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Happy ending
졸업생 대표로 선서를 하는 서하림은 고작 한 달 좀 넘게 못 봤다고 제법 어른이 된 티가 났다. 한 1cm 정도 키가 큰 것 같고, 살도 조금 빠졌는지 얼굴이 좀 갸름해져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더 조막만 해졌다.
서하림의 단정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강당을 가득 메운다.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을 되돌아보며 공부에 지쳐 힘들기도 했지만 아낌없는 조언과 가르침을 준 선생님들과, 즐거운 추억을 만들며 함께 길을 걸어간 친구들, 앞에서 꽃길 깔아두고 환영하는 선배들, 뒤에선 응원하는 후배들에게 감사했다는 누가 들어도 벅차오르고 감동적인 내용의 졸업생 인사였다.
학생회장 두고 왜 서하림이 졸업생 대표가 되어 마지막 인사를 읽는 것인지 좋은 일이긴 한데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우리 학교는 원래 졸업식 대표가 꼭 학생회장인 건 아니라고 한다. 전에도 무슨 강돈가 소매치긴가를 잡아 경찰청장의 표창장을 받은 사람이 졸업생 대표가 된 적도 있다고 하고.
서하림이 40일간의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운전면허를 땄다. 서하림 부모님이 대학 붙은 선물이라며 준 것 중 하나였다. 운전면허 학원비 말고도 노트북, 옷, 가방, 신발, 시계 등 솔직히 말해 기죽이는 건가 싶을 정도로 조온나 부담스러운 선물투성이였다.
전에 합격 축하한다고 용돈 받은 것도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어서 이렇게까지 챙겨주시지 않아도 된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져 가길래 하는 수 없이 다 받아들였다. 며칠 뒤 이모님을 통해 운전면허 학원 빼고는 다 돌려드리고 싶다고 말했다가 잔소리가 잔뜩 섞인 혼만 났다. 도대체 내가 어디서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면허나 땄다. 내 돈으로 등록한 학원비가 아니기 때문에 필기시험도 열심히 준비해서 백 점 받고 기능도 만점 도로 주행도 만점을 받았다. 학원에선 만점 괴물이 도대체 몇 년 만에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웃었지만 나는 면허증을 받아 들고도 웃질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다리로 눈동자로 얼마나 긴장을 했었는지 모른다.
또, 서하림이 없는 동안 이모님을 통해 과외 자리도 소개받았다.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성적이 안 오르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렇다고 미술이나 음악을 시키기엔 재능도 없고 돈만 낭비하는 것 같은 빡대갈 학생 몇몇에게 백일장에서 상 받는 법을 가르치는 뭐 그런 과외였다. 나름 예체능 과외라 기본 과외비가 나쁘지 않은 데다 수상하면 상에 따라 인센티브 준다 하고 뭣보다 나는 내신 관리도 어느 정도 해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가르치는 것에 재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선 올해는 세 명만 해보기로 했다. 인당 80만 원에.
거기다 마지막으로 어젯밤 서하림 아줌마에게 결려 온 전화까지.
-동규야, 학교 근처에 하림이 지낼 오피스텔 말인데 동규 너 거기서 하림이랑 같이 살래?
‘같이요?’
-나야 하림이가 집에서 다녔음 좋겠는데 옛날부터 학교 근처에서 살겠다고 노래를 불렀어서. 근데 혼자 지내게 하기엔 영…… 아주머니가 매일 간다고 해도 하림이 혼자 사는 건 아무래도 좀, 걱정이 되네.
곱게 키운 금쪽같은 아들이 원하니까 독립은 시켜주지만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게 해주고 먹고 싶은 것도 제때제때 갖다 바치면서 험한 집안일에 고운 손 흠집 하나 안 나게 해달란 얘기를 극단적으로 축약한 말이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었다.
‘네. 저야 좋죠.’
요즘 내 인생은 전례 없는 순항을 맞는 중이었다.
“어, 마침 잘 만났다. 나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방금 갑자기 잡혔는데 어디냐면.”
인문대랑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과학대 건물 앞에서 서성이다 서하림을 만났다. 학교 근처는 아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수제 맥주 집이라며 상호를 얘기한 서하림은 자기 할 말만 마치고 손을 흔들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까먹기 전 휴대폰 지도에 검색했다. 그렇게 멀진 않은 곳이었다.
대학생이 된 지 벌써 3주. 고등학교랑은 현저히 다른 대학 생활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낯설어하는 나와는 다르게 서하림은 매일매일 즐겁고 바쁘게 지냈다. 입학 전부터 워낙 유명했던 터라 하루가 멀다고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기도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 저녁 술 먹고 다니는 서하림을 데리러 가는 건 내 몫이었다. 택시 타고 집에 가면 된다는 걸 결사반대한 것도 나고. 술 취한 상태로 엄한 택시 탔다가 무슨 일 날 줄 알고 혼자 오게 한단 말인가. 밤이든 새벽이든 술 취한 서하림을 데리러 가는 일은 내겐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아직 면허도 없는 주제에 자기 명의로 된 차가 있는 서하림은 차 키를 내게 일임한 채 언제든 자길 데리러 올 날 믿고 열심히 부어라 마셔라 했다.
진짜 예상외로 서하림은 술 먹는 걸 존나 좋아한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데 그냥 좋아하기만 하는 거면 매일 집에서 속이 많이 썩었을 텐데 마시기는 또 엄청 잘 마셔서 그건 조금 안심이 됐다. 매일 서하림을 데리러 가지만 한 번도 술에 취해 주정은 고사하고 실수하는 것조차 본 적이 없고 오히려 말짱한 정신으로 날 반길 정도였다. 서하늘 말로는 궤짝으로 마셔도 유일하게 살아남는 애라고 하던데 그래 봤자 성인 된 지 이제 겨우 백 일도 안 됐고 하림이랑 같이 마셔 보질 않아 모르겠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건 대학가 술집이라는 게 안주가 다 거기서 거기라 맵고 시고 짜고 단 걸 싫어하는 서하림의 고급 진 입에 들어차지 못한다는 거. 들어보면 안주엔 손도 잘 안 댄다는 것 같다. 그러면 속도 많이 상하고 안 좋을 텐데……. 도대체 알콜이란 무엇이길래 인류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마트에서 장을 봤다. 내 걱정은 자연스럽게 매일 아침 식탁 위로 올라가는 해장국으로 이어졌고 요즘 드는 생각은 이러다가 국이나 찌개류는 다 섭렵할 것 같단 거.
오피스텔 들어온 첫날 썼던 일기가 떠오른다. 거의 뭐 신혼집 생각하며 행복에 겨워 죽던 저번 달의 나는 텅텅 빈 집에서 외롭게 저녁을 먹고 서하림의 데리러 오라는 연락만 기다리며 살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이야 학기 초니까 그런 거지 다음 달쯤 되면 괜찮아질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거 미역국 맛있다.”
얼굴이 부어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서하림이 귀엽다. 맛있다니. 11시 수업인데도 아침 일찍 일어난 보람이 있다. 아니 사실 오후 수업만 있는 날이라도 서하림이 1교시면 나도 서하림 스케줄 맞춰 일어나고 있지만.
국을 휘휘 저으며 하품을 하는 게 많이 피곤해 보여 서하림의 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미역 아니고 김국이야.”
“김?”
“응.”
“근데 왜 안 짜?”
“우리가 먹는 김은 소금을 바른 거고 이건 오리지널 김으로 만든 거라.”
“아.”
“요즘 제철인 생 돌김으로 만든 거라 엄청 맛있을걸. 아주머니가 어제 갖다 주셨어.”
“이름 촌스럽다. 생 돌김.”
“그러게.”
“당분간 아침에 맨날 이거 해줘. 맛있네.”
“응.”
“뭐 네가 해준 것 중에 맛없는 게 없지만.”
마사지가 기분 좋은지 숟가락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온다. 살짝 보니 눈도 감은 채다. 음, 하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세게 할까?”
“아니. 지금이 딱 좋아.”
“……오늘도 저녁에 약속 있어?”
“어, 오늘은 내일 주말이니까 밤새우자더라. 아니 진짜로 술 먹으면서 밤을 새우면 몰라. 다들 두 시간만 지나면 픽픽 쓰러지면서 나보고 작정하고 나오래.”
“응. 끝나면 연락해.”
최대한 교양이라도 서하림이랑 맞춰 시간표를 짜봤는데 딱 하나만 성공한 탓에 학교에서도 서하림을 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 날 때마다 자연대 앞을 기웃거리곤 있지만 늘 만나는 건 아니고.
1교시부터 수업이 있는 서하림이 부지런히 밥을 먹고 바로 학교 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입을 옷도 꺼내 왔다.
“아 오늘 학교 가기 싫어.”
“왜?”
“어제 술 먹은 애들이 말실수를 했는데 걔네랑 같이 수업 들어.”
“무슨 말실수?”
“있어. 걔넨 술기운에 막 말한 거라지만 난 제정신에 들은 거라 기분 존나 구려. 좀 전부터 계속 미안하다고 연락 와.”
휴대폰 액정에 불이 꺼지기 무섭게 또 켜지고 또 켜지던 게 그런 이유가 있었다.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별로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 마사지를 마무리하고 어서 밥 먹으라며 등을 토닥였다. 밥을 다 먹고 나선 양치질하라고 화장실에 들여보냈더니 세월아 네월아 하는 중이다. 하는 수 없이 화장실로 들어가 서하림의 입 구석구석 닦아줬다. 양치 말고 옷 입는 것도 한참 걸렸다. 도대체 어떤 말을 들었길래 이렇게 기분이 상하는 걸까. 어떤 새끼들이 뭔 지랄을 했길래.
굳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양말을 던졌다 잡았다 하는 걸 잡아채 바닥에 앉았다. 예쁜 발에 양말을 신겨주면서 어떻게 하면 서하림이 좋아할까 잠시 생각했다.
“포도 주스 만들어주면 가져갈래?”
“어!”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서하림이 발딱 일어나 앉았다.
“두 개 해줘! 하나 지금 먹게!”
몇 초 전까지 심각하던 얼굴이던 게 무색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웃지 말고 그럴 시간에 빨리 만드시지?”
“응. 잠깐만 기다려.”
소파에 앉아 기다리란 거였는데 서하림은 내 뒤를 졸졸 따라와 포도를 씻고 한 알씩 따 착즙기에 넣는 것까지 내 옆에 찰싹 붙어 지켜봤다. 나는 그런 서하림을 잠시 보다가 보냉 텀블러를 찾기 위해 찬장을 뒤졌다. 분명히 이사 올 때 서하림네 집 주방에서 가지고 왔는데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이사 올 땐 겨울이라 찬 음료를 딱히 만들 일이 없어 대충 아무 데나 넣어둔 탓이었다.
제일 위 칸까지 손을 뻗었다. 무언가가 손에 스치며 넘어졌는데 이게 그건 것 같다. 집어 보니 여름에 쓰는 텀블러가 맞았다. 찬장을 살짝 정리하고 문을 닫는데,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왜 그렇게 놀라. 나도 놀랐네.”
발소리가 나지 않아 계속 착즙기를 보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착즙기에서 내가 있는 곳까지는 못 해도 다섯 걸음.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뭔갈 찾는 내 옆에 붙어 있었을 서하림을 생각하니 너무 귀엽고 심장이 아파왔다.
“자, 잠시만. 이거 좀 씻고.”
뜨거운 물에 텀블러를 빡빡 닦은 뒤 찬물로도 한 번 헹궜다. 시원하게 먹어야 하니까.
유리컵에 얼음을 담고 포도 주스를 따랐다. 서하림은 얼른 달라는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빨대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줘. 없어도 돼.”
“그래도 양치했는데…….”
“잘 먹을게.”
다시 한번 빠르게 주방을 훑어 빨대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서하림이 워낙 저녁을 집에서 먹질 않아 어디다 둔 건지 잊어먹었다. 이따 사둬야지.
아쉬운 대로 텀블러에 남은 주스와 얼음을 담고 새지 않게 꽉 닫았다. 서하림 가방을 어디다 뒀더라.
“가방 내 방에.”
아까 옷 가지고 나오면서 같이 갖고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방바닥에 던져 놓은 가방에 텀블러를 넣고 다시 거실로 나오는 동안 서하림은 귀엽게 나를 잘도 쫓아다녔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
“응. 내가 넣고 하면 이렇게까지 맛없어.”
“설마. 기계는 사람 차별 안 하잖아.”
빈 컵을 받아들고 가방을 매주었다. 주스 먹느라 조금 늦었다면서 다급하게 신발을 신는 서하림의 머리통을 바라보다가 볼을 감싸 쥐고 입을 맞췄다. 서하림의 입안 구석구석 남아 있는 단 한 방울의 포도까지 쭉쭉 빨아 먹고 싶었으나 서하림이 내 손목을 잡아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늦었다니까.”
“포도맛 난다.”
“가야 돼.”
“다네.”
“고마워. 이따 연락할게.”
아침마다 그리고 저녁에도 늘 이렇게 귀엽고 행복하고 달콤한 시간만 있었으면 좋겠다. 잘생기고 인기 많은 사람을 기다리는 건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다.
4월이 다 돼가는데 거짓말 안 치고 개강한 다음 날부터 서하림이 술 먹지 않은 날은 지금까지 5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평일은 그럴 수 있다 치고 양보하겠지만 기숙사에 살거나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사람들이 주말에도 서하림을 불러댔다.
짜증이 나는 건 서하림은 싫고 좋은 게 확실한 애라 진짜 싫으면 나가지도 않을 텐데 술 먹자고 부르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람 같이 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술에 취한 사람이었고, 지금 내 앞엔.
“야야, 서하림! 너 친구 왔어!”
처음으로 술에 취해 다른 사람에게 엉겨 붙어 있는 서하림이 있었다.
“……쟤 내 친구 아니야.”
“뭔 소리야. 술도 잘 먹는 애가 왜 이래?”
“냅둬 귀여운데.”
졸업식이 있던 주말이었는지 그 다음번 주말이었는지 확실하진 않은데 서하늘과 서하림이 가족 모임 갔다 오는 길에 둘이서만 술집을 갔었다. 어른들이 이제 어른 됐다고 술을 한 잔씩 줬다고 하는데 서하늘이 서하림보고 네 주량이 궁금하다며 무턱대고 끌고 간 거였다.
-야 김동규. 너 서하림 술버릇 모르지.
다짜고짜 전화해서 하는 말이 저따위라 존나 짜증 난 건 둘째 치고 서하늘한테 내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는데 전화로 자기가 누군지 밝히지도 않는 게 어이없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술 안 먹어.’
-서하림 걔 진짜 장난 없더라. 소주를 네 병을 먹어도 말짱하더라고?
‘어쩌라고.’
-그 정도면 웬만해선 취하는 모습 다른 사람한테 안 보일 거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너한테 알려주려고. 싫어? 싫음 말고.
개소리하는 거면 그냥 끊을 생각이었으나 하림이 얘기였고 나는 아빠 새끼 때문에 술이라면 치가 떨리는 사람이라 앞으로도 평생 마실 생각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좋다고 말하기는 좀 자존심 상해서.
-일단 말이 존나 재수 없고 싸가지가 없어져. 원래도 할 말 참는 성격은 아닌데 뼈 때리는 말을 그냥 막 하더라고. 비꼬거나 욕하는 건 아니고 듣는 사람이 상처받는 정도?
말을 ‘일단’이라고 시작하는 거 보니 뭐가 더 있는 모양인데.
-그리고 어, 이건 좀…….
답지 않게 뜸을 들인 서하늘에게선 예상외의 말이 들려왔다.
-좀 위험? 한 거까진 아니고 좀 피곤할 거 같은데 엄청 달라붙더라. 손잡겠다 그러고 안아 달라 그러고.
‘뭐라고?’
-내가 징그럽다고 때리니까 손잡아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고 지가 손잡아 주는 걸 영광으로 알라고 그러는데 시발 까딱 했다간 병으로 머리 깰 뻔했다.
‘왜 때렸어?’
-야 지금 그게 중.
‘왜 때렸냐고.’
-왜긴 왜야. 맞을 만한 짓을 했으니까 때렸지.
더 듣고 싶지가 않아 지체 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바로 ㅗㅗㅗ가 가득한 메시지가 왔으나 읽고 씹고 말았다. 눈앞에서 술 잘 마신다는 애가 잔뜩 취한 채로 다른 사람에게 들러붙어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그때 서하늘의 전화를 끊지 말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왜 얘만 이런 거예요?”
서하림 말고도 많은 학생이 취해 있었지만 씨발 그게 알 바냐.
“그게, 얘 취한 거 보겠다고 다들 작정한 거라…… 지금 3찬데요, 근데 말 놔. 나 서하림이랑 같은 과 동기야.”
“하림아, 서하림. 일어나.”
“아 싫어. 귀찮아.”
“바로 앞에 차 댔어.”
“싫다고 했잖아.”
보란 듯이 여자애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걸 보고 있자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여자애도 그런 서하림을 끌어안으며 “어쩌지? 가기 싫다는데?” 하며 웃었다.
지금까지 서하림이 꽐라 될 정도로 마셔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선배가 마시라고 열심히 부어줘도 스스로 적당히 조절하며 마시는 편이라 안심하고 있다가 그야말로 폭탄을 맞았다. 서하림은 옆에 앉은 여자애를 안고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귀찮으면 업어줄까? 업어줄게, 가자 집에.”
“아 싫어 싫어.”
서하림을 억지로 뜯어내고 내게 말을 놓으라던 남학생에게 서하림 업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 업히기 직전까지 내가 전화한 것도 아닌데 왜 멋대로 왔냐, 집에 갈 때 전화하려고 했는데 왜 벌써 왔냐 등등 엄청 투덜댔으나 막상 업히고 나니 별말이 없다. 오히려 차로 걸어가는 동안 내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고 허릴 감싼 허벅지도 마찬가지였다. 어깨에 얼굴을 비벼대는 것도 느껴졌다.
조수석에 서하림을 앉히고 안전벨트를 채우고 나니 물이나 술 깨는 약이라도 사와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멍청이 같이 뭐 해? 집에 가자며.”
“물 먹을래? 아니면 이온 음료?”
“아니. 졸리니까 빨리 운전해. 그러려고 왔잖아.”
안전벨트를 하고 차 키를 꽂고 액셀을 밟아 출발하기까지의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서하림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살짝 숙이고 있어서 그런가. 내가 뭘 하는지 더 잘 살펴보기 위한 것 같은 모습이라 그랬던 것 같다.
“……편의점이라도 들를까?”
“손.”
“어?”
“손 줘.”
핸들을 잡고 있던 두 손 중에 서하림 쪽에 있는 손은 오른손.
“얼른.”
이대로 오른손을 떼버리면 불편한 왼손으로만 운전을 하게 되는 거라 선뜻 손을 건네주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나는 아직 능숙하게 운전을 잘 하지도 못했고 또…….
“뭐야. 평소엔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것처럼 굴면서 왜 안 주는데.”
“나 한 손으로 운전 못 해.”
“내가 달라고 그랬잖아. 깍지 껴줄게. 우읍!”
“헐. 하림아, 토할 거 같아? 멈춘다?”
바로 갓길에 차를 멈추고 조수석으로 뛰어와 문을 열었다. 서하림은 괜찮다며 고개를 젓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길 반복했다. 물 사다 준다고 해도 싫다, 등 두드려 준다고 해도 싫다. 이래서 술에 취한 사람이 싫단 거다. 서하림이 싫단 게 아니라 고집을 부려대니까 뭘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가 없는 게 싫었다.
좀 괜찮아지면 차를 몰았다가 또 토기가 올라오면 멈췄다가. 차라리 한 번 쏟아내고 나면 좀 나을 텐데 서하림은 집까지 오는 길에 열 번도 더 차를 멈췄음에도 끝끝내 벨트를 풀지 않았다.
“김동규.”
“응?”
“집 가지 말고 산책하자. 저어기로.”
잠에 취한 목소리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서하림이 가리킨 곳은 주차장 한편, 어떤 차가 주차된 곳이었지만 나는 그저 등에 업힌 서하림을 다시 한번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응. 졸리면 자도 돼.”
“새 차 냄새 때문에 속 울렁거려서 죽는 줄 알았다.”
“토하지 그랬어. 많이 힘들어하던데.”
“싫어.”
“왜?”
“음…….”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하긴 지금이 두 시 반인가 세 신가.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을 시간이긴 했다.
“보여주기 싫어서.”
“뭐를.”
“알면서 왜 또 물어봐. 존나 웃기는 새끼네.”
토하는 거 보여주기 싫단 건가. 왜지. 나는 서하림이 토하는 거 손으로 받으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은데.
“이러고 있으니까 속 가라앉는 거 같다.”
서하림이 느슨해진 팔을 움직여 내 목을 좀 더 끌어안았다. 서울의 밤하늘은 보름달 하나만 덜렁 걸려 있을 뿐 반짝이는 그 어떤 별도 보이지 않았으나 내게는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이대로 한…… 30분만 걷다가 들어가자.”
“응.”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한낱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발걸음을 늦춰 한없이 천천히 걷는 것뿐이지만 세상에 나와 서하림 단둘만 있는 것 같은 지금의 이 순간이, 지금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집 옆에 있는 구립도서관과 바로 연결되는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30분이면 공원 반 바퀴 돌기에 딱일 것 같았다.
오늘은 왜 그렇게 많이 먹었는지 아까 그 애 말고도 누구한테 안겼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잔뜩 있었지만 참았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좋았고 이대로 잠든 서하림을 업은 채 밤새 걸어도 행복할 것 같아서.
내 목을 꼭 안고 있던 서하림의 팔이 축 늘어져 내 걸음걸이에 맞춰 달랑거린다. 서하림이 잠에 들고 나서도 나는 한참이나 공원을 떠나지 않았다. 30분, 45분, 한 시간…….
아무도 없는 길을 걸으며 든 생각은 하림이와 함께할 영원을 신에게 빌고 싶다는 거. 서하림이 내 생각을 알았다간 신 같은 건 없고 영원한 것도 없다며 정색할 얘기였다.
언젠가의 여름, 작열하는 태양이 버거워 헉헉대는 나와는 다르게 땀 한 방울 나지 않고 뽀송뽀송한 서하림과 영원에 대해 이야길 나눈 적이 있다. 100억 년쯤 수명이 남은 태양 정도면 인간 입장에서 영원한 존재가 아니냐고. 길어야 고작 120년 남짓 사는 우리에겐 까마득한 수명을 가진 태양은 영원에 가깝지 않냐고.
그러자 서하림이 100억 년도 영원에게는 찰나의 순간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서하림과 영원히 함께할 날들을 상상하곤 했기 때문에 서하림의 논리를 조금이라도 흠집 내고 싶어 머리를 굴렸다. 평소처럼 ‘응, 하림이 네 말이 맞아’라는 짧은 한마디를 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도 나름 반론을 제시했고 서하림은 거기에 또 자기 생각을 덧붙이고, 거기에 또 내 생각을 얘기하고. 서하림 집이 학교 코앞이라 우리는 헤어져야 할 곳에 이미 한참 전에 도착했지만 둘 다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길 계속 이어갔다.
서하림이 신에게 영원을 빈다는 내 바람을 듣는다면 그날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내 바람이 왜 틀렸는지 조곤조곤 설명해 줄 것 같다. 그 날이 얼마나 더웠고 태양은 또 얼마나 강렬했는지, 매미는 얼마나 크게 울었고 습도는 얼마큼 높았으며 벤치를 가려주던 나무 그늘과 하늘에 떠 있던 구름의 모양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높은 온도에 발갛게 달아오른 서하림의 뺨과 이따금 얼굴을 부채질하던 하얀 손까지 나는 하나도 빼먹지 않고 떠올렸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공원을 두 바퀴나 돈 뒤였다.
집으로 돌아와 서하림을 눕히고 옷을 갈아입혔다. 미지근한 물도 받아와 얼굴과 발도 씻겨주었다. 아침에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속이 상하진 않을지 숙취에 고생하면 어쩌지하는 생각으로 속이 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엔 북엇국이나 콩나물국이 좋겠지. 속 쓰릴 수 있으니까 맵게 하면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안대를 씌워주고 수면 모자도 막 씌우려던 참이었다.
“……야.”
“어? 깼어?”
“너 있잖아, 너 나를…….”
안타깝게 끊어지는 말은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은 방금 전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사라진 뒷말이 궁금해 서하림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기고 두 팔 안에 서하림을 가두었다.
“응. 나 뭐. 왜?”
“…….”
“졸리면 자고 내일 말해도 돼.”
느리게 깜빡이는 눈은 당장에라도 자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서하림 위에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키고 앉아 배 부근을 토닥였다. 술에 취한 서하림은…… 생각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고 가시가 돋쳐 있었고 얼굴이 하나도 빨개지지 않아 겉으로 보기엔 취한 줄도…….
“뜨거워.”
“…….”
서하림은 어서 자라며 배를 토닥이던 내 손을 끌어 올리더니 뺨에 대고 비벼댔다. 눈을 감은 얼굴이 내 체온을 음미하듯 감겨들어 순간 손바닥엔 땀이 차올랐다. 꼭 잠을 자는 것만 같은 얼굴이었으나 굉장히 폭력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둔해진 왼손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했고 당장에라도 서하림을 터트릴 것처럼 힘이 들어가는 걸 참느라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나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서하림을 껴안았다. 순하게 내 품으로 파고드는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잠시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안겼었냐는 질투가 솟았다가 빠르게 사그라졌다. 서하림이 내 손에 비빌 때부터 이미 아랫도리가 터질 것 같아 그걸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손 하나를 내려 내 것을 잡고 흔들었다. 서로를 껴안고 있어 여유롭진 않았지만 떨어지기가 싫었다.
“음, 음. 끝까지는 하지 마.”
“뭐?”
“너는…….”
뒤쪽에 위치하던 서하림의 손 하나가 불쑥 옷 안으로 들어와 내 등을 더듬었다. 서하림이 꼬물거리며 등 근육을 만지자 내 온몸은 심장을 제외하고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받아들일 시간도 필요했다.
“너만 좋을 대로 하잖아.”
손끝이 차가워 어느 쪽을 쓰다듬는지 어딜 만지는지가 아주 잘 느껴졌다. 서하림의 손은 마치 피아노를 치는 것 같다. 나는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서하림의 동그란 손끝을 느끼며 얼어붙어 있었다. 성기를 더 이상 건들지 않았는데도 정액이 터져 나왔다. 겨우 솜털 같은 손짓 하나에.
“왜 웃어, 존나 쪽팔리게.”
“너 내가 그렇게 좋아? 뭐 얼마나 건드렸다고.”
이런 상황만 아니면, 서하림이 등 좀 만졌다고 사정한 게 아니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고 받아쳤을 텐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켜댔다. 서하림은 그런 나를 보며 푸스스 흩어지는 웃음을 흘려댔다. 그게 조금 괘씸하고 얄미워 서하림의 잠옷과 속옷을 한 번에 잡아 내렸다. 옷이 살짝 들려 있어 배에 내 정액이 묻었다.
“너도 섰는데.”
“알아. 굳이 말 안 해도 돼.”
“빨고 싶은데.”
“…….”
“끝까지 안 해. 그냥 빨기만 하고 끝 할게.”
“전에도 비슷한 말 하고서 다른 것도 다 하지 않았나.”
“너 술 취했단 거 거짓말이지.”
내 말에 서하림이 빵 터져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었다. 아무래도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착각인가. 다른 거 할 생각이 아주 없진 않았으나 정말로 펠라만 하고 끝낼 것이다. 저 예쁜 콧대를 눌러줘야지. 정신 쏙 빠지게 빨아 대서 술기운에 박아 달라고 사정 사정을 해도 안 넣어줄 거다.
입안에 하림이의 것을 물고 볼이 패도록 빨아대자 청량하던 웃음소리가 달큰한 신음으로 바뀌었다. 이번엔 내 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왜인지는 나도 몰랐다.
하림이는 내 입안에서 두 번 사정을 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나는 그대로 침대 아래로 내려와 조금 전 하림이가 흘려댄 신음을 다시 재생시키며 내 것을 움켜잡았다. 지금까지 서하림을 건드리며 들었던 소리 중에 제일 얌전하고 꽤 작은 축에 속했지만 나른하게 울려 퍼지는 신음 속에 좋아, 하고 말해준 적은 처음이었다.
컴퓨터에 깊숙이 저장해 둔 폴더를 열었다. 폴더의 이름은 ‘백일장’. 얼마 만에 이 폴더를 눌러보는 건지 모르겠다. 폴더 안에는 상당한 개수의 워드 파일이 있었고 하나씩 열 때마다 부끄러워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았다.
이 파일들은 다름 아닌 연습용 글들이었다. 수상작들 분석하고 예선용으로 쓰다가 버리긴 아까워서 저장한 것도 있고 아주 가끔 나중에 써먹으려고 떠오른 것들을 단편적으로 적어 놓은 것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며 다시는 이 폴더를, 폴더 속 파일들을 열어 볼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그런지 온몸이 꼬이는 듯했다.
심지어 이것들을 죄다 뽑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라 더 괴로웠다.
“와 김동규 미친 새끼…… 어떻게 이런 걸 썼냐.”
내가 보기에도 너무 퀄이 구리거나 병신 같은 것들은 다 삭제하려다 말고 전부 한 파일로 합쳐 내 메일로 보냈다. 그리고 학교 앞에서 프린트를 하고 종이에 활자로 뽑힌 것들을 다시 보며 머리를 쥐어뜯은 뒤 강의가 끝나고 지도 교수를 찾아갔다.
환하게 웃으며 날 반겨주는 교수님은 굉장히 친절했지만 가방 안에 있는 종이들을 찢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 어디 우리 천재님의 습작 노트를 봐볼까.”
종이 뭉탱이를 건네고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가라앉힐 겸 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다가 오글거리는 단어에 사레가 들렸다. 이러다 토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기침을 해대는데도 교수는 “여기서 죽으면 안 돼요”라며 웃을 뿐 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덧 기침이 잦아들고 나도 좀 진정이 됐을 땐 교수가 너무 집중해 읽고 있어 약간의 민망함이 올라왔다. 예고 출신도 아니고 글 쓰는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니라 이런 식으로 남이 내가 쓴 것들을 내 앞에서 본 적도 없거니와 곧 있으면 시작될 품평은 더더욱 들어본 적도 없었다. 백일장은 못 쓰면 탈락이고 잘 쓴 것만 골라 상을 주고 끝이었으니까. 아주 간혹 시상식에서 장원 받은 작품들을 읽어주는 곳도 있긴 한데 그건 진짜 특이한 경우다. 종이가 뒤로 넘어갈수록 교수님보고 그냥 다 없던 일로 하자고 할까 수십 번 고민이 들었다.
현대 시를 연구하고 유명한 문학 평론가라는 이 교수님은 첫 시간부터 날 부르더니 백일장에 제출하지 않고 외부에 발표가 되지 않았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 잘 쓴 것 같은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분도 어디 백일장 심사 위원이었나 싶어 별생각 없이 ‘잘 쓴 건 모르겠고 예선용으로 킵해 둔 것들이 좀 있어요’라고 대답한 게 실수였다. 교수님은 그 킵해 둔 것들 좀 보자고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나는 몇 번이나 잘 쓴 거 아니고 보여주기 부끄럽다며 뺐지만 교수님은 완강했다.
처음엔 내 천재성을 운운하며 평론가로서 젊은 천재의 작품을 보고 싶은 거라고 했지만 딱 봐도 신춘문예나 신인 문학상 얘기로 흘러갈 것 같아 더 이상 글은 안 쓸 거라 했다가 만19세에 등단 타이틀 멋있고 좋지 않냐, 쓴 게 없는 것도 아닌데 한번 내보기라도 하자, 우리 학교는 재학 중에 등단하면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준다 하며 꼬셔댔다. 열심히 첨삭해 주고 도와주겠다는 말도 했다.
3월 내내 내게 점심이나 저녁을 부지런히 사주며 나는 잘 모르겠는 내 천재성을 논하고 평론가로서의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나를 열심히 괴롭힌 결과가 바로 오늘, 지금이었다.
“잘 썼네요.”
교수는 종이를 내려놓으며 감상의 운을 뗐다.
“운문이든 산문이든 다 잘 쓰네. 혹시 이것들 나름대로의 분류가 있어요?”
“분류요? 어 그냥 시랑 소설이랑 시조랑 희곡, 시나리오, 수필 뭐 이렇게 참여 분야로…….”
“아니 그런 장르 분류 말고.”
“그럼 뭐를……?”
“보니까 입시용 작품이랑 아닌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거 같아서요. 전자는 예선용으로 킵해놨던 것들이고 후자는 아무래도 진짜 작품들일 테고.”
“아…….”
“맞나 보네.”
나는 한 번도 내가 쓴 글들을 작품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재능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지만 천재까진 아니었고, 내가 쓴 글들을 작품이라고 부르기엔 내가 내 글에 갖는 애정이 적기도 하고 애초에 창작하는 의도가 너무도 자본주의적이라 양심에 좀 찔리는 것도 있었다. 정말로 소설가를 꿈꾸고 시인이 되길 바라는 학생들에게 실례인 것 같아서. 상과 상금을 쓸어갔으니 이 정도는 미안해 해줘야 공평한 것 같았다.
“예선용은 수준도 그렇고 어차피 고등학교 백일장에서밖에 못 쓰는 것들이니까 버리고. 여기 이거랑, 이거랑 이것들 말인데요.”
교수는 수십 장의 A4용지에서 몇 개를 쏙쏙 뽑아 내 앞에 늘어놨다.
“시랑 소설 중에 뭐가 더 자신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일부러 좆구린 것들까지 전부 뽑아온 건 내가 천재가 아니고 구린 것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함이었는데 내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왜, 무슨 문제 있어요? 이거 어디 내서 상 받은 거예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네.”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잠시 말을 골랐다. 그냥 단순히 신춘문예는 너무 벽이 높은 것 같아 싫다고 하면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늘어질 것 같고 상금 때문에 백일장 참여했다고 하면 그놈의 전액 장학금 얘길 할 것 같아서 그냥 아예 다 얘길 하는 게 앞으로를 위해서도 좋을 거 같았다. 어차피 전과할 건데.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긴데 제가 백일장 열심히 다녔던 건 상금 때문이구요, 상금 받으려고 수상작들 분석 공부 열심히 했고 아니 뭐 재능이 어느 정도 있으니 큰 상도 받은 거겠지만 아무튼.”
나름 이 분의 환상을 깨부수고 있는 것 같아 좀 미안한 맘이 들었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교수님은 일단 들어줄 테니 할 말이 있으면 다 해보란 표정이었다.
“저는 제가 그,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사실 국문과도 올 생각 없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오게 된 거거든요. 원래는 저 기계공학과 갈 생각이었고 죄송한 말이지만 전과할 거라서요. 공대로요. 저 말고 진짜 작가를 희망하는 다른 친구나 선배를 도와주시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그래요?”
내 얘길 귀만 안 팠지 제대로 듣질 않은 것 같은 교수님이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서 책 몇 권을 가져왔다. 최근 5년간의 신춘문예 당선 시집과 당선 소설집이었다.
“그럼 일단 이거부터 다 읽어보고 다시 얘기하죠.”
“아니 그니까 저는 신춘문예고 뭐고 생각도 없고 될 것 같지도 않은데요.”
“좀 이르지만 저녁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이 인간도 진짜 지 말만 하는구나. 나는 됐다며 가방에 책을 욱여넣었다.
집에 가는 길에 홍합 사러 마트 가려고 했는데 가방이 존나 무거워 아무래도 집에 들러 가방을 내려놓고 가야 할 듯싶다.
“소갈비 먹을 건데 아쉽네. 다 읽으면 바로 찾아오고.”
“네.”
한 50년 뒤에 다 읽고 찾아올게요. 4월부터 백일장 시즌이기 때문에 이런 책 읽을 시간도 없고 과외에 중간고사 생각하면 여기서 괜히 시간 뺏기고 기운 뺀 것도 다 낭비였다.
대충 인사를 하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길가엔 봄꽃들이 피어 삭막한 서울의 풍경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고 샤워부터 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거짓말 조금 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지만 무게가 무게인지라 땀이 줄줄 나서.
오늘도 서하림은 마지막 강의 끝나자마자 어디 디저트 카페에 간다며 저녁 약속도 있으니 혼자 밥 먹으란 메시지를 남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저번처럼 취하면 안 데리러 갈 거야’라는 진심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답장을 보내고 해장국을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다 서하림 생각하며 딸이나 치는 게 전부였다.
과외 시간은 화금 다섯 시부터 두 시간. 시험 기간은 내신 봐주는 한 시간이 추가돼서 세 시간이다. 세 명 다 고3인데 공부와는 영 인연이 없는 친구들이었다. 그래도 3월 1일에 있던 E백일장에서 세 명이 쪼르르 장려를 받아 스타트가 좋았다. 그 뒤로 3월은 전멸이긴 했지만 어차피 3월엔 E백일장 빼면 큰 백일장이 없어 상관은 없었다.
“선생님 우리는 야외 수업 안 해요?”
백일장 수업할 땐 신나서 별말 없더니 내신 공부 시작하니까 야외 수업 소리다.
“생각 없는데.”
“아 왜요, 집중 1도 안 되는데.”
“예쁜 꽃들 보면 창작 활동에도 도움이 될 거 같은데요? 시상 존나 떠오르고 스토리 전개 팍팍 되고?”
“문제 푸는 데는 도움 안 될걸.”
내 말에 셋이 짠 것처럼 “어어” 하고 방청객 같은 소릴 냈다.
“나랑 가서 뭐 해. 남자 친구, 여자 친구랑 주말에 가면 되지.”
“주말엔 사람 많아서 눌려 죽잖아요.”
“그래?”
“그래라뇨.”
“안 가봐서 몰라.”
“엥 왜요?”
“공부하느라.”
또 셋이서 입을 모아 “허얼” 한다. 두 명은 여자애고 한 명은 남자앤데 셋이 산후조리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 같은 곳을 다니며 제일 친한 사이라더니 이런 부분에서 오래 본 친구라는 게 느껴져 귀엽기도 했다. 나랑 겨우 한 살 차인데.
“아 맞다 쌤 전교 2등이지.”
“알면 얼른 마저 풀자. 조금 일찍 끝내 줄게.”
“저도 중학교 때 2등 한 적도 있어요.”
“뒤에서 했대요.”
“아 왜 내 말 쌔벼가!”
“그게 뭐 자랑이라고 얘길 하냐?”
“너나 나나거든.”
“아니거든.”
“맞거든.”
“지랄한다. 나는 바닥인 너랑 다르게 중하위권인 거 잊지 마라?”
“중하위궈언? 그래 너 공부 조오오오오온나 잘해서 좋겠다!”
“뭐? 한시우 이 시발놈아? 뭐라고?”
“야 너네 조용히 좀 해! 지금 문제 푸는 거 안 보여? 싸우려면 나가서 싸우든가!”
알아서 멈출 거라 생각했는데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 책상을 두드렸다. 안 멈췄다간 셋이 싸울 기세였다.
“오늘 왜 이렇게 정신 사나워?”
“야외 수업 안 해서요!”
분명 몇 초 전까진 셋이 싸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야외 수업이 뭐라고 셋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이럴 때마다 얘네 대체 뭐지 싶다. 비단 이번뿐만 아니라 전에도 종종 이러다 때리는 거 아니야 싶은 상황에도 별 특별할 거 없는 한마디에 화가 풀리거나 험악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오늘은 안 돼. 중간고사 끝나고 첫 수업 때.”
그땐 벚꽃이 다 지지 않냐며 항의가 돌아왔지만 대신 오늘은 30분 일찍 끝내 주는 걸로 합의를 봤다. 중간고사 기출 문제 푼 지 10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남은 시간도 전부 수다 아닌 수다를 떨며 문제는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수업은 세 명의 집을 수업마다 돌아가면서 진행됐고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데 나는 학부모가 같이 먹자고 권해도 사양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편이었다. 으리으리한 집에서 가족도 아닌 남과 식사를 하는 건 서하림네만 해도 충분했다.
“선생님! 오늘 무슨 용궁탕 한다는데 선생님도 먹고 가요!”
“맞아요!”
“됐어. 너네 상 받으면 기념으로 먹을게.”
“거봐, 집에 숨겨둔 애인 있는 거 분명함.”
“아니면 여자 친구랑 저녁 먹어야 되는 거.”
“데이트 잘 하세요, 쌤!”
“열심히 해서 이번 달에는 상 많이 받자. 그럼 나도 저녁 많이 먹고 가고 좋지.”
차라리 서하림이 집에 잘만 들어오면 저 추측성 얘기에 기분 좋게 뭐가 있어 보이는 미소라도 지어볼 텐데 그럴 수가 없어 조금 슬퍼졌다.
과외비가 굉장히 쏠쏠해 늘 역삼동과 집을 오갈 땐 택시를 이용한다. 평소엔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집이 학교 바로 앞이라 역에서는 한참 멀기도 하고 과외를 하고 나면 기운이 많이 빠져 작은 사치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더욱이 오늘처럼 아이들에게 기가 빨린 듯한 날은 더더욱.
택시에서 내려 터덜터덜 걸으며 교수님에 과외에 오늘 저녁은 엽떡을 시켜먹을지 마라탕을 시켜 먹을지 고민했다. 존나 매운 게 끌렸다.
배달 어플을 켜고 현관문을 열었다. 막 주문을 하고 결제를 할 참이었는데.
“서하림?”
예상치도 못하게 현관엔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고 늘 두 쌍이 놓여 있는 실내화도 하나뿐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신발을 벗어 던지며 실내화를 신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녁 약속은?”
“취소됐어. 아, 술 먹고 벚꽃 축제 가려고 했는데.”
“그럼 밥은?”
“그래서 널 기다리는 중이었지.”
“아 잠깐만.”
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가 손부터 씻고 나왔다. 밥은 아침에 다 먹어서 새로 해야 하는데…… 그래도 어제 밥 먹고 쌀을 미리 불려 놓은 게 있어서 다행이다. 냉장고에 아주머니가 두고 간 반찬이 얼마나 남았더라? 냉장고를 열어 아주머니의 반찬들을 죄다 꺼냈지만 내가 거의 다 먹어서 영 신통치가 않았다.
“연락을…… 하지 그랬어.”
“기다리면 알아서 집에 올 텐데 뭐 하러. 집에 없는 거 보고 과외 하는 거 같길래 방해될까 봐.”
“방해 안 되는데…….”
무려 한 달 만에 서하림과 처음으로 함께하는 저녁이건만 부실한 밥상을 내놔야 할 상황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쌀부터 압력밥솥에 붓고 가스레인지 위에 밥솥을 올렸다. 프라이팬도 두 개를 꺼내 아주머니 반찬 중 따뜻하게 해서 먹으면 좋은 것들을 다시 볶았고 아까 사둔 홍합을 꺼내 탕을 끓였다.
“홍합탕 순하게 해 아니면 칼칼하게?”
“음, 조금만 칼칼하게.”
“많이 배고파?”
“조금? 대충해. 그냥 있는 거로 대충 먹자.”
“응.”
냉장고에서 계란과 애호박을 꺼내고 두부와 오이, 부추, 다진 마늘도 꺼냈다. 양념통 선반에서 부침가루, 볶은 소금, 고춧가루, 설탕을 빼 조리대에 올렸다.
“야 뭐 새로 하지 말고 대충 먹자니까.”
“어차피 밥 되려면 멀었어. 10분만 기다려.”
애호박을 피자처럼 여덟 조각으로 자르고 볶은 소음을 뿌린 다음 부침가루 묻히고 계란 물을 묻혀 부쳤다. 한쪽에 두부도 함께 올려 부치면서 찍어 먹을 양념장을 만들고, 오이를 깍뚝 썰어 볶은 소금에 살짝 버무린 다음 잘게 썬 부추와 나머지 양념들을 넣어 섞었다. 완성된 반찬들 위에 깨를 뿌려 완성하고 나니 딱 10분이 지나 있었다. 밥도 완성되는 소리가 들렸다.
“딱 맞췄지?”
반찬들을 그릇에 담으며 어깨를 으쓱했더니 서하림이 작게 웃었다.
“네, 셰프님.”
갓 지어진 밥에선 누룽지 냄새가 났다. 밥 빨리하려고 불을 좀 세게 했더니 아무래도 아래가 좀 눌은 모양이었다. 뭐, 이건 이대로 좋았다. 서하림이 누룽지 좋아하기도 하고 아침에 누룽지에 뜨거운 보리차 부어 주면 잘 먹기도 하니까.
치이익 하는 소리가 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밥솥 뚜껑을 열었다. 주걱으로 밥을 살짝 뒤집고 하림이 밥부터 떠서 갖다 줬다. 아주 약한 불에 올려둔 홍합탕도 식탁 위에 올렸다.
“잘 먹겠습니다.”
서하림이 홍합탕 한술 뜨고 밥도 입에 넣은 걸 본 후에 내 밥을 담아 식탁에 앉았다. 서하림 밥에 비하면 엄청난 고봉밥이었다. 애초에 우리 둘은 밥그릇 크기도 달랐다.
“오늘은 술 못 먹어서 어떡하냐. 아쉽겠네.”
반쯤은 놀리는 말이었다. 나머지 반은 속상한 거 알아달란 맘이었고. 그래서 생각보다 말투가 조금 빈정거리는 투로 나갔다.
“그러게. 아쉽네.”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서하림은 작게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과외는 어때.”
“빨리도 물어본다. 시작한 지 세 달 됐는데.”
“벌써?”
“맨날 그렇게 밤마다 밖에 쏘다니시니까 알 턱이 없지. 이 알콜 중독자야.”
“미친, 뭐래냐. 밥이나 먹어.”
“귀여워. 여자 둘 남자 하난데 셋이 갓난아기 때부터 친구래.”
“오 그래? 남자애가 좀 불편하겠다.”
“나도 그래서 물어봤거든. 남자애 이름이 한시우고 여자애들은 지아, 서현인데 시우가 혹시 지아나 서현이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셋이 나한테 욕이란 욕을…….”
그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서하림이 알 만하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셋이 거의 가족이더라고. 남매 같아. 시우가 약간 막내 포지션이고 셋이서 엄청 친한데 엄청 싸워.”
“그럼 욕먹을 만하지.”
“넌 외동인데 어떻게 알아?”
“서하늘 있잖아.”
“아.”
“서하늘이랑 친척 아니고 그냥 친구라고 해도 누가 나보고 서하늘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나도 욕부터 하고 볼걸.”
“걔랑 그 정도였어?”
“야 말도 마. 지금은 싸워서 정든 거야. 어릴 땐 걔 툭하면 나 때렸다니까. 기분 좋으면 좋다고 때리고 나쁘면 나쁘다고 때리고.”
“헐. 그걸 맞고만 있었어?”
“아니. 싸워서 정들었다니까. 걔네 오빠가 서하늘을 맨날 놀리고 괴롭혔는데 걔 성격에 그걸 그냥 당하고만 있었겠어? 바로 오빠한테도 주먹 날아갔는데 나이 차가 좀 있고 하니까 이길 수가 없으니 씩씩거리면서 만만한 나한테 화풀이를 해댔단 말이야. 그럼 나는 선빵 맞고 왜 때리냐면서 싸우고 그랬지.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좀 친해졌어. 왜냐면 걔네 오빠가 나도 같이 묶어서 놀렸거든. 우리 둘 이간질시켜서 싸우게도 하고, 우린 한참 어리니까 그 말 믿고 오해해선 싸우다가 오해 풀리고. 뭐, 전쟁 같은 날들이었지.”
처음 듣는 얘기였고 또한 굉장히 흥미로운 얘기이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서하림의 시간을 듣는 게 좋았다. 나도 지아, 서현이, 시우처럼 태어날 때부터 서하림이랑 친구여서 지금은 기억에도 없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공유했으면 좋았을 텐데. 서하림이 내 인생에 나타난 건 아홉 살, 그마저도 2학기 중간에 만났다가 헤어져 제대로 다시 만난 건 열두 살 때였다.
“그렇구나.”
“그렇지 뭐. 타고난 것도 있는데 걔네 오빠가 걔 지랄 맞은 성격에 한몫했어. 그래도 시원시원해서 좋아. 뒤끝 없이 쿨하고 화통하잖아.”
나는 그닥 서하늘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말없이 밥이나 먹었다. 목소리 듣기 좋은데 서하늘 이야기 말고 뭐 딴 거 얘기할 거 없나.
“……벚꽃 축제는.”
“응?”
“술 먹고 가려고 그랬다며. 못 가서 어떡해.”
말 꺼내놓고 실수했단 걸 깨달았다. 오늘이 아니어도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주말도 있다. 서하림이랑 같이 벚꽃 축제 가겠다는 사람을 한 줄로 세우면 끝이 안 보일 텐데 바보 같은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뭐…….”
“아니다. 너야 같이 갈 사람이 많아서 문제지.”
“같이 갈래?”
“어딜.”
“석촌호수.”
“갑자기?”
“거기서 해. 벚꽃 축제.”
밥 먹으며 태연하게 엄청난 말을 내뱉은 서하림과는 달리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한 걸 간신히 붙잡았다.
“나랑 간다고?”
“응.”
“……왜?”
“너랑 못 갈 이유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밥 먹고 가자. 가서 술도 한잔할 수 있음 하고.”
나는 술 먹는 것도 싫어하고 차 가져갈 건데 술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냔 말이 입술 바로 앞까지 올라왔지만 서하림과 같이 벚꽃 보러 갈 생각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차에 올라탔다. 진짜 우리 둘만 가는 건지, 나랑 가도 괜찮은 건지 나는 머릿속이 설렘과 걱정에 엉망진창인데 서하림은 오늘은 주초라 이 시간에 가면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며 들뜬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불행과도 졸업을 한 것인지 스무 살이 되고 모든 것이 물 흐르듯 하는 것만 같아 덜컥 무서워졌다.
“노래 틀어도 돼?”
“어? 어. 틀어. 네 차잖아.”
서하림이 차 블루투스와 연결해 노래를 틀었다. 비트가 빵빵하고 흥이 나는 노래였다. 아마도 최신 노래겠지만 나는 노래를 안 들어서 모른다. 약간 익숙한 걸 보니 길 지나다니면서 몇 번은 들어본 것 같다.
흥얼거리는 서하림의 작은 허밍이 긴장한 나를 조금 안심시켜 주었다. L타워가 가까워질수록 불안함에 떨리던 왼손과 다리가 진정됐다.
사람 많은 거 딱 질색인 내겐 벚꽃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거의 전쟁통을 방불케 하는 급이었지만 서하림은 사람이 별로 없어 좋다며 방긋방긋 웃었다.
벚꽃과 다양한 색깔의 조명들이 어우러진 밤의 거리에서 서하림은 홀로 빛나는 것만 같다. 서하림과 함께 발을 맞추며 걷는 이 길은 평범한 아스팔트 길일 뿐인데도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오로지 서하림 때문에.
혹시라도 서하림이 추워할까 봐 목도리와 핫팩을 챙겨왔지만 바람은 적당히 선선했다. 그래도 도착하자마자 카페에 들러 따뜻한 차를 쥐여주었다.
“작년에는 윤중로에 갔었거든. 거긴 진짜 사람 엄청 많았어. 사람한테 치여 죽는 줄. 여긴 금토일 아니면 괜찮다고 해서.”
“그래?”
“옆에 놀이공원 때문에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포인트들도 있지. 이따 사진 좀 찍어줘.”
“응.”
길을 걷다 한 번씩 걸음을 멈추고 서하림에게서 한두 발짝 정도 떨어져 그 애의 익숙한 뒷모습을 감상했다. 내 위치는 언제나 늘 이렇게 서하림의 뒤였다. 조용히 서하림의 뒤에서 그 애의 뒷목을 훔치고 반듯한 등을 흠모하며 따라가기 바빴다. 그런 삶이었다.
내게는 힘들고 치열했던 19년의 인생을 누군가는 고작 짧은 19년 고생한 게 뭐가 그리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인간이란 똑같은 감기를 걸려도 내가 제일 아프고 힘든 일이 있어도 내가 제일 힘든 존재였다.
이렇게…… 흐드러지게 핀 예쁜 벚나무 아래 서하림과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건, 오롯이 행복으로 충만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시간이 희생으로 필요했기 때문은 아닐까. 진정한 사랑은 아픔을 겪어봐야 단단해진다고 했고 완벽한 예술은 고통을 감내해야 탄생한다 했다. 신조차도 어리석고 유혹에 약한 인간들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역경을 주고 난 뒤에야 천국을 선사하지 않던가.
내가 서하림처럼 좋은 집에서 태어나 사랑받으며 컸다면, 그래서 서하림과 그냥 평범한 친구였다면 1분 1초의 시간이 이토록 달콤하고 소중하진 않았으리라.
행복한 감정이 지나치게 커 이따금 무섭기도 했지만 이런 날들과 시간이 반복되면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됐으면, 이런 게 당연해졌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니까 놀이공원 많이 와봤어도 여기는 별로 안 와봤어. 바로 옆인데 왤까?”
“음…… 이런 데 돌아다니는 건 시간이 많이 여유로울 때나 하는 건데 아무래도 입시 준비하는 동안은 그게 힘드니까? 하림이 넌 시간 남으면 전시 보러 다녔잖아.”
“아 그러네.”
“나도 여기 처음이야. 그리고 난 놀이공원도 가본 적 없어.”
공부하는 시간이 아까워 소풍, 수련회 이런 것도 초등학생 때나 갔지 중학교 올라와서부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땐가 5학년 땐가, 학교에서 놀이공원을 갔지만 나는 어린이대공원 놀이기구들도 무서워서 못 타는 사람이라 불참했다. 노는 것보단 공부가 하고 싶었고.
수련회에 가지 않는다고 체크하면 평소처럼 교복 입고 등교를 해야 하는데 3일간의 수련회 대체 등교 날에 공부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떠들거나 잠을 자거나 영화를 다운받아 와 빔으로 보거나 했다.
“그럼 무서운 거 잘 타는지는 모르겠네.”
보통 수련회를 빠지는 학생들은 아프거나 혹은 비용이 부담스럽단 이유로 가지 않았기에 내가 특이한 경우였다. 물론 나도 두 번째 이유는 돈인 게 맞긴 했는데 나는 조건이 맞아 학교에 신청만 하면 무료로 갈 수 있긴 했다. 서하림은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고 내가 가지 않은 이유도 대충 돈 때문이라 생각하는지 별달리 묻지 않았다.
“아냐. 알아.”
“어떻게?”
“어릴 때 어린이대공원 뭐 이런 데 가봤으니까.”
“오. 어떤데?”
“나 회전목마밖에 못 타.”
“헐 미친.”
서하림이 웃는 건지 경악하는 건지 요상한 얼굴을 했다.
“진짜로?”
“응. 바이킹 탔다간 기절임.”
“대박. 자이로스윙쯤은 씹어 먹을 거 같은데. 키랑 덩치가 아깝다.”
“저런 건 덩치랑은 상관없어…….”
내가 생각해도 키와 덩치가 좀 아깝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라 괜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난 진짜 잘 타. 이제 국내 놀이기구들은 시시해. 내 버킷리스트 중에 전 세계 테마파크 도장 깨기 하는 거 있다?”
“난 상상만 해도 기절할 것 같다.”
“어, 저기 뭐지?”
서하림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나도 부지런히 서하림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모인 곳엔 공영방송 로고가 박힌 트럭과 조명, 무대, 카메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뭐 찍는데요?”
“9시 뉴스 일기예보요.”
“아하.”
우리가 막 도착했을 땐 곧 예보가 시작되려는 건지 스텝과 기상 캐스터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자세를 잡았다. 카메라 감독인지 PD인지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잠시 뒤 캐스터가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석촌호수에 벚꽃을 보러 온 시민 여러분들이 어쩌고 하며 우리 쪽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와아!”
“아직 날씨는 완연한 봄이라곤 할 수 없지만 활짝 핀 벚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입니다.”
서하림도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런 게 처음이라 멀뚱멀뚱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웃었을까? 환하고 예쁘게? 이따 집에 가면 오늘 뉴스 꼭 찾아봐야지. 서하림이 어떻게 찍혔을지 궁금하니까.
일기예보는 능숙한 기상 캐스터에 의해 아주 정확하고 매끄럽게 진행됐다. 마무리할 때 또 한 번 사람들 쪽으로 카메라가 돌아왔다. 왠지 카메라가 둘러싼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일부러 서하림이 있는 쪽만을 비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메라 말고도 석촌호수 도착해서 차를 주차하고 내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서하림에게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으니 단순히 내 착각은 아닐 것이다.
방송이 끝나자 사람들이 금세 흩어졌다. 나와 서하림도 마찬가지였다.
“신기하다. 생방인데 실수 하나도 안 하네.”
“저게 직업이니까.”
“하긴.”
“뭐 먹을래?”
“입이 좀 심심하긴 해.”
조금 떨어진 곳에 솜사탕 파는 아저씨가 보였다.
“솜사탕?”
“싫어. 너무 달아.”
“그럼 뭐, 소시지나 회오리 감자?”
“달고 짜.”
“그래, 맞아. 그럼 뭐가 좋을까 생각해 보자. 날씨가 따뜻하면 구슬 아이스크림 같은 거 먹는 건데.”
이 근처에 가볍게 먹을 게 뭐가 있는지 열심히 검색했다. 하지만 어차피 길거리 음식이야 다 짜고 달고 자극적인 것투성인데 서하림이 먹을 수 있는 게 있으려나 모르겠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엉.”
“소시지고 회오리 감자고 달고 짜다고 원래 안 먹는 거 아는데, 술은 어떻게 먹어?”
“술?”
“맹물에 먹는 건 아닐 테고 술집 안주가 다 거기서 거기라 자극적이고 그러잖아.”
“맞아. 그래서 거의 탕이나 국이랑만 먹어.”
“헐, 속은 괜찮고?”
“아직 젊어서 괜찮은가 봐. 그리고 아침마다 누가 속 풀어주는 거 해주잖아.”
날 보며 살포시 웃는 모습에 귀 끝까지 불이 오르는 것 같다. 아주 작고 희미한 미소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슴께가 뻐근해져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후드 끈을 괜히 쭉 당기고 라운드 부근을 올려 입을 가렸다.
“근데 너는 왜 술 안 먹어?”
“……안 좋아해서.”
입이 옷에 가려져 목소리가 조금 작았다.
“혹시 아저씨 때문에?”
“응. 지금까지 한 방울도 마신 적 없고 앞으로도 먹을 생각 없어. 술이라면 딱 질색이야.”
“그으래?”
서하림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아직도 땅만 보며 걷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서하림 반대편으로 눈동자를 굴렸다가 잡고 있던 후드를 놓고 서하림 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그럼 나랑 마시는 것도 싫어?”
“……몰라.”
“모르긴 뭘 몰라 또. 맨날 모른대.”
아예 내 앞으로 마주 보고 서서는 거꾸로 걷는다.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뒤로 걷는 서하림이 사람들과 부딪힐까 봐 걸음을 멈췄다. 내가 멈추자 서하림도 더 이상 걷지 않고 우뚝 섰다.
“좋아.”
“응?”
“너랑 먹는 거.”
너와 함께한다면, 네가 주는 거라면 독이 든 성배라도 마실 수 있어. 네가 내게 하얀 곰팡이가 핀 빵을 건네고 썩어 가는 과일을 준다 해도 내가 어떻게 그걸 마다할 수 있을까.
그대로 서하림 손에 이끌려 술집에 들어갔는데 살짝 좁은 공간, 그 안에서 은은한 조명을 받아 빛나는 서하림과 마주 보고 있을 수 있단 것에 감격하길 몇 분. 처음 오는 술집과 처음 마셔 보는 술에 어색함이 채 풀어지기도 전에 내 필름이 끊겨 버렸다.
서하림은 술잔을 비울 때마다 귀엽게 이런저런 걸 붙여가며 짠을 했는데 마지막 기억 속 짠은 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고 나도 모르게 신춘문예 얘길 꺼낸 바람에 ‘신춘문예 짠!’과 ‘작가님 짠!’이었다.
눈을 뜬 건 다행히 집이긴 했고 알람 소리 덕에 제시간에 깰 수 있었다. 왜 내가 식탁에 엎어져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식탁에 굴러다니는 컵과 물통을 정리하고 황태해장국을 끓이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이따가 하림이 일어나면 어떻게 집에 왔는지 물어보고 사과할 거 있음 해야겠다. 나 같은 거구를 용케 집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대단하고 미안한 일이었다.
존나 개쪽팔리고 미안해서 황태채를 볶으면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대학교는 시험이 죄다 서술형에 주관식으로 나올 줄 알고 좀 쫄았던 것에 비해 싱거웠다. 원래도 나는 객관식에 아주 특화된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과 특성인지 아직 1학년이라 그런 것인지 아무튼 첫 시험을 무난히 쳤다. 그놈의 줄줄 써야 하는 리포트와 조별 과제들이 답도 없는 난제라 그렇지.
지난달 내내 술 먹고 놀러 다니는 줄로만 알았던 서하림은 그 와중에 공부도 할 건 다 하고 놀았다며 나보다 더 긴 시험 기간을 아주 산뜻한 얼굴로 마쳤다. 중간중간 자주 본다는 쪽지 시험도 그렇고 과제로 나온다는 어마어마한 문제들도 그렇고 서하림은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면서도 불타는 열정 끝에 답을 찾아내면 엄청 즐거워했다. 서하림 같은 사람들을 괴물이라 부르는 거겠지.
시험이 끝났다고 많은 학생이 또 불필요한 소비를 하러 학교 밖을 나갔다. 나는 집에서 티본스테이크를 구워 먹고 잠이나 퍼질러 잤다.
그런 날 깨운 건 다름 아닌 서하림이었다.
“뭐야…… 알람 안 울렸는데…… 몇 신데 벌써…….”
“아홉 시.”
“아홉 시?”
밖은 깜깜했으니 오전이 아닌 오후 아홉 시겠고.
“일어나. 나랑 같이 와인 한 잔만 하자. 저번에 이모가 보내준 거.”
“지……금? 먹고 온다며.”
“그랬는데 선배가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울고불고 그래서 그냥 도망 왔어.”
“그래. 와인 먹을 거면 안주가…… 아, 장 봐야 할 거 같은데.”
“같이 가 그럼. 나 두 병 넘게 먹고 와서 지금 기분 딱 좋아. 조온나 신남!”
소파에 앉아 고개를 까딱까딱하는 서하림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냉장고 한 번 훑고 세수 후딱 한 뒤 모자만 쓰고 나왔다. 배는 별로 많이 안 고프다기에 딸기, 블루베리, 청포도, 메론, 하몽, 방울토마토와 레몬, 깻잎, 미니 바게트, 치즈 몇 개에 나 먹을 찹스테이크 재료들을 담았다.
만드는 동안 씻고 오랬더니 귀찮아서 싫단다. 서하림은 식탁에 앉아 카나페와 부르스게타, 찹스테이크를 만드는 나를 꽃받침을 한 채 지켜봤다. 기다리기 심심할 것 같아 청포도를 좀 씻어 줬더니 하나씩 집어 먹기도 했다.
“스테이크로 무슨…… 산을 만들었냐.”
“사실 아까 잠자기 전에도 스테이크 먹었는데 배가 다 꺼졌어.”
“너 오늘은 진짜 조금만 마셔.”
내 와인 잔에 직접 와인을 따라주며 서하림이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내가 술 취하고 무슨 짓을 했는지 못해도 백 번은 물어봤는데 별 실수 없었다며 말을 해주질 않았다. 그런 것치고 조금만 먹으라는 엄포는 좀 협박에 가까운 정돈데.
“저번에 내가 술 취해서 뭐 하고 무슨 말 했는지 진짜 안 알려 줄 거야?”
“특별한 거 없었어. 그냥 너 뒤처리하기 힘들어서 그렇다니까. 네 키랑 몸무게를 생각해 봐. 너 키 더 컸다면서.”
“오늘은 밖도 아니고 집인데?”
“침대 위에서 먹는 건 아니니까. 짠 합시다, 치얼스!”
그냥 아무런 의도 없이 말한 것일 텐데도 괜히 나 혼자 음란마귀 씌어 짠도 못 해줬다. 애꿎은 찹스테이크를 포크에 네 조각이나 찍어 삼켰다. 하림이가 따라준 이 한 잔만 딱 먹으면 되겠지. 어차피 더 먹고 싶은 맘도 없고 그냥 서하림이랑 어울려 주려고 마시는 거였다.
“나는 정말 모르겠어.”
“뭘?”
“술이 대체 뭐가 맛있다고 먹는 건지.”
내 말에 서하림이 작게 웃었다.
“와인은 소믈리에라는 직업까지 딸려 있을 정도지만 그래 봤자 발효된 신포도 맛이고 소주는 그냥 에탄올 맛 아냐.”
“맞아. 맥주는 쉰 보리 맛이고 막걸리도 발효된 쌀 맛, 위스키나 보드카 기타 등등 모두 공통적으로 쓴맛이 나는 데다가 미식의 의미로 맛이 있다고 하기엔 좀 힘들지.”
좀 전에 두 병을 넘게 마시고 왔단 사람 치고 너무도 태연하게 온갖 술을 비난하는 게 살짝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좀 바보같이 보였겠다.
“그……럼 넌 대체 왜 하루가 멀다고 마시는데?”
“그거야.”
한 입 먹고 내려놨던 딸기 카나페를 마저 먹은 서하림이 말을 이었다.
“웃기잖아. 술이 뭐라고. 알콜이 대뇌랑 중추신경 기능 억제하는 거 뻔히 다 아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일부러 바보가 되는 걸 자처한다는 게.”
“저기, 너도 많이 먹으면 취한다는 걸 모르고 계시는 건 아니죠?”
“그래서 되도록 안 취하려고 평소에 조금만 마시잖아. 한 세 병 정도.”
“서하림이 이렇게 술을 잘 마실 줄 누가 알았겠냐.”
“내 말이.”
어깨를 으쓱한 서하림이 “술고래 짠!” 하며 내 와인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근데 그러면, 너랑 같이 먹으러 간 사람들 죄다 취해서 토하고 소리 지르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물 계속 엎고 그런 거 보면 좀 더럽고 어떻게 치우지 그런 생각은 안 들어?”
“들지.”
“네가 그걸 치워?”
“설마.”
“그럼?”
“소리 지르면 좀 옆으로 피하고 물 쏟고 그릇 엎고 그러면 자리 바꾸고. 그런 한심한 모습들 보다가 더 이상 못 참겠으면 돈 넉넉하게 두고 나와. 토하면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튀고. 아 오늘처럼 울거나 궁상맞은 분위기 돼도.”
생각해 보면 서하림 데리러 갈 때는 늘 술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지 내가 안까지 들어간 적은 두 번뿐이다. 한 번은 서하림이 유일하게 취했던 날이고 다른 한 번은 서하림이 나한테 연락하고선 화장실 간다고 빠져나오려는데 사람들이 화장실도 못 가게 잡은 탓에 탈출 실패를 했을 때다.
그때 진짜 웃겼는데. 문 앞에 서 있던 내게 전화하라는 수신호를 보내길래 전화를 걸었더니 ‘네?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요?’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빠져나왔다. 존나 웃긴 건 그 얘기에 술 취한 사람들이 그런 급한 일이면 어서 집에 가보라며 서하림을 바로 놔줬다는 거다.
“그리고 다들 술 취하면 말이 많아지잖아. 그러면 나오는 얘기들도 재밌어. 물론 나만 제정신이니 가끔 불똥 튈 때도 있긴 한데, 사람이란 진짜 한심하고도 신기한 존재구나 하는 철학적 사고에 도달하게 돼. 그래서 열심히 마시는 거야. 음 아니 마셔주는 건가?”
“……이해 못 하겠어.”
“이해하라고 한 얘기 아니야. 너야 이해 이전에 아저씨 때문에 술 존나 싫어하니까.”
대답은 하지 않고 하몽을 얹은 메론을 먹었다. 달고 짠 조합이 무척 괜찮았다. 아직 서하림이 이건 먹지 않아 포크로 찍어 서하림 입 앞에 가져갔다. 당연하단 듯이 입을 벌려 먹는 게 보기 좋았다.
“이런 칙칙한 얘기 말고 다른 얘기 하자. 재미없다. 음…… 너 그럼 전공 교재 보기 편하겠다.”
“응?”
“나는 온갖 영어 단어랑 공식이 판치는 책이지만 너는 한국어에 기껏 해봐야 한자뿐이잖아. 너 한자 급수가…… 2급이었나?”
“3급. 중2 때 너 따라 한다고.”
“맞아, 그랬지.”
“진짜 서하림 넌 사람도 아니야. 어떻게 올림피아드에 학교 시험도 올백 맞으면서 한자 1급을 딸 생각을 해?”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너 지금 좀 재수 없는 거 알지?”
“알아. 좀이 아니고 많이 없을걸. 머리 좋게 태어난 걸 어떡하라고.”
우리는 그렇게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시답잖은 얘기를 해도 즐거웠다. 나는 학과며 학교 생활에 전혀 참여하는 게 없어 얘기하는 거라곤 기껏해야 과외 애들 이야기, 요리 이야기, 운동 이야기가 전부였고 서하림은 물리학과 천문학의 차이점이라거나 얼마나 대단한 교수님들에게 수업을 듣는지, 사람들이 물리학도라고 하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과대가 맘에 안 든다던가 어떤 동아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유럽 어디 어딜 다녀왔는지, 누구랑 누구가 사귀는 중이고 운전면허는 언제쯤 딸 생각인지까지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 애의 목소리가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 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감상하듯 들었다. 사실 내용은 와인이 한 모금 두 모금 넘어갈수록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내 앞에 앉아 내게만 이야기를 속삭이는 서하림을 눈에 담고, 듣기 좋은 목소리를 듣고 이따금 손을 맞잡기도 하면서, 그냥 그렇게…… 로맨틱한 시간을 몽롱한 기분으로 아깝게 흘려보냈다.
내가 고작 와인 한 잔을 서른 번쯤으로 나누어 마시는 동안 서하림은 혼자 와인 두 병을 마셨다. 진짜…… 진짜 대단해.
“이제 우리 정리하고 자자.”
“응. 내일 내가 할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서하림의 옆에 앉아 있었다. 언제 자릴 옮긴 거지…….
“씻기 귀찮다. 피곤해.”
“으응.”
깍지 낀 손을 놓기가 싫다.
“너 씻을 거지.”
“응.”
“그럼 나 먼저 씻겨줘.”
“응.”
“양치도 해주고 발도 닦아주고.”
“응.”
이렇게 착하고 예쁘게 나오는데 뭐든 다 해주고도 남는다. 하림이가 먼저 나보고 씻겨달라니……. 서하림이 먼저 일어나고 나서야 나는 흐느적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 어질어질하고 바닥이 자꾸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지만 하림이 씻겨주는 건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기분도 좋고…….
“일단…… 옷을 벗어야지. 벗길게.”
취하긴 했는지 단추도 없는 옷을 벗기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바지를 벗기고 속옷도 내렸다. 예쁜 모양의 얌전한 하림이의 것을 보니 왠지 더운 것 같아 나도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하림이의 것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세우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예쁘게 생겨서.
“이건 그냥, 별 뜻 없고 그냥…… 예쁜 조각상 보는 느낌이라…… 보기만.”
의사 선생님이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 청진기로 가슴 위를 진찰하는 것처럼 나도 하림이의 것을 끝에서 끝까지 살짝 건드린 뒤 욕실로 들어갔다. 이미 내 것은 반쯤 발기 된 상태였지만 꿈을 꾸는 것 같은 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말없이 얌전하고 순한 하림이도 좋고.
“양치 먼저. 이게 서하림 칫솔이고 이게 내 칫솔. 내가 양치해 주는 거니까 내 거로. 나는 네 걸로 할 거야.”
내 칫솔에 치약을 짜 하림이의 입술로 가져갔다. 순순히 벌리는 입안으로 칫솔을 넣어 구석구석을 천천히 쓸었다. 좁은 입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나는 아주 가까이 서하림의 얼굴에 붙어 양치질을 했다.
“……나 있지. 가끔 너랑 너무 늦게 알아서 아쉬울 때가 있는데, 우리 애들은 갓난아기 때부터 친구였는데 너랑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잠깐 만나고 제대로 만난 건 5학년 때고…… 그래서 되게 아쉬운 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
“이빨 있잖아. 유치…… 그거…… 네 거…… 못 갖게 된 거 아쉬워. 네 이빨도 까치가 가져갔어? 우리가 1년만, 아니 2년만 일찍 만났으면 네 이빨 하나 정도는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해. 작고 예쁜 유리병에 넣어두고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대신 그걸로 버티는 거지. 얼마나 귀여웠을까? 지금보다 훨씬 작고, 동그랗고…… 아니 네모난가, 아무튼 귀여웠을 텐데…….”
칫솔질하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하림이가 아프면 안 되니까. 이빨, 잇몸, 혀, 입천장까지 전부 다 닦아주고 양치 컵 대신 내 손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굴 수 있게 했다.
“아 뭔가 이거 되게 야한 거 같아. 전에, 우리 이렇게 내가 손에 내 정액 묻은 거 네가 핥아줬던 거 생각나. 그때 되게…… 고양이 혀 같았는데.”
체온보다 살짝 따뜻한 물을 틀어 얼굴을 닦아주고 폼클렌징으로 거품을 내 부드럽게 얼굴을 세안했다. 안 그래도 좋은 피부가 물기에 더 탱글탱글해 보였다.
하림이의 손을 이끌어 샤워 부스에 들어갔다. 널찍한 욕조에 아예 우리 둘이 앉아 씻을까도 생각했지만 술 먹고 따뜻한 물 오래 맞으면 안 좋다고 어디서 본 게 생각나 그냥 샤워기를 틀었다. 하림이의 온몸에 닿는 물줄기를 따라 내 바지도 젖어갔다. 물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으며 잔뜩 성이 난 것이 도드라졌다. 애써 무시하며 샴푸를 짜 머리를 감겼다.
안 그래도 좋은 머릿결이 미끄러운 샴푸를 만나 녹아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알콜에 흥분 효과도 있는 걸까? 샴푸로 머리를 감기고 물로 씻겨주면서 손가락 사이 여린 살에 서하림의 머리카락이 닿을 때마다 간질거리는 동시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손가락 사이사이가 성감대라도 되는 것처럼.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짰다. 조금 진정을 할 필요가 있어 샤워볼을 한참 주물럭거리며 거품을 엄청나게 만들었다.
목부터. 닦기 용이하도록 서하림의 턱을 잡고 살짝 들었더니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에 별 박힌 거 같아. 너무 예쁘다.”
“…….”
“네 피부도…….”
목부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손길은 다분히 성적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아닌 척했다. 이대로…… 하면 좋긴 하겠지만 그냥 지금 이 분위기를 이어 가고 싶어서. 살짝 야한 것 같고 섹시한 기분도 들고. 상상인지 현실인지 싶은 정도도 나쁘지 않았다.
“말랑말랑한데 탄탄하고…… 탱탱하기도 해. 내 손에 잘 달라붙기도 잘 달라붙고…… 촉촉하고 부드러워. 아기 피부야 완전.”
하림이 추워할까 봐 끄지 않고 저쪽으로 돌려놓은 샤워기 때문인지 더운 공기와 수증기가 시야를 가리고 안 그래도 멍한 머릿속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술에 취하면 나는 좀 말이 많아지는 타입인지 내가 생각해도 좀 아무 말 대잔치를 열심히 내뱉고 있었다.
그렇다고 멈추기엔…… 하림이는 너무 예쁘고 잘생겼고…… 그래서 하림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양하는 말들이 자꾸만 자꾸만 새어나왔다. 얘기하면서 바보처럼 웃기도 했다. 너무 팔불출 같아서.
“자고 싶어.”
무릎을 꿇고 앉아 샤워볼로 서하림의 발을 문지르며 네 발바닥을 핥고 싶단 얘길 한창 하고 있는데 하품과 함께 하림이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 정도면 이제 다 됐겠지. 발만 닦으면 끝이었으니까.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고 잠옷에 안대에 수면 모자까지 다 씌워 눕히고 나니 시간은 세 시가 넘어 있었다. 방 불을 끄고 침대 옆 스탠드를 제일 낮은 밝기로 켰다. 빛이지만 어둠에 가까웠다.
“잘 자.”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안녕을 고했다. 나는 그 입술에 홀린 듯 우두커니 서서 서하림의 숨소리를 들었다. 살짝 뒤척이던 몸이 완전히 멈추고 숨소리도 규칙적으로 변해간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조금 힘들었을 것이다.
“…….”
나는 숨소리도 죽인 채 서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얼굴의 반을 가려 고작해야 코 조금과 얼굴 하관이 보이는 게 전부인 서하림을 감상하기 위해서.
얼마나 그렇게 보고만 있었을까.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며 성기를 꺼내 들었다. 서하림은 잠에 빠지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른다. 거기다 오늘은 술도 마셨다. 잠에 들어도 아주 푹 들었을 거다.
아주 오랜 시간 서하림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라앉지 못하는 힘찬 내 성기를 하림이의 입술에 가져갔다. 도톰하고 예쁜 입술 위로 입맞춤을 하듯 귀두를 살짝 눌렀다 뗐다.
“…….”
말랑한 감촉에 요도에서 프리컴이 비죽 새어 나왔다. 희미한 불빛 덕분에 하얀 몇 방울이 얼핏 눈에 잡혔다. 조심스럽게…… 입술 위로 내 것을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귀두 끝부터 기둥, 뿌리까지. 아주 느린 움직임이었지만 입술이 내 것을 따라 쓸리는 게 꼭 유두를 괴롭힐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뭉개지는 도톰하고 말랑거리는 하림이의 젖꼭지를 떠올리니 성기가 좁은 어딘가에 넣어달라며 움찔거렸다.
성이 나 힘줄까지 잔뜩 솟아 꺼떡거리는 걸 잡고 위아래로 쓸어 달랬다. 아쉽지만 오늘은 이걸로 참자. 비위 약한 서하림에게 하지도 못할 거 술기운에 해볼 수 있잖아.
성기를 잡은 손을 아래로 조금 내려 위치를 조절했다. 하림이의 얼굴과는 직각이 될 수 있도록.
나와는 별개의 생명체라도 되는 것처럼 흉흉하게 움직이는 것을 살짝 흔들어 귀두가 닫혀 있는 입술을 비집어 열게 만들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무의식 상태의 인간은 참으로 무력했다. 하림인 꿈에서도 자기가 뭘 물고 있을지 모르겠지. 안다면 바로 구역질을 하며 기침을 했을 테지만 이미 무의식에 빠져 잠에 든 이상 내가 입안에 사정을 해도 알 수가 없었다.
이왕이면 혀까지 닿았으면 좋겠지만 억지로 턱을 열었다간 자칫 잘못해서 깰 수가 있으니까…… 고작 귀두 끝밖에 못 들어갔지만 이 정도만 돼도 오늘은 충분했다. 뒤보다는 확실히 더 촉촉하고 물에 젖은 곳이라 그런지 내 것을 조이거나 빨진 않아도 색다른 기분이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비위 약한 애 입에 남자 성기가, 그것도 모양이 징그럽고 색도 좆같은 내 것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삽입 섹스만큼 값진 행위였다.
아까 하림이에게 어떻게 양치질을 해줬더라. 칫솔 대신 비릿하고 뜨겁고 단단한 음란한 살덩이로 서하림의 고운 치열을 훑었다. 귀두에 치약 묻히고 입안을 쑤셔주면 그것도 양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졌지만 몇 번이고 숨을 크게 들이 내쉬면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최대한 오래, 많이 서하림 입안에 있고 싶었다.
어느새 동이 터오는지 방 안이 푸르스름했다. 암막 커튼 치는 걸 까먹었다. 원래는 하림이의 인사를 듣고 자는 거까지 확인한 다음에 스탠드 불도 끄고 암막 커튼을 친 다음에 내 방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이게 다 빌어먹을 술 때문이다. 아니 사실 빌어먹을 건 아니고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지만 아빠 새낄 생각하면 도저히 곱게 얘기해 주고 싶지 않았다.
하림이의 숨소리는 여전히 일정했다. 나만 미쳐 돌아 발정이 나서 헉헉거릴 뿐이었다.
“읏…….”
사정감을 참고 참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최대한 버티다 성기를 뺐다. 빼자마자 입술 위로 정액이 떨어졌다. 입술에다 사정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니 사실 하고 싶었다. 입안에 못 하니까. 많이 양보해 입술에다가라도, 뭐 그런 맘이었다.
꽤 많은 정액을 싸질러 놓고도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을 입술 주변에 비볐다. 입술 안쪽은 닦을 수가 없으니까 입술이 벌어지지 않도록 아주 조심하고 세심하게 해야 했다. 비비면 비빌수록 정액이 퍼져 마치 립글로즈를 바른 것처럼 맨질맨질해졌다.
서랍 안에서 물티슈를 꺼내 하림이의 얼굴을 닦고 내 손과 성기도 닦았다. 여전히 배꼽까지 발기한 채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 고추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방에 돌아가서 몇 번 더 빼야 잘 수 있을 듯싶다.
하림이 입술과 얼굴에 코를 가져가 정액 냄새가 나지 않는지를 확인했다. 세 번은 닦은 거 같은데 여전히 희미하게 비린 냄새가 났다. 뭐 이 정도면 이따 낮에 일어나면 사라지겠지. 근데 안 사라졌으면…… 하는 못된 욕심도 든다.
속옷 안으로 성기를 넣었다. 풀 발기 상태라 넣어도 빼 놓은 것과 다를 게 없었지만 그래도 속옷 밴드가 성기를 고정해 준다는 의의가 있었다.
암막 커튼을 치고 스탠드 불빛도 껐다. 아침 해가 완전히 떠올라 사람들의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고 나서야 화장실을 벗어나 내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곱 시. 스터디룸은 굉장히 시끄럽고 무의미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노트북으로 정해진 할당량을 착실히 채운 건 나 외엔 없었다. 그마저도 한 명은 좀 전에 전화 통화를 하다가 길어질 것 같은지 아예 밖에 나가 거의 한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다른 날이었으면 과외를 내일로 미루거나 한 회분을 취소했을 텐데 내일 광주에 대학교 백일장이 있어 애들 글을 첨삭해 줘야 하는 아주 중요한 날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조별 과제 한답시고 모이라는 것도 뺄 순 없어 어떻게든 시간 내서 모였더니 누구는 게임, 누구는 쇼핑, 누구는 전화 통화. 말로는 각자 알아서 하라 그러면 잘 안 할 거 아니까 시간 맞춰 짧고 굵게 하자고 해놓고 짧고 굵게 놀고만 있다. 처음엔 다들 집중하는 것 같더니만. 이럴 거면 굳이 왜 모이게 한 건지 모르겠다.
여덟 시로 과외를 늦췄으니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내 몫은 다 했으니까 이쯤에서 칼같이 일어나도 당당했다.
“나 간다.”
“벌써?”
“아까 과외 때문에 일곱 시에 간다고 했잖아. 카페에 내 거 다 정리해서 올려놨어. 간다. 안녕히 계세요.”
막 주문해서 나온 크레이프 케이크를 먹던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장인 김승민은 게임 중인 휴대폰을 내려놓고 좀 더 있다 가라며 붙잡았지만 대꾸도 않고 스터디룸 문을 열었다.
“헐, 너 벌써 가? 오는 길에 나도 물.”
밖에선 아직도 전화가 끝나지 않은 한예원이 턱으로 정수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반응도 하지 않고 내 것만 따라 마시는 걸 보곤 부탁한다며 엄지를 펴 보인다. 무시하려다가 어차피 한예원이 앉아 있는 대기 의자가 나가는 문 옆에 바로 붙어 있어 간만에 인심 크게 썼다.
“땡쓰. 아 근데 김동규 잠깐만! 언니, 내가 사진 보낼 테니까 끊지 말고 5분만 기다려.”
내가 건넨 물을 원샷 한 한예원이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탁이 있는데.”
“컵 치우는 건 네가 해.”
“아니, 컵 내가 치울 건데 그냥 별건 아니고 사진 좀 찍어도 될까?”
칙칙한 스터디룸 카페가 뭘 그렇게 대단하다고 사진까지 찍어달란 건지 싶었지만 SNS에 과제 중이란 티를 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는데 동시에 한예원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휴대폰으로 사진 찍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뭐 하냐.”
“찍어도 된다며? 자 찍는다, 포즈 좀 잘 취해 봐. 치즈으!”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찰칵 소리가 나기도 전에 한예원의 휴대폰을 잡아챘다.
“야아! 내놔!”
위로 팔을 뻗어 갤러리를 확인했다.
“비밀번호 뭐야.”
“어차피 흔들려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을걸? 야!”
“흔들렸든 어쨌든 비밀번호 뭐냐고.”
“내놔! 내가 지우게!”
한예원이 열심히 뛰어도 절대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 휴대폰을 흔들었다. 비밀번호를 말하지 않으면 떨어뜨리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아씨, 12369야! 떨어뜨리면 고소할 줄 알아!”
잠금 해제된 갤러리에서 사진을 삭제하고 한예원에게 돌려줬다. 기분 존나 좆같아서 인사도 안 하고 나가려는 내 앞으로 한예원이 뛰어와 나가는 문을 가로막았다.
“야. 나 지금 너 때문에 과외 늦을 거 같거든.”
“진짜 미안한데 내 말 좀 들어주라.”
“왜 내 사진을 찍은 건지 모르겠는데 다짜고짜 이러니까 좀 불쾌하고 짜증 나지만 지금 바쁘니까 이유 안 묻고 없었던 일로 칠게. 비켜.”
“야야야야야! 그럼 1분만. 아니 10초만. 설명 빠르게 할게.”
“좋게 말할 때 비켜. 꺼지라는 말로 해줘야 돼?”
“진짜 10초! 5초! 딴 게 아니라, 김동규 너 피팅 모델 알바 안 할래? 얼굴은 안 나와! 빼박으로 꽂아주는 건 아니고 아니 거의 꽂아줄 수 있긴 한데 사촌 언니가 사진작가거든? 근데 같이하기로 한 모델이 사고가 났는데 이게 스포츠웨어라서 아무나 못 해. 왜냐면 클라이언트가 몸이 좋은 사람을 원한대. 근데 또 외국인은 안 된다고 그래서 언니가 주변에 피지컬 좋은 애 있으면 좀 소개해 달래서 네가 딱일 거 같길래 일단 사진만 보내보려고 했던 거야!”
입에 모터라도 단 건지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저 긴말을 다 쏟아냈다.
“그게 왜.”
“어?”
한예원이 숨을 고르며 눈을 크게 떴다.
“체교과 사람이나 운동부 사람한테 부탁하든가. 왜 나한테 이러는데. 야 나 과외 늦었다고.”
“운동한다고 다 몸이 좋고 키가 큰 게 아니더라고. 왜, 야구선수 중에도 뚱들 많잖아. 그리고 이런 건 비율도 엄청 매우 진짜 중요해서 아무나 못 한대.”
“너는 내가 상황 설명도 없이 갑자기 휴대폰 들이밀면서 사진 찍어대면 기분 좋겠어? 가뜩이나 중요한 약속 있는데 시간도 계속 뺏겨가면서?”
“아니, 그건…… 잠깐만. 언니! 내가 좀 이따 다시 전화할게. 어, 어. 어 아냐 어, 어어, 울지 말고. 어어.”
나갈 생각으로 손잡이를 잡았더니 한예원이 두 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힘을 줬다.
“먼저 설명부터 해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상황 설명부터 다시 할게. 언니한테 좀 아까 방금 전에 진짜 급하게 전화가 왔었어. 지금 끊은 전화. 언니가 급한 일이라고 큰일 났다고 이제 죽었다고 그러길래 내가 생각 없이 우리 과에 몸 좋은 남자애 같이 과제 중인데 얘기해 볼까? 했더니 언니가 빨리 사진부터 찍어 보내 보라고 그래서…… 언니가 큰일 났다고 그러니까 나도 조급했나 봐. 미안. 진짜 미안해. 아, 너 시간 없다고 그랬지? 쏘리. 얼른 가봐. 담주에 봐!”
한예원은 문까지 열어주며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더 얘기했고 나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로 한예원이 사촌 언니에게 다시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택시는 건물 바로 앞에서 잡을 수 있었지만 남부순환로가 존나 막힐 시간이라 8시까지 도착 할 수 있을지는 택시 기사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얘들아 나 좀 늦을 거 같은데]
〈이제 출발해]
[ㅇㅇㅇㅇㅇ〉
[헐〉
[얼마나요〉
[저녁 먹는 중이라〉
〈글쎄 길 막히면 한 시간도 더 걸릴걸]
[헐 조심히 오세요〉
[좀 늦어도 상관없을듯〉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ㅋㅇㅋ〉
[손가락 병신됨?〉
[성의;;〉
아이들 어머님들께도 길이 막혀 조금 늦을 수 있다고 연락을 넣었다.
읽지 않아도 과외방 메시지 숫자가 빠르게 올라가는 걸 보니 셋이 또 싸우는 모양인데 어차피 알아서 풀릴 거라 끼어들지 않는 게 현명한 방법이었다.
수업은 숙제로 주제를 주고 아이들이 써 가지고 온 것을 첨삭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시우는 시, 서현이는 소설, 지아는 둘 다 썼다. 숙제를 첨삭해 주며(내가 재창조해 주는 수준이긴 하다) 영 별로인 건 버리고 괜찮게 탄생한 건 달달 외우도록 시켰다. 첫 두 달은 그렇게 해서 각자 괜찮은 작품들을 몇 개 만들어놓았고 3월부터는 숙제를 할 때 새로 창작을 하거나 외운 걸 주제에 맞춰 변형하도록 했더니 지난달에 수상 인센티브가 엄청났다.
시우는 그렇게 잘 쓰는 편은 아니지만 손이 빠르고 잔머리가 좋다. 숙제로 두 편씩 써오라는 것을 몇 편 더 써올 때가 있는데, 그것들을 뜯어고쳐 내가 써준 거나 다름없는 시들을 전부 외워 입선이나 장려를 거의 백일장마다 받아 왔다. 온갖 주제로 샘플을 다양하게 만들어 놨으니 큰 상은 못 받아도 상장 개수는 제일 많았다. 시우 부모님은 머리 나쁜 아들 전문대라도 좋으니 서울에서 다니게 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큰 상이 없어도 전문대 문창과라면 이대로 계속 자잘한 상장을 적립해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일단 시우는 셋 중에 공부를 제일 못해서 이거 아니면 학교에 건물을 세워주는 거 말곤 답이 없다.
서현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SNS에 감성 글을 많이 써봤다고 하더니 문장력도 괜찮고 감수성도 좋아서 작년부터 내가 봐줬다면 올해는 큰 상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문체가 거의 뭐 시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라 다 좋은데 부잣집에서 태어나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어 스토리가 너무 부실한 게 유일한 흠이었다. 200자 원고지로 몇십 장의 단편소설을 내야 하는 예선 있는 백일장보단 2천 자 내외를 쓰는 당일 백일장이 잘 맞았다. 실적은 그렇게 좋진 않아 최악의 상황으로 예대 정시 실기까지 생각하고 있다.
셋 중 기대주는 지아인데 센스가 워낙 좋고 막상 글을 써보니 감각이 있어서 4월에 인천 백일장에서 차상을 받고 S여대 여고생 문학상에서 장원을 받았다. 엄마가 유명한 광고 프로덕션 감독이라 정 안 되면 엄마 연줄 타고 방송 스텝이나 할 생각이었다던 지아는 최근 기자라는 멋진 장래희망도 생겨 제일 열심히 했다.
아무튼 셋 다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고 덕분에 상을 잘 받아와 줘서 저번 달 인센티브가 과외비보다 더 많았다. 이번 달도 그러지 않을까. 큰 기대를 하는 중이다.
“선생님 밥은요?”
“대충 먹었어. 얼른 올라가자.”
“대충? 쌤 하루에 다섯 끼 푸드파이터처럼 먹는다면서요.”
“그 정돈 아냐.”
“라면 다섯 개 끓여 먹음 푸드파이터지 뭐임.”
“선생님 치킨 혼자서 1인 3닭 한다지 않았나?”
“고기는 11인분!”
“엄마가 샌드위치 만들어놨는데 주먹밥이라도 해달라고 할까요?”
스터디룸에서 먹은 빵들로는 배가 별로 차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과외 할 때 주전부리가 항상 준비되어 있긴 하지만 오늘처럼 늦은 날은 좀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따끈한 주먹밥을 먹으며 아이들이 써온 걸 더 꼼꼼하게 봐주고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광주 G대학교 백일장 예선 통과가 뜬 날 학부모 쪽에서 ‘교통편과 식사는 우리가 준비할게요’라고 했다. 아홉 시까지 데리러 오겠단 말에 무슨 광주를 백일장 시작하기 네 시간 전에 가는지, 그 시간 안에 식사는 또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지 싶어 아침 먹고 준비까지 다 끝내 놓고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아홉 시 정각이 되자 까만 차 한 대가 오피스텔 정문에 섰다. 차에 탔을 때만 해도 당연히 KTX를 타러 용산역에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사 아저씨한테 어딜 가는지 물어보지 않았으나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김포공항이었다.
얼떨떨한 나완 다르게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비행기를 탔다. 탑승객은 우리 넷이 전부였다. 나는 광주에도 공항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 시간 뒤 광주 공항에 도착했고 공항을 나가니 연예인들이 타고 다닐 것 같은 커다란 차가 우릴 광주 맛집에 데려다줬다. 40분 정도 식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대학교 정문 앞에서 내렸다. 백일장이 시작하기까지 아이들이 샘플 노트를 세 번은 읽고 차도 한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광주라는 멀고 먼 곳으로 백일장을 가는 길이 이렇게 빠르고 편할 줄이야.
G대학교 백일장은 1학년 때 갔었다. 백일장이 1시부터라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좁은 고속버스에 몸을 욱여넣어 힘들게 다녀온 기억이 있다. 12시 전에 도착하면 중식을 제공한다 했지만 불가능할 것 같아 대신 휴게소에서 이것저것 잔뜩 사 먹었더니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지 속이 부대껴 제대로 쓰지도 못해 장려상을 받았다. 왕복 열두 시간이란 긴긴 여정을 마치고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더니 아빠 새끼가 밥 내놓으라고 또 지랄을 해대길래 중국집에서 세트 메뉴를 네 개 시켜 나눠 먹었다. 물론, 내 돈으로.
두 시간 진행된 본선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겨우 세 시간. 피곤한 것도 불편할 것도 없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지아네 집에 들러 어떤 주제로 어떻게 썼는지 피드백 시간을 가졌다. 이 정도라면 광주가 아니라 제주라도 두 시간 잠깐 글 쓰러 갔다 올 수 있겠다 싶었다.
조별 과제가 아니었으면 서로 이름도 몰랐을 한예원은 어떻게 알았는지 이 넓은 캠퍼스 안에서 나를 찾아냈다. 과에서 내 번호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도 않고 같이 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같은 과긴 해도 얘랑 수업 겹치는 건 조별과제로 묶인 ‘한국문학과 한국사회’뿐이다.
“제발 부탁할게. 안 될까?”
다음 강의는 2시에 있어서 시간이 세 시간이나 빈다. 서하림 시간표 떠올리며 서하림이 있을 강의동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30분이면 이번 시간이 끝나기 때문에 얼굴 보고 점심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응?”
“사람 살리고 싶으면 의사를 찾아가.”
“야,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나도 아닌데.”
“아니 내가 네 몸이 아까워서 그런 거라구. 거울 보면서 그런 생각 안 해?”
“…….”
“어? 하나 본데?”
“다른 사람 찾아.”
좀 지치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싫다고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인문대랑 자연대가 그래도 제법 붙어 있는 편인 게 늘 좋았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캠퍼스 양 끝에 있어서 한예원이 따라 걷다 힘들다며 나가떨어지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싫다는 데도 제멋대로 내 사진을 찍어 사촌 언니한테 보내놓고, 지난주 했던 말에 의하면 확실히 꽂아주는 것도 아니라면서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건지. 아니 반응 보면 확실히 된 거 같지만 내 쪽은 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일당 암만 많이 준다고 해도 과외비보단 한참 적었고 집도 서하림 거라 공과비 안 내도 되고, 생활비는 영수증만 주면 걔네 집에서 주기 때문에 굉장히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중이라.
내가 등록금을 내길 해, 아니면 돈 드는 취미 생활이 있길 해. 유일하게 쓰는 큰돈이라면 휴대폰 요금?
“야! 좀 천천히 걸어!”
걸음 속도를 더 올렸다. 거의 경보 수준이었다.
“아오씨…….”
좀 있으면 서하림이 나올 건물 앞 벤치에 앉아 가방을 뒤적거렸다.
“하, 더워, 씨, 너 여기서 딱 기다려. 뭐 마실래? 사줄게.”
“아이스티. 제일 큰 거로.”
“도망가면 안 돼. 알았지?”
“생각해 보고.”
“야! 내가 아이스티도 사주잖아!”
“내 돈으로 사 먹으면 도망가도 되겠네.”
“알았어, 알았어! 너 진짜 이렇게 성격 꼬이고 이상한 줄도 모르고 애들이…… 아오 됐다. 사 올 테니까 기다려. 진짜 잘 좀 생각해 봐줘. 얼굴 나오는 거 아니고 하루에서 이틀만 찍으면 되는데 잘 하면 하루에도 된다 그랬어. 아 일단 나 존나 목마르니까 어디 가지 말고 있어. 제발!”
다급하게 사라진 한예원은 몇 분 되지도 않아 음료를 들고 달려왔다.
“조리…… 기능사 필기?”
차가운 아이스티를 받아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 뭐, 요리사 하게? 글 안 쓰고?”
“그냥 취미.”
“취미? 취민데 기능사를 따게? 오올 요리하는 남자? 누구한테 잘 해주려고 기능사까지 따시나아?”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러대길래 페이지를 넘기며 벤치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 오죽하면 내가 친하지도 않은 너한테 이렇게 음료까지 사다 바치면서 부탁을 하겠어. 우리 언니 아니었음 나도 너 귀찮게 안 해. 근데 언니가 네가 좋다잖아. 너만 한 피지컬을 찾을 수가 없다는데, 응?”
이 정도 무시하면 알아서 나가떨어지던데 한예원은 포기도 않고 계속 사촌 언니 이야기를 떠들었다. 때마침 서하림이 오지 않았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한 바퀴 빙 돌 생각이었다.
“어, 김동규 하이!”
“끝났어?”
“응.”
서하림이 손을 까딱까딱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티를 서하림에게 건넸다. 이럴 줄 알고 빨대 이용해서 내 침을 아이스티에 풀어뒀다. 그것도 모르는 서하림은 내가 마시던 빨대를 물고 음료를 마셨다. 서하림과 빨대로 간접 키스한 것도 좋고 서하림이 내 침이 섞인 줄도 모르는 아이스티 빨아 먹는 것도 좋고.
“헐, 너 서하림이랑 친구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 이거 다 마신다?”
“응. 다 마셔.”
얼굴 봤으니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갈 생각으로 조리기능사 책을 가방에 넣고 일어났다. 서하림 친구들은 먼저 간다며 사라졌다.
“점심 뭐 먹어?”
“애들이 농식 가재. 오늘 거기 맛있는 거 나온대서. 오리 어쩌고였는데.”
“저기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서하림이 한예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 좋았는데 산통 깰 건 뭐람. 세상 모든 사람이 서하림 빼고 다 뒤지거나 지구 밖으로 꺼져 줬으면 좋겠다.
“네.”
“저는 김동규랑 같은 과 한예원이라고 하는데요, 말 놔도 되지?”
“응.”
“김동규가 너랑 친할 줄은…… 몰랐어.”
“초등학교부터 쭉 같은 곳 다녔어.”
“아, 그럼 완전 친하겠네. 저기 하림이 너도 김동규 좀 같이 꼬셔줄래?”
“꼬시다니?”
언제 봤다고 서하림보고 하림이래? 존나 빡쳐서 걸음을 멈추고 한예원을 째려봤다. 뒤로 쳐진 나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림이와 한예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크으, 하림이 네가 봐도 김동규 몸 좋지 않아?”
“야 한예원.”
“말하자면 긴데 내 친척 언니가 사진작가라 지금 스포츠웨어 광고 사진 찍는 중이거든? 근데 지난주에 피팅 모델이 사고가 나서 빵꾸가 났어. 근데 클라이언트가 근육 빵빵! 피지컬 빵빵! 거기다 키도 크고 비율도 좋은 모델 원한대서 내가 김동규보고 해달라고 했는데 죽어도 싫다고 뺀다 계속. 그 아이스티도 내가 바친 거야.”
“아 그래?”
“같이 좀 꼬셔줘. 일당도 세게 쳐준다는데 싫다네.”
하림이가 얼마 남지 않은 아이스티를 전부 빨아 마시더니 쓰레기통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한예원 때문에 짜증 나긴 한데 몸 좋다고 물어본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조금 궁금했다. 별…… 생각 없는 건 아니겠지. 아닌가…… 없나…….
“야, 내가 진짜 아까워서 그런다니까? 네가 키만 멀대같이 크고 멸치였으면, 에휴 됐다. 언니도 봐봐. 언니가 메시지 보낸 거. 작가로서 너만 한 사람 없다는 거. 사람도 없고 시간도 없고.”
메시지 보라면서 휴대폰 액정은 내가 아니라 하림이한테만 들이미는 건 뭔지. 시간이 없다니까 내가 계속 안 한다고 빼면 사진작가든 광고주든 적당히 타협한 모델을 찾아낼 것이다. 밥 먹으러 가자며 서하림을 보챘다.
“밥 먹으러 가는 애 귀찮게 하지 말고 가라 좀.”
“와 진짜 저 저…… 됐어. 나도 이제 몰라! 그래! 하지 마라, 하지 마. 열심히 뒤지면 너 같은 피지컬 하나 안 나오겠냐. 어차피 내 일도 아닌데 몰라 몰라. 하림아, 나도 같이 밥 먹어도 돼?”
“음, 아니. 친구들이랑 먹는 거라.”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나도 내 친구랑 밥 먹어야겠다. 하림이 안녕, 나중에 또 보자. 꼭!”
빨리 꺼지라는 눈빛을 레이저로 쐈다. 한예원이 주먹을 쥐고 날 때리는 시늉을 했지만 착한 하림이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제 귀찮은 일로부터 해방이구나.
“그렇게 싫었어? 안도의 한숨을 쉬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더니 웃으며 물어왔다.
“어.”
지난주 금요일에 과외 늦은 것까지 떠올라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다시 생각해도 짜증 나네. 나한테 말도 없이 사진부터 찍어댄 건 내 쪽에서 고소를 할 일이 아닌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서하림이 오른쪽으로 빠져 컵을 버리러 갔다. 나는 앞으로 발을 더 떼지도 못하고 서하림이 쓰레기통에서 돌아올 때까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애매한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단숨에 이해했고 마음을 헤집기엔 충분했다.
“뭐 해. 안 가?”
“어…… 나 생각해 보니까 약속 있어.”
“그래?”
“응. 이따 집에서 봐.”
하림일 뒤로하고 좀 전에 한예원이 사라진 곳으로 뛰어갔다. 방금 전에 헤어졌는데도 꽤 뛴 후에야 걸어가며 열심히 뭔가를 쓰고 있는 한예원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야.”
“깜짝아! 엥 김동규?”
“할게. 사진 그거, 빠르면 하루도 된다 그랬지?”
“진짜? 뭐야 왜 갑자기 한다는 거야?”
“싫음 말고.”
“헐, 확실한 거지? 나 언니한테 전화 좀 할게. 말 바꾸면 안 된다?”
혹시 내가 말을 바꾸거나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이 되는지 한예원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언니! 얘 된대! 한대! 몰라, 뭔 변덕인지. 언니 나 얘한테 꺼지란 소리도 들었던 거 알지? 용돈 크게 줘야 돼.”
“점심이나 사. 나 밥 엄청 많이 먹어.”
고개를 끄덕이며 한예원은 통화를 이어갔다.
잘 어울릴 것 같다니. 잘 어울……. 광고 사진 얘기가 잡담으로 넘어가 한참 뒤에서야 통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서하림이 했던 말을 끊임없이 곱씹으며 자꾸만 풀어지는 얼굴을 꾹꾹 누르기 바빴다.
촬영장은 꽤 신기한 곳이었다. 사진 촬영이라길래 실내 세트장 같은 곳에서 사진작가랑 모델들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스텝 숫자가 엄청났다. 누가 보면 드라마나 영화 찍는 줄 알겠다.
촬영은 이틀이지만 빠르면 하루 만에 끝난다고 해놓고 일주일을 넘게 촬영했다. 한예원의 사촌 언니라는 사진작가님이 워낙 말을 잘해서 분명 싫다고 딱 잡아떼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때?”로 생각되는 말을 몇 마디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촬영은 열흘이나 늘어나 어느덧 마지막 날이었다. 과외 있는 날은 칼같이 빼줘서 그건 좋았다.
“어! 동규 왔어? 빨리 들어와서 옷 벗어!”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대기실로 끌려 들어와 가방과 짐들을 내 이름이 적힌 박스에 담았다. 오늘 있는 상탈 촬영도 분명 안 하겠다고 몇 번이나 얘길 했는데 작가님이 뭐라고 뭐라고 하고 나니까 나도 모르게 하겠다고 한 뒤였다.
주춤거리며 옷을 벗자 한숨이 푹푹 나왔다. 스텝이 빨리빨리 벗으라며 소리쳤다. 다시 생각해도 작가님 진짜 말 너무 잘한다. 모델도 연예인도 많이 찍는다는데 그 화려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저런 화술과 능글거림은 필수인 듯싶었다.
“아, 저기. 저, 저기요.”
스텝이 벗은 내 상체 앞뒤로 스프레이를 뿌린 뒤 찰싹찰싹 소리를 내며 문질렀다. 당황스러워 두 팔로 가슴을 가렸지만 스텝이 내 손을 치우고는 짜증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빨리 합시다. 반짝반짝 근육 잘 받게 해주는 거예요. 오일 같은 건 너무 튀니까 은은하게 반사되는 거.”
“아니, 저 살살…… 간지러운데요.”
“만세 하고 뒤돌아보세요.”
“네.”
등은 살살은 무슨 대놓고 찰싹거려서 간지러움을 넘어선 아픔이 느껴졌다. 괜히 말 많이 했다.
“김동규 씨 이거 들고 이렇게 한번 해보세요.”
스텝이 덤벨을 건네주며 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덤벨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어깨높이만큼 옆으로 올렸다가 내리는 간단한 움직임이었다.
다음 순서는 메이크업과 헤어. 사진에 얼굴이 잘린다는데 왜 머리며 얼굴까지 건드려야 하는지 일반인인 나로선 이해를 못 하겠지만 목 위를 자르더라도 머리나 얼굴도 가볍게 건드려야 찍을 맛이 난다는 게 작가님의 지론이었다.
바로 스튜디오로 가려다가 잠깐은 괜찮겠지 싶어 거울을 마주 보고 팔뚝이나 가슴에 힘을 줘 근육을 세워보기도 하고 두 팔을 머리 뒤로 넘겨보기도 했다. 렌즈도 꼈고 머리도 멋있고. 스프레이 덕인지 근육들이 좀 더 돋보여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하게 몸이 좋은 다른 모델들이 죄다 상의를 탈의하고 있어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힘을 빡 준 채로 촬영장에 들어갔다. 몸이야 비슷비슷할지 몰라도 키는 여기서 내가 제일 컸기 때문에 조금 우쭐해진 기분이 들었다.
“안녕 안녕.”
한예원이 작가님 옆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나는 본 척도 안 하고 모델 무리에 들어갔다. 쟨 왜 온 거래.
“야. 봤으면서 왜 모른 척해?”
“몰라.”
“설마…… 내가 너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지? 꿈 깨. 나 남자 친구 있구.”
갑자기 말을 멈춘 한예원이 휴대폰을 두들기더니 내 눈앞에 화면을 들이댔다.
[나 쟤랑 작년부터 사귀고 있어서 촬영 놀러 온 거야 우리 둘이 사귀는 거 비밀이니까 딴 데 가서 말하면 안 돼]
한예원이 눈빛으로 가리킨 건 제일 먼저 촬영을 하고 있는 어느 연예인이었다. 배우라고 했던 거 같은데. 키는 나보다 한참 작았지만 180 언저리였고 슬림한 근육이 있는 남자였다. 어제부턴 화보 촬영도 한다더니 그 화보를 찍는단 연예인이 한예원 남자 친구였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잘생겼지. 옛날부터 언니가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 촬영하게 되면 촬영장 가끔 놀러 오는데 고1 겨울방학 땐가 쟤가 내 번호 언니한테 물어봐서 그때부터 연락했다? 근데 쟤가 너무 바빠서 만나질 못하니 전화랑 메시지로 썸만 열심히 타다가 작년 여름에 고백받고 그때부터.”
사귀기 시작했어. 뒷말은 입 모양으로 읊기만 하는 게 얘도 나름 고충이 많겠구나 싶다.
“근데 워낙 바쁘시니까 내가 이렇게 행차해야지 안 그러면 잘 못 만나겠더라고.”
“난 연예인 잘 몰라.”
“그래? 그럼 좋아하는 아이돌은?”
“없어.”
“재미없는 놈. 근데 네 친구 서하림은 연예인 할 생각 없대?”
“없대.”
“말을 말자 말을.”
한예원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지 작가님이 계속 포즈를 이렇게 취해라 얼굴 각도를 이렇게 해라 눈빛은 저렇게 해라 몇 번이고 수정 디렉을 넣었지만 잘되지 않아 결국 작가님이 좀 쉬다 가자며 내려왔다. 그가 한예원에게 쪼르르 달려온 뒤 나와 모델들이 스튜디오로 올라갔다.
“자, 얼른 찍고 고기 먹으러 갑시다!”
“네!”
모델들은 고기 먹을 생각에 즐거운지 다들 웃고 있었지만 나만 아니었다. 회식도 작가님 화술에 얼렁뚱땅 넘어간 탓이었다.
‘술을 못 먹는다고? 맥주 만CC는 마실 것 같은 몸인데.’
‘반병도 못 마셔요.’
‘그럼 와서 콜라만 마셔. 한 방울도 못 먹게 막아 줄게.’
‘끝나면 집에 가고 싶은데요…….’
‘안 돼 안 돼. 나 원래 촬영 다 끝나면 스텝들이랑 모델들한테 한턱 쏴야 맘도 편하고 뭣보다 내가 촬영 기념으로 뭐 안 쏘면 다음 촬영이 망하는 징크스가 있어. 저번에 밤새워서 찍었다고 힘들어서 집 갔더니 이번에 봐봐. 사고 한 번 난 거. 너야 알바 개념으로 한 번 하고 만다지만 나는 이게 직업인데 담 번 내 촬영을 망하게 할 생각은 아니겠지? 제일 끝에 있는 듯 없는 듯 앉아서 물만 홀짝이다가 대충 눈치 보고 조용히 집에 가. 안 붙잡을게.’
몇 번씩 하의를 갈아입으며 단체 사진을 찍는 동안 한예원과 남자 친구는 둘만의 세상에 빠져 웃느라 난리였다. 비밀이라고 치기엔 티가 너무 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단체 사진을 찍은 뒤엔 한예원 남자 친구가 올라왔다. 좀 쉬고 나니 괜찮아졌는지 OK 사인이 수차례 떨어졌다. 그 뒤엔 모델들 개인 촬영이 이어졌고 9시가 조금 넘어서 촬영이 마무리됐다.
모델들은 촬영 기간 동안 몸 관리한다고 제대로 먹지 못했다며 빨리 고깃집을 가자고 빛의 속도로 옷을 갈아입었다. 문자로 고깃집 위치를 보내줬기 때문에 모델이든 스텝이든 정리 다 끝낸 사람들은 먼저 가 먹고 있기로 했다.
나는 최대한 늦게 도착해 제일 빨리 나올 생각이라 옷을 갈아입고 나서도 잠시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야, 너 안 가?”
“가야지.”
스텝도 몇 명 남지 않은 것 같아 대기실을 나왔더니 한예원이 있었다.
“같이 안 갔어?”
남자 친구도 없고 사촌 언니도 없는데 왜 혼자 여깄냐는 말을 돌려 물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한예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비밀 연애하잖아. 같이 갔다가 뭔 말이 돌 줄 알고. 언니랑 먼저 가라고 보냈지. 지금 갈 거지? 같이 가.”
“그러든가.”
우리는 별로 안 친한 사이였지만 한예원은 고깃집으로 걸어가는 20분 동안 내가 촬영 때문에 참석하지 않은 조별 과제가 내가 카페에 착실하게 올려놓은 자료들 덕분에 수월하게 진행됐다는 얘기, 남자 친구 얘기 조금 그리고 얼굴 아깝다는 서하림 얘기를 했다. 다른 사람에게 서하림 얘기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아 서하림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것들을 전부 잘 모른다며 넘겨 버렸다.
나와 한예원이 고깃집에 도착해 자리를 잡자 내 앞엔 꽉 채운 술잔이 넘어왔다. 술을 잘 못 먹는다고 얘기했더니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한예원은 도착하자마자 메시지 보내느라 난리였는데 저쪽에 있는 남자 친구도 고개를 푹 숙인 게 아무래도 둘이 열심히 대화 중인 듯했다.
“나 진짜 동규 씨랑 너무 얘기하고 싶었어. 갑자기 투입되고 촬영하느라 뭐 제대로 얘길 나눠 볼 시간이 없었는데.”
작가님의 어시라는 남자가 고기를 씹은 채로 말했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촬영장에서 제일 바삐 돌아다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왜요?”
고기는 한 점 먹지도 않고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던 한예원이 고갤 벌떡 들더니 나대신 물었다.
“갑자기 메인 모델이 빠지게 됐는데 어디서 이런 피사체가 튀어나왔는지, 계약자의 입장에서 안도 되고 작가로서는 감탄?”
“야 거봐. 너 안 한다 했으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죽을 뻔했지?”
한예원이 팔짱까지 끼며 뿌듯한 얼굴로 말했지만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일이라 말없이 콜라만 홀짝였다.
“정신없어서 제대로 못 물어봤는데, 동규 씨 뭐 따로 PT 받아? 어디 다녀? 이 정도면 어후, 하루 서른 시간은 운동해야겠는데?”
“그냥 집 근처 헬스장이요.”
“내가 아직 새끼 작가긴 해도 선배님 따라다니면서 몸 좋단 연예인, 모델, 운동선수 많이 봤거든. 근데 모델들은 키가 커도 근육은 잘 없고 연예인들은 보기 좋은 정도로만 키운단 말이죠? 선수들이야 몸이 좋아도 키가 큰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 없어요. 근데 동규 씨는 키도 크지 몸도, 거기다 피부색도 완전 끝장나지. 이거 봐 이거 봐. 이건, 이 정도는 관리도 관린데 타고난 거야.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겠는데?”
어시는 내 팔뚝을 주무르며 말했다. 좀 민망했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니까.
“아휴, 말도 마세요. 많기만 하겠어요? 얘 우리 과에서 얼마나.”
“아빠가.”
손사래를 친 한예원이 이상한 말을 할 것 같아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냥 계속 가만히 있으려고 그랬는데 망했다.
“아빠가 유도 선수였어요.”
“역시! 물려받은 거면 아빠도 키가 꽤 장신이겠는데? 그럼 체급도 높았겠고.”
“유명한 선수였어요?”
“저 어릴 때라 잘은 몰라요.”
뭐라고 질문들이 더 들어왔지만 어색하게 반응하며 흘렸다. 국대라고 했다간 걷잡을 수 없이 내게로 집중이 쏟아질까 봐 얘기하지 않았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람이 많아 반응 없는 나보단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야기가 빠르게 넘어갔다. 내게서 멀어진 관심 덕에 숨통이 트여 이제야 고기를 먹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조용히 고기나 배부르게 먹고 눈에 안 띄게 사라져야지.
나와 한예원이 앉아 있는 마지막 테이블 불판엔 내가 시킨 양념갈비가 끊임없이 올라갔다. 작가님이 맘 편히 시켜도 된다 해서 위장 열고 정말 편하게 주문했다. 한예원이 남자 친구랑 메시지를 보내는 와중에도 간간이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 먼저 간다. 드라이브하러. 안녕!”
“어.”
“학교에서 봐.”
한예원이 먼저 일어나 나가고 10분쯤 뒤에 남자 친구도 매니저가 내일 촬영 있으니 빨리 집에 가보라고 연락이 왔다면서 자연스럽게 고깃집을 빠져나갔다. 남자 친구가 술을 먹었으니 운전은 한예원이 하려나?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열심히 고기를 먹었고 불판을 열다섯 번쯤 갈았을 때 막차를 타기 위해 조용히 빠져나왔다. 작가님이 안 잡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슬그머니 빠진다고 못 알아챌 수가 없는 몸뚱이라 누군가 잡으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한 시간이 넘도록 말도 없이 고기만 먹어서인지 다행히 사람들에게 잊혀질 수 있었다.
술도 한 잔 안 먹었는데 그래도 촬영했다고 긴장을 해서 그런가, 지하철 타고 오는 길에 잠깐 졸았다. 마을버스를 타려다가 막차가 끊긴 걸 깨닫고 소화도 시킬 겸 공공 자전거를 결제했다. 걸어가면 30분이 넘는 거리지만 자전거를 타면 10분 남짓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잘 타진 못하지만 이 시간엔 사람이 적어 탈 만했다. 나와는 다르게 서하림은 자전거를 무척 잘 탄다. 이것만 나보다 더 잘하겠냐만, 나는 사람 많은 곳에선 탈 생각도 안 들고 안전한 자전거 도로에서 타는 걸 즐기는데 서하림은 사람이 많아도 비포장도로여도 잘만 탔다.
옛날에, 중학생 때 서하림과 함께 한강에서 자전거를 탄 적이 있다. 자고 있는데 갑자기 서하림에게 전화가 와 새벽에 퉁퉁 부운 눈으로 뛰어나갔다. 자전거가 없다는 내게 서하림이 자신의 로드바이크를 하나 빌려줘 어리둥절한 상태로 자전거에 올라탔지만 아무도 없는 새벽에 서하림과 밤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있는 자체가 즐거웠다. 한 10분쯤 달리자 체육공원에 도착했고 탄천 자전거 도로를 타고 달리며 한강 라이딩을 했다. 속도를 내며 신나하는 서하림의 얼굴과 열심히 발길질하는 뒷모습만 봐도 행복해 왜 갑자기 불러냈는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만두를 먹었는데 냉동만두라 서하림이 맛이 없다고 해 만두는 내가 다 먹었다.
추억을 곱씹다 보니 집에 금방 도착했다. 별생각 없이 오피스텔 입구에서 우리 동 건물을 살펴보는데, 이상하게 우리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오후에 집에서 나올 때면 늦게 들어올 하림이를 위해 조명들을 은은하게 틀어놓고 나오지 거실 불은 켜 놓지 않았으므로 하림이가 집에 와 있단 표시였다.
나는 하림이를 볼 생각에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꼭대기 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웠다. 어차피 우리 집은 5층이라 뛰어가면 금방이었다.
“서하림!”
현관문을 열자 보인 건 평소랑 다르게 정리되지 않은 신발과 바닥에 버리듯 뒤집어진 백팩이었다. 아무래도 오늘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하림아.”
회식을 한다는 건 미리 얘기를 해 두었다. 서하림도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했고, 하지만 12시 전에는 빠져나올 거니까 데리러 갈 수 있다고 연락을 하라는 말도 같이 했다. 12시 전에 술자리가 끝나서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은 건가. 뭐가 됐든 서하림이 날 배려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방에도 없고 서재에도 없고. 씻는다기엔 물소리도 들리지 않아 서하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하림의 전화벨이 들린 곳은 다름 아닌 욕실이었다.
“여기서 뭐 해.”
욕실 바닥엔 서하림이 벗은 옷들이 허물처럼 놓여 있었다. 현관에 있던 정리되지 않은 신발과 배를 까고 있던 가방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단단히 취한 것 같다.
“많이 먹었어?”
욕조에 누워 있는 서하림은 우습게도 속옷은 입은 채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에 든 것처럼 아무 말도 없어서 하림이 얼굴 위로 손을 흔들었다.
“자? 침대로 데려다줄까?”
“……아니. 잘 거면 침대에 누워 있었겠지.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
까칠하게 반응하는 거 보니 백 프로 취했다. 나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뒤 팔을 걷고 욕조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언제 왔어? 연락하지. 데리러 갔을 텐데.”
“회식이라며.”
“빠져도 아무도 뭐라 안 해.”
“…….”
나는 욕조 밖으로 빠져나온 서하림의 팔을 주물렀다. 기분 좋은지 하림이에게서 낮은 비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취한 거 오랜만에 본다. 두 달 만인가.”
“왜. 토라도 할까 봐.”
“나는 좋지.”
“토가?”
“네 거라면 토든 똥이든 땀이든 다 좋아.”
“더러워. 이상해.”
여전히 잠자는 듯한 예쁜 얼굴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다. 주무르던 손을 놓고 욕조 안으로 손을 뻗어 하림이의 매끈한 허벅지를 잡았다. 사타구니부터 무릎까지 위아래로 천천히 쓸어 올리길 반복했다.
“너한테서 맛있는 냄새 나.”
서하림은 굳게 감겨 있던 눈을 드디어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물 때문인지 젖어 있는 듯한 그 눈빛을 받아 내며 몸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서하림의 예쁜 눈동자는 내게 발정제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회식으로 양념돼지갈비 먹었거든.”
“김동규 돼지 한 마리 잡아먹고 왔겠네.”
“어떻게 알았어?”
“너 많이 먹는 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
“…….”
그런가. 물속에 잠겨 있는 하림이의 몸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허벅지를 쓰는 손은 여전히 느린 속도로 안쪽 여린 살을 지분거렸다.
“너 말고는 잘 몰라. 내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그런 거는 자주 보고 또 친해야 아는 거잖아.”
“같이 씻을래?”
서하림이 두 다리를 세워 제 허벅지 사이에 내 손이 끼도록 했다. 술에 취한 서하림은 상상 속 닳고 닳은 서하림보다 훨씬 더 섹시하고 요망하고…… 나를 끊임없이 분탕질하며 시험에 들게 만든다.
“안경 벗은 거 오랜만에 본다. 렌즈 낀 건가. 머리도 만진 거 같은데. 너 머리 그렇게 세운 거 처음 봐.”
“…….”
“멋있다. 잘 어울리네.”
입고 있던 옷들을 어떻게 벗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찢어졌을 수도 있다. 서하림과 다르게 나는 속옷까지 죄다 벗어던지고 욕조에 들어갔다. 우리 둘이 들어가도 사이즈가 남는 대형 욕조라 서하림 옆에서 헐떡거리기엔 충분했다.
하림이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자기한테 홀려 좆을 발딱 세워 끙끙대는 게 그렇게 좋을까? 입술이 자꾸 말라 하림이를 내 위로 올렸다. 몸이 늘어지는지 하림이는 물먹은 인형처럼 힘없이 안겨 왔다. 나는 하림이의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세게 움켜잡았다.
“잠깐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는데, 하림이가 내 어깨를 잡고 맞붙어 있던 상체를 떼어냈다.
“왜, 왜?”
이미 딱딱해진 내 성기가 빨리 넣어달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중이었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하림이의 젖꼭지라도 빨 생각으로 고개를 쭉 빼는데 하림이가 여전히 어깨를 잡고 있어 불가능했다.
“기다려.”
“왜…….”
애탄 내 목소리를 듣고 서하림이 또 웃었다. 어쩐지 조금 부끄럽고 쪽팔렸다.
한쪽 손으로는 여전히 내 어깨를 붙잡고, 자유로워진 손으로 서하림은 내 가슴을 꾹 눌렀다. 욕조 밖에 나와 있어 따뜻해지지 못한 손끝 하나가 가슴 근육을 누르는 게 간지러웠다.
“아, 왜 그래…….”
“이거 뭐야. 뭐 발랐어? 오, 미끌미끌해. 오일 같은데.”
“모, 몰라 나도.”
“오오, 맞는 거 같은데. 물에 기름 뜬다. 이런 걸 왜 발랐어?”
그냥 누르기만 해도 죽을 것 같은데 서하림이 아예 손을 펼쳐 내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상체 탈의로 촬영했다고 하면 서하림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라면 서하림이 그런 사진을 찍었단 말에 엄청난 분노를 느끼고 서하림의 발가벗은 몸을 본 작가나 스텝들을 어떻게 하면 소리 없이 죽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사진 데이터가 담긴 컴퓨터와 SD카드를 못 부셔서 안달이 났을 거다. 하지만…… 하림이는 아니겠지. 조금 울적해졌다.
“의외로 말랑말랑한데? 근육이라도 가슴은 가슴이란 거지.”
가슴을 주무르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배를 눌렀다.
“여긴 좀 더 딱딱하네.”
아,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이런 식으로 서하림이 날 만지는 게 처음이라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랫배가 팽팽해졌고 사정감이 터질 것처럼 차올랐지만, 그것도 참았다.
“나는 워낙 어릴 때부터 봐왔고 늘 보던 거라 몰랐는데.”
“아, 하림아…….”
사정감을 참아야 해서 배에 힘을 잔뜩 줬더니 복근이 뚜렷하게 갈라지며 근육 모양이 튀어나왔다. 그걸 보고 서하림은 “오오” 같은 얼빠진 감탄사를 내며 나머지 한 손까지 내리더니 손바닥으로 내 복근을 열심히 만져댔다.
“서하림…….”
애타게 이름을 불러봤지만 소용이 없다.
“남들이 보기엔 되게 좋은 몸인가 봐.”
“…….”
“나도 나름대론 몸이 좋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응응. 나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
“네 생각 말고,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응…… 하, 하림아 저기, 손…….”
“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
손바닥으로 복근을 만져대던 손이 양옆으로 갈라져 옆구리와 할배근, 목과 팔뚝까지 훑어댔다.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한 번 사정하고 말았다. 거칠게 터지는 숨은 뜨거웠고 서하림의 얼굴은 여전히 즐거워 보였다. 나는 60kg이 넘는 서하림이 위에 앉아 있었음에도 흥분감에 허리와 엉덩이를 들썩였다. 내 몸을 따라 서하림의 몸도 흔들렸다.
“애들이 너 되게 싫어했거든.”
나만 조급한가? 서하림의 엉덩이를 터트릴 것처럼 움켜잡으며 신음을 참아대는 동안, 서하림의 것도 분명 점점 앞이 부푸는 게 보인다. 그런데 왜, 왜 서하림은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 거지? 급한 대로 손가락 하나를 서하림 안에 쑤셔 넣었다.
“아……!”
겨우 하나뿐인데, 조여 오는 내벽이 쫀득했다. 어서 더 들어오라며 움찔거리는 탓에 나는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아으…….”
속옷을 아직 입고 있어 손가락을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그래도 일단 서하림 안에 내 뭔가를 쑤셔 넣었다는 것에 돌아버릴 것 같던 뇌가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하림이가 싫다고 빼지도 않았고.
“알고 있었어.”
“아, 으…… 움직이지는, 응, 마아…….”
서하림의 손바닥은 내 가슴팍 위에 올려져 있다. 왼쪽 가슴 위에 올려진 서하림의 손바닥엔 아마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펌프질을 하는 내 심장의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거였다. 평소라면 절대 들을 수 없는 늘어지는 말꼬리가 사람을 돌게 했다. 달콤한 신음을 흘리며 아래로는 내 손가락을 빨아들이는 젖은 몸이 한없이 음란했다.
“가슴 빨고 싶어.”
“기다, 려. 아직 내 말, 아!”
빨지 말라는 말이 괘씸해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손가락이 길고 두꺼운 편이라 두 개만 넣어도 버거워하는 걸 알지만 그럼 젖꼭지를 빨게 해줬어야지. 보이진 않지만 손가락에 구멍이 한껏 벌어져 있을 것이다. 틱틱거리는 것마저 귀여운 서하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사실 내용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자기도 발기하고 유두도 꼿꼿이 선 상태에서 기어코 말을 하겠다는 것도 귀여워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들어보기로 했다.
“가슴 빨면 말 못 할 거 같으니까, 안 할게. 대신에 빨리…… 빨리 말해.”
“아, 으흣, 소, 손가락, 아…….”
“나 지금 진짜 좆이 터질 거 같거든. 네 입에서 국가 기밀이 나온다고 해도 그런 거 하나도 안 궁금하고 그냥 바로 박고 싶은 거 존나 열심히 참고 있으니까 빨리, 빨리 말해. 아니면 차라리 말 그만하고 내 거나 만지든가. 그것도 싫으면 그냥 아까처럼 몸 만져줘.”
서하림의 한 손을 잡아 아래로 잡아끌었다. 뜨겁고, 흉포해진 내 것을 서하림의 손에 쥐여주었다. 대신 손가락을 뺐다.
“아, 아!”
좆도 아니고 고작 손가락일 뿐인데도 하림이는 새된 소리를 냈다. 음란한 구멍 같으니라고. 그래도 서하림은 숨을 고르며 제 손에 걸린 내 것을 살짝 쥐었다. 서하림이 자기 의지로 내 걸…… 해주려나. 잠시 기대에 차 서하림을 쳐다봤다.
“내 말부터 들어.”
발기한 내 것을 잡고 있던 손을 다시 원위치해 내 가슴팍 위에 올린다. 아, 존나 아쉽다.
“엉덩이는.”
“싫어했던 이유는 좀 많았던 것 같아.”
“엉덩이는 만져도 돼?”
“네가 과외나 학원 다니는 것도 아닌데 공부 잘하는 것도.”
“손가락 안 넣을게.”
“싫다고 그러고.”
“그냥 엉덩이 만지기만 할게.”
“공부 방법도 그냥 교과서 위주로 예습 복습 철저히 한다니까.”
“아니면 내 몸 만져달라니까.”
“재수 없다고 엄청 욕했었다?”
“만져주지도 않고.”
우리는 서로 자기 할 만만 했다. 나는 나대로 급했고 서하림은 서하림대로 고집이 있었다. 서하림은 결국 내 가슴팍에 붙어 있는 것처럼 미동도 없던 제 손을 움직여 내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아, 진짜 남 말 귓등으로도 안 처들어.”
“네 말은 잘 들어.”
“네가? 내 말을?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만져도 되지, 엉덩이.”
“대신 아프게는 안 돼. 힘 빼고 만져. 하여튼 힘만 졸라 무식하게 세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속옷 안에 예쁘게 담겨 있는 엉덩이를 잡았다. 손바닥에 한껏 담기는 작은 엉덩이는 내 손과 맞춤 사이즈였다.
“알고 있어. 학교 다닐 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전부 다 애들이 나 싫어한 거.”
힘만 빼면 뭐 엉덩이 사이도 엉덩이는 맞으니까 만져도 되겠지. 나는 손바닥을 슬금슬금 가운데로 옮겨와 검지로 하림이의 구멍 위를 쓰다듬었다. 날 보는 눈이 조금 험악해졌지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만져도 된다며? 안 아프게, 넣지 않고, 힘 빼고.”
“네 말 못 믿어. 싫다고 그래도 어떻게든지 이런 거 저런 거 하는, 으…….”
좀 전에 굵직한 손가락 세 개를 품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도록 하림이의 뒷구멍은 얌전하게 닫혀 있었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살짝 눌러 늘려도 보고 주변도 살짝 괴롭혔더니 서하림이 몸을 떨어대며 내 몸을 만져대던 손을 멈췄다.
“저번에 나는 말 지켰어. 끝까지 하지 말래서 안 한 거 기억 안 나?”
“야 거기는 엉덩이가, 아, 아니잖아…….”
“그럼 어딘데?”
입을 꾹 다물고는 날 째려본 서하림이 손가락 두 개에 무너지며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러댔다. 소리 내기 싫다고 입술도 말아 물었지만 넣지는 않고 손가락을 놀리는 탓에 자꾸만 입이 벌어지며 좋은 소리가 나왔다. 내게서도 더운 숨이 자꾸만 나왔다.
“어딘데, 응? 여기.”
“아! 야 김동규, 아…… 씨, 하, 으…….”
넣을 기세로 손가락에 힘을 줬는데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서하림이 뒤에 힘을 줬다. 오히려 힘을 줘 뒷구멍을 꽉 닫고 있는 게 내 쪽에선 좋았다. 적당히 힘을 줘도 들어가진 않지만 어쨌든 힘을 줘 자극을 하는 거라 서하림 쪽에서는 뒤를 마사지 받는 거나 다름없는 자극일 거였다.
“어, 엉덩이만 하랬잖아, 미친 새끼야…….”
“어딘데, 말해봐. 여기. 응? 엉덩이가 아니면 뭔데?”
서하림 입에서 어떤 단어가 나올지 궁금해져 계속 보챘다. 서하림의 눈꼬리에 눈물이 달렸지만 나는 실실 쪼갤 뿐이었다. 무슨 단어가 나와도 분명한 건 나는 그 단어를 듣고 사정할 거란 거다. 상상 속의 서하림은 내 취향이며 판타지를 다 때려 박아 빚어낸 존재라 이런 상황이라면 뒷구멍이니 아랫입이니 그런 천박한 단어를 야살스럽게 말하며 넣어달라고 졸라대겠지만 이 하림이는 아니니까. 정숙하고 순결하며 깨끗한 존재니까.
“……아 재미없어. 나 잘래.”
내 위에서 끙끙대던 서하림은 결국 벌떡 일어나 욕조를 나가려 했다. 나는 서하림의 팔목을 잡고 눌러 다시 내 위에 앉혔다. 일어나려는 서하림과 앉히려는 나 사이에서 잠시 실랑이가 일었다. 승자는 나. 서하림 말대로 힘만 졸라 무식하게 센 내 승리였다.
“미안해. 진짜로 장난 안 치고 손만 얌전히 넣고 있을게. 응?”
“못 믿겠다고. 이런 적이 한두 번이야? 모르나 본데, 너 나한테 신뢰도 0이야.”
“그럼 지금 신뢰도 10 적립하면 되지.”
다시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이번엔 정말로 얌전하게 가만히 있었다. 나는 ‘맞지?’ 하는 눈빛을 쏘며 서하림의 말을 기다렸다.
“하…….”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애들이 나 싫어한다고.”
“…….”
“알고 있어. 모르는 게 병신이지. 근데 상관없어. 나도 걔네 똑같이 싫어하는 데다가 걔네가 날 욕하든 따돌리든 하나도 안 무서워서. 왜? 애들이 나 싫어한다니까 불쌍했어? 나 다시 만져줘. 네가 만져주기만 해도 밤새 쌀 수 있을 것 같아. 하림이 손은 약 아니 무슨 손이라고 해야 하지. 너무 야한 손인데.”
“……말 존나 많아.”
“미안. 입 다물고 있을게. 너 할 말 해.”
물이 좀 식은 것 같아서 다리를 뻗어 뜨거운 물을 살짝 틀었다. 세게 틀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하림이 목소리에 방해될까 봐.
“……애들이 널 싫어하는 이유는 엄청 많았어. 근데 그중에는 키 큰 것도 있었고.”
“응.”
“또 이렇게…….”
따뜻한 물을 틀어서인지 서하림이 더듬어서인지 뭐 분명 후자일 테지만 내 몸은 서하림 손을 따라 달아오르며 뜨거워졌다. 양손에 힘이 들어가 하림이의 엉덩이를 조금 세게 잡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은지 서하림은 거기에 대해선 별말이 없었다. 하림이가 내 몸을 더듬는 손길에 소름이 돋는 것도 같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내 탄탄한 몸을 만지면 만질수록 욕정이 타오르면서도 한편으론 평온함과 안정감 같은 것들도 차올랐다.
“키 크고 몸도 좋아서 싫어하더라.”
“남자애들이?”
“응. 엄청.”
“원래 남자 새끼들 지보다 잘난 사람 보면 열폭 개쩔어.”
“…….”
“근데 그럼 너도…….”
복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서하림은 웃고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나는 아까부터 몇 번이고 서하림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혀 위에 올리고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아까부터가 아니고 사진 찍기로 결정했던 그날부터. 그때부터 하림이에게 아침을 만들어주고 약속 있는 날 차로 데리러 갈 때마다, 학교에서 마주치고 식당에서 만나고 작가님과 스텝들이 내 몸을 칭찬하며 추켜세울 때마다.
“너도…….”
“뭐야, 말하려면 끝까지 해. 뭔데 궁금하게 하다 말아.”
근데 막상 물어보려니 너무 부끄러워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하림이가 민망해할 정도로 하림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디가 어떻게 예쁘고 촉감이 어떻고 색이 어떻고 하는 거야 늘 하는 거고 어려울 것도 없는데 반대로 하림이에게 내가 어떤지에 대한 감상을 듣는 건 그래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런가 내 입으로 물어보기가 좀 그랬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보고 몸이 좋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좋단 거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정해진 대답을 뻔히 알고 물어보는 건 너무 속이 보이는 것도 같고…….
아까 하림이가 멋있다고 해줬을 때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서하림이 나를, 내게 그런 식으로 칭찬 같은 얘길 해준 게 처음이어서. 그렇다면 지금 얘길 해봐도 좋지 않을까. 딱 좋은 타이밍인 거 아닐까. 술도 먹었고 그런 만큼 자기가 느낀 걸 솔직하게 얘기할 테니까. 제정신일 때 물어보면 착한 애니까 나 좋으라는 소릴 해주겠지만 그래도…… 만취한 상태의 하림이는 까칠하고 틱틱대고 짜증도 많이 내는 만큼 진실을 말해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자신도 있었다. 서하림은 자기가 잘생기고 잘난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애고 그건 미와 추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단 얘기다. 나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집 밖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발에 채도록 많이 보이는 못생긴 남자들, 키 작은 남자들, 뚱뚱하거나 혹은 깡마른 남자들에 비하면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연예인들 많이 만나 본 사진작가님이 하도 나보고 좋다 좋다 하니까 일시적으로 자신감이 조금은 붙었다고 하는 게 맞았다. 다른 건 몰라도 몸은 하림이보고 어떠냐고 물어보면 좋다는 대답이 나올 것 같은데…… 입을 떼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뭐냐고. 더 기다려야 돼?”
“아니. 그, 어, 음…….”
“나도 뭐.”
“너, 너는, 너도 나…….”
“나 뭐. 나도 네 몸 좋은 거 같냐고?”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니라면 저렇게 정확하게 내 의중을 꿰뚫을 수 없다. 나는 감탄하며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금은 부끄러웠다. 정말 조금.
“음…….”
서하림은 내 몸을 쓰다듬던 팔을 거두고 팔짱을 꼈다. 퍽 진지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좋은 몸이 아니면 뭔데?”
나는 깜찍한 대답을 내놓은 서하림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내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내민 탓에 뒤로 넘어간 서하림이 내 목에 팔을 감아 매달렸다. 나는 속옷에서 손을 빼 서하림의 속옷을 찢어버렸다. 물속이라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뒤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서하림이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따로 뒤에 안 적셔도 되겠지?”
“안 돼. 아, 넣지 마.”
“나 이제 못 참겠어, 응? 안 아프게 할 거야.”
“잠시만, 아! 아윽, 야, 김도, 아, 아! 아……!”
수월할 줄 알고 일단 뒤를 열고 쑤셔 넣긴 했는데 물 안이어도 제대로 풀어주지 않으면 넣기가 힘들단 걸 깨달았다. 삽입을 편하게 하기 위해 몸을 더 숙이며 서하림을 반대쪽 끝까지 밀어 욕조에 등이 닿게 했다. 바로 옆에 달린 수도꼭지를 끄고 귀두만 들어간 것을 서하림의 어깨를 잡고 밀어 올렸다. 하림이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내 품 안에서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림이 입에서 내가 좋단 얘기를, 몸이 좋단 소릴 들었는데 어떻게 참을 수가 있나. 나는 뻑뻑하고 좁은 곳을 억지로 찢어 들어가면서 사정을 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곳에 정액을 쏘아 대느라 정액이 귀두 위에 펼쳐지는 것 같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아, 흐으, 아프, 아…… 아! 아! 잠깐만, 야, 흐, 아! 아, 아!”
왜 매번 처음 하는 것 같은 기분이지. 서하림의 안이 너무 좁고 작은 것도 할 때마다 처음 같은 이유 중 하나겠지만 자주 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도 한몫하지 않을까. 아무리 이렇게 좁아도 매일 내 것으로 쑤시고 벌려주면 어느 정도는 내 것에 맞춰질 것 같은데.
하림이는 필사적으로 날 밀어내기 위해 다리며 팔을 사용했지만 안으로 내 성기가 박힐수록 밀어내는 힘이 약해질 뿐이었다. 사정을 해도 성기가 줄어들 생각을 하질 않는다. 사정한 덕분에 안이 조금 덜 뻑뻑해진 것도 같고. 어느 정도 끝까지 밀어 넣었을 때 허리 짓을 멈췄다. 하림이가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하는 게 안쓰러워 잠시 신사적인 배려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아…… 으, 아…….”
“아직, 조금 남았어.”
“아, 흐으…….”
“너 숨 좀 고르고, 그러고 할게.”
내 배려로 서하림은 꼴깍꼴깍 숨을 쉬며 진정하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던 몸도 조금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진정하라며 하림이의 등을 토닥였다. 목이나 어깨에도 입을 맞췄다. 츕츕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으…… 야, 김동규…….”
“응? 왜, 좋아? 더 빨아줄까?”
진정되길 기다리고는 있는데 부드러운 몸에 입술 놀리는 게 좋아 결국엔 하림이의 유두를 입에 물고 빨아대던 중이었다. 떨어지기 싫어 딱 붙은 상태로 코로 대답했더니 코맹맹한 소리처럼 들려 웃음이 조금 터졌다.
“차라리 침대로 가.”
“그거 좋지.”
한참 물고 있던 유두를 입에서 뺐더니 봉긋 솟은 게 안 빤 것과 차이가 날 정도였다. 나는 하림이의 다리를 내 허리에 감고 그대로 일어났다.
“야, 뭐 해! 아!”
“침대로 가라며. 네 방이 좋아 아니면 내 방?”
“아, 잠시만, 아! 아, 아읏!”
하림이는 내 목에 팔을 감아 몸을 붙여야 할지 아니면 떨어져야 할지 몰라 몸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면서도 그럴수록 아래를 쑤셔대는 내 것 때문에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허리에서 다리를 풀어 서하림이 바닥을 딛고 섰다.
“아…….”
제 다리로 서봤자 내 것은 다 빠지지도 않았다. 마주 보고 선 만큼 빠져나간 그 순간에도 느낀 건지 서하림이 작게 신음을 터트렸다. 아직 빠지지 않고 뒤에 걸려 있는 내 것을 조이는 게 느껴졌다. 서하림이 경악에 찬 눈으로 나를 주먹으로 때려 대서 삽입되어 있던 귀두를 마저 빼고 서하림을 벽으로 몰아붙였다. 달아오른 체온과 미끌거리는 내 몸으로 서하림의 가슴과 배를 문질렀다. 나와 벽 사이에 낀 서하림에게 발정이 난 상태로 온몸을 비벼대고 있으려니 발정 난 수캐가 되어 마운팅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방이 좋겠어. 잘 때 네 정액 냄새 맡으면서 잘래.”
“씨발, 하, 너, 윽……! 아!”
찰싹 달라붙는 서하림의 엉덩이를 잡아 올리며 삽입했다. 그 탓에 서하림이 발끝으로 서며 부들거렸다. 곧바로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서하림의 몸이 주저앉을 것처럼 내려왔지만 뒤에는 벽이 지탱하고 있고 아래에선 내 것이 삽입된 채라 아주 살짝 앉게 됐을 뿐이었다. 나는 벽 쪽으로 서하림을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고 서하림의 다리를 내 허리에 둘렀다.
“아까 봤지? 내려와도 안 빠지는 거. 이대로 가자.”
“윽, 하앗, 아! 으…….”
하림이의 팔을 내 목에 감아 안게 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안에서 쑤셔지는 각도가 달라지는지 하림이가 자꾸만 허리를 튕겨댔다.
내 방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성큼성큼 걸어 침대를 몇 걸음 남겨두고 거의 하림이를 던지다시피 했다. 그만큼 급했고 흥분한 상태였다. 삽입되어 있던 내 것이 쑥 빠지기가 무섭게 침대 위로 달려들었다. 달달 떠는 하림이의 허벅지를 열고 귀두를 하림이의 그곳에 문질렀다. 젤보단 훨씬 미끌거림이 없는 물만 묻어 있는 형국이었지만 어서 넣어 달라며 닿은 귀두에 맞춰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 동규야, 제발…….”
“제발 빨리 넣어달라고?”
멈추지 않고 밀고 들어가는 성기에 서하림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숨만 겨우 터트리며 다리로 시트를 미는 게 위로 도망이라도 가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길쭉한 다리가 미는 힘은 너무나 미약했고 오히려 내가 삽입하느라 몸이 침대 헤드에 자꾸 부딪힐 정도였다.
“그만, 그만, 앗, 으, 그만해…… 아!”
“그만하기엔 여기가.”
몇 센티 남고 확 좁아지는 안쪽을 억지로 박아 벌렸다. 하림이가 허리를 심하게 뒤틀었다. 입을 벌린 채 소리도 내지 못하더니 기어코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나는 그 달콤한 눈물을 핥아 마시며 붉게 물든 눈가에 입을 맞췄다.
“너무 좋아하는 거 같지 않아? 움직일게.”
“아, 아니! 아니 동규야 잠깐만, 제발…… 응? 아, 자, 잠깐만이라고 했잖아!”
성기를 반쯤 빼고 다시 쳐올렸다. 정신을 차린 서하림이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쪽쪽거리는 나를 거세게 밀쳤다. 나는 떨어지기 무섭게 상체를 힘으로 내리고 서하림은 서하림대로 날 밀어내고. 그렇게 잠시 힘겨루기를 하다가 내가 몸을 들어 올리며 백기를 들었다. 여전히 삽입한 상태였지만, 씩씩거리며 우는 하림이가 정말로 아파 보여서 한발 물러난 거였다.
“할 말 있으.”
“아파.”
말을 싹둑 잘라 먹으며 짧은 문장을 내뱉는 서하림은 비장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눈동자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또 길게 흘러내렸다. 아깝게시리. 혀로 눈물을 핥았다.
“아파. 아프다고……. 야…… 아프다고. 어? 아파. 아, 아프, 아프다고.”
내게서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자 서하림은 내 혀를 피하기 위해 얼굴을 자꾸만 움직이며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우는 소릴 최대한 삼키고 자꾸 눈물을 흘려 대서 나는 아까운 눈물을 마시는 데 집중했다. 하림이는 눈물을 더는 흘리지 않겠다는 듯 두 눈을 꾹 감았으나 연신 아프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안 아프게 하면 되는 거지.”
“…….”
“물리적인 크기가 있으니 쉽진 않겠지만 뭐, 해볼게.”
원래 제집인 양 편안하고 포근하던 하림이의 안에서 빠져나왔다. 일부러 천천히 빼냈는데, 짧지 않은 시간에도 느끼며 몸을 트는 서하림은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죽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작년에 수능 보고 아빠 주민등록번호로 사둔 성인용품은 꽤 많았다. 콘돔과 젤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향이 다양했고 그걸 다 써 볼 생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하림이가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그럼 앞으로 그 향이나 맛으로만 사면 되니까.
침대 옆 테이블에서 제일 무난하다는 씨 워터 향의 젤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 세 개에 힘껏 짜 바르고 우선 손가락을 하나 넣었다. 그리고 하림이의 왼쪽 유두를 입에 물었다. 유두와 유륜 그리고 주변 살까지 전부 한 번에.
“으…….”
강하게 빨아 살덩이 전체를 혀로 치대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가슴은 세게 빨면 빨수록 이빨이 살을 누르는 힘도 강해지는 탓에 딱히 깨물지 않아도 이빨 눌린 자국이 남았다. 오래 갈 자국을 남기려면 아프도록 깨물면 되지만 아프진 않게 하기로 했으니 자연스럽게 생기는 정도로만 만들고 싶어 이를 세우는 대신 흡입하는 힘을 높였다.
나는 이쪽 젖꼭지가 너무 좋다. 서하림 젖꼭지를 짝짝이로 만들면 너무 야하고 좋을 거 같아서 유독 얘를 괴롭히는 걸지도 모른다.
손가락을 하나 더 넣고 앞쪽으로 굽혀 전립선을 건드렸다. 가슴 빨리는 건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진 건지 신음을 잘만 참아대다가 전립선 쪽 건드니까 바로 몸이 튀며 신음이 나왔다. 그 소리에 빨판처럼 하림이의 젖꼭지를 빨다 웃음이 터져 버렸다.
“젖꼭지는 아파도 좀 참아. 뒤가 찢어져서 아픈 것보단 낫지?”
“흐으…… 아, 아흐읏…….”
“왜, 어디 다쳤을 때 다른 곳 꼬집으면 덜 아프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여긴 좀 아프더라도 참는 거야.”
나는 퍽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하림이의 젖꼭지를 물었다.
“아프면 내 머리 다 뜯고.”
얘기하는 중에도 하림이의 것을 놓치기 싫어 이빨로 살짝 깨물면서 얘기했더니 하림이가 바로 내 머리채를 잡았다. 어깰 때리기도 했다. 신음 중간중간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정말 술 취했을 땐 까칠함이 장난 아니라는 게 실감 났다.
그래, 내 상상이랑 현실이 이 정도의 갭은 있어 줘야 진짜로 섹스하는 맛이 있지. 만약 현실의 서하림도 내 상상처럼 멍청하고 맹하고 천박한 소리를 하며 문란하게 허릴 흔들었다면 김이 좀 샜을 것이다. 이렇게 달라 줘야 상상하는 재미도 있을 테고.
손가락들을 쩍 벌리기도 했다가 구부리기도 하면서 최대한 안을 넓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가슴을 빨아 신경을 좀 분산시키긴 했지만 손가락에 달라붙어 조이는 내벽은 여전히 좁았다. 전립선을 계속 자극당해 찔끔찔끔 정액을 토해내더니 이따금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때리는 손에서 힘이 좀 빠진 것도 같았다. 좀 더, 좀 더 풀어주면 될 것 같아 한참 빨던 젖꼭지를 놓아주고 입술을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하림이의 왼쪽 유두는 빨갛게 달아올라 원래의 색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일자로 반듯한 쇄골에 키스 마크를 남기고 그대로 어깨로 입술을 옮겨 혀로 게걸스럽게 핥아댔다. 내가 핥아대고 빨아대는 모든 곳이 서하림의 성감대가 됐으면. 그래서 나랑 살짝만 부딪혀도, 밥을 먹다 팔꿈치가 부딪히거나 도서관에서 어쩌다 보니 같은 책을 빼기 위해 손가락만 닿아도 몸이 달아올라 얼굴을 붉히고 아랫도리를 세우고 달콤한 침을 흘리며 열에 오른 눈으로 날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
자길 어떻게라도 해달라고, 그런 닳고 닳은 말은 서하림이 하진 못할 테지만 눈빛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알아듣고 사람이 적은 구석진 곳으로 서하림을 데려가 최소한의 살만 꺼낸 채 서하림에게 박아 넣어주겠지. 소리는 내지 않도록 하림이의 입을 막아야겠고, 하림이는 혹시라도 누가 자신의 신음을 들을까 봐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떨면서 자기 입을 가린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을 거다. 내 손 위로 하림이 눈물이 흐르면 금상첨화겠지.
차라리 누가 도서관 구석에서 섹스하는 우릴 발견했으면 좋겠다. 깜작 놀라 하림이가 뒤를 조이는 바람에 나는 빼고 싶어도 못 빼는 거다. 나는 관음증도 있으니 우리에게 욕을 하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의 경악한 얼굴을 보며 하림이 안에 사정할 테지.
하림이와 나는 도서관 이용자들과 학생들에게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어쩌면 도서관 이용 금지가 될 수도 있고 학교의 연예인이자 아이돌인 서하림의 평판은 쓰레기가 되어 모두의 입에 걸레 호모 새끼라고 오르내릴 것이다. 동시에 내 거라는 얘기도 함께하겠지. 쟤 김동규랑 섹스했대. 누가 박았대? 김동규가. 헐, 서하림이 박히는 거라고? 그렇대. 어쩌고 저쩌고.
어깨가 침으로 흥건해질 정도가 되어서야 겨드랑이부터 옆구리까지 한 번에 혀로 죽 그으며 내려왔다. 간지럼에 약한 서하림이 몸을 크게 달싹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손가락을 조이고 있던 안쪽이 살짝 풀어졌다. 아, 이건가. 나는 하림이의 안에 넣었던 손가락을 빼고 침대에서 내려와 테이블 제일 아래 칸을 열었다. 서하림이 열에 달뜬 눈으로 나를 쫓았다. 벌써부터 지친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근데 어쩌나,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뭐 찾아?”
전에 무슨 깃털 같은 게 같이 왔었던 것 같은데.
“좋은 거.”
하림이는 할딱이면서도 이불을 끌어와 덮었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 아닐 수가 없지만 곧 사라질 이불로 잠시나마 안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정도 평화는 누리게 해주고 싶어 그냥 뒀다.
아 찾았다. 깃털이 아니라 뭔 솜뭉치 같은 거였다. 개목걸이 같은 것에 털 뭉치가 달려 있는 식이었는데 목걸이에 딱 붙어 있는 건 아니고 목걸이에 연결된 몇 센티의 줄 끝에 털이 달려 있는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털은 섬유가 아니고 물에 젖지 않는 재질을 아주 얇게 뽑아낸 것 같았다. 줄은 길이 조절이 가능하고 정상위든 후배위든 섹스하는 내내 목에 달랑거려서 나나 상대방에게 간질거림을 줄 수 있는 아주, 괜찮은 장난감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걸 목에 차고 이불을 거둬냈다. 서하림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기 직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겁먹은 토끼 같았다. 아. 토끼. 토끼 꼬리 딜도도 한번 사봐야겠다. 섹스하고 하림이 기절하면 그대로 풀어진 뒤에 토끼 꼬리 딜도를 넣어서 아침을 맞이하고, 그대로 화장실에 데려가 소변을 보게 해야지. 나는 그 뒤에 쭈그리고 앉아서 지켜보고 있는 거다. 낯선 감각에 엉덩이도 구멍도 움찔거리느라 귀여운 꼬리가 엉덩이 사이에서 흔들리는 건 정말 보기 좋을 것이다.
“그, 그게 뭔데?”
“좋은 거.”
젤 때문에 반질반질한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확실히 풀어줬더니 쑥 하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쫀쫀하고 늘 그렇듯 빡빡한 내벽이 맞아주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삽입하기 수월할 것 같았다. 털 뭉치를 조금 더 길게 늘이고 손가락을 뺐다. 그리고 엉덩이를 잡아 최대한 벌릴 수 있을 만큼 잔뜩 벌렸다. 그거로도 모자라 양손 엄지를 박아 넣고 내 것의 크기를 가늠하며 뒷구멍을 열었다.
하림이의 옅은 분홍색의 주름들이, 그곳이 가로로 늘어지며 움찔거렸고 힘으로 벌어진 안쪽 붉은 살들이 요동치는 게 보였다. 그 위의 통통한 회음부가 움찔거리며 지금 박아 넣으면 딱일, 그런 광경에 전보다 많이 흐려진 시력과 눈동자가 정말로 안타깝고 짜증스러워 입술이 탔다.
“이렇게까지 풀었는데도 아픈 건, 진짜…… 진짜 어쩔 수 없어.”
“…….”
“이것도 아프다고 울고 때리면 근육이완제 맞아야 돼.”
“뭐라…… 뭐를?”
“근, 육, 이, 완, 제.”
서하림은 근육이완제라는 것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고 단어 자체도 처음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게 어떤 효과를 주는지는 충분히 이해하는 듯했다. 나는 일부러 단어를 한 음절 한 음절 느리게 발음하며 엄지로 벌려 놓은 곳에 귀두를 넣었다. 삽입이나 박아 넣는다는 표현보단 넣는다가 정말 잘 어울릴 정도로 아주 조금의 허릿심만으로 귀두가 들어갔다. 내 손가락 힘에 하얗게 질릴 정도로 구멍이 잔뜩 벌어져 있는 덕분이었다.
“아……! 아, 흐앗, 으으, 앗!”
“어때. 괜찮, 지?”
내 것이 끝에 닿을 때까지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하림이의 발가락이 곱아들며 세운 무릎이 붉게 물들었다. 가는 허벅지가 덜덜 떨렸으나 안에 들어가 조이는 감도가 전보단 나았다. 사실 내 취향은 이렇게 애무에 공들여 잔뜩 풀어진 곳에 넣는 것보단 좆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더라도 세게 조이는 쪽이었으나 부드러운 섹스도 해봐야 하림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섹스는 둘이 함께 즐겨야 하는 행위니까.
귀두에 하림이의 안쪽이 확 좁아지는 느낌이 들자 손가락을 빼고 하림이의 위에 엎어졌다. 완전히 누운 건 아니고 팔을 세워 마주 보게끔. 목에 달린 털 뭉치가 하림이의 가슴에 닿아 움직였다.
“앗, 아아, 하아, 으응, 야 이거…….”
“괜찮은가 봐?”
내 몸이 움직여야 털 뭉치도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귀두가 걸쳐질 정도로 몸을 빼고 강하게 쳐올렸다. 털 뭉치도 내 몸과 함께 흔들리며 서하림의 가슴을 간질였다. 하림이가 바들바들 떨며 신음을 터트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 자, 잠시, 앗, 아! 아, 아…… 동, 아! 아아으…… 이거, 이상하, 아응!”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하림이는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숨도 엇박으로 쉬며 신음만 흘려댔다. 지금껏 내 욕심만 채우기 위한 섹스에서 들었던 하림이의 신음은 예쁜 소리 반, 아파하는 소리 반이었는데 간지러움을 동반한 탓에 고통이 쾌락으로 변해가며 예쁜 신음만이 쏟아져 내 뇌 속을 어지럽혔다.
“너무, 아, 동규야, 하으, 너무 아, 안에…… 아앗! 아! 아, 하으, 아…….”
허릴 뒤로 빼면 나가지 말라며 달라붙는 내벽이 끝까지 쳐올리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조여 댔다. 하림이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아래에서 흔들렸다. 내 팔을 잡았다가, 이불을 잡았다가.
이제야, 드디어, 비로소……. 하림이가 쾌락에 져 울기 시작했다.
“아, 이상해, 그만, 아, 하앗, 아, 그만, 그만해, 읏! 하아…… 아……!”
“나는, 후우…… 좋은데.”
내 쪽에서 터지는 신음을 간신히 눌러 삼키고 속삭였다. 울컥 사정감이 들어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만, 아…… 김동규, 왜, 왜, 아응, 하으…… 아, 안 돼, 아!”
왜 더 커지냐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열기 가득한 숨을 뱉어대는 모습이 예뻤다.
오늘 나는 사정을 조금도 참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에 한 방울까지 전부 싸질러서 더 이상 나올 게 없는 고환이 쪼그라드는 한이 있더라도 하림이 안에다 전부 싸지를 거고 그때가 될 때까지 계속 안에 처박고 있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사정을 하면서도 계속 피스톤질을 멈추지 않았다. 서하림은 내가 사정한 뒤에야 사정했다. 계속해서 아래를 박아오는 탓에 사정의 여운을 즐기지도 못하고 하림이는 그만하라며 울었다. 내게 두 팔을 뻗어 얼굴을 더듬는 손이 심하게 떨렸지만 여기서 멈출 거면 내가 멋지다느니 잘 어울린다느니 그런 소릴 하면 안 됐다.
나는 365일 서하림에게 발정 난 짐승이었고 어떻게 하면 서하림을 발가벗길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서하림의 것을 빨아 정액을 먹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서하림의 귀여운 회음부를, 뒷구멍을 핥아대며 맛볼 수 있을지만 생각하는 쓰레기 새끼였다.
뒤가 찢어지든 말든 서하림이 아파하든 말든 어차피 내가 난잡하고 폭력적으로 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서하림은 그런 날 받아들이고 말 거란 걸 알기 때문에, 애초부터 나란 새끼는 이렇게 글러 먹었으므로 서하림은 날 자극하면 안 됐다.
하림이 역시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떤 새낀지 다 알고 있으면서, 내 몸을 먼저 만져대고 유혹하는 결과가 결국은 섹스에 도달한다는 걸 뻔히 알고도 그런 거다. 몰랐다고 하더라도 서하림의 무의식 속엔 천박하고 음탕한 모습이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날 그렇게 꼬셨댔다.
사정을 했음에도 계속 쑤셔 박았더니 그래도 크기가 아주 약간은 줄어들었다고 씨 워터 향의 젤이 틈새로 물처럼 새어나왔다.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이, 이제 끝이지?”
“설마.”
침대 헤드에 있던 베개를 하림이의 둔부 아래에 받쳐 내 쪽으로 그곳이 들리도록 했다.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박아 넣어 브이 자로 크게 벌렸다. 그리고 청량한 향의 젤을 손가락 사이로 잔뜩 짜 넣었다. 더 많이, 더 깊숙이 젤이 찰 수 있도록 아예 통 입구를 하림이의 구멍에 딱 맞춰 대고 젤 몸통을 눌렀다.
“그만해.”
하림이가 몸을 뒤틀며 빠져나간 탓에 얼마 넣지도 못했다. 넓지도 않은 침대의 끝으로 도망간 서하림은 몸을 말아 무릎을 안고 있었는데, 바보처럼 그 자세가 내게 구멍을 내 보인다는 것도 그래서 거기서 투명한 젤과 내 정액이 줄줄 새는 게 보인단 것도 몰랐다. 그게 얼마나 사람 미치도록 꼴리게 하는 줄도 모르고.
“나 이제 자고 싶어.”
“그럼 잘래? 자도 돼. 잠자도 섹스는 할 수 있어.”
“…….”
“전에 해봤잖아. 그땐 정확히 말하면 잠은 아니고 기절이었지만.”
“…….”
“재워줄까?”
“아……니.”
“그럼 이리 와. 넣는 게 아직도 좀 무서우면 빨아줄게. 너 네 거 빨아주는 거 좋아하잖아.”
아무래도 하림이에게 네가 원하는 섹스를 하기 위해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려줘야 할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해봐. 진짜로 싫었어?”
나는 손을 뻗어 하림이의 발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발가락 다음엔 발등, 그리고 조금 얇은 발목.
“지금까지 음, 내가 좀 아프게 한 건 인정할게. 혈기왕성한 스무 살이잖아? 아, 열아홉 살에도 그랬구나. 아무튼.”
“…….”
“근데, 아까 내가 되게 공들여서 오래 풀어주고 이거 쓰니까 너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하던데. 신음 존나 자지러지고. 아니야? 나만 그렇게 들렸어?”
“…….”
“하림아, 나 너 괴롭히고 아프게 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손을 좀 더 뻗어 예쁜 양 발목 사이에 있는 하림이의 구멍을 살짝 쓰다듬었다. 젤 때문에 반질거린다. 형광등 불빛에 반짝이는 것도 같다. 힘을 줬는지 새던 것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보다 하림이의 경계 어린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래, 서하림은 진짜로 싫은 게 아니다. 아프게 박아대고 쑤셔도 결국 느끼는 몸이니까. 정신을 잃었어도 피를 봤어도 끝내 발기를 하고 뒤로 느껴 사정을 하는 서하림이란 걸 안다.
젤 때문에 구멍은 촉촉한 감촉을 가지고 있었다. 겁먹은 구멍 안을 손가락은 넣지 않고 대신 구멍 모양을 따라, 주름 모양을 따라 손가락을 둥글게 놀렸다. 무릎 위에 올려진 하림이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아까는 별로 안 아팠지. 엄청 좋아하던데. 말해봐.”
손끝에 하림이의 주름이 느껴지자 또 사정감이 찾아왔다. 나는 불편한 왼손으로 내 것을 쓰다듬으며 느리게 사정을 도왔다.
“전에도 얘기했던 거 같은데.”
“응?”
“싫은 건 아니라고.”
“음, 그럼…… 아픈 건 어느 정도 해결됐고……. 네가 원하는 거 말해봐. 같이…… 맞춰보자. 말해봐. 응? 너 말 잘하잖아.”
아 쌌다. 움찔거리며 물 질질 흘리는 하림이 거기를 보고만 있어도 앞으로 세 번은 쌀 수 있을 것 같다.
“원하는 거?”
“응. 다 들어줄게.”
“그럼 비켜.”
“아 자면서 해달라고?”
“아니. 나가라고. 아, 여기 네 방이지.”
하림이는 내 손을 거둬내고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잠시 휘청거리던 서하림의 허릴 잡아 눕혔다. 서하림의 것은 이미 잔뜩 발기해 있었고 서하림은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해대는 중이었다. 대체 좋으면서 왜 이렇게 빼는 것인지 모르겠다가도 이런 모습에서 쾌락에 질지언정 끝까지 정복당하지는 않겠단 서하림의 순결함과 고고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에 비해 나는 또 하림이를 힘으로 내려찍고 하림이의 것을 입에 물어 하림이가 내게 조금이라도 더 더럽혀질 수 있도록 혀를 놀렸다. 어차피 서하림이 완벽하게 타락할 수 없다면 최대한 흥분시키고 색욕에 빠질 수 있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절대 더럽혀지지 않는 작은 성역이 존재하는 게 배덕감을 자극했다. 죽어도 서하림의 그 한 조각은 물들지 않을 테니 상상 속에서 창부 같지만 동정 같은 서하림을 만들었던 거였다.
내 펠라를 받는 서하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 없이 울었다. 가슴팍이 들썩거렸고 숨소리도 죽이려는 듯 조용했다. 내 거친 숨소리와 빠는 소리만이 들렸다. 곧이어 입안 가득 뿌려진 정액을 삼키고 나는 하림이 안에 삽입했다. 하림이는 입술을 깨물고 미간을 구기고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신음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땡땡 부은 왼쪽 젖꼭지를 있는 힘껏 잡아 비틀면서 추삽질을 시작했다. 부은 유두가 짓이겨지는 고통에 처음엔 아픈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곧이어 젖꼭지에서 손이 거두어지고 제 성기에 털 뭉치가 닿자 하림이는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며 할딱거렸다. 허벅지 안쪽 살이 바르르 떨리며 방금 전에 사정한 것이 또 힘을 받기에 털 뭉치가 하림이를 더 자극할 수 있도록 최대한 허리를 세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하림이의 안쪽은 이곳저곳을 쑤시면 쑤실수록 늘어나고 풀어지긴커녕 어서 좆 물을 싸질러 달라는 것처럼 조여 대고 달라붙으며 귀엽게 굴었다. 하림이의 젖꼭지가 열심히 빨아대고 만져 대서 부풀었으니 이 안쪽도 밤새 좆으로 치대고 쑤셔대면 붓지 않을까. 그러면 안 그래도 좁은 하림이의 안쪽은 더 좁아질 테고 더 조일 테고…….
녹은 젤이 성기에 딸려 나오며 자꾸만 흘렀다. 젤 짜 넣은 만큼 내 정액을 싸고 나면 움직일 때마다 꽉 맞물린 이곳에서 물이 흐르듯 내 정액이 흐를까? 오늘 한번 시험해 봐도 좋겠지.
어느덧 하림이의 신음은 앙앙거리는 소리로 바뀌어 나는 우리 둘이 포르노 영화라도 찍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 아래에서 쾌락을 느끼다 못해 온몸을 떨며 울고 있는 서하림이라니, 진짜 낭만적이고 영화 같잖아.
키스하고 싶다. 입술과 혀는 물론이고 날 담는 눈동자도. 눈동자를 핥아도 시력엔 문제가 없다고 본 거 같은데. 눈물이나 침이나 체액이니까.
“하림아, 하림아…… 윽, 하림아, 나, 나…….”
“…….”
하림이에게 키스를 하기 위해 코가 닿을 정도로 다가갔다. 이윽고 나는 서하림의 눈동자에 가득 찬 나를 발견했고 뜨겁게 달아오른 눈물과 그리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성욕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을 두려워하는 하림이의 눈빛과 마주했다. 이런 눈동자, 이런 눈빛, 이런 몸을 가지고선 이토록 격렬한 사랑의 행위를 싫어할 리가 없지. 하림이의 두려움은 성적인 자극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랑해, 하림아…….”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또 사정했으며 허리는 멈추지 않았고 다만 하림이에게 입을 맞출 뿐이었다. 서하림은 두 눈을 감으며 내 혀를 받아들였다. 아까운 눈물이 또르르 흘렸지만 잠시 뒤 하림이가 눈을 번쩍 뜨며 입술을 떼고 내 목을 껴안으며 사정했다. 눈물 정도야, 오르가즘에 떠는 하림이가 나를 안겠다는데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다.
허리짓을 멈추고 날 안고 있는 하림이의 떨림이 멎을 때까지 나 역시 하림이를 안아주었다. 가만히 있을 뿐이었는데 잘게 떨리는 몸과 삼켜 내는 신음만으로도 하림이 안에서 발기하는 내 것이 느껴져 진정된 하림이가 날 놓아줬을 때 또다시 거침없는 피스톤질이 시작됐다.
하림이는 이제 마지막 한 조각의 이성과 성역을 제외한 모든 것을 쾌락에 던지며 내게 매달렸다. 빨아달라는 듯 먼저 가슴을 내밀어 빨개진 젖꼭지로 유혹했고, 잠시 쉬라고 내 것을 빼줬을 땐 뒤로 돌아 통통한 엉덩이를 내보였다. 그게 빨리 다시 박아 달라는 게 아니면 도대체 뭔지 싶어 숨차하는 하림이의 허리를 안아 박았다. 이번에 사정을 한 뒤로는 성기가 나오고 들어갈 때마다 젤보다는 내 정액이 딸려 나오기 시작했다.
“하림아, 나 궁, 금한 거 후우, 있는데.”
“…….”
“너도 취하면, 필름 끊겨?”
“하으으…… 아, 아! 아읏, 하아…….”
흔들리는 하얀 몸뚱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좀 더 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잔뜩 쉰 하림이의 목소릴 들으니 하림이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이제 그만하라며 온 마음을 쿡쿡 쑤셔댔다. 마지막 사정은 오늘을 기념해 좀 특별하게 하고 싶었다.
“하아…….”
사정하기 직전 허리짓을 멈추고 손을 뻗어 하림이의 목을 잡았다. 길고 얇아 내 커다란 손에 너무도 손쉽게 잡히는 그 목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근 10년의 시간 동안 서하림의 뒤에서 매일 보던, 교복 셔츠에 가려져 있던 단정하고도 야해 빠진 그 목을 잡아 손에 힘을 주었다.
“나, 원하는 거 있어.”
“응?”
“손…… 놔.”
“어?”
“동규야.”
하얗게 질린 두 손이 힘없이 내 손목을 잡는다. 피곤에 지친 눈꺼풀은 살짝 감겨 있었고 쉬어버린 채 잠긴 목소리가 애타게 내 이름을 불렀다.
“동규야. 김동규.”
나는 하림이가 불러주는 내 이름을 몇 번이라도 더 듣고 싶어 목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하림이의 두 손이 마치 내게서 힘을 앗아간 것처럼, 손목이 붙잡힌 순간부터 이미 아무런 힘도 주지 않았으나 하림이가 그 누구도 아닌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게 좋아서.
“응. 내 이름 불러주는 거 좋다.”
“동규야, 김동규, 김동규야…….”
“응응. 하림아.”
“김동규…… 동규야.”
마지막 사정은 그 어떤 클래식보다 감미롭고 부드러우며 강렬한 하림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황홀하게 맞이했다. 하림이는 내가 제 위에 엎어져 사정의 여운을 한참이나 즐기는 동안 내 이름을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나는 그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사라질 때까지 하림이의 안에 있다가 하림이가 완전히 잠에 들고 나서야 욕실로 향했다.
식어버린 욕조에 물을 다시 받고 늘어진 하림이를 안아 들어 씻어주면서 한 번 더 하림이 안에 삽입했다. 또 정액 빼긴 귀찮아 이번엔 콘돔을 낀 채였고 섹스를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하림이 안에 넣은 채 있고 싶을 뿐이었다. 전생 같은 건 믿지도 않지만 우리는 전생에 연리지였을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완벽하게 하나가 된 느낌은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존나 죽을 것처럼 피곤했지만 아침 알람 소리에 일어나야 했다. 끔찍하게도 오늘은 주말이 아닌 금요일이었다.
미리 불려둔 쌀부터 올렸다. 진짜 어지간한 일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림이에게는 갓 지은 밥을 주는 편이었다. 냉장고에서 해장국 끓일 재료들을 꺼내며 하품을 열 번쯤 했다. 한두 시간 잤나…… 세 시간도 못 잔 것 같다. 주방 조리대가 모자라도록 한가득 꺼내놓은 재료들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콩나물과 파, 계란, 조개, 새우젓을 빼고 다시 집어넣었다. 존나 졸려 죽겠으니까 대충 콩나물 해장국하고 수란이나 해야겠다.
생수에 다시마, 멸치, 양파, 대파 뿌리 기타 등등을 넣은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불을 켰다. 한참 멍해진 상태로 육수가 우러나는 것을 보다가 밥솥에서 나는 칙칙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서하림을 깨우러 갔다. 5분만 이따 깨우라며 칭얼대길래 등을 토닥이며 식탁에 앉히고 물까지 빨대 물려 마시게 하니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었다. 고등학교는 일 년 수업 일수 중 2/3 이상만 출석하면 졸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이놈의 대학교는 그렇지가 않아 좆같았다.
“병원 가서 의사 진단서 받고 그냥 오늘 집에서 쉴까.”
콩나물을 다듬으며 물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는 걸 보니 싫은 모양이다. 학과 생활도 즐겁고 공부하는 내용도 재밌고 맨날 술 먹고 사람들 병신 되는 꼴도 웃기고 볼링과 회화라는 두 개의 동아리 활동까지, 학교 다니는 하루하루가 행복해 죽겠다는 애란 걸 잠시 잊었다. 나처럼 학점에 벌벌 떠느라 어거지로 칼같이 출석하고 지각 1회도 용납하지 않으며 학과 생활도 동아리도 교우 관계도 말라비틀어진 대학생과는 차원이 달랐다.
“콩나물국이야?”
“수란도 있어.”
“빨리 가져와.”
말투가 조금 날이 서 있다. 아직도 술에 취해 있나? 콩나물을 다듬는 손을 빠르게 놀리며 잠시 생각했다. 대충 대가리 정리한 콩나물들을 따로 끓여둔 뜨거운 물에 한 번 데치고 얼음물에도 데쳐 아삭아삭하게 만든 뒤 육수에 넣었다. 동시에 수란도 세 개 완성했다. 하나는 서하림 거 두 개는 내 거.
“…….”
“…….”
밥 먼저 떠서 하림이 앞에 내려놨다. 다급하게 아침상을 차리려던 내 손은 고작 밥그릇 하나 내려놓고 얼어붙고 말았다. 서하림이 잠옷 상의를 벗어 던지고 하품이나 하고 있어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던지진 않았고 곱게 잘 개서 식탁 한쪽에 올려두긴 했지만…… 아무튼 무슨 의도인지 하얗고 얼룩덜룩한 몸을 아침부터 내 앞에 드러냈다는 게 중요했다.
“젖꼭지 조온나 아파.”
“…….”
“뭐 입지도 못하겠다.”
하림이에게 네가 원하는 섹스를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싶었지만 필름이 끊긴단 얘기에 하지 않은 게 떠올랐다.
“……미안. 우선 밥부터 먹자.”
아직도 부어 있는 젖꼭지를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마저 아침상을 차렸다. 나는 최대한 고개를 숙여 서하림을 보지 않고 밥을 먹었지만 서하림이 깨작거리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고 나서야 하림이를 볼 수 있었다.
“왜, 맛이 없어?”
“아니.”
“그럼 왜? 어디 아파?”
“응.”
“어디?”
“온갖 곳이 다 아프지, 지금. 안 아픈 곳이 있겠냐?”
“아…….”
“여기는.”
서하림이 식탁에 내려놓은 손을 손목만 꺾어 자기 쪽을 가리켰다. 젓가락 끝이 가리킨 것은 빨갛게 부풀어 오른 서하림의 왼쪽 젖꼭지였다.
“약이라도 어떻게 바를 수 있지만 배 속은 뭐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아, 하림아. 진짜 미안한데.”
“뭐가.”
서하림이 얼마 먹지도 못한 밥과 국, 반찬 등을 죄다 식탁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서하림을 식탁에 엎드리게 했다. 서하림이 뭐라고 반항하기도 전에 허벅지를 모아 그 사이로 내 것을 쑤셔 박았다. 몇 시간 전까지 내 좆을 내내 물고 있어 말랑하게 풀어져 있을 곳으로 넣으려던 걸 신사적으로 참고, 많이 봐줘 양보한 거다.
“잘 들어. 옷 벗고 유혹한 건 너고 난 너한테 너무 약한 사람이라.”
끝까지 삽입하고 움직이지 않은 채 하림이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네가 싫은 건 하기 싫고 너도 좋을 섹스가 하고 싶어. 아프지 않게 해줘, 부드럽게 해줘, 뭐 이런 요구들 있잖아. 미리 말하면 충분히 해줄 수 있어. 말해줘, 나 흥분해서 돌아버리기 전에. 알았지? 지금도 이렇게…….”
허리를 조금 뒤로 물렸다가 천천히 넣길 반복했다. 진짜 섹스도 아니고 고작 허벅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이지만 움직일 때마다 발기한 내 것이 서하림의 음낭과 성기를 훑는 것만 같아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하얗고 가는 뒷목을 혀로 핥으며 입을 맞췄다.
“너 힘들까 봐 이 정도로…… 참고 있는 건데…….”
“…….”
“응?”
“알겠어. 나 좀 놓고 다리 사이에 이것도 치워줘. 동규야, 나 배고프고 힘들어.”
그렇게 애처로운 목소리로 부탁하는데 참아줘야지. 치워줘야지. 허벅지 사이에서 요동치던 뜨거운 살덩이를 빼내어 속옷에 욱여넣었다. 치워둔 접시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놨다.
“고마워.”
서하림은 감사의 의미로 내 손을 잡더니 손등에 뽀뽀를 해주었다. 답지 않은 애교를 다 부리고. 확실히 어제의 섹스가 만족스러웠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방금 전의 상황도 내가 한 수 접어줌으로써 서하림의 신뢰도를 한 5쯤은 올릴 수 있었다는 것도.
단정하게 식사하는 하림이를 바라보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그 애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핥으며 자위했다. 내 손이 앞뒤로 침에 절여지고서야 화장실에서 나왔을 땐 서하림은 이미 학교에 간 뒤였다.
일부러 화장실 문을 열어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지금 시간은 9시 20분이었고 서하림 수업 시작 시간은 9시, 현관문은 5분쯤 전에 열렸다 닫혔다.
“지각이네. 미안하게.”
옷 뭐 입고 갔을지 가슴은 어떻게 했을지 궁금했지만 학교 화장실도 있고 정 뭐하면 이따 집에서 볼 거니까. 그 퉁퉁 부은 젖꼭지로 밖엔 오래 못 있을 거였다.
집에서는 옷 벗고 다녀도 된다고, 참을 수 있다고 얘기해 줘야지. 깜찍한 애교를 더 볼 수 있다면 당분간 고추 까지도록 자위만 하는 걸 고려해 볼 가치는 있었다.
하림아 서하림 하림아 좋아해 사랑해 하림아 서하림 하림이 서하림 하림아 하림 서하림 서하림 서하림 서하림 서하림 하림아 서하림 하림아 서하림 하림 서하림 서하림 하림이 하림아 하림아 하림하림서하림 서하림 하림아 하림아 서하림 서하림 서하림 하림 하림아 사랑해 서하림 사랑해 사랑해 서하림 하림아 하림아 서하림 하림아 서하림 서하림 서하림 서하림 하림아 너무 좋아해 하림아 서하림 서하림 서하림 하림아 하림아 하림 하림아 서하림 하림아 하림아 서하림 서하림 하림아 서하림 하림이 하림아 서하림 하림아 하림아 서하림 하림 서하림 하림아 서하림 하림하림하림하림하림하림서하림서하림서하림서하림서하림서하림서하림서하림서하림서하림서하림하림아하림아하림아서하림하림아하림아사랑해하림아사랑해사랑해사랑해하림아사랑해하림아좋아해하림아서하림서하림하림하림하림하림하림서하림서하림서ㅎ
“…….”
노트에 서하림 이름 적다가 손을 멈췄다. 문득 며칠 전 교수님이 또 불러서 얘기 나눴던 게 떠올라서.
‘저번에 준 책은 어땠어요?’
‘아직 안 읽었어요.’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있긴 해요?’
50년 뒤에 읽겠다는 말 대신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교수님은 그런 나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냥 써보는 건요. 꼭 등단 생각하지 않더라도 문학 잡지 같은 곳에 투고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아니 저는 그런 쪽으로는 생각이 없다고 얘길 드렸던 거 같은데요…….’
‘저번에 가져온 것 중에서, 특히 시 말인데.’
진짜 지 할 말만 하는 게 좀 허탈에서 말할 의지를 조금 상실했다. 고작 고등학생이 엄마 아빠 팔아 쓴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백일장에서 상 탄 것들도. 소설보다 시가 더 재밌고 재능도 있어 보이는데 본인 생각은 어때요?’
‘…….’
‘줬던 것들 다시 보는데 굉장히 흥미로운 것들이 몇 개 있더라구.’
교수가 책상 위에 종이 몇 장을 올렸다. 대충 첫 줄만 봐도 저게 어떤 것들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역시 평론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좀 진지하게 쓴 걸 귀신같이 알아챘다.
‘이런 느낌으로 더 쓰고 싶죠.’
‘아니요.’
‘그런 것치곤 백일장에 썼던 것들에 비해 수준이 너무 높은데.’
‘수준……이라고까지 얘기할 정도는…….’
저 열 편 남짓의 시들은 교수님 말마따나 너무 잘 쓴 것 같아 백일장에 내긴 아까워 따로 저장해 둔 것들이 맞다. 노트나 일기 쓰는 중에 감정이 과잉되면 마지막에 했던 행위가 바로 시로 털어내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 내용은 서하림 혹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찬양, 거기서 느끼는 열등감이나 두려움, 패배감, 바닥을 기는 내 감정, 쓰레기 같은 내 욕망과 구원, 빛, 그림자, 순결함 등이라 쓰고 나면 자기만족으로 끝이었지 뭘 더 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글이라는 건 참 신기한 것이어서 그렇게 내 감정을 다 드러내 토하듯 쓰고 나면 어쩔 땐 너무 날 것의 느낌이라 내가 봐도 부끄러운 게 있기도 하고 어쩔 땐 꽤 세련되게 내 마음이 구체화 되어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다. 교수님이 꼽은 것들은 후자였다.
‘수준 운운하는 게 부끄러워요?’
‘그렇기도 하고, 자신도 좀 없고…….’
‘3월 마감인 문예지 공모전이 하나 있었는데, 신인상 공모. 큰 곳은 아니고 적당히 이름 있는? 근데 그게 어제 발표가 됐어요. 심사평 들어볼래요?’
싫다고 해봤자 읽을 사람이라 그냥 가만히 있었더니 역시나 신나서 옆에 뒀던 책(신인상 공모를 했다는 그 문예지인 듯했다)을 펼쳐 심사평을 읽기 시작했다.
‘[시인이 저마다 추구하는 시의 세계는 다를 테지만 오랜 시간 시를 써온 기성 시인들보다 신인 또는 지망생들이 구축해 나가는 세계란 다소 어색하더라도 매번 즐거움을 선사한다. 예심을 통과한 열 명의 응모자들은 그 세계를 패기 좋게 내보였다.] 그다음으로는 열 명 중에 눈에 띄는 네 명에 대한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간단히 얘기하는데 김동규란 이름이 있어요.’
‘네?’
‘[「하얀색의 모든 것」을 쓴 김동규는.]’
‘교수님, 잠시만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시에 가까운 표현력이 압권이었으나 작품의 사유를 끝까지 끌고 가지 못한 게 아쉽다.]’
‘저기요 교수님, 지금 장난하시는 거죠.’
‘말도 안 하고 응모한 건 사과할게요. 당선은 안 될 것 같아서 보낸 건데 최종심까지 오를 줄은 정말 몰랐어서. 나는 그냥 심사 위원 중에 고등학교 후배가 있어서 객관적인 평이나 들어볼까 하고 넣어 본 거거든. 참고로 연락처는 다른 사람 번호랑 집 주소로 보냈어요.’
얼굴이 존나 화끈거리고 민망해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작품이라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내가 쓴 거고 내 거고 제대로 퇴고도 안 했고 초고인 데다가 제목도 짓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 내 허락도 없이 공모전에 낼 수가 있는 건지…….
‘이 정도면 자신이 들어요?’
‘…….’
‘공모전이든 신춘문예든 생각하지 말고 그러면 그냥 써보기만 해봅시다.’
‘그냥 써보기만 하는 걸 교수님한테 가지고 와야 하나요?’
‘그래 주면 좋고. 근데 그냥 써보기만 하다 보면 분명 누구한테 보여주고 싶을걸. 원래 모든 창작자가 그래요. 누구한테 보여 줄 생각이 없으면 그 이전에 쓸 마음 자체가 안 들지.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여 주고 싶을 텐데.’
음흉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는 교수님 앞에서, 나는 마치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고 불쾌한 동시에 부끄러웠다. 내 치기 어린 감정들을 쏟아낸 게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수준이 어쩌고 하며 내 글들을 밖으로 끌어내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굴을 잔뜩 구기며 책상 위 올려진 종이들을 쓸어 담았다. 찢어지지 않은 게 용 할 정도로 종이가 한껏 구겨졌으나 교수님은 상관없다는 듯 여전히 능글맞고 음흉한 웃음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어쨌든 싫어요. 안 쓴다구요. 제 허락도 없이 막무가내로 보내신 거 엄청 기분 나쁘지만,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도망치듯 교수실을 나와 택시에 몸을 싣고 과외 장소인 역삼동으로 향했다. 과외 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일찍 도착한 탓에 카페에서 시간을 죽였다. 그리고 과외 시간에 멍 때리거나 헛소리를 하며 집중을 하질 못했다. 아이들이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을 정도로.
종이 위에 토해내지 못할 정도로 아직은 언어 쓰레기라 부르는 게 맞는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차올랐다. 서하림과의 섹스만으로 이미 일곱 편 정도는 거뜬히 쓸 수 있을 정도였으나 내 안에만 담아 두고 있는 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내가 진짜 교수님의 말대로 천재라고 쳐도 그의 말을 따르게 되는 것 같은 게 싫었다.
“…….”
쓰다 멈춰 홀로 버려진 하림이의 히읗이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이건 젊은이의 눈이 아닌 온갖 풍파를 겪은 노인의 것이었다. 언제까지 담아 두기만 할 거냐며, 얼마큼 참을 수 있겠냐며 꾸역꾸역 참고 있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이 짜증 났다. 마저 하림이의 이름을 완성하곤 노트를 덮어버렸다.
시간을 역행하는 지구 위에 발을 내딛…….
“아! 시발.”
분명 이름도 완성했고 노트도 닫았는데 왜 자꾸 떠오르는 거냐고.
이게 다 하림이가 부드럽게 풀어준 섹스에 느끼기 시작하면서 내게 매달리고 나를 원하고 유혹하고 아양을 떠는 것도 모자라 언제나 처음처럼 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천재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적당히 재능이 있는 정도라고 여기지만 어떻게 보면 내게 뮤즈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서하림이었으니 틈만 나면 시상이 떠오르고 시구가 완성되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나는 서하림이 눈을 깜빡이는 행위 하나만 가지고도 그 작고 아름다운 움직임을 묘사하는 시를 백 개, 세밀하게 서술하는 글을 300페이지쯤 쓸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다시 노트를 펼쳐 더 이상 손이 아파 릴리란 단어를 적을 수 없을 때까지 계속 계속 써 내려갔다. 생각 비우는 데엔 이만한 게 없었다.
[아들 시간 나면 전화 좀 줘〉
[밤늦게라도 괜찬아〉
[중요한 일이잔아〉
바쁘다며 엄마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했더니 하루에도 수십 개씩 메시지가 온다. 마침 또 도착하는 메시지들을 읽고 씹으며 은행 어플을 켰다. 받는 사람은 [ㅗ아빠새끼ㅗ]. 물론 내 쪽에만 찍히는 이름이다. 보내는 금액에 10만 원을 입력했다가 지우고 20만 원을 적었다. 생각해 보니 20만 원은 많은 것 같아 지우고 다시 10만 원을 썼다. 바로 이체하고 아빠 새끼한테 문자를 했다.
[과외비 보너스 받아서 용돈 조금 보냈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조상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빠는 밉기도 하고 병신에 쓰레기 같은 개새끼지만 떡 하나에 얌전해지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말도 없이 집을 옮긴 내게 거품을 물며 화를 냈다. 그래서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돈으로 회유했다. 3월부터 고등학생 과외를 시작할 건데 매달 생활비 쓰는 거 보고 삼십에서 오십만 원 정도 보내줄 테니 없는 자식으로 생각해 주시라고. 연금이라고 생각하고 가끔 내가 연락할 때 말고는 내게 연락하지도, 새집과 학교에도 찾아오지 말라고. 놀랍게도 아빠는 얌전해졌고 내 말을 순순히 따랐다. 물론, 돈을 더 달라고 깽판 쳤다간 한 푼도 못 받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있었다. 이제 아빠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나도 그걸 적당히 이용할 줄 알았다.
나는 사실 내 세계가 커지는 게 두렵다. 친한 사람이 생기는 것도, 얼굴을 익히고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늘어 가는 자체가 싫다. 오로지 내 세상은 서하림 하나만 존재했으면. 얘길 나누는 사람도 서하림 하나뿐이었으면 좋겠고 내게 희로애락을 느끼게 하는 것 역시 하림이면 충분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끝이 없는 바닥으로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깊은 곳까지 날 구하러 오는 서하림이 좋았고 혼자가 되고 고립이 될수록 나를 불쌍히 여기는 서하림의 마음은 커져만 갔으며 나는 그 애의 동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관심이 고팠다. 하림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언젠가는 자해나 자살시도까지 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당장의 목마름을 죽이려고 바닷물을 마시는 어리석은 이가 나다. 추운 겨울 날씨에 다시 얼어버릴 걸 뻔히 알면서도 언 발에 오줌을 누고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멍청한 사람이 나였다.
아빠는 나를 불행에 처넣는 아주 빠른 지름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떻게 하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엄마 연락을 회피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말 돌리고 피하는 것도 벌써 몇 달째라 엄마 쪽에서 조급해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다 비행기 타고 날아오면 어쩌지 싶을 정도로.
〈엄마]
〈요즘 아빠 내 말 잘 들어]
〈개과천선 하려나봄]
〈신고 할 맘이 좀 약해지네]
〈바쁘니까 할 말 있음 메시지 남겨놔 전화 말고]
잠시 뒤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열 몇 개가 도착했지만 읽지 않았다. 오늘은 물론이고 내일도 모레도 한 일주일 정도는 읽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빠 새끼 돈만 주면 조용하니 살맛 나는데 굳이 신고해서 들쑤실 건 뭐람. 어차피 엄마는 한국도 아니고 새 삶도 시작했으면서 왜 구질구질하게 과거에 연연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빠 카드로 하림이가 신기하게 소환되는 것도 따로 살 때의 일이다. 이젠 정말로 아빠를 버릴 때가 된 것이다.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유예기간은 필요했고 매달 보내주는 돈은 불우이웃을 돕는 정도로 생각하면 그렇게 아깝지 않았다. 해보지도 않은 착한 일 해보는 셈 치면 된다. 앞으로도 구세군 냄비니 유니세프니 그런 기부는 평생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휴대폰 액정에 하림이의 번호를 띄워두고 한참을 바라만 보았다. 늘, 항상, 언제나, 매시간 전화를 걸고 싶지만 서하림에게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싶어 차마 걸 수 없는 그 번호를. 내 번호를 외우기도 전에 하림이 번호부터 외웠다. 엄마도 아빠도 그 누구의 번호도 외우지 않아 유일하게 내가 외우고 있는 번호는 서하림 번호 하나뿐이었다.
서하림 인생의 첫 휴대폰 번호는 귀엽게도 뒷자리가 자신의 생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번호를 바꿀 필요성은 못 느끼지만 간혹 나도 뒷번호를 하림이의 생일로 해볼까 하는 생각은 들곤 했다. 너무 팔불출 같아 실행한 적은 없지만.
때마침 하림이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전화하려던 걸 어떻게 기특하게 알았는지.
“하림아!”
-바빠?
“아니.”
-그럼 어, 30분까지 나 자몽에이드 갖다 줄 수 있어?
“지금으로부터 30분 후에, 아니면 시간 30분을 말하는 거야?”
-시간 30분.
“학교 운동장이지? 축구 연습한다고 했잖아.”
-응, 맞아. 그때면 끝날 거 같아서.
“시간 맞춰 갈게.”
-응, 이따 봐.
하늘에 기우제를 드리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했던가. 비가 올 때까지 하늘에 빌고 빌었다는 옛날 왕조의 왕들처럼 나는 기다리면 결국엔 전화벨을 울려줄 하림이의 연락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미련하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걸려올 전화를 기다리는 건 그다지 힘들거나 지루한 일은 아니었다.
보냉 효과가 있는 텀블러 세 개를 꺼내 얼음을 넣고 자몽에이드, 딸기에이드, 식혜를 담았다. 기말고사도 얼마 남지 않았고 시험 끝나면 경영대랑 축구 경기 한다며 술자리 대신 축구 연습하는 게 기특했다. 쿨팩과 스포츠타올도 혹시 몰라 챙겼다.
우리 집은 정문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이지만 학교가 너무 커서 공공 자전거를 탔다. 봄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텁텁한 공기와 작열하는 태양이 여름이 왔다고 알려주었다. 이제 여기서 습기만 추가되면 끝장인데.
10분쯤 운동장에 도착했다. 밖이 너무 더워 운동장이 잘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시력이 너무 떨어져 누가 하림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잔뜩 인상을 찌푸렸지만 알기 힘들었다. 대신 귀를 쫑긋 세워 간간이 들리는 목소리들로 30분이 되기 전 누가 서하림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시간이 되자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남학생들이 만세를 하며 연습 종료를 알렸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숨을 고르는 하림이 앞으로 곧장 달려가 가방 지퍼를 열었다. 차갑게 얼려둔 쿨팩을 제일 먼저 건넸다.
“아, 시원해서 좋다.”
작은 쿨팩 하나를 볼에 붙인 서하림이 귀엽게 말했다.
“자몽이랑 딸기랑 식혜도 가져왔어.”
“헐 진짜? 대박. 자몽에이드 먹을래.”
축구 연습을 한 다른 남학생들은 스프라이트, 포카리스웨트 등 미리 사둔 것 같은 음료수들을 아이스박스에서 꺼내 저마다 마셨다. 서하림이 유니폼을 팔랑거리며 열을 식히는 동안 서하림이 먹고 싶다는 자몽에이드가 담긴 텀블러를 열었다.
“에이드 말인데 그냥 진짜 진짜 차가운 물로 만들 수도 있어?”
“그럼 맛이 좀 덜할 텐데. 왜? 너무 달아서? 이거 사이다 아니고 탄산수야.”
“아니 그것보단 탄산 때문에 벌컥벌컥 마시기가 힘들어서.”
“차가운 물로도 한번 해볼게. 내가 먼저 먹어보고 괜찮으면 다음부턴 그렇게 해서 갖고 오면 될 것 같아.”
“야, 김동규!”
목베개 형태의 쿨팩을 목에 둘러주고 스포츠타올을 꺼내려는 찰나, 남학생 두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둘 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거 보니 서하림처럼 자연대 학생이겠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안녕!”
“……어.”
“이거 마실래?”
“어.”
내게 건네는 포카리스웨트는 생각 외로 꽤 차가웠다. 시원한 음료수를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어 캔을 따 마셨다. 두 남학생은 내게 이름과 학과를 얘기하며 서로 팔꿈치로 찔러대다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야 딴 게 아니라 너 왜 농구 참여 안 해? 인문대는 농구팀 꾸렸던데.”
뭔 얘긴가 했더니만. 둘 중 하나가 자기 친구가 인문대 농구팀 주장을 맡고 있다며 말을 이었다.
“너한테 제일 먼저 찾아갔는데 네가 안 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
“진짜 안 해?”
“어.”
“야! 여기야!”
저 멀리서 뛰어오는 남학생은 바로 그 기말고사 기념 체육대회에서 인문대 농구팀 주장을 맡고 있는 학생이었다. 전화번호도 메시지도 전부 다 차단해 놨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나는 흥미롭단 얼굴로 나와 남학생 무리를 지켜보던 서하림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게 대체 뭐야?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 모양으로 그렇게 물었더니 눈길을 피하고선 음료만 쪽쪽 마신다. 아무래도 서하림이 날 순수한 의도로 부른 게 아닌가 본데.
“도대체 연락은 왜 안 받아?”
“나 모르는 사람 번호랑 메시지는 안 받아.”
“모르긴 왜 몰라? 내 신상 정보 다 알려 줬는데?”
“몰라.”
“됐고, 좀 도와줘라. 풀 코트 안 뛰어도 돼.”
“나 농구 못해.”
“서하림이 잘한다던데?”
나는 또 한 번 서하림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서하림이 빨대를 이빨로 문 채 웃고 있었다.
“왜, 잘하는 거 맞잖아.”
“…….”
“틀려?”
“……아니.”
저 얼굴엔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다. 저렇게 예쁘게 웃으며 물어볼 땐 무슨 말이라도 ‘나 못생겼어?’ 하고 묻는 것만 같아 거절을 할 수가 있어야지.
“그럼 하는 거지? 어?”
내 대답은 듣지도 않았으면서 농구팀 주장에 친구라는 축구팀 두 명까지 지들끼리 큰소리로 뭐라 뭐라 떠들어댔다.
“야, 나 아직 한다고 안 했어.”
“뭐야. 한다면서!”
“야 이거 존나 비밀인데 돈 걸린 내기 농구라 진짜 김동규 네 도움이 꼭 필요해. 도워줘라.”
“내기? 그럼 더 할 생각 안 들어.”
단칼에 거절하는 내 말에 서하림이 불쑥 끼어들었다.
“왜? 안 하게? 응원 가려고 했더니만.”
“응원?”
“나 이거 배웠어.”
서하림이 입으로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전주를 부르며 치어리딩 자세를 몇 개 취해 보였다. 남학생들이 존나 웃으며 시끄럽게 굴다가 서하림을 따라 우스꽝스럽게 움직였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치어리딩은 끝이 났지만 나는 절도 있게 몸을 움직이던 하림이가 귀여워 사뭇 진지한 태도로 스케줄을 떠올렸다.
이번 주말에 바리스타 자격증 2급과 1급 강좌를 속성 2주 코스로 끊어놨는데 귀찮게 됐다. 2급은 커피 이론 기초와 원두의 종류, 핸드드립 커피에 대해 배우고 1급은 커피머신을 사용해 만드는 카페 메뉴들과 라테 아트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내가 집 근처 카페에서 이 강좌가 개설된 걸 보자마자 끊은 이유는 서하림 때문이었다. 커피 애호가인 서하림 아줌마는 아침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내려주는 핸드드립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라 서하림도 커피를 좋아했다. 핸드드립은 로스팅을 많이 해 탄 맛이 나는 걸 즐겼고 머신을 사용한 커피는 신맛 나는 원두를 쓴 라테를 먹었다. 꽤 까다로운 취향에 예민한 혀를 갖고 있다 보니 일반 프렌차이즈 커피는 절대 안 마시고 개인이 하는 카페 몇 곳을 이용했다.
저번 주에 서하림 아줌마가 하림이 먹으라고 좋은 원두를 하나 보내줬는데 서하림이 뭣도 모르고 그라인더에 갈아 내렸다가 아주 낭패를 봤다. 커피가 뭐라고 서하림이 엄청 속상해하는 걸 보고 나도 나름 인터넷 검색해서 핸드드립 커피를 해본다곤 했는데, 생각보다 커피라는 게 어렵고 만만치 않은 영역이었다. 그래서 그 길로 바리스타 강좌 등록을 한 것이다. 아침마다 카페 들렀다 학교 가는 것보단 내가 커피 내려준 거 들고 가는 게 더 편할 테니까.
“나 근데 과외도 해야 하고 뭐 강좌 들어야 하는 게 있어.”
“제발! 우리가 이기면 너 10프로 떼 주고 N분의 1 할게!”
“돈 필요 없고, 그냥 연습 없이 당일 날 참여해도 되는 거면 하고 아니면 좀 힘들 것 같아.”
“그, 그건 안 돼.”
“왜.”
나보다 약간 눈높이가 낮은 농구팀 주장을 무심하게 내려 봤다.
“안 되면 나도 못 해. 양보 많이 한 거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연습 한 번도 없이 당일에만 참여하면 좀…… 다른 애들 눈치도 있고…… 근데 네가 뛰어주면 나도 적당히 네 사정 봐주긴 할 건데…….”
“내일도 혹시 연습 있어?”
“어? 어어. 있어.”
“그럼 내일 연습 참여해 보고 괜찮으면 당일까지 연습 안 나온다.”
축구팀 반은 사라졌고 반은 남아 우리를 힐끔거리거나 대놓고 쳐다보고 있다. 덩달아 지나가던 학생들까지.
“…….”
자존심이 상하는지 선뜻 대답하지도 못하고 내 눈치만 살피는 게 우스워 팔짱을 꼈다. 나는 아쉬운 게 하나도 없어 대답을 기다렸다. 서하림 응원은 좀 아쉽긴 한데 좀 전에 짤막하게 봤으니 굳이 귀찮은 일 감수하고 스케줄 꼬아가며 할 생각은 없었다.
“덥다.”
눈동자만 굴러가던 침묵을 깬 건 서하림이었다. 어느새 자몽에 식혜까지 다 마신 건지 부른 배를 통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축구화를 벗는다.
“사람 이렇게 세워둘 거면 대답을 빨리 내놓든가 아니면 농구팀 애들이랑 상의해서 이따가 김동규한테 메시질 보내든가. 너넨 안 덥냐?”
“그, 근데 쟤 아무래도 나 차단한 거 같은……데.”
“진짜? 김동규, 너 얘 차단했어?”
“지금 풀게. 연락해.”
그날 저녁 바로 농구팀 주장에게 메시지가 왔다. 내일 일단 나와서 연습을 해보고 결정하잔 거였고 다음날 소화된 점심이 역류할 정도로 뛰어다녔다. 미친 듯이 골을 넣다 연습 경기를 마쳤을 땐 당일 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다.
서하림의 불패신화는 대학에 와서도 이어지는지 과탑을 했단 얘기가 들렸다. 축구도 마찬가지. 내 기말고사는 망했고 농구도 1점 차로 졌다. 점수는 내가 제일 많이 벌긴 했다.
분명 공부에도 손을 놓은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내가 예상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학업에서 짜증이 이는 만큼 문학 뽕에 취하고 말았고, 덩달아 과외 아이들의 실력도 일취월장으로 늘어갔다. 과외는 2학년 여자 친구 두 명이 새로 들어와 저번 달 수상 인센티브도 좋았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따는 거까진 필요 없고 수료만 하면 됐기 때문에, 무사히 마친 뒤 아침마다 서하림에게 맛좋은 커피를 대령해 칭찬도 들었다.
“전과 못 할까 봐 너무 불안한데요.”
요즘 내 인생은 좋은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단 방학인데도 교수님과 만나야 하는 것부터가 절망이 아닐까.
“못 해도 상관없어. 졸업 전에 등단하면 ‘자랑스러운 S대인’ 장학금 나오니까. 4년 치 학비는 될걸.”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해 봤자 교수님은 이해 못 할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국문과 나와서 기껏해야 소설가도 아니고 시인으로 등단해 봤자 뭐 해먹고 살라고.
“그래서 써온 게 이거야?”
교수님이 가리킨 건 「알파벳」이란 시였다. 대놓고 A를 열망하는 슬픈 대학생의 마음을 토로한 시였는데 좀 전까지 교수님께 아주 열심히 까인 거였다.
“가자. 술이나 먹게.”
“저 술 안 먹어요.”
“알아. 옆에서 안주나 먹어.”
“교수님이랑 둘만 가기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나도 마찬가지야. 너만 사주려는 게 아니라 오늘 문학 동아리 애들 밥 사주기로 한 날이다.”
“그럼 굳이 제가 갈 필요는…….”
“가서 너보단 못하더라도 열심히 잘 쓰는 친구들 수준도 좀 알고 좋은 영향도 받고 그래. ‘우뚝 솟은 첨탑처럼 치솟은 유일한 알파벳 A’ 같은 거 쓸 정신 있으면.”
내가 생각해도 유치한 시였고 종이가 아까워 나무에게 미안할 정도였으니 안주나 얻어먹을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주는 뭔데요.”
“곱창.”
“많이 먹어도 돼요?”
“그래.”
곱창으로만 돼지 열 마리쯤 잡아먹었다고 서하림한테 자랑해야지.
종강했어도 교수님에게 붙들려 사는 나도 불쌍하지만 1년에 두 번씩 나오는 동인지를 위해 방학에도 교수님을 만난다는 문학 동아리 학생들도 참 대단했다. 그 학생들 사이에 왜 서하림이 끼어 있는 것인지. 왁자지껄 떠드느라 시끄러운 테이블에 앉지도 못하고 굳어버린 나완 다르게 교수님이 학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껴서 앉았다. 동아리 애들이 내가 아닌 교수님에게 서하림을 소개했다. 나는 서하림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가장 끝에 앉았다.
“우리 학교에 이렇게 눈이 멀도록 잘생긴 남학생이 있었나? 왜 지금까지 몰랐지?”
“입학도 전부터 엄청 유명했었는데요!”
“교수님이 수제자 끼고 사느라 소식을 못 들으신 거 아니에요?”
“그런가 봐. 내가 동규를 좀 끼고 살았어야지. 어휴, 칙칙한 남학생들만 보다가 이런 꽃미남을 보니까 눈이 맑아지는구나. 술집에 해가 떴네 해가 떴어.”
잘생기고 예쁜 외모를 찬양하는 말에 남학생들이 오글거린다며 야유를 했다. 그럴수록 교수님이 더 입을 나불거렸고 참다못한 서하림이 그만하시라며 손사래를 쳤다.
서하림은 친구들과 다른 곳에서 1차를 마시고 2차로 어디 가지 하던 중 문학 동아리가 여기서 모인다는 얘길 듣고 이쪽으로 왔다고 한다.
전부터 교수님이 문학 동아리 학생들과 굉장히 친하다고 내게 몇 번이나 얘기를 했었다. 그때마다 교수가 학생이랑 친해봤자 얼마나 친할 것이며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거라고 콧방귀를 끼며 흘려들었는데 이거 정말 예상외로 학생들이 교수님이랑 퍽 친해 보이는 게 굉장히 이상하고 어색했다.
옛날 문인들 수필 보면 문학계 선배로 활동 중인 교수가 제자 겸 후배인 학생들과 문학 얘기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얘기나 그런 걸로 술을 먹으며 하루가 멀다고 밤을 지새운 적이 많다고 써져 있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낯선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서하림 친구들도 얼떨떨한 게 비슷해 보였다.
내 가까운 쪽에 앉은 학생들이 이름을 얘기하며 내게 자기소개를 했다. 나도 적당히 이름을 얘기하고 말았다.
끝에서 작게 시작되다 끝나는 줄 알았던 자기소개를 교수님이 귀신같이 알아채더니 모두 자기소개를 해보자며 초등학생들도 안 할 법한 일을 저질렀다. 자기가 제일 먼저 하겠다며 이름과 나이, 좋아하는 작가와 취미, 좌우명과 기타 등등을 가볍게 설명한 교수님이 존나 부끄러웠지만 다른 학생들은 제법 눈빛이 진지했다.
의외로 어문계열이나 인문대인 학생들이 적고 타대 학생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오지 않았으면 했던 내 순서가 되었다.
“국문과 김동규입니다. 저도 세문고등학교 졸업했어요.”
5초나 될까 싶은 자기소개를 마치자마자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며 에세이 작가를 지망한다던 어느 농대 선배가 “나 지금까지 자존심 상해서 말 안 하던 거 있어” 하며 입을 뗐다. 서하림은 김치찌개를 다시 데울 모양인지 가스버너에 불을 켰다. 아무리 맛있어도 먹기 거북한 것 중에 곱창이 있다고 했던가.
“나도 고등학교 다닐 때 교내 백일장에서 상도 타고 담임선생님이 글 잘 쓴다면서 하도 추천해 가지고 대학교 백일장 세 갠가 나가 본 적 있다고 했잖아. 교수님도 아시죠, 제가 전에 몇 번 나갔는데 상 입선 딱 하나밖에 못 탔었다고.”
“잘 알지.”
김치찌개랑 같이 먹고 있던 것 같은 계란말이는 남은 게 난도질 되어 엉망이었다. 술집에서 파는 거야 소금이랑 설탕을 많이 넣어 자극적일 텐데 그마저도 막 만들어서 따뜻할 때면 모를까 다 식은 건 서하림이 못 먹을 음식이 됐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저렇게 조각조각 잘라서는 괜히 젓가락으로 들쑤시고 있지.
“교수님 저 날치알 주먹밥 시켜도 되나요?”
“어어, 시켜.”
“아 김동규랑 교수님 흐름 끊지 마시고요. 아무튼 그때 어디였더라 F대였나…… 시상식 하면서 장원작들 읽어주던 백일장. 거기서 네가 장원 받아서 네가 쓴 소설 읽는데 와,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
“왜?”
술 때문인지 과장된 몸짓으로 퍽 익살스럽게 얘기하는 선배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곧바로 나온 스테인리스 그릇과 비닐장갑을 받아 들고 주먹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하림은 입이 작으니까 그에 맞춰 주먹밥을 백 원짜리 동전 크기로 만들면 적당했다. 가뜩이나 곱창도 못 먹을 텐데 김치찌개만 먹게 할 수는 없었다.
“글을, 아니 내가 텍스트로 읽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귀로만 듣는 건데도 너어무 잘 쓴 거야. 주제도 정확히 기억난다니까요? 쟤 제목을 따로 안 짓고 지기가 고른 주제를 제목으로 썼었거든요.”
“이거 서하림한테 좀.”
주먹밥을 완성하고 장갑을 벗었다. 귀엽게 올망졸망 모여 있는 주먹밥을 서하림에게 전달하려는데 갑자기 백일장 얘기가 끊기더니 나와 서하림에게 이야기가 옮겨졌다.
“와, 둘이 불알친구라더니 챙기는 것 좀 봐.”
서하림은 멀쩡했지만 친구들은 이미 어느 정도 술기운이 있는 상태였는지 친구 무리 중 하나가 정신을 못 차리고 낄낄대며 나를 놀렸다. 그리곤 순식간에 내 자리가 서하림 옆으로 바뀌었고 내게 서하림 이야기가 쏟아졌다.
“얘 도대체 얼마나 곱게 컸길래 술집에서 안주를 가려?”
“…….”
“야 니 아나. 얘 우리 과는 물론이고 자연대 왕자님, 연예인, 아이돌 같은 수식어로 불리는 거. 서하림 소개 좀 시켜 달라고 딴 학교 친구들한테서 그러엏게 연락이 와가 죽겠다.”
사투리를 쓰는 남학생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교수님까지 모두가 웃고 있었다. 서하림은 별말 없이 내가 만들어준 주먹밥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심각한 건 나 혼자뿐이었고 서하림의 눈치를 살피는 것 역시 나밖에 없었다.
“심소희 선배님.”
웃느라 난리 난 사람들 속에 서하림 목소리가 작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그것은 마치 아수라장에 발사된 한 발의 총성과도 같았다.
“제목이 뭐였어요? 백일장.”
차츰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다시 백일장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됐다. 내용이 뭐였냐며 얼마나 잘 썼길래 자존심까지 상했냐며.
“주인공인 나는 섬마을에서 사는 학생이고 동생이 있어. 엄마가 해녀, 아빠는 뱃일하는 사람으로 나오는 거였는데 주인공은 바다는 끔찍하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 왜냐면 엄마가 동생을 낳고 몇 년 뒤에 바다에서 죽었거든. 아빠는 혼자 애 둘을 키워야 하니까 계속 배를 타고.”
교수님에게 그렇게 내가 쓴 걸 보여주고 퇴고를 받길 수십 번인데도 남에게서 내가 쓴 것에 대한 얘길 듣는 건 정말 생소한 기분이었다. 기억 저편에 묻어둔 3천 자 남짓의 글이 떠오르고 있었다. 슬쩍 옆을 보자 서하림이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어 조금 부끄러운 것도 같아 물이나 홀짝였다. 내 흉은 아니고 칭찬을 하는 거라 그걸 서하림이 듣는다는 게 간지럽고 이상했다.
“그러다 장마가 시작된 어느 날 동생이 심하게 아파. 아빠는 한 번 배 타고 나가면 오래 나가니까 집엔 나랑 동생밖에 없지 애는 죽으려고 하지. 그러다 마지막 장면이 이제 주인공이 동생 간호하다 겨우 동생이 잠에 들어. 주인공은 집 앞 평상 같은 곳에 앉아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을 해. 죽은 엄마가 그립고, 엄마를 죽인 바다가 싫고, 그런 바다에 나간 아빠가 걱정되고, 바다를 흉포하게 만든 비는 더 싫고. 마지막 문장이 아마…… 장마가 온 세상의 비를 다 끌어모으는 것 같다? 뭐 그런 거였어.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걸 듣는데 와, 그 전까진 나 정도가 백일장에서 입선밖에 못 받냐며 이건 다 예고와 학원의 비리가 있는 거라고 혼자 속으로 음모론 제기했었는데 반성했잖아. 저 정도 써야 상 받는구나 나는 그냥 하던 공부나 계속해야겠다, 하고 그 뒤로 자존심 상해서 백일장 안 나갔어.”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요.”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교수님은 요즘 자기가 내 시를 봐주고 있는데 거기서 감탄한 시구가 이런 게 있고 저런 게 있고 근데 천재라고 다 잘 쓰는 건 아니라며 못 쓰는 건 또 얼마나 못 쓰는지를 큰 소리로 떠들었다.
“한잔할래?”
“아니.”
“아 왜! 너만 제정신이야 지금.”
“안 좋아하니까.”
“그래라 그럼.”
싫다고 몇 번이나 얘길 했음에도 잊을 만하면 자꾸 술을 권해 짜증 났다. 결국 교수님이 나서서 쟤한테는 한 방울도 주지 말라고 한 뒤에야 내게 술을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뭐였어?”
교수님이 얼음물을 따라주며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아까의 그 백일장 마지막 문장을 뜻한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기억 안 나요.”
“누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해 달랬나.”
“장마가 온 세상의 비를 다 끌어모으는 것 같다 뭐 그런 비슷한 거였어요.”
좀 전에 농대 선배가 말한 문장을 그대로 끌어다 읊었다. 교수님이 혀를 끌끌 차며 재미없는 놈이라고 욕했다.
“술 먹으면 기억 날지도 모르는데.”
“설마요. 알콜은 기억력 방해를 유발하지 않나요.”
“역시 어려서 그런가 뭘 모르네. 예술엔 알콜이 아주 크나큰 기여를 한다는걸?”
“진짜요?”
“고럼!”
주먹밥을 김치찌개에 적셔 입에 넣으려던 서하림이 관심을 보이자 교수님이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 앞에 소주로 보이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긴 소주잔을 끌어왔다.
“그렇구나. 신기하네요. 진짜 먹으면 생각나나?”
똑똑한 애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술 먹으면 사람이 추해지는 게 웃기다는 애가, 아니 그 전에 교수님이 하는 말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틀린 말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모르는 척 구는 게 이상했다.
“저도 궁금하긴 한데.”
“마지막 문장이?”
“네. 얼마나 잘 썼으면 선배가 자존심까지 상했나 싶고?”
그 말에 나는 소주잔을 들어 한 번에 삼켰다. 사실 마지막 문장이 떠오른 건 아까 전이었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충동적인 일을 벌이다니, 이게 다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교수님에게 ‘진짜요?’ 하고 물어보던 서하림이 예쁘고 귀여워서 그렇다.
계속 빼기만 하던 내가 덜컥 마셔 버렸더니 학생들이 오오, 하며 반응했다. 교수님도 바로 잔을 채워주며 또 원샷을 해보라고 종용했다. 나는 알콜 때문에 위가 어디쯤 있는지를 느끼면서 이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며 열이 오르는 볼을 살짝 만졌다.
“이건 흑기사 할게요.”
딱 한 잔만 더 마시고 마지막 문장이나 털어줄 생각이었다. 이게 진짜로 마지막이고 더 이상은 교수님이 무릎을 꿇고 마셔달라고 빌어도 무시할 생각으로. 그런 나의 비장함을 알아챈 서하림이 내 손에 들려 있던 잔을 바람같이 채가 단숨에 마셨다.
“아 뭐야아, 흥 깨지.”
“장마란 기상청에서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 비가 오는 우기를 지칭한 것에 불과할지 몰라도 빗방울 하나에 영향을 받는 우리 같은 바다 사람들에겐 그 의미가 달랐다.”
숨 하나 쉬지 않고 머릿속을 유영하던 단어들을 내뱉었다. 조금은 틀렸을 수도 있는 단어들은 그래도 꽤 그럴듯한 문장이 되었다. 확실하진 않은데, 아마 거의 맞을 것이다.
내게로 집중된 시선들에서 기대감 호기심 그런 것들이 느껴졌지만 내겐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불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머지 문장을 빠르게 쏟아냈다.
“장마가 온다고, 장마가 시작된다는 이야기가 일기예보를 타고 전파를 타면 정말로 비는 그즈음부터 무섭게 내렸다. 겨우 두 글자의 짧은 단어에선 먹구름과 비 냄새가 났다. 천둥과 번개도 들어 있고 엄마의 기일도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 그 단어가 오르기 시작하면 장마란 단어가 온 세상의 비를 다 끌어모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가 왔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장마라는 말을 지우고 싶었다.”
숨을 다시 한번 빠르게 고르고 마저 말을 이었다.
“대충 이런 거였어요.”
머쓱해서 괜히 휴지로 손바닥에 찬 땀을 닦았다. 교수님과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난리를 피웠다. 이렇게 요란을 떨 정도로 잘 쓴 건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다 읽어주는 거면 몰라도 마지막 문장만 뚝 떼 말하니 좀 이상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저건 마지막 문장이 포함된 마지막 문단에 힘을 준 거였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인공이 빗소리를 들으며 엄마와 아빠의 부재를 얘기하고, 부모의 부재를 만든 바다를 원망하며 비가 싫어 결국 장마란 단어까지 싫어진 감정을 다 읽어야…… 아니 됐다. 어차피 문학성 운운하기 부끄러운 고등학교 백일장 글이었고 내가 굳이 설명해 주기도 입 아프고 귀찮은 일이었다.
“저…… 아무래도 취한 거 같은데 집에 갈게요.”
일부러 어눌하게 발음했다. 동공도 좀 풀었다. 몇몇이 더 있다 가란 소리를 했지만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해 곱창을 집지도 못하는 걸 봤던 터라 손쉽게 날 놔주었다. 이 정도면 술 취한 연기로 합격점인 것 같아 조금 뿌듯하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많이 취해 있어 가능한 것이었겠지만.
“어, 그럼 나도 갈래.”
내가 일어났을 때와 다르게 서하림이 간단 얘기에는 모두가 하나 같이 서하림을 뜯어말렸다. 하지만 속이 안 좋다고 단호하게 얘길 해서 그런지 서하림도 금방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택시는 조금 걷다가 잡자. 나는 누구랑 다르게 속 안 좋은 게 진짜라서.”
“응. 얼마나 마셨어?”
“두 병? 근데 맥주를 엄청 마셨어.”
우리는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어차피 어디로 걸어가든 택시 타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아까 나 대신 멋지게 흑기사를 해준 하림이를 떠올렸다. 박력 있어서 설렜고…… 다 마시고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 것도 멋있었고 살짝 찡그렸던 미간도 예뻤다.
“……집에 가면.”
“응?”
“내가 오늘…… 씻겨줘도 돼?”
“그래라 그럼.”
겨우 한 잔인데도 나는 약간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며 택시를 탔다. 잠이 오는 것도 같아 하림이 손 하나를 잡고 눈을 감았다. 아무리 택시를 탔어도 집 밖이라 서하림이 싫어할 거라는 걸 분명 알고 있는데도. 뭐라 하면 술 먹어서 그렇다고 꼬장이나 부리려 했는데 의외로 손을 빼지도 않고 집으로 가는 내내 얌전했다.
집에 도착해 서하림을 씻겨주면서 그 매끈한 몸을 더듬느라 내 것이 잔뜩 발기한 것을 애써 무시하느라 조금 힘들었다. 수건으로 온몸을 꼼꼼히 닦아주고 머리도 말려주었다. 나도 이제 씻을 생각으로 욕실로 들어가 막 샤워기를 틀자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왜? 문 열려 있어.”
-문 열 정도까진 아니고.
물줄기보다 작은 소리였지만 곧바로 내 아랫도리가 반응했다. 나는 이번엔 그걸 무시하지 않고 한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여기에 심장이라도 달린 것처럼 움찔거리는 게 웃겼다. 샤워기 손잡이를 내려 아예 물소리를 죽였다.
“그럼? 뭐 필요해? 나갈까?”
-아니. 편하게 씻고 나와.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잠자기가 싫어서 맥주나 먹으려고.
“아 그럼 조금만 기다려. 10분, 아니 5분만. 뭐 먹고 싶어? 아, 속 안 좋다 그랬으니까 순두부찌개는 어때?”
포슬포슬하고 부드러워 하림이 엉덩이 같은 순두부를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그 생각에 성기가 발딱 서서 꺼떡거렸다. 느리게 손을 움직였다.
-너도 힘들 텐데 안주는 없어도 되고 그냥 혼자 먹기 심심하니까 같이 먹, 아니 그냥 얘기나 하자. 혹시 피곤해? 그럼 너 먼저 자도 상관은 없어.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려.”
-응. 천천히 씻어. 기다릴게.
“으응.”
따뜻한 물을 맞아서 그런지 정신이 좀 흐려지면서 쿠퍼액이 나왔다. 얼른 나가서 하림이랑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며 아기 새처럼 조잘거리는 하림이 볼 생각에 손이 빨라졌다. 문제는 아기 새 같은 하림이의 붉은 입에 내 것을 물리는 상상이 끝나질 않아 생각보다 한참을 욕실에서 허비했다는 것이었다.
“미안. 늦었지.”
“조금?”
키득키득거리며 웃는 서하림 앞에는 빈 캔 하나와 마시고 있는 중일 캔이 보였다. 말리지 못한 머리를 털어대며 나도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를 꺼내 왔다.
“마시려고?”
“그냥 구색 맞추기? 한 입씩 천천히 먹으면 괜찮을 거 같아.”
깡으로 술만 먹일 순 없어서 과자와 육포를 뜯어 놓고 냉동 홍합과 미리 썰어 얼려 놓은 파로 홍합탕을 끓였다. 서하림이 됐다며 몇 번이나 말렸지만 그때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라고 일축했다.
“속 안 좋다고 그래서 청양고추는 안 넣었어.”
“고마워.”
서하림은 홍합탕을 한술 떠서 마시더니 “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캔을 따고 조금 홀짝였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하림이랑 마주 보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만 해도 좋아서. 서하림은 몇 번 더 홍합탕을 떠먹었다.
“근데 나 조금 섭섭한 거 있어.”
“뭔데?”
“너 술은 나하고만 먹는다고 했잖아. 근데 아까는 둘이 있는 것만 아닌데도 원샷 하던데.”
“내가? 너하고만 마신다고 했다고? 술을? 언제?”
딸치며 예상한 이런 얘기 저런 얘기에는 포함되지 않은 말에 나는 20년의 인생을 슈퍼컴퓨터라도 된 것처럼 샅샅이 훑었다. 도대체 언제 그런 말을 했지?
“벚꽃 축제 갔을 때.”
“설마 내 잃어버린 기억에 그런 말이 있다고?”
“그런 것 같지?”
이번엔 내 쪽에서 섭섭함이 일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면 당연히 알려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미안해. 그런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릴 줄은, 아 나 그냥 앞으로 평생 술 안 먹을래.”
겨우 한 입 먹은 맥주캔을 식탁 저 멀리 치워 버렸다. 나는 서하림이 나한테 했던 말들, 내가 서하림에게 한 모든 얘기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뇌에 새기고 싶은 사람이라 술 먹고 잃어버린 기억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나랑 먹는 거는 좋다며.”
서하림이 웃으며 멀리 치운 캔을 다시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건 기억나지?”
“……응.”
조금 불퉁하게 대답이 나갔다. 서하림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웃지 마. 그때 내가 또 뭐라고 그랬어? 실수한 게 없다고만 했지 그런, 그런 중요한 얘기가 있었는데 왜 말 안 해줬어.”
“별거 없었어.”
“몇 번이나 물어봐도 그렇게 얘기하더니 지금 보니까 별거 있잖아.”
나는 또 맥주를 멀리 밀었다. 또 이렇게 미안한 일, 실수할 일 만들기가 싫어서 물어보는 건데 이런 내 맘도 모르는 서하림은 내 맥주캔을 가져오며 웃기만 했다.
“미안 미안. 근데 진짜로 그거 말고는 없었어.”
“있는 거 같은데.”
왜 말 안 해줘.
“내가, 나는…….”
아무래도 소주 한 잔, 맥주 한 모금에 취한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눈물이 차오를 리가 없을 테니까.
서하림에게 미안한 짓을 하는 건 내 음침하고 병신 같은 상상이면 족하다. 내 상상 속에서 서하림을 닳고 닳은 창부로 만들든 발목을 잘라 걷지 못하게 만들든 눈을 뽑아 귀를 예민하게 만들든 그런 건 어차피 내 상상이니까 적당히 미안해하면서 즐기면 될 일이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달랐다.
내가 왜 공부에 목숨을 걸었었는데. 서하림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주고 연락을 기다리고 눈빛 하나 행동 하나에도 무슨 생각인지 어떤 기분일지 알아채거나 새벽에 불러내도 바람 같이 나가고 그러는 이유가 뭐였는데. 보잘것없는 나는 서하림에게 모든 걸 바쳐도 모자라니까 미움받기 싫으니까 그렇게 악착같이 최선을 다했다. 착한 애라 내가 좀 못난 모습을 보여도 이해해 준다는 걸 알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은 건 사람은 물론 동물에게도 해당되는 본능이 아니던가.
“미안해, 울지 마. 응?”
당황한 서하림이 휴지를 뽑아 들고 내 눈물을 닦았다.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더 흘러넘쳤다. 멈출 기세 없이 뚝뚝 흐르기 바쁜 내 눈물 때문에 서하림이 발을 동동 굴렀다.
“김동규, 그만 울어. 진짜 그거 말고는 다른 거 없었어. 진짜야. 응? 울지 마. 장난쳐서 미안해. 네가 나랑만 술 먹겠다고 약속한 것도 전에 미리 얘기 안 해줘서 미안해. 그냥 나는 네가 나 말고는 다른 사람이랑 마실 거란 생각도 안 했고 또 아까 거기서 갑자기 네가 그렇게 마실 줄도 몰랐어.”
눈물로 휴지가 다 젖어버려 새로 휴지를 뽑아 오는 손을 낚아챘다. 휴지를 놓친 서하림이 손을 들어 내 눈가를 직접 닦아주었다. 나는 그 손에 기대듯 눈을 감고 차가운 서하림의 손을 느꼈다.
“그래서 너는 기억 못 하니까 그냥 놀리려고 그런 거야. 미안해, 이렇게 울 거였으면 그렇게 장난치듯 가볍게 얘기 안 했을 거야.”
“…….”
“왜 이렇게 울어, 원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잘 울지도 않으면서…….”
내 볼을 감싼 하림이의 손 위로 내 손을 덮었다. 하림이의 손은 언제나 그랬듯 나와는 다르게 차가웠고 가늘었으며 내게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이렇게 다정하고 친절하고 착하고 예쁘고…… 내게는 과분한 서하림. 나는 서하림이 내게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 슬프고 무서운 언어로 들렸다. 얼마나 내가 못났으면 서하림 입에서 미안하단 말이 나온 걸까. 진짜 그거 말곤 없었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서러운 감정이 들었다니, 이토록 한심할 수가 없었다.
“내가 미안해.”
“뭐?”
“기억 못 해서…… 그리고 아까 다른 사람 있는데 마셔서…… 그리고…… 그리고, 계속 캐묻고 어린애처럼……. 미안해, 미안해…….”
속죄하듯 미안하단 얘길 속삭이길 몇 번, 서하림이 고개 숙인 나를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입을 맞춰왔다. 멎지 않은 눈물 때문에 입술은 젖어 있었다. 고개를 숙였던 탓에 내 눈동자에서 떨어진 눈물이 바로 서하림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혀를 쓰지도, 입술을 가르지도 않고 그저 입술만 닿은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했던 수천 번의 키스보다 따뜻했다.
내가 어느덧 진정된 걸 느꼈는지 서하림이 천천히 내 얼굴을 감싸고 일어났다. 입술은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그만 울어.”
“응…….”
나는 하림이의 허리를 껴안았다. 하림이는 내 머리를 껴안아 주었다. 따뜻한 품에 또 눈물이 올라 조금 울었다. 나는 소리 없이 울었지만 하림이는 다 안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 화방 등록했다? 수채화 제대로 더 빨리 배우려고. 사실 1학기 내내 볼링만 쳤지 미술 동아리는 거의 나가지도 않았어. 볼링도 쳐야 하고 그림도 배워야 하고 공부랑 연구도 해야 하고…… 이제 저녁마다 술 먹으러 다닐 시간이 없을 듯해. 아, 귀찮아서 미뤄둔 면허도 따야 되네. 빠르면 일주일 만에 따는 사람들도 있대. 그리고 교수님 소개로 어디 연구소도 놀러 가기로 했어. 거기 소장님이 내가 좋아하는 책 저자거든.”
“…….”
“아, 바쁘다 바빠, 아쉽네 아쉬워, 이제 술이 인간을 얼마나 우습게 만드는지에 대한 연구도 접어야겠어?”
일부러 연기하는 듯한 말투를 쓰는 게 귀여워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는 하림이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하림이도 내 머리를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랑 먹자. 잘은 모르지만 힘든 하루를 시원한 맥주 한 캔으로 마무리하는 대한민국 성인남녀가 천만 명이라잖아.”
“겨우 그거밖에 안 된대?”
“몰라. 대충 찍은 거야.”
아까 서하림이 내 앞에 가져온 맥주를 한 입 마셔 보았다. 그사이 서하림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고 나는 식은 홍합탕을 다시 데웠다.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속도로 맥주캔을 빠르게 비워가는 서하림과는 달리 나는 무척 천천히 맥주를 마셨으나 한 캔을 다 비우기도 전에 기억이 끊어져 버렸다. 알콜에 한없이 약한 내 해마가 아쉬웠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시답잖은 말들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웃기도 하고 때로는 심각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처음 본 게 내 품 안에 안겨 자고 있는 서하림이 아니었다면 어젯밤 따뜻했던 시간을 잊어버린 게 속상해서 또 울었을지도 몰랐다.
서하림은 거실 한쪽에 이젤을 설치해 뒀지만 아직은 거기서 그림을 그리진 못했고 자기가 찍어놓은 풍경 사진들을 열심히 크로키 하는 초보 수강생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저것 배우고 공부하며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고 방학을 알차게 쓸 줄 아는 아주 바람직한 대학생이었다.
방학이 끝나기 직전 서하림이 드디어 이젤에 커다란 스케치북을 올리고 붓을 들기까지 나는 그림을 그리는 서하림을 하루 종일 감상하며 서하림 입맛에 맞는 원두로 커피를 내려주는 게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우린 때때로 둘이서만 볼링장에 가기도 했고 유명한 맛집이라는 곳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 날은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 이야길 나누기도 했다.
서하림은 나와 함께 마시는 게 좋다고 말했다. 나는 매번 조금만 마셔도 취해 다음 날이면 기억을 잃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큰 재미가 없는 얘기일지라도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마음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고 그건 몸을 섞을 때마다 하림이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나 역시, 섹스를 하며 하림이를 신경 쓰느라 전처럼 거친 섹스는 더 이상 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상상은 말도 안 되게 난잡해지고 더러워져서 상상 속 서하림은 죽어 나갔지만 어찌 됐든 내게도 굉장히 큰 변화였다.
전화가 세 번이나 끊어져 부재중이 될 때까지 액정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앞엔 이미 한 번 다 마시고 두 번째로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텀블러에 담겨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엄마]
하도 끈질기게 연락을 해 와 강의 끝난 시간을 알려주며 맞춰 전화하라고 한 건 나였지만 어차피 전화 내용은 뻔해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으로 피하고 싶었다.
남아 있는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진짜 이럴 거야?
전화를 받자마자 모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가 갖고 있던 사진들 다 보내줬잖아. 도대체 언제까지 엄마 기다리게 할 셈이야?
“글쎄…… 나 너무 바빠서.”
-바쁜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바빠?
엄마는 조금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남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미룰 때까지 최대한 미루고 싶었는데 이제 진짜로 아빠를 신고할 때가 왔나 보다. 내가 신고하지 않으면 엄마가 한국에 들어가서라도 할 거라고까지 얘길 하는 거 보니.
“근데 엄마, 생각보다 가정 폭력 형량이 안 높던데. 실형도 잘 안 나오고.”
-엄마가 알아봤는데 네 아빤 초범도 아니고 우리가 모은 증거가 굉장히 오랜 시간, 횟수도 빈번했기 때문에 많이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감방에 갈 수 있대.
“그래?”
나라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 건 아니다. 날 낳아준 엄마를 향한 한 톨의 양심은 남아 있어 나름 무료 변호사무소도 가보고 이모님 통해서 변호사 소개받아서 상담도 받아보긴 했는데 내가 어렸을 때 아빠가 감옥에 갔던 건 나나 엄마를 때려서가 아니라 그때 재직 중이던 고등학교 유도부 학생들을 패서 갔던 거였다. 그마저도 체육계 관행이네 어쩌네 하며 쉬쉬하다 넘어갈 뻔한 걸 학생 하나가 너무 맞아서 운동을 그만두고 또 다른 한 명이 자살 시도를 했던 게 이슈가 되어 겨우 육 개월 받은 게 다고.
그리고 누구 때려서 감옥에 다녀왔음 몸을 사리든가 해야 할 텐데 정신 못 차리고 나나 엄마 때린 걸 보라. 지금 신고해 봤자 길어야 1년 정도 받는다는데 출소하고 복수라도 하겠다 찾아오면 내 쪽에서는 피곤한 일이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다.
-그러니까 얼른 신고하자, 응? 그 인간 콩밥 먹는 꼴을 봐야겠어.
“…….”
-너는 안 그래?
“나는 뭐…….”
애매한 내 대답에 엄마가 한숨을 푹푹 쉬면서 짜증을 냈다. 또다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엄마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엄마랑은 다르게 나는 그냥 지금처럼 아빠 새끼한테 적당히 용돈이나 쥐여 주면서 서로 남남처럼 살다가 나이 먹어 뒤지시면 장례식 없이 저승으로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며칠 전에 어떤 한심한 짓거리를 하며 살고 계시나 전화를 해봤더니 노름판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매달 보내기로 한 돈도 이번 달부터는 좀 더 올려 줄 생각이었다. 과외비로만 한 달에 놀라울 정도로 벌고 있다 보니 돈으로 아빠를 누를 수 있다면 충분히 더 줘도 괜찮았다. 그 정도 줘봤자 출혈이 그렇게 크지도 않고.
-……해서 이제 진짜로 털어버리는 마지막 단계야.
“근데 엄마, 진짜 미안한데.”
-응. 말해봐.
“내가 요즘 되게 중요한 일을 준비 중이거든. 내 생일 좀 전에 마무리가 될 거 같아.”
-네 생일이면 1월? 무슨 일인데? 그거 때문에 그렇게 바쁘다고 했던 거야?
“어. 뭐 심각한 일은 아니고 그냥 뭐 준비하는 게 있는데 공모전 같은 거. 발표가 1월 1일이야. 이왕 하는 거 좀 잘 하고 싶고 그래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데 아빠 일로 방해받고 싶지 않아. 그거 발표 보고 내년에 하면 안 돼?”
-안 돼. 너무 늦어.
“아, 엄마아.”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려봤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그럼 너 신경 쓸 일 없도록 엄마가 한국 들어가서 다 할 테니까,
“아니, 엄마. 나도 피해자 중 하난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나는 빼고 엄마만 피해자라고 신고하게? 됐고, 엄마 이 일은 제발 내년으로 미루자.”
엄마는 계속 강경하게 나왔다. 너는 내년에 신고를 하더라도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해야겠다며. 아무리 들어도 엄마가 굉장히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잠깐 한국 들어와서 아빠 감옥에 처넣고 모든 걸 다 끝냈다며 다시 베트남으로 가버리면 한국에 남아 있는 나는? 아빠가 칼 들고 쫓아온다 해도 이길 자신은 있지만 지금의 평화로운 나날들을 깨는 것 자체가 싫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엄마가 듣기 좋도록 스토리를 극도로 미화시켜 내가 고등학교 백일장을 재패해 오죽하면 예고 학생들의 견제와 질투를 받았을 정도며 명문대 교수님이 스카우트 제의까지 할 만큼 문학 천재로 이 구역의 기대를 받고 있다는, 그리고 나 역시 화려한 데뷔를 위해 피를 토해가며 영혼을 담은 시를 쓰고 있단 얘기를 했다.
어차피 상은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타왔기 때문에 엄마도 내가 어느 정도 글 쓰는 재주는 있다고 알고 있어 납득시키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엄마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기대주란 얘길 덧붙여 너무너무 대단한 아들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또, 창작의 고통이 엄청나기 때문에 요즘 아주 예민한 상태이고 작은 것 하나에도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한다면서 올해는 아빠 때문에 조금도 영향을 받기 싫다고 못을 박았다.
-그런…… 거였으면 진작에 얘길 하지. 엄마가 우리 아들 못 챙겨준 게 여기서 티가 나네.
엄마의 목소리는 약간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하고 벅차오른 것 같기도 했다. 미화를 했지만 어쨌든 사실에 기초하여 내 자랑을 한 거라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아빠 새끼 때문에 바빴으니까 됐어. 내가 엄마한테 얘기 잘 안 하기도 했고. 미안해하진 마. 아무튼 올해는 사정이 이러니까 좀만 참아. 돈 많이 벌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지내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고. 또 연락할게.”
간지러운 소리를 더는 못 하겠어서 엄마의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얼음이 꽤 많이 녹아 밍밍해진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외 갈 시간이었다.
암만 입문이고 개설이고 얕게 훑는다고 해도 음운론이니 형태론이니 통사론이니 하는 내용들은 재미도 더럽게 없고 듣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성적을 내고자 하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첫 단추였던 원서부터 단단히 잘못 꿰었다고 생각하는 데다가 등단이라는 다른 목표 때문에 중간고사를 존나 대충 봤다.
원래 시험 기간일 땐 공부하기 싫어 국어사전도 재밌고 불교 방송도 재밌는 법이라 시 쓰고 글 쓰는 게 평소보다 못해도 열 배는 재밌었다. 나는 교수님 말에 따르면 누에가 실 뽑아내듯 시를 많이도 쓰는데 쓰는 족족 다 감탄만 나온다는 천재였고 아직도 동의하진 않지만 저 수식어 덕분인지 우리 과 1학년 중 성적이 제일 바닥을 기고 있는 와중에도 눈치는 덜 보였다. 아직 어디 당선된 것도 아닌데 괜히 교수님이 알음알음 다른 교수들한테 입을 털어낸 게 제일 컸다.
게다가 요 며칠 새 나는 전과고 복전이고 다 접었다. 내년 되면 F만 피해 다닐 내가 훤해 그냥 졸업만 하는 걸로 목표를 수정했다. 나는 늘 포기가 빨랐고 그만큼 계획을 세우는 것도 빨랐다. 일단 올해만 등단 준비해 보고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그리고 겨울 방학부터 과외 인원을 더 늘려서 돈이나 착실히 모은 다음 졸업하면 5급 공무원 시험이나 행정고시를 볼 예정이다.
대학 생활을 알차게 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마음은 있는 대로 다 떠서 그런지 내가 내는 것도 아닌 등록금이 아쉬울 정도였다. 서하림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공기업에 고졸 공채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토요일이면 서하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캔버스 앞에 앉았다. 1학기는 볼링 치러 다니느라 정기 전시회에 작품을 내질 못해서 이번 학기엔 꼭 작품을 내고 싶다고 했다.
열심히 그리는 풍경화는 유럽 여행 갔을 때 찍었다는 이탈리아의 어느 포도 농장 사진이었다. 같은 곳을 다른 위치에서 찍은 사진 중에 두 개를 골라 그려보고 제일 잘 된 걸로 제출할 거라며 굉장히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에 눈부시게 빛나는 서하림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그를 뮤즈로 삼아 연필을 들게 되었다. 시간은 우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초침 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흘러가기도 했다.
서하림은 붓과 물감으로 알록달록한 색을 채워나갔고 나는 서하림 대신 하얀 종이를 까만 연필로 마음껏 탐하고 더럽혔다. 포도나무 이파리 따위를 그리고 있는 서하림은 제 뒤에서 내가 자위를 하는 건 꿈에도 모를 것이다. 동그란 머리통, 까만 머리카락, 가는 목덜미, 곧은 허리, 얇은 발목, 끝이 붉은 발가락과 뒤꿈치, 앙증맞은 귀둘레 같은 것들만 보여도 흥분하는 나를. 종종 커피를 마시기 위해 옆 테이블로 손을 뻗으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손가락, 늘 차가워 분홍빛으로 물든 손끝과 햇빛이 반사되어 빛이 나는 정갈하고 예쁜 손톱 때문에 샤프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 종이를 찢어버리고 그 구멍 안으로 샤프를 밀어 넣어 앞뒤로 움직이는 나를.
고작 예쁘다 잘생겼다란 단어로는 차고 넘치는 서하림은 그나마 아름답다는 말이 그를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순결하고 깨끗하며 성스럽고 아름답다는 걸 한 번에 뜻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말로 시인이 된다면, 그리고 저 말들이 모두 담긴 하나의 단어가 존재한다면 내 첫 시집 이름은 단연코 그 완벽한 단어일 것이었다. 또한 내가 소설가도 될 수 있다면 첫 소설책 역시 그 단어일 것이고.
서하림이 제일 좋아하는 과테말라 원두를 갈아 드립커피를 내려 가져왔다. 테이블에 내려놓기 전에 잠시 몇 초간 그의 뒷모습을 감상하다 일부러 소리가 나게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쉬면서 해.”
“땡큐.”
그림은 거의 완성되어 가는 중인 듯했다. 흰 곳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관심 있으면 너도 같이 배울래?”
“내가? 그림을?”
“팔십 먹은 할머니분들도 배우러 와.”
호로록 커피를 마시며 살짝 눈을 감는 서하림은 잔뜩 풀어진 얼굴을 했다. 그 얼굴에 홀린 듯 입을 맞추고 나니 나도 모르게 화방을 등록한 뒤였다. 다만 나는 그림에 전혀 소질이 없어서 내가 뭘 그릴 때마다 옆에서 서하림이 놀리느라 바빴다. 고1 미술 시간에 정물화 그리긴가를 했었는데 그때 육각면체와 사과를 존나 못 그렸던 걸 뻔히 다 봤으면서 도대체 나를 왜 화방에 앉혀 놓은 것인지.
웃긴 건 그래놓고 한 달도 되지 않아 화방에 다니는 대신 요리 학원을 가라고 추천했다는 거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복어로 이루어진 다섯 개의 조리 기능사 자격증은 혹시 몰라 방학 때 필기만 전부 다 패스해 놨다. 근데 따고 나니 굳이 실기 시험을 봐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냥 집 근처 문화센터에 잘 되어 있다는 취미 요리반이나 들을까 하고 있던 중이라 그런 것도 하나 모르는 서하림에게 설명해 줬다.
“야, 필기 봤으면 실기도 봐야지! 필기를 안 봤으면 몰라도 너무 아깝잖아.”
그래서 바로 실기 볼 생각으로 요리 학원을 등록했다. 하림이랑 앞으로 계속 살려면 확실하게 서류로 조리 자격증을 남겨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원래는 클래스가 시작되고 난 뒤에는 등록을 받아주는 편이 아니라고 학원 직원이 얘기했지만 실기 한 번 봤는데 떨어졌다고 뻥을 쳤더니 사람 남는 반으로 넣어줬다. 첫 수업에 바로 뻥인 게 들통났으나 지금까지 해온 짬이 있어서 그런지 선생님이 날 혼내진 않았다.
“너넨 예대 지원도 안 하는데 왜 거기 책자를 가지고 있어.”
혹시 몰라 수시에서 떨어질 수 있으니 3학년 아이들도 합격 발표 전까지는 계속 수업을 듣는다. 쉬는 시간이 되기도 전부터 조잘조잘 떠드는 아이들 사이에서 3인방이 지원도 하지 않은 대학교 수시 안내 책자를 발견했다. 게다가 수시 원서 접수는 지난달이었다.
“표지에 우리 애들 나와서요!”
딱 봐도 성인일 사람들에게 오빠가 아니라 애들이라 지칭하는 게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하여간 말을 들어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이 학교에 다니고 있고 그래서 고등학교에 배부되는 수시 안내 책자 모델이 되었고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이 대학의 책자가 빠르게 동이 난 바람에 팬들의 요청으로 이번 달에 재인쇄가 되었다며 아이들이 내게 그 아이돌의 인기를 자랑했다. 하나도 흥미가 들지 않아 반응조차 해주지 않았더니 아이들도 내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오늘의 다과인 수제 약과를 까 먹으면서 문득 우리 학교에 연예인이 다니고 있나를 떠올렸다가 관뒀다. 다니고 있다고 해도 워낙 관심이 없어서 얼굴 봐도 모를 게 분명했다.
과외가 끝난 후 서하림과 볼링을 치러 나왔을 때 나는 안내 책자는 어차피 무료인데 뭐 하러 재학 중인 연예인 사진을 넣는 걸까 하는 의문을 꺼내 얘기해 봤다. 서하림은 내 과외 이야기를 듣는 걸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과외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나는 대로 다 얘기하는 편이었다. 서하림이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못 하는 것 중에 과외가 있다 보니 내 얘길 들으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듯했다.
“학교 홍보실에서는 이왕 책자 나가는 거 무반응인 것보다는 반응이 있는 게 좋으니까 그러겠지.”
“너 수시 지원할 때 우리 학교 책자 보고 했어?”
“아니.”
서하림이 오른손에 찬 아대를 다시 고쳐 붙이며 대답했다.
“나도. 책자는 고사하고 요즘 사람들은 종이책 자체를 잘 안 읽는데 뭐. 어린 학생들은 긴 글도 못 읽는다잖아.”
“너도 요즘 사람 어린 학생이거든. 근데 보통 팬들한텐 그게 소장용이니까?”
“겨우 대학교 책자를? 학교에서 내는 정기 간행물 같은 거라서 인터뷰가 실리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내 연예인 이름 석 자만 적혀 있어도 자랑스럽고 갖고 싶은 게 팬의 마음이지. 학교 입장에서도 유명한 연예인들이 우리 학교 다니고 있으면 학교 이름 알릴 기회니까 이게 웬 떡이냐며 냉큼 사진 찍고도 남겠다. 연예인 아니더라도 보통 그런 거 다 어느 정도 생긴 학생들 데려다가 사진 넣어. 그래서 나도 책자랑 포스터 찍었잖아.”
“뭐?”
“음?”
서하림 말에 마지막 자세가 흔들리면서 볼링공이 옆으로 빠져버렸다. 서하림은 제 볼링공을 닦고 있었다.
“언제!”
“뭐야, 깜짝 놀라게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미안해. 사진은 왜 언제 찍었어? 나한테는…… 왜 얘기 안 해줬어? 혹시 책자 가지고 있어? 포스터는? 집에 있어? 방에? 서재?”
“학교에서 찍어달라고 하니까 거절할 이유 딱히 없어서 찍었고 정신없어서 말 안 했고 집에 없어. 나도 인쇄되고 나서 학교에서 한 번 본 게 다야. 포스터는 지하철이나 뭐 그런데 붙는다 했고 책자는 학교 입시처 홈페이지 들어가면 PDF 파일로 볼 수 있을걸. 아닐 수도 있고.”
빨리 공 던지고 찾아볼 생각에 자세를 바로 잡지 않은 채 힘으로만 공을 굴렸다. 가운데를 약간 벗어났음에도 파워 때문에 스트라이크가 나왔다.
나는 공이 손에서 떨어지자마자 주머니에 넣어 놓은 휴대폰을 꺼내 입학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수시 입시 요강을 다운받았다. 처음부터 하림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음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표지엔 학교 로고뿐이었다.
문제는 그다음 장부터였다. 캠퍼스를 멋지게 찍은 사진이 나왔고 간단하게 학교를 소개하는 문구와 함께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어쩌고 글로벌 어쩌고 하는 말 옆에 서하림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크기가 좀 작긴 했는데 그래도 이런, 대외적으로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정식 출판물에 서하림의 사진이 여러 장 있다는 것과 그걸 나 모르게 찍었다는 게 조금 서운했다.
도서관에서 찍은 건지 뒤로는 서재가 포커스 아웃 되어 있고 책상에 앉아 책을 몇 권 쌓아둔 채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를 한 서하림의 사진을 뚫어져라 보다가 주머니에 넣고 그러다 또 보고 싶어 내 차례가 됐는데도 잠금 화면을 풀었다가 또 주머니에 넣은 다음에 볼링공을 던졌다. 계속 보고 싶어서 집중이 흐려지는지 힘줘서 던졌는데도 계속 겨우 핀 몇 개만 맞출 뿐이었다.
“야, 뭐야. 제대로 해.”
“응.”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내 시선은 휴대폰 액정에 고정된 채였다. 볼링공을 대충 닦아 건성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다시 액정에 뜬 서하림의 사진을 봤다.
“김동규.”
스페어 처리를 한 서하림이 내 휴대폰을 가져갔다. 둘이 하는 게임인데도 휴대폰 붙잡고 액정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으니 나름 나도 잘못한 걸 알고 있어 왜 뺏어갔냐고 뭐라 하진 않았다.
“원본 줄 테니까 제대로 해. 이럴 거면 왜 따라 왔냐? 다른 애들한테 연락 왔는데도 너랑 온 건데.”
“헐 진짜? 미안해. 알았어. 열심히 할게.”
사진 원본 준다는 것도 좋고 나랑 굳이 와준 것도 좋아 싱글벙글 웃으며 볼링공을 꼼꼼히 닦았다. 몇 번 제대로 던지지 않았더니 서하림과 점수 차가 많이 벌어져 버렸다. 시간을 들여 집중하고, 힘을 실어 공을 던졌다.
“그대로 멈춰봐.”
“어?”
“30초만.”
“나 스페어 처리해야 되는데…….”
“알아. 30초만.”
볼링공 던진 자세로 얼음처럼 굳어 서하림이 30부터 거꾸로 세는 소리를 듣기만 했다. 뭐지, 뭘 하는 거지. 벌레가 붙었나? 아니면 바지가 터져서 사진을 찍으려고?
“…….”
하림이가 대체 뭘 하는 건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그러면서도 숨을 참은 채 숫자를 다 셀 때까지 기다렸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멈춰 있으라고 그랬으니까.
“십, 구, 팔, 칠, 육, 오, 사, 삼, 이, 일.”
나는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하림이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서하림 손에는 손바닥만 한 스케치북과 6B 연필이 들려 있었다.
“뭐……해?”
“크로키. 뒤에서 보는데 몸이 좀 좋아야지.”
“…….”
“나 화가 DNA가 있나 봐. 요즘 뷰가 좋은 것들만 보면 손가락이 반응한다?”
금요일 저녁 시간이라 사람이 많았다. 안 그래도 볼링장에 있는 사람 중에 제일 커다래서 튈 텐데 심지어 볼링공을 던지고 정지한 채 가만히 있으려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에 서울 시민 전부가 모여 날 이상하게 쳐다본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게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안겨 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귀까지 빨개지고 광대와 이마에 헛헛한 열이 올라 심장이 빨리 뛰는 건, 오로지 서하림 때문이었다.
스페어 처리를 위해 다시 공을 던졌을 땐 팔도 다리도 일부러 좀 더 뻗어보았다. 멋져 보일 수 있도록, 좋아 보일 수 있도록. 나는 발레리노라도 된 것처럼 손끝과 발끝에도 영혼을 담았다. 뒤에서는 보이지 않을 표정을 갈무리하고 엉덩이와 등 근육에도 잔뜩 힘을 줬다. 왜 볼링은 옷을 입고 하는 스포츠인 거지? 두근거리는 가슴 부근을 빨리 눌러주고 싶었다.
“혹시 공 던지는 동작들 죄다 느리게 할 수 있어?”
“응, 할 수 있어.”
“내가 멈추라고 하면 바로 멈춰야 돼.”
“응. 바로 멈출게.”
“던지기 전일 수도 있고 후일 수도 있어.”
“응. 괜찮아. 너 편한 대로 얘기해.”
나는 성질 급한 사람이 옆에서 날 본다면 속 터져 죽을 만큼 정말 천천히 움직였다. 서하림은 볼링공을 닦을 때 멈추라고 하기도 하고 던지려고 두 손으로 잡고 있을 때나 막 한 걸음을 떼었을 때, 손에서 공이 떨어진 순간을 비롯해 다양한 동작에서 크로키를 했다. 인간의 동작이 이토록 다양했는지 처음 알았다. 아니지, 나도 서하림이 눈을 깜빡이고 숨을 쉬고 눈썹을 찡긋하거나 어깨를 올렸다 내리고 입술 한쪽을 삐죽이거나 침을 삼키거나 자음과 모음을 쓰는 모든 손동작, 윗입술을 무는 것 등 수천수만 가지 서하림의 움직임을 알고 있다.
서하림도 내가 그러하듯 30초라는 짧은 시간에 내 몸을 핥는 걸까. 맑은 눈동자가, 곧은 시선이 끈적한 욕망이 녹아든 타액을 매단 혀처럼 내 몸을 쓸어내리고 옷 안쪽을 상상하며 그림 그리는 건 아닐까.
‘이렇게 하면 돼?’
‘으응. 움직이지 말구, 앞에 봐.’
나는 서하림의 주문대로 누드모델들이 한다는 포즈를 취해 보였다. 성난 등 근육과 엉덩이 보조개라는 아폴론 보조개가 선명하게 보일 수 있는 자세였다. 연필이 종이 위를 움직이며 들려야 하는 사각사각 소리 대신 작고 귀여운 하림이의 숨소리만 들려온다. 커다란 눈동자가 굴러가며 내 등을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내 등에 저런 게 있는지도 몰랐고 심지어는 저게 이름까지 있는 보조개라는 걸 저번에 피팅 모델 알바 하면서 처음 알았다. 그래서 하림이한테 바로 얘길 해줬더니 내 등에, 특히 척추 끝 아폴론 보조개가 있을 곳에 키스 마크를 남기는 걸 참 좋아했다.
‘얼마나 이러고 있어야 돼?’
‘음…… 30분?’
‘그렇게나 오래?’
‘야아, 뒤돌아보지 말구 앞에 보라니까.’
‘하지만…….’
30분이나 이러고 있어야 한단 얘기에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꽤 많이 몸을 틀었으니 하림이도 분명 반쯤 선 내 것을 봤을 거다. 봤을 텐데도 아무것도 못 본 척 그림을 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아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소리였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끝까지 발기 하고 말았다. 서하림이 내 등을 훑는 시선이 굉장히 노골적이었고 음탕했으므로.
‘뒤 말고 앞은 안 그려? 앞도 지금 존나 멋진데. 조각으로 떠도 될 정도야.’
‘알지. 근데 지금은 일단 등 그리고 싶어.’
배꼽에 닿을 정도로 발기는 했는데 움직이지 말라고 했으니 가만히 서 있는 게 퍽 불편했다. 거기다 손도 안 댄 채로 사정을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손으로 만지지 않아 100% 만족스럽지도 않았고.
‘음…… 하림아.’
‘아, 왜 아깝게 싸고 그래……!’
비릿한 정액 냄새가 퍼져 나가기가 무섭게 스케치북과 연필을 집어 던진 하림이가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내 정액을 개처럼 핥아먹기 시작했다.
‘하림아, 더러워. 먹지 마.’
‘으응, 아니야…….’
어깨를 잡고 바닥에서 떼어내자 하림이는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혀를 뺐다. ‘동규 건데, 동규 거……’ 하며 우는 소릴 내는 게 귀여워 마저 핥게 손을 놨다. 어차피 바닥은 열심히 청소해서 깨끗했고 카펫이 깔려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만족할 때까지 바닥을 핥은 하림이가 향한 곳은 내 다리 사이였다. 나는 하림이가 내 것을 물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래서 하림이가 내 귀두만 입에 물었을 때 뒤통수를 당겨 한 번에 목구멍 깊숙이 처박았다. 하림이의 눈동자가 반쯤 뒤집히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기도까지 막아버린 내 좆 때문이었다.
‘헉, 컥, 허억…….’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자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하림이의 얼굴은 질식사하는 사람처럼 점점 붉어지면서 내게서 떨어지기 위해 내 허벅지와 배를 때리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이젠 파랗게 변해가는 얼굴을 바라보다 사정하며 하림이의 입에서 내 것을 꺼냈다. 하림이가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하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림이 역시 옷을 하나도 입고 있지 않아 숨을 빠르게 쉴 때마다 가슴팍이 빨아 달라는 듯이 움직였다.
‘힘들어? 더 못 하겠어?’
나는 하림이의 양쪽 유두를 뜯어낼 것처럼 세게 꼬집었다. 하림이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또 울기 시작했다.
‘응? 못 하겠냐고. 내 거 못 빨겠어?’
‘아, 아악! 아파! 동규야, 동규야!’
‘대답하면 놔줄게.’
‘할게! 빨 수 있, 아으, 하악!’
‘입 벌려봐. 한 번 더 입에 싸고 싶어.’
아직도 가쁜 숨을 내쉬며 엉엉 우는 하림이는 내 말에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작고 말랑이는 혀 위에 내 것을 얹은 다음 느리게 밀어 넣었다. 우는 소리가 내 것에 막혀 반쯤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게 더 꼴리고 자극적이었다. 입 가려놓고 섹스하면 이런 소리일까 싶어서.
‘더 깊게 찔러도 되지?’
미간을 찌푸리며 겁먹은 눈동자를 하고, 볼이 다 젖도록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하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다 그렸다니까.”
“어, 어. 나도 잠깐 딴생각하느라고.”
“그러니까 세 게임을 다 졌지.”
“그러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나는 서하림이 그려낸 내 모습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내가 쓰는 서하림은 세상 천사가 따로 없고 아름다움의 헌신인데 말이다. 고작 30초 그린 거로 대단한 작품이 나오진 않았을 거고 잘 모르지만 크로키는 연습용 그림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래도.
‘뒤에서 보는데 몸이 좀 좋아야지.’
서하림의 볼링 가방을 받아 트렁크에 넣으면서도 웃음이 주체가 되질 않아 광대를 몇 번 눌렀다.
“가위바위보 할까?”
서하림이 차 키를 달랑거리며 물었다. 나는 도저히 운전할 상태가 아니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 서하림이 가위. 나는 순순히 손을 내밀어 차 키를 받았다.
“아 근데…….”
“응?”
“나 지금 기분 너무 좋아서 실실 웃다가 전봇대 박을 거 같아.”
“헐 미친.”
내 손 위에 올려놓은 차 키를 서하림이 다시 번개같이 가져가더니 운전석에 올라탔다. 나는 조수석에 가지 않고 운전석 창문을 똑똑 두들겼다.
“왜.”
“나 아까 그린 거 봐도 돼?”
“그래라. 볼링 가방에 있어.”
조그만 스케치북 하나가 뭐라고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건지. 별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이 작은 게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소중하게 들고 차에 탔다. 막상 펴보려니 너무 떨려서 펼치지는 못하고 숨만 쉬고 있는 걸 보다 못한 서하림이 안전벨트를 직접 채워주기까지 했다.
“저녁은 어떡할래?”
“저녁?”
“딱 저녁 시간이잖아. 너 밥하기 귀찮으면 밖에서 먹고 들어가게.”
“난 상관없어. 밥하는 거 귀찮았던 적 한 번도 없어서.”
“아 그래.”
서하림이 차를 빼기 위해 뒤쪽을 보느라 내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나름 너 먹이려고 뭐 만드는 건 좋다고 매력 어필을 해본 건데 실패다.
스케치북 표지를 열었다. 첫 장은 시내버스였다. 버스 옆에 신호등도 같이 그려져 있었고 그림 오른쪽 아래 구석엔 날짜와 위치가 대략적으로 쓰여 있었다.
“너 먹고 싶은 거 해줄게. 뭐 먹고 싶어?”
“어, 나…….”
“기다릴까?”
면허를 딴 지 이제 두 달이 넘은 서하림은 차 빼는 데 백만 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나갈 때 편하도록 후면 주차를 하라고 해도 귀찮다며 정면 주차만 해댔다. 내 말에 서하림이 민망한지 살짝 웃으며 “1분만” 하고 말했다.
크로키 전용 스케치북인 줄 알았는데 크로키 수준이 아니라 스케치라고도 할 수 있는 꽤 정밀한 그림들도 여럿 보였다. 연필로 명암을 넣거나 색칠도 한. 이런 쪽은 잘 모르지만 막눈인 내가 봐도 꽤 괜찮은 수준인 것 같았다.
“너무 자세히는 보지 마.”
“왜, 잘 그린 것 같은데.”
“너는 내가 네가 쓴 글 보면 좋겠어?”
“나는…….”
“거 봐. 싫지?”
“음, 좋을지 싫을지 잘 모르겠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네가 내가 쓴 거 읽는다는 거를.”
“헐 진짜? 나야 취미지만 너는 나보다 제대로잖아. 나중에 진짜 시인 돼서 시집 나오면 나 거기다가 네 싸인 받을 거야. 1등으로 해줘.”
항상 쓰기 바빴지 그걸 서하림이 본다고 생각해 본 적이 정말 한 번도 없다. 내가 쓴 걸 보여주는 대상은 백일장 심사 위원, 교수님, 신춘문예 심사 위원 뭐 이런 사람들로만 생각해서 그런가.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서하림에게 영감 받아 쓴 걸 막상 그 대상인 서하림이 읽는다고 했을 때 조금 부끄러울 것 같긴 하다. 내가 그렇게 찬양하고 아름답게 써봤자 진짜 서하림보단 덜 한 거라서.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돼? 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지만 음, 근데 좀 더 생각해 보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서하림에게 느끼는 감정을 말로 했다간 음담패설이 따로 없을 텐데 그래도 글로 쓰면 문학적인 표현으로 멋들어지게 탄생하는 거니까.
“난 좋을 것 같아.”
“어?”
“네가 내 거 읽어주면 좋을 것 같다고. 나는 좋아.”
운전석 쪽으로 몸을 살짝 빼고 얘기했더니 서하림이 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 그거야 너는 완전 본격적이고 재능도 있고 잘 하면 내년부터는 프로 작가 되는 거고 한데 나는 진짜 그냥 아마추어니까 보여주는 게 부끄러워도 너는 아니지. 나도 내가 만약에 그림 천재면 휴지에 낙서를 그려도 너한테 보라고 자랑했을걸.”
“알았어. 대충 볼게.”
답지 않게 당황해하는 게 귀여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앞에 그린 건 정말로 대충 보기 위해 슥슥 넘겼다. 어차피 보고 싶은 건 좀 전에 서하림이 그린 ‘나’였다.
“집에서 밥 먹자.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음. 면 먹고 싶어.”
“국수? 짜장면? 파스타?”
“아니. 음…… 칼국수 어때.”
“좋지. 해물 칼국수 먹을래 아니면 닭칼국수 아니면 얼큰 칼국수?”
“닭칼국수.”
“그럼 마트 들러서 생닭 사가자.”
“생닭? 그럼 시간 많이 걸리는 거 아니야? 집에 닭가슴살 없어?”
“있는데 그거로 만들어도 돼? 생닭 쓰는 게 맛이 더 좋은데.”
“김동규 손이면 닭털 가지고 만들어도 맛있을걸.”
그 정도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마침 넘긴 곳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연필 선이 아주 바쁘게 움직이며 풍채 좋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 나왔다. 아래엔 오늘 날짜와 김동규라고 적혀 있는 그림이.
나라고 얘기하지 않으면 나인지도 모를 아주 간소화된 그림이었지만 굉장히 역동적인 포즈 덕인지 내가 보기엔 예술 작품이 따로 없었다. 모델이 좋단 얘기가 아니라 하림이 그림 실력이 그렇다는 얘기다. 나야 하림이가 동그라미 하나만 그려놔도 세기의 역작이라고 할 사람이라 객관성은 좀 떨어지겠지만 서하림은 뭘 해도 중간 이상은 하니까 내 눈이 많이 틀리진 않았을 거다.
빠르게 그리기 위해 머리카락이나 손끝, 그 외 모든 디테일은 전부 날렸어도 그만큼 내 몸은 옷 하나 입혀지지 않은 것처럼 날 것 그대로 그려져 있었다. 내가 옷을 벗고 있었던가 싶어질 정도로.
아, 혹시 정말로 서하림은 날 데리고 누드크로키를 그리고 싶은 걸까. 몸이 좋다고 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으로 웨이트를 더 열심히 해야겠단 다짐이 들었다. 사진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누드모델이 근육이 보기 좋게 많으면 좋을 것 같으니까.
날린 거나 다름없는 그림들을 손끝으로 훑고 있다 보니 종이가 서하림의 속살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져 흥분됐다. 진정을 해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마지막 그림까지 본 뒤엔 거의 사정하기 직전이었다. 속옷 안으로 손을 넣는 건 좀 꼴불견처럼 보일 것 같아 대신 손을 뻗어 하림이의 허벅지를 잡았다.
“아, 깜짝아. 뭐야.”
하림이의 성기에 닿을 듯 제일 안쪽 허벅지살을 잡아 힘을 줬더니 그대로 정액이 나와 속옷이 축축해졌다. 운전하느라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리지도 못하던 서하림은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묻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서하림의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해.”
“손 안 움직이고 넣고만 있을게.”
“빼라고 했어.”
당황했는지 살짝 낮아진 목소리가 존나 섹시했다. 운전 중이라 괜히 만졌다간 초보 운전자인 하림이가 사고를 낼 수도 있으니 대신 손을 빼고 옷 위를 움켜쥐었다.
“아, 손 치워.”
“나 지금 좀…… 급한데.”
“죽고 싶냐? 손 치우라고.”
마침 빨간불에 걸려 서하림이 핸들에서 손을 떼 나를 밀쳐냈다. 창문까지 밀려난 나는 서하림이 다시 운전을 시작했을 땐 백 보 양보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것인지 서하림은 입술만 깨물 뿐 하지 말란 얘긴 없었다.
성기 바로 옆 허벅지부터 무릎까지 나는 간질이듯 움직이며 서하림의 발기를 도왔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서하림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히더니 운전도 조금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집까지 그리 멀지 않았으나 깜빡이도 신경질적으로 껐다 켜고 액셀 밟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조급해지는 서하림과는 반대로 여유롭게 손을 놀리며 자꾸만 새는 웃음을 누르느라 애썼다. 운전하는데 놀린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이미 충분히 희롱하는 중이긴 했지만.
오피스텔 주차장은 토요일이라 그런지 많이 비어 있어 서하림이 선을 못 맞추고 주차를 했어도 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서하림이 주차를 끝마치자마자 그의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발기한 것을 꺼내 물었다. 차 시동을 끄지도 않은 상태였다.
“야, 너 미쳤어?”
“응.”
하림이는 제일 먼저 블랙박스 전원을 껐다. 아직도 다른 거 할 정신이 남아 있는 게 괘씸해서 강하게 빨아올렸더니 두 다리가 발발 떨리며 움찔거렸다. 하림이가 내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리려 했으나 이빨로 기둥을 세게 물어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하, 윽, 야, 김도, 하, 시발…….”
목구멍 끝까지 하림이의 것을 삼키면서 시트를 완전히 뒤로 젖혔다. 서하림이 팔을 뒤로해 눕지 않겠다고 버텼다. 힘으로 누르면 못 눕힐 것도 없었으나 어차피 사정하고 가슴 빨리면 알아서 드러누울 테니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얼마큼 버틸 수 있나 보잔 심산으로 하림이의 것을 입에서 조금 빼 손으로 기둥을 치대면서 혀로는 귀두와 요도 구멍을 뭉개듯이 핥아댔다. 입을 가렸는지 신음이 잘 들리지 않았다. 대신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때리며 비키란 말을 했는데, 입을 뗄 때마다 신음이 튀어나왔다.
서하림의 차는 썬팅이 무척 잘 되어 있어 밖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아도 안에서는 밖이 너무 잘 보이는 게 흠이었다. 내부에서 불을 켜지 않으면 우리가 옷을 벗고 뭔 짓을 해도 밖에선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들어 하림이의 기둥을 위아래로 빠르게 치댔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며 귀두에서 비릿한 맛이 돌았다. 일단 한 번 빼게 하고 눕힌 다음에…… 내 좌석으로 오게 하는 게 편하려나. 키가 커서 불편한 점보단 좋은 점이 훨씬 많다고 생각했는데 차에서 섹스하기엔 큰 키는 확실한 단점이었다. 차라리 멸치처럼 말랐으면 모르겠는데 아쉽게도 그러질 못해서.
“너 진짜 여기서, 읏, 아…….”
사정을 참으려는지 허벅지 안쪽과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요도 구멍도 필사적으로 움직이려 하기에 입술로 부드럽게 귀두 아래를 눌러주며 사정하지 않고선 못 배기게 만들었다. 소리를 참는 대신 호흡이 격렬해지고 뜨거워졌다. 하림이의 세지는 콧김이 뒤통수에 느껴지는 것만 같다.
어깨를 때리던 손이 멈추면서 진득한 정액이 입안에 터져 나왔다. 나는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귀두를 쭉쭉 빨아 요도 안쪽에 남아 있을 정액을 빨아 마셨다. 체액이 억지로 빨려 나가는 느낌에 서하림이 참지 못하고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가 제 소리에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귀엽긴.
나는 내 쪽의 시트를 젖히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잠깐 사이 숨을 고르던 서하림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신속하게 내려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을 나가려는 서하림을 붙잡았다.
“놔.”
“집에 가서 마저 해.”
“미쳤어? 하…… 진짜 말이 안 나오네. 할 생각이 있었어도 이미 다 식었어. 주차장에서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식은 건 아닌 거 같은데.”
“됐고, 나 오늘 밖에서 자고 들어갈 거야.”
서하림은 내게 팔을 잡힌 채로도 멈추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나는 적당히 따라가 주었다.
“내 입에 쌌잖아.”
“그렇게!”
걸음을 멈추고 소리를 지르려던 서하림은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다.
“……만져대고 빨아대는데 그럼 안 싸?”
“좋았지? 난 스릴 있어서 좋던데.”
“…….”
“좋았잖아. 너도 나도 아직 흥분한 상태인 거 같은데, 아니야?”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서하림과 깍지를 꼈다. 서하림은 손을 털어 내 손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더 손에 힘을 주었고 서하림이 가던 방향과는 반대로 걸음을 뗐다.
“손 놔. 좋은 말로 할 때.”
“그럼 한 번만 하고 집에 가자.”
“한 번이고 백 번이고 안 한다고.”
“그럼 그건 어떻게 해결하게?”
“자위를 하든 다른 사람이랑.”
“무슨 소리야? 넌 자위하는 방법도 모르잖아. 타.”
뒷좌석 문을 열고 서하림을 밀어 넘어트렸다. 서하림이 욕을 하며 버둥대길래 일단 뒷주머니에 늘 넣어 다니는 손수건을 입에 쑤셔 넣었다. 미운 소리가 막히니 훨씬 나았다. 그리고 서하림이 입고 있던 청재킷으로 두 팔을 묶었더니 카섹스 하기 딱 좋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서하림이 씩씩거리며 날 째려봤지만 색다른 섹스 한번 해보고 나면 다음부턴 아예 공원이나 수영장 같은 야외에서 박아달라고 할 게 분명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서하림의 니트를 걷어 올렸다.
지갑에 콘돔이 몇 개 있었더라. 우선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 하림이 먼저 씌우고……. 하도 빨아대서 이제는 빨지 않아도 통통한 유두에 혀를 대며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세 개 남짓한 콘돔을 알뜰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아, 발길질 좀 그만해. 다리까지 묶으면 할 때 불편하단 말이야.”
나는 계속 하림이 안에만 싸면 콘돔은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하림이만 계속 씌워주다가 세 번 정도 안에 싸고 집에 올라가서 씻겨주면 될 것 같다. 집에 올라갈 때까지 바지가 젖으면 남들이 보기에 민망할 테니까 뒤를 꽉 조이고 있으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세 번이나 쌀 때까지 박히고 난 다음에 새지 않게끔 힘을 주는 게 가능하긴 한가? 매번 하고 나면 꽉 닫히지 못하고 살짝 풀어져 있던 하림이의 뒷구멍을 떠올리며 즐겁게 젖꼭지를 깨물었다. 입천장에 뾰족한 유두가 닿아 간지러웠다. 세 번도 말이 좋아 세 번이었다. 하다 보면 내가 몇 번을 싼 건지 서하림이 몇 번째로 사정을 한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으니까.
어찌 됐든 얌전해진 서하림의 가슴팍을 빨아 분홍색 젖꼭지를 또 빨갛게 만들었다. 가슴골을 핥았더니 잘게 떠는 게 귀여웠다. 간지러움을 잘 타는 건 그만큼 예민하단 뜻이고 서하림은 처음부터 섹스돌 마냥 내 혀가 스치고 손이 닿는 곳마다 느끼는 애였다.
지갑에서 콘돔 하나를 꺼내 반쯤 선 하림이의 것에 씌우고 하나는 내 손가락에 끼워 구멍 위를 문질렀다. 바로 허리를 뒤틀며 반응하는 게 예뻤다. 콘돔에 어느 정도 미끄러운 게 묻어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했다. 손가락으로 풀어준다고 해도 찢어질 것 같아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렇다면 그냥 콘돔 쓰고 하는 게 좋을까? 그냥 생으로 박아 넣는 것보단 뭐라도 발라져 있는 콘돔을 끼고 하는 게 좀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겨우 세 개밖에 없고 이게 두 번째 거다. 콘돔이 최대한 수용할 수 있는 정액 용량이 어느 정도지? 하나에다 몇 번을 싸도 흘러나오진 않나?
‘동규야, 방법이 하나 있는데.’
내 아래에 누워 있는 서하림과 똑같지만 어딘가 멍청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네 걸 빨아주면 되잖아. 일단 네가 내 뒤를 손으로 잘 풀어주고 그다음엔 내가 네 걸 잘 빨아서 침도 가득 묻히구…… 그러면 괜찮을 것 같지?’
손가락 두 개를 힘을 줘 밀어 넣었다. 하림이가 고개를 젖혀 예쁜 목젖이 보였다. 윽, 하고 막힌 신음이 들려왔지만 그만큼 달콤한 목소리가 웅웅 울려댔다.
‘너도 알지만…… 조금 서툴러도 잘할 수 있어. 아니, 오히려 서툰 게 좋지 않을까? 잘 못하니까 침이 더 잔뜩 묻을 테구 으응, 아 손가락 조금만 살살해애…….’
서하림 입에 쑤셔 넣어둔 손수건이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느껴졌다. 내 취향으로 빚어낸 서하림이 목소리만으로 나를 충동질하고 재촉하며 날 꼬셔댔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서하림에게서 손수건이 없었다면 들렸을 소리를 내 귓가에 흘려 넣으며 수건 대신 내 것을 박아 넣으라고 시험에 들게 했다.
‘아, 하응, 하앗…… 아! 자, 잘할 수 있, 으응…….’
전립선 근처를 누른 것인지 잔뜩 발기한 서하림의 것이 크게 흔들렸다. 손가락을 열심히 놀려 서하림의 것이 사정을 할 수 있게끔 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숨으로 신음을 대신하는 서하림의 입에, 입이, 손수건이 자꾸만 걸리적거렸다.
내 상상 속의 서하림은 펠라를 존나 못해도 하는 건 좋아했다. 내 것이 입에 들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송해했고 빨 수 있어서 좋다고 울기도 했다. 진짜 서하림이 비위가 약해서 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상상의 서하림은 비위도 좋았다. 가끔은 비위가 나쁜 서하림으로 상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상상하면 눈을 세모나게 뜨고 싫단 소리를 하도 해대서 영 별로였다. 나 좋자고 하는 상상인데 말이다.
손가락을 빼 콘돔에 손가락을 두 개 더 넣어 총 네 개를 얇은 고무 막 안에 가뒀다. 내 것에 한참 부족하긴 해도 지금 당장 뒤를 풀어주기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다른 손 엄지를 구멍에 먼저 넣고 벌렸다. 하림이가 곧바로 뒤에 힘을 줬지만 내 힘이 더 강했다. 창문으로 주차장 불빛이 들어오긴 해도 만족스러울 만큼 밝지가 않아 속살이 보이지 않는 게 조금 아쉬웠다.
손가락 네 개를 최대한 동그랗게 붙여 끝을 가늘게 만들고, 벌어진 구멍에 넣었다. 쿵, 하고 작게 머리가 문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가기 위해 다리로 몸을 민 탓이었다.
“빨리할게.”
손이 큰 편이긴 해도 내 성기보단 한참 작고 얇은 것을 쑤셔봤자 얼마나 풀어지겠냐만 안 하는 것보단 풀고 가는 게 나중에 욕을 덜 먹는 방법이었다.
입이 막힌 서하림 대신 다른 서하림이 내게 만족할 만큼 신음을 흘려주어 나는 곧바로 사정감이 차올라 죽을 맛이었다. 그냥 이대로 박을까. 얼마 풀지도 않아서 분명 피 볼 텐데.
‘괜찮아 그래도.’
진짜?
‘응응…… 하앗, 흐으…….’
아 존나 죽겠다. 나는 당장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실낱같은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손가락에 썼던 콘돔을 내 것에 씌웠다. 새것을 뜯을 정신도 없고 그건 하림이한테 이따 쓸 거고 아 시발, 다급하게 씌우느라 끝까지 잘 하지도 않은 채 그냥 대충 정액만 담을 수 있을 정도로만 하고 하림이 안으로 들어갔다.
“흐읍……!”
“아, 너무…….”
이럴 줄 알았다. 너무 좁고, 좁아서…… 귀두 들어가니 끝이다. 그래도 손가락 들어갔던 곳까진 될 줄 알았는데 너무 겸손했다. 하림이가 도리질을 치며 인상을 썼다.
“안 들어간다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지만 동시에 서하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들어갈 수 있어. 끝까지 다 넣어줘 동규야.’
이렇게 예쁘게 말하면 얼마나 좋아.
“찢어지면 올라가서 약 발라줄게.”
멈췄던 발길질이 다시 시작되며 서하림이 위로 몸을 피했다. 누워 있던 몸이 거의 반쯤은 앉은 자세가 되었는데 나도 하림이를 따라간 탓에 삽입되어 있던 내 것이 빠지지 못했다. 서하림은 절망에 어린 눈동자로 접합부를 보았다. 나는 하림이의 허리를 붙잡고 내 것을 느리게 삽입했다. 매번 구멍을 억지로 벌리고 그 안에 젤이든 로션이든 그런 것들을 부어 넣고 섹스를 했기 때문에 고작 콘돔에 묻은 걸론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잔뜩 벌어져 분홍색 주름이 하얗게 질렸음에도 찢어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좁은 안으로 조금씩 밀어 넣을 때마다 안쪽 살이 찢어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근육 운동 안 하다가 갑자기 할 때면 근육조직이 찢어지는 건 아니더라도 뭔가 피부 내부에서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는데 지금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건 아마 서하림이 극도의 긴장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뭐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풀지도 않았는데 압박감이…… 평소의 열 배는 됐다. 이러다 서하림 안에서 내 것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도 들어가는 걸 멈추진 않았다. 몇 센티씩 성기가 안으로 삽입될 때마다 서하림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차에다가 아예 콘돔 박스하고 젤도 여러 개 준비해놓을게. 미안해.”
나는 수도 없이 하림이에게 미안하다 속삭이며 얼굴에 입을 맞췄다. 분명 많이 아플 텐데도 오늘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게 정말 누가 볼까 봐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람들 생각보다 남한테 관심, 윽, 별로 없어.”
끝까지 밀어 넣고 나서 잠시 숨을 골랐다. 조여도 너무 조여서 이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정할 기세였던 서하림의 것은 다시 반쯤 죽어있었다. 차에서, 주차장에서 하는 게 그렇게 싫은가. 난 존나 색다른 기분인데.
“움직인다. 머리 조심해.”
우선 허리를 조금만 빼 작게 움직였다. 조금씩 빼는 길이를 늘려 가면 될 것 같았다. 얕게 추삽질을 시작하니 서하림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귀엽게 정수리 쪽에 두 손을 올리길래 허리를 잡고 내려 아예 눕게 만들었다. 또 다른 서하림이 왜 안 빨게 해줬냐며, 쾌락에 겨워 울면서 말했다.
성기를 반쯤 빼냈다가 강하게 들이박았다. 하림이의 허리가 튀고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하림이의 예쁜 좆도 다시 힘을 받는 게 보여 나는 아예 귀두만 남겨 놓을 만큼 뒤로 물러났다가 쳐올렸다. 머리통 대신 손과 재킷이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터질 것처럼 조이던 안쪽이 이젠 익숙해져서 피스톤질 하기가 수월했다. 오히려 안에 물처럼 차 있는 것이 없으니 콘돔을 하고 있음에도 쫀쫀한 내벽이 잘 느껴졌다. 서하림의 혀가 이렇진 않을까, 부드러우면서도 쫀득하고 뜨겁고……. 나는 온 힘을 다해 허리짓을 했다. 서하림의 눈꼬리에 결국 반짝이는 눈물이 흘러내리도록 허리를 쳐올리고 또 박아댔다. 하얀 허벅지가 내 딱딱한 몸에 부딪혀 빨갛게 달아올랐을지도 모른다. 허리를 뒤틀며 내게 도망치기 위해 이 좁은 곳에서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안쓰러웠으나 그럴수록 나는 얄쌍한 다리를 잡아끌어 하림이의 도망을 헛수고로 만들었다.
차라리 아래가 찢어지면 하림이에게 더 편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찢어지는 만큼 더 벌어질 수 있잖아. 하얗게 질린 뒷구멍이 불쌍한 것 같지?
‘응, 나는, 하앗, 으으, 뭐든 다 좋아…… 하읏, 아앙, 찢어줘, 해주세요…….’
닳고 닳은 서하림. 내가 원하는 대답만 들려주는 게 얼마나 예쁜가.
차체가 흔들릴 정도로 격하게 움직였다. 서하림이 소리 없이 울면서 내 아래에서 흔들렸다. 아까운 눈물들을 혀로 핥아 먹으면서도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몸이 따끈해지는 변화가 좋다. 언제나 나와 다른 체온의 하림이가 유일하게 나와 똑같아지는 건 섹스를 할 때뿐이었다. 내 좆이 들락날락거리면 분홍색의 차가운 손끝과 발끝이 제 색을 찾았고 좀 더 몸을 비비면 온몸과 함께 새빨갛게 물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하림이와 몸을 섞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림이가 나랑 뭐라도 같아졌으면 좋겠어서.
잠시간 참았던 사정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허리짓은 멈추지 않았다. 사정하면서도 이 좁은 안에서 느리게 움직이면 존나, 끝내줬다. 이렇게 사정하면서 또는 사정하고 나서도 하림이의 안을 쑤실 때면 소변이 마려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상상 속이면 몰라도 진짜 하림이에게는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닌 것 같아 그것도 꾹 참기가 여러 번이었다. 진짜 안에 정액 말고 다른 걸 싸질렀다간 뺨을 맞을 수도 있어서.
“하, 씨발…… 하림아 너 오늘 진짜 존나 죽인다…… 조이는 거 장난 아니야.”
하림이 안에 삽입 한 채로 하림이를 등이 보이도록 돌려세웠다. 자연스럽게 하림이의 묶인 손이 창문에 닿았는데, 섹스하느라 달궈진 공기에 창가에 김이 서려 손이 닿자 뿌득뿌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존나 야해서, 얼마나 야했냐면 방금 사정했는데도 크기가 커지는 게 다 느껴질 정도였다. 땀에 젖어 가죽시트에 살이 쩍쩍 달라붙었다. 그 소리도 존나 야하고 움직일 때마다 차가 흔들리며 나는 미세한 소리나 내 숨소리, 서하림 숨소리도 그랬다.
이대로는 하림이가 어떻게 망가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안이 너무 조였다. 목구멍처럼 좁아지는 안쪽 깊은 곳에 귀두가 닿을 때면 머릿속에서 폭죽이 펑펑 터져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었다. 이렇게 배려 없는 섹스를 한 게 얼마만이지. 이왕 배려 없이 하는 거 진짜로 아래를 찢어 버려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림이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 하나를 내려 아래를 더듬었다. 주름이 있었는지 싶을 정도로 팽팽하게 벌어진 곳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넣고 싶은데 넣을 수도 없을 만큼. 하지만 어떻게든 손가락을 넣어 보기 위해 커다랗게 벌어진 뒷구멍의 테두리를 더듬어보았다. 그러자 서하림이 발작하듯 몸을 떨며 뒤를 돌았다.
“…….”
수도 없이 고개를 흔든다. 손가락은 여전히 뒤를 더듬는 중이었다.
“싫어?”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자 눈물이 따라서 후두둑 떨어졌다.
“그럼 네가 내 위로 올라와서 움직이든가 아니면 내 거 빨아줘.”
한참이나 하림이의 입을 막고 있던 손수건을 빼주었다. 우리가 몸을 섞은 지 꽤 되었는지 두툼한 손수건이 하림이의 침으로 다 젖어 있었다. 이건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앞 좌석 시트에 던졌다. 저걸 다 적실 정도면 하림이 침이 얼만큼이란 거지? 하림이 침을 빨아 마실 생각만으로도 어이없게 사정을 하고 말았다.
“아…….”
“…….”
“빨리 골라 둘 중에 뭐 할래? 후우…… 가을인데 너무 덥다. 그치. 얼른 끝내고 올라가서 밥 먹자.”
이왕이면 후자를 선택해 줬으면 좋겠다. 위로 올라와서 하림이가 스스로 움직이는 건 펠라보다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보였다. 서하림이 여기서 내 걸 빨다가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괜찮았다. 토하면 토하는 대로 계속 빨아줬으면. 토사물이고 위액이고 내 것에 묻는다고 해도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내겐 그만큼 좋은 일이었다. 더럽고 추악한 모든 것은 늘 내 상상 속에서나 구현되던 일이었으므로 그게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짜릿한 것은 없었다.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상상을 하고 판타지를 갖는 게 아니던가.
두 번이나 사정한 콘돔을 빼 묶었다. 차에 늘 준비해 둔 휴지를 꺼내 콘돔을 잘 감싸 정리했다. 비싼 차니까.
웅크리고 엎드려 있는 서하림이 꺼낼 대답을 기다리며 하림이의 팔을 풀어주고 내 것을 찬찬히 만지작거렸다. 아 지금 딱 빨아주면 끝내줄 것 같은데……. 하림이 입안에 딱 한 번만 사정하면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끝낼 용의도 있었다.
“……올라가면.”
“응.”
마음을 정한 듯한 서하림이 내 위에 올라앉았다.
“올라가면 술 먹어. 밥 먹으면서 술 마시자.”
“응. 마시자. 빨리 넣어봐. 술 마시러 가야지.”
서툰 움직임으로 서하림은 내 것을 잡아 제 안에 넣었다. 입을 앙다문 채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늘 내가 달래고 넣어주던 걸 자기 스스로 해야 하는 이 상황도, 그게 우리가 사는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그것도 차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적잖은 충격일 거였다.
“아, 잠깐만. 아…….”
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서하림이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들어갔던 것이 빠지며 귀여운 소리가 났다.
“못 하겠어, 시발…….”
“그럼 빨아주.”
“그건 더 싫어. 죽어도 못 해, 안 해.”
입술을 깨물며 펠라는 죽어도 안 하겠다는 서하림에게 한 번에 다 넣는 걸 추천했다. 하림이가 몇 번 한숨을 쉬더니 핏줄까지 잔뜩 선 내 것을 다시 잡고 삽입을 시도했다. 천천히 몸을 내리며 너무 아파하길래 허릴 잡고 한 번에 들어갈 수 있게 했다.
“……!”
단숨에 조여드는 끝까지 박힌 탓에 서하림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덜덜 떨어댔다. 벌어진 입이 다물리지 못했고 숨도 이상한 소리를 내며 쉬었다. 상상 속에서도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새하얗게 질린 서하림을 보고 존나 잔뜩 흥분하고 말았다. 이대로 움직이라고 재촉해도 못 움직일 것 같아 나는 하림이 허리를 끌어안고 내 힘으로 서하림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첫 섹스가 떠올랐다. 서하림은 감기 때문에 기절한 상태였고 아파하는 소리에 나 혼자 꼴려선 눈 돌아간 채로 박던 그때를. 나도 처음이라 참 병신 같았고 서하림은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처음을.
“하림아, 하림아…….”
“…….”
“내가, 하, 쓴 거 중에, 윽, 하아…….”
하림이는 내 위에서 달랑거릴 뿐 내 머릴 잡지도 때리지도 않았다. 내 것만큼이나 녹아내릴 듯한 속살이 뜨거웠다. 하림이는 신음을 참으며 턱에 힘을 주었고 나는 굳게 닫힌 입술을 핥고 눈동자를 핥고 콧구멍과 턱과 귓속까지 침을 묻혔다. 하림이를 보고 쓴 시 중에 꽤 마음에 드는 시구가 있어서 그걸 말해주고 싶은데, 너무 좋아서 도저히 말이 문장으로 만들어지지가 않았다. 그저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짐승 같은 소리뿐이었고 사람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건 서하림이란 이름이 다였다.
움직이지 않던 하림이가 자신의 것을 잡았다. 자위하듯 흔들진 않고 그냥 정말 잡기만. 사정하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 묻고 싶어도 그럴 정신머리가 없어 하림이가 자신의 것을 잡았다는 것만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사정을 참아가며 하림이를 움직였다. 차가 들썩이는 게 누가 봐도 안에서 섹스하고 있다는 걸 알지 않을까 싶었다.
CCTV를 보고 있는 관리실 직원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 어떡하지. 풍기문란이라며 경찰이 찾아오면? 그래도 나는 할 거 다 하고 나서 문을 열어줄 거다. 벌거벗은 하림이를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고 섹스를 중간에 끊을 바에야 죽는 걸 택하겠다.
“안에, 안에다가…….”
하림이의 안에 사정하기 위해 하림이를 꼭 껴안았다. 사정한 후에 여운을 즐기면서 움직일 생각으로. 그런데 하림이가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덕분에 쏙 빠져버린 내 것이 하림이의 다리 사이에 사정을 하고 말았다.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있어 이건 이대로 또 보기에 나쁘지가 않긴 했다.
떨리는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내 정액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하림이가 닦아내는 바람에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하림이는 허벅지 말고도 손을 뒤로 뻗어 어딘가를 닦았다.
“네 코트…… 내가 입는다.”
“응. 여기 내가 정리할게.”
하림이는 속옷도 바지도 차에 버려둔 채로 내 코트를 입고 차에서 내렸다. 종아리를 거의 다 덮을 정도로 내려오는 기장에 보이는 하얀 발목이 색정적이었다. 바바리맨 같기도 하고. 저런 예쁜 바바리맨은 세상에 없겠지만. 차에서 내린 서하림은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휘청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니 뒤늦게 미안함이 밀려들었다.
빨리 하림이 밥 먹일 생각에 정리를 대충 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마저 정리해야지. 이미 저녁 시간은 훌쩍 지나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하림이는 아직도 씻는 중이었고, 나도 다른 욕실에 들어가 5분 만에 씻고 나와 늦은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늘도 반병을 넘자 기억은 끊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음 날 아침 두 눈이 퉁퉁 부어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과외하는 고3 트리오 중 두 명이 수시에 합격해 아이들 부모님이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한 명은 정시 준비를 하게 됐고 예대는 정시 실기가 1월까지 넘어가다 보니 그때까진 서현이도 예민할 테고 선생님인 나도 긴장 풀면 안 될 것 같다고 변명을 해두었다. 나중에 서현이까지 합격하고 나면 또 어떤 핑계를 둘러댈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대학 합격 인센티브만으로도 3, 4학년 학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수준이었다.
신춘문예 접수를 위해 누런 봉투에 프린트해 놓은 A4용지를 신문사별로 넣고, 봉투에 빨간 글자로 응모 부문과 편수를 적었다. 동일한 작품을 다른 곳에 제출하면 당선이어도 취소가 되기 때문에 전부 다 다른 작품으로 응모를 해야 한다. 나는 올해만 해보고 안 되면 접을 생각으로 원서 넣듯 다 찔러보는 거였지만 교수님은 “이러다 두세 군데에서 한 번에 되면 대박이겠는데?”라며 웃었다.
일곱 개의 봉투들을 우편으로 보냈더니 속이 다 시원했다. 이번 겨울방학은 교수님을 안 만나도 되는구나, 이제 교수님과는 수업 시간 말고는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어서.
교내 우체국을 나서며 시간을 확인하고 미술 동아리 동방으로 향했다. 그냥 서하림 얼굴만 한번 보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우리 놀러 가는 거 알고 귀신같이 찾아왔네!”
동방 문 열기도 전에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하림 때문에 몇 번 얼굴 비춘 적이 있어서 그런지 동아리 사람들 몇이 내게 아는 척을 했다.
“마침 표 남는데 같이 가자. 우리 지금 현대미술관에 전시 보러 가거든.”
화가 김완의 Perfect Finish: 취미 생활.
동아리 사람들은 김완이란 사람도 잘 알고 있고 퍼펙트 피니시라는 전시도 잘 알고 있는지 가는 내내 문외한인 나는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서하림 옆에 붙어 가만히 서하림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었다. 재미라곤 하나도 없는 내용이었지만 서하림 목소리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법률을 낭독해 준대도 좋아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도착해서 1관에 입장할 때까지만 해도 동아리 사람 모두가 뭉쳐 있었지만 10분쯤 지나자 저마다 보고 싶었던 작품이 있었다며 빠지고 3관이 더 좋다며 빠지고 하면서 몇 명 남지 않게 됐다. 서하림도 다른 사람들이랑 다니는 건가 싶었는데 서하림 옆에 남은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다 같이 보는 거 아니었어?”
“초등학교에서 소풍 온 것도 아니고 자기 맘대로 보는 거지.”
나 같으면 서하림이랑 같이 다니고 싶을 텐데 의아함을 느끼며 입구에 잔뜩 꽂혀 있던 안내 팸플릿 같은 것을 펼쳤다. 1, 2관은 회화 작품이, 3관은 설치미술이, 4관은 조각이나 도예, 사진, 기타 등등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적혀 있었다.
“확실하진 않은데 전에도 이름 비슷한 전시회 간 적 있지 않아?”
“맞아. 이 화가는 늘 똑같은 이름으로 전시회 열어. Perfect Finish. 팸플릿 보면 아래에 작게 부제 적혀 있을걸. 이번에는 취미 생활.”
“응. 봤어.”
“너 진짜 세상 재미없게 산다. 요즘 TV만 켜도 아니 온갖 포털사이트 메인에 이 사람 얼굴이나 이야기가 걸려 있는데도 모르고.”
“뭐…… 나는 이런 데에 관심 없어서.”
조금 부끄러워 머리를 긁적였다. 서하림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이 화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화가이고 우리 대학교 선배님이고 엄청난 천재라 어릴 때부터 유명했으며 국제 비엔날레에서도 여러 차례 수상을 했고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이 사랑하는 천재 중의 천재. 서양화면 서양화, 동양화면 동양화 그리는 족족 평론가의 극찬을 받으며 조각, 건축 분야에서도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고 취미로 하는 모든 예술 활동들이 다 작품이 된다는 뭐 그런 얘기였다.
“그렇게 대단한데 전시회가 무료인 게 신기하다.”
“한국인이니까 자국민들이 예술을 맘껏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취지래. 한국 말고 중국에서 하는 전시도 무료야.”
“왜?”
“엄마가 중국인이라.”
“아하.”
“해외에선 엄청 비싸. 이번 전시 유럽 여행 갔을 때 스위스에서 봤었거든. 그때 15유론가 그랬어. 일본만 가도 티켓값 되게 비싼가 봐.”
“그렇구나.”
“내가 옛날에 갔던 이거 이전 퍼펙트피니시는 그림 작품으로만 꽉 차 있던 전시인데 이번에는 그림 그린 것들도 취미로 그린 것들이야. 화풍도 다르게 하고 낙서나 그리다 만 것들도 있고 패러디도 많이 하고.”
“취미로 돈도 벌고 좋겠다.”
나는 내 옆에서 이런 설명 저런 설명을 해주는 서하림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었다. 듣고 있다 보니 몇 번 지나가며 들어본 이름 같았다.
“나 다음 생이니 환생이니 사후세계니 이런 거 하나도 안 믿는 거 알지.”
“응. 나도 그래.”
“근데 만약 다시 태어나면 예술가가 되고 싶어.”
“화가?”
“화가도 좋고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도 좋고 발레리노도 좋고. 사진작가나 영화감독이나 너처럼 시인이 돼도 좋겠지.”
“나 아직 아닌데.”
“어쨌든.”
서하림은 직사각형의 캔버스 위에 그려진 노을과 바다를 감상하고 작품 옆에 붙은 설명을 읽었다. 나도 허리를 숙여 함께 읽었다. 글자가 너무 작아 꽤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어야 읽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분은 도대체 어떨지, 머릿속에서 창작이 발생하는 느낌은 어떤지 그런 게 되게 궁금해. 무에서 유가 발생하는 건데, 약간 빅뱅 같기도 하고.”
“너도 그림 그리고 피아노 치고 그러잖아.”
“나는 창작이 아니고 그냥 악보 보고 연주하고 실물 보고 따라 그리고 하는 거지 창작은 아니니까.”
끝에서 끝까지 예술로 감싸진 전시회란 공간의 특성 때문인지 우리의 대화는 예술과 창작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단 한 번도 서하림과 이런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서하림이 각종 연주회, 전시회에 어릴 때부터 관심이 많았던 건 아는데 그게 이런 이유였을 줄은 몰랐다. 예술을 그저 향유하고 즐기는 정도의 수준인 줄로만 알았지 좀 더 근원적으로 파고들었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글쓰기 시작했을 때 좀 더 본격적인 마음가짐으로 써볼 걸 그랬다. 이미 우체국에서 분류가 시작됐을 서른 편이 넘는 시들이 아쉽다. 더 잘 쓸 걸, 더 신경 쓸걸.
“와 이게 낙서라는 게 말이 돼?”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뜯어 액자에 예쁘게 넣은 것들이 한쪽 벽을 전부 차지했다. 전에도 봤었다면서 또 봐도 그렇게 좋을까. 나도 서하림의 시선을 따라 낙서들을 살펴보았다. 얼마큼 잘 그린 건진 모르겠지만 그냥 천재 예술가의 습작 노트라고 말해주면 그렇구나 할 정도.
“여기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 있잖아. 이따 나올 텐데 그림이랑 조각으로 구현해 놨다?”
“그래?”
“너도 막 뭐 떠오르는 거 있잖아, 그걸 작품으로 쓰면 무슨 느낌이야? 약간 내가 설계한 거 3D 프린트로 만드는 거랑 비슷한가. 뿌듯하고 멋지고 그런 거.”
“좀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그럼 무슨 느낌이야? 너도 이런 낙서 노트 있어?”
만약 올해 신춘문예 떨어지면 딱 한 번만 더 도전해 봐야지.
평소보다 조금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묻는 서하림과 함께 걸으며 나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조금씩 다듬어보았다.
동시에 조금은 쑥스러웠다. 내가 진짜 생각 없이 글 썼구나 싶어서. 대부분의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제 새끼로 표현하던데 그렇다면 나는 애들이 생기니까 그냥 생기는 대로 쭉쭉 낳았고, 낳고 나서는 방치도 그런 방치가 없었던 게 아닌가. 죄로 따진다면 거의 무기징역이었다.
“그……런 건 없는데.”
“없어?”
다소 실망한 어투에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대신에 나는 보통 다 머릿속에 넣어 두는 편이야. 짧은 문장이나 시구나 단어 같은 것들이 조각처럼 뿌려져 있는데 머릿속에서 이렇게 붙여보고 저렇게 붙여보다가 얼추 완성되면 그때야 꺼내서 쓰는…… 그래서 낙서 노트라고 할 것도 없고 그냥 컴퓨터에 미완성 파일이 몇 개 있는 거라 그런 거창한 건 없어.”
“헐 그게 더 대박 아니야? 쓰다 지우다 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만으로도 쓴다는 거잖아. 와, 교수님이 괜히 김동규 천재 소리 하는 게 아니었어.”
만약 내가 정말로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된다면, 이야기를 맛깔나게 지어내는 소설가가 된다면 서하림에게서 내 위치가 달라질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서하림이 날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아닐까. 내 시를 읽고 예술가적 면모에 반했다면서 얼굴을 붉혀오고. 그러면 나는 수줍은 서하림에게 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사랑을 듬뿍 담은 키스를 하고 침대 위에 눕힌 다음 내 뮤즈는 너라고, 너밖에 없다고 얘기하면서 섹스를 하는 거다. 느릿느릿 박으며 서하림을 떠올리고 쓴 시를 읽어줘야지.
이게 바로 네 이야기야. 네 아름다운 피부를 눈동자를 이렇게 노래 한 거야. 네 하얗고 긴 손가락이, 풍성한 속눈썹과 듣기 좋게 멋들어진 목소리가 이렇게 표현됐어. 키스할 때면 젤리처럼 말캉이는 입술과 끈적하고 달콤한 혀도, 꿈까지 찾아와 내 온몸을 달구는 새벽의 너와 닳고 닳아 창부 새끼 같은 또 다른 너까지도 내 시 속에선 이렇게나 아름다운 미의 화신이지.
진흙탕에 핀 새하얀 꽃도 너보단 청초하지 못할 것이고 바다 위에 부서지는 햇살도 너보단 빛나지 못할 것이며 태양도 고갤 숙이며 겸손해지는, 더러움, 악, 어둠을 물리치는 단 하나의 신, 구원자. 내게 영원불멸할 절대적인 진리.
“서하림.”
모든 것은 언젠가 소멸하며 영원한 것은 없단 자연의 법칙은 예술가들로 말미암아 영원을 찾아내고 꿈꾸게 만들었다.
“만약에 진짜로 내가 등단하면,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줄게.”
“영광입니다.”
“1월 1일이 당선 발표거든. 그날 신문 보고 만약에 진짜 등단하게 되면 전화할 건데, 그러면…… 축하해 줘야 돼.”
“물론이지. 책 나오면 열 권 산다.”
서하림에게 바친 내 순정과 사랑은 죽음도 막지 못할 천고의 감정이었고 마찬가지로 서하림이란 존재는 내게 영원과도 같으니 나도 이젠 정말 시인이 되긴 된 것 같았다.
당선되면 좋겠다.
“응?”
“아니야. 혼잣말.”
다음 생이 있다면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하림이에게 예술가의 삶을 조금이나마 선물 하고 싶다. 내 하림이에게, 나의 뮤즈에게, 릴리에게.
거대하고 찬란한 예술이라 가볍게 발만 살짝 담갔을 뿐이었던 문학은 이렇게나 쉽고 갑작스럽게 파도가 되어 날 집어삼켰다. 나는 그 파도를 기꺼이 맞았고 거친 해류에 몸을 맡겼으며 파도는 시간이 지나자 내 가슴 한편에 터를 잡은 바다가 되었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아주 깊고 깊은, 그런 바다였다.
서하림은 종강하자마자 호주로 날아갔다. 1월부터 두 달간 어디 연구실 조수로 가게 됐다고 하는데 그 전에 따뜻한 나라에서 놀고 오겠다면서.
과외 학생은 2학년 네 명, 1학년 세 명을 새로 받았다. 앞으로 죽어도 수시까지만 하고 정시는 안 할 생각이다. 같이 준비한 친구 둘은 수시로 합격해서 지금 놀자판인데 비해 정시 준비하는 서현이는 제일 늦은 합격 발표가 무려 2월에 있어서 굉장히 예민한 상태였다.
서현이 엄마가 알아서 돈 많이 주고 전문 입시 상담사에게 문의해서는 수도권 전문대 작년 추가합격 최종 등급 컷을 가져와 서현이에게 알려줬다지만 서현이는 자존심이 엄청 상했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예대나 인서울 문창과 못 붙으면 재수를 하겠다고. 하루에 한두 번 적당히 답장을 해주고 말았다. 읽기만 하고 답장은 안 할 때도 있고.
어차피 얘도 내가 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고, 친구들이나 엄마한텐 자존심 때문에 얘기하지 못하는 걸 나한테 털어놓는 것뿐이라 나도 수십 개씩 쌓이는 메시지들을 부담 없이 대충 읽고 넘겼다.
[선ㄴㄴㄴㄴㄴㄴ생님 내일이면 크리스마슨데 뭐해요〉
[저는 놀러 왔는데〉
[맘 편히 놀지도 못함〉
[ㅠㅠㅠㅠㅠㅠ에혀〉
서하림이 시드니에서 놀고 있을 시간, 나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재료를 사러 나왔다. 사서 먹어도 좋긴 한데 예약하기도 귀찮고 픽업하러 가기도 귀찮고 크기도 작고 해서 그냥 나 먹고 싶은 맛과 크기로 만들어 먹는 게 더 나았다. 케이크들 아무리 커봤자 피자 한 판보단 작지 않던가. 하림이가 좋다는 이 몸 유지하려면 많이 먹고 그만큼 많이 운동을 해야 했다.
올해의 케이크는 초코 시트에 바나나 엄청 넣은 초코 바나나 케이크. 작년에는 크레이프 케이크였고 재작년에는 레드벨벳 케이크였고 그 전에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였다.
열심히 장 보고 있는 와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주의라 무음으로 돌려놨는데 장 다 보고 오니 부재중 통화가 같은 번호로 네 통이나 남겨져 있고 문자도 하나 와 있었다.
[김동규 님 영성일보입니다. 문자 확인 후 전화 주십시오.]
자동차 트렁크를 닫지도 못한 채 바로 전화를 걸어 당선 통보를 받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당선된 소감을 얘기했다.
“진짜 사기 아니죠. 안…… 믿겨지는데요.”
-2천 년대 들어서 우리도 이렇게 어린 당선자는 처음이에요. 아직 생일 안 지나서 만18세 맞죠?
“네, 맞긴 한데…….”
-하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생각하고 집에서 축하 파티라도 하는 건 어때요?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일요일까지 새해 첫 지면에 실릴 당선 소감 짧게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달란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끝났다. 너무 횡설수설한 건 아닌가 후회가 조금 됐지만 신문엔 메일로 보낸 게 들어갈 테고 나보다 더 엉망진창으로 혹은 울면서 전화를 받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담당자는 내 전화를 얼마 안 있으면 잊을 거였다.
서울과 시드니의 시차는 두 시간. 지금이 오후 8시 3분이니 서하림이 있는 곳은 10시가 조금 넘었다. 자고 있진 않을 것 같은데 전화 걸어도 되나…… 하지만 제일 먼저 말해주기로 했다.
〈하림아 자?]
10분쯤 기다렸는데도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아 일단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차피 하림이한테 답장 오면 진동 오게 설정을 해놨기 때문에 오더라도 금세 알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이브라 그런지 존나 막혔다.
집에 와서 봐온 장들을 정리하고 손을 씻은 뒤 오븐 전원을 켰다. 계량컵 꺼내고 전자저울 꺼내고 베이킹 주걱이나 거품기 등 온갖 도구를 다 꺼내 놨을 때 내 귀를 잡아채는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기다렸는지 작은 진동 소리가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느껴졌다.
[ㄴㄴ 방금 저녁 먹고 방에 들어옴〉
사촌 중 하나가 시드니에서 살고 있어 서하림은 그 집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다. 서하림 답장 보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웬 전화?
“하림아 나…….”
-왜.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안 좋은데, 설마. 뭔데.
깊고도 깊어서 바람이 불어도 평온하기만 하던 바다가 서하림 걱정 한마디에 요동을 친다. 커다란 바위를 누가 던진 것처럼, 집채만 한 고래가 물을 뿜기라도 한 것처럼.
“좋은 일이야.”
-좋은 일?
“축하해 줘, 하림아.”
-……헐.
주어 다 자르고 한 말에 잠시 기억을 더듬는지 대답은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왔다.
-대애박.
“제일 먼저 알려준다고 약속해서, 그래서 전화한 거야.”
-진짜야? 아직 1월 1일 아닌데?
“원래 크리스마스 전후로 전화 온대.”
-헐 미친 대박. 축하해 김동규! 완전 생일 선물이네! 우와, 대박. 헐! 신기해!
세상 그 누가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넨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기쁘고 벅차오르진 못하리라. 멋진 미사여구도 수고했다는 긴긴 격려의 말도 없었으나 한껏 상기되어 통통 튀는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인류사 제일가는 대문호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전화…… 조금 더 하고 싶은데 괜찮아?”
-응응. 그럼 잠시만. 나 과자랑 보조 배터리 좀 가지고 올래. 뭐 썼는지 알려줘, 궁금해.
나도 주방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은 뒤 의자에 앉았다. 아무래도 케이크는 이따가 만들어야겠지.
-나 왔어. 와, 신기하다. 네가 시인이 됐다니.
“나도 몰랐는데 내가 진짜 천재가 맞긴…… 맞나 봐.”
-그러니까 말이야. 와,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등단 타이틀 존나 돌았다. 아니 스물하나에 다는 거긴 하지만 아무튼.
“안 믿겨져.”
바나나를 괜히 툭툭 건드렸다. 보이스피싱인 건 아닌지, 사기 전화는 아닌지 아직도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전화번호는 확실히 신문사 번호가 맞았다.
-와, 김동규 이렇게 힘내는 거 보니까 나도 좀 열심히 해야겠는데.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겠다고?”
-그럼, 당연하지. 내 목표는 노벨상이야. 큰 상 받으려면 죽을 각오로 달려야죠.
“나보단 네가 더 대단한 거 같은데.”
-진짜로 받게 되면 그렇겠지?
서하림은 키득키득 웃으며 과자를 먹었다.
-왜, 너도 대단한데. 요즘 쉽게 쉽게 책이나 시집 내는 사람들 널리고 널렸는데 너는 그야말로 정석 루트로 데뷔하는 거잖아. 아무리 신춘문예가 명성이 옛날보단 떨어졌다 해도 신인 작가들의 화려한 등용문 아니야?
“내 입으로 맞다고 하긴 좀 부끄러워.”
-아 왜에 이제 프로인 건데.
“등단만 반짝 해놓고 책도 못 내고 활동도 못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
-겸손 떨기는. 재수 없다. 됐고, 당선된 시나 읽어봐. 얼마나 잘 쓰셨는지 한번 들어나 보자.
“그건 마치 옷 빨가벗고 학교 가라는 거랑 똑같은 말이야.”
-아 뭐래. 지금 잘난 척하는 거? 너무 잘 쓴 거라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읽어주기 싫은가?
“아니야 그런 거. 너도 네가 그린 거 보여주기 부끄럽다며.”
-너는 네가 쓴 거 내가 보면 좋다며. 그리고 내가 만약 미술 천재라면 너한테 휴지에다 낙서한 것도 보여줄 거란 말도 했었어.
안 통하네. 서하림은 뭔가를 마시는지 스피커에서 꿀꺽꿀꺽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테이블인지 어딘가에 내려놓는 소리가 금속성인 걸 보니 캔맥주인 듯했다.
“맥주 마셔?”
-말 돌리지 말고.
차라리 나중에, 못해도 3년 정도는 지나서 쌩 신인은 벗어났을 때 쓴 시면 몰라도 나름 제대로 쓰기로는 처음인 걸 읽어주려니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전에는 하림이가 내 걸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생각했는데 막상 진짜로 이렇게 되니까 좀 그랬다. 게다가 나보고 시 낭송을 해달라니. 그래도 서하림이 읽으라면 읽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내 휴대폰도 스피커폰 설정을 해놓고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하아…….”
-자자, 빨리 읽어봐. 눈 감고 자알 감상해 줄게. 유명한 사람들이 심사 위원이었을 테니 퀄리티는 보장되겠고.
“그 정도는 아니야. 진짜 못 썼어.”
-어디 신문사야. 올해 뽑힌 김동규가 심사 위원들의 안목을 폄하했다고 고발하게.
“못됐어 진짜.”
-아 빨리. 궁금하단 말이야.
한숨 푹푹 내쉬면서 파일을 열었다.
“……세 편 보냈고 당선작 제목은 「여백」이야.”
-제목 좋고. 다른 두 개는?
“「산리아」하고 「봄날의 동화」.”
-산리아는 무슨 뜻이야?
“나무 이름. 하얀 꽃이 풍성하게 피는 작은 나무인데 가을이 돼도 잎이 늦게 떨어져서 겨울에 눈 내리면 예쁘대. 향도 좋고. 오뉴월에 제주도나 울릉도 가면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게 보이는데 그게 그 나무 꽃 때문이래. 정식 명칭 있는데 이 이름이 예뻐서 골랐어.”
-오 진짜 시인 같아. 아니, 같은 게 아니라 맞구나. 여백부터 고고.
“……여백.”
스피커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말로 눈을 감고 듣고 있는 걸까.
「여백」은 사람이 갖는 수천수만 개의 감정을 다 표출하지 못하고 안으로만 삼킨다는 내용이고 「산리아」는 예쁜 하얀 꽃이 빨간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탐미적으로 쓴 시이며 「봄날의 동화」는 올 한해 서하림과 함께 지내면서 행복했던 내 마음을 쓴 시다. 애정 시 내지는 사랑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차례차례 시를 읽어가는 동안 서하림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고, 세 편을 다 듣고 나서는 박수를 쳐주었다. 나는 곧바로 인터넷 창을 닫아버린 다음 식탁 위에 엎어져 서하림의 말을 기다렸다. 처음으로 서하림이 내 작품을 들었다. 읽었다. 분명 내 귀는 새빨개졌을 거다.
감상을 듣고 싶은 마음 반,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이었다. 초침이 껌딱지처럼 열두 개의 숫자에 달라붙어 힘겹게 움직였다.
-잘 썼으니 뽑힌 거겠지만 진짜 잘 썼다. 진짜로.
“고마워.”
-예술은 참, 신기한 세계야. 시적 허용이란 단어도 있고. 분명 문법적으로는 어긋나는 표현이더라도 그게 아름답단 말이지. 그리고 단어 하나가 세상에 존재하는 문인들, 음악가, 창작자의 숫자만큼 규정이 돼.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거의 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잖아. 심지어 국어사전에도 정의가 되어 있어.
담담한 말투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듣기 좋아 나는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귀를 더 바짝 대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를 꿈꾸는 사람에게서 듣는 진지한 감상이기도 해서 조금 새로운 기분도 들었다. 서하림은 감성이 메마른 단순한 과학도가 아니기도 했으므로.
-무언가를 아끼는 마음, 감정 뭐 그렇게 써져 있겠지.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납득할 수 있게끔. 그게 맞는 거잖아. 모두에게 똑같이. 지금껏 읽고 본 수많은 시도 소설들도 그림들도 음악들도 그렇고 네 말이나 표현들은 하나같이 다 다른데, 근데 그게 또 그런 정의랑도 맞기는 다 맞아. 시인의 눈은 함수 상자인가 봐. 나랑 가까운 사람이 단어를 새롭게 정립하고 조탁하는 예술가가 됐다는 게 너무 신기해. 나는…… 모든 우주와 자연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내고자 하는데.
아주 이과적인 마인드의 단어 선택과 감성이라 작게 웃었다. 내게는 다시없을 최고의 찬사였다.
“뭐, 비슷하지.”
-마지막 거 약간 간질거리는 게 너랑 안 어울리게 사랑에 관한 거 같던데 어떻게 사랑이란 단어는 한 번도 쓰지 않고 그런 감정이 떠오를 수 있게 한 건지 신기하더라. 그러니까 시인이 된 거겠지. 제목 듣고서는 봄날의 풍경에 대한 자연 시일 줄 알았거든. 난 솔직히…… 네가 쓴 시들은 다 어둡고 우울할 거라 생각했어. 염세적이고 비관적이고.
“왜? 아빠 때문에?”
-아무래도.
써놓은 것 중에 어둡고 우울하고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작품들의 기반은 아빠 같은 좆같은 인간쓰레기가 아니라 그냥 내 태생이 음침하고 어두운 것에 있었다. 아빠란 존재는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질 못한다. 그 새끼가 뭐 대단한 위인이라고 내 인생이 그 새끼 때문에 흔들리고 암울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태생적으로 부정적인 내 감정은 빛과 같은 서하림 옆에 있어서 더 도드라지고 응집될 뿐이었다.
“내 인생에서 아빠가 차지하는 비율은 1%도 안 돼.”
-그럼 다행이고.
“정말이야. 나는, 나는…… 너밖에 없어. 나머지 99%는 전부 너야.”
-……그래, 알아.
아마도 아니, 전보단 확실하게 서하림에게서 내 존재는 더 커졌으리라. 새삼스럽게 반하진 않았을까? 몸 말고도 서하림에게 어필할 수 있는 새로운 매력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하림아, 보고 싶어. 언제 와?”
-모레.
“데리러 가도 돼? 차 끌고 갈게. 도착하면 축하 파티하자. 스테이크 구워줄게. 케이크랑 어, 라쟈냐랑 음, 또 뭐 하지. 아, 거기 와인 괜찮은 거 있으면 사올래?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
-그럴까. 근데 도착하면 좀 피곤할 거 같아.
“아 그러네. 그럼 너 푹 쉬고 나중에 시간 날 때.”
-그래 그러자.
“응, 시간 너무 지났다. 피곤하진 않아?”
-조금?
“그럼 끊을까? 너 자야지.”
-아니, 괜찮아. 까놓은 과자 다 먹고 자려고.
“맛있나 보다. 원래 과자 잘 안 먹으면서.”
-맥주 마실 땐 짠 거 먹어줘야지.
서하림은 오늘 뭐 했는지를 얘기했고 나는 전화를 끊고 나면 만들기 시작할 케이크 이야기를 했다. 서하림이 옛날에 서핑을 배웠는데 지금은 다 까먹어서 고생했단 얘기에선 서하림이 수영복 하나만 입은 채 도톰한 젖꼭지 내놓고 다녔을 거란 생각에 화가 좀 났다. 잘 보면 오른쪽보단 왼쪽이 조금 더 큰, 하얀 피부랑 잘 어울리는 맑은 분홍색의 유두를 도대체 몇 명이나 봤을까 싶어 빙빙 둘러 “등 다 탔겠네” 하고 혼잣말하듯 물었다. 그러자 “래쉬가드 입었어”라며 기특한 소릴 했다.
기분이 좋아져 휴대폰을 한쪽에 내려놓고 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다며 자기가 잠이 들어 조용해져도 전화를 끊지 말라 그러기에 우리의 전화는 몇 시간이 지나 케이크가 완성되고 설거지까지 다 한 뒤에야 끝날 수 있었다.
서하림을 데리러 가는 길에 우리나라 수도가 인천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우리 집에서 인천공항까지 너무 멀었다. 그래도 일주일 만에 보는 거라 한 시간 정도의 운전이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아오, 한국 너무 추워.”
짧게 다녀온 거라 캐리어는 그렇게 크진 않았다. 캐리어보다 면세점에서 산 것들이 더 많아 보였다.
“배고프다. 가면 뭐 먹어?”
“삼계탕 해놨어.”
“아 따뜻한 국물 완전 좋아.”
“도착할 때까지 좀 자.”
서하림은 입이 워낙 짧고 예민해서 기내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배고픔 가실 정도로만 먹고 만다며, 비행기 타기 전 도착하자마자 내가 차린 점심 먹고 싶다길래 삼계탕을 끓였다. 안 그래도 마침 아주머님께서 가져온 재료 중에 인삼과 전복이 있어 푸짐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었다.
미리 챙겨온 안대를 건네자 바로 쓰고는 곤히 잠들었다. 오는 동안 잠을 잘 못 잤나 싶어 최대한 조심히 운전했다.
30분쯤 지났을까, 전화가 왔다. 운전 중이라 받진 않았고 신호가 걸렸을 때 휴대폰을 확인했다. 예상외로 아빠였다.
바로 또 전화가 오길래 주머니에 다시 넣어 두고 근처에 주차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미친 새끼, 내가 연락하는 거 말고는 하지 말라고 분명히 몇 번이나 얘길 했었는데.
마트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최대한 조용하게 문을 열고 내렸다.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그랬지.”
-안다. 알아.
“끊는다.”
-잠깐만!
“안다는 사람이 왜 이래. 돈 받기 싫으신가 봐.”
-아,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
“끊습니다. 한 번만 더 전화하면 번호 차단할 줄 알아.”
-동규야!
전화 끊자마자 다시 걸어오는 탓에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뭐 하자는 거야, 시발 새끼가. 밥 혼자서는 못 해먹겠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급전이 필요해져서 그런 건지. 아, 그러고 보니 엄마한테도 연락을 해야 하는데. 이번 달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었으니까. 설마 엄마가 신고한다 그랬나? 그래서 도와달라고 연락한 건가? 우선 하림이 밥부터 먹인 뒤에 엄마한테 연락을 해봐야겠다.
돌아왔을 땐 서하림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하여튼 잠에 들면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잔다. 안전벨트를 매고 핸들을 마저 잡았다.
“하림아, 일어나 봐. 거의 다 왔어.”
주차하고 깨우면 밥 먹을 때 입맛이 돌지 않을까 봐 오피스텔 사거리 앞에서 잠을 깨웠다. 몽롱한 얼굴로 생수를 반이나 마시더니 정신이 드는지 거울을 내려 머리 정리를 했다.
“가자마자 씻을 거지.”
“아니. 밥부터.”
“그러자 그럼.”
사거리에서 오피스텔 정문 쪽으로 돌아 들어가려는데 나와 서하림은 똑같은 사람을 발견하고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 시발 저 새끼는 여길 왜.”
“…….”
정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서성거리는 아빠를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험악해진 내 얼굴과 가라앉은 분위기에 주차를 하고 나서도 누구 하나 차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먼저 올라간다. 씻고 기다리지 뭐.”
“빨리 갈게. 배고프잖아.”
하림이를 먼저 올려보내고 나도 차에서 내려 정문으로 향했다. 미친 새끼. 씨발 새끼. 욕이 자꾸만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빠. 돌았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내 말 좀 들어봐라, 동규야. 내가 오죽하면 여기까지 왔겠어, 어?”
“나 여기 사는 건 어떻게 알았어.”
“하, 학교에서부터…….”
“…….”
“따라온 적이 있어. 딱! 한 번 그랬다! 그래도 아들이 어디 사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웃기네. 와서 또 깽판 치려고 알아 둔 거겠지. 그래서, 왜 왔는데.”
아빠는 전보다 확실히 많이 말라 볼품없어 보였다. 내 말에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해서 그대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아빠가 내 어깨를 잡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도, 돈 좀 줘라. 너네 엄마가 줬던 돈, 아직 남아 있지? 내, 내가 그거 다음 달 안에 고스란히 다시 줄 테니까 아니, 1.5배! 1.5배로 불려서 돌려줄 테니까 주는 거 말고 꿔주는 거. 그래 빌려 주는 거. 응?”
급전 쪽이 맞는 거였군. 시뻘게진 눈으로 한없이 비굴하게 구는 아빠를 보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아빠가 좀 더 비참한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입을 일자로 다물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빠를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제발 부탁이다, 응? 진짜, 지인짜 연락 안 할 생각으로 평생 죽은 듯이 네가 주는 돈 매달 받아 살 생각이었는데 하하, 갑자기 큰돈이…… 아니 내가 친하게 지내는 형님이 있는데 그분이랑 같이 요즘 돈놀이를 하고 있는데 이, 이게 생각보다 우, 운이 따라야 하다 보니까 어느 날은 대박이 나도 다음 날은 쪽박을 차니까 근데 요즘 계속 이 아빠가 쪽박을 차는 걸 보면 운이 없는 거 같지?”
뭐 재밌는 말이라고 인간 말종의 변명을 오래 듣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이 정도면 내 경멸하는 눈빛에 자존심도 적잖이 상했을 테고 배고픈 하림이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알겠다고 입을 열었다.
“천만 원 보내줄 테니까 앞으로 이렇게 찾아오지도 말고 전화도 하지 마. 매달 꼬박꼬박 돈 보내주는 게 그쪽 좋으라고 보내주는 줄 알아? 찔러 죽일 수가 없으니 서로 약속.”
“알았다, 알았어! 지금 바로 꺼져 줄 테니 빨리 보내줘. 보내준 거 확인하고 갈 테니까.”
꺼둔 휴대폰 전원을 켜자마자 은행 어플에 들어가 천만 원을 보냈다. 이체됐단 화면을 확인한 아빠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부리나케 달려 사라졌다. 이걸로 한동안은 얌전히 살겠지. 나 역시 집으로 뛰어 올라가 아침부터 열심히 준비해 둔 점심을 마저 만들기 시작했다.
밥을 다 먹고 엄마에게 연락해 등단 소식을 전하고 앞으로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단 말을 전했다. 엄마가 무척이나 서운해했지만 미래를 생각하잔 내 말에 하는 수 없이 그러겠다며 생일 축하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란 얘기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1월 1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 편의점에 달려가서 신문을 샀다. 신문에 내 이름과 사진이 작게 실려 있음에도 아직도 얼떨떨해서 체감이 잘 되지 않았다. 거실 테이블에 신문을 올려놓고 멍 때리고 있는데 교수님에게 전화가 왔다. 며칠 전에도 축하한다고 연락을 해왔는데 바쁘지도 않은지 신난 목소리였다.
-신문으로 보니까 기분이 색다르네.
“네.”
-동규야. 방학에 바쁘니?
“과외 때문에요.”
-24시간 하는 건 아닐 거잖아.
“네.”
-내년 상반기 출간 목표로 시집 준비하자.
“네?”
-그리고 당장 내일부터 쉬지 말고 시나 에세이 같은 것 좀 써줬으면 좋겠다.
“네? 갑자기요?”
-스타 작가 만들어 줄 테니까 같이 힘 내보잔 얘기야.
“교수님, 저 지금 교수님이 무슨 말 하시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전화로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내일 시간 어떠니.
“길어져도 상관없어요.”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단 말이 작게 들렸지만 내일 귀찮게 밖에 나가는 것보단 지금 해결하는 게 나았다.
-내 남편이 대형 출판사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남편 동생은 대형 서점을 운영하는 중이고. 스타 작가라는 건 요즘 세상에 만드는 것도 가능하거든. 들어본 적 있을 거야. 베스트셀러는 함정이니 뭐니 하는 거. 간만에 유명 인사가 탄생했으니 제대로 밀어줄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
관련 기사를 전에 읽어 본 적이 있어서 베셀 작가를 만들 수 있는 메커니즘은 알겠는데 그게 왜 나인 건지 이제 겨우 등단했는데 어떻게 1년 만에 시집을 내서 수익을 내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말을 정리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려다가 그냥 대놓고 물어보니 교수님이 별거 아니란 투로 얘기했다.
-왜 너냐니? 간만에 천재 나왔다고 너 고1 때부터 이쪽 동네는 난리였어. 내가 왜 새파랗게 어린 신입생을 데려다가 앉혀서는 등단 과외를 무료로 해줬게? 만19세에 등단한 천재 시인, 그것도 최고 명문대 국문학과생. 중학생 때부터 재능이 드러나 문학계 아이돌이 되다. 일단 이것부터 사람들은 환장해요. 그리고 출판사랑 서점에서 SNS 운영 중인데 출판사에서 올해의 신인 시리즈라는 걸 하고 있어. 그 올해의 신인은 바로 너고. 1년 짧은 시간 아니니까 열심히 써서 인지도 올리고 바로 시집 내자. 그리고 그다음엔 표지 예쁜 에세이집 내고 문예지에 단편소설도 종종 싣다가 장편도 내고. 소설도 잘 쓰잖아.
“지금 들어선 안 될 걸 듣는 느낌인데…… 그렇게 하면 욕먹지 않아요?”
-실력이 없으면 욕먹지만 있으면 상관없어. 판매량이야 서점에서 할 일이고. 이 바닥에서 너 엄청난 유명 인사라니까.
“시집은 좀 고민해 볼게요. 요즘 누가 시집을 산다고. 시집 말고도 에세이집이랑 소설책도요. 이제 겨우 등단 하나 했는데 이러시는 거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책 안 팔리면 저보고 다 사라고 빚 떠넘기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교수님이 엄마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의도도 이해가 안 가요.”
-요즘 입소문만 잘 타면 시집이라도 꽤 팔리는 편이고, 평론가로서 10년 넘게 보지 못한 천재가 튀어나왔으니 날개 달아주려는 건데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후배인 동시에 제자인데.
“어려운 게 아니라 부담스럽다구요. SNS에 올리는 건 해볼게요.”
-하, 이 답답한 놈. 오늘 당장 올해의 신인 시리즈에 네 이름이랑 사진 올라갈 테니까 알고 있고.
“네?”
-새로 쓰려면 시간 좀 필요할 테니까 이번에 응모한 시들 중에 당선된 거 말고 다른 곳에 보냈던 것들 SNS 담당자한테 보냈거든. 그러니 이번 달은 새로 안 써도 된다.
“잠깐만요 교수님. 이런 거 원래 이렇게 당일 통보하는 식이에요?”
-아니지. 이 시리즈는 신인 밀어주는 프로젝트라 원랜 작년 가을에 데뷔한 어떤 소설가가 하기로 얘기 다 됐었는데 너로 바뀐 거야, 이브 날에. 진짜로 올해 바로 등단을 해버릴 줄이야. 너는 내년이나 내후년 시리즈 주인공이었어. 근데 뭐, 진짜로 올해 떡 하니 등단을 해버렸으니 다들 널 주목하고 있지 않겠어?
덜컥 무서워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게 교수님이 달콤한 말로 달래기 시작했다. 너 정도면 일반인들에게서도 반응 금세 올 거다, 소설가보단 시인이 주는 특별함과 메리트가 크고 시보다 더 잘 팔리는 소설책도 낼 거니까 괜찮다, 나 믿고 같이 잘 해보자, 너에게 피해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교수님 말대로 사람들 반응이 괜찮았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서량이 한없이 낮다는 기사를 찾은 동시에 온라인 서점이나 전자책 시장이 성장 중이란 기사와 특히 SNS에서 짧은 글을 쓰고 소비하는 것이 늘어난 현상에 대해 다룬 심층 기사를 읽었다. 교수님이 왜 에세이집 얘기할 때 ‘표지가 예쁜’이라고 말했는지도 이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1년 만에 책을 내는 건 위험부담도 너무 크고 섣부른 것 같아 천천히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SNS에 올리는 시와 나중에 언젠가는 낼 시집에 넣을 시를 분리해 썼다. 교수님이 책도 몇 권 보내줬는데 SNS 작가들의 책이라 사람들이 원하는 글이 뭔지 파악하기 수월했다.
작품 활동하는 것보다 서현이 정시 준비가 배는 골치 아팠는데, 다행히 서현이가 예비 1번을 받고 추가 합격을 해 한숨 놓았다. 그래 봤자 2월도 거의 다 가서 좀 있으면 개강이었지만.
서하림은 출퇴근하듯 연구소에 다니는 일을 무척 즐거워했다. 나 역시, 저녁을 준비하며 하림이를 기다리고 있으면 진짜로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 시간을 마음껏 만끽했다. 정말 교수님 말대로 내가 스타 작가가 된다면 하림이는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며 바깥일을 하고 나는 집에서 비정기적으로 글을 쓰면서 서하림 내조를 하고 뭐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좀 했다. 하지만 스타 작가가 된다 해도 전업으로 돈을 많이 버는 건 극소수일 테니 꿈같은 이야기였다.
서하림이 같이 조수 생활을 하게 된 친구들끼리 일주일에 한 번씩 도시락을 싸 오기로 한 탓에 도시락 만드는 것도 일이었다. 5단으로 도시락을 만들어도 모자랐지만 서하림이 말렸다. 너무 힘주지 말라고. 캐릭터 도시락을 검색해 귀여운 토끼를 만든 것도 뭐라 한 소리 들었다. 추워서 나가기 귀찮으니 안에서 먹는 건데 오버하지 말라며.
1월에 담당자가 달별로 이런 주제를 써달라고 상반기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는데 3월은 봄, 시작, 꽃, 결심 뭐 그런 거였고 4월은 벚꽃, 사랑, 연애, 5월은 결혼, 사랑, 가족, 동심, 감사, 6월은 여름, 여행, 조국이었다.
작년 1학기는 과외 시작하고 처음 맞는 백일장시즌에다 술 먹으러 다니는 하림이 때문에 바빴는데 올해는 학과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았음에도 시간이 총알처럼 흘러갔다. 개강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종강이었다. 이게 다 교수님 때문에 억지로 올해의 신인에 뽑혀 가지고 시 쓰느라 그렇다.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좀 괜찮은데 SNS에 올라가는 시들은 너무 길거나 한 행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많으면 안 되고 너무 어려워도 안 됐다. 차라리 백일장에서 주제 맞춰 쓰는 게 훨씬 쉽고 편했다. 주제만 던져주는 게 아니라 읽는 사람들이 원하는 형식과 구성에 맞춰 써야 하는 건 엄청난 고역이었다.
특히 사랑에 관련된 시가 인기가 굉장히 좋았고 감성적이면 감성적일수록 좋아요도 많이 눌렸다. 담당자는 사랑 시를 더 많이 쓰란 눈치를 줬으나 오글거려 사랑 시와 아닌 시의 비율을 1:2 정도로 썼다.
“약 좀 발라줘.”
“입에?”
“응.”
“또?”
“응.”
나는 진작에 학교 공부는 포기하고 졸업하면 변리사 시험이나 준비할 생각으로 돈을 열심히 모으는 중인데 비해 서하림은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는지, 고3 때도 안 나던 입병 때문에 고생이었다. 입에 뭐 날 땐 찍어 바르는 구내염 치료제가 직빵인 걸 알고 있지만 아픈 걸 싫어하는 서하림에겐 쓸 수 없어 대신에 연고처럼 바르거나 붙이거나 가글형인 약을 잔뜩 사놨다.
“방학인데 좀 적당히 해.”
면봉에 구내염 약을 묻혀 입술 안쪽과 잇몸에 발랐다. 크기가 작은 걸 보니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적당히 하고 있어.”
“그런데 왜 자꾸 나는 건데.”
속이 상해 면봉을 내려놓고 서하림을 껴안았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혀로 빨아대자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안은 채로 서하림의 손 하나를 잡아 내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약 발라줄 때 나한테 입 벌리고 있는 걸 본 순간부터 이미 내 것은 잔뜩 발기한 상태였다.
“자꾸 입병도 나는 데다가 요즘 잠도 좀 못 자는 거 같아. 신경 쓰는 일 있어?”
“…….”
서하림의 손으로 먼저 한 번 싸고, 휴지로 정리한 뒤에 서하림의 상의 안으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말랑한 젖꼭지를 입에 물고 아이처럼 빨아댔다. 어제도 잔뜩 빨아줘서 그런지 조금만 세게 빨아도 서하림이 허리를 들썩이며 반응했다. 어깨를 때리는 걸 보니 그만하란 뜻이라 혀를 내려 배꼽 안으로 파고들었다. 여긴 어제 건들지 않았으니 괴롭혀도 되겠지. 작고 좁은 곳에 두툼한 혀를 밀어 넣으니 하림이가 몸을 뒤틀었다. 배꼽은 자극하면 아픈 게 정상이라는데 하림이는 여기마저 성감대라 제 아랫도리를 세우기 바빴다.
하림이의 것을 잡고 위아래로 치대다가 손바닥으로 귀두를 문질렀다. 곧 사정하려는지 내 손바닥이 움직이는 족족 민감하게 반응을 해왔다. 잔뜩 예민해진 귀두는 깃털로 건드려도 정액을 쏘아댈 것처럼 반질반질했다. 정액을 싸기 직전에 바로 하림이의 것을 입에 담았더니 정액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하림이의 것이 내 입안에서 사정의 여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면서 손으로는 하림이의 뒤를 쓸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부푼 곳은 손가락 하나쯤은 손쉽게 들어갈 정도로 풀어져 있었다. 검지를 밀어 넣으니 소파에 누워 있던 서하림이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안 할 거야.”
“알겠어.”
“빨리 빼.”
“손가락 하나가 전분데?”
일부러 앞쪽으로 손가락을 구부리며 전립선 근처를 자극했다. 반쯤 세운 상체가 힘없이 무너지며 신음을 흘려댔다. 이토록 쾌락에 약한 서하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즐겁게 웃으며 하림이의 것을 입술로 누르고 이빨로 긁었다. 어제 그렇게 싸놓고도 또 발기하는 걸 보면 우리가 확실히 젊긴 젊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어 내 것 대신 피스톤질을 했다. 넣고 싶은 마음이야 한가득이었지만 입안에 하얀 구멍 달고 피곤해하는 애를 이틀 연속으로 괴롭히고 싶진 않았다. 나는 서하림에게 매우 신사적인 사람이었고 하림이가 싫다는 건 안 하는 편이었다.
입안에 두 번째 사정을 마친 서하림은 온몸이 풀어져 눈을 감은 채 숨을 쉬었다. 숨이 조금 차는지 숨을 쉴 때마다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가슴이 섹시했다. 그걸 보고만 있다가 서하림의 가슴팍 위에 앉아 내 것을 몇 번 흔들었다. 서하림 얼굴 위로 정액이 한가득 쏟아졌다. 눈 위로도 정액이 튀어 눈을 뜨기 어려워했다.
“안 할 테니까 얼굴에 몇 번만 쌀게.”
“…….”
“씻는 것도 내가 다 해줄 테니까 걱정 마.”
여름방학인데도 마음껏 쉬지 못하고 공부에 대외 활동으로 바쁜 걸 알고 있음에도 어제와 오늘은 심술 난 게 컸다. 술은 이제 밖에서는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잘 먹지 않아서 좋은데 다른 사람들 만나고 다니는 게 너무 잦아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곧 있으면 생일인데 생일도 그냥 집안 어른들이랑 보내면 될 걸 친구들이랑 하루 종일 논다고 그러고, 조기 졸업에 유학까지 준비한다는 것도 짜증 나고. 그냥 4년 얌전히 한국에 있다가 천천히 준비하면 될 걸 어떻게든 빨리 해외로 나가려고 하는 게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 보내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교환학생도 안 된다는 서하림 할아버지에게 감사했다. 고집불통인 노인네라 장손을 한국에 끼고 있겠다는 보수적인 마인드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재단을 물려주고자 했던 큰딸은 감투 쓰기 싫다며 국내외를 다니느라 바쁘고 그렇다고 사위에게 주자니 마음에 차진 않아 둘째와 셋째를 재단으로 불렀는데 나이 지긋한 아버지가 이사장에서 내려오질 않고 있으니 둘이 경영 싸움 중이라 여러모로 문제가 있는 듯했다.
이모님은 집안일이라 이 이상으로 자세한 걸 얘기하지 않았지만 아주머니랑 같이 주방 정리하다 알아낸 바로는 할아버지가 서하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어떻게든 한국에 붙어 있게 해서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든 말든 교수가 되든 말든 재단에 한 자릴 줘서 다음다음 이사장을 서하림이 되게 하겠다는 게 할아버지의 목표라고.
설령 서하림이 한국에서 대학원 나오고 교수도 한국에서 한다고 한들 갑자기 재단 이사장을 맡는다고 경영을 잘 해나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들었다. 전문 경영인을 쓰는 게 더 낫지 않나 싶고 그럴 거면 차라리 자식들 손주들 죄다 의대 보내는 것보단 경영대 보내는 게 현명한 것 같은데 재단이 의료 재단이니 노인네 생각엔 무조건 자기처럼 의대 나와야 한다고 보는 거겠지. 그러니까 서하림이 의대 안 간다고 했을 때 뺨이나 갈겼을 테고.
뭐, 어차피 서하림은 할아버지 뒤를 이을 생각도 전혀 없고 자연의 진리를 찾아내는 과학자로 평생을 살고 싶다니까 알 바는 아니었다.
서하림 손을 끌어와 내 것을 비비게 해서 두 번 더 얼굴에 사정하고 나서야 서하림 위에서 내려왔다. 씻겨주겠단 내 말에 서하림은 혼자서 씻겠다며 일어났다. 얼굴에서 내 정액이 뚝뚝 떨어져 비린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는 그게 존나 색정적이고 꼴리는 광경이라 입도 다물지 못하고 감상하다 휴지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만약 내가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서하림 입에 내 것을 물리고도 남았을 그런 얼굴이었다.
곧 있으면 수능이라 과외 아이들이 글쓰기 수업하다가 꼭 한 번씩 대학 얘길 꺼냈다. 나는 특기자로 대학 붙은 게 아니라고 대답해 줘도 아이들은 입시 전문가한테나 물어볼 질문들을 했다.
내가 커버할 수 있는 학생 수는 10명이 딱 적당한 것 같다. 그마저도 두 반으로 나누긴 했지만 이 정도면 딱 할 만했다. 작년보다는 학생들 열의가 적어 재미는 덜했으나 학생 숫자가 는 만큼 과외비도 늘었고 인센티브도 커 좋았다. 대신 등단을 한 입장이라 조심스러워 백일장 인솔에선 빠졌다. 학부모들은 내가 등단을 했단 것에 자신의 아이들이 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좋아했고 주말에 직접 멀리 지방까지 가야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애들 면접은 잘 본 것 같대?”
“그런가 봐. 그건 내 담당이 아니라서.”
내가 고3을 맡는 건 원서 넣기 바로 전인 8월까지고 그 이후로는 할 일이 없었다. 면접은 아이들 학부모가 알아서 면접 전문가를 초빙해서 준비한다고 했다. 보통 실적 90%에 면접이 10%니 알아서 잘 붙겠지 싶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나는 서하림이 부탁한 식혜를 건네주며 눈치를 살폈다.
“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러고 있어? 할 말 있으면 해.”
“나도…… 따라가도 되나 해서.”
“너도? 그러든가. 근데 나 머리하고 갈 거라.”
“괜찮아.”
오늘은 지난주부터 코엑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과학엑스포」의 마지막 날이었고 5시에 시상식이 있을 예정이며 서하림과 선배들이 대학부 대통령상을 받을 거였다. 부모님께도 알렸지만 서하림 아줌마는 워낙 바쁜 분이라 오는 게 불가능했고 아저씨와 이모님만 온다고 했다.
“근데 할아버지는 안 오셔?”
“말 안 했어.”
“왜?”
“어차피 저녁 같이 먹어서. 서프라이즈로 얘기하게. ‘할아버지, 제가 선배들이랑 연구 하나를 했는데 이게 대통령상을 받아버렸네요?’ 하고.”
“아하.”
가볍게 먹고 나갈 준비 하자기에 베이컨과 에그마요, 양상추와 아보카도를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정장을 입은 서하림이 너무 멋있고 잘 어울렸다.
차를 타고 숍에 들러 머리를 예쁘게 하는 것도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살짝 다듬고 세웠을 뿐인데도 눈이 부실 것 같았다. 나 말고도 직원들도 모두 입을 모아 잘생겼다며 너무 예쁘다고 칭찬했다. 도대체 연예인 왜 안 하고 아직까지 버티고 있냐는 소리엔 내가 다 어깨가 으쓱했다. 저 얼굴로 일반인이라 멋진 건데 몰라도 뭘 모른다.
게다가 서하림이 그냥 평범한 일반인이던가.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 듣던 과학 신동, 그런 머리를 아낌없이 서포트 해줄 수 있는 재력 있는 집, 자기가 가진 재능과 하고 싶은 게 딱 맞아 떨어지는 천운까지. 겨우 연예인이나 하기엔 서하림이 가진 것들이 너무 아깝다. 하림이 말마따나 한 2, 30년 뒤에 노벨물리학상 받을 귀한 인재가 서하림이었다.
“동규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하림이에게서 소식은 들었다. 축하가 늦었네. 사람들 마음을 위로해 주는 좋은 작품을 쓰길 바란다.”
“네, 감사합니다.”
서하림이랑 똑같이 생긴 얼굴 때문에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뚱하게 반응하고도 남았다.
관계자가 안내해 주는 자리에 가서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이 정리되고 시상식이 시작됐다. 제일 먼저 관객석 쪽 불이 꺼지더니 스크린에 프레젠테이션이 띄워지며 이번 엑스포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어떤 의의로 열렸고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일반부로 나뉘어 진행됐고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의 네 영역이 각각 어떤 특색이 있었으며 이전 엑스포와는 다른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엔 역대 수상자와 수상자들의 최근 행보까지 소개가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루했지만 사회자가 초등부 생물 영역 얘기할 땐 조금 귀엽기도 했다. 옛날에 서하림이 상을 받았다던 장수풍뎅이 실험같이 기상천외하고 깜찍한 것이 많았다.
불이 켜지고 귀빈들을 소개한 뒤 초등학생부터 상을 받았다. 초등부는 최고상이 장관상, 중등부 고등부는 국무총리상, 대학부와 일반부는 대통령상이 제일 높았다.
여러 명이 한 팀인 경우 나이순으로 이름을 부르는 탓에 서하림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에 불렸다. 내게는 끝에 불린 게 마치 이 상의 진짜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대통령이 직접 서하림에게 상을 주고 악수를 하는 걸 보면서 손바닥 터지도록 박수를 쳤다. 진짜 내 새끼가 상을 탔더라도 이보다는 자랑스럽지 않을 것이다. 상을 받은 뒤 팀별 사진, 단체 사진을 찍을 땐 앞에 나가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었다. 하림이한테 보내줄 거라 손이 떨리지 않게 주의했다.
주변에 기자들과 방송국 카메라가 있는 걸 보니 이따 기사도 올라가는 것 같고 뉴스도 타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뉴스 로고가 박힌 카메라와 방송국 기자가 수상자 인터뷰를 하는데 초등부의 제일 어린 팀과 서하림네 팀이 인터뷰를 했다. 서하림네는 팀 리더가 따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는 서하림에게 돌아갔다.
관객석에 앉아 그걸 보는데 기분이 존나 이상했다. 앞으로의 가까운 내 인생 계획은 졸업할 때까지 최대한 과외로 돈을 모으고 졸업하면 딱 3년 변리사 시험 준비해서 합격하는 것이었다. 과외비도 어마어마한데 수상 인센티브와 합격 인센티브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라 열심히 모으기만 하면 3년간의 생활비나 학원비로는 충분했다.
많은 직업 중에 변리사를 선택한 건 8대 전문직 중 제일 소득이 높았기 때문이고 합격 수기들을 읽어봤을 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5급 공무원도 나쁘진 않았으나 무조건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래야…… 하림이가 외국에서 공부하고 거기서 산다고 하더라도 비행기를 자주 탈 수 있을 것 같아서. 휴가도 무조건 하림이가 사는 곳으로 갈 건데 그러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돈을 최대한으로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하림이가 하는 일이 빛을 보고 잘 되는 게 좋아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였는데 왜, 왜 어째서 이렇게 불안하고 더러운 기분이 드는 건지. 미리 준비했는지 똑 부러지게 인터뷰를 하고 대단한 사람과 사진도 찍고 큰 상을 받고. 분명 아까는 되게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기특한 기분만 들었는데.
“진짜 혼자 가도 괜찮겠어?”
“네. 어차피 가족들끼리 저녁 먹는다면서요. 하림이는 아저씨 차 타고 갈 거고, 저는 하림이 차로 가면 돼요.”
“그래, 그럼 동규 다음에 또 보자. 연말에 식사나 한번 하는 건 어때.”
“저야 좋죠. 아줌마랑 아저씨 편한 시간에 맞출게요.”
웃으며 두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세 명이 떠나는 걸 확인한 뒤 얼굴이 빠른 속도로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피가 식는 기분이다. 차에 올라타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핸들 위에 엎어져 한참 생각을 정리했다.
서하림 좋을 일에 왜 그렇게 기분이 더럽고 좆같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가 싫었다. 툭하면 서하림 발가벗기며 시도 때도 없이 집안 이곳저곳에서 섹스를 해대는 것도 다 내 심술인 거 알고 하림이가 잘 되면 잘 될수록 멀어지는 거 같은 게 짜증 나는 것도 그런 하림이에 비해 내가 너무 모자라고 한심하단 것까지도 다 아는데 알고 있는데, 문제는 왜 처음 있는 일인 것처럼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서하림이 잘난 애인 건 코찔찔이 시절부터 아주 잘 알고 있다. 고등학생 때 내가 수학을 제일 잘 했던 건 서하림이 수학을 제일 잘 하고 좋아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거 따라잡으려고 수학에 제일 시간을 쏟아부었다. 서하림이 따로 푸는 문제들 그러니까 이모님이 구해온 문제집들은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선 문제들이 태반이었고 문제 풀이 내기에서 이기는 횟수가 서하림이 훨씬 많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뱁새가 황새 쫓는 격이나 다름없었고 대학교 와서도 서하림은 괴물처럼 과탑을 고수하고 있었으니 대통령상 정도야 놀라울 일도 아닌데 가슴에 울분이라도 쌓이는 것처럼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어디다 가둬두고 나만 볼 수 있게 하면 이 불안함이 진정될까? 다리를 자르고 두 눈을 멀게 하고 반짝이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야 이 기분이 해소될 수 있을까?
나는 왜 잘 참다가 한 번씩 참지 못하고 못난 모습이 새어 나오는 걸까. 울며불며 하림이에게 떠나지 말아달라고 내 곁에 있어 달라며 빌면 차라리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고작 나 하나 때문에 서하림이 정말로 떠나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아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하는 거라곤 서하림 인생 망가트리는 상상만 처해대면서 정작 실행에 옮기진 못하고 병신처럼 화만 삼키는 꼴이 제일 참을 수가 없고 서하림과 나는 하루하루 더 멀어져만 가는 것 같고…… 마음 편하게 응원해 주지 못하는 내가 제일 한심했다.
난 쓰레기다. 서하림을 조금이라도 덜 좋아하면, 약간만 사랑했더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저질렀을 텐데 그렇게 하지도 못하는 병신 새끼다.
내 마음에 바다가 생기면 무얼 하나. 바다는 하늘을 품을 수 있다는 말은 틀렸다. 바다에 비치지 못하는 하늘이 얼마나 크고 넓은데 고작 바다 따위가 하늘을 품을 수 있겠는가. 우주는 지금도 끊임없이 팽창하는 중인데.
하루가 다르게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는 건 신기하고도 재밌는 일이었지만 그거랑 별개로 삶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걸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다. 꺼져줬음 좋겠는데 돈 보내달라며 슬그머니 연락해 오는 아빠 새끼도 그렇고 요즘 사는 게 재밌다며 간간이 사진 보내오는 엄마도, 날 데리고 이것저것 할 생각에 신이 난 교수님이나 아는 체를 해오는 학과 사람들이며 그냥, 모든 게 다.
〈집에 언제 와?]
〈너랑 술 먹고 싶어...]
하림이를 기다리며 맥주를 마셨다. 흐린 기억 속에서 우리는 섹스를 했고 사랑한다는 얘기도 나눴다.
그래. 사는 게 좆같으면 뭐 어떤가. 내 메시지에 집으로 달려와 주는 서하림이 있고 내 불안을 몸으로 달래 주는 하림이가 있고 내 품에 잠이 든 하림이가 있는데. 멀리 떨어진다 하더라도 서하림이 죽지 않고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단 사실이 내겐 위로가 되고 평화가 될 것이었다.
서하림 없는 세상은 생각하기도 싫으니 무조건 열심히 살아서 하림이 죽는 순간 옆에 붙어서는 눈 감는 하림이 보면서 혀 깨물고 죽을 거다.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한 대신 죽음은 함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온몸이 끈적거리는 걸 보니 씻지도 못한 것 같은데 안대는 쓰고 있는 게 귀여워 하림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훨씬 커 그 모양새는 웃길 테지만 뭐든 좋았다. 하림이의 살 냄새를 맡으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시집은 내년 3월 말에 내는 것을 목표로 아주 빠르게 진행됐다. 싫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교수님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어쩔 수가 없었다. 시집에 실을 용으로 쓴 것들은 SNS에 올린 것보다는 훨씬 잘 쓴 것들이라 과연 SNS만 본 사람들이 얼마나 구매를 해줄지는 모르겠다만 시발 알 바냐. 손해를 봐도 출판사에서 보는 거지 나는 모를 일이다. 첫 책부터 베스트셀러 만들어주겠단 교수님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깊게 관여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유명해져서 서하림에게 멋지고 유니크하게 보일 수 있으면 만족이다.
고3 애들도 두 명을 제외하고 전부 수시에 합격했는데, 그 둘은 면접을 망친 거라 내 탓은 아니었다. 합격 인센티브 받고 며칠 내내 연락을 씹고 있던 아빠에게도 돈을 보내줬다. 자잘한 돈 보내주면 계속 연락을 해와서 이렇게 크게 보내주는 게 좀 나았다.
내년 초까진 이제 평온한 날만 남아 있구나. 3월이면 백일장 시즌이 시작되므로 그 전까지 여유를 즐겨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시집 준비하느라 여유까진 아닌데 학점관리도 대외활동도 하질 않아 시간이 많았다.
“올해도 겨울방학에 연구소 가?”
“응. 말하는 거 깜빡했다.”
영어로 된 전공 서적들을 펼쳐놓고 시험공부하는 서하림에게 주전부리를 만들어 가져왔다. 쟁반을 내려놓자마자 마시기 좋게 식혀온 유자차를 단숨에 들이마시곤 가볍게 목 스트레칭을 한다. 나는 서하림의 뒷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또 도시락 싸줘야 하면 말해줘.”
“그래.”
“그럼…… 연말엔 뭐 해? 또 어디 놀러 가?”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겠지. 아, 종강하고 엄마랑 아빠가 저녁 먹재. 생일날 먹을래?”
“좋긴 한데 근데 완전 연말인데 아줌마랑 아저씨도 집에서 쉬고 싶지 않을까? 아니면 친구들이랑 직장 동료들이랑 약속 있을 거 같아.”
“그런가.”
“어른들 만나는 거 말고는 약속 없어?”
“지금은 별다른 약속은 없어.”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언제 만나?”
“글쎄다. 30일? 31일? 아니면 1월 1일?”
“크리스마스는?”
“그때도 딱히 약속 없는데.”
“그러면……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면 안 될까.”
“크리스마스?”
매번 나 혼자 보냈던 크리스마스였다. 같이 살게 되면 내가 만든 케이크를 함께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작년엔 서하림이 해외로 놀러 가는 바람에 할 수 없었지만 올해는 일 없다니까.
“생일 선물로, 응? 드라이브하고 근사한 저녁 먹고 케이크에 촛불 붙여서 생일축하 노래도 불러주고…….”
서하림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내 말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어깰 주무르는 손이 빨라졌다.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같이 보러 가고…… 눈이 오면 눈 오는 것도 구경……하고……. 근데 크리스마스에 안 될 거 같으면 연말이라도…… 같이 TV로 보신각 종 치는 것도 보고 아니면 직접 가도 되긴 할 텐데 춥고 사람 너무 많아서 그건 좀 비추.”
“뭔 말이 그렇게 많냐, 그냥 같이 보내자고 하면 될걸.”
청포도를 먹느라 발음이 뭉개졌다. 서하림이 고개를 뒤로 젖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생일날은 약속 없으면 그냥 집에서 쉬자. 어차피 축하는 크리스마스에 해줄 거니까.”
세상에, 진짜로 서하림에게 생일 축하 받게 생겼다.
“음…… 생일 케이크는 크레이프 케이크가 좋겠어.”
“응응. 만들까?”
“사도 되고 만들어도 되고.”
“그럼 만들래. 뭐 하러 사? 크레이프 케이크 생크림 많이, 달지 않게. 맡겨만 줘.”
서하림을 처음 만난 9살부터 지금까지 내 생일날 같이 있었다거나 제대로 생일 축하해 줬다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방학이었고 과외도 연말과 연초는 쉬기 때문에 내 생일엔 서하림을 만나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생일을 알고는 있어서 바쁜 일 없으면 생일 축하한다고 메시지를 주기도 했는데 31일은 원래 수많은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는 날이고 내 생일보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며 친구들과 얘기하는 게 더 중요해서 안 올 때가 더 많았다. 1월 첫 과외 날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미역국은 먹었어?’ 정도 얘기하는 게 전부였지 이렇게 제대로 약속을 잡아서 내 생일 축하를 이유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생일 선물은 따로 준비한다?”
“왜?”
“왜냐니.”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주는 게…… 생일 선물인 거 아니야?”
“그건 그거고 선물은 따로지. 뭐, 우리 사이에 생일 선물 챙기고 그런 적은 없긴 한데 생각해보니 내가 네 생일 챙겨주는 게 처음 같아서.”
“맞아…….”
이번 생일을 서하림과 함께하는 대신 앞으로 평생 내 생일은 사라진다고 해도 좋았다. 뭐든 처음이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고 특별한 거니까.
생일까지 18일 남았는데 눈 감았다 뜨면 31일이었으면. 오늘부터 저녁 먹으면 그냥 바로 자야겠다. 그러면 하루가 빨리 지나갈 테니까. 어릴 때도 생일날엔 엄마가 미역국 챙겨주면 생일인가 보다 하고 말았다. 아빠 새끼 때문에 그런 기념일 같은 걸 챙길 여유가 없어서 그랬다. 아주 어릴 땐 그래도 어린이집에서 생일을 챙겨주긴 했었는데.
몰라. 뭐든 다 됐고, 다 좋다. 내가 쓴 시에 악플이 천 개가 달려도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저녁은 어디서 먹지, 뭘 먹지. 드라이브 코스는 어디가 좋을까. 사람이 많아서 막히면 어쩌지. 보통 크리스마스에 커플들은 어딜 가지?
눈 뜨는 순간부터 잠에 드는 순간까지 나는 인터넷을 열심히 서치하며 세상에서 크리스마스를 제일 행복하게 보내기 위한 계획을 짰다. 대한민국에서, 지구에서 12월 25일을 나보다 더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은 없어야 된다는, 없을 거란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에 휩싸였다.
하림이도 나랑 같을까? 늘 똑같던 하늘이 더 파랗게 보이고 평범한 길거리가 결혼식 버진로드 같고 겨울의 칼바람이 부드럽게 느껴지며 모든 사랑 노래가 내 이야기 같아 가는 걸음걸음이 꽃길을 걷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인데.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웃음이 나오고 자다가도 괜히 간지러워 배나 팔을 긁게 되고 설렘에 뒤척이고 꿈에서도 보고 싶고.
어디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멍청이처럼 굴었다. 뭘 해도 즐겁고 행복했다. 온 세상이 따뜻한 핑크빛이었다.
4부 Happy ending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