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12화>
* * *
진유성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상소윤은 어느새 높은 산의 봉우리에 있었다.
하지만 상소윤은 산의 풍경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분명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소리를 질렀는데 건물이 흔들리다니?
건물이 지진 같은 외부 충격에 흔들린 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다.
말로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가 튀어나가서 건물을 흔든 느낌이었다.
‘설마 내가 무공 고수가 된 건가?’
하지만 예전에 진유성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그럴 듯한 고수가 되려면 30년은 걸릴 거라고 했었다.
며칠 만에 무공의 고수가 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모든 답은 진유성에게 있었다.
건물이 흔들릴 때 전혀 당황하지 않는 표정만 봐도 그러했다.
“야…….”
상소윤이 입을 여는데, 진유성이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소윤아.”
“응.”
“네가 가진 궁금증에 대한 답은 모든 이야기의 끝에서 해 줄게.”
“…….”
“일단은 주변을 한번 봐라.”
“주변……?”
그제야 상소윤이 주변 광경을 살폈다.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으나, 의식하니 산에서 태어나서 처음 겪는 웅혼함이 느껴진다.
영험한 산이었다.
“여기 어디야?”
“장백산, 그러니까 백두산이다.”
“여기가 백두산이라고?”
“그래. 지구의 백두산을 가 본 적은 없으나, 아마 지형 자체는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상소윤이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속초의 자연 생태 공원에도 때 묻지 않은 자연이 보존되어 있는데, 여기와 비교하자면 뒷동산밖에 되지 않는 느낌이다.
“나는 이곳에서 증오와 분노를 키웠고, 두려움과 공포를 배웠다.”
상소윤도 알고 있다.
진유성이 백두산에서 부모님을 죽인 무신들에게 복수를 다짐했다는 걸.
“또한 아득히 닥쳐 오는 절망을 체감했다.”
홀몸으로 오른 백두산에서 진유성이 살아 나갈 확률은 터럭처럼 적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백두산에 오른 것은 이것이 유일한 생로이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은 몸은 덜 고되나 100개의 사로(死路)가 있는 곳보다는, 몸은 고되나 99개의 사로와 1개의 생로(生路)가 있는 곳을 선택했다.
“하지만, 희망을 배웠다.”
그리고 생로를 걸어서 살아남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노복들의 도움으로 명나라에 편안하게 도착했다면, 난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백두산에 올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아파하고, 신음하던 그 시간이 진유성을 살게 했다.
문득 상소윤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리고 어린 진유성이 고통받고 신음하는 모습이 환상처럼 보인다.
절망 뒤에 희미하게 아른 거리는 희망을 쫓는 모습도 보인다.
진유성이 손을 휘둘렀다.
어느새 그들은 커다란 궁 안에 있었다.
천신궁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내부의 모습과 궁인들의 복식이 다르다.
이곳은 고려의 궁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궁궐의 한복판에 서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무관심 속에서 진유성이 말했다.
“이곳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웠다.”
상소윤은 어린 진유성을 사랑해 주는 그의 부모님과 형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배신도 배웠다.”
고려 무신들의 역성혁명이 닥쳐오는 순간, 진유성의 배신감이 느껴진다.
‘모든 왕족을 절대 놓치지 마라!’라며 진격하는 이들 중에는 평소 진유성이 좋아하던 이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먼 훗날에는 그런 생각도 했다. 과연 나의 부모님이 흠결 없는 지도자였을까.”
진유성은 대명제국의 꼭대기에 선 뒤 복수를 포기했다.
자신이 복수를 하는 순간, 명나라가 고려를 짓밟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어린 나이에 알 수 없었던 당시 고려의 상황들과 역모의 행동 동기가.
그래서 고려에 대한 정보를 모았고, 자료를 모았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역모가 옳았을 수도, 옳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명확한 흑백은 없다.
한쪽에서 보면 흑이지만, 반대쪽에서 보면 백일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공정함을 배웠다.”
그 뒤로 상소윤은 진유성의 과거의 장소들로 끊임없이 이동했다.
멸마대의 훈련장도 있었고, 생존대의 출발점도 있었다.
노예상에게 붙잡혀 있던 곳.
처음 살인을 저지른 곳.
불행 속에서 행복을 느꼈거나, 행복 속에서 불행을 느꼈던 곳.
그 모든 곳에서.
상소윤은 진유성에게 공감했다.
그가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진유성에게 공감할수록 상소윤은 온몸이 들끓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온몸이 뜨겁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기분과 비슷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버려진 화전촌에 도착했다.
산에 불을 질러 농사를 짓는 화전촌의 특성상, 지력(地力)이 쇠하면 화전민들은 그 장소를 떠난다.
긴 세월이 흘러 지력이 회복되면 또 다른 화전민들이 들어서고.
진유성이 도착한 화전촌은 현재 버려진 상태였다.
상소윤은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진유성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진유성이 화전민 모녀를 만났고, 그들의 죽음을 목격했고, 고결함을 품었다는 걸.
또한…….
자신이 그들 중 한 명이었다는 걸.
본디 고결함은 품기는 어렵고, 변질되기는 쉬운 법이다.
그러나 진유성은 그 고결함을 아주 오랫동안 변질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고결해지고, 더욱 완전무결해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진유성이 연민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소윤은 화전촌에서 진유성의 연민을 느꼈다.
연민은 값싼 동정이 되곤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더해지면 그것은 아주 값비싼 보석이 된다.
행동.
진유성은 연민을 품기만 하지 않았고 행동으로 옮겼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고결함은 조금도 쇠하지 않은 것이었다.
상소윤은 비로소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자신의 관측으로 진유성이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그것은 진유성의 시작점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었다.
진유성이 눈물을 흘리는 상소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어찌하여 궁이 흔들렸는지 궁금하느냐?”
상소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알겠다.
진유성과 상소윤은 존재의 인과율을 나눠 가졌다.
진유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관측해야 한다.
그러니 상소윤은 진유성의 힘에 영향을 받아 변화 중이었다.
이는 간단한 삼단 논리다.
상소윤은 진유성의 존재를 관측해 유지시킨다.
진유성은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상소윤도 진유성이 죽기 전까지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러한 일이 가능해진 것은…….
“입멸공은 인과를 다루는 힘이고, 그 힘은 강한 소망을 가질수록 강한 힘으로 발현될 수밖에 없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도 여기서 생긴 말이다.
“그런 내가 지구에서 가장 강하게 품었던 인과율이 무엇인 것 같느냐?”
진유성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DDP에서, 널 찾을 때.”
* * *
인과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다.
인과율은 그렇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자 한다.
입멸공(入滅功).
최종오의(最終奧義).
생(生).
사(死).
입(入).
멸(滅).
세상을 재단하는 네 가지의 힘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
이것은 진유성도 처음으로 해 보는 일이었다.
드드드드.
입멸검이 진동하며, 온몸을 가득 채운 기운들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이율배반적이며 상이한 네 개의 법칙이 충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힘을 줄이기는커녕, 더욱 내뻗었다.
이것은 진유성이란 사람이 가진 모든 가능성이었다.
살아갈 수 있으며, 죽을 수 있고, 존재할 수 있으며, 소멸할 수 있다.
이것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필멸이라는 수식어를 달기도 한다.
진유성은 검을 휘둘렀다.
상소윤의 얼굴을 떠올렸다.
상소윤의 옆에 존재했었던 인과율에 끼어들기 위해서.
만약 상소윤이 이미 죽었다면 진유성이 간섭한 인과율이 칼이 되어서 그를 벨 것이다.
그것은 진유성조차 감당하기 힘든 힘일 것이고.
그러나 진유성은 두려움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일렁이는 푸른색 공간이 진유성을 삼켰다.
* * *
상소윤의 관측으로 지구에 돌아오고, 세상이 인과율을 기준으로 재구성되었을 때.
진유성은 알게 되었다.
자신이 가장 강하게 품었던 인과율 역시 실현되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심지어 그 대상이 관측자라면 더더욱.
그러니 상소윤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진유성과 함께 영생(永生)을 살게 된 것이었다.
진유성이 죽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 삶을.
수많은 사람들은 영생을 탐내지만, 진유성은 알고 있다.
영생은 생각보다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이 되었다.
상소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어떻게 하면 상소윤을 정상으로 돌릴 수 있는지.
방법도 찾아냈다.
진유성은 원한다면 그는 상소윤을 보통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지금만 가능하다.
보다 시간이 흘러서 인과율이 완전히 얽혀 버리면 불가능해진다.
그러니 이제 그 결정을 상소윤에게 맡겨 보려고 했다.
상소윤이 평범한 존재로 돌아가겠다면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진유성은 조금 더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상소윤.”
“어?”
“담보를 정했다.”
“담보……?”
“기억이 나지 않는 게냐? 내 분명 책임의 무게를 느끼라고 했을 터인데.”
상소윤이 눈을 크게 떴다.
담보.
생각이 났다.
쇼핑몰을 창업할 때.
* * *
“담보를 걸어라.”
“담보?”
“외숙모가 왜 돈을 아슬아슬하게 빌려줬는지 알고 있으니, 그냥 빌려줄 수는 없다.”
“음…….”
상소윤은 고민했지만, 딱히 걸 만한 것이 없었다.
“없는데.”
“사소한 것도 상관없다. 외숙모는 네가 책임의 무게를 알길 바라는 것이니.”
“아, 그럼 뭐. 네가 제안해 봐.”
“흠…….”
사실 진유성도 딱히 바라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담보는 나중에 잡자. 필요한 게 생기면.”
“야. 담보라는 게 내가 돈을 못 갚을 때 네가 쓸 수 있는 거지?”
“그렇다.”
“그럼 뭐, 그 담보 잡을 필요도 없을걸. 무조건 갚으니까.”
“그게 나을 수도 있겠군. 생각하기 귀찮으니까.”
* * *
상소윤은 진유성에게 돈을 갚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급박한 상황 속에서 잊어버렸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상소윤의 쇼핑몰은 폐업했다.
경영 악화로 폐업을 한 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 많아지면서 불편한 일들이 많아서 폐업했다.
진유성에 대한 관심 옆에는 상림이나 상소윤에 대한 관심도 있었으니까.
나중에 세상이 좀 잠잠해지면 다시 시작할 예정이었다.
어쨌든 상소윤은 진유성에게 돈을 갚지 않았고, 사업을 접었으니 담보를 제공해야 한다.
“기억이 났느냐?”
“담보는 정했어?”
“정했다.”
“뭔데.”
“죽음.”
진유성은 자신의 소망을 말하고 있었다.
죽음을 강탈당한 영생의 삶을 살아 줬으면 좋겠다고.
상소윤이.
엔딩을 잃어버린 삶의 과정을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상소윤이.
진유성과 상소윤의 시선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상소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이냐?”
“그렇다고.”
“한 점의 주저함도 없느냐?”
“채무자가 무슨 면목이 있어서 거부하겠어?”
상소윤이 중얼거렸다.
“거부하고 싶지도 않고.”
진유성이 한 걸음 다가와 상소윤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들은 서로를 영원히 기억해 주기로 약속했었고, 이제 그 약속은 지켜진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니 지금 입술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도 기억될 것이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