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9화>
* * *
최근 정새롬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학을 안 간 심도훈, 지종수라든가, 놀려고 대학을 간 고인수와는 다르게 진지하게 학업에 임하고 있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디자인 공부에 몰두하는 상소윤과 비슷했다.
진유성이야 말할 것도 없이 논외고.
정새롬이 이렇게 바쁜 삶을 살게 된 것은, 부모님 회사 계열사 중 하나를 물려받기로 약속을 하면서였다.
부모님이 내건 조건은 휴학 없는 다이렉트 스물셋 졸업, 스물넷 공채 입사.
그것도 정정당당하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을 맞이하는 정새롬은 꽤 바빴다.
학기 중에는 학점 관리에 매진하고, 방학 때는 직무 관련 자격증을 따면서 인턴십도 해야 한다.
그나마 어렸을 때부터 영어와 중국어 조기 교육을 받아서 어학 관련 공부를 안 해도 되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하아. 심심하네.”
바쁜 거랑 심심한 건 별개다.
이성은 심심할 때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감성이 심심하다고 소리친다.
그렇게 괜히 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지종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 종수야 왜.”
-아니, 이 미친 진유성!
진유성 욕으로 시작하는 익숙한 전화였다.
“왜, 또 무슨 일인데.”
-아니 진짜로 들어 봐. 내가…….
듣자 하니, 지난번에 소윤이 아버지와 짜고 진유성을 골탕 먹인 것에 대한 복수를 당한 모양이었다.
한데, 스케일이 좀 과감하다.
종수가 영화 시사회장에 도착하는 순간 진유성이 갑자기 나타나 얼굴을 점혈했단다.
잔뜩 긴장한 상태라서 인상을 팍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 지종수는 모든 시사회 일정을 인상을 쓴 채로 소화해야 했다.
레드 카펫에서도, 무대 인사에서도.
심지어 기자들이 미소를 지어 달라고 요구를 하는데도!
다행히 작중 캐릭터가 딱 그런 식이라서 적당히 웃고 넘어가긴 했다는데…….
첫 중요 배역에 과몰입한 찐따 신인배우 커뮤니티에 사진이 돌고 있단다.
-진유성이 올렸을 거야! 분명해!
“그럴 확률이 높긴 하지.”
-너 이 미친놈이랑 연락 돼? 내 전화는 지금 다 씹어!
“어……. 한번 해 볼게. 뭐라고 전해 줄까?”
-전화 받으라고!
“알았으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말아 줄래?”
그렇게 전화를 끊고, 진유성의 번호를 찾는데 또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종수가 할 말이 남았나 싶었는데, 고인수였다.
“어, 인수…….”
-야, 이 미친 진유성!
내가 발신자 이름을 잘못 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다시 봤지만, 지종수가 아닌 고인수가 맞았다.
“넌 또 왜.”
-또?
“방금 종수한테 전화 왔거든.”
정새롬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고인수가 흥분해서 진유성의 욕을 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정새롬이 보기엔 고인수는 지종수에 비하면 스케일이 작았다.
소개팅녀를 보고 호감을 가졌는데, 진유성이 훼방을 놓았다고.
그놈의 주구장창 외쳐 대는 인수분해로?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상견례도 아니었으니 그냥 웃어넘길 에피소드다.
아니, 막말로 고인수의 몸이 좋았으면 플러스 요소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사람은 원래 남의 호환마마보다 본인의 고뿔이 더 아픈…….
‘내가 지금 무슨 비유를 떠올리는 거야?’
진유성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어르신들이나 쓸 비유가 옮았다.
아무튼 정새롬은 고인수의 분노가 크게 와닿진 않았지만, 일단 공감은 해 줬다.
일이 크든 작든 원론적으로는 일단 진유성이 나쁜 게 맞으니까.
-너 진유성이랑 연락 돼?
“네 전화도 다 씹냐?”
-어!
“안 그래도 종수 때문에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내가 해 보고 알려 줄게.”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이번에야말로 진유성한테 전화를 걸려는데…….
“아, 또 뭐.”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모르는 번호였다.
한데 막상 받으니 반가운 목소리긴 했다.
갑자기 군대로 납치된 심도훈에게 걸려온 전화였으니까.
“이게 군대 폰이야?”
-부대에서 쓰는 폰이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단어가 좀 그렇다.
“내가 군대를 안 가 봐서. 아무튼 고생 많네. 갑자기 간다고 환송회도 못했잖아.”
-군대스 컴바인이 하루 전에 취소 받아 주는 줄 알았지…….
“어휴, 멍청한 놈. 근데 너희 게임 구단은 어떻게 됐어? 너 그거 승격됐다지 않았나?”
정새롬은 그 뒤로 심도훈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지만, 잡담의 방향이 점점 변질되기 시작했다.
“훈련소 조교로 왔다고? 그게 가능해?”
-몰라. 이 미친놈이 뭔 짓을 했는지, SG에서 파견군 형식으로 왔더라.
점점 심도훈의 목소리에서 진유성에 대한 분노가 묻어나는 것이었다.
최우수 병사를 달고 잠깐 세뇌를 당했던 심도훈이지만, 생각해 보면 열받는 일이 너무 많았다.
특히 화생방 훈련 때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는데 박장대소를 하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죽여 버리고 싶었다.
-아무튼 진유성 만나면 내 대신 시원하게 욕 좀 퍼부어 줘라. 연말 잘 보내고.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정새롬은 혼란스러워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진유성의 전화번호를 화면에 띄워 놓고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치?”
“얼?”
“스?”
“……치얼스? 이게 뭔데.”
정새롬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숙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튀어 들어왔다.
“야, 이! 나쁜 놈들아!”
그들의 담임 연기훈이었다.
수학여행.
술을 먹다가 사라진 진유성이 담임한테 고자질을 해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던 순간.
떠오르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다.
“인간도 혀로 헥헥 거리면 체온을 조절할 수 있다.”
“야, 그게 말이 되냐?”
“어허, 딱 한 번만 직접 해 보면 되지 않느냐? 무려 대정고 일등이 하는 말이다.”
“아니, 일등이고 나발이고 이걸 하란다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호기심에 혀를 날름거렸는데, 진유성이 내공으로 체온을 낮춰 버렸었지.
그 뒤로 정새롬과 상소윤은 한동안 인간의 혓바닥 체온 조절설을 진지하게 믿었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창피한 일이었다.
그 뒤로도 진유성에게 놀아나서 바보가 됐던 경험은 무수히 많았다.
요트 비용을 건 낚시 대결?
“사과하면 월척을 낚게 해 주겠노라! 하하하하!”
농락만 당했다.
기말고사 시험 성적 가지고 했던 조롱의 수위는 얼마나 심각했던가.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던 정새롬은 드디어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스스로의 감정에 내적 비명을 질렀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이건, 소외감이었다.
왜 고인수, 심도훈, 지종수에게만 장난을 친단 말인가!
나는!
생각해 보면 그들은 세계 3대 쇼라 불리는 하이난의 송성가무쇼를 보고 진유성의 쌩쇼보다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이들이었다.
방학 때는 진유성의 거리 공연을 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중독자들이었고.
3년이란 시간이 지나서 중독 상태에서 빠져나온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다.
중독은 끊어 내는 게 아니라, 참는 거라는 말이 정확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정새롬은 치열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
이건 어쩌면 진유성의 가스라이팅이 아닐까?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마!
그러나 결국 정새롬은 진유성에게 전화를 걸고야 말았다.
-정새롬이군. 무슨 일이냐?
그래, 이 말투가 진짜다.
늘 새롭고 짜릿해.
“어, 아니 뭐. 너 애들 괴롭히고 다닌다며?”
-괴롭힌 적 없다.
“애들은 괴로워하던데?”
-나약해서 그런 것이다. 내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너에게 한 것부터가 약하다는 증거지.
“아무튼 애들이 전화 좀 받으라고 난리더라. 이…… 사위야.”
이제 정새롬은 진유성이 할 말을 알고 있었다.
난 사위가 아니라, 일위다.
알량한 장기자랑 좀 이겼다고 자랑하는 것이냐?
그 다음에는 분명 자신에게 복수를 하려고 할 거고.
이딴 걸 기대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요즘 너무 심심했으니까.
현생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이 정도 일탈쯤은 괜찮잖아?
그렇게 정새롬은 진유성의 일갈을 음미하려고 했지만…….
-흠……. 때가 되면 받을 터이니, 바쁜 대학 생활이나 열심히 해라.
너무나 정상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차마 뭐라고 받아치기도 힘든 깔끔한 응대.
하지만 이미 자존심을 버린 정새롬은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웬 정상적인 척이야? 사위 주제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끊어라.
하지만 전화는 끊겼다.
자극이 코앞까지 왔다가 사라져 버린 중독자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성적인 판단을 잃어버린다.
결국 정새롬은 다시 진유성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든 반응을 유도하려고 했지만, 어림없었다.
-새롬아. 내가 이런 말을 너에게 할 줄 몰랐는데, 대학생이 귀한 방학 시간을 이렇게 허비해도 괜찮겠니?
심지어 말투까지 점점 정상인으로 바뀌었다.
이 말투, 어디선가 들어 봤다.
그래. 소윤이 어머니 말투다.
결국 정새롬은 이성을 잃었다.
“야! 왜 나만 왕따 시켜!”
-난 멸마대와 생존대를 거쳐, 일원신교의 잔당을 흡수해 천마신교를 일궈 냈다. 그 이후 대명제국의 황족들을 내 발아래 두었지.
“갑자기 뭔 소리야.”
-그 모든 일을 이룩한 나의 행동 원리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게 뭔데.”
-상대방이 원하는 건 결코 쉽게 내어 주지 않는 거다.
“너……!”
정새롬은 그제야 진유성이 처음부터 자신의 의도를 완벽히 간파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지?
전화 목소리 몇 마디만 듣고 그게 짐작이 된다고?
그 순간,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다. 정새롬. 대신 조건이 있다.
“뭐, 뭔데?”
-상소윤에게 전화를 걸어라. 그리고 말해라.
“뭐라고?”
-한국 음식이든, 프랑스 음식이든! 너에겐 요리에 재능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야! 어떻게 친구한테 그런 말을 해!”
-친구니까 할 수 있는 거다. 연인인 내가 하면 서운하겠지만, 네가 하면 진실된 조언으로 와닿을 수 있다. 이게 어떻게 나쁜 일이더냐? 친구가 냉철한 메타 인지를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데!
“그래도…….”
-무엇보다 발전의 첫걸음은 인정이다. 상소윤은 본인의 요리 실력을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네가 그 첫걸음을 도와준다면? 무척 보람찬 일이 아니더냐?
한참 동안 진유성에게 설득당한 정새롬은 결국 홀린 듯이 전화를 들었다.
그리곤 상소윤에게 말해 버렸다.
물론 진유성처럼 직설적이진 않았지만.
-야, 정새롬. 너 이거 진유성이 시킨 거지.
“진유성이 나한테 왜?”
-지가 못 말하니까?
“시킨다고 내가 해?”
-흠……. 그건 그런데. 아 그럼 갑자기 뭔데!
“내가 방금 레스토랑에서 네가 해 준 거랑 같은 프랑스 요리를 먹었거든.”
-그래서? 갑자기 내 요리를 욕하고 싶어졌다?
“그냥 뭐, 비교가 되더라, 이 말이지.”
-끊어! 한국 가면 뒤졌어!
자극을 맛볼 준비를 끝낸 중독자는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만족을 갈구한다.
그렇게 정새롬은 진유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다.
설마 배신당하는 건가 싶은 순간 날아온 한 통의 문자.
[아직도 모르겠나? 넌 이미 원하는 것을 가졌다.]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부지불식간에 진유성에게 속아서 실컷 농락당했으니까.
하지만 이 해결되지 않는 갈증은 뭐지?
정새롬은 그 순간 다시 깨달았다.
마지막 과정이 남아 있다는 걸.
지종수에게 전화를 건 정새롬이 소리쳤다.
“야 지종수! 진유성 이 미친놈이 나한테 뭐 했는지 알아?!”
그들은 여전했다.
* * *
몇 년 뒤 돌이켜 보자면 아무 것도 아닌 나날들이었고, 멀리서 보면 그저 어디론가 향하던 여정의 한복판이었다.
추억으로도 남지 않을 사소한 일상들.
그래도 즐거운 건, 아마 그들이 친구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렇게 스물둘이 끝나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