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안녕하세요!
우선, 릴리를 세상에 빛 보게 해 준 시크노블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서로의 사랑과 감정이 잔뜩 어긋나는 애증의 관계를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릴리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안 맞고 결국엔 사랑까지 어긋나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하필 걸려도 음침한데다 빻은 공에게 걸린 수의 이야기를 공 시점으로 보고 싶었고 수 시점에서는 반전과 진실이 밝혀지는 걸 쓰고 싶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동규가 영원히 스물두 살인 엔딩을 맞이해야만 했고요. 동규가 살아있었음 두 사람은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까요…….
릴리를 읽으면서 누구에게, 어떤 감정에, 어떤 상황을 따라가셨는지에 따라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읽으셨다면 저는 너무너무 영광일 것 같아요.
이후의 이야기를 조금 해 보자면 혼자 남겨진 하림이는 잘 살아갑니다. 젊은 나이에 과학자로서 최고의 커리어인 노벨물리학상도 받고 공부, 연구, 여행 뭐 그런 것들도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고요. 다만 이따금 한 번씩 동규가 하림이를 흔들어 놓겠죠.
그리고 어른이 된 하림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흔들림도 의연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동규가 자기 자신을 땅에 붙잡혀 움직일 수 없는 나무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하림이는 동규를 ‘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하림이 앞에 물이 가득 담긴 예쁜 컵이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볼게요. 며칠 지나니 물이 증발해 줄어들고, 시간이 더 지나자 텅텅 비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물이 사라진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뀌어 하림이의 곁에 존재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게 어느 날은 폭우가 되어 하림이를 찾아오고 어느 날은 커다란 파도가 되어 밀려들기도 할 거예요.
빗물과 바닷물은 또 증발하고, 물이 되고, 또 증발하고, 물이 되고…… 그렇게 계속 끊임없는 순환이 반복되는데 하림이는 지구에 사는 과학자라 어디서 뭘 하고 있든 작은 물 컵에 있던 물이 늘 자신과 함께한다고 여길 거고 동규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규 때문에 아프게만 느껴졌던 즐거움, 분노, 슬픔, 사랑도 어른이 된 하림이에게는 차차 익숙해지면서 ‘그것들마저 김동규였던 거지’ 하고 생각하게 될 테고요. 강한 애라 씩씩하게 잘 지냅니다.
동규의 인생에 이렇게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슬프네요. 문득 동규 죽었을 때 어떤 분께서 ‘동규야 수고했어’라고 해 주신 게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규림이들 데리고 즐겁게 썼지만 저는 이제 1년을 마무리 하는 날에 하림이랑 동규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아요.
길고도 짧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