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8화 (323/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8화>

*   *   *

어느덧 훈련소 기간이 끝나고 수료일이 다가왔다.

진유성 입장에서 꽤 재미있는 기간이었다.

이제는 너무 옛날이 된 멸마대 시절이 생각나는 장소였으니까.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신주청과 상림이 좀 괘씸하다.

감히 본 교주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견제를 하다니.

‘주청이가 오려면 아직 멀었지?’

매년 중양절(9월 9일)이면 신주청이 지구에 방문하지만, 중원의 중양절이 지구의 중양절은 아니다.

정확한 시간은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보통 3월 말 아니면 4월 초다.

두 차원 간의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신주청을 혼쭐내는 건 잠깐 미뤄 놓고 상림을 혼내야겠다.

진유성이 상림을 어떻게 혼내 줄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심도훈이 슬쩍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야,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러냐?”

“야? 본 조교한테 반말하지 않습니다.”

“아, 수료식까지만 조교라며!”

“흠. 그건 그렇지.”

“내가 진짜 생각해 봤는데, 이유를 모르겠어서 그래.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이제부터 내 꿈은 너야, 훈진아.”

“……?”

“내 연무장에 온 걸 환영해.”

“진짜 미친놈인가…….”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너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더냐.”

“뭐가?”

“재벌 3세가 최우수 훈련병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아마 최초일 거다.”

진유성의 말처럼 심도훈은 진유성의 철두철미한 감시 하에 이번 기수의 최우수 병사가 되었다.

심도훈 입장에서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실제로 그렇진 않았다.

최근 공화 플러스의 소년 만화 스토리에다가 진유성이란 존재가 얽혀 버리니, 심도훈의 군 생활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생긴 것이다.

물론 군부대는 기자가 쉽게 취재하기 어려운 곳이지만, 심도훈이 잘 해내면 국방부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조만간 심도훈이 최우수 훈련병이란 기사가 나갈 거고, 다른 훈련생들도 개고생한 심도훈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제 전역을 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군 생활로 태클을 걸 수 없을 거다. 누가 뭐래도 열심히 했으니까.”

“뭐, 그건 그렇지…….”

“공화 플러스의 감독이 되면 어떨 것 같나? 선수들의 나약한 정신력을 질타할 수 있다. 왜냐고? 넌 최고의 군인이었으니까.”

“음, 그건 그래. 솔직히 나만큼 열심히 한 사람도 없지.”

“그래. 이 모든 건 널 위해서다.”

십수 년간 상림에게 사용해 온 세뇌 스킬의 효과는 굉장했다.

심도훈으로선 진유성의 말이 꽤 그럴듯하다고 여겨졌으니까.

물론 그도 바보는 아니라서 진유성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조교가 됐을 리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뭐, 결과가 좋으면 전부 좋은 게 아니던가.

“야, 근데 밖에서 오메가 플러스, 아니 공화 플러스는 어떻게 되고 있냐?”

“너희 아버지는 게임 구단 운영에 별 관심이 없더구나.”

“그렇긴 하지. 시멘트가 일반 소비자들한테 팔리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팀을 유지해 준다고 약속했는데?”

“공화 플러스라는 이름은 유지하되, CMSG가 메인 스폰서가 되어 운영하기로 했다. 스폰서 비용도 CMSG가 70% 이상을 부담할 거다.”

“엥? 근데 왜 공화 플러스야?”

“나중에 너한테 팔 거니까.”

“뭐?”

“네가 전역하기 전에 1부 리그 우승을 시켜 놓고 아주 비싸게 팔 거다.”

“내가 안 사면?”

“다시 내 꿈은 훈진이가 된다.”

“……사야겠네.”

사실 1부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는 전제하에, 우승 구단을 살 수 있다는 건 굉장한 기회긴 하다.

보통은 돈이 있어도 못 사니, 유산을 당겨 받아서라도 사야 한다.

“아니 근데 우승은 좀 그렇다. 2등, 아니 4등만 해 줘.”

“왜?”

“우승한 다음에 내가 부임하면 너무 부담스럽잖아. 플레이오프 진출팀 정도가 딱 좋은데?”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군. 네가 부임해도 일단은 2군 감독부터 시작을 해야지. 어디 1군부터 날로 먹으려고 하느냐?”

“아, 그런가?”

“요즘 군 생활이 18개월이라고 했었나?”

“젠장. 이제 1개월 좀 더했는데.”

“후딱 전역해서 지종수와 고인수를 놀려라.”

“그것만 보고 있지.”

심도훈과 진유성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훈련병들은 지나가며 계속 인사를 건넸다.

심도훈은 훈련 기간 내내 진유성을 욕했지만, 훈련병들 입장에서는 진유성의 존재가 나쁠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쪽이었다.

유명한 사람이라는 걸 떠나서, 훈련병들에게 꽤 잘해 줬으니까.

PX를 털어서 과자를 나눠 주기도 했는데, 원래는 훈련소에서 누릴 수 없는 호사였다.

다른 조교들이 뛰어와서 이러면 안 된다고 말렸지만, 계급에서 밀린다.

어차피 조교라고 해 봤자, 간부 계통 아래는 전부 현역병들이다.

그럼 진유성은?

서류상이긴 하지만 SG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진유성의 계급은 장성급이다.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튼 난 이제 가야 하니, 친구들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전해 주도록 하마.”

“부대 가서 폰 쓰면 되는데 무슨 말을 전해.”

“그럼 되었다.”

“야, 다른 부탁은 안 되냐?”

“부탁?”

“빨리 가서 고인수도 괴롭혀 줘. 얼마 전에 종수는 괴롭혔잖아.”

“무슨 소리냐. 난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가만 보면 너, 나랑 종수만 괴롭혀. 고인수는 놔둔다니까?”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인수에게도 관심을 가져 줘. 서울에 돌아가자마자. 오케이?”

진유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그런 부탁을 왜 하느냐?”

“억울하잖아. 나만 군대에서 고생하고 있는 게.”

“몹시 좋지 않은 마음가짐이다.”

“그래서? 안 들어줄 거야?”

“군인 부탁이라 어쩔 수가 없군. 들어주겠다.”

*   *   *

진유성, 상소윤, 정새롬, 지종수, 심도훈, 고인수.

대정고 시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뭉쳐 다녔던 6인이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는 그렇게까지 자주 보진 못했다.

여느 고등학교 친구 사이가 그렇듯이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상소윤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파리 유학을, 지종수는 드디어 단역을 벗어난 연기자의 길을, 심도훈은 게임 산업에 있다가 군대로.

진유성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사실 여섯 명 중 제대로 대학 생활을 하는 이는 정새롬과 고인수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캠퍼스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정새롬이 자신의 집안을 숨긴 채 대중교통으로 등하교를 한다면, 고인수는 최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다녔다.

정새롬을 비롯한 친구들은 꼴불견이라고 혀를 찼지만, 고인수는 대학 생활이 재밌었다.

매일마다 소개팅과 미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오늘도 그랬다.

하지만 오늘은 좀 특별했다.

“그래요? 대정고 앞에 많이 지나갔었는데, 몰랐네요.”

소개팅 상대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그동안은 반쯤 재미 삼아서 했다면 이번에는 가슴이 뛴다.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같은 학번.

캠퍼스 커플이 되어서 교정을 활보하다가 결혼을 하고 손자까지 보는 상상을 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고등학교 때 멋모르고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지금이 첫사랑이다.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잠시의 침묵이 흘렀을 때, 고인수는 마음을 정했다.

조금 진지하게 애프터 신청을 해야겠다고.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인수분해!

혜광심어에 육합전성을 섞은 진유성의 전음이 고인수의 뇌리를 뒤흔들었고.

후드드득.

어느새 고인수의 옷은 단추가 다 풀어져,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티셔츠 입었잖아!’

정신없는 와중에도 고인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진유성이 인과율 안으로 복귀하는 순간, 입고 있던 옷의 단추가 전부 풀어졌던 건 고인수의 트라우마였다.

그 뒤로 고인수는 한여름에도 반드시 티셔츠를 입었다.

심지어 지금은 겨울이다.

이너웨어를 두 벌이나 입었는데!

속살이 보일 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내려 보니, 안에 입은 옷들이 깔끔히 반으로 잘려 있다.

진유성이다.

어디에 있는지 보이진 않지만, 진유성의 짓이 분명했다.

“야! 이 미친놈아!”

고인수가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다가 황급히 옷을 추슬렀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먹고 다녔더니 살이 쪄서…….

“풉.”

소개팅녀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으니까.

고인수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폰을 들어 진유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다.

그사이, 어딘가에 숨어 있던 진유성은 뻘쭘한 표정이 되었다.

분명 심도훈의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고인수를 괴롭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심도훈의 손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아무 것도 모른 채 레스토랑에서 하하호호 웃고 있는 고인수를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단추만이 보였다.

‘단추 달린 옷을 입고 오다니. 고인수가 잘못…….’

제 아무리 간장종지에 자기 합리화의 화신인 진유성조차 차마 진지하게 고인수의 단추 탓은 못하겠다.

이건…….

그래, 심도훈의 잘못이다.

[전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심도훈이 사회에 남긴 마지막 부탁이었다.]

진유성의 문자를 본 고인수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그날, 고인수의 세상은 무너졌다.

*   *   *

상림이 대표로 있는 LF건설은 최근 사업을 확장하며 엄청난 호황을 누리는 중이었다.

이젠 LF건설이 아니라, LF그룹이다.

LF그룹이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진유성이 대표로 있는 CMSG에 한 발 걸쳤기 때문.

CMSG가 엄청난 고성장을 기록 중이니까.

그럼 CMSG는 왜 잘나가냐?

진유성 덕분이었다.

물론 진유성이 열심히 일을 했다던가, 사업을 위해 고민한 적은 없었다.

“교주님, 얼마 전에 입찰한 면세점에서 인허가 문제로…….”

“해 줘.”

“…….”

“해! 줘!”

귀찮은 일이 생기면 전부 상림에게 떠넘기기만 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성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업체들은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커지면 정치 논리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데, 정치인이란 놈들이 참 그렇다.

사업가가 정치인과 손을 잡아야 하는 건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돈은 알아서 벌 테니까, 방해만 하지 말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진유성의 존재는 치트키였다.

CMSG가 야당이 좋은 일을 해서 돈을 벌든, 여당이 좋은 일을 해서 돈을 벌든, 정치권은 터치하지 못한다.

기업 윤리와 상법 안에서 적법하게 돈을 벌면 누구도 뭐라고 못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유성에게 짬 처리를 당해 쉬지 않고 일을 하던 상림은 진유성의 허락을 받고 LF건설과 CMSG의 지분을 교환했다.

그렇게 LF그룹이 탄생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상림은 현대 사회의 완벽한 성공 신화 스토리를 완성했다.

공사판의 일용직 잡부로 시작해(물론 중원에서 가져온 귀물들이 있었지만), 한 그룹의 총수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단한 총수님은…….

“춥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 전, 지종수와 수작을 부리다가 진유성에게 복수를 당했다.

대머리 고자로 만들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진유성을 말리기 위해서 머리를 희생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내공을 되찾아 빌어먹을 자연 탈모를 피했더니, 진유성 때문에 자꾸 인공 빡빡이가 된다.

“이 교주 놈은…….”

딱!

“언제 오셨어요? 님이라고 하려다가 날이 추워서 모음이 샜는데, 혹시 오해하신 건 아니죠?”

딱!

“송구합니다. 근데 무슨 일이세요?”

“오늘이 지종수의 영화 VIP 시사회더구나. 입장권을 내놔라.”

“아니, 그런 사소한 건 아무나 붙잡…… 으면 안 되죠. 교주님이 직접 가실 건데.”

머리를 부여잡은 상림이 얼른 비서를 시켜서 최대한 빠르게 시사회 티켓을 구해 왔다.

웬일로 지종수한테 복수를 안 하나 했다.

저 교주 놈은 다 계획이 있었던 거다.

시사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진유성은 티켓을 받자마자 바로 회사를 떠났다.

회사 창문으로 진유성이 멀어지는 걸 확인하던 상림은 문득 스스로가 불쌍해졌다.

대체 저 미친 교주 놈은 언제 철이 들 것이며, 자신은 언제까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거리가 멀어도 욕 한 마디 못하는 자신이 처량했다.

지금의 진유성은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라서, 예전에는 들리지 않았을 거리도 곧잘 듣는 걸 확인했다.

결국 상림은 까슬까슬한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유사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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