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17화>
진유성의 말을 들은 상소윤은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끔 아니 종종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는 상소윤이지만, 그녀라고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다.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투와 눈빛.
평소라면 꺼내지 않았을 긴 서두.
공간을 채운 온도와 습도.
느낌이 왔다.
이건 청혼 타이밍이다.
하지만 그 순간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알겠다.
진유성이 무슨 생각이었고,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 고생은?
그건 어디서 보상받는데!
게다가 생각해 보면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반려자’보다 훨씬 깊은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일단, 허락되는 시간이 다르다.
예전에 진유성에게 우리가 정확히 얼마나 사는 건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대답은 간단했다.
원하는 만큼.
두 사람의 진원진기가 고갈되어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 그들이 진실로 완전한 죽음을 갈망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힘이 서서히 흩어질 거라고 했다.
그거 백 년 뒤일지, 천 년 뒤일지, 혹은 만 년 뒤일지는 알 수 없다고.
애초에 필멸자의 몸과 정신으로 완전한 영생을 이룩한 경우가 없다고 했다.
사실 천 년이나 만 년은 너무나 아득한 시간이라서 체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상소윤이 생각하기에 적어도 300년은 살 거 같았다.
그 정도면 세상 발전하는 것도 보고, 해 보고 싶은 것도 해 보며 재밌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혼자가 아닌, 둘이니까.
그러니까 보통의 청혼이 50년짜리라면 이건 최소 300년짜리다.
말 몇 마디에 이렇게 쉽게 넘어가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치만 좀 달콤한걸.’
‘아냐! 마음 고생한 걸 생각해!’
‘멘트 못 들었어? 같이 있어서 바다가 아름답다잖아.’
‘눈물로 지새웠던 밤(한 번도 안 울었다)을 생각하라고!’
상소윤이 두 가지 생각에서 오락가락하는 사이, 진유성은 정말 큰 궁금증이 생겼다.
“그, 왜 갑자기 박색해지는 것이냐?”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사르르 녹아내렸다가 코를 벌렁거렸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진유성이 궁금해하는 사이, 상소윤은 ‘박색’이란 단어에 정신을 차렸다.
그동안 저 박색이란 단어로 얼마나 놀림을 받았던가.
덕분에 마음의 추가 기울었다.
“안 돼!”
“뭐가 말이냐?”
“그래, 인정. 좋아. 좋은 시도였어. 타이밍도 적절했고, 멘트도 훌륭했어.”
“……?”
“하지만 내 마음 고생을 생각하면 이건 안 돼.”
“……?”
“청혼! 제대로 해!”
“……!”
진유성은 마음만 먹는다면 땀샘의 작용부터 동공확장까지 모든 신체 기능을 조절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간신히 표정 변화를 수습할 수 있었다.
‘청혼?’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어차피 영생을 함께할 것인데, 굳이 사회적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건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자신의 관점이고, 상소윤의 생각은 다를 수 있어 보였다.
결국.
“생각보다 깐깐하군, 상소윤. 안 넘어오다니.”
진유성은 청혼을 하려고 했던 척 연기를 시도하기로 했다.
“당연하지. 나 생각보다 굉장히 깐깐한 여자야.”
“그렇군.”
“……?”
진유성의 표정 연기는 완벽했다.
아니, 애당초 연기가 아니라 신체 변화를 통제한 것이니 이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이 필요 없는 삶을 너무나 오래 살아온 진유성은 거짓말을 잘 못했다.
그러니 진유성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동작 그만.”
“……왜 그러느냐?”
“반지 꺼내 봐.”
“……!”
“설마 청혼을 하면서 반지도 안 가져오진 않았겠지.”
“…….”
“뭔가 동공 쪽에 내공이 많이 쏠린 거 같은데?”
맞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두 눈을 진정시키느라.
진유성은 그 순간 적절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리곤 주머니 속의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보석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인과가 담긴 반지라 내게 의미가 깊다.”
“인과가 과수원 과일도 아니고……. 맨날 어디 걸려 있네?”
“큼, 말에 뼈가 있구나.”
“내놔 봐.”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상소윤에게 진유성이 건넨 것은…….
환한 빛이 나는 무언가였다.
“뭔데 이렇게 빛나?”
“멸마대 시절 화살에 맞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가슴팍에 넣어 둔 은전이 내 목숨을 건져 줬지. 그걸 지금껏 간직했다.”
“근데 왜 이렇게 빛나?”
“이번에 인과율의 균열을 재조정하면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게 없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
“됐고, 빛이나 꺼 봐.”
“내 힘으로 꺼지지 않는다. 아마 내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빛날 것이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진유성이 빛을 내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흡!”
상소윤이 빛을 꺼 버렸다.
“…….”
정확히 말하자면 상소윤이 본인의 기를 둘러 동전을 고립시켰다.
물론 진유성은 상소윤의 기를 침범해 동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한데 그러면 상소윤이 다친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려 진원진기를 움직여서 동전을 고립시켰으니까.
진퇴양난이었다.
“아, 그러니까 멸마대 시절에 네 목숨을 살려 준 게, 프랑스에서 쓰는 유로 주화네?”
“…….”
“화살에 뚫렸다면서 구멍은 또 왜 이렇게 깔끔해? 방금 뚫은 거지?”
“…….”
“저기요? 진유성 씨? 혹시 동전은 뚫어도 입은 막히셨나요?”
그날, 진유성은 세쌍둥이 마도사, 짭유성, 그릇 앞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 * *
파리 패션 위크.
줄여서 PFW는 뉴욕 패션 위크, 밀라노 패션 위크, 런던 패션 위크와 함께 세계 4대 패션쇼 중 하나였다.
굳이 이 4개의 쇼에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지만, 매겨야 한다면 파리 패션 위크가 1위다.
4대 패션쇼 중에서도 가장 성대하고 전통 있는 쇼니까.
상소윤은 대학 생활의 끝을 장식하기 위해 이곳에 도전을 하는 중이었다.
물론 PFW의 메인 행사로 여겨지는 오트쿠튀르쇼나 프레타포르테쇼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팝업 스토어와 미니멀 쇼들이 있었다.
일주일이나 파리를 달구는 행사이기 때문에 거대 브랜드쇼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관계자들의 명함을 사로잡을 기회는 많았다.
게다가 상소윤을 높게 평가하는 교수님이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준다는 약속도 하셨으니까.
‘교수님이 붙여 준 놈은 상태가 영 별로지만.’
상소윤이 그런 생각을 하며 킬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킬리안이 찔끔하며 다소곳하게 몸을 돌린다.
진유성에게 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계속 저 모양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회음혈을 점혈당한 킬리안이 엉엉 울면서 전화를 했다.
골이 아파진 상소윤은 진유성에게 가서 만나 보라고 했고, 밖에 나갔던 진유성이 의기양양해져서 돌아왔다.
같이 간 게 아니라, 진유성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1초 이상 눈을 마주치면 죽여 버리겠다고 한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무슨 사람을 메두사처럼 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의외로 진유성이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서, 상소윤과 진유성의 사이는 소문이 나지 않았다.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킬리안은…….
“너만 괜찮다면, 텍스트 메시지로 대화해도 괜찮을까?”
저 모양이라서 상관없을 것 같고.
“됐고. 여기 어때?”
그렇게 상소윤은 정식 디자이너로서의 첫 발을 떼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킬리안은 상태는 별로였지만, 실력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작업물이 쌓일 때쯤, 교수님이 놀라운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써드(Third)쇼에 선다고요? 제 디자인이요?”
파리 패션 위크의 퍼스트쇼와 세컨드쇼는 언제나 오트쿠튀르쇼와 프레타포르테쇼다.
사실 저 두 개의 쇼 때문에 벌어지는 게 PFW니까.
하지만 세 번째로 권위 있는 쇼는 매년 바뀌는데, 그건 매해 브랜드 가치 평가와 운영 방침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번에 써드쇼의 인식을 받고 있는 쇼에서 상소윤의 옷을 픽했다.
“축하한다.”
“와우! 축하해, 소윤.”
선정된 의상들 중에는 킬리안과 함께 작업한 것도 있지만, 상소윤 혼자서 작업한 것도 있었다.
킬리안과 협업을 했기 때문에 뽑힌 게 아니라, 그녀의 역량이라는 말이었다.
그동안 상태가 영 메롱했던 킬리안의 축하에 상소윤이 활짝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그러자 킬리안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제, 제발. 만지지 말아 줘.”
상소윤은 그러려니 했지만, 영문을 모르는 교수님은 왜 저러나 싶은 눈치였다.
* * *
쇼의 당일이 밝았다.
아침부터 상소윤은 흥분 상태였다.
꿈같은 일이었고,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고, 배울 것들 투성이었으니까.
그래서 구경을 하겠다고 함께 파리로 온 진유성에게 복면을 하나 씌워 주고는 쫓아 보냈다.
어디 구경이나 하라고.
“이런 걸 쓰고 있으면 경찰에게 잡혀 간다.”
“길거리 사람들 옷 입은 거 보면 복면은 평범할걸?”
“내가 부끄러운 게냐? 왜 날 멀리 떨어트려 놓는 것이냐?”
“신분 차이 같은 거지. 난 디자이너로서 스태프 라운지에 있어야 하고, 넌 일반 객석이 한계고.”
“빌어먹을 패션 봉건제…….”
평소에도 옷을 못 입는 진유성이라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나 아직 화난 거 다 안 풀렸거든? 말 시키지 마라.”
물론 실제로는 화가 풀린 지 오래였지만, 눈치를 보는 진유성이 재밌어서 컨셉 유지 중이었다.
잠시 뒤, 드디어 기다리던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상소윤은 자신의 옷들이 쇼의 7번 타임에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7번은 제일 인기가 없는 자리고, 사람들에게 가장 주목을 못 받는 자리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내가 디자인한 옷이 이 큰 쇼에 나오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옷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엔 자신이 너무 긴장해 쇼의 순번을 헷갈렸거나, 드레스 라인업 순번 자체가 밀렸나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킬리안과 함께 공동으로 작업한 건 정상적인 순서로 무대에 올라왔으니까.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쇼의 진행은 전쟁터와 같다.
감히 그런 사소한 것을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봐서도 안 된다.
혹시 총괄 디자이너가 라스트 리스트를 보고 욕을 하면서 뺐을까?
그게 아니면 쇼의 컨셉이 갑자기 바뀌었나?
그것도 아니면…….
결국 상소윤이 할 수 있는 건 초라한 추측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쇼가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 세례가 이어질 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익숙한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유성.
깜짝 놀란 상소윤이 고개를 들자, 런웨이 위에 진유성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만든 옷을 입고.
상소윤은 뭔지 모를 상황이었지만,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진다.
진유성이 워킹을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상소윤은 이미 진유성의 워킹을 본 적 있었다.
수학여행 때 지종수가 상림에게 선물하겠다고 뭘 잔뜩 샀는데, 진유성이 그걸 갈취했었다.
그리곤 지종수를 놀리겠다고 대정고 정문에서 워킹을 했었고.
상소윤은 지종수가 오해할까 후다닥 도망갔었지만, 멀리서 진유성의 워킹을 봤었다.
그건 꽤 멋있었다.
아니, 굉장히 멋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원래도 옷에 관심은 많았지만, 갑자기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꾸게 된 게.
진유성이 다가온다.
흐트러짐 없지만, 리드미컬하게.
그리곤 반지를 건넨다.
“상소윤, 결혼이다!”
평소보다 조금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상소윤은 진유성이 민망해서 그런다는 걸 알았다.
이건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니까.
그래서 받아 주었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자, 박수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환호 속에서 뒤늦게 현실을 자각한 상소윤이 소곤소곤 물었다.
“야, 근데 이거 민폐 아니야?”
“무슨 말이냐?”
“아니, 아무리 무력이 쎄다고 해도 남의 패션쇼에서 막 이렇게 해도 되나……?”
“무슨 소리냐. 이 쇼의 메인 스폰서가 CMSG다. 내가 여기에 돈을 얼마나 썼는지 알면 놀랄 거다.”
“으, 무드 없어.”
“참고로 말해 주는데, 네 디자인 채택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확인하고 후원한 거다.”
“이건 좀 배려 있네.”
그사이, 스태프들이 다가와서 진유성과 상소윤을 무대 아래로 내렸다.
잠깐의 이벤트는 가능했지만, 메인 디자이너와 함께하는 엔딩쇼를 지체할 순 없으니까.
그렇게 스태프 라운지로 내려간 진유성과 상소윤은 손을 잡고 엔딩쇼를 구경했다.
결국 이 쇼의 주인공은 상소윤도 아니고, 진유성도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주인공이 아닌 순간에도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게 사랑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