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하림 외전. 그 애 (8/53)

서하림 외전. 그 애

릴리.

나는 김동규가 혼자 있을 때면 나를 저런 식으로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순결과 변함없는 사랑을 뜻한다는 백합이 나와 잘 어울린다면서 차마 때가 탈까 봐 입 밖으로 뱉어 본 적도 없다는 내 또 다른 이름을. 릴리는 숨겨둔 노트에 한가득 적혀 있기도 했고 제목 없는 몇 개의 시에서는 내 이름 대신 쓰이던 단어이기도 했다.

순결…….

꽤 열심히 쓴 일기에서도. 내가 자기랑 그렇게 몸을 섞었는데도 불구하고 김동규는 나보고 깨끗하다느니 고고하다느니 그런 생각들을 하며 찬양하기 바빴다.

삐이이이-

지금도 그럴까. 고작 내 키스 하나에 숨이 멎는 순간마저 작게 미소 지은 김동규는, 행복한 건 아니겠지.

의료진이 뛰어 들어왔지만 심폐소생술도 심장 전기 충격기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작년에 수술했을 때도 낮은 확률 감수하고 대수술을 감행한 거였고 애초에 깨어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김동규가 정신을 차린 걸 보고도 의사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언제가 마지막으로 깨어나는 것일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단 얘길 했을 정도였다.

“사망 선고하겠습니다. 12월 31일 오후 6시 22분 김동규 님 사망하셨습니다. 잠시 동안은 다 들을 수 있거든요. 고인이 편하게 가실 수 있도록 천천히, 작은 소리로 마지막 인사 해주세요.”

이 병실에 의료진과 간병인 말고 김동규랑 사적이 친분이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라 나는 천천히 발을 떼 김동규 옆에 섰다. 간병인이 이모님께 전화를 하며 의료진과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조금 어지럽다. 이렇게 갑자기.

“야, 김동규. 진짜 죽어?”

이토록 허무하게…….

“너 왜 나랑 한 약속 안 지켜.”

전에 김동규가 아빠한테 맞고 입원했을 때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나 참 많이도 울었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로 그렇게 됐음에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내 손에 죽는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왜 이러고 누워 있어, 왜……. 일어나 미친 새끼야, 일어나라고!”

내 인생의 절반에는 김동규가 함께였다. 처음 만난 이후로 10년이 넘게 흘렀는데도 나는 김동규에게 가진 수많은 감정을 정의 내리지 못했고, 안 하기도 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그냥 그렇게 엉망진창인 상태여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행복하다는 듯 웃지 말고 일어나…….”

그래도 몇 가지는 수학 문제 풀 듯 깔끔하게 해답을 찾아 정리해 놓기도 했다. 우정, 불쌍함, 신기함, 동정 같은 것들. 하지만 김동규에게 가진 다양한 감정 중 제일 강렬한 것은 다름 아닌 공포와 증오였다.

‘하림아, 선생님이 부탁할 게 있는데.’

담임선생님의 그 한마디로 김동규랑 만났다. 아니, 전학 온 날 서로 인사는 나눴으니 정확히 말하면 선생님 때문에 그 애랑 얽히게 됐다는 게 맞았다. 선생님만 아니었으면 그냥 학년 말에 전학 온 같은 반 친구 사이로만 남아 평생 아무런 것도 없었을 거였다.

김동규는 전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전학 온 첫날부터 아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고작 아홉 살이면서 엄청나게 커다란 키나 몸도 그렇고 입고 있는 옷이나 행색 때문에 반 친구들이 김동규를 받아들이질 않았다. 그 애에게 말을 걸어주는 건 반장과 부반장, 짝꿍뿐이었고 차라리 나도 키가 커서 옆이나 주변에 앉아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그땐 그게 아니었다. 이름도 나는 성이 시옷이라 출석 번호가 중간에서 살짝 앞인데 비해 김동규는 전학생이라 끝 번호다 보니 몇 명씩 모여 앉을 때조차도 같은 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랬는데 담임선생님의 부탁으로 김동규와 자주 붙어 다녔다. 매일은 아니어도 급식을 같이 먹거나 하루 한두 번쯤 쉬는 시간에는 같이 놀기도 하고 하교도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함께 하고. 전화나 메시지는 매일매일 주고받았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 김동규가 내게 한 거였지만.

겨울방학까지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내내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3월 개학 전까지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과 여행을 다녀오거나 영재원 공부로 학교를 나가지 않아 김동규와 다시 만난 건 5학년 때였다. 반이 갈리다 보니 매일같이 오던 김동규의 메시지를 드문드문 읽고 답장도 잘 하지 않던 중이었다.

다시 만난 김동규는 전보다 더 커져 있었고 말이 좀 많아졌다. 안 하던 공부도 시작했다. 친구가 공부하겠다는데 도움이 되고 싶어 이것저것 물어볼 때마다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유치원생도 아는 걸 모를 수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구보다 꾸준히 한 공부는 중학교에 올라가자 빛을 발했다.

자기 반에도 공부 잘하는 애들 많을 텐데 김동규는 잘해봤자 전교 1등이 아니지 않냐며 다른 반인 내게까지 찾아와 틀린 문제들을 물어봤다. 선생님들 놔두고 뭐 하는 건지 조금 귀찮긴 했는데, 내 설명에 눈을 반짝이며 정답을 찾아내는 김동규를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자극도 되고.

게다가…… 작년에 김동규가 아빠 병원으로 실려 왔다. 그것도 자기 아빠한테 맞아서. 그런 아빠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애가 이건 어떻게 푸는 거냐고 찾아오는데 귀찮다고 밀어낼 정도로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야 서함. 나도 너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 주면 내 과외 선생님 해줌?”

“진짜? 야 그럼 나는 노트! 시험 전날만 빌려줘. 복사라도 상관없고 사진으로 찍어줘도 돼.”

요즘 내 친구들의 최대 관심사는 김동규다. 작년부터 이모님 허락하에 김동규랑 시험 기간 3주 정도를 같이 보내게 됐다. 같이 공부하는 날이면 김동규가 고맙다고 주전부리를 만들어왔다. 생긴 건 투박했지만 많이 달지 않아 좋았다. 만들어 올 때마다 내가 다 먹어서 그런가, 김동규는 시험 기간이 아니더라도 이것저것 만들어 주곤 했다.

방금 전에는 커피 양갱을 가져왔다. 색도 노란색, 빨간색, 고동색으로 세 가지나 됐다.

“너 과외 선생님 세 명이나 있잖아.”

“나도 주라!”

맛이나 보라고 두 개를 꺼내줬다. 양갱 하나를 작게 잘라 먹었더니 커피향이 은은하게 나면서 달지 않고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졌고 동시에 작게 갈은 호두가 씹혀왔다. 맛은 있는데 커피 사탕 맛이 느껴졌다. 그냥 인스턴트 커피 썼나 본데.

“존나 맛있는데?”

“더 먹을래?”

“어!”

“다 먹어라.”

나 혼자 먹으면 딱인 양이라 친구들이 한 개씩 먹으니 끝이었다. 김동규는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고 밥을 소화시키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문제 푸느라 바빴다. 내 입에 별로면 억지로 먹지 말고 어떤 부분이 맘에 안 들었는지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으니까 그다지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받는 것도 아니고 공부도 도와주고 아무도 보여주지 않는 노트도 보여주니까.

“근데 너 준 건데 우리만 먹어서 어떡함.”

“다 먹어놓고 지랄한다.”

“삐지는 거 아니야?”

“야 삐지기만 하면 다행이게? 안 맞으면 다행이지.”

“다 틀렸어. 너넨 김동규가 얼마나 호구 새낀지 모르냐? 아주 정성이야. 친구 하나밖에 없다고 서하림한테 지극정성. 보는 앞에서 맛없다고 토를 해도 서하림한테는 화 안 낼걸.”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자기들끼리 떠드는 목소리는 분명 김동규 쪽에서 얘네가 자기 얘길 한다는 걸 뻔히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아까부터 아무 말 안 하고 있긴 했지만 점점 김동규를 까 내리며 수준 낮아지는 대화를 아예 듣고 싶지가 않았다.

〈서하늘 뭐해]

〈우리반 좀 놀러와]

[ㅇㅇ〉

산후조리원부터 어린이집,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거쳐 지금까지 같이 다니고는 있는 애들은 친하긴 한데 종종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김동규네 아빠가 범죄자든 뭐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김동규가 어디 살든 뭘 하든 남한테 그렇게 관심 쏟을 시간이 있을 바에야 김동규처럼 공부나 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나. 엄마들끼리도 친하고 너무 어릴 때부터 알아와서 어울려 주고는 있지만 그렇게 맘에 드는 애들은 아니다. 그나마 같이 다녀주는 이유는 적어도 얘네는 오래 알아서 그런가 나보고 재수 없단 티를 잘 숨겨서 그건 편했다.

“와, 김동규 오늘은 뭐 풀어.”

뒷문으로 들어온 서하늘이 교실에서 유일하게 공부 중인 김동규의 앞자리에 앉아 풀고 있는 문제집을 건드렸다.

“이러다 서하림 제치고 전교 1등 하겠다. 너는 맨날 공부만 하고 있더라? 쉬는 시간인데 왜 안 쉬어?”

김동규는 대답이 없었고 서하늘이 그런 김동규에게 끊임없이 말을 던졌다.

“좀 쉬엄쉬엄해라. 그러다 과부하 걸리면 어떡하려고. 갑자기 어느 날 현타가 와서 공부가 질리면 어떡해?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에요.”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검지를 빠르게 까딱거리고 있는 걸 보니 속으론 서하늘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하늘은 꼭 저렇게 한 번씩 김동규를 건든다. 좋아하는 거냐고 물어봤는데 그건 아니란다.

“너 1학기 때 몇 등 했다고? 평균 높았던 거 같던데. 아직 나보단 아래지?”

서하늘이 놀러 오면 그 핑계로 교실을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김동규 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서하늘의 어깨를 두드렸다.

“양갱 별로 맛없었어?”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김동규가 갑자기 불쑥 물어와 나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뭔데? 설마 또 김동규 맛있는 거 만들어서 서하림 줬어? 아 왜 뭔데! 왜 또 나 안 주고 서하림 혼자 다 처먹은 건데!”

“내가 다 안 먹었어. 쟤네 줬어.”

“야 그럼 나는 왜 안 줘?”

“몰라. 야, 일단 나와.”

서하늘이 옆에서 욕을 해대는데도 김동규는 다시 문제를 풀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런 김동규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서하늘과 교실을 나왔다.

“야. 김동규 존나 웃기지 않아? 내 말은 존나 씹었으면서 너한테만 말 거는 거. 하루 이틀 아닌 건 아는데 간만에 코앞에서 무시당하니까 기분 존나 더럽다. 저번엔 얘기했는데.”

“안 친한데 네가 계속 말 거니까 그렇지.”

“저번엔 얘기했다니까?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이 오가는 대화를 했다고. T, A, L, K. OK?”

“음료수 사줄게. 가자.”

나는 지난주 쌍방이었다던 김동규와 서하늘의 대화를 떠올렸다.

‘야야. 나도 마카롱 만들어줘.’

‘…….’

‘나도 수플레랑 케이크랑 푸딩이랑 좋아해. 머랭쿠키도. 크렘 브륄레랑 타르트랑 애플파이도.’

‘…….’

‘똥고집하고는. 서하림 거 만들면서 하나만 더 만들면 되잖아.’

‘…….’

‘야, 너 그거 틀렸어. 그렇게 해서는 답 안 나와.’

‘어디.’

‘여기. 갑자기 여기서 왜 y가 -7이 돼 멍청아.’

‘아.’

‘이게 바로 전교 2등의 클라스라는 거야. 고맙지? 그럼 내 것도 만들어 와.’

‘……어.’

대화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바로 다음 날 김동규는 내 에그타르트와 서하늘의 에그타르트를 가져왔다. 내 건 세 개였고 서하늘 건 한 개였다.

“난 콜라 마실 건데 너는.”

“포카리.”

점심시간이 아직 남아 있어 서하늘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운동장 옆에 설치된 등나무 벤치에 앉아 서하늘에게 하려는 말을 정리했다. 서하늘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랑 백날 싸워서 그런가 나랑 동갑인데도 조금 누나 같은 구석이 있는 편이고 입도 무겁고 눈치도 빠르고 뭐든 고민을 쉽고 빠르게 해결하곤 했다. 교실로 놀러 오라는 말이 친구들이 거지 같으니까 좀 빼내달라는 신호란 것도 잘 알고. 어릴 땐 사이 진짜 안 좋았는데 나까지 갈궈대는 서하늘의 오빠 덕분에 생긴 전우애였다.

“어? 하림이 안녕!”

“여기서 뭐 해?”

“얘가 나 음료수 사준대서. 후식.”

“아.”

운동장을 거니는 친구들이 이쪽으로 계속 인사를 해왔다. 서하늘은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가끔 지나가는 애들에게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었다.

지금까진 딱히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까 전 흘려들은 친구의 말이 계속 신경 쓰인다. 지극정성. 나한테는 화도 안 낸다는 김동규. 거기다 김동규가 나한테만 말을 건다는 서하늘의 얘기까지.

그런데 이걸 서하늘한테 말해본다고 뭐가 달라지나. 사람 성격은 천차만별이고 김동규는 낯을 좀 많이 가리고 안 친한 사람에게는 선을 확실하게 그어서 그렇지 그게 잘못은 아니고 또 나한테도 이것저것 만들어주고 같이 공부하긴 해도 그렇게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얘길 많이 하길 해, 아니면 옆집에 살길 해. 메시지야 뭐 자주 주고받긴 하는데 그것도 김동규가 10개 보내면 내가 한두 번 답장하는 정도고. 시험 기간에 공부할 때도 거의 문제 푸는 얘기만 하지 특별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적당히 친한 친구 수준이 아닌가.

“이번엔 또 네 감자 삼인방 친구들이 뭐라고 했나 들어나 보자.”

“감자 아니라니까.”

“그럼 똥머리.”

이전엔 오징어 삼인방이라 부르던 걸 감자로 바꾼 지는 좀 됐다. 작년 여름방학 끝나고 오니 셋이 머리를 짧게 자른 걸 보고 바꾼 건데 이젠 머리가 다 자랐는데도 여전히 감자라고 불렀다.

“아니 그거나 그거, 아 됐고. 그냥 별거 아니야.”

“그래? 그럼 왜 바쁜 몸 불러내 놓고 음료수까지 사줘? 원랜 감자들의 지옥에서 구해주고 나면 쿨하게 안녕인데.”

“5분만. 너 있잖아.”

“응.”

“너도 김동규가 나한테 잘해준다고 음. 아니 나도 잘해준다고 생각하고.”

“뭐라는 거야. 물어보는 거야 혼잣말을 하겠다는 거야.”

지극정성이란 단어를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 나는 잘 모르겠어서 물어보는 건데.”

“어.”

“그냥 나는 유난스럽거나 특별하다곤 생각 안 하거든.”

“어.”

“근데 걔가 나한테 좀…… 지극정성인가?”

“어.”

“어?”

“어. 맞다고 지극정성.”

너무 빼도 박도 못하게 얘길 하니까 당황스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런가? 그랬나? 김동규랑 했던 말들이나 있었던 일들 다시 되감아 봐도 그 정도까지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디가?”

“이것저것 만들어 주는 것만 봐도 지극정성이지. 야 마카롱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그거 말고도 만들어 갖다 바치는 것들 생각해 봐. 대량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너 하나 먹으라고 만드는 건데 그 덩치 큰 남자애가 한 명 주겠다고 소량만 반죽하고 1인분만 계량하고 그러는 거 상상해 보면 좀 놀랍지. 시험 기간에 공부도 너네 집에서 한다며.”

“만드는 게 많이 힘들어?”

“그걸 말이라고 해?”

“하지만 걔는 그냥 이유 없이 만드는 거 아니고 내가 공부도 도와주고 하니까…… 그래서 나보고 맛없으면 어디가 별로인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이런 것도 다 얘기해 달라고 그랬어. 별로인 거 얘기해 주면 다음번에는 더 맛있게 만들어오던데. 서로 이득 보는 그런…… 거 아닌가.”

“그런 거 아니거든요. 완전 천년의 사랑이네, 사랑이야. 그 정도면 너한테 사귀자고 고백하는 거임.”

“장난치지 말고.”

“정 그러면 테스트해 보든가.”

“테스트?”

“걔가 화가 날 상황을 만들어서 화내나 안 내나 보라고.”

“맛없다고 해도 화 안 내던데? 이거 만들어 줘, 저거 만들어 줘 하거나 이것저것 부탁해도 그렇고.”

“그럼 음.”

서하늘이 남은 음료수를 한숨에 털어 마시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새벽에 전화해서 나오라고 그래.”

“새벽에?”

“완전 새벽. 한…… 세 시쯤. 두 시는 넘어야 돼. 잘 자고 있는데 전화 때문에 잠에서 깬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다짜고짜 나오라고 하면 누구든 다 화내지. 화까진 안 내더라도 나오란 말에 대부분 자고 일어나서 만나자고 할걸? 근데 내가 봤을 때 네가 나오라 그러면 걔는 백 퍼 나와.”

“설마.”

“아 쉬 마려. 나 먼저 들어간다. 만약에 하면 나한테 후기 꼭 털어!”

차갑긴 해도 얼음이 없어 자판기에서 막 나왔을 때보단 미지근해진 콜라를 벤치에 내려놨다. 마침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내일은 주말이라 새벽에 부르기엔 적당한 것 같았다. 새벽에 깨서 나갔다가 다시 잠들어도 오후 늦게까지 푹 잘 수 있을 테니까.

아니 됐다. 걔가 뭔 잘못이 있다고 새벽에 잠을 깨야 돼. 지나가는 친구들이 계속 내게 인사를 건넸지만 서하늘과 달리 가볍게 손만 흔들었다. 그렇게 수업 준비 종이 칠 때까지 나는 운동장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침대에 누운 지는 한참 전이었지만 안대 속에 숨겨진 내 눈은 꾸역꾸역 움직였다. 안대 끼고 눈 깜빡이는 짓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짓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눈 떠봤자 안대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잠이 오지 않아 자꾸만 눈이 뜨였다.

시간은 벌써 1시 51분. 무드 등 끈 게 12시 20분쯤이었으니까 벌써 의미 없이 시간을 죽인 게 한 시간 반이 넘었다. 서하늘이 얘기했던 두 시까진 겨우 9분. 전화번호부에서 김동규를 찾아 번호를 띄워두고 통화 버튼을 누를지 말지 고민했다. 얼마 고민 안 한 것 같은데 정신 차리니 2시가 넘어 있었다.

해? 말아? 보통은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이번에는 안 하고 후회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뭔가를 할 때 이렇게 주저해 본 적이 있었나. 뭐든 잘될 거라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전화했다가 김동규가 왜 이 시간에 전화했냐고 화를 낼까 봐 조금 무서웠다. 꼭 김동규가 아니라 서하늘이나 다른 친구들이었어도 무서웠을 거다. 친구가 아니어도 할아버지나 엄마나…… 누구라도 이 시간에 전화했다가 내게 짜증을 낼 거라 생각하면 무서울 거 같다. 그래,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괜찮아져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너무 길었다.

차라리 받지 마. 계속 자.

끊을까 그냥.

-응. 하림아.

잠에서 막 깨어났는지 평소보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기도 했고 어딘가…… 이상해서 귀가 간지럽고…….

-지금 시간이…… 두 시네. 왜, 무슨 일 있어?

나는 까만 어둠만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침을 아무리 삼켜봐도 막힌 듯한 목구멍이 갑갑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서하림?

“어…….”

-뭐야. 잠결에 건 게 아니네. 왜 전화했어? 집에 무슨 일 있는 거야? 지금 갈까?

“아니.”

-아니라니 다행이야. 큰일 난 줄 알았어.

서하늘 이 거짓말쟁이 새끼. 누구든 잘 자고 있는데 전화 때문에 잠에서 깨면 짜증 낼 거라고 했으면서.

“자……전거 타자.”

-갑자기 자전거? 그래. 근데 나 자전거 없어.

“빌려줄게. 나 두 개 있어.”

-응. 집 앞에 도착하면 전화할게.

새벽에 다짜고짜 나오라고 하면 누구든 다 화낼 거라고 했으면서. 나오란 말에 대부분 안 나올 거라고 했으면서.

‘근데 내가 봤을 때 네가 나오라 그러면 걔는 백 퍼 나와.’

전화가 종료되어 빛을 잃은 액정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내 방에선 보이지 않았다. 손에 잡혀 있는 휴대폰의 딱딱한 감촉만이 느껴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지금 드는 기분을 명료하게 설명하지도 못하고 한참을 앉아만 있었다.

김동규 전화에 액정에 밝은 불이 들어왔을 땐 진짜 화들짝 놀랐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에라 모르겠다. 대충 둘러댄 핑계였던 자전거나 타면서 밤바람이나 쐐야지. 그러면 복잡한 머리가 알아서 정리될 거다.

결국 한강을 따라 라이딩 하고 편의점에서 못 먹는 컵라면에 맛없는 만두까지 먹고 헤어지고 나서 한참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새벽바람에도 머리가 정리되지 않아서.

“야, 자전거가 말이 돼?”

후기 들려준단 얘기에 옆 동 사는 서하늘이 달려왔다. 서하늘은 들어오자마자 자몽청에 사이다를 부어 자몽에이드를 만들었다. 청에도 설탕이 얼마나 들어가는데 그걸 또 탄산수가 아니라 설탕이 가득 들어간 사이다로……. 이해하지 못할 입맛이었다.

“이거 김동규가 만든 거지.”

“응.”

“사촌 아우님. 자전거야 뭐예요, 자전거가. 새벽에 데이트해?”

“그럼 새벽에 다짜고짜 뭐라고 하고 나오라 해?”

“할 말이 있, 음 이건 별로다. 그럼 새벽에 불러서 라면이라도 끓여달라고 해.”

“나 라면 안 좋아해.”

“그러니까 끓여달라는 거지. ‘똥규야앙, 하리미가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어져또. 그런뎅 하리미는 라면을 끓일 줄 몰라. 오또카지? 끓여조 끓여조오!’.”

“……그다음엔 뭐라고 해?”

서하늘이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려 소름이 돋았다. 이건 분명 날 괴롭게 하려는 속셈인 게 분명해 발끈하지 않고 참았다. 괜히 반응하면 10절까지 할 애였다. 그 10절의 애교를 생각하며 미친 거 아니냐는 말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그다음엔 끓여주면 ‘근데 하림이는 라면 못 먹게또’ 하고 버려.”

“버리라고?”

“응. 한 입 정도는 먹어도 돼.”

“야 그건 너무한 거 아니야?”

“거기서 걔가 화내면 미안하다고 해. 화낼 것 같지도 않지만.”

“안 할래.”

“사과하면 되지. 음, 과학고 입시 준비하다가 새벽에 갑자기 센치해져서 미친 짓 좀 해봤다고 그래. 그래도 화내면 그냥 싸워. 이 새벽에 오란다고 오는 니가 미친놈이다, 그냥 장난으로 해본 말인데 여기까지 오면 어떡하냐.”

“너 존나 인성 쓰레기 같아.”

“내가 뭘? 원래 친구끼리는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예요, 아우님. 나도 뭐, 친구가 입시 때문에 힘들어서 미친 짓 했다 그러면 한 번쯤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아.”

아무리 그래도 새벽에 불러내는 것도 미안한데 라면을 끓이라고 하고 그걸 그냥 버리라고?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서하늘을 째려보며 입 모양으로 인간쓰레기라고 욕했다.

“정 미안하면 솔직하게 얘기해. 서하늘이 날 들쑤셔서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한번 새벽에 부른 건데 정말로 와서 라면 끓여줄 줄은 몰랐어. 사실 전에 갑분자전거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동규야, 너는 정말 이 삭막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잘 볼 수 없는 참된 친구로구나. 너의 진실 된 우정을 의심해서 정말 미안해. 친구야, 우리 앞으로도 이렇게 참된 우정을 나누며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평생을 함께하는 죽마고우, 막역지우, 금란지교의 벗이 되어보자.”

“……뭐 하냐.”

일부러 어색하게 연기하며 분위기를 푼 서하늘이 “내가 뭘?”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안 궁금해? 새벽에 다짜고짜 자전거를 타자는데 왜 화를 안 냈는지.”

“자전거 타는 거 좋아하나 보지.”

“잘도 그러겠다. 진짜 한 번 더 불러봐. 자다 깨서 라면 끓이라고 해서 끓여줬는데 눈앞에서 한 입도 안 먹고 버리는 거 보고도 화를 안 내면 그게 사람이냐, 등신 머저리 호구 새끼지.”

“한 번도 좀 그랬는데 또 그러기는 안 내켜.”

“이것도 해보고 후기 보고 올리세요, 서 팀장.”

“야, 나 안 한다고.”

“그래애? 진짜? 정말? 리얼로? 하지 마라 그럼.”

진짜로 안 할 생각이었다. 새벽에 나도 걔도 푹 자고 그러려고 했다. 서하늘이 집으로 돌아가고 책상에 앉아서 문제가 눈에 잘만 들어왔어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내 전화 하나에 왜 그 늦은 새벽에 나온 건지, 자전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는데도 왜 짜증 내지 않았는지, 왜 하필 자전거였냐고 안 물어본 것은 왜 그런 거고 전화는 왜 또 그렇게…… 다정하게 받을 이유는 뭐였는지. 지금까지 나와 김동규가 뭘 특별나게 한 게 있었나. 나를 좋아한다기엔 부족하고 아니라기엔 이상했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제일 싫다. 아무리 풀어도 정답이 나오지 않는,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불확실한 건 다 싫다. 일주일쯤 김동규 때문에 뇌가 엉망이었고 전화를 걸까 두 번 정도 고민했지만 차츰 괜찮아졌다. 김동규가 왜 저러는지는 내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풀리지 않는 대로 둬도 크게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아.”

교과서 넘기다 종이에 손을 벴다. 가볍게 스친 줄 알았는데 빨간 핏방울이 무섭게 올라오자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저 손가락.”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자 선생님이 얼른 보건실에 다녀오라며 고갤 끄덕였다. 드라마에선 이렇게 손을 베이면 입에 물던데 손을 씻은 것도 아니고 세균 가득할 손가락을 상처 났다고 입에 물기 뭐해 그냥 검지만 세운 채로 1층으로 내려갔다.

“손 줘봐.”

수업 중이라 복도엔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네가 여기 왜 있어?”

“배 아파서. 줘봐, 손.”

“배 아프면 화장실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괜찮아졌어.”

일단 김동규 손 위에 다친 내 손가락을 올렸다. 참된 우정을 나누는 죽마고우. 서로 거스를 것 없는 막역지우, 단단하기가 황금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 같은 우정의 금란지교.

“많이 벴네. 빨리 가서 선생님보고 치료해 달라고 그러자.”

“그래.”

정말 그냥 친한 친구라서, 내가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서 이런 걸까? 김동규는 나를 따라 보건실에 들렀다가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 올 때까지 별말도 없었다. 그냥 내가 너 똥 못 싸서 어떡하냐니까 진짜로 괜찮아졌다며 약국에 가면 방수밴드라는 걸 파니까 이모님보고 사다 달라고 하면 될 거란 게 다였다. 남은 수업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10시에 학원을 마치자마자 우루루 빠져나가는 학생들이 어느 정도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빨리 나간다고 저 무리에 껴봤자 치이기만 하고 좋을 게 없다.

누군가 내 책상을 툭 치고 가 필통이 떨어졌다. 나는 그게 누군지 알고 있어 작게 욕을 하며 필통을 주워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거의 제일 마지막으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덕분에 자기 아이를 픽업하는 수백 대의 차도 어느 정도 빠진 상태였다.

“오늘은 어땠어? 많이 힘들었지? 얼른 집에 가서 쉬자. 이제 몇 달만 고생하면 돼, 하림아. 면접만 잘 보면 끝이야.”

힘든가. 아니 별로 힘들진 않는데. 과학고를 준비하고 있지만 설령 외고를 준비했더라도 그렇게 힘들진 않을 거였다. 못 할 거면 진작 때려치웠을 거고 할 만하니까 하고 있는 건데 이모님은 내가 힘들었으면 좋겠는지 데리러 오면서 매번 힘들었냐고 묻는다.

“네. 힘들어요. 너무 힘들어 죽겠어요.”

“뭐라구?”

“아니에요. 혼잣말 한 거예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문제들 푸는 게 즐거우니까 이 짓을 하고 있는 거다. 이 세상엔 내가 푼 문제와 아직 안 푼 문제만 있을 뿐이고. 하지만 이모님 말고도 학원 친구들이나 학교 친구들이 전부 내가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냐며 날 측은하게 만드는 게 뻔히 보였다. 가끔 내가 그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고도 손쉽게 문제를 풀었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이번에는 너 때문에 박탈감이 든다거나 인생 살기 싫어진다며 내 탓을 했다.

“……이모님. 혹시 학원 선생님을 우리 집으로 불러오게 하는 건 못해요?”

“글쎄다, 아주 힘든 건 아니겠다만 왜?”

“그냥 집에서 편하게 수업 듣고 싶어서요. 이모님도 여기까지 매일 픽업하러 왔다 갔다 하는 거 힘드실 테고.”

학원에서 나랑 사이가 존나 안 좋은 남자애가 하나 있다. 권예준이라고 국제중 다니는 앤데 거기서 전교 1등을 하고 있고 작년까지는 수학 올림피아드 준비하면서 같이 중등부 금메달도 따고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지난달 3월에 있던 FKMO에서 중학생 중 유일하게 나만 우수상을 받기 전까지는. 장려가 아니라 우수상 받은 게 나도 조금 놀라긴 했는데 받을 만한 상이어서 신나게 좋아했다가 권예준한테 욕을 들었다. 누군 기분 좆같은데 그 앞에서 꼭 그래야겠냐고.

오늘도 쪽지 시험에서 자기는 하나 틀렸지만 나는 다 맞은 게 짜증 난다고 내 필통이나 떨어뜨리는 유치한 짓을 했다. 이 정도는 귀엽다고 봐줄 수 있었다. 어차피 뒤에서 날 신나게 까고 다녀봤자 앞에선 티도 못 내고 씩씩거리는 게 다인 한심한 애였다.

그리고 걔가 날 싫어하는 이유에 외모도 포함되어 있단 걸 알고 나서는 학원 갈 때마다 꼬박꼬박 권예준한테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고 걔가 날 보는 게 느껴지면 괜히 휴대폰 꺼내서 셀카를 찍거나 카메라를 보면서 얼굴을 정리하거나 했다. 그때마다 권예준이 짜증 나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게 웃겼다.

“노력은 해볼게.”

“학원에서 빼 오는 게 힘든 거면 유명한 과외 선생님이어도 괜찮아요. 아니, 유명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어요. 저랑 잘 맞는 선생님이랑 집에서 공부하고 싶은 거지 다른 게 중요한 건 아니라서요.”

“그래, 좋은 선생님으로 한번 알아볼게요.”

아까 필통 주우면서 나도 모르게 욕을 한 건 명백한 실수였다. 떨어지자마자 권예준 불러서는 잘 가라고 상큼하게 인사를 해줬어야 됐는데. 그러면 이 뭐 같은 기분이 좀 풀렸을까.

엄마는 워낙 바쁘니까 만날 일이 잘 없으니 그렇다 쳐도 아빠랑은 요즘 맨날 싸웠고 이모님이랑도 자주 싸웠다. 할아버지한테도 한 소리 들었다. 자기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다 사춘기 지냈는데 너처럼 그렇게 싸가지없지 않았다고. 내가 생각해도 질풍노도의 사춘기였다. 모든 게 다 짜증 나는 것투성이라 지금 내 앞에 할아버지가 앉아 있어도 욕을 하며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김동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하늘 도발에 넘어갈 생각 없다고 버텼던 게 무색하도록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걸 작정이었다. 시간은 1시 32분.

-응.

저번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잠에서 막 깬, 낮고 허스키하고 다정한…… 목소리.

-시간도 늦었는데 왜…… 혹시 안 잔 거야?

“응.”

-헐 왜.

다정한 그 목소리에 라면 먹고 싶단 한마디가 목에 걸려 나오지를 않았다. 전화 걸기 전엔 분명 짜증이 나니까 이런 내 짜증을 받아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내 친구 중에서 김동규가 제일 못 살아서 아니, 그게 아니라 제일 잘난 척도 안 하고 나한테 잘해주는 편이고 무슨 말을 해도 잘 들어주고 저번에도 새벽에 걸었을 때 그냥 바로 나와 줬고 또…….

-하림아, 어디 문제 있어? 아픈 거야? 무슨 일인데.

또, 서하늘이 해보고 자기보고 후기 알려달라고 그랬고 아까 이모님이 힘드냐고 몇백 번째인지 모를 말을 물어왔고 학원에서 권예준이 필통 떨어뜨린 것도…….

-지금 갈까? 집에 아무도 없어?

“……방수밴드를 깜빡했어.”

-방수밴드?

“이모님한테 사와 달라고 한다는 걸 깜빡했어. 집에 올 때도 차 타고 오면서 분명히 약국 보긴 봤는데 까먹었어.”

-잠깐만.

김동규는 전화를 끊지 않고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전화가 끊어질까 봐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내고 점점 늘어가는 통화 시간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금 갈게. 검색해 보니까 방수밴드 편의점에서도 판다. 혹시 씻다가 물 들어갔어?

“어? 어.”

-물 들어갔으면 따끔거리고 많이 아팠겠다. 2시까지 갈게. 어른들 다 자고 계실 테니까 도착하면 벨 안 누르고 전화하면 되겠지?

“응.”

-이따 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내려갔다. 우리 집에 라면이 있던가? 가끔 아빠가 라면 끓여 먹는 거 같긴 한데 나도 같이 먹어봤어야 그걸 어디 뒀나 알지. 온갖 찬장을 다 열어 보고 주방에 있는 서랍이란 서랍을 다 뒤져봐도 없던 라면이 주방 베란다에서 나왔다. 아빠는 왜 이걸 과자랑 같이 여기다가 놔서 못 찾게 만들어. 얼큰한 맛이라며 너구리가 그려진 라면은 조리 예로 쓰인 사진만 봐도 자극적이었다.

힘들게 찾은 라면을 들고 식탁에 앉자마자 김동규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깜짝 놀라서,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고 전화를 받았다.

-나 집 앞이야. 미안. 2시까지 오려고 했는데 조금 늦었어.

“문 열게, 잠시만.”

거실로 달려가 인터폰 화면을 켰다. 문 앞에 김동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5초쯤 뒤에 센서 등이 꺼져 김동규가 팔을 뒤로 흔들었다. 불이 켜지니 김동규는 또 앞을 보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문 열어준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안 열어주면 벨이라도 눌러보려 하거나, 인터폰 카메라라도 기웃거려 볼 법한데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김동규는 멀뚱히 서 있었다. 자동 불이 세 번 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현관문 도어락을 해제했다.

어른들 깰까 봐 엄청 조심스럽고 천천히 문을 연 김동규는 신발도 엄청 느리게 벗었다. 신발 벗어봤자 소리가 얼마나 크게 난다고.

“문 안 열리길래 나는 네가 다시 자는 줄 알았어.”

거기다 말도 들릴 듯 말 듯 소곤소곤했다. 저 덩치로 그러는 게 어이도 없고 조금 귀여운 것 같아 웃음이 살짝 나왔다.

“소리 내도 괜찮아. 어차피 부모님 방까지 너무 멀어서 들리지도 않을걸.”

“아 그래?”

김동규는 실내화를 신지도 않고 내게 걸어와 덥석 손을 잡았다.

“시, 실내화부터 신는.”

“방수밴드라도 손은 체온이 있으니까 밴드 안에서 땀이 찰 수도 있거든. 근데 그러면 상처에 안 좋으니까 네가 느끼기에 좀 눅눅한 거 같다 싶으면 갈아 줘야 돼.”

“아, 응.”

실내화 안 신으면 바닥 차가울 텐데. 당사자는 아프지도 않은 상처에 대해 김동규가 차근차근 설명하며 손가락에 방수밴드를 붙여주었다. 덩치 큰 게 곰손이면서도 꽤 야무진 손놀림이었다. 하긴, 베이킹도 요리도 잘하니까 이 정도는 껌이겠지 싶다.

손가락에서 떼어내 너덜너덜해진 밴드를 김동규가 손바닥에 올려두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물에 들어갔다고 거짓말한 걸 들킨 건 아니겠지.

“이거는 내가 버려도 돼?”

“쓰레기통 저기 있어.”

“응.”

“안 버려?”

“좀 이따가. 물 좀 마시고.”

세 걸음이면 닿을 쓰레기통을 두고 굳이 물부터 마신다는 게 이상했지만 일어나서 물도 못 마시고 온 것 같아 김동규와 주방으로 갔다. 그때 식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라면 봉지 때문에 머리카락이 온통 서는 기분이 들었다. 라면 꺼내 놓은 걸 깜빡했다. 아 괜히 서하늘 때문에 이게 뭐야. 이렇게 착한 애한테 내가 뭘 하려고…….

“설마 라면 먹으려고? 네가?”

“어? 아니, 아니지.”

“맞는 거 같은데 당황하는 거 보니까.”

“아니! 나 라면 싫어해! 너무 자극적이고 짜고 아무튼 별로야.”

“그럼 안 자극적이고 안 짜면 먹을 수 있어?”

“라면이?”

“라면도 어쨌든 면이잖아. 배고프면 그걸로 뭐 만들어줄까?”

예상과는 너무 다른 전개에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그냥 라면을 끓이는 게 아니라 만든다고? 그럼 나는 그걸 한 입만 먹고 버려야 하나? 아니면 그냥 집에 가라 그래? 그냥 물만 먹고 가라고? 뭐 하나 선택하기 어려운 보기들만 떠올랐다. 김동규는 그런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는 중이라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말해줘도 돼”라며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아, 아무거나.”

“그래 그럼. 밤이니까 간단하게 샐러드 해볼까. 근데 어른들 깨면 어떡해?”

“안 깨. 요리하다 뭐 터지지만 않으면 괜찮을걸?”

“알겠어. 앉아서 기다려. 15분이면 돼.”

괜찮다는 데도 김동규는 모든 동작이 조심스러웠다. 최대한 소리를 덜 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면을 삶아 얼음물로 박박 씻어 채에 올려두고 설탕이랑 간장이랑 이것저것 섞은 소스를 만들어 고기랑 섞어 굽는다. 여러 가지 야채들도 빠르게 썰어 그릇에 예쁘게 담아내니 딱 15분이 흘러 있었다. 그 15분 동안 나는 김동규가 붙여준 투명한 방수밴드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요리하는 김동규를 지켜보았다.

“자. 진짜로 어른들 안 깼다.”

“……그럴 거라고 했잖아.”

“그러게. 네 말이 맞아.”

김동규 말대로 이건 그냥 라면의 면만 사용한 또 다른 요리라 라면이라 부를 수가 없는 거였다. 늘 그랬듯 김동규가 만든 건 맛있었지만 밤늦게 먹기 거북해서 몇 입 먹고 젓가락을 내려놨다. 내가 해달라고 한 게 아니라 김동규가 한 거니까 괜찮겠지. 라면 말고 갑자기 이 밤에 전화해서 방수밴드 사 오라고 한 것만 해도 라면 끓여달라고 한 거나 비슷하다고 퉁 칠 수 있지 않을까.

“너 야식 원래 잘 안 먹지.”

“응.”

“근데 왜 갑자기 라면 먹겠다고 한 거야?”

내가 쓰던 젓가락과 접시를 자기 쪽으로 가져간 김동규는 남은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양심과 미안해서 거짓말을 해야 한단 마음이 부딪혔다. 서하늘이 자기 팔아서 솔직하게 얘기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아직도 실내화를 신지 못해 양말만 신고 있는 김동규에게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학원에서 나 싫어하는 애가 유치하게 내 필통을 바닥에 떨어뜨렸거든.”

“응.”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줍고서 웃어줬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 했어. 순간 짜증이 나더라고.”

“예상치 못하게 그러면 그럴 수 있지. 다음에 네가 어깨빵 하고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

“그래서 일단 짜증이 너무 난 상태였는데 이모님도 자꾸 나보고 공부하는 거 힘들지 않냐고 물어봤어. 나는 밤늦게까지 학원 다니고 집에 오면 또 공부하고 주말에도 영재원 가고 그런 거 다 좋아서 하는 거거든. 힘들고 못 하겠으면 안 했을 거야.”

“맞아. 뭐든 할 만하니까 하는 거야. 너는 평균보다 훨씬 대단하긴 한데, 어쨌든 네 성격에 하기 싫거나 못 할 거였으면 옛날 옛적에 포기했겠지. 사람마다 잘하는 거 못 하는 거 다 다르고 너도 못 하는 거 있잖아. 뭐랬지, 춤추는 거 못 한다면서. 나도 그래. 완전 몸치임.”

김동규는 항상 듣기 좋은 말을 해준다. 힘든 일에, 마음에 공감을 해주고 누구든 좋아할 화법을 썼다. 세상에 김동규 같은 친구들만 있으면 범죄자로 자라나는 청소년이 한 명도 없을 텐데.

“암튼 기분 나빴겠다. 그런 날은 야식 생각나.”

“아니 그건, 서하늘이…….”

“서하늘? 갑자기 걔는 왜?”

“몰라. 그냥…… 걔 때문이야. 너한테 미안해서 사실대로 다 못 말하겠어. 새벽에…… 이렇게…… 와줬는데.”

“그럼 하지 마. 괜찮아. 별로 안 궁금해. 뭐, 네 전화에 내가 온다 안 온다 내기라도 걸었나 본데 네가 건 쪽으로 얘기해.”

“그런 건 아니야.”

“뭐든. 안 궁금하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잊어버려. 걔가 한 말이면 안 봐도 개소리다.”

우정에 관한 사자성어들을 기억나는 대로 떠올렸다. 죽마고우, 막역지우, 금란지교, 단금지계, 문경지교, 지기지우, 관포지교, 복심지우, 교칠지심, 어수지교…….

어렸을 때부터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던 아빠 때문에 불행한 유년시절을 지낸 사람이, 과연 자기한테 잘해주는 친구에게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걸까. 고전 한시들 보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도 있고 생사를 함께하는 친구도 있고, 뉴스만 봐도 성별이나 나이, 인종을 뛰어넘어 길이길이 회자되는 다양한 우정과 친구들이 존재했다. 심지어 동물이랑도.

새 살이 돋는지 밴드 속 손가락이 간지럽다. 다른 손가락으로 건드리니 따끔하고 아팠다.

설거지까지 완벽하게 하고 김동규는 떠났지만 나는 방으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식탁에 앉아 김동규가 앉아 있던 자리만 바라봤다.

우정이겠지. 우정이야. 그 이상이라면 뭔가 더 있었을 텐데 이렇게 쌩 하고 왔다가 쌩 하고 가버릴 리가 없다. 김동규가 다정한 건 원래……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거고 친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일 건데 걔가 친한 건 나밖엔 없는 거니까 그런 모습 보여줄 사람도 알고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는 거고.

아직 누굴 좋아해 본 적은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만약 진짜로 김동규가 날 좋아하는 거면 더 있어도 되냐고 온갖 핑계를 대면서 10분이라도 더 우리 집에 있었을 거고 학교에서도 어떻게든 말 한 번 붙여보려고 그랬을 거고 시험 기간이 아니어도 나 보겠다고 맨날 놀러 왔을 텐데 그러진 않았다.

근데, 이 새벽에 밴드 사 들고 올 건 또 뭐고 자전거를 타겠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에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자전거가 없는 게 걱정일 건 또 뭐야. 진짜 이상한 애다.

난 그런 거에 편견 없는데, 정말로. 김동규가 나보고 좋아한다 고백하면 뭐 김동규랑, 다른 사람들에겐 말은 못 하겠지만 사귀어도 뭐…… 같이 쿠키 반죽 만들고 케이크 굽고 맛있는 거 먹다가 같이 공부도 하고 그리고 또…… 아 됐다. 그 이상은 역시 좀 그렇겠지. 내가 걜 좋아하면 몰라도 손잡고 키스하고 그런 거는 좀.

김동규가 너무 착해서 벌어진 일 때문에 괜히 든 생각을 정리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새벽에 내 전화 하나로 달려와 줄 만큼 좋은 애니까 나도 언젠가 김동규가 날 필요로 하면 전화 한 통에 달려가 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야지, 하는 것으로 생각을 마무리 짓고 잠에 들었다.

김동규는 이번 중간고사에서 서하늘을 이기겠다고 이를 박박 갈았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깝고 잠자는 시간도 아깝고 씻는 시간도 아까워 하루를 1분 1초로 쪼개 쓴다는 김동규는 좋게 말하면 대단했고 어떻게 보면 조금 불쌍했다.

“와 다크서클 봐라. 어제 밤 샜어?”

“샌 건 아니고.”

시험 기간이라 김동규와 같이 하교했다. 김동규 집까지는 거리가 좀 있어 김동규가 집 들렀다가 우리 집에 오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같이 공부 시작하고 나선 자연스럽게 이렇게 됐다. 오늘은 엄마 때문에 집에 갔다 온다고는 했지만.

“아무리 시험공부가 중요하다지만 그러다 죽겠다.”

“사람 생각보다 쉽게 안 죽어. 아 더워.”

“뭐라도 마실래? 폭염엔 사람이 죽기도 하니까. 아 물론 아직은 봄이고 폭염은 아닌데.”

집 근처 카페에서 음료수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왔다. 시험 기간만 아니면 카페에서 열도 식히고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태양 내일 당장 사라졌으면 좋겠다.”

“큰일 날 소릴 하네. 그럼 우리도 죽어 사라질걸.”

“맞아. 근데 그냥 말이 그렇다고. 너무 더워. 4월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더우면 여름엔 어떡하지. 큰일 났다. 진짜 태양 그냥 소멸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100억 년 남았어.”

“100억 년?”

“70억 년이다 130억 년이다 학자들마다 다르긴 한데 암튼.”

김동규는 음료수를 한 입 쪽 빨아 먹고 손가락을 접어가며 뭔가를 계산했다.

“와 그럼 도대체……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태양의 죽음은 못 보겠다.”

“뭐, 우린 못 보겠지만 100억 년 뒤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볼 수 있겠지. 아, 사람들도 못 보겠다. 지구는 태양보다 훨씬 전에 수명을 다할 테니까.”

“어우, 너무 까마득한데. 말이 100억 년이지 느낌상 영원한 것처럼 느껴져.”

대답하지 않고 있으니 김동규가 말을 더 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꽤 긴 걸 보아 얼마나 더워하는지 알 만했다.

“나는 길어야 100년 밖에 못 살 텐데 내 입장에서는 태양이 100억 년 뒤에 죽는단 소리 들어도 그게 오긴 오는 날인가 싶어. 전에 기사 봤는데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장기가 최대한 버틸 수 있는 게 120년이래. 150살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좀 신빙성이 없나 봐.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아무튼 인간 입장에서는 직접 본 것 중에 태양만큼 영원한 존재가 없을 거야. 지구엔 영원을 약속할 만한 게 없는 거 같아. 아, 그러고 보니까 작년에 무슨 백일장에서 ‘네버엔딩’이라는 주제가 나온 적이 있는데 난 그거 주제로 태양 얘길 썼어.”

“그래?”

“응.”

김동규 말처럼 길어야 겨우 100년 더 사는 인간에겐 영원만큼 미지의 존재도 없다. 사후세계야 믿진 않지만 만약 존재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니 사후세계가 있다면 모든 인류가 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영원에 한없이 가까운 영겁의 시간이라도 결국 끝이 있다면 그건 영원이 아닌 거니까. 영원이 과연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선 영원만큼 살거나 존재하는 또 다른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영원은 오직 하나가 전부다.

어떤 철학자가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삶과 생명이 가치를 갖게 되고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김동규도 나름 예술을 하는 애니까 비슷하지 않을까. 김동규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얘는 영원한 것에 대한 예술적 판타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00억 년도 영원 앞에선 찰나의 순간일 뿐이야. 영원이 왜 영원인데.”

“그건 그렇지.”

“영원한 게 정말 있을까? 나는 없을 것 같아.”

“왜?”

“영원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시도조차 할 수가 없어. 그냥 ‘끝나지 않는다’는 허상의 개념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해야 하나. 천사나 악마, 신 뭐 그런 거. 증명은 할 수 없으니 실재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대단하고 엄청난 시간 개념이니까 온갖 곳에서 사랑, 우정, 맹세 같은 걸 영원에 거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내 사랑은 태양처럼 뜨거워요’라거나 ‘당신의 눈은 반짝이는 별 같아요’라는 낭만적인 말들도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거 같아. 태양도 100억 년 뒤면 사라질 거라 그즈음의 인류들은 사랑을 태양에 비유하지 않을 거고, 반짝이는 눈동자란 것도 이미 죽고 사라진 별의 빛을 수천 년 수만 년 거리에 떨어진 우리가 보고 있을 수도 있잖아. 다잉 메세지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를 칭찬하는 데 쓰는 게 약간 좀…….”

“진짜, 서하림 감수성 삭막해도 너무 삭막해서 여기가 한국인지 이집트 사막인지 좀 헷갈려.”

“뭐래. 아무튼 영원은 함부로 빗대서 얘기하면 안 돼.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엄청나게 크고 대단하고 무거운 거라고. 사람들은 너무 쉽게 영원을 얘기해.”

집까지는 금방이라 얘기가 끝났을 땐 우리 집 아파트 앞이었다. 김동규는 집에 일이 있다면서 정문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따라왔다.

“집에 안 가?”

“조금만 더 얘기하다가. 급한 거 아니야.”

금방 갈 거라며 우리 동 앞 벤치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김동규 옆에 앉았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영원이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건지 들었고 나는 그 낭만적인 얘기들을 차근차근 논리로 지르밟아 주었다.

결국 한참의 얘기 끝에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김동규는 집에 가지도 못하고 우리 집으로 올라갔다. 늘 내 말이 맞다고 해주던 김동규가 끝까지 영원한 게 없단 내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은 건 의아했지만 집에 와서 씻고 저녁도 먹고 시험공부하며 지내다 보니 금세 잊혀졌다.

“서하림! 우리 나가서 먹을 건데 뭐 사다 줘?”

“콜라! 얼음 컵도 같이.”

“오키.”

“저번처럼 빨대 까먹음 죽는다.”

“네네.”

저녁을 밖에서 먹는 애들이 빠져나간 교실은 거의 비어 몇 명 있지도 않았다. 친구들은 피자를 먹으러 나갔고 패스트푸드 안 좋아하는 나는 매일 그랬듯 도시락이었다. 학원에 마련된 온장고에서 도시락 가방을 꺼내 앉자 나처럼 도시락을 가져온 친구들이 내 주위로 앉았다.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었다. 거의 이 다섯에서 한두 명 정도 빠지거나 더해지는 숫자가 저녁 도시락 멤버다. 나처럼 밖에서 사 먹는 거 싫어하는 애도 있고 알레르기 때문인 애도 있고 부모님이 비싸고 좋은 도시락 먹이겠다는 애도 있고 이유는 다양했다.

“권예준 반 바꾼대.”

“진짜?”

“중간고사 담준데?”

“알아서 하겠지. 잘 먹겠습니다.”

다른 네 명이 내 말에 벙쪘지만 나는 무시하고 국을 떠 마셨다. 권예준이 반을 바꾼 가장 큰 이유는 나였고 그건 우리 반 애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번 달 들어서 일부러 권예준 옆자리에 앉아서 걔가 공부하는 거 빤히 보다가 걔가 실수라도 하면 한숨 푹푹 내쉬길 반복하고 그러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열심히 웃어줬더니 결국 이렇게 도망을 가버린다. 머리 좋은 애니까 반을 옮긴다고 성적이 떨어지진 않겠지만 버틸 거면 중간고사까지는 버텨보지 사내새끼가 참을성이 요만큼도 없다.

“아 빨리 면접 보고 싶다. 인문계 가는 애들은 11월에 기말 치면 끝인데 우리는 면접 12월까지 있잖아.”

“꼬우면 너도 걍 인문계 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여름방학에 존나 너무 놀았어.”

“하림이는 별걱정 없겠다.”

“맞아. 너 정호과고는 방학에 영캠 가서 1등 했잖아. 그럼 거의 합격이지.”

“존나 좋겠다.”

“난 솔직히 면접 2배수라서 붙은 거 같은데 우리 엄마는 지금 이미 합격해서 입학식까지 다 끝났어. 개부담스러워 죽을 거 같아.”

“우리 반에서 20명 넘게 합격할 텐데 뭐가 걱정이야.”

“와, 저 여유.”

“자기는 그 20명 중에서도 1등이다?”

한 반에 정원이 25명 남짓인 이 학원은 실제로 특목고 합격률이 굉장히 높았고 나는 그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네 명이 하나같이 나를 몰아갔다. 반쯤은 장난이었겠지만 원래 장난은 받는 사람이 기분 좋아야 장난이지 아니면 그냥 예의가 없는 거다. 내가 무표정으로 반응도 않자 떠들던 애들이 말을 돌리며 다 같이 도시락에 코를 박았다.

김동규는 지금 내 방에서 주먹밥을 먹고 있겠지. 시험공부하느라 식사 시간 아깝다고 밥이랑 반찬 한 번에 뭉쳐 만든 주먹밥 옆에 놓고 문제 풀면서. 어째 나보다 내 방을 더 오래 쓰는 건 김동규 같다.

도시락 정리하면서 김동규와의 대화창을 확인했다. 10분 전쯤에 저녁 맛있게 먹으란 메시지가 와 있었다. 거의 매시간 메시지를 보내는 김동규지만 이번에는 진짜 의지가 장난이 아닌지 저녁 먹기 전후로 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수업이 모두 끝난 뒤에도 김동규에게선 연락이 없다. 원래는 끝나는 시간 맞춰서 조심히 오란 말을 보내주곤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길래 그렇게 열심히 보내던 메시지도 안 보내나 싶어 정문 앞에서 내렸다. 주차장에 엘리베이터가 있긴 있지만 여기서 집으로 가는 게 더 빨랐다.

“김똥규! 공부는 많이 했냐? 이러다 어? 이번엔 서하늘 진짜로 이기겠어?”

“몰라.”

“맨날 모른대. 공부 많이 했나 안 했나는 자기가 제일 잘 아는 건데.”

간단하게 씻고 나와 책상에 앉았다. 김동규는 하얀 종이가 문제풀이 때문에 까맣게 되도록 엄청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영 공부할 기분이 나지 않아 그런 김동규를 보며 샤프나 돌려댔다. 1학기엔 못 이긴 서하늘 이기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건 알겠는데 문득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근데 너 갑자기 무슨 계기로 공부 시작한 거야?”

“나?”

“첨엔 진짜 구구단도 제대로 몰랐잖아. 나야 뭐 아기 때부터 숫자 놀이 좋아하고 수학 문제 푸는 거 좋아해서 의대 갈 생각으로 과학고 준비 하느라 이런다지만 너는 서하늘 모를 때부터 갑자기 그랬는데 그러려면 계기가 있었을 거 아냐.”

“너 과학고 가?”

“엥 몰랐어?”

“몰랐어.”

김동규는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처음 듣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너랑 내가 시험 기간을 작년부터 같이 보냈는데 그걸 몰랐다니 살짝 섭섭해지려고 그러네.”

“미안.”

“미안할 거까진 없고.”

“나도 갈래.”

“뭐? 이미 접수 진작에 끝났어. 1학기에.”

“그럼 우리 같은 학교 못 가?”

“아마도? 그리고 원서 넣었다고 해도 나는 오래 준비했는데 너는 아니니까 합격은 좀 힘들겠지.”

“아…….”

우리 학교 학생의 절반은 바로 옆에 붙은 세문고등학교로 진학한다. 자사고라 입학이 빡세긴 한데 그만큼 세문고 보내려고 이 근방 중학교 중에 시험 난이도가 제일 높았다.

“나는 너 당연히 세문 갈 줄 알고 나도 거기 준비하느라 열심히 공부한 건데…….”

“아 진짜? 어차피 다른 데 가도 못 보는 거 아니니까 세문 가서도 열심히 해. 지금처럼만 하면 진짜 거기 가서 1등 할 수도 있겠다.”

“…….”

“가서도 계속 연락해 알겠지? 나도 연락할게.”

내가 김동규한테 과학고 준비한다는 걸 꼭 알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올해는 같은 반이라 조금만 신경 쓰면 내가 과학고 준비하는 건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쉬는 시간에 이어폰 꼽고 문제집 푸느라 지가 몰라놓고 김동규는 삐진 티를 엄청 냈다. 많이 속상해하는 거 같아서 몇 번 말을 더 걸었는데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는 걸 보고 나도 입을 다물었다. 삐지려면 삐져라, 이 삐돌이야. 아까보다 현저히 느려진 속도로 문제를 풀던 김동규는 12시가 되자 인사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뒤도 안 보고 가더니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땐 김동규의 아침 인사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그렇게 삐진 티를 냈대. 하루에도 여러 번 보내오는 김동규의 메시지는 딱히 답장을 바라고 보내는 게 아니라 그냥 읽고 덮었다.

[오늘 하늘 진짜 파랗다 구름도 한 점 없어 하늘 너무 예뻐서 하늘만 봐도 기분 되게 좋아져〉

암막 커튼을 걷고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을 비비며 파란 하늘을 응시했다. 정말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진하고 맑은 색의 하늘이었다.

중고 서점에 가면 절판 도서를 살 수 있단 말에 김동규랑 같이 서점에 가기로 했다. 서점 가는 길에 김동규 집이 있어 오랜만에 놀러 갈 겸 해서 원래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서둘렀다. 맛있는 거 만들었다고도 하고. 뭘 만들었는지 궁금한데 새로 시도한 거란 말만 하고 알려주질 않아 기대치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김동규네 집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뭔가 깨지고 욕하는 소리였다. 작년에 머리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워 있던 김동규가 떠오르면서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켠 채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이 조금 떨렸지만 모르는 척 도망칠 순 없는 일이었다. 나도 김동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로…….

문을 열자마자 아저씨에게 멱살 잡혀 흔들리는 김동규가 보였다. 발아래로는 피가 흥건해서 휴대폰을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김동규에게 달려갔다. 아저씨는 좆 됐다며 작게 욕을 하더니 김동규를 마저 한 대 때리고 밖을 나갔다.

“시, 신고, 아니 일단 119부터…….”

신발장에 떨어진 휴대폰을 들어 119에 전화하려는데 김동규가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말렸다. 기어온 김동규의 뒤로 빨간 줄 두 개가 엉망진창으로 이어져 있었다. 저 정도로 피를 흘리면 죽는 거 아닌가?

“그럼 우리 엄마라도…… 아니야 아빠 병원이 더 가까우니까 아빠한테 전화해서 발 치료해달라고 그러자.”

“안 돼.”

“왜 안 돼? 지금 이게, 이게…… 그럼 아빠, 아니 이모님이라도…….”

“절대 안 돼! 싫어. 그랬다간 나 여기서 살지도 못하고 청소년 보호센터 가야 돼. 그러기 싫어, 하림아.”

자꾸만 안 된다는 김동규를 붙잡고 나는 거의 빌었다. 죽으면 어떡해, 빨리 병원에 가자 제발. 김동규는 내 허릴 껴안고 고개를 저었다. 한참 우리 둘이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알겠어. 여기 정리부터 하자. 뭐 어떻게 하면 돼?”

나는 김동규가 알려주는 대로 깨진 유리들을 버리고 청소기로 바닥을 청소하고 수건으로 피도 닦았다. 그리고 김동규가 자기 발에서 유리 조각 빼는 걸 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발도 그렇고 김동규 상태도 그렇고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몰라 이마를 짚었더니 열이 올라 뜨거웠다. 김동규가 병원에 죽어도 가기 싫다 하니 일단 조금 쉬게 하고 병원에 데려갈 생각으로 침대에 눕혔다.

문제는 병원에 가기 전까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였다. 옛날에 읽은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시리즈에서 조난당했을 때 누가 열이 나서 아프면 체온으로 식혀줘야 한다고 한 게 떠올라 옷을 벗고 김동규를 껴안았다. 삼투압 현상도 열의 이동도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이동하는 거니까 이러고 있으면 김동규 열이 내 쪽으로 오게 되겠지.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세게 뛰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버티던 김동규가 잠에 들고 사방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내 심장이 조금 진정됐다. 여전히 둥둥거리는 심장박동이 이상해 나보다 큰 김동규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맨살이 더 닿게 했다. 도대체 아줌마는 언제 오시는 거지. 초침 소리를 세서 시간을 가늠하려고 했는데 자꾸 100을 넘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 세어야 했다. 아주 어릴 때를 빼곤 누군가와 이렇게…… 이러고 있는 게 너무 어색한 탓이었다.

“동규야!”

“안녕하세요.”

“하림이 너 지금…….”

김동규 아줌마는 자기 아들을 챙기기 전에 발가벗고 있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차 싶어 상황을 설명했다. 김동규가 열이 너무 올라서 식혀주려고 인터넷에서 본 대로 체온내리려고 최대한 맞닿게 하고 있었다고. 엄청 당황해서 제대로 설명했는지 모르겠다. 내 횡설수설한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줌마가 내 등을 찰싹 때리며 화를 냈다.

“똑똑한 애가 그것도 몰라? 그건 열이 올랐을 때가 아니라 춥거나 저체온인 사람한테 그렇게 하는 거야! 얼른 옷 입어, 감기 걸리겠다.”

벗어 놓은 옷을 빛의 속도로 입었다.

“119에 전화할까요?”

“아니, 그냥 택시 타고 병원 가면 돼. 하림이 너는 집에 가.”

“네?”

“못 볼 꼴 보여서 미안하다 아줌마가. 동규는 아줌마가 병원에 잘 데려갈게. 구급차 부르면 상황이 복잡해져서 그래.”

“그래도 얘 아줌마 혼자서 택시 태우기도 힘들 거고…… 응급실까지도 얘를 어떻게 데리고 들어가요? 저도 같이.”

“아니. 할 수 있어. 택시 아저씨 불러서 둘이 옮기면 돼. 오늘 일은 동규도 부끄러울 테니까 모르는 척해주는 거다, 알겠지? 대신에 병원 가면 아줌마가 연락할게.”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고집부려 가기가 뭐해 알겠다고 하고 나왔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던 와중 아저씨 하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김동규네 집으로 들어갔다. 아줌마랑 마주칠까 봐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어차피 3층이라 1층까진 금방이었다. 택시 아저씨가 키가 좀 작긴 해도 덩치가 있어서 다행이다. 김동규 잘 들 것같이 생기기도 했고.

나는 2동 바로 앞에 세워진 택시에서 멀찍이 떨어져 김동규가 택시 타고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주머니에 쑤셔 넣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 미친.”

몰랐는데 휴대폰 액정이 깨져 있었다. 이걸 이제야 발견하다니. 아까 진짜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다.

택시는 이제 막 떠나 연락이 오려면 한참 남았는데도 나는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수시로 잠금 화면을 풀어댔다.

나도…… 택시를 잡아야겠다. 얼른 집에 가야지. 존나 기운 빠지고 긴장이 풀려 몸이 축축 처지는 것 같다. 택시 잡으려고 길가로 나왔다가 또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디 병원으로 갔을까.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이 어디지. 지도를 켜 가까운 병원을 검색했다. 6분 거리에 A병원이 있다. 그렇다면 금방 도착했을 거라 전화가 오고도 남았을 텐데.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휴대폰을 확인하고 또 손을 뻗었다가 휴대폰을 확인하고. 불안해서 아무래도 가만히 앉아 택시를 타고 갈 수가 없어 집까지 걸어갔다. 땀에 젖은 채로 찬바람을 맞아 춥긴 했지만 길거리를 걷고 있으니 불안한 게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김동규네 집에서 우리 집까지는 걸어서 장장 40분이 걸리는 거리였고 30분쯤 걸었을 때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어 하림아, 다행히 꿰맬 정도로 심한 상처는 없대. 상처가 많긴 한데 깊은 건 별로 없다더라. 이틀은 입원해서 걷는 대신 휠체어 생활하고, 퇴원해서는 목발 짚으면 된대. 동규 도와줘서 고마워. 놀랐을 텐데 푹 쉬구 담에 아줌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집에 와서 씻을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잠깐만 누워 있다 일어나야지 했다가 옷도 그대로 입고 자버렸다. 그리고 감기몸살에 걸려 죽다 살아났다. 몸살은 좀 괜찮아졌는데 목감기가 떨어지질 않았다. 엄마는 더 쉬라 그랬지만 열은 안 나서 오전 수업만 들을 생각으로 등교를 했다. 어차피 기말고사도 끝나서 다들 영화 보거나 자거나 예능 보거나 게임하거나 하면서 놀자판이라 그냥 더 쉬어도 상관은 없었는데 김동규가 걱정하는 메시지를 100개도 넘게 보내와서 생존 신고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자. 괜찮지?”

나보다 더 먼저 등교해 책상에 앉아 있는 김동규의 손을 잡아 이마 위에 올렸다. 내 이마보다 김동규 손이 더 뜨거웠다.

“목소리가 완전 환자 목소린데.”

“목발과 함께하는, 네가 할 소린,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기침도 많이 하잖아.”

“안 죽어.”

기침을 좀 심하게 하긴 했지만 하면 오히려 가래가 나와서 시원할 정도지 폐가 찢어질 것 같다거나 하진 않았다.

세 시간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으나 수업이 시작되자 난방을 위해 히터를 트는 바람에 너무 건조했다. 기침이 쉴 새 없이 터지는 건 물론이고 콧물도 줄줄 나왔다. 분위기 잡고 공포영화 보는데 내 기침 소리 때문에 자꾸만 흥이 깨지기도 했고 콧물에 목에 난리도 아니라 교실을 나왔다. 보건실에서 잠이나 자다가 점심시간에 집에 가야지.

“존나, 죽겠다…….”

김동규도 봤고 내일부터는 그냥 집에서 푹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계단을 막 내려갈 때였다. 탁탁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목발 소리였다. 기침이 너무 심하게 나와서 목도 아프고 가슴과 배도 당겨왔다.

“하림아!”

“어, 괜찮…….”

“서하림!”

이러다 토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침하다 눈을 떴더니 병원이었다.

“이모님, 제가 여긴 왜…….”

“기침하다 발 헛디뎌서는 계단에서 굴렀대. 동규가 마침 같이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

“아…….”

기억을 더듬어보니 김동규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것 같길래 그쪽으로 몸을 돌려서 괜찮다고 얘기하려다가 기침이 엄청 나왔고 발을 잘못 디디면서 그대로 계단에서 쓰러졌다. 김동규가 목발을 던졌던 것 같기도 하고.

“고마워. 놀랐겠다.”

김동규를 고개를 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많이 놀랐나 본데.

“가벼운 뇌진탕이 있어서 이번 주는 무조건 안정이야. 그리고 팔목이랑 종아리 인대가 살짝 늘어났대. 4주는 꼼짝없이 깁스 신세야. 어떡하지? 당장 이번 주말에 면접이 두 군데나 있는데…….”

“아 맞다. 면접 있죠. 아…….”

“미안해.”

“동규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맞아. 네 덕에 안 죽었다 야.”

나랑 이모님의 말에도 김동규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아니 도대체 왜? 못 구해줘서 미안하다는 건가?

“동규가 눈앞에서 친구가 구르니까 많이 놀랐나 보다. 덩치만 컸지 애네 애야.”

“야, 울지 마.”

“에휴, 쯧쯔쯔…… 이렇게 여린 애를 에휴.”

안 다친 손을 뻗어 김동규의 무릎을 토닥였다. 그러자 김동규가 손을 떼고 휴지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더니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작게 웃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 근데 면접 진짜 어떡하지. 이모님 저 휠체어 타고 가는 거 의사 동의서 얻어서 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병원이랑 학교에 물어봤어. 답 오면 바로 알려줄 테니 기다리렴.”

이모님 편하게 저녁 드시라며 김동규가 내 저녁 식사를 도왔다. 하필 다친 손도 오른손이다.

“김동규.”

“응. 아 해.”

고사리 무침에 멸치볶음, 김치를 삼키고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김동규를 불렀다. 고개를 살짝 젓고 물을 마셨다.

“나 지금 좀 미친 생각이 들었는데.”

“뭔데?”

“갑자기 면접 가기가 싫어졌어.”

“……왜?”

“의대는 일반고든 과학고든 갈 수 있는 건데 굳이 힘들게 힘들게 이런 몸을 끌고 면접을 봐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어. 조기 졸업 메리트도 인간 수명이 100살 넘긴 이 시점에 1년 빠르든 늦든 무슨 상관인가 싶어지고.”

이모님이랑 할아버지가 들었다간 거품 물고 쓰러질 얘길 김동규가 덤덤한 얼굴로 들어줬다. 그래서 계속 미친 소리가 줄줄 나왔다.

“생각해 봤는데 진짜 굳이 과학고에 목매달 필요가 있나? 근데 이래놓고 내년 돼서 존나 후회하면 어떡하지. 막 편입 준비하고.”

“글쎄. 너 좋을 대로 맘 가는 대로 하는 게 제일 좋지. 과학고는 그…… 기숙사 생활해야 하지 않아?”

“맞아.”

“그러면 이런저런 제약도 많을 거고.”

“그렇지. 계속 단점 말해봐.”

“과학고 가면 중학교에서 전교 1등 하던 애들도 막 반에서 중간 겨우 하고 그런대.”

“근데 난 가면 1등 할 자신 있어.”

“아…… 그러네. 맞아. 너는 그럴 거야.”

“머리 아프고 어지럽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 밥이나 먹을래.”

이틀을 푹 쉬어도 머리가 계속 어지럽고 구토 증세가 나아지질 않아 의사도 면접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몸이 안 좋으니 의지가 꺾인 나는 과학고와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마음을 접었다.

몇 달 뒤에 불현듯 국제고 편입을 알아본 건 의사가 진짜 내가 되고 싶은 건지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게 되면서였다. 실제로 의사로 살고 있는 엄마, 아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게 제일 컸다.

아빠는 의사란 직업이 성적이 아깝고 부모님이 하래서 한 거라 굉장히 현실적인 얘기들을 해줬다. 피 보기 싫어서 수술을 거의 안 하는 내과, 그중에서도 내분비내과를 선택한 거고 의사라는 직업은 굉장히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장인어른 재단에서 한 자리 받고 월급만 받고 싶다는 둥 개인 병원 차려서 월급 닥터들 쓸 거라는 둥.

엄마는 누가 봐도 의사가 천직인 사람이었고 맨날 수술하느라 바쁜데 해외에도 수시로 나가, 학생들도 가르쳐, 책도 쓰고 여러 다큐멘터리나 드라마에 자문도 하느라 아빠랑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줬다. 엄마와 아빠랑 얘길 나누면 나눌수록 의사는 나랑 안 맞는 것 같았다.

편입을 하든 유학을 가든 일단 의대는 아닌 쪽으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동규는 고등학교에 올라와 1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전교 3등을 했고 처음으로 서하늘을 이겼다. 기말고사에선 2등으로 올라왔다.

[하림아〉

[뭐해〉

[저녁 먹었어?〉

[나는 차돌박이 먹었어〉

[고추장으로 양념해서〉

[차돌박이는 너무 얇아서 두 근은 먹어줘야 돼〉

김동규에게 온 메시지를 보고 딱히 답장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읽기만 했다. 그래도 끊임없이 김동규는 시시콜콜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냥 잘까 하다가 자기 전에 간단하게 답장했다.

〈이번 내기 내가 이길 듯 나 다섯장 남음]

〈넌 끝났어]

나는 나 스스로 입맛이 꽤 까다로운 편이라는 걸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는 게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 맛있다고 환장하는 것들은 죄다 별로였고 집 밖에서 사 먹는 것들도 마찬가지여서 가끔 푸드 칼럼니스트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웃긴 생각도 하곤 했다.

졸업한 세문중과 지금 다니고 있는 세문고등학교는 재단이 같은 곳이라 그런지 급식 업체도 같은데 SNS와 인터넷에서 꾸준히 회자될 정도로 급식이 맛있고 잘 나오기로 유명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영양사 선생님이 2년 전에는 장관상도 받았다. 조리사분들도 합이 좋고 열정이 대단했다.

하지만 모든 대량생산에는 흠이 있기 마련이고 많은 양의 요리를 한 번에 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는 어쩔 수 없어서 종종 급식마저 잘 먹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김동규가 귀신같이 알고 간식을 챙겨주거나 하교하고 우리 집에 꼭 들러 이것저것 만들어주곤 했다. 간식도 물론 자기가 만든 거였다.

이런 까다로운 입맛을 갖게 된 데에는 할아버지와 이모님의 공이 무척 컸는데, 나는 유치원 졸업하기 전까지 시중에서 판매하는 과자나 음료수, 사탕, 젤리,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다닐 때도 입학 전부터 담임선생님에게 그런 것들을 먹이지 말라고 얘길 해놔서 친구 생일 때도 이모님이 따로 만들어 싸준 간식들 그러니까 야채나 과일, 사탕수수에서 뽑아낸 것들로 만든 유기농 수제 과자, 과즙 100%의 생과일 주스 같은 것만 먹어야 했다. 김치도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씻어서 먹었다. 진짜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었다.

여섯 살 때는 그런 내 앞에서 곰돌이 젤리나 아이스크림을 입에 털어 넣으며 놀려대는 서하늘이랑 엄청 많이 싸웠다. 물론 그 옆에서 얄밉게 거드는 서하늘의 오빠 서하준이 백 배는 더 미워서 하준이 형 팔도 물어뜯어 피도 봤다.

아직도 그렇게까지 했었어야 됐나 유난 떨 것도 참 없지 싶긴 한데 한편으로는 미식가의 혀를 갖게 된 것에 감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맵고 시고 짜고 달고 쓰고 식감이 이상하거나 향이 너무 강한 것들은 다 싫어하는 내가 특히 참을 수 없는 건 바로 매운맛과 단맛이다. 매운 건 사실 미각의 영역이 아니라 통각의 영역이긴 한데 어쨌든 매운 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고 단 거는 혀가 어느 정도의 허용치를 넘기면 본능적으로 거부를 했다. 그래서 1년 중 제일 힘든 날을 꼽으면 밸런타인데이와 빼빼로데이 같은 날이었고 아무리 입이 심심해도 그런 걸 먹는 일이 없었다.

그랬는데, 김동규는 어떻게 내 입에 딱 맞는 것들만 쏙쏙 만들어내는 신기하고 비범한 능력을 가졌다. 공부하기 바빠 취미도 휴식도 공부라는 농담을 반쯤 믿어주기로 하고, 대체 요리는 언제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머릿속으로 레시피 따라 시뮬레이션 돌리면 굳이 몇 번 연습 안 해도 돼. 엄마 쉴 때 어차피 밥해야 하니까 그때 만들어보는 걸로 연습은 충분하고. 베이킹은 과학실험 같아서 칼 같은 계량과 시간만 맞음 되고.’

뭘 만들어 먹어본 적이 있어야 공감을 하든 태클을 걸든 했을 텐데 내가 모르는 부분이라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걔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뭐.

김동규의 손에서 탄생하는 각종 디저트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건 파베 초콜릿과 크레이프 케이크, 크렘 브륄레. 도대체 지구상 어디에 존재하는지 너무 궁금한 별로 달지 않은 초콜릿을, 아니 달지 않은 초콜릿이라니 이보다 더 아이러니 한 말은 없겠지만 아무튼 김동규는 진짜로 안 단 초콜릿을 구해 이것저것 만들었고 그중에서도 김동규의 쫄깃한 파베 초콜릿이 제일 압권이었다.

크레이프 케이크는 또 어떤가. 생크림은 별로 달지 않고 딱 내 혀에 기분 좋을 정도로 달달해서 곧잘 먹곤 했는데 내가 생크림을 좋아하니까 일반적인 크레이프 케이크보다 생크림을 더 넣어 만들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엄청 맛있다. 크렘 브륄레도 장난 아니다. 위에 올라가는 캐러멜도 얇게 잘 만들고 커스터드 크림이 진짜, 먹고 있다 보면 태어나길 잘했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저거 두 개 말고 바닐라 푸딩도. 그리고 시나몬롤이랑 에그타르트도. 자몽에이드랑 딸기우유랑 견과류에 반건시를 싸서 만든 한과랑 라즈베리 쿠키도 맛있고…… 사실 김동규가 만든 건 맛없는 걸 찾는 게 더 빠른 수준이긴 하다.

생각한 김에 딸기우유 먹어야겠다. 읽고 있던 비문학 지문이 하필이면 현대인의 지나친 칼로리 섭취에 대한 내용이라 생각이 이렇게까지 흘러갔다.

“뭐야. 얜 또 왜 이렇게 많이 보냈대.”

한 시간 반쯤 던져두었던 휴대폰 잠금 화면을 풀자 메시지가 300개도 넘게 와 있었다. 또 김동규 할 짓 없이 잉여 짓 했네. 이래놓고 쉬는 날에도 공부를 하고 공부하는 게 쉬는 거라고. 보통 이렇게 엄청 보낼 때 하는 말은 영양가 없는 게 대부분이라 대충 슥슥 넘기며 아래로 내려왔다. 김동규가 만들었던 딸기청을 잔에 덜고 우유를 넣어 섞었다. 이 컵엔 숟가락으로 엄청 크게 두 번을 넣으면 딱 맞았다.

반쯤 내리다가 나머지는 읽기 귀찮아 그냥 전화를 걸었다.

-어 하림아!

“딸기청 거의 다 먹었어.”

-그래? 내일 딸기 사서 만들게. 아, 아니다. 아주머니보고 딸기 맛있는 거 갖다 달라고 하는 게 먼저구나. 여름이라 그냥 마트 가서 사면 맛이 없거든.

“맛있는 딸기는 어디서 파는데?”

-나도 몰라.

김동규의 300개가 넘는 메시지들처럼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지금 뭐 하고 있었냐는 얘기가 나왔고 나는 비문학 풀다가 네가 만들어주는 것들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진짜? 와…… 너무 좋다.

“뭐가?”

-그냥.

“그냥?”

-별거 아니야.

“…….”

이럴 때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 뭐지 싶은 말을 해놓고 그게 뭔지 다시 한번 물으면 맨날 어물쩍 넘어가는 때. 몇 번을 물어도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질 않는다. 얘기하는 문맥상 내가 자기 생각을 해서 좋다는 것 같은데 나를 좋아하는 게 맞으면 그건 별거 아닌 게 아니라 큰일이지 않나. 그런데 그냥 별거 아니라고 넘겨 버리니까 내가 생각한 게 아닌가 싶고, 그러면 내가 가정한 ‘쟤가 날 좋아함’이란 전제도 무용지물이 된다.

짜증 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전화 끊을까. 끊고 싶다.

-아 맞다. 너 주려고 아까 저녁 먹기 전에 파베 초콜릿 만들었어.

“……그래?”

-응. 메시지 안 봤구나.

“너무 많이 보냈더라고.”

-내일 학교 끝나고 너네 집에 들를게.

“파베 초콜릿 다 좋은데 학교에서도 먹을 수 있었음 좋겠어. 수업 시간에.”

-먹게 해줄까?

“어떻게? 실온에 오래 두면 별론데.

-아이스팩 깔면 돼. 내일 한 번 1교시에 도전해 볼래? 아래 세 개 위에 세 개 해서 여섯 개 들어가는 작은 통에 초콜릿 넣고 그 아래에 아이스팩 놓고서 올려두고 먹으면 돼.

“크게 효과 있을까?”

-나 공부할 때 종종 그렇게 하고 먹는데 괜찮아.

“콜. 근데 1교시까지밖에 안 가? 아이스팩 차가운 거 유지되는 시간은 얼마쯤 돼?”

-정확하게는 재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이스팩이 크면 오래 가겠지?

“약간 베라 드라이아이스 느낌인가.”

-맞아. 근데 파베는 그 정도로 바싹 안 얼려도 돼서 아이스팩 작은 거 위에 올려둬도 나쁘지 않더라고.

“으응.”

더 이상 대화는 없었지만 나도 김동규도 전화는 끊지 않았다. 서로의 숨소리만 들릴 듯 말 듯 했다. 나는 다 마신 컵을 만지작거렸다.

“……끊을까?”

-피곤해?

“아니.”

-그럼, 그냥 아무 말이나 해줘.

“뭐야.”

-그냥. 목소리 듣기 좋으니까?

누워 있던 건지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자고 있었어?”

-잔 건 아니고 그냥 누워 있었어. 지금 막 앉았어.

무슨 얘길 하지.

“……수업 시간에 뭐 먹어도 되긴 하잖아.”

-응.

“근데 초콜릿 어떻게 먹지.”

-어떻게? 그냥 먹으면 되지. 먹기 좋게 잘게 잘라줄게.

아 순간 내가 말해놓고도 존나 바보 같아 깜짝 놀랐다. 초콜릿은 먹는데 냄새가 많이 나거나 시끄럽지도 않아 대놓고 핥아 먹어도 괜찮은 간식인데. 당황했지만 최대한 아닌 척을 하며 말을 붙였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 가루 겉에 묻어 있잖아. 그거 때문에 어떻게 먹냐는 거였어. 손 씻으러 화장실 가야 하나?”

-아…….

“초콜릿 먹던 애가 갑자기 화장실 간다고 하면 선생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음…….

“그렇다고 빨아 먹을 수는 없잖아. 손에 묻은 거를.”

김동규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 안 그래도 귀에 붙인 휴대폰을 더 바짝 붙였다. 굉장히 논리적으로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말이 없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내가…… 일회용 플라스틱 작은 포크…… 준비할게. 아니면 물티슈 써도 되고. 뭐가 좋아?

“포크.”

-그래 그럼. 그리고…… 먹을 때 말이야.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는데.

“응.”

김동규는 뜸을 들였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뭐냐고 채근해도 잠깐만, 하고 말았다.

“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아 미안.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먹는데?”

-별건 아니고.

“응.”

-먹을 때…… 입천장에 초콜릿을 붙여. 그리고…… 입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럼 혀 중간쯤에 초콜릿이 딱 닿거든.

“응.”

-그러면…… 혀를 살짝만 움직여서…… 혀끝으로 말고. 혀 중간을 이용해야 돼. 그걸…… 중간 부분으로 살살…… 초콜릿 건들면서 음, 그러면 조금씩 녹거든. 그냥…… 입천장에 붙이고 가만히 있어도 녹긴 하는데…… 혀로 살짝살짝 건들면 딱 먹기 좋게 녹아.

“쫄깃한 게 매력인 파베초콜릿을 굳이 그렇게 녹여 먹어야 하는 이유는 뭔데?”

-그렇게 먹으면 더 맛있으니까. 음, 내일 한번…… 시도해 봐.

“너 진짜 자다 일어났지.”

-왜?

“목소리 되게…… 늘어져서.”

-아……. 음.

자다 일어난 게 아니면 어제 늦게 자서 졸린 게 분명했다. 조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새벽에 자다 깼을 때를 연상케 했으니까.

“그렇게 열심히 메시지 보낼 시간 있으면 잠이나 자.”

-…….

“시간 쪼개서 공부한다며.”

-……응.

“너 그거 다 거짓말이지. 나한테 몇백 개 보낼 시간에 문제를 하나 더 풀겠다.”

-……으응.

“네 목소리 듣고 있으니까 내가 다 졸려. 나 공부하다 잠깐 나온 거라 다시 올라가야 돼.”

-아…… 그래.

“끊는다. 초콜릿 까먹지 말고 가져와.”

-아, 잠깐만 하림아.

“왜.”

-자, 잠깐만.

“뭔데?”

김동규는 대답이 없더니 기침을 몇 번 했다.

“야, 감기 걸렸어?”

-아니. 됐어. 끊어도 돼. 나도 씻고 공부해야겠다.

“그래 그럼. 내일 봐.”

다음 날 김동규는 얼굴에 반창고 몇 개를 붙인 채 나타났다. 어제 그렇게 전화 끊고 아저씨가 또 대판 지랄을 해댔는지 김동규 눈도 시뻘겠다. 잠도 제대로 못 잤나.

“여기. 어제 알려준 대로 먹어봐.”

괜찮냐고 물어보려는데 김동규가 먼저 말을 선수 치는 바람에 못 물어봤다. 내 손에 들어오는 작은 포장용 통과 아이스팩을 쥐여주고 김동규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포크는 뚜껑에 비닐 포장된 걸 붙여 놨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뜯어 하나를 미리 먹었는데 적당히 달달하고 쫀득해서 좋았다. 이 맛있는 걸 녹여 먹는 김동규가 이상했지만 그렇게 하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니까 한 번쯤 시도해 볼 만은 했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며 작은 주사위 같은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입천장에 붙이고 입을 다물자 입속 온도 때문에 정사각형의 초콜릿이 뭉개지는 게 느껴졌다. 그냥 씹어 먹을 때보다 훨씬 오래 입에 남아 있었고 혀로 살살 건들자 내 침이 초콜릿이라도 된 것처럼 은은한 단맛이 온 입안을 감돌았다.

애도 아니고 이렇게 초콜릿을 사탕처럼 녹여 먹는 상황도 웃긴데 저 커다란 애가 초콜릿 조각 하나 입에 물고 태연한 얼굴로 녹여 먹을 걸 상상하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자꾸 피식피식 웃어대서 옆자리 친구가 나를 몇 번이나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아, 진짜 초콜릿 달다. 딱 기분 좋게.

세성전 준비 때문에 점심시간을 전부 바치고 학교가 끝나고 나서도 한 시간 정도 학교에 남았다. 야자나 방과 후 수업 듣는 애들과 세성전 축구팀을 빼고는 학교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굳이 남아 있는 건 전교에서 김동규 하나뿐이었다. 24시간 중 20시간을 공부에 투자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매번 뻔뻔스럽게 하는 것 치고 굉장히 태평한 모습으로.

김동규는 연습 경기가 끝날 때까지 등나무 아래 앉아서 영어 단어 책을 보다가 이따금 고갤 들어 우리를 보다 했다. 그러다 연습 경기가 거의 끝날 때가 되면 잠시 사라졌다가 얼음 컵에 콜라를 담아 내게 건넸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 같아.”

“뭐가?”

“공부할 시간 아까워 죽겠다는 놈이 맨날 여기서 날 기다리긴 왜 기다려?”

대답 대신 김동규는 자기 손바닥만 한 영어 단어 책을 흔들었다.

“그걸 굳이 왜 운동장에서 하냐고.”

“그냥. 나 축구 좋아해.”

“뻥친다. 축구 좋아한다면서 체육 시간에 억지로 하는 거 말고 공 차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들켰네.”

뭐야. 김새게. 김동규는 어깨만 으쓱 하고 말았다. 또 헷갈리게 만들어 놓고 아무 말도 없고. 말이 많은 애면 같이 생각 없이 아무 말 대잔치 하면 되는데 김동규는 그런 편이 아니었다. 괜히 이런 식으로 말해놓고 입을 딱 다물어 버리면 그동안 나 혼자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자꾸 들어 혼란스럽다. 짜증 나. 누가 바닥에 버리고 간 스프라이트 캔을 발로 뻥 차도 속이 시원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실례인 줄 알고 있는데도.

-축구 경기 이겼다면서? 엄마가 학원 빼지 말고 가래서 못 갔어. 못 봐서 너무 아쉽다.

나 좋다고 티를 엄청 내던 학원 친구에게 모처럼 전화를 걸었다. 세성전 끝나면 할 말 있으니 전화 달라고 했던 말이 뭘 의미하는지 뻔히 읽혔지만 감정이라는 게 사귀다 보면 생길 수도 있고 그런 거니까. 오래된 부부는 사랑이 아닌 정으로 산다고도 하고.

-집에 가는 중이야?

“응.”

-옆에 누구 있어?

경기 이겼다고 다 같이 어디 가진 않고 가고 싶은 애들만 모여 뒤풀이를 하러 갔다. 어차피 내일 축제도 있어서 대부분 뒤풀이는 축제 끝나고 했다. 내가 밖에서 뭐 먹는 걸 싫어하는 걸 다들 알고 있어서 예의상 같이 가자고 물어볼 뿐 진짜로 내게 같이 가자고 하는 애는 없었다. 대신 보온 통에 뜨거운 보리차를 담아 원정경기를 따라온 김동규랑 집에 가는 길이었다.

“아니.”

택시 타고 가도 되는데 S대부고에서 우리 집까지 30분 정도 거리라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저기…….

딱 봐도 고백의 타이밍이었다. 부끄러운 건 알겠는데 용기 있게 얼굴 보고 얘기하지 않는 건 좀 그랬다.

-하림아. 갑작, 스러울 수 있겠지만.

고백의 순간 바로 직전. 나는 얠 좋아하지도 않지만 몇 초 뒤면 고백을 받는다는 사실 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고백 한두 번 받는 거 아닌데 새삼스럽고 참 이상하지. 옆에 같이 걸어가는 김동규는 왜 또 아무 말이 없는 거며 얘는 사설이 왜 이렇게 긴지도 모르겠고.

전부터 많이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로 시작하는 긴긴 고백을 대충 흘려들었다. 통화하는 나를 배려하는 건지 조용한 김동규를 슬쩍 훔쳐봤다. 평소랑 같은 덤덤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혹시라도 고백이 새어나갈까 봐 통화 소리를 제일 작게 줄였다. 하품하며 팔을 긁적이는 걸 보니 괜히 줄였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나랑 사겨 줬으면 좋겠다고. 나 진짜 너 많이 좋아해.

난 지금 심장 터질 것 같은데 너는 무슨 생각하고 있어?

-지금, 지금 바로 대답 안 해도 돼! 시간 필요하면 거절하는 거라도 나중에, 나중에 말해줘!

“……아니야. 그래. 그러자.”

-뭐라구?

“그러자고.”

지금의 떨리는 마음은 고백의 여파다. 지서윤은 친한 친구고 좋은 애고 친절하고 나 많이 좋아해 주고…….

-허얼. 아, 잠깐. 진짜? 진짜지 하림아? 거짓말 아니지?

“응응. 거짓말 아니야.”

-아, 어떡해! 아악! 나 학원 끝나고 이따가 밤에 다시 전화해도 돼?

“응.”

-그럼 이따 전화할게! 우승한 거 축하하구, 고마워! 사랑해!

이렇게 충동적인 결정을 한 적은 살면서 두 번째였다. 터질 것 같던 심장이 계속 쿵쾅거려 휴대폰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택시 타자.”

“그래.”

사랑해. 사귄다고 한 지 10초 만에 그런 말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김동규가 가져온 보리차를 택시 탄 동안 다 마셨다. 목이 타고 입이 말라 그 큰 통에 든 걸 다 마시는 줄도 몰랐다.

집에 도착해서 휴대폰 전원을 켜자 온갖 이모티콘으로 난리 난 지서윤의 메시지가 한가득 와 있었다. 그걸 다 읽고 나서야 미안함이 물밀 듯 밀려왔다. 한창 수업 중일 지서윤의 하트 가득한 메시지에 조금은 우울한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근데 서윤아]

〈우리 사귀는 거 비밀로 하자]

짧은 문장을 얼마나 썼다 지웠는지 모른다. 수업 중 아니었나? 보내자마자 1이 사라졌다. 전원을 꺼버렸다. 학원 10시면 끝나니까 그때 맞춰서 키면 되겠지.

저녁이 코로 들어가는지 목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먹었다. 밥도 반도 넘게 남겼다. 9시 반쯤에 전원을 다시 켜고 심호흡을 했다.

[헐 왜?〉

[ㅠㅠ〉

[...........ㅠㅠㅠ〉

왜긴 왜야. 그냥 비밀로 하고 싶어서 그러지.

10시 되자마자 울리는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나는 섭섭하다는 지서윤을 30분 동안 달랬다. 100일 날 친구들에게 얘기하자며 겨우 달랜 뒤 전화를 끊고 나자 기운이 진짜 다 빠졌다. 원래 연애라는 게 다 이런 건가. 나는 다음번에 속상한 일 있으면 한 시간 넘게 징징대야지.

바로 다음 날 있던 축제 예술제에서 지서윤이 내 머리를 만져줬다.

“영화부 상영회 때문에 바쁘지 않아?”

“나는 촬영팀이라 잠깐 나와 있어도 돼. 근데 얘는 왜 여기 있어?”

지서윤이 말한 ‘얘’는 김동규였다. 김동규는 좀 전에 도착해 내 앞에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 있는 중이었다.

“내 선물 가져와서. 너도 먹을래?”

“뭔데?”

얼추 머리나 얼굴 정리가 다 끝난 것 같아 케이크 상자를 끌어와 열었다. 포크가 하나밖에 없다.

“어…… 포크 하나밖에 없어.”

“괜찮아. 하나로 나눠 먹으면 돼. 간접 키스하고 좋지.”

지서윤이 포크 포장을 뜯어 크레이프 케이크를 잘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무표정한 김동규를 한 번 보고 입을 벌렸다. 지서윤도 곧바로 케이크를 먹더니 맛있다며 눈을 토끼처럼 크게 떴다.

“와 대박. 진짜 맛있다! 이거 어디서 산 거야?”

“…….”

“산 거 아니고 직접 만든 거. 김동규 요리도 잘하고 이런 것도 엄청 잘 만들어.”

“와 진짜? 대단하다! 하림아, 아 해. 이번엔 좀 크게. 맛있는 건 많이 먹어야 제맛이지.”

좀이 아니고 많이 큰데. 입 가득 찬 부드러운 케이크를 씹어 먹으며 김동규를 관찰했다. 별 반응이 없는 게 이럴 때 보면 내가 잘못 짚은 것 같단 말이야.

“지서윤! 영화부 다 모이래!”

“왜?”

“영화부 선배가 놀러 와서 인사하자는데? 선생님이랑.”

“아 뭐야. 난 안 갈래.”

“그러지 말고 가자. 존나 예쁘고 친절한 선배님이래. 맛있는 것도 사 오고.”

“……그래?”

지서윤은 내 입에 또 케이크를 한가득 물려 놓고 자기도 크게 한 입 먹더니 선배를 만나러 나갔다. 지서윤이 앉아 있던 의자에 김동규가 앉아 케이크에 엑스칼리버처럼 꽂아 둔 포크를 빼 작게 잘랐다.

“그렇게 크게 주면 먹기 힘든데. 그치.”

그리고 저쪽에 있던 종이컵과 음료수도 가져왔다. 포카리. 함께 있던 마운틴듀, 파워에이드, 김빠진 콜라, 김빠진 환타보단 좋은 선택이었다. 먹기 좋게 잘라 김동규가 먹여 주는 케이크 세 조각을 다 먹고 기악부 공연도 잘 마쳤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12월, 방학 날이 되었다. 조례 시간에 김동규와 강당에서 나란히 학업 우수상을 받았다.

“구구단도 모르던 김동규가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이런 상을 다 받냐.”

“다 훌륭하신 선생님 덕분이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내년 스승의 날엔 카네이션 꼭 달아드릴게요.”

“미친 뭐래.”

교실로 돌아와서는 교장 선생님의 겨울방학 잘 지내라는 엄청나게 긴 이야기, 예비 고3들에게 하는 더 엄청나게 긴 이야기를 들었다. 담임선생님은 겨울방학에 열리는 방과 후 수업 듣는 사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여는 입시 설명회도 안내했다. 나도 방과 후 수업을 듣기 때문에 무슨 반인지 몇 시인지 확인했다.

“그럼 방학이라고 놀자판으로 지내지 말고 아프지 말고. 포동포동해진 얼굴로 2월에 봅시다, 똥강아지들아.”

3월에 처음 똥강아지라는 별명인지 애칭인지 같은 걸로 우리를 지칭했을 땐 다들 그게 뭐냐고 경악을 했는데 고1이면 고등학생이 아니고 중졸자라며 선생님은 꼭 우리 반 모두를 얘기할 때 저런 말을 썼다. 2월이면 고1이지만 열여덟 살이 되는 건데도 선생님이 우리를 똥강아지라고 부르려나, 같은 생각을 하며 가방을 정리했다. 어차피 들고 온 것도 별로 없어 챙길 것도 없었다.

친구들이 오늘 집에 가서 뭐 하냐고 물어보던 중에 누가 뒷문에서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야 서함! 여자 친구가 빨리 나오래!”

“뭐?”

“네 여친 지서윤 아니야?”

“아…… 어.”

존나 당황해서 가방을 버려두고 교실부터 뛰쳐나갔다. 지서윤이 미안하다며 깍지 낀 손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야. 어떻게 안 거야?”

“하림아, 진짜 미안해. 나 친구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는데 어제저녁 먹다가 너한테 메시지 보내던 중에 친구한테 뭐 줄 거 있던 거 깜빡해서 그거 잠깐 준다고 책상에 내려놨는데 그걸 구지호가 봐 가지고…….”

“걔는 왜 남의 휴대폰을 멋대로 보고 그래?”

“그러니까. 아 그래도 내가 휴대폰 잠그는 거 깜빡해서 본 거고, 아 진짜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걔는 봤으면 그냥 닥치고 혼자만 알고 있던가 왜 또 다…… 서윤아, 지금 애들 누구누구 알아?”

“몰라. 구지호 입 완전 싸서…….”

“오올, 서하리임! 지금까지 서하림 연애사는 다 알고 있는 우리 모르게 비밀 연애했다니 쪼금 섭섭하지만 오오오올!”

“뽀뽀는 했나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미안해, 하림아.”

“아니야, 됐어. 미안할 거 없어. 왜 네가 미안해해. 나 가방 가져올게.”

친구들이 옆에서 온갖 사랑 노래를 불러댔다. 이래서 비밀로 하자는 거였는데. 구지호 지나가다 만나면 거기를 까주든 해야지. 구지호가 알았다는 건 그냥 전교생이 다 안다고 해도 무방했다.

정문 나올 때까지도 미안하다는 지서윤에게 괜찮다고 해주고 헤어졌다. 나는 집에서 걸어 다니지만 지서윤은 차로 통학했기 때문이다. 내게도 인사를 해주는 지서윤 아줌마한테도 웃어 보이고 집으로 향했다. 피곤하다. 등교하자마자 두 시간 만에 집에 온 건데도.

방까지 맛있는 냄새가 났다. 내일부터 9일 동안 아주머니 겨울 휴가라 오늘 저녁에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주겠다고 하셨는데 냄새부터 벌써 맛있었다. 엄마랑 아빠도 내일부터 일주일 놀러 가고 이모님은 월요일부터 일주일. 다음 주면 김동규가 우리 집 식탁을 책임진다. 이모님도 그냥 내일부터 휴가 가시라고 할 걸 그랬나. 아 모르겠다. 알아서 놀러 오겠지.

이모님과 단둘이 이틀 지내는 동안 이상하게 김동규에게서 연락이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매일 아무 말 대잔치던 수많은 메시지가 없으니까 심심했다. 일요일 밤에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김동규에게 메시지를 했다.

〈내일 나 늦잠 잘 거야]

〈12시 넘어서 일어날 거 같은데]

〈12시 반까지 내가 메시지 안 보내면]

〈전화해서 깨워]

평소엔 보내면 바로바로 읽더니 오늘은 15분을 기다려도 1이 사라지지가 않는다. 걔 말대로 방학했는데도 공부하겠거니 싶어 벨 소리 켜놓고 잠에 들었다.

일어난 시간은 열두 시가 아니라 세 시였다. 김동규에겐 전화도 한 통 없었다. 뭐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잠에서 막 깨 시야가 뿌연데도 김동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는 바로 받았다.

“야, 너 왜 전화 안 했어? 무슨 일 있는 거야? 설마 또 아저씨가 막 그랬어?”

-아니. 일어났어? 잘 자는 것 같은데 깨우기 싫어서 전화 안 했어.

“내가 12시 반까지 연락 없음 깨우라고 그랬잖아.”

-응.

“아 됐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라니까.”

-걱정……했어?

“그럼 하지 안 하냐? 너 같으면! 아 됐다 그냥.”

-…….

“나 배고파.”

-…….

“빨리 와.”

-지금 갈게.

“얼마나 기다려야 돼?”

-30분.

“아우, 나 누구 때문에 배고파서 굶어 죽을 듯.”

살짝 장난 어린 목소리로 얘길 했다. 그러면 당연히 김동규가 ‘죽기 전에 빨리 가야겠네’라거나 ‘뭐라도 먹고 있어’ 같은 말을 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김동규는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있다가 이따 보자는 한마디만 하고 끊었다. 뭐야.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나는 빠르게 씻고 나와 1층 현관문 앞을 서성였다. 또 얼굴에 반창고 덕지덕지 달고 나타나는 거 아닌지 멍든 얼굴로 오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됐다. 무슨 일이 있으면 있다고 말하는 법이 없어 이럴 때면 김동규가 좀 답답했다. 충분히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걔는 그렇게까지는 아닌 건가 싶어지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한 건가 싶기도 하고. 어찌 됐든 김동규가 약속한 30분이 다가올수록 왔다 갔다 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우리 집에 구급상자가 어디 있더라. 미리 좀 찾아놔야 하는 건 아닐까.

띵동-!

경쾌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직접 현관문을 열었다. 어차피 현관 앞에 서 있던 상태라 오픈 버튼 누르러 가는 것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문을 여는 게 더 빨랐다.

“동규야!”

“안녕.”

“어? 얼굴 괜찮네.”

“…….”

“난 또 맞았을 줄 알고. 들어와.”

김동규는 손을 씻고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살피더니 늦은 점심 혹은 이른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 배가 너무 고파 김동규의 딸기청을 꺼내 딸기우유를 한 잔 마셨다. 밥 나오면 바로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몇 번이나 들었다 내려놨다를 반복했다.

“잘 먹겠습니다.”

“…….”

밥을 먹는 동안에도 김동규는 조용했다. 아빠한테 안 맞았으면 엄마랑 싸웠겠거니, 나랑 엄마가 사소한 걸로 싸우던 걸 떠올리며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너무 배가 고팠던 터라 한 그릇 다 비우고 반 그릇을 더 먹었다. 간만의 폭식이었다.

부른 배를 두들기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TV를 켜 예능 채널을 돌리다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에서 손을 멈췄다. 복스럽게 식사를 하는 개그맨들을 봐도 지금만큼은 부럽지 않았다. 내가 더 맛있는 거 먹었지롱. 그것도 엄청 많이.

“저녁은. 괜찮았어?”

“응. 완전.”

“……나 뭐 물어볼 거 있는데.”

“엉.”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는지 김동규는 TV를 껐다. 나는 옆으로 살짝 자리를 비켜 김동규가 앉을 수 있게 했다.

“나는, 네가…….”

김동규는 상처받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빠한테 아무리 맞아도 이런 표정은 짓지 않았는데.

“아니라고……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아니라고? 뭘?”

“서하림 너, 진짜로 걔랑 사겨?”

“지서윤?”

침을 삼켰는지 목젖이 아래로 크게 내려왔다 올라온다. 아니라고 대답하라는 건 무슨 뜻이지. 또 날 들쑤셔놓고 아닌 척 내빼려는 건 아닌가. 이제 더 이상 김동규랑 빙빙 돌리며 얘기하기도 귀찮아졌다. 맞다고 하고 왜 물어봤냐고 했다가 맨날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면 멱살을 잡든 머리끄덩이를 잡든 아무것도 아니면 말을 해보라고 해야겠다.

“맞아. 진짜로 사겨. 세성전 끝나고부터. 음, 오늘이…… 61일. 왜?”

“……아니라고 대답해 줬으면 좋겠다고…… 그랬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냐?”

“3일 뒤면 내 생일이야.”

“3일 뒤? 31일? 헐, 몰랐어. 네가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어서.”

내 생일도 김동규가 딱히 챙기진 않았기 때문에 서로의 생일은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도 안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생일 선물 한번 챙겨볼까.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아! 너 왜 이래!”

지서윤이고 김동규고 왜 다들 애처럼 달래 줘야 하는 건지 싶은 찰나, 김동규가 내 머리채를 잡고 일어났다. 당황한 나는 김동규의 팔을 잡아 떨어트리려 했지만 김동규의 손엔 힘이 더 들어갈 뿐 나를 놓거나 하진 않았다.

“야! 김동규!”

잡은 머리채를 아래로 내려 나는 허리가 90도로 숙여졌다. 그대로 김동규에게 질질 끌려갔다. 가는 방향은, 욕실이었다. 도대체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소리를 지르며 김동규의 팔과 다리를 주먹으로 때려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실내화 한 짝이 벗겨져 어디로 간지도 모르겠고, 발바닥에 욕실의 차가운 타일이 느껴지자 소름이 돋았다.

“미친, 야! 너 진짜 갑자기 왜 이러냐니까! 미친 거 아니면 말로.”

말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나는 물속으로 처박혔다. 커다란 욕조에 물이 가득 차 있었고 김동규는 한 손으로는 내 머리채를, 다른 한 손으로는 목을 잡아 빠져나올 수 없게 눌렀다. 씨발, 미친 새끼 진짜 갑자기 왜 이래? 온몸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김동규에게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고 주먹을 날려 닿는 김동규의 모든 곳을 때려댔다. 내가 너무 격하게 움직이자 김동규가 결국 한발 물러났다.

“허억, 흐으…… 야이…… 씨, 발 이게…….”

내 머리는 여전히 김동규의 손아귀에 잡힌 채였다. 모자란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며 김동규를 있는 힘껏 째려보았다. 김동규는 평소의 그 표정과 똑같았다.

“아니라고 대답해. 손잡았어? 키스는? 설마 걔랑 잤어?”

“그걸…… 네가 왜, 궁금해해?”

“빨리 아니라고 말해.”

“아…….”

뒷머리다 죄다 뽑힐 것 같다. 김동규가 다시 한번 나를 욕조에 처박았다가 꺼냈다.

“미친, 씨발, 야!”

물을 뱉어내고 숨을 거칠게 헐떡이며 발길질을 했다. 분명 많이 아플 텐데도 김동규는 눈썹만 조금 씰룩거릴 뿐 아프단 소리를 조금도 내지 않았다. 그게 더 어이가 없어 악을 지르며 김동규를 때렸다. 욕실엔 내 비명과 욕설과 김동규를 때리는 소리 그리고 한 번씩 김동규가 나를 욕조에 넣고 숨이 다 닳을 때까지 처박느라 나는 찰싹거리는 물소리만이 가득했다.

“해, 했어도…… 그걸 너한테 말, 말하지도 않을.”

또다시 차가운 물 속. 공기 방울들이 빠져나가는 게 보이고, 코와 입으로 가득 들어오는 차갑고 차가운…… 얼음 같은 물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나를, 친구로…… 아니면 그런 감정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사실은 나를 엄청 싫어하고 미워하고 있었던 건가? 다른 애들이 자길 무시하는 것보다 내가…… 내가 자길 동정한다고 생각해서? 그게 더 기분 더럽고 그래서? 하지만 나는 김동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긴 해도 친한 친구라고, 좋은 애라고 그런 게 더 컸는데…….

죽을힘을 다해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이길 수 없는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김동규는 나보다 키도 몸도 훨씬 컸고 갑자기 지진이 나거나 누가 날 구하러 오지 않는 이상 나는 이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물어보는 건 나중 일이다. 일단 살고 보는 게 더 중요했다. 나는 숨이 모자라 죽음이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이대로 죽기 싫다. 갑자기,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내 의지라고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는 죽음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숨이 막히자 심장이 더 심하게 펌프질을 하며 요동쳤다. 뇌에서 산소를 찾으며 징징 울렸다. 더 이상 몸을 버둥거리는 것도…… 힘이 들어가지 않자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짧지만 길었던 17년의 인생이 스쳐 지나가고 엄마와 아빠, 이모님과 할아버지의 얼굴도…….

흐려지는 정신을 겨우 잡고 온몸의 힘을 뺐다. 죽은 척하자. 30초만. 딱 30초만 더 버텨서…… 내가 죽은 줄 알고…… 힘 빼면 그때…….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를 막 세려고 할 때 김동규가 축 처진 내 머리를 들어 올렸다. 온몸이 산소를 원하며 빨리 숨을 크게 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나는 실 가닥 같은 이성을 붙잡고 아주 천천히,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 하, 하림아…….”

김동규가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자 내 몸은 욕실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조금만 더. 김동규가 가까이 오면, 조금만 더 오면. 심장과 폐가 점처럼 작게 수축했다가 커지는 게 느껴졌다.

“하, 하림아, 미안해…… 내, 내가, 아…….”

내 숨을 확인하기 위해 김동규가 가까이 다가온 순간, 나는 김동규의 멱살을 잡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김동규 얼굴을 사정없이 주먹으로 갈겨댔다. 김동규는 얼굴이 눈물범벅이었고 내 주먹을, 나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냥 그렇게 맞기만 했다. 씨발, 왜 또 여기서 화 안 내고 울기만 하는데. 새벽에 전화해서 아무리 잠을 깨워대도 기껏 열심히 만든 요리를 한 입 먹고 맛없다고 했을 때도 내 친구들이 무시하며 낄낄거릴 때도 그리고 지금도 왜…….

“야 이 새끼야! 왜 그냥 울기만 해! 씨발, 왜, 하, 왜 이랬어. 왜 이랬냐고, 왜!”

“…….”

“울지만 말고 말해봐.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얘기해 보라니까?”

“…….”

“너 진짜 나, 나 죽이려고 그랬어? 설마 내가 지서윤이랑…… 지서윤이랑 사귀어서? 그게 뭐? 설마. 넌 어차피 날 좋아하지도.”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이랬냐는 말이 갑자기 턱 막혔다. 목구멍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힘껏 때리기 위해 귀 옆까지 올린 주먹도 멈췄다. 김동규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따뜻한 손으로 감싸 잡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울었다. 너무 서글프게. 그래서 목구멍에 뭔가 박힌 것처럼 말이 나오질 못했다.

“아니야…… 아니야, 하림아…….”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팔이 고장이 난 것처럼 힘이 빠져 아래로 툭 떨어졌다.

“좋아해. 좋아하고 있어, 너무…….”

“뭐, 뭐라고……?”

“많이 좋아해. 너무, 너무 좋아해. 사랑해.”

지서윤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사랑해. 걔가 말했을 때 이 정도의 무게였던가. 이 정도로 괴롭고 날이 서 있었던가. 내 마음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 들고 머릿속을 까맣게 태워 버리는 것 같았던가.

말도 안 된다. 이런…… 이런 게 무슨 좋아하는 거고 사랑하는 거야. 나는 힘이 빠졌던 팔을 들어 김동규의 손을 쳐내고 멱살을 움켜잡았다.

“지랄하지 마. 좋아해? 사랑해? 이게? 이러고도?”

“……미안해.”

“너 조금 전에 나 죽이려고 그랬어. 아니! 죽였어. 너 내가 죽은 줄 알았잖아.”

“미안해…….”

“미안? 미안할 짓을 왜 했는데? 좋아해서? 사랑해서? 네가 생각하기엔 이게 좋아하는 사람한테 할 짓이야? 어? 그렇게 생각하냐고!”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멱살을 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김동규는 눈을 감고 울기만 했다.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서. 그게 꼭 두 눈을 감고 지금 이 상황을 회피하는 것만 같아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나한테 맞아서 코피가 터지고 멍이 들었어도 하나도 불쌍하지 않았다.

“눈 떠. 나 봐, 김동규.”

다시는 뜨이지 않을 것 같던 눈이 열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솔직하게 대답해. 도대체…… 왜 그랬어. 왜 나…… 날 죽이려고 그랬어.”

“좋아.”

“좋아한단 말은 하지 말고, 이 씨발아! 지금 그걸 나보고 납득하라고? 왜? 차라리 이왕 죽일 거 사람 많은 길거리에서 찔러 죽이고 좋아하는 애라 그랬다고 광고를 하지그래?”

“하지만 나, 나는 정말 네가 조, 좋아서.”

“입 닥쳐. 좋아한다는 말하지 말라 그랬다.”

“좋아하는 걸 어떡해.”

“닥치라고 미친 새끼야.”

“처, 처음 봤을 때부터.”

“듣기 싫어. 이게 어떻게 좋아하는 애한테 할 짓인데?”

“나, 나는 너를 정말로 좋아.”

“닥치라고 그랬어.”

“하는걸.”

“닥치라고. 조용히.”

“진짜 진심이야.”

“하라는 아, 너 내 말 우습냐?”

우리는 서로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나는 거의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내가…… 너를 이, 잃는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하, 순간적. 내가 TV 보고 소화 다 시키는 동안 이 큰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는 시간도 순간이야?”

“그, 그러니까 내가…… 마, 마지, 마지막으로 아, 아니라고 대답, 대답하.”

“아 그래? 그래서. 솔직하게 말 한 내 잘못이다?”

덜덜 떨긴 했어도 나불거리던 입이 일자로 닫혔다. 내 잘못이 맞단 뜻이었다. 곧이어 눈도 감는다. 씨발 그래. 도망쳐라, 도망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멍청한 짓처럼 외면해. 기억은 내가 하나도 빠짐없이 하면 되니까.

나는 김동규와 처음 만난 9살의 기억부터 떠올렸다. 뭘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그때부터 3년 뒤에 다시 만나서 구구단을 알려주고 영어 단어를 알려주고 받아쓰기도 직접 채점해 주던 때도, 겨울에 차가워진 내 손을 뜨거운 제 손으로 잡고 호호 불어 녹여 주던 날과 더위를 잘 타지 않는 나를 신기하게 보던 더위 먹은 모습, 중학교 올라와선 한 번만 설명해도 기특하게 알아듣던 거나 글 써서 상 받았다고 자랑하던 거, 이거 한번 먹어보라며 갖고 왔던 수많은 간식, 요리들…… 그리고 늦은 밤 새벽에 내 이름을 불러주던 그 다정했던 목소리까지.

‘응, 하림아.’

‘여보세요. 서하림?’

‘지금 갈게.’

‘하림아.’

‘이따 봐.’

눈을 감고 울고 있던 김동규가 내 두 손을 잡더니 내 손으로 자기 목을 감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또.”

“내가 죽을, 죽을죄를 지었어. 난 쓰레기야, 어떻게 너를…….”

김동규에게 잡힌 내 손이 그의 목을 잡았다. 김동규가 제 손에 힘을 줘 내가, 내 손이 김동규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면서 나 살인자 만들 생각이지 지금.”

내 말에 김동규는 화들짝 놀래며 제 손을 뗐다. 그리고는 또 소리 없이 운다. 울고 또 울었다.

“하…… 잠깐 생각 좀 정리하자.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어.”

너무 어지럽고 토할 거 같고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올라온 심장은…… 너무 아팠다. 짜증 나. 진작에 김동규에 대한 걸 정리 했어야 했다. 너무 오래, 엉킨 상태도 괜찮다고 내버려 둔 게 내 실수였다. 별거 아니라고, 그냥이라며 넘기려던 말을 붙잡아 끝까지 캐물었어야 했다. 바보처럼 그냥 그걸 그대로 두고…… 나답지 않게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김동규를 친구라고만 간단히 정리했고…… 아, 그냥…… 모르겠다.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김동규. 나 봐봐.”

김동규는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눈동자가 무서워 나는 그 애의 코로 시선을 살짝 내렸다.

“일단, 먼저…… 하…… 나 지서윤이랑 사귀는 거 맞는데 어차피 곧 헤어질 생각이었고, 걔랑 어디까지, 아 시발 이걸 왜 너한테 말해야 돼? 걔는 나 너무 좋아하는데 나는 걔를 이성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헤어질 거였어. 그리고 우리 말인데.”

“…….”

“잊자. 잊고, 없던 일로 해. 너랑 지금까지 지낸 내 시간들을 생각해서, 진짜…… 눈 딱 감고 없던 일로 할게. 우리 좋았잖아. 나는 너랑 되게 좋은,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고…… 그래, 되게는 아니고 그거보단 조금 더. 특별한 친구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냥 잊어버리자. 전부 잊어버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기억은 잊혀지게 마련이야.”

“……알았어. 다 잊어버릴게. 하나도 빠짐없이.”

“아니다. 하나는 기억해야지.”

“어떤 거?”

“네가 날 한 번 죽였으니까 나도 한 번 해야 공평하지 않겠어? 사는 게 아무리 좆같아도 네 손으로 죽지 말란 얘기야. 너네 아빠가 널 때려죽인대도 죽지 마. 술 먹고 찌르든 뭘 하든 정신 잡고 있으라고.”

사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김동규가 날 죽이려고 했으니 나도 그만큼은 갚아 줘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조금만 차분했더라면, 조금만 더 평소 같은 상황이었다면 충분히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도저히 그러질 못해 내 말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았어. 그건 꼭 기억할게. 네 손에서 죽을게. 네가 죽으라면 그때 죽을게.”

“…….”

“지금 바로 창밖으로 뛰어내릴까? 아니면 차도로? 카, 칼 가져올까?”

“지금은 말고 나중에. 하, 시발 뭐가 뭔지…….”

내 말에 김동규는 환희에 찬 것 같이 들떠 이상하게 웃었다. 아니, 웃는 게 맞긴 하는 걸까. 수도꼭지처럼 줄줄 흐르던 눈물이 어느새 말라 그렇게 보인 걸지도 모르겠다. 당장에라도 죽으라고 하면 혀라도 깨물 것처럼 구는데 그게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며 설레하는 개처럼 보였다. 미친 새끼. 좋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눈 돌아서 사람을 죽이려는 애인 줄은 진짜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네가…… 이런 거는 너네 아빠 때문이라고…… 솔직히 이해할 순 없는데 어릴 때부터 너도 모르게 그런, 그런 무의식에서, 하 씨……. 그냥 이렇게 어떻게든 이해하고 납득해서 넘어갈게. 앞으로 다시는, 다시는 이런 식으로 나한테 굴지 마. 그럼 너네 아빠랑 똑같은 새끼라고 취급할 테니까.”

“알았어. 네가 싫어하는 건 안 할게. 아무리 화가 나도 참을게. 나 그거 잘해.”

“고백한 것도 잊어. 우리 그냥 친구만 하자.”

“……알았어.”

더 이상 할 말도 없어 나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김동규가 내 손을 잡았지만 쳐냈다.

“난 방에 갈 테니까 정리하고 집에 가. 새 학기에 보자. 안녕. 잘 가란 말은 못 해주겠다.”

젖은 옷 갈아입기도 귀찮아 그냥 방에 들어가 누웠다. 안대도 수면 모자도 불 끄는 것도 귀찮아 그냥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오후 늦게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온 집안을 뒤져 구급상자를 찾는 일이었다. 김동규 때리느라 손가락과 손등이 만나는 볼록볼록한 곳 살이 다 까져 아팠다.

우리 집이 그렇게 크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처음으로 집이 좆같이 크단 걸 깨달았다. 아무리 찾아도 구급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집에 의사가 둘이나 있는데 도대체 엄마나 아빠는 구급상자 하나 집에 구비해 놓지 않고 뭐 한 거야? 오늘 같은 날도 둘 중 하나가 집에 있었으면 이런 일도 안 벌어졌을 텐데 왜 그렇게 바쁘고 왜 집에 없어서……. 뒤지고 있던 서랍장을 세게 닫았다. 부서졌으면 하고 쾅 닫은 건데 부서지지 않아서 신경질이 났다.

“아, 존나 아파.”

세수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다리가 얼어붙어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도망치듯 부모님 방으로 뛰어가 거기 화장실을 썼다. 세면대 앞에 서긴 했지만 세수를 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물소리에 소름이 돋고 눈앞이 하얗게 변해서.

겨우겨우 세수를 하면서도 자꾸 뒤를 확인했다. 갑자기 김동규가 들어올 것 같았다.

“할아버지, 지금 바쁘세요?”

하는 수 없이 나는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놀고 있는 별장 하나만 쓰겠다고 부탁했다. 구급상자도 꼭 준비해 달라고. 할아버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집에 가다 담배 피우는 중학생이랑 시비가 붙어 잠시 다른 곳에서 지내야 할 것 같다니까 할아버지가 별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다. 할아버지는 구급상자 말고도 필요한 게 더 있냐고 물어보고는 전화를 끊었다.

별장은 사람이 없어도 늘 관리하는 직원이 있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집으로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초인종을 눌렀다. 차에 올라타 또 잠에 들었다.

동해가 잘 보이는 강원도의 별장에서 나는 두 달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엄마도 놀러 오고 아빠도 서하늘도 놀러 왔는데 몸이 아프다고 돌려보냈다. 전에는 보기 좋기만 하던 바다의 뷰만 봐도 지긋지긋하고 귓가에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전부 커튼을 쳤다. 노트북과 문제집 등 공부에 필요한 것들을 이모님이 가져다줬다. 걱정하는 이모님을 겨우겨우 돌려보내서 조용하니 좋았다. 여기 아주머니는 말도 거의 없었다.

숫자도 수식도 영어 단어와 한글 자음 모음, 하얀 종이와 까만 글씨들이 처음으로 버겁게만 느껴졌지만 보름쯤 지나자 괜찮아졌다. 공부를 할 때는 뭔가에 집중을 할 수 있어 좀 나았지만 밥을 먹거나 잠시 쉬고 있거나 씻거나 잠에 들기 위해 누워 있다 보면 나는 사무치는 슬픔에 눈가가 시큰거렸다. 왜 슬픈 건지, 이건 슬픔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또 정의 내리지 못하고 알 수 없는 형태로 엉망진창이었지만 이제 막 열일곱을 벗어난 내가 건들기엔 너무 크고 위험해서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렇게, 뭔지 모를 것을 건들지도 못하고 새해를 맞이했다. 다행히 시간은 약이라 3월 1일에 집으로 돌아왔을 땐 욕실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애를 생각하면…… 공포와 증오, 다정함과 친절한 우정이 뒤죽박죽 섞여 혼란스러웠다.

욕실이나 화장실 문만 멍하게 바라본 적이 있다. 때때로 잠을 자려고 누워 있다 보면 거친 내 몸짓에 찰박이던 물소리나, 콧속 깊숙이 차올랐던 물의 감촉이 떠올라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란 문장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려 애썼다.

잘 잊었겠지, 깔끔하게. 유리 파편 같은 믿음의 조각 하나를 마지막으로 그러쥐고 교복을 입었다. 김동규는 그냥 혼란스러운 미지의 존재인 것뿐이고 걔는 내 인생에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래야 했다. 그럴 것이다. 고작 김동규가 내 일상과 삶을 송두리째 흔들기엔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자존심도 상했다.

“안녕.”

교실 맨 뒷줄, 개학 첫날부터 이어폰을 꼽은 채 문제를 풀고 있는 익숙한 모습이다. 나는 김동규의 한쪽 이어폰을 빼고 가볍게 인사한 뒤 친구들 사이로 도망쳤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지만 김동규는 손만 흔들더니 내가 뺀 이어폰을 다시 꼽고 문제를 풀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털어냈다. 꽃샘추위가 기승인 열여덟의 봄이었다.

그날을 마치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김동규는 태연하고 천연덕스러웠다. 처음엔 갑자기 또 미치는 건 아닌지 몇 번이나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말로 떠본 적도 있지만 정말로 김동규는 우리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의아하게 날 바라보곤 했다. 화가 날 상황도 여러 번 만들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너무 달아. 못 먹겠어.”

그리고 나는 내가 먼저 다 잊어버리자고 말해놓고도 그때를 잊지 못하고 문득문득 분노가 치밀 때마다 김동규에게 풀기 바빴다.

“아 진짜? 미안해.”

브라우니를 만들어달라고 했으니 단 건 당연한 건데도 김동규는 미안하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사실 그렇게 많이 달지 않았고 먹기 좋은 정도였는데 그냥 엄청 화가 났다. 어차피 김동규는 내가 뭘 해도 미안하다며 다 받아 줘야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자길 때려봤자 죽지도 않을 텐데.

“당근 케이크 먹고 싶어. 저번에 만들었을 때 괜찮더라.”

“지금부터 만들려면 시간 좀 걸리는데…….”

“누가 지금 만들래? 눈치 진짜 없다. 나가서 사 오면 되잖아.”

“아…… 알았어. 빨리 다녀올게.”

접시와 포크를 치우고 나가란다고 나간 김동규를…… 비참한 기분으로 기다렸다. 진짜 나가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냥 괴롭히고 상처 주고…… 차라리 싫다고 한 번이라고 거절을 했으면 화가 풀릴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다 제풀에 지쳤을 텐데 김동규는 도대체가…… 내게 그 어떤 가시도 세우지 않는 병신 호구 새끼였다. 그것조차 내 화를 자꾸 쌓이게 하는 원인이었다.

왜 몰랐지. 이상할 정도로 내게 헌신적으로 굴고 모난 말을 하지도 못하는 김동규를 왜 전에는 몰랐지. 이상하다고 생각을 왜 못 했을까.

나는 결국 김동규가 사 온 당근 케이크는 한 입도 먹지 않고 배부르니까 버리라며 방으로 올라왔다. 뛰어왔는지 김동규는 숨을 헐떡거렸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암막 커튼을 치고 아주 살짝 걷어내 창문 밖을 지켜보았다. 잠시 뒤 김동규가 나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크긴 또 엄청 커서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알아챌 수 있도록 누가 봐도 김동규인 것도 맘에 안 들었다.

침대에 벌렁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애처럼 굴지. 잊자고 한 건 난데. 없던 일로 하자고, 다 잊어버리고 전처럼 돌아가자고 한 건 나인데. 김동규는 전과 같이 지냈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고 그것도 짜증 나고 자존심이 상했다. 쟤는 할 수 있는 걸 왜 나는 못 하고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어서. 아니, 생각을 해보면 쟤는 가해자고 나는 피해자인 거라 당연히 내 쪽에서 더 못 잊게 되는 건 맞는데 더 좆같은 건 잊어버리자고 덮겠다고 한 나 자신이었다.

다른 친구가 내 머리채를 잡고 죽이려고 했다? 그러면 바로 112에 신고하고 부모님께도 알렸을 거고 그럼 그 새끼 인생 망하는 건 시간문제인 일이다. 그게 맞는 거고 당연한 건데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김동규를 내 옆에 두고 계속 괴롭히고 상처 주고 내 화풀이 대상으로 쓰고 싶어 한다는 게 제일 짜증 나고 좆같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한다고 다 이렇게 상대에게 다정하고 헌신적으로 구는 건 아닐 텐데. 나도 평소처럼, 잊은 것처럼 잘 지내다가 한 번씩 이렇게 화가 치밀어 바보처럼 구는 내가 어색했다.

식탁 위 까만 직사각형의 접시엔 우동 스푼이 세 개 올려져 있고 각각의 숟가락엔 매운 라면이 딱 한 입 먹을 만큼 담겨 있다. 김동규와 한 A 문제집 내기에서 진 건 나였고 내가 걸었던 벌칙은 ‘매운 라면 먹기’였으니 당연한 거였지만 막상 저 새빨간 걸 먹으려니 벌써부터 위가 쓰리고 혀가 아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마주 보고 앉은 김동규를 눈에서 레이저 쏠 기세로 바라보았다.

“김동규 진짜 약았어. 많이 남았다고 안심시키더니.”

“최근 내 승률이 너무 바닥을 기더라고.”

“다음부턴 페어플레이해.”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천재를 일반인이 정당한 방법으로 따라가려니 다리가 찢어지겠더라.”

매우면 혀 진정시키라고 쿨피스, 우유, 얼음물, 노란 단무지, 크림리조또, 미음, 냉녹차까지 준비한 김동규가 접시를 밀었다. 하얀 스푼을 들었다. 땡초와 고추를 비롯한 모든 매운 것들이 지구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한 입만 먹고 나머지 두 개는 안 먹겠다고 해야지.

“한 입 먹어보고 도저히 못 먹겠으면 먹지 마.”

퍽 다정한 목소리로 김동규가 말해오자 눈물 줄줄 흘리면서 나머지 두 스푼도 먹어 치웠다. 내가 포기하는 것과 김동규가 먹지 말라고 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우유 먹어, 우유!”

“다음부턴 절대 안 져.”

“알겠으니까 빨리 마셔 그만 울고.”

고백한 건 없는 일로 해도 마음은 지울 수가 없는지 김동규는 여전히 끔찍하게 다정하고 친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 잊자고 하면서 날 좋아하지 말란 얘기도 할 걸 그랬다. 혹시 모르지. 나한테 미안해서 당장 죽겠다고 했었으니 내가 그렇게 말했으면 알겠다고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그랬을지. 그러면…… 이런 일상은 없었을까. 같이 공부도 하지 않고 마주 보고 얘기할 일도 없고. 근데, 그건 또 싫다는 게 짜증 나 죽겠다는 거다.

“자, 그다음으론 농구 할 사람. 손을 번쩍 들어주세요!”

체육대회 경기별 참가자를 모집하는 학급 회의에서 나는 축구에 자진했다.

“추천도 받아?”

“네! 받습니다!”

옆자리 친구랑 작게 떠들다가 추천받는다는 말에 손을 들었다.

“네, 축구 에이스 서하림 말씀하세요.”

오그라들게 존댓말을 쓰는 반장 때문에 웃음이 났다.

“농구에 김동규요.”

반 아이들이 일제히 김동규를 쳐다보았고 김동규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내가 알기로 김동규 키가 지금 183이던가 184인데. 더 컸나? 더 컸을걸? 암튼 농구에 딱이고 작년에도 농구 해서 이겼으니까 추천!”

“그야 나도 알긴 아는데 추천이라도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고…….”

나는 김동규 쪽으로 몸을 돌려 물었다.

“할 거야 안 할 거야?”

“올해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김동규는 말끝을 흐리며 내게 싫단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럴 거 알고 추천한 거다. 김동규는 나한테 싫은 소리, 안 하겠단 소리를 못하니까.

“김동규 학우님, 저…… 그럼 농구 하나만이라도 해보는 건…… 어떨까요?”

“해해. 그 키 아꼈다 뭐에 쓰냐?”

“……알겠어.”

“진짜?”

반장의 말에 김동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는지 반장은 몇 번이나 더 되물었고 농구는 다 이겼다며 반 애들이 술렁거렸다.

“또 추천! 줄다리기랑 팔씨름에도 김동규!”

반장은 김동규의 대답을 기다렸고 나는 괜찮다며 빨리 이름을 적으라고 반장을 재촉했다. 내 등쌀에 반장이 마지못해 이름을 적어도 김동규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체육대회 당일, 팔씨름 남학생부에선 힘 좋다고 나온 남학생들이 김동규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고 농구도 축구도 이겼고 이어달리기까지 이겨서 올해 체육대회는 우리 청팀의 승리였다.

학교는 매달 온갖 경시대회가 열린다. 나는 그 대회들을 최대한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참여하는 편이었고 학생부에 교내 상을 착실하게 적립하는 게 소소한 재미 중 하나였다. 1등, 1등, 금상, 금상, 최우수, 최우수, 최우수. 태어나 지금까지 받은 온갖 상장들을 펼쳐 놓으면 우리 학교 운동장도 덮을 수 있을 만큼이지만 매번 상 받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2등도 꼴등도 충분히 값진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이왕 하는 거 제일 좋은 상 받는 게 좋지 않은가. 어디 가서 먼저 내 자랑만 안 하면 됐지.

어릴 땐 1등 하면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는데 할아버지한테 겸손이 대상보다 더 중요한 거라며 크게 혼난 뒤론 나이가 고작 한 자릿수였던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도 겸손을 떨어야 했다. 좀 더 크고서는 말이 겸손이지 나보다 못난 사람의 시기 질투를 고상하게 대처하라는 뜻이었단 걸 깨달았다.

대놓고 내게 열등감을 표출했던 권예준이나 엄마한테 비교당한다며 가끔 틱틱대는 서하늘도 그렇고 같이 어울려 다니고는 있지만 앞에서는 대단하다며 부럽다며 얘기해놓고 뒤에서는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톡방 만든 새끼들이나. 다 지긋지긋해.

“이따 추첨했을 때 하림이랑 같은 팀 됐으면 좋겠다.”

“내 말이. 다른 학교는 토론 대회 할 때 이렇게 개인으로 안 하고 세 명을 한 팀으로 신청해서 하던데 왜 우리 학교는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이따 오후에 있을 토론 대회 결승에 참여하는 애들끼리 모여 점심을 같이 먹었다. 다들 한 손에는 종이 한 장씩 들고 조금이라도 더 자료들을 읽느라 바빴다. 나는 기사랑 판례들 한 번만 쭉 읽어보고 종이를 접어 내려놨다.

“벌써 다 외웠어?”

“아니. 밥 다 먹고 보게. 정신 사납잖아.”

“아 나 하림이랑 같은 팀 안 돼도 좋으니까 찬성하고 싶어.”

“나는 반대. 나 가끔 큰누나랑 조카 데리고 밖에 나가면 노키즈존 존나 많아.”

이번 토론대회 주제는 ‘노키즈존, 허용해야 한다’였고 참가자는 본선과 결승에서 자기가 찬성 팀이 될지 반대 팀이 될지 몰라 양쪽 의견을 다 준비해야 된다. 예선이랑 본선도 다 같은 주제였는데 새삼스레 약한 소리 하는 게 우스워 나는 그냥 밥이나 먹었다. 나는 어차피 찬성이 되든 반대가 되든 상관없었고 누구랑 같은 팀이 돼도 괜찮았다. 결승에서 아쉽게도 우리 팀은 3등을 하고 말았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과외 쉬는 시간에 확인한 휴대폰에는 또 김동규에게 300개가 넘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하교하는 시간부터 시작된 아무 말 대잔치의 메시지들을 무료하게 읽었다.

토론 대회 쉬는 시간에 가서 봤는데 너무 멋있더란 얘기, 더 보고 싶었는데 같이 보고 있던 선생님이 종 치자 올라가라고 눈치를 줬단 얘기, 자기는 노키즈존 반대인데 내 생각은 둘 중에 뭐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런 이런 이유로 반대라는 거 그리고 초코수플레를 만들었다며 만드는 동안 그 과정을 일일이 쳐서 보냈는데 그걸 나한테 왜 설명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척 신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수플레를 완성한 사진을 끝으로 두 시간쯤 아무 말이 없다. 읽고 그냥 메시지 창을 닫으려다 짧은 10분 날 보겠다고 와준 김동규가 생각나 손가락을 움직였다.

〈우리팀 3등함]

답장은 금방 왔다.

[잘했네 ㅊㅋㅊㅋ〉

[저녁 뭐 먹어〉

[나 지금 저녁 하는중〉

김동규는 또 신이 나서 내게 무슨 반찬을 할 거고 쌀에 세 가지의 잡곡을 넣을까 말까 고민 중이라며 혼자 열심히 얘기했다.

〈그냥 밥]

김동규의 긴긴 저녁 밥상 이야기를 듣다가 그냥 대충 보내고 메시지 창을 닫았다. 그 뒤로도 계속 김동규에게 메시지가 왔지만 읽지 않았다.

김동규가 학교를 빠졌다. 담임선생님 말로는 일이 있어 이번 주를 다 못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어차피 시험이 끝났으니 학교를 안 나온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하루 종일 메시지를 보내 떠들기 바쁜 애가 어제 오후부터 내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그건 예전에 내가 지서윤과 사귄 걸 알게 되어 이틀간 아무런 연락이 없던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스마트폰 중독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쉴 때마다 김동규와의 메시지 창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어제 과외 할 땐 선생님이 뭐라고 할 정도로 집중력이 엉망이었다. 씻을 때도 휴대폰을 가지고 들어갔고 밥 먹을 때도, TV를 볼 때도 계속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자려고 안대 쓰고 누워 있다가 지금쯤이면 왔을 것 같아서 자꾸 휴대폰을 확인하느라,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자겠다는 그 마지막 확인이 서른 번쯤은 반복돼서.

오늘은 일부러 가장 구석진 데 앉은 친구랑 자리를 바꿔서 수업 시간엔 아예 선생님께 안 보일 각도에다 휴대폰을 올려두고 10분마다 자동으로 화면이 꺼지지 않도록 액정을 두들겼다.

왜…… 왜 아무 말이 없어. 집에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라고 얘기하는 법은 없어도 대신에 아빠 욕을 하거나 엄마한테 뭘 만들어 줬는데 반응이 좋아서 나한테도 해주겠다거나 그런 이야기들을 하던 애가 왜, 왜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런 말이 없어.

“서하림? 어, 안경 썼네. 잠 못 잤어? 밥 먹으러 안 가?”

친구한테 뭐 빌리러 온 건지 서하늘이 자기 반도 아닌데 척척 걸어들어와 어떤 애 가방을 뒤적거렸다.

“어. 입맛 없어.”

“나 이거 뭐 쌔비는 거 아니고 생리대 빌리러 온 거야. 얘랑 나랑 같은 거 써서.”

“너무 당당하게 가방 열길래 뭐 빌리는 거라고 생각했어.”

“역시, 넌 척하면 척이야. 근데 왜 안 먹어? 오늘 존나 특식이라 나 1등으로 뛰어가서 밥 먹고 왔다?”

“잘했네.”

“야, 뭔 게임을 하길래 심각한 표정이야?”

서하늘이 내 앞자리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 화면을 보려고 쭉 다가오길래 가슴 쪽에 휴대폰을 붙이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게임 아니야.”

“그럼?”

“그냥.”

“야 이거 먹을래?”

늦잠 자는 휴일을 제외하고 아침 안 먹는 날은 1년에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김동규 때문에 늦잠을 자서 아침을 못 먹었다는 사실이 아직까지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입맛이 없는 것도 사실이라 아무리 특식이 나왔어도 점심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하늘이 먹고 있던 사과 주스를 내밀었다.

“새로 사다 주는 것도 아니고 먹던 걸 줘?”

“에이. 아우님 설마 내 침 때문에 그래? 너 혈액형 O형이던가?”

“응.”

“난 AB.”

“너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다른 혈액형 침 섞이면 죽는다느니 그런 거 믿는 건 아니지?”

“날 뭘로 보고. 당연히 안 믿지! 근데 혈액형 성격은 좀 믿어. 날 봐. AB형의 헌신이지 않아? 너도 완전 전형적인 O형이고.”

“나 솔직히 널 진짜 좋은 가족이자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좀 모른 척하고 싶어져.”

“아 왜.”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런 걸 믿는다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넌 초등학생 때도 안 믿었잖아. 그리고 이게 진짜 맞을 때가 있다니까? 별자리랑 타로도.”

“뭐래냐, 진짜.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4만 년 전부터 인간이 얼마나 많이 태어나고 죽었는데 그 많은 사람을 겨우 네 가지 혈액형이나 열 개 조금 넘는 별자리로 구분을 한다고?”

“MBTI는 열여섯 개야. 나 요즘 이거 존나 신봉함. 너도 해볼래?”

“됐어.”

“내가 봤을 때 너는 음, 일단 앞자리는 E다.”

“됐다고. 하나도 안 궁금해.”

거드름을 피우며 내 유형을 궁예해 보겠다는 서하늘을 무시하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 진짜 왜 아무 연락이 없는 거야.

“ENTP? ENTJ? 의외로 INTJ일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ESFP인가. 야 너 그냥 이따 한번 해보면 안 돼?”

“안 궁금하다니까. 근데 하늘아.”

“네가 이름으로 부르면 좀 쫄려. 왜.”

“친구랑 오해가 있어서 친구가 잠수를 탄 적이 있는데.”

“헐 누군데? 너랑 싸울 정도면 얼마나 인성 빻은 앤지 궁금하다.”

“싸운 건 아니야. 그냥 오해.”

“잠수 탔으면 싸운 거지. 야 누군데? 우리 학교야? 아니면 다른 학교? 영재원 친구?”

“있어. 아무튼 지금도 갑자기 잠수를 탔는데…… 이번엔 아무런 것도 없거든.”

“걔 남자애지. 혼자 어디서 버튼 눌려서 너한테 열폭하고 잠수 탄 거 아님? 너 프사 혹시 셀카 사진으로 바꿨어?”

“아니. 프사 그대로고 걔 그럴 애 아니야.”

“음, 잠수 언제부터 탔는데.”

“어제.”

“그 전까지는 잘 얘기했고?”

“응.”

“음…….”

다리를 꼰 서하늘이 음료수를 빨아 마시며 발을 까딱거렸다. 나는 길어지는 서하늘의 침묵이 끝나길 기다리면서도 계속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럼 딴 일로 바쁜가 보지. 잠수가 아니고 걍 연락할 시간이 없나 본데? 아플 수도 있고. 네가 생각했을 때 진짜로 걔랑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지?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그럴 껀덕지 1도 없고?”

“응.”

“그럼 네가 찔릴 게 하나도 없는 거네. 잠수가 아니고 걍 너한테 딱히 할 말이 없나 봄? 그리고 연락 겨우 하루 안 된 거로 잠수라고 생각하는 것도 좀 웃기다. 한 이틀은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걔가 연락 씹으면 모를까.”

“아…….”

“나 생리대 갈러 간다. 좆같은 자궁. 이거 버려줘.”

서하늘은 내 책상에 다 먹은 음료수 곽을 올려놓고 사라졌다.

아픈가. 김동규는 어릴 때 아프면 어디가 아프다고 내가 의사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미주알고주알 자기 몸 상태 말하기 바빴지만 중학교 올라와서부턴가는 아파도 절대 아프단 말을 하지 않았다. 아빠한테 그렇게 맞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때도 희미하게 웃으며 “안녕, 보기 흉하지. 미안해”라던 애다. 아침에 멍을 달고 등교해도 괜찮냐는 내 말에 아이스팩을 흔들며 엄지를 들어 올리는 게 김동규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내가 잘못한 거, 아니 그때도 내가 잘못한 건 아니었으니 내가 잘못한 거란 말은 틀렸다. 음. 기분 상했을 일. 그래. 이번에는 미친놈이 기분 상해서 눈 뒤집힐 일은 전혀 없었다.

나는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두 가지는 독감이나 감기몸살처럼 너무 아파서 연락을 하지 못하는 경우와 아빠한테 맞아서 또 입원했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경우. 어찌 됐든 이 상황에 아픈 것 말고는 논리적으로 다른 가정은 세울 수가 없었고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 집과 김동규 집에서 가장 가까운 큰 병원이 아빠가 있는 병원이니까 바로 이모님 쪽으로 연락이 갔을 거였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소거해 남은 결론이 만족스러웠다.

〈저기... 많이 아파?]

많이 아픈 게 아니라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는 게 더 옳은 문장이 아닌가 싶었지만 갑자기 허기가 몰려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하늘이 억지로 쥐여주고 간 쓰레기를 버리고 급식실로 뛰어갔다. 급식을 받아 자리에 앉아서도 사라지지 않는 1이 김동규가 아프다는 걸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점심 먹고 4, 5, 6, 7교시도 심지어는 과외 시간까지도 내내 휴대폰 붙들고서 1이 언제 사라지나만 지켜봤다. 결국 선생님이 오늘은 일찍 끝내자고 했고 나는 냉큼 그러자며 책상을 정리하지도 않고 지갑을 챙겨 나왔다.

택시를 잡아탔을 땐 1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집이야?]

〈나 지금 과외 끝나서 너네집 가는 중]

〈아줌마 집에 계셔?]

〈안 계시면 죽 사가게]

〈왜 봤는데 답장이 없어]

〈야 김동규]

〈말 좀 해]

보내는 족족 다 읽고 있으면서도 답장이 없는 게 답답해 전화를 걸었다.

-응, 하림아.

왜 연락이 없었냐고, 많이 아픈 거냐고 따져 물으려던 혀가 굳었다.

-나 조금 아파. 집에 있다고 막 쓰던 중이었는데.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낮게 깔리고 막힌 듯한 목소리는 언젠가의 새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김동규를 탓하며 쏘아대려던 걸 멈추고 굳은 혀를 움직여 준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죽집이 아플 때 먹는 죽 파는 곳 맞지.”

-응. 아무거나 사와.

저 목소리 계속 들었다간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제일 비싼 거 사간다며 전화를 끊었다. 택시기사에게 아파트 근처 죽집에서 내려달라고 하고 제일 비싼 특트러플 전복죽을 사서 김동규네 집으로 뛰어갔다. 마침 딱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세 번이나 누르고 닫힘 버튼도 다섯 번 눌렀다.

문 열리자마자 뛰어가 벨을 눌렀다. 열 번은 눌렀는데도 김동규가 문을 열지 않아 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야! 빨리 문 열어! 설마 안에 아저씨 있어? 그래서 못 여는 거야?”

비밀번호는 알고 있었지만 급한 일 아니면 비밀번호 열고 들어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냥 벨을 눌렀던 거였다. 아무래도 아저씨가 안에 있는 것 같아 비밀번호를 막 누르려는데 문이 열렸다. 머리는 헝클어졌지, 코피에 입술도 다 터져 보기 괴로운 몰골의 김동규가 서 있었다.

“집이 너무 지저분해서.”

“공부하느라 바쁜 애한테 청소까지 시키고 아주 좋은 아빠 납셨다. 얼굴은 또 왜…… 됐다. 많이 아파?”

“아니.”

“그럼 죽 먹어. 전복 제일 많이 든 거로 사 왔어.”

“응.”

“트러플 전복죽이래. 설마 그 트러플인가 싶어서 물어보니까 진짜로 트러플이 들어간 건 아니고 오일이 들어갔대. 그 오일도 분명 함유량 1%밖에 안 될걸.”

아픈 행색이라 내가 차려주겠다는 걸 김동규가 굳이 자기가 차리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쟁반을 들고 나타난 김동규의 손에는 깁스가 달려 있었다.

“팔 뭐야.”

“맞았지 뭐.”

미친 새끼. 김동규 아빠는 진짜 길 가다 누구한테 맞아 죽어도 싸다. 김동규가 이렇게 아빠한테 맞았는데도 태연할 때마다 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원래도 신은 믿지 않았지만 이런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 세상을 활개 치게 방관하는 신이 도대체 어디 있나. 내가 신이었으면 벌써 잡아다 지옥 불에 처넣었다.

내게도 죽을 챙겨주는 김동규가 편하게 많이 먹을 수 있도록 샌드위치 먹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 상황에 해도 무난할 말을 골랐다. 김동규는 곧 죽어도 팔 다친 이야기나 아빠 얘기를 할 애가 아니었다.

좀 전까지 과외 선생님과 성적 분석을 했던 터라 그 얘기를 시작했다. 한 번 얘기를 시작하니까 의대 가기 싫어서 유학 생각하고 있는 거, 작년에 국제고 편입 알아본 거까지 줄줄 나왔다. 놀라운 건 김동규가 그런 내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알아.”

이대로만…… 이렇게만 있으면 정말 딱인데. 김동규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안 이후로 김동규가 이렇게 굴 때마다 애정에 기반을 둔 다정함이 얼마나 세심하고 집요한지를 느낀다. 그 날만 아니었으면 그 일만 없었으면 김동규의 고백을 받더라도 이런…… 이렇게 다정한 김동규를…….

“그럼 뭐. 음, 수교과라도 갈 생각이야?”

엉뚱한 소리에 생각이 싹둑 잘렸다.

“사범대 가기엔 내 성적이 너무 아깝지. 사대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 물론 전교 1등도 사대 갈 수 있고 선생님도 진짜 훌륭한 직업이야.”

“농담이었어.”

할아버지가 뭐라 하면 대전으로 가버리란 김동규 말에 엄청 웃었다. 그랬다간 할아버지가 쓰러졌다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대전으로 날아와 내 뺨을 때릴지도 몰랐다. 만약 정말로 길이 K대뿐이라면 할아버지한테 곤장을 맞더라도 대전 내려가는 걸 생각해 봐야겠다.

그런데, 내가 대전으로 내려간다 그러면 얘도 같이 내려올까? 거긴 우리 학교 애들이 거의 없겠지만 영재원 친구들은 좀 있을 거다. 하지만 그 먼 곳까지 혼자 지낼 생각하면 좀 망설여지고…… 김동규라도 있으면 낯선 도시에서 지내볼 만할 텐데.

입안에 괜히 침이 고여 한 번 꿀꺽 삼켰다. 자연스럽게 삼킨 게 아니라 꿀꺽 하는 소리가 엄청 크게 났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 혹시 만약에 내가 대전에 간다면 너도 S대를 포기하고 대전에 가겠냐는 말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김동규는 우리 학교에서 내 뒤를 바짝 쫓아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있는 우리 학년 차석이었으니까. 김동규는 취직이 잘 된단 이유로 S대 공대를 지망했다.

“우리 부모님 이혼한대.”

나보다 빠르게 입을 연 김동규에게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나름 K대도 공대 중의 공대니까 취직이 잘될 거란 생각까지 뻗어 나가 있던 게 전부 파투가 났다.

“헐 진짜? 대박.”

“…….”

“아니 대박이 아니고, 아니 그러니까 그게…… 잘, 된 일인가? 축하해 줘야 하는 거야?”

이혼을 해도 이전 배우자가 가정 폭력으로 신고를 할 수 있나를 가늠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왜 하필이면 의사여서 내가 법에 관련된 지식을 알 수 없게 한 건지 조금 짜증이 났다. 할아버지가 법조인이었으면 분명히 내가 옹알이를 할 때부터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은 물론이고 온갖 법들을 달달 외우게 했을 텐데.

베트남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가신다는 김동규 아줌마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김동규는 엄마가 자길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에 굉장히 화가 난 듯했다.

“어쩐지 요즘 아빠가 술을 안 처먹는다 했어. 그리고 엄마도 뭔가 좀 이상했어. 그래. 말은 나 성인 될 때까지 이혼 안 하고 참는다고 했는데 베트남 가는 자리가 내년까지 남아 있을 거 같아? 이혼해 주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거겠지. 어릴 때부터 힘든 거 다 봐오고 수발 다 들었는데, 돈도 다 내줘 합의금도 물어줘 아니 이건 지금도 갚고 있긴 한데 시발 뭔 소용이야. 도망을 갈 거면 쓰레기 같은 게 지 성질 못 이기고 제자들 패서 감방 갔을 때 도망을 갔어야지.”

김동규는 갑자기 숨도 쉬지 않고 말을 했다. 꼭 말을 토해내고 뱉어내는 것처럼. 목소리도 점점 낮아져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듯했다.

“지가미친새끼정신차릴수있을거라고옆에붙어있었으면서, 엄마, 내가그랬잖아사람고쳐쓰는거아니라고. 짐승만도못한새끼가사람되려면이번생은글렀으니까돈주지말라고했잖아! 왜그랬어? 내말은말같지도않은소리야? 왜 내말안들었어? 왜자꾸돈갖다바쳤냐고. 어차피버릴거면아빠한테맞았을때왜감쌌어. 왜나대신맞았냐고.”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며 한 번씩 소릴 지르는 김동규가 낯설고 무서웠다. 나는 온몸을 뒤덮는 소름을 참아가며 숨소리를 죽였다. 눈도 깜빡일 수가 없었다.

“내가맞아죽든말든그냥보고만있었어야지. 그새끼한테맞아서피가터지고정신잃는걸보고도망쳤어야지! 엄마왜그랬어대답해봐! 해보라고! 엄마, 엄마왜말이없어빨리대답해보라고나버리고가는건할수있는데왜말을못하는데!”

쨍그랑-!

누구에게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를 김동규가 두 손으로 상을 내리쳤다. 어마어마한 힘의 반동으로 그릇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김동규의 정신을 깨운 것인지 김동규는 평소의 그 평온하고도 덤덤한 얼굴로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파.”

떨리는 손을 상 아래로 숨기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파, 하림아.”

도대체 뭐가? 깁스 한 채로 상을 내리친 손이?

“울지 마.”

내 눈물을 닦아주는 김동규의 두 손은 나보다 훨씬 떨리고 있었고 차가웠다. 늘 뜨겁기만 하던 김동규였는데, 겨울에도 따뜻해서 얼어붙은 내 손을 녹여 줄 정도로 뜨겁던 손이었는데…… 바들바들 떨리는 차가운 손은 김동규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낯설었다.

“하림아, 나 너무 아파.”

“벼, 병원 가자.”

“아니 손 말고, 여기가…….”

김동규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제 심장 부근으로 가져갔다. 나는 땅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울음을 터트렸다. 두 눈을 망연자실하게 감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야차 같던 김동규 아저씨의 얼굴이 떠오른다. 깨진 유리들과 그 위를 밟고 선 김동규와 붉은 피도. 날 무섭게 바라보던 충혈된 눈, 말리러 온 날 때리긴커녕 김동규를 때리던 커다란 손과 엄청났던 파열음, 무력하게 돌아가던 김동규의 고개…….

아빠보다 키가 더 커졌다고 그랬다. 다 늙은 아빠보단 김동규가 힘도 더 셌을 텐데 반항 한 번 하지 못했던 건 폭력에 오래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김동규의 가슴 위에서 떨고 있는 손을 내 심장으로 끌어오고만 싶었다.

내가 그날의 김동규를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했던 것도 이해해야만 했던 것도 다…… 김동규를 불행하게 만든 태초의 원인인 김동규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빠한테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나중에, 조금만 더 크면, 입시만 끝나면 알아서 하겠다며 엄마랑 함께 감내하고 있던 아빠란 존재를 이제는 혼자서 오롯이 감당해야 할 김동규가 너무…… 너무 불쌍하고 딱하고 안쓰러웠다.

그래서 울면서 입을 맞춰오는 김동규를 밀어내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내 입술 사이로 들어오는 혀도. 너무 오래 붙어 있는 것 같아 밀어냈지만 김동규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더 가까이 껴안았다. 입술을 떨어뜨렸다간 죽을 것처럼 찡그린 미간에 나도 눈을 감았다.

키스 한 번 한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아빠랑 단둘이 살아야 할 김동규에게 친구로서…… 또는 날 좋아해 주는 사람으로서 나와 키스하는 게 위로가 된다면 한 번쯤은 꿈꾸는 셈 치고 해줄 수 있었다. 다만, 김동규를 껴안거나 하진 않았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말아쥐었다. 주먹 쥔 손이 잘게 떨려왔다.

“좋아해. 사랑해, 하림아. 나…… 널 좋아해.”

김동규의 두 번째 고백은 무겁고도 슬펐다.

“너무, 너무 좋아해……. 나한텐 너밖에 없어. 나는…… 너만 있으면 행복해.”

짧게 입을 다시 맞춘 김동규는 여전히 우는 중이었다. 그 날을 잊자고 했는데 왜 또 고백을 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엄청난 속도로 뛰는 심장이 아프기까지 해서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너만…… 너만 있으면 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나 좋아해달라고 하지 않을게. 나 안 좋아해도 돼. 미워하지만 말아줘. 떠나지만 말아.”

이건 고백이라기보다 애원에 가까웠다.

“어떻게…… 떠나지 말란 거야. 연애도 하지 말고 결혼도 하지 말라고?”

“여, 연애? 너 여자 친구 사귄 적 있어?”

혼란스러워하는 눈동자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김동규는 엉엉 울며 언제 사귀었냐고 물었다. 도대체…… 지금 연기하는 건가?

“괜찮아, 아니, 사실은 안 괜찮은데, 아…… 어, 언제 사귀었어? 누구, 누구야? 내가 아는 애야? 어…… 어떻게…….”

“야, 김동규.”

“아…… 안 돼…… 하림이가 더, 더러운, 아니 그건 아닌데.”

“동규야.”

나는 우느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김동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김동규가 눈물을 닦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상처받은 눈이었다. 김동규는 진짜로 그날의 기억을 깨끗하게 지운 거다. 충격적이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인 게 김동규에게 어마어마한 트라우마였다면 아예 일어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차라리 잘됐어. 잘된 일이다.

“……동규야.”

“응 하림아.”

“진정하고, 그…… 하나씩 양보하자.”

“양보?”

“내가 누굴 만나든 누굴 사랑하고 결혼을 하든 축하해 줘.”

“…….”

“대신 나도 널 제일 친한 친구로 생각할게. 아니 생각이 아니라 그럴게. 평생.”

제발 먹혀라. 나 좋아한다며. 사랑한다며. 내가 내민 조건을 빨리 수락해야지 뭐 하고 있어.

“힘든 일도 기쁜 일도 늘 함께하는 그런 친구. 널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제일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 어?”

“제일 특별하고 소중한…….”

“그래.”

“……알겠어.”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김동규가 다시 내게 달려들어 입을 맞췄고, 이번 키스는 굉장히 거칠고 뜨거웠다.

겨우 김동규를 밀쳐 내고 푹 쉬라며 김동규에게서 벗어났다. 다시 잡아 키스하면 어쩌지 조금 걱정했는데 그러진 않았다. 그리고 김동규는 내가 얘기한 ‘제일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를 들먹거리며 수시로 입을 맞추고 맨살을 맞대거나 비벼대면서 성적인 의도를 숨기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냈다.

거의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놀라울 정도로 김동규는 내 입술을 빨아대고 만져대고 혼자 발정 나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싫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질 않았다. 나는 네게 특별한 존재이지 않냐고 속삭이고 끈덕지게 달라붙는 자극 때문에 살짝 발기한 내 것을 만지며 너도 좋지 않냐고 밀어붙였다. 정말로 이런 건 싫은데, 김동규가 만지는 손길마다 달아오르는 내 몸이 끔찍했다. 이성과 본능이 따로 논다는 게 이토록 비참한 줄은 몰랐다.

“아, 제발 그만해…….”

차라리 그냥 평범하게 키스를 하고 손을 잡고 그 정도만 했으면 좋을 텐데.

“그만…….”

내 입술을 아플 정도로 빨아대던 김동규가 퉁퉁 부은 입술을 핥고 입 주변을 핥고 턱을 따라 혀를 미끄러뜨리더니 귓구멍까지 침을 묻혔다. 목을 움츠리며 몸을 뒤로 빼도 나를 따라 몸을 붙이더니 결국 볼과 인중, 코, 눈썹까지 온 얼굴에 침을 발랐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김동규가 날 좋아한다는 거 충분히 알겠고, 알겠는데……. 떼어내겠다고 멱살을 잡고 때리기라도 했다간 나한테 맞으면서도 바지를 벗겨 어떻게 해버릴 것 같아 두 눈을 감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김동규, 그만하라고…….”

“내 침 삼켜봐.”

“뭐?”

“내 침. 삼켜보라고. 목젖 움직이는 거 만지고 싶어.”

“말도 안…….”

김동규의 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술과 턱에 힘을 줬지만 억지로 입을 열게 만드는 손에 타인의 침이 입안을 꿀렁꿀렁 채워갔다. 토할 것 같아 욱 하는 소리가 들려도 김동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내가 김동규를 의아하게 바라봐도 김동규는 해도 괜찮다는 눈빛으로 웃었다. 삼키자. 삼키고…… 바로 화장실로 가서 토하고 세수도 하고 그러면 돼.

“삼켰어. 됐지. 이제 비켜.”

“한 번만 더.”

“화장실 갈 거야.”

“한 번만 더, 하림아.”

힘으로 밀어붙이면 나는 도저히 김동규를 당해 낼 수가 없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김동규의 침을 또 삼키고, 벗어나지 못해 껴안긴 채로 키스를 받았다. 입술도 아파 김동규가 빨리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때 이모님이 방문을 두드린 덕분에 김동규와 떨어질 수 있었다.

“제가 내려갈게요!”

입만 떨어졌지 여전히 날 안고 있는 김동규는 가볍게 키스를 해댔다. 키스 때문에 그만하라는 내 말이 계속 먹히고 먹혔다.

“아 진짜…… 걸리면 어쩌, 하…… 그러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겠어?”

“응.”

“웃어? 웃음이 나와?”

“응.”

“됐다. 말을 말자, 말을.”

부은 입술을 확인하는데 김동규가 아이스팩을 꺼내 주며 “예쁜 붕어 같아”라면서 속을 긁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씻고 삼킨 김동규의 침을 다 토해냈다. 침은 투명한 색이라 김동규의 것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어 노란 위액이 나올 때까지 억지로 속을 비웠다.

다시 세수를 하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파리한 내 모습을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터지려던 울음을 막고 쓰린 속과 정신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괜찮아. 괜찮아야지. 괜찮을 거야. 이런 때만 저러지 제정신일 땐 나쁜 애는 아니고 또 무엇보다 김동규가 아무리 날 어떻게 한다 하더라도 나는 고작 김동규 하나로 상처를 받거나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나무처럼 살자는 게 내 좌우명이었다. 그래. 나무…… 나무처럼. 미지근한 물로 구석구석 세수를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다이닝룸으로 내려오니 이모님이 김동규와 아예 같이 공부를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나쁘진 않은 조건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김동규만큼 잘 맞는 스터디메이트도 없고 꼭 공부가 아니어도 뭐 김동규랑은 몸 비비는 것만 아니면 다 좋았으니까.

이모님이 자꾸 김동규의 가정사를 파고들어 몇 번이나 김동규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이모님에게 그러지 말라고 둘러 둘러 얘길 했지만 내 의도를 뻔히 알아채 놓고도 이모님은 끊임없이 계속 물었다. 왜 어른들은 남에게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걸까. 김동규는 바보처럼 물어본다고 또 다 줄줄 대답을 하고. 입맛이 떨어졌다.

과외를 하기로 결정하고, 김동규는 자기 자료들을 가지러 나갔다.

“이모님.”

“응?”

“김동규 말인데요.”

“동규 진짜 짠해서 어떡하니,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데 그런 애를 아빠도 엄마도 제대로 키우질 못해서 좋은 인재 하나 망치는 거 아닌가 몰라.”

이모님은 종종 나를 진짜 제 자식처럼 생각하며 내가 자신에게 토를 달거나 반기를 드는 걸 굉장히 고깝게 여겼다. 정작 우리 엄마는 안 그러는데. 나쁜 분은 아니지만 할아버지에게 큰 빚을 졌고 그 빚의 조건은 나를 잘 키우는 것이었으니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럴 거면 로봇을 키웠어야지. 나는 하나의 인격체고 사람인데. 이모님은 계속 조금 전에 김동규가 대답한 것들을 다시 그대로 읊으며 김동규가 불쌍하다고 그런 김동규를 딱하게 여긴 자기가 얼마나 자비를 베풀었는지를 교양 있는 우아한 말로 얘기했다.

“이모님, 걔 제 친구예요. 제 앞에서는 김동규 불쌍하다며 까 내리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까 내린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거지. 나는 어른으로서 동규가 너무 안타깝고 불쌍하니까.”

“누가 그걸 모른대요? 그렇게 불쌍하면 이모님 전 재산 다 김동규 주시든가요. 그런 것도 아니면 불쌍해 죽겠는 거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고 계시면 되잖아요. 저는 그런 것보단 성실한 거나 세심한 거나…… 아무튼 걔의 그런 모습이 좋아서 친한 거지 불쌍해서 적선하듯 같이 지내는 거 아니에요. 저도 올라가서 제 거 가지고 올게요.”

이모님의 얼굴이 구겨지며 입을 달싹거리는 게 보였다. 내가 할 말만 하고 꺼져 주겠다고 했으니 이모님도 더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아서 나한테 화를 냈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엔 이모님이나 김동규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데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김동규 앞에서 매번 고상한 척 위하는 척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도 운이 좋아서 우리 집에 있는 거면서.

박스에 내 문제집이나 노트들을 가지고 내려왔을 땐 나도 이모님도 좀 전의 일이 없던 것처럼 서로를 대했다. 내가 어느 정도 머리가 큰 이후로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반대로 이모님이 내게 펀치를 날려도 다음 날이면 없던 일인 것처럼.

이모님이 힘들게 모셔온 선생님은 보통의 입시 전문 강사보단 나이가 훨씬 어렸지만 그만큼 말도 잘 통하고 피드백도 빨랐다. 나는 원래 선생님의 스타일에 맞춰 공부하는 편이 아니고 선생님이 내게 맞춰 공부하는 게 편한 스타일이라 대치동 유명 학원의 선생님들보다도 나았다. 과학고도 아닌데 올림피아드 참여하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마지막 올림피아드 여름학교를 앞둔 나는 아주 비장한 각오였다. 과학고 아니어도 이번엔 꼭 상위권 성적을 받아오겠노라며. 여름학교에 참여하는 고등학생 중 유일하게 비 특목고 학생인 것도 열을 올리는 데 한몫을 했다. 그런 내 비장함을 선생님이 응원하며 함께해 주었다.

그런데 김동규는 내가 상을 타오거나 좋은 성적을 받아오는 것보다 오래 못 본다는 사실에 슬퍼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해댔다. 내가 누구 때문에 작년 겨울 학교도 3월 파이널도 못 나갔는데.

내 손에 깍지를 껴 손가락을 더듬고 누르는 걸 내버려 뒀더니 손이 손목과 팔로 점점 올라와 내 얼굴을 쥐고 허리를 감싸며 입을 맞춰왔다. 김동규는 커다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곤 했는데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게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하기가 여러 번이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는 것만 같아서. 시선은, 조용하기에 많은 것을 상상하게끔 만들었다. 함축된 문장들을 짐작하고 풀어낼 때마다 심장이 지끈거렸다.

키스하다 사정한 김동규에게 손님용 잠옷을 던져주고 1층으로 내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시끄럽고 재밌는 게 보고 싶어 내가 좋아하는 예능 재방송을 틀었다. 거의 전회차를 결제해놔서 재생 버튼만 누르면 되는 거였는데 무슨 편을 볼지 회차 옆에 음식 이름을 빠르게 읽어도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리모컨 위아래 버튼만 빠르게 눌렀다. 양념 돼지갈비 편이나 볼까. 아니면 미국 가정식 편? 차마 먹진 못하는 내장이나 국밥, 닭발, 선지 이런 것들도 TV로 보면 대리만족이 들어 재밌었다. 근데 지금은 뭘 봐도 재밌을 것 같지가 않았다.

김동규가 과일을 깎아왔다. 상큼한 거 먹고 있으니 매콤한 거 먹는 걸 보면 될 것 같아 떡볶이 편을 재생시켰다. 중간중간 피식거리며 잘 보고 있는데 갑자기 김동규가 뒷머리를 잡아채 당겼다.

“야, 미친 갑자기 왜 이래?”

고개를 돌리니 손이 쉽게 떨어졌다.

“잡지 마라. 아프니까. 읏, 야!”

강하게 턱을 잡는 손길이 느껴지기 무섭게 김동규가 입을 맞추고 내 입안에 있던 복숭아를 가져가 버렸다. 김동규는 내 손에 들려 있던 과일 컵을 뺏어 테이블에 내려두고 고개를 틀어 입을 깊게 맞춰왔다. 혀가 온 입안을 훑으며 돌아다녔다.

“읍…….”

한 뭉텅이의 침이 넘어왔다. 아직도 입안에 과즙이 남아 있어 내 침도 고여 있던 터라 나도 모르게 김동규의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과일 때문에 전혀 역겹지도 않고 달기만 했다.

“나 또 섰어.”

“미친, 왜?”

“너무 좋으니까. 사랑하니까. 근데 오래 못 보잖아. 헤어지잖아. 멀리 떨어지잖아. 키스가 아니어도…… 나는 네가 포크로 사과를 찍기만 해도 이래.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거나, 그냥…… 그냥…… 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이렇게…….”

김동규가 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옷 위로 자신의 것을 문질렀다. 그러곤 그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속삭였다.

“너 없는 동안 보고 싶어서, 이렇게…… 이렇게 만지고 싶어서 어떻게 참지?”

강렬하게 타오르는 욕망은 내 시선을 붙잡고 도망칠 수도 없게 만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김동규가, 김동규의 손이 너무 뜨거웠다. 자꾸 입술이 타 마른침이 넘어갔다.

“내가 뭘…… 왜.”

“손 빌려줘.”

내 얼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잡힌 얼굴이 아팠다.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내가 다 할게. 그러면 열흘 잘 참을 것 같아.”

“미쳤지 지금.”

“아…… 나 지금 죽을 거 같아, 응? 남의 거라 보기 징그러우면 그냥 눈 감고 있어. 앞에 보고 앉아서 TV 마저 봐. 손 하나만이라도 주면 돼. 소리도 안 낼게. 입이랑 코 다 막고 찍소리도 안 낼게. 제발…….”

“손 떼. 아프니까.”

내 말에 김동규가 바로 손을 거뒀지만 여전히 김동규의 손이 내 볼에 들러붙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김동규는 이렇게 늘 뜨거웠다. 차가운 내 손을 볼에 가져가 그 열을 식히기 위해 애썼다. 여기서 싫다고 했다간 어떻게 될지 상상을 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꼴은 못 볼 거란 거, 손 하나 내준 것보다 처참한 꼴을 볼 거란 결론밖에 나오지가 않았다.

“소리 내는 순간 바지 올리고 집에 가.”

귀가 아플 정도로 TV 소리를 올렸다. 빨리 싸고 끝내라 제발. 내 손인데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손에 뜨거운 무언가가 닿았다. 김동규의 손이었다. 어렸던 내 손을 녹여주던 그 손. 수족냉증을 달고 살아 늘 차가웠던 탓에 나는 남들보다 김동규의 손을 더 뜨겁게 느끼고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손이 내 손에 깍지를 끼는 게, 나는 꼭 김동규의 손에게 내 손이 잡아먹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손가락에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고…… 입술이 그랬던 것처럼 찐득한 침과, 있는 힘껏 빨리는 손가락의 감각이 참 이상했다. 누가 내 손을 이렇게…… 집요하게 빨아댈 줄 알았겠는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김동규가 내 손을 무생물의, 인형의 손처럼 느껴야 했다. 혹시라도 실수로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진 않을까, TV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김동규의 입안에서 한참을 빨리던 내 손은 결국 김동규의 성기를 붙잡고 거칠게 움직였다. 내 의지는 아니고 김동규의 손에 의해서.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엄청나게 커다란 김동규의 것은 힘줄도 돋아 있어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징그러웠다. 움찔거리는 것도 느껴졌고 까딱거리는 것도 느껴졌다. 숨이 가빠오고 온몸의 피가 팽팽 돌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썼다. 첫 번째 사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손가락 사이로 정액이 뿌려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미친 새끼. 김동규는 내 손으로 자위질을 하고 결국 사정을 할 때까지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아무리 TV 소리를 크게 키웠다고는 해도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 참을 수 없이 튀어나오는 거친 숨소리라거나 새어나오는 소리가 전혀 없었다는 건 김동규가 얼마나 이를 악물고 이 짓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한가? 아무리 방에서 숨죽여 자윌 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소리가 나오게 마련인데.

대단을 넘어선 경악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더 경악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김동규는 내 손에 묻은 자신의 정액을, 신나게 빨아먹었다. 내 쪽에서 소리가 튀어나올 판이었다. 흥분해서가 아니라 너무 놀라고 충격적이라.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기 정액을 전부 핥아 먹은 김동규가 다시 제 발기한 성기로 자위하기 시작했을 땐 이 세상에 나와 김동규 둘만이 있는 착각까지 들었다. 두 번째 사정이 터지고 나서도 김동규는 제 성기를 계속 흔들었다. 김동규의 신음은 없었지만 젖은 손 때문에 치덕거리는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귀가 터지더라도 TV 소리를 제일 크게 올려놨어야 했다.

“아, 윽…….”

김동규의 신음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

눈이 풀린 김동규는 티슈를 미친 듯이 뽑아 귀두로 가져갔다.

“손 놔 김동규.”

정액 때문에 미끄러운 손이 김동규 안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미친 새끼, 힘은 존나 더럽게 세서는 이게 지금…….

“아, 하림, 하림아…….”

손바닥 아래 수십 장의 티슈가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정액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양의 액체였다. 김동규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내 이름을 부르며 온몸을 떨어댔다. 그 모습이 너무 이상하고 무서워 김동규의 손에 붙들린 손을 비틀어서 빼 2층으로 도망쳤다.

“미, 시발 미친 새끼 아니야?”

쿵쾅거리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손을 닦았다. 핸드워시를 몇 번이나 눌러 거품을 내 닦고 또 몇 번을 펌핑해 닦고 또 닦고.

“하 시발…….”

손을 아무리 닦아도 덜덜 떨던 김동규의 모습이 떨쳐지지 않았고 내 성기도 가라앉지 않아 너무 난감했다. 아니, 난감 수준이 아니라 충격적이었다. 헛헛한 다리 사이로 도저히 손을 뻗기 싫어 애꿎은 손만 계속 씻고 핸드워시를 또 짜고, 결국 핸드워시가 빈 통이 될 때까지도 내 것은 빳빳하게 서 있었다.

“짜증 나…… 씨발.”

원래 욕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진짜…… 욕하는 거 안 좋아하고 잘 쓰지도 않는데. 속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나는 수없이 욕을 내뱉고 곱씹었다. 아직도 내 손에 남아 있는 김동규의 것을 떠올리면서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힘줄 때문에 울룩불룩하던 거며 끝에서 끝까지는 엄청 길어서 손이 한참을 움직여야 했던 거나 엄청 두툼했던 귀두, 귀두만큼 묵직했던 살덩이, 내 손끝에 움찔거리며 프리컴을 울컥 쏟아내던 요도 같은 것들을.

차라리 제대로 봤으면 몸이 덜 달아올랐을까. 안 본 탓에 더 선정적으로만 구현되는 김동규의 것이 말도 안 되게 짜증 나고 좆같고 또, 또…….

“하으…….”

사정을 했는데도 여전히 만져달라는 내 성기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개운하지 않았고 김동규의 뜨거운 손과 입안의 감촉을 떠올리며 밤새도록 그곳에 앉아 있었다. 내 스스로가 나의 손이 아니라 내 얼굴을, 뺨을, 손과 몸을 더듬던 커다랗고 뜨거운 다른 이의 손을 원한다는 걸 나는 끝끝내 인정해야 했다. 일방적이었어야 했던 성적인 욕망이 왜 어째서,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찾고 또 찾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도 김동규가 자꾸 떠올랐다.

잘못됐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여전히 김동규는 엉망진창이라 손댈 수 없는 형태로 내게 존재했고 뭐 어떻게 조금이라도 풀어보고 싶어도 자꾸 실패하고 헛돌아 허망함만 안겨주었다.

여름학교는 김동규를 꾸역꾸역 저 멀리 숨겨놔 잘 마쳤고 만족스러운 결과도 얻었지만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다시 해일처럼 밀려와 한숨만 푹푹 나왔다.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놈이 보이질 않아 걱정하는 나도 한심하고 아빠한테 맞아 기절한 김동규는 더 한심했다.

아빠에게 맞을 때면 증거 사진을 남겨 놓는다는 걸 알고 있어 쓰러진 김동규를 보고 당황한 와중에도 사진을 찍어 두는 걸 잊지 않았다. 김동규가 앰뷸런스에 실려 가고 이모님이 소환되고 입맛도 없는데 억지로 억지로 빵을 입에 쑤셔 넣고 쓰레기보다 더 쓰레기 같은 김동규 아저씨랑 전화를 하고…… 김동규가 수술을 마칠 때까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머리에 두른 붕대만 아니면 잠을 자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김동규를 앞에 두고 나는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냥 우두커니 서서 김동규를 바라만 보았다. 간병인은 이모님에게 나와 김동규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들었기 때문에 내가 얼빠진 상태로 한참을 서 있어도 동규는 이런 친구가 있어 좋겠다는 말만 할 뿐 앉으라고 닦달하거나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다.

다짜고짜 욕을 하니까 조금 쫄았던 건 시간이 풀리자 괜찮아졌다. 내세울 게 없으니 남은 게 욕밖에 없어 그걸로 어린애 겁주겠다는 꼴이 우습고…… 쫄 것도 없었는데 더 당당하게 얘기할 걸 그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갑자기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는 김동규에게 화가 났다. 분명히 얘기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말라고. 아빠가 술 처먹고 때리든 찌르든 어떻게든 정신 붙들고 일어나라고.

“야, 빨리 일어나.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알겠어?”

“곧 깨어날 거예요.”

당연히 깨어나야죠. 김동규는 숨이 끊어졌어도 제가 부르는 소리에 살아 돌아와야 하는 앤데요. 속으로만 말을 삼켰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 대신 한숨이 길게 나왔다.

[전화 받았지? 이모 출발〉

며칠 후 깨어난 김동규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나를 찾은 거라고 했다. 그 상황에서도 나랑 한 약속을 떠올렸나 보지, 날 찾은 걸 보면.

김동규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무척 기다렸다. 하루 세 번 간병인이 보내오는 평범한 소식이 아닌 김동규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나와 한 약속을 어기고 김동규가 죽어버릴까 봐 매시간 시간이 괴로웠다. 억울해서. 너무 억울해서. 나는 아직도 내 뒤통수와 뒷목을 누르던 그 힘을 잊지 못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동규 손에, 손을…… 그런 것까지 다 짜증 나고 싫어 죽겠는데 김동규 혼자만 도망가 버리는 것 같아서.

죽으면 다 끝이다. 영혼? 사후 세계? 다음 생? 그런 건 믿지도 않거니와 존재하지도 않는다. 김동규가 저 혼자 죽어버리면 내 억울하고 복잡한 마음은 영원히 해소되지 못하고 내 몫이 되는 거다. 그러면 나는 한평생을, 죽는 순간까지 김동규를 원망하며 부질없는 저주를 하다 죽게 되겠지. 그건 반칙이고 계약 위반이고 날 우롱하는 거고 김동규가 내게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모든 말을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일이었다.

가자. 가서 멱살부터 잡고 일단 왜 이렇게 늦게 깨어났냐고 따지자.

“감사합니다.”

병실 문 앞에서 10까지 센 뒤 문을 열었다. 이모님이 보이지 않아 어딨냐고 물었더니 김동규가 한 말은 어처구니없게도 아니 예상했던 대로 “보고 싶었어”였다.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다가갔는데 힘없이 웃으며 내뱉는 말에 뭘 하고자 했던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서 더 해 김동규는 깨어나서 날 못 본 시간을 계산씩이나 하셨다.

우리가 보지 못 한 시간이 1초면 어떻고 1만 시간이면 어떤가. 시신경이 다쳤다는 게 더 중요한 건데. 어쩐지, 날 보는 김동규가 왜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나 했다. 잘 안 보여서 그렇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나는 또 한없이 바닥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잘 보여. 예쁜 얼굴.”

다정했다가 제멋대로 굴었다가 또 친절했다가 다시 거칠게 굴길 반복하는 김동규를 매번 이해할 명분을 찾아 꾸역꾸역 받아들였다. 처음엔 내가 생각해도 좀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였어도 시간이 지나면 걔는 원래 미친놈이니까, 나는 아직 미성숙하니까와 같은 전제들로 말미암아 결국엔 납득하고 이해를 했다.

그렇게 되기 무섭게 김동규는 내가 내린 정의들을 송곳이 되어 죄다 쑤셔 놓았다. 내가 어떻게든 김동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간은 이렇게 김동규가 끝도 없는 절망에서조차 나만 보고 있을 때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하, 아니…… 야. 지금 예쁘고 말고가, 그게 지금…….”

어떻게 이런 게 사랑일 수가 있는 거지. 내가 감당할 수도 없는 크기로,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게로 존재하는 이 감정을 도대체 김동규는 어떻게 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는 거지.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울지 마.”

심장이 너무 아프다. 심장병도 없는데 이렇게 아픈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김동규가 내 젖꼭지를 빨겠다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내가 또 김동규의 미친 성욕을 밀어내고 거부해 봤자 뒤돌아서 그 정욕에 빠진 눈빛에 아랫도릴 세우고 혼자 자위하며 비참함을 느끼는 것보단 나았고, 그 뒤엔 김동규 때문에 성욕을 느낀 나를 납득할 이유를 찾고 김동규를 이해할 이유를 찾아야 하는 시간도 아까웠다. 시간과 감정을 깎아가는 그 시간들은 마치 영혼이…… 상처받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아니고 영혼이.

“아파, 윽, 하으, 아프, 아프게 하지 말, 읏! 아!”

몸이 아픈 건 며칠 아프고 말 일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영혼 같은 게 입는 타격은 굉장히 오래갔다. 그런 상처를 겨우 수습해 놓으면 김동규는 또 암담한 현실에 파묻힌 채로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뻗었고, 그 안쓰러운 큰손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보려는 내 발목을 틀어쥐기 충분했다. 결국 이런 김동규만 생각하면 날 죽이려던 것도 아무 일이 아닌 게 되어갔다. 내 모든 게, 불행한 김동규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지고 쓰러지고 말라가고…….

“하림아, 네 거 존나 예쁘게 생겼다.”

“만지지 마. 손 떼, 죽여 버릴 거야.”

“응, 죽여줘. 너무 예뻐…… 꼭 너처럼 생겼어. 아 시발 존나 좋아서, 존나…… 죽을 것 같아…… 넌 어떻게 여기도 이렇게 생겼어?”

퉁퉁 부은 젖꼭지를 입에 문 김동규가 부드럽게 핥아 올리며 간질였다. 이빨을 세우지 않았어도 이미 실컷 깨물린 곳이라 혀만으로도 아파 왔다. 김동규는 내가 빨리 사정하도록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헐떡거렸다. 차라리 빨리 싸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랫배에 힘을 주고 사정했다.

“빨리 싸. 너도 빨리…….”

김동규는 검붉은 색의 젖꼭지를 또 빨았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김동규, 싸도, 먹지 마 더럽게…… 휴지 내놔.”

“하나도 안 더러워. 깨끗해. 나는, 나는…… 네가 내 입안에 소변을 싼다 해도 기쁘게 마실 거야.”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저런 말들을 전에는 어떻게 이해할 생각을 했지. 어떻게…….

김동규가 내 몸을 더듬는 손길에 또 사정했다.

“윽!”

한 방울이라도 더 짜내겠다며 김동규가 손가락을 둥글게 말더니 아래에서 위로 압박해 쭉 올렸다. 요도에 남은 정액이 삐죽 나와 흘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김동규가 미친 것처럼 빨아댄 젖꼭지가 심장 부근에서 찌릿찌릿거리며 아팠다. 내 손으로 약을 바르고 아파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가 좆같게도 김동규의 입안을 떠올리며 자위하고. 검붉은 색의 유두가 원래의 색을 찾을 때까지 나는 이 개 같은 사이클을 매일같이 반복해야만 했다.

이렇게까진 할 필요가 없지 않냐며 김동규를 탓하고 싶어도 병원에서 중간고사를 준비하는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제 몸을 챙길 생각도 하지 않고 내가 먹을 거, 내가 좋아하는 거를 만들겠다는 김동규에게 나는 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친한 친구의 모습을 가장하고 그 애를 대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김동규를 오로지 친구로서, 우정으로만 상대를 하면 김동규도 나를 친구 이상 애인 이하 뭐 그런 식으로 잘 대해줬다. 나에 대해 김동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세심하게 챙겨줬고 또 항상 그랬듯 다정했다.

그래, 다정. 사람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관계 속 나를 가지고 있다. 아들로서의 나, 친구로서의 나, 학생으로서의 나, 과학자로서의 나 기타 등등. 김동규는 흥분할 때를 제외하곤 내게만 다정다감한 김동규의 모습 외엔 없는 것처럼 굴었다.

“야 안민주 나 머리 아파.”

“헐 진짜? 어디? 많이?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 정돈 아니고. 보건실 가고 싶은데.”

“어, 가가가가가. 안 도와줘도 돼. 우리가 다 할게.”

“그럼, 서하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매번 내가 불편해하는 상황을 이렇게 잘 알아챌 수 있는 걸까.

“나 좀 부축해 줘.”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학교 축제까지 찾아와 기어코 명함을 주고 간 매니저 때문에 온갖 애들이 다 꼬여 시끄러웠다. 엄마처럼 자기가 일하는 직군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언론에 노출되고 방송에 나가는 거면 몰라도 연예인은 전혀 생각 없다고 재작년도 작년에도 올 초에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도통 포기하질 않았다. 의대 안 간다는 것도 원서 쓸 때까진 비밀로 하려고 그랬는데 홧김에 말해버렸다. 다 망했어.

“어 그래.”

“어깨 좀.”

김동규의 팔을 잡아 어깨에 둘렀다. 김동규가 휘청거리며 내 쪽으로 쓰러져 다급하게 한 팔로 김동규를 껴안았다.

“괜찮아?”

“응. 아니.”

“서하림 빨리 김동규 데려다줘야겠다!”

“어어. 야 조심해. 김동규, 천천히!”

보건실에 도착하자마자 김동규는 제 두 발로 똑바로 섰다. 진짜 놀라서 허겁지겁 이 무거운 놈을 데리고 낑낑대며 여기까지 온 건데 다 연기였다는 거지.

“뭐야.”

“몰라. 그냥 애들 너무 말 많았어서.”

“이게 진짜. 독서부가 아니라 연극부를 했어야 됐네. 아주 남우주연상 감이야.”

김동규는 어깨만 으쓱했다. 내가 불편해해서 구해줬다고 자랑 자랑에 생색을 내지도 않고. 이럴 때면 김동규가 나를 진짜로……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고마워. 짜증 나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별것도 아닌데. 근데 너 이제 오케스트라 준비해야 하지 않아?”

“해야지.”

“음악실 갈 거지?”

“응.”

“그럼 가서 좀 쉬고 있어. 너 주려고 어제 마카롱이랑 딸기타르트 만든 거 있는데 갖다 줄게.”

“아 헐? 진짜? 딸기타르트 대박. 완전 좋아!”

“먼저 가. 나는 독서부 애들 피해서 후문으로 가게.”

“그래라. 이따 보자.”

계속 이러기만 하면 얼마나 좋아. 음악실로 올라가 여자애들이 머리와 얼굴을 만져주는 동안 손가락을 마사지했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독서부 부스에 갔다고는 해도 성의 없이 [이름♡서하림]을 적을 순 없어 글씨 예쁘게 쓰려고 공을 좀 들였더니 손이 조금 아팠다. 한두 개를 쓴 것도 아니라.

다 외워서 자다 일어나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악보를 다시 보고 기악부 친구들이랑 수다를 떨며 긴장감을 덜고 있는 중에 김동규가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친구들이랑 같이 먹으라는 건지 딸기타르트는 내 몫을 제하고도 굉장히 많았다. 타르트 상자를 열어 부원들에게 나눠주니 다들 반응이 좋았다. 김동규는 기악부 부원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까딱거리기만 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먹을 수 있도록 상자를 들고 일일이 타르트를 나눠주었다. 이럴 거 생각하고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 작은 종이 상자에 넣어둔 건지 하나씩 꺼내 주는 건 힘들지 않았다.

“그럼 나 간다. 이따 연주 잘해.”

“어어, 고마워!”

좀 더 앉아있다 갈 줄 알았더니 김동규는 내 인사도 받지 않고 나가 버렸다.

“선배님 저도요!”

“어, 응 여기. 안 떨어뜨리게 조심해서 먹어.”

넉넉하게 만들어서 그런가 타르트가 좀 남았다. 무대 보고 온 음악 선생님도 하나 먹고, 더 먹고 싶은 사람 있으면 더 먹어도 된다고 했더니 금세 상자가 텅텅 비었다.

나는 내 몫의 타르트를 먹고 군고구마 시나몬, 얼그레이 마카롱도 먹었다. 나머지는 이따 끝나고 먹거나 집에 가서 먹을 생각이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연주라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이 되어서 배부른 상태로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야. 너 맨날 이렇게 맛있는 거 먹어?”

“뭘.”

같은 기악부에서 첼로를 맡고 있는 진주혁이었다. 진주혁은 딸기 타르트를 세 개나 먹었다.

“김동규 말이야. 어릴 때 왕따 새끼 하나 구해줬던 걸 이렇게 보은하네. 공부도 같이하지?”

“어.”

“나도 지금부터라도 우리 학교 찐따들이랑 친하게 지내볼까. 요즘 시대에 힘들긴 하지만 개천에서도 용이 난다는데 혹시 알아?”

“뭐…….”

“응?”

“나랑 친하게 지내볼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가 그랬잖아. 지금부터라도 친해져 볼까 한다고.”

찐따 새끼들이랑. 중요한 단어를 쏙 빼고 진주혁을 향해 입꼬리만 올려 웃어주었다. 웃자마자 곧바로 정색을 하는 나를 보며 진주혁이 뒤늦게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장난이야. 으, 친하게 지내 볼래라니 오글거려.”

“야.”

“왜 이래. 장난이었다니까?”

“…….”

“기분 좋게 단 거 제일 많이 먹어 놓고 혼자 삽질하지 말자. 난 타르트 한 개밖에 못 먹었거든.”

김동규와 나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부 같은 곳을 다녔고 우리 학교엔 마찬가지로 세문초, 세문중을 나온 애들이 널리고 널렸다. 학교에서 김동규와 내가 그렇게 붙어 다니는 편은 아니고 오히려 얘기한 시간이나 횟수를 따지면 서하늘이 김동규랑 훨씬 친한 수준이라 다른 초 다른 중 나온 애들은 나와 김동규가 가까운 사이라는 걸 잘 몰랐다.

친한 애들이나 초등학교부터 같이 나온 애들은 내가 김동규 아홉 살 때 담임선생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녔고 친하게 지내줘서 김동규가 그런 나를 호구같이 따라다니는 거로 알고 있다. 평소엔 별말 없이 따로 지내는데 간식 같은 거는 잘 챙겨줬으니까.

옛날에는, 그러니까 그 일 있기 전에는 친구들이 김동규를 그런 식으로 얘기할 때마다 하지 말라고 바로바로 지적을 했었는데 그 이후로는…… 가끔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라 나도 모르게 김동규보고 바보 같다느니 멍청이 같다느니 병신 새끼 같다고 한 번씩 내뱉었고 내 말에 친구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해도 그냥 방관했다. 그래놓고 집에 오면 또 미안해서 침대에 한참 엎드리고 누워 있었다. 병신 새끼는 김동규가 아니라 나인지도 모른다.

진주혁이 굳어 있어 몇 번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풀어줬더니 진주혁이 다시 평소의 가벼운 모습으로 돌아와 시답잖은 얘기들을 늘어놨다. 몇 명이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고 음악실 나가기 전까지 열심히 수다를 떨다 각자의 악기를 들고 내려갔다.

내년 이때쯤엔 수능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수시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합격 발표가 수능 전에 나와도 몇 점 받을지 궁금해서 보긴 볼 거였다. 내년에 스케줄 괜찮으면 연주회에 참여해도 되냐고 해볼까.

“…….”

바이올린 현을 누르고 활을 움직이자 잡생각이 사라졌다.

축제 끝나고 부모님과 저녁을 먹었다. 할아버지랑 할머니도 함께였다. 할아버지가 이미 내다 버린 의대 어쩌고 하는 얘기를 신나게 하셔 가지고 좋아하는 요리를 반밖에 먹지 못했다. 입맛 떨어져서.

할아버지의 얘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도대체 저 노인네한테 의대 안 가고 수학과나 물리학과 가겠다고 1학년만 한국에서 대학 다니다가 유학 가겠단 얘길 어떻게 꺼낼지만 생각했다. 엄마가 몇 번이나 할아버지한테 애 밥 좀 먹자고 입을 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엄마가 입 모양으로 ‘집에 가서 간단하게 뭐 먹자’라고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동규 아니니?”

엄마가 샌드위치 해준다고 그래서 엄마보단 아빠가 해주는 게 더 낫지 않냐는 얘길 막 하던 때였다. 주차장까지 들어가기 싫어 나와 엄마는 주차장 앞에서 내려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지금이…… 10시가 다 됐는데.”

“안녕. 안녕하세요.”

“뭐 하냐 여기서?”

“어? 나…… 그냥…….”

“또 하림이 뭐 주려고 온 거야? 작년에도 축제 끝나고 뭐 만들어 준 거 같은데. 아무튼 동규야 너어무 오랜만이다! 퇴원 소식 들었어. 병문안 못 가서 미안. 저녁은 먹었고?”

“네.”

엄마는 김동규보고 과일 먹고 가라며 김동규에게도 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샌드위치 한다는 걸 내가 뜯어말렸고 아빠가 만들겠다는 걸 아주머니가 간단한 주전부리 있으니 그거랑 같이 먹게 샐러드를 해주겠다며 막았다. 어차피 엄마나 아빠는 식사를 제대로 했고 나만 못 한 거라 차와 함께 나온 건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나는 먹을 생각이 안 들어 과일이랑 차만 먹었다. 김동규 먹으라고 그쪽으로 밀어줬다.

과일로 배를 채우고 방으로 올라왔다.

“집에 언제 가게?”

“몰라. 열한 시? 열두 시는 전에.”

피곤하다. 어째 축제에 공연하느라 힘든 것보다 할아버지 상대하는 게 더 힘들다. 나는 그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니 축축 늘어져 힘든 몸을 이끌고 침대에 가서 앉았다가 그대로 상체를 뒤로 눕혔다. 잘 거 아니고 그냥 힘든 몸을 어디에 기대고 싶은 거라 발도 까딱까딱거렸다.

“왜 왔어. 피곤해서 바로 쉬려고 그랬는데. 아, 아니다. 딸기타르트 맛있더라. 마카롱은 뭘 또 그렇게 많이 했어. 한 개씩만 먹어도 열 개라 배부르겠더라.”

“하림아, 나 퇴원 선물 줘.”

분명히 저 먼 책상에 앉아 있던 김동규였는데 언제 여기까지 온 건지 나는 내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김동규 때문에 엄청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줘. 퇴원 선물. 준다고 했잖아. 좋은 거.”

“그랬지, 준다고. 근데 나 존나 피곤하니까 내일 말해 내일.”

나는 다시 뒤로 누웠다. 김동규가 만들어준 타르트와 마카롱의 맛을 떠올리며.

“피곤하니까 한 시간만 수다 떨고 가자. 알겠지? 선물은 내일 일어나서 같이 사러 가자.”

“지금 줘. 지금도 줄 수 있는 거야. 비싼 거 아니고, 아니 비싼, 아니 값진 거긴 해. 돈 주고도 못 사는 거.”

왜 이렇게 귀찮게 굴지, 답지 않게. 피곤하고 지친 나는 조금 날 선 목소리로 도대체 뭔지 되물었다. 그랬더니 김동규가 다짜고짜 내 바지를 내리더니 속옷까지 죄다 벗겼다.

“야! 씨발, 지금 뭐 하는, 하……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퇴원 선물로 섹스라도 하자고?”

“하게 해줄 거야? 나는 그러면 너무 좋.”

“아니. 미쳤어? 허벅지에서 손 떼. 하, 진짜. 야. 손 떼라고 했어.”

김동규는 이 악물고 얘기하는 내 목소리에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놨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부산스러웠다. 속옷부터 입기 위해 그런 김동규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있던 김동규가 내 무릎을 깨물고는 갑자기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하림아. 너도 좋았, 좋았잖아. 저번에, 내가 내, 내가 젖꼭지 빨아주니까 너도 섰잖아. 내가 만져주니까, 만지, 만지니까 막, 막, 막 정액도 두 번이나 쌌, 싸고…….”

“그렇게 만져대는데 그럼 안 싸?”

허벅지를 잡아 강하게 누르는 힘에 침대에 억지로 앉혀졌다. 김동규는 내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봐…… 나 지금 조, 좆 터질, 터지겠, 터질 것 같아. 아, 알잖아. 나 너한테 맨날 존나 꼴, 려서 발정하는 거. 나 아까 네가 바이올린 여, 연주할 때도 이랬어. 강당에서 사정할 뻔했, 할 뻔한 거 겨우, 겨, 겨우 참았단 말이야.”

나는 김동규의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그래도 밀리지 않아 김동규의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김동규는 아픈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자기 말만 했다.

“내가 뭘 했다고 이래. 바이올린이든 피아노든 그냥 연주한 게 단데 거기에 짐승 새끼처럼 세운 건 너지 내가 아니야.”

“섹, 섹스는, 섹스…… 섹스는 하아…… 안 하, 안 하고 싶은 거 아니고 솔직히 지, 진짜 너무…… 너무 하고 시, 싶은데 나중에, 나중에 어른 되고 해도 상관없어. 차, 참을 수 있어. 참을게. 그러니까…….”

이상하게 대화의 핀트가 맞지 않았다. 김동규는 제 뒷머리를 쥔 내 손을 가볍게 떨쳐 내고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였다. 아 시발, 진짜 집에 아무도 없었으면 소리를 지르고도 남았다.

“하지 마. 김동규. 하지 말라고 했어.”

“너도 좋았잖아.”

“안 좋았어.”

“그럼 싸질 말아, 말았어야지. 발기하지 말았어야지. 진짜 싫으면 아, 안 그래.”

“야, 시발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진짜 하지 마. 떨어지라고!”

최대한 목소리를 누르면서도 화를 참지 않았다. 안 돼. 이대로는 진짜 나까지 미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김동규를 밀쳐 냈고 때렸다.

“부, 부끄러워서 그런 거면 불 끄고 올까? 이부, 이불 속으로 들어갈게.”

“됐다고 미친 새끼야 싫다고 했잖아.”

“문은 아까 다 잠가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하, 진짜…… 아, 하지 말라고!”

김동규의 입에 내 것이 들어가자 번개가 정수리에 꽂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는 진짜 죽을 것 같아서 다리를 들어 김동규의 어깨를 밀쳤다. 다리 힘이 팔보다 강해 김동규가 떨어지고 그 애의 입에서 내 것이 빠져나왔다.

“야 김동규, 하 시발 일단 좀 진정하자. 진정 좀 하고, 아 진짜 제발 그대로 좀 있어.”

뭔가 또 무너지는 것만 같다. 나는 김동규에게 애원조로 말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진정하라고.

“……너도 알 거 아니야. 남자들은 그냥 성적으로 흥분하는 거 아니어도 잘 서.”

“그럼 사정은 뭔데.”

“극도의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면 사정을 하기도 해.”

“넌 좋아했잖아. 흥분해서 신음 소리 냈잖아.”

김동규가 다시 기어와 내 다리를 벌리고 자리를 잡았다.

“동규야…… 진짜 부탁이야. 우리 이러지 말자.”

“가슴 빨아 달라고 나한테 계속 졸랐잖아. 그렇게 새빨개질 때까지 빨려서 아플 텐데도 느낄 정도로 예민해선 야한 소리도 내고…… 사정도 두 번이나 했어. 내가 그거 다 핥아 먹었는데 기억 안 나?”

다정하고 친절하고 세심하고 배려 깊은 김동규를 억지로 떠올렸다. 친한 친구, 같이 공부하는 스터디 메이트, 귀엽게 이것저것 만들어 가져오던 거나 손발이 찬 나를 항상 생각해 주는 것도.

“……솔직하게 말해보자. 그래. 싫진 않았어.”

“그럼 됐어.”

김동규가 입을 벌리는 걸 보고 손으로 김동규의 입을 막았다. 내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또다시 자기를 이해하려고, 이해해 보려고 하는지도 모르고 섹스에 미쳐 이러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씨발아, 하 진짜 좀 기다리라고 했잖아!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야, 어떤 남자가 그렇게 작정하고 자극하는데 발기를 안 하고 하…… 사정을 안 해? 아, 진짜 야!”

지 입을 가린 손바닥까지 핥아댄다.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김동규에게 맞춰주고 내주고 이해를 해줘야 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차라리 나도 김동규를 좋아하는 거면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김동규만 생각하면 심장이 지끈거리며 아파 오고 친구로서만 지내면 좋겠다는 아쉬운 마음뿐이었다. 그 외에는 불쌍하고 무섭고 그러면서도 언젠가 김동규를 내 손으로 죽이겠다는 분노로 차 있고.

“안 싫다며. 그럼 좋은 거지. 잘해줄게, 너 자위도 해본 적 없잖아. 그냥 자위 기구 쓴다고 생각해. 아니, 화장실. 그래 그게 더 낫겠다. 화장실에서 소변 싸고 똥 싸는 것처럼 내 입에 다 싸버려. 나는 다 좋아. 나는 너만 보면 발정 나고 너는 싫은 건 아니니까 적당히 성욕만 해결하고. 서로 윈윈이잖아.”

“우리 그냥 친구만 해. 그러자.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게 이런 의미는 아니었어.”

“응? 구석구석 잘 핥아줄게. 좋을 거야.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좆같은 아빠 때문에 몇 달씩이나…… 내 삶의 이유는 너 하나뿐인데…….”

“나는 너를…….”

“하림아, 빨아도 되지?”

“친구인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동규야…….”

김동규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내 것을 물었다. 진득하게 빨아대고 애무하는 혀 때문에 내 것은 착실하게 발기했고 몸이 달아올랐고 신음 소리가 나왔다. 너무 세게 빨아서 간혹 아프기도 했다.

“사, 살살해…… 아파…….”

정말로 내 정액을 그렇게 먹고 싶은지 귀두만 입에 물고 쭉쭉 빨아댔다. 이런 식이면 내 몸에 있는 모든 정액을 김동규가 다 빨아 마신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나는 김동규의 입안에는 사정하고 싶지 않아 제발 좀 떼라고 하지 말라고 얘기했지만 김동규는 결국 끝까지 내 것을 입에 물고 있었고, 나는 그 안에 사정했으며 김동규는 그걸 또 잘도 삼켰다.

“됐……지. 이제 비켜. 하…… 시발……. 나 진짜 이제 좀 쉬자.”

“그러면 한 번만 더 싸줘. 정액 한 번만 더 먹고 끝낼게.”

비리고 먹어봤자 맛도 없을 게 뭐라고 거기에 집착을 하는 거지.

“이제 그만해 진짜.”

“마지막이야.”

“쉬고 싶다고.”

“원래는 아무것도 안 나올 때까지 빨려고 그랬어.”

“도대체…… 정액을 왜 먹겠다는 거야?”

“많이 봐준 거야. 펠라 처음이잖아. 좋았지.”

말이 안 통해. 본능에 진 김동규는 앞뒤 분간도 못 하고 좆의 숙주처럼 군다.

나는 너무 피곤했고 힘들었고 더 이상의 소모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잖아. 얼른 싸고 쉬어. 응?”

축축한 감촉이 내 것을 다시 감쌌다. 빨든 싸든 비비든 얼른 끝내고 꺼져 줬으면. 김동규가 날 위해…… 아니 그것도 웃긴다. 날 위해서라는 놀라운 이유로 마지막으로 펠라를 하겠다는 걸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두 번째 사정을 했는데도 김동규가 떨어지지 않고 더 들러붙었다.

“더 안 빨 거야. 잠깐만.”

김동규가 내 것을 들고 혀를 빼더니 내 몸에 그런 곳이 있었나 싶은 곳을 핥아댔다.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키라고 아무리 말해도 김동규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아래를 핥고 빨아댔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빨리 김동규가 할 거 다 하고 이성이 돌아오길 바랐다. 두 다리를 잡아 올리고 엉덩이를 벌리지만 않았다면 그냥 누워 있기만 할 생각이었다.

“미친, 야!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싸면 그만둔다며!”

“그만둔다는 말은 안 했어. 많이 봐줬다곤 했지.”

“얼른 싸고 자라며!”

“그래. 그게 그만둔다는 말은 아니잖아.”

들쳐 올린 다리를 눌러대는 탓에 일어날 수도 없었다. 머리에선 사이렌이 울리며 온갖 미래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 지금 김동규보고 혀 깨물고 죽으라고 할까. 김동규라는 친구가 사라진 내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친구들은 또 김동규의 죽음을 뭐라고 비웃을 것이며 그렇다고 이대로 김동규랑 끝까지 가야 하는 건지, 시발 미친 새끼가 그렇게 섹스를 하고 싶으면 지가 박히든가 아니 김동규랑 섹스를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짧은 순간에 수천 가지의 생각들을 떠올리며 나는 마지노선을 정하고 모든 생각을 그 마지노선에 따라 정리했다.

“넣으면…… 우린 끝이야.”

나 때문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김동규를 위한 최후의 한계선. 끝까지 했다간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을 것이다. 매번 이런 진한 성행위를 허락하진 않겠지만 김동규와 삽입은, 누가 넣든지 간에 끝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안 넣어. 참는다고 했잖아. 참을 수 있다고. 아니면 네가 넣을래? 좀 안 내키긴 하는데 누가 박는지가 너한테 중요한 거면 그 정도는 양보할 수 있어.”

나는 김동규의 단어 선택에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너는 그게 양보……. 어떻게든 하긴 하겠다는 생각이구나 너는.”

“끝까지 안 해.”

“…….”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 차라리 김동규네 아빠가 진짜로 김동규를 찔러 죽였으면 좋겠다. 상상도 못 할 뒤를 빨면서 눈물까지 흘려대는 김동규가 징그럽고 그런 김동규 때문에 흥분하는 내 몸은 혐오스러웠다. 끝까지…… 끝까지 하면 죽어 버릴 거야. 김동규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아니, 사실은 죽고 싶지 않다. 내가 왜 김동규 때문에 죽어야 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신음을 죽였다.

“대답…… 하지 말고 듣기만 해.”

“응응.”

아, 여전히 뒤를 핥아대는 김동규의 혀가 너무 끔찍하고…… 또 발기하는 내 거길 도려내고 싶고…….

“내가, 내가 연락할 때까지 절대로 먼저 연락하지 마. 나한테…… 말도 걸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마. 학교든, 밖이든, 집이든. 쥐 죽은 듯이 지내. 어쩌다 복도에서 부딪히거나 교실에서 마주치면 네가 피해. 알겠어?”

“응, 알겠어.”

김동규는 내 뒤를 빨다가 사정을 했고 발기한 내 것을 보고서는 나를 씻겨주겠다고 한 걸 내가 빨리 꺼지라며 내쫓았다. 그 상태로 누워서 아랫도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다. 울고 싶은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하고 온갖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심장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일어나 앉아 힘을 잃은 내 것을 바라보고…… 김동규가 빨아주던 게 생각나 머리를 털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한참 맞기만 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김동규와 생각들을 미뤄두고 무거워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비워내기 위해 애썼다.

왜 이렇게 힘들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김동규가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아빠한테 맞고 쓰러지고 실려 오고 그러는 게 불쌍해서? 걔가 날 좋아해서? 아무리 아빠 때문에 좆같아도 나만 보면 좋다고 웃어서? 나는 그런 김동규를 좋아하지 않고 그저 성욕만 느끼고 있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논리적으로.

바뀌지 않을 거, 내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는 게 첫 번째 순서였다. 예를 들어 어떤 선생님이 있는데 이 선생님은 교과서에 적힌 것보다 자기가 정리해서 나눠 주는 프린트에서만 시험 문제를 낸다고 했을 때 학생인 내가 할 일은 프린트를 보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 거지 바보처럼 교과서를 달달 외울 게 아니다. 그리고 또 내일이 소풍날이고 소풍 갈 생각에 너무 설레서 도시락도 잘 싸고 간식도 잔뜩 챙겼지만 아침에 비가 와서 취소가 됐을 때 학교에다 따지거나 속상해 울 게 아니라 소풍이 언제로 미뤄지는지 확인하고 학교로 정상 등교해 수업을 듣는 게 맞다.

바뀌지 않는 것은 김동규가 미친 새끼라는 거, 내가 김동규에게 성적으로 반응을 한다는 것이었고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아니지만 남고생 둘 이상 모이면 하는 얘기가 여자 아이돌 이야기, 게임 이야기, 자위 이야기밖에 없고 그건 그만큼 내 나이 또래들은 성적인 유혹에 아주 취약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단 소리다.

다른 친구들처럼 자위나 섹스에 미쳐 있지도 않고 욕구불만인 것 같으면 운동으로 해소하는 편이라 지금까진 몰랐지만 생각보다 나도 성적으로 잘 느끼고 흥분하는 것 같으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맞았다. 딱히 김동규 때문이 아니어도 나중에 연애를 하고 결혼 생활을 할 때 즐거운 섹스 라이프를 위해 인정을 하는 거였다. 내가 잘 느끼는 편인가 보지. 그렇게 생각하니 김동규 때문에, 김동규에게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좀 더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도 비우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여기까지만 하고 욕실을 나왔다.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고 샤워가운만 입은 채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잠옷으로 갈아입는 것도 까치집이 된 머리를 정리하는 것도 아닌 김동규가 만들어 아주머니에게 전달한 케이크나 어제 먹고 남은 마카롱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이었다. 처음엔 그냥 상자째로 통 안에 던져놓고 말았는데 세수하려고 화장실 가다가 되돌아와 버린 것들을 쓰레기통에서 꺼낸 다음 발로 밟아 부수고 짓이겼다.

바닥은 상자에서 튀어나온 생크림이나 부스러기들로 엉망이었고 내 실내화도 마찬가지였다. 실내화도 벗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시끄러운 소리에 아주머니와 이모님이 내게 달려왔다.

“하림아, 무슨 일이야?”

“아주머니, 제가 김동규가 준 케이크 먹으려고 꺼내다가 실수로 떨어뜨렸거든요. 대충 쓰레기통에 치우긴 했는데…… 죄송해요.”

“아니에요. 제가 치울게요.”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해도 화가 가시질 않아 씩씩거리며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서는 서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떤 미친 새끼가…… 귀중한 토요일 아침에 전화질이야.

“서하늘 깼어?”

-야이 서하림 이 시발놈아. 지금 12시도 안 됐어.

“깼으면 우리 집으로 밥 먹으러 와.”

-좆까. 아…… 다시 잘 거야.

“할 말 있어. 응? 야아 서하느을.”

-어디서 되지도 않는 애교를 떨어대. 딴 애들은 몰라도 누나한텐 하나도 안 통하거든.

“아 됐어. 걍 자라 자.”

-무슨 일인데?

“주무신다면서요.”

-뭐래 미친놈이. 다 깨워놓고.

“올 거야?”

-아우님이 이 누님의 도움을 그러엏게 필요로 하신다니 내키지는 않지만 행차해 주셔야지 어쩌겠어.

“아 오지 마 오지 마.”

-갈 건데? 갈 건데? 조신하게 이 누님이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밥상 딱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어라.

내게는 이 결론이 최선은 못 되더라도, 차선의 혹은 열 번째나 백 번째 결론일지라도 최악의 결론은 아니라고 인정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껏 18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내린 결정에 후회한 적도 없고 틀렸다고 의심을 해본 적도 없는데 이번에는 타인의, 서하늘의 말이 필요했다. 내 안의 파도와 폭풍이 너무 거세서 그렇다. 혹시라도 거기에 휩쓸려 최악의 결론을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을까 봐.

먹는 반찬마다 맛있다며 아주머니에게 살갑게 군 서하늘과는 다르게 나는 밥을 얼마 먹지도 못했다. 얘가 나보고 틀렸다고 하면, 만약에 그러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얘길 해야 하는 건지, 김동규랑 그렇고 그런 걸 다 했다는 건 도저히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뭐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새벽부터 깨워댄 이유가 뭔데.”

서하늘이 내 방문을 닫으며 물었다.

“새벽 아니고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었어.”

“아무튼. 너 설마 연애해? 누구야? 헐 우리 학교야? 너네 반? 딴 학교?”

“아니야 그런 거.”

“뭐야 뭔데!”

나는 침대에 앉았고 서하늘은 책상 의자를 끌어와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존나 궁금해. 너 연애하지. 연애문제지. 백 퍼 이건 연애 고민 상담이야. 삘이 그래.”

“아니라고.”

“헐 미친 설마 그럼 짝사랑? 야 나한테 이럴 시간에 빨리 가서 고백해. 실패 확률 제로를 넘어선 마이너스다.”

“아니라니까.”

“걔 남자 친구 있대? 다른 애 좋아한대? 대박 나였으면 남친 버리고 너랑 사귄다. 아 오해하지 마. 우린 가족이잖아.”

“오해 안 해.”

“와 대박인데. 혹시 그 친구…… 실례지만 앞을 못 보는 친구야?”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야? 세상 모든 여자애 나 빼고 네가 좋다 하면 다 넘어갈 텐데.”

“그런 문제 아니라고. 계속 아까부터 아니라고 그랬잖아.”

“아 그래? 갑자기 재미없어졌어.”

반짝거리던 눈동자가 흥미를 잃고 동태눈깔이 됐다. 서하늘이 의자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내 책장을 뒤적거렸다.

“그럼 뭔데요. 말씀하세요, 아우님. 대충 들어줄게. 엥 너 수학의 정석 뗀 지가 10년이 다 돼가는데 왜 아직도 안 버리고 갖고 있어?”

서하늘이 책장 제일 위에 꽂혀 있는 수학책을 펼쳐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겼다. 저건 김동규 때문에 갖고 있는 책이었다. 여덟 살에 영재원 입학해서 첫해에 초등학교 과정 끝내고 다음 해에 중학교 과정 끝낸 뒤 세 번째 해에 고등학교 과정 시작할 때 풀었던 책이기도 하고. 아직 중학교 과정을 한창 마무리하던 때, 김동규와 만났고 우리 집에 김동규가 놀러 왔었다.

‘우와 너 이런 것도 다 알아?’

내가 무슨 말만 해도 대단하다며 박수를 치는 김동규 때문에 조금 으쓱해진 나는 유치원 졸업하고 할아버지가 장식용으로라도 꽂아놓으라며 사둔 수학의 정석을 꺼냈다.

‘이건 고등학교 가야 푸는 건데 나는 내년부터 이거 푼다?’

‘진짜? 멋지다! 그럼 나중에 나도 고등학교 가면 네가 알려줘.’

‘내가?’

‘응! 이 책으로.’

‘이거?’

‘그래. 이거 얼마지.’

‘아니 아니, 새 책 말고 네가 다 푼 거.’

‘내 거?’

‘응.’

‘새 책이 더 좋은 건데?’

‘나는 네 책이 더 좋아.’

‘그래!’

빳빳하고 깨끗한 새 문제집을 푸는 게 얼마나 좋은지 김동규는 왜 모를까, 하던 나는 김동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 책을 다 끝내고 나서도 책장 제일 구석에 넣어뒀었다. 그대로 잊어버렸는데 작년 가을 김동규의 손에 의해 발견되어 아래 칸으로 옮겨졌다.

‘이거 몇 년 만에 꺼내보는 건지 모르겠다.’

‘서하림 글씨체 완전 아기 글씨체인 거 봐.’

‘처음 풀었을 때가 열 살이었나…….’

‘아 글자랑 숫자 꼬물꼬물하고 삐뚤삐뚤한 거 완전 귀여워.’

‘난 필요 없으니까 너 가져. 있단 것도 까먹고 있었네.’

들떠 보이는 김동규는 어린 시절의 내가 적어놓은 내 이름 옆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는 어차피 공부는 내 방에서 하니까 나중에 다 풀면 가져가겠다고 책을 도로 꽂았다.

“……친구가 있어.”

“응.”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잖아. 그래서 나는 이해도 안 가고 못 하겠는 부분을 그냥 걔는 원래 그런 애라면서 받아들이기로 했어.”

“저번에 걔? 잠수 탔다는 애.”

“아니.”

“어느 부분이 안 맞는데?”

“그냥…… 일방적이라서.”

“어떤 게?”

“평소에는 괜찮아. 친하고 마음도 잘 맞고. 그런데…… 종종 걔가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해.”

“그걸 왜 참고 받아들여?”

“그거야…….”

“그거야?”

“……내가 진짜로 그 행동을 싫어하진 않아서.”

“그 행동이 뭔데?”

“그건 말 못 해.”

“뭐, 걔가 친구들 패고 다니고 괴롭히고 그러는데 너도 사실은 그걸 즐기고 있다 뭐 그런 건가.”

“맥락 자체는 아예 다르진 않아.”

“그래서 그다음은. 너도 걔의 일방적이고 비도덕적인 뭔 행동을 받아들였다? 그럼 됐는데 왜 아침부터 사람을 깨우고 부른 거야? 네가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니지만 걔가 하는 행동을 완전 끊어내진 못하겠고 그래서 양심에 찔려서 고해성사라도 하겠다고?”

“아니. 그냥 평소의 좋은 모습인 걔랑 이상한 모습인 걔를 나 편한 대로.”

“너 편한 대로 이용해 먹으시겠다?”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서하늘이 다른 책을 펼치더니 “어후 난 진짜 천재는 못 하겠다”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해. 뭔 상관이야. 원래 나쁜 행동들은 걸리지만 않으면 돼. 나 봐. 몰래몰래 잘만 피우고 다니잖아. 맘 편하게 생각해. 일탈이라고. 이유를 굳이 붙이고 싶으면 공부하다 미쳐버려서 적당히 일탈하고 싶은 거라고 붙이든가. 아궁 우리 동생 누나한테 허락받고 싶었구나?”

서하늘이 음흉하게 웃으며 네 맘 이해한다고 고갤 끄덕였다.

“허락은 무슨 허락이야.”

“만약에 걔가 하는 행동이 진짜 죽도록 싫었다면 네가 말한 평소에 좋았고 친했고 했던 부분도 다 밉게 보이게 되는 법이야. 왜, 정떨어지면 밥 먹는 게 처먹는 거로 보인다잖아? 아 말하니까 생각 난 건데.”

전에 엄청 싸우고 절교했단 친구와의 이야기를 서하늘이 길게 얘기했다. 처음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서하늘이 말을 너무 재밌게 잘 해서 마지막엔 잘 싸웠다고 박수도 칠 뻔했다.

그 후에도 나는 김동규가 아주머니를 통해 전달하는 모든 음식, 음료, 디저트를 손도 대지 않고 버렸다. 나중엔 쓰레기통에 떨어져 뭉개진 케이크를 보며 왜 이걸 내가 버리고 있어야 하는지 화가 나 아주머니가 김동규에게 받아 냉장고에 넣어둔 것들을 다 녹고 상하라고 주방 아무 데나 던져 놨다. 그러고 나니 그 뒤론 아주머니가 김동규한테 받자마자 알아서 버려주셨다. 내가 김동규랑 싸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나한테 싸운 이유를 묻지 않고 김동규에게도 내가 먹지 않고 버린다는 걸 얘기하지 않아 감사했다.

내가 열심히 버리는 줄도 모르고 김동규는 겨울방학동안 착실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 갖다 바쳤다. 한 번 마음을 정하니 김동규가 만든 것들을 버려도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고 평온했다.

고등학교 3학년을 준비하는 방학은 너무너무 바빴다. 영재원 친구랑 과학 동영상도 찍어야 했고, 찍으려면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 괜찮은 걸 골라 3분 정도의 요약 대본을 써야 했고 친구가 옷도 좀 매번 멋있게 입고 오래서 뭘 입고 나갈지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옷 고르다 보면 괜히 한다 그랬나 좀 회의감이 들기도 했는데 막상 동영상 올라가고 내가 추천한 책들을 구매해서 재밌게 읽었다고 하면 어깨가 우쭐해졌다. 과학이 대중들과 멀어진 게 슬픈 사람 중 하나라.

방학엔 아예 김동규를 보질 않아 괜찮았지만 이따금 김동규가 생각날 때면 우울해졌다. 나는 그런 나를 꾸짖으며 일부러 더 바쁘게 지냈다. 개학하기 전에 새 학기 반 발표 확인하고는 김동규랑 같은 반이라 좀 걱정했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김동규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싫었고 슬프거나 울적하거나 심장이 아프거나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뭘 해도 김동규는 괜찮은 애니까 화나면 화나는 대로 생각 안 거치고 김동규를 욕하고 짜증 나는 일이 있어도 김동규 탓을 하고 안 좋을 일도 다 김동규에게 밀어버리기로 다짐했다.

김동규랑 하는 이런저런 것들도 적당히 느끼고 즐길 수 있으면 느껴보고 대신 끝까지만 가지 않도록, 만약에 김동규가 나랑 억지로 끝까지 하려고 한다면 죽어버린다고 할 거였다. 그러면 김동규는 자기 허벅지를 뜯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멈출 테니까. 김동규에게 내 존재는 무척이나 컸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요즘은 김동규가 왜 아무것도 안 갖고 와?”

3학년 대표로 성적 우수상 받고 돌아왔더니 반 친구들이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듣지도 않고 삼삼오오 모여 과자를 까먹고 있었다. 대놓고 가리키진 않았지만 친구들이 김동규를 흘깃 쳐다보거나 턱짓을 했다.

“맞아. 걔가 만든 거 맛있는데.”

“먹을래?”

“아니.”

“아 너 이런 과자 안 먹지.”

“아침부터 달달하니 김동규표 곰돌이 쿠키 먹음 딱일 거 같은데.”

“…….”

“싸웠네 싸웠어.”

아무리 나랑 서하늘이 친척이고 등수도 비슷하다지만 어떻게 초중고 12년 중에 딱 한 번 그것도 초등학교 5학년 때를 제외하곤 같은 반이 되지 않은 건지 이럴 때면 운명이 참 야속했다. 랜덤으로 반 나누고 상위권 학생들이 한 반에 몰리지 않도록 조정을 한다고 하던데 그래도 서하늘이랑 같은 반이 되지 않은 게 조금은 아쉬울 때가 있었다. 사실 걔랑 나는 가족도 가족인데 친구에 더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김동규도 대단하다. 어떻게 서하림이랑 싸울 생각을 하냐? 잘못을 서하림이 했어도 지가 빌빌 기었어야지.”

게다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진주혁이랑 같은 반이 되었고 아기 때부터 친구였던 김유찬이랑 진주혁이 친해서 진주혁까지 같이 다니게 되었다. 김유찬은 소심한 편이고 진주혁은 생각 없이 텅텅 빈 애라 둘이 어떻게 친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친구 중에서 심심하면 김동규를 들먹이는 건 진주혁이었다.

내가 봤을 때 진주혁은 굉장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김동규한테. 1학년이랑 2학년 때는 김동규랑 같은 반도 아니었고 성적도 진주혁은 바닥을 기는 데다가 키도 작고 뚱뚱해서 김동규한테 상대 될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혼자 맨날 김동규 김동규거렸다. 김동규보다 나은 건 좋은 집안 딱 하나였다. 진주혁은 부모님이 한 분은 국립대 교수, 한 분은 인사동에서 큰 갤러리를 운영 중이다.

정작 김동규랑은 제대로 얘기 한 번 해본 적도 없으면서 뒤에서 얘기하는 게 한심했지만 나는 진주혁이 김동규에 대해 뭐라고 떠들든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남 눈치 많이 보고 소심한 김유찬이 진주혁이 도를 넘을 때면 자제시킬 정도였다.

“하아. 김동규랑 서하림이랑 같은 반 된 거 보고 맛있는 거 먹을 생각에 기대했는데. 둘이 싸웠을 줄이야.”

“너 김동규랑 싸운 지 꽤 됐지?”

“좀.”

“미친놈. 꼴에 자존심 센가 봐. 존나 웃기다.”

교실 문이 열리고 학생부장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에게 서류봉투를 하나 건넸다. 모의고사 1등급 맞은 학생들에게 주는 상장이었다.

“자자, 이름 부르는 사람 나와서 상장 가져가라.”

가나다순으로 이름이 불렸고 우리 반 거의 대부분이 한 과목 이상은 꼭 상장을 받았다. 거기에 진주혁은 없었다.

“이거 봐. 서하림은 전 과목 1등급이라서 상장에 과목명 다 써져 있는 거. 나는 겨우 두 과목밖에 안 써져 있는데.”

“얘 그냥 1등급 아니라 올백이야.”

“모의고사를?”

진주혁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며 물었다. 어깨만 으쓱하려다가 상장으로 부채질을 하며 입을 뗐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눈 감고 풀어도 만점 받을 수 있어. 3월은 쉽잖아.”

할아버지가 들었다간 호통을 칠 말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할아버지가 지금 여기 있는 것도 아닌데.

“진짜 서하림 유학 가도 지니어스 코리안이라고 불리는 거 아니야?”

“서함 1학년 때부터 대학 수학? 공부하고 있다며. 내가 서하림 뇌 갖고 있었으면 초등학생 때부터 해외로 튀었어.”

뒤에선 욕하더라도 칭찬을 들으면 고래도 춤을 추기 때문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1교시를 준비했다. 얘기가 흘러 잊을 만하면 나오는 얘기인 유튜브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친구들에게 얘기하긴 좀 부끄러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영재원 친구가 하는 거라며 말을 돌렸다. 이래서 연예인들이 일반인인 친구가 자기가 나온 드라마나 영화 나오는 걸 못 보게 한다는 거구나 싶었다.

“그리고 서하림이 너 정말 방과 후 안 할 거냐?”

나만 보면 미래의 후배라느니 동문이라느니 하는 수학 선생님은 할아버지와도 인연이 있었다. 뭐 같은 학교니까 인연이 있으려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제 딸뻘인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이랑 친해 봐야 얼마나 친할까 싶어서 내가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내는 사람이었다. 내가 자길 싫어하는 걸 뻔히 알 텐데도 수학 선생님은 나한테 말을 못 걸어서 안달이었다.

“너 인마 인터넷에 이상한 거 올려대느라 시간 뺏기지 말고 할아버지 말 따라서 의대 갈 생각이나 해.”

“이상한 거요?”

어지간하면 그냥 평소처럼 개소리 지껄인다 생각하고 좋게좋게 넘어갈 생각이었으나 ‘이상한 거’라며 내가 한 일을 무시하는 말에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선생님 말에 따박따박 대꾸하고 따라 나오래서 나갔다. 복도로 나온 선생님과 갈 데까지 싸워볼 생각이었는데 선생님이 그놈의 할아버지를 들먹거리는 바람에 전의를 상실했다. 짝다리 짚고 서서 한심하단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다 하품을 하고 머리를 긁고 창문이나 복도 바닥을 무료하게 바라보며 얼른 개소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할아버지 가지고 협박을 해도 겁을 먹지 않는 내게 당황했는지 선생님 말이 끝날 줄을 몰랐다.

“선생님. 벌써 15분 흘렀는데요.”

반장인 송정연이 나이스 타이밍에 치고 들어왔다. 내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라고, 여기가 학교냐 학원이냐 하며 맞는 말만 하는 송정연에게 교실로 들어오며 엄지를 날렸다. 그러자 송정연이 멋지게 웃으며 쌍따봉을 들어 올렸다.

감사의 의미로 송정연에게 음료수를 사주고 사건이 깔끔하게 종결됐는데도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할아버지한테 어떻게 얘길 해야 좋을지 고민 중이었는데 그걸 선생님이 후벼 팠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랑은 이미 개학 전날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도 아빠도 내 선택을 존중하며 잘 생각했다고 해주셨다. 특히 아빠가 기특하다고, 저번에 아빠로서 너무 철없이 얘기한 건 아닐까 걱정했었다고 그러는데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나는 전부 알 수 없지만 아빠가 의사란 직업을 선택한 이후의 삶이 얼마나 심적으로 힘들었을지 싶어서. 엄마는 엄청나게 좋아했다. 엄마는 내가 꼭 공부가 아니라 뭘 해도 다 좋다고 할 사람이라 딱히 놀라운 반응은 아니었다. 내가 환경미화원이 되겠다고 해도, 고고학자가 되겠다고 해도, 오지 탐험가나 하다못해 병아리 감별사가 된다고 해도 내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해줄 분이었다.

“하…… 최종 보스가 답도 없는 노인네라 문제네.”

내일 검사 맡는 과외 숙제를 예정대로였으면 이미 다 풀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나는 오늘 몫의 여덟 장 중 겨우 반쪽 그러니까 두 문제밖에 풀지 못했다.

서하늘이 가족만 아니었어도 할아버지한테 뭐라고 얘기할지 같이 의논해 보겠는데 서하늘이 친척이라 문제였다. 비록 얘는 아빠 쪽 사촌이고 할아버지는 엄마 쪽이긴 해도 엄마 쪽 친척들과 아빠 쪽 친척들이 왕래가 잦아 서하늘도 어릴 때부터 엄마 쪽 할아버지를 몇 번 봤었다. 서하늘은 아빠 쪽 할아버지는 엄청 좋아하지만 우리 엄마 쪽 할아버지는 꼰대 완전체라고 극혐하고 있어서 서하늘에게 객관적인 입장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나도 사실 아빠 쪽 할아버지가 더 좋다. 친절하고 젠틀하고 권위적이지도 않고 잔소리도 안 하고.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에게 얘기하긴 싫었다. 내가 고작 할아버지한테 말도 못 하고 쩔쩔매는 걸 보여주기 싫어서. 쩔쩔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럴 때 가장 적합한 사람이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지우며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문제를 꾸역꾸역 풀어갔다. 그런데 별로 힘도 안 줬는데 아까까진 괜찮던 샤프심이 자꾸 부러지고 기본적인 사칙연산이 계속 틀리고 오늘따라 지우개가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좋아.”

깔끔하게 포기하고 샤프를 내려놨다. 문제집도 노트도 덮었다.

“오늘 선생님이랑 싸워서 연락하는 거 아니고 슬슬 연락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할아버지 문제 때문에 시간 잡아먹으면 존나 효율 떨어지고 그래서 빨리 해결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고 그 전에 오늘 갑자기 연락하면 김동규가 선생님 때문에 연락한다고 오해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얘기하는 게 먼저야.”

작년 김동규 퇴원 이후로 얼어버린 대화창을 열어 메시지를 보냈다. 손가락이 날아다녔다.

〈너네집에]

〈뭐 디저트 남는 거 없어?]

〈좀 단 거로]

〈많이 단 거 먹고 싶어]

한 시간만 기다리라는 김동규와 대화를 마치고 나니 심장이 쿵쿵거렸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건데 이상하거나 어색하진 않았겠지. 집으로 들어오게 해야 하나? 아니면 밖에서? 김동규와 그 짓을 했던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밖에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의자에서 일어났다. 뭘 입고 나갈지 한참 고민하고 거울 앞에서 또 한참 서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아 샤워도 하고 나왔는데 20분이 남아 그냥 밖으로 나갔다. 분명 샤워 30분은 한 것 같은데 아니어서 놀랐다.

우리 동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김동규를 기다리며 미끄럼틀을 타고 그네를 타고 시소도 혼자 타고 어린이용 암벽등반도 정복하고 벤치에 앉았다. 그러자 택시 하나가 우리 동 앞에 도착하더니 김동규가 뛰어내려 도어락을 눌렀다.

나는 그런 김동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동규야, 하고 조그맣게 그 애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거리가 있어 내 목소리는 김동규에게 닿지 않았을 텐데도 김동규가 내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뒤를 돌았다.

“뭐야. 걸어온다면서 택시 타고 왔잖아 거짓말쟁이야.”

“…….”

“시간은 진짜 딱 한 시간 걸렸네. 쓸데없이 칼 같은 놈.”

기다리느라 이 어린이 놀이터에 있는 모든 놀이 기구를 다 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김동규의 눈이 눈물이라도 고인 것처럼 유난히 반짝거려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김동규가 들고 있는 게 궁금하기도 했고.

“김동규.”

“……응.”

“그거 뭐야? 손에 든 거.”

“달고나야.”

“헐, 이름부터 벌써 달아.”

“설탕 왕창에다 소다 한 꼬집 들어가. 단 거 필요하다며.”

“난 적당히 많이 단 거 먹고 싶다 했지 녹인 설탕 굳힌 걸 먹겠단 소린 아니었는데.”

“녹인 설탕 나부랭이가 아니고 엄연히 달고나라는 귀여운 이름이 있어.”

김동규는 다른 지역에서는 이게 뽑기라고도 불린다며 달고나 정 가운데에 있는 모양만 남기는 이상한 유래를 알려주었다. 쉬울 줄 알고 해보겠다고 했다가 전혀 쉽지 않아 꽤 고전했다. 이게 다 김동규 때문이다. 오랜만에 불렀어도 단 냄새 폴폴 풍기며 달려온 김동규 때문에 자꾸 심장이 지끈거리고 손이 떨리고, 그래서 별거 아닌 걸 자꾸만 부러뜨리고 실패하고 그런 거다.

죄다 부셔 먹고 자존심을 내려놓은 채 가장 쉽다는 세모를 골랐다. 1단계의 세모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한 거였는데 막상 깔끔하게 세모만 남으니까 뽑기에 성공한 내가 자랑스러워 김동규보고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와, 이게 뭐라고 성취감 장난 아니다.”

“원래 넌 뭐든 열심히 잘하잖아.”

“맞아. 그렇긴 해.”

내가 말이 없으니 김동규 쪽에서도 말이 없다. 나는 오늘 부른 건 선생님 때문에 그런 거 아니고 원래 이때쯤에, 중간고사 전이나 후에 연락하려 했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려다가도 내가 왜 얘한테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 거며 김동규가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선생님 때문에 단 거 만들어 오라고 시킨 게 뭐가 그리 큰 잘못인지 혼돈에 빠져 세모 모양의 달고나를 조각내고만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달고나가 다시 설탕 가루가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 내 손을 김동규가 잡아끌더니 손끝에 입을 맞췄다. 다시 심장이 지끈거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김동규가 손가락을 빨아버릴 것 같아 주먹을 쥐었다.

“밖이야.”

“이 정도는 가까이서 보는 거 아니면 뭔지도 몰라.”

“밖이라고.”

“핥기만 할게. 손만 아니 손가락만.”

나는 최대한 김동규가 흥분하지 않도록 차분히 김동규를 진정시키고 설명했다.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신중을 쏟았다. 가끔 김동규한테 화가 나서 그걸 김동규에게 풀더라도 나는 기본적으로 김동규에게 친구로서 기대하는 것이 컸다. 세상 모든 사람이 김동규를 그저 불쌍한 애라고만 판단하고 재단할지라도 나는 늘 내게 다정한 말을 해주고 공감해 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친구가 필요했고, 좋았다.

“우리 그냥 이렇게, 동규야. 음…… 같이 공부하다가 가끔 머리 식히러 나와서 네가 만들어준 거 먹고 뽑기 얘기처럼 재밌는 얘기도 하고 그냥 이렇게 보름달 아래서 밤바람 쐬고 선생님 욕도 하고 친구들 뒷담이나 까고 나중에 대학생 돼서도 다른 학교 다니든 같은 학교 다니든 종종 만나서 과제 좆같다 교수가 별로다 그런 얘기하고 그냥, 그러면 안 돼? 난 진짜 잘 모르겠다. 왜, 왜 어쩌다 그런, 그런 거까지 우리가 해야 하는지…… 너도 좀 진정할 필요가 있어 보여.”

묵묵히 내 말을 듣는 김동규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렇게 얘기해봤자 김동규가 크게 바뀔 거란 기댄 하지 않는다. 아예 얘길 안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래서 하는 거다. 끝까지 하는 것만 아니라면, 아프게 하지만 않는다면 나도 김동규랑 그런 걸 아예 못 할…… 것도 없고. 친구들끼리 야한 영화 보다가 꼴려서 같이 자위하거나 몸을 더듬기도 한다고, 친구들이 옛날부터 그랬다. 나는 걔네랑 한 번도 그런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는 걸러 듣는다고 해도 아예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 같지는 않았다.

“네가 날 좋아하는 건 알겠어. 많이,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거 알겠어. 하지만 동규야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내가 부탁할게. 우리 그냥, 평범하게…… 특별하고 소중하지만 평범하기도 한 그런 사이로 지내면 안 될까.”

하지만 또 모르지. 지금은 이렇게 좋은데 김동규가 입을 맞추고 몸을 맞대오면서 억지로 하려고 하면 김동규에 대한 분노 때문에 한동안 김동규를 막 대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서로 얘기를 나누고 합의를 하고 그런 과정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우리…… 좋았잖아, 그 전까지.”

시선을 내린 채 내 말을 듣기만 하던 김동규가 갑자기 두 귀를 막더니 제 허벅지 위로 상체를 엎드렸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

“야, 김동……규?”

“하하, 하림이가…… 아…… 아아아아아아! 흐으, 아…….”

이상한 소리를 내며 김동규가 다리를 떨어대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중간중간 목소리가 커지면 스스로도 놀라 움찔거렸다. 나는 김동규에게서 떨어져 김동규가 진정될 때까지 또 내가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기다렸다.

전에 부모님이 이혼한다고 얘기했을 때도 이랬다. 분명 김동규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상한 부분이 있었고 나는 휴대폰을 꺼내 김동규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김동규가 간간이 들리는 내 이름을 중얼거릴 때면 휴대폰을 든 손이 떨려왔지만 이 또한 김동규의 모습이었다. 이건 아마도 김동규가 가진 최초의 기억부터 있었다던 아빠의 폭력 때문에 뭔가가 고장 난 김동규의 모습일 것이고 나는 그런 김동규가 불쌍하고도 안쓰러워 눈물만 나왔다.

인생의 반을 함께한 김동규는 내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을 너무나 격렬하고 선명하고 또 뜨겁게 새겨 놓는 존재였다. 벗어나고자 하면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김동규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기인한 불가항력적인 모든 요소 때문에 김동규를 외면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독하게 마음먹고 끊었다간 김동규는 바로 죽어버릴 것 같아서. 그러면 혼자 남겨진 나는 김동규가 멋대로 남겨 놓고 간 모든 감정이 텅텅 비는 걸 바보처럼 보고만 있어야 했다. 죽음이란 게 그렇다.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떠난 이의 빈자리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고 추억하는 게 전부다. 시간이 흐르면 일상으로 돌아와 괜찮아지겠지만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죽은 사람을 완전히 잊지는 못하지 않던가. 내게 김동규만큼 드라마틱한 감정을 느끼게 해줄 사람이 과연 또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만나게 된다면 죽을 때까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다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김동규의 등을 토닥였다.

“동규야, 김동규. 괜찮아? 동규야, 나 서하림인데 내 말 들려? 괜찮아?”

“……서하림?”

“응, 나야.”

“하림아, 서하림…….”

김동규는 내 말에 떨던 몸을 멈추고 뭉개진 채로 빠르게 쏟아내던 말들을 멈췄다. 귀를 떼 낼 정도로 세게 붙들고 있던 것도 느슨하게 풀어 그냥 그렇게 엎드리고만 있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죽음보다 더 죽음 같은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김동규만큼 내 심장을 쥐고 있진 못하겠지. 나는 때때로 김동규가 내 심장을 쥐고 터트리는 것 같단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김동규를 생각하면 심장이 아프고 지끈거리고.

내 눈물이 다 마르고 김동규가 괜찮아질 때까지 그 애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바람을 따라 흩어지고 날아다니는 벚꽃 잎들을 셌다. 천천히, 아주 오래도록.

김동규를 찍은 동영상을 들고 상담 센터를 가자니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가면 병원 정신과랑 연결해 줄 것 같아 자칫하면 엄마나 아빠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 들어갈 것도 걱정됐다. 김동규가 원한 것도 아닌데 내가 괜히 나섰다가 우리 엄마나 아빠가 알게 되고 그러면 김동규가 더 상처받는 건 아닐지도 무서웠고.

“얼굴은 또 왜 그래?”

“누구겠어. 안 부러졌으니까 걱정 마. 코피만 좀 났어.”

아니면 차라리 가정 폭력으로 아빠를 빨리 신고하라고 강하게 얘길 해볼까. 김동규는 미성년자니까 국선 변호사를 쓸 수 있겠지만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엄청 비싼 변호사를 붙여주면, 그러면서 청소년 심리 상담 센터 같은 곳을 다니라고 그러고. 하지만 알아봤는데 가정 폭력이 생각보다 형량이 높지가 않아 아무리 좋은 변호사를 써도 김동규의 아빠가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할 수는 없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좆 됐단 메시지를 보내 와서 놀라 뛰어온 거였는데 김동규는 진짜 좆 된 상황이 맞았다. 아저씨가 김동규 등록금을 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상황에서 2년 장학금이 걸린 백일장 부상이 준비하던 공대를 가면 취소된다니.

늘 김동규가 내 고민을 차분히 듣고 얘길 해줬던 것처럼 나도 나름대로 내 선에서 김동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말들을 해주었다. 혹시 내가 나도 모르게 김동규를 무시하거나 낮춰 얘기하는 건 없는지 신경 써서.

“……그리고 복전도 괜찮은 거 같은 게, 문학 하는 공대남 멋지지 않아? 숫자로 이루어진 삭막한 이공계의 세상 속에 문학이 봄비를 내려 꽃을 피우는 거지. 1+1이 2가 되는 걸 온갖 공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은 1+1은 2가 아니라면서 시로 딱 보여주는 거.”

“1+1이 왜 2가 아니게 되는데?”

내 말을 가만히 듣던 김동규가 갑자기 물었다. 1+1이 2가 되는 상황만 생각했지 아니게 되는 상황은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글 쓰는 김동규 앞에서 설명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건 김동규의 웃음소리였다.

“아 왜. 왜 웃어. 웃지 마라, 김동규.”

“백일장에서 그렇게 쓰면 바로 쓰레기통행임.”

당황해 얼굴이 새빨개졌을 내 손을 잡은 김동규를 따라 놀이터에 있는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어린이들이 쓰는 거라 커다란 김동규는 들어오지 못하고 나 혼자서 쭈그리고 앉는 게 다였다. 김동규는 내 목 언저리를 가볍게 잡고 입을 맞출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1+1=2라는 간단한 수식이 시가 되려면 1이나 2 같은 숫자가 아니라 기호에 주목을 해야 해. 문학은 늘, 주인공이 아니거나 남들 눈에 잘 띄지 않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할 걸 쓰는 거야.”

문학 지문을 풀다 보면 어떻게 이런 시를 쓰는지, 어떻게 이런 문장을 썼는지 놀라곤 한다. 그러니까 교과서에 실리고 유명한 소설가고 시인인 거겠지만. 김동규가 쓰는 것들도…… 그럴까? 따뜻한 눈으로 때로는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1+1이 2가 될 수 없는 건.”

다음 생 같은 건 없지만, 만약에 또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면 나도 김동규처럼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노래를 만들거나 불러도 좋고 춤을 춰도 괜찮겠지. 김동규가 가끔 이렇게 나는 생각지도 못할 시적인 생각들을 늘어놓을 때마다 김동규의 말에 홀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 보이는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운 비유와 묘사로 느껴진다면 참으로 멋지고 놀랍고도 즐거운 일일 것 같다.

“더하기가, 2 속에 함께하기 때문이야.”

조심스럽게 얽혀드는 혀는 오랜만이지만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눈을 감은 김동규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도 눈을 감았다.

사실 김동규가 보는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울 것 같지가 않다. 가시 달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노래하고 우울한 감정이 넘실대고…….

그래서 김동규와 키스를 하면서 김동규의 동영상을 나 혼자서 들고 가기보다는 같이 얘기해 본 뒤에 김동규가 무섭다고 하면 손잡고 함께 가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빠한테 그렇게 맞아도 입시 뒤로 해결을 미루는 걸 보면 이 문제도 그럴 것 같으니 합격부터 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얘길 꺼내봐야겠지.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모르고 있는지도 물어봐야겠고.

“……내일 봐.”

“조심히 가.”

한참을 붙어 있다 떨어진 김동규가 내 입술을 닦아주고 일어났다가 다시 한번 입술 위에 뽀뽀를 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잠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중간고사 코앞이라고 특식이 나오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친구들은 점심 타령을 했다. 1등으로 달려가서 꿔바로우 많이 먹을 거라면서. 급식에 튀김 종류 나오면 아무리 1등으로 간다 해도 눅눅하게 마련인데 밥도 볶음밥, 국도 없고 그마저도 다른 반찬 하나는 잡채라 오늘 급식에서 내가 맛있게 먹을 만한 건 요거트뿐이었다. 요거트도 김동규가 만들어준 거 아니면 너무 달아서 좋아하진 않지만 나 한 명 맞추겠다고 급식을 만들 순 없는 거니 어쩔 수 없었다.

카레나 짜장밥이면 그냥 소스 안 받고 흰밥 먹음 되지만 볶음밥은 그게 불가능해 밥이고 반찬이고 다 조금만 받아 적당히 위가 찰 정도로만 먹었다. 그릴 소시지는 친구 줬다. 밥 먹고 얼음 컵 사러 다녀올까. 근데 막상 나가자니 외출증 받으러 가기도 귀찮고 그렇다고 얼음 없이 그냥 콜라 마시는 건 싫고.

결국 귀찮은 게 승리해 교실로 올라왔다.

“어, 하림아! 잠깐만 와봐. 나 이 책 샀다?”

여자애 몇 명이 내가 3분 과학에서 소개한 책을 보고 있었다. 민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여자애들과 책을 비롯해 이런저런 얘길 하고 있으니 남자애들도 하나둘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거 내가 좀 어려운 책이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물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고 생각보다 우리 일상 속에 많이 스며들어 있는데 이 책 저자가 작년 10월인가, 헐 대박. 고마워.”

한참 얘기하던 중에 어디 나갔다 온 김동규가 줄 거 있다 그래서 손을 뻗었더니 손에 잡힌 건 까만 봉지, 그 안엔 얼음 컵과 뚱캔 콜라가 있었다.

“야 뭔데? 콜라?”

“저걸 쟤가 왜 사와?”

“너 몰라? 서하림 존나 양아치 새끼잖아.”

빵셔틀이니 일진이니 남자애들이 그런 소릴 해댔다. 나랑 여자애들만 재미없어 계속 책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튼 이 책 저자가 지금 책 이름이 정확히 생각은 안 나는데, 어…….”

얼음 컵 뚜껑 열고 속 비닐을 살짝 뜯은 다음 고여 있는 물을 따라 버렸다. 어차피 콜라 마시다 보면 얼음이 녹아 농도가 옅어지긴 할 테지만 녹아 있는 물의 양이 좀 많았다.

“크으, 아 콜라 마시니까 살 것 같다. 오늘 점심 너무 느끼했어.”

“할아버지인 줄? 존나 웃겨!”

“혼자 마시니까 좋냐? 나도 콜라 좀.”

“아 싫어, 니가 알아서 사다 먹어.”

빈 콜라 캔을 쓰레기통에 잘 조준해서 던졌다. 정확히 맞아 캔이 달랑거리는 뚜껑을 밀치고 쏙 들어갔다.

“제목이 아마 일상에서 찾아보는 물리 과학? 뭐 이런 제목일 텐데 그거 엄청 재밌고 쉬우니까 나중에 한번 읽어봐. 아니 이런 것까지 계산된 거라고? 할걸.”

“내가 제목 찾아볼게. 어…… 정확한 제목 <일상 속에 숨어있는 물리 과학>이야.”

“나도 김동규보고 사 오라고 그럴까. 어차피 호구 새낀데 하나 더 사 오라고 하면 사 오지 않을까?”

아 진짜 진주혁 말하는 거 거슬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네. 그냥 김동규 욕하는 거야 나도 화 날 때 들으면 적당히 용인되는 수준이고 진주혁이 열폭 종자라고 무시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지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김동규를 부려 먹으려고 할 때마다 진주혁도, 진주혁이랑 친한 김유찬까지 쌍으로 정이 떨어졌다.

“김동규가.”

“응?”

“누구 호구 새끼더라.”

“어?”

“사 오라고 해봐. 쟤가 사 오나 안 사 오나 나도 궁금하네.”

“어?”

“불러줘?”

“야, 기.”

“아니! 야 왜 그래, 장난친 건데.”

“나도.”

“…….”

“장난이야.”

“…….”

“아 콜라 맛있다. 역시 콜라엔 얼음이지.”

진주혁이 방긋 웃는 나를 씩씩거리며 째려보다가 김유찬을 데리고 교실을 나갔다. 나갈 거면 혼자 나가지 죄 없는 김유찬은 왜 데리고 나간대.

“근데 하림아 언제부터 김동규랑 이렇게 친해졌어?”

“아 너 세문중 아니었어서 모르는구나. 김동규랑 하림이랑 원래부터 알았어. 초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인가.”

“아니 나도 그건 아는데 요즘 좀…… 부쩍 친해진 거 같아서 물어본 거임.”

“왜, 서하림이 쟤랑 같이 공부하잖아. 매번 둘이 1등 2등 하는 거 보면 몰라?”

“헐 진짜? 어디 학원? 과외?”

내가 할 말들을 다른 애들이 대변인인 양 얘기하는 탓에 그냥 콜라만 빨아 마셨다.

“과외일걸?”

“응. 그냥 우리 집에서 과외. 근데 너 어디 중학교 나왔는데?”

“이 근처는 아니야. 학교 여기 오려고 중3 때 이사 와 가지고. 문영여중.”

얘기만 가만히 듣던 중에 아는 학교가 나와 콜라 컵을 내렸다.

“내 친구도 문영여중 나왔는데. 전유하라고 알아?”

“알아! 내 친구 친구인데 이름이랑 얼굴만 알아. 공부 잘한다는 거랑.”

“걔 나랑 영재원 동기야.”

“아하, 어쩐지.”

물 흐르듯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수다를 떨다 보니 점심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서하늘과 나는 이건우에게 붙잡혔다. 이건우는 7반 앤데 얘도 나랑 서하늘과 유치원부터 이어진 긴 인연이었다. 이건우는 하늘이 흐리면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고 어디 부딪히면 땅이 꺼질까 걱정하는, 진짜 엄청난 겁쟁이에 세상 걱정을 다 짊어지고 사는 애였다. 고민 상담할 거 있다고 3일만 시간 내달라고 해서 김동규랑 하교를 못 하게 됐다.

대체 뭔 상담인가 하고 들어보니 의대 가기 싫단 얘기였다. 피 보는 것도 무섭고 수술하는 것도 무섭고. 그래서 우리 아빠처럼 내과 가라니까 이건우가 대학생 때는 시체 해부를 해야 한다며 거의 울려고 그랬다. 서하늘은 남자애가 징징거리는 소리 듣기 싫다며 3일 만에 발을 뺐지만 나는 이건우가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너만은 날 버리지 말아줘”라고 매달리는 판에 일주일을 넘게 더 붙잡혔다. 매일같이 이건우랑 하교해도 김동규가 그러라길래 괜찮은 줄 알았더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야, 이건우. 너 도대체 서하림이랑 무슨 얘길 하길래 바쁜 애 시간을 뺏어?”

나나 서하늘 말고는 다른 애랑 거의 얘기하지 않는 김동규가 이건우에게 말까지 걸 정도인 걸 보면.

“야 나 안 바빠. 시험 끝났잖아.”

“어얼, 건우건! 뭐 해 지금?”

타이밍 뭐 같게 진주혁이 나타났다. 하필 이럴 때 진주혁이라니, 타이밍이 구려도 이렇게 구릴 수가 없다.

“뭐야, 김동규랑 싸워?”

“안 싸워. 야 김동규, 나 빨리 이건우랑 얘기하고 집에 갈 테니까 너도 그냥 가.”

“그, 그래! 내가 얘랑 할 말이 있지 너랑 할 말이 있냐?”

“그래 맞아! 건우건 잘한다!”

진주혁이랑 이건우가 친했었나. 진주혁이 이건우 옆에서 장작을 지폈다. 김동규도 그냥 집에 갔으면 좋겠는데, 얘도 말이 점점 심해지면서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다들 뭐 하냐? 체육대회 끝났는데 집에들 안 가고?”

지나가던 선생님이 애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끼어들었다. 다행히 나랑 학생회장이 무리에 속해 있어 우리 둘이서 별일 아니라고 잘 둘러댔더니 선생님이 체육대회는 끝났으니까 어린애들처럼 싸우지 말고 집에 가라며, 주먹다짐하지 말라는 지금 상황에 아무도 안 웃을 농담을 날리고 사라졌다. 선생님이 심각한 상황을 몰라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서하림보고 오늘 입을 팬티색도 고민이라고 아침마다 물어보지.”

“야, 김동규 그만하고 나랑 얘기해.”

“김동규 너 말이 존나 심한 거 아니냐?”

“아 진짜 돌겠네.”

이건우가 소리치는데도 김동규는 팔짱만 낀 채로 더 해보라며 턱을 치켜들었다. 나와 학생회장 백시후가 김동규를 말렸다가 이건우를 말렸다가 그 옆에서 얄밉게 입을 놀리는 진주혁한테 뭐라고 하느라 진땀을 뺐다. 고3 1학기는 학생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꽤 컸기에 괜히 일 커졌다간 다 같이 망하는 지름길이었다.

“김동규 니가 뭔데 날 병신 취급해? 병신 호구 새끼는 내가 아니라 너잖아! 맨날 서하림 근처 서성거리면서 말도 없이 음침하게 보기만 하고, 시발 서하림이랑 같이 공부하는 게 뭐가 그리 대수냐? 요즘 서하림이 친하게 지내준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거 같아? 너야말로 모르나 본데, 서하림이 너 보고 속으로 뭔 생각하는지나 알아?”

“야 그만해! 이건우 닥치라고!”

진주혁이 내 앞에서 김동규를 까 내렸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걸 방관하고 이따금 김동규를 못되게 말했던 나도. 진주혁 이 새끼는 자기만 들었던 걸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 이거지. 나는 혼비백산하며 이건우의 어깨를 잡았다. 진주혁이 계속 이건우를 부채질했고 결국 이건우는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을 뱉어 김동규에게 멱살이 잡혔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부모님을 건드는 건 아니었다. 김동규는 이건우를 창문으로 던지더니 주먹으로 그 옆에 있는 창문을 깨트렸다. 수군거리던 아이들이 놀라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망했어.”

김동규가 이건우에게 뭐라 뭐라고 얘길 하는데 여기선 들리지가 않는다. 나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백시후가 교무실로 뛰어갔고 뒤늦게 진주혁이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더니 제일 먼저 튀었다.

나와 백시후는 교무실로 올라가 목격자로 상황 설명을 했고 선생님이 우리 둘 중 학생회장인 백시후더러 남으라고 했다. 나도 같이 있겠다고 했지만 우리 집에서 알면 복잡해진단 말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시후야 끝나면 나한테 제일 먼저 전화해. 메시지 주든가. 꼭! 알았지? 기다리고 있는다?”

백시후보고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하란 얘기를 세 번이나 하고 나서야 교무실을 나왔다. 아까 도대체 김동규가 이건우한테 무슨 말을 했을지가 너무 궁금했다.

[야 지금〉

[학부모 소호나중〉

[소환〉

고맙게 바로 상황보고 해주는 백시후의 메시지를 보고 집으로 가다가 그대로 뒤로 돌아 다시 학교로 걸어갔다. 아니, 뛰었다는 게 맞을 정도로 빠른 걸음이었다.

[하림아 집에 가서 쉬어 오지말고〉

김동규 메시지에 발걸음이 멈췄다. 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메시지를 보낸 거지? 아, 아빠한테 연락을 해야 하니까 휴대폰 썼겠구나. 마저 학교로 가려다가 그냥 택시를 잡아 김동규네 집으로 향했다. 김동규를 기다리는 동안 이모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그냥 다 거절했다. 과외 선생님에게도 무슨 일이 있냐고 메시지가 왔지만 답장하지 않았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 김동규와 아저씨가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저 새끼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김동규한테 온갖 욕을 했다. 지금 나도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닐까? 또 맞……는 건 아니겠지?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 봐야겠단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던 차에 백시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어떻게 됐어?”

-나 이제 학교 나옴. 상담실 나오자마자 전화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딴 데 말하지 말라 그래 가지고.

“어, 고마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해줘 아니면 처음부터 설명해?

“결론부터.”

-잘됐어. 이건우가 패드립 해서 줘 터진 게 차라리 다행이었지 뭐. 아니 줘 터진 건 이건우가 아니라 창문이지만.

“잘…… 됐다니까 됐어.”

-김동규네서 창문 배상하기로 했고 김동규 집안 사정이야 선생님들 다 아니까 이건우가 한 말이 좀 그렇다는 거를 알고 이건우네 부모님은 안 불렀어. 김동규가 원하면 이건우네 엄마도 소환되고도 남을 말이었지만 고3이라 김동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일 크게 만들기 싫어하는 눈치였고. 김동규네 아빠는 사실 창문 땜에 온 거라. 그래서 둘이 서로 사과하고 껴안으면서 미안해 사랑해 친구야 하고 끝.

“그게 뭐야. 네 살 아기들도 아니고.”

-암튼 잘됐다고. 야 근데 김동규 진짜 좀 대단하더라.

“왜?”

-선생님 앞에서 거짓말하면서 불쌍한 척하는데 좀, 소름 돋음.

“뭐라고 그랬는데?”

-그냥 뭐, 선생님이 왜 그랬냐고 묻는데 이건우가 자기보고 거지 새끼에 엄마 없는 새끼라 그랬다, 그리고 아빠는 쓰레기라고 욕했다고 그랬어.

“아…….”

-완전 구란 아니어도 아무튼 거짓말은 거짓말이지. 그리고 걔 원래 심성이 여린 애야?

“글……쎄. 아닐걸.”

-베트남 간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 기세던데. 너 걔네 엄마 베트남 간 거 알았어?

“아, 어.”

-하긴 너네 둘이 맨날 공부하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아무튼 나 걔랑 그렇게 가까이? 많이? 얘기한 거 처음인데 생각보다 좀…….

“좀?”

-아 이거 뭐라고 얘기해야겠는지 모르겠는데 음, 불행팔이? 이걸 뭐라고 그러지? 아무튼 그런 느낌이 나서 좀 소름 돋았음. 아무렇지 않게 창문 깨부수고는 이건우 멱살 정리하던 애가 선생님이랑 같이 상담실에 딱 앉으니까 손도 아프다고 칭얼거리고 선생님이 듣기에 가슴 아플 포인트 눈물 글썽거리면서 얘기하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기 치부인 건데 그걸 너무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리고 이건우랑 마지막 화해 딱 하고 나니까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오는데 음 나는 앞으로 김동규랑 친해질 일 없을 거 같아.

“아…….”

-걔 너한테도 그래?

“아들 새끼 때문에 내가 학교도 다 가 본다!”

김동규 아저씨가 누군가와 전화를 하며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야 서하림?

“나 급한 일 있어서! 고마워 내일 마저 얘기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이모님에게 또 전화가 와서 그냥 전원을 꺼버렸다.

“김동규, 집에 있는 거 맞지?”

“어어! 나 안방이야!”

김동규는 딱 봐도 얻어터진 얼굴을 하고 현관으로 달려 나왔다. 아까 본 다친 오른손을 뒤로 숨기고 내가 신을 실내화를 꺼내주면서 “집에서 쉬라니까 왜 왔어” 같은 말이나 하는 김동규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와 김동규에게 이건우랑 무슨 상담을 했던 건지 설명했다. 서하늘이 참다못해 손 털고 탈주했고 나는 이건우의 징징거림을 다 들어주고 있었다고. 그런 나를 김동규가 바보라며 타박했다.

“딴 친구한테 하라 해.”

“이미 했는데 다들 의대 가라고 하거나 바리스타 자격증 따라 그랬대. 개웃겨. 바리스타래 미친.”

심각했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다. 나도 김동규도 바리스타에 빵 터져서 한참을 웃었다. 너무 웃느라 눈물까지 고여 손으로 대충 눈물을 닦으려는데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김동규가 휴지를 뽑아와 내 눈가를 닦았다. 나는 여전히 남은 웃음의 잔재를 털기 위해 기침을 했다.

김동규는 휴지를 새로 뽑아 마저 내 눈가를 두들겼다. 나는 아직도 바리스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날 것 같은데 김동규는 좀 전에 웃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마치 내가 울 정도로 웃을 거란 걸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내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계속 기다린 듯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있잖아.”

“응.”

“나는.

“…….”

“나는 널…….”

‘걔 너한테도 그래?’

만일 김동규 아저씨가 그때 나오지 않았더라도 나는 백시후에게 바로 대답을 못 했을 거다. 아니라고 해도 맞다고 해도 심장이 울렁거릴 게 뻔했다.

내 눈물을 닦은 휴지를 곱게 접는 김동규를 보면서,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말을 시작해 놓고도 길을 잃어 더 이상 문장이 만들어지지가 않았다. 나도 너를…… 아니, 아니다. 김동규는 나를 죽이려고 했고, 죽였었고 그래서 아직도 가끔 자려고 누웠다가도 김동규 때문에 화가 나 벌떡벌떡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또 화가 치밀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김동규는 내게 입을 맞춰왔다. 살짝 입술만 맞춰오는 게 꼭, 미안하다고 하는 것만 같았다.

“난 좋아.”

“뭐가.”

“그냥 다.”

“넌…… 내가 너를 미워해도.”

“좋아. 미워해도 좋고 싫어해도 불쌍하게 여기고 동정하는 것도 좋아. 다 좋아. 미안해하지만 마. 자존심 하나도 안 상해. 네가 나한테 미안할 건 하나도 없어. 난 너랑 이렇게…… 이렇게…….”

김동규가 살짝 웃으며 계속 입을 맞춰왔다. 아, 또 김동규가 내 심장을 쥐고 흔든다. 짜증 나. 대체 그때 왜 그랬어, 왜.

“나, 진짜 하림이 널 너무 좋아해. 아니, 사랑해.”

“동규야.”

“네가 나한테 주는 거면 싸구려 동정이든 불쌍함이든 슬픔이든 적선이든 하다못해 날 싫다고 혐오하고 욕을 해도 다 좋아. 뭐든 괜찮아. 상처 하나도 안 받아. 실망도 안 해. 내가 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내가……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때리고 욕해. 떠나지만…… 나 두고 떠나지만 말아줘. 응?”

“뭘 잘못한지는 알아? 나는 그 일 생각하면 한 번씩 미친 듯이 화가 나는데 그거 때문에 내가…… 내가 그 화를 풀겠다고 너한테 못되게 굴 때마다 집에 오면 후회를 한다고.”

“사랑해.”

“하지만.”

내 입을 손으로 막은 김동규가 계속 말을 이었다.

“미안해 안 해도 돼. 넌 나한테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니까. 왜 자꾸 나 속상하게 만들어? 후회도 미안한 것도 다 내가 해. 내 몫이야. 그러니까 너는 나 미워만 해. 응?”

이런 게 김동규가 날 좋아하는 방식이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지 말라고 서로 화내며 풀자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손 치료하자. 일어나, 병원 가게.”

알아서 치료하겠다는 김동규를 겨우 앉혔다. 미친놈이 내가 뭘 했다고 또 아랫도리를 세웠는진 모르겠지만 김동규는 원래 이런 애라 새삼스럽게 놀라울 것도 없었다. 무시하고 구급상자나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김동규가 빨개진 얼굴로 TV 선반에서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이런 건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 김동규의 설명을 따라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김동규가 좆 터지겠다며 뭐라 말했지만 무시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손이 다친 게 중요하지.

“하림아 집에 빨리 가.”

“왜, 이왕 도와주는 거 밥도 한번 차려볼까 하는데. 오른손 다쳐서 불편할 거 아냐.”

“나 지금 너 생각하면서 딸 칠 건데 보고 싶으면 계속 있든가. 손 빌려주면 좋고.”

“간다. 월요일에 봐.”

진짜 답도 없는 놈. 이럴 때면 김동규에 대한 감정이 빡침으로 맥스를 찍었다. 나 같으면 아픈 거 무기 삼아서 밥도 얻어먹고 양치도 해달라고 그러겠는데 김동규는 생각하는 게 왜 다 그쪽으로 빠지는 건가 싶었다. 머리도 좋은 놈이 진짜 이럴 때면 머리에 든 게 자위와 섹스밖에 없는 흔한 남고생이랑 다를 게 없어 한심했다.

인생 길고, 대학이 그 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중요도가 크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기분 좋게, 또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기말고사를 치고 나서는 구름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한반도가 반으로 갈라지는 지진이 일어나거나 지구가 다른 행성과 충돌하는 게 아니라면 떨어질 일은 없겠지만 12년의 긴 레이스를 마무리한다는 건 진짜 이걸 무슨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딱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면접도 있고 최종 발표까진 몇 달 더 남았더라도.

낮잠 자고 일어나 할아버지, 할머니랑 저녁 먹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 나는 꽤 비장한 각오로 수십 번을 시뮬레이션 한 탈의대 발언을 몇 번이나 점검했다. 어차피 가면 속 얹힐까 봐 제대로 먹지도 못할 것 같아서 김동규가 만든 딸기청으로 딸기우유를 해 먹었다.

김동규 덕에 속이 든든했고 거울 보니 내가 봐도 잘생겼고 옷도 예쁜 거 골라서 잘 입었고 엄마도 네가 하고 싶은 말 다 하라며 응원해 줬고 심지어 날씨도 좋았다. 완전 완벽해.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정명원 음식들 잘 먹는다고 오늘 같은 역사적인 저녁도 정명원으로 잡았다. 정명원은 엄청 유명하고 고급인 한정식 집으로 할아버지가 젊을 때부터 단골인 곳이다. 엄마도 단골이고 나 역시 이곳의 단골이 되겠지.

“우리 똑똑이 배고프지? 밥부터 먹자.”

아빠 쪽 할아버지가 어릴 때 날 불렀던 애칭은 뽀송이었고 지금도 가끔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고 해도 아기 때나 부르던 애칭으로 날 부르곤 하는데, 엄마 쪽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늘 똑같이 항상 나를 ‘똑똑이’라고 불렀다. 영재원에 수학 영재로 합격했단 소식도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했었다. 두 분의 할아버지가 내 어떤 모습을 사랑하고 주로 보는지는 애칭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엄마랑 아빠가 배부르게 먹을 때까지 나는 할아버지 말에 열심히 웃고 맞장구를 치고 친구 이야기, 어디서 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했다. 밥 너무 안 먹으면 할아버지가 뭐라고 할까 봐 적당히 먹으면서.

본식 다 먹고 후식으로 오미자차와 흑임자 아이스크림까지 나왔을 때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눈빛으로 이제 말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버지 근데요, 하림이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대요.”

어디 해보라며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할아버지.”

“그래, 하림이 할아버지 여깄다.”

“저 진짜 많이 심사숙고하고 결정까지 다 내린 다음 말씀드리는 건데요. 저…… 의대 안 써요. 의사랑 안 맞는 것 같아요.”

“뭐라고?”

“의사란 직업이 무척 훌륭하고 좋은 직업이라는 거 너무너무 잘 알고 있지만 저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 우주의 진실을 밝히고 진리를 탐구하.”

“뭐야!”

할아버지가 상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누르고 침착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타, 탐구하고 싶어서 의대 말고 물리학과 갈 거고요, 대학원 가서 박사까지 다 딴 다음엔 교수 할 거예요.”

“현주 너는 알고 있던 일이냐?”

“그럼 제가 하림이 엄만데요.”

“자네는!”

“저돕니다 장인어른.”

할아버지가 뒷목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많이 화가 나셨는지 휘청거리느라 할머니도 급하게 일어나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통보구나, 통보! 이 할아버지를 무시하고!”

“무시가 아니에요, 할아버지. 제가 진짜 무시할 생각이었으면 할아버지 오늘 뵐 생각도 안 했을 거고 대충 전화나 문자로, 아니 그런 것도 안 드리고 그냥 말도 안 하고 썼을 거예요.”

“너, 너잇! 그걸 말이라고!”

할아버지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나도 일어났고 엄마랑 아빠도 일어났다.

“도대체 제가 왜 의사가 되어야 하는 건데요? 할아버지랑 엄마 아빠가 다 의사라서요? 저는 생각보다 그렇게 희생정신이나 봉사 정신이 강한 사람도 아니고 생명이라는 무거운 걸 제 손으로 다루는 중압감도 싫어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아니, 다 떠나서 그냥 하기 싫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거 즐겁게 할 수 있는 거.”

뺨으로 할아버지의 손이 세차게 날아들었지만 예상했던 일이라 놀랍진 않았다. 아픈 뺨을 붙잡고 할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보!”

“아버지! 지금 미쳤어요? 말로 하면 될 걸 왜 애를 때리고 그래!”

“할아버지가 아무리 그러셔도 원서는 제가 쓰는 거고 이미 다 마음 굳혔어요.”

“그렇게 의대가 싫으면 경영을 가라. 네 엄마도 이제 슬슬 재단에 들어오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밖으로만 싸돌아다녀서 안 그래도 요즘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너마저 할아버지한테 이러면 도대체 어쩌라는 게냐, 하림아!”

“필요 없어요. 저는 재단 경영 그런 거 관심도 없고 갖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모랑 삼촌들한테 물려주세요.”

한 대까지는 기꺼이 내줄 생각이었는데 한 대를 더 맞으니까 나도 뭔가 뚝 끊기는 느낌이었다.

“하림아!”

“장인어른!”

“큰일 하기 싫으면 그냥 얌전히 졸업만 해! 개인 병원 차려 줄 테니까 경영을 가든 의대를 가든.”

“싫다니까요!”

“그럼 등록금은 한 푼도 없다!”

“왜 제 등록금을 할아버지가 내겠다고 생색이에요? 저, 부모님 두 분 다 정정하게 잘 살아 계세요.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겠지만!”

“생색? 이게 어디서 어린 게 할아버지한테!”

“아버지, 하림이 등록금은 내가 내요. 하림이가 아빠 애야? 그만 좀 해요, 이게 뭐 하는 거야!”

완전 아수라장이었다. 정명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 우리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 정도였다.

“지금까지 용돈 주신 거 다 모아놨으니까 그거 돌려드릴게요. 그럼 의대 6년 등록금이랑 퉁 쳐지죠? 만약 제가 엄마 아빠 없는 고아라도 편의점 알바를 하든 공사장에서 삽질을 하든 전단지를 돌리든 제가 돈 모아서 가면 되니까 할아버지 도움 하나도 필요 없고, 아 진짜 그놈의 의사가 뭐라고!”

“뭐, 뭔 놈의 뭐?”

그 말을 끝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할아버지가 뒤로 넘어갔다. 엄마는 아빠한테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냐고 화를 냈고 아빠는 쓰러진 할아버지 상태를 진단하며 쩔쩔맸다. 할머니는 못 볼 거 봤다면서 나가 버렸다.

“하림아, 집에 먼저 가.”

“나 먼저? 그, 그래도 할아버지 깨어나는 거는 보고…….”

“여기 의사 선생님 둘이나 있는데 걱정하지 말고 가. 시험 끝난 날인데 고생했다, 내 새끼. 당신은 하림이 혼자 집에 있게 오늘은 호텔 가서 자.”

“그럼 당신은? 나는 호텔에서 자고 당신은 집에서 자겠다고?”

“나도 하림이 쉬라고 혜화동으로 갈 거야. 왜. 나만 집으로 돌아가면 안 돼? 이렇게 말을 잘하시는 분이 아까는 왜 벙어리처럼 그러고 있었어?”

“그럼 그 상황에 장인어른이랑 싸우기라도 하라고?”

엄마랑 아빠랑 서로 언성 높인 거 처음 봐서 내가 두 분의 눈치를 봐야 했다. 할아버지는 두 사람이 시끄럽게 굴어도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에서도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미친 노인네. 서하늘한테 다 얘기할 거야. 앞으로 인연을 끊어버려야지. 할아버지 죽기 전에 할아버지보다 더 유명하고 돈도 많이 버는 사람이 돼서 자랑할 거야. 진짜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노벨상 받든지 해야지. 그래도 저 성질머리 앞에 두고 할 말은 거의 다 해서 속은 시원했다.

할아버지가 뒷목 잡고 쓰러졌다며 서하늘에게 자랑하려다가 지금 한창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 것 같아 말았다. 다른 친구들은 할아버지 얘길 모르니까 전화를 할 수도 없고.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김동규, 혹시 자고 있었어?”

-아니.

“잠에서 막 깬 목소린데.”

-조금 전에 깼어.

“저녁은 먹었어?”

-아직.

“그럼 저녁 같이 먹자. 배고파. 기운 빠져.”

-그래. 어디서 먹을까?

우리 집으로 오라고 했더니 김동규가 먹고 싶은 걸 물었다. 친구들이 화날 때 매운 걸 먹으며 스트레스를 푸는 걸 잠깐 떠올렸지만 나는 매운 걸 먹으면 스트레스가 쌓이면 더 쌓였지 풀리진 않아 부드러운 걸 먹겠다고 대답했다.

김동규는 배고프단 소리에 나한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밥 다 됐다고 불렀을 때야 내 얼굴을 제대로 봤는데 식탁을 엎고도 남을 흉악한 얼굴을 하고 누군지를 캐물었다. 국 떠먹으며 할아버지라고 했더니 김동규가 살짝 당황하는 게 보였다. 아, 맛있다. 역시 김동규가 해준 건 진짜 뭘 먹어도 맛있다.

마주 보고 앉아 조금 늦었지만 사랑이 담긴 따듯한 저녁을 함께 먹고, 같이 할아버지 욕을 하고, 엄마 아빠가 이혼할까 봐 걱정하는 내 불안을 덜어주고, 빨갛게 부은 내 볼에 아이스팩을…… 그냥 올려도 될 걸 내가 너무 차가워할까 봐 손수건을 둘러 올려 주고. 그리고 아직도 맘이 상해 있는 날 위해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그래서 서로 한참을 웃고.

김동규가 웃다가 눈물을 닦는 내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나는 지금의 이 즐겁고 다정한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김동규 허벅지 위에…… 머리 베고 누워볼까. 김동규가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김동규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잠에 들고 싶은데.

“오늘 그럼…… 집에 아무도 없어?”

“아…….”

김동규의 눈빛이 다르게 반들거리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자고 갈 거면 손님방에서 자.”

“잠깐만.”

다급하게 일어나 방으로 가려는 나를 잡아챈 김동규가 내게 입을 맞추며 소파 위로 나를 넘어뜨렸다. 완강한 거부의 의사로 싫다고 말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김동규가 계속 내 입술을 따라오며 입을 비벼댔다. 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개를 돌리자, 김동규가 먼저 포기하고 나를 끌어안았다.

“하림아…….”

“참는다고 했어. 날 위해서. 네가 분명히 그랬어.”

“웃는 거 보니까 너무 좋다. 기분 안 좋을 때 나 찾아준 것도 고맙고 내가 네 기분도 풀어줄 수 있어서 좋아.”

“그건…… 고마워.”

한 치의 틈만 보여도 김동규는 어떻게든 그 좁은 걸 비집고 들어와 발정을 하고 침을 흘린다. 고마운데 아무것도 없냐는 말에 김이 다 빠져 그냥 빨리 방으로 올라가서 쉬고 싶어졌다.

“참는다며.”

“그러니까 물어보잖아.”

“너 진짜 이럴 때마다 정떨어져. 이러는 거 꼴도 보기 싫다. 어떻게…… 좀 괜찮아지려고 하면 이러냐. 진짜 이것도 능력이야 너.”

“절대로 내가, 내가 먼저 뭐 안 해. 그러니까 네가 말해줘, 응?”

김동규의 눈동자에 내가 비친다. 저 작은 곳에 내 질린 혹은 상처받은 얼굴이 담겼다. 눈동자에 나를 달고 있는 김동규의 얼굴은 욕정에 한껏 들떠 있었다. 괴리감이 엄청났다. 짜증 나. 피곤하다. 그냥 입술 내주고 빨리 자고 싶다.

하는 수 없이 키스만 하고 다른 건 하지 말라고 얘길 했지만 김동규는 자꾸 더한 것을, 다른 것을 원했고 이뤄냈다. 김동규의 손과 입을 따라 착실하게 발기하는 내 것을 잘라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머릿속을 하얗게만 만드는 흥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마지노선. 마지막 한계선을 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이성을 붙들고 그만하라고, 하지 말라는 말을 수도 없이 외쳤다. 김동규가 기분 좋은 곳을 만지고 핥으면서 기분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지만 김동규가 좋아할 말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몇 번을 사정하고 눈을 감았다 뜨니 아침이었다. 김동규의 침과 정액으로 범벅이던 몸은 깨끗해졌지만 유두도 아프고 거기도 아프고 허벅지도 많이 쓰렸다. 김동규 털끝 하나도 보기 싫어 않아 학교를 결석했다.

싫다고 해봤자 김동규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단 듯이 굴었다. 그래서 아프지만 않으면, 너무 심한 스킨십만 아니라면 싫단 소리 안 할 테니까 시도 때도 없이 벗겨 먹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김동규가 웃으면서 알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김동규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이 하나로 얽히면서 한 귀여운 약속을 멍청하고 순진하게 믿은 병신 바보 새끼였다.

잘 걸리지도 않는 감기에 걸려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그래서 김동규를 불렀다. 죽을병도 아니고 좀 앓고 나면 괜찮을 거라 놀러 간 엄마 아빠 걱정시키기도 싫어 김동규를 불렀는데.

“하림아, 내 말 들려? 괜찮아? 깼어? 아픈 건 좀 괜찮아? 의사 부를까? 어? 하림아 말 좀 해봐!”

김동규 얼굴을 보자마자 뜨문뜨문 잘린 기억이 휘몰아쳤다. 불은 온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따뜻한 색에서 멀어져 차가운 색으로 바뀌는 아주 신기하고 귀여운 물체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도 극에 달하게 되면 청색의 불처럼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게 되는 것인지 속에서 열이 오르면 오를수록 화가 나기보단 머리가 차게 식어 갔다.

아픈 환자가 막 눈을 떴으면 그냥 얌전히 누워 있게 해주면 될 걸 왜 어깨를 잡고 처흔들어대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없이 김동규의 손목을 잡아뗐다.

너 진짜 미쳤구나.

그 한마디를 제일 먼저 내뱉고 싶었는데 목이 너무 아파 기침이 터져 나왔다. 김동규는 물을 자기 입에 털어 넣고 내게 입을 맞췄다. 밀어낼 힘이 없어 그냥 그대로 목구멍에 밀려들어 오는 물을 삼켰다.

“말 못 하겠어? 많이 아프지?”

너랑 말 섞기 싫어.

“의사 부를까?”

엄마 보고 싶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동규가 빨리 꺼져 줬으면 좋겠어서 어릴 때부터 나를 봐준 의사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김동규에게 건넸다. 좀 쉬고 있다 보니 박선영 선생님이 왔고 수액을 맞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일어났다가 풀썩 주저앉은 나를 김동규가 잡아 제게 업히도록 했다. 어딜 가고 싶냐고 묻기에 등에 화장실이라 적었더니 구태여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뒤에서 나를 안고 내 것을 잡아 소변을 쌀 수 있도록 도왔다. 기분이 더러웠으니 도움이란 말은 좀 어색했다.

김동규가 내게 끼니마다 다 다른 맛의 죽을 세 가지나 준비하고 젖은 수건을 몇 개나 가져와 내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닦아주며 아주 극진한 정성을 쏟아붓는 걸 보고 나는 내 흐릿한 기억이 제발 꿈이기를 바랐다. 있지도 않을 신을 찾으며 제발 그게 내 꿈이었고 몽정이었다고, 내가 결국엔 미쳐 버렸다고 인정할 테니 진짜 일어난 일이 아니게 해달라고 바랐지만 찢어진 것 같은 뒤 때문에 내 바람은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만도 못 하게 되어 바닥을 굴러다녔다.

목은 이미 어제부터 괜찮아져 말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간 김동규에게서 섹스하던 상황이 줄줄 나올까 봐 계속 입 닥치고 있었다. 미룰 수 있다면 이대로 그냥 별말 없이 계속 미루고 침묵하고 확실하지 않은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고만 싶다.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미루고 싶다고, 피하고 싶다고 도망가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다. 아무리 두려운 것일지라도 마주 보고……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라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일생을 살다 가지만 도망가거나 회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기 때문에 동물과 다르고 아름다운 존재인 거다. 나는 지금까지 늘 이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김동규랑 섹스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알게 되는 일은 내게 이 만큼의 거창한 마음가짐을 되새김질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작 그게…… 섹스가 뭐라고 내가 사랑하는 우주를 들먹이고 인간 존재의 철학까지 논해야 하는지 화가 너무 치밀고 분노가 타오르고 걷잡을 수 없는 증오가 솟았지만, 차분하고 침착하게 그리고 천천히 조용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김동규.”

“응, 하림아.”

내 이름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지 말아, 제발.

쥐구멍에 숨고 싶다. 아니, 이대로 그냥 죽고 싶다. 강도가 들어서 나랑 김동규를 죽여줬으면. 갑자기 4차원의 블랙홀이 나타나 이 시공간을 다 흡수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내가 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심장에 가시가 되어 박혔다. 아, 심장이 너무 아프고…….

“한 거 맞지.”

아니라고 해. 그냥 비비기만 했다고, 하고 싶었는데 날 위해 참았다고 말해. 사랑하는 나를 위해서 네가 인내심을 갖고 참아줬다고, 그러니까 어서 칭찬이라도 해달라고 그래.

“응.”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이보단 덜 비참할 것이다.

“……그래.”

“…….”

“그렇구나.”

“응.”

내일 당장 죽는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대도 이것보단 낫겠지.

“한 거 맞구나.”

“응. 난 좋았어.”

입을 맞춰오는 김동규가 짜증 나 졸리다며 몸을 돌렸다. 안대를 쓰자마자 눈물이…… 눈물이 너무 많이 나와 수면 모자를 어떻게 썼는지도 모르겠다. 김동규가 쥐고 흔들었던 심장이 죄다 녹아버려 텅 빈 것만 같았다. 이젠 다 모르겠다. 내가 좋아했던 다정한 김동규를 아무리 떠올려도 허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눈물만 소리 없이 흐를 뿐이었다.

생각보다 내가 연기에 소질이 있는 건지 아니면 나도 원래부터 쓰레기 같은 본성이 있던 건지 그 이후에도 김동규랑 평소처럼 지내면서 키스도 하고 몸도 비비고 그랬다. 오히려 학교에서는 더 살갑게 굴었고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기도 했다.

대학 합격하고는 등교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김동규가 학교에 간다는 걸 알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렀다. 수업 시간임에도 우리 집에 온 김동규한테 양말이나 벗겨 달라거나 샤프에다 심 좀 넣어달라거나 보조배터리를 찾아달라고 하는 등 온갖 사소한 일들을 시켜놓고 내쫓기를 반복하고, 어디 같이 가자고 집 앞에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밤새도록 서 있게 만들거나 저녁 같이 먹자고 맛있는 거 많이 만들라고 해놓고는 다른 곳에서 실컷 먹고 집에 와서야 뒤늦게 까먹었다고 연락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김동규를 괴롭혔다.

겨우, 겨우 이런 괴롭힘밖에는 할 수 없는 내가 한심했다. 그래서 화가 나 죽겠는데 김동규는 내가 아무리 기다리게 하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 이상한 요구를 해도 그저 좋다며 따랐다. 나는 매일매일 김동규가 어떻게 하면 나를 질려 할지만 생각했고 심심하면 김동규 면전에 가시 세운 말을 던졌다. 그래놓고 김동규가 입을 맞춰오면 좋아서 혀를 섞었고 김동규가 내 맨살을 만지면 김동규가 좋아할 신음 흘려댔다. 그냥 김동규 호구처럼 부리면서 성욕도 해결하면 좋지. 그래, 그런 거야. 그래야 해. 내가 나쁜 게 아니라 김동규가 이상한 거다.

[하림아〉

[바빠?〉

[하림아〉

[뭐해〉

[서하림〉

[하림아~〉

[뭐〉

[해〉

[저녁 먹어?〉

[엄마는 뭐하셔〉

[아빠는?〉

[이모님은 휴가 언제부터래〉

이렇게 김동규에게 미친 듯이 메시지가 오는 때는 크게 두 상황인데 하나는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나머지 하나는 아저씨한테 맞아서. 높은 확률로 후자인 경우가 더 많았고 이번에도 아마 그럴 것이다. 나한테 답장이나 전화가 없거나 자기 집으로 찾아오지 않으면 김동규는 밤을 새워서라도 메시지로 떠들어댔다.

저번 달에도 한 번, 김동규한테 메시지 온 게 귀찮아 주말 내내 씹었더니 월요일 아침까지 김동규가 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와 영상 통화를 걸었다. 얼굴 보니 좋다며 웃는 김동규는 정작 아빠한테 맞은 얼굴이었다.

이번에도 분명 아빠한테 맞은 걸 거다. 내가 메시지를 읽은 걸 확인하자 메시지를 보내는 속도가 두 배로 빨라졌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친구들이 재밌는 얘기하고 있어서.”

학교 축제 오케스트라는 수능 전이라 참여하지 못했는데 3년마다 한 번씩 하는 총동문회 연주회에는 참여하게 됐다. 이것도 사실은 연습하기 귀찮고 할아버지 할머니랑 가는 여행 때문에 딱히 할 생각이 없었는데 기악부 후배들의 부탁으로 막판에 합류했다.

“엄마 나 전화 좀.”

레스토랑 룸을 나와 전화할 곳을 물었다. 직원이 화장실 앞에 휴식 공간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저녁 뭐 먹었어.

“너 목소리 왜 그래. 무슨 일 있지.”

-응…… 나 죽을 거 같아.

“아저씨 왔다 갔어?”

-응. 죽겠다 지금……. 바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지금 엄마랑 있어서.”

-아…….

이 미친 새끼는 아빠한테 맞았으면 병원이나 곱게 갈 것이지 맨날 이렇게 퍼질러 누워서는 나만, 나만 기다리고 있는다. 내가 진짜 일이 있어서 연락을 못 받는 상황인데 아저씨가 너무 때려서 큰일 날 상황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잠시만.”

나는 다시 룸으로 들어와 엄마에게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다고 말했다.

“한 10분이나 15분 뒤에 출발할게. 병원 데려다줘?”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보고 싶어.

“맨날 그 정도는 아니래.”

-진짜야…….

“알겠고, 사진이나 잘 찍어놔.”

-찍었어.

“끊는다.”

“누군데? 병원?”

“아니, 잘못 말했어. 학교 친구.”

“이 시간에?”

“급한 일이래. 나 먹던 거만 마저 먹고 일어난다.”

내 접시에 담아둔 샐러드와 배지테리언 피자를 해치우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바이올린은 그냥 엄마 줄 걸 그랬나. 김동규네 집 앞에서 내려 들어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

한참 멈춰 있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편의점이었다. 원래도 편의점은 잘 오지 않는데 한 번도 쳐다본 적 없는 곳으로 걸어가 제일 큰 사이즈의 콘돔을 집었다. 그랬다가 다시 내려놓고 또 집었다. 몇 번을 그렇게 집었다가 놨다가를 반복하며 비참한 감정과 차오르는 분노를 눌러놓고 그냥 카운터로 가지고 갔다. 코트를 입고 있긴 해도 그 안은 교복 차림이라 신분증 보여 달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노란 머리의 남알바생이 나를 스캔하곤 “음대생이에요?”라고 물었다.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하니 신분증 확인도 안 하고 계산을 해줬다.

왜 샀지. 가면 김동규가 하자고 할 것 같아서? 김동규랑은 끝까지 하지 않겠다고 한 게 내 마지노선이지 않았나?

김동규랑 펠라며 페팅이며 몸을 비벼댄 게 몇 번이고 기억이 안 날 뿐이지 끝까지 다 해놓고 삽입 하나에 기를 쓸 건 또 뭐지? 정말 삽입만 안 한다고 괜찮은 건가?

아프게 하지 말라고 하면, 안 아프게 해준다고 하면 끝까지 못 할 건 뭔가. 처음 하기 전에도 이미 김동규랑 했던 건 다 섹스의 일종이었는데.

어떻게든 화를 가다듬고 내가 이걸 산 이유를 정당화하고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자꾸 심장은 아프지 머리는 터질 것 같지 화 때문에 마음은 답답해져 와 주머니에 넣어 둔 콘돔을 저 멀리 던졌다. 씩씩거리며 그냥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학생. 안 타요?”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약속이 있던 걸 깜빡했어요.”

기어코 잡은 택시를 보내고 좀 전에 던진 콘돔을 다시 주워든 뒤 김동규네 집으로 걸어갔다. 그 길이 너무 짧아서 아파트 현관문 앞에 서서 또 한 번 콘돔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냥 약만 발라주고, 밴드 붙이고 붕대 둘러주고만 나오자. 설마, 설마 그렇게 맞았는데도 그 짓을 하려고 하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 찬 바닥에 부딪혀 모서리가 뭉개진 작은 박스를 들고 김동규네 집으로 올라갔다.

“늦었네. 메리 크리스마스.”

오랜만에 본 김동규는 코피가 터졌는지 코 주변이 온통 피딱지인데도, 그 꼴을 하고서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메리 크……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구급상자를 찾는데 김동규가 이상한 곳에서 성질을 부렸다. 연주회 얘기 안 한 게 뭐가 그리 서러운 일이라고, 말해주는 거 깜빡했단 내 말에 김동규가 커다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나도 똑같이 뭐라고 하려다가 빨리 상처 치료하고 집에 가고 싶어 우는 애를 달래고 휴지로 눈물도 닦아주었다.

전에 해본 대로 김동규의 얼굴을 생리식염수로 닦았다. 그리고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김동규의 눈동자를 무시하고 이마, 코, 볼, 입술의 순서로 내려오며 약을 발랐다.

“……이번에는 또 뭔 지랄을 했냐.”

“대학교 합격했다니까 등록금 내놓으란 거냐고, 부모 등골 빼먹겠다는 거냐고.”

“웃긴다. 지가 아들 등골 빼먹고 살면서 미친 소리 하네.”

솜이랑 쓰레기들 어디다 버리면 되냐고 물었더니 김동규가 정리해 버렸다.

“손 씻고 싶은데.”

“조금 이따 씻어.”

바닥에 앉아 있던 김동규가 꾸물꾸물 내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눕더니 눈을 감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그 얼굴을 보니 또 화가 날 것 같아 김동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다른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키스하고 싶어.”

“……해.”

“사실은 그거 말고 너랑 다른 거 하고 싶어.”

허벅지 안쪽을 강하게 자극하는 김동규의 손을 쳐낼까 하다 말았다. 만에 하나라는 희박한 확률이라고…… 그렇게 정신 승리했던 게 다 소용없고 부질없고 그렇다. 이럴 줄 알았어. 그래, 차라리 콘돔 사 오길 잘했다. 잘한 거야.

“해 그럼.”

“뭐라고?”

“하라고. 너 그 얘기 할 줄 알고 가져왔어.”

“뭐?”

나는 꺼낼 일 없을 줄 알고 코트 주머니보다 더 꺼내기 힘든, 교복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콘돔을 꺼냈다. 최대한 느리게 꺼낸다고 꺼내는데 또 심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 진짜 네가 산 거야?”

“응.”

“직접?”

“응.”

“어디서?”

“그냥 샀어. 대신.”

김동규가 행복에 겨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 손에서 콘돔을 낚아채 간 김동규가 이미 발기해 흉흉한 자기 거에 콘돔을 씌우며 내 남은 말을 기다렸다.

“대신 한 번만이야. 나 연주도 해서 너무 피곤하고…… 그래서 한 개만, 아!”

아프지 않게 해달라는 말도 못 했는데 김동규가 밀려 들어왔다. 옷도 제대로 벗지 못했고 딱딱한 거실 바닥이었다. 김동규가 진짜로 내 뒤를 찢어 놓을 것처럼 들어와 나는 살기 위해 네발로 기었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로 다짜고짜 했다간 피를 볼 것 같아 도망치고 싶어도 김동규가 어깨를 잡고 있어 도망을 갈 수가 없었다.

“아, 아파…… 아프, 아파, 이 시발 색, 아…….”

좁은 곳을 억지로 쑤셔 들어올 때마다 아래에서 이상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로 찢어져 망가진대도 이상할 게 없어 제발 그만 하라고 아프다고 소리쳤지만 김동규가 일단 다 들어가서 벌려 놓으면 괜찮을 거라며 계속 밀어붙였다.

“아, 아니…… 다 들어가기도 전에, 하지, 하지 마…….”

“알겠어, 후으, 다 안 넣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씨……발 네 말, 못 믿어…… 윽, 하윽!”

“콘돔 갖고 온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한 번만 싸고, 끝낼게.”

“하아, 하으, 하아…… 아!”

김동규가 내게 삽입한 상태로 엎드려 있던 나를 돌렸다. 안이 뒤틀리는 느낌에 욕이 튀어나왔다. 너무 아픈데도, 내 안에 들어온 김동규의 것으로 느끼고 그래서 반쯤 섰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차라리 내 건 그냥 이대로 꺼내지 말고 혼자 박다 끝났으면 좋겠다. 피를 봐도 김동규가 혼자 열심히 박다가 얼른 싸서…… 그러면 아파도 나는 나대로 좆같은 쾌락에 몸을 맡기고 느낀 뒤 끝내면 되니까.

“하, 하지 마!”

“왜? 기분 너무 좋아져서?”

건들지 않았으면 싶었던 내 것을 꺼내 든 김동규가 민감해진 귀두를 엄지로 쓸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나를 보고 웃은 김동규는 추잡한 소리를 내며 내 젖꼭지를 빨기 시작했다.

“하림아, 젖꼭지 빨아주는 게 그렇게 좋아?”

“으……윽, 아니, 시발! 아니!”

“난 좋아.”

“싫, 다고 했어.”

“뭐라도 나오면 더 좋을 텐데. 그리고 난 네가 빨아줘도…… 아…….”

미친 새끼가 도대체 뭐라는, 차라리 그냥 진짜 다 뜯어낼 것처럼 아프게만 하던가. 김동규는 이로 내 젖꼭지를 깨물다가 내가 아파 울면 이를 떼고 혀를 써서 간질이다가 또 이를 써서 아프게 했다가를 반복했다. 허리가 들썩이고 가슴팍에 달린 작은 유두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김동규가 내 안에서 빠져나갔지만 여전히 아래가 얼얼하고 뒤가 열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동규는 내 것을 쥔 손을 위아래로 빠르게 치대면서도 유두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겨우 한 번 해봤다는 지난번의 섹스로도 내가 느끼는 곳들을 아주 잘 아는 것 같았다. 유두나 성기가 아니어도 옆구리나 귀, 안쪽 허벅지 같은 곳을 김동규가 쓸어내릴 때마다 내가 들어도 좋아 죽겠다는 소리가 터지는 게 그 증거였다.

덥다며 옷을 벗어 던진 김동규는 몸을 아래로 내려 내 것을 빨고, 혀를 내려 이름은 모르겠지만 김동규가 건들기만 해도 온몸이 쭈뼛거리는 곳에 침을 발랐다. 그리고는 뒤에…… 찢어졌을 곳에 입을 붙이고 빨아댔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이라 위로 도망갔지만 허벅지를 붙잡혀 그대로 쑥 내려왔다.

“빠, 빨리해…… 빨리 싸 김동규…….”

물컹거리지만 힘 있는 혀가 뒤를 열고 들어온다. 내 뒤는 침입한 혀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도록 힘을 잔뜩 주었는데, 김동규가 비웃는지 콧방귀를 뀌는 게 느껴졌다. 혀가 끝까지 들어와 움직였다. 나도 힘을 많이 주고 있어 혀가 움직인 건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을 테지만 나는 그 작은 움직임이 너무나 크게만 느껴져 몸을 떨어댔다.

“혀 잘리겠어.”

“빨리하라고.”

“여기, 피 비린 맛 난다.”

김동규는 손에 묻은 내 정액을 콘돔에 꼼꼼히 바르고 내 골반을 잡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김동규가 제 것을 내 뒤에 넣을 것처럼 조준했고 그대로 허리를 밀었다. 나는 최대한 뒤에 힘을 주고 김동규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찢어진 탓에 힘을 준 곳이 따끔거렸지만 김동규는 내 저항에도 아무렇지 않게 엉덩이를 잡아 벌리더니 너무도 손쉽게 그리고 힘 있게 귀두를 삽입했다. 내가 너무 아파하자 김동규가 손을 뻗어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찌릿한 기분에 허리가 튀었어도 아래를 채우는 압박감이 너무 엄청나 도저히 힘이 빠지지가 않았다.

“숨, 쉬어봐.”

엄지로 유두를 꾹 누르는 것과 동시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숨을 내쉬자 근육이 조금 이완되어 김동규가 끝까지 치고 들어왔다. 김동규가 안을 꽉 채웠을 땐 숨도 쉬기가 힘들었다. 김동규의 것이 크다는 건 수없이 보고 만져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내 몸 안에 들어오니 그 부피나 크기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떨려오는 몸을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울었다. 몸이 떨리는 것도 눈물이 나는 것도 내 의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기, 김…….”

“응, 계속 내 이름 불러. 불러줘 하림아…… 윽!”

빨리 끝낼 수 있게 도우라며 김동규가 내게 이것저것을 요구했지만 나는 그걸 들어줄 정신이 없었다. 뒤에 피 계속 나는 것 같은데 망가지면 어쩌지. 그때도 이랬나? 아파서 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첫 번째 섹스에서도 이랬던가? 그때도 이렇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고 아프지만 김동규의 숨 하나조차 달큰하게 느껴져 머리가 터질 것 같았나? 손가락 하나도, 발가락 하나만 만져도 쌀 것 같은 기분에 나는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게 힘들었다.

“하림아, 너무 예뻐…….”

김동규는 개새끼처럼 내 얼굴을 빠짐없이 핥아대고 침을 묻혔다. 그러면서 내가 좋아했던, 좋아하는 다정한 말들을 속삭이며 아래로는 끊임없이 추삽질을 했다. 흐르는 내 눈물을 마시고 내 이름을 부르고.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가 얼마나 내게 욕정하는지 나만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얘기했다. 내 뒤에도 잔뜩 사정하고 내 입에다가도 잔뜩 싸서 정액으로 젖게 해주고 싶다거나, 교실에서 내 손으로 자위를 하고 싶다거나, 택시에서 섹스를 하고 싶다거나, 부모님이 잠든 새벽에 주방 식탁에서 하고 싶다거나.

“아, 그만해…… 김동규 그만, 그만…….”

끔찍한 말들을 쏟아대며 김동규는 웃었다. 이것도 날 위해서 약한 거만 얘기한 거라고, 내게 양잿물을 억지로 먹여 성대를 녹게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진짜로 김동규가 그렇게 할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목 놓아 울었다. 눈물만 흘려대다가 억지로 참았던 울음이 터지자 걷잡을 수 없이 큰 소리가 났다. 나는 커다란 바늘로 귓속을 찔러 청각을 잃고만 싶은데 김동규는 우는 것도 듣기 좋다고 계속 허리를 움직였다.

“하림아, 이거 봐.”

김동규가 내 손을 끌어다 배꼽 위에 올렸다. 귀두가 빠질 정도로 뒤로 나갔던 김동규가 한 번에 치고 들어왔다. 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터져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손바닥 아래에서 꿀렁이는 배의 감촉을 느꼈다.

“내 거야. 이, 렇게.”

또 뒤로 빠진 김동규가 거세게 쳐올리자 김동규의 것이 안을 쑤시면서 판판하던 배가 살짝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

“신기하지. 네가 내 위로 올라오거나 뒷치기 하면 더 잘 나온다?”

“하아…… 하악…… 흣, 으…….”

“아, 이제 못…… 참겠다.”

김동규가 내 배 위에 제 두 손을 올리더니 힘을 줘 눌렀다. 안 그래도 김동규의 것으로 꽉 차 있는 배를 누르니까 진짜로 안이 망가질 것 같아서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땅을 밀었다. 조금이라도 김동규의 것이 빠져나가도록.

“아 시발…… 존나 좋아…….”

온몸의 솜털이 서는 것 같았다. 이러다 진짜 안쪽 어딘가가 터지든 고장이 나는 건 아닐까, 그러면 어떡하지. 김동규는 내 배를 압박하며 긴 사정을 했다. 살짝 몸을 떨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사정한 김동규가 내 위로 엎어져 헉헉거렸다. 사정을 해서 크기가 작아졌을 텐데도 김동규의 것은 너무도 뜨겁고 줄어든 것이 느껴지지가 않아 여전히 쑤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김동규와 내 사이에 낀 내 것도 너무 많이 사정해 얼마 있지도 않은 정액을 뱉어냈다.

“무……거워.”

목이 쉬어 쇳소리가 났다. 김동규가 내게 쑤셔대는 만큼 나는 신음 내지르기 바빴으니 당연한 거였다.

“숨 막힌다고.”

“미안. 근데 조금만 이러고 있자. 너 지금 목소리 쉰 거…… 존나 섹시해. 또 꼴린다.”

“미친 새끼…….”

“듣기 좋으니까 뭐라고 말 더 해봐.”

“씻고 싶어.”

“응.”

“씻는다고.”

“좀 이따 씻어. 내가 씻겨줄게 걱정 마.”

“필요 없어. 내가…… 내가 씻을 거야.”

“응 그럼 조금 이따가.”

말이 안 통하니 한숨밖에 나오질 않는다. 김동규는 그런 나를 껴안고 어깨에 머리를 비벼댔다. 김동규는 목이 쉰 내 목소리가 그렇게도 좋은지 계속 말을 걸어왔고 나는 기계처럼 대답했다.

“다음번엔 콘돔 없이 하자.”

“응.”

“넣은 채로 자도 돼?”

“응.”

“아침에 일어나서 그대로 안 빼고 하는 건?”

“응.”

“요즘 섹스 젤들은 먹을 수도 있대.”

“응.”

“무슨 맛이 좋겠어?”

“응.”

“나는 음, 스테디셀러라는 딸기?”

“응. 근데 나 진짜로 씻고 싶어. 힘들다 이제. 쉬고 싶어.”

“알았어.”

어느 순간 몸이 식은 게 느껴져 따뜻한 물이 맞고 싶어졌다. 김동규가 내 안에 넣고 있던 것을 빼는데, 쓸데없이 길고 커서 빼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도 콘돔 껴서 그런지 교복 상태 괜찮다. 많이 안 더러워졌어.”

“응.”

허리가 빠질 것 같고 다리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김동규의 부축을 받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하지만 힘이 풀린 다리 때문에 자꾸 주저앉게 돼서 김동규가 화장실까지 데려다줘야 했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욕조에 앉아 따듯하다고 하기엔 조금 뜨거운 물을 맞았다. 바디워시로 씻을까 했는데 다 귀찮고…… 김동규랑 똑같은 냄새 풍기고 싶지 않아서 그냥 하염없이 물만 맞았다.

성욕만 생각하면 나도 분명 좋았던 건 맞는데, 빈껍데기만 남은 기분이 든다. 수챗구멍으로 흘러가는 물속에 녹아내린 내 심장도 함께 섞여 나가는 게 분명했다.

엄마 보고 싶다.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자야지. 그 생각에 벌떡 일어났지만 자꾸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여전히 허리 아래로는 연체동물처럼 덜렁거리는 것 같고 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엄마 품속에서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자고 싶었다.

“미안한데 나 집에 좀 데려다줘.”

김동규가 나한테는 큰 자기 옷을 입혀주고 내 목도리를 둘러주고 코트도 입혀줬다.

“머리 안 말려도 돼?”

“택시 탈 거야.”

“걷기 힘들면 업힐래? 택시 타러 가는 곳까지만이라도.”

“아니.”

“교복은? 내가 빨아서 갖다 줄까? 집 들어가다가 부모님이나 이모님 만났는데 이거 뭐냐고 꺼내보고 그러면 좀 그렇잖아.”

“맘대로 해. 나 진짜…… 피곤하거든. 빨리 가자 좀.”

“아, 어 그렇지 미안. 오늘 연주회도 해서 많이 피곤하겠다. 아니, 12시 지났으니 어제구나.”

좋아 죽겠다고 웃는 김동규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허리 숙이기도 힘들어하자 신발까지 손수 신겨준 김동규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차라리 여기서 기다릴래? 내가 택시 먼저 잡고서 다시.”

“동규야. 나 진짜 지금 너무…… 너무 힘들어. 힘들다 동규야.”

“그럼…… 자고 갈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최대한 어르고 달래서 빨리 집에 가야만 했다.

“괜찮아. 집에서 잘래. 빨리 집에 좀 보내줘라 좀. 지금 말할 기운도 없어.”

“아 미안. 너무 좋아서. 엘리베이터 왔다.”

택시에 올라타자 택시 아저씨가 손님들 위해 히터 빵빵하게 틀어 놨다면서 운이 좋은 학생들이라고 넉살 좋게 웃었다. 그런가. 따뜻한가. 창밖에 시선을 두고 머리를 비웠다.

“하림아, 많이 힘들었어? 미안해. 다음부턴 조심할게.”

“…….”

“근데 진짜, 너무너무 좋아서 자제를 할 수가 없었어. 미안해.”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택시가 다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놀란 김동규가 급하게 계산을 하고 따라 나왔다.

“하림아! 위험하게 왜 그래!”

김동규가 나를 따라 우리 동 안까지 들어오려고 하길래 나는 고개를 젓고 손을 뻗었다.

“아, 여기 바이올린.”

그냥 손 위에 어깨 줄만 올려놓으면 알아서 맬 건데 김동규는 내 어깨에 바이올린을 단단히 메어 주며 뿌듯한 얼굴을 했다.

“목 아프니까 말 안 해도 돼. 잘 들어가고, 엄마랑 밥 먹느라 바쁜데도 와줘서 고마워. 아빠한테 맞아서 아팠던 거 싹 다 나은 거 같아. 하림이 손은 약손인가 봐.”

머리를 안 말려서 그런지 안 그래도 찬 겨울바람이 시리도록 춥게 느껴졌다.

“그, 너무 아프게 해서 미안해. 원래 그게 서로 맞춰가는 거라잖아. 다음부턴 안 그럴게.”

“……다음.”

또 김동규랑 이 짓을 해야 한다고.

“진짜로 안 아프게 할게. 춥지? 머리도 안 말렸는데 얼른 들어가 이제. 아주머니보고 우유라도 데워달라고 해서 마시고 자. 알겠지? 아 말 또 너무 길어지네. 들어가 빨리.”

김동규가 나를 현관 도어락 패드 앞으로 밀었다. 열다섯 개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에도, 안으로 들어가 사라질 때까지도 김동규는 그 자리에 서서 날 보고 있었다.

엄마가 혹시라도 정액 냄새를 맡을까 봐 무서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열 번도 넘게 씻었다. 부들부들한 샤워볼이 피부를 벗겨내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될 정도로 닦고 또 닦았다.

머리도 말리고 잠옷도 입고 수면 모자에 안대까지 챙겨 들고 안방 문을 열었다. 엄마도 아빠도 다 새근새근 자고 있어서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자?”

“응. 왜.”

“나 오늘 엄마랑 같이 자고 싶은데.”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여보, 비켜봐.”

잘 자고 있다 깬 아빠가 내가 가운데에 들어올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좁다.”

“우리 아기가 다 커서 그렇지. 아빠보고 다른 방 가라 그럴까?”

“아니. 같이 자 그냥.”

“그냥? 아빠는 그냥 같이 자고 엄마랑은 안고 자고?”

“그럼 내일은 아빠랑 안고 잘게.”

엄마 품으로 안겨들면서 턱으로 내려놨던 안대를 올렸다. 조금 울어도 안대를 써서 티가 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울고 싶진 않았다. 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참고 참으려고 했는데 아까 그렇게 울었는데도 눈물이 나와 입술을 깨물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열일곱 살의 겨울을 지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그 날 하루만이라도, 몇 시간 만이라도.

유럽 여행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엄마에게 무슨 집을 찍은 사진이 여러 개 도착했다. 이게 뭐지 싶었는데 학교 근처에 마련해 준다는 자취할 집 사진이었다. 여행 중이라 엄마가 알아서 깔끔하고 학교에서 가까운 곳으로 고르라고 답장을 보냈다.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를 해야 했기 때문에 한 달 조금 넘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짐을 풀었다. 엄마 아빠에게 면세점에서 산 것들과 각 나라에서 가져온 기념품을 나눠주면서 자취 집 얘기를 했다. 선물에 신난 엄마가 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집에…… 김동규랑 같이 살라고?”

“그럼. 설마 혼자 살 생각이었어?”

“당연하지!”

“어떻게? 밥은 누가 차리고 설거지는 누가 하고 청소랑 빨래는 누가 해? 냉장고도 주기적으로 청소해 주고 정리해야 하고 화장실도 물때 청소 다 해야 하고 음식물 쓰레기랑 일반 쓰레기, 분리수거 다 다르게 버려야 하는 건 알아?”

“아주머니 있잖아.”

“매일 가시기는 좀 힘들지.”

“왜? 그렇게 안 멀어.”

“역삼동에서 신림동까지 차로 30분이 넘어. 그럼 이모님이랑 같이 살래?”

“아니. 아 그럼 주말만이라도!”

“5일 동안 삼시 세끼는 뭐로 해결하게? 동규랑 같은 학교 다니는데 같이 살면 좋잖아. 동규 집에서도 나올 수 있고.”

“주말에 아주머님이 냉장고에 먹을 거 넣어두면 그거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되지.”

“우리 아드님이? 직접?”

엄마가 네가 진짜 그럴 수 있겠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웃었다.

“못 할 건 없지.”

“그럼 설거지는?”

“이번 기회에 하면 돼.”

“됐네요. 내 새끼 손에 물 묻히기 싫어. 다 너 편하라고 그런 거야.”

“혼자 사는 게 제일 편해.”

“동규한테도 아빠랑 따로 살 수 있는 좋은 기횐데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네.”

“내 자취 집인데 왜 걔 얘기가 자꾸 나와?”

“똑똑한 아드님. 엄마 아빠가 아드님을 고옵게 아주 고오옵게 키운 거 스스로가 제일 잘 알죠? 그럼 혼자 사는 게 만만치 않단 것도 알 텐데 아마추어같이 왜 이래. 동규랑 같이 살든가 집에서 통학해. 차 사줄게.”

“아 뭐야 진짜. 그럼 나중에 나 유학 가도 설마 김동규 데리고 가야 돼?”

“뉴욕에 고모할머니 사시잖아. 다른 주에 사촌들도 있고. 거기서 지내.”

어쩐지 찍어서 보내준 사진들이 혼자 살기엔 너무 크다 싶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아주머니나 이모님한테, 하다못해 김동규한테라도 간단하게 요리하는 것도 좀 배우고 집안일 하는 것도 배워둘 걸 그랬다.

“엄마.”

“응?”

엄마, 나 엄마가 그렇게 불쌍해 죽으려는 김동규랑 섹스했어. 해버렸어.

“왜 불러놓고 말이 없어?”

“……그냥 불러봤어.”

자려다가 화병 날 때 혼자 방을 서성이며 분을 삭이던 걸 생각하면 오히려 같이 살면서 그날이 꿈에 나올 때마다 김동규의 방으로 찾아가 멱살을 잡고 욕을 하고 그러는 게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겠다.

“걔한테는 엄마가 얘기해.”

나와 김동규가 살 오피스텔은 기본적인 건 다 구비되어 있어 각자의 개인 짐만 챙겨 들어가면 됐다. 나는 옷만 해도 한가득이라 몇 박스를 가져갔는지 모르겠는데 김동규는 집에서 쓰던 데스크탑과 책 몇 권과 간단한 것들을 챙긴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옷도 얼마 되지 않았고 오히려 엄마가 김동규 방에 사서 넣어놨다는 옷들이 훨씬 많았다.

김동규는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짐들을 두 시간 만에 다 옮겼다.

“배고파? 이사 왔으니까 짜장면 할까 하는데.”

“이사를 했는데 왜 짜장면을 먹어? 할 거면 양파 많이 넣어줘.”

“냉장고에 춘장 없어서 장 보러 가야 할 것 같아. 많이 배고프면 뭐 간단한 거 만들어 줄까?”

“아니. 괜찮아.”

“그래 그럼.”

장을 보러 나간 김동규에게서 15분쯤 뒤에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늦어질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아저씨한테 나온다고 얘기 안 했다더니 결국 걸린 것 같았다.

〈설마 아저씨?]

[ㅇㅇ 걱정하지 마〉

[얘기 하고 금방 갈게〉

[집에 오라고 난리야〉

[시리얼 있던데 그거라도 먹고 있어〉

[배고플텐데 미안해〉

설탕이 아예 묻지 않아 고소한 맛만 나는 시리얼을 커다란 머그잔에 따라 먹었다. 꼭꼭 씹어 우유랑 같이 먹고 나서 TV를 켜고 친구들이랑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문득 김동규가 가져온 짐들이 궁금해졌다. 남의 것을 허락도 없이 뒤지는 게 조금 맘에 걸렸지만 나는 김동규에게 택배나 편지가 오더라도 맘대로 뜯어 봐도 되는 사람이었다. 김동규는 그런 거로 화내지도 않고 그런 거 뜯어 봤자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들어간다.”

주인 없는 방에 들어와 김동규의 데스크탑 전원을 켜고 커다란 가방을 열었다. 데스크탑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비번 뭐지.”

김동규 생일인 1231, 틀렸고. rlaehdrb 틀렸고. donggyu랑 kimdonggyu도 틀렸고. 겨우 네 번 만에 나는 내가 김동규에 대해 알고 있는 소스가 전부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충격적이었다. 같이 안 지가 벌써 몇 년인데 내가 얘에 대해 아는 게 이렇게나 없었나. 그러고 보니 김동규가 좋아하는 색도 모르고 좋아하는 음식도 모르고 취미는 맛있는 거 만들기? 헬스? 둘 다 취미라고 하기엔 힘들고 글 쓰는 것도 나는 걔가 정확히 뭘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 좋아하는 연예인도 몰랐고 재밌게 본 드라마,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도 몰랐다.

혹시 가방에 가져온 책 제목인가 싶어 가방에 있는 것들을 죄다 책상 위로 쏟았다. 시집과 소설책 제목들을 단어로도 쳐보고 풀네임으로도 쳐봤지만 여전히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안내 문구만 나왔다.

까만색의 파우치는 열어선 안 될 것 같은 기운을 뿜었지만 그래 봤자 지가 나 가지고 쓴 야한 글이겠거니 싶어 열었다. 파우치 안에는 그래도 글 쓴다고 몽블랑 만년필 케이스가 있었고 표지에 아무것도 써져 있지 않은 노트가 비닐에 한 번 더 쌓인 채 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비닐을 뜯어내 공책을 꺼냈다. 첫 페이지엔 예상했듯 내 이야기가 써져 있었다.

- 여덟 번째 서론 -

서하림은 그 어떤 더러움을 마주한대도 순결한 입술과 손과 영혼이 더렵혀지지 않는다. 그는 치졸하고 더럽고 추악한 오물 같은 내가 보는 것만으로도 황송한 한 떨기의 꽃이다. 한 송이의 가녀리고 아름다운 꽃.

그 애는 순결함의 상징인 백합을 닮았다. 백합…… 숭고한 그 이름은 내게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릴리. 나는 혀끝을 간질이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가 화들짝 놀란다. 어떻게 그 이름을 내 목소리로 부를 수가 있는가, 담을 수가 있는가.

함부로 부르는 것조차 죄가 되는 사랑하는 서하림, 나의 릴리.

그 아래로는 몇 년도 몇 월 며칠의 날짜가 쓰여 있었는데 정확히 여덟 줄로 여덟 개의 날짜가 쓰여 있는 걸 보아 노트를 새로 살 때마다 첫 장에 저 짧은 서론을 매번 썼던 것으로 짐작됐다. 노트가 여덟 권째라는 건지 서론의 버전이 여덟 번째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동규가 키스하면서 내 어디 어디가 예쁘고 내 어디가 좋다고 자주 얘길 하기 때문에 글로 써놓은 걸 본다고 새삼스러울 건 없었으나 김동규가 쓴 글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라 좀 낯뜨거웠다.

괜히 봤나. 머쓱해진 채로 다음 페이지로 넘기자 내 이름이나 릴리라는 김동규가 제멋대로 지은 애칭이 수두룩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다음 장도, 다음 장도, 또 다음 장도 계속계속…….

차라리 내가 주인공인 야한 소설이었다면 이런 이상한 기분은 들지 않았을 거다. 나는 팔에 돋는 소름을 무시하며 빠르게 비닐 봉투에 노트를 넣고 만년필 케이스와 노트를 파우치에 넣고 가방에도 넣은 뒤 가방이 원래 있던 자리에 똑같이 올려 두었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었다.

암호를 어서 치라며 깜빡이는 커서를 보면서 키보드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김동규의 휴대폰 비밀번호는 내 이름을 영타로 친 것이었기에, 긴장한 손으로 tjgkflad과 seoharim을 쳤다. 틀린 암호였다. 뭐지. 내 생일 0622를 쳐도 틀렸다고만 나온다. 내 휴대폰 번호 뒷자리 0137도 아니다.

“…….”

혹시 몰라 조금 전에 본 릴리를 영타로 쳐보고 영어단어로도 쳐봤는데 영어 단어 lily가 정답이었다.

파란색의 기본 바탕화면이 날 반겼다. 바탕화면엔 폴더가 딱 두 개였다. [정리], [나]. 나는 두 번째 [나] 폴더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백일장]. [일기장], [그냥] 폴더가 있었는데 당연히 내 관심을 끈 것은 일기장이었다. 휴대폰을 들어 김동규와의 메시지 창을 확인했다. 17분쯤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뒤로 아무 말이 없길래 아직도 얘기 중이냐고 보냈다. 1은 5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일기장 폴더는 우리가 중1이던 해 늦봄부터 시작이 되어 연도별로 정리돼 있었다. 수가 워낙 많아 매일매일 쓴 줄 알았지만 폴더 당 일기가 365개가 되지 않고 들쑥날쑥했다. 6년 전 중1이던 때의 폴더에 들어가 아무거나 열었다. 다섯 개쯤 읽고 중2 때와 고3 때 일기도 몇 개 읽었다.

김동규가 적은 일기는 말이 일기지 나와의 대화를 적어 놓은 기록물에 가까웠다. 자기 얘긴 하나도 없고 오로지 나와 한 대화들만. 나와 한 통화, 나와 한 대화, 내가 한 이야기…… 그리고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금.

어느 날짜를 열어도 그랬다. 일기를 쓰지 않은 날은 김동규랑 내가 학교에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거나 시험 기간이 아니라 공부를 같이 안 했거나 방학에 놀러 가거나 바빠서 김동규 연락을 씹었거나 했던 날들이었다. 심지어 자길 버리고 도망간 엄마나 매일 같이 때리는 아빠조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내가 얘랑 이런 얘길 나눴나 싶은, 이미 나는 잊어버린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까지 김동규는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거였다.

왜인지 겁이 나 모든 폴더를 닫고 컴퓨터 전원을 끄려다가 다시 일기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열일곱, 칼바람이 불던 그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그즈음의 모든 날짜를 열었다.

“왜…….”

아무것도 없지. 그날만 하얀 화면에 날짜만이 덜렁 적힌 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수정한 날짜가 보이도록 설정했더니 이날만 수정한 날짜가 만든 날짜와 달랐다. 일주일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이날이 17살의 마지막 일기였고 18살 일기의 시작은 고2 새 학기 첫날 내가 김동규에게 인사하는 내용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띄엄띄엄 파일을 열어 최근으로 올라왔다. 최근으로 오면 올수록 김동규랑 얘기할 때 느꼈던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했다. 종종 대화의 핀트가 맞지 않는다고 느꼈는데 일기에 적힌 우리의 대화는 내가 했던 말의 일부가 지워져 내가 김동규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만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나마 적혀 있는 내 말들도 내가 김동규에게 했던 말 중에 평범하거나 좋은 말들뿐이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있는 그대로 봐준다고 생각했던 김동규가, 이런 식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단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녹취록과도 같은 일기들을 읽고 또 읽었다.

“나만…… 그날 그런 게 아니라…….”

우리의 기억엔 상처가 있다. 그건 아주 날카롭고 뾰족하고 흉한 것이어서 나는 나대로 김동규는 김동규대로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김동규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김동규는 내 모든 화살을 받아놓고도 진짜로 내가 해야 할 후회와 사과를 저 혼자 짊어지겠다고 기억을 지우고.

이제야 왜 김동규가 자기 할 말만 하고 섹스에 미친 것처럼 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그날 이전의 내가 김동규에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그때만 없었으면 지금이 이렇게 힘들고 괴롭지 않았을 거라 상상만 하는 걸 김동규는 기억을 몽땅 지운 덕에 상상이 아닌 현실로 보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자기 혼자만 계속 행복하고 즐겁고 내가 싫다고 해봤자 내가 자기에게 얼마나 큰 증오를 갖고 있는지를 모르니 아랫도리 세운 채로 밀어붙였던 거고.

‘네가 나한테 주는 거면 싸구려 동정이든 불쌍함이든 슬픔이든 적선이든 하다못해 날 싫다고 혐오하고 욕을 해도 다 좋아. 뭐든 괜찮아. 상처 하나도 안 받아. 실망도 안 해. 내가 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내가……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때리고 욕해. 떠나지만…… 나 두고 떠나지만 말아줘.’

‘미안해 안 해도 돼. 넌 나한테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니까. 왜 자꾸 나 속상하게 만들어? 후회도 미안한 것도 다 내가 해. 내 몫이야. 그러니까 너는 나 미워만 해.’

내가 자길 향해 얼마나 큰 공포와 증오를 느끼고 있는지 알면 절대 하지 못할 말이었다. 지가 뭐라고 내 후회와 미안함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자기 몫이라고 했던 건데. 내가 주는 거라면 뭐든 다 좋다고? 진짜로 김동규가 내가 주는 모든 것을 가져갈 생각이었으면, 그날의 기억을, 아니 감정만이라도 잊지 않고서 나를 위해 죽어줬어야 했다.

이제 돌아간다는 김동규의 전화를 받으며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이렇게 치사하고 비겁할 수가 없다. 내가 다 잊자고 해놓고 이러는 것도 웃기지만 어떻게 혼자서만 행복에 겨워할 수 있는 거지. 나는 그날만 아니라면, 진짜로 어디다 머리를 부딪쳐 그때의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김동규와 함께했을 나날들을 상상하고 또 상상하고…… 상상이 현실이 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든 내 남은 인생의 절반이든 내어 주고 그날의 기억을 없애고 싶단 한심한 생각을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잠에 들면 꿈에서 김동규가 몇 번이나 나를 물에 처넣어 죽이려 들었고, 겨우겨우 도망쳐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면 눈물 때문에 흠뻑 젖어 있는 안대를 벗으며 얼마나……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는지, 당장이라도 김동규를 어떻게 해버리고 싶어 밤을 새운 적도 여러 번이었는데.

전에 찍어 둔 김동규의 동영상을 지웠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김동규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이걸 보여주고 손을 잡고 상담 센터를 찾아갈 생각을 했던 지난날의 내가 너무 미련하게 착했다. 내가 종종 올라오는 화에 죽겠는 것처럼 김동규도 종종 그렇게 발작하고 소리 지르고 괴로워하라 해.

그건 기억을 지 편한 대로 저장하고 맘 편하게 사는 것에 대한 죗값이다. 불쌍할 것도 없고 안쓰러울 것도 미안해할 것도 없다. 어차피 김동규는 나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동시에 자기방어를 위해 온갖 것을 왜곡하고 지 좋을 대로 받아들이는 새끼니까.

김동규가 내 입맛에 딱 맞춰 만들어준 저녁을 먹고 잠에 들었다. 김동규랑 같은 집에서 살게 되면 김동규가 나를 죽이는 악몽에 자주 시달릴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첫날도, 둘째 날도, 셋째 날과 그 이후의 모든 날들도.

원래도 술을 잘 마시는 체질인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나는 술이란 의지의 영역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량보다 몇 배 넘는 만큼 마시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술 취한 상황에서도 정신 똑바로 차리는 일이 불가능한 건 아니란 거다. 무서운 어른과 마시거나 아주 중요한 술자리에서 주량보다 조금 더 마시게 되었을 때 어떻게든 정신 줄 붙잡고 실수 안 하려고 노력하면 버텨지는 거나 술 많이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었어도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것들이 내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 증거들이었다.

“서하림 너 이러다 진짜 알콜 중독 걸려.”

“얘는 걸려도 괜찮지. 엄마 아빠가 다 대학 병원 의사인데. 믿는 게 있으니 하루도 안 빼먹고 마시는 거 아니겠어?”

김동규가 공대가 아닌 인문대로 진학한 건 진짜 다행인 일이었다. 자연대와 공대는 겹치는 수업도 꽤 있고 친한 학과별로 자주 모이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인문대, 그것도 국문과랑은 그럴 일이 전혀 없어서 좋았다.

나는 개강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업이 끝나면 집에 곧장 들어가지 않고 밖을 나돌았다. 주말에는 집에 늘어져 방에만 틀어박혀 있거나 본가로 가거나 주말에도 어떻게든 약속을 잡아 집구석을 나왔다. 내가 좋아 사랑하기까지 한다는 김동규랑 같이 있고 싶지가 않아서.

“나보다 못 마시는 사람이 하는 충고는 안 듣도록 하겠어.”

“그럼 여기서 너한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 한 명도 없다 야.”

“말귀를 왜 못 알아들어? 서하림이 너 닥치라는 거잖아.”

이렇게 술 먹고 밖에 돌아다니면 김동규가 나를 데리러 왔다. 김동규는 내가 집에 들어오지 못할까 봐 벌벌 떨며 내 연락을 기다렸고, 술에 취한 나를 차에 태워 집으로 모셔 갔고 씻기 귀찮아 한 번씩 씻겨 달라고 행패를 부리는 내 말에도 묵묵히 나를 씻겨줬다. 그리고 아침마다 나를 위한 해장국을 만들기 위해 1교시가 없는 날이라도 새벽같이 일어나고.

나는 몸이 차서 그런가 술을 먹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엉겨 붙길 좋아하는 편이라 내 연락에 달려온 김동규가 그런 나를 보고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술 먹었단 핑계로 김동규를 부려먹고 때리기도 하고 막말도 할 수 있고. 지난주에는 술도 술인데 막걸리를 너무 많이 먹어서 새벽에 토하느라 잠이 다 깬 걸 핑계 삼아 자고 있는 김동규를 깨워 라면을 끓여달라고 그랬다.

우리 집에 라면이 없었기 때문에 김동규는 세수도 하지 못한 채 편의점에 뛰어 갔다 와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는 식탁에 앉은 내 앞에 라면을 예쁜 그릇에 담아 내왔을 때, 나는 코를 막고 싱크대에 라면을 그릇째로 버렸다. 갓 끓인 라면도 라면인데 접시까지 깨졌음에도 김동규는 오로지 내 손이 다쳤는지만 걱정했다. 나는 김동규의 그 따뜻한 손을 매몰차게 내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오, 서하림 오늘 좀 달리는데!”

“갑자기 안 좋은 일 생각나서.”

“누가 우리 서하림이를 짜증 나게 만들었을까?”

“그러게나 말이야. 누구야!”

대학가 술집은 다 거기서 거기라 어지간해선 안주를 잘 먹지도 않고 먹어도 맵거나 짜지 않은 거 위주로 먹는다. 예를 들면 치즈 계란말이나 콘치즈, 감바스 같은 것만 조금 먹고 보통은 국물 안주만 먹는 편이다. 오늘 온 이곳은 다른 건 몰라도 짬뽕을 진짜 기가 막히게 만드는 집이었다. 기본적인 빨간 짬뽕, 해물 짬뽕, 크림 짬뽕 세 가지가 있는데 세 개 다 맛있다. 심지어 면도 생면이었다.

친구들이 하도 까탈스러운 내 입맛에 여기 짬뽕은 통과했다고 사장님한테 자랑 자랑을 해서 사장님이며 알바생들이 내 얼굴을 알고 있다. 그래서 좀 전에도 내 얼굴을 본 사장님이 우리 테이블로 와 오늘은 숙성이 잘 됐다며 면 반죽을 자랑까지 했다. 짬뽕 맛있게 해주겠다고 껄껄 웃는데 그걸 보면서 좆같게도 김동규가 떠올랐다. 김동규는 내 입에 들어가는 건 뭐든 자기 손을 통해야 했기 때문에 국수 하나를 만들더라도 직접 면을 뽑지 마트에서 면을 사 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가 주량을 조금 넘게 마셨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마시며 주량을 넘긴 거라 다들 놀란 듯했다. 놀라면서도 다들 내 술 취한 모습 보겠다고 자기들은 얼마 마시지도 않았다.

“서하림 진짜 이거 안 되겠네.”

“저 얼굴로 치대는 게 술버릇이면 고소감이야.”

“고소해 보든가.”

“집에 돈 많다 이거냐?”

“좀?”

“왜 그래, 귀여운데.”

“저도 주세요.”

옆에 앉아 있던 동기 누나에게 기댔다. 재수해서 올해 입학해 나보다 한 살 많았다. 누나가 국물을 마시길래 나도 달라니까 웃으면서 자기가 먹던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내밀었다.

“아니 제 숟가락이요.”

“어차피 같은 곳에서 떠먹는 건데?”

“그래도 싫어요.”

“알았다 알았어. 자, 아 하세요.”

처음에는 다들 내가 술 취한 거 처음 본다며 좋아하더니 내가 계속 까칠하게 대답하자 집에 보내는 게 좋겠다며 술렁거렸다. 아직 그렇게 취하진 않았기 때문에 똑바로 젓가락질을 하며 홍합을 발라먹었다.

“나 안 가. 더 있다 갈 거야. 손 닦게 물티슈 좀 줘.”

“서하림 그냥 집 가서 손도 발도 닦고 자라. 너랑 10분만 더 같이 있다간 여기 있는 사람들 뼈 다 부러지겠어.”

“애초에 그럴 일을 하지 말았어야지.”

“아우 그래 너 잘났다 잘났어. 야 휴대폰 줘봐.”

“집에 안 간다니까.”

“알겠어. 여기서 밤새 있어. 그러니까 줘.”

휴대폰을 건네고 홍합을 또 발라 먹었다.

“너 같이 사는 애 이름 뭐라 그랬지. 김 뭐였는데.”

“김동규. 걔 교수님들 사이에서 유명하잖아.”

“왜?”

“고등학생 때부터 천재였대. 백일장만 나갔다 하면 장원 받았다나 봄?”

“교수님들 아니어도 유명해. 올해 국문과 신입생 중에 남학생이 네 명밖에 없어서.”

“남자가 넷밖에 안 된다고? 우리랑 반대네.”

“하림아 문학 천재 친구 불렀으니까 이따 오면 집에 가.”

“아 왜, 안 간다니까.”

“저기요 왕자님.”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네네. 저기요 학우님, 학우님에 비하면 돈 없고 공부도 안 하고 놀기 바쁜 미천한 우리가 앞으론 술 많이 마시라고 나대지 않을 테니까 집에 곱게 가라 응? 몸은 어? 요망하게 앵기면서 말은 아주 가시가 돋쳤어.”

“왜, 징그러워?”

누나에게서 떨어져 동기에게 달라붙었다.

“징그럽고 뭐고 너 말하는 싸가지 때문에 그런다 왜.”

“누나, 제가 싸가지없게 말했어요?”

“아니? 맞는 말만 했지. 그럼 그럼.”

“나쁜 새끼. 너랑 다신 안 놀아.”

다시 누나의 어깨에 기대 국물을 받아 마셨다. 김동규가 온 건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야 서하림! 네 친구 왔어! 집에 좀 가 이제.”

친구?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김동규를 보며 동기 누나의 팔에 팔짱을 꼈다.

“쟤 내 친구 아니야.”

“뭔 소리야? 같이 산다며? 빨리 가. 천하의 서하림도 술을 먹으면 진상이 되는구나.”

“냅둬, 귀여운데 왜 자꾸 가라 그래?”

김동규가 나를 억지로 뜯어내 데리고 가느라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욕을 하려다가 보는 눈이 많아 입술만 깨물고 등에 업혔다.

“내가 전화 한 것도 아닌데 왜 와. 네가 쟤 친구야? 쟤랑 살아? 왜 쟤가 오란다고 와?”

“많이 취했다고 그래서.”

“취했어도 전화할 정신은 있었어. 내가 어련히 전화할 생각이었는데, 아. 나랑 그 짓 하고 나니까 이제 슬슬 내 말은 말 같지도 않다?”

“그런 거 아니야. 미안해.”

조수석에 나를 앉히고 벨트까지 채워준 김동규를 향해 나는 쉬지 않고 말을 뱉었다. 너랑 살기 싫어, 이럴 거면 왜 데리러 왔어, 택시 타고 갈 거니까 너 혼자 가 기타 등등. 그런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김동규 때문에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병신처럼 뭐 하고 있어? 집에 가자며.”

“물 마실래? 아니면 이온 음료?”

“아니. 졸리니까 운전이나 해. 기사 노릇 하려고 온 거잖아.”

“편의점이라도 들를까?”

답답한 새끼. 화 좀 내.

“손 줘.”

“어?”

“손. 두 번 말 하게 하지 마라. 얼른.”

“나 한 손으로 운전 못 해.”

“알아. 그래서 달라고 그런 거야. 그래서 안 주려고? 내가 달라고 그랬잖아. 깍지 껴 줄게. 너 나랑 손잡는 거 좋아하잖아.”

손 주지 않으면 내리겠단 말을 하려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김동규가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본네트를 돌아 내 쪽으로 달려왔다.

“무, 물 사 올까? 등 두드려줘? 편의점 가서 봉투라도 사 올까? 아, 앞으로 차에 물이랑 일회용 봉투 넣어놔야겠다.”

나는 필사적으로 올라오는 것들을 참았다. 목구멍에 힘을 주고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도록 했다. 조수석 문을 열고 발을 동동거리는 김동규를 보면서 고개만 저을 뿐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김동규에게 토하는 모습 보여주기 싫다. 술한테 진 것 같고 그래서 한심한 것 같고 무엇보다 더러운 토사물을 쏟아내는 모습 자체를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김동규는 내 분비물도 감사히 먹겠다는 경악할 만한 사고를 가진 새끼였지만 그건 걔 생각이고 정상인인 나는 아니었다.

“괜……찮으니까 빨리, 집에 가자.”

집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나.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집까지 가는 길이 너무 길었다. 몇 번이나 참을 수 없이 구토가 올라와 차를 멈추고 잠시 쉬다가 괜찮아지면 출발하길 반복했다.

“도착했어. 하림아, 이제 좀 괜찮아? 집에 가서 화장실 갈 거지? 등 두드려 줄게.”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으로 뛰어와 문을 열고 나를 등에 업은 김동규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토하고 싶으면 등에 해도 괜찮으니까 그냥 해. 알겠지?”

“김동규.”

“응?”

“집에 가지 말고 산책하자. 저어기로. 여기 오피스텔 산책로 있잖아.”

“응. 좀 걷다 올라가자. 졸리면 자도 돼.”

“차 새로 산 거라 새 차 냄새 때문에 토할 것 같았어.”

“하지 그랬어. 해도 된다니까. 많이 힘들어하던데.”

“싫어.”

“왜?”

김동규는 내가 그냥 걱정돼서 물어본 말일 테지만 나는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침만 삼켰다. 솔직하게 다 말하기는 자존심이 상해서 절반만 떼서 얘기했다.

“보여주기 싫어서.”

“뭐를?”

“알면서 왜 물어봐. 존나 웃기는 새끼네.”

악착같이 토를 하지 않았으니 누구라도 속 게워내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한다는 걸 알 터였다. 김동규도 그렇겠지. 김동규는 속으로 또 내가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며 온갖 수식어를 달아 찬양하고 미화하고 있을까? 나는 그냥…… 됐다. 그냥 토할걸. 김동규가 뭐가 예쁘다고 진상 부릴 찬스를 놓쳤지.

“속 가라앉는 거 같으니까 30분 정도만 걷다가 들어가자.”

넓은 등에 업힌 30분은 화살처럼 빨리 흘러갔다. 아무런 말도 없이 걷던 김동규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바본가. 이럴 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걸어도 싫다고 안 할 건데, 진짜 이상한 데서 칼 같은 놈이다.

집에 돌아온 김동규는 내 옷을 갈아입히고 물도 받아와 얼굴과 발을 씻겼다. 침대에 앉은 채 내 발을 구석구석 닦아주는 김동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기 위해선 낮은 자세를 취해야 하고 몸에서 가장 지저분한 곳을 닦아줌으로써 갖는 의미도 컸다. 자기 발도 아닌 걸 뭐가 예쁘다고 매번 이렇게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닦는 것일까.

“발톱 잘라야겠다.”

제 손가락만 한 크기의 손톱깎이로 내 발톱을 깎고, 발톱들을 휴지에 모아 접는다. 같이 살기 전이었다면 고이 접힌 휴지를 보고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겠지만 김동규가 저걸 버리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정성스레 내 발을 마사지하는 김동규의 손길을 느끼며 발톱으론 뭘 할지 상상해 보았다. 뭘 상상해도 역겹고 비위가 상했다. 상상을 날려줄 것이 필요했다.

김동규의 다리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그도 그럴 게, 김동규의 것이 서서 바지가 불룩했다. 발가락 사이 여린 살을 김동규의 커다란 손가락이 만지는 게 간지럽다.

“동규야.”

“응?”

“간지러워.”

“아 미안. 술 많이 먹은 거 같은데 진짜 토 안 해도 돼?”

“응. 아침에 맛있는 해장국 끓여줘.”

“알겠어. 뭐 해주지. 많이 마셨으니까…… 음…….”

평소 같으면 지 혼자 흥분해선 나를 자빠뜨리고도 남았을 애가 저렇게 앞을 세우고도 평온한 게 조금 웃기다.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김동규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

“내가 이렇게 해주니까 좋지.”

“…….”

“좋잖아.”

“……응.”

“엄청 흥분했네. 왜 지금은 안 달려들어. 좆 터질 것 같다고 낑낑대 봐. 혹시 알아? 술도 취했는데 기분 좋다고 내가 잘 해줄지.”

“술 취한 애 데리고 하기 싫어. 아프게…… 안 한다고도 했고 이제는 자제 좀 해보려고.”

갑자기 왜 날 생각해 주는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자극해도 넘어오지 않는 김동규한테 짜증이 나서 발을 굴렀다. 플라스틱 통도 발로 차 물이 엎질러졌지만 김동규는 내 발을 꼼꼼히 닦고 내일 아침에 뭐가 좋겠냐고 물어보고 안대와 모자까지 씌워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고 대놓고 삐졌다는 티를 내기 위해 입술을 삐죽이며 김동규 쪽으로 누웠다.

나 때문에 엉망이 됐을 바닥을 닦고 수건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린다. 통을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가 침대 옆으로 돌아오는 소리도 들렸다. 다시 돌아온 김동규는 침대 옆 조명 밝기를 낮추고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야.”

“어? 깼어?”

“안 자고 있었어.”

“시끄러웠나 보다. 미안해. 잠깐 너 자는 거 보다가 나도 나가려고 했어.”

“너 있잖아. 너 나를…….”

안대 아래쪽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온다. 내가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김동규가 안대를 벗겼다. 어두운 조명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김동규가 나와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응. 나 뭐. 왜?”

너 있잖아. 김동규 너, 날 이제 안 좋아하면 안 돼? 그만 좋아할 순 없어? 사랑하는 마음 접고, 내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나만 보지 말고 그냥 그렇게 살면 안 될까.

“졸리면 자고 내일 말해도 돼.”

일렁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나는 혀 위로 올라온 말을 삼켰다. 내뱉지 못한 말은 너무 뜨거워 목구멍이 다 따끔거렸다.

어서 자라며 내 배를 토닥이는 김동규의 손을 잡고 뺨에 비볐다. 날 계속 이렇게 좋아할 거라면 김동규가 계속 나쁜 새끼였으면 좋겠다. 뭘 하든 내가 김동규를 욕하고 비난할 수 있도록. 그래서 김동규의 손에 뺨을 비비고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빨리 나를 정욕으로 함락시켜달라고 유혹했지만 김동규가 넘어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김동규를 끌어당겼다. 그 커다랗고 힘이 센 애가 내 손에 너무도 쉽게 끌려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김동규의 손을 잡아 내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끝까지만 하지 마.”

“뭐?”

“너는…….”

무슨 말을 해야 김동규가 넘어오지. 벌써 두 번은 싸고도 남았어야 할 김동규가 의외로 차분한 데 비해 나만 잔뜩 달아오른 것 같아 김동규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단단한 등 근육을 쓸어내렸다.

“너만 좋을 대로 하잖아. 내가 아프다고 말해도…… 그러니까 끝까진 하지 말고 안 아프게, 아프지 않게. 피곤하니까 끝까지는 못 하겠다.”

김동규가 숨을 빠르게 쉬다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와, 김동규 벌써?”

“왜 웃어, 쪽팔리게.”

“너 내가 그렇게 좋아? 겨우 등만 건드렸는데.”

“진짜 해도 되는 거지. 난 네가 술 취했을 땐 진짜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해.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김동규가 잠옷과 속옷을 벗기면서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도 섰는데, 진짜 술 깨고 후회 안 할 거지.”

“응. 나도 섰어. 굳이 말 안 해도 돼.”

“빨고 싶어.”

“해. 끝까지만 하지 말고.”

“솔직히 자신은 없어.”

“…….”

“하지만, 끝까지 안 해. 안 할게. 그냥 빨기만 하고 끝 할게.”

“갑자기 신뢰도가 하락하는 기분이야. 전에도 비슷한 말 하고서 다른 것도 다 하지 않았나.”

“너 술 안 취했지. 취했단 거 거짓말이지.”

나도 내가 취한 건지 아닌 건지 확신할 수 없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웃는 김동규의 얼굴이 낯설고 이상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웃음이 끝나지 않는 걸 보니까 취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김동규가 내 것을 물자 웃음소리가 단숨에 신음으로 바뀌었다. 나는 김동규의 입에서 두 번을 사정했고 내 정액을 삼키는 김동규의 머리카락을 잡은 채 할딱거리며 좋다고 얘기했다.

진짜로 취했나 보다. 이게 내가 그렇게 바라는 상상 속 어느 날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걸 보니까.

술값 내기 볼링이 열렸다. 술은 이러나저러나 마실 거였고 볼링은 핑계였다.

3대 3으로 팀을 가르고 게임이 중간쯤 흘렀을 때 상대 팀의 둘이 빠졌다. 그것도 하나는 여자 친구가 불러서, 다른 하나도 썸 타는 애한테 전화가 와서. 순식간에 버려진 우리 네 명은 다시 2대 2로 나누어 몇 번 볼을 던지다가 흥미를 잃고 말았다.

“이래선 술맛도 떨어지겠다.”

“남자 새끼들이랑만 있는 것도 칙칙한데 여자 친구 있다는 두 놈이 빠져서 외로운 도토리들만 남았어.”

“아내도 아니고 여자 친구가 부르는데 그렇게 튀어 갈 건 뭐야?”

“아주 극진하게 공주님처럼 모신대잖아. 전화하는 거 못 들었어?”

“옆구리가 시려서 동사하는 줄.”

“우리 엄마가 대학만 오면 여자애들이 졸졸 따라다닐 거라고 그랬는데 이게 뭐냐 지금.”

파투 난 술값 내기 경기를 마치고 볼링장을 나왔다. 아쉬워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같이 가서 마실까 했는데 다들 여자 친구 타령을 하며 집으로 가잔 분위기였다. 술 가볍게 먹고 벚꽃이나 보러 가려고 했더니.

“우리야 그렇다 쳐도 서하림 너는 왜 여친 안 사겨?”

“너 좋단 애들만 세워놔도 학교 캠퍼스를 한 바퀴 돌겠다.”

“내가 얘 얼굴이었으면 세계 최고의 창놈 되고도 남았어. 나 좋다는 애들 시간별로 만난다.”

“시간이 뭐야, 분으로 쪼개야지.”

“그 정도야? 어후, 진짜 부럽다 부러워. 대기표도 뿌려야겠네.”

친구들은 정작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던 나 대신 내 연애를 자기들끼리 시작했다 끝내고 다시 시작했다 끝내며 떠들어댔다.

“서하림 이상형이 어떻게 돼? 좋아하는 연예인은? 눈이 높은가? 아니면 좋아하는 애가 있어?”

“얘 이상형 같은 거 없다고 그랬잖아, 전에 엠티 갔을 때.”

“그래?”

“아무리 없어도 이랬으면 좋겠다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음…….”

“오, 있나 본데?”

이상형이라.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이랬으면 좋겠다 정도는 당연히 있다. 내가 뜸을 들이자 친구들이 걸음까지 멈추고 내게 귀를 쫑긋 세우며 빨리 말해보라고 채근했다.

“다정한 사람.”

“외모는?”

“사람 외모 잘 안 봐.”

“하긴 너 정도면 거울 보면 될 테니까.”

“그래도 생긴 것도 봐야지!”

“얼굴보단 몸매가 더 중요한가 보지. 말 끊지 말아봐.”

“다정하고 또?”

“또?”

“너무 범위가 넓잖아.”

“흠.”

“몸매 보나 본데.”

“그런가.”

나는 제법 심각해져 팔짱까지 꼈다. 딱히 몸도 보진 않는데.

우리는 바로 앞에 보이는 편의점 외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각자 음료수 캔 하나씩 들고나와 내 이상형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나랑 같은 고등학교 나온 친구 중에 서하림 존나 좋아 미치는 애 있는데 걔한테 알려줘야지.”

“나는 나만 알고 있어야지. 여자애들이 알았다간 우린 승산 없어. 4년 풀로 외로운 도토리다.”

“근데 진짜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다니까.”

“다정하고 빨리 그다음. 가슴 큰 거?”

“아니. 나 많이…… 좋아해 주는 거.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좋아하면 좋겠어.”

“갑의 연애를 하시겠다? 누군지 몰라도 그 여자애가 불쌍하다.”

“나만 이해 가? 내가 여자라면 저 얼굴에 저 머리에 저 집안에 키도 커, 나 많이 좋아해달라는 게 연애 조건이면 헌신짝 되도록 순정 다 바치고 남았다.”

“그건 인정.”

“나 아직 연애할 생각 없어.”

“그건 우리한테 희소식이고.”

나만 없으면 우리 학교 여학생들이 다 자기들 것이 된다는 듯 구는 게 한심해서 코웃음이 나왔다. 저번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는데 나보고 외국인을 사귀라느니 다른 학교 학생을 사귀라느니 우리 학교 학생은 자기들을 위해서 양보를 하라느니 그런 얘길 했었다. 나는 다 마신 콜라 캔과 얼음 컵을 들고 일어났다.

“정말 희소식일까.”

“응?”

“내가 4년 내내 솔로로 지내다 졸업한다고 해도 안 생길 사람은 안 생긴다고.”

“와!”

아직 앉아 있는 세 명이 거드름을 피우며 재수 없다고 야유를 보냈다. 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이곤 쓰레기통에 캔과 컵을 버렸다. 내 비난에서 연애 얘기로 다시 화제가 돌아가자 친구들이 안 그래도 날씨가 추운데 옆구리까지 시려 죽겠다며 각자 집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딱 저녁 시간이었다. 음료를 마셔서 그렇게 배고프진 않아 집으로 곧장 왔더니 과외 하는 중인지 김동규가 집에 없었다. 어묵탕이나 끓여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꼭 필요할 때 없다. 살짝 집 안을 훑어보고 다시 신발을 신고 나와 집 근처 샐러드 전문점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야채들을 가득 담아왔다. 김동규가 만들어 놓은 요거트랑 우유 치즈를 곁들여 먹으니 맛있었다.

“서하림?”

풀로 채운 배를 두드리며 누워서 TV를 보고 있는 와중 김동규가 들어왔다.

“저녁 약속은?”

“취소됐어. 아, 술 먹고 벚꽃 보러 가려고 했는데.”

“저녁은?”

“그래서 안 먹고 너 기다리는 중이었지.”

김동규는 내 말에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화장실로 뛰어갔다. 김동규가 뭘 해주든 한두 입 먹고 배부르다고 할 거였기 때문에 손을 씻고 나온 김동규가 헐레벌떡 저녁을 준비하는 걸 보고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일부러 대충 먹자는 말도 했다. 그러면 김동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죽어도 대충 만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10분만 기다리는 말에 밥 조금만 먹고 호수공원이나 데려갈까 생각했다. 놀러 간 김에 그렇게 먹기 싫어하는 술도 한번 먹여봐야지. 토할 정도로 마시게 해서 내일 아침에 숙취 때문에 바닥을 기어 다니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쐐기를 박을 거다. 결국 너도 너네 아빠랑 다를 거 없더라, 뭐 그런 말. 술에 취했어도 날 애지중지하는 김동규가 나를 때릴 가능성은 아주 적었고 김동규 스스로도 그걸 잘 알 테지만 내가 한 그 한마디는 김동규에게 엄청난 파장을 줄 것이다. 거짓말이었다고, 장난이었다고 웃어줘도 김동규는 자기가 술에 취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끊임없이 자기를 의심할 테고 그렇게 싫어하는 아빠와 자기가 닮은 게 있다며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겠지. 물론, 김동규가 나보다 못 마신다는 가정하에 하는 생각이다.

몇 숟갈 뜨지도 않은 내 밥을 정리한 김동규와 호수공원을 갔다. 운이 좋아 사람도 별로 없었고 일기예보 찍는 생방도 봤다.

“근데 너는 왜 술 안 먹어?”

“……안 좋아하니까.”

“혹시 아저씨 때문에?”

“응.”

“너도 술 먹고 그렇게 될까 봐? 나 막 때리고?”

“…….”

상처받을 말을 들으면 좀 상처받은 티를 내줬으면 좋겠는데 김동규는 눈만 깜빡이는 게 전부다.

“지금까지 한 방울도 마신 적 없고 앞으로도 먹을 생각 없어. 술이라면 딱 질색이야.”

김동규와 마주 보고 뒤로 걸었다. 뭐 어떻게 해야 김동규가 나랑 술을 먹겠다고 그럴까.

“그으래? 그럼 나랑 마시는 것도 싫어?”

“몰라.”

“모르긴 뭘 또 몰라. 맨날 모른대. 아, 죄송합니다.”

뒤로 걷느라 지나가는 사람을 보지 못해 부딪힐 뻔한 걸 김동규가 내 팔을 잡아끌어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행인도 셀카 찍느라 나를 못 본 상황이라 서로 사과를 했다.

“진짜 안 마셔 나랑? 너도 알잖아, 나 술 먹으면 다른 사람한테 안기는 거. 애교도 막 부린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손이 차서 사람 몸에 손대고 그러면 너무 좋.”

“마실게. 좋아.”

“응?”

“너랑 먹는 거.”

“나도 좋아.”

웃으며 그렇게 말해주니 김동규가 나와 눈도 마주치질 못했다. 뻣뻣하게 구는 김동규의 팔을 잡아끌어 몇 번 와본 술집으로 향했다.

벚꽃 축제가 시작됐어도 오늘은 좀 추워서 술집이 꽉 차 있을 법도 한데 선술집에 자리가 남아 있었다.

“여, 여긴 뭐가 맛있어?”

“다 맛있는데 일단 음식 나오기 전에 나오는 연두부부터 맛있어. 직접 만든대. 그리고 참나물 전이 진짜 맛있어. 밀가루 거의 안 쓰고 엄청 담백하고 향 진하게 나서 맛있구 그리고 여긴 회가 진짜 장난 아냐. 진짜 소주 쭉쭉 들어가.”

“그래. 참나물 전 나도 먹어봐야겠다. 연두부도.”

거의 모든 테이블이 작은 룸처럼 되어 있어 문도 다 달린 이곳은 분위기도 좋고 술집치고 안주가 먹을 만해서 좋았다. 김동규는 연두부를 한 입 먹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곧이어 나온 참나물 전은 사진까지 찍어댔다. 나중에 해주려나 본데, 집에서 아무리 이 맛을 똑같이 구현해 준다고 해도 여기서 먹는 게 더 맛있다고 버릴 생각이었다.

저번에는 김동규가 회 떠주는 걸 잘 받아먹다가 갑자기 짜증이 터져 행패를 부렸다. 횟집에서 먹는 것보다 덜 싱싱한 것 같다, 두께가 일정하지 않다며 있지도 않은 트집을 잡았다. 김동규의 미안하단 말을 수십 번 듣고 나서야 기분이 풀려 남은 회를 먹었다.

김동규가 참나물을 세 입째 먹었을 때 우리의 첫 짠이 시작됐다. 나는 평소 달리는 페이스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내 잔과 김동규의 잔을 채웠다. 저 덩치면 둘이서 다섯 병을 마셔도 거뜬할 것 같아 빨리빨리 해치울 속셈이었다.

“아…….”

하지만 김동규는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숟가락과 젓가락을 수시로 떨어뜨리고 물을 쏟고 몸을 가누질 못했다. 존나 김빠져. 우리는 이제 막 두 병을 다 마시고 세 병을 깐 상태였다.

“야. 김동규.”

“응?”

“나 참. 너 진짜 그 등치가 안 아깝냐?”

“응. 아까워.”

“놀이 기구도 못 타, 벌레도 잘 못 잡아, 술도 못 마셔, 공포 영화도 못 봐. 넌 도대체 잘 하는 게 뭐야?”

“응.”

“이럴 거면 왜 같이 마시자고 그랬어? 재미 하나도 없다. 아 그냥 다른 애들이랑 올걸.”

내 사소한 한마디까지 전부 기억하는, 아니 정확히는 지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거지만 그래도 내가 한 말들을 따로 적어 놓기도 하는 김동규라 약간의 시험을 해보는 것도 있었다.

술 왕창 먹고 취했을 때 김동규는 과연 어디까지 기억할 수 있는가? 만약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술 먹고 나를 때린 것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거나 어차피 잊어버릴 테니 온갖 막말을 해도 되는 거니까.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런 상황이라니 내 쪽에선 환영이었다. 기억만 잘 끊기면 완벽했다. 김동규 아저씨가 맨날 술만 처먹고 다녀서 주량도 유전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애들? 난 너랑만 마실 건데…….”

“너랑 여기 왜 왔는지 시간도 아깝고 돈도 아깝다. 넌 이제 내가 주는 술만 먹고 안주는 하나도 건들지 마.”

“응.”

“생각 같으면 먹은 것도 뱉어내라고 하고 싶은데, 이미 위에서 소화되는 중일 테니까 그건 안 되겠다.”

“응.”

“병신. 미친 새끼. 내가 하는 말이라면 죽, 아 죽는댔지. 내가 하는 말이라면 똥 보고 된장이라 해도 먹겠다?”

“응.”

“응? 으응? 야, 너 진짜 바보야? 너는 술에 취해 있어도 그냥 다 응만 해? 멍청이야? 술김에 화도 못 내? 노답 새끼. 진짜…… 화를 안 내는 걸 지 혼자 대단한 사랑이라고 정신 승리나 해대는 주제에 내가 진짜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김동규의 잔에 술을 채웠다. 회 한 점을 먹으며 나도 내 잔을 채워 마셨다. 김동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해? 안 마셔? 내가 아까 전에 내가 주는 술만 마시라고 그랬지.”

“…….”

원래 같았으면 미안하단 말이 튀어나올 타이밍이었음에도 김동규는 조용했다.

“야. 귀먹었어? 아 시발 됐어. 술맛 떨어져. 일어나, 집에 가게.”

“……그럼.”

“대리 부른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뭐?”

후두둑 떨어지는 김동규의 눈물에 놀란 건 나였다. 나도 모르게 테이블 구석에 있는 티슈 케이스를 잡았지만 저게 뭐가 예쁘다고 운다고 휴지를 줘. 들었던 케이스를 다시 내려놨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밖에 없는데…… 네, 네가 나한테 아무리 욕을 하고 그래도…… 당연한 건데…….”

“당연한 거라고?”

“내가, 하림이 너를…… 그, 그렇…….”

울음이 터져 나오는지 김동규가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죽여 울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지? 분명히 다 지웠을 텐데. 내가 얼마나 김동규를 떠봤는데. 주어 없이 그때를 얘기하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아니라 김동규가 그때 일을 거론하는 게. 거기다 나처럼 화가 나거나 분에 차서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슬프게 울면서 차마 얘길 못 하겠다는 듯이 구는 반응도 처음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내가…… 내, 내가…….”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이 김동규를 얼마나 들쑤실 수 있을지, 얼마만큼 상처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앉아 있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이렇게 우는 게 너무 같잖아서 나는 목이 칼칼하고 코끝이 찡해졌다.

“그래. 네가 그랬어. 김동규 네가.”

“…….”

“그렇게 사랑한다는 나를 네 손으로 죽였어.”

김동규는 코로 빠르게 숨을 쉬면서 이제는 몸까지 떨어댔다. 테이블 아래에 있던 나머지 한 손도 입을 틀어막고 눈동자도 불안정하게 한 곳에 두지 못했다.

“기억하고 있었네. 내가 분명히 잊어버리라고 그랬는데.”

“아니야! 다 잊었어!”

“시끄럽다. 여기 집 아니야.”

내 말에 김동규는 다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나는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며 김동규를 흘겨보았다.

“내 말 안 들었네. 다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아닌 척. 와, 김동규한테 완전 속았네 나.”

두 눈을 꼭 감은 김동규는 더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울었다. 지금 울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울고 난리야.

“잊었다고? 그럼 왜 평소엔 모른 척했어?”

일기장 얘길 해도 되나.

“모, 모른 척 한 게 아니라…… 진짜 모르는 거고, 다, 잊은 거 맞는데…… 다 잊었어 하림아, 나 진짜로 몰라, 모르는 일이야…….”

입에서 간신히 뗀 두 손을 주먹 쥐어 입가에 붙이고 있는 꼴이 무서운 선생님에게 혼나는 어린아이 같았다.

“내가 잘못했어, 다 잊었어. 잊어버리라고 해서 다 잊었어. 정말이야…… 그, 그렇게 무섭, 무섭게 보지 마…….”

“못 믿겠어. 아까 분명히 네가 그랬어. ‘내가 하림이 너를 그렇게, 내가 그랬잖아 내가’라고. 그럼 내 귀가 잘못됐단 얘길 하고 있는 건데 맞아? 네가 맞고 내가 틀려?”

달달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때리던 김동규가 갑자기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잔이나 앞접시, 수저가 엎어지고 떨어졌지만 우리 둘 중에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김동규에게 바짝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 알겠다. 너 이거 회피하는 거구나. 네가 감당할 수 없으니까 따로 빼서 저장해놓고 혼자 맘 편히 지냈는데 술 먹으니까 저 멀리 던져둔 기억들이 자꾸 떠오르고, 어? 감당을 못 할 정도로 나한테 미안해 죽겠어서 우는 거 아니야 지금.”

“하림아.”

엎어져 들썩이던 김동규가 내 손을 잡았다. 여전히 김동규는 울고 있었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나보고…… 죽으라고 한 마디만 해.”

“뭐?”

“죽고 싶어. 죽게 해줘. 죽을게. 더 살고 싶지 않아. 내가 어떻게…… 나는…… 나는, 하림아…….”

“지금 뭐라고……?”

“제발 하림아, 나…… 나 좀 죽여줘…… 죽으라고 해…….”

어느 쪽이 내가 아는 김동규지. 다정했다가 막무가내로 무섭게 돌변하는 쪽? 아니면 죄책감에 절규하는 쪽?

내 손을 잡은 김동규의 손이 너무 뜨겁다. 그와 반대로 내 손은 차가웠다. 우리는 원래 이랬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내 차갑던 손을 녹여주던 김동규의 손을 잘 알고 있는데 너무 뜨거워 손이 델지도 모르겠단 착각까지 들었다.

“싫어.”

“아, 하림아, 제발…….”

“입 닥쳐 조용히 해.”

“흐으…….”

내 손을 잡은 채로 김동규는 다시 엎드려 흐느꼈다. 어지러워. 짜증 나.

“동규야.”

조용히 하라고, 닥치라는 내 말에 김동규는 울음소리를 짓눌러 끅끅거리는 소리가 났다.

“……늦었어. 너무…… 너무 늦었다.”

들썩이는 어깨가 불쌍하고 처량하다.

“우리 처음 했을 때…… 아니, 나는 그때 제정신 아니었으니까 넘기더라도 그다음 번…… 두 번째로 하기 전에 네가 이렇게 얘기했었어야 했어.”

“하림아…….”

“나는, 나는 그랬어. 너랑 끝까지는 하지 않는 게 내 마지막…… 최후의 선이었다고. 끝까지 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얼마나 많이 얘기했어. 너는 내가 무슨 심정으로 그걸 샀는지 모르지? 알 리가 없지. 그러니까 그랬겠지. 다 네 잘못이야. 내가 사 온 콘돔 하나에 그렇게 눈이 돌아가서…… 아니다. 그것보다 더 먼저, 내가 진짜로 잊어버리라고 했다고 그렇게 다 잊어서는 안 됐어. 이렇게 미안해서 죽을 각오였으면 상처 하나도 안 받고 실망도 안 하니까 미안해하지 말라고, 떠나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후회도 다 네 몫이니까 미워만 하라고 할 게 아니라 죽겠다고 했었어야지.”

“미안해, 미안해 하림아…….”

“네 진심을 이렇게 숨겨두고 나를 그렇게 대했어. 난 그것도 모르고…… 나는…….”

화가 나고 분노가 차고 슬프고 불쌍하고 안쓰럽고 그러면서도 다정한 모습에 마음 한편을 기대고, 그랬다가 또 그런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일련의 감정들을 나는 절대로 피하지 않았다. 힘들고 괴로워도 마주 봤고 이해하려고 애쓰고 납득할 이유를 찾았다. 수십 번씩 기대했다 실망하길 반복해도 우리 관계의 진전을 위해서 또는 내 증오를 풀기 위해서. 좋은 감정이든 안 좋은 감정이든 어떻게든 다 토해내고 게워내서 내일을 맞이할 생각을 했지 피하고 숨기지는 않았다.

그게 맞는 거고 그래야 하는 거니까. 사람과 감정적으로 얽혀 있는데 어떻게 피하기만 하고 숨기기만 할 수 있겠는가.

“일어나. 집에 가자.”

“하림아…….”

내가 진심을 다해 화를 내도 어차피 김동규는 듣질 않아. 내가…… 모든 감정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가장 달달한 것만 남겨둔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김동규에게 가서 닿을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나는 또 집에 돌아가서, 너랑 같이 사는 그 좆같은 집으로 돌아가서…… 너한테 한 말들을 후회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해봐야겠으니까, 일어나라고.”

대리 기사를 불렀다. 김동규는 완전 인사불성이 되어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지만 도와주지 않았다. 일어나, 똑바로 걸어. 그런 말들로만 김동규를 움직였다. 김동규는 계속 울면서도 내 말을 착실하게 듣기 위해 몸의 중심을 세우고 쩔뚝이는 다리를 붙잡으며 제 발로 집에 들어갔다.

김동규가 내 몫까지 다 울어 버린 건지 나는 김동규에게 했던 모진 말을 곱씹으면서도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심장에 구멍이 난 것 같다. 이젠 나도…… 내 진심으로부터 도망갈 시간이었다.

그 뒤로도 나는 수시로 김동규와 술을 마셨다. 일기장을 확인해 보니 김동규는 술에 취하면 아예 기억이 날아가는 모양이었다. 가끔 일기 끄트머리에 왜 그렇게 자신은 술을 못 먹는 건지 한탄을 하는 말이 적혀 있기도 했다.

술에 취한 김동규와는 정말,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술에 취한 김동규는 내가 그냥 무슨 말을 하든 울기 바빴다. 그때를 간접적으로라도 다시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끝까지 김동규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았고 김동규는 그런 내게 죽고 싶다고 빌었다.

약해져 우는 김동규를 달래다 보면 우는 와중에도 내가 물어보는 건 꼬박꼬박 잘 대답을 해줬는데 순한 김동규에게서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김동규의 모습이 보여 한없이 깊은 심해로 가라앉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다정한, 정말로 너무나 다정한 김동규. 제정신일 때도 이러기만 하면 좋을 텐데.

회피란 굉장히 영악한 것이어서 나 역시 요긴하게 써먹기 아주 좋았다. 김동규 혼자 이렇게 좋은 걸 몇 년이나 했었다는 거지. 전에 서하늘이 얘기한 대로 그냥 김동규를 이용해 먹는 건 마지막 남은 양심이 그렇게 걸리더니 그것마저도 모른 척 외면하니까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평소엔 김동규랑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도 그냥 살갑게 굴었고 김동규에게 화가 나거나 나한테 흥분해서 달려든 다음 날이면 술을 먹었다.

김동규가 촬영이 끝나고 회식에 갔다 와 욕조에서 그리고 김동규의 방에서 했던 섹스는 그래, 솔직히 말해서 존나 좋았다. 김동규와 하는 섹스는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오르가즘이 극으로 치달아 그 짓이 끝이 나면 바로 잠에 빠져들 정도여도 김동규는 꼭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했다. 내가 몇 번을 싸도, 김동규가 몇 번을 싸도 우리의 섹스는 끝날 줄을 몰랐다.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땐 욕조에서 나와 김동규가 날 수건으로 닦아줄 때였다. 몸이 식으면서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아직도 쑤셔지는 것 같이 욱신거리며 벌어진 듯한 뒤가 개 같아서.

김동규는 잠옷과 안대와 모자를 다 씌워주고 이불까지 덮어주고도 나가지 않고 한참을 서 있었다. 안대 때문에 보이진 않으나 그런 것 같았다. 침대 옆에 있는 조명도 껐고 암막 커튼도 쳐 완벽한 어둠이었는데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혹시 나갔는데 내가 착각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몇 번 들긴 했으나 어둠 속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아주 작은 타인의 숨소리가 김동규의 존재를 확실하게 느끼게 했다.

소름이 돋아 김동규를 등지고 누웠다. 뒤통수, 목, 척추를 따라 김동규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만 같다. 최대한 시계의 초침 간격을 정확하게 떠올려 숫자를 셌다. 시간의 흐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김동규는 두 시간 사십칠 분 동안 그렇게 그냥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나갔다.

“…….”

문이 열리고, 닫히고. 혹시라도 김동규가 문 앞에 서 있을까 봐 600까지 센 뒤에 손을 뻗어 조명을 켰다. 작은 불 하나까지 차단된 곳에서 그 긴 시간 김동규는 도대체 뭘 한 거지? 숨소리 말고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걸 보면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 앉아 있다 일어나는 소리도 없었다.

그렇게 섬뜩하던 새벽이 아니었다면, 졸리면 자라는 말만 없었어도, 내가 잠에 들어도 기어코 자기가 끝날 때까지 나한테 박겠다는 말과 다음 날 아침에 아프다는 나를 식탁에 엎어두고 허벅지 사이로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지만 않았어도 오늘도 이렇게 술 마시는 일은 없었을 거였다.

“난 진짜 이해가 안 돼. 너는 항상 나랑 그 짓 할 생각밖에 없어?”

“응…… 미안해.”

“미안할 짓을 애초에 하질 마.”

“응, 미안해.”

“지긋지긋하니까 미안하단 말 그만하고 눈물 좀 닦아.”

“하지만…….”

“후우, 도대체 같은 남자한테 그러는 게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휴지로 코를 풀던 김동규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네가 할래?”

“뭐?”

“나는 괜찮아. 너랑 몸이 닿고, 하나가 되는 게 좋은 거라서.”

“둘 다 싫은데 넣는 게 나는 더 혐오감 느껴져.”

“아…… 미안해.”

“그만 좀 울어.”

“하지만…….”

얼굴이 새빨개지고 눈이 붓도록 눈물을 흘리는 김동규를 보고 있으면 김동규가 내가 울 것까지 울어주는 것 같아 첫날만큼 가시 돋친 말이 나오질 못했다. 조금이라도 세게 말하면 뛰어내리게 해달라고, 칼로 찌를 수 있게 해달라고 엉엉 우니 이젠 죽는다는 개념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숨을 쉬는 것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동규야 이리 와봐.”

“응.”

내가 앉아 있어서 그런가 안 그래도 커다란 김동규가 더 커다랗게 보였지만 우느라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게 아닐까 싶은 모습은 여리고 초라하고 나약해 보여 마치 보호가 필요한 어린 양 같았다.

“허리 숙이고 가까이.”

“…….”

“더 가까이 와 봐.”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김동규의 안경을 벗기고 젖은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울던 김동규가 내 입맞춤에 눈물을 멈추었다.

취한 상태의 김동규는 내가 아무리 건드려도 그냥 가만히만 있는다. 그 점이 좋았다. 내게 온전한 선택권을 넘겨주고 자기 자신은 그런 내가 주는 만큼만, 허락하는 만큼만 원하고 만족하는 게. 김동규의 목에 팔을 두르고 몇 번 더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가 떼길 반복했다. 촉촉하고 말랑한 게 기분 좋았다.

“동규야.”

“응.”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는데도 김동규는 조금 흐릿한지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나 너무 아팠어. 좋았는데, 좋긴 했는데 아팠어.”

“미안해.”

“아프다고 하면 좀 멈춰줘.”

“알겠어.”

“거짓말. 기억 하나도 못 할 거면서. 아, 알았어, 울지 마.”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비난하는 나로부터의 회피가 김동규의 것이라면 현실에서 허상 속 김동규에게로 회피하는 게 내 방법이었다. 김동규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오로지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김동규.

그래서 조금 심술이 났던 건지도 모른다. 현실의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네가 취한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도 모르지 않냐며.

어느 날엔 문학 동아리와 김동규네 교수님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김동규를 조금 긁었다.

“근데 나 조금 섭섭한 거 있어.”

“뭔데?”

“너 술은 나하고만 먹는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호수공원으로 벚꽃 축제 갔을 때.”

문제는 김동규가 애매하게 취해 있었다는 것에 있었다. 완전히 취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김동규는 놀리는 내 말에 엄청난 섭섭함을 느끼며 펑펑 울어댔다. 술을 왕창 마셨으면 섭섭하더라도 나한테 한 마디도 못 한 채 혼자 끙끙거리며 울기만 했을 텐데 애매하게 취한 김동규는 한참을 투덜거리는 게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맥주 한 캔을 다 먹고 물 먹은 인형이 된 김동규를 겨우 데려다 침대에 눕혔다.

“아오 씨, 더럽게 무겁네. 야 너 100킬로 넘지 근육 돼지야.”

“응…….”

“진짜?”

“몰라.”

“또 모른대.”

김동규를 눕혀 놓고 나는 침대에 살짝 앉아 아직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김동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잘 것처럼 눈을 반밖에 뜨지 못하면서, 꾸역꾸역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게 웃겨 살짝 웃었더니 또 눈가가 촉촉해진다.

“아 왜 또.”

“왜 웃어.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아니야. 졸린 것 같은데 왜 안 자.”

“너 보는 게 좋아서. 보는 건 해도 되는 거지.”

시선 하나까지 조심스럽게 허락을 맡는 김동규를 잠시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1분만 기다려. 양치하고 온다. 자면 안 돼. 기다려.”

“응. 보고 싶을 거야.”

“울지 마!”

“으응…….”

“울지 말래도.”

눈가를 닦아주니 눈을 살짝 감고 손바닥에 기대온다. 감은 눈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나는 그걸 몇 번이나 닦아줘야 했다. 겨우 달래고 화장실에 들어가 빛의 속도로 양치를 했다. 그리고 열심히 눈물을 참았는지 새빨간 눈을 하고 날 기다리고 있는 김동규의 품 안으로 들어가 넓은 등을 토닥였다.

계절 하나가 지나가는 동안 처음으로 김동규는 대학생다운 생활을 보냈다. 과외도 과외인데 피팅 모델 알바는 좀 의외였다. 뭔가 사회성 높은 활동을 하고 있는 김동규를 옆에서 보고 있자니 나도 뭔가를 더 해볼까 하는 자극이 됐다.

그림을 좀 제대로 그려볼까. 김동규보고 모델 하라고 하면 그림 실력도 쑥쑥 늘 것 같은데. 몸은 엄청 좋으니까. 아무리 근육을 키웠어도 가슴근육은 생각보다 말랑하다는 걸 김동규 덕분에 처음 알았다. 내가 지 몸을 그린다는 걸 알면 또 얼마나 좋아하며 난리를 칠지 걱정은 조금 됐지만 날이 갈수록 현실의 김동규가 안정이 되는 게 느껴져 해볼 만했다. 그런 걸 보면 술에 취한 상태여도 무의식의 일부는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쪽을 자주 만나 이런저런 얘길 하다 보니 생긴 의외의 수확이었다.

우리 사이는 한동안 꽤 좋았다. 김동규와 몸을 섞는 것도 온전히 김동규가 틀어쥐던 주도권이 내 쪽으로 많이 넘어온 게 느껴졌다 김동규는 자기 성욕만 채우기에 급급하지 않았고 내 기분을 살피거나 내가 느끼는 것에 집중하기도 했다.

장족의 발전은 아무리 흥분했어도 끝까지 가지 않는 날이 생겼다는 거였다. 내가 정말 많이 피곤한 날이면 그냥 우리 둘의 것을 비비거나 내 것을 빨기만 하거나 아니면 내 손으로 자위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허벅지를 모아 붙이고 하는 것만으로 김동규는 참았다. 물론 겨우 한 번 사정하고 끝은 아니었고 둘 다 몇 번은 사정해야 했지만, 그게 어딘가. 김동규랑 끝까지 하고 나면 최소 삼 일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온갖 진땀을 빼야 했다.

서하늘이 불러서 만나긴 했는데 웃기게도 나는 온통 김동규 생각뿐이었다. 어제 술 취한 김동규 데리고 그 짓을 해서 그런가. 나도 미쳤지. 아니 근데 술 취한 김동규는 되게…… 순하고 상냥하고 그러니까. 만취한 김동규와 한 것은 처음이었다. 말도 안 되게 느끼며 이상했던 내 몸도 처음이었고.

“야, 진짜 내가 웬만하면 너한테 누구 만나 보라고 안 하겠는데 걔는 진짜 좋은 애라니까.”

“그래 그래. 나도 임유리 좋은 애인 거 잘 알아.”

또, 김동규는 제정신이든 술에 취해 있든 꼭 뒤처리도 다 자기가 해주었다. 여운을 즐기고 있으면 알아서 따뜻한 물에 날 넣어 깨끗하게 씻겨주고 말려주고 옷까지 입혀 침대 위에 눕혀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술에 취해있어도 헛손질을 조금 하며 뚝딱거리긴 할 뿐 똑같았다.

소름 돋던 새벽 이후로 조명은 항상 제일 낮은 밝기로 켜두고 잠에 들었고 종종 김동규가 또 말없이 어둠 속에서 나를 지켜보는 건 아닐까 자다가도 깜짝 놀라 깨긴 했지만 매번 그건 내 기우에 그쳤다. 내가 김동규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며 밤을 지새우듯, 김동규도 그때 생각이 많았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해야만 잠에서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그래도 조명은 완전히 끄진 못했다.

허리가 불편해 자세를 고쳐 앉을 때마다 서하늘이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까 아닌 척 눈치를 살폈다. 서하늘 얘길 아무리 들어도 어젯밤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는데 왜 안 만나? 꼭 심장이 두근거리고 그래야만 사귀는 거 아니잖아.”

“싫다니까.”

“그러니까 왜!”

서하늘의 절친 중 하나인 임유리는 우리나라 나이로 10살부터 19살까지 벨기에와 미국에서 공부한 영어영문학과 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외교관인데 대학을 우리 학교로 왔다. 그 스펙이면 그냥 미국에서 대학 가도 됐을 텐데 한국인이라고 하면 꼭 한 번씩 물어 오는 「너 고양이도 먹어?」라는 말에 어느 날 참지 못하고 한국행 티켓을 끊었다고 했다.

“그렇게 좋은 애면 다른 좋은 애 만나라고 해.”

“아오 답답해, 유리가 너 좋다는데 왜 다른 애를 만나?”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아도 사귈 수 있다며. 안 두근거리는 다른 애랑 사귀면 되겠네.”

“야!”

“난 임유리랑 별로 안 친해.”

“미친아, 그러니까 친해지면 되잖아. 너네 같이 뭐 전에 볼링도 했다며.”

“한 번밖에 안 했어.”

임유리랑 볼링 했을 땐 별로 말도 안 했는데 걔는 내 뭐가 좋다고 서하늘이 날 못 붙여서 안달인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직접 얘길 하든가.

“잘생겨서 좋대.”

“남 입으로 전해 들으면 참도 기분 좋겠다.”

“볼링 하고서 연락해도 네가 답장도 잘 안 하고 자연대 찾아가도 인사만 하고 사라졌다며.”

“내가 되게 바쁜 사람이거든.”

“와 진짜 한 마디도 안 지는 거 봐라.”

“틀린 말은 없잖아. 나 10분 뒤에 일어난다.”

“그래, 10분 뒤에 1초도 어기지 말고 꺼져.”

“아, 저녁에 뭐 먹는댔지?”

“막걸리. 꿀 막걸리랑 복숭아 막걸리랑 옥수수 막걸리랑 밤 막걸리랑 또…… 암튼 막걸리만 한 열 가지 먹을 수 있대.”

“아 맞다. 나 밤 막걸리 완전 좋아해. 군밤이래 알밤이래?”

“몰라 나도.”

세문중이나 세문고등학교 출신이라 서하늘과 내가 둘 다 아는 친구들끼리 연락이 닿아 모이기로 한 자리에 임유리가 등장한 건 서하늘의 계략이 분명했다. 서하늘이 임유리와 함께 등장했을 때 웃으며 서하늘을 바라봤더니 하는 말이 “다 같이 우리 학교 새내기란 공통분모가 있지”라며 능글맞게 넘어갔다. 다른 다섯 명이 하나 같이 당황하지 않는 걸 보면 나만 빼고 임유리가 온다는 걸 다 알고 있는 거였다. 당황하지 않고 임유리를 반갑게 맞았다.

“그래서 미국인 남자 친구랑 헤어진다고?”

아 진짜 불편해 죽겠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둘 이상 모이면 연애 이야기를 못 해서 안달이지. 처음 보는 사이에도 이름, 나이, 직업, 학교 물어본 다음이 ‘여자 친구 있어요’나 ‘남자 친구있어요’라는 질문인 게 얼마나 불쾌한지를 모른다. 연애 안 해도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도. 심지어 임유리는 나 좋다고 서하늘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지 않던가.

“응 조금 됐어. 저번 달?”

“와 아깝다. 걍 결혼하지. 시민권이 날아가네.”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이라서.”

임유리가 나를 보며 얘기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깨만 씰룩했다.

“하림아, 그래서 너는 여자 친구 사귈 진짜 생각 없어?”

임유리의 질문에 지금까지 수백 번은 더 얘기했던 것처럼 없다고 대답하기 위해 입을 뗐다가 빠르게 다물었다. 잠깐 눈동자를 굴리며 시간을 번 다음 말했다.

“나 연애 중이야.”

“야 저거 거짓말이야. 여친 있는 척해서 다 떨궈 내려고.”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서하늘이었다.

“진짠데. 안 믿네.”

“네가? 언제? 나 몰래? 누구랑?”

“있어.”

남자애들이 예쁘냐고 앞다투어 물었다.

“나 얼굴 안 본다니까.”

“그럼 얼굴 아래는?”

“글쎄.”

구릿빛의 탄탄한 몸을 떠올렸다 지웠다. 머그잔의 손잡이를 두드리던 임유리는 별말 없이 “아쉽다” 하고 웃었다. 진짜 아쉬운 거라 하기엔 너무 호쾌한 웃음이라 찜찜했지만 무시했다.

서하늘이 내 말을 끝까지 믿지 않고 손가락질을 해댔고 결국 내 입에서 장난이었단 말을 얻어냈다. 서하늘은 미션을 완수한 사람처럼 뿌듯하게 팔짱까지 꼈지만 임유리는 개의치 않고 얼굴에 미소를 걸어놓은 채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나도 마찬가지로 웃어주며 맞받아쳤지만 왠지 진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는 별다를 것 없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김동규와 전시 보러 다니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볼링도 치고 드라이브도 하고.

다만 친구들 앞에서 연애한다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김동규는 잘 지내다가 한 번씩 폭발하듯 제멋대로 굴었다. 차에서 김동규랑 섹스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도돌이표였다.

맨다리를 긴 코트가 가려주었지만 욕이 튀어나오는 건 막지 못했다. 김동규가 있는 대로 쑤신 탓에 부은 데다가 뜨겁고 아픈 뒤는 김동규가 안에 싼 탓에 힘을 풀 수도 없었다. 따끔거리고 욱신거려 죽겠는데 차 안에서 속옷이며 바지며 꾸역꾸역 입는 건 더 싫어 그대로 올라왔다.

집에 도착해 한 시간 반도 넘게 샤워를 했다. 두 번 정도 김동규가 괜찮냐고 욕실 문을 두드릴 정도로 시간을 죽였다. 그냥 호텔로 갈 걸 하고 스스로를 탓하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욕실을 나왔다.

“맑은 국물 먹고 싶어.”

“어,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끓여뒀어. 다시 데우기만 하면 돼.”

나는 작정한 듯 김동규에게 술을 먹였다. 거의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바보 같은 놈은 또 그게 좋다고 다 받아 마셨다. 내가 주는 거라면 다 좋다는데, 그 말을 믿고 술에 취해 뭉개지고 눈물을 뚝뚝 흐르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김동규의 술잔을 잠시도 비워두지 않았다.

“야, 일어나. 똑바로 앉아.”

아마 김동규 인생에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본 적이 없을 거다. 김동규는 몸을 가누질 못하고 자꾸만 식탁 위에 엎어졌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김동규에게 바로 앉으라며 타박했다.

“어지러워.”

“네 두 잔 남짓한 주량을 탓해.”

“응…….”

겨우 일어나선 한다는 말이 또 “응”이다. 손에 감은 휴지로 눈물을 닦는데 취해도 너무 취해 손이 눈을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고 이마를 찔렀다가 볼을 찔렀다가 했다.

“넌 진짜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알아?”

“응.”

“미친놈. 아, 존나 아파 시발. 너는 나랑 섹스하려고 같이 지내지.”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차에서도 그 짓이 하고 싶어? 그렇게 섹스에 환장을 했으면 차라리 날 닮은 창부를 사서 그 사람이랑 해.”

“싫어, 나느은 하림이 너랑.”

“끔직하다. 질려 이젠. 날 사랑한다는데 그 말도 못 믿겠어.”

흐느적거리는 몸뚱이가 엎어지며 울었다. 나는 김동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장난으로 마무릴 지었어도 연애한다는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니 임유리가 그렇게 웃었던 게 꼭 이렇게 될 거란 걸 알아서라는, 그런 어이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스스로 날 우습게 만들었지.

“……너네 아빠가.”

김동규와 놀러 다닌 그 모든 시간은 대체 뭐였을까.

“너랑 다를 게 뭔지 싶어진다. 방식만 다르지 너도 완전 아저씨 아들이야. 물건 깨부수고 입술만 터지는 게 폭력인가. 사람 마음 상하게 해도 폭력이지.”

좋았던 것 같은데. 즐겁고 재밌고.

“귀 막지 마. 좋은 말할 때.”

“하림아, 나…… 마음이…… 너무 아픈 것 같아.”

“아프라고 하는 소리야.”

나는 심장이 아팠다. 말을 하면 할수록 나까지 상처받을 거란 건 예상했던 바였다. 서슬 퍼런 감정으로 꺼내 든 김동규의 아빠란 칼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훌쩍거리는 소리 가운데 내 덤덤한 목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았지만 그냥 생각나는 대로 계속 지껄이고 내뱉었다.

가스버너 위에 올린 조개탕이 다 졸아 탄 남새가 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 너머로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뒤 사위가 적막에 휩싸였음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김동규에게 쏟아낸 말들이 다시 내게로 돌아와 상처를 헤집고 할퀴고 짓이겼다. 왜 그랬지, 왜 그렇게 심하게 얘길 했을까. 조금만 더 생각하고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말걸…….

별로 먹은 게 없는데도 속이 얹혀 식은땀이 났다. 어떻게든 참고 자보려 했으나 김동규의 방문을 열고 곤히 자고 있는 김동규를 깨우는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일이야?”

“……속이 안 좋아.”

“아, 그럼 병원.”

“아니. 안 가도 돼.”

“손 찬 거 봐. 그럼 소화제나 매실차라도 마실래?”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김동규를 따라 주방으로 나왔다. 시계를 확인하니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김동규가 타준 따끈한 매실차를 한 입 마셔도 영 속이 별로였다. 내 손을 열심히 마사지하던 김동규는 내가 인상을 펴지 않자 꿀물을 타주겠다며 일어났다. 여전히 술에 취한 건지 찬장을 뒤지는 몸이 휘청거리고 단지 뚜껑도 제대로 열지 못했다.

“하림아!”

그 바보 같은 꼴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와 화장실로 뛰어갔다. 변기를 붙들고 토를 하는데 음식물을 토해내는 만큼 눈물도 함께 터져 나왔다. 더 이상 게워낼 것이 없을 때까지 나는 구토를 핑계 삼아 조용히 울었다.

“괜……찮아?”

얼마나 위를 쥐어짜 내 토한 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굴에 몰렸던 피가 흩어지는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닦았다. 분명 다 토했는데 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동규의 손엔 물잔이 들려 있다. 나는 손을 뻗어 물을 달란 말을 대신했다. 김동규가 내게 다가오더니, 시원한 물이 아닌 김동규의 혀가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김동규를 밀어냈다. 물잔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씨발 지금 더럽게 뭐 하는.”

“하나도 안 더러운데.”

“미쳤어, 아니 어떻게 토한 사람한테…….”

세면대를 잡고 일어나 입을 헹궜다. 토한 꼴 보인 것도 싫고 아까 막말한 나도 싫고 다 싫은데 미친 새끼가 더러운 줄 모르고 입을 맞춘 게 제일 좆같았다. 내가 게워낸 건 시큼한 위액이나 토사물 그리고, 추악하고 더럽기까지 한 맹독과도 같은 말이어서 더 그랬다.

김동규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내가 밀친 자세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다. 씻어야 하는 건 내 쪽이 아니라 김동규 쪽인데도, 나는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입 안팎을 닦았다. 입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따끔거릴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진정이 됐다.

“미안해, 키스해서. 내가…… 더럽, 더러운, 너랑은 다르게.”

“야.”

“더럽, 더, 아, 네가 아니라 내가, 하림이 너는 어떻게 이렇게 깨끗한.”

“김동규.”

“응.”

“나 속 이제 괜찮아졌어. 그냥, 빨리 가서 자자. 갑자기 깨워서 내가……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내 미안하단 말에 김동규가 그러지 말라며 우는 걸 겨우 달래 재웠다. 입안이 헐 정도로 양치를 하고 소파에 멍하게 앉아 있다 옷을 갈아입었다. 학교 가기 너무 싫다. 책상 서랍에서 안경도 꺼내 썼다. 긴 하루가 끝나질 않았다.

새해의 첫날, 문단의 기대주라는 김동규는 만20세의 천재 타이틀을 달고 화려하게 데뷔했다. 등단 소식을 알리던 날 밤 김동규는 전화를 끊으며 내게 예술가의 삶까지 선물하겠노라고 말했다. 원래는 등단할 생각이 하나도 없었는데 내가 다음 생이 있다면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그래서 열심히 한 거라고. 사랑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무겁고 버거운데 삶까지 통째로 주겠다는 그 말의 아득한 무게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동규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늘어갔다. SNS의 주 이용자인 10대 20대는 물론이고 문학에 본래부터 관심이 많던 중장년층까지 다 알 정도로 김동규의 이름 주가는 끝이 없이 올랐다. 대중성과 문학성을 한 번에 잡은 대형 신인의 탄생이라며 모든 곳에서 입을 모아 말했다.

학교 대숲엔 김동규의 시를 인용해 고백하는 글들이 줄을 이었고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인터넷 광고에서도 김동규의 시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소설 위주로 흘러가던 우리 문학계에 어떻게 이런 슈퍼루키가 나타난 것인지에 대한 기사와 칼럼, 비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김동규는 주변의 반응을 하나도 체감하지 못하며 뚱하게 반응했다. 어느 날은 김동규의 지도 교수님이 쓴 칼럼을 읽고 이렇게 얘기를 나눴다.

“김동규 이러다 시집 백만 부 팔리는 거 아니야?”

“요즘 시집은 만 부만 팔려도 핵핵스타 시인이야. 적게 뽑으면 이천 부 남짓 뽑을걸. 나도 최대 오천 부 정도 예상한대. 완전 쌩 신인이라.”

칼럼은 ‘김동규 시인의 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다, 그 이유로는 쉽게 쓰인 시와 함께 문학성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린 순수한 형태의 시도 다 잘 써서 텍스트보단 시각적 자료인 비디오나 이미지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도, 문학에 목말라하던 세대에게도 완벽하게 부합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초고도화로 발전된 사회일수록 아날로그로 회귀하는 현상도 늘어나 최근 책이나 독서가 젊은이들의 트렌드가 되었기 때문도 있다’는 뭐 그런 내용과 젊은 시인의 첫 번째 세계가 펼쳐질 시집을 기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김동규와 계약 했다는 출판사 SNS에는 주에 한 개 혹은 두 개씩 김동규의 시가 올라왔다. 얘는 SNS를 일절 안 해서 모르겠지만 좋아요 눌리는 숫자가 보통이 아니었다. 다른 시들도 올라오는데 김동규의 것만 좋아요든 댓글이든 난리였다.

소설도 아니고 시가 이렇게 파급력이 클 수 있나 내가 너무 궁금해하니까 김동규가 살짝 교수님과 남편, 그의 가족들이 작정하고 밀어주고 있어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김동규의 등단작 중 제일 핫한 반응을 보인 건 「산리아」라는 시였다. 첫 행부터 시작되는 강렬하고도 탐미적인 묘사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중2 감성을 자극하고 젊은이들에게는 소비하는 자신이 뭔가 있어 보이게끔 만들어주며, 어른들에게는 시의 전성시대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는 것 같다는 또 다른 평론가의 말도 화제가 되었다.

내가 좋아한 건 「여백」이었다. 아니, 좋아한다는 건 잘못된 말이고 제일 머리에 남는 작품이라는 게 더 맞았다. 「여백」은 사람이 느끼는 많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따금 한 번씩 김동규의 목소리와 함께 떠올랐다. 나는 이걸 글로 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거였다.

일부러 김동규의 시들을 찾아보지도 않았고 우연히 보게 되더라도 외면했다. 삶까지 선물하겠다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예술가의 입에서 나왔으니 이보다 더 낭만적인 말은 없을 텐데도 그 말은 들은 이후의 나는 김동규가 선물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히고 내 삶이 좀먹혀 공허해지는 느낌이었다.

“요즘 자꾸 입병도 나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거 같아. 무슨 신경 쓰는 일이라도 있어?”

“아니.”

입 벌리고 있는 내가 너무 야하다며 얼굴에 몇 번이나 사정하는 김동규에게서 눈을 돌렸다. 이런 순간만 참고 외면하면 된다. 뭐 나도 할 때는 좋기도 하니까…… 제정신인 김동규도 이럴 때만 빼면 괜찮으니까, 정 못 참겠을 땐 술 마시면 되고……. 얼굴을 여러 번 닦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을 테지만 세면대로 쏟아지는 물을 끄지 않았다.

“힘들다.”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어마어마한 파도가 되어 들이닥치는 김동규 앞에서 내 중심을 잡는 게 너무 힘들었다. 김동규에게 기대라는 걸 하는 나 스스로가 용서가 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자꾸만 기대하고 만다.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부서진 마음을 겨우겨우 다잡는 동안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화가 났다가 쓸데없이 기운 빼며 화낼 필요가 뭐 있나 그냥 나도 모른 척 피해버리잔 생각이 들었다가. 섹스에 미친 새끼가 되고 싶으면 계속 쓰레기처럼 굴든가 아니면 도망치지 말고 평소에도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든가.

내가 밤을 새우며 새로운 마음가짐과 새로운 방법을 구상해 김동규를 대해도 나는 그냥 거친 파도와 거센 풍랑에 힘없이 흔들리는 작은 나무배였다.

그렇게 한 해를 보냈다. 김동규란 해일에 흔들려도 전복되지 않도록, 잡아먹히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며 김동규 하나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했다.

[집에 언제 와?〉

[너랑 술 먹고 싶어...〉

술 먹으면 나한테 무슨 얘길 듣는지 기억도 못 하는 새끼가, 술 먹는 거 그렇게 싫어하는 애가 나보고 먼저 술 먹자고 하는 게 웃겼다. 술 먹은 날이면 아침에 일어나서 서로 안고 있을 때가 많으니까 내가 사랑한다고 속삭이기라도 한 것 같나 본데, 나는 굳이 김동규의 그 희망을 깨트리진 않았다. 가끔 깨 부셔서 김동규를 상처 줄까 하는 마음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다 부질없는 거 같아서 그랬다. 깨서 뭐 할 건데. 어차피 김동규가 괴로운 기억이라고 잊어버리면 그만인걸.

외면할 대로 외면하고 상처 줄 대로 상처 주고 이용할 대로 이용하다 보니 이젠 그냥 아무렴 어떤가 싶어진다.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이해와 납득, 수긍과 인정이다. 그냥 물 흐르는 대로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기면, 기대치를 한없이 낮추고 김동규의 다정한 한 마디, 세심한 행동 하나에 만족하면 꽤 괜찮은 일상이고 삶이고 인생이고 그랬다.

“아우님, 나 대박인 거 알아냄.”

“뭔데.”

그즈음, 연말이라고 아빠 쪽 친척들이 전부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어제도 오늘도 학교에서 본 얼굴을 또 만났다. 프리미엄 뷔페 한 관을 통째로 빌려 홀 크기에 비해 사람이 적어 좋았다.

“김동규 시 중에.”

“나 걔 거 안 읽어서 말해도 잘 몰라.”

“등단작은 읽었다며.”

“내가 읽은 건 아니고 김동규가 읽어 준 거야.”

“아 그거나 그거나. 내용은 알잖아.”

“응. 나 목마르니까 잠깐만.”

김동규 얘기에 목이 깔깔해져 샴페인을 두 잔 가져왔다.

“땡쓰.”

“김동규 등단작 왜.”

“너 그거 알았어?”

“말을 해야 알지.”

“「산리아」가 네 생일 탄생화인 거 알았어?”

“내 생일?”

“원래 이름은 가막산나무? 뭐 그런 건데 나도 어제 인터넷하다 알았어. 꽃이 하얘서 그런 이름으로도 불린대.”

“아 들었던 거 같아.”

“그래? 나 SNS에서 봤는데 이거 꽃말이 대박이야.”

“뭔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어떤 소설가의 에세이에서 소설가와 시인, 극작가처럼 글을 쓰는 사람들은 나무나 풀, 꽃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 걸 읽은 적이 있다. 식물들이 가지고 있는 뜻이나 전설 같은 것들이 창작에 많은 영감을 주고 도움을 준다던가.

365일의 날짜 중 굳이 내 생일을 집어 그날의 탄생화를 제목으로 지은 건 분명 김동규가 의도한 것일 거다. 정식 명칭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알고, 무슨 색의 꽃인지 언제 꽃이 피는지도 알고 있었을 테니 저런 비극적인 뜻을 가지고 있단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셰익스피어 희극에나 쓰일 법한 꽃이네.”

“어 그러게. 되게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 자식, 너 좋아하는 거 익히 알곤 있었지만 이건 거의 뭐 프러포즌데?”

기대를 낮추니 김동규의 이런 귀여운 짓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가 세상에 발표된 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내 탄생화란 것도 저런 뜻을 가지고 있단 것도 하나도 얘길 안 했다 이거지.

“같이 살잖아.”

“나도 미술 하는 남자나 사진 찍는 남자 만나 볼까. 날 얼마나 예쁘고 정성스럽게 그려주고 찍어주겠어. 아이돌 직찍만 봐도 피사체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잖아.”

“그러든가.”

“짠!”

달아야 하는 샴페인이 조금 썼다.

작년 크리스마스엔 호주로 놀러 갔었는데 올해는 김동규랑 약속을 잡았다. 별일 없으면 같이 보내자고 하면 될 걸 생일 들먹이며 쭈뼛거리는 게 색다르다면 색달랐다. 데이트한다고 답지 않게 들떠 있는 것도 보기 좋고.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래야지. 이래놓고도 매일 매시간이 힘들고 지치면 그게 사는 건가.

올해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얘기가 사방팔방에서 들렸다. 무려 5년 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사람들은 곧 만날 함박눈을 기다리며 즐거워했다.

눈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눈이 오면 조금 덜 추워지는데 추위에 약한 나는 차라리 걷기 힘들 정도로 눈이 펑펑 오는 게 좋지 칼바람이 부는 건 사양이었다.

같이 저녁 먹으면서 어떻게 등단작으로 그런 제목을 낼 수 있었냐고,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내 생일화 마음대로 쓰라 그랬냐고 그런 얘기들을 해볼까 했다. 잘도 멋대로 써놓고 한 마디도 안 하고 있었냐고 언제까지 비밀로 할 생각이었냐고.

김동규가 하루하루 날짜를 세며 설레하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처음으로 김동규랑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나도 나대로,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보며 기다리고 있었단 얘기다.

“…….”

사람들의 염원에 어울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5년 치를 한 번에 쏟아내는 과함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냥 빈약하지도 않은, 길거리의 캐롤과 잘 어울리는 영화 같은 눈이었다.

김동규가 대수술에 들어갔다는 엄마의 전화에 어딜 다친 건지 왜 다친 건지를 침착하게 물은 뒤, 빠르게 들려오는 엄마의 대답 속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단 말에 정신없이 달려 병원에 왔다. 도착하고 나서야 목도리도 장갑도 없이 코트만 달랑 입고 뛰어 왔다는 걸 알았다. 스무 시간이 꼬박 넘는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여러 번이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김동규를 기다리며 3일간 병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붙어 있었다. 서하늘과 한예원, 한예원 친구들과 국문과 교수님들이 차례로 방문했다.

원래대로라면 김동규와 정명원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왜 그런 제목을 붙인 건지 물어보고도 남았을, 그런 시간이었다. 별맛도 느껴지지 않는 병원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면서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린이 환자나 나이 어린 방문객들이 한쪽 벽면을 차지한 커다란 유리창 앞에서 우와 우와 소리를 냈지만 나는 신기한 것도 예쁜 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하염없이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며칠 더 있을 생각이었으나 연구소 갈 준비를 해야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김동규 엄마가 베트남에서 오기도 했고.

겨우 며칠 안 왔을 뿐인데, 여행 갈 때면 훨씬 많은 날을 비워두던 집이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맞는지 싶을 정도로 낯설고 어색했다.

겨울 방학 동안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연구소에 있다가 집에 오면 관련 연구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연구실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이 따로 주는 과제도 하느라 정신이 너무 없었다. 김동규의 시집 발간은 무기한으로 지연되었다. 교수님은 이대로 출간 일정을 맞춰 내고 싶어 했는데 김동규 아줌마가 김동규가 깨어날 거라고, 그러면 그때 내자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김동규는 현재 자신의 의사를 전혀 표명할 수 없어 친모인 김동규 어머니에게 의사결정권이 넘어간 상태였다.

두 달간 병원에 안 가 버릇해서 그런가 봄이 되고 여름이 와도 병원으로는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나보다 서하늘이 더 자주 병문안을 갔다. 갈 때마다 여전한 상태여서 과일만 놓고 온다고 그랬다.

“원래 너 안경 썼었어?”

“아니.”

스파게티를 한 가닥 집어 느리게 씹었다. 고등학생 때는 급식으로 파스타가 나오면 먹은 적이 없었는데 장족의 발전이었다. 사실 별맛이 느껴지지 않아 그냥저냥 먹었을 뿐 배가 고파 먹는 건 아니었다.

“피곤하면 써.”

“거의 매일 쓰길래 나는 패션인 줄 알았네.”

“게임이라도 새로 시작했나?? 어떤 거 해?”

“게임 아니야.”

“드디어 서하림도 심오한 물리의 세계에 기력이 딸리나 보다.”

“하림아 너 전화 왔어. 엄마한테.”

테이블에 휴대폰을 올려놨더니 다들 내 휴대폰만 바라본다.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으라며 손을 휘휘 내젓고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무슨 일.”

-하림아! 동규 깼어! 근데 1분도 채 안 되어 바로 다시 정신 잃었다네. 깨어난 건 한 30분 전인데 엄마도 지금 얘기 듣고 전화한 거야.

수술하던 날 엄마가 뭐라 그랬더라. 수술 성공 확률이 40 퍼센트도 안 되는데 성공한다 해도 못 깨어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했던 것 같다.

그 얘길 듣고 내가 한 생각은 김동규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나랑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깨어났으면 좋겠는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거, 그리고 진짜로 이대로 죽어버리면 김동규를 평생 미워할 거라는 거였다.

엄마는 김동규가 깰 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주었다. 깨어나도 길어야 1분이라 정신을 차렸다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고 했다.

나는 더 바빠졌고 덕분에 계속 들려오는 김동규의 몸 상태와 그 애가 쓴 시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김동규만 생각하면 심장이 너무 아프게 뛰어서 도저히 김동규를 보러 가지도 떠올리지도 못했다.

아, 김동규가 이런 기분이었나. 이랬겠지. 그랬을 거다. 모든 걸 부정하고 믿고 싶지 않아 자꾸만 외면하게 되는 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뇌가 본능적으로 하는 거였다. 이런 일이 생기고 나서야 김동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다니. 웃긴 일이다.

중간고사는 끝났지만 여전히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 내 옆에, 임유리가 은근슬쩍 다가와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항상 내 옆엔 임유리가 있었다.

“이거 먹고 해. 지금 너 꼬르륵 소리 들려.”

임유리가 건넨 샌드위치를 받아들었다. 안에 이것저것 많이 들어 있는데도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아니더라도 그랬다. 요즘은 뭘 먹어도 맛도 잘 모르겠고 배가 고픈 것도 잘 못 느꼈다.

먹으라고 줘놓고 임유리가 내 손에서 샌드위치를 가져갔다.

“하림아, 그거 먹지 마.”

“왜 줬다 뺏어.”

“나가자. 나가서 맛있는 거 사줄게. 날씨도 좋잖아. 이제 5월은 더워서 4월이 진짜 계절의 여왕이래.”

“이것도 맛있는데.”

“그렇게 모래 씹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 맛있다고? 빨리 와. 우리 학교 앞에 맛있는 카레 집 있거든.”

카레는 자극적이어서 딱 질색이다.

“거기가 얼마나 괜찮냐면 되게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도 괜찮구 S대 맛집 치면 간간이 글도 나와.”

아무나 만든 거 잘 안 먹는데. 특히 밖에서 먹는 거.

“너무 유명해지면 어쩌지? 맛있긴 한데 엄청 줄 서서 30분씩 기다릴 맛까진 아니거든.”

임유리는 내 노트북과 펼쳐 놓은 프린트들을 한데 모아 노트북 가방에 정리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걸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임유리가 팔을 끌어당기고 나서야 나도 천천히 일어났다.

오는 동안 그렇게 맛있다고 한 것치고는 카레는 그냥저냥이었다. 돈가스가 밥 위에 올려져 있고 그 위에 카레를 뿌려 덮은 식이었는데 나는 바삭바삭한 튀김이 눅눅해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 탕수육도 소스에 찍어 먹고 치킨도 갓 튀긴 것만 양념을 따로 놓고 먹는다. 덮밥 요리를 먹을 때도 밥 위를 덮지 않고 한쪽에 몰아 놓은 뒤 한 입씩 밥이랑 섞어 먹고, 카레나 짜장밥 같은 것도 그랬고 심지어는 국이랑 밥도 말아 먹는 걸 싫어했다. 죽은 예외지만.

새삼스럽게 내 입맛을 되짚어보느라 조용한 나와 달리 임유리는 혼자 열심히 얘길 했다. 문득 내가 대답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조금 미안해졌다.

“나는 영어를 그래도 잘 하고 원래 미국에 있을 때도 영미문학 쪽으로 공부할 생각이었어서 우리 과 수업 되게 쉽거든.”

“아 그래. 돈가스 더 먹을래?”

“그래도 돼?”

“내 입엔 안 맞아서.”

“나야 좋지. 아무튼 그리고 거기서 고등학교 다닐 때도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 있으면 뭐든 깊게 배울 수 있다 보니까 나는 고등학교 다니면서 친구들이랑 소설도 쓰고 고전들 분석도 하고 작가 인터뷰도 하고 유명한 영문학 박사랑 학교 연결해서 강연도 오게 하고 그랬단 말이지.”

그냥 내 밥이랑 카레도 다 먹으라고 그럴까. 진짜 입맛 하나도 없고 카레 같은 자극적인 건 먹기도 싫다. 아까 뺏긴 샌드위치가 훨씬 나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인문대는 평소에도 익숙한 내용이니까 과제에 치여 죽고 공부하느라 토할 거 같고 그런 건 좀 덜한데 옆에서 너 보고 있으면, 휴 나는 다시 태어나도 문과생 할래.”

“난 재밌어. 적성에도 맞고.”

“맞아. 그래 보이더라.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지? 싶을 정도로 하는 것도 많고 그 와중에 학점은 다 챙겨서 입학하고 과탑 놓친 적 한 번도 없다며. 난 그 정도까진 못 하겠어.”

“할 만하니까 하는 거야.”

“보통은 그렇게까지 못 하잖아. 너가 지이이이인짜 특별하고 대단한 거야. 헤르미온느가 책에서 튀어나와도 너한테 졌다고 그럴걸. 좀 쉬엄쉬엄해. 맛있는 것도 먹고 굶지 말고. 아직 3학년이니까요.”

“할 만하니까 하는 거라고.”

“4학년 되면 더 힘들 텐데 뭐 하러 벌써부터 힘을 빼. 하늘이한테 들었는데 유학 갈 생각 있다며? 그래서 그런가? 어디로 생각 중이야? 하림이 너라면 유학 가서도 잘할 거야.”

말 안 해도 알고 있다고 얘기하려다가 말았다. 임유리의 첫인상은 별로였고 지금도 좀 그렇긴 하지만 공부 안 하고 있을 때면 김동규 생각이 자꾸 올라오니까 누가 옆에서 계속 떠들어주면 좀 괜찮을 것 같아서. 잠자는 시간 말고는 시간의 공백을 두고 싶지가 않았다. 잠자는 시간도 할 수만 있다면 자지 않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슬펐다.

샤워할 때도 씻을 때도 휴대폰을 가지고 들어가 노래를 큰 소리로 틀어놓고, 잘 때도 조금이라도 시끄러우면 자지 못했던 내가 클래식을 틀어 놓고 잠에 들어 어떻게든 딴생각할 요소를 필사적으로 차단하려고 했는데, 꿈은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김동규가 나오는 걸 막을 재간이 없었다. 꿈도 꾸지 않고 숙면하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유리야.”

“응?”

“내가 원래 누구 사귈 생각도 없었지만 요즘은 많이 바빠서 더 누구 만나고 싶지가 않거든.”

“응. 괜찮아. 누가 사귀어달래? 난 너 맘에 들고 얼굴만 보고 있어도 힘이 나고 엔돌핀이 솟아. 내가 원래 잘생긴 애들 많이 좋아해. 근데 남자들 대부분 조금 봐줄 만한 정도여도 자기가 엄청 잘생긴 줄 알고 얼굴값 하는데 너는 그런 것도 없어서 좋아. 완전 엄청 매우 아주 진짜 잘생겨서 더 좋고. 아 얼굴 밝힌다고 욕하진 말고. 취향이야.”

“욕 안 해.”

“이거 봐. 얼굴도 착하지 성격도 착하지. 그냥 점심때면 밥이나 같이 먹고 카페 가서 커피 마시면서 수다나 떨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그러자. 하늘이가 빵집 투어하라고 서울 빵집 지도도 보내줬어.”

자길 빵순이라고 말하면서 밥 없이는 살아도 빵 없이는 못 산다는 서하늘이 생각나 살짝 웃음이 나왔다.

“어, 너 빵 좋아해?”

“싫어하진 않아.”

“난 완전 좋아해. 벨기에 살 때 와플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엄청 좋았다?”

“거기 감자튀김도 맛있던데.”

“맞아. 사실 벨기에 와플이 유명한데 나는 감자튀김이 더 좋아. 감자튀김 영문명 프렌치프라이 말고 벨지안프라이라고 EU랑 UN에서 공식지정 해야 돼.”

“유럽을 넘어 UN까지?”

실없이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여전히 카레는 별로였고 뭐가 맛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옆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해주는 임유리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잘 먹는 거 보니까 좋네. 웃는 것도. 과탑이 뭐 그리 대수라고 진짜 좀 쉬면서 하면 안 돼? 몸 상하겠다.”

“할 만하니까 하는 거래도.”

“아 알았어, 우리 하림이 대단해! 최고! 됐지?”

나는 밥과 카레를 반 넘게 남겼지만 내 돈가스는 결국 임유리가 전부 다 먹어 해치웠다. 사장님이 반이나 남긴 내게 뭐가 혹시 맘에 안 드냐고 물어와 몸이 아파 입맛이 없다고 둘러댔다.

연구소 하나만 다녀도 나 같은 두세 달짜리 인턴까지 빡세게 굴려서 죽을 것 같은데 1학기 중간고사 끝나면서 K대 다니는 영재원 친구의 부탁으로 프로젝트를 하나 도와주고 있던 터라 이번 여름방학은 죽음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논문에 당연히 내 이름도 실린다지만 평일은 연구소 일과 연구실 과제 때문에 밥 먹을 시간조차 부족했고 금토일 주말은 프로젝트 때문에 잠 잘 시간이 부족해 체력이 기하급수로 떨어졌다.

안 그래도 주말은 낮이고 밤이고 프로젝트의 늪에 빠져 쪽잠조차 귀했지만 밤에는 열대야 때문에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했다.

-서하림 뭐 해. 자냐?

“응.”

밤새고 낮잠 잤다가 일어나 밥 먹고 연구하다가 또 낮잠 자는 중이었어서 그걸 깨운 서하늘에게 욕이 올라왔지만 정말 너무 피곤해 그냥 끊고 말려고 했다.

-야야 끊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해.

“아 서하늘 진짜 욕 많이 먹고 오래 살고 싶지. 듣기만 한다. 듣다 잘 수도 있어.”

-어어 괜찮아.

귀에 휴대폰을 올려둔 채로 눈을 감았다. ASMR 듣는다고 생각해야지.

-깨운 거 진짜 진심 개미안. 근데 지금 토요일 오후 여덟 시 넘었는데 설마 지금까지 잔 건 아니겠지? 아무튼. 내가 방금 유리랑 영화 보고 저녁 먹었는데.

그때 마침 귀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두 시간 반 전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울렸다. 못 듣고 그대로 자 버릴까 봐 음량을 최대치로 올린 트럼펫 소리라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아 귀 아파.”

-아 헉 미안! 나 지금 밖이라 시끄러워서 목소리 크게 나왔어!

“너 때문 아니야.”

-깼어? 미안한데, 진짜 중요한 이야기라서.

“어차피 저녁 먹어야 해서 이때쯤에 일어날 생각이었어.”

-이때쯤? 언제 잤는데? 밤샘?

“여섯 신가…… 요즘에 친구 뭐 도와주느라고 주말에 밤새. 아홉 시에 세 시간쯤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마저 하다가 또 잠깐 자던 거라…….”

-세상에서 제일 바쁘게 살아요. 아무튼 하림아, 나 말실수를 하나 했는데 그게 네 얘기라서 전화했어.

“뭔데.”

-그게…… 막 큰 말실수는 아니고 그냥, 유리랑 영화 보고 밥 먹고 헤어졌는데 너 요즘 왜 이렇게 생기가 없이 다니냐길래 나도 모르게 김동규 때문이라고 그랬어. 미안.

“계속 말해봐. 다 듣고 뭐라 할지 생각해 보게.”

정신을 차리기 위해 캡슐 넣고 커피부터 내렸다. 주말도 쉬질 못하니 일주일이 열흘은 되는 느낌이다.

-분명히 얘기하는데 김동규가 너 좋아한다는 얘긴 안 했어!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가 왜 튀어나와.”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야 할지 짧게 고민하는 와중 서하늘이 말을 덧붙였다.

-김동규가 너 좋아하는 거 안 지는 엄청 오래됐으니까 어떻게 알았는지는 안 물어봐도 돼. 중학생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고등학교 올라와서 걔랑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많이 하다 보니까 그냥 내 촉으로 안 거야. 다른 애들은 대부분 그냥 따돌림당하던 애라 자기 챙겨준 너한테 고마워서 그런 거라고 알아. 학교에서 얘기도 잘 안 했잖아. 어차피 쌍방도 아니라 굳이 너한테 얘기 안 했던 거고.

전에 했던 프러포즈 이야기가 그냥 농담은 아니었군.

“……그래서.”

-김동규는 국문과생 아니어도 인기 작가님이라 다들 알잖아. 아 소설가 아니고 시인인데 시인도 작가라고 하나? 암튼 그래서 갑작스럽게 입원한 것도 좀만 관심 있으면 다 알고. 왜 갑자기 그런 건지 속사정까지 아는 사람은 너나 나나, 뭐 엄청 소수지만. 아니 애초에 너랑 김동규 친한 거 자체를 아는 사람이 여긴 별로 없잖아. 그래서 내가 요즘에 네가 그런 거 김동규 때문인 거 같다고 하니까 유리가 왜냐고 하는데 아차 싶어서 대충 둘러댔어.

“뭐라고 했는데?”

-김동규는 나랑 하림이랑 초등학교부터 쭉 같은 학교 나왔고 뭐…… 김동규 부모님이 바쁘셔서 김동규 신경도 못 써주고 낯도 많이 가려서 친구도 없고 그랬는데 하림이가 그런 김동규 어릴 때부터 챙겨줬고 둘이 전교 1등 2등 해서 같이 공부도 하고 그랬다, 근데 갑자기 큰 사고 당해서 하림이 충격이 큰 거 같다 뭐 이 정도로 얘기했지.

나름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이 보기엔 아닌가 싶어 커피를 마시면서 요즘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떠올렸다.

“잘했어. 난 또.”

-그래도 미안. 그냥 집에 뭔 일 있다고 하거나 친한 친구가 아파서 그렇다고 하면 될 걸 배가 너무 고파서 정신없이 스테이크 썰다가.

“괜찮아. 아 스테이크 맛있었겠다. 나도 저녁 스테이크 먹을까.”

-어 그러면 나올래? 나 지금 사당인데 안 그래도 김동규 병문안 가려고 그랬거든. 같이 갈 거면 데리러 가고.

“거긴 또 왜 가. 너 김동규 보러 되게 자주 간다.”

-간병인이 김동규는 과일 바구니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없다는데 그걸 듣고 맘 아파서 어떡해 그럼? 그럼 나 대신 네가 가든가. 의리도 없게 한 번도 안 갔다며.

“……처음엔 나밖에 없었어.”

-그것도 작년 일이거든요. 다음 주면 벌써 8월이고요. 암튼 내 말실수 보고 했고, 너도 잘 둘러댔다고 해줬고, 김동규한텐 안 간다고 했으니 다 됐지? 저녁 맛있게 먹어.

전화를 끊으니 적막이 내려앉았다. 서하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이모님까지 내게 왜 병원에 오지 않냐고 잔소리를 한다. 특히 엄마가. 김동규가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내게 보고를 해주던 엄마는 이제 김동규가 한 번씩 깨어날 때마다 나를 엄청 혼냈다. 엄마가 나보고 그렇게 의리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는 애인지 몰랐다며 실망했다고 해도 끝까지 가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영혼의 짝꿍, 베스트 프렌드라고 하고는 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 만난 뒤 10년간 떨어져서 가끔 보다 스무 살에 다시 만난 건데도 서하늘과 임유리는 배 속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엄청 죽이 잘 맞았다. 다시 만났을 때 10년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런 게 느껴졌으면 소울메이트였겠냐고 오히려 타박을 들었다.

“나는 그런 게 없으니까 모르지.”

“왜 없어? 너는 나 있잖아 나. 배 속부터 피로 연결됐는데 혈육의 정을 무시하면 쓰나 아우님.”

“넌 임유리랑 소울메이트라며.”

“엥 질투해 지금? 살다 살다 서하림이 친구 뺏겼다고 질투하는 걸 보네.”

“뭐래. 운전이나 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지만 서하늘이 혀 짧은 소리로 “울 하리밍, 틴구 뺏긴 거 같아서 슬퍼또요?” 하고 놀렸다. 임유리는 조수석에서 박수까지 치면서 웃었다.

오늘은 둘이서 그 대단한 서울 빵집 투어를 하시겠다는데 바쁘다는 나를 둘이 양쪽에서 연행하듯 잡고 도서관에서 빼내 와 차에 태웠다. 주말인데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죄라고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붙여서. 서하늘에게는 안경 쓸 정도로 잠도 안 잤다고 혼도 났다. 서하늘이 이렇게 들이닥칠 줄 알았으면 오늘 안경 안 들고 나왔을 거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서 요즘 체력이 바닥을 기는 나는 탈출도 실패한 채 빵집 두 군데를 억지로 방문해 온갖 빵을 한 입씩 먹었다. 분명 맛있는 것일 텐데 입맛이 없으니 조금씩만 먹는 것도 힘이 들었다.

“야 서하림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위 빨리 늘려.”

“저기 벌써 세 번째 빵집인데요. 누가 나 치면 크루아상 모양 그대로 뱉어낼 수 있을 거 같아.”

“여기가 오늘 마지막이야. 여긴 에그타르트랑 밤 식빵이 끝내준대. 밤 식빵은 하루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아침 일곱 시고 두 번째는 사십 분 뒤인 세 시야. 지금 가도 줄 길면 어쩌지? 주말이라 좀 걱정되는데.”

“아 아까 먹은 페스츄리 빵들 너무 맛있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

“그치? 나 이따 저녁도 거기 빵 먹을 거야.”

“쇼핑백 두 개 가득 채울 만큼 사길래 며칠을 먹을 생각인가 했더니 며칠 할 것도 없이 이틀이면 사라지겠는데?”

“내일 아점저 다 거기 빵으로 먹을 거야.”

세 끼를 빵으로 먹는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아 입을 막았다. 서하늘이 빛의 속도로 단 한 번에 후진 주차를 성공하고 차에서 내렸다. 자기 입으로 주차의 신이라고 하더니 진짜였다.

“가자. 손잡아줄까?”

나가기 싫어 벨트도 풀지 않은 내게 임유리가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벨트를 풀고 임유리의 손이 민망하지 않게 잡았다. 차에서 내린 다음엔 손을 놨지만 임유리가 팔짱을 껴오는 것까지는 그냥 두었다.

임유리와 서하늘이 툭하면 나를 불러대고 납치해서 맛있는 거 먹이고 드라이브를 가고 재밌는 영화나 공연을 보여주는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엄청 바쁘게 지내는 것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큰일을 당해서 상심해하니까 기운 좀 차리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다. 서하늘도 서하늘인데 특히 임유리가 더.

학교에선 임유리와 내가 사귀는 사이로 되어 있었지만 나도 임유리도 그걸 정정하진 않았다. 우리는 가끔 손을 잡고 걷곤 했는데 내가 먼저 잡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팔짱 끼거나 껴안고 그런 것도 다 임유리가 리드했다. 그 이상은 내가 내키지 않아하는 걸 알고 임유리도 더 진도를 나가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 임유리가 처음엔 조금 불편했는데 이젠 굉장히 편한 사이가 됐다. 서하늘이랑 작정하고 이렇게 끌고 나오는 경우 아니면 먼저 나한테 어디 가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는 편이었고 나는 다섯 번 중에 한두 번을 빼곤 다 임유리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신경 써주는 게 고맙기도 했고 임유리랑 있으면 잔잔한 호수에 누워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되게 평온했다. 뭐 억지로 강요하는 것도 없고 내가 자기 말에 잘 반응을 하든 까칠하게 반응을 하든 싫다고 하든 좋다고 하든 뭐든 다 OK라며 이해해 줬다.

“와 대박 오늘 무슨 일이래? 줄 생각보다 적은데?”

“우리 사고도 남겠다. 서하림 너 밤 식빵 먹을 거야?”

“아니.”

“그래도 사. 1인당 한 개밖에 못 사니까. 사서 나 줘.”

“응.”

식빵에 밤이 들어간 수준이 아니라 수를 셀 수 없는 밤에 빵이 둘러싸인 것 같은 밤 식빵을 제일 먼저 쟁반에 담고 각자 먹고 싶은 걸 골랐다. 서하늘과 임유리는 아까도 그 전에도 빵을 그렇게 먹었으면서 또 빵을 한가득 담았다. 아무리 몇 개만 먹고 집에 가져간다지만 빵을 무슨 도합 열 개는 넘게 먹는 거 같다. 나는 매시간 구워서 나온다는 에그타르트를 하나 집었다. 밤 식빵과 함께 3시 타임에 막 나온 거라 따끈따끈했다.

엄청 넓은 빵집은 내부 테이블도 많아서 우리는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 마실래?”

“나는 티 종류로 아무거나. 핫으로.”

“오키.”

서하늘과 임유리가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계산대 줄에 섰다. 나는 턱을 괴고 서하늘과 임유리가 무슨 말인지 신나게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 뜨거운 거 잘 못 먹는 것 같아서 얼음 두 개 넣어달라고 그랬어.”

임유리는 원래도 매너가 좋은데 세심하기까지 하다. 자연스럽게 김동규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김동규는 늘 내가 먹기 좋게 뜨거운 건 살짝 식혀 오고, 머그잔을 따듯하게 한 뒤에 커피를 내렸다. 아침에 혼자 일어나 커피를 내려 먹을 때면 컵을 따뜻하게 해놓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깨닫는데 그 귀찮은 걸 김동규는 한 번을 빼먹지 않고 해주었다.

플라스틱 칼로 에그타르트를 잘랐다. 맛은 있어서 계속 먹고는 싶은데 반 먹으니까 진짜 토할 것 같아서 서하늘이랑 임유리 먹으라고 줬다. 이럴 거면 사진 찍게 아예 먹지 말고 주든가 새로 사주든가, 하며 투덜거리는 서하늘 때문에 기껏 줘 놓고도 기분이 상해 마시고 있던 컵을 쾅 소리 나게 내려놨다.

“반 잘렸어도 예쁘게 찍는 법을 나는 알고 있지.”

“진짜? 어떻게?”

카메라를 들고 각도를 잡으며 임유리가 나를 보고 윙크를 했다. 임유리는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늘 여유롭고 어른스럽고 상황 대처 능력도 뛰어난 걸까. 서하늘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임유리 옆에 있으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저런 사람이랑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면 참 좋을 것 같다. 결혼해 남은 생을 함께해도 되게 괜찮은 인생의 반려자가 될 것 같고. 살면서 늘 좋은 일만 있진 않겠지만 임유리 같은 사람이 배우자라면 고난과 역경도 둘이서 잘 헤쳐나가 먼 훗날 ‘그땐 그랬지’ 하고 웃으며 추억할 것 같다. 힘들면 상대방의 어깨에 기대고, 손만 잡아도 든든해지고, 내 등 뒤를 맡겨도 괜찮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발걸음을 같은 속도로 맞춰 걷는 그런 사람. 서하늘의 말대로 임유리는 진짜 좋은 애였다.

“있잖아.”

난데없는 내 말에 사진 다 찍고 밤 식빵 외 일곱 가지의 빵 품평회를 열고 있던 서하늘과 임유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이 동시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럼 사랑하는 사람은?”

“가능.”

“나도.”

“왜?”

“뉴스에 많이 나오잖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긴 죽고 애인이나 아내를 살린 사람이라든가 강도가 들었는데 딸을 죽이려 해서 대신 칼 맞고 죽은 엄마 아빠, 동생이 길 건너는데 차가 못 보고 그대로 동생 칠 것 같으니까 뛰어들어서 구한 언니 오빠, 하다못해 어린이집에 불이 나도 아기들 살린다고 하다가 선생님이 죽기도 하고.”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자주 보이는 게 절벽 같은 데에서 남자 주인공이 떨어지려 그러니까 여주가 손을 딱 붙잡았는데 남주가 이러다 여주도 떨어져 죽을 것 같아서 손 놓고 떨어지는 클리셰도 있지. 딱히 애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동료나 암튼. 다 사랑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럼 너네는 엄마를 위해서 죽을 수 있어? 엄마랑 둘이 있는데 무장 강도가 들어왔다.”

“아우 난 못 할 거 같아. 차라리 그냥 나도 식칼 빼 와서 강도랑 싸울래.”

“지금은 하겠다 못 하겠다 쉽게 얘기해도 막상 그때가 되면 지금이랑 반대의 선택을 할 거 같아. 극한의 상황이면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힘이 나오기도 하고, 그런 상황에서 나한테 있는지도 몰랐던 비겁한 본성이 튀어나오거나 엄마를 향한 엄청난 사랑과 희생이 두려움을 이길 수도 있는 거고.”

“근데 갑자기 왜?”

“그냥. 별 이유는 없어.”

“그럼 너는?”

“나?”

뜬금없는 내 질문에도 성실하게 대답해 준 임유리의 성의를 보고 나도 이런 상황 저런 상황을 가정해서 시뮬레이션을 빠르게 돌려봤다.

“나는 내가 죽어서 엄마가 살 수 있는 게 확실하면 죽을 거 같고 내가 죽어도 엄마가 죽는 상황이면 안 죽고. 만약에 그냥 무장 강도가 우리 집에 들어왔는데 나만 강도 얼굴을 봤고 엄마는 잠을 자는 중이라 못 봤어. 근데 강도가 나만 죽으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겠다고 하면 알겠다고 하고 죽을 건데 연쇄 살인마가 들어와서 우리 가족 다 죽인다고 그래서 내가 ‘우리 부모님은 죽이지 말고 저만 죽이고 집을 나가주세요’라고 했는데 ‘나는 싸패라서 이 집 사람들 다 죽일 거라 네 딜이 하나도 매력적이지가 않다’ 뭐 이러면 앞장서서 안 죽는 거고.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희생했는데 뭐라도 성과가 있어야지.”

“오 그럼 나도. 강도랑 식칼 들고 싸우다가 서하림처럼 할래. 내가 죽어서 엄마가 확실히 사는 거면 눈 딱 감고 ‘엄마 다음 생에서도 엄마랑 딸로 만나. 사랑해’ 하고 죽어야지.”

“다음 생 같은 건 없다니까.”

“전 세계 5억 명의 불교 신자들에게 맞아 봐야 저놈의 다음 생은 없네 어쩌네 소리를 안 하지.”

“난 불교 신자가 아니잖아.”

“그게 중요해? 너는 꼭 내가 좋다는 거에 한 번씩 초를 치더라. 환생이나 별자리나 심리 테스트 같은 거에 무슨 원수 졌나 봐?”

“내가 그런 말 싫어하는 거 알면서 꼬박꼬박 내 앞에서 말하는 네 심보는 뭐야 그럼?”

“그만 그만! 지금 강도 들었어? 아니지? 싸패 살인자가 칼 들고 설쳤어? 아니지? 신성한 빵 앞에서 싸우지 말자.”

임유리의 말에 우리 둘은 더 이상 말을 않고 입을 다물었지만 한 번 얼어붙은 분위기는 되돌아올 줄을 몰랐다. 서하늘이랑 유치원 졸업한 이후로 이렇게 싸운 게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 놀랐지만 나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내 말을 취소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귀신이니 다음 생이니 혈액형이니 하는 걸 내가 앞니 빠지던 어렸을 때부터 안 믿고 싫어한단 걸 뻔히 아는데도 구태여 얘기하는 서하늘이 이상한 거다.

“나 먼저 일어난다.”

“가려고?”

“그럼 나랑 서하늘이 어디까지 헐뜯을 수 있는지 봐보든가. 야 서하늘 나 간다.”

“꺼져.”

“사과할 맘 생기면 연락해.”

“저이 씨발, 뭐라고? 야 연락? 평생 보지 말자.”

“어 그래. 나도 바라던 바야.”

“하림아 왜 그래, 서하늘 너도.”

그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남산 근처인 빵집에서 학교까지 오는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서하늘 때문에 화가 풀리지 않아서 입술을 수시로 깨물었다. 방학을 통으로 연구소와 프로젝트에 꼬라박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2학기가 시작돼서 입술에 염증이 나 아파 죽겠는데 이거라도 해야 얌전히 앉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그랬다간 시트를 팡팡 두들겨 택시기사가 이상하게 봤을지도 모른다.

한술 더 떠 엄마한테 또 전화가 왔다. 김동규가 깨어났든 저녁 먹으러 오라는 얘기든 이 상태로는 전화 받았다가 엄마한테도 고운 소리는 못 나갈 것 같아 계속 거절을 눌렀더니 문자가 도착했다. 아무런 수식어나 설명 없이 딱 네 글자로 [전화 받아]라고만 왔는데 그래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재중 통화가 20통이 넘어 30통에 가까워졌을 때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건물 앞 벤치에 앉은 다음 전화를 받았다.

-서하림!

“왜. 주말인데 엄마도 참 할 일 없다. 누가 보면 아들한테 집착하는.”

-지금 어디야!

“나? 학교.”

-빨리 택시 타고 병원으로 와! 지금 당장.

“아 김동규 안 보러 간다니까. 엄마 지금 병원이야? 토요일인데?”

-엄마 오늘 당직이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림아, 동규가 너 찾았어.

“뭐라고? 못 움직인다며.”

-좀 전에 깨서는 꽤 오래 있었는데 네 이름만 부르더라.

“…….”

-그러고는 또 기절했어.

“다음에…… 다음에 갈게.”

-언제 또 일어날 줄 알고? 아니, 다시는 못 깨어난다고 해도 친구가 그러고 누워 있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올 수가 있어. 물론 수술하고 나서는 동규랑 같이 있어줬지만 그래도 엄마 진짜 속상해지려고 그래.

내가 말이 없자 엄마가 한숨만 내쉬었다. 좀 전에 서하늘이랑 싸운 것 때문에 짜증 나 죽겠는데 엄마는 왜 또 지금 전화해서는, 아니 김동규는 눈치도 없이 왜 지금 정신을 차린 건지 내내 움직이지도 못했다면서 왜…… 내 이름을 불러서는 열심히 도망치던 날 현실로 끌어와 앉히는 건지 모르겠다.

여긴 너무 트여 있는 장소라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원래도 여긴 구석져서 학생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서하림. 엄마 말 듣고 있지.

“응.”

-하림아.

“응. 말해.”

-많이 무서워하고 있는 거 엄마가 알고 있는데, 그래도 와. 무서워도 일단 와.

“…….”

-진짜로 동규가 이대로 하늘나라 가잖아? 그러면 정말 평생 미안해서 후회해. 사정이 있어서, 바쁜 일이 있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친구나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이 아플 때 연락 하나 못 해도 계속 생각나고 미안하고 그런데 동규 같은 상황은…… 진짜 평생 죽을 때까지 따라가.

“엄마.”

-아가, 우리 하림이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이잖아. 당차고 올바르고 사랑도 많고 정도 많고, 똑 부러져서 할 말도 다 하고, 해야겠다 생각 들면 무슨 벽이 있어도 맞서 싸우고. 그거 아무나 못 하는 거야. 마음이 튼튼하고 강한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어. 엄마는 하림이가 강한 사람이라는 거 알아.

“엄마.”

-응 아가.

“나 사실, 옛날에…….”

-응 옛날에.

김동규가 깨어났단 전화를 받을 때마다 가슴속에 뜨겁게 달궈진 돌덩이가 돌아다니는 듯했다.

“김동규랑…… 크게 싸운 적이 있는데.”

-그랬었어?

“응. 내가 아니라 걔가 잘못한 거였는데.”

-응. 그랬는데.

“그때 내가 너무…… 너무 화가 나서…….”

그건 내가 김동규에게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그 말 때문에 김동규가 깨어나는 건 아닐까, 책임감 같은 것과 두려움이 그 돌을 뜨겁게 만들어 내 안에 화상을 남기는 거였다.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김동규보고 그랬어. 만약에 너네 아빠가 너를 어떻게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죽지 말고 무조건 깨어……나라고……. 엄마, 나 어떡해? 김동규가 너무 아프고 심하게 다친 건데도 내가 한 말 때문에, 내가 그렇게 얘길 해서…… 아픈데…… 죽지도 못하고 계속 깨어나는 거면 어떡해…….”

-아가, 울지 마. 응? 네 잘못 아니야. 동규가 자꾸 깨어나는 건 기적인 거지 우리 하림이가 죄책감 느낄 필요 하나도 없는 일이야.

“그런 거면 어떡해……. 그래서 내가 가면, 갔다가…… 나 보고 김동규가…… 나 봤다고, 약속 지켰다면서 진짜로……. 엄마, 나 너무 미안하고 무서워. 엄마 나 어떡해…….”

엄마도 우는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달래는 엄마의 말이 하나도 와닿지가 않아 계속 울기만 했다. 엄마는 김동규가 깨어나는 걸 기적이라고 말했지만 김동규를 수술한 의사가 기적이 아니라고 단언할 정도면 정신을 차리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정신을 차려서 내 이름을 부른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상상도 되질 않았다.

왜 그때 그렇게 얘길 했을까. 그 말만 아니었으면 수술을 마치고 바로 김동규를 보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랬으면 일주일에 쉬는 날이 하나도 없이 몸을 혹사시킬 필요도 없었을 거고 입안이 잔뜩 헐거나 하루 종일 빈 속에 커피만 마실 일도 없었을 텐데. 힘든데도 잠을 자지 못해 매일같이 안경을 써야 할 일도, 미각이 무뎌지는 일도 없었을 거였다.

-아가, 엄마 이제 전화 끊고 돌아가 봐야 해. 그만 울고, 아가, 꼭 오늘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꼭 와. 알겠지? 너무 늦지만 않으면 괜찮아. 동규가 너 보겠다고 그렇게 눈을 힘겹게 뜨고 있는데 아, 엄마도 눈물 너무 난다. 하림아, 오늘은 자취방 말고 우리 집으로 가. 아니다, 엄마가 아빠한테 말해서 데리러 가라고 그럴게. 오늘은 아빠랑 자. 응?

“내가 이따 아빠한테 전화할게.”

-그래 그럼. 하림이가 해. 조금만 더 울고 세수한 다음에 아빠한테 전화하는 거야.

“응.”

가 봐야 한다는 사람이 전화도 끊지 못하고 있길래 내가 전화를 종료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지금껏 외면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나는 그 시간을 다 눈물로 빼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엄마 말대로 나는 아무리 큰 벽이 있어도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던 사람인데…….

너무 울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지쳐서 더 이상 울 기운도 없을 때 아빠보다 서하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사과할 거 아니면 당장 끊어.

“사과하려고 전화한 거야.”

-너 목소리 왜 그래? 울었어?

“조금.”

-왜? 야, 그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닌데…… 나도 미안해. 근데 너무 과한 사과가 아닌지?

“하늘아.”

-뭐야 왜.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였어. 내가 요즘…… 아니 예전부터 그랬지만 그냥 정신없이 살아. 몸이 힘드니까 마음도 지쳐서 그래. 지치나 봐.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겼을 건데도…… 미안해. 미안해 하늘아…….”

-야, 너 진짜 울어? 왜? 야, 그렇게 미안해 안 해도 돼! 야 너 집이야? 밖이야?

서하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전화한 건데, 시간이 갈수록 나는 누구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는 채로 미안하단 말만 반복했다. 서하늘은 내가 진정이 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사과를 들어주었다.

일상으로 돌아와 바쁘게 사는 동안 김동규는 두 번이나 깨어났다. 엄마도 이젠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나를 혼내지 않았고 서하늘도 내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또 그런 서하늘한테 미안해서 덩달아 말을 조심조심했다.

프로젝트의 틀을 잡고 첫 번째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숨통이 좀 트였다. 12월 한 달간은 쉬고 1월부터 다시 미친 듯이 달리자는 연락이 왔다. 나 말고도 우리 학교에 그 프로젝트의 중심 멤버가 세 명이나 있어 다 같이 수고했다는 의미 겸 2차 실험의 성공을 기원하자며 학교 앞 술집에 모였다.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인지 모르겠다. 다들 작정하고 마시는데 나는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조금만 마셨다. 좋은 일로 모인 거라 안주도 빵빵하게 시켰으나 사라질 줄을 모르는 염증 때문에 계속 입술은 갈라지지 물집 같은 것도 올라오지 거기다 입안도 자꾸 말라 다른 안주는 하나도 건들지 않고 탕만 먹었다. 이따금 다 같이 건배하는 분위기면 술을 한 잔씩 했는데 그 외에는 술잔을 비워뒀다.

넷이서 열한 병을 마셨다. 나는 겨우 한 병 마신 거라 실질적으로는 셋이서 열 병을 마신 거였다. 쌓인 술병이 내 것 포함 일곱 병이 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사람들은 전부 맛이 가 젓가락질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술은 기가 막히게 따르고 잘도 마셔댔다.

“이모! 한 병 더요!”

미친 거 아닐까. 나는 지갑에서 5만 원권 두 장을 다급하게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임유리에게 전화했다. 임유리가 미친 듯이 밟아서 10분이면 간다고 어디 가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나도 안 취했다고, 진짜 조금 마셨다고 그랬는데도 믿질 않았다.

사실 그냥 택시 타고 집에 가도 되는데 겨우 한 병이래도 오랜만에 마신 거라고 마음껏 치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따뜻한 온도의 체온이.

“나 뒤에 타도 돼? 눕고 싶어서.”

“응. 급브레이크 밟을 일 있으면 10초 전에 미리 얘기할 테니까 앉아서 벨트 매.”

“미리?”

말도 안 되는 얘기에 피식피식 웃으며 임유리의 차에 올라탔다. 열심히 밟았는지 정말로 10분 조금 넘어 도착했던 임유리는 반대로 우리 집에 갈 땐 이러다 경찰이 너무 느리게 운전하는 거 아니냐고 잡아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굉장히 천천히 운전했다.

“토할 것 같진 않고?”

“나 오늘 진짜 조금 마셨어. 토하려면 두 병은 더 마셨어야 돼. 아무나 못 보는 진귀한 광경이라고.”

“네네. 도착했습니다, 손님.”

분명 기대고 싶어서 부른 건데 옆에 앉기가 싫었고, 그래서 뒷자리에 탔던 건데 막상 임유리가 문을 열고 나를 일으키겠다고 손을 뻗자 그 손을 넙죽 잡아 깍지를 꼈다. 임유리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문을 닫고 들어와 내 다리를 치우고 앉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 버킷리스트 중에 잘생긴 애랑 카섹스하는 게 있어.”

임유리의 손과 입술을 거부할 수 없는 건 임유리의 손도 김동규처럼 뜨겁고 입술은 다정해서 그렇다. 임유리는 살짝 입을 맞추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잖아.”

깍지 낀 손을 푼 임유리가 내 몸을 더듬었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갑자기 왜 하는 거지.

“친구 때문에 많이 슬픈 것도 여러모로 위로해 줄 수 있고.”

“아, 잠깐만 유리야.”

“왜? 여기도 반응하고 있는데.”

“아, 아는데…….”

임유리가 친구란 단어만 내뱉지 않았으면 이대로 임유리랑 끝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나랑 김동규를 단순히 친구 사이로만 아는 임유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인 거 아는데, 알고 있는데 갑자기 김동규가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하자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눈물이 흘러나왔다.

“유리야, 나 네가 싫어서 그런 거 절대 아니고…… 지금 이건 왜 그러냐면.”

“응. 뭔데 이거.”

다리 사이에서 손을 거둔 임유리가 두 팔을 내 머리 옆에 두고는 빨리 말해보라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과장된 표정이라 진짜로 화난 게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꼭 임유리에게 갇힌 것 같다. 이것마저도 김동규랑 이런 식으로 마주 봤었던 게 떠올라서…… 심장이 너무 아파 나는 그 부근을 꾹 눌렀다.

“좋아하는…… 애가 있어. 많이…… 내가 그 애를 많이 좋아해. 되게 오래전부터 좋아해서…… 걔랑 진짜 많은 일이 있었는데…… 진짜 밉고 싫은 적도 많았는데…… 그래도 너무 좋아해. 근데, 걔가 지금 많이 아파.”

임유리는 내 위에서 내려와 휴지를 가져왔다. 내가 닦고 싶었지만 너무 아파서, 심장에서 손을 뗄 수가 없어서 임유리가 눈물을 닦아주는 걸 가만히 받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래서 죽을지도 모른대. 아니…… 의사 선생님 말로는 이미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아, 걔가…… 걔가 있잖아, 유리야…….”

말도 마치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나를 임유리가 안아주었다.

“자꾸 깨어나서 나를 찾는대. 내가 보고 싶어서…… 죽은 것처럼 있다가 자꾸 눈을 뜬대. 눈을 뜨고 내가 없으면 다시……. 그런 걔를 두고…… 나는 걔가 너무 보고 싶은데, 옆에 있고 싶은데 내가 가서 보는 모습이 걔 마지막일 것 같아서…… 미안해, 유리야.”

“하림아.”

날 안고 있는 임유리의 목소리도 물기에 젖어 있다. 슬픔을 나누면 정말로 반이 되는 걸까. 임유리가 내 슬픔 절반을 가져가 줬어도 사라진 반이 다시 눈 깜짝할 새 차오르고 넘쳐 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잘 모르니까 조심스러운데, 그러면 더 가야지. 걔한테 빨리 달려가야지. 바보처럼 숨고 있으면 어떡해. 걔가 얼마나 너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겠어. 만약에 걔가 널 보고, 네 말대로 그게 진짜로 마지막 모습이면…… 걔는 행복할 거야. 가. 지금 빨리 가서 나도 너 보고 싶었다고 말해줘.”

임유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휴지로 제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그리고는 휴지를 왕창 뽑아내 것도 닦아주고 코 풀라며 “흥!”도 했다.

“지금…… 가?”

“그럼 내년에 가려고? 근데 갈 거면 택시 타고 가. 내가 바로 태워다 주면 제일 좋긴 한데, 나도 사람인지라 지금은 데려다주기가 좀 그렇다. 아니 사실 네가 내 차 타고 빨리 가고 싶다고 그러면 쿨하게 태워다 줄 수 있어.”

“아니야. 혼자 갈게. 고마워. 진짜…… 진짜 진짜 고마워.”

“알면 빵집 투어 남은 것도 같이 가자.”

“응. 내가 빵 다 살게.”

임유리는 어디 병원인지 물어보더니 같이 길가까지 따라 나와 택시를 잡아주고 기사님께 5만 원을 쥐여주면서 내가 S대 병원 말고 다른 데로 간다고 해도 딴 데로 새지 말고 무조건 S대 병원 앞에서 내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임유리가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는 손을 흔들어서 나도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엔 임유리가 쥐여준 차량용 휴지가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 VIP동 들어가는 데만 30분,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데만 20분, 김동규 있는 층에 내려 소등한 로비에서 또 30분을 허비한 뒤에야 병실로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무겁고 무거웠다. 문소리에 간병인이 깨어나 나를 확인하더니 인사를 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

이렇게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동규를 여러 번 봤었는데, 그땐 힘도 세고 덩치도 키도 큰 게 입원할 정도로 아빠한테 맞는 것도 바보 같고 이러다 죽어버리면 내가 억울해서 어떡하냔 생각을 제일 먼저 했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병원복 입고 누워 있는 게 불쌍해서…… 이런 모습 보기 싫단 생각도 했었는데 이젠 이런 모습도 마지막일 거라 생각하니 김동규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가 다 아쉬웠다.

목구멍을 간질이는 김동규의 이름을 차마 뱉지 못하고, 링거를 맞고 있는 김동규의 손등만 만졌다. 늘 뜨겁고 따뜻했던 체온 그대로였다.

한 주 수업을 통으로 다 빠졌다. 엄마한테 의사 소견서랑 진단서 끊어달라고 해서 입학하고 결석계도 처음 내봤다. 내가 온 지 하루 만에 김동규가 눈을 떠서 그랬다.

-하림아. 안녕. 보고 싶었어.

울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밥은 먹었어? 얼굴이 안 좋아 보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 모양으로 말하는 김동규를 보면서 즐겁고 재밌었던 일을 떠올렸다.

-잠은 푹 잤고? 잘 못 잔 거 같아. 여기서 잔 거야? 불편하진 않았어?

마른세수를 하고 입을 떼며 김동규의 안경 케이스를 열었다. 엄마가 김동규가 일어나면 제일 먼저 날짜를 알려주고 너스콜을 누르고 안경을 씌워주라고 그랬다. 너스콜을 누르고 어제 나한테 연락을 준 김동규네 교수님에게도 연락을 했다. 의사는 김동규가 바로 기절하지 않자 이것저것 물었고 엄마도 와서 김동규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를 꼭 껴안아 줬다. 엄마가 김동규 엄마한테 전화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영상 통화도 시켜줬다. 그 외에도 시집은 어떻게 됐는지, 지금 교수님이 오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해주었다.

김동규는 교수님이랑 무슨 얘길 나눴고 교수님이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더니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출판사 사람과 변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카메라를 설치하고 저작권 양도 확인서를 내게 건넸다. 교수님이 전화를 끊고 나에게 설명을 해줬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서류에 사인을 했다.

-하림아 할 말 있어.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우리 둘만 남자 김동규가 나를 불렀다.

“뭔데.”

-가까이 와봐.

멀리서도 입 모양이 보이는데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는지 싶어 김동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고 싶어. 나…… 섰는데.

이 상황에서도 그 짓을 하겠다는 게, 전에도 깨자마자 날 벗겨 먹은 전적이 있어 새삼 놀랄 것도 없었지만 정이 뚝 떨어지는 것 같은 건 사실이라 치미는 화를 누르기 위해 숫자를 세고 이불이나 다시 제대로 덮어줬다.

“몸도 안 좋은데 잠이나 자. 잘 자라고 토닥토닥해 줄게.”

그러곤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기말고사 앞두고 일주일이나 빼먹은 게 타격이 크기도 하고 그 상황에 아랫도리를 세운 김동규가 어처구니없어서 며칠 좀 보고 싶지가 않았다.

학교 끝나면 김동규 병실로 출근해 공부하는 틈틈이 USB에 담아둔 김동규의 일기들을 첫날부터 빠짐없이 읽었다. 제일 놀란 건 중3 때 내가 과고 입시 앞두고 계단에서 구른 일이었다. 그건 김동규가 저지른 짓이 아닌데도 김동규는 자기가 한 거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종종 사실이 아닌 걸 맞다고 한 걸 더 발견했는데 어릴 때 내가 많이 아팠다거나 납치를 당했다거나 내가 김동규의 것을 입에 물고 해줬다든지 내가 자위도 한 번 안 해봤다든지 뭐 그런 것들이었다.

다 죽어가도 그 짓 할 생각하는 애고 기억을 자기 맘대로 지우고 만들고 하는 애라 잠깐 짜증이 치밀었지만 이제 그런 게 다 뭔가 싶었다. 김동규는 그날 이후로 내가 꼭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이나 밥 먹으러 또는 화장실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때를 맞춰 깨어났다. 깨어나도 바로 기절한다는 간병인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타이밍 나쁘게 일어나놓고 끈기 없이 내가 없다고 바로 눈을 감을 건 뭐람. 화장실 갔을 땐 진짜 1분만 버텨도 됐을 텐데.

종강을 하고 본격적으로 김동규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했다. 김동규는 늘 내가 자기랑은 다르게 씩씩하고 밝고 잘 웃고 강하고…… 그런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에 최대한 그런 모습으로 보내줄 생각이었다.

종강을 하고 눈이 내린 크리스마스가 지났어도 김동규는 죽은 것처럼 잠만 잤다. 곧 김동규 생일인지라 일어났으면 좋겠고 바랐다. 생일 선물도 준비했는데.

1월이 되면 김동규한테 올 시간이 너무 없을까 봐 이번 겨울방학은 연구소 인턴을 취소했다. 경쟁률 높은 곳이라 한 번 그만두면 다시 들어갈 수 없었지만 다른 곳을 뚫을 자신이 있어 미련 없이 취소 버튼을 눌렀다. 오히려 연구실 선배들이 놀라 내게 전화를 할 정도였다.

“야, 김동규. 생일 축하해.”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김동규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프로젝트 두 번째 실험은 1월부터 준비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냥 넉넉하게 며칠 전부터 시작했다. 어차피 김동규 병실에 있다 보면 할 일도 없었다.

김동규 침대 바로 옆에 이동식 테이블을 붙이고 한참 해외 눈문을 찾아보던 중이었다. 침대가 작게 덜컹거리더니 김동규가 깨어났다.

-하림아, 하림아…… 미안해. 하림아, 서하림…….

뭐가 미안하단 거지. 저번에 나 보고 그랬다고? 너 원래 변태인 거 잘 알고 있으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김동규가 이상했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도 계속 뭔가를 얘길 해서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김동규의 입술을 읽었다.

-하림아 근데, 나 이대로 죽어도 좋은데 너랑, 너랑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아니, 잠깐만 지금 좀 이상해. 하림아, 너무 졸린데 자고 싶지 않아. 안 잘래. 뭐라고 얘기 좀 해봐, 나한테 말 걸어줘. 계속 얘기하면 좀 잠이 달아날 거 같은데…… 하림아, 하림아, 나 네가 너무 좋아. 좋아해…… 사랑해. 사랑해 하림아. 나한테 와줘서 너무 고마워. 힘들 때마다, 슬플 때마다 네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고…… 아, 이상해 잠 왜 이렇게 오는 거지.

내 이름만 속삭이는 김동규가 이제 진짜로 떠나려나 보다. 나를 두고, 나만 두고.

“김동규. 동규야.”

나는 김동규의 손을 잡고 준비한 생일 선물을 꺼내 들었다.

“오늘 네 생일이야. 생일 축하해.”

김동규가 울고 있어 나는 최대한 울음을 참아 넘겼다. 쉼 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웅얼거리던 입술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고, 멈췄고, 닫힌 눈가엔 흐르지 못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릴리.

김동규는 내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혼자서만 몰래 부르더니 진짜로 눈을 감았다. 흰 백합과 닮았다고, 내가 깨끗하고 순결하다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더니 내 심장에 그 예쁜 꽃 하나를 심어 주고 가버렸다.

“사망 선고하겠습니다. 12월 31일 오후 6시 22분 김동규 님 사망하셨습니다. 잠시 동안은 다 들을 수 있거든요. 고인이 편하게 가실 수 있도록 천천히, 작은 소리로 마지막 인사해 주세요.”

선생님 왜 하필이면 6시 22분이에요. 그거 제 생일인데.

“야, 김동규. 진짜 죽어?”

너무 허무하다. 이토록 허무하게…….

“너…… 왜 나랑…… 나랑 한 약속 안 지켜.”

김동규가 진짜 죽고 나면 많이 울 것 같았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내 손에 죽는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누워 있어. 왜! 일어나 미친 새끼야. 일어나라고!”

내 인생의 절반에는 김동규가 함께였다. 처음 만난 이후로 10년이 넘게 흘렀는데 아직도 나는 김동규에게 갖는 수많은 감정들을 하나하나 이름 붙여 정리하지 못했고, 안 하기도 했다. 이름이 붙지 않고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인 상태의 감정들뿐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행복하다는 듯 웃지 말고 일어나…….”

유리가 말한 대로 김동규는 행복한 것 같았다. 죽으면 끝이고 소멸이고 아무것도 없는 건데도.

그래도 김동규를 향한 감정 중에 몇 개는 수학 문제 풀 듯 깔끔하게 해답을 찾아 정리해 놓기도 했다. 우정, 불쌍함, 신기함, 동정……. 그중에 가장 강렬했던 것은 공포와 증오…… 그리고 사랑이었다.

할아버지가 마련해 준 비행기편으로 김동규 아줌마가 한국에 입국했다. 넋을 놓은 아줌마가 겨우겨우 장례를 진행하는 동안 소식을 들은 서하늘이 와주었다. 말없이 눈물만 흘려대며 사흘 내내 장례식장에서 지내는 나를 보고 서하늘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무시했다.

발인까지 모든 절차가 다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서야 서하늘이 물어왔다.

“하림아. 혹시 있잖아…… 진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도.”

“하늘아.”

“어?”

“맞아. 맞으니까 그냥…….”

“아 그래, 미안. 괜히 물어봤어 미안해.”

유리가 아무 말도 안 해줬구나. 진짜로 맛있는 거 많이 사줘야지.

가위바위보에서 진 아빠가 운전을 하고 엄마와 나는 뒷좌석에 탔다. 나는 엄마 허벅지를 베고 누워 짧은 잠에 들었다.

김동규랑 살던 집을 정리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서 혼자 있다간 너무 우울해질 것 같아 부모님 집으로 들어왔다. 겨울 방학 동안 프로젝트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더 열심히 프로젝트에 열중했다.

개강하고 나서는 대학원을 미국으로 갈 거라 유학 준비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2차 실험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3월 첫 주부터 서하늘, 임유리와 함께 그놈의 빵집 투어를 돌기 시작했고 김동규네 교수님이 자꾸 나를 찾아와 시집을 빨리 내자며 보채기도 했다. 김동규 아줌마가 자기에게 넘어온 저작권도 다 나한테 양도한 탓에 김동규가 쓴 모든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이 나한테 있어 어떤 걸 시집에 실을지 출판사랑 상의를 해야 했지만 나는 김동규가 쓴 시들을 읽기가 싫어 유학을 앞세워 바쁘다고 차일피일 미뤘다.

“어차피 전에도 뭐 넣을지 거의 다 정해져 있었다면서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상황이 다르잖아, 상황이.”

“무슨 상황이요?”

“동규 그렇게 되고 얼마 안 지나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다만 모든 예술가는 죽으면 몸값이라는 게 뛰어.”

“몸값이요.”

“현실적으로 보자는 겁니다. 나랑 남편은 동규 시집을 아예 작정하고 베스트셀러로 만들 생각이야. 21세기 유일무이한 100만 부 시집, 좋잖아.”

“앞으로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는 사면 안 되겠어요.”

“돈 많이 벌어다 준단 소리야. 이렇게 얘기하면 이해될까?”

그래, 저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제일 중요할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지. 자본주의 시대에 돈 많이 벌고 싶은 게 뭐가 그리 나쁜 일이라고. 법을 어기겠단 것도 아닌데.

“교수님. 돈 많으세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저보다요?”

“뭐?”

“저 지금 유학 준비하는 거 아시죠. 성적이나 레터는 뭐, 무난히 통과할 거라고 보고 언어도 문제없고. 제가 유학 가서 제일 걱정되는 게 뭔지 아세요? 음식이에요. 제가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나 곱게 자라 길거리 음식이나 학식 같은 게 입에 안 맞아요. 맵고 짜고 달고 그런 거 못 먹어서 집에는 저 혼자만을 위한 요리사님도 계세요. 맛집? 배달 음식? 그런 거 왜 시켜먹어요? 집에서 말만 하면 내 입맛 맞춰서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는데.”

“…….”

“무슨 말이냐면요, 가서 걱정되는 게 고작 그게 다지 생활비나 학비 같은 돈은 저한테 아무런 고민거리가 안 된다는 거예요. 가자마자 차도 살 거고 청소하기도 귀찮고 하니까 박사 딸 때까지 호텔에서 지낼까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돈이 썩어나게 많아서 죽기 전에 이걸 다 쓰고 죽을 수 있을지가 인생의 가장 큰 난제거든요. 이렇게 얘기하면 이해가 되실까요?”

돈이 많은 건 맞는데 다 엄마 거, 할아버지 거라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차는 고모할머니가 사준다고 했지만 호텔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나보다 한참 많이 산 어른 앞에서 부릴 수 있는 허세를 있는 대로 다 부리며 센 척을 했다.

“시집 백만 부가 아니라 천만 부를 팔아도 저에겐 푼돈이니까 방학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자존심이 상한 듯한 교수님을 보며 혹시라도 내 센 척이 들키진 않았는지 표정 관리를 하느라 힘들었다.

“교수님께서 새로 시집으로 엮을 것들 골라서 보내주시면 제가 보고 뺄 거 있음 빼고 사인 해 드릴게요. 비전공자인 제가 보기에도 ‘어라, 이건 좀 그런데’ 싶은 것들을 뽑진 않으시겠지만요.”

종강하자마자 교수님이 파일을 보내왔다. 나는 한 작품도 읽지 못하고 이대로 진행하잔 답장을 보냈다. 다음 날 출판사로 가서 서류에 사인을 했다.

김동규가 지어놨다는 제 시집의 제목은 탈리(脫離). 과학 용어 중 하난데 분자·이온 등에서 원자 혹은 원자단이 떨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면 꽃이나 나뭇잎들이 가지에서 떨어지는 것도 다 탈리 현상 때문이었다. 똑같은 자연현상이 예술의 세계에서는 낙화라는 멋진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공계로 넘어오면 딱딱하기 그지없어지는 게 재밌었다. 짧고 강렬한 게 젊은 천재 시인의 첫 시집으로는 딱 괜찮은 이름인 것도 같았고.

출판사 내부에서 무슨 문제가 생겨 늦가을에 발간 예정이던 김동규의 시집이 겨울로 밀렸다. 졸업 논문을 해치우고 대학원까지 준비하느라 여름방학과 마지막 학기는 너무 바빠서 10월인가 교수님이 추천사 한번 읽어보라고 보내줬는데 까먹고 읽어보질 못했다.

한 번도 과탑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여덟 학기의 학점도 토플 점수도 GRE 점수도 좋았고 대통령상 받은 거나 친구네 팀에서 프로젝트 참여하면서 국제 저널에 논문 게재된 거, 또 연구소에서 인턴 지낸 거까지 교수님이 미국인들도 나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을 거라 할 정도였다. 세 명의 추천서를 받아 접수를 끝냈을 즈음엔 김동규의 시집 발간 작업도 막바지였다.

서점에 나가기 일주일 전 우리 집으로 김동규의 시집 <탈리> 세 권이 도착했다. 나는 봉투를 뜯지도 않고 책장에 꽂아두고 있다가 발간 하루 전에 뜯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교수님이 보냈지만 확인하지 못한 추천사를 제일 먼저 읽었다.

사랑하는 제자이자 존경하는 천재 시인이 첫 시집을 낸 것을 축하한다는 첫 문장을 읽은 지 1분도 되지 않아 나는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지금 이거 뭐예요.”

-뭐가?

“추천사요.”

-아 이제 봤어? 어쩐지 별말이 없더라.

“책 몇 권 뽑았어요? 제가 그거 다 살 테니까 당장 전부 폐기하고 추천사 새로 써주세요.”

-그건 안 되겠는데.

“다 산다니까요?”

-돈이 문제가 아니고 명성의 문제지 이런 건.

교수님이 쓴 추천사는 김동규의 천재성은 불행한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의 인생은 순수한 문학을 위해 희생된 거라고밖엔 볼 수 없을 정도로 비극적이고 불행했다고, 문학의 신이 있다면 그는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존재일 것이라는 말을 추천사랍시고 써재껴 놨다.

“지금 욕하고 싶은 거 참고 있는 거예요.”

-해. 나도 욕먹을 거 알고 쓴 추천사야. 내 동료들 선배들 후배들한테 한 소리 좀 듣겠지.

“그걸 아시는 분이.”

-근데 그게 왜? 동규 죽은 건 아쉽다만 솔직히 그런 쓰레기 같은 아빠가 없었다면 동규도 그 정도는 못 썼어.

“교수님이 뭔데요.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김동규가 제대로 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어도 똑같이 천재였을지 어떻게 알아요.”

-딱 보면 알지. 내가 평생 봐온 시인이 몇 명이고 읽은 시가 몇 갠데. 아무튼, 뭐 저작권자의 입장 잘 알겠고 2쇄부턴 수정한 추천사로 들어갈 테니까 메일 보내면 바로 확인.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차피 이제 학교도 곧 졸업이고 우리 과 교수님도 아니라 볼 일도 없었다.

합격 발표가 나자마자 출국했다. 수석 졸업생이라 졸업식은 하고 가라고 교수님들이 뜯어말렸지만 한시라도 빨리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서하늘과 임유리가 전해준 얘기로는 추천사 때문에 김동규가 왜 죽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알게 됐다는 거, 그래서 출간 첫 주부터 주간 판매량 1위를 하고 월간 판매량도 1위를 하고 2쇄부터 수정됐다는 추천사도 좆같았는데 2쇄부터 다른 추천사가 찍힌 이유를 출판사가 노이즈마케팅으로 터뜨려서 사람들이 더 가열차게 시집을 사들였다고 했다. 논란이 된 추천사를 실은 1쇄는 심지어 프리미엄가가 붙어 거래되고 있다고.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면 어느 소아과 의사가 교수님의 추천사들을, 그중에서도 특히 1쇄 추천사를 강력히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투고해 아동 인권단체에서 이성혜 교수님께 엄청난 항의가 들어갔단 게 있었다.

김동규 아저씨의 형량이 너무 낮은 거 아니냐며 여론이 들끓는 와중 상반기 1위, 올해의 도서 판매량 10위 안에 <탈리>가 이름을 올렸다는데 나는 일부러 한국 소식을 다 끊어버렸다. 그게 많이 팔리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소식 전해 듣는 것도 솔직히 너무 싫었지만 그래도 하늘이랑 유리가 신경 써주는 거 같아서 아무 말 않고 있었고 두 사람도 첫해만 얘기해 줬을 뿐 더는 김동규 시집 얘길 꺼내지 않았다.

석사 마치고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한국에 애인 있단 얘길 수도 없이 많이 했으나 여기엔 없으니 괜찮다는 소릴 엄청 들었다. 연구하는 것보다 개랑 고양이 먹냐는 말보다 그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한국엔 들어가기 싫어 해외만 돌고 있으니 부모님과 양가 조부모님들이 한국에 들어오라며 졸랐다. 하지만 결국 비행기에 오르는 건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어른들이었다.

내가 김동규의 시집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된 후, 이따금 유리와 하늘이가 신기한 얘기를 전해주기도 했다. 직접적으로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둘러 둘러 그의 작품이 어떤 사랑을 받는지를 듣는 건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얼마 전 유명한 연예인 커플이 결혼식에서 <탈리>의 시 하나를 읽은 게 화제가 되어 만인의 고백 시, 청혼 시가 되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다. 해외까지 출간된 <탈리>의 판매 부수도 그렇고.

못해도 서른다섯 전에는 한국에 들어가지 않으려던 내가 한국에 들어간 건 유리가 보내온 기사를 읽고 난 뒤였다. 나는 한국과의 시차를 생각하지도 않고 김동규네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이 시간에.

“이성혜 교수님. 접니다, 서하림.”

-아…… 오랜만이네. 미국에서 잘나간다며.

“교수님, 제가 기사를 봤는데 김동규로 뭘 하신다구요.”

-기사…… 봤다면서. 내가 말로 해주는 것보다 기자가 육하원칙 따라서 잘 써주.

“교수님!”

-아 귀청 떨어지겠어.

“교수님이 추천사 바꾸실 때마다 다 읽어봤으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건 그래도 김동규가 쓴 게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서 많은 사랑 받았으면 좋겠으니까 참고 넘긴 거였어요. 교수님 추천사 지금까지 마음에 드는 거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은 사람을 데리고 그런 걸 하실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김동규 아줌마가 그러래요? 그래도 된답니까?”

김동규를 비롯한 유명한 문인들의 유해를 수목장으로 바꿔서 새로 짓는 국립서울문학관 산책로로 만들겠다는 걸 김동규 아줌마가 허락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교과서에 실리는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랑 같이 진행되는 거라고 했더니 영광이라고 그러시던데.

“아 진짜 교수님 그렇게 안 봤는데…….”

-나도 알아. 금쪽같던 제자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고 찌들어 있는 거. 근데 서하림 씨, 거기랑 다르게 여긴 새벽이라 이만 다시 잠들었으면 하는데. 내일은 한국 시간 기준 오전 9시에서 11시, 오후 2시에서 3시에 강의가 있으니까 그 시간 피해서 전화해.

전화 대신에 가장 빠른 한국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한국에 들어간단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아 입국장에서 나를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6년 만에 온 고국이었지만 그립고 좋고 반가운 기분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시차고 뭐고 택시 타고 학교로 찾아갔다.

교수동 앞에 내려 중앙 현관문을 열다가 문득 김동규를 낳아 기른 아줌마가 허락한 걸 내가 무슨 수로 무를 수 있는지를 계산했다. 김동규 아줌마가 김동규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사귀지도 않았는데 무슨 명분으로 아줌마의 결정을 물러달라고 할 것이며 교수님께는 또 무슨 이유로 취소하라고 그러지? 이런 일이 있을까 봐 한국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던 건데.

김동규가 나에게 선물처럼 준 그 애의 시와 글을 제외하고 나는 김동규와 무엇 하나 연결된 것이 없었다. 엄청난 패배감에 수치감까지 들었다. 이성혜 교수님을 이길 무기가 내겐 하나도 없다.

시차로 생긴 피곤함이 뒤늦게 몰려왔다. 택시를 잡아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가려다, 김동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저 유골함을 고작 나무한테 묻겠다는 거지. 김동규에게 나무가 어떤 의미인지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김동규의 일기들을 공개하지 않아 김동규가 나를 새로 표현하고 자길 새에게 구애하는 나무라고 써 놓은 이야기는 우주에서 오로지 나 혼자만 아는 거였다.

사실 김동규가 죽었을 때 자길 땅에 묶인 나무라고 하던 김동규가 죽어서는 훨훨 날 수 있도록 바다에 뿌릴 예정이었다. 김동규 아줌마 또한 내 생각을 들으며 그러자 했다. 반대한 건 이성혜 교수님 혼자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이용해 먹을 생각인 건지 소름이 돋기보단 그 집요함에 혀가 내둘러졌다.

“진짜…… 오랜만이다, 동규야. 난 잘 지내. 매일매일이 어제보다 괜찮은 오늘이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이 괜찮을 거고.”

이 이름을 이렇게 애틋하게 불러보는 것도 6년 만이다.

“만 부만 팔아도 스타 시인이라 그러더니 기특하게 200만 부를 넘겼더라.”

100만 부와 150만 부, 200만 부 기념으로 나온 한정판 표지의 <탈리>가 보기 좋게 세워져 있다.

“사실 나 평생 여기 올 생각 없었어. 끝까지…… 너만 행복했잖아. 그런데 내가 여기까지 오면 이게 너만 좋을 일이지.”

한국에 오기 싫었던 건 미운 것도 화가 나는 것도 있었고 김동규 하나 때문에 중심을 잃을게 겁이 난 것도 있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시간이 흘러 많이 괜찮아졌어도 우린 너무 일찍 남들이 한평생 겪을 감정들을 소비한 탓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그런데 그 기사 보고 이렇게 쉽게…… 예정도 없이 오게 되다니……. 막상 와보니까 별거 아닌데 지금까지 왜 그렇게 아등바등 한국 안 가겠다고 뺐는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김동규의 진심을 알게 되고 처음으로 미안하다 울던 김동규에게 너무 늦었다고 못을 박았는데 어쩌면 나도 늦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운명 같은 거 믿지도 않고…… 일어난 일은 시간을 몇 번씩 되돌리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진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어. 그게 뭐냐면…….”

내 화를 풀기 위해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김동규 데리고 억지로 취하게 만들었다. 미안하다고 우는 김동규에게 했던 말들이 떠오르고 그런 김동규와 지샌 밤들이 스쳐 지나간다.

김동규는 거센 파도와 같아서 내가 모래성을 아무리 열심히 쌓아봤자 그저 나를 보겠단 이유로 해변을 다 쓸어버리곤 했다. 내가 예쁘게 만든 모래성도 그걸 만들기 위한 노력도 김동규가 밀려왔다 사라지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나는 다시 허탈한 기분으로 모래를 모으고 휩쓸리고 또 모으고 또 휩쓸리고. 그걸 반복하면서도 계속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어떻게든 모래를 모았다. 그러기 바빴다.

“내가 만약에…… 딱 한 번만 눈 감고 너한테 좋아한다고 얘기했다면, 결국은 네가 죽는 건 변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뭔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까 한다는 거야.”

나는 마지막 기회도 날린 멍청이었다. 수십 번, 수천 번도 더 김동규는 내게 사랑한다고 해줬지만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 끝까지 그 짧은 한 마디를 해주지 못했다. 김동규는 너무 서툴러 뜨겁기만 했고 그걸 식혀주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자존심 상하는 거…… 하나 또 있는데.”

울고 있는 탓에 목소리가 이상했다.

“이번엔 네가…… 너무 나빴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전부 다 나빴어. 네 잘못이야. 벌 받은 거야. 죽음이 용서의 이유가 될 수는 없어.”

또한 김동규는 그림자이기도 했다. 떼어낼 수도 없고 평생 나만 따라다니는 그림자. 하지만 그림자는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작아지는 존재이기도 했으므로 반짝이는 추억들과 햇살 같은 나날들을 이길 수가 없다. 김동규가 없어도 나는 계속 하루하루를 살아갈 테고 텅 빈 심장은 지금보다 더 익숙해져 김동규가 쥐고 흔들었던 모든 것이 차차 제자리로 돌아갈 거였다.

어쩌다 김동규는 내게서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건지. 밉기도 밉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는 않다. 좋은 것도 아닌 것도 다 김동규의 몫으로만 남겨두고 나는 내일의 아침 해를 꿈꾸며 잠드는 밤이 좀 더 편안해질 언젠가의 미래가 빨리 오길 기다릴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 또 한 번만 만나면 안 될까. 네가 다시 살아……나든 아니면 다음…… 다음 생에서. 이번에는 모든 게 다 안 맞았어.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동규야…….”

만약 신이 있다면 다음 생을 달라고 빌고 싶다. 아니, 사실 이미 열심히 비는 중이었다.

나 따라 한다고, 내가 좋은 건 자기도 다 좋고 내가 싫은 건 다 싫다는 애라 김동규는 내가 싫어하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믿지 않았는데 일기에 딱 한 번 다음 생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다음 생엔 자기랑 내가 엄마와 자식으로 만났으면 좋겠다는, 내가 자기 몸속에 수정되고 잉태되는 순간부터 자기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우주보다 큰 사랑을 주고 싶다며 담담하게 적어간 문장들은 내가 죽더라도 영원히 잊지 못할 글이었다.

“……또 만나. 다음엔 우리 둘 다 진짜로 모두 잊어버리고 만나자. 네 말대로 엄마랑 아들이어도 좋아. 나 우리 엄마한테 엄청 착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인 거 알지. 꼭 사람이 아니어도 돼. 네가 나무가 되고 내가 새가 된다면 내가 너한테 둥지를 틀면 되니까, 하늘을 신나게 날더라도 잊지 않고 네 품으로, 아…… 동규야…….”

죽은 뒤에 김동규를 만날 수만 있다면 김동규가 사무치게 그립던 어느 새벽에 망설임 없이 그를 만나러 갔을지도 모른다.

“보고 싶어…….”

나와는 다르게 스물셋을 맞이하지 못하고 영원히 스물두 살일 그 애의 이름을, 사랑과 그리움과 내 모든 것을 담아 부르고 또 불렀다.

서하림 외전 그 애 fin.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