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숨(2)
사람 욕심이라는 게 하나 해주면 두 갤 원하고 두 개 해주면 세 개 원하는 거라 했다.
기껏해야 점심에 밥 먹고 서하림 불러다 얘기할 예정에 신의 은총이 따랐지만 이왕 끝나고 데려다주는 거 아침에도 데리러 오면 얼마나 좋겠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배가 불렀지 불렀어. 나는 원래 이렇게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닌데 서하림과 가까워질수록 욕심쟁이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원래 연애를, 음 아니, 확실히 아직은 사귀는 건 아니니까 연애는 아니고. 원래 사랑을 하면 다 이렇게 되나?
첫 시간인 국어는 그래도 푹 자고 일어난 상태라 나쁘지 않은 컨디션으로 쳤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하림이가 보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종 치자마자 쪼르르 달려왔을 걸 생각하니 귀엽고 예뻤다.
“잘 봤어?”
사실 보름 만에 보는 거라 서하림 만나면 나도 화까진 아니라도 뭐라고 할 생각이었다. 어떻게 내 연락을 씹을 수 있냐고, 그날 그렇게 날 홀려 놓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피할 수가 있냐고. 그러면 하림이가 예쁜 눈동자를 굴리면서 나름대로 변명을 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알겠다며 키스도 해주고 젖꼭지는 이제 괜찮냐며 보여달라고 슬쩍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그냥 평소처럼 봤어.”
그런데 정말이지, 저 예쁜 얼굴은 당할 재간이 없다. 누군들 저 얼굴을 앞에 두고 욕이나 할 수 있겠냐만 뭐 어떻게 안 좋은 말 한 마디가 나오질 못했다. 서하림이 나 찔러놓고 ‘죽어’ 해도 피 토하면서 ‘응 그럴게’ 하고 대답할 호구 새끼가 나다.
“되게 오랜만이네. 보고 싶었어.”
“선생님이 감독하러 와?”
“응. 좀 전에 영어 쌤 왔다 감.”
“헐. 너만 뚫어지게 보고 있어?”
“아니.”
“너 17번 정답 뭐로 체크했냐? 이거 우리 반 애들 답 제일 많이 갈려.”
왜 내 연락 피했냐고 물어보는 건 이따 밥 먹고 해도 늦지 않겠지. 나는 시험지를 넘겨 17번 문제를 확인했다. 나는 2번으로 체크했고 서하림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집에 가서 가채점했을 때 우리의 정답이 맞았다.
수학 때는 머리가 좀 아파와 세 문제 풀고 드러누웠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아 수식만 깨작대다가 안경을 벗었다. 이 안경은 엄마한테 용돈 필요하다 했더니 이유도 안 묻고 바로 30만 원 쏴주길래 그 돈으로 맞춘 거다. 왜 필요한지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 생각이었지만. 안경을 벗어 케이스에 넣어두고 멍 때리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아 성찰의 시간이 찾아왔다.
곰곰이 생각해 본 건데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 서하림이 데리러 와줬으면 좋겠다고 한 건 좀 과했다. 하림이가 착한 건 맞지만 욕심난다고 그걸 이용해 먹으려고 한 건 내 생각이 짧았다. 중요한 모의고사 날 쉬는 시간 전부를 나에게 투자하는 게 솔직히 말해 서하림 아줌마도 마냥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내 주제를 알아야지 하림이를 오래 볼 수 있다. 욕심을 부려 내 그릇 크기를 줄이기보단 서하림처럼 큰 바다 같은 애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나무나 미생물도 아니고 사람이니 욕심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전에는 잘만 하던 거 요즘 행복에 겨워 나댔다.
조심해야지. 조심 또 조심. 아무리 욕심이 나도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잘 누르자.
“야! 23번 답 뭐야! 뭐 나왔어! 37 맞아?”
종 치고 몇 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보건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렸다. 서하림은 책상 위에 곱게 접어둔 내 시험지를 펼쳤다. 한 번에 24번이 있는 페이지를 펼친 것도 대단했다.
“헐. 뭐야, 왜 이래?”
“컨디션 안 좋아서 수학은 패스했어.”
“아, 왜!”
“다른 애들은 37 아니래?”
“이 문제 지금 전멸이야.”
“헐, 그 정도?”
“나도 첨에 -2 나왔다가 긴가민가해서 다시 풀었더니 37 나와 가지고 너는 뭐 나왔나 궁금해서 달려온 거야.”
“미안.”
“됐어. 밥이나 먹자.”
서하림 손에 커다란 도시락통이 달랑거렸다. 나 때문에 서하림이 급식을 먹질 못하니 집에 입주해 있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만들어준 것일 테다. 보건 선생님과 간병인이 점심을 먹으러 교직원 급식실로 떠났고 서하림은 내 책상 위에 도시락 통 몇 개를 꺼냈다가 자리가 모자란다며 통들을 다시 넣었다.
“안에서 먹자.”
“안에?”
좋은 학교라 침대가 전부 칸막이가 쳐져 있는데 심지어 온돌도 깔려 있어 작은 방이나 다름없었다. 침대는 접이식으로 매트와 이불, 베개만 있다.
뭐 깔 거 없나 보건실 주변을 뒤지다가 “이거 좀 쓴다” 하며 시험지까지 옆구리에 챙긴 서하림을 따랐다. 보건실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뭘 이렇게나 많이 해주셨어? 도시락 들고 오는 거 많이 무거웠겠다.”
“내 말이. 아니. 야 너 거 때문에 그래.”
“아 그러네. 미안.”
그 등치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겠다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 앞에 내려놓는 모습이 어색하다. 원래 이런 건 내가 하는 건데.
한 손으로 서하림의 턱을 잡아 입을 맞췄다. 우리 사이엔 펼쳐놓은 밥이나 반찬이 한가득이라 서하림이 엉덩이를 뗀 애매한 자세였다. 놀랬는지 동그란 눈이 감기지도 못하고 흔들렸다. 그래서인지 입도 쉽게 열렸다. 혀를 안으로 미끄러뜨리며 푸스스 웃었다. 좀 더 키스하고 싶었는데 애 밥은 먹어야 해서 서하림 침 빨아 삼키고 바로 떨어졌다. 서하림은 제 자리에 앉아 날 째려봤다.
“미안. 귀여워서.”
“밥이나 먹어.”
“밥 먹고 나서.”
서하림은 꼭 밥을 먹기 전에 국을 숟가락으로 떠 한 번 마신 뒤에 밥을 먹기 시작한다. 도시락도 예외는 아닌지 숟가락으로 국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색이 좋은 입술이 키스 때문에 촉촉해 눈길이 갔다. 도톰하고 말랑한 입술이 벌어지며 숟가락이 살짝 들어갔다. 서하림의 목젖이 움직이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거기 보여줘.”
“거기?”
“젖꼭지.”
“아 밥 먹는데 그런 소리 좀.”
“미안. 근데.”
눈도 안 보고 대답하는 모습은 혼자서 식사하는 모양새였다. 부끄럽긴 엄청 부끄러운가 보다. 하긴, 그런 곳이 성감대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텐데 그렇게 세게 빨리기까지 했으니 부끄러움을 넘어서 수치를 느꼈을 수도 있겠다.
“보여주기 좀 그러면…… 아직도 많이 빨개? 혹시 멍들었어? 피가 몰린 거 보면 피멍이 들지 않았나 싶은데. 집에 가는 길은 어땠어? 셔츠에 쓸려서 아프진 않았어? 셔츠가 많이 얇았는데 음…… 비치진 않았고?”
“…….”
“밴드 붙였어? 아니면 거즈? 붕대? 혹시 살 표피가 벗겨진 건 아니지? 간혹 아기 엄마들은 유두가 닳는대. 아기들이 하도 빨아서. 나는 아긴 아니지만 그래도 그날 좀 많이 빨아대긴 했잖아. 음 겨우 하루 빤 걸로는 안 닳는 게 맞겠지. 좀 아쉬운데.”
“…….”
“아 궁금해. 알려줘. 그럼 보여달라고 안 하고 알아서 상상할게. 나 그거 존나 잘해. 맨날 하는 게 너 벗겨 먹고 이런 거 저런 거 하는 상상이야.”
서하림은 내 얘기는 전부 무시한 채 고고하게 밥을 먹었다. 이런 얘기는 정말 면역이 없는지 귀가 좀 빨개진 것 같았다. 나는 어리고 예쁜 학생을 희롱하는 변태 아저씨가 된 기분이었다. 솔직히 하림이가 음담패설에 약할 거란 건 예상한 거라 좀 미안하긴 한데 그만두자니 이런 얘기 들을 바에야 차라리 교복을 벗어줄 거라고 조금은 기대하는 것도 없잖아 있었다.
“옷 입을 때랑 벗을 때랑 어떤 게 더 자극적이야? 그날 이후로 시간 꽤 흘렀는데 혹시 티셔츠 안 닿게 잘 입고 벗는 너만의 방법이 있어? 그거 알아? 멍은 자꾸 눌러주면 빨리 없어진대. 아기들 쓰는 멍크림 바른 다음에 꾹꾹 눌러가며 문질문질하는 거야. 혹시 멍들어서 아직 안 빠졌으면 내가 좀 만져줄까? 안 아프게 해줄게. 내가 손은 커도 섬세한 거 잘 하는 거 알지. 제빵 그거 곰손은 못 하는 거야. 하림이 너는 피부가 하야니까 빨개진 젖꼭지는 음…… 하얀 생크림 케이크 위에 올라간 체리나 딸기 같겠다. 그치?”
입으로 향하던 젓가락질이 살짝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아 좀만 더하면 될 것 같다.
“사실 맛도 크게 다르지 않을걸. 너 과일 많이 먹잖아. 그래서 그런지 네 정액은 좀 단맛 느껴지는 것 같다? 넌 네 거 안 먹어봐서 개소리라고 할 수 있는데 네 거는 정액도 그렇고 땀이랑 눈물에서도 좋은 맛 나. 아, 또 빨고 싶다…… 하지만 아직 아플 테니까 나중으로 미룰게. 그리고 아직도 빨간색이면 너도 많이 부끄러울 테니까.”
“…….”
“정액 하니까 생각 난 건데 하림이 네 거기, 그러니까 젖꼭지 말고 아래. 거기도 색 진짜 예쁜데. 귀두는 진짜 예쁜 맑은 분홍색이고 기둥은 네 피부색이랑 똑같아서 솔직히 나 진짜 깜짝 놀랐다? 모양도…… 생물학이나 해부학 교과서에 실려도 될 정도야. 아 이건 농담. 네 거 남들이 본다고 생각하면 존나 처죽이고 싶어져.”
곱게 생긴 서하림의 것은 남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고추, 자지, 좆, 성기, 거시기, 페니스 같은 그 어떤 단어를 붙여도 성에 안 찼다. 서하림 것에 비하면 다 상스럽고 천박했다. 국어사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세종대왕이 무덤에서 깨어나도 하림이의 것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림이의 것을 지칭하는 가장 자연스럽고 어울리는 단어를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은 분명 나일 거다. 어떻게 생겼는지 촉감은 어떤지 맛은 아직 모르지만 아무튼 서하림의 것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나였고 만에 하나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서하림의 것을 보고 만지고 빤다고 해도 미래의 나만큼 어울리는 단어를 찾진 못하리라.
“그래서, 지금 무슨 색이야?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빨간색인 게 좋겠는데. 좀 꼴리잖아. 젖꼭지가 아직도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고 교복 입을 때마다 찌르르하면서 내 생각도 나고 그렇게 만들어준 내 입도 생각나고 그러다 보면 또 내 똘똘이도 생각나고 뭐, 그러다가 혼자 음, 근데 이건 너는 나랑 다르니까 아닐 수도 있고. 나 사실 그때 네 정액 묻었던 손 물로 딱 한 번만 대충 씻고서 며칠 동안 킁킁거렸다. 냄새만 맡아도 존나 벌떡벌떡 서더라고.”
“할 말 다 했어? 안 먹을 거면 정리하고.”
입이 짧은 서하림은 밥을 딱 반만 비웠다. 나는 숟가락조차 건들지 않은 상태였다. 하림이는 부끄러워 나랑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서둘러 먹었는데 나는 변태 아저씨가 돼서는 희롱만 잔뜩 한 게 좀 머쓱해졌다. 그래도 적나라한 내 말에 귀가 빨개진 게 존나 귀엽잖아.
“먹어. 먹을 거야.”
급하게 숟가락으로 밥을 크게 떠 입에 쑤셔 넣었다. 여전히 변태 아저씨 같은 미소를 머금고 하림이와 눈을 마주치면서.
“……원래대로 돌아왔어. 됐지.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라.”
주어는 없었지만 나는 서하림이 지칭한 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좀 아쉽네. 신체의 치유 능력이 이토록 뛰어난 것이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나는 그래도 곧 있으면 성인이니까 아기들보다 빠는 힘이 더 세지 않을까? 그러면 음, 진짜 맘먹으면 빨아대다가 피부가 터지는 것도 가능한가. 피부는 그렇게 약하진 않은데 유두 쪽은 좀 얇은 것 같으니까 완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닐 것 같은데.
언젠가 피 나올 정도로 빨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짜 젖 빠는 느낌이겠지. 그쯤 되면 많이 아파 하림이가 애처럼 엉엉 울 것이다. 어디 묶어놓으면 더 쉽고 요긴하게 효율적으로 가슴을 빨 수 있으려나.
하림이와 함께하니 즐거운 식사였다.
서하림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 바이올린을 들고 브이 하고 있는 걸 보니 이번 주에 동아리 활동이 있었나 보다. 다른 사람이 찍어준 탓에 거의 전신 샷이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뭐, 교복 입은 모습도 좋아하니까 됐다.
“똥똥규! 뭐 해? 오늘도 쉬는 날?”
늦둥이 동생이 나랑 동갑이라며 유난히 내게 살갑게 굴어주는 간호사 선생님이 문을 열고 얼굴만 쏙 들이밀었다.
“네.”
“그래그래. 푹 쉬는 게 좋아.”
보름 전엔 이렇게 될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동안 의사고 간호사고 내 공부 봐주는 게 좋다고 한 게 문제였다. 공부 시간 줄이면 밥도 안 먹을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해서인지 선생님들은 의무적으로 내 공부를 봐줬다. 처음이야 멋모르고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냥 나한테 관심을 꺼줬으면 좋겠다.
어른들은 왜 이렇게 남에게 관심이 많고 남 일에 오지랖을 떠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도와주면 도와주는 대로 끝 하고 결과야 내가 어련히 알아서 얘기할 텐데 도와준 게 뭐 별거라고 모의고사 가채점 점수까지 궁금해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 상태가 나빠져서 문제는 푸는 둥 마는 둥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병원에서 아픈 몸으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잘 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점수만 가지고 보면 중학생 때도 안 맞아 본 점수였다.
학교 가서 서하림 보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정작 시험 조진 나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병원 선생님들이 유난이었다. 모의고사는 하루지만 중간고사는 4일이나 된다는 게 이유였다.
한 달 반의 입원을 얘기했던 의사는 최소 두 달 반이라며 말을 바꿨고 나는 수시로 달력을 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사실 오늘도 과외를 했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과외 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쌤 다음 시간에 봬요]
친절한 분이니 지난 몇 번의 취소 문자에 해줬던 답장처럼 이번에도 내 몸을 걱정해 주는 내용의 메시지가 올 것이다.
과외는 일주일에 세 번 그러니까 이틀에 한 번 꼴이라 다음 시간이라고 해봤자 내일모레다. 모레는…… 수업 들어야겠지. 한 장도 풀지 않은 숙제들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이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자꾸만 늘어 간다. 생활 패턴이 좆창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오후 회진 시간 때도 내가 잠을 자고 있으면 밤을 샜다는 증거라 잔소리를 엄청 들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이럴 거면 아예 몸이나 빨리 회복되게 푹 쉬지 뭐 하냐고. 그러면 나는 또 짜증이 나서 누가 공부를 안 하냐면서 치워둔 문제집을 펼친 채 밤을 새우고 또 아침에 잠들고, 늦게 잠드니 일어나는 시간도 오후 늦게라 밥도 약도 제시간에 먹지 못해 몸 상태는 바닥으로 치닫고.
간병인은 이모님에게서 돈을 받고 있지만 이모님은 아빠가 온 이후론 큰일이 없는 이상 내가 병원에서 어떻게 지내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간병인은 날 걱정하는 말을 몇 번 해주다가 내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자 그만두었다. 과외 쌤은 수업을 병실에서 해서 그런지 내가 수업 내내 멍하게 있거나 딴생각을 하고 있어도 의사의 눈치를 많이 보느라 열심히 공부하란 소리도 못 했고 맘이 붕 뜬 내게 쓴소리도 하지 않았다.
모의고사 본 날은 솔직히 중간고사만 잘 보면 상관없단 입장이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부터 잠자는 시간을 줄여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나 공부라는 행위가 생각보다 체력도 많이 필요로 하고 뇌를 엄청나게 괴롭히기 때문에 공부하던 중에 갑자기 필름 끊기듯 기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입원이 한 달이나 더 늘게 됐다. 서하림 아빠도 쓰러졌다는 내 소식을 듣고 찾아왔지만 차마 공부를 하지 말라고도 그렇다고 하라고도 못 했고 서하림 엄마는 무조건 쉬는 게 좋겠다며 꽤 긴 메시지를 보내왔다.
문제는 한 달이나 더 입원해야 한다는 얘기에 모든 게 허탈해진 내 마음에 있었다. 9월은 끝나가고 중간고사는 다가오지, 공부하고 싶어도 몸이 안 따라주니까 모든 게 다 좆같았다. 문제집이고 필통이고 보기가 싫어서 서랍에 쑤셔 넣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서랍으로 선뜻 손이 가진 않았다. 어차피 펼쳐봐야 머리가 아파서 얼마 풀지도 못할 걸 알고 있었고 또 눈도 잘 안 보여서 풀다가 짜증이 치밀면 제 성질 못 이기고 문제집을 던질 것도 잘 알았다. 던져놓고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화를 삭이며 결국엔 주워 온다는 것까지.
또 과외를 미룬 내가 한심하고 죄책감이 들어 종일 밥을 제대로 먹질 못했다. 저녁을 일찌감치 치워 버리고 누워 있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하림이는 왜, 왜 하필이면 그렇게 잘나서…….
창밖엔 어둠이 내렸지만 서울을 밝히는 불빛들 때문에 밝았다.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도 불을 끈 병실 내부가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빛나는 모든 것이 짜증 난다. 빛 속에 어둠이 있으면 그 작은 어둠조차 몰아내려고 하면서 이렇게, 어둠만 내려앉은 밤에도 손톱만 한 불빛 하나가 수많은 어둠보다 더 존재감을 뽐내니까.
그림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니라 겁먹고 쫄아 든 어둠이며 빛이란 적에게 둘러싸인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어둠은 강한 빛을 만나면 만날수록 작아지고 도망가기 바쁘다. 거기다 블랙홀같이 절대적인 어둠은 심지어 빛을 흡수해 품기까지 하지 않는가.
그런데 빛은? 누군가에겐 생명의 신호이며 희망과 환희의 상징이겠지만 내게는 달랐다. 빛은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존재다. 혼자만 잘나고 혼자만 반짝거리고 혼자만…….
“아 시발.”
화가 나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서하림 탓을 하다니 미친 거 아닌가?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친다는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미친 새끼, 난 뒤져도 싸다.”
스스로에게 향하는 화가 도저히 멈출 기미가 없어 주먹을 쥔 손이 떨려왔다. 뭐라도 깨부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집이 아니라 참아야 했다. 대신 나는 주먹을 펴 내 뺨을 후려쳤다. 내 또래의 사내새끼들이 그러하듯 충동은 참기가 힘들었다. 볼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조악하게나마 면죄부가 되어 속에 핀 천불을 진정시켰다.
오늘도 일찍 잠들기는 글렀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언제 왔어.”
방금 전에 꾼 꿈이 뭐였는진 기억나지 않지만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본 게 서하림 얼굴이라니 분명 행운을 가져다주는 상징물들이 잔뜩 나오는 꿈이었을 것이다. 돼지, 네잎클로버 그런 것들.
모의고사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거지만 그동안 보지 못해 서럽고 속상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오히려 행복했다.
“28분 전에.”
서하림은 시계를 힐끔 보더니 대답했다. 대충 30분 전이라고 해도 될 텐데 천상 수학자인 게 이런 곳에서 티가 났다. 그게 또 멋있어서 좋았다.
“깨우지 왜 기다리고 있어. 언제 일어날 줄 알고.”
“안 그래도 이거 다 보고 나서도 안 일어나면 깨울 생각이었어.”
서하림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시집이었다. 나와 얘기를 하면서도 시선은 계속 시집을 향해 있었다. 하얗고 고운 손은 시집과 잘 어울렸고 살짝 내리깐 눈과 무표정한 얼굴은 고귀한 느낌마저 들어 나는 차마 아프고 괴로웠던 나를 어서 봐달라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평범한 교복에 서점에서 흔하게 살 수 있는 시집일 뿐인데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시집 읽는 서하림은 하나의 완벽한 명화 같았다. 나는 허겁지겁 안경을 꺼내 썼다.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의 실물을 영접해 감동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예술 작품 같은 서하림을 감상했다. 초침 소리도 가습기 소리도 병실에 서하림 하나 들어와 있다고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려왔다. 목이 타 연신 물을 삼키는 내 꿀꺽 소리는 소음에 가까웠다.
긴 속눈썹이 이따금 깜빡이며 움직였고 매끈한 손가락이 종이를 넘기는 모습은 단정했다. 시를 따라 움직이는 눈동자는 퍽 귀엽게 느껴졌다. 손에 들고 있는 게 시집이 아닌 춘화집이라고 해도 서하림은 이렇게나 정갈하고 고고한 모습으로 그림들을 볼 것이다. 모두가 서하림이 보고 있는 게 살색의 향연과 섹스로 난잡한 책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성서를 읽는 것으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나중에 천박한 판타지가 구현된, 더럽고 징그러운 섹스로 점철된 만화책을 구해 서하림이 읽게 하는 것도 좋겠다. 나는 하림이와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서 하림이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는 거다. 내가 봐도 심할 정도로 역겨운 섹스들을 텍스트도 아닌 그림으로 처음 접하게 되면 아무리 서하림이라도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리거나 눈썹이 조금 꿈틀거리겠지. 아주 사소한 얼굴 근육 하나하나까지 일그러지고 움직이는 걸 확인하는 쾌감도 상당할 것이다. 얼굴에 혐오가 피어나도 그건 그거대로 짜릿할 것 같았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책과 서하림이라니, 이토록 무해하고 잘 어울리는 조합은 잘 없다. 땀 흘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서하림도 좋고 칠판 한가득 풀이 과정을 적어나가는 서하림이나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서하림도 좋지만 책을 보는 건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만 필요로 했고 소리도 나지 않아 서하림을 오롯이 눈에 담기엔 아주 좋았다. 독서란 매우 정적인 행위는 하림이를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들어주었다. 책이 주는 아날로그적인 느낌도 분위기를 살리는 데 한몫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책이나 신문 같은 걸 보고 있는 서하림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매일매일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근사한 아침일 것이다.
“너 깨는 거 기다리느라 시간 너무 많이 썼어. 서술형 빨리 알려주고 난 간다.”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마지막 시를 읽어 나간 서하림은 다 읽기가 무섭게 시집을 가방 속으로 넣고 노트와 종이들을 꺼내 침대 위에 펼쳐놓았다.
“미안.”
“아파서 그런 건데 미안할 게 뭐 있냐. 아 그리고 아빠한테 들었는데 너 몸 안 좋아서 좀 쉬어야 한다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엄마도 네 걱정 많이 해.”
“미안.”
“아, 쫌! 그놈의 미안하단 소리 좀 안 하면 안 돼? 지금 이 꼴 된 게 네 잘못이 아니잖아.”
“아…… 미, 응. 알겠어.”
또 미안하단 소리가 자동으로 나올 뻔한 나를 보고 서하림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안 좋은 얘기 듣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른들 오지랖 떨어대는 거나 입 가벼운 건 알아줘야 한다.
“나도 이번 중간고사는 좀 쉬면서 적당히 대충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기말고사 때 만회하면 되는 거고 지금까지 해온 게 있는데 한 번에 폭삭 안 망해.”
서하림이 날 걱정해 주는 게 좋다. 할 수만 있다면 작고 약한 어린양이 되어 서하림에게 평생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살고만 싶을 정도였다. 나는 하림이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고 떨어지는 동안에도 하림이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고만 있었다.
“좀 쉬어. 너 아는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 죄다 걱정하더라. 나보고 너 좀 말려달래 친구 말이라면 좀 들을 거 같다고.”
“올라와 봐.”
펼쳐둔 종이와 노트들을 서랍 위로 치워 버리고 일반 병실 침대보다 훨씬 큰 침대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하림은 내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더니 신발을 벗고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에 앉았다.
“야, 공부는 체력전인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건강이 제일…….”
쫑알쫑알 내 걱정을 쏟아내는 하림이의 턱을 잡았다. 키스를 하려고 얼굴을 붙였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입술이 닿기 직전 멈추었다.
“문은. 잠갔어?”
“……아니.”
“바보네.”
내 병실 들어오면서 문 잠글 생각을 안 하다니. 나는 바람처럼 문을 잠그고 돌아와 안경을 벗어놓고 하림이에게 입을 맞췄다. 아직 안경이 익숙하지 않아 키스할 때면 여간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다.
가벼운 뽀뽀였던 좀 전과는 달리 입술을 열고 혀를 넣은 진득한 키스였다. 내 어깨로 손을 올리지도 못하고 그저 주먹을 꼭 쥐는 손이 귀엽다.
이렇게 혀를 섞고 있으니 정말로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집에 살면서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같은 햇살을 맞으며 눈을 뜨고 싶었다. 집안 곳곳엔 두 개가 짝인 물건들이 넘쳐나고 냉장고 속 재료들도 일 인분이 아닌 두 명분의 몫이 들어 있는, 어른이 된 서하림과 나의…… ‘우리’의 집.
반항 없이 순하게 감겨오는 혀를 빨면 빨수록, 달콤한 침을 삼키면 삼킬수록 서글픈 마음이 올라왔다. 쉬라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서하림에게서 듣는 게 좋으면서도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쉬지도 못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아니다. 다 내가 자처한 일이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나는 하림이를 안아 힘을 줘 밀어 눕혔다. 당황했는지 하람이가 밀치는 게 느껴졌으나 서하림보다 훨씬 무거운 체중으로 눌러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하림이가 고개를 돌리고는 숨을 골랐다. 내 침 때문에 입술이 반질반질했다.
“나 가야 돼.”
매정한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눈물 한 방울이 하림이의 볼 위로 툭 떨어졌다. 놀란 서하림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뭐야 이거.”
아니, 매정한 게 아니다. 내가 서하림 시간을 뺏고 있는 거고 서하림도 내게 굳이 안 와도 되는 걸 시험에 도움 되라고 여기까지 와 준 건데……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야 한다며 빼는 하림이의 한마디가 그렇게 비수가 되어 꽂힐 줄은 몰랐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게 아니었던가. 몸이란 그저 내 정신의 껍데기라 내가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생물체라고만 여겼다. 정말 몸이 힘드니 마음도 지치나 보다. 이런 투정도 다 부리게 되는 거 보니.
“……쉬고 싶지 않아. 안 쉬고 싶어.”
“뭐?”
“근데 또 한편으로는 진짜 엄청 진심 맘 편히 쉬고 싶어. 걱정 없이 잠 푹 자고 밥도 많이 먹고 하루 종일 멍 때리기만 하고.”
“해 그럼.”
“어떻게 해. 너 같으면 병원에 몇 달씩 처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썩어 있으라는데 맘 편히 쉬고 있을 수 있겠어?”
한 번 말을 시작하니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나는 하림이의 얼굴로 쏟아지는 내 눈물을 휴지로 닦았다. 그리고는 하림이 배 위에 앉아 서하림을 다리 사이에 두고 무릎 꿇듯이 앉았다. 성당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아 고해성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에게 기도하는 경건한 자세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참담한 기분을 맛보았다.
“할 수 있겠냐고. 나도…… 나도 두 달 푹 쉬고 싶다고. 눈도 병신 돼서 공부하려면 불편한 안경도 써야 돼. 그렇다고 문제가 잘 풀리는 줄 알아? 전처럼 집중하고 있다 보면 머리도 아파서 오래 하지도 못해. 그래서 숙제도 제대로 못 하고 그 전에 하고 싶은 맘도 의지도 맨날 사라져. 근데 더 좆같은 건 뭐냐면. 뭐냐면…….”
내 아래에 누워 있는 서하림은 심각한 얼굴로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나는 오열하듯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결국엔 나는 공부를 해야만 하고 그래서 문제집 풀다가 짜증 나서 던져 버려도 주워와야 한다는 사실이야. 그게 얼마나…… 얼마나 짜증 나고 비참한지 넌 모르지. 샤프 부러트린 것도 벌써 두 손을 넘어가. 나는 너랑은 다르게 머리가 좋지를 않으니까 너보다 몇 배나 더 노력을 해야…… 네 발끝 겨우 따라잡을 수 있는데 지금 이렇게 누워만 있는 게 존나 불안해 죽겠어. 그런데 마냥 쉬라고.”
“…….”
“쉬면. 중간 끝나는 날까지 푹 쉬면 12시 땡 하고 온몸이 다 낫는대? 나 원래 시험 끝난 날부터 다음 시험 준비해. 그리고 나도 중간고사는 대충 보고 쉴까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기말고사로도 커버 못 할 정도로 망칠까 봐 진짜 너무너무 불안해 지금.”
몸을 숙여 하림이에게 입을 맞췄다.
“이도 저도 할 수 없어서 너무 불안하다고.”
다시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 뗐다.
“근데 쉬든 공부하든 시험을 망치든 그런 건 사실 다 부차적인 문제야. 내가 제일 비참하단 생각 들고 제일 슬픈 게 뭔지 알아.”
“……아니.”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진짜 약해지나 봐. 사실…… 하림이 너 때문에 힘들단 생각 조금 했어. 미안해……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결국 말했다. 정말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하듯이, 제일 힘든 건 다름 아닌 너 때문이라고.
나는 차마 하림이의 입을 또 맞추지도 못하고 하림이 위에 엎어져 엉엉 울었다. 웅크린 내가 배 속의 태아 같기도 했고 진짜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처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 같기도 했다. 나는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자주 하림이에게 미안하단 말을 쏟아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랑하는 하림아…….
“야, 너 뭐 해.”
바지 안에 잘 넣어져 있던 셔츠를 끄집어내고 그 안으로 팔을 넣어 맨 허리를 껴안았다.
“위로.”
“뭐?”
“그냥 네 살, 네 체온이 그리워. 아프게 안 할게. 그냥 진정될 때까지만…… 안 돼?”
눈물 뚝뚝 흘려가며 얘길 해서 그런지 하림이는 팔로 눈을 가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울 것이다. 만약 하림이가 안 된다고 했으면 서럽다며 죽겠다는 얘기를 했을 것 같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서하림은 착하니까.
나를 더 불쌍해해. 날 더 동정해. 날 가엾게 여겨줘. 죄책감에 버릴 수도 없게.
하림이의 허락이 떨어진 순간부터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일부러 벗겨 먹을라고 눈물이 나온 건 아니었는데. 정말, 진짜로 가야 된다는 말에 갑자기 서러움이 터져서 운 거지.
나는 교복 마이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맘 같아선 빠르게 풀어버리고 싶었지만 마이 안에 있을 카디건과 셔츠의 단추들까지 천천히 풀어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바쁘니까 가야 한다는 서하림의 시간을 더 많이 잡아먹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셔츠 단추까지 풀고 나자 조금은 아쉬웠다. 단추가 백 개쯤 있었으면.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셔츠를 양쪽으로 펼쳤다. 오랜만에 보는 하얀 몸과 분홍색 유두가 날 반겼다.
“아…….”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오는 몸이었다. 나는 황금비율로 완성된 조각상에게 혼을 빼앗긴 듯 하림이의 매끈한 상체를 손끝으로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댔다. 흰 몸이 흠칫거리긴 했지만 하지 말란 소린 없었다. 너무 좋다……. 내 뜨거운 손이 조금 덜 따뜻한 하림이의 몸을 만지고 있다는 게 진짜 존나 좋았다.
잠시 옆구리나 가슴팍을 그렇게 만져대다가 턱 끝에 입술을 댔다. 어디 왕의 발등에 입을 맞추는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아직도 입술을 깨물고 있길래 물린 입술을 빼주었다.
“하아…….”
하림이의 목으로 내려오니까 진짜 숨이 트이는 것만 같다. 밤낮으로 날 괴롭히는 공부를 하지 않은 죄책감 한편으론 쉬고 싶다는 욕구, 내 몸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시험만 생각하면 조급해지는 모든 복잡한 감정이 하림이의 살 냄새 하나에 평온함을 되찾았다. 머리가 갑자기 쌩쌩 돌았다. 조금만, 조금씩만 적당히 공부해야지. 절대 무리하지 말자. 편히 쉴 수도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할 수도 없으니 욕심을 반만 부리자. 하림이 오래오래 보려면.
숨을 더 이상 들이쉴 수도 없을 정도로 아주 깊게 들이마시고 코로 혹은 입으로 뜨겁게 내뱉기를 반복했다. 왜 이제 왔어, 진작 왔으면 맘 정리하기 좋았을 텐데. 아니, 애초부터 내가 이렇게 병원에 있는 게 잘못이고 그 전에 아빠가 병신 같은 인간쓰레기인 것부터가 잘못이다.
순식간에 진정이 되자 나도 모르게 혀를 빼고 하림이를 핥고 있었다. 목은 물론이고 턱 아래까지 내 침 때문에 반질반질했다. 내 침으로 샤워라도 시켜 줄 기세였다. 나는 쇄골의 파인 부분을 혀로 길게 훑으면서 하림이의 젖꼭지를 손으로 살짝 눌렀다. 으, 하고 터진 하림이의 반응이 귀여웠다.
“아프게…… 안 해. 그냥 만지기만…… 만지고 비비고 그런 거만…….”
하림이의 몸에서 입술을 떼지 않고 말하느라 말이 조금 뭉개졌지만 상관없었다. 하림이에게서 내 침 냄새가 났다. 영역 표시라도 한 것 같아 존나 꼴렸다. 진짜 강아지들 영역 표시는 오줌 싸는 거긴 하지만 이런 식의 영역 표시도 나쁘진 않았다.
침으로 반질거리는 몸에 뽀뽀를 하면 소리가 찰지면서도 귀여웠다. 나는 한껏 올라가는 입술을 막지 않고 하림이의 가슴팍과 옆구리, 배꼽, 유두 그 외에 핥을 수 있는 모든 상체에 혀를 놀렸다. 특히 배꼽은 안쪽으로 파여 있어서 그런가 내 두툼한 혀를 밀어 넣으면 고추가 찌릿하니 아파왔다.
어디서 봤는데 우울하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쓰이는 심리치료의 방법 중 하나로 맨살로 끌어안기 같은 걸 하면 좋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따뜻한 사람의 체온에 안겨 있으면 보호와 사랑을 받는 기분이 들고 뇌에서 긍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어쩐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있진 않았지만 36.5도의 체온이 주는 위안이란 참으로 컸다.
나는 하림이의 가슴 위에 귀를 대고 엎어져 심장 소리를 듣기도 하고 개처럼 침을 묻히기도 하고 하림이의 몸 구석구석을 코로 핥아가며 숨을 쉬기도 하고 그냥 두 손바닥을 배 위에 올려두기도 하면서 마음을 천천히 풀어나갔다.
화난 애인에게 가슴을 보여주면 풀린다고 했던가. 나는 하림이 때문에 화가 났어도 하림이가 가슴이 아닌 손톱 쪼가리만 보여줘도 화가 풀릴 새끼였지만 이런 환상적인 위로는 처음이었다.
하림이의 배 위에 볼을 붙였다. 어느덧 내 침 냄새는 다 날아가 미약하게만 남아 있었고 하림이의 체취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착하게도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예뻤다. 볼에 닿는 피부는 부드럽기도 하고 탱글탱글하기도 해 이대로 하림이의 피부에 달라붙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 다음 생에선 하림이랑 하나로 연결된 연리지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고작 길어야 120년 살 수 있을 테지만 나무로 태어나서 하나가 되면 몇백 년 몇천 년도 함께할 수 있으니까.
뿌리는 다르게 태어나고 자라겠지만 하나가 되면 하림이를 내 몸처럼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햇살을 얼마나 잘 받았는지 어느 가지가 아프진 않은지 물은 잘 흡수했는지 그런 것들. 반대로 하림이도 내 상태를 누구보다 잘 느낄 것이고. 아 시발 상상하니까 존나 야한 것 같다. 서하림이랑 평생 연결되어 있는 거라니…….
진정된 다리 사이로 열이 다시 몰렸다. 나는 가만히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하림이의 양쪽 유두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말랑한 젖꼭지가 부드럽게 눌리는 감촉이 좋았다. 몇 번 눌러주니 좀 딱딱해진 것 같아 오른쪽 유두를 가볍게 물었다. 입안으로 쏙 들어오는 게 기분 좋아 혀로 감아올리며 웃었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유두를 끼워 넣고 싶은 충동이 몇 번이나 일었지만 아프지 않게 하기로 약속했으니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턱 대신 부지런히 혀를 움직여야 했다.
하림이가 입술을 깨물더니 지금보다 조금 더 거친 숨을 뱉어냈다. 클래식보다 더 유려한 그 숨소리를 들으며 입안에서 굴리던 유두를 놔주었다. 내 침 때문에 반짝거려 유리로 세공한 느낌이 났다.
입술을 점점 아래로 내렸다. 일부러 더 쪽쪽 거리는 소리를 크게 내면서. 왜인지 오늘은 그동안 꿈꿨던 걸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들어서였다.
가슴골, 옆구리, 윗배와 아랫배, 배꼽…… 배꼽에 혀끝을 세워 넣으며 하림이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찰칵 하는 소리가 무척 경쾌했다.
“하지 마.”
“어?”
“할…… 거면 위에만 해.”
전엔 서로 고추도 비볐으면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기는. 이미 머릿속에선 하림이 회음부에 코 박고 뒷구멍을 핥아대는 내가 있었지만 나는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버클을 채워야 했다.
“그럼 다음엔 딴 것도 하게 해줘.”
위로 조금 더 올라와 하림이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누웠다. 눈앞에서 귀엽게 어른거리는 젖꼭지를 다른 한 손으로 매만졌다. 귀에선 서하림의 심장 소리가 손가락에선 하림이의 젖꼭지가 만져지는 건 정말 호강이 따로 없었다.
으음…… 이러고 있으니 발기해 점점 힘을 받는 내 것이 느껴졌다. 기름에 불붙듯 빠르게 서는 게 아니라 이렇게 천천히 서는 것도 괜찮았다.
이제는 뾰족 선 젖꼭지를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허리를 살짝 들썩였다.
“위에만 건들면 뭘 해도 되는 거지.”
“…….”
서하림의 아랫배 위에 앉았다. 그리고 환자복 바지를 살짝 내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내 것을 꺼내 잡았다. 속옷은 아까부터 젖은 상태였다. 힘을 받아 배에 붙을 정도인 성기를 잡아 하림이의 배에 문질렀다.
서늘한 체온에 발기한 것을 비비자니 꼭 하림이 살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아…….”
하림이의 얄팍한 배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뭘 어떻게 해볼 생각을 하기도 전에 사정했다. 하림이의 배에 붙인 상태로 사정을 한 탓에 하림이의 목까지 내 정액이 튀어버렸다.
“다 닦아줄게. 걱정하지 마.”
물티슈도 많고 수건도 많다. 하림이가 내 정액으로 샤워를 한다 해도 말끔하게 씻을 샤워부스도 병실 안에 있고.
가슴팍에 정액을 묻힌 채 인형처럼 누워 있는 하림이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숨을 골랐다. 눈을 보고 싶은데…….
아쉬움을 삼키며 정액을 펴 바르듯 하림이의 상체에 발랐다. 안 그래도 좋은 피부가 코팅 된 것처럼 반짝거렸다. 바디오일이나 러브젤을 바르면 이런 모습이겠지. 안 그래도 비릿한 정액을 넓게 펴 바르니 정액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이래선 닦아내도 하림이 몸에서 내 정액 냄새가 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나야 좋지만.
한참 그렇게 찐득하게 상체를 만져대고 비비고 있자 어느덧 발기한 성기에서 또 사정감이 찾아왔다. 나는 물티슈로 손을 깨끗이 닦아낸 뒤 하림이의 위로 엎어졌다. 완전히 깔아뭉개진 않고 두 팔에 힘을 줘 플랭크 하듯 우리 사이에 틈을 냈다. 내 가슴 쪽에 하림이 숨결이 닿아 간질거렸다.
나는 잔뜩 발기한 내 것을 하림이의 배에 비벼댔다. 아까 싼 정액이 묻어 있어 굉장히 미끄러웠다. 그 감촉이 왜 이렇게 야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정감을 최대한 참아가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간혹 내 배와 하림이의 배에 성기가 끼는 순간이 오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하림이의 위에 누워 사정해 볼까. 성기가 압박당한 채 사정하면 존나 좋을 것 같다.
“무거워도 잠깐만 참아봐.”
팔에 힘을 풀고 그대로 서하림의 위에 누웠다. 상체에는 힘을 조금 줘 얼굴 위에 올려진 하림이의 팔을 누르지 않게 했다. 중요한 건 내 아래쪽이고 괜히 팔에 얼굴 눌리면 아파할 테니까.
나와 하림이의 판판한 배 사이에 성기가 딱 들어맞는 기분은 정말…… 나는 참지 못하고 씹어뱉듯 욕을 했다. 욕을 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아, 씨발 존나 좋아 어떡해 씨발…….”
사정을 하고 나서도 하림이의 위에서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내 몸무게로 잔뜩 압박당한 상태가 끝내주게 좋았다. 누가 내 허리 위에 앉아서 더, 더 압박해 줬으면. 이렇게라도 서하림 뒤에 쑤셔 넣은 기분을 느껴볼 수 있도록.
무게가 무게인지라 하림이에게서 참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만족할 때까지 위에 엎어져 있다가 일어났다. 내 배도 하림이의 배도 엉망이었다. 뜨거운 성기를 붙잡고 나는 나머지 정액마저 짜내 하림이의 배 위에 쏟아냈다.
시간을 잠시 확인했다. 저녁 시간 즈음 맞춰서 보내면 되겠지.
무릎걸음으로 조금 올라와 하림이의 젖꼭지에 내 귀두를 가져갔다. 말랑하고 예쁜 젖꼭지를 건드는 내 뭉툭한 귀두는 합성이라도 한 것처럼 안 어울렸다.
고추를 살짝 양옆으로 흔들었다. 작고 힘없는 하림이의 유두는 내 귀두의 움직임에 따라 짓눌리며 흔들렸다. 그 꼴을 보자 요도 구멍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하긴 귀엽긴 귀엽지. 고추로 젖꼭지를 살살 때려가며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말 그대로 좆방망이질을 하는 것 같아 쾌감이 장난 아니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내 것에 하림이의 작은 젖꼭지가 눌릴 때마다, 점점 강도를 높여 세게 젖꼭지를 때릴 때마다 하림이의 젖꼭지는 색이 진해지는 것 같았다. 좆으로 맞아도 맞긴 맞는 거니까.
나는 좀 이상하게 내 기준 오른쪽 그러니까 하림이의 왼쪽 유두를 이렇게 괴롭히는 게 참 좋았다. 저번에 그렇게 빨아서 아프게 만든 곳도 여기고 좆으로 때리고 있는 곳도 여기고.
음, 여기다 피어싱을 달아볼까. 너무 많이 빨면 멍이 드니까 그 정도까진 안 되게 적당히 빨아주고 꼬집어서 잔뜩 예민해지고 부푼 젖꼭지에 직접 소독 한 바늘을 사용해 뚫어주고 싶다. 하림이랑 어울려야 하니까 화려한 다이아몬드보다는 고급스럽고 정숙한 느낌이 나는 진주가 좋겠다. 크기는 좀 작은 걸로. 옷을 입어도 그렇게 티가 확 나지 않도록.
좆으로 젖꼭지를 때려대다가 요도 구멍에 젖꼭지를 맞춰 위아래로 흔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거긴 해도 구멍 쪽으로 살짝살짝 들어왔다 나가는 하림이의 젖꼭지가 아쉽다.
요도 구멍이 좀 더 커서 젖꼭지가 내 고추 안으로 쏙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의미에선 하림이의 것이 내 안에 들어온 것이니 섹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하림이의 것은 말랑거리니까 힘을 주면 어떻게 요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힘을 줘 귀두로 젖꼭지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정액 탓에 귀두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젖꼭지도 계속 귀두에 눌려지기만 했다.
“아 시발…….”
진짜 안 되는 건가? 하는 수 없지.
잠시 하림이의 젖꼭지와 씨름하던 나는 백번 양보해 요도 구멍을 젖꼭지 앞에 정조준하고 사정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하림이의 왼쪽 유두가 정액에 잔뜩 젖어 장관이었다. 그 위를 사정의 여운을 즐기기 위해 귀두로 문질렀다. 작고 귀여운 젖꼭지가 힘줄이 솟아 못생긴 내 것을 저 나름대로 열심히 애무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착한 녀석. 앞으로도 계속 예뻐해 줘야겠어.
하림이 데리고 몇 번 더 쌀 수 있었으나 나는 서랍에서 물티슈를 꺼내 내 것을 닦았다. 다시 발기하지 않도록 애국가를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살짝 젖어 있는 팬티 안도 닦았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빨 거니까 대충.
내 것을 다 닦은 뒤엔 화장실로 달려가 수건 세 개를 꺼내 따뜻한 물에 적셨다. 하림이 몸은 물티슈로 대충 닦아주고 싶지가 않았다. 체온보다 조금 더 따듯한 물을 받아 수건들을 적시고 식지 않도록 접었다.
침대로 돌아왔을 때 하림이는 얼굴에서 팔을 치운 상태였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예쁜 눈에 입을 맞추고 몸을 닦았다. 팔과 다리가 힘없이 늘어져 있는 게 좋았다.
상체 구석구석을 수건으로 닦으며 내 정액들을 걷어냈다. 얇게 펴 바른 것들은 이미 굳어 있기도 했다. 가슴팍을 닦을 땐 일부러 젖꼭지를 힘줘 닦을까 하다가 하림이 집에 못 돌려보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수건 세 개를 다 쓰고 새롭게 두 개를 또 다 쓰고 나서야 하림이의 몸이 전처럼 깨끗해졌다.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셔츠의 첫 단추를 막 잠그려던 때였다.
“……이제 됐어. 내가 해.”
“아냐.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나는 몇 시간 전 단추를 풀었던 것처럼 천천히 아주 느리게 단추들을 잠가 나갔다. 흰 셔츠를 끝내고 까만색의 카디건 단추를 잠그고 마이까지 다 잠갔다. 서하림은 마지막 단추가 잠기자마자 벌떡 일어나 가지런하게 벗어놓은 운동화부터 신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나는 단추 하나도 1분씩 걸려가며 채웠는데 뒷정리를 빠르게 해치우는 똑 부러지는 하림이를 보니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수건들을 화장실에 던져두고 물티슈도 정리했다.
“앉아. 얼른 알려주고 가게. 나 배고파.”
“밥 먹고 갈래?”
“아니. 병원 밥 맛없어.”
“그럼 만들어줄까?”
“뭔 소리야. 여기서 어떻게 한다고.”
“아 그러게.”
바른말만 하는 하림이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괜히 뒷머리를 긁으며 침대에 앉았다. 서하림의 손엔 아까 내가 치워둔 종이와 노트들이 들려 있었다.
“받아. 이건 수업 시간에 받았던 것들인데 너 거 챙겨놓은 거. 내가 시험에 나올 것 같은 거 체크해 놨어. 이거는 내 노트들 복사한 거.”
아무리 친해도 자기가 정리한 건 잘 안 보여주는 앤데 날 위해 이렇게까지 해줬다는 사실이 좀 충격이었다. 이걸 내가 정말 받아도 되나?
“이번에 국어는 서술형에서 부분 점수 짜게 준다고 했으니까 좀 열심히 공부하는 게 좋을 거야.”
“하림아.”
“그리고 확통이랑 기벡 중간고사 때는 객관식이 50인데 기말에는 70이라니까 알고 있고.”
“서하림.”
“한국사 몇 년돈지 물어보는 문제 안 나온다고 했으니까 제껴. 아 왜.”
“딸기청은 다 먹었어?”
“응.”
“귤청은.”
“좀 남았어. 나머지는 다 프린트랑 복사본 보면 내가 적어놨으니까 알아서 네가 보고 해.”
“중간고사 때 가져갈 수 있게 딸기청 미리 만들어 놀게. 귤청은 좀 별로였어? 역시 귤은 그냥 과일째로 먹거나 생과일 주스로 해 먹는 게 낫나.”
하림이가 내 품에 안겨준 종이들은 감동이긴 하지만 관심도 없다. 이따 정리할 때 보면 되는 거고.
“그냥 좀 쉬어. 뭐 만들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차라리 공부해.”
“공부는 당연히 할 건데, 너 공부할 때 먹고 싶은 건 더 없어? 시험 첫날에 잠깐 집에 들를 건데 너 크레이프 케이크 좋아하잖아. 에그타르트나 솔티드캬라멜 쿠키 구워줄까? 아니면 녹차푸……딩?”
서하림의 표정이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심각해졌다. 나는 서하림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서하림은 날 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야. 김동규.”
“응?”
“딸기청, 크레이프 케이크, 에그타르트, 쿠키, 푸딩 다 좋아. 좋은데, 퇴원하고 만들어줘.”
“알겠어. 그럼 또 딴 거 먹고 싶은 거 있어? 나 퇴원하면 11월 초는 돼야 할걸. 그때 되면 좀 추우니까 찬 건 좀 힘들겠지? 아 너 망고 스무디랑 멜론 빙수 좋아하는데 나 입원하느라 이번 여름에는 못 먹었겠다.”
“아 진짜, 알았으니까 쫌! 한겨울에도 빙수랑 스무디 먹어줄게. 됐지?”
“화채도. 너 화채 좋아하잖아.”
“알았어. 화채도. 또 뭐 있지?”
“식혜.”
“그래 식혜. 식혜도 만들어주면 살얼음 띄워서 잘 먹을게. 됐지? 더 없지? 끝?”
“응…….”
서하림 못 먹인 여름 디저트들이 뭐가 있나 머리를 더 굴려봤지만 이 정도면 대충 다 나온 것 같다. 나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짜 푹 쉬는 거다. 공부 조금만 하고?”
“응.”
“또 쓰러졌단 소리 안 들리게 해.”
“응.”
“몸 좀 생각해. 네 몸이 불쌍하지도 않아?”
“불쌍해.”
“그럼 학교에서 보자.”
부지런히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서하림의 팔을 붙잡았다. 학교에서? 그럼 시험 전에는 안 오겠다는 얘긴가?
“바빠서……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 내줘서 고마워. 노트도…… 프린트랑 갖다 줘서 고마워. 이번 시험 잘 보면 다 네 덕이야.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망칠 수는 없지. 몸 안 상하는 선에서…….”
내일도 모레도 또 와달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지만 혀 위로 올릴 수는 없었다. 서하림도 공부하느라 많이 바쁠 테니까. 나한테 와봤자 공부는커녕 온몸 빨려가며 누워서 몇 시간 흘려보내기 일쑤인데 내가 서하림이라도 선뜻 오기가 그럴 것이다.
“……적당히 조절하면서 공부할게. 시험 끝나면 놀러 와. 아니, 끝나고 바로는 말고 친구들이랑 놀고 좀 쉬고 나서 여유 생기면.”
“11월 첫 주에 세성전이랑 축제 있어서 퇴원 전에 시간이 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 세성전…….”
중간고사 끝나면 축구 연습에 바이올린 연습에 서하림은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스케줄이었다. 섭섭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절망감이 더 컸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도 내가 가는 수밖엔 없다. 퇴원은 무조건 10월 31일에 해야지. 그 직후가 세성전이랑 축제니까 멀쩡한 몸으로 하림이 응원하러 갈 거다.
“설마 이번에도 축구부에서 프리허그 부스 해?”
“아니.”
이번에도 한다고 했으면 축구부 부스 다 깨부수고 깽판 치려고 했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서하림은 제 손목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부드럽게 떨쳐냈다. 나는 비에 젖은 처량한 개라도 된 것처럼 아쉬움을 말로 하는 대신 온몸으로 표현했다.
“갈게.”
나는 차마 ‘응’이나 ‘또 봐’ 같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손도 흔들지 않았다.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서하림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마자 나는 그 애가 주고 간 종이에 코를 박았다. 희미하게라도 서하림의 냄새가 배어 있진 않을까 싶어서.
당연한 거지만 맡아지는 거라곤 종이 냄새뿐이었으나 나는 아까 한 시간이 넘도록 맡았던 하림이의 냄새를 떠올려 그 위에 덧씌웠다. 그러자 정말로 하림이가 이 종이를 품에 안고 자기라도 했던 것처럼, 이 종이들이 하림이의 체취가 묻은 시향지라도 된 것처럼 하림이의 살 냄새가 났다.
솔직히 어젯밤까지만 해도 이러다 정신병 걸리는 거 아닌가 싶었다. 불 꺼진 방 안에 비치는 조명불 가지고도 별생각을 다 하며 하림이 탓을 했던 건 미친 게 아니고선 스스로 납득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하림이 맨살을 만지고 보고 싶던 얼굴을 보고 나니까 오던 정신병도 달아난 기분이었다.
심리 치료에 맨살로 껴안기 어쩌고를 처음 봤을 땐 변태 새끼인 남성 심리학자가 씨부린 허울 좋은 얘긴 줄 알았는데 정말이었다. 해보니까 알겠다. 나와 비슷한 체온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체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래서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나 보다. 외롭고 힘들 때 껴안고 위안을 받으려고.
술 취할 때마다, 내가 대들 때마다 죽이겠다며 눈 시뻘겋게 뜨는 아빠가 있는 집구석이라도 하림이가 발가벗은 채 내 방에서 기다려 준다면 매일 집으로 가는 길이 행복할 것 같다. 아빠에게 맞든 욕을 듣든 너덜너덜해진 내 마음을 알몸의 하림이가 껴안아 준다면 그곳이 집이 아닌 지옥 한복판이라도 행복할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서로 온몸의 살이 닿은 채 누워만 있어도 좋겠지. 바짝 붙은 몸에선 심장 두근거리는 파동마저 느껴질 테고 규칙적인 숨소리도 잘 들리고 예쁜 얼굴도 붙어 있는 만큼 가까이에서 뜯어보기 좋을 것이다.
황홀하겠지. 잘생기고 예쁜 얼굴은 하루 종일 보고만 있어도. 서하림의 완벽한 얼굴을 제일 처음 담아내는 각막부터 수정체, 유리체, 망막, 시신경과 대뇌까지 서하림의 얼굴이 전달되는 모든 신체 기관에게도 질투가 났다.
그런 귀찮은 과정 없이 바로 하림이를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머리가 깨진 채 병원에 누워 있다 보면 몸이란 참 쓸모없고 불필요한 껍데기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생각이나 영혼이 진정한 나인 것 같고 그래서 영혼만 존재하면 좋을 것 같다는 조금 어이없는 생각도 한다. 영혼으로만 존재하면 눈이나 손, 시각이나 촉각 같은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진짜 서하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영혼이니 뭐니 하는 그런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건 믿지 않지만.
서하림과 발가벗고 껴안고 있다 보면 이따금 나도 모르게 점점 힘을 받아 단단해지는 성기라든가 갑자기 많아지는 침 때문에 들리는 꿀꺽 하는 소리라든가…… 좀 당황하는 일들도 생기겠지.
상관없다. 상상 속 하림이는 나만을 위한 섹스토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잡아 잔뜩 젖은 음란한 구멍을 보여줄 테고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든가 ‘참지 마’같은 꼴리는 말을 내뱉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이다. 착하게도 날 위로하기 위해 제 몸을 바치는 하림이 안으로 들어가면 언제나 그렇듯 처음처럼 좁고……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고…….
“공부 중이었어요?”
“네.”
“저녁 가져와도 되죠?”
“네.”
간병인이 저녁을 가지러 간 동안 나는 화장실에서 다급하게 자위를 해야 했다. 하림이의 살 냄새가 나는 노트 복사본 한 장과 함께.
서하림이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그래서 내가 위로를 좀만 더 빨리 받았다면 시험은 평소처럼 봤을 것 같다.
중간고사까지 학교를 통으로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시험 친 내 감상은 그랬다. 전교 등수도 그렇게 많이 밀릴 느낌이 들지 않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아파서 입원했다고 나만 쉬운 시험지 준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마지막 한국사 서술형 시험지를 걷어 가는데 기분이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지난 몇 년간 서하림 따라잡겠다고 아등바등한 게 그렇게 헛된 건 아니었나 보다. 정말 서하림 말대로 지금까지 해온 게 있어 망하지 않았다.
하림이 말 듣길 잘 했다. 낮 밤이 거의 뒤바뀌었던 하루를 똑바로 돌려놓고 과외도 열심히 하고 공부는 문제 풀이보다는 복습을 위주로 했더니 몸에 무리도 안 가고 좋았다.
반장이 교무실에서 정답지를 가져와 1번부터 불렀다. 정답이 불릴 때마다 교실 곳곳에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멍청이 새끼들. 이 쉬운 걸 틀리냐.
오늘은 종례가 없어 가채점 끝나자마자 노트나 시험지, 필기구 같은 것들을 한 번에 쓸어 담는 서하림을 따라 나도 책상 위에 올려진 것들을 빠르게 가방에 쑤셔 넣었다. 서하림은 친구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서하림의 옆에 붙어 부지런히 걸었다.
“병원 갈 거지?”
“응. 너는?”
“보고 싶은 전시 있어서 현대미술관. 도슨트 설명 꼭 듣고 싶어서 지금 시간에 가야 돼. 오후에 가면 사람 엄청 많아서.”
“친구들이랑?”
“아니 나 혼자.”
하긴 서하림 친구 중에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 전시 챙겨 보는 애는 하나도 없다. 여자애들은 가끔 서하림이 다녀와서 좋았던 전시 추천해 주면 자기들끼리 주말에 가보는 거 같긴 한데 남자애들은 가는 꼴을 못 봤다.
혼자 전시 보러 다니는 거 잘 알고 있지만 그냥 서하림 목소리 더 듣고 싶어서 물어본 거였다.
예전에 시험 끝나고 내가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서하림은 혼자 관람하는 거 좋아한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서하림 뒤를 밟은 적이 있다. 두 번.
첫 번째로 따라갔을 때는 아마 예술의 전당을 갔을 거다. 전시회 이름이 무슨 퍼펙트 어쩌고였던 거 같은데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 서하림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따라다녔다. 서하림은 도슨트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도슨트와 한 바퀴 돌고 나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몇몇 작품을 다시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보기에 꼭 시간이 서하림을 피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길어야 작품 10초 남짓 보고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하림이 혼자 서 있는데 천사가 따로 없었다. 나는 한가람 미술관에서 몇 시간 내내 작품 같은 하림이를 마음껏 감상했다.
두 번째는 어디 박물관이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무슨 주제였는지도. 그날은 오전 시간 도슨트가 어린이를 위한 키즈도슨트밖에 없어서 ‘헐 진짜요?’ 하며 당황해하는 하림이가 귀여웠다. 그래도 다행히 오디오 가이드가 있어서 이어폰을 끼고 박물관을 부지런히도 돌아다녔다. 중간중간 가이드를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유물을 앞에서도 봤다가 뒤에서도 봤다가 하는 모습이 예뻤다.
평일 오후와 주말, 방학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따로 약속 있는 거 아니면 서하림은 유일하게 평일 오전 전시를 볼 수 있는 시험 기간 마지막 날에는 꼬박꼬박 시간을 냈다. 어지간하면 시험 끝날 때마다 서하림 따라가서 몇 시간 내내 훔쳐보고 싶은데 나는 시험 끝나는 날부터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라 그러기가 힘들었다. 서하림이 전시 보러 갔다 하면 못해도 한 시간 반이라. 전에는 관람 시간이 세 시간으로 제한된 곳 갔다가 세 시간 꽉 차게 보고 온 적도 있다고 했다.
“조심히 가. 퇴원 언제랬지?”
“세성전 하루 전 수요일.”
“아 맞다.”
“퇴원 선물 뭐 없어?”
“선물? 생각해 놓은 거 없는데. 말하면 줄게. 뭐 갖고 싶어?”
“아무거나 다 돼?”
“응. 비싼 것도 괜찮아. 집이나 차만 아니면.”
“진짜 아무거나 다 되는 거지.”
“헐 뭐야. 진짜 집 사달라고 하게?”
“아니.”
네 아래 빨게 해달라고 할 건데.
“생각 좀 더 해보고. 비싸고…… 좋은 거. 존나 좋은 거.”
우리는 교문 앞에서 헤어졌다. 서하림은 택시를 잡았고 나는 서하림이 탄 택시 번호판을 찍어 놓고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병원으로 향했다. 아무거나 다 된다는 퇴원 선물을 생각하니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퇴원 선물 받고 에이스 서하림이 활약해서 세성전도 멋지게 우승하고 세문의 밤에서 바이올린 연주하는 아름다운 서하림까지 볼 다다음 주가 기대됐다.
택배 오는 날은 시간이 유독 안 가는 것처럼 퇴원 선물 받을 거라 그런가 31일이 너무 멀었다. 과외 쌤이 준 문제 풀이를 백 번은 본 것 같은데 고작 10분 지나 있고 일주일은 지난 것 같은데 겨우 이틀 지나있고 그랬다. 그래도 전처럼 조급해하거나 병신같이 굴진 않아서 내가 느끼기에도 몸이 좋아지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밥도 세 그릇씩 먹고 의사, 간호사 선생님이 하란 대로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고 운동도 꾸준히 했다.
만약 입원 기간이 더 길어졌다면 병실을 다 부셔서라도 퇴원할 생각이었는데 다행이었다. 역시 하림이가 더 일찍 왔었어야 됐다. 서하림 못 보는 건 똑같은데 여름에 내 캠프랑 서하림 여름학교 겹쳤을 때 말라 죽던 거 생각하면 지금은 진짜 장족의 발전이었다.
대신 퇴원하면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병원을 와야 했다. 몸 상태 보고 다시 입원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나는 무조건 좋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다시 하림이랑 같은 교실에 앉아 같은 공기 마시고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31일은 알람 소리보다 내가 더 먼저 깼다. 오늘까지 학교를 쉬기로 했기 때문에 늦게까지 자도 됐지만 그냥 일찍 일어났다. 학교 1교시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수업 시간을 떠올리며 쉬는 시간마다 서하림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누가 봐도 퇴원한다고 신난 사람이었다.
내가 보낸 메시지들에 붙은 숫자 1이 사라진 건 쉬는 시간도 점심시간도 아닌 수업이 다 끝난 때였다.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1이 언제 사라지는지만 보고 있었다.
[축하해!!〉
[선물은 지금 정신없으니까 축제까지 끝나고 담주쯤? 그 때 말해〉
[나 지금도 축구 하러 가야됨〉
운동장을 멋있게 뛰어다닐 서하림도 기대됐지만 그보단 퇴원 선물 받을 생각에 콧노래가 나왔다.
홈경기장이 우리 학교인 데다가 서하림이라는 우수한 선수를 데리고도 우리 학교는 세성전에서 졌다. 주요 전력이던 몇 명이 다리를 다치거나 감기에 걸리거나 설사병에 걸린 게 패배의 요인이었다. 게다가 1학년 경기에서 우리 학교는 한 골도 넣지 못했다.
모두가 심지어 서하림까지 침울해 있는 와중에 나는 하림이가 골을 두 개나 넣은 게 좋아서 광대가 씰룩거렸다. 우승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알 바냐. 하림이가 멋지게 골을 넣은 게 중요하고 그걸 또 누군가 잘 찍어줬다는 게 중요하지. 만약 하림이가 운동선순데 한국 국적 버리고 다른 나라로 튄다고 해도 나는 그 나라 국가대표 서하림을 응원할 거다.
고맙게도 독서부 친구들이 배려해 준 덕분에 나는 축제 때 독서부 부스에 묶여 있지 않아도 됐다.
“진짜 나 그냥 돌아다녀도 돼?”
“된다니까. 어차피 학교 나오지도 않아서 우리가 뭐 하는지도 잘 모르잖아. 그렇게 여기가 좋으면 구석에서 지켜보다가 좀 도와주든가.”
독서부 부장인 안민주가 너무 쿨하게 얘기해서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럼 밖에 나가서 호객 행위라도 좀 하든지. 아. 야 너 서하림이랑 친하니까 축구부에서 서하림 잠깐만 빼와 봐.”
“안 친……한데.”
“같이 공부하면 친한 거지 뭔데 그럼? 암튼 도와줄 거 아니면 솜사탕이나 사먹으면서 노세요. 안 그래도 좁은 부스 너 때문에 존나 더 좁아.”
독서부 부스를 나온 나는 아주 당연하게 축구부 부스로 갔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축구부엔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했다.
올해 축구부는 부원들과 손가락 축구를 하는 거였는데 2:2로 경기가 펼쳐졌다. <축구부를 이겨라!>라고 써 있는 현수막이 팔랑거렸다. 축구부를 이기면 상품 돌림판을 돌릴 수 있었고 제일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소원 한 가지 들어드립니다(단, 여기서 바로 해줄 수 있는 것/너무 어렵고 이상한 건 거절함)’이라고 써 있었다.
서하림 팀 대기 줄이 제일 길길래 사람이 제일 적은 팀에 줄을 서 바로 경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5분 경기에서 서른 골을 넣고 이겼다. 좆밥 새끼들.
“소원 걸리면 독서부로 서하림 빌려간다.”
“되고나 말해. 걸릴 확률 0.000001퍼야.”
확률이란 그럴싸하고 굉장히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것 같지만 사실 무의미한 숫자놀이다. 내가 당첨되면 100퍼센트니까.
커다란 돌림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축구공 선물, 어떤 선수의 사인 유니폼 선물, 국내 리그 무슨 경기 관람권 등등을 지나쳐 속도가 점점 떨어지던 화살표가 마침내 손톱보다 작은 칸을 가리켰다.
“0.000001퍼가 아닌데.”
사실 나도 별 기대는 하지 않고 0.000002퍼 정도 기대한 게 다였다.
“대박.”
“야 서함! 소원 걸렸어!”
이름 모를 축구부 애가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며 미니 축구공을 따라붙은 서하림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 좀만 기다려. 왜 내 의지는 묻지도 않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건데?”
“아까 소원 미리 얘기했을 때 하기 싫다고 말했어야지. 난 네가 별말 없길래 알겠다는 줄?”
“아니 어떻게 그게 딱 걸리냐. 야 막아!”
아등바등 마지막 손가락 축구 경기를 이긴 서하림은 자길 기다리며 길게 늘어선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며 두 손을 흔들어주었다. 벌써 몇 명은 독서부 부스로 가고 있었다.
“안녕 안민주.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서하림은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해주며 웃었다. 독서부 애들과 독서부 부스에 찾아온 애들까지 서하림 하나 등장했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특히 세문중 아이들은 서하림이랑 눈만 마주쳐도 자기들끼리 꺄르르 웃으며 난리였다.
“민주야 나 뭐 하면 돼?”
“헐.”
독서부에서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으면 그 아래에 캘리그라피를 하는 세 명의 부원이 시구나 책 속 문장을 적어주는 이벤트를 했다. 시나 문장은 독서부 애들이 000번 총서부터 900번 역사까지 모든 장르를 읽고 감성 글귀를 열심히 뽑아 부스를 찾아온 손님이 원하는 걸로 맞춰 고를 수 있게 도와줬다. 연애에 관한 문구는 없나요, 진로에 관해 힘 나는 말로 써주세요, 힐링 될 수 있는 거요 등등.
세상에서 한 장뿐인 폴라로이드에 감성 글귀가 더해져 SNS에 올리기 아주 딱 좋은 이벤트라 안 그래도 파리만 날리던 작년에 비해 사람이 세 배는 많았는데 거기에 서하림이 등장하니 안민주가 벌떡 일어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내 팔을 퍽퍽 쳤다.
“빼왔어, 축구부에서.”
“뭐야. 어떻게? 나 아까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나는 말 없이 어깨만 으쓱하며 안민주가 때린 부분을 쓸어댔다.
“손가락 축구 이겨서 상품 돌림판 돌렸는데 소원 들어주는 거 걸렸어. 아니 그거 진짜 두께 일 센치도 안 되는데 김동규 뽑기 신 강림한 정도야.”
“헐 김동규 미친 거 아니야?”
“내가 이번에 새로운 종교에 빠졌거든. 그분의 은혜야.”
“뭔 개소리야. 야 서하림! 여기 앉아주세요.”
안민주는 자신이 앉아 있던 책상에 서하림을 앉혔다. 안민주가 빠르게 말해준 독서부 이벤트를 듣더니 캘리그라피 해본 적 없다며 서하림이 민망해했지만 괜찮다며 안민주가 네임펜을 서하림 손에 쥐여주었다. 안민주처럼 멋들어진 글씨는 못 쓰겠지만 서하림은 생긴 것처럼 글자도 무척 반듯하고 잘 쓰기 때문에 나쁘진 않은 결정이었다.
“넌 그냥 발로 개발새발 쓰기만 해도 괜찮아. 정 문장 쓰긴 그러면 그냥 네 앞에 앉은 애 이름 물어봐. 써. 그다음 하트. 그 옆에 네 이름. OK?”
서하림의 등장으로 독서부 부스가 미어터질 것 같아 나는 부스 밖으로 쫓겨났다. 안민주 말대로 솜사탕이나 사먹으며 독서부 부스를 기웃거리다 시간을 다 보냈다.
동아리 부스 중에 제일 마지막까지 열려 있던 독서부 부스를 마무리할 즈음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그놈의 어디 소속사 캐스팅 매니저가 다가왔다. 젠틀하게 인사하는 남자를 보자마자 서하림의 얼굴이 굳었다. 지나가던 학생들도 매니저를 알아보고 하나둘 부스 앞에 멈춰 섰고 안민주와 다른 애들은 매니저를 보자마자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연락하기 바빴다.
“야 그만하고 빨리 책상 좀 정리해. 괜히 와 가지고 존나 걸리적거리네.”
매니저도 짜증 나고 저 사람 왔다고 정리 멈춘 애들도 짜증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서하림은 관심 없다고 칼같이 선을 긋고는 문장들을 정리한 A4용지를 한데 모았다. 남자의 말은 죄다 무시하고 대꾸도 하지 않으니 애들도 서하림 눈치 보면서 슬슬 정리를 시작했다.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서하림에게 명함을 건넸다. 주머니에 명함을 넣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남자는 사라졌다.
“대박 하림아 너 진짜 아이돌 할 생각 없어?”
“없어. 나 유학 가서 교수 할 거야.”
이 말은 이 말대로 핵폭탄급이라 또 애들이 술렁거렸다. 의대 안 가나 봐. 의사 안 한대? 내가 서하림이래도 의대 가기엔 머리가 아깝다 블라블라. 당사자 앞에서 저러는 게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도 모르는지 애들은 지들끼리 한참을 쑥덕거렸다.
아. 서하림 빡쳤다. 물건 막 내려놓는 거 보니 엄청 신경질이 난 상태였다.
“야 안민주 나 머리 아파.”
“헐 진짜? 어디? 많이?”
“보건실 가고 싶은데.”
“어, 가. 안 도와줘도 돼. 우리가 다 할게.”
“그럼, 서하림. 나 좀 부축해 주라.”
“어?”
내 말에 서하림은 들고 있던 바구니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어 그래” 하고 대답했다. 평소랑 다르게 아주 차가운 목소리였다. 하림이는 내 팔을 잡아 제 어깨에 두르고는 먼저 발을 뗐다. 나는 휘청거리는 연기를 하며 서하림에게 몸을 의지했다.
보건실 있는 학교 건물에 들어오고 나서야 나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서하림도 내 팔을 내려놨다.
“고마워. 짜증 나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뭘. 너 이제 오케스트라 준비해야 하지 않아?”
“해야지.”
“음악실 갈 거지.”
“응.”
“그럼 가서 좀 쉬고 있어. 너 주려고 어제 마카롱이랑 딸기타르트 만든 거 있는데 갖다 줄게.”
“아 헐 진짜? 딸기타르트 대박. 좋지 좋지.”
“먼저 가. 나는 독서부 애들 피해서 후문 가게.”
“그래라 그럼. 이따 봐.”
서하림 먹일 생각에 바로 택시 타고 집으로 날아가 냉장고에 잔뜩 쌓아둔 것들을 쓸어왔다. 올해는 좀 많이 만들어 택시 트렁크가 꽉 찰 정도였다. 작년엔 서하림 한 명만 주려고 조금 만들었지만 올해는 축제에 제대로 참여할 수 있는 마지막이기도 하고 뭐 내년에도 참여하면 할 수 있긴 한데 수능이 있는 달이라. 아무튼 서하림과 같이 연주해 주는 기악부 애들도 한 입씩은 먹을 수 있도록 존나 많이 만들었다. 딸기만 뻥 안치고 20kg는 산 거 같다.
마카롱은 초코, 바닐라, 솔티드캬라멜, 군고구마시나몬, 그린티, 오레오, 블루베리치즈, 얼그레이, 레드벨벳, 복숭아까지 열 가지를 만들어 두 개씩만 담았다. 뚱카롱으로 만들려다가 대기실에서 먹기 불편할 것 같아서 말았다.
남은 것들은 다시 학교 가는 길에 서하림네 들러서 아주머니께 전달했다. 이렇게 전해 놓으면 알아서 잘 먹는 것 같았다.
음악실에 타르트를 넣어둔 상자를 가져가자 반응이 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코레이션을 좀 더 신경 써서 예쁘게 만들 걸 하는 아쉬움이 조금 들었지만 서하림이 먹는 걸 보니 행복으로 배가 불러왔다.
정신없이 타르트를 흡입하는 서하림 손에 마카롱을 쥐여주고 음악실을 둘러보았다. 한데 던져 놓은 교복 마이들 사이로 곱게 접어놓은 서하림의 것이 보였다. 나는 잠시 기악부 애들을 힐끔거리곤 서하림 마이 주머니에 빠르게 손을 넣었다 뺐다. 그놈의 짜증 나는 매니저의 명함을 손안에서 구겼다.
“그럼 나 간다. 이따 연주 잘해.”
음악실에서 나오자마자 주먹 안에 구겨 둔 명함을 더 이상 찢을 수도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어 창문 밖으로 던졌다. 다음 달이면 겨울이라 그런가 바람이 제법 불어 종이 쪼가리들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영상부, 합창부, 댄스 동아리 기타 등등 지루한 시간이 다 지나고 기악부의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서하림의 자리는 올해도 제1 바이올린 자리. 단원들이 얼추 자리를 정리하고 악보를 펼치자 기악부 부장이자 악장인 서하림이 일어나 음을 맞췄다. 관중들에게서 작게 박수가 터져 나왔고 서하림이 민망한지 작게 웃었다.
평소에 단정하게 내리던 머리는 공연한다고 또 살짝 올려 예쁜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여자애들이 뭘 한 건지 입술도 좀 반짝거리는 거 같았다. 서하림 외모에 눈이 먼 내 착각일 수도 있다.
입술 말고도 진하고 시원하게 모양 잡힌 눈썹도 더 멋져 보였고 가늘고 긴 속눈썹이나 안 그래도 큰 눈에 흑요석처럼 반작이는 눈동자도, 매끄럽게 뻗은 콧대와 그 아래 까만 콩처럼 귀여운 콧구멍도, 부드럽게 도드라지는 광대뼈나 남자답게 딱 떨어지는 칼 같은 턱선까지 오늘따라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안경을 껴도 전과 같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게 서글플 정도로 서하림은 오늘도 언제나처럼 그랬다. 이렇게 예쁘고 또 멋지고…….
연주곡은 ‘Flying Petals’, 무슨 사극 드라마 OST 그리고 ‘넬라판타지아’.
마지막 곡으로 ‘넬라판타지아’를 한 건 진짜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프로 연주자가 아닌 아마추어 학생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지만 다양한 악기들이 숭고한 느낌까지 드는 곡을 연주하고 그 소리 안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서하림이 있다는 게, 오보에의 맑은 음색과 무대 위를 밝히는 평범한 조명조차 서하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최고는 사랑이며 인간과 자연의 대서사시를 찬양하며 그려냈다는 영화보다, 이미 악보는 다 외워 반쯤 눈을 내리깔고 종종 지휘자를 바라보며 연주에 집중하는 서하림이 내게는 훨씬 더 위대하고 벅차오름을 느끼게 했다. 가끔은 누군가의 실수가 들리는 서툰 연주였지만 4분 정도의 곡은 서하림을 한층 더 성스럽고 고귀하게 만들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또 강렬하게 밝은 빛으로 멀어져만 가는 서하림을 느끼며 나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하고 초라해져 갔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고 그와 동시에 어둠을 태워 죽일 듯 강해지는 빛 앞에 고개를 묻고 입을 맞추고 싶기도 했다.
연주가 끝나고 단원들이 일어나 인사를 하며 웃는 것까지, 서하림은 완벽 그 자체였다. 어쩐지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박수가 쏟아지며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내려가고 음악실로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우울했다. 무거운 안경을 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존나 어이가 없다. 고작 음악 한 곡에 이렇게 또 사랑에 빠져 괴로워해야 한다니. 늘 서하림의 모든 것에 새삼 반하고 자꾸만 사랑에 빠지는 나였지만 종종 이렇게 예상도 할 수 없는 부분에서 치고 들어올 때마다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인간은 또 얼마나 무력한지 싶어 허탈하기도 했다. 만물의 영장 타이틀도 아깝고 우주를 정복하겠다며 최고의 과학자들이 만들고 있는 우주정거장도 다 하찮았다.
조금 있으면 악기를 정리한 기악부 애들이 강당으로 내려올 테지만 나는 문득 두려움 비슷한 걸 느끼고 강당에서 도망쳤다. 길거리에 사람은 적었고 나는 갈 곳 잃은 방랑자처럼 목적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냥 서하림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웃긴 건, 정신을 차렸을 때 당도한 곳이 서하림의 집 앞이라는 것이다. 뭐가 무섭고 두려운지 서하림에게서 도망치겠다고 몇십 분을 싸돌아다닌 게 다 헛수고였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듯, 작은 꿀벌이 아무리 먼 곳으로 꿀을 따러 가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듯 나는 본능보다 더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회귀를 느끼며 서하림의 터전으로 이끌렸다.
그래, 이건 내 의지가 아니다. 다 서하림이 잘나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날 구했기 때문에 내 무의식에 서하림이 들어차 있어서 그렇다. 내 잘못도 아니고 서하림의 탓도 아니다. 그냥…… 그냥 너무 당연한 거다. 숨을 쉬는 게 의지로 조절되는 영역이 아닌 것처럼,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처럼 자연의 순리요 이치랑 다를 게 없는.
“어머 동규 아니니?”
“야, 너 여기서 뭐 해?”
시간이 멈춘 듯이 의식의 아래로 점점 침잠하며 내려가고 있을 때 날 끌어 올린 건 다름 아닌 서하림 아줌마였다.
“어, 안녕. 안녕하세요.”
“뭐 하냐 여기서?”
“어? 어…… 그냥…….”
“또 하림이 뭐 주려고 온 거야? 작년에도 축제 끝나고 뭐 만들어 준 거 같은데. 아무튼 동규야 너어무 오랜만이다! 퇴원 소식 들었어. 병문안 못 가서 미안. 저녁은 먹었고?”
“아, 네.”
“같이 들어가자. 우리도 저녁 먹고 오는 길이야. 아직 몸 안 좋을 텐데 들어가서 과일이라도 먹고 가.”
날씨가 쌀쌀해 과일 대신 따뜻한 차와 쿠키가 나왔다. 아직도 슬픈지 우울한 건지 행복한 건지 무서운 건지 혼란스러우면서도 서하림으로 가득 찬 꿈이라도 꾸는 사람처럼 나는 맹하게 굴었다. 다행히 누구도 날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에 말이 많지 않은 덕분이었다.
“엄마는 잘 지내신대?”
“네.”
“그래도 하림이 친구 엄만데 내가 너무 신경을 못 썼나 싶기도 하고…….”
아줌마도 아저씨도 뭐라 이야길 되게 많이 해준 것 같은데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네, 네, 하고 대답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질문이 머릿속에 입력되지도 않았고 그걸 대답하기 위해 생각하는 것도 힘겨웠다. 마주 보고 차나 홀짝이기에는 서하림 생각으로 나는 과부하가 걸리기 직전이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서하림의 촉촉한 입술에 닿는 찻잔이 부러웠고 서하림의 혀에 감길 차가 질투 났다. 혀 말고도 차가 스쳐 지나갈 하림이의 치아, 목젖, 식도, 위 그리고 종국엔 차가 흡수될 서하림의 세포들까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을 고작 찻잎 우려낸 액체가 이뤄낼 수 있다는 게 치가 떨렸다.
나도 서하림의 일부가 되고 싶다. 키스할 때마다 서하림에게 내 침을 아무리 쏟아부어 삼키게 해도 부족했고 만약 내 정액을 서하림이 열심히 삼킨다고 해도 나는 한없이 부족함을 느낄 것이다.
하림이와 혈액형이 같은 건 정말 천운이 아닐 수가 없다. 언젠가 하림이가 수술을 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내 온몸의 피를 뽑아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하림이에게 수혈하고 죽을 거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의미 있는 죽음일 것이다. 각막, 신장, 폐, 심장까지 그 어떤 신체 장기라도 필요하다면, 하림이와 맞는다면 다 가져가라고 하고 싶다.
제발 써줘. 피부 가죽만 남아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해도 네 안에 살아 숨 쉬고 싶어…….
“그럼 아줌마는 이제 피곤해서 들어가 볼게. 하림이랑 위에서 얘기하다가 늦지 않게 돌아가. 담에 보자!”
서하림보다 더 먼저 일어나 2층으로 향했다. 너무도 익숙한 서하림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장 서하림 침대에 누워 잠에 들면 내 인생 최고의 하루가 될 것 같은데, 그럴 순 없어 중앙 테이블 의자를 빼 앉았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서하림은 내가 열어둔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 보고 있었다. 빨리 들어와. 들어와서 씻고 네가 좋아하는 잠옷으로 갈아입어.
“언제 가게.”
“몰라. 열한 시? 열두 시 전에.”
서하림을 기다리는 동안 아주머니가 씻어 예쁘게 썰어 놓은 과일들을 가져다줬다. 내가 먹는 양을 잘 알고 있는 분이라 거짓말 조금 보태면 산더미처럼 많았다. 나 먼저 먹기 전에 복숭아 조각을 포크에 찍어 하림이에게 건넸으나 부모님과 저녁 먹고 와서 별로 먹고 싶지 않다며 갈아입을 옷만 챙겨 욕실로 가버렸다. 나는 새콤달콤한 과일들을 서하림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꼭 씹어 삼키기도 하고 혀 위에 올려 굴려대기도 했다.
깨끗이 씻고 나와 뽀송뽀송해진 서하림은 아직도 배가 부른지 테이블 위에 올려둔 과일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스쳐 지나가서는 침대에 가로로 누웠다.
“아 피곤해……. 넌 왜 왔어. 쉬고 싶었는데.”
나는 홀린 것처럼 서하림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는지 제 다리 사이에 앉은 나를 보지 못한 서하림은 많이 피곤한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다. 딸기타르트 맛있더라. 마카롱은 또 뭘 그렇게 많이 했대냐. 한 개씩만 먹어도 열 개라 배불렀어.”
“하림아, 나 퇴원 선물 줘.”
“아 깜짝아. 뭐야, 언제 여기 온 건데.”
누워 있던 서하림이 고개만 들어 나를 발견했다.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바로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리니 깜짝 놀란 듯싶었다.
“줘. 퇴원 선물. 준다고 했잖아. 좋은 거.”
다시 목에 힘을 풀고 누운 서하림은 손을 팔랑거리며 “피곤하니까 내일 말해 내일” 하며 손사례를 쳤다.
“피곤하니까 한 시간만 수다 떨고 가자. 알겠지.”
“지금 줘. 지금도 줄 수 있는 거야. 비싼 거 아니고, 아니 비싸. 돈 주고도 못 사는 거.”
“아 진짜…… 뭔데.”
침대 아래로 내려와 있는 다리가 꿈틀거렸다. 말투에 짜증이 조금 묻어나 있는 걸 보니 정말 피곤한가 보다. 나는 손을 뻗어 서하림의 잠옷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잡고 내렸다.
“야 지금!”
목소리가 너무 크게 나갔는지 서하림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뗐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퇴원 선물로 뭐, 섹스라도 하자고?”
“하게 해줄 거야? 나는 그러면 너무 좋.”
“아니. 미쳤어? 손 떼.”
“…….”
“빨리.”
미간을 살짝 구기며 단호하게 말하는 서하림을 보고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 잠옷이 발목까지 내려와 분홍색의 반질반질한 무릎이 보였다. 서하림이 일어나 앉아 발목께로 내려온 잠옷으로 손을 뻗는 순간 나도 모르게 서하림의 무릎을 깨물고 말았다.
“아.”
서하림은 얼굴을 찡그리며 아예 일어났다. 하림이의 예쁜 것이 눈앞에서 달랑거렸다. 무릎엔 내 이빨 자국이 선연했다.
“하림아. 너도 좋았잖아. 저번에 내가 젖꼭지 빨아주니까 너도 섰잖아. 내가 만져주니까 막, 막 정액도 두 번이나 싸고…….”
하림이의 허벅지를 잡아 강하게 눌렀다. 서 있던 하림이가 내 힘에 눌려 다시 침대에 앉게 됐다.
“나 봐…… 지금 좆 터질 거 같아. 알잖아. 나 너한테 존나 맨날 꼴려서 발정하는 거…… 나 아까 네가 바이올린 연주할 때도 이랬어. 강당에서 사정할 뻔한 거 겨우 참았단 말이야.”
“…….”
“섹스는, 하아…… 안 하고 싶은 거 아니고 솔직히 진짜 너무 하고 싶은데 나중에, 나중에 어른 되고 해도 상관없어. 참을 수 있어. 참을게. 그러니까…….”
나는 하림이의 허리에 팔을 둘러 내 쪽으로 조금 당겼다. 하림이가 날 밀쳐내며 발버둥 쳤지만 내 팔은 굳건했다. 껴안은 하림이의 허리에 깍지를 껴서 아예 손이 빠지지 않게 고정하고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이 악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 마. 김동규, 하지 말라고 했어.”
“너도 좋았잖아.”
“안 좋았어.”
“그럼 그때 싸질 말았어야지. 발기하지 말았어야지. 진짜 싫으면 안 그래.”
“야, 시발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진짜 하지 마. 떨어지라고.”
“부끄러워서 그런 거면 불 끄고 올까? 이불 속으로 들어갈게. 문은 아까 다 잠가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하, 진짜…… 아, 시발 하지 말라고!”
하림이의 것을 입에 물자마자 하림이가 발로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쳐냈다. 내 침 때문에 귀두가 반짝거렸다.
“야…… 하, 일단 좀 진정해. 진정 좀 하고.”
진정은 무슨, 혀에 닿은 서하림 귀두의 촉감이나 맛을 수천 번을 리플레이 하며 입맛을 다셨다. 자동으로 입이 벌어지고 그 안에 침이 자꾸만 고였다. 내가 사람이라 망정이지 개였으면 이미 바닥에 침이 한가득 고였을 터였다.
“아니, 너도 알 거 아니야. 남자들은 그냥 꼭 성적으로 흥분하는 거 아니어도 잘 서.”
“그럼 사정은 뭔데.”
“극도의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면 사정을 하기도 해.”
“넌 좋아했잖아. 흥분해서 신음 소리 냈잖아.”
“…….”
“가슴 빨아 달라고 나한테 계속 졸랐잖아. 그렇게 새빨개질 때까지 빨려서 아플 텐데도 느껴 가지고 야한 소리 내면서…… 사정도 두 번이나 했어. 그거 내가 다 핥아먹은 거 기억 안 나?”
“솔직히 말해보자. 그래. 싫진 않았어.”
“그럼 됐어.”
나는 다시 서하림의 다리 사이로 달려들어 입을 벌렸다. 서하림이 내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며 말을 이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야, 어떤 남자가 그렇게 작정하고 자극하는데 발기를 안 하고 사정을 안 해? 아, 진짜 야!”
내 입을 가리고 있는 서하림의 손바닥을 핥았더니 하림이가 신경질을 내면서 손을 뗐다. 나는 말랑한 손바닥이 떨어진 게 아쉬워 대신 입술을 축였다.
“안 싫다며. 그럼 좋은 거지. 잘해줄게. 너 자위도 잘 안 하잖아. 그냥 성인 도구 쓴다고 생각해. 아니, 화장실. 그래, 그게 더 낫겠다. 화장실에 쉬 싸고 똥 싸는 것처럼 이용해. 난 다 좋아. 나는 너만 보면 발정이 나고 너는 그런 내가 싫지 않고. 서로 윈윈이잖아.”
“…….”
“응? 구석구석 잘 핥아줄게. 좋을 거야.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좆같은 아빠 때문에 병원에 몇 달씩이나 누워서는…… 내 삶의 낙은 너 하나뿐인데…….”
“…….”
“하림아…….”
늘 그랬던 것처럼 대답은 없었다. 나는 환희에 찬 얼굴을 숨기고 대신 성물을 대하는 순교자처럼 하림이의 것을 잡았다. 힘없이 누워 있는 게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살짝 내려온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리고 코를 박았다. 하림이의 진한 살 냄새가 풍겨와 페로몬처럼 느껴졌다.
나는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내쉬면서 하림이의 다리 사이를 뜨거운 숨으로 달구었다. 고환 냄새를 맡기도 하고 고환까지 들어 살짝 보이는 회음부 냄새도 맡았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향긋한 냄새가 날 수 있는 거지. 씻어서 더 그렇겠지만 원래 하림이 살 냄새는 청량하고 맑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전혀 역겹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여기 냄새를 추출해서 향수로 만들면 좋을 텐데…… 마약이 필요 없겠지.
충분히, 한참을 숨만 쉬다가 입을 벌렸다. 내 숨결에 하림이의 것이 살짝 힘을 받은 상태였다. 그게 귀여워 살짝 웃었다. 손을 뻗어 아까 전에 바닥에 내려놓은 휴지를 열심히 뽑아 속옷 안으로 넣었다. 사탕같이 단 하림이의 것을 입에 넣은 순간부터 참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는 상태였다.
일단 처음이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까 나는 괜히 혀를 놀리지 않고 천천히…… 하림이의 것을 내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점점 안쪽으로 들어오는 하림이의 것을 느끼며 나는 사정을 했다.
혀 안쪽, 그보다 더 안쪽…… 하림이의 것이 내 목젖을 건들자 살짝 기침이 나왔지만 결코 빼고 싶지 않았다. 더 안으로…… 완전히 안으로…… 하림이의 얼마 없는 음모에 내 코가 파묻힐 때까지 나는 하림이의 것을 기꺼이 쑤셔 박았다. 기도가 눌린 건지 숨이 잘 쉬어지지도 않았지만 좋았다. 더 이상 넣었다간 숨 막혀 죽을 것 같을 때, 나는 삽입을 멈췄다.
아…… 그냥 더 안으로 넣어서 죽어버릴까……. 하림이 것에 숨 막혀 죽으면 좋을 것 같은데…….
산소가 부족해 눈이 아려오고 머리에서 사이렌이 울렸지만 나는 잠시 가만히 그러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지 말지 고민하기 바빴다. 이대로 죽으면 하림이가 살인자가 되는 거란 생각에 도달하고 나서야 머리를 조금 뒤로 물렀다. 목구멍 안쪽이 억지로 틀어 막혀 있었기 때문에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하림이가 준 느낌이니까 감수할 수 있는 불쾌함이었다.
혀 위로 하림이의 것을 올렸다. 좀 전에 먹은 과일이라도 된 것처럼 하림이의 것은 달았다. 나는 볼이 패일 정도로 하림이의 것을 쭉쭉 빨아댔다. 사실 이렇게 펠라를 해본 게 처음이라 이러면 하림이가 아플 것 같긴 했는데, 좀 급했다. 빨리 하림이 정액이 먹고 싶었고 내 입에서 발기한 채 힘 가득 들어간 하림이의 것을 느끼고 싶었고 내 입안에 사정하는 하림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휴지를 썼지만 밖으로 삐져나온 정액이 묻은 손으로 하림이의 허벅지를 잡았다. 잔뜩 긴장한 게 느껴졌다. 탱글한 허벅지는 손에 착 감겨와 촉감이 끝내줬다. 밤새 하림이의 것을 물고 빨아서 하림이가 더 이상 나올 게 없어지면 허벅지 빨다가 집에 가야지. 그런 즐거운 생각을 하며 혀를 굴렸다.
가끔 이를 세워 긁기도 하고 살짝 물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하림이에게서 신음이 터져 나와 듣기 좋았다.
“아으…… 사, 살살해…… 아파.”
“응.”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강하게 빨면 빨수록, 아프게 이를 세우면 세울수록 하림이가 듣기 좋은 소리를 터트려대니 나로서는 거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엔 없었다.
하얗고 예쁜 발가락이 곱아들더니 입안에 비린 맛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사정을 참고 있는 것 같으니 프리컴인가. 머리를 뒤로 쭉 빼 귀두에 키스하듯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 기둥을 잡고 요도 구멍을 강하게 흡입했다.
“읏…… 으아, 김동, 하, 하지, 윽…… 떼…….”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구멍을 빨아대니 아무리 사정을 참겠다고 버텨도 시간문제였다. 입에는 죽어도 사정하기 싫다며 도리질을 치던 서하림이 뒤로 넘어가며 결국 정액을 터트렸다. 천장을 보고 헐떡이는 하림이의 숨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 하림이의 것을 반쯤 넣었다.
입안 가득 비릿한 향을 선사한 하림이의 것을 삼키지 않았다. 대신 하림이의 나머지 반을 삼켜 입안을 헤집었다. 하림이의 귀두가 내 입안을 정액으로 문질렀다.
양치를 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키스를 할 때 내가 혀로 하림이의 이빨들을 훑으며 가지런한 치열을 느끼고 혀 안쪽 통통한 살이나 다소 거칠거칠한 혀 위쪽, 유난히 뜨끈한 것 같은 혀 아래와 가느다란 설소대를 탐닉하는 것처럼 하림이도 사정 후 민감해진 귀두로 내 입안을 죄다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또 사정감이 밀려들었다. 진짜 나는 하림이 때문에 조루 신세 면하기는 글렀다.
“이상해, 하지 마. 했……잖아. 이제 그만, 하읏! 윽…….”
정액과 섞인 내 침이 너무 많이 고여서 이젠 삼킬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입안에 있는 모든 걸 삼키며 하림이의 것도 강하게 빨아 또 목 안쪽 깊숙이 넣었다. 하림이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무너졌던 상체를 다시 세운 서하림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했잖아, 그, 그만, 윽, 하…… 이제 그만해. 그, 그만 하으, 라고…….”
“으으으응.”
하림이의 것을 입안에서 빼기가 싫어 고개를 흔들었다. 어깨를 내리치는 손이 좀 아팠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나는 조금 심술이 나 하림이의 것을 이빨로 물었다.
“으응, 시발, 진짜…… 너…….”
여기도 세게 빨아대면 어쨌든 살덩이니까 색이 붉어지겠지. 전에 젖꼭지에 멍울 든 것처럼 여기도 그렇게 만들면 하림이는 옷 입고 벗고 화장실에 들를 때마다, 자리에 앉고 일어서고 걸음을 걸을 때마다 쓰라린 이곳 때문에 내가 떠오를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이빨로 살점을 조금 뜯어버릴까 하는, 내 거가 다 아파오는 상상으로까지 흘러갔다.
계속 자극을 한 탓인지 하림이의 것이 다시 힘을 받는 게 느껴졌다. 나도 휴지를 새로 뽑았다. 둘 다 더 이상 나올 게 하나도 없을 때까지 싸고 빨다 갈 거다. 그러려고 병원에서 하란 대로 하며 얌전히 지냈다.
너는 나한테 이 정도는 해줘도 돼. 착하게 지낸 나한테 보상을 줘야지. 다른 것도 아니고 네 하얀 몸뚱이로 날 칭찬하고 기쁘게 해 줘야지. 퇴원 선물 준다는 그 한마디 때문에 버틴 거니까.
솔직히, 서하림도 은연중에는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지한테 원하는 게 이런 거 말고 또 있나? 나보다 잘난 것투성이인 애한테 뭘 원하고 바랐으면 진작 옆에 붙어 빌빌대며 굽신거렸을 것이다.
그뿐인가. 서하림 부모님이 주는 용돈이 얼만지 1원 단위까지 다 얘기하고 이모님에게 품은 불만들도 일러바치고 엄마에겐 얼마나 실망했고 아빠에겐 얼마나 맞으며 살았는지 미주알고주알 다 드러내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서하림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거의 없다. 하고 싶지도 않고 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내가 서하림에게 원했던 건 나를 봐주는 눈동자, 내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예쁜 글씨를 쓰는 손, 내가 만든 것들을 먹어주는 입술, 혀,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숨결 이런 것들이지 다른 건 무의미했다.
그래. 서하림은 다 알고도 뭐든 다 된다고 한 거다. 저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얼마나 음욕과 색정에 찌들어 있는지 뻔히 다 알면서. 게다가 혹시 몰라 진짜 아무거나 다 되는 거냐고 다시 한번 물었는데도 모르는 척 내숭 떨면서 집문서 운운한 건 서하림이다.
전에 아무런 일이 없던 것도 아니고 대딸도 해줘, 젖꼭지도 빨렸어 서로 거길 비비기도 했는데 그러면 다음엔 뭘 원할지는 뻔한 일이다. 서하림도 직접 섹스를 언급하지 않았던가. 나는 고작 네 거 빨고 싶단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하림은 끝까지 다 생각하고 있단 얘기다. 존나 엉큼한 서하림.
내 상상 속의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닳고 닳은 서하림도 좋지만 현실의 서하림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아으, 잠깐만, 아…… 아……!”
싫다고 빼는 게 짜증이 안 난 건 아닌데 섹스까지 생각 다 해놓고도 막상 하려니 무서워하는 게 귀여웠다. 그만하라고 백 번 얘기해 봤자 뭐 하냐. 내 입안에다 사정하면서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데.
내 얼굴로 하림이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잘 울지 않는 애가 내 앞에서만 이렇게 눈물을 보이는 것도 존나 좋다. 눈물이 아까웠지만 지금은 눈물보단 하림이의 것을 물고 빠는 게 더 중요해 나는 손을 뻗어 하림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닦고 나니 내 손에 내 정액이 묻어 있던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닦아줘야 하나 싶었지만 말았다.
“하…… 시, 발…….”
연신 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또 입술을 깨물고. 젖꼭지 따위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끝내주게 강렬한 쾌감을 처음 맛봤을 테니 이렇게 발발 떠는 게 이해됐다. 이렇게 예쁘게 우니까 맘 약해지는데.
“그러면 한 번만 더 싸줘. 정액 한 번만 더 먹고 끝낼게.”
“이제 그만해 진짜.”
“마지막이야.”
입에서 하림이 정액 냄새 나는 거 같다. 이대로 하림이 정액으로 절여졌으면 좋겠다.
“나 쉬고 싶다고.”
“원래는 너 더 이상 아무거도 안 나올 때까지 빨려고 그랬어.”
“…….”
“많이 봐준 거야. 펠라 처음이잖아. 좋았지.”
“하…….”
“피곤하잖아. 얼른 싸고 자자. 응?”
어차피 대답은 또 침묵일 게 뻔했으므로 나는 하림이의 것을 입에 물고 빨았다. 좀 더 오래 물고 있고 싶은데 미움받긴 싫으니까 빨리 한 발 빼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열심히 혀를 썼다. 이빨을 세워 물어도 신음 하나 안 들리는 거 보니 화가 좀 단단히 난 듯싶었다. 할 거 다 하고 사죄해야지.
공들여 애무를 해댄 덕분에 하림이가 곧바로 사정했다. 정액 양이 별로 많지 않아 한 번에 꿀꺽 삼켰다.
“이제 진짜 끝이야. 얼른 비켜.”
“잠시만.”
나는 하림이를 뒤로 눕히고 다리를 내 어깨 위로 올렸다.
“야, 마지막이라며. 쌌잖아.”
“알아. 더 안 빨 거야.”
하도 내가 물고 빨아 대서 색이 붉어진 하림이의 것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시발, 이제 속옷 입을 때 아프겠지. 미안하면서도 좋아서 미안했다.
나는 하림이의 것을 조심스럽게 잡아 위로 올렸다. 고환도 같이. 그러자 통통한 회음부가 움찔거리며 날 반겼다. 혀를 빼 살짝 핥았다.
“야, 으앗…….”
회음부 살을 살짝 빨았더니 하림이가 몸을 뒤틀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중간중간 비키라고 그만하라는 말도 들렸지만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삽입 섹스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닌가.
침을 통통한 회음부에 잔뜩 펴 바르고 일부러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아래로 조금씩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조우했다. 내 인생의 종착지를.
누가 나한테 인생의 의미가 고작 서하림이랑 섹스하는 거냐며 돌을 던져도 나는 그게 어떻게 고작일 수가 있냐며 화를 낼 사람이었다. 좆의 숙주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다. 맞으니까.
하림이의 것을 잡고 있던 손을 떼 엉덩이를 잡고 벌렸다. 서하림이 벌떡 일어나 다리를 움직여서 한동안 몸싸움을 해야 했다. 아 씨발 몇 초 보지도 못했는데 이러고 힘 빼고 있어야 돼? 나는 하림이의 두 허벅지를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눌러 하림이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싸면 그만둔다며!”
“그만둔다는 말은 안 했어. 많이 봐줬다곤 했지.”
“얼른 싸고 자라며!”
“그래. 그게 그만둔다는 말은 아니잖아.”
“…….”
“…….”
길쭉한 다리에 얼굴이 가려져 있지만 어떤 얼굴일지 상상은 갔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1, 2, 3, 4, 5, 6, 7, 8, 9, 10.
“……넣으면. 우린 끝이야.”
“안 넣어. 참는다고 했잖아. 참을 수 있다고. 아니면 네가 넣을래? 좀 안 내키긴 하는데 누가 박는지가 너한테 중요한 거면 그 정도는 양보할 수 있어.”
“…….”
“얌전히 있어. 끝까지 안 해.”
허벅지를 붙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내 손자국이 흰 허벅지에 남아 보기 좋았다.
나는 다시 얌전해진 다리를 내 어깨 위에 올리고 탱글하고 말랑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작고…… 예쁜…… 하림이의 것을 잠시 감상했다. 심장 한구석에서 벅찬 감정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감격의 눈물도 흘러 눈이 시큰시큰했다.
혀를 빼 들고 작은 그곳에 다가갔다. 움찔거리는 게 사랑스러웠다. 터질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나는 하림이의 그곳에 혀끝을 댔다. 안 그래도 닫혀 있는 주름이 더 조여드는 게 느껴졌다. 코엔 회음부가 닿았다. 시각도 후각도 촉각도 미각까지 서하림으로 젖어 행복했다.
회음부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서하림의 살 냄새를 하나도 빠짐없이 훑어 마시며 혀에 힘을 실었다. 연한 색의 주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지만 서하림은 나만큼이나 힘을 줘 그곳을 움찔거리면서 내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혀가 들어오지 않게 방어하면 할수록 내 혀엔 거기가 움찔거리는 게 잘 느껴졌으니까.
존나 감격스럽고 행복하고 너무 좋아서 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줄줄 흘렀다. 살면서 이렇게 많이 울어 본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대답, 하지 말고…… 듣기만 해.”
응응. 그곳에 침을 치덕치덕 바르며 대답을 삼켰다.
“내가…… 내가 연락할 때까지 절대 연락 먼저 하지 마.”
침이 좀 점액질로 되어 있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내 침이 하림이의 곳에 좀 더 오래 붙어 있었을 테니까.
“나한테 말도 걸지 마. 학교든, 밖이든, 집이든.”
원래 학교에선 거의 말 안 하고 지냈고 밖에서도 서하림네서 공부하는 거 아니면 만날 일 자체가 없어서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
신음 대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림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또 사정을 하고 말았다. 몇 번짼지도 모를 사정을.
코에는 하림이의 회음부가 입술엔 하림이의 뒷구멍이 닿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게 믿겨지지가 않는다. 몇 번이고 가슴이 크게 부풀도록 숨을 쉬어 살 내음을 맡아도 움찔거리는 뒷구멍의 감촉을 느껴도 꿈만 같다. 하지만 꿈속의 서하림이라면 달콤하고 야살스런 말을 속삭이며 제 손으로 엉덩이를 벌려 구멍 속 속살까지 다 보여줬을 것이고 내 좆을 받지 못해 안달 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물고 빨고 있는 건 서하림. 진짜 서하림. 부끄러워 내빼는 게 귀여운, 아무것도 모르는 하얀 백지 같은 서하림. 나 같은 더러운 새끼는 엄두도 못 냈을…… 하지만 내게 좆을 세우고 사정하는 야해 빠진 서하림.
너는 내게 더럽혀진 걸까? 아니, 서하림은 내가 아무리 더럽혀도 진흙 속에서 피어난 흰 백합처럼 순결할 것이다.
그 사실이 내게 굉장한 자극인 동시에 면죄부를 주었다. 내가 더 개같이 발정하고 짐승처럼 추잡해져도 서하림은 숭고하고 고고하며 깨끗한 존재일 테니까.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숨을 쉬는 게 당연한 것처럼.
2부 숨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