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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6화>
* * *
진유성이 육군 훈련소의 조교가 된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심심해서.
그 시작은 대한민국 정부와 DDP 인근의 인과율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상림의 전화를 받으면서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공화시멘트가 팀 운영을 같이하자고 했다고?”
-예. 심도훈 그 친구, 내일 군대를 가야 한다더라고요.
“엥? 1부로 승격했는데?”
-입영 일자를 받아 놓고 적법하게 연기를 안 했거든요. 뭐, 심 회장이 손을 쓰면 미룰 수 있겠지만 요즘 공화 플러스를 보는 눈이 있으니까.
“그래? 그렇단 말이지.”
-예. 어떻게 할까요? 저쪽에서는 공화라는 팀명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스폰서십 비용을…….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일단 알겠다고만 해. 선수들이 제법 괜찮았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협상은 언제 하시게요?
“일단 다른 게 더 급하니까 시간만 벌어 놔.”
그렇게 진유성은 대한민국 정부와 협상(이라고 읽고 공갈이라고 쓰는)을 했다.
이제 대한민국 정부도 진유성이란 사람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진유성은 의외로 국가 운영에 있어 굉장한 배려를 해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벼운 일’이라는 판단이 들면, 쓸데없는 일을 벌이기 좋아한다.
“그러니까, 육군 훈련소 조교를 잠깐만 하고 싶으시다는 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만을 위한 조교다. 정부가 늘 외치는 재별 개혁 있지 않느냐. 그걸 해 주겠다는 거다. 공화시멘트의 자제에게.”
“아니, 그 개혁이 그런 게 아닐 텐데…….”
“어허.”
결과적으로 진유성의 요청은 통과되었다.
다만 한 명을 전담으로 조교하다가 지루해지면 쓱 그만둬 버린다는 건 기각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이 당나라 부대도 아니고, 그런 일은 허용될 수 없다.
그 대신 진유성은 SG에서 대(對)각성자 훈련을 위해 차출한 임시 파견군이 되었다.
서류상이긴 하지만, 진유성은 아놀드 벡이 이끄는 SG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진유성이 심도훈 앞에 빨간 모자를 쓰고 나타나기까지는 이런 복잡한 일들이 있었다.
그래도 진유성은 전혀 복잡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고?
“34번 훈련병. 열외.”
“……열외!”
“대답이 늦다! 열외로 이행시 실시!”
“열 받습니다! 외 이런 시련이!”
“34번 훈련병. 엎드려.”
“엎드려!”
“하나에 맞춤법을, 둘에 지키자.”
재밌으니까.
“화생방 따위에 지는 게 무슨 군인이냐! 멀쩡한 날 봐라! 이깟 것들에 지고 싶단 말이냐!”
“조교님은 미세 먼지도 거르는 이상한 마스크를…….”
“34번 훈련병. 방독면 벗고 스승의 은혜 완창. 실시.”
“제, 제발.”
“제발은 반말이다.”
아주, 아주 재밌으니까.
쉴 틈 없이 갈구다 보니 심도훈의 몸이 좋아지는 게 보인다.
아마 심도훈도 내심 자신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것이었다.
“34번 훈련병. 하강 전에 가장 고마운 사람의 이름을 크게 외친다.”
“지, 진유성!”
“엎드려. 아부는 사절이다.”
그러다보니 옛날 생각이 나기도 했다.
진유성도 멸마대에 처음 들어갔을 때, 딱 심도훈 같았다.
무공을 배운 적이 없어서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했고, 노예상에게 오래 붙잡혀 있다 보니 체력도 나빴다.
진유성이 누구보다 우위에 있는 건 영민한 두뇌밖에 없었다.
그래서 원래 멸마대주로 내정된 건 신주청이었다.
그러다가 상림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고, 2년간의 기초 훈련이 끝날 때쯤 진유성이 두각을 드러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진유성이 둘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그래, 아마도 깃발 뺏기 때부터였던 것 같다.
* * *
봄볕이 따사롭게 쏘이는 어느 날.
30대인지, 40대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알아보기 힘든 한 남자가 정도맹의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은 그였지만, 한 시진이 채 지나기 전에 정도맹주와 독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일월신교주, 훗날 마교주라고 불리는 지도자였다.
마교주와 정도맹주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교(일월신교)의 세가 천하를 뒤덮었고, 정도맹의 소속 문파들은 봉문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마교는 직접적으로 정도맹을 건드리지 않았으나, 마교와 동맹을 맺은 문파들에게 정도맹은 눈엣가시였다.
혹시 언제 자신을 찌를지 모르는 비수였고.
그렇기에 그들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빈번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 마교와 정도맹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일 즈음, 정도맹은 은밀히 오성이 뛰어난 300명의 아이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멸마대로 지었다.
추후 세상에 알려지기론 멸마대는 마교주의 목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였다.
하지만 무공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을 모아서 마교주의 목을 베겠다는 것은 어불성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잔혹하면서도 현실적인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계획이 어쨌다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멸마대는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를 베고, 스스로까지 베어 버린 다음에 버려질 칼이었으니까.
그런 시대였다.
* * *
“신주청, 상림, 진유성. 너희 셋이 최종 훈련의 조장이다.”
멸마대에 이름은 없다.
서로 간에 번호가 아닌 이름을 부르다가 발각되면 교관들이 즉결 처형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이들이 있다면, 조장들이었다.
진유성은 어렸지만, 냉철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멸마대의 운영 방식이 냉정하지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존감을 가진 인간은 쉽게 복종하지 못한다.
그 자존감을 빼앗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름을 지우는 일이다.
진유성은 지난 2년 간, 멸마대원들이 사회적 소통 방식을 잊어버리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그들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명령에 따른다.
그러면서도 이름을 갖고 싶어서 조장이 되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렇기 때문에 조장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굳이 교관들이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아도, 조장들은 무려 ‘이름’을 가진 이들이니까.
“조장 셋은 갑, 을, 병의 조를 맡는다. 또한 각 조에는 66명의 조원이 소속된다.”
시작은 300명이었지만, 지난 2년 간 100명 가까운 사망자가 있었다.
병에 걸려 죽은 이들이 절반, 교관의 손에 죽은 이들이 다시 절반.
나머지는 훈련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멸마곡 밖으로 이송된 이들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이송이라는 단어가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멸마대원으로서 발설하면 안 되는 정보들을 지키기 위해 멸마곡에 남았을 것이었다.
한 줌의 흙이 되어서.
진유성이 궁금한 것은 정말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자신뿐인지였다.
이름을 얻지 못한 멸마대원들은 정말 아무런 의문도 품고 있지 않을까?
‘신주청, 상림.’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저 둘은 어떨까.
지난 반년 동안 조장은 언제나 그들 셋이었지만, 딱히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신주청과 상림은 종종 소통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들은 진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300명 중 300등이었을 정도로 나약했던 진유성이 치고 올라오는 게 인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 교관이 최종 훈련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갑․을․병 각 조에는 132개의 깃발이 주어진다. 조장을 제외하면 인당 2개씩이지.”
자동으로 교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보가 머릿속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3명의 조장을 제외한 멸마대원은 198명.
인당 2개씩의 깃발.
깃발의 총 수는 396개.
그리고…….
“최종일에 3개의 깃발을 가지고 있는 이들만 생존한다.”
“……!”
그 동안의 엄한 훈련 때문에 그 누구도 감정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
저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3개의 깃발을 쥘 수 있는 132명만 생존할 수 있다.
66명은 반드시 죽는다.
최악의 경우, 훨씬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깃발을 1개 혹은 2개를 쥐고 있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3개를 쥔 이들의 수가 줄어드니까.
그렇다면 깃발이 하나뿐인 이들은 두 개인 이들에게 양보해야 할까?
이 훈련의 본질은 이기심인가, 이타심인가.
그도 아니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뺏을 수 있는 잔혹함인가.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한다. 휴식 기간 중 타 조와의 경쟁은 불허한다. 알겠나? 조장들?”
“명심하겠습니다!”
“휴식 후, 각 조가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면 깃발 쟁탈전이 시작된다. 쟁탈 기간은 칠일이다.”
“…….”
“규칙은 없다. 기습, 매복, 하독, 각자도생, 연합. 모든 게 허용된다. 멸마곡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뭐든지 가능하다.”
진유성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무공의 수위로 따지자면 그는 신주청과 상림을 넘어서지 못했다.
게다가 신주청과 상림은 알게 모르게 연합을 형성할 때가 많았다.
만약 두 사람이 연합을 형성한다면, 희생되는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조원들이 될 것이었다.
“이게 최종 관문이다. 여기서 살아남는 이들은 정식으로 멸마대원이 될 수 있다.”
교관의 말에 문득 진유성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 * *
진유성은 왜 이번 훈련에 이틀간의 휴식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조장의 통솔력을 보기 위해서다.
다른 조의 깃발을 빼앗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같은 조의 깃발을 빼앗는 것이다.
교관은 분명 휴식 기간 중 ‘타 조’와의 경쟁을 불허한다고 했지, 같은 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니 이틀 안에 깃발 하나를 훔쳐서 멸마곡에 숨어버리면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원 수가 줄어든 조의 힘은 약해진다.
조장은 그것을 통솔해야 한다.
진유성의 처방은 간단했다.
“깃발을 전부 모아 와라. 이틀 동안 내가 보관한다.”
“하지만 조장님. 깃발은…….”
“마지막 휴식이 될 수 있는 이틀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만들 물건이지.”
“…….”
“옆 사람이 네 깃발을 훔쳐 간다는 불안감에 벌벌 떨다가는 삼일 뒤 다른 조에게 뺏길 거다. 내게 생각이 있으니, 깃발을 맡기고 최대한 체력을 회복해라.”
깃발을 모두 회수한 진유성은 그것들을 꽁꽁 숨긴 채 가짜 깃발을 만들 궁리를 시작했다.
훈련에 쓰일 깃발을 외부에서 사 왔을 리 없다.
아마 이 깃발은 멸마곡 내부에서 자체 제작된 것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깃대는 교관동 뒤편의 대나무를 찍어서 만든 것이었고, 기장은 훈련복을 만드는 천이었다.
기장의 색이 좀 다르긴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진유성은 그렇게 낮에는 새우잠을 자고, 밤에 몰래 깃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휴식일을 보내고 있는데, 마지막 날 밤, 신주청과 상림이 그를 찾아왔다.
“우린 연합할 거다.”
두 사람이 툭 꺼낸 첫 마디에 진유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말해 주러 온 거냐?”
“그래.”
“왜? 말을 하면 연합하는 게 덜 쪽팔릴 거 같나?”
“그럴 리가. 66명의, 어쩌면 그 이상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우린 우리의 조원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넌 너의 조원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라.”
“불공평함 속에서 공평함을 찾는군.”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속 시원하게 말해. 진유성.”
상림의 말에 진유성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죽이진 말자.”
“도검을 쓰지 말잔 소리냐?”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그것도 괜찮네.”
“하지만 교관들이…….”
“연합이 되는데 협상이 불가능할 이유가 뭐지?”
“…….”
상림이 만들어 낸 잠깐의 침묵 뒤로 신주청이 물었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건?”
“적어도 내 손으로 동료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실낱같은 위안.”
“…….”
“그런 것에라도 기대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진유성을 한참 쳐다보던 신주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검은 쓰지 않겠다.”
“신 형. 정말 괜찮은 거요?”
“그래.”
결국 상림도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미소를 짓던 진유성이 방 안에 숨겨 놓았던 깃발을 꺼냈다.
그들이 배급받았던 깃발은 붉은색이었는데, 진유성이 꺼낸 것은 황토색이다.
“붉은색은 눈에 잘 띄어서 전부 진흙으로 염색하고 있다. 우린 싸우지 않고 숨을 거다.”
“왜 알려 주는 거지?”
“불살(不殺)에 동의해 준 대가.”
세 사람은 각자의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은 금방 밝았다.
깃발 쟁탈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