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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16화 (331/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16화>

*   *   *

이헌원이 사라지고, 진유성은 며칠을 천신궁에서 보냈다.

오랜만에 만난 신주청이 반갑기도 하고, 천계 때문에 부서진 천신궁의 복구 작업을 도와주기…….

“교주님!”

“왜…….”

“대체 목자재에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새싹이 돋았습니다! 벌목해서 청까지 바른 목자재에!”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 가지고…….”

“아니, 그게 궁금하면 자재 하나 받아서 하시면 되잖습니까?”

“그치? 그러면 되는데 내가 왜 전부 그랬을까?”

“하아.”

도와주는 척을 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사실 원래의 진유성은 그 어떤 사고를 쳐도 굉장히 뻔뻔하게 구는 인물이었다.

그에 피해를 입는 건 항상 상림이었고.

하지만 이번에는 좀 애매했다.

며칠 전 신주청은 정말로 죽을 뻔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오로지 진유성에게 있다.

제아무리 뻔뻔한 진유성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뻔뻔할 정도의 위인은 아니다.

‘이번엔 좀 미안한 척을 해야겠지?’

진유성은 그리 생각했지만…….

“교주님! 야!”

사고를 안 치면 된다는 건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다.

어찌 됐든 천신궁의 복구 작업이 궤도에 올랐을 즈음, 진유성과 신주청은 술잔을 기울이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진유성이 이번에 겪은 일이었다.

진유성은 본디 자신의 이야기를 떠벌리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신주청은 들을 자격이 있었다.

“그렇게 된 거다.”

“교주님이 이헌원과 그런 인연이 있었는지는 몰랐군요.”

“따지고 보면 나도 몰랐지? 이번에 겪은 일이니까.”

진유성의 말에 술잔을 매만지던 신주청이 나직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제 와서 보면 이헌원은 저희에게 정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 해남으로 도망친 것도 일월신교의 진격로를 역행한 거니까.”

“신교의 기준으로는 이헌원이 17대, 교주님이 18대, 제가 19대 교주군요.”

신주청의 말처럼 이헌원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 일월신교에는 정통성을 가진 교주가 없었다.

각각의 세력들이 난립하며 서로가 적통 교주라고 싸워 대다가 망했으니까.

“조사전에 위패라도 올리든가.”

“그건 곤란하죠. 천마신교와 일월신교는 분리되어야하니까요. 하지만 불천위(不遷位) 제례에 이름을 올릴 수는 있겠습니다.”

불천위란 덕망이 높거나 큰 공을 세운 이들을 뜻했다.

“그래. 이헌원도 그 정도면 만족해할 거다.”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대화를 나눴고, 다음날 짧은 이별을 고했다.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음 중양절 때 뵙죠.”

“아, 맞다. 주청아. 이제 꼭 중양절이 아니어도 상관없을 거다.”

“변화가 있었습니까?”

그동안 신주청은 일 년에 한 번씩 지구에 방문했지만, 그건 일 년에 한 번만 시간이 나서는 아니었다.

차원의 압력을 견디는 데 몸에 무리가 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신주청이 진유성의 업을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차원의 압력을 견디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진유성도 정확히 몰랐던 부분이긴 하지만, 두 차원 간에 얽혀 있던 균열은 완전히 사라졌다.

업을 짊어진 신주청은 이제 더 이상 별다른 압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좋은 일이군요.”

“그치.”

그뿐만이 아니다.

“아마 지구의 현 세대가 모두 사라지면, 그러니까 개변의 날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두 없어지면, 더 이상 위상의 구분도 의미가 없을 거다.”

지금은 지구 차원과 중원 차원의 위상을 구분 짓는 게 진유성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짧으면 70년, 길면 100년.

그 시간이 지나면 진유성은 더 이상 두 차원의 위상을 수호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힘을 잃어버리거나 수명이 다하는 건 아니지만, 기준점의 역할에서 벗어난다.

“그때쯤이면 상소윤이랑 차원 여행을 다닐지도 모르겠군.”

“상 소저는 잘 지내십니까?”

“나한테 잔뜩 화가 나 있지.”

“그렇군요.”

“……이유는 안 물어봐?”

“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게 더 어색합니다만……?”

“간다!”

지구로 향하는 게이트를 연 진유성이 냅다 사라졌다.

지은 죄가 있어서 이번엔 신주청을 못 갈궜지만, 다음엔 반드시 갈구겠다는 다짐을 하며.

*   *   *

띠디디디디-

알람 소리에 상소윤의 눈이 번뜩 떠졌다.

진유성과 힘을 공유한 이후로는 피곤함이란 걸 거의 못 느껴서 좋다.

당장 지금도 알람만 들리면 눈이 번쩍 떠지니까.

‘근데 무슨 꿈을 꾼 거 같은데?’

상소윤이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꿈에 진유성이 나왔던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한데, 진유성을 떠올리니 불쑥 화가 치밀었다.

사실 상소윤은 최근에 진유성에게 거대한 불만을 품고…….

‘뭔가 익숙한데?’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오늘과 똑같은 하루를 겪었던 것처럼.

근데 뭐, 대학생의 일과가 다 그렇지 뭐.

상소윤이 시계를 보고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학 생활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오늘 프로젝트 미팅에 늦으면 안 되니까.

그렇게 도착한 교내의 카페테리아에서 파리 패션 위크를 함께할 킬리안과 커피를 주문했다.

“잘 잤어?”

벌써 몇 주째 자신에게 들이대는 놈인데,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해 줘도 믿지 않는다.

하긴 뭐!

진유성 이 자식이 말을 돌리고 한국으로 도망갔으니까!

“열받아…….”

“응? 방금 한국말 한 거지? 듣기 좋다. 뭐라고 했어?”

“아냐. 혼잣말이야.”

“말은 원래 사람끼리 감정을 나누라고 만들어진 거야. 우리 둘이 나누면 더 좋고.”

상소윤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생을 포기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군.”

누군가 상소윤의 옆에 앉자, 킬리안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진유성?”

“내가 네 친구더냐?”

진유성이었다.

난데없는 진유성의 등장에 카페테리아에 웅성거리는 소음이 번졌다.

개변의 순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진유성은 한 번쯤 만나고 싶은 존재니까.

그런 진유성의 시선은 킬리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선택하여라. 위냐 아래냐.”

“무슨 말인지…….”

“위, 아래.”

“위위아래?”

“케이팝 팬이었군.”

“저는 한국말을 못합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어깨를 으쓱한 진유성이 이번엔 프랑스어로 물었다.

“위냐, 아래냐? 하나를 골라라.”

“……아래?”

그 순간, 진유성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핏!

“당분간 하물을 쓰지 못할 터이니 반성하며 살거라.”

정말 끔찍하고 사악한 이들에게만 선사한다는 회음혈 점혈이었다.

참고로 이 점혈을 당하고 멀쩡했던 이는 지종수와 심도훈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게냐? 점혈이 두렵지 않느냐?”

“진유성. 넌 아무 것도 몰라.”

“우리에게 네 점혈은 통하지 않는다.”

“어째서?”

“쓸모없는 걸 앗아 간다고 협박해 봤자, 두렵지 않으니까.”

“…….”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던 진유성이 옆을 돌아보았다.

상소윤이 어딘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진유성이 지구에 도착하는 순간 밀려든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일 터였다.

하지만 나쁜 현상은 아니었다.

뒤죽박죽 순서가 섞인 책장 속의 책들을 순서대로 꽂아 넣는 과정일 뿐이다.

“소윤아.”

진유성이 손을 내밀자, 상소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손을 잡았다.

손을 잡으니 따스한 기운에 혼란이 가신 듯, 상소윤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가자.”

이윽고 둘은 파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상소윤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익숙한 곳에 와있었다.

제2의 파리라고 불리는 보르도의 서쪽.

노을 지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정원의 벤치.

상소윤과 진유성의 집.

잠시 바다를 바라보던 상소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쩐지 뭔가 전부 겪은 일들 같더라.”

“나쁜 일은 아니다.”

“나도 알아. 이해했어.”

상소윤과 진유성은 인과율로 얽혀 있으며, 힘을 공유하기 때문에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소윤이 진유성처럼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네가 꾼 꿈들은 사실 꿈이 아니었다.”

“그럼 그건 뭐야?”

“어느 날 집 천장에서 물이 새면 어떻게 하겠느냐?”

“어디서 새는지 찾아봐야겠지?”

“너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균열이 이끄는 곳으로 의식이 향했던 것이었지.”

“그럼 내가 꿈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으면 현재가 바뀌었을까?”

“아마도.”

하지만 진유성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믿음은 아니었으나, 그 믿음은 단단했다.

아카샤가 자신을 믿고 인과율의 시험을 진행한 것처럼, 진유성 역시 상소윤을 믿고 있었다.

“내가 잠시 너와 거리를 둔 것도, 한국으로 떠나 있던 것도 그 탓이었다.”

진유성의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상소윤에게 영향을 준다.

상소윤은 진유성의 힘을 나눠 받는 과정 중에 있었지만, 진유성이 지닌 힘은 너무나 거대해서 단번에 받을 수가 없다.

해서, 상소윤은 꽤 오랫동안 상단전이 개방된 채로 진유성이 공유해 주는 힘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유성은 어쩌면 이러한 행위가 과거의 인과율에 개입하는 상소윤의 문제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해서 한국으로 떠난 것이었다.

물론 DDP의 인과율 변화를 관찰하려는 게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지만, 몇 달을 머물 필요가 있는 일도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상소윤이 벌떡 일어나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야! 그런 거면 말을 해야지!”

“말을 하면 스스로가 과거의 인과율에 접촉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되지 않느냐?”

“그게 왜?”

“의식은 계산을 불러오고, 계산은 실패의 영역에 있는 일이다. 해서, 나는 믿은 거다. 네가 어떤 상황에 떨어지더라도 올바른 쪽으로 갈 거라는 걸.”

구구절절 맞는 소리에 할 말이 없어진 상소윤이 쌍심지를 끄자,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이리 와라, 상소윤.”

상소윤이 쭈뼛거리며 진유성 옆에 앉자, 진유성이 그녀를 감싸 안아 주었다.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처음 바다를 봤던 것은 해남에서였다.”

“생존대로 도망 다닐 때?”

“그래. 한국은 삼면이 바다지만 중원인들은 평생토록 바다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다.”

진유성은 처음으로 마주친 바다를 보며 그 웅혼함에 놀랐었다.

삶을 연명하던 생존대 앞에 나타난 자연은 그야말로 거대했고, 강인했다.

“어쩌면 그때 나에게 필요한 게 거대함과 강인함이었기에,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바다의 모습은 상해의 상일문주(桑鎰門主)를 만났을 때였다.

상일문주가 천신궁에 찾아온 것은 소천한 신주청의 주검을 거둔 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심적으로 혼란했던 진유성은 그를 배려하지 못했고, 상일문주는 목숨을 불태워 왜구의 토벌을 부탁했다.

진유성은 상일문주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그길로 바다를 넘어서 왜구를 토벌했다.

그때 나룻배를 타고 넘었던 바다는 거칠었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꼭 괴물의 아가리 같았으며, 스스로의 무심함을 질책하려는 채찍 같았다.

“어쩌면 그때 내가 자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유성이 상소윤을 쳐다보던 시선을 돌려 보르도의 서쪽 바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금 너와 함께 보는 바다는 아주 아름답다. 꼭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반짝이는구나.”

그건 아마도.

“네가 내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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