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황홀경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치과에 가는 일이다. 모든 병원이 그렇겠지만 유난히 치과는 더 무섭고 아픈 것 같다. 소리부터가 소름 돋게 하기도 하고. 그래서 혹시 충치라도 생길까 봐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까지 찾아온 치과협회에서 알려준 바른 양치법으로 열심히 이를 닦아왔다.
치과가 아니어도 병원이란 곳 자체가 내겐 그다지 좋은 이미지의 공간은 아니다. 늘 아프고 상처가 많은 곳. 치료를 해주기도 하고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인류의 지식으로는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건 아니라 내겐 되도록 멀리하고 싶고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내 시에서도 병원은 늘 부정적인 요소로 등장했다.
그런 나완 다르게 서하림은 병원을 겁내지도 않고 척척 잘만 갔다. 어릴 때 그렇게 병원에서 살았으면서도.
서하림은 사랑니 때문에 통증이 오기 무섭게 참지 않고 치과를 갔고 바로 발치 날짜를 잡았다. 발치 후 땡땡 부을 하림이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다 냉장고를 꽉꽉 채우다가 문득 소름이 돋았다. 나는 작년에 발치했는데, 괜히 버티고 있다가 썩어버려 두 배로 고생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턱이 아파 오는 것 같아 머리를 좌우로 털어 기억을 날렸다.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뭔데.”
“사랑니 뽑으면…… 그거 나 주라.”
“불법일걸.”
“아 그래…….”
냉장고 문을 닫고 아쉬운 마음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아직도 냉장고를 잡고 있는 내 손등을 하얀 손이 불쑥 나타나 살며시 문질렀다. 곱고 예쁜 손가락부터 반쯤 가려진 손과 팔을 따라 시선을 느리게 옮겼다. 자기 몸보다 훨씬 큰 내 셔츠 하나만 달랑 입은 서하림이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작은 유리병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 이빨 뽑는데 너무 아파서 울었어.’
‘그랬어? 의사 선생님은 여자였어, 남자였어?’
‘여자. 왜?’
‘나이는?’
‘좀 젊었던 거 같은데. 왜?’
매끈한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어 말랑하고 여린 살을 주물렀다.
‘의사 선생님이 네 우는 얼굴 보고 큰일 났었겠다 싶어서.’
‘아 뭐야. 동규야, 아으, 간지러워.’
서하림은 어떻게 사랑니도 이렇게 예쁘게 생겨선 쏙 뽑힐 수 있는 건지 신에게 묻고 싶을 정도로, 작은 유리병에 담긴 이빨은 작고 귀엽고 예뻤다.
우선 이빨의 본을 떠서 잘 부서지지 않게 새로 만들고 이빨을 세공해 목걸이나 반지나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봐야겠다.
“야 김동규, 나 아이스크림 하나만. 바닐라 맛으로. 먹고 나가게.”
“……아, 응. 큰 거로?”
“아니, 작은 거.”
하림이가 소파에 그냥 두고 간 빈 아이스크림 컵을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누워서 한참 서하림의 사랑니를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빨리 흘렀다. 고작 이빨 하나 가지고도 이렇게 행복한 걸 보니 앞으로는 베개에 붙은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 같은 것들도 모으면 좋을 것 같단 생각도 해보았다.
인간이 포유류 동물인 게 이럴 때면 참 아쉽다. 우리도 성장할 때마다 탈피를 하는 동물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나는 하림이가 벗어낸 표피를 하나도 빠짐없이 소장하고 관리도 잘 했을 텐데. 사진을 찍어 과거의 모습을 남기듯 하림이의 일부였던 그 모든 것은 사랑스러웠을 거다.
“…….”
시간을 확인하고자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니 보이는 건 아빠에게 온 문자였다. 하여간 내 인생에 도움이라곤 되지 않는 새끼다. 내용은 또 돈을 보내달라는 구구절절한 말이었는데 어쨌든 돈 보내달란 얘기라 읽지 않고 삭제했다. 1,000,000이란 숫자를 적었다가 지우고 절반인 500,000을 썼다. 돈을 보내고 요즘 너무 자주 돈을 뜯어가시는 거 아니냐는 타박의 문자도 함께 보냈다. 고맙다는 말로 시작하는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고, 오자마자 삭제했다.
선심에 정기적으로 보내 주는 돈보다 이런 식으로 보내주는 돈이 많아지니 이제 슬슬 밑 빠진 독에 쏟아붓는 돈이 아쉬워졌다.
한집에 살고 있지만 나는 나대로 바쁘고 서하림은 기말고사 공부하느라 바쁘다 보니 내 시간도 상대방의 시간도 아까울 땐 전화를 건다. 바로 지금처럼.
나는 휴대폰 액정에 서하림 이름 세 글자가 뜨자마자 방문을 박차고 나와 서하림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와도 된단 소리가 작게 들렸다.
“왜?”
“별건 아니고 그냥 입이 조금 심심해서.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시 쓴 거 정리?”
“헐 미안. 그런 줄 알았으면 전화 말고 메시지 보낼걸.”
시는 무슨. 두부 만들고 크리스마스 계획 짜기 바빴다. 서하림에게 전화 오기 전에 32번째 계획이 완성됐다. 겨우 삼 일만에 이렇게 불어나 안 그래도 더 늘기 전에 서하림에게 중간 검사를 받아 볼 생각이 있었다. 간식 먹으면서 물어보면 될 거 같았다.
“괜찮아.”
서하림이 눈가를 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서하림이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소파 안쪽으로 꾸물거리며 붙는 걸 보니 나보고 앉으라는 것 같아 조금 생긴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마저 어깨부터 허리까지 마사지를 했다.
“음, 마시는 거로 아니면 가볍게 뭐 먹을 거로?”
“조금 있으면 저녁 먹을 거니까 마시는 게 좋겠어.”
“따뜻한 거 아니면 시원한 거?”
“어…… 정신 좀 차리게 시원한 거.”
“너 보고 있으면 공대 안 가길 잘한 거 같아.”
“지금 놀리냐? 죽고 싶지.”
“응.”
서하림 손에 죽을 수 있으면 좋은 일이라 진심이었지만 서하림은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벌떡 일어나 가볍게 주먹질을 하며 “죽어라 죽어” 하고 약간 화를 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지만 입은 웃고 있어 주먹질이 아프진 않았다.
“누군 조옿겠다. 시험공부 하나도 안 해도 이름만 써서 내면 된다면서. 누군 공부하다 죽겠는데.”
“누가 그래?”
“서하늘이.”
“걔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루머를 퍼뜨리고 다녀?”
“나도 너 공부 하는 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상당히 억울한데. 루머 해명하기 전에 골라봐. 오미자차, 보리차, 녹차, 홍차, 식혜랑 딸기에이드, 자몽에이드, 레몬에이드도 있고 차도 다른 거 많아. 저번에 너 선물 받은 것 중에 꽃차들도 있더라.”
“오미자! 달콤새콤한 거 먹고 싶어.”
“그래 그럼. 탄산수 넣어줘?”
“아니.”
아직도 쥐고 있는 주먹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춘 다음 주방에 가 오미자 진액에 생수를 섞어 가져왔다. 얼음도 몇 개 띄워 한 입만 마셔도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았다.
전남 어디 종갓집 큰 어른이 서하림 아줌마 덕분에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면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만들어 보내준 거였는데 어디서도 이런 맛있는 오미자 진액은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서하림에게 보내준 건 아니고 서하림 본가로 세 병이 간 건데 서하림 아줌마가 아주머니 통해 보내서 한 병을 전달받았다. 오미자 진액 말고도 그 종갓집이 무슨 장인인지 명인인지 그래서 그 집에서 쓴다는 귀한 식재료들도 간간이 받았고 서하림이 좋아하는 술도 받았다.
서하림은 솔, 잣, 메밀, 단호박, 밤 등등 여러 가지로 만든 전통주를 몇 번 먹어보더니 양주 먹는 양이 현저하게 줄었다. 워낙에 한식을 좋아하는데 전통주들이 한식에 잘 어울리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 서하림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멋진 선비였을 거다.
“아 진짜 맛있다. 이거 유통기한 두 달이랬지.”
“응. 방부제 안 썼으니깐.”
“그냥 오미자 따서 만드는 걸 텐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오지? 진액이라는 게 열매 쭉 짠 거일 거 아냐. 볶거나 튀기거나 별다르게 조리하는 것도 아니고.”
“명인이시라니까 오미자도 그냥 오미자 말고 엄청 좋은 오미자 쓰지 않을까? 진액 만드는 것도 기계 쓰는 게 아니라 손수 면포에 한약 짜듯 할 수도 있어.”
“그렇겠지?”
“응. 한 잔 더 마실래?”
“이번엔 얼음 넣지 말고 그냥 냉수로만. 아 그냥 계속 쉬다가 저녁 먹어야겠다. 다시 책상에 앉기 싫어.”
빈 컵에 다시 오미자차를 채워 가지고 왔을 땐 서하림이 좋아하는 예능을 보고 있었다. 서하림과 나란히 앉아 오미자차를 홀짝이면서 나는 언제쯤 크리스마스 데이트 코스를 얘기하면 좋을지 타이밍을 쟀다.
“오늘 저녁 뭐 먹어?”
“돼지 양념갈비랑 도토리묵이랑 내가 만든 두부. 아주머니가 파김치 갖다 주셨어. 배추 동치미랑.”
“두부 만들었어? 언제?”
“아까. 너 집에 오기 직전에 완성했어.”
“아, 아깝다. 집에 빨리 올걸. 막 만든 두부 맛있는데.”
순한 음식 좋아하는 서하림은 두부를 무척 좋아해서 나는 집에서 직접 두부를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유도 그렇다. 시험 기간이면 아침 먹을 시간에 자기 바쁜 서하림에게 땅콩, 캐슈넛, 아몬드에 백태나 검은콩을 넣어 만든 두유를 먹인다. 아니면 소이 라테나 견과류 라테 만들어주기도 하고.
“주말에 또 만들게.”
“응.”
서하림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나는 아예 몸을 서하림 쪽으로 돌린 채 신나게 떠들었다. 뭐라고 얘기가 더 이어질 줄 알았는데 서하림이 말이 없어 머쓱해졌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그걸 하지 못해서.
입술만 씰룩이다 나도 바로 앉았다. 한참 보다 중간광고가 시작됐을 때 서하림이 고갤 돌려 날 바라보았다.
“할 말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해. 두부 망쳤어?”
“아니.”
“그럼? 아, 루머 해명하려고? 장난이야. 그거 안 믿어. 이름만 썼는데 점수 받으면 교수고 너고 퇴학감이지.”
“공부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야. 그냥 F만 안 받게 학사경고 없이 졸업은 할 수 있게끔…….”
“…….”
“근데 진짜 공부 안 하는 것도 있는데 못 하는 거기도 해. 언어가 되게 어려운 세계더라고. 문법이랑 국어사 제일 싫어. 그리고 고전들도 다 싫어. 세종대왕 제일 싫고 각종 문학 관련 수업들도 다 싫어. 문학 작품들 교과서에서 만나면 아무리 재밌는 거라도 재미없잖아.”
“그 정도야?”
“네가 대단하고 멋있는 거야. 배우는 온갖 게 다 재밌다며.”
“적성에 맞으니까 그렇지. 아무튼. 뭐 문제 있어?”
“아…….”
광고가 끝났는데도 서하림은 내 눈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발가벗겨진 것만 같아 시선을 내렸다. 32가지 중 몇 개를 얘기해야 좋을지 어떤 걸 말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10분 단위로 짠 계획을 막상 말하려니까 너무 오버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데…….”
“대?”
데이트 말인데, 라는 문장의 고작 한 글자를 얘기한 것만으로도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입이 딱 다물어졌다. 부끄럽다. 얼굴 뜨거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을 크게 쉬었다. 그냥 무난하게 얘기하는 게 제일 좋겠지.
“뭐야, 어디 아파? 왜 그래?”
“아니, 아니야. 잠깐 생각 좀.”
“아프면 말해. 저녁 하지 말고 그냥 뭐 시켜먹자.”
“그냥…… 아니, 어, 음, 그러니까.”
바보처럼 말을 한참 더듬는데도 서하림은 인내심 있게 날 기다려 주었다. 갈 곳을 잃은 내 눈동자가 바닥을 굴러다니며 도망을 다녀도 다정한 시선이 느껴졌다. 용기를 내어 그 시선에 응했다.
“크리스마스 말인데.”
“응.”
“점심은 집에서 영화나 보면서 너 먹고 싶은 거 얘기해 주면 내가 요리해서 그거 먹고 저녁은 밖에서 먹을까 하는데…….”
“응.”
“뭐 먹고 싶어?”
“갑자기 얘기하려니까 생각이 안 나는데.”
“지금 바로 얘기 안 해도 돼.”
“음 아냐. 이런 건 미리미리 얘기해야 준비하는 입장에서 편하지.”
저녁엔 수많은 레스토랑이 선택지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점심엔 간단하게 랍스터나 대게로 해산물 요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꼭 내가 생각해 둔 게 아니어도 서하림이 먹고 싶단 건 뭐든 만들어줄 수 있었다.
“아무거나 얘기해도 돼?”
“응. 다 돼. 어디 오지의 전통 음식만 아니면.”
“음…… 크리스마스니까 음…….”
“…….”
“칠면조?”
“칠면조?”
“통으로 구운 거. 낮부터 만들기는 좀 부담스러운가?”
“아니 전혀. 눈 감고도 해.”
내 말에 서하림이 작게 웃었다. 나도 그런 서하림을 따라 살짝 웃었다. 서하림은 뭔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뗐다.
“저녁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돼?”
“응. 상관없어.”
“그럼 이 편만 다 보고 예약해야겠다.”
“오늘? 다음 주가 크리스마슨데 예약 다 차지 않았을까?”
“할아버지 이름 대면 자리 내줘.”
“어떤 곳이길래……?”
“정명원이라고 한정식집. 할아버지 단골집 중 하나야. 깔끔하고 맛있어서 나도 좋아해. 몇 년 전부터는 비건 한식도 시작했는데 그것도 맛있다? 저녁은 내가 살 테니까 점심 맛있게 해줘.”
서하림이 좋아하는 곳이어도 가격대가 좀 있을 텐데 할아버지까지 단골이라니 얼마나 고급 진 곳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TV를 마저 보던 하림이가 갑자기 휴대폰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검색했다. 예능 프로그램이 거의 다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서하림이 고개를 들었다.
“점심 먹고 드라이브는 내가 방금 알아봤는데 서울 근처에 백운호수라고 우리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야. 생태 탐방로도 있대.”
“그래 좋아. 추울 거 같으니까 꽁꽁 싸매고 가야겠다. 보온 통에 커피랑 차도 담아 가자.”
“좋지.”
“핫팩도 챙기고.”
“그럼 그럼.”
“너무 추우면 생태 탐방로는 포기하고 차에만 있자.”
“그래. 그날 눈 오면 좋겠다.”
“눈 맞으면서 걷게? 그것도 잠깐 맞으면 좋지 오래 맞으면 옷 다 젖고 별로야.”
“별로라니. 예쁘잖아. 운치 있고.”
“맞아. 나도 좋아.”
내 말에 서하림이 웃었다. 나도 하림이를 따라 웃으며 물었다.
“왜. 별말 안 했는데.”
“너도 참 어지간히 밸도 없다 싶어서.”
우리나라에서 흔한 식재료가 아닌 칠면조를 그것도 통으로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문제인데 이모님이나 아주머님에게 얘기해 두면 금방 구할 수 있을 거 같다. 서하림이 TV 보는 동안 나는 칠면조 요리를 백방으로 검색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맛이 있는 고기는 아닌 것 같고 요리하기도 굉장히 까다로운 것 같아 연습을 해보는 게 좋을 듯했다.
아주머니께 문자를 했더니 바로 다음 날 6kg짜리 칠면조 네 마리를 받았다. 냉동이라 냉장 해동하는 데에만 2~3일이라 찬물로 해동시켰다. 게다가 닭보다 커도 너무 커서 처음에 오븐에 구웠을 땐 존나 망했다. 그래서 두 번째 칠면조는 스팀 오븐과 일반 오븐을 함께 사용했더니 질기지도 뻑뻑하지도 않았다. 마지막 연습으로 세 번째 칠면조는 양념을 계속 발라주며 구웠는데 초반에 스팀 오븐으로 구워서 그런가 이것도 괜찮았다.
다만 양고기도 그랬듯 칠면조 역시 아무리 맛있게 만들어봤자 서하림이 그렇게 좋아할 것 같진 않아 원래 하려던 해산물 요리도 같이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브 날이 되자 랍스터와 전복 같은 중요 해산물들은 아주머니께 저녁에 맞춰 보내달라고 했고 그 외에 자잘한 채소들은 내가 직접 보고 사는 게 좋아 아침부터 마트로 나왔다. 서하림은 장 볼 때 되도록 차를 끌고 다니라고 했지만 부담스러운 로고가 박힌 차 키는 서하림 데리러 갈 때가 아니면 들고 다니기가 불편했다. 살 게 많은 날이면 서하림 차 끌고 가는데 오늘은 그런 것도 아니었고 걸어 다니면 운동도 되니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뉴스에선 연일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 거라며 낭만적인 소식을 전해주기 바빴다. 길거리에도 24일과 25일에 눈이 오면 다양한 이벤트를 한다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5년 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했다. 하늘은 청명했고 바람도 좋았다. 구름도 확실히 지난주보다는 커다란 게 눈을 한가득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림이가 바랐던 눈이 정말로 오려나 보다. 하림이가 눈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으니 산책하기에 좋을 정도로만 왔으면. 바람도 불지 않아 눈송이들이 그 애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그리고 콧잔등과 속눈썹에 살포시 앉을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은 질투가 나겠지만 하얀 눈과 서하림이 잘 어울릴 것을 안다. 눈과 눈을 맞은 서하림을 시로 옮겨 담을 나 역시.
아무도 밟지 않은 곳에 서하림의 하얀 발자국만이 태초의 흔적처럼 새겨지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그 애가 남긴 발자국 옆에 내 것을 남기며 걷고 싶다. 겨울 호수 옆에 우리의 발자국만이 길게 이어지면 태양은 점처럼 작게 난 하얀 자국들을 하나의 신호처럼 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하림과 함께 낭만적인 하루를 보내는 내 설레는 마음이 표현되길 바란다. 그 애를 만난 첫 순간부터 행복했던 내 인생을, 영원할 내 사랑까지 표현되길 바란다. 태양도 수백억 년 뒤엔 소멸할 별이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가장 영원에 가까운 존재일 테고 태양과 함께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내 사랑을 알아주었으면 하니까.
눈이고 비고 귀찮다고만 생각했는데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서하림처럼 눈이 간절해졌다. 시간도 빨리 흘러 크리스마스가 됐으면 좋겠고.
육교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숨을 내쉬자 하얗게 부서지는 입김 너머엔 꼴 보기 싫은 면상이 보여 두 눈을 비볐다. 눈이 안 좋으니까 비슷한 사람을 잘못 본 것이길 바라며 안경도 한 번 닦았다.
“오, 오랜만이다.”
“얼굴만 안 봤지 연락을 너무 열심히 주셔서 오랜만이란 느낌이 안 드는데.”
“하하, 그게 좀 급했던 거라.”
그놈의 돈이 뭐라고. 평생 나와 엄마를 괴롭히고 무섭게 굴던 사람이 고작 2년 만에 내게 이렇게 비굴해진다는 게 참.
“그럼 지금은. 나 돈 없어.”
“그렇, 그렇겠지? 아직 학생이니까…… 그런데 동규야.”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소름 돋았다. 어차피 또 돈 달라는 소리나 할 것 같아 무시하고 발을 뗐다. 아빠가 내 팔을 거칠게 붙잡으며 따라 걸었다.
“지금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줘야겠다.”
“어디. 나 바빠.”
“먼 곳은 아니고 인천에, 누가 돌아가셨어.”
감흥 없는 내 얼굴에 아빠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존나 귀찮게 됐다. 계속 따라오거나 이렇게 막거나 바짓가랑이 붙잡고 안 놔줄 것 같아 차라리 빨리 서로 할 말 하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누구.”
“있어. 아빠 사촌 형인데 오랜 투병 끝에,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고 힘들 때 도와준 형이라 아들이랑 꼭 같이 그 형 장례식장에 가고 싶어서 이렇게…….”
“그럼 여기서 기다려. 옷 갈아입고 오게.”
“아니! 지금 당장 가야 된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시간이 없어.”
“친한 형이라면서 죽은 걸 이제 알았어?”
“아무튼 급한 일이니까 빨리, 자. 아부지 따라와라. 어?”
장례식장에 가자는 슬픈 말을 저렇게 험악한 얼굴로 할 일인가. 돈 이야긴 아니라 좀 신선하긴 한데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따라나설 바보는 아니었다. 아빠 역시 내가 이상함을 느끼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선 부탁조의 말이 점점 거칠어졌다. 대체 이 인간이 다짜고짜 찾아와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괜히 자극하기 싫어 계속 가만히 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설은 아니지만 뜬금없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어쩐지 계속 즐거운 일만 있다 했다.
이 인간은 도대체 언제 뒤지는 거지? 예상도 못 하고 갑작스럽게 당하는 교통사고처럼 평온하고 행복한 내 일상을 매번 이렇게 부수러 오는 걸 참는 것도 이젠 한계였다. 돈이나 매달 받아가며 얌전히 살고 있으란 약속도 아빠 쪽에서 어긴 지 오래였고 그럼 나도 더 이상 봐줄 게 없지 않나. 어디서 봤는데 폭행죄에서 제일 중요한 건 선빵이라 그랬다. 주변을 살펴보니 육교 아래 마주 보고 선 가로등 두 개 다 CCTV가 달려 있다. 육교도 촬영 범위인지 꽤 높은 곳에 달려 있었다.
“아빠. 그냥 돈 달라고 하면 될 걸 왜 귀찮게 거짓말을 치고 인천까지 데려가려고 해?”
“도, 돈은 무슨!”
“나 바빠. 돈 보내줄 테니까 가. 지금 바로 보낸다. 이번이 큰돈 보내주는 거 진짜 마지막이야. 앞으로 또 이런 식이면 매달 보내주는 것도 없어. 알겠어?”
아빠에게 천오백을 이체하고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빠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듯 씩씩거렸다. 나는 다시 발을 떼었으나 아빠에게 바로 붙잡히고 말았다.
“……동규 너. 글 쓰는 거 뭐 됐다고 하던데 고작 이게 다냐.”
“고작? 지금 말 곱게 하니까 못 알아들어? 아 됐어. 오백 더 보낼 테니까 진짜로 꺼져. 앞으로 매달 보내는 것도 안 할 거고 이런 식으로 찾아와도 안 줘. 또 찾아오면 공갈협박죄로 신고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신경질적으로 돈을 보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빠는 그런 나를 가로막으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되지도 않는 호소를 했다.
“마, 진짜 마지막이다 동규야. 인천에, 아니 이 근처 은행 가서 가지고 있는 거 다 주면 진짜 이제는 더 이상 조르지 않을게, 응? 네 엄마가 준 돈보다 네가 가진 돈이 훨씬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좆도 없는 집에서 대학교 하나 갔다고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턱턱 주고 매달 용돈도, 어? 제발 피붙이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더 들어주기가 싫어 발로 아빠를 차버렸다. 바닥에 엎어진 아빠가 욕을 하며 자꾸 내 앞을 막아섰지만 아빠는 더 이상 내게 힘으로 이길 수 없을 만큼 초라해져 있었다. 반대편 계단까지 걸어가는 길이 존나 길었다.
“있으면 더 내놔 이 호로 새끼야! 세상에 빛 보게 해준 게 누구 덕분인데! 애새끼일 때부터 먹고 입히고 어? 굶어 죽지 않게 한 것만 해도 장기를 다 팔아치워도 모자라 씨팔!”
이젠 같지도 않은 주먹질이 우스웠다.
“뭔 소리야. 누구 덕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엄마가 날 키운 공로를 잊은 것 같아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엄마 덕이고 엄마가 다 했지. 가정 폭력으로 신고 안 하는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알고 살아야지 뭘 잘했다고 도박에 미쳐 돌아선 아들 돈을 뜯어먹고 지랄이야. 됐고, 그냥 112 신고할 테니까 경찰이랑 얘기해.”
휴대폰을 꺼내 숫자 세 개를 누르는 걸 본 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꽤 힘을 실어 부딪혀 오는 몸을 받아냈더니 휘청거렸다. 아프기도 꽤 아팠다. 중심을 잃은 나를 본 아빠가 바로 팔을 휘둘러 주먹을 날렸다. 가까스로 피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아빠가 팔뚝을 뒤트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아, 씨발! 뭐 하자는 거야!”
“인천, 인천 가야 돼 씨발! 죽지만 않으면 되겠지!”
“뭐라는 거야 도대체?”
사람 둘이 육교로 올라와 몸싸움을 하는 우릴 발견하고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내 휴대폰도 아직 112와의 전화가 끊기지 않은 상태였고 다른 한 명은 전화 대신 동영상 촬영을 했다. 목격자도 증거도 다 완벽하다. 이제 아빠를 눌러서 제압하면 끝이었다.
“김 씨! 빨리해! 아래에 차 대놨어!”
육교 아래에서 한 남자가 소릴 지른다. 차? 인천?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인 듯한데, 빨리 아빠를 눕혀 놓고 근처 경찰서로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등 쪽을 노릴 생각으로 몇 걸음 떨어졌다. 그러자 아빠가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고 내게 달려들더니 허벅지를 안아 들었다. 몸이 뒤로 넘어가며 공중에 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고 실제로 몇 초의 시간 공중에 떠 있었고 그 짧은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늘어져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모양을 감상할 수도 있었고 내 뒤로는 수많은 육교의 계단이 있다는 것과 이대로 머리가 깨져 병원에 실려 가는 것까지 생각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이렇게 어이없이? 아무리 죽음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지만 아빠 새끼 손에서 이렇게 허망하게?
뒤통수에 차갑고 날카로운 계단이 닿기 직전 내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하얀 얼굴이었다. 다정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봐주던 그 얼굴과 내 이름을 불러주던 상냥한 목소리, 온 세상을 품고도 남을 안락하던 품까지도.
온몸이 찢어진 것 같은 고통에 몸을 뒤척였지만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자는 게
정신은 분명 내 것일 텐데 누가 스위치로 켜고 끄는 것처럼 정신도 누가 조종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기분 탓인가.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는 있나 보다.
하림이랑, 하림이가
지금 누군가 내 이름
죽어서도 청각이 제일 오래도록 살아 있다고 했던가. 그건 반대로 청각이 제일 먼저 살아나는 감각이라는 뜻인가 보다.
물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던 정신이 끌어 올려지고 제일 먼저 들은 건 가습기의 소리였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작게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더니 그게 가습기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생각과 정신이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꽤 오래 유지 된다는 것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픈 건 둘째 치고 최대한 생각을 천천히 했다. 뇌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그래서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손가락을 움직일 생각이나 눈꺼풀을 들어 올릴 노력은 하지 않았다. 얼마 만에 제대로 든 정신인데 이대로 날려 보낼 순 없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숫자가 2천을 넘어갈 즈음 자연스럽게 다른 감각들이 돌아오면서 눈이 떠졌다. 시야에 담긴 것은 예상했던 대로 하얀 병원 천장. 움직이지 않는 목 대신 눈동자를 굴리자 간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휴대폰을 보고 있다. 그가 나를 어서 발견해 주길 바라며 숫자를 마저 셌다.
“세상에, 선생님!”
또 천을 더 셌을 때 간병인이 눈을 뜬 나를 발견했다. 의료진이 들어와 시끄러웠고 내게 온갖 것을 물어왔으나 대답할 수가 없었다.
“김동규 씨! 예는 눈 한 번 깜빡하고 아니오는 두 번 깜빡하는 겁니다, 알겠어요?”
한 번도 두 번도 깜빡하지 않고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 보고 싶은 얼굴을 찾았다. 내가 응답을 하지 않은 채 모두를 훑고 무언가를 찾는 듯 굴자 당황한 의사가 자꾸 내 상태를 물으며 눈을 깜빡이라고 재촉했다.
누가 서하림 좀 불러주세요. 하림이가 너무 보고 싶어.
필사적으로 외쳐봤자 들리지 못할 얘기였지만 나는 눈동자가 건조해져 눈물이 고일 때까지 버텼다.
내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눈물을 흘려대자 의사와 간호사가 난리나 허둥지둥거리는 게 보기 싫어 그냥 눈을 감았다. 귀가 다 젖을 정도로 넘친 눈물이 흘러 코까지 엉망이었다. 울음이 멈추지 않으니 내 코에 꽂혀 있는 산소호흡기에 자꾸 물이 차 간호사가 마스크 형태의 산소호흡기로 바꿔주었다.
“지금 깨 있죠? 울지만 말고 제발 눈 떠봐요, 김동규 씨!”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고…… 나는 내가 눈을 뜬 것이 기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을 것이고 그런 거라면 이런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빨리 서하림 불러와. 내 앞에 데려오라고!
아무리 외쳐도 속에서만 울릴 뿐 내 성대도 혀도 입술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서러웠다.
두 번째로 눈을 떴을 때 든 소감은 안도였다. 저번이 마지막이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이번에 정신을 잃더라도 다음번에 눈을 또 뜰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눈을 끔뻑이며 간병인이 날 알아채길 기다렸다 희망을 품게 돼서 그런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의사가 묻는 질문에 눈을 계속 깜빡이며 내 몸 상태를 보고했다. 그러고 나서도 내가 깨어있자 간단한 검사를 마친 의료진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김동규 씨, 관악 경찰서 함대호 형삽니다.”
경찰 수첩을 내게 들이민 남자가 보조 의자 위에 앉았다.
“의사도 얘기했지만 지금은 3월 27일이고 김동규 씨가 수술한 지 세 달이 지났습니다. 듣기 충격적인 이야기는 다 생략할게요. 몸이 많이 안 좋으니까.”
아저씨. 하림이는요.
“김동규 씨 아빠는 지금 가정 폭력, 불법 도박, 사기, 살인미수 기타 등등으로 감옥에 가 있어요. 베트남에 계신 엄마랑도 연락이 닿았는데.”
하림이 왜 없어요? 그렇게 오래 누워 있었다면 하림이가 와줬을 텐데…… 저 깨어났단 소식에 바로 달려오는 중이죠? 아저씨, 저는 아빠 새끼 하나도 안 궁금하고 제 몸 상태도 안 궁금하니까 제발 알려주세요. 많이 걱정했대요? 울진 않았어요?
움직이지 않는 입술과 혀와 목에 온갖 힘을 줬다. 침을 삼킬 수 있는 정도는 됐다. 이야기는 적당히 생략한다고 했으면서 뭔 쓸데없는 말을 계속 늘어놓는 건지, 빨리 꺼져줬으면 좋겠는 형사는 계속 자기 할 말만 했다. 청각을 차단하고 온 신경을 말하기에 집중했다.
-하림이 보고 싶어요.
겨우 벌어진 입술을 움직였다. 목소리는 나오지 못했고 아주 미세하게 입술이 움직일 뿐이었지만 누가 제발 내 말을 알아차려 줬으면 좋겠어서 계속 속삭였다. 입술이 거의 붙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 그런지 형사는 내 필사적인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으나 간병인이 아주 작은 내 움직임을 알아보고 의사를 불렀다.
“말할 수 있겠어요? 천천히, 최대한 정확하게 얘기해 봐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정확하게는 말은 할 수 없으니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내 입 모양으로 알아채는 수밖엔 없을 거였다. 그래서, 의사고 간호사고 간병인이고 형사고 모두가 날 둘러싼 채 내 입만 쳐다보는 지금이 기회였다.
-서하림…… 하림이요. 서하림. 서하림…….
얼마나 움직였을까. 알아들은 사람이 있긴 할까. 우습게도 하림이 이름이 미음으로 끝나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미음 받침 발음을 할 때마다 입술이 닫히니까 잘 하면, 서하림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 미약한 움직임에서 서하림 이름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깰 때마다 달이 바뀌어 있었고 하림이가 보이지 않았다.
눈을 뜨면 내가 하는 일이라곤 눈동자를 굴려 병실을 훑는 거였고 서하림이 없으면 정신을 놓아버렸다. 서하림이 없으면 깨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하림이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거운 눈꺼풀이 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하얀 천장이 뿌옇게 보이고 오른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였을 때, 나는 심장이 터져 죽는 줄로만 알았다.
“…….”
“…….”
온몸의 감각이 빠르게 돌아오며 침샘이 아려왔다. 침을 계속 삼켰다. 칼칼한 목을 침으로 적시면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입술에도 혀에도 힘을 줘 움찔거렸다. 성대는 다친 게 아닌지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의사의 말대로 거의 온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게 문제지.
바로 의사를 부르지 않은 서하림은 나와 눈을 마주친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죽을힘을 다해 굳어있는 입술을, 혀를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림아.
“…….”
-안녕. 보고 싶었어.
저번에 눈 떴을 때가 10월 말이었던가. 그렇다면 거의 1년 만에 보는 셈인데, 오랜만에 본 하림이는 여전히 예쁘고 잘생겼지만 좀 마른 것 같고…….
-밥은 먹었어? 얼굴이 안 좋아 보여.
“…….”
-잠은 푹 잤고? 잘 못 잔 거 같아. 여기서 잔 거야? 불편하진 않았어?
있는 힘 없는 힘 쥐어짜 낸 덕분에 입술은 전보다 좀 더 많이 벌어져 입 모양도 정확해진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서하림은 내 입술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손에 얼굴을 묻은 서하림이 어떤 말을 할지, 나는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서하림이 내게 안경을 씌워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12월 3일이고…….”
눈이 빨개지는 걸 보니 눈물을 참고 있나 보다. 움직일 수 있다면 작은 얼굴을 내 손에 담아 눈가에 입을 맞춰주면서 괜찮다고 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참담했다. 만약 몸이 괜찮아진다면 필리핀에서 살인 청부업자라도 사서 아빠 새낄 죽이든지 해야지.
“의사부터 부를게.”
의사가 물어본 건 전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여기는 우리 학교 병원인지 의사 가운 입은 서하림 아줌마도 왔다 갔다.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2박 3일 정도 머무른다 했고, 지금은 베트남에 가 있는 중이라 영상통화를 했다. 나는 엄마보고 오지 말라고 못 박았지만 엄마가 울면서 다음 주에 보자 그랬다.
서하림은 그 외에도 교수님에게 들은 소식도 전해주었다. 시집 발간은 일단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고. 마침 교수님이 내가 깨어났단 소식에 오는 중이라고.
교수님이 도착했을 때도 나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생했다 말하는 교수님에게 안부 인사를 건넬 시간도 없어 본론만 얘기했다.
-저 만약에 못 깨어나면 제 작품 저작권이랑 판권 같은 것들 다 타인에게 양도하고 싶어요.
“타인? 누구한테. 엄마?”
-아니요. 서하림이요.
“왜…… 아니, 알았다. 지금 바로 서류 가지고 오라 그럴게.”
잘은 몰라도 변호사와 출판사 편집장이란 사람이 카메라로 나를 촬영하며 이것저것을 설명했다. 내 긍정적인 의사는 눈 한 번 깜빡이기, 부정적인 의사는 두 번 깜빡이기였고 계약 서류의 조항을 읽을 때마다 변호사가 내 의사를 물었다. 서하림도 갑작스런 내 제안에 놀란 눈치였지만 어차피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 소원이라 생각했는지 별다른 말없이 서류에 사인을 했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해당 계약서에 명시된 조항들을 모두 들었고 이해했으며 계약하겠냐는 질문에 눈을 한 번 깜빡인 뒤 편집자가 내 손에 빨간 인주를 묻혀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만 쉬라며 교수님, 편집장, 변호사가 모두 나갔다. 간병인은 보이지 않아 이 큰 병실엔 나와 서하림밖엔 없었다. 서하림이 내 옆에 앉아 물티슈로 인주 묻은 손가락을 닦아주었다.
행복하다. 하림이가 날 간병해 주는 걸까.
“누울래? 침대 내려줘?”
-아니.
물티슈를 세 장을 써도 완벽하게 인주가 지워지지 않았다. 서하림이 왜 다 안 닦이냐며 작게 짜증을 냈다. 손가락을 닦다 포기한 건지 서하림은 물티슈를 내려놓고 컵에 물을 담아 내 입을 적셔주었다. 물 마시고 싶어 작게 입을 벌렸더니 기특하게 입안으로 물을 흘려주기도 했다. 한 컵을 다 비우고 또 마시고 싶다고 하자 하림이가 다시 내 턱을 받쳐 잡고 컵을 살짝 기울여 주었는데, 물 먹이느라 가까이 붙어 있으려니 오랜만에 하림이 냄새가 맡아져 기분이 좋았다.
빈 컵을 내려놓은 서하림이 보조 의자에 앉아 또 나를 멀거니 바라만 본다. 벌써 12월……. 일 년간 서하림이 깨어나지 않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안 그래도 하얗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린 걸 보면 걱정 많이 한 것 같은데. 밥은 잘 먹었을까. 안 그래도 입이 짧은 애라 내 걱정에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나 때문에 수척해진 하림이에게 미안하게도, 오랜만에 본 서하림과 그의 냄새에 아랫도리가 뜨거워졌다. 살이 좀 빠진 채 수심에 잠긴 얼굴은 처연미를 돋보이게 했고 원래보다 훨씬 가련해 보였다.
-하림아. 할 말 있어.
하지만……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이다. 약해진 마음은 본능을 이길 수 없고 나는 원래 답도 없이 발정 난 새끼였다.
“뭔데.”
-가까이 와봐.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에 살짝 앉은 서하림이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아주 조금이라도 목소리가 나온다면 하림이보고 귀를 바짝 대달라고 해서 하림이 귀를 빨아 먹고 얘길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하고 싶어.
“…….”
-나…… 섰는데.
입 모양으로만 속삭이는 내 말을 분명 알아들은 서하림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내 가슴팍 주변으로 시선을 떨구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몸도 안 좋은데 잠이나 자.”
내 것은 이미 발기해 하얀 병원 이불이 크게 솟을 정도였지만 서하림은 일부러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내 배를 작게 토닥였다. 개수작 한번 부려본 건데 넘어오지 않는 서하림이 아쉬우면서도 날 생각해 주는 게 고맙고 귀여워 눈을 감았다.
한 번 하림이를 봐서 그런가, 정신을 차리는 간격이 굉장히 짧아졌다. 전에는 눈뜰 때마다 달이 바뀌어 있었는데 지금은 요일만 바뀌어 있다.
며칠에 한 번 꼴로 일어나기도 하고 몇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기도 했는데 하림이가 없으면 기다리지 않고 정신을 놨다.
나 왜 살지. 그때 발기했어도 그냥 입 닥치고 있을걸. 화가 난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하림이가…….
하림이 못 볼 바에는 그냥 깨지 말고 죽었으면 좋겠다. 죽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하림이 보려고 깨는 건데.
-하림아, 하림아…… 미안해.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하림이에게 나는 사과부터 했다. 입이 잘 움직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잘못했어. 너 그런 말 싫어하는 거 아는데, 내가 그날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서하림은 내가 하는 말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하림아, 서하림…….
갑자기 잠이 쏟아진다. 평소랑은 다른 감각이었다. 나는 하림이의 이름을 끊임없이 속삭이며 쏟아지는 잠을 억지로 참아냈다. 숨이 좀 가빠오고 하림이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눈물이 차올랐다.
-하림아 근데, 나 이대로 죽어도 좋은데 너랑, 너랑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아니, 잠깐만 지금 좀 이상해. 하림아, 너무 졸린데 자고 싶지 않아. 안 잘래. 뭐라고 얘기 좀 해봐, 나한테 말 걸어줘. 계속 얘기하면 좀 잠이 달아날 거 같은데…… 하림아, 하림아, 나 네가 너무 좋아. 좋아해……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하림아, 나한테 와줘서 너무 고마워. 힘들 때마다, 슬플 때마다 네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고…… 아, 이상해 잠 왜 이렇게 오는 거지. 사랑해 하림아, 영원히 사랑해…….
“……김동규.”
잠은 생각을 좀먹는 것인지 하림이의 이름과 간단한 문장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하림이의 이름만 속삭였다. 다른 것은 떠오르지가 않았고…….
“오늘…… 네 생일이야.”
-하림아, 하림아. 서하림.
“생일 축하해.”
하림이가 내게 다가왔다. 하림이 냄새가…… 점점 얼굴이 다가오더니…… 촉촉한 입술이 닿았고…….
안 돼. 눈 떠 김동규. 마지막이잖아. 숨 쉬어, 눈 뜨라고!
혀를 쓰지도 입술이 벌어지지도 않는 입술만 닿은 입맞춤이 달콤하고도 조금…….
아…… 진짜 죽는 거구나. 그래도 죽는 순간에 하림이랑 키스할 수 있어서…… 행복한…… 하림이와의 키스는 천국으로 가는 문인가 보다. 아빠에게 처맞거나 찔려 죽는 거 말고…… 이런 죽음이라면 너무 황홀한 거 아닌가…….
하림아…… 다…….
5부 황홀경 fin.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