를 얼마나 갔는지, S대는 얼마나 갔는지 등 대학 입시에 관한 기사에서 꾸준히 전국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학교지만 예술계에도 세문고등학교 출신이 꽤 많은 건 이와 같은 이유였다.
얘기 많이 들었다며 친근하게 구는 담임 선생님에게서 도망쳐 제일 뒷자리에 앉은 동규는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난 자기 자신을 탓했다. 어제 자기 전까지 하림과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한 게 문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림은 11시도 되지 않아 자러 간다며 내일 보잔 메시지를 보내고 끝이었지만 동규는 그 뒤로도 자지 않고 괜히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허비했다. 거기에 괜히 모닝콜 시간을 몇 번이나 바꾸다가 늦잠 잘까 봐 원래 일어나는 시간보다 30분이나 빠르게 모닝콜을 설정하고, 모닝콜 울리자마자 침대에서 뛰어 나온 게 문제였다. 10분만 더 잘걸. 그랬으면 이렇게 텅 빈 교실에 홀로 앉아 있진 않아도 됐을 것이다.
10분이 지나자 학생들이 교실로 하나둘 들어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동규는 꽤 자주 앞문과 뒷문을 힐끔거리며 하림이 언제 오는지 체크했다. 등교 시간이 5분도 남지 않았는데 하림의 머리카락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야 서하림! 여기 너 자리 맡아 놨어!”
책 읽느라 그 속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렸더니 뛰어왔는지 앞문에서 숨을 고르던 하림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림의 친구가 말한 맡은 자리는 동규의 옆자리였다. 어쩐지, 인기 있는 뒷자리인데도 아무도 안 앉는다 했다.
“하, 헉, 여기 너무, 운동장, 커.”
“안녕.”
“정, 문에서 여, 기까지 엄, 청 뛰어옴.”
동규는 제 인사가 씹힌 게 조금 머쓱했다. 다시 인사를 해야 하나 하고 있는데 하림이 책상 위에 엎드려 숨을 고르면서도 친구들이 아닌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어색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어서 그런가 뛰느라 붉어진 얼굴이나 할딱거리느라 벌어진 입술 같은 그런 것들도 괜히 신경 쓰여 어색하고.
“느, 하아. 늦게 일어나서 지각할 뻔, 했다.”
“어제 일찍…… 잤잖아.”
자러 간다고 하림이 동규에게 굿나잇 메시지를 보냈을 땐 11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랬는데, 너무 푹 잤어. 알람 소리도 못, 들었다? 하…… 숨 차.”
하림이 숨을 고르면서도 웃고 있는 얼굴이라 동규는 읽던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시야 끝에 숨 쉬느라 등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하림이 걸렸다.
“뭐 봐?”
여전히 엎어진 채 하림이 손을 뻗어 동규의 책상을 건드렸다. 동규는 말없이 표지를 보여 주었다.
“재밌어?”
“응.”
“그럼 너 다 보면 나도 빌려줘.”
“응.”
교실로 들어온 마지막 학생이 하림이었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은 하림이 어느 정도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교탁에 섰다. 선생님이 자기소개를 하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오늘 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동안에도 하림은 책상에 엎어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읽던 책을 덮고 선생님이 하던 얘길 듣던 동규가 하림에게 입 모양으로 뭐 하냐고 물어도 하림은 힘들다고 답할 뿐이었다. 하림이 동규가 있는 왼쪽을 바라보고 누워 있어 동규는 하림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건지 그냥 이대로 계속 앞을 봐도 되는 것인지 헷갈렸다.
“왜?”
“뭐가?”
“이쪽에 뭐 있어?”
“아니. 그냥 멍 때리는 건데.”
잘 보니 정말 초점이 흐릿한 게 멍 때리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교과서를 받아 가라며 담임 선생님이 출석 번호를 불렀다. 동규는 3번이라 곧바로 일어나 교과서를 받아 들고 선생님이 알려 준 사물함에 가서 교과서를 넣었다. 교실로 돌아오자 반 친구들은 교과서에 이름을 적거나 네임 스티커를 붙이기 바빴다. 다시 사물함으로 돌아가 교과서를 가져와야 하나 동규는 잠시 생각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교과서에 필기를 안 하기 때문에 누가 훔쳐 간다 해도 타격이 없었다.
“자리는 3월 한 달 동안은 지금 앉은 자리 고정으로 하자. 선생님도 그렇고 너네도 친구들 이름 외워야 하니까.”
하림은 책을 세워 ‘10617 ㅅㅓㅎㅏㄹㅣㅁ’을 적었다. 동규가 그런 하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표지는 깔끔한 게 좋아서 안 건들고 위아래에다 이름 적어. 그리고 이름 옆에는 과목들 적어서 바로바로 알 수 있게 여기다 쓰는 게 편하더라고.”
“나는 귀찮아서 안 적어. 어차피 공부도 안 해서.”
“응. 그런 것 같더라. 나 사물함 다녀온다.”
반 친구들이 교과서 정리를 위해 우르르 빠져나갔다가 들어온 뒤엔 선생님이 1학기 시간표와 여러 가지 가정 통신문을 나눠 주었다. 그러곤 입학식을 위해 강당으로 내려갔다. 입학식이 끝나면 쉬는 시간을 갖고 각 반마다 담임 선생님과 한 교시 수업을 한 뒤 집에 가는 일정이었다.
동규는 입학식 하는 동안 제일 뒤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다시 교실로 돌아오는 내내 하품을 했다. 수업 할 거면 다 하든가 겨우 하나 할 거면 왜 수업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사물함에서 수학책을 꺼내 왔다.
“담임 선생님 수학이라 완전 좋아.”
“너야 좋겠지, 이 수학 덕후야.”
“아, 왜. 잘 생각해 봐. 담임이 다른 과목인 거보다 수학인 게 차라리 제일 나아.”
하림은 친구들과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규는 자리에 앉아 하림처럼 책 위에 이름을 적어 볼까 하고 펜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이름 적으려면 책을 세워야 하는데 하림이 그 모습을 봤다간 자길 따라 하는 거냐고 할 것만 같았다. 하림은 공부를 엄청 잘하니까 전교 꼴등이 1등 따라하는 거라 비웃음 사기 딱 좋았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길 하는 하림의 등을 힐끔 바라보다가 애꿎은 수학책만 괴롭혔다.
잠시 뒤에 수업 종이 울리며 선생님이 들어왔다.
“근데 너 여기 앉아도 돼?”
“여기?”
“맨 뒤.”
“그게.”
뭐라 더 말하려던 하림은 노트 뒷장을 찢어 뭐라고 적은 뒤 동규의 책상 위에 올렸다.
[그게 왜?]
[편견일 수 있는데 공부 잘 하는 애들은 다 앞자리 앉는 거 좋아하지 않나 해서]
[100프로 편견임ㅡㅡ 나는 뒷자리 좋아함 글고 너무 앞인 거보다 뒤가 칠판도 더 잘 보여 시력도 양쪽 1.5야]
첫날, 첫 시간인 수업 시간이라 선생님도 학생들도 부산스러운 와중 하림만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동규는 샤프만 연신 돌리며 시간이 어서 가길 빌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첫날부터 엎어져 자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하림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책상과 한 몸이 된 동규를 데리고 다녔지만 4월이 되기 전에 포기했다. 동규가 축구도 싫다, 농구도 싫다 하며 교실에만 붙어 있으려고 든 게 가장 큰 이유였고 두 번째로는 하림의 친구들과 동규가 서로를 낯설어한 게 이유였다.
교실은 고사하고 책상에서조차 떨어지려 하지 않는 동규는 자연스럽게 저와 비슷한 친구들과 친해졌다. 한 명은 취미로 노래를 만드는 친구였고 다른 한 명은 동물을 좋아해 수의사가 되겠다는 학생이었다.
셋 다 조용한 편이라 하림은 가끔 그 사이에 들어가 재밌는 이야기를 하거나 친구들의 관심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자작곡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세상에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지 같은 것들을 하림이 반짝이는 눈으로 들어 주는 덕에 동규는 제 친구들이 그렇게 말이 많았는지 하루가 다르게 놀라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동규 역시 무슨 얘길 해도 진지하게 듣고 크게 반응해 주는 하림 앞에서 무장 해제가 되곤 했으니 친구들이 하림에게 신이 나 얘기하는 걸 보고 있으면 괜스레 뿌듯해졌다.
“아, 왜? 왜 아무것도 안 해?”
하지만 이번에는 동규도 조용한 친구들도 모두 하림의 시선을 피하느라 진땀을 뺐다.
“백번 양보해서 정서준이랑 윤지호는 그렇다고 쳐. 근데 김동규 너는 그 키 갖고 뭐냐?”
“내 의지로 크고 싶어서 이렇게 큰 게 아니라…….”
“그럼 체육 대회 내내 앉아만 있으려고?”
5월 초에 있을 체육 대회 선수 선발이 3월부터 진행되는 중이었다. 동규는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뛰어다니는 건 딱 질색이라 뭐 하나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죄다 거절했기 때문에 올해와 내년도 그늘에 앉아 멍이나 때리면서 덧없는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지만 하림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는 하림에 비해 셋이 모두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하림이 제일 키가 큰 동규를 물고 늘어졌다.
“노는 건 아니고 책도 읽고 생각도 하고 나름대로 할 게 많은데…….”
“와, 참도 할 게 많다.”
“미안하지만 난 태양 아래서 뛰어다니는 거 엄청 싫어하고 귀찮아. 어떻게 찌운 살인데 아깝게.”
“그건 나도.”
“……나도.”
“얘들아, 우리 학교 체육 대회 진짜 재밌대. 규모도 엄청 크게 해. 중학교 다닐 때 못 봤어? 상품도 졸업생들이 좋은 거 많이 기부하고…….”
하림이 의욕에 찬 얼굴로 열심히 체육 대회 영업을 해 보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세 친구들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됐어. 하지 마라 걍. 나만 괜히 유난 떠는 거 같다.”
화를 내진 않았지만 하림의 까칠한 목소리를 처음 들어 본 세 사람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눈치를 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세 사람이 소리 없는 토론을 벌이는 동안 하림은 교실을 나가 버렸다.
“화났나 봐.”
“어떡하지.”
“김동규 너는 뭐라도 하나 하겠다고 하지 그랬어.”
“나 운동 못해.”
“수영 좋아한다며. 근육 키우는 건?”
“수영은…… 그냥 나 혼자 하는 거고 근육은…… 그것도 그냥 운동 기구 가지고 혼자 몸 관리 하는 거지 팀 먹고 하는 그런 건 못해.”
“아 큰일 났다. 이대로 쟤 계속 화내면 어떡하냐?”
“겨우 체육 대회 안 하는 거 가지고 오래 삐지거나 그럴 애는 아닌 거 같긴 한데.”
지호의 예상대로 하림은 다시 교실에 돌아왔을 때 전과 같이 세 친구를 대했다. 지호와 서준은 역시 서하림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까칠했던 하림의 모습을 금방 잊어버렸지만 동규는 아니었다. 그 뒤로도 계속 많이 아쉬워하는 듯한 하림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금 까칠했던 목소리도.
원래도 공부는 하지 않지만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는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정오표 나오기 전 과목별 점수와 등수만 먼저 보여 주는 꼬리표에서는 아무래도 뒤에서 전교 1등인 듯한 아우라가 풍겨 왔다. 그걸 보고 하림이 경악을 하며 ‘0점은 정답 알고 일부러 다 피해야 나오는 거 아니야?’라고 놀리기도 했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건 영 성미에 맞지 않아 결국 단체 경기를 제외하고 참여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대신 동규는 체육 대회 전날 집에 가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 하얀색 풍선을 샀다. 하림과 동규는 같은 반에 짝수 반이었기 때문에 백팀이라 고른 것이었다.
풍선을 입으로 불어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으나 동규는 가방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봉투를 뜯어 풍선을 불었다. 작게 불어 묶어 보기도 하고 너무 많이 불어 풍선이 터지기도 했다. 응원에 적절해 보이는 크기를 정했을 땐 서른 개 넘게 들어 있던 풍선이 겨우 두 개 남아 있었고 방 안엔 온통 하얀 풍선들이 굴러다녔다. 뒤늦게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몇 개 불지도 않았는데…….”
동규는 수영을 좀 더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풍선들을 정리했다.
다음 날, 미리 응원 풍선을 불어 본 것이 무색하게 동규는 차마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아 주머니에 넣어 둔 풍선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하림이 종횡무진 활약하며 두 검지를 하늘로 찔러대는 세리머니를 할 때도 편하게 그늘에 앉아 박수만 쳤다.
“집에 가고 싶다.”
“나 같은 집돌이는 야외에 오래 있으면 말라 간다고.”
“지금은 실내잖아.”
“좀 전까진 밖이었지.”
두 친구의 투닥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동규는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있는 풍선만 떠올렸다. 산더미처럼 받아 온 볶음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서준과 지호가 “김동구 오늘은 멍 두 배로 때리네”라고 얘기해도 소용이 없었다.
‘축구 시작하면 구석에 있지 말고 앞에 나와서 응원해 줘야 돼. 알겠지.’
이게 다 아침에 만나자마자 대뜸 잘생긴 얼굴 들이밀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하림 때문이다. 동규는 응원단도 아닌데 앞에 나가기 싫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제 손을 주무르는 하얀 손이 생각보다 너무 차가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림은 그냥 별 기대하는 거 없이 그냥 앞에 나와만 있으란 뜻으로 한 얘기였을 텐데 풍선까지 준비했다는 걸 알리기도 부끄러웠다. 부끄러운데, 처음 본 하림의 화난 모습이 도저히 잊히지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이걸 불어, 말아.
“우리 학교는 돈도 많으면서 왜 편의점을 학교 안에 안 두는 거임?”
“몰라. 대신 자판기 많잖아.”
서준과 지호가 급식실 건물 1층에 있는 자판기에서 각자 마실 음료수를 뽑고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야! 김동규 안 오고 뭐해!”
운동장 한편에는 오후에 있을 농구나 축구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하림은 축구팀이었고 동규는 멀뚱히 서서 또 주머니 속 풍선을 매만졌다. 이제 손에서는 고무 냄새가 배고도 남을 정도였다.
“아 너 농구팀에서 엄청 꼬셨다 그랬지. 근데 싫다며? 갑자기 미련 생겨?”
“……아니.”
“아니긴 무슨. 맞는 거 같은데.”
동규보다 한참 작은 지호가 그 키 안 쓸 거면 나눠 달라고 진심 섞인 장난을 쳤지만 동규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풍선을 들고 흔들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결국 풍선은 주머니 밖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체육 대회가 끝이 났다. 대신 동규는 응원단 학생들 옆에 딱 붙어 하림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열심히 흔들었다. 공 따라 운동장을 누비던 하림이 그런 동규를 발견하고 정확히 그를 가리키며 웃기도 했다. 풍선을 불지 않은 건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체육 대회는 백팀의 우승이라 종례 시간에도 모두가 들떠 시끄러웠다. 하림은 종례가 끝나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사라졌다. 동규는 읽으려고 가져왔지만 몇 페이지도 보지 못한 책을 가방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림에게 연락이 온 건 세 시간쯤 뒤였다.
[뭐해〉
〈그냥 저녁먹어]
[뭐먹는데〉
〈그냥......]
[그냥?〉
〈밥]
[그니까 밥이랑 뭐〉
〈반찬]
[아니 그니까〉
[아 됐어〉
짧은 세 글자에서 지난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 동규는 급하게 손가락을 놀렸다.
〈국도 같이 먹었어]
[됐다고〉
전에 들었던 까칠한 목소리로 메시지가 읽혔다. 동규는 어쩐지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하림과 같은 반이 되면 매일 재밌고 즐거운 일만 있을 줄 알았지 화를 내는 상황이 벌어지거나 싸우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미아낼]
〈미안해]
뭘 잘못한 건지 솔직히 모르겠고 애초에 잘못한 게 아닌 것 같았지만 일단 화를 풀어 주고 싶어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하림은 읽고도 답이 없었다. 1분이 5분이 되고 5분이 10분이 되어도 아무런 메시지가 오지 않아 동규는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못했단 말을 아주 길게 늘려 쓰기 시작했다. 젓가락도 내려놓고 아주 본격적이었다.
[전에도 말했는데 기억 하는지 모르겠다 나 요리하는거 좋아하고 엄마가 장가 잘 가고 예쁨 받으려면 밥 잘해야 한다 그래서 저녁 내가 혼자 만들어 먹는거 좋아해서 오늘 저녁도 체육 대회 이긴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으려고 해서 밥도 잡곡 세가지나 섞어서 만든 밥이고 반찬은 겉절이하고 두부튀김이랑 오븐가지ㅈ]
반찬들 레시피도 다 써 주는 게 좋을까? 동규는 잠시 고민하고는 반찬의 이름마다 옆에 괄호를 추가해 어떻게 손수 만들어 먹었는지를 적었다.
[?〉
[왜 미안해〉
요리책 수준으로 빼곡하게 채워지던 말들이 순식간에 다 부질없어졌다.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동규는 혹시 몰라 장문의 내용을 복사해 두고 전부 지웠다.
〈화...........난거 아니야?]
[왜???〉
[아〉
[김동규 봐봐〉
[나 잠깐 친구 만나느라 답장 늦음〉
[정확히 말하면 가족인데 아무튼〉
이번엔 동규가 하림의 메시지를 읽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 친구인 동시에 가족이라 하면 동규도 아는 딱 한 명이 있다. 하지만 진실을 안 것과 별개로 김이 다 빠지고 피가 어디론가 줄줄 새는 듯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하림에게 ‘응’ 하고 보내고 휴대폰을 뒤집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입맛도 떨어졌다. 배는 고파서 입에 밥을 쑤셔 넣고는 있지만 먹는 속도가 더뎠다.
엎어 놓은 휴대폰이 진동하며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액정엔 하림의 이름이 떠 있었다. 동규는 입 안을 가득 채운 음식물들을 빠르게 삼키고 물도 한 입 마셨다.
-왜 답이 없어? 삐졌냐?
하림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조금 느껴졌다.
“아니.”
-맞네. 저녁 뭔지 말하지 말래서? 아니면 내가 너 두고 서하늘이랑 놀아서?
“걔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삐지지 마. 그리고 나는 왜 네가 미안하다고 한 지 모르겠어. 미안한 거 없는데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하는 거 별로야.
할 말이 되게 많은데 없기도 했다. 동규는 말을 아꼈다.
-근데, 아까 들고 있던 거 네가 만든 거야?
“아까?”
-‘ACE는 서하림 MVP도 서하림’ 플래카드.
“아…….”
동규는 나름 열심히 흔들었던 플래카드를 떠올렸다. 제일 무난한 문구로 고른 거였다. 다른 플래카드엔 얼굴부터 10골이라느니 필드의 황태자라느니 적정하고 오글거리게 만든 문구들 천지라 차마 그걸 들 정도로 얼굴이 두껍진 못했다.
“아니.”
-친구가 경기를 뛰는데 성의가 하나도 없구만.
“하나도 없진 않아.”
-응? 그럼 뭐 준비한 거 있어?
말실수했다. 하림은 지나가는 말이나 사소한 얘기 같은 것도 놓치는 법이 없다는 걸 까먹고 잊었다.
-오 뭔데, 뭔가 있나 본데. 뭐야, 뭔데. 궁금해. 빨리 얘기해 봐.
“……없어.”
-하나도 없진 않다며. 하나는 있단 얘기잖아. 그 하나가 뭐야?
집에 오자마자 벗어 던진 체육복 바지를 떠올렸다. 하림은 답이 없는 동규를 계속 보챘고 동규는 결국 풍선 얘기를 실토했다. 왜 풍선을 사게 됐으며 풍선을 사이즈별로 불어 봤다는 것까지.
-너 되게…… 귀여운 짓도 할 줄 안다.
“웃지 마.”
-곰같이 커다란 애가 풍선 흔드는 상상 하니까 자꾸 웃음 나.
“상상…… 그만해.”
-싫은데용.
웃음소리는 듣기 좋아 입을 삐죽이며 웃지 말라고 하면서도 동규는 휴대폰을 귀에 더 꾹 눌렀다. 이렇게 재밌어하는데 그냥 쪽팔림을 무릅쓰고 해 줄 걸 하는 생각도 조금 들고.
-그럼 풍선 버렸어?
“아니.”
-진짜? 야 나 지금 너네 집에 놀러가도 돼?
“설마 풍선 가지러 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풍선 예쁘게 딱 불고 기다리고 형아 기다리고 있어라.
“진짜로?”
-진짜로. 얼만큼 불어야 풍선 예쁘게 되는지도 연습했다며.
“그게 뭐라고 여기까지 오는데.”
-아, 몰라. 벌써 집 나왔어.
“벌써? 너 안 힘들어? 오늘 하루 종일 뛰어다녀서 그래서 힘들 텐데 집에서 쉬는 게 낫, 아니 저녁은? 저녁은 먹었어? 이제 저녁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밥 있지?
“응.”
-가서 먹지 뭐. 끊는다, 이따 봐.
갑자기? 동규는 하림과 전화를 끊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뒤졌다. 우리 집에 걔 입맛에 맞는 게 있나? 아빠는 매 끼니마다 고기반찬에 자극적인 거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엄마는 반대로 입맛이 슴슴하고 풀떼기만 있어도 되는 사람이었다.
현재 동규는 엄마와 둘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반찬들이 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 위주였다. 오늘은 돼지 앞다리살 사 와서 제육볶음 만들어 먹고 있긴 했지만 엄마가 야근한다고 혼자 먹으라고 했던 탓에 딱 저 혼자 먹을 양밖에 사 오지 않았고, 그마저도 거의 다 먹었다.
아, 얘는 왜 갑자기 집에 온다고……. 어제 얘기해 줬으면 뭐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그거 맞춰서 한두 가지 만들어 줬을 텐데. 청소도 지난주에 귀찮아서 건너뛰고 옷도 걷어 놓기만 했지 아직 안 개서 엉망진창이다. 동규는 빠르게 집 안을 스캔하고 양치를 끝낸 뒤 휴대폰과 풍선을 꺼내 들었다. 도저히 하림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집 상태가 아니었다.
“뭐야. 왜 나와 있어.”
택시를 타고 온 하림이 동규의 아파트 동 앞에 막 내렸을 땐 동규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하림은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동규는 그런 하림의 어깨를 잡아 이끌어 놀이터를 가리켰다.
“그, 풍선은 저기서 불어 줄게. 그리고 저녁은…… 내가 맛있는 반찬을 다 먹어 버렸고 옷들도 내가 밥 먹고 나서 정리하려고 했더니 아직 좀 그래서 청소랑 같이…….”
“그래?”
들어가겠다고 하면 어쩌지.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그러면 어쩌지. 나는 정말 보여 주기 싫고 데려가기 싫은데. 동규는 입술만 연신 씹으며 아직 불지 않은 흰 풍선 두 개를 맥없이 흔들어 보였다.
“알겠어. 그럼 나 배고파서 밥 사 먹을 건데 심심하니까 같이 앉아 있어.”
“응.”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며 동규는 살짝 웃었다. 풍선을 입에 물고 놀이터로 걸어갔다. 풍선의 고무 맛이 느껴졌지만 어제 열심히 연습한 덕에 익숙한 맛이었다.
“너 밥 먹어서 배부르다 그랬지. 난 뭐 먹냐. 너도 앉아만 있으면 좀 그러니까 간단하게 같이 시켜서, 음.”
“아직 배 안 불러. 밥 또 먹을 수 있으니까 너 먹고 싶은 거로 골라.”
“또? 아, 하긴. 그 몸 유지하려고 많이 먹는댔지.”
“그런…… 건 아니야.”
동규가 불어 준 하얀 풍선을 양손에 들고 신나게 흔들던 하림은 동규에게 자신의 모습을 찍어 달라며 휴대폰을 건넸다. 휴대폰 액정 속에서도 잘생긴 얼굴과 이목구비가 보였다.
하림이 혼자 풍선 두 개를 다 들고 있기는 불편하대서 서로 하나씩 나눠 들었다. 그리고 하림이 좋아한다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비싸 보이는 곳이라 동규가 들어가지 않고 잠시 주춤했더니 하림이 자기가 사 주겠다고 동규를 이끌었다. 하림의 입맛은 놀랍게도 동규의 엄마와 비슷했다. 나중에 꼭 하림보고 우리 집에 놀러 와 저녁 한 번 먹어 보라고 얘기를 해 봐야겠단 다짐을 하며 동규는 하림과 헤어졌다.
집에 돌아온 하림은 어색하게 풍선을 흔들던 동규를 떠올리고 한참을 웃다가 가정부 아주머니께 부탁해 두 풍선을 하나로 연결하고 책장 제일 위 칸에 매달았다. 공부하다 한 번씩 풍선을 보곤 했는데 매번 웃음이 피식 흘러나왔다.
일주일쯤 지나 풍선이 작아지기 시작했을 땐 터지지 않도록 바늘로 작게 구멍을 내어 조심스럽게 공기를 모두 뺐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상자에 담아 책상 서랍 한편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