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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311화 (311/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11화>

* * *

예전에, 그러니까 대략 80여 년 전쯤.

진유성은 깊은 심마에 빠진 적이 있었다.

심마(心魔)란 마음의 병이다.

지구에서 흔히 말하는 슬럼프나 우울증도 전부 심마의 일종이다.

진유성이 마음의 병을 앓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스스로 인간인지가 헷갈렸다.

중원을 일통하고, 벽을 넘은 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었던 때.

개인의 영달도, 일신의 무예도 모두 극의에 이르렀다고 생각됐을 때.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원하지 않는 모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 때.

딱 이때였다.

물론 진시황 같은 무소불위의 황제들도 진유성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으나, 그들과 진유성은 달랐다.

그들은 불로불사에 집착했지만, 진유성은 집착하지 않았다.

벽을 넘는 순간 느꼈으니까.

아무리 짧아도 이백 년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걸.

그나마 이것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고, 스스로 수명을 늘리길 원한다면 입신지경에 오른 내공으로 수백 년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좀 헷갈렸다.

내가 인간인지, 아니면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괴력난신(怪力亂神)의 무엇인지.

진유성 정도의 무인이 심마에 든다는 것은 꽤 심각한 일이었다.

주화입마라도 들어서 이성을 상실하면 진유성은 단신으로 중원의 수십억 인구를 모두 죽일 수도 있었다.

이런 진유성이 심마에서 빠져나온 계기는 간단했다.

스스로가 인간이든, 혹은 귀신이든…….

인간을 위해 살자.

정체성이 혼란하다고 목적성까지 혼란한 필요는 없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인간을 위해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걸.

그때부터 진유성은 그 스스로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되어도 헷갈리지 않았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이건 좀 그렇군.”

솔직히 이건 좀 그렇다.

진유성은 이제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적인 존재에 가깝다는 걸.

정확히는, 존재가 인과율의 영향을 받게 된 순간부터 인간을 초월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비로소 완벽하게 실감한 느낌?

왜냐하면, 정말로 중원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옆에서 멀미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비틀거리던 상소윤이 입을 열었다.

“뭐야? 여기가 중원이야?”

“그렇다.”

“바다네? 아니 섬인가?”

“지구로 따지자면 하이난이다. 여기서는 해남이라고 부르고.”

“해남……? 이렇게 발음해?”

“비슷하다.”

고대 한자와 비슷한 중원어를 따라 해 보던 상소윤이 뒤늦게 눈을 치켜떴다.

“야! 갑자기 들어가면 어떡해!”

“나도 처음 해 본 거라서 얼마나 길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럼 네가 게이트를 연 거야? 열려 있던 게 아니고?”

“이건 게이트라기보다는 길이다.”

“아무튼.”

“그래, 내가 열었다.”

“어떻게? 원래 중원에 막 이렇게 오갈 수 있었어? 아니지 않아?”

“당연히 아니다.”

진유성은 전 지구가 게이트화가 된 순간부터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가 ‘게이트’란 공간의 권한을 가진 마스터 플레이어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개념이다.

이제 진유성은 지구와 중원이란 두 차원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는 두 차원의 위상을 구분하는 기준이 진유성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이 존재하는 차원.

존재하지 않는 차원.

두 개의 관측이 차원의 위상을 바꿔 버린다.

두 차원이 진유성이 존재한다는 인과율을 기준으로 재정립되면서 말이었다.

결국 스스로를 둘로 나눠서까지 차원의 위상을 지키려던 전지전능한 존재는,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진유성의 설명을 들은 상소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유성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진 존재인지는 알고 있지만, 이건 좀 다른 이야기 아닌가.

두 차원을 오간다는 건.

그러나 상소윤은 상소윤답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차원을 돌아다닐 수 있어도 진유성은 진유성이고, 자신은 자신이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야, 근데 그럼 나는?”

“뭐가 말이냐?”

“나는 어떻게 그 길을 통과한 거야? 네가 옛날에 그랬잖아. 게이트를 왔다 갔다 하는 건 너밖에 안 된다고.”

사실이다.

보통 사람들은 게이트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신체가 붕괴해 버렸으니까.

중원으로 향하는 통로는 게이트는 아니지만, 그 압력 자체는 동일하다.

아니, 압력이 더 강할 것이다.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니까.

그러나 진유성은 대답 대신 웃어 버렸다.

역시 상소윤답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진유성에게 신이 된 거냐고 꼬치꼬치 물어봤을 것인데, 상소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아마 상소윤에게 중요한 것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이니까.

“가자.”

“어디를?”

“천신궁.”

“아니, 관광은 갈 건데. 나는 왜 괜찮냐니까?”

“글쎄.”

누가 봐도 말을 얼버무린 진유성이 손을 내밀었다.

상소윤이 투덜거리다가 그 손을 잡는 순간, 그들은 어느새 해남의 이름 모를 섬에서 사라져 있었다.

잠시 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자금성 앞이었다.

진유성은 당장 천신궁 안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은 자금성의 정문으로 도착했다.

그의 유구한 삶이 담긴 장소를 보고 싶기도 했고, 자금성의 수비 체계에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진유성이 천신궁에 다짜고짜 들어간다면 분명 금위의 중 몇몇은 목이 잘리거나 파면당할 테니까.

그렇게 진유성과 상소윤이 난데없이 나타나자 자금성의 수비대가 혼비백산했다.

“웬 놈이냐!”

“무림인이냐!”

생전 처음 보는 의복을 입은 고수의 등장에 수비대는 당황했지만, 그 반응은 빨랐다.

순식간에 대응진을 펼치며 궁사들이 활시위를 당긴 것이었다.

오히려 당황한 건 상소윤이었다.

그녀는 수비대를 자극시키지 않으려는 것인지, 진유성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야, 이 사람들이 너 몰라?”

“아마 모를 것이다.”

“여기 역사에서는 네가 없는 거야?”

“아니다.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적인 차이가 있지.”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꽤 흘렀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장 자금성의 제 일 차 관문의 수비대들이 펼치고 있는 대응진만 해도 처음 보는 것이다.

황실군의 병법 같은 경우는 아주 오랫동안 보완되고, 수정되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원형이 없어지긴 쉽지 않다.

그러니 대응진의 원형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병법이 개벽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최소 30년이다.

진유성이 천신궁 게이트에 들어간 시점에서부터 30년이 흘렀다면, 자금성의 일원들은 다 물갈이됐다고 봐야했다.

의복이 완전히 다른데, 얼굴을 보고 바로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진유성이 어느 순간부터 황실의 사람들과 인간적인 인연을 맺지 않기도 했고.

“근데 이렇게 막 와도 돼?”

“막 온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본래의 세계보다 진유성이 보다 빠르게 잊혔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신’으로 여겨지는 천마신교주는 유일하지 않으니까.

쿠르르릉!

천둥이 내려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자금성의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그립고도, 반가운 소리였다.

진유성은 멸마대의 보급 무공이었던 삼적보를 삼적천능보로 진화시켰고, 이것은 곧 그의 독문무공이 되었다.

하지만 멸마대의 보급 무공이 삼적보뿐이었던 것도 아니고, 보급 무공을 진화시킨 게 진유성뿐만인 것도 아니다.

뇌운칠보(雷雲七步).

번개가 치기 직전의 구름 같은 일곱 걸음이란 뜻으로, 움직일수록 점점 가속도가 붙는 보법.

사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엄청난 무공은 아니었다.

정에서 동으로 움직이는 묘리는 뛰어나지만, 그 안정성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멸마대원 중에는 이것을 진화시켜서 ‘벽력칠보’로 만든 이가 있었다.

그리고 벽력칠보가 전개될 때면 언제나 천둥이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벽력칠보의 주인공은…….

“정말 교주님이십니까?”

진유성의 눈앞에 서 있는 2대 천마신교주 신주청이었다.

* * *

인과율은 대단한 것 같지만, 때로는 허술하다.

하지만 그 허술함 속에서는 반드시 그러해도 좋을 이유들이 있다.

중원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중원의 역사에서 진유성은 무림을 일통하고, 신주청의 죽음 이후에 천신궁의 게이트를 넘어섰다.

진유성이 사라진 역사에서는 신주청이 진유성의 자리를 대신했다.

인과율의 보정을 받은 최종 역사에서 진유성은 신주청에게 2대 교주를 넘기고 게이트를 넘는다.

신주청은 진유성과 함께 유일하게 이 세 가지 버전의 역사를 전부 기억하고 있는 이였다.

그만큼 신주청의 업(業)이 진유성의 신성과 깊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신주청의 얼굴에는 약간 민망한 기색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지구로 건너와 어떤 일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제 상실의 공간이 사라졌으니 상실된 것은 없지만.

신주청이 민망함을 떨쳐 버리며 진유성과 상소윤에게 직접 차를 건넸다.

“다시는 못 뵈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오신 겁니까?”

“차원 사이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자주 올 수는 없을 듯하지만.”

두 차원의 위상을 구분하는 것이 ‘진유성의 존재’인만큼 자주 방문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종종 들르마.”

진유성의 이야기를 들은 신주청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언젠간 상림도 함께 올 수 있는 겁니까?”

“그건 좀 힘들 것 같구나.”

“어째서 말입니까?”

“아마 상림은 차원의 압력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신주청이 상소윤을 쳐다봤다가 눈을 크게 떴다.

“혹, 상림의 여식입니까?”

신주청은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 개의 기억을 모두 유지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해리성 인격 장애와도 같다.

그러니 자아의 방어 기제가 잊혀진 역사의 기억을 적당히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가 상소윤을 뒤늦게 알아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상소윤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월성은 어딘지 무섭고, 진유성을 싫어하지만, 어쨌든 우리 편인 사람이었다.

신주청이 진유성과 상소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두 분, 연모하는 사이십니까?”

아주 오랫동안 진유성과 함께한 신주청이기에 첫눈에 알아본 것 같았다.

질문은 신주청이 던졌건만, 긴장은 상소윤이 했다.

그동안은 차마 부끄러워서 물어보지 못했다.

그날,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행동과 말들이 아직 유효한 것이냐고.

그런데 난데없이 그 의문에 대한 답변을 들을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꿀꺽.

상소윤이 침을 삼키자 진유성과 신주청이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벽을 넘은 고수인 그들에게는 상소윤이 침을 삼키고, 긴장하고, 심박수가 빨라지는 걸 훤히 알 수 있었다.

“연모라…….”

장난기가 돈 진유성이 말꼬리를 질질 끌자, 심박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신주청이 이러다가 심장이 터지겠다고 생각한 순간, 진유성의 입이 열렸다.

“나는 그러하다.”

“……!”

상소윤이 깜짝 놀라서 진유성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러하다.

나는 그러하다.

나는 그러하다…….

마침내 대답을 들었으니까.

상소윤은 ‘나도’라고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잘 모르는 사람 앞이기도 했고, 그럼 그동안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일종의 복수로.

“그럼 제가 대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겁니까?”

“그것도 이상하지 않냐?”

“그럼 그냥 소저라고 부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상소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신주청이 아주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솔직히 많이 놀랍군요.”

“뭐가? 내가 인연을 쌓는 거? 아니면 상림의 여식인 거?”

그러나 신주청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그럼?”

“너무…….”

신주청이 상소윤을 쳐다보며 말했다.

“박색하지 않습니까?”

진유성은 신주청을 잘 안다.

사람 눈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장난을 치는 거다.

신주청은 진중한 성격이지만 진유성, 상림과 함께 보낸 시간이 있으니 종종 장난을 치곤 했다.

게다가 신주청은 자신보다 오랫동안 지구에서 산 기억이 있기 때문에, 지구의 미의 기준을 정확히 알고 있을 터.

진유성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어허, 사람을 미추로 구분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교주님…….”

“어허, 하지 말래도.”

“하지만 지나치게 박색합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감당해 보려고 한다.”

“인간관계 사이의 인내는 언젠간 소모되기 마련입니다.”

“허어…….”

진유성이 장탄식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달콤함에서 깨어나 부글거리던 상소윤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야!”

그 순간, 신주청과 상소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브스스스스-

상소윤이 소리를 지르는 순간, 천신궁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는 엄청난 공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진유성이 상소윤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잠시 나갔다 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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