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1화 (316/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외전 1화>

Chapter 1. 3년 후, 스물둘

진유성은 지금의 세상이 수정된 인과율로 개편되었단 걸 인지하고 있었다.

이 세상은 본래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상소윤이 관측해 준 덕분에 인과율이 수정되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일이었다.

단 한 명을 위해 전 세계 모든 인간들의 인과율을 수정한다?

배보다 배꼽이 훨씬 큰 일이었다.

세계는 그대로 두고 진유성이란 존재를 배제하는 게 훨씬 쉬운 일이 아닌가.

진유성이 가진 어마어마한 힘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성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그간의 나는 기록을 적는 자였을 뿐, 단 한 번도 읽는 자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처음으로 기대하노라. 또한 희망하노라.]

[내가 읽을 수 없는 페이지 너머. 거기에 그대의 행복이 기록되기를…….]

[그렇게, 한 명의 독자로서 기대하겠노라.]

아카샤의 배려와.

“혹시 내 삶은 모두 그대가 정한 운명대로 흘러갔나?”

[그럴 리가. 내가 정한 운명은 딱 하나뿐이었단다.]

“그게 뭐지?”

[오토바이 한 대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

전지전능했던 존재의 의지 덕분이었다.

그래서 진유성은 책임감을 느꼈다.

자신만 없었다면 훨씬 부드럽게 돌아갔을 인과율의 역사에 어긋난 톱니바퀴들이 생겨났으니까.

분명, 이로 인한 사이드 이펙트들이 한동안 세상을 뒤흔들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소멸될 줄 알았던 게이트 사태가 점차 거세지거나, 남극에 중원으로 건너갈 수 있는 통로가 생겨난 것처럼.

진유성은 아무도 모르게 이런 일들을 처리하느라 꽤 바빴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세상이 어느 정도 안정화에 접어들었다고 생각될 즈음.

충격적인 소식이 진유성을 강타했다.

“뭐라고? 그게 진실이냐?”

“어. 왜?”

“……분명하군. 이 세상은 망가졌다.”

“야, 진유성.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네가 그렇게 말하면 농담처럼 안 들린다니까?”

“농담이 아니다, 상소윤! 이건 인과율이 개박살 난 게 아니라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

“아무래도 난 가 봐야겠다. 일분일초가 급하군.”

진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오랜만에 모였던 상소윤, 정새롬, 심도훈, 고인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종수한테 여자 친구가 생긴 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

“그러게? 예쁘던데.”

심도훈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그들도 지종수가 데이트가 있어서 못 온다는 이야기를 방금 들었고, 여자 친구가 누군지 아직 몰랐다.

“너 알아? 종수 여친?”

“어, 니들도 알걸?”

“누군데?”

배우의 길에 뛰어들고, 3년 만에 처음으로 상업 영화 출연 기회를 잡은 지종수.

조연이긴 하지만, 나름 의미 있는 역할이라는 이야기도 귀가 닳도록 들었다.

지종수의 여자 친구는, 그 영화의 여주인공이었다.

엄청 유명하고, 예쁜!

“…….”

“…….”

잠깐의 침묵 끝에 정새롬이 맥주를 들이키며 결론을 내렸다.

“개박살났네. 인과율.”

*   *   *

“함정이다. 지종수.”

“뭐야, 진유성. 언제 왔냐?”

“방금 왔도다.”

“남의 집에 올 때는 전화를 하거나, 하다못해 인터폰을 울려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냐?”

“전혀 들지 않는다.”

미칠 듯한 당당함에 지종수가 할 말을 잃는 사이,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낸 진유성이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야, 침대에 흘리면 죽인다.”

“어허, 그 짧은 말을 하면서도 세 가지나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니. 과연 지종수로구나.”

“오류?”

“첫째,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인정?”

“……인정.”

“둘째. 내 체술이 극의에 달해 있는데 이깟 아이스크림을 흘리겠느냐?”

“……그것도 그러네.”

지종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두 가지 오류는 인정인데, 여기서 오류가 더 있다고?

“세 번째는 뭔데? 더 없는데?”

“얼굴이 오류다.”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진유성과 대화하는 그 짧은 순간에 지쳐 버린 지종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근데 왜 왔어? 뭐가 함정인데?”

“너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 절대 순수한 의도일 리가 없다. 전부 함정이다.”

이게 진유성이 내린 결론이었다.

만약 순수한 의도라면 인과율이 개박살 난 것이지만, 세상이 생각보다 멀쩡하다.

그렇다면 여자 쪽에 음흉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아, 꺼져. 너 또 저번처럼 난리 피우려고 그러지?”

“저번?”

“……설마 잊어버렸냐?”

“내가 뭘 했던가?”

진유성의 멍청한 표정을 본 지종수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래서 가해자는 모르고, 피해자만 괴로워한다는 거다.

지종수는 스무 살 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소윤에 대한 오랜 짝사랑을 끝내고 방황하던 그에게 찾아온 그녀를.

그건 분명 썸이었다.

놔뒀다면 사랑으로 발전했을.

하지만 눈앞의 진유성이 전부 망쳐 버렸다.

불순한 마음을 품은 게 틀림없다면서 썸녀를 찾아가 흰 봉투를 건넨 것이었다.

‘내 아들과 헤어지게.’라면서 재벌가 사모님들이 건네는 그거.

진짜 어이없는 건, 두 사람이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화 몇 번 주고받다가 데이트 딱 한 번 했다.

근데 거기다 대고 돈봉투를 건네?

이건 망해 버리라고 고사를 지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썸녀는 봉투를 받지는 않았지만 이후 묘하게 어색해져서 관계가 끝나 버렸다.

그리고 지종수는 당시 진유성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좋은 여자 같았는데, 역시 너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떠나 버렸구나.”

“내면을 닦아라, 지종수. 어차피 외면은 망했으니.”

지종수는 진유성에게 피의 복수를 다짐했지만, 그 이후 진유성은 일 년 가까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듣자 하니 다른 차원에 가 있었다는데, 알게 뭐란 말인가.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흘러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날의 분노가 다시 타오른다.

“돈봉투 건네서 내 썸을 망쳐 버렸잖아!”

“내가? 혹시 인과율로 개편되기 이전의 시간을 말하는……. 아니, 아니지. 그때는 내가 없는 세상이니까 그럴 수가 없는데?”

“……정말 기억이 안 난다고? 돈 봉투를 건네면서, ‘내 친구와 헤어지게’를 시전해 놓고선?”

“말도 안 된다!”

벌떡 일어나는 진유성을 보며 지종수는 이어질 말이 변명일 줄 알았다.

내가 그런 나쁜 짓을 했을 리 없다 같은.

하지만 아니었다.

“그런 즐거운 이벤트가 있었다면 잊어버렸을……! 아! 기억났다!”

진유성이 뒤늦게 박수를 쳤다.

돈봉투를 건네고 며칠 뒤, 남극과 중원을 잇는 통로가 나타나는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까먹고 있었다.

지종수는 그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기뻐하는 진유성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복수하겠어.’

진유성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지종수는 반(反)진유성 연합군의 수장이었다.

물론 고등학교 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연합군의 작전은 시도하는 족족 실패했고, 거의 대부분 반격당해서 비참한 꼴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진유성에 대해서 잘 몰랐다.

낚싯대에 장난을 쳐도, 내공으로 참다랑어(참치)를 낚아버릴 수 있는 괴물인지 누가 알았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종수는 진유성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었고, 그 스스로도 성장했다.

연기 판에 진지하게 몸을 담으면서 연기력의 측면에서도 큰 발전을 거두었다.

그러니 진유성에게 복수할 자신이 있다!

지종수는 아주 오랜만에 연합군의 작전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결심이 선 지종수가 재빨리 연기 모드에 돌입했다.

“아, 그래 뭐. 그건 다 지난 일인데…….”

지종수가 어딘지 우물쭈물거리자,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냐?”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해. 순수한 의도가 맞는지 좀 고민이 돼서…….”

“고민이라?”

“난 말한 적이 없는데, 우리 집안에 대해서 알고 있더라고.”

“호오. 네가 부잣집 아들인 걸 따로 조사한 것 같다는 말이냐?”

“아마도.”

거짓말이다.

애초에 지종수가 여자 친구를 만났던 것 자체가 아버지 기업의 후원 행사에서였으니까.

그녀가 촬영장에서 지종수를 알아보고 넌지시 말을 건 게 그들의 시작이었다.

“흐음. 불순한 의도가 있을 가능성을 느꼈다는 것이군. 그래, 내가 뭘 해 주면 되겠느냐?”

“네가 나보다 부자잖아?”

“그렇지.”

“힘도 쎄잖아?”

“단순히 쎄다는 표현은 몹시 부족하다. 핵무기와 나뭇가지 정도의 차이? 아니, 이것도 부족하군. 소행성 충돌과 하품 정도의 에너지 차이라고 해 두지.”

“아니, 누가 분석해 달랬어?”

“T라서 어쩔 수가 없다.”

“……티발.”

“아무튼 그래서 뭐? 내가 더 잘났는데?”

“게다가 네가 나보다 유명하잖아?”

“그렇긴 하지. 그 부분은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진유성 정도의 존재가 인과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상소윤 한 명의 관측으로는 부족했다.

물론 상소윤의 관측이 물꼬를 텄고, 가장 중요한 관측이긴 했으나, 분명 부족했다.

그래서 전 세계인들이 진유성의 행적을 알도록 세계가 개편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우연을 가장해서 접근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순수한 의도인지.”

“흠, 모든 조건에서 내가 너보다 나은 사람이니 불순한 의도라면 내 유혹에 넘어올 것이라는 말이냐?”

“모든 조건까지는…….”

“아니, 결단코 모든 조건이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상소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지종수가 멈칫했다.

사실 지종수의 계획은 여자 친구와 짜고 진유성의 추파(?)를 녹화한 다음에 상소윤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어차피 상소윤에게도 전부 거짓이라는 걸 알려 줄 것이지만, 한동안 바가지를 긁을 수 있을 거다.

옆에서 자신이 깐죽거릴 수도 있고.

하지만 진유성의 말처럼 예의가 아닌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별수 없이 차선책을 선택해야겠다.

“내가 소윤이 허락을 받아 올게. 아니, 같이 받자.”

“같이 받자고?”

“그래. 지금 전화한다?”

지종수는 곧장 상소윤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고는 허락을 받았다.

다만 상소윤은 지종수의 여자 친구에게 예의가 아닌지를 걱정했지만, 그 부분은 괜찮았다.

어차피 미리 이야기를 할 거고…….

‘걔도 정상인은 아니니까.’

충분히 재밌어할 것이다.

결국 진유성도 상소윤의 허락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유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종수.”

“왜?”

“내 눈을 봐라.”

“왜? 네 눈을 바라보면 행복해지고 건강해져?”

“반쪽짜리 공인이지만,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은 삼가라.”

어이가 없어진 지종수가 진유성의 눈을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쿵-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깊은 무저갱과 같은 심연에 빠져서 신체의 통제가 사라지고, 아득한 막막함이 엄습한다.

“네가 지금까지 한 말에 거짓말은 없느냐?”

진유성은 지금 지종수를 의심하고 있었다.

평소에 알던 지종수를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순순히 비난을 수긍했기 때문이었다.

지종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서 자신의 모든 계획을 실토할 뻔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배우의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그 심연 속에서 입을 열었다.

“거짓은…… 없다.”

그 순간, 씻은 듯이 기운이 사라졌고 진유성은 의심을 거두었다.

물론 그가 진짜 지종수의 상단전을 쥐어짠 건 아니다.

그랬다면 가장 깊은 비밀까지 술술 불게 만들 수 있었지만, 백치가 될 위험성이 있다.

진유성은 단지 아주 미약하게 정신적 압박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미약한 압박도 대부분의 일반인은 견뎌 내지 못한다.

아주 정신력이 강한 이들이 아니라면.

진유성이 알고 있는 지종수는 정신력이 강하기는커녕, 풍선 인형처럼 나풀거리는 놈이다.

“그렇군. 계획 일정이 정해지면 연락해라.”

그렇게 진유성이 사라지고, 지종수는 묘한 고양감에 취했다.

방금 그 연기.

자신이 평생 해 온 연기 중 최고였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지?’

지종수가 후다닥 거울 앞에 섰다.

진유성도 모르고, 지종수도 몰랐지만, 이날의 경험은 지종수가 연기로 대성을 이루게 된 기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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