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Limit line
나는 서하림이 싫어할 짓은 원래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까다로운 입맛도 다 맞춰주고 공부할 때도 나보다 훨씬 머리 좋은 하림이 위주로 커리큘럼이나 수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했고 그 외에 자잘한 것들도 서하림이 하지 말라면 하지 않았고 하라고 하면 했다.
서하림이 나보고 앞으로 딸치지 말라고 하면 평생 스님처럼 목탁이나 두드릴 생각이고 지나가던 사람 아무나 골라 죽이라고 하면 바로 달려들어 칼을 꽂든 목을 부러트리든 일을 칠 거였다.
그래서 서하림이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했으니 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전화고 문자고 메시지 알람이고 진동에 소리도 최대로 켜놨지만 혹시라도 내가 서하림 연락을 놓칠까 봐 하루에 수천 번은 더 휴대폰 잠금을 풀어댔다.
휴대폰을 손에서 떨어뜨리는 시간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화장실 갈 때도 들고 가고 잠잘 때는 아예 손에 휴대폰을 쥔 채로 붕대를 감고 잤다.
가끔 메시지 왔다는 소리가 들렸고 진동도 느껴졌으며 ‘뭐 해’라는 내용의 메시지 창을 본 것도 같은데 다 내 착각이었다. 약간 강박증이 걸린 느낌이었다.
퇴원하면 다시 같이하기로 한 과외도 취소됐다. 대신 병원에서 과외 해준 선생님과 계속하기로 했다. 나는 또 서하림 아줌마와 이모님께 감사 연락을 돌렸고 자존심이 약간 상했으며 그런 내가 한심했다. 아직도 남은 자존심이 있나 싶어서.
교실에 앉는 자리도 옮겼다. 맨 뒷줄인 건 여전했지만 하림이를 마음껏 관음할 수 없는 자리로.
서하림 없는 일상이 조금 힘들긴 했는데 말라 죽을 정도는 아니라 참을 수 있었다. 원래 사랑이란 서로 맞춰 가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하림이 화가 풀릴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용의가 있었다.
다만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 시간이면 불현듯 하림이가 너무 보고 싶어 견디지 못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나는 지긋지긋한 문제집을 덮어두고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얼굴은 보지 못해도 하림이를 느낄 수 있는 딱 하나의 방법을 위해서.
택시를 잡아 타고 하림이네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하림이네 집인 D동 앞으로 뛰어갔다.
아래에서 네 번째, 왼쪽에서 두 번째. 창문에 불이 켜져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벤치에 앉았다.
공부하느라 아직 안 자는구나. 존나 다행. 불이 꺼져 있었다가는 하림이네 집으로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모반듯한 불빛 너머에는 제가 좋아하는 잠옷을 입은 서하림이 예쁜 두 눈을 깜빡이며 문제를 풀고 있겠지. 과외를 하고 있으려나. 책상에 펼쳐 놓은 문제에 집중하느라 고갤 숙인 탓에 가는 뒷목이 보이고 눈을 살짝 내리깔아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었을 거다. 표정은 무표정하겠지만 재밌는 문제가 나오면 오른쪽 눈썹이 아주 살짝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길 반복하고 입도 삐죽삐죽거리고. 잘 안 풀리는 문제가 나오면 조금 미간을 구겼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고 동그란 머리를 괜히 헤집어 보기도 할 것이다.
책상 한쪽엔 아주머님이 만들어준 생과일 주스가 올려져 있겠고 문제에 집중한 채 간간이 손을 뻗어 마시다 보면 입술 주변에 조금 주스가 묻어 있기도 했다. 그걸 혀로 핥아주는 재미가 소소했는데.
한참 공부하는 하림이의 모습을 떠올리던 중 불이 꺼지고 커튼이 쳐졌다.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밝은 빛을 내뿜던 네모난 창문은 이제 한없이 까만 어둠뿐이었다.
잘 자, 하림아.
체감으로만 따지자면 존나 쉬웠던 중간고사는 아프긴 아팠다고 10등 밖으로 밀린 등수였지만 기말고사에서 바로 3등으로 만회를 한 덕분에 2학기 최종 성적은 6등이었다.
2학년 종합 등수는 아깝게 4등.
그래서 해마다 학년 별로 두 명에게 주는 학업 우수상을 올해는 받지 못했다. 만약 올해도 내가 받았다면 작년에 이어 올해도 1등으로 상을 받는 하림이랑 나란히 서서 붙어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좆같은 아빠만 아니었어도.
아빠는 뭘 하고 다니는지 낮 밤이 바뀌어선 잘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디서 어떻게 빡이 돌지 모르는 인간이라 매일 국은 다른 거로 바꿔서 만들고 반찬도 열두 개나 만들어서 넣어놨더니 아주 조용했다. 스트레스의 원흉을 거의 안 보고 살아서 그런지 정신건강에 청신호가 켜진 느낌이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병원에도 꼬박꼬박 잘 다니고 있고 몸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고. 모든 게 다 완벽한데 서하림이 없는 게 흠이었다.
참다 참다 불 꺼지는 것만 몇 시간 보다 오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이제 서하림을 몰래 따라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하림은 겨울방학이 시작하기 좀 전에 구립도서관에서 하는 과학 강연을 듣고 오더니 물리에 아주 푹 빠진 모양이었다. 매일 물리에 관련된 책들을 주문했다.
옛날에 서하림이 내 휴대폰으로 온라인 서점을 로그인한 적이 있어 하림이가 시킨 책이 배송 시작을 하면 알람이 온다. 종종 이런 책은 대체 왜 사는 거지 싶은 거는 굿즈들을 위해 사는 책들이었다.
아무튼 요즘 서하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물리 어쩌고 양자영학 어쩌고 빅뱅이 어쩌고 시공간이 어떻고 아인슈타인이 뭐 했고 하는 책들을 샀다.
조용히 책만 읽으면 다행이었다. 서하림은 다른 학교, 아마도 영재원 동기인 것 같은 남자애를 일주일 내내 만났다. 나는 서하림이 카페에서 다른 새끼랑 머리를 맞대고 뭔갈 열심히 하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속에서 열이 들끓었지만 하림이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따라다니기도 바빴다.
그 새끼랑 일주일을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결국 서하림은 그 새끼랑 ‘3분 과학’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동영상을 찍어 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하림이 찍어 올린 건 아니고 동영상을 찍은 것도 걔, 편집해서 자막을 넣은 것도 걔, 업로드를 한 것도 걔였지만 어쨌든 출연자는 걔랑 서하림이었다. 아니 연예인 생각 없다면서 왜 이딴 짓을 한 건지 당장 달려가 하림이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또 참았다.
온갖 오버에 지랄 다 떠는 그 새끼랑은 다르게 서하림은 그냥 카페에 앉아서 책 펼쳐놓고 조곤조곤 자기가 봤던 책을 설명하는 게 고작이었고 가까이서 하림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나는 그런 것도 감지덕지였다.
왜냐하면 그 새끼가 쓸데없이 좋은 카메라를 쓰는지 동영상은 최고 화질이 4K나 됐고 고화질의 서하림은 내게 고퀄의 야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서하림 얼굴이 한가득인 영상을 전체 화면 해놓고 딸 치면 되니까.
나처럼 모니터를 핥을 기세인 사람이 한둘이 아닌지 조회 수는 새로 고침을 할 때마다 늘어나고 또 늘어났으며 학교 커뮤니티도 난리가 났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 중 하나가 서하림 이야기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건데 1분 1초 단위로 쪼개진 서하림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보여진다고 생각하니 자려고 누웠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기 일쑤였다.
서하림 너 진짜 요즘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연예인 안 할 거라고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더니 SNS에 올라오는 저건 뭔데? 넌 하기 싫다 그랬는데 저 새끼가 너보고 하자 그랬지? 하기 싫으면 평소처럼 싫다고 그러지 휩쓸리긴 왜 휩쓸려? 까지 쓴 메시지는 오늘도 보내지 못하고 지워지고 말았다.
“아 진짜 존나 빡치는데.”
23분 전에 새로 올라온 영상을 일곱 번째 재생시키면서 나는 주방을 죄다 뒤져 온갖 제빵 재료들을 한데 모았다.
“시발 진짜 짜증 나 씨발…….”
반죽 치대다가 갑자기 화가 나서 반죽이 영재원 동기 새끼라도 되는 것처럼 존나 때려댔다. 아무리 세게 때려도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어, 이 정도는 중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아주 친절한 책이구요. 근데 재밌어서 저도 생각 날 때마다 읽는 책이에요. 과학 도서 베스트셀러답죠.
“……예쁘긴 또 존나 답도 없이 예뻐서는.”
한숨 푹푹 내쉬면서 반죽을 볼에 던지듯 내팽개쳤다. 계란이나 깨야지. 흰자랑 노른자 분리해서.
나만의 서하림이 유명해지는 걸 망연자실하게 지켜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림이를 위해 이것저것 만드는 것뿐이었다. 얼른 화가 풀려야 연락을 줄 테고 그러면 하림이를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있으니까.
어제는 식혜를 담갔고 그제는 매실청을 담갔다. 서하림이 좋아하는 것들을 매일 잔뜩 만들어 아주머니께 전달했다.
존나 중요하다는 고2 겨울방학. 공부에 열중한 시간보다 서하림 따라다니고 디저트 갖다 바치느라 쓴 시간이 더 많았다.
“아 왜 또 선생님이 담임인 건데요!”
사립이라 그런 건진 모르겠는데 우리 학교는 고3 담임 선생님들이 고정이다. 아무래도 입시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고2 때 담임 선생님을 3학년이 되어 한 번 더 만난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원래 나는 고3 전담이었어. 작년에 우리 아들이 고3이라 잠시 2학년 맡은 거지.”
“헐, 선생님 아들 어디 붙었어요?”
“공부 못해서 겨우겨우 인서울 턱걸이했다.”
반 애들이 그래서 어디 대학교냐고 조례 시간을 다 잡아 먹어가면서 물어봤지만 선생님은 끝끝내 어딘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선생님한테 얘기할 게 있었는데 괜히 저 새끼들이 나대서 시간만 뺏겼다. 그래도 나름 고3인데 경각심이 하나도 없는 건지 수업 준비 종이 쳐도 시끄러웠다.
“선생님.”
“어, 동규.”
“오늘 새 학기 첫날이라 아직 공문 안 왔을 거 같은데요. 저 Y대 백일장 참여하려구요. 이번 달 마지막 주 금요일이에요.”
“왔는데? 안 그래도 물어보려 그랬어.”
백일장을 결석이 아닌 출석으로 인정되는 공결 처리로 다녀오려면 첫 번째 학교로 공문이 오는 대회여야 하고, 두 번째 학교를 통해 신청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딱히 개근상에 욕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평일에 열리는 공모전은 그래도 어쨌든 담임에게 얘길 해야 하는 거라.
“고3인데 평일 백일장은 좀 부담 아닌가, 선생님은 그런 생각이 든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Y대에서 1회로 열리는 데다가 윤동주 이름 건 거라 대상이 자기네 학교 국문과 입학하면 2년 장학금이고 자기네 학교 안 오면 한 학기 장학금 준다 그래서요.”
“2년?”
“네.”
“진짜 우리 둘째는 글 쓰게 해야겠어.”
“어차피 탈 상은 다 탔고 저도 장학금 2년 치 받아서 굳이 안 참가해도 되긴 하는데 그냥 뭐 되면 좋고 안 돼도 상관없는 대회예요. 한 학기 등록금 더 적립한다 생각하면 되니까.”
“진짜 동규 넌 효자다 효자야.”
“쨌든 선생님, 저는 얘기했어요.”
“그래그래. 또 상 받아와서 교장 선생님 기분이나 좋게 해드려. 어차피 너 학교장 추천서 받아야 하니까 상 많이 받을수록 좋지. 교장 선생님 죽기 전에 시집 내시는 게 꿈이신 분이잖아.”
아직도 그 헛된 꿈 안 버렸군. 그래도 뭐 100세 인생에 꿈꾸는 건 돈 드는 일이 아니니 맘껏 해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요즘 돈만 있으면 시집이 뭐야 소설책, 수필집, 풀 컬러 사진집도 낼 수 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렇게 평생의 소원이라면 돈도 많은 노인네니까 죽기 전에 지 돈으로 내겠지.
나도 대학 가면 신춘문예나 도전해 볼까. 메이저 신문사는 소설 당선되면 3천만 원 주던데. 소설은 좀 신경 써서 공부 좀 하고 내고 시는 좀 더 자신 있으니까 음…….
“야 서하림!”
가까운 미래 설계를 하던 중 서하림의 이름이 들렸다. 그 이름은 내 것이 아니었지만 그 애의 이름이 불린 곳으로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 끝에는 서하림이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다 들려.”
아주 짧은 순간 그 예쁜 얼굴을 사진 찍듯 확인하고 도망쳤다. 서하림이 아는 척하지 말라고 그랬으니까. 괜히 눈 마주쳤다가는 화가 더 오래 갈 수 있으니까. 서하림마저 날 미워하고 싫어하게 된다면 나는 바로 목매달고 죽어 버릴 거다.
고3이라고 해봤자 천지가 개벽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용솟음치듯 대단한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자애들은 신학기고 3학년이 됐으니 뭔가 좀 진중하고 차분한 느낌이 있었지만 남자 새끼들은 고3인지 중3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3월 모의고사가 끝나자마자 벌써부터 수학을 포기했다는 또라이 새끼도 나왔다. 나처럼 장학금에 지원금 받아서 학교 겨우겨우 다니는 사람이 보기엔 한심도 그런 한심이 없었다. 이제 겨우 개학하고 열흘밖에 안 지났는데 같은 교실 안에 수포자가 있단 사실이 소름 돋았다.
잘은 몰라도 서하림은 이번 모의고사에서 만점을 기대하는 것 같다. 애당초 서하림은 그냥 똑똑한 걸 넘어선 천재 수준이기 때문에 내신도 뭘 더 배우고 선행을 해서 시험 보는 게 아니라 이미 다 알고 있고, 거기서 오답률을 0%로 만들어가는 데 집중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어디 유명 학원도 안 다니고 그냥 자기랑 잘 맞는 과외 선생님 찾아서 모르는 문제만 물어보는 게 다고.
서하림이 공부하는 방법 중에 시중에 나와 있거나 대치동에서 공구하는 고난이도 문제집을 모아서 자기가 약한 파트만 골라서 푸는 게 있다. 나처럼 문제집 첫 장부터 끝장까지 풀 필요가 없는 거다.
그리고 수학이나 물리, 기하, 미적분 같은 과목들은 틀린 문제를 공부하는 방식이 다시 풀어서 정답 나오면 끝인 게 아니라 다른 풀이 과정을 최소 세 가지를 찾아내는 괴물이었다. 정답이 맞고 풀이 과정 이해가 끝났으면 그만인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랑은 차원이 다른 애였다.
저번 기말고사도 올백 하더니 모의고사도 올백인가 보다. 진짜 괴물. 근데 하림인 예쁘고 잘생겼으니까 괴물이더라도 사랑스러운 괴물이었다.
하림이도 이렇게 힘을 냈는데 나라고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Y대 백일장은 이번이 1회라 지난 수상작을 전혀 분석할 수 없는 대신 백일장 이름에 윤동주가 들어가 있어 윤동주전집을 열심히 독파했다. 윤동주 관련 유명한 평전도 비평도 해석도 그리고 논문까지도 싹 다 읽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참가자 수가 존나 엄청나게 많을 것 같아 뭔가 부족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Y대 국문과 교수진을 찾아서 그들의 저서와 논문, 시집, 에세이 기타 등등을 전부 찾아봤다. 혹시 몰라 Y대 출신인 작가들도 검색해서 그들의 책과 비평, 인터뷰도 훑었다. 대학교 백일장은 보통 그 학교 국문과나 문창과 교수, 학교 출신 작가들이 심사 위원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적잖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작년에 D그룹에서 대상 받아서 진짜 이것만 하고 나면 손 뗄 생각이기 때문에 깔끔하게 피날레를 Y대 대상으로 마무리해도 좋을 거 같아서 힘을 좀 줘봤다.
공부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 줄여가며 똥 쌀 때도 화장실에서 책을 읽어댔더니 시간이 존나 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하림이에게선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어느새 내일이면 백일장이라 기라도 얻을 겸 하림이네 집으로 향했다. 동영상 말고 진짜 하림이가 보고 싶었다. 진짜 하림이를 느끼고 싶다.
D동, 아래에서 네 번째, 왼쪽에서 두 번째.
벤치에 앉아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하얀색에 가까운 노란빛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맘에 들긴 한데 키가 한 10m쯤 되면 좋겠다. 창문으로 공부하는 하림이 보게.
불이 꺼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도 벤치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까만 창만 힐끔거렸다.
잘 자, 하림아. 보고 싶어.
보내지도 못할 말을 썼다가 지웠다. 내 마음이 이런 딱딱한 휴대폰이 아니라 팔랑이는 원고지였다면 벌써 연필 몇 자루가 닳아 수많은 몽당연필이 굴러다니고 있었을 거였다.
간만에 맡아보는 백일장 냄새.
사실 그런 냄새는 있지도 않지만 그냥 해본 말이다. 그래도 나름 한 학기를 쉬고 온 거니까.
예상은 했지만 참여 학생 수가 아주 벌떼 같았다. 대형 백일장의 경우는 기존에 늘 참여하는 예고 애들, 학원 애들 말고도 그냥 일반 학생들도 많이 참가하는 편이다. 굳이 대상이나 장원 아니고 장려나 입선만 받아도 인문계열 지원하는 데에 좀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 같다. 나랑은 별 상관없는 얘기라 정확히는 모른다.
백일장 신청하고 추가로 온 안내문은 조금 특이했다. 당일 백일장인데도 다른 백일장보다 써야 하는 양이 상당히 많았다. 소설은 천 자 원고지로 네 장 이상, 시는 세 편 이상. 쓰는 시간도 아침 열 시부터 여섯 시간이나 됐다. 거의 국립예대 시험급이었다. 내년부턴 참여 학생이 못해도 1/3은 떨어질 게 훤했다.
점심은 아무 때나 싸온 거 먹든 학식 사먹든 나가서 편하게 먹으면 되고 작품 작성은 감독관이 있는 강의실에서만 쓰면 어디서 쓰든 괜찮았다. 거의 한 층을 통으로 비워놓은 데다가 쓰다가 쉬고 싶으면 밖에 다녀와도 돼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단, 강의실 안에선 필기도구를 제외한 개인 소지품을 갖고 있을 수 없어 감독관에게 가방과 휴대폰을 맡겨야 했다. 필통도 없이 볼펜 하나, 샤프랑 샤프심이랑 지우개만 가지고 다니는 나로선 굉장히 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작 시간을 좀 남겨두고 대충 자리 있는 강의실을 찾아 앉았다. 담배 냄새 난다 했더니 내 앞에 눈에 익은 예고 애가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도 전부 같은 교복 학생들이었다. 미친놈들. 교복 입고 올 거면 알아서 냄새 좀 빼고 오지.
“역시 백일장 킬러 참가하셨구만.”
걔가 날 알아보고 말을 건 탓에 한가득 뭉쳐 앉아 있던 예고 애들이 전부 나를 쳐다봤다. 문창과 세 학년 다 왔나 보다.
“뭐로 써?”
“시.”
“나도야.”
뭐라고 더 쫑알거렸지만 나는 그냥 무시하고 샤프나 딸깍거렸다. 지 혼자 신나서 얘기하던 녀석도 내가 대답을 전부 ‘응’으로 통일하니 흥미가 떨어졌는지 몸을 돌려 친구들과 떠들었다. 밥은 학식 말고 나가서 먹는 게 좋겠지. 학식 여러 번 먹을 바에야 분식집 가서 메뉴 한 네 개쯤 시키면 될 것 같은데.
잠시 뒤 감독관이 들어와 Y대 국문과의 역사와 Y대 전신인 연희대와 윤동주 이야기를 10분쯤 하고 이번 백일장은 어떤 의의가 있으며 어떻게 진행되고 기타 등등을 설명했다. 얼른 하나 쓰고 밥 먹고 싶은 마음에 하품만 쩍쩍 하다 감독관과 눈이 마주쳤다.
시제가 발표되고 천 자 원고지와 연습 종이가 배부됐다. 웃기게도 시제는 ‘<자유주제> 단, 작품의 주요 배경이 학교나 집(家)이 아닐 것’이었다.
보통 예고나 학원 다니는 애들은 잘 써서 칭찬받은 자기 작품들을 통으로 외운 뒤 백일장에 나온 시제에 맞춰 적당히 수정해 제출하는 식인데 사실 우리나라 청소년이 할 수 있는 경험이나 상상은 다 거기서 거기라 학교 얘기, 친구 얘기, 가족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괜히 잘 모르는 거 써서 엉성하고 이상한 거 나올 바에야 자기 경험이 최고인 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경험을 그대로 쓰진 않지만 몇 가지 요소들을 따와 쓰는 식이었다. 잘 아는 걸 쓰면 퀄 자체가 달라졌다.
1회라 그런가 여러모로 파격적인 백일장이었다. 나는 연습 종이에 뭘 써야 하나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하며 열심히 끼적거렸다. 뭐라도 쭉 쓰다 보면 마음에 드는 키워드가 걸리기 마련이고 그런 거 두세 개만 더 튀어나와도 시상이 떠오르는 건 금방이었다. 시를 무려 세 개나 창작해야 한다는 게 좀 부담스럽긴 한데, 못 할 건 또 아니었다.
하나 쓰고 나니 열두 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라 Y대에서 나눠준 불투명한 L홀더에 원고지와 연습 종이를 접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고 애가 ‘벌써 다 썼어?’라고 입 모양으로 물어보길래 어깨만 으쓱했다.
감독관이 이름을 적어 세울 수 있는 삼각형 모양의 이름표를 줬다. 이름을 써서 끼우고 L홀더 위에 올려두었다.
그래도 대학교 백일장인데 학식은 먹어봐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 학생 식당으로 걸어갔다가 그대로 돌아 나왔다. 사람 붐비는 거 존나 싫고 시끄러운 건 더 싫다. 그냥 빠르게 정문 밖으로 나와 적당한 분식집에 들어가 메뉴를 세 개 시켰다. 가게 주인이 복스럽게 잘 먹는다고 칭찬해 줘서 김밥을 두 줄 더 시켜 먹었다.
밥 먹고 돌아와서는 창작열을 불태웠다. 오전에 미리 남은 두 개도 좀 짜놓고 나갔기 때문에 한 시에 자리에 앉았어도 조급하지 않았다. 네 시보다 더 빨리 끝날 수 있겠단 생각을 하면서 종이를 꺼내고 샤프를 집었다. 그리고 정말로 40분이나 여유를 두고 원고지를 제출했다.
서하림은 아침부터 시청각실을 다녀오느라 바빴다. 모의고사 만점으로 성적 우수상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국어에서 중복 정답을 인정하니 마니 하느라 성적이 좀 늦게 나왔지만 성적 나오기 전부터 학생들과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교장 선생님도 이사장도 서하림의 모의고사 만점 소식에 무척 기뻐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굳이 서하림이 아니더라도 1등급이 나온 학생들을 위한 성적 우수상 상장이 교실로 배달됐다. 그래도 나름 전국에서 손꼽히는 학교라 그런지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한 장 이상은 꼭 받았다. 나도 받았다. 수학만. 나는 모의고사에서 1등급이 적고 2~4등급 파티이기 때문에 한 장만 받아도 감지덕지였다. 내신 공부만 하기에도 벅차서 어쩔 수가 없다.
“자자, 조용히 하고 자리에 앉자.”
서하림 친구들은 수학 선생님이 들어오기 바로 전까지 역시 네 머리는 국내에만 두기 아깝다며 떠들어댔다.
“3월 모의고사가 수능 성적이라는 말도 안 되는 루머 믿는 사람은 여기 없겠지? 대부분 수시로 갈 테지만 혹시라도 정시 노리는 사람은 지금부터라도 똥 빠지게 노력해서 수능에서 좋은 성적 받자, 어?”
몇몇이 김빠지는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서하림이 너 정말 방과 후 안 할 거냐?”
우리 학교 방과 후 수업은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하나는 모든 학생이 신청만 하면 들을 수 있는 평범한 방과 후, 다른 하나는 말이 방과 후지 사실상 의치한 진학을 위한 의대 반이라 불리며 자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방과 후다. 시험 한 번 통과한다고 끝이 아니라 학기마다 신청을 받고 시험도 매번 친다. 선생님이 말한 방과 후는 두 번째 방과 후였다. 서하림이 이번 학기에 그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영재원 친구랑 놀더니 아예 의대 갈 맘을 접은 듯했다.
“네.”
목소리가 조금 삐딱한 느낌이다.
“너 인마 인터넷에 이상한 거 올려대느라 시간 뺏기지 말고 할아버지 말 따라서 의대 갈 생각이나 해.”
“이상한 거요?”
“그래. 방과 후 시작한 지 벌써 보름이야. 전교 1등이란 애가 정신이 빠져 가지고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서하림이 잡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안 그래도 수학은 학생들에게 생각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뭐만 하면 시대가 어느 땐데 남자는 어쩌고 여자는 어쩌고부터 시작해서 공부 못하면 사람도 아니라며 학생들을 압박했다. 자기처럼 S대 출신이면 인생이 핀다 어쩐다. 학생들에게 존경받지도 못하는 선생님이 과연 지 말대로 핀 인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가 느끼기에 그렇게 느낀다니 할 말이 없다.
“…….”
“뭐야. 누가 선생님을 그렇게 쳐다봐.”
“제가요.”
“뭐, 뭐?”
“선생님.”
“왜.”
“제가 성적이 떨어졌어요?”
“뭐?”
“아니면 공부에 손을 놨어요?”
“알아서 잘 하니까 선생님은 그냥 입이나 다물고 있어라, 그 말이냐 지금?”
“네.”
“뭐야? 너 따라 나와.”
수학은 서하림이 바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할 줄 알았는지 말을 해놓고도 서하림을 내려 봤다. 하지만 서하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쑥 밀어 넣으며 수학을 지나쳐 걸어갔다. 당황한 건 오히려 수학이었다.
“나오라면서요.”
앞문을 열고 나간 서하림이 복도를 가리켰다. 수학이 씩씩거리며 교실 밖으로 따라 나가더니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학생들이 전부 복도 쪽 창문으로 달라붙었다. 나는 뒷문을 열고 섰다.
“서하림이 너 선생님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그게 뭐야! 너 잘되라고 좋은 얘기하는 건데 뭐? 제가 성적이 떨어졌어요, 공부에 손을 놨어요?”
서하림은 눈동자를 왼쪽 아래로 깔고 굉장히 심통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냥 무표정이겠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지금 하림이는 선생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심산이다.
“네 할아버지나 부모님은 네가 딴짓하는 거 알고 계시디? 모르시겠지, 너도 네가 한 짓이 쪽팔린 걸 알아서 말 안 했을 거다. 안 그래?”
“…….”
“오죽 네가 아까우면 선생님이 이런 말 하는지 생각은 안 해? 선생님 딸도 좀 있음 인턴 되고 아들도 한의대 갔는데 둘 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수재였다.”
“네.”
그 뒤로도 수학은 뭐라 뭐라 얘기하다가 갑자기 지 혼자 화를 냈다가 풀렸다가를 반복했다. 서하림은 하품만 안 했지 아주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흥미가 떨어진 대부분의 반 애들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애들 말처럼 선생님이 뭐라고 서하림 엄마도 아빠도 아닌데 의대 타령인지도 모르겠고 지 혼자 열 받아서 저러는 게 좀 오글거렸다.
“선생님. 벌써 15분 흘렀는데요.”
반장인 송정연이 앞문을 열고 심드렁하게 얘기하자 교실에선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 요즘 청소년인 우리 반 애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확실히 알고 있는 서하림 편인 것 같았다. 뭐 굳이 서하림이 아니었어도 수학이 워낙 병신 같아서 마찬가지였겠지만.
“걔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 정도면 알아서 잘 알아들었겠죠. 방과 후 들면 들고 안 들면 걍 마는 건데 왜 그렇게 목을 매세요. 우리 학교가 진정한 교육과 사랑의 현장인 학교가 아니고 의치한 몇 명 붙는지가 중요한 학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오 하는 소리와 함께 몇 명은 박수까지 쳤다. 수학은 서하림에게 잘 생각해 보라며 교실로 들어왔다. 나였으면 쪽팔려서라도 자습하라고 해놓고 교무실로 튀었을 텐데 역시 생각 없는 사람은 달랐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로 수업이 시작됐다. 대신 서하림은 수업시간 내내 대놓고 딴짓을 했고 선생님도 그런 서하림을 모른 척했다.
종례 시간까지도 하림이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집에 와서도 영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문제를 풀다가도 인강을 듣다가도 지금쯤이면 하림이 기분이 풀렸을까, 좀 나아졌을까 걱정이 됐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접고 내일 일찍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일이 재량 휴업일인 게 다행이었다.
[너네집에〉
이제 그만 자야지 하고 문제집이랑 필통을 막 정리하던 차에 휴대폰이 알람 소리와 함께 진동했다. 나는 제일 먼저 환청은 아닌지 환시는 아닌지 메시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휴대폰 어플들을 전부 닫았다가 다시 키고 심지어 전원도 한 번 껐다 켰다. 정말 진짜로 내 착각이 아닌 152일 만에 하림이가 보낸 연락이었다.
[뭐 디저트 남는 거 없어?〉
[좀 단 거로〉
[많이 단 거 먹고 싶어〉
안 그래도 내일 하림이 갖다 주려고 만든 다쿠아즈가 있다. 아 근데 평소에 얘 먹는 대로 만드느라 그렇게 안 달게 만들었는데……. 전화, 전화로 말해줘도 되나?
〈한 시간만 기다려]
[ㄴㄴ 됐어 없는거면〉
나는 존나 다급해졌다. 얼굴에 있는 땀구멍이 모두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더운 땀이 났다.
〈있어]
[?〉
[기다리라며〉
[사오는 건 안됨〉
〈아니]
〈지금부터 걸어가면 한 시간 걸린다고]
[아 그래?〉
[그럼 단 거 부탁함...〉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은 게 분명한 온점 세 개가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한 시간이라고 했으니 택시 타고 가는 시간까지 대충 40분 정도의 시간이 생겼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도대체 만들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도저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커스터드 크림이라도 만들어서 가야 하나? 다쿠아즈에 발라 먹으라고? 아니 중불에 끓이고 식히는 데 한 시간 넘는다. 아니면 캬라멜 크림? 아니 그것도 시간이 안 됐다.
살면서 이렇게 빠르게 뭔갈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국 내 생각의 끝은 달고나였다. 지금 당장 만들 수 있는 단 게 그거밖에 없었다.
설탕과 국자를 꺼내 주방에 펼쳤다. 소다도 겨우 찾아냈다. 이름이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호떡 만들 때 쓰는 누르개도 꺼냈다. 국자에 설탕을 반쯤 붓고 가스 불을 켰다. 아무래도 국자는 버려야겠지.
설탕이 다 녹았을 때 소다를 넣었다. 색이 예쁘게 변하며 부풀어 올랐다. 씻어 놓은 쟁반에 엎고 누르개로 눌렀다. 그러고 보니 쿠키 구울 때 쓰는 모양틀을 쓰면 좋을 것 같아 그것도 꺼내왔다.
국자도 집에 두 개나 더 있어서 일단 망친 첫 국자는 끓는 물에 넣어두고 두 번째 국자에 설탕을 부어 넣었다. 좀 전 거는 너무 소다를 많이 넣었더니 색은 예쁜데 맛이 별로였다. 소다를 조금 덜 넣으니 색도 예뻤고 맛도 좋았다.
두 번째 국자도 끓는 물에 넣어두고 세 번째 국자를 들었다. 남은 시간은 30분. 30분 동안 만들 수 있는 최대한으로 달고나를 만들어 지퍼백에 담아 들고 택시를 탔다. 다쿠아즈도 일단 챙기긴 했지만 달고나 때문에 택시에서 단내가 진동을 했다.
카드 결제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잔돈 안 줘도 된다며 도착도 하기 전에 택시 아저씨에게 돈을 쥐여주었다.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튕겨 나오듯 문을 열고 나와 서하림 집으로 뛰어갔다. 다급하게 D동 현관문 옆에 붙어 있는 도어락을 눌러대다가 묘한 기분이 들어 몸을 돌렸다.
“…….”
늘 내가 앉아 창을 바라보던 벤치에…….
“뭐야, 택시 타고 왔으면서 왜 걸어온다고 거짓말했냐.”
거짓말처럼 그곳에 서하림이 앉아 나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하림이에게 다가갔다. 조금 휘청거렸는지도 모른다. 지난밤, 서하림이 없는 하루를 마무리하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밤…… 이곳에 앉아 있던 내 모습들이 겹쳐 보였다. 하림이의 주위에 그렇게나 서하림을 그리워하던 수많은 내가 함께였다.
“시간은 진짜 딱 한 시간 걸렸네.”
민망한 건지 멋쩍은 건지 서하림이 살짝 웃음을 흘렸다. 아직 만개하지 않은 벚꽃들이 봄바람에 흔들렸고 그 아래 앉아 있는 서하림은…… 내 언어능력으로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걸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어 슬퍼졌다.
내가 훌륭한 화가였으면 지금의 이 장면을 평생 기억하고 그림으로 몇 번이고 남겼으리라. 그리고 그 작품은 내 인생의 걸작으로 남아 두고두고 회자 되겠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림 속 서하림을 찬양하고 또 숭배하고…….
어쩐지 서하림에게 더 이상 가깝게 다가가기가 무서웠다. 저 예쁜 장면 속으로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걸까? 이 시간을, 공간을 망치는 건 아닐까?
서하림도 별말 없이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게 오라는 손짓도, 말도 더 이상 없었다. 벤치에 등을 붙이고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저, 나와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 거지.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도 되는 거지.
서하림이 내게 그 어떤 허락의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어 계속 감격스럽게 서하림을 눈에 담았다. 바람이 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서하림의 머리카락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서하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무릎이라도 꿇어 미안하다고 사과하길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내 손에 들려 있는 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단 이것들을 입에 물려주길 바라는 걸까.
다정한 목소리로 ‘이리 와’라거나 ‘뭐 해’ 같은 말을 먼저 해주길 바라면서도 차라리 서하림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대로…… 꿈결 같은 장면을 계속 보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한참 이렇게 있다가 그냥 집에 가서 드러누우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봄날의 서하림을 꿈꿀 수 있을 텐데.
“김동규.”
너무 오랜만에 듣는 내 이름이라 잠시 서하림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목소리를 넘어 하나의 음색이 된 소리에 귀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저건 내 이름이었지. 저 맑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이런 소리, 이런 느낌이었다.
“……응.”
“그거 뭐야?”
“…….”
“손에 든 거.”
“아 이거…….”
안경을 추켜올리고 하림이에게 다가갔다. 서하림은 달고나를 처음 보는지 벤치 끝에 엉덩이를 걸쳐 앉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달고나야.”
“헐 이름부터 벌써 달아.”
“설탕 왕창에다 소다 한 꼬집 들어가.”
“으…….”
“단 거 필요하다며.”
“녹인 설탕 굳힌 걸 먹겠단 소린 아니었는데.”
“녹인 설탕 나부랭이가 아니야. 엄연히 달고나라는 귀여운 이름이 있는데.”
내 말에 서하림이 크게 웃었다. 그제야 나는 긴장이 풀려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하림이의 화가 풀린 것도 알겠고 너무 오랜만에 하림이를 보고 새삼 시각적인 충격을 받은 것도 진정이 됐다.
비어 있는 하림이의 옆에 앉았다. 덩치 큰 내가 앉기 편하게 하림이가 조금 비켜주었다.
“그래, 달고나.”
“근데 이게 지역마다 이름이 다른데 어디서는 뽑기라고 부른대.”
“왜?”
“봐봐.”
지퍼백에서 달고나를 꺼내기 전에 주머니에 넣어온 일회용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하림이에게 다쿠아즈를 건넸다.
“지금 먹으라고?”
“뭐 보여줄 거 있어서 들고 있으라고. 먹으라고 가져온 거니까 먹어도 되고.”
“이거 먹을래.”
서하림은 턱짓으로 달고나를 가리켰다. 나는 물티슈를 하나 더 꺼내 손을 다시 한번 꼼꼼히 닦은 뒤 지퍼백을 열었다. 열자마자 풍겨오는 단 냄새에 서하림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윽, 와 단 냄새 대박.”
“이거 봐 하림아. 모양 있지. 달고나 먹든 자르든 해서 이 모양을 그대로 잘 살리면 하나 더 준대. 그래서 뽑기라고 부른대.”
“모양을 뽑아낸다 뭐 그런 뜻인가?”
“그런가 봐.”
“쿠키 틀로 한 거야?”
“응.”
“그럼 나도. 나 먼저 고른다?”
전부 다 네 거니까 편하게 고르란 말은 하지 않았다. 품에 소중히 안고 온 덕분에 하나도 깨지지 않은 달고나들을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르고 있는 게 귀여워서.
꽃은 자연광 아래서 보는 게 제일 예쁘고 보기 좋은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굳이 밤에 여의도로 벚꽃 보러 가는 사람들을 지금껏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림이와 벚꽃 나무 아래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니 왜 사람들이 낮이 아닌 밤에 꽃을 보러 가는지 알 것 같았다.
밤이 주는 운치가 낮과는 무척 달랐다. 어둠과 싸우는 가로등의 불빛들이 차마 쫓아내지 못한 그림자가 얼굴이나 몸 곳곳에 묻어났고 모두가 잠들기 시작한 시간이라 조용하니 하림이의 얼굴에 집중하기도 좋았다. 햇살은 따듯함을 줬지만 어둠은 무게가 느껴져 특별함을 선사해 주었다.
나는 스페이드 모양을 고른 하림이가 조심조심 달고나를 조각내는 모습을 감상했다. 동그라미의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조금씩 떼어내고 그 조각들을 입으로 가져가고. 너무 단맛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도 코앞에 둔 달고나에 집중하느라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약간 가운데로 귀엽게 몰린 것도.
“아씨. 스페이드 모양 하나 더 있으면 줘봐.”
실패한 달고나를 내 입안에 처리한 서하림이 다시 새로운 스페이드에 도전했다.
“많이 달면 다쿠아즈 먹어. 그건 이렇게까지 안 달아.”
두 번째 스페이드도 부셔 먹은 서하림은 다음번에 제일 쉬운 세모 모양을 골랐다.
“됐어…… 이미 단 거…… 먹어서…… 맛도…… 제대로…… 못 느낄걸. 지금 이거…… 약간…… 조각하는 느낌인데…….”
집중하느라 대답도 느리게 하더니 한 10분쯤 지났을까, 세모 모양을 성공한 서하림이 오른손 검지를 하늘로 올리며 작은 세레머니를 울렸다.
“와 이게 뭐라고 성취감 장난 없다.”
“원래 넌 뭐든 열심히 잘하잖아.”
“그렇긴 해.”
우리는 나란히 앉아 앞만 바라보았다. 서하림은 발을 앞뒤로 움직여 바닥을 끌어댔다. 지익지익 땅이 끌리는 소리가 간지러웠다.
하림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침묵마저 즐거운 대화였다. 이따금 우리는 이렇게 아무런 말 없이도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교류하곤 했다. 둘 사이의 고요함에선 안락, 평온, 신뢰, 의지 같은 것들을 언어 이상으로 강렬하게 통감할 수 있었다.
우리를 평범하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공기가 감미롭게 바뀌었고 해와 달은 오로지 우리 둘만을 위해 빛을 비춰주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이다지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어제와 별다를 거 없는 오늘과 언제나 똑같은 장소를 순식간에 영화처럼 바꿔놓는다.
괜한 말로 행복한 침묵을 깨는 대신 하림이의 손을 끌어와 달콤함이 묻은 손끝에 입을 맞췄다. 여전히 차가운 손 때문에 손가락 마지막 마디는 붉었고 설탕 덩어리 덕분에 단맛이 묻어났다. 혀를 빼고 핥고 싶었으나 고운 손이 가볍게 주먹을 쥐면서 뜨거운 입술을 회피했다.
“……밖이야.”
“이 정도는 가까이서 보는 거 아니면 뭔지도 잘 몰라.”
“…….”
“핥기만 할게. 손만. 아니, 손가락만.”
서하림의 주먹이 산소호흡기라도 되는 양, 나는 주먹 정 가운데에 코를 박고 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달콤한 피부에서 단 냄새가 나니 미칠 것 같았다. 손끝, 아니 손톱이라도 핥게 해줬으면…….
“손가락 말고 손끝이라도. 응?”
“하지 마.”
“아 제발…….”
“나 너랑 이런 식으로 얽히기 싫어.”
이런 식?
서하림은 내게 잡혀 있던 손목을 비틀어 뺐다.
“이런…… 식?”
나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서하림을 채근하는 눈빛을 쏠 뿐이었다. 몇 초 전만 해도 발기할 거 진짜 간신히 겨우겨우 참느라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는데.
“친구랑, 그래. 뭐…… 야한 거 보다가 서로 흥분해서 같이 자위하거나 그러다가 도와주기도 하고, 대충 뭐 그런 경우 좀 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 근데 너랑은 그러기 싫어.”
“왜?”
“…….”
어쩐지 나만 발정 난 개가 된 것 같아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실망감도 컸다. 저렇게 순진하고 예쁜 얼굴로 날 이용해 먹은 것만 같았다. 서하림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랬다는 거다.
너도 좋았으면서, 좋아했으면서. 그러기 싫은 애가 같은 남자가 뒷구멍을 핥아주는데 어떻게 좋아 죽는 신음을 낼 수가 있어…….
“우리 그냥 이렇게, 음. 으음.”
서하림은 상처받은 눈빛을 한 내 눈치를 봤다. 내가 조금이라도 충격을 덜 받을 수 있게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만드는 모습이 친절하고 다정했다.
그런데 지금 내 맘이, 하림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곱게 듣지 못할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하림이가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애정 행각을 이런 식이라는 하찮은 말로 정리해 버린 건 조금 참기 힘들었다.
아니겠지만, 날 가지고 논 건 아니겠지만…… 하림이가 말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았고 눈가가 뜨거워지는 게 자칫 잘못했다간 울지도 몰랐다.
“같이 공부하다가 가끔 머리 식히러 나와서 네가 만들어준 거 먹고 뽑기 얘기처럼 재밌는 얘기도 하고 그냥 이렇게 별빛 달빛 감상하고 밤바람 쐬고 선생님 욕도 하고 친구들 뒷담이나 까고. 나중에 대학생 돼서도 다른 학교 다니든 같은 학교 다니든 종종 만나서 과제가 좆같다 교수가 별로다 뭐 그런 얘기하고 그냥, 그러면 안 돼?”
얘가 지금…… 미친 거 아닌가.
눈 세 번만 더 깜빡였다간 볼을 타고 흐를 정도로 고여 있던 눈물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눈두덩이에서 누가 눈물을 끌어당긴 것도 아닌데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이렇게나 빨리 사라진 것에 나는 또 인체의 신비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가슴이 아파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아주 질긴 근육으로 되어 있는 심장이라 터질 일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는데 심장이 얼마나 수축하고 이완되는지 피가 얼마나 팽팽 도는지까지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지금 나랑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순정만화 주인공들처럼 그런 연애를 하고 싶다, 이 말 아닌가.
“난 진짜 잘 모르겠다. 왜, 어쩌다 그렇게, 그런 거까지 우리가 해야 하는 건가 싶고…… 너도 좀 진정할 필요가 있어 보여.”
시발 미쳤나 봐 진짜로…….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이 없나? 슬퍼서 다 죽었던 좆이 또 지랄 발광을 하며 나댔다.
그래. 내가 성급했던 거 인정하고 밀어붙인 것도 인정한다. 자위도 한번 제대로 안 해본 애 데리고 뒷구멍을 핥아 댔으니 그 충격이 오죽했을까. 성감대인지 18년 평생 모르고 살던 젖꼭지가 피멍이 들 정도로 빨리고 그렇게 수십 번 혀를 섞어댔어도 아직 어색하고 뻣뻣한 키스도 그렇고.
눈 감았다 뜨면 스무 살이었으면 좋겠다. 어른이 빨리 되고 싶다. 술 취해서 귀엽게 풀어진 하림이도 보고 싶고 술김에 짐승처럼 섹스도 해보고 싶고 성인용품점에 당당하게 들어가서 하림이한테 이것저것 해볼 것들도 사고.
콘돔은 그냥 깨작깨작 한두 개 사는 게 아니라 몇십 개 든 박스째로 사야겠지. 섹스하다 하림이가 기절해도 나는 내가 만족할 때까지 하림이 안에 박아 넣고 싸고 싶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바닥에 널브러진 콘돔 개수 보고 경악하는 하람이 얼굴이 보고 싶다.
아 또, 곤히 자고 있는 하림이를 섹스로 깨워보고도 싶고…… 잘 자고 있는 하림이 바지랑 속옷만 벗겨서 풀어주지도 않고 바로 넣으면 바로 깰지 아니면 몇 번 움직여야 깰지도 궁금했다. 모닝 섹스에 깨어난 하림이가 당황해하면 삽입한 채로 일으켜 세운 다음 둘이 딱 붙어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서는 반쯤 서 있는 하림이의 것을 잡고 소변보게 하고 싶다.
또…… 지난밤의 난잡한 섹스 때문에 뒤가 잔뜩 부어 있는 걸 아침부터 빨아주고 싶은데 그러면 하림이는 간지러워서 깰까 아니면 느껴서 깰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우리 좋았잖아, 그…… 전까지.”
더 이상 들었다간 너무 좋아 혼절할 것 같아 나는 내 두 귀를 틀어막았다. 하림이 입을 막을 수는 없어서.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하림이의 입 모양이 날 걱정하고 있다.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심장이 거세게 뛰어왔고 숨도 가빠왔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분홍빛이고 귓가에 종소리가 들린다는 헛소리는 개소리가 아니었다. 머릿속에선 수천 개의 종이 사이렌처럼 울려댔다. 밤이라 세상이 분홍색으로 보이진 않았으나 예뻐 보였다.
“……아니야. 괜찮아.”
멈추지도 않고 폭주하는 상상들이 덮쳐와 한참이나 귀를 막고 있어야 했다. 서하림은 착하게 그런 나를 오랜 시간 기다려 주었다.
설마설마했지만 Y대 백일장까지 대상을 받을 줄은 몰랐다. 전국 규모 대회 특히 대학교 백일장에서는 대상이나 장원 하나만 받아도 문학 특기자로 대학 프리패스인 데다가 입시가 걸려 있어서 누가 이렇게 독식하는 건 심사 위원들이 알아서 피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용이나 체육 이런 쪽은 누구 한두 명이 3년 내내 싹쓸이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여기도 그럴 줄은 몰랐다.
교장 선생님은 수상 공문이 오기도 전에 교내 방송으로 날 불렀다. 거기 심사 위원 중 하나가 자기랑 초등학교 동창인데 친한 사이라 공문 팩스 보내기 전에 미리 수상 소식 들었다면서.
“아이고, 우리 작가님 오시네.”
헐. 존나 오글. 작가님이라니. 소름이 돋았다. 저는 그냥 문학적인 소양 뭐 그런 거 하나도 관심 없고 상금이랑 장학금 때문에 백일장 다니는 건데요.
“오후에 공문 올 거긴 한데, 교장 쌤이 동규 수상 소식에 너무 기쁘고 반가워서 불렀어요.”
“…….”
“알고 있겠지만 전국에 있는 국문과, 문창과 교수님들이 문학 천재 김동규 학생이 우리 학교로 오겠지 하고 목 빼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또 큰 대회에서 훌륭한 작품을 써준 덕분에 교장 쌤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나는 나를 문학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백일장에서 쓰는 걸 작품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쯤 되니 문창과도 국문과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나중에도 글을 쓸지 말지도 모르는데 상금이나 축내는 학생 하나를 골라내지도 못하는 어른들이 한심해져 왔다.
“나 참. 15년만 빨랐어도 이런 천재가 나오면 학교 차원에서도 대상 축하한다고 현수막을 걸어봄직한데 아깝네, 아까워. 서하림이도 그렇고 올해 우리 학교엔 자랑스런 천재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는데 말이야.”
엉덩이나 긁적대면서 적당히 교장 선생님의 말에 몇 번 호응해 주고 나서야 교장실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게는 용돈 내지는 장학금 적립 행사일 뿐인 백일장 수상식에 와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정말 담임 선생님이 말한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인재인가 하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상장 수여 다 하고 부상도 다 주고 단체 사진도 찍은 다음 심사 위원들이 수상자들에게 한마디씩 하기 위해 학생들 쪽으로 몰려왔다. 특히 내 쪽에.
심사 위원 무리 중 제일 나이도 많고 짬도 제일 높아 보이는 교수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동규 너, 내가 다른 백일장에서 장원이랑 차상 두 개나 줬는데 모르지?”
“…….”
“1학년 때 장원 받은 것도 내가 밀어붙여서 준 거야.”
“네.”
다짜고짜 친한 척 반말을 해서 기분은 별로였지만 용돈 같은 상금을 주신 분이라니 감사하긴 해서 씹진 않았다.
“다른 곳 가지 말고 우리 학교로 원서 써. 사실 네 실적이면 전국 어딜 써도 다 합격이긴 하다만. 거기다 좋은 학교에서 공부도 잘한다며.”
교수나 되는 사람이 지금 대놓고 부정 입학을 추천하는 건가. 원서 쓰면 합격시켜 주겠다는. 아니 뭐 나서서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나 정도면 내신도 빵빵하고 실적도 빵빵하니 원서 쓰면 안 붙는 게 이상할 정도긴 한데 나는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 옆에 나란히 선 다른 학생들을 생각하니 땀이 삐질삐질 나왔다.
정말로 내가 문학 천재인가 싶은 생각도 처음 들었다. 대학교수들까지 진짜로 탐낼 정도인가, 내가.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니면 어디 꼭 가고 싶은 곳 있어? 좋아하는 작가랑 동문이 되고 싶다거나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배우고 싶다거나.”
“저 공대요.”
“공대? 아니 뭐, 요즘은 전공이랑 상관없긴 하지. 꼭 우리 과 아니어도 되니까 새 학기에 봤으면 좋겠는데. 교내 문학상도 있고 게다가 재학 중에 등단하면 졸업 때까지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어.”
옆에 주루룩 서 있는 다른 수상자들은 나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심정을 모두가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친구들은 내 심정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S대를 목표로 두고 있는 나로서는 다른 모든 대학에서 4년 장학금을 준다고 해도 성에 안 찼다. 입원하고 본 중간고사가 평소보다 좀 망해서 그렇지 내 성적은 여기 오기에 좀 많이 아까웠다. 물론 여기도 명문대 중의 명문대인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는 서하림이 외국 대학 간다고 하면 지금보다 더 피 토해가며 공부해서 따라갈 생각이고 그러면 S대도 맘에 안 찼을 거라.
나 말고도 다른 수상자들에게 좋은 덕담이 오갔다. 입선을 받은 1학년 애 중에 하나가 저 대왕 교수의 팬이라 마지막을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야.”
집에 가던 지하철에서 예고 애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 나 모르지. 근데 존나 궁금한 게 있어서.”
이름표를 힐끔 보니 낯익었다. 얘도 아마 나처럼 상 좀 많이 받은 애라 익숙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네가 뭘 좀 모르는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
“뭐를?”
“너 공대 갈 거면 도대체 백일장 왜 그렇게 열심히 다녀?”
“열심히 다니든 말든 내 맘이지 너랑 뭔 상관인데.”
“내가 너랑 같은 학교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몇 번 본 게 다긴 한데, 너 문학의 세계에 감동받아서 원고지에 파묻혀 죽고 싶다거나 나중에 방송 작가 되고 싶다거나 뭐 그런 생각 하나도 없지.”
“어.”
“그럼 왜 백일장 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건 별개라서 천부적인 재능을 펼치려고?”
“아니.”
쪽팔리게 상금 때문이라고 말하긴 싫었지만 이 새끼 말하는 꼴을 보니 답 듣기 전엔 죽어도 안 보내줄 것 같아서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상금 때문에. 장학금도 주잖아, 대학교 등록금.”
“헐 미친. 야 너 진짜 몰라?”
“뭘.”
이제 좀 슬슬 짜증이 날 것 같은데.
“백일장에서 대학교 등록금 주는 거, 창작이랑 어문계열 아니면 한 푼도 안 줘.”
“뭐?”
“많이 봐줘서 인문계열까지 주긴 하는데 그것도 요즘은 거의 다 막혔을걸. 하도 장학금까지 받아 놓고서는 글이랑 상관없는 학과 진학하고 진로도 그런 쪽으로 빠져서. 장학금까지 주는 대회들은 존나 큰 대회들이고 그런 데는 보면 맨날 하는 말이 현대 문학 신인의 초석이 되는 학창 시절부터 어쩌고저쩌고하잖아. 약간 신진 작가 키우는 투자? 지원? 개념으로 장학금 준 지 20년이 넘어가는데 장학금 받은 학생 중에 등단하거나 작가로 활동하는 학생이 존나 손에 꼽는대. 그래서 국문 영문 불문 문창 극작 뭐 이런 학과 아니면 장학금 안 줘.”
“구라 치지 마.”
“뭔 구라야. 저렇게 된 지 몇 년 됐어. 백일장 참여하는 애들 백이면 백 다 문창 아님 극작 준비해서 모르는 애가 없는데.”
“진짜야?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항의 안 했대?”
“넌 공부도 잘하고 공대 생각해서 모르겠지만 문창이랑 극작은 예대라서 수시든 정시든 수상 실적 아님 실기만 거의 칠팔십 퍼 반영이라 항의 들어올 것도 없어.”
“아…….”
“야, 어디 가!”
때마침 역에 도착해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왔다. 다짜고짜 내린 거라 무슨 역인지도 몰랐지만 지하철 타고 집으로 가려던 계획을 접고 택시를 잡아 타 학교로 갔다.
담임도 모르고 있었나? 알았으면 진작에 얘기해 줬을 텐데 얘기 안 해준 걸 보니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하긴 우리 학교에서 백일장 다니거나 문학 특기자 준비하는 애가 나 전에는 없었을 거다.
“아저씨 세문 고등학교요.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진짜 좆 됐다. 가서 담임 선생님이랑 다시 한번 확인해 보긴 하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조차 전혀 들지 않았다.
“아 시발…….”
그동안 괜찮았던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시야가 핑글핑글 돌았다.
〈하림아]
〈나 어덕함]
〈좆됨]
〈아...]
〈어떡햐 진ㅉㅏ]
〈하 큰ㄴ일남 어떡헤]
〈망했어]
수업 중인 시간이라 내 메시지를 읽을 순 없겠지만 하림이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자체가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해 올리는 기도였다.
택시 타고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학교가 전부 끝난 시간이었다. 원래 금요일은 6교시까지만 해서 세 시도 안 돼서 끝나긴 하지만. 야자가 자율인 학교이기 때문에 학교 끝나면 칼같이 집으로 가는 서하림은 볼 수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아직 퇴근을 안 한 상태였다.
-어, 선생님 네 시 반이면 퇴근인데. 오늘 잘 썼어? 대상 각이냐 또?
‘선생님 저 오늘 백일장 아니고 시상식이었는데, 아니 그거보다 진짜 급한 일 있어서 지금 택시 타고 학교 가는데요. 오늘 한 시간만 늦게 퇴근하면 안 돼요?’
-무슨 일인데?
‘지금 정신없어서 생각 정리 좀 해야 돼서 전화로는 좀 그렇고 학교 가서 얘기할게요. 저 아무래도 존, 큰일 난 거 같아요 선생님.’
-그래 알았다. 교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선생님 교무실 어딘지 알지? 신관 3층이야.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교무실로 뛰어갔다. 교무실 문을 부서질 정도로 세게 열었는데 안에는 선생님들이 그리 많지 않아 집중되는 눈이 몇 개 없었다.
“그 정도로 열어서야 문 부술 수 있겠어?”
담임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숨 좀 고르게 뭐 좀 마시자. 따라와.”
신관은 3학년 교실이 있는 건물을 말한다. 완전히 새로 지은 건물은 아닌데 건물 안팎으로 리모델링을 거쳐 반짝반짝하다 보니 다들 신관이라 불렀다. 선생님이 교무실과 연결된 진학 상담실 불을 켜며 에어컨을 틀었다. 나는 연신 땀을 닦아댔다. 선생님이 냉장고에서 알로에 주스를 꺼내 건넸다. 볼에 대자 시원해서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존나 큰일 난 일이 뭔데?”
“아 선생님 저 좀 전에 예고 애한테 얘기 들었는데요. 저 받은 장학금 국문학과랑 문창과 아니면 무용지물이래요. 이게 말이 돼요?”
“그게 무슨?”
“아 씨 몰라요. 바뀐 지 몇 년 됐다는데 개망함요 진짜……. 장학금 줘봤자 다른 과 가버리고 작가 되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어문계열이랑 창작계열만 장학금 준대요.”
“잠시만. 지금까지 시상식 때 안내 안 해줬어?”
“아니 그냥…… 상장주면서 부상으로 대학 진학 시 1년의 장학금을 수여합니다라고만 했던 거 같은데…….”
“하이고야. 기다려 봐라.”
선생님은 다시 교무실로 사라지더니 내 학생부와 서류들을 잔뜩 가져왔다. 교외 수상 실적란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중에 장학금 준 대회가 뭐 뭐야.”
나는 칸을 가득 채운 수상 실적 중에서 두 개를 찾아내 짚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곧바로 해당 대회 공문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이 하는 말들은 내가 예고 애한테 한 말과 매우 비슷했다. 왜 어문계열만 됩니까, 학부모들이 장학금 제도를 바꾸는 것에 찬성을 했습니까 등등.
두 곳과 전화를 마친 선생님은 머리를 싸매고 작게 신음을 뱉었다.
“아우,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본다 동규야. 선생님이 미대, 음대, 체대 다 보내봤거든? 근데 이쪽은 왜 이런대?”
그걸 나한테 물어봤자 답이 나오는 게 아니므로 어깨만 씰룩했다. 선생님은 잠시 내 학생부를 뒤적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교무실로 건너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선생님들과 얘길 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1이 사라지지 않은 서하림과의 메시지 창만 열었다 닫았다 했다. 교무실 문 열었을 때만 해도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나보다 더 고민하고 답답해하는 걸 보니 내 걱정이 다 선생님에게 옮겨간 모양이었다.
“동규야. 선생님이 진짜 네 재능도 아깝고 장학금도 아까워서 하는 말인데 국문과 가는 게 어때.”
긴 시간 끝에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김빠지는 소리였다.
“아 싫어요. 국문과는 꿈에서도 생각 안 해봤어요.”
“현실적으로 좀 보자. 너네 집 생각하면 너도 장학금은 포기하기 싫을 텐데 국문과 아님 못 받는다. 그리고 지난 네 2년을 돌이켜보면 공대에 비빌 눈에 띌 활동도 잘 없고. 기껏해야 모의고사 수학 1등급으로 받은 성적 우수상? 작년에 상 받지도 못한 경시대회?”
“왜요. 독서부 활동하면서 읽은 책 제목들 보면 세상 다시없을 공대생인데.”
“공대 가고 싶었으면 로봇공학부에 들던가, 수학 연구부에 들던가 했어야지 꼴랑 책 몇 권 읽은 거는 한참 부족해. 네 학생부는 ‘나 국문과 가고 싶어요’ 하는 학생 거야. 상이라도 덜 받든가.”
내 학생부를 손으로 콕콕 찍어가며 선생님은 열변을 토해냈다. 내가 꿈쩍도 안 하자 한숨을 푹 쉬었다.
“고집 봐라. 그러면 그냥 일단 국문과 들어가서 장학금 받으면서 2년 다니고 그 후에 전과하든가 복수 전공 들어야지 뭐.”
“그것도 싫어요.”
“아 왜!”
대학생이 된 나의 계획은 이렇다.
정시가 아닌 수시로 합격해서 입학하는 거기 때문에 수석 입학은 될 수 없지만 입학한 뒤 아싸로 살면서 학교 활동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 과에서 1등을 놓치지 않고 4년 내내 전액 장학금 받으며 학교 생활 성실히 하고 그런 나를 교수님이 좋은 연구실이나 직장에 꽂아주고 마지막으로 수석 졸업생 타이틀을 거머쥐는 거까지.
중간에 교내 문학상이나 등단 정도는 간간이 도전해 볼 수도 있다. 용돈 벌이 겸해서. 근데 그것도 방학 때 학생 과외로 돈 많이 벌면 굳이 공부할 시간 버려가며 할 생각은 없다.
서하림 같은 학생들이 전국에서 올라온 곳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가서도 지긋지긋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전과하면 이미 1년 이상 공부한 애들을 상대로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공부해야 하는 건데 따라잡기가 힘들 거고 복수 전공은 그 지긋지긋한 걸 두 배나 하란 얘긴데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전과든 복수 전공이든 공부하다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릴지도 모른다. 머리 나쁜 내가 서하림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과 열성이 그 정도로 어마어마하단 얘기다. 지금보다 더 힘들고 지칠 것이다. 과제 하다 또는 시험공부하다 뇌혈관이 터져 죽는다고 해도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할 거다.
내가 얼마나 괴롭고 처절하게 공부하는지 세상 그 누구도 몰랐다. 의사나 서하림에게 얘기한 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걸 넘어서 끔찍하기까지 한 공부와 성적은 내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만큼 집착의 강도도 어마어마했다.
배움은 평생이라지만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잘못됐다가 미끄러지면 서하림과도 안녕이 될 테니까.
“……그냥 싫어요. 선생님 고3 전담이라면서요. 저는 공대 아님 가기 싫고 전과도 복수 전공도 싫고요. 장학금도 웬만하면 포기하기 싫으니까 선생님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좀 생각해 보고 알려주세요.”
“다른 고3 반 선생님들한테 물어봐라. 나랑 다른 대답 나오나.”
엄마한테 장학금 다 받아 놨다고 떵떵거려 놔서 엄마한테도 손 벌리기 싫다. 어차피 엄마가 비행기 타고 출국한 순간 내 인생에서도 출타시켜 드렸고 아빠야 뭐 말할 가치도 없다.
나는 알고 있는 선배나 형 누나가 없어 대학 생활을 정확히 몰라 나름대로 세운 계획은 어딘가 어설프고 이상할 거였다. 과외 쌤에게 물어보기엔 왜인지 자존심이 상했고 그렇다면 남은 건 담임선생님뿐이었다.
“그래도 좀 더 알아봐 주세요. 일단 저는 성적이 괜찮잖아요. 그럼 저 갈게요. 주말 잘 보내세요.”
선생님에게서 어차피 똑같다는 말이 다시 한번 나올까 봐 서둘러 나왔지만 선생님은 뭐라 말을 더 하지도 나를 잡지도 않았다. 허겁지겁 신관 건물을 빠져나온 뒤에야 노련한 어른이 바르게 제시한 여러 가지의 선택지를 어리광부리며 거부한 것이란 걸 깨달았다.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다는 것도.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나. 멍청이도 이런 멍청이가 없다.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탈까 하다가 내가 과연 버스비를 내도 될 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싶어 관뒀다.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는 것도 사치였다. 내 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은 운동화도 아까웠다.
아직도 하림이는 내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손이 떨려 오타가 가득한 메시지들이 흉하다.
그냥 죽을까.
차도에 뛰어들어 차에 치이는 것과 육교에서 떨어져 차에 치이는 것 중에 뭐가 더 덜 아프게 죽을 수 있을지를 가늠했다. 나중에 하림이 죽고 나면 따라 죽을 생각이었는데 장학금 얘기가 나름 충격은 충격이었는지 집에 가는 내내 전봇대에 머리 박는 상상이 들었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학자금 대출’을 검색하다 어느 드라마 주인공의 ‘통장이 텅장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글을 봤다. 스펙왕 주인공이 신입 사원 치고 적지 않은 월급을 받았는데 이런저런 항목들로 돈이 거의 다 빠져나갔고 그중에는 학자금 대출도 있었다.
대출이자도 눈에 띄었다. 엄마고 아빠고 내 인생에 없는 사람이라 치고 살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나도 앞으로 은행에 대출을 받을 일도 많을 거고 그럼 대출이자도 내가 나중에 월급을 받으면 빠져나갈 돈일 테니까.
이래서 공대를 가고 싶은 거다. 돈을 진짜 진짜 많이 벌고 싶다. 대학 졸업하기 전에 취직해서 최대한 빨리 돈을 벌고 싶다. 가끔 스무 살 되자마자 매주 복권을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요행보단 내 머리를 믿는 게 돈 모으기 더 빠를 것 같았다.
진흙탕 같은 현실에서 어떻게든 탈출해 보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때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들. 오랜만이야.”
노크도 없이 벌컥벌컥 여는 게 아주 집주인 나셨다. 아빠는 배고프다며 밥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냉장고에 밥이랑 국이랑 반찬 아직 있을 텐데 왜 지랄인지.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어.”
“그거야 네가 없을 때 얘기고.”
갓 지은 밥을 먹고 싶으시다? 안 그래도 기분 좆 구린데 프라이팬으로 지 대가리나 안 치면 다행인 걸 아빠는 모를 것이다.
“시발 존나 귀찮게 구네.”
“뭐라고?”
“지금 쌀이 괜찮게 있네, 라고 했는데.”
“그러냐? 30분이면 다 되지? 씻고 나올 때까지 차려놔.”
샤워하다 미끄러져서 머리 박고 뒤졌으면. 밥 새로 하기 귀찮아서 냉동 밥 전자레인지에 돌린 걸 그냥 밥솥에 쏟아붓고 약불을 켰다. 어차피 요리는 좆도 모르는 새끼라 대충 밥솥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고 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면 밥을 지은 줄 알 새끼다.
국만 콩나물국으로 새로 끓였다. 깨끗한 수돗물을 사용하는 대신 주방 행주 씻은 걸 썼다. 침을 열심히 뱉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찬들은 몇 개 꺼내 다시 볶았다.
상 차려놓기가 무섭게 샤워를 마친 아빠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밥상에 앉았다. 아무래도 화장실 바닥에 린스 칠을 해놓든가 샴푸를 뿌려놓든가 해야겠다.
죽지도 않고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한심하기 짝이 없어 고개가 절로 흔들렸다.
“아빠.”
“왜.”
“돈 모아놓은 거 좀…… 있어?”
“뭔 돈? 사고 쳤어?”
돈 얘기에 그릇에 처박고 있던 얼굴을 번쩍 든다. 그놈의 돈을 아들에게 쓰기가 그렇게 싫은지 눈을 부라리며 성을 낸다.
“아니.”
“그럼 뭔데. 돈 없어.”
“…….”
“나 쓸 돈도 없다.”
“그러시겠지.”
“뭐?”
“됐어. 혹시 만에 하나라도 기대해 본 내가 병신이지.”
“병신? 그래 이 새끼야. 아빠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어?”
머리를 향해 손이 날아왔지만 피하지 않았다. 퍽 하는 소리가 꽤 컸다. 아 의사가 머리 조심하라고 그랬는데.
“내가 로또에 당첨돼도 너한테는 한 푼도 안 줘. 알아?”
그냥 가만히 듣고 적당히 맞아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화가 일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된다고 해도 나한테…… 천 원 한 장조차 베풀기가 싫다고.
“왜 안 줘. 줘야지.”
“뭐야?”
“내가 아빠를 낳길 했어 아니면 키우길 했어. 얻어맞으면서 밥 꼬박꼬박 차려주고 집안일도 다 해주는데 돈을 안 주길 왜 안 줘?”
“이 새끼가 지금 또 뭐라고 하는 거냐?”
아빠는 당장에라도 밥상을 엎을 기세로 두 손을 밥상 아래로 내렸다. 나는 작게 비웃으며 밥상 위에 손을 올렸다. 순간 아빠가 힘을 주며 밥상을 들어 올렸지만 내가 누르고 있어 움찔거리는 게 다였다. 밥상 다리가 바닥에 끌리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줬던 건 설마 벌써 다 썼어? 몇 달 있으면 대학교 예치금도 내고 등록금도 내야 하는데 아빠라는 사람이 모아놓은 돈도 없고 참 자랑이다.”
“이 씨발 새끼가!”
밥그릇을 잡고 벌떡 일어난 아빠가 내게 그릇을 던졌다. 첫 번째 그릇은 잘 피했고 두 번째 그릇은 피한다고 피했는데 코를 맞아 코피가 터져 흘렀다. 코를 틀어막으며 나도 공격 태세를 취했다.
“코뼈 부러졌으면 상해죄로 고소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해봐. 누가 겁낼 줄 알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아빠를 협박하고 지랄이야? 고소는 아무나 하냐?”
“요즘은 고소 개나 소나 다 해. 게다가 내가 미성년자라 국선 변호사가 함께 법정 가줄걸.”
내 말에 아빠가 반찬이 담긴 그릇을 던지려는 순간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알람음과 진동이 울렸다.
“잠깐만!”
나는 아빠의 손에서 그릇을 뺏어 밥상 위에 내려놓았다.
[??〉
[??〉
[미안 늦게 확인했는데〉
[뭔일이야?〉
[지금 과외 끝남〉
[뭐임?? 뭔데??〉
[왜 좆된건데??〉
이제 아빠가 할 몫은 다 했다. 하림이한테 연락이 왔으니 아빠에게 향하던 분노가 쓸모없어졌다. 다만 근본적인 비참함만 낮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다행히 코뼈는 안 부러진 거 같고. 아빠, 나중에 한 푼이라도 용돈 받고 싶으면 돈 좀 모아놔. 투자를 좀 하라고. 머리가 있으면 생각 좀 해. 똑똑한 아들 뒀다 뭐 해? 나 돈 존나 많이 벌 거야. 그러려고 피 터지게 공부하는 거고.”
“지금 네 아빠 무식하다고 욕하는.”
“욕하는 거 아니고 사실을 말하는 거잖아.”
신나게 던져대느라 깨진 그릇들을 조심스럽게 쓸어모았다. 시발 이래서 뭐 집에 남아나는 게 있겠나. 천원숍이 없었다면 우리 집은 진작에 허허벌판이 됐을 거다. 벚꽃 피는 시즌이라 벚꽃 에디션을 한창 팔고 있던데 식기도 포함되어 있으려나.
욕을 하며 나보고 죽으라는 아빠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대충 정리해서 아빠가 나중에 아주 작은 그릇 파편을 밟게 만들까.
만약 합격 발표 나서도 진짜로 돈도 하나도 모아 놓지 않은 상태면 최후의 방법이라 쓰긴 싫지만 서하림 아줌마한테 연락을…… 해야겠지. 미성년자라 은행에서 등록금이든 생활비든 대출을 받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집구석에서 탈출할 때까지 1년도 남지 않았다. 열 달만 참으면 된다, 열 달만.
“알았어. 알았고, 나 호로 새끼에 싸가지없는 새끼야. 됐지? 다시 밥상 차려 줄 테니까 좀 앉아 있어.”
몇 개 남지 않은 접시를 새로 꺼내서 음식을 담고 밥상에 올리고. 우악스럽게 밥을 처먹는 모습이 징그러웠지만 외면한 채 마저 바닥을 정리했다.
[나올래?〉
[집 앞에 놀이터에서 기다릴게〉
행복하다. 아빠가 온 바닥에 피칠갑을 해놨어도 즐겁게 정리할 수 있었다. 깨진 그릇에 손도 좀 베였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택시를 타고 하림이네로 왔다. 나는 하림이가 온다면 하루, 한 달, 일 년을 같은 장소에서 행복하게 기다릴 수 있지만 하림이에게 기다림이라는 외로운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나쁜 건 모두 서하림을 피해갔으면 좋겠다.
D동 앞 놀이터는 D동에서 조금 떨어져 사실상 C동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 아무튼 놀이터라는 귀엽고도 낭만적인 장소에서 서하림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심장이 너무 뛰어 아파왔다.
그네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는 하림이의 동그란 머리통과 곧은 등이 보였다. 서울의 밤은 너무도 밝아 별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서하림이 수억 개의 빛나는 별들보다 더 귀하고 밝은 존재라 괜찮았다.
발소리를 죽여 천천히 다가갔다.
“하림아.”
“아, 깜짝아!”
“놀랐어?”
“심장 지금 바닥까지 내려갔다 올라왔어. 죽고 싶냐?”
“응.”
“…….”
응 죽여줘. 하림이 입에서 죽고 싶냐는 소리가 나오면 나는 마냥 좋았다. 하림이 손에 죽는 것만큼 내가 원하는 죽음도 없어서. 그래서 죽겠냐는 말에 빈말로라도 아니라는 말은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얼굴은 또 왜 그래.”
“누구겠어. 안 부러졌으니까 걱정 마. 코피만 좀 났어.”
“됐고, 뭐가 좆 된 건데?”
나는 하림이에게 예고 애한테 들은 거, 담임선생님과 이야기한 것들을 얘기했다. 하림이는 살살 그네를 타면서 진지한 얼굴로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진짜 좆 됐네.”
“응.”
“난 네가 좆 됐다길래 너네 아빠가 집에 불이라도 지른 줄 알았어. 아니면 누구 죽였든가. 뭐가 됐든 다 좆같은 상황이네.”
아, 시간을 지하철 타던 순간으로 돌리고 싶다. 메시지 보낼 때 좆 됐다고 하지 말고 그냥 선생님한테 말한 것처럼 큰일 났다고 보낼걸. 하림이가 자꾸 좆좆거리니까…….
“음. 너는 대체 왜 공대 가고 싶어?”
하림이가 발을 크게 굴려 그네를 탔다. 포물선이 시원하게 그려졌다.
“……그냥.”
돈 많이 벌면 아빠 새끼 없이 살 수 있고 돈이라도 많아야 네가 뭘 하든 따라다닐 수 있을 거 같아서. 따라다닐 때 꿀릴 거 같지 않아서. 꿀리지도, 다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네가 하고 싶은 거에 도움 되고 싶어서. 그러려면 그냥 막연히 공대 가면 취직도 잘되고 돈도 잘 벌 거 같으니까. 그래서 가고 싶어.
“그으냥? 그럼 과는? 공대에 과 여러 개 있잖아. 글고 보니 지금까지 너 공대 가고 싶단 것만 알았지 정확히 어떤 공댄지를 안 물어봤네.”
공대에 무슨 과가 있는지 잘 모른다. 대충 원서 시즌 되면 살펴보긴 하겠지만 큰일이 없다면 공대에서 취업률 제일 높다는 전기, 화학, 기계 중 하나 쓰겠거니 하고 있다.
그것보다, 하림이가 내게 관심을 가져주는 게 너무 좋아서 손바닥에 자꾸만 땀이 났다. 침이 엄청 나와 삼키는 소리가 크게 났다.
“아마도…… 기계.”
“기계공학이면 로봇 같은 거 만드나?”
“몰라.”
“근데 왜 가려고 하는데? 설마 또 그냥?”
“응. 그냥.”
실없이 웃는 소리가 저 멀리서 이 앞까지 포물선으로 이어졌다.
몇 번 더 힘차게 발을 구르던 서하림은 이내 곧 발에 힘을 뺐다. 앞뒤로 움직이던 그네는 점점 힘을 잃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완전히 그네가 멈추고 나서도 서하림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하림은 운동화 코를 부딪치며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고 나는 그걸 바라볼 뿐이었다.
“결정은 네가 하겠지만 내 생각엔 별 이유도 없는데 굳이 장학금도 포기해 가면서 공대 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 등록금이 얼만지는 모르지만 싸진 않을 거 아냐. 뉴스에도 맨날 등록금 비싸단 얘기 나오고. 원서 쓸 때까진 시간 좀 있으니까 잘 생각해 봐.”
“…….”
“그리고 복전도 괜찮은 거 같은 게, 뭔가 멋있지 않아? 문학 하는 공대남. 숫자로 이루어진 삭막한 이공계의 세상 속에 문학이 봄비를 내려 꽃을 피우는 거지. 1+1이 2가 되는 걸 온갖 수학 공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1+1은 2가 아닐 때도 있다면서 막 시적으로 표현하고 그런 거.”
“뭐야 그게. 1+1이 왜 2가 아니게 되는데?”
“사람 한 명이 가진 사랑이란 감정을 1이라 가정하면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사랑이 두 개가 되니……까? 근데 사랑이란 감정의 용량 1이 싸우면 0.7이 될 수도 있고 이벤트 같은 거 하면 1.5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나름 열심히 설명하는 천생 이과 서하림의 설명을 들으니 웃음이 터졌다. 하림이는 음악도 그림도 어느 정도 수학적인 비율이나 과학적인 증명에 따른 아름다움을 느끼는 애였다. 난 예술에 문외한이라 잘은 모르지만 황금 비율이나 원근법, 구도, 배치, 색채 심리나 화음, 화성 뭐 이런 것들.
“아 왜. 왜 웃어.”
“백일장에서 그렇게 쓰면 바로 쓰레기통행임.”
“하…… 글 써서 상 쓸어 담는 사람 얘기라 뭐라 반박을 못 하겠네.”
그네에서 일어나 하림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글거리는 내 눈동자를 하림이도 느꼈을 것이다. 그넷줄을 쥔 내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밖이야 여기.”
“알아.”
나는 잠시 하림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잡고 일어나 놀이터 한쪽에 있는 통나무집으로 들어갔다. 어린이 사이즈라 높이가 아주 낮았지만 지붕이 있고 벽이 있어 사방이 막혀 있었다. 여기서 노는 애들을 본 적이 없는데 누가 놀긴 놀았는지 모래가 쌓여 있어 흙냄새가 났다.
“1+1=2라는 간단한 수식이 시가 되려면.”
“…….”
“1이나 2 같은 숫자가 아니라 기호에 주목해야지. 문학은 늘, 주인공이 아닌 거 남들 눈에 잘 띄지 않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걸 쓰는 거야.”
그래서 내가 글 쓰는 재능이 조금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빛나는 서하림 옆에 있는지도 모를 애니까.
하림이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입속에 고인 침을 삼켰다.
“1+1이 2가 될 수 없는 건.”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서하림은 내 입술을 보다가 천천히 눈을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ㄷ 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통나무집은 어두웠지만 내 등 뒤에서 밝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 덕분에 하림이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더하기가, 2 속에 함께하기 때문이야.”
오랜만에 맛보는 입술을 가르며 말랑한 혀를 건드렸다. 다리 사이가 찌릿했고 머릿속은 온통 축제였다.
하림이가 조언을 해줬으니 들어야겠지. 이과 머리에 문과 심장을 가진 게 멋있다고 하니까. 서하림처럼 완벽하고 근사한 왕자님은 못 되더라도 나름대론 서하림 눈엔 멋있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하림이에게 반해 영혼까지 홀려버린 듯이 서하림도 그랬으면.
마음 아프다. 잘난 게 없는 건 이렇게 또 서러웠다.
눈만 감아도 하림이의 몸이 떠오른다. 그건 가슴팍일 때도 있고 목덜미일 때도 있고 다리 안쪽 여린 속살이거나 혹은 예쁜 엉덩이 사이일 때도 있었다. 그냥 기억을 끄집어내는 수준을 넘어서 마치 하림이가 눈앞에 있는 듯, 아주 선명했고 사실적이었다. 침대에 누워 하림이의 몸을 탐닉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을 허공에 뻗을 정도였다.
기억은 자꾸 꺼내면 꺼낼수록 조금씩 변화하고 미화된다지만 내 취향에 맞게 변화하고 미화될수록 하림이를 곱씹는 내게는 더 좋은 일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하림이를 건들지 말자고 스스로 약속했으니 닳고 닳은 상상 정도로 끝내는 게 양반이지 않은가. 하림이랑 밤새 섹스하다 아침 해를 맞이하고, 하림이 안에 실컷 싸지른 상태 그대로 빼지 않고 둘이 까무룩 잠들었다가 오후 늦게 일어나선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하림이 안에 볼일 보는 게 소원 중 하나다. 참다 폭발해서 아직 싫단 애한테 일 저지르는 것보단 훨씬 낫다.
우리는 중간고사를 앞두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내내 따로 공부하다가 이렇게 다시 과외 선생님, 서하림과 이렇게 셋이 앉아 있으니 마치 시간이 작년 이맘때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대치동에서 유명한 선생님이라도 자기랑 안 맞으면 칼같이 갈아치우는 서하림이 고3이 되었어도 과외 선생님을 바꾸지 않은 걸 보니 이 선생님과 상성이 꽤 잘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설명만 제대로 해주는 사람이라면 선생님이 누구든 상관없는 편이었다. 전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공부 봐줬을 때도 그분들은 선생님이 아니라 가르치는 건 좀 어설펐지만 알아듣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입원했을 때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 함께했던 선생님도 이모님이 급하게 임시방편으로 붙여준 것치곤 뭐 나쁘지 않았고.
이모님이 그렇게 모시기 어렵다고 했던 이 과외 선생님은 우리 대학 합격까지 봐준다고 했으니까 하림이랑 상성이 맞는 분이라면 내 쪽에서 환영이었다.
공부하다 눈이 피로해지거나 머리가 아파 쉴 땐 하림이 가지고 온갖 상상을 펼쳐보는데 그러다 못 참을 때면 손을 뻗어 하림이의 손을 잡았다. 하림이는 손을 빼지도 그렇다고 맞잡아 오지도 않았지만 내가 깍지를 껴 더 손을 얽어도 싫어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림이 손을 잡고 다른 생각하며 진정하면 공부하고, 공부하다 또 흥분하면 하림이 손 잡았다가 그래도 진정이 안 되면 입술을 비벼댔다.
“문제 풀고 있을 땐 하지 말라 그랬지.”
“미안. 근데 참을 수가 없었어.”
다시 입술을 붙이고 혀를 빨아대면서 하림이가 쥐고 있던 샤프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심심해진 손이 주먹을 쥐는 게 보였다. 하림이의 두 손을 끌어 내 뒷목을 안게 했다.
“……문은.”
그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술을 떼더니 물어온다. 문을 잠그지 않은 게 생각나 급하게 몸을 돌렸다. 잠금 버튼을 누르고 돌아와 하림이의 턱을 잡았다. 다급하게 들어오는 혀에 하림이가 당황하는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이 정도도 안 했다간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하림이의 두 손은 의자 팔걸이 위에 올려져 있다. 그 위에 내 손을 올려 덮었다. 동그랗게 말아 쥔 양손이 귀여웠다. 사실 한 손은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내 것을 만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키스하고 화장실 가서 두 번 빼고 와야지. 성욕보단 좀 더 순수함에 가까운 애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으니까.
순수함이라니. 그닥 자신은 없었지만 별수 있나. 하림이가 그런 연애를 원한다는데.
학교에서도 전보다는 얘기하는 일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가고 싶은 학교가 같은 곳이다 보니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이 우리 둘을 묶어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학교는 의대 진학률이 엄청 높고 전통적으로 정시에 강한 학교라 S대 합격생이 수시보다 정시가 훨씬 많은데 가뜩이나 작년에 수시로 겨우 한 명 붙어서 올해 선생님들이 서하림과 나에게 기대하는 게 컸다. 우리 둘 말고도 세 명 정도 더 기대주가 있다고 알고 있다.
아무튼 학교 가면 딱히 입을 열 일조차 없던 나는 요즘 학교 가는 일이 즐겁고 행복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급식 식단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다른 애들처럼 내가 좋아하는 게 나오나 안 나오나 체크하는 게 아니라 하림이가 싫어하는 게 나오는지 보는 거였다.
오늘의 식단은 김치볶음밥, 국 대신 통 그릴 소시지, 잡채, 꿔바로우, 김치, 요거트.
급식으로 카레, 하이라이스, 짜장밥, 볶음밥 이런 거 나오면 서하림은 반만 먹는 편이고 잡채는 좋아하지만 급식으로 나오면 좀 부는 데다가 꿔바로우도 갓 튀긴 게 아니라 눅눅할 테고, 요거트는 새콤한 건 하림이가 별로 좋아하질 않기 때문에 오늘은 빵점짜리 식단이다.
전체적으로 기름지고 그만큼 맛있는 날이었다. 늦게 가면 꿔바로우는 없겠군.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나야 양만 많으면 꿀꿀이죽을 주든 음식물 쓰레기 같은 주먹밥을 주든 상관없는데 하림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점심 빨리 먹고 밖에 나갔다 와야 해서 간만에 급식실에 엄청 빨리 들어갔다. 보통은 사람 많은 게 싫어서 좀 천천히 가곤 했다.
애들 사이에 빡빡하게 껴 있는 건 불쾌한 일이다. 아니 밥 먹으러 학교 오나. 남학생 줄은 앞이고 뒤고 사방팔방에서 밀어대느라 욕도 많이 들렸고 짜증도 났다. 많이 먹는 내 얼굴을 아는 급식실 직원이 밥을 한가득 퍼줘서 다행이지 그거 아니었으면 밥 먹는 내내 욕하면서 먹었을 거다.
밥 비우기가 무섭게 교무실로 뛰어가 외출증을 받았다. 내가 거의 초반에 급식실을 들어갔으니 아직 서하림은 밥을 먹는 중일 거였다. 볼일은 편의점에 있지만 시간을 죽이기 위해 서점에 들어가 괜히 책이나 문제집 따위를 뒤적거렸다.
한 30분쯤 그렇게 시간을 보낸 다음 학교 앞 편의점에 들러 라지 사이즈 얼음 컵과 뚱 캔 콜라를 샀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가 좋았다. 빨대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운동장에도 급식실에도 서하림은 없었다. 그렇다면 교실에 있을 것이다. 나는 한달음에 뛰어가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교실로 향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가슴 떨릴 일인가. 온갖 거 만들어 바치는 건 늘 있는 일인데 이렇게 뭘 사와서 챙겨주는 건 좀 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깜짝 이벤트 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팔불출 같은 느낌도 난다. 아니 팔불출 같은 게 아니라 팔불출은 맞지. 아무튼 그냥 좀 세상에 연애하는 인구가 수억 명은 될 텐데 나 혼자만 유난 떠는 거 같아서 간지럽고 부끄럽고 그랬다.
교실 앞에서 괜히 걸음을 멈추고 바스락거리는 비닐을 한껏 구겼다. 시발. 고백 편지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냐.
서하림은 책상 위에 앉아 친구들과 얘기 중이었다. 나는 서하림에게서 떨어져 있는 내 책상 위에 비닐봉지를 올려두고 안경닦이를 꺼내 안경을 닦았다. 언제 말을 걸면 좋을까. 얼음 녹으니까 되도록 빨리 주고 싶은데. 서하림 지금 목타서 아이스 콜라가 절실할 거다. 이미 다 닦아 깨끗하다 못해 정전기가 날 것 같은 안경을 다시 꼼꼼히 닦고 썼다.
내가 다가가자 서하림은 친구들을 보던 시선을 자연스럽게 내게도 돌리면서 대화의 흐름이 끊기지 않게 했다. 나는 들고 있는 봉지를 흔들며 ‘줄 거 있어’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서하림은 친구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고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른 애들은 처음에만 나와 봉지를 힐끔거렸을 뿐 서하림이 내게 별말이 없자 내게 집중하진 않았다.
“헐. 대박 고마워!”
서하림의 대화가 정확히 내게로 향했다. 나는 어깨만 으쓱하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야 뭔데? 콜라?”
“저걸 쟤가 왜 사와?”
“너 몰라? 서하림 양아치잖아.”
빵셔틀 달고 다닌다고 일진이라느니 어쩌니 하며 자기들끼리 웃고 난리가 났다. 서하림은 그런 거 아니라고 하면서 얼음 컵을 열어 속 비닐을 살짝만 떼어내 컵 아래에 고여 있는 녹은 물들을 창문 밖으로 버렸다.
얼음밖에 남지 않은 컵을 45도로 기울여 콜라를 조심스럽게 따른다. 누가 맥주 따르냐고 웃었지만 최대한 탄산이 빠지지 않게 하려는 하림이는 진지했다.
“아우, 살 거 같다!”
“할아버지냐? 존나 웃겨!”
“미친놈. 나도 콜라 좀.”
“아 싫어, 사다 먹어.”
맵고 시고 짜고 단 것, 식감이 이상하거나 향이 강한 것들, MSG 맛이 팍팍 느껴지는 건 잘 먹지 않는 서하림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몸에 안 좋은 음식이 바로 콜라였다. 음식보단 음료지만 아무튼.
피자나 햄버거는 아주머니가 만들어준 핸드메이드만 먹고 길거리에 파는 닭강정, 소시지, 어묵, 회오리 감자 이런 거 웬만하면 절대 안 먹는다. 다 손수 만들어줘야 먹었다. 치킨도 먹겠다고 하면 집에서 깨끗한 기름으로 갓 튀긴 것이어야 했고 양념치킨 소스도 제 입맛 맞춰서 만든 걸 먹었다.
감자튀김이나 떡볶이도. 전에 떡꼬치를 해준 적이 있는데 생각 없이 마트에서 산 걸로 만들었다가 소스부터 인터넷을 뒤져 새롭게 만든 적이 있다.
내 입에는 사이다나 콜라나 똑같이 단 탄산음룐데 서하림은 콜라만 무척 좋아했고 그냥 캔 따서 마시는 게 아니라 꼭 얼음과 함께 마셨다. 냉장고에 하루 종일 넣어 놔서 시원한 콜라여도 얼음과 먹어야 한단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프로즌 콜라는 또 안 된다. 왜냐면 탄산이 빠져서.
어떻게 보면 진짜 까다롭고 손 많이 가는 식성이지만 그만큼 내가 해야 할 게 많단 얘기와 같았다. 서하림 부모님은 물론이고 이모님, 아주머니까지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하림이의 저 까다로운 식성을 내가 다 알고 있단 데서 오는 희열감도 장난 없고.
“언제부터 이렇게 친해졌어?”
“쟤네 원래 초등학교 때부터 알았어. 2학년인가 3학년인가.”
“아니 요즘 좀…… 부쩍 친해진 거 같아서 물어본 거임.”
“왜, 서하림이랑 쟤랑 같이 공부하잖아. 맨날 둘이 1등 2등 하는 거 보면 모르냐?”
“헐 진짜? 어디서? 학원? 과외?”
“그냥 우리 집에서 과외.”
서하림은 곧바로 화제를 돌려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서하림 친구들이 나에 대해 좀 더 물어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이미 대화의 방향이 딴 데로 튀어버린 뒤였다. 내가 다른 애들에게 관심받는 걸 싫어하는 서하림의 배려였다. 콜라 사왔다고 이렇게 예쁜 짓을 하다니. 지금까지 학교에서 일부러 거리를 뒀던 건 이렇게 될까 봐 그런 거였다.
다음에 콜라 사 올 땐 슬쩍 가방에 넣어놓거나 따로 불러서 줘야겠다. 근데 그러면 좀 얼음이 녹지 않나? 그럼 보냉 되는 텀블러를 사놓는 게 좋을 거 같다. 얼음을 거기다 옮겨놓으면 잘 안 녹겠지. 바로 휴대폰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간간이 서하림 목소리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중간고사가 끝났는데도 하교하는 길은 서하림과 함께였다. 학생 중 절반은 야자를 하거나 방과 후 수업을 듣는데 서하림과 나는 아니어서. 나머지 절반은 학원을 가지만 이 역시 서하림과 나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는 서하림과 나를 보는 학생들의 웅성거림은 이제 익숙해진 것이었다. 가끔 서하림 친구들이 서하림이랑 얘기할 땐 내가 두 걸음 정도 떨어져 하림이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이제 서하림과 함께하는 하굣길이 익숙한데 왜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신경 쓰는 건지 진짜 모를 일이었다.
“나 어제 할아버지한테 전화 왔다.”
“엄마 쪽? 아니면 아빠 쪽?”
“엄마네 아빠.”
서하림의 외가는 의대에 대형 병원을 네 개나 가지고 있는 의료 재단으로, 할아버지가 이사장이고 할머니도 어디 대학교 간호학과 교수였다. 할아버지는 사위인 서하림 아빠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서하림네 아저씨는 그냥 공무원 부부 아래에서 태어난 중산층의 평범남이라 할아버지 마음에 안 찼다고 했다. 남자가 야망도 없고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매가리 없이 맹탕한 것도 싫다는 것 같다. 결혼 반대를 그렇게 했었는데 서하림 아줌마가 밀어붙였고 결과는 결혼에 성공, 토끼 같은 예쁜 서하림이 태어났다.
“시험 잘 봤냐고? 성적표 나오기가 무섭게 전화하셨네.”
“그것도 그거고 기말고사 보고 나면 고생했다고 놀러 오래.”
딱 한 번 서하림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서하림네서 공부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행차하셨다. 원래는 건강 때문에 경기돈지 강원돈지 어디 서울 아닌 곳에서 지내는데 이 근처에 볼 일 있어 왔다가 장손 생각나서 왔다고 했다. 공부하다가 허겁지겁 인사하고 그날 공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하림이가 할아버지한테 시험이 코앞이라 다시 공부하고 싶다고 했는데 굳이 굳이 손주랑 저녁을 먹고 싶다면서 날 내쫓던 심보 고약한 노인네였던 걸 분명히 기억한다.
“기말고사 언젠지 날짜도 다 알고 있으신 분 아냐? 수시 일정도 꿰고 계실 거 같은데.”
“그럴걸. 아 근데 나 내일부터 수목금 약속 있어. 학교 끝나고.”
“그래?”
“응. 누구 만나야 돼.”
“누구?”
“친구들.”
“그러니까 누구.”
“서하늘이랑 7반 애.”
“7반 누구.”
“이건운데 알아?”
“……아니.”
“뭐야.”
아 지금 거는 좀 과했다. 즐거운 하교 시간을 방해한 새끼 이름이 궁금했던 것뿐인데.
서하늘은 서하림의 동갑 사촌 누나고 이건우는 모르는 애다. 서하림이 이름도 모르는 영재원 애랑 붙어서 괜히 얼굴 팔리는 일을 해서 그런가 좀 예민하게 반응했다.
“뭐…… 하는지 물어봐도 돼?”
“그냥 별거 아냐. 고민 상담.”
“서하늘이?”
나는 잠시 서하림보다 생일이 몇 달 빠르다는 서하늘을 떠올렸다. 동갑이지만 가족들 모인 곳에서는 서하림이 누나라고 부른다던, 나도 얘기는 많이 나눠본 적 없지만 머리 좋고 성격 똑 부러지고 할 말 다 하고 쿨한 데다 시니컬한데 웃기기도 좀 웃긴 애다. 욕도 잘하고 좋아하는 연예인도 열심히 팬질하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고.
남자애들은 드세다고 싫어하던데 내가 보기엔 뒤에서 드세네 무섭네 하는 남자 새끼들이 찌질한 거고 그냥 걔도 서하림처럼 멋진 애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사랑 많이 받고 모자란 거 없이 자란 거 잘 느껴지는 그런 애.
단지 여자들은 육감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서하늘과도 같은 초등학교여서 그때부터 알았는데 가끔 서하늘과 얘기할 때면 걔가 내 속을 훤히 보는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좋은 애인 건 아는데 그거랑 별개로 그냥 가까이하고 싶진 않았다. 가끔 좀 귀찮게 군 적도 있었다.
“걔가 너한테 고민 상담할 게 있어?”
세상 즐겁게 사는 애라 고민이라고 해봤자 좋아하는 아이돌에 관한 거밖엔 없을 거 같은데.
“아니. 나랑 서하늘이 이건우 고민 상담해 주는 거. 근데 사실 나는 하루면 될 거 같은데 걔가 하루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3일이나 얘기하자 그래서.”
“좋아하는 애 때문에 공부가 안 된대?”
“아니. 나도 정확히는 몰라. 내일 돼야 알아. 성적은 좋지. 너, 나, 서하늘, 이건우 다 같은 학교 생각하잖아.”
서하늘이 고등학교 올라와 10등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운지 김건운지는 내가 알 반가.
“내일부터 심심하겠네, 집 가는 길.”
“심심할 게 뭐 있어.”
학교에서 네 발로 기어가도 20분을 넘지 않을 서하림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방에 들어갔다.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서하림네 집안일을 책임지는 아주머님은 이 집에 입주한 가정부지만 종종 자녀들 일로 휴가를 쓰는 일이 있다. 오늘처럼.
정기 휴가 말고도 이모님이나 서하림 부모님이나 가족 일이면 편하게 휴가를 써도 된다고 하는 데다가 아주머니만큼 요리 잘하는 내가 있어서 아주머니도 비교적 쉽게 휴가를 냈다. 오늘은 친정어머니 생일이라고 했다.
초반에는 내가 저녁을 대신하면 된다는 이모님 말에 아주머니가 어떻게 하림이 친구인 데다가 학생인 나에게 저녁을 하게 하냐고 질색하더니 저녁 하는 아주머니 옆에서 보조하며 난이도 높은 것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걸 보고 이제는 한식 자격증 따보라는 농담도 한다.
서하림에게 내가 만든 요리를 먹게 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집에 둘만 있고 싶을 때를 대비해 밑밥을 깔아둔 것도 없잖아 있었다. 오늘 밤은 집에 가보셔도 괜찮아요, 뭐 그런 거.
커다란 냉장고에서 꺼낸 재료들을 열심히 손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정신이 없는 것까진 아니고 하림이 하나만 먹이면 상관없는데 하림이네 부모님도 먹어야 하니까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전엔 아주머니가 미안하다고 재료들을 죄다 손질해놓거나 데우기만 하면 될 정도로 음식들을 거의 다 만들어 놓고 갔었다. 근데 나는 재료 손질도 요리에 포함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중하게 재료만 사와 놓음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말씀드렸고 그 이후론 아주머니도 내게 별 터치가 없었다.
“야 주방에서 요리할 거면 앞치마 해.”
하림이가 꽃게 튀김 먹고 싶다 그래서 열심히 꽃게 손질을 하고 있는데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하늘이었다.
“앞치마 하든 안 하든 똑같은데.”
“하면 위생상 좀 더 좋아 보이지 않아?”
앞치마라도 좀 주고 얘길 하던가.
“아주머니가 쓰는 건 작아서 나한테 안 맞아.”
“아 그러네. 그렇겠네. 쏘리!”
다시 꽃게 손질에 집중했다. 빡빡 닦은 꽃게들을 절단하기 위해 중식도를 들었을 때였다.
“야 김동규, 나 해물파전 하나만 해줘.”
“뭐?”
“여기 냉동 해물 있는데 이걸로.”
“네가 해 먹어.”
“어차피 요리하는 김에 살짝만 하면 되잖아.”
“나 바빠.”
“아 존나 요리 그거 뭐 얼마나 바쁘다고? 좀 해주라, 응?”
나는 서하늘을 무시하고 꽃게들을 잘랐다. 계란 후라이도 못 할 애한테 요리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설명하기엔 내 입이 아팠다.
“야아, 서하림이랑 같이 먹을 거야. 걔도 지금 배고파서 뒤지겠대.”
“……진짜지.”
“그럼 구라겠어? 올라오는 김에 간식 가지고 오래. 나 방금 왔거든.”
서하늘은 이래서 좀 껄끄럽다. 내가 서하림한테 약한 거 뻔히 알아서 서하림 앞세워서 얘길 하는 경우가 있다. 하는 수 없이 밀가루, 부침가루, 튀김가루를 꺼냈다.
“금방 나오지? 여기서 기다렸다가 갖고 올라간다?”
식탁에 삐딱하게 앉아선 휴대폰을 꺼낸다.
“갑자기 왜 왔어?”
“아나 시발 묻지 마. 어제 오빠랑 존나 싸웠는데 집 가니까 ‘왔냐?’ 하고 인사하는 거 좆같아서 그대로 뒤돌아서 나온 거니까.”
하림이가 먹을 건데 냉동 해물 쓰긴 좀 그렇지 않나. 냉장고를 열어 해물 칸을 살폈다.
“말하니까 또 빡치네. 야 나보고 뭐라는지 알아? 지금 교생실습 중인데 요즘 애들 왜 이렇게 또라이 같냐고 하면서 지네 반 애들 이상한 거 얘기하더니 나도 학교에서 그렇게 지내냬. 미친 거 아님? 아직 선생님도 아니면서 나를 존나 하찮게 보는데 머리채 잡고 싸웠어.”
낙지가 있는데 오징어 말고 낙지를 넣어볼까. 해물파전 하면 오징어긴 한데 낙지가 상태가 좋아 보인다. 아주머니가 어제 사놓으셨나 본데.
“3년 내내 술 처먹고 다니느라 F 맞은 게 몇 개인지 내가 다 아는데 진짜 그딴 새끼가 내 호적 메이트라는 게 좆같아.”
그래도 역시 낙지보단 오징어겠지. 낙지를 다지듯이 썰어 놓고 새우 살과 조갯살들을 반으로 잘라 물기를 뺐다. 부추와 둥근 호박, 쪽파, 당근도 채 썰어 3cm 정도 길이로 잘랐다. 야채고 해물이고 물이 없어야 바삭바삭한 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물기를 쫙 빼는 걸 잊지 않았다.
밀가루와 부침가루, 튀김가루를 적당한 비율로 섞고 되직하게 만든 뒤 다진 마늘을 한 큰술 넣었다. 반죽에 다진 마늘을 넣으면 해물의 비린 맛을 잡아줬다.
“임용고시 망하라고 전날에 설사약 먹일 생각이야.”
팬에 기름을 두르고 충분히 달궜다. 반죽을 좀 넉넉히 붓고 동그랗게 폈다. 약불로 줄인 뒤 야채들과 해물을 올리고 반죽에 잘 붙게 눌러줬다. 이래야 뒤집을 때 안 떨어진다. 계란을 빠르게 풀어 파전 위에 얹었다. 냄새가 끝내줬다.
프라이팬을 흔들어 뒤집었다. 노릇노릇하게 색도 잘 나왔다. 완성된 파전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네모 모양이 되도록 잘랐다. 나는 잘린 가장자리를 먹으며 접시에 예쁘게 담았다. 그리고 새로 반죽을 부었다. 금세 한 판이 또 만들어지자 빠르게 잘라 마저 접시에 담은 뒤 쟁반에 올려 식탁에 앉아있는 서하늘에게 건넸다.
“와 냄새 존나 대박. 오늘 저녁 뭐야?”
“허브 꽃게 튀김이랑 수육이랑 겉절이랑 기타 등등. 아 잠깐만. 간장 만들어줄게. 30초만 기다려.”
파전에 찍어 먹으면 좋을 간장을 만들었다. 서하늘이 의자에 벗어둔 가방을 다시 메고 위층으로 사라졌다. 파전 재료들을 빠르게 정리하고 다시 저녁 준비에 돌입했다.
열심히 차린 저녁을 먹으며 서하림 아줌마와 아저씨는 나한테 시집오는 아가씨가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고 해줬고 하림이는 밥보다 꽃게 튀김을 더 많이 먹었으며 서하늘은 오빠 욕을 하느라 바빴다.
맛있게 잘 먹었다며 평소보다 배는 많이 먹은 것 같은 하림이에게 매실청을 타줬다. 많이 먹은 만큼 소화 잘되라고.
올해 체육대회는 3학년으로 참여해서 그런가 별 재미가 없다. 3학년이 참여 가능한 종목은 개인전이랑 이어달리긴데 애초에 3학년은 자율 참여라 참여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그냥 하루 종일 자유 시간을 갖다 보니 교실에서 내내 영화만 보는 애들도 있었다. 공부한단 애들을 위해 종일 야자실도 오픈이었다.
서하림은 작년에 이어 우리 팀 이어달리기 주자가 됐다. 개인전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교실에 붙어 있던 것도 아니다. 종일 이건운지 뭔지 하는 새끼랑 붙어서 과자를 까먹거나 콜라를 마시거나 했다.
지난주 수목금 3일을 내내 혼자 집에 간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이건우 이 씨발 놈은 벌써 이번 주도 서하림이랑 고민 상담을 해댔다.
이상한 건 서하늘은 지난주 3일만 같이 어울리고 이번 주는 빠졌다. 지금도 서하림과 이건우는 운동장 한쪽에 있는 등나무 아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 물고 뭔 얘기 중이고 서하늘은 교실에서 뭔 아이돌 콘서트 DVD를 보고 있는 중이다. 서하늘 찾아가서 고민 상담이 뭐냐고 물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곱게는 얘기 안 해줄 거라 접었다.
“나 오늘도 이건우랑 간다?”
간단하게 챙겨온 책가방을 챙기며 서하림이 말했다. 이미 복도에는 먼저 끝나 서하림을 기다리고 있는 이건우 면상이 보였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닌가.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것도 모자라 급식도 둘이 먹고 간식도 둘이 먹고 방금 종례 직전까지도 계속 얘기한 거 뻔히 아는데 또? 학교 끝나고 상담인지 뭔지 벌써 8일짼데?
아무리 심각한 고민이라도 내가 가진 고민보다는 별로 안 복잡할 고민일 텐데 이건우는 뭐가 그렇게 복잡하다고 자꾸 서하림을 가져가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좆같은 아빠가 있길 해 아니면 해외서 새 인생 사는 엄마가 있길 해?
나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서하림을 무시한 채 제일 먼저 교실을 나왔다. 멸치처럼 빼빼 마른 새끼가 뒤이어 나온 서하림을 불렀다. 저렇게 썩은 목소리로 서하림 이름을 부르는 것도 좆같다.
참다 참다 뭐라도 하나 부술 것 같아 걸음을 멈추고 이건우를 불렀다.
“야, 이건우.”
얼른 가자며 서하림을 재촉하는 이건우가 내 말에 깜짝 놀라며 “나?” 하고 되물었다.
“너 도대체 서하림이랑 뭔 얘기하는 건데? 무슨 얘기길래 바쁜 애 시간을 잡아먹고 그러냐?”
이건우는 다소 험악한 내 말에 눈치를 봤다. 복도로 쏟아져 나오는 애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야, 나 안 바빠.”
“그래. 내가 뭐 시간을 뺏어봤자 얼마나 뺏는다……고.”
“어얼, 건우건! 뭐 해 지금?”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을 것 같은 상황에 이건우는 말꼬리를 늘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지나가던 이건우의 친구들이 이건우를 발견하곤 이건우의 주변에 섰다.
“뭐야, 김동규랑 싸워?”
“안 싸워. 야 김동규, 빨리 이건우랑 얘기하고 집에 가게 너도 그냥 가.”
“그, 그래! 내가 얘랑 할 말이 있지 너랑 할 말이 있냐?”
이거 보게. 친구들 나타났다고 갑자기 의기양양해진 꼴이라니.
“얼마나 대단한 고민인지 모르겠는데 열흘 동안 결론 못 내린 거면 네가 병신인 거 아니야?”
“뭐라고?”
“야, 김동규.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제는 지나가던 애들이 다 걸음을 멈추고 우리 주변을 둘러쌌다. 선생님들이 무슨 일이냐며 왔지만 서하림과 이건우의 친구들이 별일 아니라며 둘러댔다. 마침 학생회장이 껴 있어서 선생님들이 싸우면 바로 교무실로 알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나도 그렇게 큰 소리를 낸 게 아니고 평소에 얌전히 학교를 잘 다녀서 그런가 선생님들이 주먹다짐만 하지 말라는 말도 했다.
“그렇게라니. 맞잖아.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좀 있으면 성인 되는 꼬추에 털 수북이 난 새끼가 자기 줏대도 없고 친구한테만 의지하는데 왜 사냐? 왜. 차라리 서하림보고 오늘 무슨 색 팬티 입을까도 고민이라며 아침마다 물어보지.”
“야, 김동규. 나랑 얘기 좀 해.”
서하림이 내 팔을 끌었지만 나는 바닥에 못이 박힌 듯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고민 상담?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 넘게 들어주는 게 어디 쉬워? 말은 안 해도 얘도 니 고민 존나 지루해 죽을걸.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우유부단한 니 모습 보고 한심하다고 생각 백 퍼 한다.”
내 말에 반박도 못 하고 째려보기만 하는 이건우가 우습다. 오히려 이건우 친구들이 나한테 말이 좀 심한 거 아니냐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야! 좋은 말 할 때 그만하고 나오라고.”
서하림이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나도 이쯤 했으면 그만 갈까 하고 발을 막 떼려던 참이었다.
“……야 김동규. 너야말로…… 네가 뭔데 이래?”
“뭐?”
“서하림이랑 초등학생 때부터 알았다고? 야 그렇게 따지면 나는 얘랑 네 발로 기어 다닐 때부터 친구였어. 그리고 뭐, 시, 시발 네가 뭘 알아? 내가 쟤랑 뭔 얘길 하든 뭔 상관이냐고!”
앵앵대는 목소리가 존나 웃겨서 웃음이 터졌다. 어디 더 말해보란 생각으로 팔짱을 꼈다.
“야 이건우, 너도 그만해. 둘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뭘 그만해. 쪼다 새끼가 나보고 병신이라 하는데 가만히 있어? 서하림 너도 닥쳐. 나만 처맞고 끝내면 억울하지.”
“됐고 그만하라고.”
학생회장이 이건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김동규, 야 니가 뭔데 날 병신 취급해! 병신 호구 새끼는 내가 아니라 너잖아! 맨날 서하림 근처 서성거리면서 말도 없이 음침하게 보기만 하고, 시발 서하림이랑 같이 공부하는 게 뭐가 대수냐? 요즘 좀 서하림이 친하게 지내준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거 같아? 너야말로 모르나 본데, 서하림이 너 보고 속으로 뭔 생각하는지나 알아?”
“그만해!”
“존나 불쌍한 새끼라고 생각한다고!”
“야 너네 한 마디만 더하면 나 선생님 부르러 교무실 간다.”
“가라 가. 내가, 어? 저딴 새끼한테 병신 소리를 들어야 돼? 차라리 불러라. 선생님들 다 오라 그러고 엄마 아빠도 다 학교 오라고 해 시발! 아, 김동규는 그게 안 되는구나. 선생님 부르면 안 되겠네. 부모님이 학교에 못 오니까.”
“야!”
아빠만 욕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는데 부모님이라고 엄마까지 곁들여 욕하는 걸 참지 못하고 이건우의 멱살을 잡았다. 이건우의 친구들이 이건우를 떼어내려고 했고 서하림은 내 손을 붙들었다.
“때려! 때리라고! 나 때리면 너도 니네 아빠랑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리고 학교 쫓겨날 거 각오하고 때려라? 어?”
평소에 복도에서 마주치면 지가 알아서 몸 사리고 피할 새끼가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고개 빳빳하게 쳐든 게 존나 빡쳤다. 멱살을 잡고 있던 한 손을 떼 주먹을 쥐었다. 서하림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지만 진짜로 힘 많이 실으면 못 때릴 것도 없었다.
“하하, 시발 새끼. 길가에서 굶어 죽는 고양이나 너나 서하림한테는 똑같아. 서하림이 불쌍하다고 봐주고 있는 걸 왜 너만 모르냐? 같이 공부한다고 뭐라도 된다 생각하는 거 같은데, 어차피 서하림이 너를 동정하고 연, 윽!”
나보다 키가 한참 작아 발끝으로 겨우 서 있는 이건우를 창문으로 내던졌다. 내가 제일 화가 나는 건 서하림에 대해서 지가 뭔데 잘 알고 있단 식으로 얘기하냐는 거였다. 내가 서하림에 대해 모른다고 말하는 거. 그러면서 은연중에 내가 서하림에게 별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밑에 깔고 있는 거.
서하림 생각? 그건 서하림이 제일 잘 알고 그다음이 나야.
이건우가 악, 하는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다시 이건우의 멱살을 잡아 주먹을 날렸다. 깨진 건 얼굴이 아닌 창문이었다. 귀 바로 옆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들은 이건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미, 미, 미, 미친…….”
“야 나 선생님 불러온다!”
“내가 모르긴 왜 몰라.”
나는 이건우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서하림이 나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
“착한 애잖아.”
아무도 나를 말리러 오지 않는다. 겁쟁이 새끼들. 방관만 할 줄 알지. 등 뒤에서 서하림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서하림이 날 길고양이 취급하거나 불쌍하다고 동정하는 거, 존나 좋아해.”
아니었으면 서하림이랑 그냥 평범한 친구밖에 안 됐을 거니까. 너는 좋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누가 날 동정하고 연민하는 걸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로 아나 본데, 나는 아니거든.
사람이 가진 수많은 것 중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감정팔이였다.
“미안. 겁만 주려고 했던 건데 진짜로 깰 줄은 몰랐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으로 이건우의 구겨진 멱살을 정리해 줬다. 와이셔츠에 내 피가 묻었지만 시발 알 게 뭐야. 집에 교복 살 돈이 차고 넘칠 텐데.
“왜 그렇게 쳐다봐. 진짜로 미안하다니까?”
아 손 아파. 선생님이 달려오면서 내 이름을 부른다. 죄송하다고 백번은 말했지만 아빠가 학교로 오는 건 막지 못했다. 어쨌든 학교 물품을 파손한 거니까.
선생님 전화 한 통에 날아올 줄은 몰랐지만 꼴에 아빠라고 내 옆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팔짱까지 끼고 있는 건 몇 번을 봐도 놀랍다.
“물론 먼저 병신 소리 한 건 제가 맞는데요, 우리 나이에 그 정도 욕은 할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또 이건우가 저보고 거지 새끼에 엄마 없는 새끼에 아빠는 쓰레기라고 그랬어요.”
사실에 기반한 선의의 거짓말을 조금 덧붙인 건데 학생회장이 쓸데없이 정정했다.
“그 정도까진 아니고요. 그냥 서하림이 너 불쌍하게 생각해서 데리고 다니는 거다, 나 때리면 너네 아빠랑 똑같은 사람 되는 거다, 그러면 학교로 부모님 와야 하는데 너는 그게 안 되지 않냐 뭐 이런 말이었어요.”
존나 도움 안 되는 새끼.
“근데 마지막 말은 좀 제가 생각해도 좀…… 많이 화낼 만하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부모님 욕 돌려 말한 거니까.”
백시후는 아나운서 말고 변호사를 하면 참 좋을 것 같다. 학생회장 하는 거 보면 리더십도 있고 말도 공명정대하게 사실관계를 정확히 가리니까. 백시후에게 2년간 행사한 내 표가 자랑스러웠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최대한 불쌍한 척을 했다. 옆에 아빠가 있어서 좀 쪽팔리긴 했는데 한국을 떠난 엄마가 보고 싶다며 한숨도 푹푹 쉬었다. 멍청한 아빠 새끼는 자기 욕을 했단 말에 발끈해선 이건우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 둘이 지 앞에 앉아 있는 게 좀 부담이 됐던 건지 이건우는 아까의 패기는 사라진 채 죄송하다며 쩔쩔맸다.
이건우를 때린 것도 아니고 나도 이건우도 서로 뭘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둘 사이의 문제는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서로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사실 내가 이건우를 때리진 않았으나 싸운 게 맞고, 나는 보호자가 같이 있는 상황이라 이건우가 자기도 엄마 불러 달라 그러면 짤 없이 이건우 엄마가 학교 와서 어른 싸움이 될 뻔한 거였는데 아빠 새끼의 무서운 얼굴을 보고 이건우가 쫄아서 자기 엄마 불러달란 생각을 못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창문도 아빠가 다음 주 안으로 학교에 창문값 보내는 것으로 얘기가 끝났다.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당장 계좌 이체할 돈도 없는 게 한심하고 쪽팔렸다.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하고 집에 가자며 선생님이 일어났다.
“야, 진짜 미안. 아니 나는 그냥 네 말대로 서하림 호구 새낀데 걔 공부 시간 뺏기고 그러면 걔네 이모님한테 내가 뭐라 뭐라 잔소리 들어서.”
“알아. 걔네 이모님 잔소리. 나도 미안. 손 잘 치료해.”
“어.”
선생님은 교무실 앞까지 아빠를 배웅했다. 집에 가는 동안 아빠가 또 뭔 소리를 지껄일까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의외로 택시를 탄 동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택시비 내가 낼 테니까 택시 타고 가자고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입을 털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살다 살다 학교에 불려 갈 줄은 몰랐다. 부끄러워서 어떻게 동네에 얼굴 들고 다니냐?”
첫 번째 말부터 반박할 거리가 삼십 가지는 됐지만 일단 뭔 개소리를 하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동안 같은 동 사람들이 화를 내는 아빠를 쳐다보기도 했지만 그런 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에도 우리 집 현관문을 여는 동안에도 저 입은 쉴 줄을 몰랐다.
“좋은 학교 보내놨더니만 공부 잘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긴커녕 이런 일로 학교를 가게 만들어?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다. 내가 지금 일하다가 애새끼가 학교에서 사고 쳤다고 얘기하고 나왔어. 알아? 씨이발, 내일 일하러 갈 때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치킨이라도 몇 마리 사 들고 가야 돼. 그게 또 얼마냐. 창문값은 또 언제 벌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까마득하다. 노답도 이런 노답이 없었다.
“일단, 치킨값이랑 창문값은 내가 낼게 그럼.”
“뭐야. 엄마가 용돈 준 거 있어?”
“아니. 얼마 전에 뭔 대회 나갔는데 대상 받아서 상금 받은 거 있어.”
“그럼 빨리 내놔봐라.”
방으로 들어가 상금 봉투에서 15만 원을 꺼냈다. 시발 내 코 묻은 상금…….
“치킨값 이 정도면 돼?”
“그래. 새끼가, 상을 받았으면 아빠한테도 째깍째깍 알려주고 그래야지.”
“…….”
“만약에 엄마가 용돈 보내 주면 몰래 숨겨두지 말고 내놔라. 알겠냐.”
“왜?”
“왜냐니. 원래 애새끼들은 용돈 받으면 다 부모님한테 헌납하고 그러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영혼이 빠져나간다면 이런 기분일까? 뻔뻔하고 한심한 게 도가 지나치니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미쳤네. 엄마가 준 돈도 다 까먹은 주제에 애새끼 돈도 가져가게?”
“뭐야?”
“그리고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봐. 쪽팔려서 동네에 고개 못 들고 다니는 게 나지 아빠야? 나름 국대 출신에 잘 나가던 운동선수가 지 성질 못 이기고 후배들 쳐 패느라 감옥에 갔다 와, 정신도 못 차리고 아내랑 지 새끼도 패, 아들은 좋은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며 아등바등 살고 있는데 아빠란 새끼는 술이나 처마시느라 결국 아내도 도망가. 학교에 불려간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내가 부모 멀쩡한 집 자식이면 걔가 나 무시도 안 하고 빡칠 일도 없었겠지.”
“이 새끼가 미쳤나.”
“안 미쳤는데. 왜, 팰라고? 패봐. 이왕 팰 거면 그냥 패서 죽여 버려. 인간쓰레기 길거리에 돌아다니게 하는 것보다는 내 한 몸 희생해서 감옥에 평생 처박아 두는 게 훨씬 낫다. 경찰청에서 정의를 실현했다며 내 숭고한 희생에 표창장도 줄걸?”
“씨발 새끼야!”
아빠가 내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머리만 안 맞도록 요령 있게 피해가며 맞았다. 서하림은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교무실로 간 건 나, 이건우, 백시후 이렇게 셋이었다. 백시후는 학생회장이라 증인 겸 상황 설명해 주러 간 거고 나랑 이건우는 당사자였고. 엄밀히 따지면 서하림도 당사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또 정확히 따지면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니까.
어느덧 바닥에 누워 머리를 감싸고 발길질을 맞으며 서하림을 떠올렸다. 창문 깨질 때 많이 놀랐겠지? 피 뚝뚝 떨어지는 거 보고 얼굴이 좀 굳었던데 하림이한테도 사과를 하는 게 맞겠지. 내가 괜히 고집부리고 땡깡 부려서 그 사달을 낸 거니까. 좀 더 어른스럽고 여유로운 사람이 돼 주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안 좋은 거 보여준 것도 미안했다.
서하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도대체 언제쯤 그만두려나. 나는 눈을 감고 팔에서 힘을 풀어 기절한 척을 했다. 순간 아빠의 발길질이 멈추더니 다급하게 내 코 밑으로 손가락을 대는 것이 느껴졌다. 코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씨발, 좆 됐네…….”
“으으…….”
“하, 씨팔.”
저번처럼 큰일은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혹시라도 겁먹어서 진짜 해외로 튀어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아, 힘 존나…… 세네…….”
아빠는 내가 준 15만 원 중 5만 원을 내 가슴팍 위에 올려놨다.
“이거로 병원이나 다녀와. 주말 동안 집 안 들어올 테니까 그렇게 알고.”
대답 대신 5만 원을 쥐었다. 바로 나갈 줄 알았는데 바닥에 널브러진 내 주변을 서성거리다 도망치듯 아빠가 집을 나갔다.
아, 일단은…… 이대로 누운 채 일단 한숨부터 자는 게 좋겠다. 손이고 뭐고…… 일어날 기운도 없고 기운이 있어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이대로 누워 잠이나 한숨 자야지 하고 있을 때였다. 팔과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고 숨 쉬는 간격이 점점 길어지고 정신이 아득해져 가고…… 몇 초만 더 있으면 잠에 빠질 것 같은 그때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김동규.”
거지 같던 집구석을 순식간에 정화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를…… 부르는 서하림의 목소리.
무의식으로 넘어가던 정신머리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돌아왔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도 모르게 몸이 벌떡 일어나 앉아 있었다.
“집에…… 있는 거 맞지?”
“어어! 나 안방!”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뛰어나왔다. 나를 발견하고 나서야 신발을 벗는 하림이에게 실내화를 꺼내 주었다. 피딱지가 굳은 오른손을 등 뒤로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림이가 거실에 멀뚱멀뚱 서 있는 걸 소파에 앉혀두고 화장실로 달려가 손부터 닦았다. 다행히 유리가 살에 박히거나 한 건 아니라 살점이 너덜거리지도 크게 찢어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런 걸 보여주기 싫었다.
굳은 피들이 다 떨어져 나가게 빡빡 닦았더니 피가 다시 터져 나왔다. 휴지를 많이 풀어 상처 위를 덮었다. 세게 눌러 피가 솟아나진 않을 정도로 지혈을 시킨 뒤 휴지를 새로 갈아 덮고 화장실을 나왔다.
나를 본 서하림이 벌떡 일어나길래 어깨를 눌러 편히 앉게 했다. 나는 소파 앞에 펼쳐 놓은 밥상이 의자라도 되는 양 걸터앉았다. 앉은키는 내가 약간 더 낮았다.
“앞에 놀이터에서 너 오는 거 기다리고 있었는데 못 보고 들어가더라고.”
“앞에 있었어? 못 봤는데.”
“네가 택시 타고 바로 앞에서 내리기도 했고 아저씨가 그, 자꾸 욕하고 그래서 못 봤나 봐.”
아 진짜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쓰레기.
“너 집 들어가는 거 보고 나도 따라가려고 했는데 아저씨랑 같이 들어가서. 한 시간만 기다리다가 아저씨 안 나오면 집에 가려고 했는데 마침 아저씨가 좀 전에 어디 가 가지고 혹시 또 맞거나 저번처럼…… 그럴까 봐 문 열고 들어왔어. 미안.”
“미안할 게 뭐 있어. 아무 때나 오라고 비밀번호 알려준 건데.”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하림이의 손을 잡으려다가 내 손 꼬라지를 보고 관두었다.
“내가 미안해. 다 미안해. 친구랑…… 그래, 친구랑 얘기도 하고 고민도 상담하고 그럴 수 있는 건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어. 너는 친구도 많고 인기도 많고…… 그럴 수도 있는데 내가 고집부렸다, 그치. 내가 원래 이렇게 속이 좁고 쫌생이 같은 사람이 아니거든. 그냥 맨날 너랑 집에 같이 가는 게 너무 좋아서 그랬어. 이건우가 너 뺏어가는 거 같고.”
“…….”
“원래는 우리 집에 같이 안 갔잖아. 그랬던 시간이 훨씬 많은데 좀 내가 과했고 오버했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야, 고개 들어.”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반짝거리는 까만 눈동자에 내가 비쳤지만 전보다 잘 보이지가 않는 게 애석했다.
“내가 이건우랑 뭔 얘길 한 건지부터 얘기할게.”
“응.”
“걔도 방과 후 하는 거 알, 아니 모르겠구나. 걔도 방과 후 하는데.”
“의대반 방과 후?”
“응. 걔네 부모님 그냥 이건우 할아버지가 준 건물 받고 띵가띵가 놀면서 카페 운영하거든. 그래서 이건우가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하니까 의사 만들려고 그랬어. 이건우도 그냥 엄마 아빠가 공부하라니까 하고 의사 하라니까 알겠다 하고 의대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야.”
“근데 무슨 고민 상담을 해?”
“작년에 무슨 실습하는 거 보고 오더니 자기는 절대 피 보기 싫다고 못 하겠대.”
“내과나 정신과 같은 거 가면 되잖아.”
“그 전에 공부할 때 해부도 하고 장기도 보고 그러잖아. 그냥 막연히 생각으로 할 땐 괜찮았는데 눈으로 보고 오더니 죽어도 못하겠다면서 의대 가기 싫은데 어떡하냐고 나한테 SOS 친 거야.”
“아하.”
“나도 아예 의대 생각 접었고 그러니까. 내가 거의 유일할 걸, 방과 후 도중에 탈주한 애. 암튼 엄마랑 아빠한테 말할 자신은 없고 근데 의대는 가기 싫어서 그 난리를 친 거야.”
“한의대도 공부할 때 시체 해부하고 그러나?”
“그렇다나 봐? 정확히는 몰라. 어쨌든 거기도 인체 내부 공부하긴 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한대?”
“내 말이. 일주일 내내 도돌이표야 완전. 솔직히 네 말대로 이제 슬슬 지겨워지고 있는 중이야. 서하늘 봐봐. 3일 듣더니 진작에 손 턴 거.”
왜 서하늘이 3일만 어울렸는지 이제야 납득이 갔다. 서하늘 성격상 이건우와의 대화는 대충 이랬을 것이다.
‘그럼 의대 안 쓰면 되겠네.’
‘하지만 엄마랑 아빠가…….’
‘그럼 의대 써.’
‘근데 나 진짜 의사는 못 하겠는데…….’
‘그럼 다른 과 써.’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이 시발 존나 답답한 새끼야! 나 안 해!’
안 봐도 훤했다.
“너도 왜 그걸 바보같이 계속 들어만 주고 있어. 네가 할 수 있는 말은 다 해주고도 남을 시간인데 너도 그냥 서하늘처럼 손 털어.”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이건우가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면서 얘기라도 들어 달래. 징징거리는 거 어디다 풀 곳도 없다고.”
“딴 친구한테 하라 해.”
“이미 했는데 다들 그냥 의대 가라고 하거나 바리스타 자격증 따란 말 들었대. 개웃겨.”
바리스타에 서하림이 빵 터지더니 “바리스타래 미친” 하며 자꾸 바리스타 바리스타 거렸다. 나도 하림이를 따라 웃었다.
“아 배 아파, 바리스타 진짜 자기 전에 맨날 생각나서 웃다 잠든다 요즘.”
서하림은 웃다가 눈물까지 맺혔다. 나는 밥상 위에 올려 놓은 휴지를 가져와 하림이의 눈가를 닦았다. 그러자 하림의 웃음소리가 뚝 끊기고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있잖아.”
“응.”
“나는, 널…….”
널, 까지 말한 붉은 입술이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가볍게 말렸다.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살짝 벌렸다가 고개를 도리질 치며 다시 입을 꾹 다문다. 한숨을 쉬면서 윗입술을 깨물고, 입술도 축이고.
하림이 입에서 미안하단 소리를 듣기 싫어 입을 맞췄다. 서하림은 내게 하나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불쌍하게 여기고 동정만 해도 괜찮다. 사과할 것도 없고 하찮게 여겨도 좋다. 싫다고 밀어내는 것만 아니라면.
화가 나서 누군가를 패고 싶을 때 이유 없이 날 패도 좋고 밥 먹다 갑자기 음식들을 머리 위로 부어도 상관없다. 날 호구 새끼나 병신이라고 말하며 빵셔틀을 시켜도, 전교생 앞에서 네 발로 기며 개처럼 짖으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어차피 서하림은 그럴 애도 아니거니와 애당초 나는 서하림이 날 불쌍하게 여겨줬으면 싶어서 아빠한테 맞는 걸 좋아하는 새끼였다. 심지어는 일부러 아빠가 날 좀 팰 수 있도록 아빠 속을 긁는 데 도가 텄다.
서하림은 눈도 다 감지 않고 혀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개를 피한 것도 아니었다.
“난 좋아.”
“뭐가.”
“그냥 다.”
“넌…… 내가 너를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불쌍하게 여기고 동정하는 것도 좋아. 다 좋아.”
말하느라 잠시 떨어진 입술을 도장 찍듯 맞추자 쪽 하는 소리가 났다.
“자존심 하나도 안 상해. 너랑 이렇게.”
또 한 번 쪽.
“이렇게…….”
이번엔 두 번.
“나 진짜 너 너무 좋아해. 아니, 사랑해.”
“…….”
“네가 나한테 주는 거면 싸구려 동정이든 불쌍함이든 슬픔이든 적선이든 다 좋아. 뭐든 괜찮아. 상처 하나도 안 받아. 내가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받을 수가 있어?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
“사랑해.”
“하지만.”
왜일까. 서하림한테 미안하단 말 듣는 게 싫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하림이의 입술을 부드럽게 막았다.
“미안해 안 해도 돼. 넌 나한테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니까. 왜 자꾸 나 속상하게 만들어?”
입만 덮은 건데도 서하림 얼굴은 작고 내 손을 커서 거짓말 조금 보태면 동그란 눈만 빼고 다 가려져 있었다. 서하림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뭔가를 생각하는 거 같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우랑 이 문제는 정리됐으니까 손 치료하자. 일어나, 병원 가게.”
“그 정도 아니야. 그냥 약 바르고 거즈 하고 붕대 감으면 돼.”
“진짜? 손 줘봐.”
서하림이 내 오른손을 잡아 제 눈앞에 가져가려는데 상처 보여주기 싫어서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안 내놔?”
“아 왜! 됐다니까? 보여주기 싫어!”
“왜!”
“싫으니까!”
좋은 거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으니까.
서하림이 내 앞에서 점프를 하며 손을 내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자 소파 위로 올라가 내 손목을 잡았다. 황급히 팔을 털며 뒤로 몸을 빼려는데 서하림이 내 목에 팔을 두르고는 바짝 매달려왔다. 허리엔 서하림의 다리가 감겼고 나는 무력하게 서하림에게 손을 뺐기고 말았다. 아, 시발 섰어…….
내 손에서 힘이 빠지자 서하림은 다리를 풀고 내려왔는데 그러면서 서하림의 몸에 발기한 내 것이 비벼졌다. 분명 서하림도 느꼈을 것이다.
“그러네. 그렇게 심하진 않네. 구급상자 어딨어?”
모르는 척하기는. 서하림이 잡고 있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서하림의 어깨를 눌러 소파에 다시 앉혔다. 이대로 바지를 내리고 하림이가 빨아주면…… 딱일 텐데. 침을 삼키자 꿀꺽 소리가 귓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다.
“어딨냐고.”
이미 머릿속에서는 바지 까고 서하림 뒤통수 잡아챈 다음에 내 속옷에 비벼대는 중이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성기를 겨우겨우 붙들고 있는 천 위에 서하림의 얼굴이 짓눌리고 당황하는 서하림 목소리가 들려오고. 당장이라도 쌀 것 같아 속옷을 내렸다. 크기에 하림이가 놀래 나를 올려다봤다.
‘할 수 있겠어?’
‘너무 큰데…….’
‘아, 일단 귀두라도 넣어 봐. 쌀 거 같은데 네 입안에 싸고 싶어.’
“야. 구급상자 어딨냐니까?”
“미, 미안. 내가 갖다 줄게.”
TV 선반에 넣어둔 구급상자를 꺼내 왔다. 아래가, 시발 진짜 터질 것 같고 근데 하림이가 그런 짓 하기 싫다고 했으니 참긴 참아야겠고. 진짜…… 죽을 것 같다.
“나는 잘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줘.”
“으응. 거기 하늘색 통이 소독약인데 솜 꺼내서 집게로 소독약 묻히고 상처 닦는 게 제일 먼저야.”
밥상 위에 앉아 일부러 다리를 쩍 벌렸다. 발기해 앞이 잔뜩 부푼 게 하림이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손대진 않을 테니 서하림이 건드려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시멜로 모양의 솜에 소독약을 붓고 내 상처 위를 닦는다. 따끔한 게 좀 아팠지만 하림이가 주는 아픔이라 더 아파도 참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의사 가운 입고 수술 준비하는 서하림도 좀 섹시할 것 같고.
상처, 혀로 핥아주면 좋겠다. 말랑하고 예쁜 색의 혀로 상처를 핥아주면…… 엔돌핀이 마구 분비돼서 빨리 나을지도 모르는데. 질척한 침을 내 손에 잔뜩 발라주면 나는 그게 성수라도 되는 것처럼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하림이 침 냄새만 맡으며 지낼 수도 있다.
“면봉 꺼내서 연고 발라주고…… 거즈 올리고 살색 테이프 붙여서 고정한 담에 붕대 둘러주면 돼. 요즘 붕대는 테이프도 필요 없다?”
“쉽네.”
“나 지금.”
“아프면 말해.”
“널 위해서 참고 있는 중이야.”
“…….”
“좆 터질 거 같은데도, 꾸역꾸역 참고 있는 거라고. 이딴 거 다 치워 버리고 바지 벗어서 네 손으로 자위하고 싶고 그리고.”
펠라도 시키고 싶은데.
“진짜 간신히…… 간신히 참고 있는 거야. 그냥, 알아달라고.”
서하림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붕대를 감았다. 어설픈 솜씨였다. 평소의 서하림이라면 모양이 제대로 잡힐 때까지 몇 번이고 풀어보고 완벽하게 마무리를 했을 테지만 입술만 살짝 깨물고 대충 한 번 시도한 게 전부였다. 적나라한 섹스 어필에 하림이의 야무진 손이 허둥지둥하는 게 귀여웠다.
“손 다쳤는데 뭐 도와줄 건 없어?”
내 대신 구급상자를 정리해 원래 있던 선반에 넣으며 말한다. 도와줄 거, 많지.
“하림아. 빨리 집에 가.”
“오른손 다쳐서 불편할 거 아냐.”
“나 지금 너 생각하면서 딸 칠 건데 구경할래? 손 빌려주든가.”
“월요일에 봐.”
발정 나서 이런 짓 저런 짓 다 하고 싶은 건 맞지만 결국 키스한 거 말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하림은 내가 진짜 얼마나 열심히 참는지 알아야 한다. 칼같이 자르고 도도하게 신발을 신는 모습에 뒤치기나 떠올리는 게 난데.
쾅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하림이가 앉아 있던 소파 냄새부터 맡았다. 조금이라도 하림이 냄새가 남아 있으면 빠짐없이 들이키려고. 짧은 시간 앉아 있었던 거라 하림이 냄새가 날 리는 없는데 그냥, 하림이가 앉아 있던 곳이니까 가죽 냄새 속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하림이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아니어도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느껴졌다.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요도 구멍을 꽉 막고 소파 구석구석 하림이가 닿았던 곳들을 맡았다. 몇 번이나 쌀 것 같은 걸 겨우 눌러가며.
충분히 하림이 냄새를 맡은 뒤에 소파에 똑바로 앉았다.
“아 시발…….”
1초도 안 되는 시간 살짝 손이 미끄러졌는데 정액이 나왔다. 아오, 그걸 못 참냐. 손도 다쳐서 속옷 빨기 존나 힘든데. 하림이보고 다시 오라 해서 손빨래해 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세탁기에 돌리기로 했다.
왼손으로 자위는 처음 해본다. 늘 오른손을 도와주는 친구였는데 이렇게 화려하게 데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하림이가 손수 감아준 붕대를 한 번 핥았다. 이상한 맛이 느껴졌고 까끌까끌했다.
‘그래서, 내 상처 핥아 먹으니까 어때?’
‘으음…… 피 맛 나.’
‘좋지.’
‘맛없는데…….’
‘피 가지고도 이러면 어떡해. 나중에 내 것도 다 마셔야 하는데.’
‘그러게.’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 귀엽다.
‘손 줘봐.’
순순히 손을 내미는 하림이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언제 옷을 벗은 거지. 기특하게.
‘뜨거워.’
‘그리고?’
‘단단하고…… 커.’
수줍어하면서 내 성기에 대한 감상을 읊는 서하림 때문에 한 번 사정했다. 다행히 하림이가 귀두 쪽을 잡고 있어 정액은 하림이 손바닥을 벗어나지 않았다.
‘손 움직이면서 더 말해봐. 응, 그렇지. 정액 내 거에 펴 바른다는 느낌으로.’
하림이는 소파에 앉은 내 다리 사이에서 열심히 손을 놀렸다. 남근숭배를 하는 신도처럼 벌떡 선 내 것을 천천히 만져댔고 자꾸 입술을 축이면서 ‘그리고, 그리고’ 하며 내게 들려줄 말들을 생각했다. 까만 눈동자엔 커다란 내 것이 비쳤다. 하림이는 눈으로도 내 것을 핥아 먹는 중이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응.’
‘좀, 징그럽게 생겼어.’
‘너처럼 예쁜 모양은 아니지.’
‘힘줄도 그렇고 색깔도 그렇구…… 나한테 안녕 하고 말도 할 거 같아.’
‘아, 지금 좋다…… 더 세게 해봐.’
사정감이 밀려들자 내 성기가 움찔거리며 하림이의 손안에서 움직였다. 당황한 하림이가 내 것을 아래에서 위로 주물렀다. 앗,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하림이가 내 것을 만지며 사정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하림이의 손을 온전히 느꼈다. 아직도 살짝 차가운 열 개의 손끝이 잘 느껴졌다. 발을 뻗어 사정한 하림이의 것을 건드렸다.
‘하응, 도, 동규야, 나 바, 방금 쌌는데…….’
‘알아.’
‘그, 그렇게, 으응, 하앗, 그러지 마, 아앗!’
정액 덕분에 하림이의 것은 미끌거렸다. 발가락을 열심히 놀려 하림이의 것을 희롱했다. 힘을 줘 바닥에 누르기도 했고 발가락으로 꼬집기도 했다. 아프다며 엉엉 울면서도 자꾸 핏핏 정액을 싸지르는 게 예뻤다.
성기를 괴롭힌 탓인지 하림이는 내 것을 잡기만 하고 끙끙거렸다. 더 이상 손을 움직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만, 그만해애…… 제발, 아응, 하, 제발…….’
‘그러면 입 벌려봐.’
‘응응.’
입을 벌려도 발은 멈추지 않았더니 눈을 감고 움찔거리는 게 마치 누가 뒤에서 박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참지 않고 하림이의 입에 내 것을 처박았다. 이미 내가 싼 정액이 잔뜩 발라져 있어 굉장히 역할 것이었다.
‘으읍!’
하지만 하림이는 정말 기특하게도 비린 내 것을 뺄 생각을 하지 않고 눈물만 주르륵 흘려댔다. 감은 눈은 눈물 때문에 속눈썹이 잔뜩 젖어 있었다.
하림이의 입안은 굉장히 뜨겁고, 축축하고 또 미끄럽고 좁고…….
‘눈 떠. 나 봐야지.’
달달 떨리는 턱이 안쓰럽다. 그래도 나는 하림이의 뒷머리를 잡은 채 안으로 더 쑤셔 넣었다. 하림이는 혀를 쓸 줄도 몰랐고 어떻게 빨아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게 더 꼴리고 흥분됐다. 분명 펠라를 해주는 주체는 하림이가 맞지만 나는 하림이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침이나 흘려대는 걸 감상하며 하림이의 입안을 헤집었다. 분명 펠라인데, 당하고 있는 건 하림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목젖과 가까워지는지 확 좁아지는 목구멍이 귀두에 닿았다.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도 벌써 하림이 목젖이란 사실에 감격스러워 그만 그대로 사정하고 말았다. 작은 입안이 내 좆에 감기는 게 너무 좋았다.
기침을 할 것 같아 성기를 뺐더니 역시나, 하림이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며 울었다. 입에서는 침과 섞인 내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그 어떤 성인영화보다도 더 선정적이었다.
‘아파. 아프다구.’
‘처음 해서 그래. 처음이라. 자꾸 하면 펠라 만으로도 오르가즘 느껴서 사정을 할 수 있대.’
‘……정말?’
‘진짜.’
내 말에 하림이는 백치처럼 웃었다. 사정을 해도 흉흉한 기세인 내 성기로 입술 근처를 눌러대도 헤헤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눈을 감고 입을 벌린다. 아…… 진짜…… 하림이 머리 어딘가가 망가져서 이렇게 평생 날 위한 섹스돌로 살았으면 좋겠다. 손 달라고 하면 주고 입 벌리라 하면 벌리고 다리 벌리라고 하면 벌리고 이렇게…… 때로는 알아서 예쁜 짓도 하면서 내 정액만 먹고 살아갔으면. 정액도 어차피 단백질이니까 정액만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천천히 넣었다. 그래서인지 숨 막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전에 내가 해준 거 기억나지. 혀랑 입안을 이용하면 돼. 잘 모르겠으면 그냥 사탕 아니 하드 아이스크림 핥아 먹는 것처럼 하다가…… 응 그렇게…… 그러다가 한 번씩 강하게 빨아줘. 내가 전에 네 젖꼭지 빨아준 것처럼…… 이 안 쓰게 조심하고…… 그러다…… 사정하면 다 마셔야 돼. 알겠지? 정 못 먹겠으면 뱉어도 괜찮아.’
입이 막혀 대답을 할 수 없는 대신 눈물을 그렁그렁 단 눈이 야살스럽게 웃었다. 그래, 너는 잘 먹을 수 있을 거야. 너는 뭐든지 잘하니까.
하림이가 충분히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서툰 혀가 움직이며 내 것을 핥고 정갈한 이가 살짝 누르기도 하고 이따금 강하게 빨아 사정을 유도하는 하림이는 여전히 서툴고 미숙했다. 그 안에 두 번이나 사정을 하고 하림이가 한 방울도 빠짐없이 마셨지만 내게서 그만두란 말이 나오지 않으니 무언가를 더 하기 위해 내 눈치를 봤다. 혀를 빼 귀두를 문지르는 게 엉성했다.
닳고 닳은 창부처럼 굴면서도 늘 이렇게 서툰 서하림은 완벽한 내 취향이었다. 평생 섹스를 해댄다고 하더라도 24시간 내내 추삽질을 한다 해도 하림이는 이럴 것이다. 처음 같고, 낯설고 잘 못하고…….
‘잠깐만.’
하림이의 입안에 붙은 것처럼 한참을 넣고 있던 내 것을 뺐다. 열에 들뜬 하림이가 달려들며 다시 입을 벌렸지만 좆으로 입술을 때려댔다.
‘왜, 왜 그래? 내가 잘 못해서 그래?’
‘잘 못하는 건 좋아.’
‘그럼 왜?’
‘나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서. 가만히 있어.’
애가 닳아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게 예뻤다. 아, 저 엉덩이를 잡고 넣는 것도 좋은데 일단 지금 당장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게 따로 있어서.
나는 하림이의 침이 잔뜩 묻은 내 것을 위아래로 털어댔다. 하림이가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당장에라도 내 것을 핥겠다는 듯 굴었다. 귀여워 진짜.
‘다시 물려줄 테니까 기다려.’
‘응응, 그치만.’
곧바로 사정감이 차올랐다. 나는 내 것을 잡고 하림이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하림이는 다시 빨라는 건 줄 알고 입을 벌렸는데 나는 그보다 조금 더 위로 세워 정액을 싸질렀다.
‘아…….’
시원하게 터진 정액이 하림이의 얼굴을 더럽혔다. 일부가 눈에 닿아 하림이는 윙크를 하는 것처럼 한쪽 눈을 감았다. 비린 정액 냄새가 훅 끼쳐왔다.
고작 정액이 뿌려진 것뿐인데 하림이는 약이라도 한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는 나도 흡족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하림이의 얼굴 위로 떨어뜨렸다. 한쪽 눈만 뜬 하림이의 눈동자가 총기를 잃고 반질거렸다. 그 안에는 내 얼굴이, 내 성기가 커다랗게 담겨 있을 뿐이었다. 하림이의 것도 꿀렁이며 정액을 내뱉는다.
넋이 나간 하림이를 끌어 올려 내 위에 앉혔다. 팔다리가 늘어져 꼭 인형 같았다. 하림이의 엉덩이 아래 눌린 내 것을 잡아 빼 하림이의 것과 맞닿게 했다.
‘그렇게 좋아?’
힘없이 안겨 있던 하림이가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빈다. 정액 때문에 미끄러웠고 하림이의 숨이 느껴져 간지러웠다.
‘응, 동규 거 좋아.’
이제는 따끈해진 하얀 손가락들이 내 것을 가볍게 쥐었다. 성욕에 찌들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느낌이라기보다는 그냥 내 좆을 만지기만 해도 좋은 것처럼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만져댈 뿐이었다.
또다시 힘을 받는 것을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감싼다. 내 것을 다 덮을 순 없었지만 하림이의 손이 내 것을 감싸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이랄지 평온함이 찾아왔다.
하림이가 내 정액으로 범벅된 얼굴로 웃으며 다가왔다. 입술에서는 내 정액 맛이 났지만 그마저도 달았다. 하림이 입술에, 얼굴에 닿은 거니까.
키스를 하던 중에 우리 둘은 사정을 했고 나는 하림이 얼굴을 손으로 마구 문질렀다. 정액으로 절여지다 못해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다. 더럽혀질수록 깨끗하고 순결하다니, 존나 아이러니했다.
서하림 말 따라 국문과에 가기로 맘을 정하긴 했는데 담임선생님과 앉아 얘길 하고 있다 보면 공대가 포기가 되질 않았다. 국문과 나와서 뭐 하고 살지도 막막했고 그렇다고 복전이나 전과를 하기엔 공부라면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물론 요즘엔 꼭 학과 따라 직업도 정하는 건 아니라지만 문과대 갈 생각하니 눈앞이 갑갑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한숨 좀 그만 쉬어라 선생님 앞에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선생님은 제 심정 1도 모를걸요. 하 진짜 착잡한 수준…….”
“왜. 어차피 2년 넘게 돈도 한 푼 안 내고 다닐 건데 기분 좋아야지.”
“복전은 졸업 때까지 내내 두 배로 고생해야 하니까 차라리 전과가 낫겠죠?”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부른 건데, 내가 전화해서 물어봤거든. 근데 전과하면 장학금 안 준다더라.”
좆 됐네 진짜. 망했다 망했어.
“굳이 공대에 목매는 이유가 대체 뭐야? 딱히 없다며.”
“……네. 아니 사실 딱……히 없는 건 아니고요.”
“그래? 그럼 뭔데.”
“그냥 뭐, 졸업 전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고 싶은데 공대가 제일 빠를 거 같아서요.”
선생님이 비웃거나 하면 어떡하지 좀 고민하고 말한 건데 의외로 선생님은 내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중요하지 그런 것도. 그래 그럼 선생님이 좀 더 이곳저곳에 알아보고 새로 알게 되는 거 있으면 바로 부를게. 큰 기대는 말고.”
“감사합니다.”
새롭게 뭐 더 나올 건 없겠지만 그래도 애써주신다니까.
혹시 몰라 수시 원서에 써야 할 것들을 국문과 버전과 기계공학과 버전으로 나누어 준비하고 있다. 추천서는 교장 선생님이 해주기로 했고 담임선생님과 국어 선생님이 내 원서를 몇 번이나 퇴고해 줬다.
그리고 호옥시 필요할 수도 있어 이틀 전 3학년을 대상으로만 진행되는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했다. 3학년만 참여 가능한 이유는 마지막으로 학생부에 뭐라도 적고자 하는 이공계 지원자에게 막차 타라고 열리는 대회이기 때문이다. 서하림처럼 1, 2학년 때 쌓은 업적이 많은 애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막차 타보겠다고 나갔다. 나름 공대 지원하는 원서에 책만 읽은 것보다는 실질적인 기록이 남으면 좋을 거 같아서. 대충 가채점해 보니 최소 은상이었다.
1학기 기말고사까지 3주. 3주만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하면 된다. 어차피 수시에 붙을 거니까 최악의 상황으로 S대를 떨어져도 갈 곳은 많았다. 학교가 달라도 서울이기만 하면 매일 하림이네 학교 놀러 갈 수 있으니까.
6월 모의고사를 본 뒤로는 떨어질 사태에 대한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중이다. 성적 좋고 학교장 추천서 있다 해도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최근 3년간의 우리 학교 기말고사 기출 문제를 풀고 있는 동그란 머리통이 살짝 까딱거린다. 한참 열심히 먹던 고구마말랭이로 더 이상 손을 뻗지 않는 걸 보니 말을 걸어도 나를 봐줄 것 같지가 않다. 손이라도 잡을까 싶었는데 집중 잘하고 있는 애 방해하기 싫어 말았다.
마인드컨트롤 한다고는 하는데 하림이랑 같은 학교 못 간 상태로 복수 전공이라는 끔찍한 대학 생활을 할 생각을 하니 숨이 막히고 암담해 영 집중이 되지 않는다.
서하림도 나처럼 우리가 떨어지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을까? 우리 둘이 다른 학교를 다니고 다른 하루 일과를 보내는 그런 나날들을.
당장에라도 하림이의 시선을 빼앗은 문제집을 던져 버린 채 나랑 다른 학교 가면 어떡할 거냐고 묻고 싶은 맘은 굴뚝같으나 할 수 없단 걸 안다. 나는 샤프를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몇십 분 정도는 공부하긴 그른 것 같아 턱을 괴고 하림이나 관찰하기로 했다. 서하림이라면 사진 한 장 가지고 하루 종일 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왜.”
“그냥.”
“자신 있나 봐.”
“그건 아닌데.”
다 풀었는지 문제집을 한 장 넘긴다. 국어 지문이 보였다.
“그냥 좀 생각이 많아져서.”
“성적 반영되는 마지막 시험이라 그래. 12년 레이스인데 기분 이상할 수 있지.”
“그것도 그렇고.”
“또 있어?”
“그냥 뭐…….”
“뭐야. 말해봐.”
드디어 문제집에서 시선을 떼 나를 바라본다. 손을 뻗어 하림이의 손에 깍지를 꼈다. 좌우로 흔들자 내 손을 따라 흔들리는 하림이의 손이 좋았다.
“떨어지면 어떡하나 뭐 그런 생각.”
“면접 가서 욕만 안 하면 어디든 붙겠지.”
“나는 그런 말이 아닌데.”
내가 하림이의 눈빛, 손짓, 표정까지 모든 걸 관찰하며 하림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알아채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처럼 때때로 하림이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줬으면 하는 때가 있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데 꼭 말로 내뱉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아직 말로 정리가 되지 않아 감정만 있을 때도 있고 그러니까. 섭섭하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가 되고 싶단 얘기다.
“그럼?”
너랑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어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실패할까 봐 불안해.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이었다.
넌 아마 죽을 때까지 내 맘을 다 모르겠지. 알 수가 없겠지. 내가 거친 언어와 정제되지 않은 말들을 쏟아내며 있는 그대로 내 사랑을 표현해도 나와 가진 마음의 무게가 다르고 크기도 다를 테니까.
출발점부터 사랑과 동정이라는, 비슷하지만 절대 같지 않은 감정으로 시작됐고 어쩌면 끝끝내 같은 마음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같은 빨간색이라도 자세히 보면 수천 개의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것처럼 같은 온도라도 더 정밀한 기계를 사용하면 온도 차가 존재하는 것처럼.
순수한 의문이 떠오른 까만 눈동자가 예쁘다. 지나치게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은 슬픔을 동반한다. 서하림의 모든 것은 그렇게, 지나치게 예쁘고 아름다웠다. 눈동자, 머리카락, 목소리, 말투, 입술, 손가락, 발목…… 그냥 서하림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평소엔 그 슬픔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모른 척하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기침처럼 혹은 걷잡을 수 없이 터지는 눈물처럼 뜨거운 슬픔이 울컥 차오르는 때가 있었다.
단순히 슬프다는 말에 다 담기지 않는 감정이었다. 왜냐면 정작 펑펑 운다거나 매번 눈물이 나오는 건 아니었으니까. 공허하기도 했고 서글프기도 했다. 언젠가 서글프다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본 적이 있다. 서글프다란 형용사는 쓸쓸하고 외로워 슬픈 것을 뜻한다는데 이것도 완벽하게 내 마음을 대변해 주지는 못했다.
내 아름답고 예쁜 사랑은, 사람은 그 어떤 단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커다란 존재였다. 대자연 앞에 서면 나는 고작 하나의 작은 인간 또는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과 같이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사랑과 슬픔은 두려움을 낳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번씩 서하림이 무서워 뒷걸음질 치던 나를 기억한다. 분명 서하림이 싫은 게 아니라 너무, 너무너무 좋고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다 내가 부족한 탓이었다.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었다면 이 어마어마한 감정을 충분히 품고도 남아 서하림에게 예쁜 사랑만 줄 수 있었을 텐데. 같은 온도와 색을, 어디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무게와 크기를 가진 마음으로 서로를 원하고 바랄 수 있었을 텐데. 때로는 순수하고 때로는 열정적인 사랑을 함께하고, 둘이 같이 만들어가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그런…… 사랑을.
“아니야. 그러게, 네 말이 맞아.”
나라고 로맨틱하고 간질거리는 사랑을 원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라는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틀려먹어 음침하고 더러운 게 어울렸다. 그 외엔 할 줄도 모르고 솔직히 하고 싶지도 않았다. 서하림이 이런 나를 버거워한다는 걸 안다. 나도 이런 내가 싫었고 혐오스러웠지만 깔끔하게 인정하고 포기하니 편했다.
결국 나는 여전히 절망이요, 어둠이었으며 서하림 역시 이런 나를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든 구원의 손길을 뻗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어릴 때부터 지금의 관계에 익숙해져 있었다. 동정하고 동정받고 불쌍해하고 불쌍해지려 애쓰고. 둘 중 누구 하나가 죽더라도 불이 꺼진 자리에 남는 그을음처럼 평생의 족쇄가 될 거였다.
“뭐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너랑 같은 학교 다니면서 CC 하고 싶다고.”
서하림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진짜로 오늘 공부는 조졌다.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속을 애써 감추며 서하림만 신나게 감상하다 끝이 났다.
집에 와선 노트와 만년필을 꺼내 하림이의 이름을 적었다. 굉장히 느리고 천천히. 어둠이 물러나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기말고사가 끝나면 무슨 기분일까 상상 많이 해봤는데 생각보다 홀가분한 기분은 아니었고 생각보다 내가 자랑스러웠다.
물론 앞으로 계속 원서도 수정해야 하고 면접 준비도 해야 하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전부 떨어질 때를 대비해 수능 공부도 하긴 해야 하지만 수시 올인인 내겐 입시 마지막 시험인 3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참…….
“수고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거 아니고 중요한 수능이 남은 건 다들 알고 있겠지.”
담임선생님이 좋은 얘기들을 하는 동안 반 정도는 나름 감동받아 가며 지난 12년의 세월을 떠올리는 듯했고 나머지 반은 친구들과 떠들었고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다리를 떨어댔다.
아무리 망해도 인서울 붙을 성적에 학교장 추천서가 있으니 이젠 더 이상 시험 마지막 날부터 다음 시험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주말에도 맘껏 자도 되고 공휴일에도 학교 가는 날처럼 여섯 시 반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화장실에 놔둔 영어 단어 책도 이젠 치워도 됐다. 베개 아래 넣어둬 자기 직전이나 깬 직후에 보려고 한 딱딱한 노트도 이젠 안녕이다.
“집에 가면 뭐 할 거야?”
서하림이 눈을 비비며 물어왔다. 서하림과 함께하는 즐거운 하굣길이었다.
이건우는 S대만 의대를 쓰고 나머지는 지 꼴리는 대로 아무렇게나 넣는다는 것 같다. 바리스타 추천한 친구가 이번에는 이건우에게 치킨 대학을 추천했단 얘기는 좀 웃겼다. 누군지 몰라도 골 때리는 새끼였다.
“원래는 그냥 아무 걱정 없이 내일 아침까지 푹 잘 예정이었는데.”
“는데?”
“잠이 안 올 거 같아.”
“왜?”
“기분 이상해서.”
“나도.”
손잡고 싶다. 나보다 더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하림이의 19년을 따뜻한 손으로 응원해 주고 싶다.
아직 원서도 안 넣었는데 겨우 시험 끝났다고 우리 둘 다 감성에 젖은 게 신기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짠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보러는 언제 가?”
“오늘 저녁.”
“와 쉴 시간도 안 주고 스파르타네.”
“스파게티 먹고 싶다.”
“갑자기?”
“지금 의식의 흐름, 아무 말 대잔치임.”
“뭐야.”
“몰라아용. 마자아용!”
빈틈없이 완벽한 서하림도 좋지만 뜬금없고 살짝 나사 빠진 바보 같은 서하림의 모습은 볼 때마다 새로웠고 신선했으며 귀여웠다. 오늘 하루 정도는 서하림도 이 이상한 기분에 허우적거리다 내일이면 다시 완벽한 왕자님으로 돌아와 뭐든 척척 해낼 것이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안 온다. 분명 기말고사 치고 나면 제일 하고 싶었던 게 죽은 것처럼 자는 거였는데. 피곤은 한데 영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다가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또 뒤척이다 괜히 휴대폰 잠금 풀었다가 서하림한테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하다 라면을 끓여 먹었다. 배가 부른 상태로 누워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Rrrrr-
날 깨운 건 전화벨 소리였다. 다른 모든 번호는 소리를 설정해 두지 않았고 서하림만 벨 소리 나게 설정해 뒀기 때문에 옅은 선잠에 빠져 있던 나는 정신이 들기도 전에 이미 통화를 누른 상태였다.
-혹시 자고 있었어?
고막부터 닿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번개처럼 뇌로 박히며 잠을 몰아냈다.
“아니.”
-저녁은 먹었어?
“아직.”
벌써 저녁 시간이었구나. 생각보다 많이 잤네.
-그럼 저녁 같이 먹자.
귀에 딱 붙이고 있던 휴대폰을 잠시 떼어 시간을 확인했다. 9시가 다 돼간다. 할아버지랑 저녁 먹었다고 하지 않았나? 이미 후식까지 먹고도 남을 시간인 거 같은데.
“그래. 어디서 먹을까?”
-우리 집에서. 근데 오늘 아주머니가 집에 없어.
“그렇겠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그냥 좀 부드러운 거.
“그럼 두부랑 계란 위주로 먹는 거 어때.”
-좋지. 그럼 천천히 와.
총알같이 일어나 택시 타고 날아왔다. 하림이는 소파에 누워 예능을 보고 있었다.
“헐 왤케 빨리 왔어?”
“배고파서.”
“아 그렇겠다. 대충 먹어도 되니까 간단하게 만들어.”
계란을 풀어 체에 거르고 우유를 조금 넣어 섞은 뒤 당근과 부추, 양파를 잘게 썰어 함께 섞었다. 통후추를 그라인더로 갈고 소금도 넣었다. 그리고 두부를 으깨고 감자도 강판에 갈아 밀가루와 섞어 두부 감자전을 부치고 순두부가 있길래 멸치랑 다시마로 국물 내서 맑은 순두부찌개를 끓였다. 서하림이 해물 들어가도 괜찮다고 해서 바지락도 넣었다. 칼칼하겐 하지 않았다.
다른 반찬은 하기 귀찮아 이모님이 해둔 것들을 꺼냈다.
“와 임금님 수라상이네. 대충 하라니까.”
“이거 누가 이랬어.”
아까 도착했을 땐 서하림이 누워 있어서 제대로 못 봤는데 지금 보니 서하림 오른쪽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누가 봐도 때린 흔적이었다.
“밥부터 먹고.”
“누가 이랬냐고.”
이 정도로 붉게 부은 거 보니 한 대 가지고는 부족하다. 많이 맞아봐서 잘 아는데 작정하고 때리는 거 아니면 이렇게 뚜렷한 붉은색이 나올 수가 없다. 서하림이 어디서 맞고 다니는 애도 아니고 사고 몰고 다니는 애도 아니고 아예 이렇게 맞을 짓조차 하질 않는데 도대체 누가, 누가…….
“나 배고파. 너도 배고프다며.”
피가 거꾸로 솟는 걸 넘어서서 온몸의 피가 들끓었다. 바르게 앉아 국물을 한 숟갈 떠 마시는 서하림은 평소처럼 단정한 젓가락질을 했고 배고파도 급하게 먹는 게 아니라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맛을 음미하고 소화가 잘 되게 꼭꼭 씹어 삼켰다. 나는 지금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정작 당사자인 서하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사를 하고 있으니 입맛이 싹 가시고 식욕도 떨어졌다.
정말로 배가 고팠던 건지 밥이 절반이 될 때까지 서하림은 별말 없이 밥을 먹었다. 국이 맛있다며 국물을 호로록 잘 마시길래 중간에 한 번 더 떠다 줄 정도로.
“이거 그냥.”
어느 정도 배가 찬 건지 서하림이 입을 열었다.
“어떤 새끼야. 빨리 말해.”
죽여 버릴 거니까. 손에 가죽 장갑 끼고 살이 터질 때까지 뺨 때린 다음에 죽일 거야.
“할아버지 새끼.”
“어?”
“할아버지라고.”
“할아……버지? 너네 할아버지? 오늘 저녁 약속?”
“그래. 우리 엄마의 아빠.”
그렇게 말한 서하림은 국물을 떠 마셨다. 국물 진짜 맛있다, 같은 소리나 하면서.
서하림은 외가 쪽 장손이고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은 유명했다. 공부하다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쉴 수 있도록 인천 어디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별장 하나 만들어주고 학교 축제 때도 꼬박꼬박 화환을 보내기도 하고 서하림이 전시들 보러 다니는 거 좋아하니까 예술의 전당 후원도 서하림 이름으로 제일 높은 등급 가입해선 연회비도 꽤 큰 금액으로 낸다거나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그런 사람이 왜?
“할아버지 저 의대 안 써요 의사랑 안 맞는 거 같아요, 했다가 맞음.”
“뭐라고?”
“솔직히 의대란 단어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다 의사니까 그럼 나도 의사 선생님 해야지 했던 건데 그냥 그 직업이 익숙한 거뿐이었잖아. 그래서 다 말했지. 할아버지 저 물리학과 쓸 거고 대학원 가서 박사까지 다 따서 교수할 거라고.”
미친 노인네. 어릴 때부터 얼마나 애를 압박하고 세뇌를 시켰으면 착한 애가 이렇게까지 얘길 해.
“아 잠시만. 겨우 그 말 듣고 때렸다고.”
“응. 나는 엄마처럼 이 직업이랑 잘 맞을 거 같지도 않고 희생정신 봉사 정신 그런 것도 잘 모르겠고 잠도 좀 잘 자고 내 생활도 있고 남을 위한 직업보단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다고 했다가.”
“때릴 데가 어딨다고…….”
“내 말이. 근데 할아버지가 정 의대 싫으면 재단 물려받게 경영이라도 가라는데 내가 그런 거 관심도 없고 갖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모랑 삼촌네 애들한테 물려줘라 그랬더니 또 존나 때리는 거야. 큰일 하기 싫으면 그냥 의대 얌전히 졸업만 하라고 개인 병원 차려준다 하는데 나도 그 말 듣고 그냥 빡쳐서 원서는 내가 쓰지 할아버지가 쓰냐 그랬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등록금 한 푼도 안 주겠다잖아.”
“아줌마는 뭐라셨는데.”
“아 들어봐. 그래서 내가 그래 알겠다. 등록금 안 주셔도 된다. 용돈도 앞으로 주지 마시고 지금껏 용돈 주신 거 열심히 모아놨는데 그거 토해 내라고 하시면 드리겠다. 편의점 알바를 하든 공사장에서 삽질을 하든 내가 돈 모아서 가면 된다 했다가 할아버지 뒤집어졌어. 엄마는 내 편이라 할아버지한테 내 아들 등록금 낼 돈도 없는 거 같냐고 엄청 뭐라 함. 나보고 삽질은 하지 말래 몸 상한다고. 엄마랑은 작년 겨울방학에 얘기 다 끝난 거라.”
“잠깐만.”
역시 크게 되실 분답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하림이 방에 있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팩을 꺼내 왔다. 하림이한테 건넸지만 밥 다 먹고 하겠다길래 주방 냉장고에 넣었다.
“야 근데 대박인 건 엄마랑 아빠 지금 싸웠어.”
“왜?”
“아빠가 할아버지 말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해서 엄마 개빡침. 엄마는 할아버지한테 뭐라고 존나 그랬는데 아빠는 한 마디도 못 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한테 곱게 못 늙을 거면 죽으라면서 나가 버리고. 나 엄마 그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어.”
아저씨 꿈이 개인 병원 차려서 월급 닥터들 쓰는 거라 그랬던가. 그렇다면 장인어른께 잘 보여야 병원이 떨어질 테니 왜 그랬는지는 알겠다. 도대체 서하림 아줌마는 왜 그런 사람이랑 결혼을 한 걸까 잠시 생각했는데 하림이 얼굴 보고 납득했다. 서하림의 외모는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게 컸다. 뭐 저 정도 얼굴이면…….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손찌검을 해? 많이 배우신 분이 왜 그랬대?”
“나도 좀 흥분해서 세게 말했어.”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소신 있게 잘 말했구만 세게 말하긴 뭘 세게 말해.”
“됐어. 나도 한 대 맞고 나서는 말할 때 좀 비꼬면서 말했어.”
“아 그래?”
“응. 지금 엄마 혜화동 집으로 갔고 내가 집에서 쉬고 싶다니까 엄마가 아빠보고 호텔 가서 자라고 해 가지고 아빤 호텔이야. 혼파망도 이런 혼파망이 없다. 엄마랑 아빠 이렇게 싸운 적이 없는데 둘이 이혼하면 어떡하지?”
“못 하지 않을까.”
“왜?”
아줌마라면 몰라도 아저씨는 하고 싶어도 못 할 것 같지만 부모님에게 사랑 많이 받고 자란 하림이에게 굳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원래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
“그렇겠지?”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끝낸 뒤에 아이스팩을 꺼내왔다.
“누워봐. 부기 빼줄게.”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하림이 옆으로 누웠다. TV 시청을 방해하지 않도록 약간 머리 위로 비켜 앉은 다음 팩에 손수건을 둘러 볼에 대주었다.
“쿠션은 안 불편해?”
“응. 지금 각도 딱 좋음. 감사. 시원하네.”
“속상하다.”
“며칠 지나면 사라져.”
“그래도.”
“…….”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면서 때리긴 왜 때렸대. 진짜 그렇게 손주 사랑이 지극하면 네가 뭘 하고 싶은지 관심 가져주고 뭘 하든지 응원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냥 대전으로 튈까. 거기 국립인데 등록금 엄청 싸.”
“싼 정도가 아니라 전교생 4년 전액 장학금일걸.”
“헐. 대박 진짜? 그럼 너 거기 가는 건 어때. 딱이잖아. 공대랑 장학금 다 되네.”
“싫어.”
“아 진짜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애냐?”
“몰라.”
“네가 제일 많이 하는 말 꼽으면 ‘몰라, 그냥, 싫어’일걸.”
“너는 ‘헐, 대박, 진짜, 미친 하고 뭐래나 뭐야’.”
“아 뭐래 미친. 아 진짜네. 악! 아닌데? 안 쓰는데? 아 미친 개웃겨.”
“거 봐.”
하림이가 웃으며 아니라고 항변을 하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헐 대박 진짜 미친 뭐야가 자꾸 쏟아져 나왔다. 하림이는 자기가 제일 많이 쓰는 단어들을 쓰지 않고 말을 하려 했지만 고장 난 로봇처럼 버벅거려 웃겼다.
“아니, 안 쓰, 안 쓴다고. 봐봐. 내가 고작 저런 짧은 몇몇 단어만 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나름 그래도 어휘력이 지, 완전 높다고 자부하는데 진, 아 나 지금 되게 바보 같아 미친. 아, 미, 아오! 뭐야 진짜. 아 몰라. 헐대박미친뭐야 없인 말 못 해. 아 그만 웃어!”
자기도 웃고 있으면서 나만 타박한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배 근육이 당겨왔고 하림이의 눈에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아 진짜 배 아파. 기분 별로였는데 대박 많이 웃었네. 하, 눈물 나.”
서하림은 손가락으로 눈가를 툭툭 건들며 눈물을 닦았다. 나는 그런 하림이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손가락에 묻어 있는 눈물이 반짝거렸다. 그런 눈물을 혀로 살짝 핥아 마시며 하림이의 차가운 손끝에 입술을 눌러댔다.
“오늘 그럼…… 집에 아무도 없는 거네.”
내게서 손을 내뺀 서하림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볼에 올려둔 아이스팩이 소파 위로 떨어졌다.
“아, 어. 자고 갈 거면 손님방에서 자.”
“잠깐만.”
앉아 있는 하림이에게 입을 맞추며 뒤로 눕혔다. 서하림은 내 품에서 벗어나려는지 자꾸 고개를 돌려댔고 몇 번 고개를 따라 입을 맞추던 나는 그냥 하림이를 껴안았다.
“하림아.”
“참는다고 했어. 날 위해서.”
“응. 웃는 거 보니까 좋다. 기분 안 좋을 때 나 찾아준 것도 고맙고 내가 네 기분 풀어줬단 것도 좋고.”
“그건…… 고마워.”
얌전히 한 품에 안기는 하림이의 어깨와 허리를 더 꽉 껴안았다. 말랑하진 않지만 나와는 다르게 마르고 매끈한 몸이라 안고 있기 딱 좋았다.
“고마운데 아무것도 없어?”
하림이의 보드라운 목덜미 냄새를 맡고 있기만 해도 몽롱하니 이대로 잠들어도 좋을 것 같다. 눈 떴을 때도 하림이가 내 품에 안겨 있었으면……. 내가 먼저 잠에서 깨야 곤히 자고 있는 하림이를 볼 수 있겠지. 자기 방 침대에서 잔 게 아니니까 안대는 없을 테고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하림이는 범접할 수도 없이 성스러운 기운이 품길 것이다. 그런 하림이의 손을 잡은 채 하림이가 깰 때까지 하림이를 보고 싶다.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참는다며.”
“그러니까 물어보잖아.”
“…….”
“절대로 내가, 내가 먼저 뭐 안 해. 그러니까 네가 말해줘. 응?”
“……키스만.”
“응응.”
“다른 건 하지.”
난폭하게 혀를 들이밀긴 했지만 막상 혀를 섞고 난 뒤엔 부드럽게 움직였다. 하림이는 나와 잠시 시선을 마주했다가 얌전히 눈을 감았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게 꼭 잠을 자는 것도 같고 키스를 음미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한 번씩 서하림이 내 혀를 건드렸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헐떡이며 하림이의 입천장을 쓸고 혀를 빨아댔다. 하림이에게서 아주 작게 으응, 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존나 미칠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발기한 아래를 무의식적으로 비벼대고 하림이의 침을 삼켜대고.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볼까. 싫어하면 바로 빼면 되니까.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앞으로 가져와 옷 아래로 살짝 넣었다. 판판한 배가 느껴졌고 조심스럽게…… 손을 위로 올려 하림이의 유두를 건드렸다.
“아, 잠시만…….”
하림이가 내 손목을 잡았지만 내리 끌진 않았다. 내 손목을 세게 쥐고 숨을 고른다. 이미 하림이의 것도 발기한 상태였다. 하림이는 지금 저도 몸이 달아 나에게 더 허용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성과 본능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물고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가 뺐다가. 붉게 물든 광대가 사랑스럽다.
나는 손에 힘을 줘 그대로 하림이의 가슴팍을 문질렀다. 하림이가 손목을 잡고 있긴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도 풀어 아예 상의를 위로 밀어 올리고 가슴살을 끌어모으듯 했다.
“아, 이거…… 이런 거…….”
마른 근육을 가진 애라 모아봤자 얼마나 되겠나 싶었는데 힘으로 살과 근육들을 모으니 제법 봉긋하니 볼만했다. 혀를 빼고 입으로 물까 하다가 입으로 빠는 것보단 손으로 문질러 주는 게 하림이에게 거부감이 덜 들 것 같아 양손 검지로 젖꼭지를 꾹 눌렀다. 봉긋하게 모은 가슴 덕분에 그냥 누를 때보다 더 쑥 들어가 감촉이 좋았다.
“아…….”
무릎으로 하림이의 것을 문질렀더니 바로 듣기 좋은 신음이 흐르면서 하림이가 몸을 뒤틀었다. 쿠션을 쥔 손이 하얗게 샜다.
“기분 좋지.”
예쁜 색의 유륜을 모양 따라 엄지로 그림 그리듯 했더니 유두가 엄지에 짓눌려 점점 딱딱해졌다. 입술을 깨문 하림이는 신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게 더 좋은 소리가 돼 주었다. 점점 밀려오는 흥분을 정신 놓지 않고 참는 게 서하림이랑 잘 어울려서. 고고한 선비같이, 순결한 신부님처럼.
“빨아주면…… 기분 더 좋을 거야. 손보다 훨씬. 뜨겁고 촉촉한 입으로 빨아주면, 너도 알지. 혀도 있고 이빨도 있어서 네가 원하는 만큼.”
눈을 꾹 감은 서하림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아…… 싫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하림이의 젖꼭지는 엄지에 짓눌려 민감해진 상태였다. 손톱을 세워 누르니 하림이가 아프다며 내 손을 잡았다.
“이 정도도 아파? 알겠어.”
색이 좀 더 짙어진 게 아파도 잘만 하면 그게 쾌락이 될 수 있을 텐데. 손톱 대신 손가락을 이용해 유륜을 꼬집듯 잡았다. 아…… 진짜 이대로 입에 넣어 빨고 싶다. 하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하질 못하니 심술이 돋아 손가락에 힘이 조금 실렸다. 유륜을 꼬집은 상태라 젖꼭지 쪽으로 피가 몰리는지 그 부분만 색이 변해갔다.
“아파…… 아파 김동규…….”
“이것도? 그럼…… 빨아도 돼?”
“아니, 아, 아프게 하지 마, 윽, 하으!”
아래를 계속 자극하며 유두를 꼬집었다가 문질렀다가를 반복했더니 더 이상 입술을 깨물며 누르지도 않고 그대로의 신음이 나왔다.
“아아, 도, 동규야…… 그만, 그만하라고…….”
“쌀 거 같아?”
“아, 김동규…… 아래 그만 좀…… 으으.”
“말도 없이 싸면 안 돼. 알았지?”
속옷에 한 방울도 양보할 수 없다. 만약 속옷에 사정하면 다 핥고 빨아서 먹을 거다.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아래를 건들지 말라는 거 보니 곧 사정하려는 듯싶었다. 나도 급하긴 마찬가지여서 하림이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리고 내 것을 맞붙였다.
“이, 이런 짓 싫다고…… 내가 싫다고 했잖아.”
“알았어. 아프게 안 할게.”
허리를 움직여 하림이의 것과 문지르기 시작하자마자 내가 먼저 사정했다. 이제 고작 한 번 싼 거라 죽지도 않은 내 것을 계속 하림이에게 비비면서 입을 맞췄다.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겠는지 하림이의 입가로 자꾸만 침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아까워 개처럼 입 주변을 핥아댔다.
입을 맞추면 내 입안에서 신음이 울렸다. 그게 꼭 하림이의 목소리를 삼키는 것만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만족할 만큼 입을 맞춘 뒤에 하림이의 것을 먹고 싶어 하림이의 요도 구멍을 막은 채 손을 움직였다. 신음은 참지 못하겠고 입은 맞춰오고 숨은 쉬어야겠을 때 하림이가 고개를 돌려 입술을 뗐다. 그때마다 하림이의 입술을 핥고 콧구멍을 핥고 속눈썹을 핥으며 예쁜 얼굴에 영역 표시를 하듯 침을 처발랐다. 하림이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을 뱉을 때마다 퓨즈가 나갈 것만 같았다.
“우리…… 둘 다 기분 좋은 정도만 하고 끝내자. 아프게 안 해.”
막고 있던 하림이의 것을 입에 물고 세게 빨았더니 하림이가 소리를 지르며 사정을 했다. 남김없이 삼킨 뒤에 고환부터 혀로 올라오며 핥아주었다. 힘을 줘 근육이 선 허벅지도 좋았고 바르르 떨리는 신음도 좋았다. 그래도 이번엔 아프게 하지 않아서 그런가 울먹이는 소린 없다.
사실 맘만 같으면 지금 당장 삽입을 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괜히 좋은 분위기 망칠 것 같아 손가락으로 구멍 주변을 꾹꾹 누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안 돼, 하지 마…… 응?”
“안 해. 안 할 거야. 네가 하지 말라면…… 안 해. 그냥 만지기만 하는 거야. 빨지도 않을게. 혀도 안 대. 간지럽고 기분 좋을 거야.”
입에는 하림이의 것을 물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다른 감각이 더 살아나니까. 혀를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양손 엄지로 하림의 뒤를 살살 눌렀다. 꾹 닫힌 것을 위아래로 쓸기도 하고 양옆으로 쓸기도 했다. 저걸 열겠다는 의지는 접어 두었으므로 그냥 가볍게 살을 쓰는 정도였다. 그 덕분에 하림이의 촘촘한 주름이 느껴졌다. 내 침입을 막기 위해 힘을 줘 입을 다물고 있지만 손가락이 주름 위를 쓸어댈 때마다 하림이가 상상 속에서나 듣던 소리를 자꾸만 내뱉었다.
“아프…… 아, 아프지 않게…….”
“응, 응.”
너무 좋다……. 신음 소리가 이렇게 예쁠 수도 있는 건가. 헉헉거리는 짐승들의 소리도 야동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소리도 아닌 내 상상 속에서나 구현하던 소리라니.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자꾸 이를 세워 하림이의 것을 빨게 된다. 아프게 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쉽지가 않다.
하림이의 뒤를 지분거리다 사정한 두 번째 정액을 손가락에 묻혔다. 오일은 아니지만 미끈거리는 게 생기자 하림이의 주름이 더 잘 느껴졌다. 마치 내 지문이 된 것 같다. 하림이 주름 모양으로 지문이 된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발기하고 흥분하겠지. 그런 어이없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아직은 이성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나도.
하긴. 정신 놓고 하림이 젖꼭지 빨아 댄 거나 뒤를 핥아댄 거나 괜히 좀 너무 지나치게 좋아했지. 그래서 하림이가 성행위를 부담스러워하게 됐고.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당장에라도 하림이에게 삽입하고 싶은 다급한 욕정이 아니라 하림이의 벽을 녹여낼 여유였다. 그 여유가 얼마나 많을지 얼마나 버틸지는 나 스스로도 장담할 순 없지만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정액 덕분에 마치 뒤가 젖은 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 그런데도 용케 손가락 안 쑤시고 있는 것만 봐도 진짜 많이 여유로워진 거였다.
“솔직하게 말해봐. 기분 좋아, 안 좋아.”
싸지 않고 참으려고 했는지 하림이의 두 번째 사정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럼 뭐 해, 입안에서 아예 빼버리지 않으면 결국 사정하게 될 건데.
꽤 오래 참은 사정을 해서인지 하림이는 팔로 눈을 가리고 크게 할딱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부푸는 가슴을 빨고 싶었지만 하림이 위로 올라와 팔을 거둬냈다. 까만 눈이 촉촉했고 열에 들떠 반질반질했다.
“거짓말하지 말고. 좋아하잖아.”
“……기분 좋으면. 좋다고 그러면. 끝까지…… 할 생각이야?”
“아니.”
“아…….”
하림이의 허벅지를 하나로 모아 잡고 그 사이에 내 것을 밀어 넣었다. 바르르 떨며 눈을 감는데, 진짜로 삽입을 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프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긴 속눈썹은 내 침인지 하림이의 땀인지 모를 것으로 젖어 있었는데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파르르 떨어대는 게 애간장을 녹였다. 그만큼 하림이 얼굴에 가까이 붙어 있었다. 신음을 더 잘 듣기 위해서였다.
“좋, 다고 해. 너도 좋다고…… 좋아한다고.”
“응으…… 하아…….”
진짜로 섹스하듯 퍽퍽 세게 치댈 수도 있었으나 부드럽고 아프지 않은 걸 바라는 하림이를 위해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탱탱한 허벅지가 날 조이는 게 끝내줬다. 움직일 때마다 정액이 튀어 하림이의 아랫배와 가슴을 적셨다. 하림이는 연신 몸을 뒤틀고 머리맡에 있는 쿠션을 잡았다가 내 어깨를 잡았다가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허리를 뒤로 쭉 빼 귀두가 허벅지 사이에서 빠져나오자 뿅 하는 귀여운 소리가 났다. 정액 덕분에 하림이의 허벅지가 질척한 탓이었다. 다시 허벅지 사이로 좆을 맞추고 밀어 넣자 하림이가 죽으려 했다. 정말 넣은 것도 아닌데 이 정도로 느끼는 게 신기했다.
달달 떠는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동그랗게 곱은 발가락에 입을 맞추다가 입에 넣어 빨아댔다. 젖꼭지 아니니까 이건 빨아도 되겠지. 혀에 예쁜 모양의 발톱이 자꾸 걸렸다. 윗니로 발톱을 깨물면서 사정했다.
이젠 다 식어 차가운 기운이 거의 사라진 아이스팩을 하림이의 볼에 대고 눌렀다. 얼굴이 온통 붉어져 어디가 맞은 뺨인지 구별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서하림은 계속되는 행위에 두 번쯤 더 사정하더니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몇 번째 싼 건지 모르겠지만 사정은 체력 소모가 큰 일이고 하림이는 몸이 약한 애라 과도한 쾌락에 기절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정신을 잃고 인형이 된 하림이 입에 내 것을 물리거나 어차피 기절한 거 뒤에 한 번 넣어볼까 하는 충동이 강렬하게 들었지만 허벅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밤은 길었고 넓은 집엔 나와 서하림 단둘뿐이었다. 하림이는 기절할 때까지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좋아 기절한 것만 봐도 우리의 첫 섹스가 그렇게 먼 일은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더 이상 나올 게 없을 때까지 허벅지 사이에서 놀다가 하림이를 안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늘어진 하림이를 씻기면서 거품 묻은 손으로 온몸을 특히 엉덩이 사이를 오래도록 만져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뽀송하게 말려준 뒤 잠옷에 방울 모자에 안대까지 씌워 눕히고는 마지막으로 하림이 손을 써서 마무리 자위를 했다. 피날레치곤 정액은 얼마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일어나 학교를 갔지만 서하림은 결석이었다.
방학에도 과외는 계속 이어졌다. 면접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국문과생이 되는 미래를 선택했다. 나름 열심히 쓰고 고치기는 또 수도 없이 고쳤던 공대 버전 원서 파일을 지우는데 마음이 조금 쓰렸다.
누군가는 정말 멋진 공학도의 마음을 가지고 공대를 지원할 테고, 비록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기에 복수 전공을 듣는다고 해도 전국에서 올라온 수재들을 이기지 못하고 전과는 무슨 과락이나 안 받으면 다행인 대학 생활을 보낼 수도 있다. 그래도 오랜 시간 공대 하나 보고 달려온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이 열심히 전화를 돌려 비창작 비어문 과를 가더라도 등단을 한다는 전제하에 장학금을 주는 방법을 모색해 보는 건 어떠냐고 백일장에 건의를 넣었다. 하지만 회의 결과 나 하나만을 위해 예외 사례를 둘 수도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선생님은 나름 기대를 걸어본 모양인데 나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아 담담히 공문을 받아들였다.
말이 쉬워 등단이지. 고등학교 백일장처럼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겨우 세 학년으로 한정된 풀 안에서 1등 해 먹는 건 어떻게 요령을 피우거나 적당히 재능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지만 스무 살부터 죽기 직전까지 우리나라 국적을 가진 모든 성인이 참여하는 프로의 세계를 뚫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냥 대학생 되면 시도나 해볼까 하는 정도였지 꼭 등단을 해야 한다고 하면 될 자신은 없었다.
물론 등단작들 분석하고 1년 혹은 그 이상 창작에 몰두하면 재능이 없는 건 아니니 가능할 수도 있지만 내 우선순위는 무조건 학점, 장학금, 빠른 취업 그리고 높은 연봉일 뿐 글 쓰고 등단하고 뭐 이런 건 우선순위에서 밀려도 한참 밀려 있는 것들이었다.
면접 연습하는 동안 대학생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하니 굉장히 우울해졌다. 그런 나와는 다르게 서하림은 선생님의 질문들에 똑똑하게 대답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선생님이 방을 나가자마자 서하림을 잡아 내 허벅지 위에 앉혔다.
“주말에 할아버지 보고 왔다고?”
“응.”
손바닥에 하림이의 날개뼈가 담겼다.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뭐라셔. 완전 얘기 다 끝낸 거야?”
“응.”
나는 이제 부드럽고 아프지만 않으면 하림이가 몸을 만져대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이렇게 키스를 하면서 몸을 더듬어도 그냥 하림이 살이 좋아서 비비는 거라면 하림이도 딱히 싫단 말을 하지 않았다. 성감대인 유두나 사타구니나 엉덩이 같은 곳들은 좀 다른 얘기긴 한데, 아무튼 더 이상 나 혼자 발정 나서 헉헉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 정도가 하림이가 감당할 수 있는 나였고 나도 굳이 그걸 부시고 싶지 않았다.
손깍지를 끼고 볼을 만지는 딱 그 정도의 온도로 스킨십을 하면 오히려 하림이가 아닌 척 안겨 오기도 했다. 왜 그럴까 몇 날 며칠 고민을 해봤는데 어릴 때부터 엄마도 아빠도 워낙 바빴어서 무의식중에 애정 결핍이 생겼고 그래서 살이 닿는 가벼운 스킨십을 좋아한다는 결론을 냈다. 내 생각이지만 굉장히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요즘은 키스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잘했어.”
입술에 살짝 버드키스를 했다.
“뭐라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나 보라고 백날 누워계셔도 나는 내 생각 안 꺾을 거고 이렇게 고집 부리실 거면 나도 할아버지 핏줄이라 한 고집 한다는 거 보여드리기 위해 바로 해외로 갈 수밖에 없다, 유학 자금은 엄마로도 충분하고 정 뭐하면 아빠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부탁드릴 거라고. 비행기 지금 바로 예매할 테니까 공항으로 마중은 나와 주세요, 했지.”
“와 세게 나갔네.”
“결제 직전까지 갔어. 근데 유학은 진짜 갈 거야. 아무튼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머리 싸매고 끙끙 앓더니만 냉수 열 잔 들이켜고 대학원이든 취직이든 해외에서 하더라도 학부는 무조건 한국에서 마치라면서 더 이상은 양보 못 한대. 쨌든 졸업만 한국에서 하면 되는 거니까 교환학생은 되는 거겠지?”
서하림은 커다란 날개를 갖고 있어 어디든 마음껏 날아간 생각만 한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도록 척박한 땅에 뿌리박힌 나무였다. 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으니 넓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서하림에게 더 가까워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필사적으로 뿌리를 키워 물을 빨아들인, 지나치게 커진 나무. 조금이라도 더 햇빛을 받고 한 방울이라도 더 흡수하기 위해 주변 식물들을 모조리 죽이고 혼자 남은, 그러면서도 예쁜 새가 언제든 날아와 쉴 수 있도록 풍성하고 푹신한 잎사귀를 틔우고 휘황찬란한 꽃을 피우고 새가 목을 축일 달콤한 열매까지 부지런히 맺게 하는 그런 나무. 내게 둥지를 틀어 달라며 새에게 구애를 하는 참으로 이상한 나무였다.
“알아봤는데 영국이나 미국, 독일이 제일 좋은 거 같아. 근데 나 독일어 진짜 일상 회화만 조금 할 줄 아는데 지금부터 시작해야 되나.”
“난 이히리베디히랑 구텐탁밖에 모르는데 회화를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하지. 넌 뭐든 금방 배우니까 지금 시작해도 괜찮을걸.”
서하림이 나름 열심히 찍고 찍혔던 3분 과학은 3학년 1학기를 끝으로 더 이상 하림이의 영상이 올라오지 않았다. 영재원 동기였던 그 친구가 자신의 원서와 면접을 위해 시작한 거란다. 1학년 때부터 과학 관련 콘텐츠를 열심히 올려도 조회 수나 구독자 수가 좆창나니까 2학년 겨울방학에 서하림에게 급한 SOS를 친 거였고. 굉장히 불손한 의도가 아닐 수 없다. 서하림에게 전해 들은 말에 또 따르면 동기가 하는 말이 단기간에 유명해지려면 잘생긴 사람이 나와야 하고 자기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긴 게 서하림이었고 어릴 때부터 워낙 친했던 친구 부탁이라 수락한 일이라고 했다. 앞으로는 동기만 나오는 영상이 올라올 예정이고.
하지만 지난 반년 넘는 시간 동안 서하림 없는 영상이 올라오면 댓글로 다들 서하림만 찾아댔고 조회 수도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내가 동기라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연락해서 비정기적이라도 좋으니 계속 함께하자고 했을 테지만 뭐 둘이 알아서 할 얘기고 서하림 동영상을 다른 사람이 더 안 봐도 돼서 좋았다.
독일어 하는 서하림을 상상하니 굉장히 멋있고 섹시했다. 독일어 잘은 모르지만 좀 딱딱하고 중후한 느낌이지 않나. 우리 학교는 제2외국어가 중국어랑 일본어밖에 없고 나는 중국어를 선택해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외엔 잘 모른다. 대부분이 일본어가 익숙하다고 죄다 일본어를 선택했는데 난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전혀 보지 않아 일본어나 중국어나 그게 그거였다. 참고로 중국어를 선택한 이유는 한자 공부를 겸할 수 있어서도 있고 하림이가 선택해서였다.
“아 사실 할아버지가 고집 안 꺾었으면 그냥 그 핑계로 최대한 빨리 해외 나가려고 했는데 좀 아쉽기도 하고?”
나를 보지 못하는 곳으로 날아가지 말아줘. 내가 닿지 못할 곳에 가지 마. 아무리 햇빛을 받고 물을 흡수해 하늘과 점점 가까워져도 나무는 땅에 붙어 있는 존재니까. 하늘은 수많은 것이 날아다닐 수 있는 넓은 곳이지만 이파리가 받는 일조량엔 한계가 있고 가뭄이 들면 땅이 말라가듯 내가 가진 것들은 너무나 빈약했고 내가 속한 환경은 조악했으며 한심했다.
그럼에도 나는 타는 목에 애써 침을 삼켜가며 모범 답안을 말해야겠지.
“인생 긴데 몇 년 늦는 게 뭐 대수라고.”
“그렇지?”
손에 쥐고 터트릴 수도 없이 커진 서하림을 정말 누군가 차를 몰고 와서 치고 가면 좋겠다. 내가 다리를 분지르고 염산을 뿌린대도 서하림을 품 안에 데리고 있을 수가 없을 거 같다. 조그맣고 어수룩하던 중학생이 아니라 곧 있으면 어른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눈도 못 뜨고 말도 못 하는 식물인간이 돼도 좋으니 누군가 하림이를 망가트려 줬으면. 내 손으로 서하림의 인생을 망치는 것보다 여러모로 더 쉽고 나을 것 같다.
“속독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네.”
나는 독서가 공부에 방해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책을 빠르게 읽곤 했다. 그랬더니 속독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책을 읽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문제 풀 때 지문 읽는 것에도 많이 도움 되고.
게다가 이번에 면접 준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 아무래도 백일장과 공대를 위해 주로 읽은 책의 종류가 문학과 과학에만 집중되어 있는 편이었는데 선생님이 면접용으로 인문, 역사, 철학 책을 몇 권 추천해 줬다. 10권 남짓한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으니 선생님이 더 읽을 수 있겠냐며 아예 목록을 통으로 뽑아주면서 읽을 수 있는 만큼만 읽으라고 했다. 그래서 목록에 있던 책들을 주말 동안 죄다 읽어버렸다.
“그냥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빠른 정도예요.”
“보통 사람들 다 죽었다. 아무튼 갑자기 많이 읽어서 내용이 다 기억이 안 날 수도 있거든. 읽는 속도가 빠르니까 면접 준비하다가 네가 생각하기에 이건 까먹으면 안 되겠다 하는 부분은 몇 번씩 읽어서 확실하게 기억해 둬.”
“네.”
“선생님도 네 면접 답변 듣고 어떤 책 어떤 부분 다시 읽어야 할지 집어줄 테니까 걱정 말고.”
“……네.”
“뭐야. 못 믿겠다는 눈친데.”
“그건 아닌데요.”
“그럼?”
“그냥…….”
“그냥?”
내가 답을 할 것처럼 말을 흐렸더니 자기 차례가 끝나 휴대폰으로 놀고 있던 서하림도 내게 관심을 보였다.
“그냥…… 지금까지 준비해 오던 거랑 전혀 다른 거 준비하니까 시간이 좀 촉박한 거 같고…… 망하면 어떡하나, 차라리 딴 학교 준비하는 거였음 수시에 문특 있고 수상실적 비율이 크니까 맘 편히 안심하겠는데 여긴 문특이 없어서요. 쌩으로 내신이랑 생기부로 승부 봐야 하고.”
“상을 그렇게 쓸어갔는데 면접 가서 국문과 교수님들이 동규 네 이름을 모르는 게 이상하지.”
“면접 보는 중에 갑자기 똥 마려워서 대답 못 하면 어떡해요.”
“바지에 싸지만 마.”
“토하고 싶으면요?”
“삼키자.”
장난을 단호하게 커트하는 선생님의 말에 서하림이 빵 터졌다. 나도 따라 웃으며 불안함을 애써 감췄다. 마인드컨트롤, 마인드컨트롤.
서하림은 원래 수학을 오래 해서 그런지 면접 준비 시작한 첫 주만 좀 힘들어하고 그 뒤로는 아주 날아다녔다. 선생님 조수들이 만들어온 물리 관련 제시문을 읽고 척척 대답하는 게 신통방통한 수준이었다. 가끔은 선생님도 허를 찔리는 수준이라 조금 부럽기도 했다. 나도 기계공학과 면접이었으면 수리 자연 관련 질문이라 하림이만큼은 아니라도 명쾌한 대답들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수능은 거의 놓은 나와 달리 서하림은 전국 등수가 궁금하다며 수능 공부를 계속했고 과외 선생님 커리어를 위해 다른 대학교 의예과도 준비했다. 나는 그런 하림이의 주변을 알짱거리며 뭉친 어깨를 주물러 주거나 피곤한 등을 마사지해 주기도 하고 각자 다른 맛의 생과일 주스를 마신 뒤엔 키스로 서로의 맛을 알아가는, 제법 풋풋한 고등학생의 연애를 하며 초록의 여름을 지내는 중이었다. 뭐든 열심히 그것도 잘 해내는 하림이가 대견하고 존경스러웠다.
개학을 하루 앞둔 광복절.
서하림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하필 이번 주는 서하림 부모님이 해외여행을 갔고 이모님도 휴가, 아주머니도 휴가라 그 큰 집이 텅텅 빈 상태였다. 아파서 끙끙대는 하림이를 챙기는 건 나뿐이었다.
병원에 가자고 해도 싫다, 그럼 의사를 부르자고 해도 싫다. 부모님이 알게 하는 게 죽어도 싫다고 이불 속에서 앓는 걸 옆에서 보고 있는 것도 죽을 맛이다.
처음엔 그냥 단순히 코감기인가 했는데 목으로 옮겨갔고 목이 붓자 열이 미친 듯이 올랐다. 어제부터는 몸살감기도 왔는지 아파하는 소리가 더 심해져 약 먹는 것도 힘들어했다.
“하림아…… 그냥 병원 가자, 응?”
목이 많이 부어 말도 제대로 못 하기 때문에 하림이는 고개를 저어 의사를 표현했다.
“이러다 죽겠어.”
찬물을 적신 수건으로 하림이의 얼굴을 닦았다. 나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하림이가 열이 오른 다음부터는 아예 하림이 방에서 지냈다. 새벽이고 낮이고 조금이라도 아픈 소리가 들려오면 바로 일어나 몸을 닦아주고 손도 잡아주고 죽도 먹이고 약도 먹였다.
“오늘이나, 내일…… 지나면 괜찮을…… 것…… 같아.”
물도 침도 못 삼키는 게 꾸역꾸역 말을 하면서 희미하게 웃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애처롭게 기침을 하다 목이 아프다며 엉엉 울었다. 휴지를 가져와 하림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내 눈물도 훔쳤다. 이렇게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다 아렸다. 수액이라도 좀 맞아서 열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는데, 발을 동동거리며 애타는 내 맘도 모르고 혼자 아파하고 있으니.
수건으로 온몸을 몇 번이나 닦아줬지만 열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약국에서 사온 해열제를 입에 물고 물을 털어 하림이와 입을 맞췄다. 아…… 입안이 엄청 뜨겁다.
목구멍 너머로 약을 넘기고 나서도 하림이가 내 입술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시원한 물 때문인 것 같아 물을 한입 가득 물고 하림이에게 넘기려는데 방금 전에 약을 삼키느라 목이 아팠는지 따갑다고 우느라 물이 죄다 베개로 흐르고 말았다.
“하림아, 많이 아파? 아프지……. 해열제라 약 기운 좀 돌면 괜찮을 거야.”
하림이가 아프다며 울면 나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하림이를 간호했다.
다행히 약 기운이 돌았는지 많이는 아니지만 열이 살짝 떨어졌다. 조금 살 만해진 하림이는 지쳐 잠에 들었다. 자는 동안 열이 좀 더 떨어지라고 새로 시원한 물을 가져와 수건을 적셨다.
잠옷 단추를 하나하나 풀자 평소처럼 하얀 몸이 아닌 열 때문에 붉어진 몸이 보였다. 잠옷을 활짝 열어젖히고 팔을 뺐다. 원래도 잠잘 때 워낙 숙면하느라 죽은 듯이 잠자는 편인데 아픈 데다가 약까지 먹어서인지 깰 것 같지가 않다.
식은땀에 젖은 이마부터 귀 뒤, 목, 쇄골, 팔, 겨드랑이, 가슴, 옆구리, 배…… 젖은 수건이 몸을 쓸 때마다 하림이가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아파하는 소리도 계속 들렸지만 시원한 게 좋은 듯했다.
그다음으로는 상의 단추를 잠근 뒤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하림이가 깨어 있을 땐 바지만 벗겼지만 자고 있을 땐 그냥 다 발가벗겼다. 치골과 허벅지, 무릎, 정강이, 발목, 발바닥까지 수건으로 닦고 다리를 M 자로 세워 엉덩이와 무릎 뒤, 종아리까지 꼼꼼히 닦았다. 그리고…… 아랫배와 하림이의 성기 주변, 고환, 회음부…… 마지막으로 뒷구멍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아픈 탓에 하림이의 것이 조금도 발기하지 않았고 하림이는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입술이 자꾸 바싹 말랐다. 혀로 몇 번이나 입술을 축여도 끝내주는 장면이었다. 아파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신음을 흘리며 다리를 벌리고 있는 서하림이라니…….
이렇게 온몸을 다 벗겨 닦아줄 땐 중간중간 하림이가 깨곤 했지만 오늘은 대놓고 성기를 만져대고 뒤를 눌러대도 깨지 않았다. 약 기운도 약 기운이지만 하림이 말대로 지금이 가장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으음…… 하으…….”
옷 입은 채로 하림이 허벅지에 내 것을 비비다가 이대로는 일을 칠 것 같아 하림이의 속옷과 바지를 올렸다. 하림이의 신음 소리와 내 거친 숨소리가 맞물려 시끄러웠다.
아픈 애를 건들 순 없어 하림이와 손을 맞잡고 다른 손으로 내 것을 꺼내 쥐었다. 나는 하림이의 신음을 듣기 위해 최대한 내 숨을 참아 삼켰다. 열에 올라 아프나 섹스해서 아프나 어차피 아파서 내는 소리는 같았기 때문에 눈을 감고 하림이에게 박아대는 상상을 하며 자위를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하림이 때문에 사정은 빨랐으나 문제는 하림이의 신음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티슈로 손에 묻은 정액과 바닥에 떨어진 걸 닦은 다음, 자위를 또 해야 하는지 한다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하림이는 계속 이렇게 아픈 소리를 흘려댈 텐데 차라리 밖에 나가 있는 게 좋은 건 아닌지 그래도 언제 깨어나 울지 모르는데 옆에 붙어 있는 게 좋을지 제일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적나라한 하림이의 소리는 참기가 힘들었다. 자꾸 나를 끊임없이 충동질하고 시험했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릿속이 아득했고 그런 머릿속을 하림이의 소리가 헤집으며 괴롭게 만들었다.
“나, 난, 진짜 참으려고…… 참으려고 그랬어.”
코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벌린다. 그 안에 빨간 혀가 움직이며 뜨거운 숨을 뱉어댔다. 우는 소리도 섞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림이의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엉덩이 아래에 마른 수건을 깔았다.
“하아…….”
좀 전에 시원한 물로 닦아줬는데도 하림이의 몸은 다시 뜨끈하게 달아올라 내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기까지 했다.
“네가 자꾸…… 자꾸만 그렇게 소릴 내니까, 참으려고 노력 진짜 많이 했는데, 했거든? 근데 아…… 누가 아픈데 소릴 그렇게 내…… 자꾸 딴생각 들게.”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좆에서 좆 물이 새지 못하게 막고 다른 손으로 하림이의 뒷구멍을 눌렀다. 잠인지 기절인지 제정신이 아니라 엄지에 조금만 힘을 줘도 쉽게 열렸다.
“하림아. 하림아 일어나 봐. 해도 돼? 해도 되지? 응?”
귀두를 막고 있던 손도 떼고 구멍을 벌렸다. 분홍색의 주름들이 옆으로 늘어지며 붉은 속살이 보였다. 만약 하림이가 안 된다고 한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감언이설로 하림이를 꼬셔 낼 생각이었다. 이대론 순순히 못 물러나.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입을 털어야 한다면 밤새 털 것이다. 결국엔 하림이에게서 넣어도 된다는 말을 얻어 낼 자신이 있었다.
“서, 서하림, 일어나, 응? 아 제발…….”
아래에서 손을 떼고 하림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림아, 일어나. 나 해도 돼? 응? 너도 괜찮지?”
닫혀 있던 눈꺼풀이 반쯤 열리며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흰자는 열 때문에 붉었고 눈물도 고여 있었다.
“서하림, 들려? 깼어?”
“으응…….”
“하림아 나 해도 되지? 응? 한다? 어?”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날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힘없이 흔들리는 고개를 따라 시선을 마주치며 하림이의 대답을 보챘다. 하림이의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자꾸만 눈을 감으려고 하길래 엄청 다급해졌다. 이대로 기절하면 허락을 받을 수가 없다. 하림이 입에서 해도 된단 말을 들어야만 했다.
“하림아 정신 차려!”
“…….”
아프다는 말이 쇳소리가 섞여 들렸다. 거의 한숨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아프게 안 할게. 응?”
하림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결국 눈동자가 뒤집히며 눈이 감겼다.
“아…….”
하림이의 어깨를 잡은 손이 떨려온다. 진실의 맹세를 하림이의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신했다. 말로 해주고 싶어도 하림이가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이 정도면 굉장히 양심적이고 신사다운 약속이었다.
대답을 보채며 참았던 사정을 시원하게 풀어 하림이의 구멍 위로 싸질렀다. 닫혀 있는 곳 위로 귀두를 붙이고 문질렀다. 문지를 때마다 어서 들어오란 듯이 구멍이 살짝 벌어졌다. 정말 이대로 진짜 넣어도 되는 거지. 꿈은 아닐까. 하림이 안으로 넣는 순간 깨버리는 건 아니겠지.
젤 대신 윤활제가 되어줄 정액도 묻혔겠다, 이대로 넣기 위해 허리에 힘을 실었다. 귀두 크기에 맞춰 벌어지는 구멍이 삽입을 무기력하게 받아냈다. 한 1cm는 들어갔을까. 나는 문득 하림이도 나도 처음인 이 섹스에서 피를 보고 싶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박았다간 찢어질 게 분명했다.
삽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삽입을 멈추고 하림이의 책상에서 로션을 찾아왔다. 그냥 물 같은 스킨보단 좀 더 나을 것 같았다. 여름 제품이라 그런지 많이 미끄럽진 않았지만 바디오일을 가지러 욕실까지 갈 정신머리가 내겐 없었다.
손바닥 한가득 로션을 때려 붓고 손가락에 발랐다. 안으로 손가락이 좀 수월히 잘 들어갈 수 있게 구멍 위아래를 잡고 벌렸다. 검지는 무리 없이 들어갔다.
빳빳하고 좁은 입구를 지나 닿은 속살은 손가락이 녹을 정도로 뜨거웠고…… 좁고, 축축했다. 하림이의 입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손가락을 압박해 오는 속살은 부드러운 것 같기도, 쫄깃한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됐든 이런 걸 알아버렸으니 앞으론 하림이의 입으로는 만족을 못 할지도 모르겠다. 또 펠라를 시킬 생각이었는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바로 쑤셔 박는 게 훨씬……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곧바로 손가락을 두 개 더 넣었다. 정신을 잃으면 신음조차 내지 못하는 건지 예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퍽 아쉬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빨리 풀어준 뒤 박아 넣고 밤새도록 싸고 싶다.
아픈 와중에도 속살이 손가락을 꽉꽉 물어댔다. 열감기 덕분에 너무 뜨거웠지만 어차피 내 좆도 존나 뜨거울 거라 이 정도는 괜찮았다. 오히려 뜨거운 안쪽이 내 성욕을 더 부채질하며 손가락이 아닌 내 것을 바라는 것처럼 요망하게 굴었다.
세 개의 손가락을 아무리 쑤셔대도 내 것을 넣기엔 조금 빠듯할 것 같았다. 새끼손가락까지 꾸역꾸역 밀어 넣어 앞쪽으로 손을 굽혔다. 아마도 이 어딘가가 전립선일 것이다. 하림이가 기절한 상태라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쑤셔대도 반응을 볼 수 없어 어디가 하림이의 전립선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하림이의 앞이 점점 힘을 받았다.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이 정도면 훌륭했다.
비뇨기과 의사가 된 것처럼 손가락들을 놀려 그 좁은 곳을 눌러댔다. 분명 이 어딘가가 전립선일 텐데…….
“으…….”
남성의 성기란 얼마나 단순한 것인지. 어딘가를 딱 누르자 반도 발기하지 못한 하림이의 것이 정액을 꿀럭 토해냈다. 몸도 조금 뒤틀고 얕은 소리도 들렸다. 손가락을 물고 있는 안쪽도 순간 좁아졌다 다시 풀리는 게 느껴졌다. 기절한 뒤로 처음 나온 반응이었다. 힘을 주지 않아도 좁아터진 곳이 수축하며 손가락을 한데 모으는 감각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사정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손가락을 빼고 다시 두 개만 삽입했다. 그대로 있는 힘껏 브이 자로 벌려 안쪽에 로션을 쭉 짜 넣었다. 붉은 속살이 하얀 로션에 묻히는 꼴이었다.
손에 다시 로션을 털고 성기에 잔뜩 처발랐다. 약간 요거트를 묻힌 것 같은 모양새였다. 로션의 남은 양을 보니 조금 부족할 듯싶었지만 어차피 나중엔 정액이랑 섞여 굳이 필요가 것이다.
이제 정말로…… 하림이와 하나가 된다. 19년 내 평생 얼마나 고대해 온 순간이었던가. 서하림은 비록 내게 처음을 따이고 뒤를 먹히게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천사이며 빛이었고 깨끗하고 숭고한 백합일 것이다.
하림이의 잠든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삽입했다. 분명 아무 의식이 없을 텐데도 하림이는 내 것을 빨아 먹을 것처럼 조여 댔다. 내가 굳이 밀어 넣지 않아도 안으로 움직이며 나를 종용했다.
로션을 그렇게 짜 부었는데도 빡빡하다. 심지어 기절을 해서 힘도 하나 들어가지 못했을 텐데도.
고추가 타들어 갈 것 같다. 일반적인 체온보다 몇 도나 높은 속살에 내 것이 녹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거기다 좁은 하림이의 안쪽은 압박감도 상당해서 끝까지 밀어 넣고 나서 어떻게 허릴 움직여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시간이 필요했다. 하림이의 것에 익숙해지는 시간. 덜덜 떨리는 허벅지는 하림이의 안이 얼마나 좁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1분 1초가 영겁의 시간으로 변모한다. 내일 아침은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오늘이 지구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입술을 지나쳐 턱까지 흐른 코피를 대충 티셔츠로 닦아냈다. 이제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았다. 수술 이후로는 코피가 나면 절대 좋은 게 아니니까 병원에 꼭 와야 한단 말이 떠올랐다. 내일 죽더라도 하림이와의 섹스는 하고 죽을 것이다.
허리를 반쯤 뒤로 물렸다. 뜨거운 체온에 녹은 로션이 물처럼 흘러나왔다. 쫀득한 속살이 살짝 딸려 나온 걸 본 것도 같은데.
어쨌거나 반이라도 나온 게 아쉬워 제법 강하게 들이박았다. 좀 전에 천천히 넣을 땐 몰랐는데 귀두가 닿는 쪽에 갑자기 확 좁아지는 곳이 있었다. 막힌 건 아닌데 제법 좁은 곳이라 내 것이 다 들어가질 못했다.
동네 이비인후과를 가도 볼 수 있는 인체 내부 모형을 떠올렸다. 아 설마 이 부분이 그곳인가? 옆으로 꺾어지는 거기.
하림이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몇 센티의 뿌리가 뜨거운 속살과 맞닿고 싶다며 움찔거렸다. 나는 내 털까지 안으로 밀어 넣을 기세로 피스톤질을 했다. 좁은 곳을 귀두가 자꾸 쳐대자 조금씩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몇 번 더 허리를 움직이니 끝까지 들어가 박힐 수 있었다.
안쪽의 또 다른 구멍을 따먹은 듯한 쾌감은 곧바로 사정으로 이어졌다. 정액이 최대한 하림이의 안쪽으로, 깊은 곳으로 뿌려질 수 있도록 성기와 요도 구멍에 힘을 쏟아부었다. 만약 하림이가 저번처럼 내 것을 입에 물고 삼켜 준다면 하림이의 몸 안까지 전부 내가 범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중에 꼭 그렇게 되도록 위아래로 정액을 먹여줘야지. 나올 게 없어 고환이 쪼그라드는 한이 있더라도.
사정 후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잔뜩 민감해진 성기를 하림이의 안쪽에 비비고 치댔다. 사정 직후라 몇 배는 더 예민해져서인지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데 정확히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서하림은 내 아래 깔려 정신을 잃은 채 예쁜 인형처럼 흔들릴 뿐이었고 내 신음과 숨소리만이 우리의 주변을 채워갔다.
쉬지도 않고 허리를 처박아대면서 다시 성기가 꼿꼿해진 것을 느꼈을 때 나는 성기를 뒤로 물러 쭈욱 빼냈다. 의식 없는 주인과는 달리 하림이의 안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어 빠져나가는 내 것을 물어대며 아쉬워했다. 귀두가 구멍 밖으로 나오자 찔걱이는 소리가 나면서 정액과 로션이 줄줄 샜다. 기절한 탓에 한껏 쑤셔졌던 구멍이 끝까지 닫히지 못하고 하얀 물을 흘려댔다.
그 위에 귀두를 붙여 뭉근하게 움직이니 기분이 끝내줬다. 뒷구멍부터 회음부까지 귀두로 훑어댔다. 구멍은 당장에라도 내 것을 삼키겠다고 제 위를 스칠 때마다 빠끔거리며 벌어졌다. 뇌가 전부 녹아 찰랑거리는 느낌이다. 오로지 번식이나 세포분열밖에 모르는 단세포동물이 된 것만 같다. 머릿속이 하얗게 태워지며 섹스 외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핏줄이 잔뜩 선 성기가 빨리 다시 하림이의 안으로 들어가겠다며 성을 냈다. 나도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으므로 잔뜩 젖어 녹진녹진한 하림이의 구멍으로 바로 쑤셔 넣었다.
“……으응…….”
강한 힘에 하림이의 몸이 위로 밀리면서 고개가 돌아갔다. 나보고 미치라는 뜻인지 색색거리며 벌어진 입에선 작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숨쉬기가 불편한지 가슴팍이 올라왔다 내려오기도 했다. 잠옷 위로 손을 더듬어 하림이의 유두를 꼬집었다. 의식 너머에서부터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가 진짜, 진짜로 환장할 정도로 좋았다. 사람을 홀려 죽인다는 사이렌의 노랫소리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
추삽질을 조금도 쉴 수가 없다. 하림이의 안을 내 좆으로 찢어발기고 잔뜩 붓게 해 말도 못 할 고통에 신음하도록 만들고 싶다. 하얗게 질려 식은땀을 흘리는 하림이에게 누군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도 그저 입술만 깨물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겠지. 뒷구멍부터 배꼽 안쪽까지 멍이라도 든 것처럼 내가 남긴 흔적은 오래도 하림이를 괴롭힐 것이었다.
하림이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어깨를 붙잡고 있는 힘껏 움직였다. 하얗고 긴 다리가 내 피스톤질에 맞춰 거세게 흔들렸고 침대 밖으로 나가 힘없이 흔들리는 고운 손은 가냘팠다. 정신을 잃었어도 쾌락을 느끼는 음란한 몸뚱이를 가진 서하림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살짝 웃음을 짓기도 했다. 나에게도 하림이에게도 충격적이고 강렬한 첫 섹스였다.
사정을 하고 나서 하림이의 위에 엎어져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오르가즘이 후희가 되어 잦아들 때까지.
이대로 잠에 들면 좋을 것 같지만 하림이를 씻기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당해 놓고도 모자란지 하림이의 내벽이 내 것에 붙어왔다. 그래서 반쯤 뺐다가 그냥 다시 다 넣었다. 하림이의 잠옷 상의를 벗기고 발목에 걸려 달랑거리던 속옷도 아예 빼 던져 버렸다.
내 것이 하림이에게서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고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뗐다. 하림이가 정신이 있었으면 이대로 내 허리에 다리를 둘러 좀 더 편하게 갈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질 않으니 땀으로 미끄러운 몸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했다.
욕조에 등을 기대앉아 물 온도를 맞추고 차오르길 기다렸다. 내 품에 쏙 안겨 있는 하림이의 안은 무척이나 포근했다.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하림이의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원래 하림이의 안이 내 자리인 양 익숙하고 친근했다. 그래, 우리는 원래 이런 상태가 맞는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림이의 뜨겁고 좁은 압박감이 이토록 기분이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정 후 완전히 발기가 되지 않은 지금 이 상태가 딱 괜찮았다. 풀 발기를 한 상태로 안에 들어가면 도저히 편하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쪼그라든 건 아니지만 적당히 힘을 받은 지금이 딱이었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 예쁜 주름들이 팽팽히 펼쳐질 만큼 벌어지게 만들던 내 것이 그때보단 줄은 상태라 내가 안에 싸놓은 정액이나 로션이 틈새로 새어나온다는 점. 하림이의 구멍은 무척 작기 때문에 반도 발기하지 않은 지금도 한가득 벌어져 있었지만 완전히 발기한 상태랑은 비교가 되질 않으니까.
심심한 시간을 하림이의 것과 젖꼭지를 쪼물락거리며 죽였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욕조를 점점 채워가는 물이 야속했다. 물이 가득 차는 걸 넘어서 욕조 밖으로 넘쳐흐를 때까지 나는 하림이의 고환을 만져댔다.
이대로 안에 계속 정액을 넣어 두면 하림이에게도 좋지 않을 일이라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하림이가 나와 마주 보게끔 안았다. 빼고 싶지 않았지만 하림이의 엉덩이를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내 것이 빠져나오면서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왔다. 하얀 물이 하림이의 안에서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하늘로 향해 기립한 내 것을 무시하고 하림이의 뒤를 열었다. 두툼한 것을 꽤 오래 물고 있어서 손가락이 수월하게 들어갔다. 최대한 안쪽으로 넣는다고 넣는데 아무래도 내 것에 비하면 손가락은 많이 부족한 길이었다.
그럼 내 걸로 빼주면 되지 않나? 나는 유레카를 외치듯 명쾌한 답을 찾아내 삽입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내 것을 밀어 넣었다. 하림이가 목을 울리더니 기침을 해댔다.
“……나.”
“깼어? 괜찮아?”
일부러 따뜻하기보다는 약간 미지근과 시원함 사이쯤 되는 물을 담았다. 하림이의 열이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하림이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지만 연신 기침을 해대느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울 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것 같진 않다.
“으…… 하…… 아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하림이가 목을 감싸 잡으며 괴로워했다. 나는 존나 당황해 하림이의 볼을 잡고 말을 계속 걸었다. 정신이라도 차리면 숨을 제대로 쉴 것 같아서.
“하림아, 내 말 들려? 하나에 숨 쉬고 둘에 내쉬어. 어?”
아이처럼 울음을 쏟아내는 하림이는 내 말에 고개를 저으며 할딱거렸다. 뜨거운 몸이 격하게 움직이느라 의도친 않았지만 하림이가 내 위에서 움직이는 꼴이 됐다.
“아아…….”
“하림아, 입 닫고 아무 말도 하지 마, 응? 목 아프잖아.”
듣기 좋은 신음이 정말로 괴로운 소리로 변해가자 내가 듣기가 힘들었다. 자꾸 뭐라고 쇳소리를 흘리는 하림이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 와중에 아파하는 하림이가 뒤를 조여대 죽을 것만 같았다. 아, 시발 진짜 큰일 났다. 괜히 아픈 애 건드려서 이게 지금…….
나 혼자 박아대던 것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강한 쾌감이 온몸을 꿰뚫었다. 하림이를 달래긴 달래야겠는데 이대로 계속 아파하면서 뒤를 조여 줬으면 좋겠다. 아까 하림이가 그냥 이대로 식물인간처럼 정신을 잃고 나만을 위한 섹스돌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었나. 그때의 나를 죽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한 내가 병신 같았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내 좆 때문에 하림이가 허리를 뒤틀며 뒤로 넘어갈 뻔한 걸 잡았다. 아프다고 우는 하림이에게 미안했지만 미안하지 않았고 죄책감이 들었지만 사랑스러웠다.
차라리 충격에 아예 정신을 다시 잃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렇게 아파하는데.
나는 하림이의 허리를 움켜쥐고 내 팔 힘으로 하림이를 들었다 놨다 하며 강제로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불쌍한 기침 소리 사이로 들리는 하림이의 허스키한 신음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섹스 중 가장 빠른 속도로 하림이의 안을 괴롭혔다. 땀이 흘러 눈으로 자꾸 들어왔지만 안중에도 없었다.
어느덧 하림이의 몸이 축 늘어지며 터질 것처럼 조이던 뒤에도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이미 한 번 하림이 안에 사정을 한 상태였고, 코피가 입술을 적시고 목을 따라 내려와 가슴팍을 더럽혔다. 건강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이 느껴졌지만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림이 안에 사정을 하고 싶었다.
나도 꽤 지친 상태라 하림이의 허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풀고 그냥 하림이를 껴안았다. 잠시 뒤 사정이 시작되며 눈앞이 새까매졌다. 정신을 잃은 건 아니었으나 잠시 몇 초 정전이 된 듯했다. 설마 나 방금 요단강 건널 뻔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하림이부터 빨리 정리해서 침대에 눕혀주는 게 급선무다. 줄어들었어도 커다란 내 것을 자비 없이 뽑아내고 하얀 물이나 정액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손가락을 휘저었다.
하림이를 안아 들고 일어났을 땐 현기증도 났다. 내가 생각해도 섹스에 미친 새끼 같다. 어질어질한 시야를 겨우 다잡고 하림이를 눕혀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머리는 도저히 못 말려주겠다. 잠옷을 입히는 데도 자꾸 초점이 안 맞고 식은땀이 나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죽더라도 하림이한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이 집을 나가서 쓰러져야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하림이의 휴대폰으로 내 것에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 기능을 켜 하림이 베게 바로 옆에 두었다. 배터리가 닳지 않도록 보조 배터리도 연결했다. 해열제와 진통제를 먹이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 밤은 집에 가서 자는 게 좋겠다. 전화를 연결해 뒀으니 많이 아파하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달려와야지.
아직도 내 좆에는 쫀득하게 붙어오던 좁은 살들의 감각이 살아 있어 다리가 살짝 후들거리면서 조금 과장을 보태면 좆이 빠질 것 같았다.
집에 오자마자 잠에 들었는데 밤새 하림이도 죽은 듯이 잠을 잔 듯했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이렇게 날 생각해 준다. 푹 자고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고 하림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열이 좀 떨어졌고 숨소리도 좋았다. 온몸에 피어 있던 열꽃도 좀 사그라들었고. 하림이 말대로 어제가 고비였나 보다.
속옷을 끌어 내려 뒷구멍을 확인했다. 옅은 분홍색이던 것이 색이 진해졌고 촘촘하던 주름들은 부은 탓에 탱탱하고 매끈했다. 뜨겁기도 무척 뜨거웠다. 실컷 혹사당한 이곳을 얼음으로 문질러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지를 올려주었다. 뭐, 깨면 해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나는 잠드는 시간을 제외하고 온종일 하림이의 옆에 앉아 언제 눈을 뜨나 기다렸다. 1초가 그렇게 긴지 살면서 처음 느꼈다. 하얀 걸 넘어 창백해진 얼굴을 닦고 입술에 물을 묻히고 시간이 되면 물약을 먹였다. 약을 먹을 땐 삼키면서 콜록거리느라 깰 법도 했지만 하림이는 여전히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저녁 약을 먹이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얼굴을 보는 내 심정도 점점 참담해질 무렵 서하림의 긴 속눈썹이 흔들렸다.
“하림아, 내 말 들려? 괜찮아? 깼어? 아픈 건 좀 괜찮아? 의사 부를까?”
어깨를 잡고 흔들며 하림이의 정신이 빠르게 돌아올 수 있도록 했다. 힘없이 달랑거리는 하림이의 가는 목과 머리통은 얼마나 서하림이 기운이 없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서하림이 내 손목을 잡는다. 흔들던 어깨를 놓고 양손으로 마른 손을 붙잡았다.
“…….”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쇳소리가 나면서 서하림은 또 심하게 기침을 했다. 텀블러에 미리 담아둔 따뜻한 물을 내 입에 가득 넣고 하림이와 입을 맞췄다. 꼴깍꼴깍 물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기침은 계속됐지만 물 덕분에 아주 조금은 괜찮아질 수 있었다.
기침이 진정되길 기다린 서하림은 목을 가볍게 감싸고는 고개를 저었다.
“말 못 하겠어? 많이 아프지?”
끄덕끄덕.
“의사 부를까?”
바로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더니 순식간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덕에 눈물이 흘러 귀를 적셨다.
서하림은 자신의 휴대폰을 뒤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 뒤 나에게 넘겼다. 액정에 뜬 이름은 ‘박선영 쌤’. 아마 의사 선생님인 것 같았다. 곧바로 들려오는 여보세요 소리에 다급하게 서하림이 얼마나 아픈지 설명했지만 잘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상대방이 알겠다며 한 시간 안에 도착한다는 말을 했다.
40분 뒤에 도착한 의사는 하림이에게 수액을 몇 개 놓고 내게 주의 사항을 설명한 뒤 내일 다시 오겠다며 사라졌다.
“왜? 좀 더 누워 있지.”
의사가 방을 나서자마자 서하림이 몸을 일으키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빨갛게 잔뜩 부은 뒤도 그렇고 허리도 그렇고 온몸이 아플 것이다. 누워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았지만 하림이는 기어코 침대를 벗어났다. 하지만 그마저도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아 업어줘야 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등에 써 봐.”
어깨 위에 화장실이란 단어가 적혔다. 아,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수액이 걸린 폴대를 한 손으로 잡고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문 앞에서 하림이를 내려주긴 했는데 여전히 후들거리며 제대로 걷질 못해 하는 수 없이 변기까지 함께 가줘야 했다. 잠옷을 꽉 잡고 있는 손을 보아하니 많이 급한 것 같은데…… 내가 보는 게 부끄러울 테니 하림이를 뒤에서 안고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러면 안 보여.”
잠시 뒤 들리는 소변 소리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늘하늘한 몸이 움직이는 것도 잘 느껴졌고 잠옷이 살에 쓸리며 올라가고 내려가는 소리 역시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게 벌써 이틀 전 일이다.
2학기가 시작됐지만 홀로 누워 있는 하림이 걱정에 점심시간 종 치자마자 외출증을 끊고 하림이네 집으로 뛰어갔다.
아침에 미리 반쯤 끓여둔 죽을 가스레인지에 올리며 물을 조금 부었다. 국자로 휘휘 저으며 이제 이것도 내일과 모레면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주말이 지나면 서하림 부모님과 이모님, 아주머님이 돌아온다. 그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내 평생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어디 망가진 서하림을 이렇게 옆에서 평생 간호하고 보살피는 건데.
개학 날 그러니까 서하림이 깨어난 날은 나도 정신이 없어 학교에 말도 없이 쉬었다가 선생님한테 엄청 혼이 났다.
‘도대체 무슨 전화를 하루 종일 해? 문자 하나 보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네가 아직 학생이라는 자각 좀 하는 게 어때? 특수 상황 감안해서 부모님 연락 없어도 된다고 했잖아.’
학교 가는 날인지도 모르고 종일 하림이 휴대폰이랑 통화를 시켜둔 탓이 컸다. 서하림은 그 아픈 와중에도 선생님에게 연락을 하고 다시 기절했다. 그래서 혼난 건 나 혼자였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게 개학이 섹스한 다음 날이라 학교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저 아침이면 다시 하림이 간호해야 한단 생각밖에 없었다.
“아 해.”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숟가락을 받아먹는 서하림이 보기 좋아 식사 때마다 다른 맛의 죽을 소량으로 세 가지씩 만들었다.
“맛있어?”
서하림은 대답 없이 고갤 끄덕였다. 의사가 어제 와서는 목이 많이 가라앉아 이젠 기침도 거의 없을 거고 말하는 데 무리도 없을 것이며 주말이 지나면 목은 깨끗이 나을 거라 했다. 그런데도 하림이는 깨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내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의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 아닌데 목이 아플까 봐 무섭다는 게 이유였다. 서하림은 온갖 통증에 약했고 무서워했다. 어릴 때 몸이 워낙 안 좋았던 게 이런 식으로 남아 있었다.
“뭐가 제일 맛있어?”
적은 양이지만 세 개나 되는 걸 서하림은 매번 깔끔하게 비운다. 서하림은 가운데 그릇을 가리켰다. 전복 내장을 많이 넣어 고소하게 만든 전복죽이었다. 아침엔 낙지 죽을 어제저녁은 고구마죽을 제일 맛있게 먹어주었다.
“저녁엔 참치 죽, 야채 죽, 매생이 굴 죽이야. 학교 끝나면 바로 올게. 내일부턴 주말이니까 시간이 많아서 손도 많이 가고 더 맛있는 거 해줄 수 있어. 삼계 죽이나 사골 죽이나 쇠고기 미역 죽 같은 거? 보니까 한방 버섯 죽이라는 것도 있대. 오리고기랑 녹두로도 만들기도 하고.”
커다란 머그잔과 생수 1.5L를 챙기고 칫솔과 치약을 가져왔다. 빈 대야와 수건도. 침대 헤드에 몸을 편하게 기댄 하림이가 대야를 건네받고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였다.
“이.”
이 하라면 이 하고 아 하라면 아 하고 혀 내밀라면 고분고분하게 혀를 내밀면서 양치를 했다. 머그잔에 담아 둔 생수로 오로록까지 다 끝낸 하림이가 편하게 있을 수 있게 눕혀주었다.
학교가 집 코앞이니 지금부터 네 발로 기어가도 널널한 시간이다. 서하림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가슴께를 천천히 토닥였다. 밥 먹고 바로 잠드는 건 위에 안 좋긴 하지만 졸려 하는 것 같아서.
하림이는 눈을 느리게 뜨고 감으며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말 대신 시선을 얽어가며 조용한 대화를 나눴다. 서하림이 작게 목을 가다듬기 전까지는.
“……김동규.”
부은 목 때문에 약간 허스키한 것 같기도 하고 낮아진 것 같기도 한 목소리는 조금 새로웠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림이가 며칠 만에 부르는 내 이름을 잠시 머릿속에서 음미한 뒤 입을 뗐다.
“응.”
“우리, 한 거 맞지.”
짧은 문장 속엔 서하림이 뭘 묻는지 정확한 단어는 없었지만 그게 뭘 뜻하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일부러 하림이가 얘길 하기 전까지 섹스의 시옷도 꺼내지 않고 기다리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픈 애 데리고 한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과 최후의 양심이 남아 있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까. ‘맞아, 우리 섹스했어’? 아니면 ‘응, 우리 끝까지 했어’? 아니면 ‘네가 해도 된다고 그랬잖아’라고 하면 화를 낼까? 하림이의 얼굴은 평안했고 까만 눈동자는 평소랑 같았다. 날 탓하거나 그날 기억이 부끄럽다거나 그런 종류는 아니었다.
“응.”
하림이가 수많은 단어를 쳐낸 문장으로 물었듯 나 역시 모든 게 함축된 단 하나의 단어로 대답했다. 키스해도…… 되나.
“그래. 그렇구나.”
“응.”
“한 거 맞구나.”
“응. 난 좋았어.”
“…….”
아파서 그때 기억이 잘 안 나는 모양이다. 나는 하림이의 볼을 가볍게 잡고 몸을 숙였다.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지자 하림이가 졸리다며 몸을 돌렸다. 꾸물거리며 수면 모자와 안대를 쓰는 게 귀엽다. 기분 좋은 느낌의 머리카락과 잘생긴 귓불이 보였다. 귀는 조금 붉어진 것도 같다. 쑥스러운 모양이지. 내 얼굴도 핫핫하니 열이 올랐다.
서하림은 어떻게 섹스 후 반응도 이렇게 점잖고 천사 같을까. 내 것에 뒤를 뚫리고 정액 범벅이 되고 구멍이고 안이고 온통 두드려 맞은 듯 부었으면서도 여전히 아름답고 고귀하며 순결한 존재였다. 나 따위가 더럽힌다고 타락하긴커녕 오히려 빛까지 뿜어 대는 것만 같다.
옛날에 신의 선택을 받아 신탁을 전한다는 성전의 신자, 신녀들은 신의 사랑으로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났었다고 전해지곤 했다. 어떤 신화에선 나비나 새들이 신녀의 주변을 날아다니기도 했고, 신녀가 동식물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다면 서하림도 신의 사랑을 받는 게 분명했다. 하늘 위에 있다는 절대자가 직접 선택을 하고 사랑하는 존재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거였다.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라고 하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이 완벽했다. 한낱 인간인 나조차도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인데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나보다 더 서하림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겠지. 그의 사자들은 하늘 위 궁전에서 매일매일 서하림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
신 같은 건 믿지도 않지만 상상을 하면 할수록 서하림이 너무 대단해 경외심이 차올랐다. 뿌듯했고 자랑스러웠다. 그런 서하림과 처음으로 몸을 섞은 사람이 나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하림이의 손을 잡는 대신 그가 덮은 이불을 움켜잡았다. 잠자는 데 괜히 방해되고 싶지 않았다.
잘 자.
학교 끝나고 몇 시간 뒤면 또 볼 텐데 그 몇 시간이 아쉬워 자꾸만 몸을 돌렸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방을 나왔다.
허겁지겁 뛰어올 때랑은 다르게 학교로 돌아갈 땐 걸어갔다. 급식실 가기도 존나 귀찮고 점심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학교 앞 빵집에서 빵을 존나 쓸어 담고 우유도 500ml 짜리를 두 개 샀다. 냄새가 많이 나거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크지만 않으면 수업 시간에 뭘 먹어도 크게 터치하지 않는 학교라 새삼 다행이었다.
주말 동안 내 극진한 수발을 받은 서하림은 월요일 아침 드디어 등교를 했다.
“와 서함 얼굴 존나 반쪽 됐네.”
“죽다 살아났다 진짜.”
“원래 아프면서 크는 거래.”
“미친 뭐래냐?”
등굣길부터가 시끌벅적했다. 서하림 친구들이 서하림에게 달라붙어 얼굴이 더 얄쌍해졌네 잘생겨졌네 소릴 했고 그건 복도와 교실까지 이어졌다.
2학기가 시작되고 제일 눈에 띄는 건 2학기에 9월 모의고사, 수시 원서 접수가 시작되고 수능까지 있어서 그런지 남자 새끼들도 좀 얌전해졌다는 점이다. 3학년 건물은 긴장이 가득했다.
솔직히 나는 다른 애들보단 좀 차분한 상태다. 서하림이랑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없더라도 세상이 멸망하는 건 아니고 2년 장학금의 메리트는 좀 멋있어 보였고 게다가.
‘바지 좀 벗어봐.’
‘바지?’
‘속옷도.’
‘왜?’
‘뒤에 약 발라야 하니까.’
예전 같았으면 자기가 하겠다거나 싫다거나 하면서 뺐을 텐데 서하림은 그냥 작게 ‘뒤에……’ 하고 곱씹더니 제 손으로 바지와 속옷을 내렸다. ‘뒤 돌까?’ 하는 엄청난 말을 하면서.
‘어, 어. 그게 바르기 쉽겠지?’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하림이가 깨어나고 이틀은 눈치 보느라 약 바를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서하림이 먼저 우리가 섹스했냐고 물어 와서 용기 내 한 말이었고 혼자 하겠다고 하면 얼마나 부었는지 전보단 얼마큼 괜찮아졌는지 색을 봐야 한다, 혼자 바르긴 어려운 곳이니 내가 도와주겠다 같은 수십 가지 논리적인 이유를 준비해놓은 참이었다. 그런데 먼저 옷을 벗고 뒤로 돌아 누워 엉덩이를 보여주기까지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바, 바른다?’
‘빨리해. 잘 거야.’
‘어, 어어. 빨리해야지.’
한두 번 발라본 것도 아닌데 처음 하는 것처럼 존나 허둥지둥했다. 떨리는 손으로 검지에 약을 짜고 서하림의 엉덩이 한 짝을 잡기까지 시간이 엄청 느리게 흘렀다. 흰 엉덩이 사이에 드러난 서하림의 그곳은 이젠 진했던 색도 많이 옅어지고 부푼 것도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했지만 나는 입을 다물고 그저 하림이의 거기에 손끝을 가져갔다.
차갑고 말캉거리고 미끄러운 약이 닿자 하림이의 그곳이 살짝 움츠렸고 엉덩이에도 힘이 들어갔다. 입안에 침이 홍수처럼 터져서 1초에 세 번은 삼켜야 했다.
촘촘하게 새겨진 주름을 꾹꾹 눌렀다. 주름 결을 따라 바르기도 하고 꽉 다물려 있지만 힘을 주면 열릴 정 가운데에 점 같은 곳을 유난히 눌러 손끝이 들어갈 것처럼…… 해보기도 하고 예쁜 색의 그곳 주위에도 약을 펴 발랐다. 원래 약은 상처 부위와 그 주변까지도 바르는 거라고 했다.
‘……아직도 많이 그래?’
‘어? 어어.’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구멍 위에 대고 빠르게 비비다가 서하림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직 아픈 앤데 약 발라주겠단 핑계로 변태 짓 한 게 미안해서 얼굴이 존나 뜨거웠다. 옷 알아서 올리라며 하림이의 방에서 도망 나왔다. 그리고 그 길로 화장실로 들어가 검지를 내 성기에 비벼대며 자위했다.
다음 날인 토요일은 그래도 한 번 봤다고 하림이가 직접 벗고 뒤로 누운 걸 보고 좀 참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일요일이었다.
내일이면 이제 서하림 부모님에 이모님에 아주머니까지 전부 돌아오는 날이라 더 이상 하림이랑 단둘이 있을 수가 없는 게 너무 아쉬워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도 영혼을 팔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하림이와 저녁을 먹었다. 저녁 맛있게 만들어주고 과일까지 예쁘게 깎아 먹여준 다음 약을 발라 주는데, 손끝 아래에 있는 하림이의 것을 한참이나 지분거렸다. 못해도 5분은 계속 그러고 있었다. 그래도 하림이에게서 그 어떤 거부의 말이나 싫다는 말이 튀어나오지가 않았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바랐었는데 진짜 사람 마음이 이렇게 영악하고 간사할 수가 없다.
섹스 후 하림이가 약간 말랑해진 느낌이라 울적하고 서운한 티 하나도 숨기지 않고 물어봤다.
‘손가락…… 넣어도 돼?’
서하림 뒷구멍을 괴롭히는 손가락은 마치 내 좆이라도 되는 양 엉덩이 사이에서 아주 바빴다. 하림이는 대답이 없었고 늘 그렇듯 긍정을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 대답을 다시 한번 더 듣고 싶어 손가락을 넣기 전 입을 열었다.
‘싫지 않지? 그치? 응?’
하나, 둘, 셋. 3초면 많이 기다렸고 충분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대로 서하림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굉장히 좁고 빡빡했으나 미끄덩거리는 약 덕분에 손가락 한 마디가 수월하게 들어갔다. 그 이상은 안쪽이 뻑뻑해 힘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덩치에 맞게 손도 보통 남자애들보다 크고 두툼해서 안으로 밀어 넣으면 밀어 넣을수록 서하림에게서 신음이 작게 터져 나왔다.
‘으, 윽…….’
‘아파? 약 더 발라야겠다.’
다 들어가지도 못한 손가락을 빼내자 폭 하는 소리가 났다. 남은 약을 모조리 손가락에 짜고 다시 서하림의 뒤에 넣었다. 워낙 작고 좁은 입구라 손에 바른 약들이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들어가는 건 내 손가락뿐이었다.
저번에 섹스할 때처럼 손가락 두 개 넣어서 브이 자로 벌린 다음에 하면 좋을 것 같긴 한데…… 아직 서하림이 아픈 애라는 게 내 마지막 이성과 양심을 붙들어주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손가락이 뭐야, 이미 끝까지 하고도 남았다.
‘아, 자, 잠시만.’
‘하나만 넣었어. 더 안 넣을게. 아…… 존나 좁아.’
서하림은 이를 꽉 깨물어 소리를 최대한 참았지만 한 번씩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때마다 쌀 것 같아 열심히 참았다.
겨우 하나밖에 안 들어갔는데도 이렇게 좁고 작고 빡빡한 곳에 내 걸 넣었다는 게 안 믿어졌다.
하림이 뒤를 열심히 풀어줬던 건 정말 본능적인 촉이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닌데 그래도 서하림은 아팠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으니 뒤까지 찢어먹지 않은 건 내가 서하림을 얼마나 위하고 아끼며 많이 사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서하림은 모를 것이다.
조금이지만 미끄러운 약 덕분에 서하림의 좁은 내부를 휘젓는 건 나쁘지 않았다. 내 손가락을 쭉쭉 빨아대는 내벽을 찔러대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 하림의 숨소리도 조금 진정이 됐다.
지금 전립선 찔러대면 끝까지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내 쪽으로 손가락을 굽히고 있던 걸 내부에서 그대로 돌렸다. 하림이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앞쪽을 향했고, 나는 머릿속에 남성의 내부 신체 구조를 떠올리며 이곳저곳을 눌러댔다.
‘아으…… 헉, 야, 아앗! 하아, 으응…….’
전립선을 찾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하림이의 예쁜 신음과 함께 정액 냄새가 맡아졌다.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갔다. 몸을 잘게 떠는 하림이는 어느덧 주먹을 쥔 채 할딱거리고 있었다. 나는 전립선을 몇 번 더 눌러주다가 좆 대신 손을 열심히 피스톤질 했다. 검지 말고 중지를 넣었어야 됐다. 그랬으면 조금이라도 더 안쪽에 쑤셔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아프, 아파…… 하으, 응…….’
‘미안해. 곧 끝내. 잠깐만.’
나는 하림이의 신음을 들으며 사정했다. 속옷 안에 성기가 갇혀 있는 게 굉장히 답답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사정의 여운이 가실 때까지 손가락을 최대한 안쪽까지 쑤셔 넣었다가 빼기를 느릿느릿하게 반복했다. 하림이도 나도 호흡이 진정됐을 때 나는 하림이 안에서 손을 뺐다.
‘씻어줄게. 기다려 봐.’
하림이 체온에 달궈진 손가락을 입안에 넣어 쪽쪽 빨았다. 약은 맛이 존나 더럽게 없었지만 내 손가락을 끊어 먹을 듯 조이던 하림이의 속살이 닿았던 걸 생각하니 약을 다 삼킨 뒤엔 좀 맛있는 맛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하림이 안쪽 체액 같은 건 이미 다 빨아 사라졌을 테지만 나는 계속 애처럼 손가락을 빨아대며 한 손으로 하림이의 앞을 닦아주었다. 하림이는 새빨개진 눈동자로 천장을 보거나 나를 보거나 했다.
이젠 하림인 내게 싫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겨우 주말 3일간이었지만 앞으로도 하림이는 내게 싫다거나 빼는 말을 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 사실이 지난 몇 달간 나를 뒤흔들던 불안함을 아주 빠른 속도로 종식시켜 주는 중이었다.
여자 친구 사귀는 건 별생각 없다 그랬고 소개팅은 아예 할 생각이 없다고 한데다가 서하림은 거의 나랑 지금 사귀는 것과 다른 없는 상태라, 물론 나는 우리가 조금 다른 온도와 모양이긴 해도 서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꼭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사랑을 하고 상대방을 신뢰하게 되고 그렇게 믿음이 생기고 안정감을 얻고. 조금 어른이 된 느낌이다. 어른의 연애라는 건 여유롭고 굳건한 그런 거니까.
거칠기 짝이 없던 내 마음이 아주 조금이지만 차분해진 건 내게 굉장한 변화였다. 좋지도 못한 머리로 꾸역꾸역 서하림 옆에 붙어 있는 걸 인정받으려고 공부에 집착한 모든 시간과 열정이 어느 정도 보상받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하림의 태도 변화가 이렇게 조금씩 이루어진다면 같은 캠퍼스를 거닐지 않아도 같이 살지 않더라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학은 참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아직 어렸고 여유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기 때문에 서하림이 비행기를 타겠다고 하면 다시 폭발하듯 감정이 몰아치고 삽질하며 지낼 게 뻔했다.
나중 일이니 유학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겠다. 주말 동안 행복했던 기억을 괜히 망치고 싶지 않았다.
원서와 함께 교장 선생님이 교육자로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써본 게 처음이라는 추천장도 접수하고 중간고사를 보고 수능도 봤다.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모두 불안해하고 긴장하는 그 나날들 속에서 나 혼자만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흠잡을 게 없는 천하의 서하림도 사람은 사람인지 때때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 날이면 나는 서하림을 따라 방에 들어가 입을 맞추고 등을 토닥이고 가슴을 쓰다듬고 다리 사이를 매만지며 있는 힘껏 그 애의 불안함을 종식시켜 주었다.
따끈한 체온이 맨살에 닿아 비벼지는 것이 좋은지 그럴 때면 서하림은 내게 앵기거나 젖꼭지를 빨아달라는 양 가슴을 내밀었다. 그럼 나는 그런 서하림을 무시하지 않고 열심히 빨아주었다. 전처럼 멍울이 생기진 않을 정도로, 하지만 작은 유두가 내 입을 거치고 나면 퉁퉁 부어 있을 순 있도록.
그냥 살을 쓸어내리는 게 아니라 속옷 안으로 손을 슬쩍 밀어 넣어도 거부하지 않았다. 탱탱한 엉덩이를 터질 것처럼 잡거나 서하림의 것을 입에 물고 몇 번이나 사정하게 만든 적도 있다.
그러면서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열심히 해왔는지 서하림이 일궈온 시간을 얘기해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불안해하면 나 같은 애들 죽으라고?”
하림이의 허벅지 안쪽 살이 빨갛게 부어 있다. 좀 전까지 끌어안고 내 것을 열심히 치댄 탓이었다. 아프단 소리에도 멈출 수가 없어 계속 진짜로 삽입한 듯 비비고 했더니 이렇게 됐다. 서하림이 세 번이나 사정하고 나는 네 번쯤 한 거 같다. 다섯 번인가. 아무튼.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히 성욕을 갈무리하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하림이와 내 아랫도리를 정리한 뒤에도 나는 여전히 하림이 다리 사이에 앉아 있었다. 바로 발기하지 않고 살짝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하림이의 말랑한 것을 쪼물락거리면서. 그리고 안쓰럽게 부은 안쪽 허벅지살과 통통한 허벅지살, 여린 뒷구멍까지 혀로 쓸기도 하면서.
“음…… 만약 수석 입학생을 수시에서 뽑는다면.”
하림이의 고환을 살짝 입에 넣었다가 뺐다. 뜨거운 숨이 함께였다. 아래를 빨기 좋게 한쪽 다리를 세워 침대 위로 올리고 발목을 잡고 있었는데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건 당연히…… 서하림이지.”
“하아…… 으…….”
사정이 밀려올 만큼 강하게 애무하는 수준은 아니라 하림이는 작고도 귀여운 신음을 흘려댔다. 혀로 뒷구멍을 콕콕 찌르거나 주름을 핥아 올릴 때마다 엉덩이가 바짝 긴장하고 허리를 뒤트는 게 좋아 살짝 웃음을 흘리면서 가볍게 괴롭혔다.
“안 넣는다니까.”
“읏, 으응…….”
대신 반쯤 발기한 서하림의 것을 다시 입에 물었다. 한 번만 더 싸게 하고 집에 가야지.
입에서 서하림 정액 절은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하림이의 것을 쪽쪽 빨아댔다. 그러자 하림이의 소리가 점점 커져 결국 서하림이 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역시 완벽한 서하림보단 이렇게 어딘가 부족하고 불안정한 서하림이 좋았다. 합격자 발표가 12월 중순이 아니고 한 2월쯤이었음 싶었다. 하림이가 불안감을 숨기고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살을 맞대고 서하림이 안심할 말들을 수없이 속삭여줄 수 있도록.
하지만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갔다. 못해도 이틀에 한 번씩은 서하림과 뒹굴면서 지내서 그런 것 같았다. 상상 속 서하림을 데리고 하루가 멀다고 자위하며 살던 때보다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나날들이었다. 상상이 아무리 리얼해 봤자 실물만 하겠나.
나는 수능을 조졌지만 서하림은 가채점부터 만점이었다. 모두가 수고했다며 서하림에게 박수를 보냈고 다음 날 원서를 넣은 모든 학교의 1차 발표에 서하림 이름이 전부 뜨면서 박수 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다행히 나도 1차 합격을 했다. 내겐 담임선생님과 서하림의 축하가 전부였다. 면접은 전형이 달라 내가 서하림보다 일주일 정도 먼저였다.
면접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면접 순번이나 간단한 상황 설명 같은 것을 해주는 아마도 조교인 것 같은 사람이 나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면접에 들어가기 직전 김동규 학생은 면접 시간이 조금 길어질 수 있는 걸 염두하라고 얘기해 줬다. 그리고 정말 그대로 됐다. 내 면접은 수시 안내 책자에 잘 설명되어 있는 ‘인문학, 사회과학 관련 제시문을 활용하여 전공 적성 및 학업 능력을 평가’한다는 15분을 훨씬 넘겨 끝났다. 책자에 제출 서류를 참고하여 추가 질문이 있을 수 있다고는 적혀 있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좀 과하단 생각이 들었다.
뭐 아무튼 나름대로 머리 굴려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대학교가 여기 말고 없는 것도 아니고 붙여주면 감사, 아니라도 상관은 없단 마인드로 후회 없이 마무리했다.
면접이 진행된 강의실 문을 닫고 고생했다는 조교에게 고개를 까딱 하고, 으리으리한 대학교 건물을 빠져나와 정문까지 걷는 동안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했다. 답지 않게 감정적이 돼선 지하철 대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른 학교도 1차 합격해 면접도 보고 그랬지만 사실상 내가 제일 맹목적으로 원했던 곳이라 그런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가고 싶어 한 게 아니라 서하림이 여길 목표로 하니까 그런 거지만.
〈선생님 저 면접 끝나고 집 가는 길이에요]
〈대충 잘 본 거 같긴 한데 몰겠음]
〈낼봐요 ㅃ]
내 연락을 기다렸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름 신경 많이 써준 담임선생님에게 연락을 하고 서하림에게도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서하림과의 채팅창을 열었다.
“…….”
선생님에게는 얘기가 바로바로 나왔는데 서하림에게는 할 말이 정리가 되지 않아 한참을 창에 머릴 기대고 깜빡거리는 메시지 입력 창만 봤다.
서하림 때문에 팔자에도 없던 공부를 시작한 열두 살부터 8년.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를 다름 아닌 서하림이란 높은 기준에 맞춰 해야 했던 수많은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해도 문제가 풀리지 않아 아빠한테 맞았을 때보다 더 엉엉 운 적도 있었고 실수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이런 걸 틀리냐고 스스로를 자책하던 밤도 많았다. 아빠만 아니었으면, 그 새끼만 없었으면 나도 좋은 과외 좋은 학원 다닐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꿈에서 아빠를 찔러 죽이기도 여러 번이었고 실제로 모의고사가 아무리 해도 내가 원하는 등급이 나오지 않아 속이 존나 상했던 어느 날은 술에 취해 잠든 아빠 새끼를 보고 주방에서 식칼을 들고 온 적도 있었다. 머릿속에선 이미 아빠를 난도질해 죽인 뒤였지만 차마 그렇게 하진 못하고 아빠 새끼가 누워 있는 침대 매트를 화가 풀릴 때까지 푹푹 찔러 겨우 진정시키기도 했다.
입시가 다 끝나면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수능 할인 뭐 이런 건 관심도 없고 그냥 잠을 일주일 내내 푹 자고 싶었다. 아무도 날 깨우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 곳에서 맘 편히. 몸이 아파 강제로 열심히 자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수면을 즐기는 그런 잠.
나 면접 끝이라고 쓴 걸 지웠다. 이렇게 보내면 서하림은 ‘그래’라거나 ‘응’이라거나 ‘수고했어’ 같은 다정한 답장을 줄 테지만 그런 텍스트 말고 서하림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결국 메시지도 전화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은 학교를 빠졌고 침대에 누워 싱숭생숭한 기분에 삽질을 반복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수능 성적표가 나왔고 서하림은 만점, 나는 수능 최저가 안 들어가는 게 감사한 등급이었다.
합격자 발표 날은 면접 본 날과는 다르게 굉장히 의연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 조용히 확인하고 싶었던 내 바람은 깡그리 무시당한 채 서하림 집에서 서하림과 이모님, 서하림 아빠까지 함께 노트북 앞에 둘러앉았다. 먼저 확인한 건 서하림. 역시나 합격이었다. 의대도 두 곳이나 붙었다. 합격 두 글자 보자마자 서하림네 아저씨는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모님은 과외 쌤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했다.
“와, 기분 이상해.”
“이상할 게 뭐 있어. 네가 안 붙는 게 이상한 거라니까.”
“너도 빨리해 봐.”
서하림은 아빠가 건네준 휴대폰을 받아 들고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도 눈은 노트북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쳤다.
“헐, 엄마! 김동규도 합격이야!”
바꿔 달라고 한 건지 내게도 휴대폰이 건네졌고 귀에서 축하한다는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평소랑 똑같이 감사하단 얘길 할 뿐이었다. 서하림 아저씨도 내 어깨를 토닥이며 고생했다고 해줬고 이모님도 그랬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서하림이랑 같은 학교 가서 좋긴 좋은데 결국 국문과라 고등학교랑 별반 다를 거 없을 지긋지긋한 대학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냥 서하림이랑 키스나 한 번 하고 꼭 껴안으면 딱 적당할 것 같았다.
이모님이 내게 같이 저녁 먹지 않겠냐고 물어왔지만 예의상 묻는 걸 알아 고개를 저었다.
“위에 스터디룸 정리하고 갈게요. 쉬고 싶어요.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하림이가 좀 도와줘.”
서하림은 내 뒤를 따라오면서도 사방팔방에서 오는 연락에 답장을 하느라 바빴다.
“정리할 거 조금밖에 없어서 내가 할게.”
“어어 고마워.”
흰머리가 나면 어떡하지.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스트레스 때문에 새치가 나서 서하림이 날 싫어하게 되면? 보기 흉하니까 염색 주기적으로 해줘야 할 텐데 그러면 또 그 염색 값은 어떡할 것이며 관리는…….
“하아…….”
꽤 크게 한숨을 쉬었지만 서하림에게는 닿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굉장히 느리게 느리게 문제집을 꺼내고 프린트된 문제지를 정리하고 내 오답 노트나 내 몫의 기출 문제, 면접 예상 파일 등을 쌓았다. 미리 가지고 올라온 박스에 천천히 넣으며 앞으로도 계속 좆같을 하루하루를 잊어보려 애썼다.
더 이상 정리할 게 없이 박스가 꽉 찼다. 나는 정신없이 액정을 두드리며 수다를 떨고 있는 서하림의 휴대폰을 잡아 책상 위에 뒤집었다.
“아 뭐야?”
앉아 있는 서하림을 일으켜 테이블 위에 앉혔다. 여기가 서하림 방이라면 하다못해 침대가 있으면 그 위에 눕혔을 테지만 아쉬운 대로 책상에 서하림을 올려두면 높이가 나쁘지 않았다. 서하림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그를 꼭 껴안았다.
“아 뭐야 뭔데. 숨 막혀.”
몸을 살짝 구부려 서하림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한참 서하림 살 냄새만 맡았다. 자연스럽게 내 성기가 발기했고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나는 두 손으로 서하림의 뺨을 잡아 눈을 마주쳤다. 까맣고 예쁜 눈동자가 반짝거렸고 그 속엔 내가 있었다.
“좋아해.”
“…….”
“사랑해, 하림아.”
그리고 도장을 찍듯 입술을 맞추고 혀를 넣었다. 볼을 잡고 있던 손을 하나씩 떼 하나는 하림이의 뒷머리를 가볍게 감싸 쥐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림이의 손을 이끌어 내 부푼 곳에 가져갔다. 서하림의 손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손이 내 손 안에 있는 이상 열심히 움직일 수 있으니까.
혀로 가지런한 치아를 훑고 입천장을 간질이다 서하림의 혀를 빨아댔다. 내 혀를 피해 서하림이 열심히 도망쳤지만 헛수고였다. 내 입으로 끌어온 서하림의 것을 마치 서하림의 성기라도 되는 것처럼 빨면서 손을 더 빨리 놀렸다.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로도 참을 수 있었다. 진짜 많이 컸다, 나.
한참 희롱하던 혀를 놔주고 뒷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뻗어 티슈를 가져왔다. 사정을 하기 위해 하림이의 손을 놔주었다. 힘없이 내 손에 휩쓸리던 그 손은 자유로워지기 무섭게 주먹을 쥐며 멀어졌다. 나는 휴지를 빠르게 뽑아 바지 버클을 풀고 터질 것 같은 성기를 꺼내 그 안에 사정했다. 사정했어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서하림의 교복 카디건을 벗기고 셔츠 단추를 풀러 가슴팍에 입을 가져갔다. 다른 한쪽 유두는 손으로 꼬집는 걸 잊지 않았다. 서하림은 두 팔을 뒤로 뻗어 나를 버텨냈다. 소리 내지 않을 생각인지 억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예쁜 소리가 듣고 싶어 이빨에 힘을 줘 깨물었다.
“아앗……!”
그러자 바로 듣기 좋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하림은 이제 제법 작았던 젖꼭지가 커진 상태였다. 내가 열심히 빨아주고 지분거리지 않아도 이제는 전보다 확연히 커진 유두를 가진 거였다. 존나 음란한 몸이 아닐 수가 없다. 어딜 가서 옷을 갈아입을 때면 서하림의 통통한 젖꼭지를 보고 아랫도리를 세우는 남자들이나 아래가 젖는 여자들이 있을 거란 생각에 짜증이 치미는 것 같았다.
빨리 돈 많이 벌어서 서하림을 가둬둘 수 있는 집을 제일 먼저 사야겠다. 시골 아주 깊은 산골 자락에 아무도 거기에 집이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못하는 곳에다가. 창문도 하나 없이 만들어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월요일인지 화요일인지도 전혀 알 수 없게 해 점점 미쳐가는 서하림을 만드는 거다.
어디서 봤는데 사방이 하얀색이면 사람에게 정신병이 온다고 했다. 그래, 하림이가 사는 방은 온통 하얀색인 게 좋겠다. 모든 가구도 다 하얀색이어야겠지. 옷은 벗고 있는 게 좋겠다. 나도 그 방을 들어갈 땐 속옷도 입지 않고 들어가야지. 하림이 혼자 둘 땐 반복되는 뚜뚜뚜뚜 소리 같은 걸 틀어놔 정신을 괴롭게 만들고, 내가 있을 때만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길들이면 나랑 같이 있는 게 좋다며 매일 하림이가 매달릴 것이다. 당연히 카메라는 설치해 둔 뒤이기 때문에 반복되는 기계음에 미쳐 돌아가는 하림이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을 테고.
-하림아, 동규야. 정리 아직 멀었어? 하림이 엄마 이제 10분 뒤면 도착한대.
“거의 다 했어요! 나갈게요!”
문 너머로 들려온 이모님 목소리에 서하림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몸이 잔뜩 긴장해 달달 떨리는 게 보기 좋았다.
“10분 안에 끝나.”
“…….”
엄지로 바르르 떠는 속눈썹을 훑고 목선을 따라 내려와 잔뜩 부은 젖꼭지를 다시 한번 희롱하고. 빠른 사정을 위해 두 손으로 성기를 힘을 줘 쓸어 금방 사정할 수 있었다. 내가 사정한 걸 본 서하림은 입을 가린 손을 떼며 뒤로 넘어갔다. 참고 있었는지 숨을 터트리며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좀 미안하네.
책상 위에 있는 물티슈로 손을 닦고 정액으로 범벅된 휴지도 챙겼다. 하림이의 옷을 정리해 주고 창문까지 열어 놓은 다음 먼저 방을 나섰다. 물티슈랑 휴지를 빨리 화장실에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휴지들을 깡그리 버리고 손을 박박 닦은 뒤 다시 스터디룸에 돌아와 박스를 챙겨 들었다. 서하림은 이미 1층에 내려가 있었다.
이모님이 박스는 현관문 근처에 두라며 위치를 알려줬다. 박스를 내려놓고 바로 나갈까 했는데 서하림 아줌마한테 인사를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소파에 앉았다. 마주 보고 앉은 서하림은 제 옆에 앉은 아저씨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그 말은 아저씨와 서하림 두 사람 다 잘생긴 얼굴을 뽐내고 있단 뜻이었다. 조금 전 내 아래서 신음을 내며 떨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서하림은 정갈한 교복 차림이 아주 잘 어울리는 금욕적인 모습이었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서하림 아줌마가 들어와 고생한 아들을 품에 안으며 얼굴 곳곳에 뽀뽀를 했다. 나는 그것이 영 탐탁지 않았고 그래서 인사도 대충 하고 나와 버렸다. 아무리 서하림 낳은 엄마라도 그렇게 서하림한테 입술 대는 게 존나 싫었고 그런 뽀뽀를 받으며 예쁘게 웃는 서하림에게 섭섭했다. 버스를 타지 않고 씩씩거리며 걸어 집에 돌아왔을 땐 화도 식고 섭섭한 맘도 가신 뒤라 서하림이 조금 부러웠다. 정말 조금. 그뿐이었다.
엄청 오랜만에 엄마한테 연락해서 합격 소식 전하고 엄마가 준 돈으로 등록금도 냈다. 엄마는 꽤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그런 척했다.
몰랐는데 찜질방도 피시방처럼 밤 10시부터는 청소년이 이용할 수 없는 곳이었다. 대학도 붙었겠다 일주일은 학교 쭉 쉬고 찜질방 라이프나 즐기려고 했는데 다 망했다. 집구석엔 좆같은 인간쓰레기가 있어 일주일을 맘 편히 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데.
대놓고는 아니지만 학교에서는 합격생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으면 하고 눈치를 준다. 정시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주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인데 정시 준비하는 학생의 성비는 남학생이 훨씬 높았다. 하여튼 남자 새끼들 쫌생이 같고 남 잘되는 꼴을 못 본다.
아무튼 나는 매일 열심히 등교했다. 일주일쯤 쉴 수 있는 친척 집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집도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미성년자인 나는 결국 학교밖엔 갈 곳이 없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내게 쏟아지는 시선들이 많았지만 아랑곳하지 앉고 책상에 앉아 종일 엎어져 있거나 보건실에 가 누워 있거나 했다. 저 앞에서 날 지칭하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주 금요일이면 방학이고 다다음 주면 새해라 스무 살이 되니까 조금만 버티면 된다. 엄마가 맘껏 쓰라고 용돈도 보내줬고 서하림 부모님도 나보고 고생했다며 용돈을 꽤 많이 주셨다. 방학 내내 찜질방에서 살아야지. 그럼 아빠가 밥 못 먹어서 뒤지지 않을까.
하품 한 번 했다가 반 애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슬그머니 일어나 보건실 간다며 교실을 나왔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지 더러워서 피하냐.
“대체 왜 나온대?”
“몰라. 출석이 그렇게 중요하면 조퇴를 하든가.”
방학 가까워지면 어련히 그림자처럼 취급할 줄 알았는데 그림자는 무슨, 날 까는 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커져 갔다. 그렇다고 내가 그쪽으로 시선 돌리면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몇몇 남학생이 내가 너무 신경 쓰인다 어쩐다 선생님한테 얘기를 한 모양인데 아쉽게도 나는 그들에 비하면 한참 낮은 사회적 약자였고 학교란 울타리밖에 없는 고등학생이라 선생님도 보건실로 보내는 방법 말곤 어쩔 수 없단 입장이었다. 그래서 등교하면 가방 내려놓기 무섭게 보건실로 갔지만 어쨌든 교실은 들어가야 해서 그 짧은 시간에도 번번이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근데 나는 넓은 마음으로 반 친구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주말 동안 정시 입시 요강들 살펴봤는데 정시에도 면접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조건 최저 없는 수시에 올인한 사람이라서 정시야 뭐 수능 봤음 끝 아니냐 그런 생각이었는데 면접이 남아 있다니까 저런 옹졸한 자태가 납득이 간 것이다. 합격자가 가져야 하는 덕목 중 하나는 아직 입시 중인 친구들이 열심히 쏘아대는 시기와 질투를 너그럽게 받아내는 여유가 아니던가.
종일 보건실에서 누워 있다가 점심 맛있게 먹고 또 뒹굴거리다 종례도 안 듣고 가방만 챙겨 들고 나왔다. 이제 이틀만 있으면 한 달 반 동안 학교에 오고 싶어도 못 온다.
서하림은 지난주 월요일부터 어른들 만나러 다니느라 바빴다. 아빠 쪽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친척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덕담을 돌린 다음 엄마 쪽으로 넘어와 마찬가지로 중고등학교 다니는 먼 친척 동생들에게까지 순회 돌고 외가 조부모님들과 발리에 한 일주일쯤 갔다가 어제 한국으로 들어왔다. 연말이랑 새해는 가족들이랑 한국에서 보내고 한 달 정도 유럽 여행을 갈 예정이라고 했다. 어차피 길게 나가는 거 그냥 졸업식도 재끼고 더 길게 있으라고 했더니 졸업식 날 졸업생 대표로 나가야 해서 안 된단다.
하교하면서 자주 가는 정육점에 들러 육회 고기를 1kg 사왔다. 마트 들러서 배랑 아빠 줄 육회 고기를 특별히 색깔 구린 거로 골랐다. 키친타월로 핏물 제거하고 설탕, 물엿, 매실액, 소금 넣어 버무리고 참기름과 후추를 넣어 섞은 뒤에 비닐에다 공기 최대한 빼고 넣어 냉장고에 보관했다. 아빠 해줄 고기는 냄새부터가 좀 별로였지만 내 알 바 아니라 설탕 존나 많이 소금도 존나 많이 후추도 존나 많이 넣어 대충 비닐에 싼 뒤 주방 한쪽에 던져뒀다. 두 시간 정도 숙성시키면 먹기 딱 좋아지기 때문에 과자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던 육회를 절반 그냥 반찬으로 조지고 나머지는 비빔밥으로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퍼먹고 있는데 아빠가 들어왔다.
“어, 아들! 저녁 먹었네?”
아 술 냄새. 난 대학가도 술은 절대 안 먹어.
“아빤. 저녁 줘? 육회 했는데.”
“오, 좋지!”
“뭐야.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좋지 그러엄. 간만에 이거 좀 만졌지.”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드는 거 보니 화투로 돈 땄나 보다.
“좋겠네. 앉아. 밥 바로 줄게.”
아이스크림을 냉동실에 넣어두고 주방에 던져둔 육회를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미각 마비되라고 만들어 둔 김치찌개를 데웠다. 찌개 먹고 육회 먹으면 이상한 맛이 좀 덜 느껴질 것이다. 밥도 대충 담고 반찬도 대충 담아 밥상을 차렸다.
“간만에 아들 노릇 제대로 하니 얼마나 좋아.”
“네네, 많이 드세요.”
“소주 좀 가져와라.”
술 먹고 기분 좋은 날은 손에 꼽을 만큼 적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소주와 소주잔을 갖다 바쳤다. 방으로 갈까 하다가 보던 예능이 재밌어서 마저 보려고 아이스크림 통이나 다시 꺼내 앉았다. 배가 고팠는지 소주는 까지도 않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뒷모습이 한심했다. 서하림은 아무리 배고파도 천천히 정갈한 자세로 식사를 하고 저 새끼랑은 다르게 젓가락질도 잘한다. 한심을 넘어 불쌍함이 느껴져 나는 고개를 젓다 TV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쩝쩝거리는 소리가 조금 거슬렸지만 TV 소리를 더 올렸다.
“그래서. 공부는 잘 하고 있어?”
미친놈. 빨리도 물어본다.
“잘 하고 있지. 왜. 용돈이라도 주게?”
“몇 등 했는데?”
“전교 2등.”
2학기는 어차피 성적 반영 안 돼서 쭉 밀려났지만 그동안 계속 2등 했으니까 거짓말한 건 아니었다.
“잘했네, 잘했어. 자, 얼마를 줄까. 아니 잠깐만. 그럼 대학교는 어딜 가야 되나 전교 2등이면.”
“…….”
나는 잠시 내가 벌써 이 주 전쯤에 이미 대학을 합격했단 사실을 이 인간에게 얘길 해야 할지 가늠을 하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존재하긴 했는지 싶던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를 세는 거 보니 기분이 진짜 좋긴 좋은 거 같은데. 말해도 되나. 어차피 등록금도 다 냈고 그냥 합격 소식인데.
“나 학교 붙었어.”
“뭐?”
“수시라고 수능 안 보고 가는 거로. 좀 됐어 합격한 지.”
“뭐야?”
지갑에서 지폐를 세던 손이 멈추더니 얼굴이 험악하게 변한다. 뭐야. 돈 달란 것도 아닌데 어디서 빡이 친 거지? 평소엔 공부하는 거 일절 관심 없던 양반이.
“어디 붙었는데.”
“S대.”
“뭐야,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나.”
아빠는 밥을 먹던 숟가락으로 내 머리통을 때렸다. 장난 전혀 안 쳤는데 도대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질 게 뭐지.
“그걸 왜 이제 말해? 아, 너 이 새끼, 아빠가 오늘 돈 따서 그래서 말한 거구나?”
“뭐라는 거야.”
아빠의 손에서 숟가락을 뺏어 밥상 위에 던졌다. 그러자 바로 따귀가 날아들었다.
“나보고 대학 등록금 내놔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 냈다고 해도 술 취한 사람이라 말대꾸하냐며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 것이기 때문에 그냥 맞으면서 어련히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았다. 아빠 핑계로 하림이한테 연락을 해도 되고, 굳이 하지 않아도 신기하게 하림이는 이런 날이면 나한테 먼저 연락을 하곤 했으니까.
솥뚜껑 같은 손에 입안은 터지겠지만 혹시 이빨이 나갈 수도 있으니 턱에 힘을 줘 세게 물었다. 내가 대꾸도 않고 가만히 있자 지 혼자 내가 등록금 내놓으라 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벌떡 일어나 본격적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게 어디서 부모 등골을 빼먹으려고 해? 씨발 그래, 그 좋은 학교 붙었다고 지금 유세야? 어디서 돈 냄새는 귀신같이 맡아서는 돈을 내놔라 마라 해?”
나는 얌전히 맞고 있을 생각이었다. 분명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있다가 화도 풀리고 술도 깬 내일 즈음 등록금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빠가 신경 쓰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할 생각이었다.
“씨팔, 내가 아니라 너 두고 도망간 엄마한테나 달라고 해. 얼마나 잘 살면 따박따박 양육비 보내오겠어?”
“지금 뭐라 그랬어.”
엄마 얘기만 안 나왔다면 그럴 생각이었다. 분명 소파에 앉아 맞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빠의 멱살을 잡은 채 서 있었다.
“이 씨발 새끼가 지금 누구 멱살을 잡아? 후레자식이!”
아빠는 내 손목을 잡고 뿌리치려 했으나 더 이상 아빠는 나보다 힘이 세지 않았고 이젠 키도 내가 아빠보다 훨씬 컸으며 덩치도 마찬가지였다. 힘으로 내가 밀리지 않자 당황한 아빠는 몸을 뒤로 빼고 주먹을 날리려는 자세를 취했다.
“다시 말해봐. 엄마가 뭐?”
“자식 새끼 버리고 도망간 년한테 엄마라고 부르는 거 봐라. 이래서 조상님들이 피가 물보다 진하.”
아빠가 주먹을 날리기도 전에 나는 아빠를 잡은 채로 다리를 걸어 그대로 밥상 위에 그를 내리꽂았다. 등이 접시에 부딪혔는지 아빠가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다시 멱살을 고쳐 잡고 아빠를 들어 올리곤 또 내리찍었다. 온통 자기로 되어 있는 접시들 몇 개가 깨진 게 보였다. 피비린내가 얼핏 나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빠가 입은 옷이 겨울옷치고 좀 얇은 것 같다.
“이 미친 새끼, 윽!”
“왜, 평소에 아빠가 나한테 잘 하던 거잖아. 좆같은 새끼가 엄마 욕하는데 당연히 빡이 치지 안 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계속 욕을 하길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려 이번엔 바닥에 던졌다. 키가 큰 탓에 머리는 밥상을 벗어났지만 바닥은 아빠의 머리통까지 고스란히 충격을 주었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아빠가 눈을 뜨며 새빨개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 시발 좆됐다. 아빠의 눈에서 읽힌 건 공포였다. 나는 일어나지 않고 내게 눈동자를 굴리는 아빠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일단 바닥에 떨어진 식기들을 밥상 위로 올리면서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빨리 일어나. 일어나서 반격하라고. 차마 말로 내뱉지는 못하고 그렇게 빌었다.
“너…….”
“죄송해요.”
다급하게 입을 뗐다. 겁먹지 말라고, 여전히 내가 약자이며 너에게 겁을 먹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
“제가 어떻게 아빠를…… 잠깐 미쳤나 봐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여전히 공포에 물든 눈동자를 한 아빠는 비틀거리며 앉더니 내가 다가가자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쳤다.
“어디 가세요. 다쳤는데 치료라도.”
“몰라 씨발! 오지 마!”
“뭐야, 왜 그러는데.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했잖아. 요.”
“…….”
아무래도 이제 내가 일부러 남겨둔 계륵이었던 패가 다 까진 모양이었다. 1년쯤은 더 써먹으려 했는데 아깝게 됐다. 그렇다면.
“아빠.”
나는 아빠의 두 정강이를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빠가 욕을 하며 내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 가지 말고, 나 좀만 더 때리고 가야지.”
“뭐, 뭐라고?”
“후레자식 버릇 고쳐놓고 가셔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아빠의 손을 들어 내 뺨을 때렸다. 아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퍽 웃겼다.
“이렇게.”
손에 힘을 더 실어 나는 내 뺨을 타인의 손을 빌려 후려갈겼다. 뺨은 얼얼했고 머리가 띵해졌지만 참을 만했다.
“이렇게, 잘, 하라고. 내가 잘못했잖아.”
공포 그다음에 떠오른 것은 안도 내지는 복종과 비슷한 것이었다. 아빠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내 손을 내렸다. 아빠가 이상한 표정을 하고 내 뺨을 몇 번 두들기더니 점점 강도가 올라갔다. 그런데 어느 정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가 않는 것이다.
“뭐 해. 코피가 안 나잖아요.”
괜찮으니 맘 놓고 때리라는 뜻으로 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 아빠는 내게서 도망치기 위해 날 때려야만 했다.
-너 목소리, 무슨 일 있어?
피가 뭉쳐 코가 막혔고 목에서 자꾸 기침이 튀어나왔다. 간만에 온몸이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는 때리는 내내 계속 내 눈치를 살폈고 때리던 중 뻑 하고 큰 소리가 나면 병신같이 혼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내가 만족할 때까지 아빨 놔주질 않아 도망가는 데에 몇 번이나 실패했다. 막판엔 맞기 싫음 잘 때리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
“응…… 나 죽을 거 같아.”
대답 대신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웃음이 튀어나왔지만 빠르게 갈무리했다.
-아저씨 왔다 갔지.
“응. 죽겠다 지금…….”
-…….
“바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지금 엄마랑 있어서 가기가 좀.
“아…….
-잠시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서하림 기다리느라 57초 정도 지났을 즈음 다시 휴대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10분이나 15분 뒤에 출발할게. 병원 데려다줘?
“아니. 그 정돈 아니야.”
-맨날 그 정도는 아니래.
“진짜야…….”
-알겠고, 그, 사진이나 잘 찍어놔.
서하림이 말하는 사진이란 나중에 아빠 신고할 때 써 먹을 가정 폭력 증거 사진을 말한다. 서하림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착실하게 컴퓨터에 모으고 있었다.
“찍었어.”
-이따 봐.
진작에 보일러를 틀어놔 따뜻한 바닥에 몸을 지지고 누워 있으니 살 만은 했다. 사실 오늘은 평소에 비하면 아픈 강도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얼굴을 위주로 때려달라고 했을 뿐이다. 온실 속 화초인 서하림에게 가장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라.
다만 내 맘대로 시원하게 움직이지 않는 왼팔이 좀. 아까 힘을 줘 그 거구를 때려눕힌 탓인지 저릿저릿했다. 다시 생각하는 거지만 오른팔이 불편한 게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저릿한 걸 좀 없애보려 하는데 영 별로였다. 이젠 병원에 매주 안 가고 한 달에 한 번 가도 됐는데 이번 주가 이번 달 마지막 주라 병원을 가야 했다. 지난달엔 괜찮았는데 이번에 갑자기 얼굴에 피떡 달고 몸 상태도 별로인 거 알면 병원 선생님들이 난리 칠 게 뻔해서 조금 머리가 아파왔다. 여름방학엔 섹스하느라 코피 엄청 흘리고 하림이 간호에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병원 갔다가 존나 혼났는데.
맞는 동안 벗어 놓은 안경은 서하림이랑 전화 끊자마자 주워 썼다. 이따 보잔 말 들은 게 37분 전. 서하림이 집에 있다가 15분 후에 출발했다고 해도 택시 타고 오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언제 와, 서하림. 이번에도 아픈 날 보듬고 위로해 줘야지.
옆으로 누워 하림이 사진들을 한참 보고 있는데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한 지 거의 한 시간 만이었다.
“…….”
“늦었네.”
서하림은 겉보기엔 끔찍한 내 몰골을 보고 할 말을 잃었는지 표정이 험악해졌다.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아니 실제로 오랜만이 맞지. 합격 발표 나고 서하림은 학교에 나오질 않았으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하, 진짜.”
캬라멜색 코트에 까만 목도리를 두른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고 귀엽고 잘생겨 새삼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뒤에 매고 온 건 바이올린 케이스 같은데.
“됐다. 구급상자 어딨더라.”
“바이올린은 왜 가져왔어?”
“오늘 오케스트라랑 합창단 연주회 있었어. 몇 년마다 협연으로 하는 정기 공연.”
“뭐?”
서하림은 코트를 벗고 목도리를 풀러 바닥에 내려놓은 뒤 구급상자를 찾아 가지고 왔다. 나는 서하림이 바르기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너 그거 안 한다 그랬잖아.”
“그랬는데 급하게 하게 됐어.”
“왜?”
“어제 급하게 연락 와 가지고.”
응급 상자를 뒤적거려 집게와 솜을 찾은 뒤 종이컵에 작은 솜뭉치들을 넣고 생리식염수를 부으려는 서하림의 손을 붙잡았다.
“할아버지랑 여행 가느라 연습할 시간도 없고 맞춰 볼 시간도 없을 거라 안 한다고 그랬잖아.”
“그니까 갑자기 하게 됐다고.”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했어? 한국에 오늘도 아니고 그제 왔잖아.”
“깜빡했어.”
“깜빡? 이게 깜빡할 일이야?”
나는 서하림의 모든 모습을 좋아하지만 그만큼 내가 모르거나 놓치는 게 있다는 게 싫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랑 있는 시간까진 내가 어떻게 함께할 순 없는 거지만 연주회 정도는 내가 충분히 함께할 수 있는 게 아니던가. 조명 아래 앉은 수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 객석에 차분한 어둠이 내리면 서하림이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치고 손가락으로 줄을 누르고 활을 들어 준비 자세를 마치면 작게 숨을 들이마신 뒤 침을 꼴깍 삼키는, 그 모든 준비 과정부터 악보를 보느라 눈이 살짝 아래로 향해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앞으로 취미로 혼자 바이올린이든 피아노든 할 순 있겠지만 연주회 속 특별하고도 숭고해 보이는 서하림의 모습은 다시 못 볼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걸…….
“야, 미안해. 울지 마.”
“안 그래도 아빠한테 맞아서 기분 더러운데…….”
“나도 정신이 없었어. 그만 울어. 응? 약 발라야 돼.”
당황한 서하림을 두고 휴지를 가져왔다. 눈물이 멈출 때까지 계속 휴지로 눈물을 닦아내며 울었다. 많이 미안한지 서하림은 울고 있는 내게 한 마디도 못 하고 그저 내 앞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다 울었어?”
“아니.”
“그럼 좀 참아. 약 바르게.”
“응.”
마지막으로 코를 한 번 풀자 콧물과 피가 섞여 나왔다. 세수하고 올까 싶었지만 관두었다. 세수보단 내 얼굴에 약을 바르느라 집중한 하림이가 더 보고 싶었다.
“아프면 말해.”
서하림은 생리식염수로 적신 솜으로 내 얼굴과 상처들을 닦고 약도 차근차근 발라갔다. 이런 걸 해본 적이 워낙 없어 서툰 것 같기도 하고 뭐든 잘하는 애라 능숙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저 내 이마, 코, 볼, 입술 등을 유심히 바라보는 하림이의 눈동자를 따라갈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저를 뚫어져라 보는 게 분명 느껴질 텐데도 서하림은 상처 소독과 치료에 집중했다.
“……이번엔 아저씨가 또 뭐라고 지랄했냐?”
“대학교 합격했다니까 자기보고 등록금 달라는 거냐고. 등골 빼먹겠다는 거냐고.”
“웃긴다. 지가 아들 등골 빼먹고 살면서.”
상처 치료가 끝나고 서하림은 쓰레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일 하게 하기 싫어서 내가 하겠다고 했다. 구급상자 안에 든 비닐봉지를 펼쳐 내 피나 약이 묻은 솜들을 모으고 반창고 종이 같은 것들을 넣었다. 그리고 대충 묶어 주방 쪽으로 던졌다.
“손 씻고 싶은데.”
“조금 있다 씻어.”
나는 하림이의 허벅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감미로웠다. 눈을 뜨면 깨진 채 엉망인 밥상이 보일 거고 흉한 내 얼굴 때문에 저도 모르게 굳은 표정을 한 서하림이 보일 테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림이 허벅지에 누워 있는 지금이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연주회 못 간 건, 알려주지 않은 건 이렇게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으니 화가 나고 속상하고 했던 게 사르르 풀려갔다.
“키스하고 싶어.”
“해.”
“사실은 그것보다 너랑 그걸 더 하고 싶어.”
감은 눈 위로 서하림의 시선이 느껴진다. 단어를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그게 뭔지 나도 서하림도 알고 있었다. 나는 서하림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눈을 뜨지 않을 생각이었다.
“……해. 그럼.”
뭐라고? 깜짝 놀라 말도 못 하고 눈을 크게 뜨는 것도 모자라 벌떡 일어났다. 허락해 주지 않아도 살살 달래다가 키스하고 애무도 하고 그렇게 쪽쪽거리다가 끝까지 해볼 생각이었다. 아빠를 앞세워 서하림의 동정심을 있는 대로 자극하면서.
“너 그 얘기 할 줄 알고 가져왔어.”
“뭐……?”
서하림의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콘돔이었다. 살면서 서하림이랑 콘돔을 함께 생각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아예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물론 내가 서하림이랑 섹스할 때 종종 사용할 거긴 했지만 얘가 이걸 이렇게 직접 손 위에 들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 속에서도 없던 일이다. 내 상상 속에선 늘 그냥 생으로 갖다 박아서 안에 싸질렀기 때문에 콘돔이 필요가 없었다.
“지, 진짜 네가 산 거야?”
“응.”
“직접?”
“응.”
“어디서?”
“그냥 샀어.”
“아…… 아 잠시만.”
지금 너무 행복하고 엔돌핀인지 아드레날린인지 뭐가 됐든 뇌 속에서 펑펑 터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세상 청순한 얼굴을 하고 앉아 콘돔을 들고 있는데, 도저히 말이 정리가 되지 않았고 심장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신은 아니라는 거다, 내가.
서하림에게 달려들어 일단 바지부터 벗겼다.
“대신.”
좆같은 안경. 코 위에서 눈앞에서 걸리적거리는 게 존나 좆같다. 서하림의 교복 바지를 내리고 속옷 벗기는 시간도 부족해 일단 서하림을 뒤집어 내 것에 콘돔을 씌웠다.
“한 번 만이야. 나 너무 피곤하고…… 그래서 한 개만 가져온, 윽!”
애무고 뭐고 살살 녹이는 건 나중이다. 일단 나는 당장 서하림한테 박아 넣는 게 급해 속옷을 벗기지도 못하고 한쪽으로 당겨 구멍만 나오게 하고 바로 삽입했다.
“아윽, 야, 아!”
콘돔에 분명 자체적으로 미끄러운 게 묻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는 하림이 안에 들어가기엔 한참 부족하고 나도 그걸 충분히 잘 알고 있는데, 알고 있는데도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 안으로 내 것을 밀어 넣기 바빴다. 너무 좁고 뻑뻑해 잘 들어가지 않아 서하림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어깨를 잡고 내 쪽으로 강하게 끌면서 위아래로 삽입을 도왔다.
“아, 아파…… 윽, 하읏, 아아!”
“나, 나도, 아프, 씨발, 하림아, 윽, 힘 좀…….”
하림이는 내게서 도망치기 위해 네 발로 기어가려 했지만 어깨를 붙잡고 있는 나 때문에 불가능했다. 바르르 떨리는 어깨가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픈 만큼 강하게 조여 대는 내벽에 내 것이 진짜 끊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림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지 자꾸 어딘가 막힌 듯한 신음을 내뱉었다.
일단 끝까지 다 박아 놓으면 우리 둘 다 괜찮을 것 같아 나는 힘으로 밀어붙였다. 고통에 소리를 지르는 하림이의 비명은 좀 있으면 쾌락으로 변할 것을 알아 못 들은 척했다.
힘으로 밀어붙여도 하림이가 너무 세게 물고 있어 넣는 게 쉽지 않았다. 몇 번에 나눠 넣었는데 그때마다 아래에서 조금 위험한 소리가 났다. 혹시 찢어진 건 아닌가 싶은 그런 소리.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아직 다 넣지도 않았는데 하림이의 어깨를 풀고 아래를 확인했다. 주름이 펴지다 못해 분홍색인 그곳이 너무 벌어져 조금 하얗게 질려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아주 조금이지만 찢어진 게 보였다. 저번에는 정신을 잃은 덕분에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어 괜찮았던 것 같고 이번에는 제정신에 좀 급하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았다.
잠시 하림이의 뒷구멍을 보고 불쌍해지려는 찰나, 서하림이 앞으로 기어가 빠져나가려 했다. 나는 다시 서하림의 어깨를 잡아 껴안았다. 그리고 빠져나온 만큼 다시 뭉근하게 찔러 넣었다.
“다, 안 넣을 테니까 가만히 있어.”
“…….”
“콘돔 갖고 온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한 번만 싸고 끝낼게.”
자신은 없는데 최대한 안 싸고 버티면서 쑤시면 그게 한 번이지 뭐. 서하림이 몇 번을 사정하든 나만 한 번 싸면 끝인 거니까 삽입한 채로 계속해도 상관은 없단 얘기다.
하림이는 내 말에 숨을 고를 뿐이었다. 그 숨소리가 애처로워 나는 내 것을 빼고 하림이를 앞으로 돌려 눕혔다. 하림이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코끝이 빨갰고 눈물 때문에 눈가와 볼이 반질거렸다. 그 예쁜 얼굴에 입을 맞췄다. 반듯한 이마, 긴 속눈썹, 눈물 맺힌 눈꼬리, 정갈한 콧대, 물기 가득한 입술……. 혀를 넣어 키스를 하려다 그냥 가볍게 쪽쪽거리며 얼굴에 침을 묻히기로 했다. 키스에 시간 쏟고 싶지 않았다.
하림이의 속옷을 내리고 교복 마이를, 카디건과 셔츠를 열었다. 침대였으면 그냥 다 벗겨 알몸으로 만들었을 텐데 어쨌든 바닥에 누워 있어 나름의 배려라고 해두겠다.
턱선과 목, 쇄골을 따라 쪽쪽거리며 내려와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하림이의 것을 부드럽게 잡았다. 두 다리가 움찔거리며 하림이가 내 머리를 잡았다가 놓았다.
“머리…… 잡아도 돼. 머리카락 다 뽑아버려.”
젖꼭지에서 입을 떼지 않고 빨면서 말했더니 단어들이 온통 뭉개졌지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돈 아니었다. 얼굴에 가볍게 키스할 때 난 소리와는 다르게 농밀하고 찐득한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침을 발라가며 유두 빠는 소리가 적나라할 수 있도록 만든 덕분이었다. 하림이는 내 머릴 잡는 대신 풀어 헤쳐진 교복을 움켜쥐었다.
입안으로 들어온 하림이의 유두는 몇 번 빨아주니 바짝 서서 딱딱해졌다. 그런 유두를 혀로 누르며 위아래로 쓸어 올렸더니 하림이가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기한 귀두를 열심히 문지르는 것도 한몫했겠지만 원래 하림이는 젖꼭지로 많이 느끼는 편이었다. 이를 세워 깨물어주니 허리가 들썩였다. 하림이의 것을 만지고 있는 엄지에 끈적이는 것이 묻었다.
“하림아. 젖꼭지 빨아주는 게 그렇게 좋아?”
“응윽…… 하아…….”
“난 좋아.”
“…….”
“뭐라도 나오면 더 좋을 텐데.”
손가락 사이에 끼워 괴롭히던 다른 쪽을 입에 물었다. 말랑하면서도 딱딱한 여린 젖꼭지를 마음껏 희롱했다. 이를 세워 물다 아파하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혀로 바꿨고 간질거리는 소리가 되면 이로 세게 물어 울게 했다. 하림이의 정액 냄새가 난다. 순간 나도 사정할 뻔했지만 귀한 한 번의 기회를 이대로 날릴 수 없어 허벅지와 요도에 있는 힘껏 힘을 줘 참았다.
“아프, 하…… 아프잖아. 아프, 다고.”
“기분 좋으면서.”
“아 진짜…….”
억울하단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는 게 귀여워 양쪽 젖꼭지를 잡아 세게 꼬집었다. 서하림이 두 눈을 찌푸리며 아프다고 몸을 뒤틀었지만 진짜 아프면 하림이의 것이 죽어야지 이렇게 팔팔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근데 아프다면서 이건 왜 이래?”
하림이의 것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반쯤 상체를 일으켰던 하림이가 다시 앓는 소리를 하며 누웠다. 매끈한 다리로 날 밀쳐내기도 했지만 허벅지 안쪽 살이 떨리는 게 보였다.
하림이의 것을 손에서 놓는 대신 입에 물었다. 좀 전에 내가 하림이 안에 넣었다 뺐던 것처럼 하림이의 것을 내 목구멍 깊숙이 한 번 박았다 뺐다. 그리고 고환을 빨아 입안에 굴리고 뱉어낸 뒤 하림이의 뿌리 끝부터 귀두와 요도 구멍까지 혀를 세워 천천히 쓸어 올렸다. 요도 구멍을 괴롭히기 시작했더니 서하림이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잡고 신음을 흘려댔다.
나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하림이랑 맨살로 닿고 싶어서. 이따 박아 넣고 밤이 새도록 괴롭힐 때 하림이 위에 누울 것처럼 올라가 살을 비비고 싶어서. 하얗고 고운 등에 내 가슴팍이 닿는 것도 좋겠고.
하림이의 것이 발기해 아랫배에 닿을 만큼 선 것을 보고 나는 혀를 좀 더 아래로 내렸다. 통통한 회음부에 혀가 닿자 움찔거린다. 거기다 내 침을 잔뜩 발라 놓고 좀 더 아래, 아래로 혀를 움직였다. 다행히 많이 찢어지진 않아 피는 금방 멎은 하림이의 구멍은 한 번도 벌려진 적이 없는 것처럼 꽉 닫힌 채 수줍어했다. 촘촘한 주름 사이 작게 맺힌 피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뒤가 찢어져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어쨌든 피가 난 거니 아프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최대한 침을 모아 하림이의 뒷구멍을 빨아댔다. 하림이가 위로 도망가려고 하길래 허벅지를 껴안았다.
“빨리…… 빨리해.”
밤은 길고 시간은 많다. 빨리하면 오히려 하림이가 더 힘들 터였다. 답지 않게 바보 같다. 사정이 뭐 푹푹 열 번 움직여 할당량 채우면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이런 쪽으로는 진짜 때가 안 탄 게 이런 데서 느껴졌다.
나는 혀끝을 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뜨겁게 조이는 안쪽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게 어서 더 들어오라고 종용하는 것 같아 혀를 최대한 끝까지 넣었다. 움찔움찔, 저 나름대로 이물감에 힘을 주는 것 같은데 그럴수록 사람 돌게 하는 줄도 모르고 서하림은 계속 안을 움찔댔다.
혀를 살짝 빼고 침을 모아 흘려 넣으려는데 혀가 나오면 나오는 대로 안이 조여드니까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방에 들어가 뭘 가지고 오자니 하림이가 옷 추스르고 나가 버릴 것 같고. 하는 수 없이 손에 묻은 하림이의 정액을 콘돔 위에 마저 묻힌 뒤 삽입할 자세를 취했다.
하림이는 곧 제게 박아 넣을 나를 울먹이며 바라보았다. 숨을 꼴깍꼴깍 삼키느라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평소엔 잘 울지도 않는 애가 내 아래에서만 곧잘 우는 게 존나 좋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림이와 눈을 맞춘 채 귀두를 삽입했다. 우리 둘 다 서로 미간을 좁히며 삽입의 고통을 맞이했다. 나름 많이 풀어줬다고 생각했는데 원체 좁은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 손을 뻗어 하림이의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안쪽에 조금 힘이 풀리는 순간 그걸 놓치지 않고 쭉 밀어 넣었다.
“아…… 하으, 아프…… 아…….”
몇 센티가 조금 못 들어갔다. 아까도 이만큼은 못 들어갔던 것 같다. 이 정도가 하림이의…… 음.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전엔 다 넣었었는데. 다 넣지 않겠다곤 했지만 지금 와서 그게 알 반가.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 끝까지 밀어 넣기 위해 하림이의 허리를 잡았다.
“그만, 그만해, 아 제발…….”
“나 진짜, 너무, 윽, 아 너무 좋았어.”
“동규야, 아, 하으…… 김동규…… 아!”
“네가 직접 코, 콘돔까지, 헉, 하읏, 아 존나, 하.”
힘으로 밀어 넣으니 전에 느꼈던 확 좁아지는 곳에 닿았다. 존나, 그게 느껴지는데 쌀 뻔해서 놀랐다. 전부 다 들어가고 나니 하림이도 도망칠 생각이 사라졌는지 몸에 힘을 풀고 늘어졌다. 손으로 아래를 더듬었다. 하나도 남지 않은 다 펴진 주름이 느껴졌고 아니 주름이 없어졌으니 주름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아무튼 그 작고 좁아 내 것을 버겁게 받아들인 곳을 더듬었더니 손에 피가 살짝 묻어나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피도 액체니까 움직이기는 좀 더 수월해질 것 같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으…… 아, 이거…… 김동규…….”
“응, 계속 내 이름 불러.”
“그만하자고…… 으응…….”
허리를 천천히 뒤로 무르고 다시 천천히 밀었다. 느리게 피스톤질을 반복하자 좁았던 하림이의 내벽도 내 것에 적응을 하는 건지 움직이기가 괜찮아졌다. 아프다고 울던 하림이 소리도 어느 순간부터 안쪽을 찌를 때마다 자지러지는 소리로 바뀌었다. 이제 좀 속도를 올려도 되겠지.
“빨리한다.”
“아니, 아니! 아니 잠깐, 으응, 하, 하지 마……알라고!”
귀두가 살짝 걸쳐질 정도로 빼고 끝까지 삽입했다. 온몸에서 불꽃놀이가 터지는 것만 같다. 끝까지 삽입하고 빼내길 수차례, 제일 안쪽 지점이 자극될 때마다 서하림이 죽을 것처럼 신음을 냈다. 그 소리가 듣기 너무 좋아 나는 좀 더 안으로, 안쪽으로, 더 깊은 곳까지 박아 넣기 위해 추삽질을 열심히 했다. 발발 떨리는 다리와 손이 안쓰러우면서도 고통에서 멀어져 결국엔 쾌락에 굴복했단 걸 알려주는 것 같아 보기 나쁘지 않았다.
삽입하는 힘이 너무 세서 하림이가 자꾸만 위로 밀려 올라갔다. 그때마다 아래로 다시 끌어오고 박다가 또 끌어오고를 반복했다. 근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하다 멈추기가 짜증 나 하림이의 다리를 내 허리에 둘렀다. 하지만 하림이의 다리는 벌벌 떠는 채로 힘이 들어가지 못해 내 허릴 감질 못했다.
아 시발 좆같다. 다리 한쪽도 팔도 불편한 상태라 완전히 내가 편한 대로 되질 않는 게.
“하림아.”
“…….”
“빨리, 끝내려고 노력할 테니까 내 목 좀 끌어안고 다리로 허리도 좀 감아봐.”
“…….”
“응? 얼른.”
빼지 않고 박은 채로 보챘더니 숨을 몇 번 고른 하림이가 내 목을 감아 왔다. 다리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허리를 완전히 고정하진 못했지만 이 정도만 돼도 좋을 것 같다.
“응읏……!”
앙다문 입에서 이빨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오고, 내 머리를 끌어안은 덕분에 아주 가깝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하림이의 안을 좆으로 때리겠단 의지로 움직였다. 찔걱이는 소리 사이에 들리는 푸슉푸슉 하는 소리가 존나 음란했고 빠지면 빠지는 대로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하는 서하림도 끝내줬다. 예쁜 신음이 흔들리는 몸 때문인지 바르르 떨리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잘 느끼는 게 신기해 열심히 박으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하림이가 또 사정을 했는지 내 아랫배에 문질러지던 것이 미끄덩거렸다. 나도 그렇지만 하림이도 좋아 죽을 것처럼 구는 게 존나 좋았다. 사정의 순간이 수십 번도 더 찾아왔지만 이를 악물고 열심히 참아대는 보람이 있었다.
나는 계속 네가 예쁘다고, 세상에서 네가 너무 좋다고 속삭였다. 뜨거운 네 안쪽이 너무 좋고 좁은 곳 뚫어대는 이 기분도 좋다고. 생각만 같으면 네 아래를 죄다 찢어서 다물지도 못하게끔 만들고 싶다고. 좆뿐만 아니라 내 온몸을 네 안에 집어넣어 너와 한 몸이 되고 싶다고. 이렇게 너랑 섹스하다 죽으면 황홀할 것 같다고.
내 귓가에 서하림의 신음이 때려 박히듯 나는 서하림의 얼굴을 핥아대며 그의 뇌에 이런 말들을 새겨 넣을 기세로 속삭였다. 도리질을 치면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내가 얼마나 너에게 욕정하고 있는지 잊어버리지 말라며, 평생 기억하라며.
몇 번이고 질리지도 않고 평생 해줄 수 있는 말들이다. 지금 당장은 끔찍한 말로 다가오겠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서하림은 이런 내 추하고 징그러운 것들까지 이해하고 받아 줄 것을 안다.
그래서 더 얘기했다. 필사적으로 사정을 참고 내일 허리가 아파 일어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쉬지 않고 허릴 움직이며 하림이의 안이 더 이상 내 좆을 물어대질 못하게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기 위해 사방팔방을 쑤셔댔다.
본능에 가장 가까운 행위를 하며 쏟아낸 말들은 서하림 기억 가장 아래에 또는 무의식에 입혀져 갈 테다. 만약 내가 아닌 누군가와 섹스를 하게 되더라도 내가 속삭인 모든 말이 서하림을 괴롭힐 것이고 하다못해 키스를 하고 손만 잡아도 내가 했던 말들이 떠오를 것이다.
“아, 동규야, 그만, 김동규…….”
그만하라며 내 이름을 불러댔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뭘 그만하라는 걸까? 섹스를? 아니면 이야기를? 물어볼까 싶었지만 계속하던 말을 이었다.
“가끔…… 이렇게, 날 부르는 네 목소릴 듣고 있으면 있지.”
“흐아, 윽, 아…….”
“넌 모를 것, 같은데…… 너무…… 너무 좋으면 다 그냥 부수고 싶, 어.”
“으…… 하으읏! 으응, 아앗…….”
“네가 내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이랑도 얘길 해야 하고……. 그래서 그냥 상상인데 양잿물인가…… 그거 마시게 해서 성대 녹게 해도.”
“아 진짜, 제발 그만해…… 아, 김동, 동규야…….”
“좋겠다고, 윽, 생각했어.”
그렇게 나는 서하림의 목소리가 다 쉬고 눈물도 나지 않을 때까지 하림이와 섹스를 했고 하고 싶은 말들을 속삭였다. 서하림이 직접 콘돔을 들고 온 것은 서하림 의지로 나와 성적인 행위를 하겠다고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이제는 정신도 온전히 서하림을 가진 느낌이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다.
다 쉰 목소리로 색색거리는 신음에 이젠 나도 참지 못하고 사정했다. 서하림 안쪽은 여전히 좁고 내 좆을 조이고 있었지만 하도 엉망진창으로 쑤셔진 탓인지 부드럽게 내 것을 감싸 안고 있다는 게 더 어울렸다.
나 너랑 하고 싶은 거 너무 많아. 그러니까 오늘처럼 이렇게 또 먼저 날 찾아와서 다리 벌려줘.
하림이 위에 엎어져 사정을 만끽했다. 콘돔 안에 답답한 느낌으로 사정을 하고 나서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일어나면 빼야 되고 그러면 끝이고 하림이 집에 돌려보내야 되는데 그러기가 싫었다.
“……무거워.”
“응.”
“숨 막히다고.”
“미안. 근데 조금만 이러고 있자. 너 지금 목소리 쉰 거 존나 섹시해.”
“…….”
“듣기 좋으니까 뭐라고 말 더 해봐.”
“씻고 싶어.”
“응.”
“씻는다고.”
“좀 이따가 씻어. 내가 씻겨줄게.”
“됐어. 내가 씻을 거야.”
“응, 그럼 조금 이따가.”
대답 없이 한숨 쉬는 하림이를 껴안았다. 이것 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것처럼 서하림도 이렇게 땡깡 부리고 고집부리는 나를 끝끝내 밀어내질 못한다. 하림이가 계속 이렇게, 너무 착하니까 내가 자꾸 점점 못나지는 거다. 옛날 같았으면 씻겠다는 하림이 말에 벌떡 일어나 화장실까지 모셔다 줬을 텐데.
나는 맛이 간 하림이의 목소리를 계속 듣기 위해 서하림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이 정도로 목이 쉬었으면 그냥 씹을 만도 한데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하림이가, 너무 좋았다. 사랑스럽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짜로 씻고 싶어. 힘들다, 이제. 쉬고 싶어.”
“알았어.”
하림이 안에서 숨 쉬고 있던 내 성기를 꺼냈다. 빼기 너무 아쉬워 천천히 뺐는데 하림이가 허리를 뒤틀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거에도 느끼나 보다.
“그래도 콘돔 껴서 그런지 교복 많이 안 더러워졌다.”
다리가 풀렸는지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서하림을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갔다. 나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물소리는 한 시간이 넘어도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서하림을 기다리는 동안 휴지를 가져와 딸이나 쳤다. 내 손 대신 하림이의 몸을 더듬고 있을 물줄기를 질투하면서, 아직도 성기에 남아 있는 압박감을 떠올리면서.
“미안한데, 나 집에 좀 데려다줘.”
“어어, 당연히 그래야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교복 다시 입을래? 안 입을 거 같아서 옷 가져왔는데.”
“응.”
우리 집에 서하림 사이즈 맞는 옷을 좀 몇 개 구비해 놔야겠다. 내 옷 입은 것도 보기 좋은데 겨울이라 큰 품의 옷 사이로 찬바람 들어갈까 봐 걱정이 됐다. 바닥에 있던 목도리를 칭칭 감아 둘러주고 코트도 입혔다. 나는 대충 패딩을 껴입고 하림이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둘러멨다.
“머리 안 말려도 돼?”
“어차피 택시 탈 거라 상관없어.”
“걷기 힘들면 업힐래? 택시 타러 가는 곳까지만.”
“아니. 그냥 부축만 해.”
“교복은? 내가 빨아서 갖다줄까? 집 들어가다가 부모님이나 이모님 만나면 좀 그렇잖아.”
“맘대로 해. 나 진짜 피곤하거든. 빨리 가자 좀.”
“아 어 미안. 오늘 연주회도 있었지. 아니 어젠가.”
나는 바보처럼 웃으며 신발을 신었다. 하림이가 허리 숙이기 힘든 것 같아 신발도 신겨줬다. 벌써 12시가 넘었다니. 도대체 안 싸고 몇 시간을 참은 건지 모르겠다. 맨날 토끼처럼 조루처럼 하림이 손만 닿아도 싸기 바빴는데 이렇게 내가 오래 참을 수 있었다는 게 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역시 사람은 맘만 먹으면 못 할 게 없다. 너무 참아서 사실 요도가 좀 얼얼할 정도다.
“차라리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택시 잡고 내가 올라.”
“아니. 동규야, 나 진짜 지금 너무 힘들어…….”
“그럼…… 자고 갈래?”
“괜찮아. 집에서 잘래. 빨리 집에 좀 보내줘, 좀. 말할 기운도 없어 지금.”
“아, 미안. 너무 좋아서. 가자.”
우리 집은 후문 바로 앞에 있는 동이라 후문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새벽인데도 얼마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택시에 탄 서하림은 창밖만 바라보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많이 힘드냐고 미안하다고 했는데 진짜 힘든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아 나도 그냥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죄책감과 미안함이 몰려들었다. 다음엔 진짜 아프지 않게 해야겠다.
우리는 서하림 집 바로 앞에서 내렸다. 안까지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서하림이 고개를 저으며 오른손을 뻗었다.
“아, 바이올린. 여기.”
기운 없는 하림이 어깨에 잘 메어줬다.
“목 아프니까 말 안 해도 돼.”
“…….”
“잘 들어가고, 바쁜데도 와줘서 고마워. 아빠한테 맞아서 아픈 거 다 나은 거 같아.”
“…….”
“그, 너무 아프게 해서 미안해. 다음부턴 안 그럴게.”
“……다음.”
“진짜로. 춥지, 머리도 안 말렸는데 얼른 들어가 이제. 아주머니보고 우유라도 데워달라고 해서 마시고 자. 알겠지? 아, 말 또 길어진다. 들어가 빨리.”
나는 서하림을 이끌어 현관 비밀번호 패드 앞에 세웠다. 서하림이 긴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벤치에 앉아 서하림 방 불이 켜지고 꺼지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도 한참이나 창을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갔다. 온 거리가 크리스마스의 불빛으로 반짝였다.
3부 Limit line fin.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